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윗의 묘미는 글쓰기나 글 읽기가 아니다. 애초부터 그 목적 자체가 글과는 무관해 보인다. 말하자면 사람들은 글을 쓰지 않기 위해 트윗을 한다. 영리하게도 회사는 사람들의 이 무언의 요구를 허용되는 글자 수를 제한함으로써 정당화 한 것처럼 보인다. 블로그와는 전혀 다른 목적과 형식의 소셜미디어가 탄생한 것이다. 블로그와 달리 트윗은 순수관계를 지향한다. 교환이 아닌 순환의 형식으로, 팔로잉과 팔로워 수치의 반복되는 기하급수적 확산으로, 표현능력이 아닌 제청능력만으로도 앙가주망의 효과를 체험하며, 막연하지만 거대한 어떤 세력의 주체가 된 것 같은 환각이 형성된다. 이 환각이 트위터리안들의 활력을 지탱하는 질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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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되었든 살아가려면 누군가를 만나야 한다. 물론 아무도 만나지 않고 은둔 속에서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삶이라기 보다는 삶으로부터의 초월을 지향하는 것이다. 먹고 살려면 만나야 하고, 관계의 그물을 짜기 위해 두툼한 수첩을 준비해야 한다. 인터넷에는 살아가기 위해 부벼대는 관계의 몸부림이 즐비하다. 물리적 의미에서의 육체를 점점 잃어가는 이들은 다른 육체 속으로 기생하여 숙주들의 안에서 섹스를 하고, 울부짖으며, 사유를 한다. 공허와 무의미로 다시 추락하지 않기 위해 이들은 기기들을 부여잡고 파워-스위치를 줄을 모르며, 손과 눈을 뗄 줄을 모른다. 너저분함으로부터의 초월에 실패한 나, 아주 많이 화가 나 있던 나 역시 결국은 속으로 나와야 것이다. 기괴하게도, 관계로부터 고통 받지 않기 위해, 상처 받지 않기 위해, 불나방처럼 다시금 관계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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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직접 보거나 듣거나 자기가 직접 조사하고 취재한 사실을 보고하거나 폭로했을 때, 그 보고자의 인격이나 전달방법이나 정치적 경향성 등을 들어 그가 보고한 내용을 무시하거나 부정한다면, 적어도 세 가지의 왜곡의 원인이 있는 셈이다. 하나는 그 폭로로 인해 정치적 경제적 손해를 보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머리가 나빠 보고내용과 보고자를 구별하지 못하는 경우이며, 나머지 다른 하나는 보고자의 인상과 말투가 마음에 안들거나 친하지 않아서이다. 물론 보고자가 누구냐에 따라 보고내용은 달라질 것이다. 그러나 이 둘을 동일시하거나 혼동하는 문제, 혹은 동일시하지 않고 혼동하지 않는 문제는 전적으로 윤리적 문화적 수준의 문제이다. 무엇이든 뒤섞어 얼버무리는 우리의 문화 수준에서 너무 많은 것들이 가려지고 잊혀진다. 이는 핀트를 맞추지 못하고 나불거리는 떠벌이 지식인들이 더 심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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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라(Emile Zola)를 위시하여 자연주의 작가들에 대한 위스망스(Joris-Carl Huysmans)의 비판은 그들이 병든반복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었다. 물질주의적 중언부언으로 인해 그들의 세계는 제자리 걸음, 더 정확히는 "고정된 원 위에서 맷돌을 돌려대느라 숨을 몰아쉬며" 퇴락의 반복을 초래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그는 물질의 지대를 넘어서는 순수 잠재성의 지대를 탐색하기 시작한다. 위스망스는 자신의 소설에 대한 서문을 20년 후에 새로 쓰면서 병든반복을 넘어서는 영원회귀의 섬광이 될 만한 통찰을 다음과 같이 간략히 적는다.

"실상 자신이 쓴 문장들을 몇 년이 지난 후에 바라보는 것만큼이나 실망스럽고 괴로운 일도 없다. 문장들은 이를테면 침전물이 생기면서 맑아지고 책 깊숙히 찌꺼기들을 가라앉힌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 책이란 나이를 먹으면서 맛이 좋아지는 포도주 같지는 않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일단 맑아진 후, 각각의 장들은 김빠진 술처럼 맛을 잃어버리고 그 향기는 시들고 마는 것이다."(조리스-카를 위스망스, <거꾸로>(문학과지성사, 1993), p. 9. >

퇴락의 반복이 초래하는 권태와 공허 뒤에는 또 다른 심오한 반복이 있다. 키에르케고르(Soren Kierkegaard)가 말했듯이, 동일한 반복의 두 계열이 있는 것이다: 과거로 가는 반복, 그리고 미래를 향한 신념과 확신의 반복. 우리의 목적은 글과 문장이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표식 같은것에 불과하다. 심오함은 글과 문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곳, 영원회귀가 일어나는 다른 지대 속에 있다. 물론 추억을 더듬듯이 과거를 향해 그 표식으로 되돌아 오지만, 표식 아래에 쌓여있는 침전물의 부정적 결과인 권태와 공허는 다른 반복을 가능케 하는 토양이 된다. 이전의 표식이 따분할 만큼 우리는 커져있고, 증식하고 있으며, 달라졌기 때문이다(키에르케고르가 말했던 "부조리의 힘"이란 다름 아닌 "역설을 가능케하는 시간"일 것이다) 결국 새로운 글을 써야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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