카프카(Franz Kafka)가 여가수 요제피네(Josephine)의 예술을 해설하면서 예를 들었던 호두까기에 관한 사례처럼, 아무리 단순하고 일상적이며 쉬운 일이라 해도, 그것이 반복되고, 지시되고, 의식적으로 관철되고, 누군가가 주목을 하면 어떤 예술적인 것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예술은 정신에 속한 문제이며, 덧없는 사건으로서의 삶보다 우월하다. 나아가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술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감탄하지 않는 어떤 것을 감탄하게 한다. 예술은 우리들로 하여금 가던길을 멈추고 잠깐 서서 머뭇거리게 하며,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난 꽃병과 엎질러진 물(뭐하고 있어? 빨리 치우지 않고?!)을 서둘러 치우는 대신에 그것을 잠시 동안 바라보게 하며, 누구나 불 수 있는 휘파람 소리에 남다른 시선으로 되돌아보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요제피네는 생쥐들의 휘파람을 견딜 수 없어하며 그들에게 오만하고 건방진 미소를 띠었음에도, 생쥐 동족들은 요제피네의 휘파람을 휘파람이 아니라며 감탄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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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네카(Lücius Annaeus Seneca)가 다양한 고전의 사례들을 통해 보여주었던 것은 하나의 기질로서의 "화"(anger)라기 보다는 "방식"의 문제였던 것 같다. 그가 고집스럽게 만류했던 "화"는 감정상태가 아니라 그 감정의 미숙한 처리였던 것이다. 격정과 화를 구별해야 한다고 충고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세네카에게 있어 화는 형이상학적 대상이 아니라 실천윤리, 즉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는 기술로서의 윤리학적 관점에서 접근해야할 문제였다. 일종의 처세술이랄까? '화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화를 조절하고 절제할 수 있을까?' 형이상학자였다면 이런 식으로 멋진 말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화에 대한 최고의 치유책은 유예다. . . . 설사 화를 유예시킴으로써 네가 얻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지라도 적어도 그것은 이제 화의 모양새가 아니라 심판의 형태를 취할 수 있게 된다. 네가 어떤 일의 성격을 알고자 할 때는 언제나 그 일에 시간을 주어라. 일렁이는 물결 위에서는 아무것도 정확히 판단할 수가 없다."(세네카, <화에 대하여>, 사이, 2013, p. 183) 


 세네카는 "죽음"을 언급함으로써 모든 화(anger)가 무용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에게는 인간의 삶에 죽음만큼 현실적이고도 준엄한 사건은 없다. 필경사 바틀비(Bartleby)를 상상하는 변호사의 외부에 존재할 뿐만 아니라 그의 모든 상상의 부정적 토대가 되었던 바틀비 자신의 고독에서 우리가 목격했듯이, 절대적인 침묵은 문학이나 예술의 비유적인 문제가 아니라, 가장 치열하고도 현실적인 삶의 문제이다. 오히려 죽음은 행복, 평화, 초연과 같은 삶의 윤리적 이상의 가장 적절하고도 현실적인 동기이자 토대일지도 모른다. 아니 그 보다도 죽음이란 모든 은유가 현실이 되는 지점이다. 승리자든 패배자든 누구에게나 똑같은, 시간 차이도 그다지 크지 않은 하나의 결말로서의 죽음. 역설적이게도 이 결말 앞에서 모든 현실적 가능성들이 생명력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로써 세네카의 지극히 평범한 결론이 나오게 된다: "화를 내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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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가다가 튀어나온 보도블럭에 발이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신체의 모든 기능적 망들이 장애를 일으키며 잠시나마 붕괴상태가 된다. 그러나 총체적이고 전면적인 파괴로 이어지지는 않았고, 건강한 나의 신체는 현재 스스로 복구중에 있다. 그런데 하필이면 내가 다니는 이 길목의 보도블럭을 누가 이렇게 만들어 놓은거지? 상황을 파악중이다. 그러나 경찰이나 정부의 소행 여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며, 방송 3사의 음모 여부도 "아직은" 파악되지 않고 있다.http://goo.gl/KU6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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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현실적 삶을 가로지르는 이행이다. 그것은 운동과 생성을 추출하는 문제이다. 그럼으로써 삶의 이행 혹은 삶의 지속이 일어나는 지대 즉 잠재성의 시간을 스스로 현존하고 보존한다. 들뢰즈(Gilles Deleuze)는 글쓰기가 개인의 기억이나 여행, 사랑, 슬픔, 꿈, 환상을 반복해서 이야기하는 행위가 아니라고 말했다. 글쓰기는 신경증으로 이룩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글쓰기는 오히려 욕망이 막히고 차단될 때 신경증적 슬픔의 상태 속으로 우리를 빠트릴 뿐 삶을 ‘이행’으로 이끌지도 구성하지도 못한다. 문학은 건강한 삶으로(서) 출현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건강한 문학이란 ‘누락자’ 혹은 ‘행방불명자’를 발명하는 활동이다. 문학의 궁극적인 목적은 광기 속에서 건강을 창조하고, 소수자를 발명하고, 그를 통해 삶의 가능성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결국 문학은 언어 내부에서 외국어를 열어젖힌다. 카프카가 사용하던 독일어가 그랬듯이, 낯선 언어의 현존은 삶의 또 다른 층위인 침묵을 드러내고, 이는 곧 삶의 이행을 가능케 하는 결절점이 된다. 이것이 들뢰즈가 말하는 소수문학이다. 만일에 소수 문학이 아니라면, 즉 문학이 국가-형식으로 포섭되거나 상품-내용에 사로잡힌다면 그 끝은 무엇이 될 것인가? 민족이나 국가의 기억과 공공의 스토리텔링이라는 기능들 속에서 소수자에 대립하는 전쟁을 만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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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개봉한 <더 헌터>(The Hunter)는 도덕주의적 확신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제스처(아! 교장 선생님!)인지를 잘 보여준 영화이다. 한 어린아이의 어처구니 없는 거짓말에서 비롯된 어른들의 그 경솔한 폭력을 바라보며, 우리는 Fact 라고 믿고 있는 것 자체에 대한 엄밀하고도 준엄한 고민없이, 자신의 믿음에 대한 회의 없이, 善에 열광하고 惡에 분노하는 영혼이, 아니 사실상 자신이 무엇에 열광하고 무엇에 분노하는지 조차 알지 못하는 단순한 영혼이 살인자나 성폭행범 보다도 더 위험한 파시스트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어떤 점에서 이 영화는 미디어와 우리 자신의 문제에 대해, 가령 기자들이 어떤 존재인지, 언론사가 어떤 집단인지, 이들의 도덕이 무엇에 기반하고 있는지, 이들이 무엇을 위해 글을 쓰는지, 그 구체적 실상에 대해서는 무지한 채 텔레비젼과 신문 앞에서 기도하듯이 쭈그리고 앉아 화면과 지면을 경전삼아 실명이 될 만큼 뚫어지게 바라보며, 그들이 쏟아내는 뉴스를 진리(Fact)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가운데 격한 감정을 느끼는 것으로 앙가쥬망이 실현된 것으로 만족하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한 충고 같은 영화가 아닐까? 


결국 힘들고 괴로운 쪽은 누구일까? 거짓말 한 아이는 유유히 치고 빠져나갔지만, 사람들은 상황이 종료되고 시간이 지난 뒤에도 미련이 남았는지, 아니면 무슨 잔정(殘情) 때문인지 여전히 증오심을 철회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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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로들이 충격적인 내용인데도 실패하는 이유는 정치적 의지로서의 대세가 이미 기울어졌기 때문이다. 불이 붙어 이미 활활 타오르는 불구덩이에 차가운 물 몇 방울 튀긴다고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듯이 말이다. 순행적 폭로가 아닌 역행적 폭로는 실패할 운명을 안고 태어난다. Fact를 결정하는 것이 다름 아닌 대세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최근의 미디어와 우리의 정치적 환경이 던지는 문제이다. 정치를 넘어서는 Fact가 존재할까? 또 그것을 아는 철학적 주체가 가능할까? Fact에 대한 환상을 버리고, 차라리 더 큰 힘을 위해 물방울을 아껴두는 쪽이 현명할지도 모른다. 폭로의 실패는 사회를 움직이는 힘이 벌어진 사건들의 디테일에 전적으로 좌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왜냐하면 폭로란 대중들이 모르고 있을 것이라는 확신에서 출발하지만, 대세란 이미 모든 것은 드러났다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지금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실상에 대한 인지(recognition)가 아니라(이미 우린 많은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을 수용하는 태도의 본성적인 변화이다. 미디어를 바라보며 대중들은 순진한 얼굴로 놀라는 표정을 짓는다. 그러나 그 모든 제스처 뒤에서 그들은 낄낄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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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미디어 환경의 급격한 변화로 인해 주류 미디어에서는 접하기 어려운 뉴스를 비주류 미디어를 통해 접할 수 있게 되었다. 깔끔한 웰메이드 이미지는 아니지만, 거친 이미지 그 자체가 어떤 점에서는 더 신뢰할만한 가치를 가지는 경우도 있다. 때로는 스캔들의 형태로, 때로는 소문의 형태로, 때로는 음모의 형태로, 어떤 면에서 보면 실상에 더욱 가까운 스토리들과 이미지들이 일상 속으로 파고든 것이다. 이로써 뉴스의 선택이 중요한 문제로 대두된다. 선택에 있어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다. 기자들은 충격적이거나 특종이 될 가능성이 있는 모든 팩트를 기사로 쓰지는 않는다. 그들은 우선 계산을 한다. 필요에 따라 팩트 관련자를 만나고, 때로는 협의도 하고, 어떤 경우엔 계약도 서슴치 않는다. 반대로 기사가 계약의 결과나 조건인 경우도 태반이다. 기사와 광고가 식별불가능해진 것이다. 또 그들은 반드시 윗선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윗선은 사업상이든, 정치적 이해관계든, 아니면 하다못해 끼리끼리 어울리는 동문지간 등의 이유로 관료나 정치인 혹은 재계의 거물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고, 이들의 얽힌 관계는 알게모르게 혹은 절대적으로 기사를 처리하는 결정에 관여하게 되어 있다. 이렇게 아주 복잡한 망이 정동의 수준에서 개입되어 회사에 얼마나 이익이 되는지 감가계산이 완결된 후에야 비로소 포장된 하나의 상품으로서의 기사 한 편이 현실화되는 것이다. 신문이든 방송이든 인터넷 검색이든, 미디어를 통해 우리가 대면하는 것은 날것 그대로의 팩트나 실상이 아니라, 소비자의 취향이나 시장의 상황 혹은 소비의 패턴 등을 면밀히 따진 자본가의 기획과 제조업자의 노동에 의해 가공되어 한 벌의 스웨터로 둔갑한 한 송이의 면화처럼, 어디선가 주어들은 팩트의 파편들을 신문이나 방송회사가 구미에 맞게 가공한 상품이다. 따라서 어떤 회사를 택할지, 어떤 회사의 뉴스상품을 구매할지는 전적으로 당신의 몫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인터넷에 나도는 짧은 단신조차, 뉴스는 결코 공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물론 선택은 자유이다. 그러나 우리는 선택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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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Gilles Deleuze)의 두 권의 책 <씨네마>는 “이미지”를 존재론적으로 다룬 이미지-존재론이다. 이미지를 의식의 능동적 행태의 과정으로 파악했던 사르트르(Jean Paul Sartre)의 이미지론(<상상력>과 <상상계>)과는 대립하는 위치에서, 사르트르가 간과했던 틈새(영화!)로부터 또 다른 형식의 이미지론이 구성된 것이다. 들뢰즈에게 이미지는 의식 이전에 물질-운동-빛이라는 존재론적 근거 위에서 성립한다. 한편 <씨네마>는 영화 유파들과 편집 형식들을 체계적으로 암시하거나 명시하고 있다는 점에서―본인은 영화사가 아니라고 했지만―일종의 영화사이다. <씨네마>는 역사적으로 수많은 영화유파들의 편집방식에 대한 미학적 아포리즘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 정도이다. 또 한편 <씨네마>는 기호학이다. 들뢰즈는 이미지들을 본성적으로 다른 경향(물질의 계열과 정신의 계열)에 따라 그 차이를 나누면서, 나뉜 이미지들에 꼬리표를 달아두었다. 그 꼬리표에 붙은 이름들은 대부분 퍼스(Charles Sanders Pierce)의 기호분류체계를 따라 진행된다. 이미지 그 자체의 수준에서 분류한 “특질기호”(qualisign), “공기호”(synsign), “법칙기호”(legisign), 이미지가 표상하는 대상과의 관계에서 분류한 “아이콘”(icon), “지표”(indices), “상징”(symbol), 그리고 이미지가 해석자에 의해 표상되는 방식에서 분류한 “해석체”(rheme), “발화기호”(dicisign), “논항”(argument) 등이 그 예인데, 이 기호들은 들뢰즈가 분류하는 운동-물질-빛 이미지의 주관적 변용(지각, 정감, 행동, 추론, 관계, 시간 등)에 따라 대응하는 기호들로 명시된다.

 

그러나 이렇게 다양한 관점의 규정에도 불구하고, <씨네마>는 무엇보다도 베르그송(Henri Bergson)의 이미지론과 그 철학 전반―특히 <물질과 기억>에서 개진한―에 관한 예증적 주석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이미지란 물질이며 정신, 즉 세계 자체이다. 마치 영화가 세계의 이미지이면서 동시에 세계 그 자체인 것처럼 말이다. 독자들은 <씨네마>의 각 장마다 이 같은 베르그송의 테제들에 관한 논증을 접하게 되며, 논증된 명제들은 다시 영화 이미지를 통해 예시되는 과정이 반복되는 거대한 회로와 마주하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베르그송이 자신의 철학을 견지하면서 <창조적 진화>에서 그토록 비판했던 (운동의 허구적 재현으로서의)영화는 그의 철학을 가장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는 매체가 된다. 들뢰즈의 <씨네마>는 “베르그송주의”(Bergsonism)를 영화예술로 육화하는 하나의 프로젝트이다. 물질 이미지가 두뇌 안에서 주관화되면서 형성해가는 역량들의 본성상의 차이를 발견하는 문제, 그리고 그 방법으로서 직관적 나눔과 같은 베르그송주의의 테마들이 그 책 전체를 지배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들뢰즈의 영화론 뿐만 아니라 문학-예술에 관한 그의 대부분의 텍스트에서 핵심을 차지하는 나눔의 방법을 “증후학적 비평”이라고 부른다―이것은 니체적인 용어이다. 물론 증후학은 의학의 한 분과이지만, 증후들(symptoms, signs)의 역동적 변화를 직관하고, 나아가 증후들의 복합으로서의 증후군을 그 본성적 차이에 따라 분류하는 실천적 메커니즘은 예술에 가깝다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증후학적 비평은 이미지와 존재의 “질적인 변화” 속에서 표현되는 실체를 읽어낸다. 즉 예술로서의 증후학 또는 증후학으로서의 예술이란 바로 존재의 표정과 뉘앙스를 관찰하고 파악하는 과정이다. 예컨대, 들뢰즈는 마조흐(Leopold von Sacher Masoch)의 소설에 관한 한 장대한 서문에서 정신분석이 새도-마조히즘이라는 용어로 두리뭉실하게 뒤섞어 놓았던 사드와 마조흐의 예술을 다양한 관점(언어, 스타일, 이상화, 도착, 본능 등)에서 그 본성상의 차이에 따라 나누었는데, 그것은 그들 각각의 표정과 뉘앙스를 긍정한 증후학적 비평의 좋은 예이다. <씨네마> 역시 이미지의 질적 변화, 즉 수많은 영화 유파들에 의해 배열되고 편집되는 방식에 따라 발생하는 이미지의 다양한 표정들 각각을 분류한다. 이로써 지각-이미지, 감정-이미지, 충동-이미지, 행동-이미지, 사유-이미지와 같은 주관성 고유의 각각의 역량들, 그리고 그들을 창조한 예술가들의 특이성이 그 이미지론 안에서 나누어지고 긍정되는 것이다.

 

필자의 책 <들뢰즈의 씨네마톨로지>(이하 <씨네마톨로지>)는 들뢰즈의 영화 이미지론을 이러한 증후학적 관점에서 독해하고, 거기서 핵심적인 몇 가지 개념들과 그 논리를 해설한 일종의 해설서이다. 이 책은 내용상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하나는 들뢰즈가 개진한 이미지 개념의 성격과 이미지론의 철학사적 배경을 이론적으로 소개한 1, 2, 3장이 있다. 여기서는 이미지의 주관적 계열과 객관적 계열을 나누고, 이 두 계열의 관계를 철학적 유물론과 관념론, 그리고 후설과 베르그송을 위시하여 존재론적으로 대립되는 관점들을 다루고 있으며, 객관적 계열의 운동-이미지가 주관화되어가는 정신적 발생과정을 논증한다. 두 번째 부분은 이미지의 주관화 과정에서 생성되는 질적 차이를 영화사에서 회자되었던 여러 유파들의 작품들을 통해 예시하고, 나아가 이미지의 탈주관성(이미지의 소멸)을 논의한 4, 5, 6, 7, 8장이 있다. 여기서는 들뢰즈가 분류한 운동-이미지의 주관적 변용들(지각-이미지, 정감-이미지, 행동-이미지, 시간-이미지)을 새뮤얼 베켓(samuel Beckett)의 영화 뿐 아니라 네오-리얼리즘, 표현주의, 서정주의, 리얼리즘, 그리고 오즈 야스지로(Ozu Yasujiro) 등의 작품을 통해 구체화한다.

 

무엇보다도 <씨네마톨로지>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이미지들의 질적 차이를 발견하고 그 역량들을 긍정하는 증후비평이 “잠재성”을 향한 운동이라는 점이다. 들뢰즈의 철학에서 잠재성은 과거이자 미래이며, 폐쇄적이고 가시적인 것 내부 또는 외부의 열림이다. 예술적 견지에서 잠재성이란 사물들이 자아내는 표정의 실질적 근거라 할 것이다. 따라서 이미지가 질적으로 변화하는 양상에 따라 그것을 나누는 목적은 닫힌 공간 안에서의 우리의 욕망, 삶의 필요, 이해관계 때문에 편협하게 얼버무리고 추려낸 가시적인 이미지의 이면―이전과 이후―에 있는 잠재성을 읽어내기 위한 것이다. 이미지의 본성적 차이의 나눔이란 사물의 표정에 대한 긍정을 넘어 시간에 도달하는 과정이다. 이를 위해 <씨네마톨로지>는 여러 영화감독들과 예술가들이 추구하는 “소멸화” 운동을 제시한다. 예컨대, 표현주의와 서정주의의 정동화 편집, 하워드 혹스(Howard Hawks)나 네오웨스턴의 탈유기적 편집, 네오리얼리즘의 반주관적 편집이나 진공화, 오즈의 탈공간화 등, 본성적 차이로서의 표정과 시간을 동질화된 사물로 가두는 육체와 공간을 식별 불가능한 지점에 이를 때까지 이미지를 나누고 빈 공간을 만들고 가시적인 모든 것을 지워나감으로써 그 표정과 시간을 해방시키는 과정이 펼쳐지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씨네마톨로지>를 “창조적 소멸론”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 이 글은 2012년 하반기에 <연세대학교 대학원 신문>에 게재되었던 책소개의 일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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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느와르(Jean Renoir)가 비판했던 인간 유형은 무리집단이 강요하는 역할에 사로잡혀 자신의 본성에 무지한 인간, 니체(Friedrich Wihelm Nietzsche)식으로 말하자면 "낙타"였다. 르느와르는 마네(Edouard Manet)의 회화처럼 영화를 찍었던 사람이다. 따지고 보면 낙타는 모든 예술가들과 철학자들의 공통의 대상이다. 덮어놓고 남이 하는 대로 따라하거나, 우정이 최고의 미덕인줄 알고 하이에나떼처럼 우루루 몰려다니거나,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는 낙타만 바라보고 있거나, 잘 나가는 낙타들에만 어울리고 싶어하는 부류가 대표적으로 그런 축에 속한다. 낙타는 지배 계급이든 피지배 계급이든 가릴 것 없이 어디에나 존재한다. 르느와르는 The Golden Coach라는 작품에서 연극을 관람하는 두 부류의 계급을 통해 이러한 낙타의 존재를 보여주었다.

 

18세기에 남아메리카를 점령한 스페인군 총독 바이스로이는 식민지 민중과 귀족들을 달래기 위해, 셰익스피어 시대의 영국 왕실이 그랬듯이, 자신의 관저 근처에 전용 극단과 극장을 차려놓고 정기적으로 연극 공연을 주최한다. 이탈리아에서 온 한 극단이 귀족들을 위해 무상으로 공연을 해주고, 대신에 민중들로부터 돈을 받고 공연을 할 수 있도록 허가를 받는다. 극단이 이탈리아 코메디를 공연하게 되는 것으로부터 이 영화는 시작된다. 민중들을 위한 초연은 관객의 싸늘한 반응으로 시작한다. 땅에 파묻혀 사는 농부, 남의 일이라면 이골이 난 노동자, 빨래와 밥 짓는 일만 평생 해온 부녀자들로 이루어진 음울한 관객들이 외국의 코미디를 알 리가 만무했다.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이들은 경전을 듣고 있는 송아지들처럼, 아니 교양수업을 듣고 있는 대학생들처럼 눈만 멀뚱멀뚱 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관객이 배우들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무대 위에서 관객을 바라보고 있는 배우들에게 웃음이 부재한 객석 아니 식민지 전체는 일종의 재앙이었다.

 

차가운 반응은 두 번째 날에 관객으로 들어온 귀족들도 다르지 않았다. 물론 귀족이란 또 다른 형태의 무지렁이들이기 때문에, 이들 역시 코메디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설사 일부 교양을 갖춘 귀족들이 코메디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치더라도, 공연을 보면서 솔직 담백하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낼 수 있는 위인들은 아니었기 때문에, 누군가 먼저 웃어주기를 기다리며 흘깃거리는 눈초리로 부채질만 해댄다. 그렇게 서로의 눈치를 보면서 웃음을 참고 있었다. 우리가 교양을 위선과 동일시 한다면, 그 이유는 교양이라는 것 자체가 어떤 조심성과 은폐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양은 집단적인 현상이고, 집단을 벗어났을 때 교양은 무너진다. 따라서 교양인은 어떤 의미에서든 튀지 않아야 한다. 더우기 감정이 표출되지 않게 하려면 반드시 몰려다녀야 한다. 웃음을 참지못해 감정을 터뜨렸을 때 받게 될 그 이유 모를 텅 빈 비난의 눈초리들은 교양인에겐 사형선고이기 때문이다. 귀족들의 교양이란 한 마디로 말해 위험하지 않은 그냥 밋밋한 따분함일 뿐이다.

 

그러나 민중-낙타든 귀족-낙타든 결국은 웃을 수 밖에 없었는데, 그들 중에는 우상(Idol)이 있었기 때문이다. 민중들 사이에는 당대에 최고의 인기를 끌었던 투우사 라몬이 있었고, 귀족들 사이에는 자신들을 지배하는 영국군 총독이 있었던 것이다. 공연이 끝난 후 라몬의 웃음과 박수소리(실은 다른 이유, 즉 여배우가 마음에 들어)가 들리자 그제서야 민중들은 공연이 자신들을 구원해줄 찬송가라도 된 듯이 괴성에 가까운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를 터뜨린다. 그 후로 민중들 앞에서의 공연은 승승장구한다. 귀족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공연이 끝난 후 한 동안 아무 박수 소리가 들리지 않았는데, 이 때 총독은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는 중이었다. 불을 붙인 후에 총독이 박수를 치자, 그제서야 귀족들은 하이에나떼처럼 주변을 기웃거리며 조심스러운 박수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결국 두 공연 모두 마지막엔 많은 박수를 받으며 성공적으로 막을 내린다.

 

어떻게 하면 이 낙타들의 왕국을 깨뜨릴 것인가? 어떻게 하면 크리스탈 안에서 아우성을 치며 빙빙 돌아가는, 자신에게 부여된 뜻모를 역할들을 연기해대는 낙타-배우들의 왕국으로부터 쏟아져 나와 자신의 본성적 삶으로 나아갈 것인가? 이것이 르느아르가 끊임없이 자신의 작품들을 통해 던진 질문이었고, 영화와 예술로부터 그 미래 비전의 동력을 찾고 싶어했던 것이다. 그러나 영화와 예술에도 역시 낙타들, 더 역겨운 낙타들이 매복해 있음을 그는 알게 되었을 것이다.

 

계급을 막론하고 낙타들이 존재하듯이, 그것은 프랑스나 독일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르느아르나 니체와 같은 위대한 낙타 저격수를 가지지 못한(혹은 아직 발견하지 못한) 한국에는 더욱 더 무성하게 빙빙 돌아가며 들끓고 있다. 해방 이후 왕조를 벗어나 서구식(!) 민주주의(?)가 미국에서 날라온 한 금융사기꾼과 종교집단을 중심으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생각해보라. 낙타들의 현대적 왕국은 이미 그 때부터 포문이 열렸을 것이다. 지금은 어떨까? 세계가 일명 "좀비들의 춤"이라고 부르며, 일부는 열광하고 대부분은 경멸하는, 문화-예술-연예를 빙자하지만 결국 금융-주식으로 귀결되는 신종 semi-sex 산업의 왕국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아래의 두 기사가 대답을 하고 있다.

 

http://goo.gl/ynJUz

http://goo.gl/czLB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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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화

note_fragmentary_aporism 2013/01/29 03:44

예술에서든 노동에서든, 물화(物化, reification)의 두 경향이 존재한다. 하나는 진부해지고, 흔해지고, 가치가 타락함으로써 생기는 물화이고, 다른 하나는 희소한 가치로 숭배되거나 신비화되는 물화이다. 상품이 되거나 골동품이 되는 것이다. 전자는 주로 노동에서, 후자는 주로 예술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경향은 기계적 생산과 시장 유통이라는 역사적 조건의 필연적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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