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을 배치하든, 이미지를 배치하든, 아니면 단어나 소리를 배치하든, 일정한 형식의 배치는 의미를 만든다. 배치하는 어떤 사람의 의지나 바램을 나타내기도 하고, 배열된 것을 바라보는 누군가의 기억을 불러오기도 하고, 그 배치된 특정 모양이 일으키는 어떤 연상으로부터 유쾌함이나 불쾌함을 유발하기도 한다. 나무 아래에 기대어 앉은 사람, 낭떠러지 위에 놓여진 신발, 주먹으로 움켜쥔 붉은 깃발, 머리에 꽂은 꽃, . . . 이 모든 배치들은 특이한 형상과 의미와 정서를 촉발하여, 그로부터 어떤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사물들의 배치는 구성, 이미지들의 배치는 몽타주, 그리고 단어들의 배치를 통사(syntax)라고 하는데, 이 모두는 의미를 일으키는 형식적 틀이다. 즉 우리는 배치를 통해 특정한 관계를 형성하고, 그 관계의 한 당사자로서 혹은 관계를 바라보는 관찰자로서 거기에 자신의 바램을 투사하며 살아간다. 맥루한(Marshall McLuhan) 식으로 말해 메시지를 창조하는 것이다. 이 배치를 통한 메시지를 가장 빈번하게 실천하는 분야는 물론 저널리즘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단지 알려진 사실들만을 종이에 일정한 형식으로 배열만 했는데도, 우리는 그 뉴스가 정치적으로 좌파인지 우파인지, 혹은 반정부적인지, 친미국적인지 등과 같은 시대적 화두를 판단할 수가 있다.

물론 배치가 교묘하여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 교묘함이 더하면 더 할 수록 메시지의 농도는 더 진해지고, 떨쳐버릴 수 없을 만큼 둔탁해지며, 깊숙이 파고드는 무엇인가가 우리의 신체와 관념에 작용한다. 가령, 최근에 주류언론(관치언론)이 자주 사용하는 공포의 배치가 좋은 예이다.


붉은 줄로 표시한 두 기사들은 서로 순서를 바꾸어가며 며칠 동안 등장한다. 이 두 기사의 관계는 물론 "공포"라고 하는 현대적 무의식을 둘러싼 정치적인 문제이다. 배열의 순서만을 바꾸거나 서로 다르게 함으로써, 그 메시지의 방향과 의미는 전혀 달라지긴 하지만 말이다. 중요한 것은 생물학적 공포가 단지 불가피한 재앙 혹은 자연 재해의 이미지로 등장하는 반면에, 그것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회적 대응들의 성격이 암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자연적 혹은 생물학적 재해 그 자체는 정치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면이 덜하거나 거의 없지만, 그것이 사회적 특정 행위들과 연결되면 마치 그 공포가 사회적 행위의 결과인 것처럼 둔갑해버린다. 두 기사가 지속적으로 같이 붙어 다니는 과정에서 우리는 공포의 원인과 결과 혹은 최소한 공포의 강화 혹은 약화의 특유한 관계들을 우리 스스로가 구성하게 되는 것이다.  두 기사 어디에도 서로를 지칭하거나 서로를 언급하는 내용을 찾아 볼 수 없는 경우일지라도, 두 개의 공포가 서로 붙어있다는 것 만으로도 굉장한 자장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다. 그 에너지는 우리의 집단적 꿈과 기억 그리고 거칠고 저속한 이미지의 형태로 우리의 영혼을 잠식할지도 모를 일이다.

이와는 반대로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는 특정 인물이나 사건 혹은 어떤 이미지를 감추면서 동시에 다른 무엇인가를 들추어내기 위해, 두 뉴스의 배치를 멀리에 두는 경우도 있다.

위 쪽에 배치된 기사는 최근에 뜨거운 이슈가 되고 있는 지방행정도시 문제를 둘러싼 여당과 야당의 충돌이라는 정치적 사안과 관련이 있다. 그 충돌의 와중에 여당 측 한 여자 의원을 위시한 몇 몇 의원들이 야당에 유리한 발언들을 쏟아내고 있는 중이었다(그녀는 지방에 행정도시 추진을 반대하거나 7번 기사처럼 수정을 원하는 여당에 반대한다). 그 여자 의원은 현재 여당의 우두머리 격인 행정수반과 대선 때부터 줄곧 반목과 경계를 거듭해 온 터였는데, 계속해서 수세에 몰리다가, 여당이 패한 얼마 전 보궐선거에서 드러난 여론을 등에 업고 세를 모으기 위해 모처럼의 기회를 이용하여 몇 마디를 한 것이었다. 한편 아래 쪽에 배치된 기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그 여자 의원의 부친이다. 그는 수 십 년 전에 오랫동안 군사독재 정권을 지속해 오다가 자신의 부하에게 총을 맞고 죽은 군인출신 대통령이었다. 문제는 그가 일제식민지 시절 일본 사관학교 출신이었고, 그 동안의 조사에 따라 친일인사로 분류된 서적이 곧 출간될 예정이었는데, 여기에 덧붙여 일제에 혈서로 충성을 맹세한 친일행각 기록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그의 친일은 이미 많이 알려져 있었으므로 특별히 놀랄 것도 없음에도, 난색을 표하며 그의 과거를 다루는 기사를 선택하고 배치한 저 능청! 이 배치의 관점은 역사가 아니라 정치적인 것에 있으며, 이로써 언론사가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어떤 메시지, 즉 동떨어져 보이는 두 사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밀접한 관련성을 통해, 헌법 13조 3항에 위배되는 연좌제(緣坐制) 비스무리한 어떤 증오의 도식이 함축되어 있다. 저 배치는 특정 정치인사의 반(反)여당적 일탈에 대한 관치저널리즘의 전형적인 대응이라고 할 만한 것이다. 기사 8번을 위에서 내리누르는 7번 기사와 아래에서 치고 올리는 9번 기사, 그리고 10번으로 연결되는 배치의 미학을 보라!

맥루한에 따르면 현대의 미디어에서 빈번히 목격할 수 있는 미디어구도의 전형이 있는데, "나쁜 뉴스"와 "좋은 뉴스"가 바로 그것이다. 물론 나쁜 뉴스란 열광, 분노, 공포와 같은 집단적 분출을 조장하는 뉴스이다(정치-문화적 스캔들, 재해, 폭행, 끔찍한 일탈에 관한 기사들). 반면 좋은 뉴스는 이러한 황색저널리즘(혹은 붉은색저널리즘)을 미끼로 특정 집단의 메시지(주로 물건을 파는)를 퍼뜨린다. 나쁜 뉴스가 쏟아내는 무섭고 위험한 이미지가 일련의 경고의 기능을 하는 동안 혹은 그 후에, 다른 한편에서는 그와는 전혀 다른 집단과 세력의 천국의 이미지들이 교차평행편집 스타일로 왔다 갔다 하는 것이다. 모자이크 처리된 거친 다큐멘터리 VCR화면을 바라보며 양미간을 구기고 숨을 헐떡거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나 싶으면, 어느새 카메라는 외부소음이 차단된 스튜디오로 들어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깔끔한 용모로 생글거리는 미소 혹은 단호한 표정을 머금은 여자 앵커의 '모범적' 자태를 보여준다(그녀의 자세와 어조와 표정은 해당 언론이 보여주고 싶어하는 도덕과 정신상태 등을 대표한다). 그녀는 아주 대조적인 또 다른 교훈적이고 바람직한 도덕적 실용주의의 세계를 우리에게 소개하기도 하는데, 거기에는 소시민들의 선행과 도덕의 사례들이 간간히 열거되는 가운데, 무엇보다도 그 세계의 정수는 인상 좋은 선한 용모의 배우들이 직접 가리키고 있는 상품의 꿈같은 화사함이다. 이러한 불행과 구원의 교차편집은 어설픈 얼뜨기들을 유인하는 야바위꾼의 상술처럼 펼쳐진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이 화이트저널리즘의 야바위는 집단의 적개심을 필요로 하는 집권세력의 메시지 또한 어김없이 반복하는 것이다.

선택과 배치. 이것이 저널리즘의 형식적 질서이다. 무엇을 선택했는지(이는 취향을 반영한다). 그리고 그들을 어떻게 배치했는지(이는 욕망을 반영한다). 우리가 뉴스를 바라보며 생각하고 찾아야 할 미로는 바로 이 취향과 욕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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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브레히트(Bertold Brecht)식 낯설게 하기의 가장 좋은 소재는 상품이 아닐까? 상품은 너무나 친숙해졌고, 아름다워졌고, 편안해졌고, 신비스러워졌다. 포스트모던 브레히트는 상품의 이 허울을 벗겨내기 위해, 이들의 구성요소들, 부속들, 쓰레기로 만들어지는 실체들, 그 조잡하고 무의미한 성분들과 관계들에 대한 가차없는 폭로가 필요해 보인다. 예술가들은 상품을 해부하고(비유적으로가 아니라 물리적으로), 날 재료들을 가리거나 그들을 봉합하는 거친 재봉선을 들추어내고, 속을 보여주고, 창자들을 빼내어, 그 날 재료들을 드러내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보이지 않는 옷처럼 걸치고 있는 이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물건들의 실체가 무엇인지, 자신들의 등판과 어깨에 무엇을 걸치고 있는지, 기업이 들추어내기를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물건들에 대한 관심과 취향과 흥미를 떨어뜨리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일이 필요한 것이다(작은 예로, 얼마 전에 일부 영리한 젊은 층이 문화-경제적으로 시도했던 특정 기업 상품불매 광고 운동에 대한 기업과 사법부의 흥분된 반응을 보라. 우리는 치명적인 약점 하나를 발견한 셈이다). 고다르(Jean Luc Godard)가 영화를 감동적이지 않은, 재미없고 시시하고 엉성하고 부산하고 산만하고 지루한 것으로 만들었던 것처럼 예술 자신을 재미없게 할 것이 아니라, 상품과 그 이미지를 시시하게 만드는 일, 이것이 예술가들이 (무엇보다도 그 자신들을 위해) 해야 할 현대적 과업이 아닐까? 감동적이고, 아름답고, 뭉클하게 만드는 예술가들은 가짜이며, 점점 더 마취되기를 원하는 관객들과 아울러 함께 놀아나고 있는 공범자이다. 앤디워홀(Andy Warhol)? 물론 그는 상품을 신비화한 장본인이다. 그는 한 꺼풀만 벗겨내면 쓰레기가 되었을 그 무엇들에 대해 아무도 그 한 커플을 벗겨내지 못할 것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그 얇은 가리개를 이용하여 아우라를 재구축했던 것이다. 그는 결국 영리한 사기꾼이었지만, 현대의 예술가가 필요한 능력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와 같은 사기꾼 근성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상품의 아우라는 파괴되어야 하지 않는가? 브레히트나 고다르의 방식이 옳지 않았을 수도 있다. 예술은 자기자신을 망가뜨리고, 스스로를 드러내고, 자기를 지시하고, 자기를 반영함으로써, 오히려 스스로를 아무도 신뢰하지도 흥미로워하지도 않고 관심을 두지 않는 괴물로 만들었던 것은 아닐까? 교화는 행동과 결단을 촉구하지 못한다. 그것은 윤리적으로도 조차 지속되기가 어렵다. 인간이 돼지가 되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돼지가 인간이 될 수는 없지 않은가? 인간이 돼지라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그 지성이란 것이 생각처럼 그렇게 쉽게 결단하고 행동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브레히트는 이성을 일깨워 행동을 촉구했지만, 실은 이성은 행동을 방해한다. 서사극보다는 오히려 그람시(Antonio Gramsci)의 지적처럼 멜로드라마가 더 효과적이었을지도 모른다. 대중을 교육시키려는 생각보다는, 그들에게 네가 본 것을 폭로하라! 도덕과 집단적 정의에 호소했던 미국의 전 근대적 저널리즘식 폭로(muckrakers)가 아니라, 개인의 이익과 취향과 쾌락에 호소하는, 폭로의 예술, 폭로의 기교가 필요한 것이다. 낯설게 하기가 예술의 형식으로서 아직도 유효하다면, 교화가 아닌 폭로를 위한 것이 되도록 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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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바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성장하는 것? 아니면 과거와 전통과 관습을 보존하는 것? 그래서 한편으로는 풍요와 부의 시대를, 다른 한편으로는 안정과 질서의 시대를 만드는 것? 어떤 점에서 우리 시대에 성장과 보존은 모순처럼 보이면서도 서로 상호보완적으로 엮여있다. 특히 그것이 어떤 소수의 견해를 대변하는 경우라면 더욱 더.  니체(Friedrich Nietzsche)는 『때아닌 명상』(Unzeitgemässe Betrachtungen, Untimely Meditations, 1873-1876)에서, 삶에 도움을 주는 역사의 서술방법을 세 가지로 나눈 바 있다. 역사가 본질적으로 순수한 지식일 수는 없으므로, 역사 그 자체의 세 가지 방법을 언급함으로써, 그는 자연스럽게 현재적 삶의 세 가지 양태를 지적한 셈이다. 그의 말을 따라가보자.

세 가지 관점에서, 역사는 인간의 삶 속에 속해 있다.
(1) 능동적이고 투쟁적인 강자의 역사
(2) 보존하고 경배하고 찬양하는 인간의 역사
(3) 고통 받으며 해방이 필요한 인간의 역사

이렇게 세 가지 관점은 니체가 언급한 세 가지 역사(혹은 연구방법)와 일치한다.
(1) 기념비적 역사
(2) 골동품 애호가의 역사
(3) 비판적 역사(들뢰즈는 이를 '윤리적 역사'라고도 불렀다)

기념비의 역사는 능동적이고 힘있는 인간의 관점에서 본 역사이며, 그러한 인간을 정당화하는 역사이다. 대단한 전투를 치른 인간, 모범이 되는 인간, 만인에게 교훈을 주고 위안을 주는 인간, 평범하지 않은 인간의 역사, 즉 "쉴러(Schiller)의 역사"이다. 기념비의 역사는 과거와 현재 모든 시간을 정점(culminating point)으로 환원하고, 가장 높은 것의 위대함으로 세상의 구석구석을 설명하려는 야심이다. 따라서 그 정점에 세워진 기념비의 힘과 가시적인 업적의 크기가 과거의 느낌의 정도를 좌우한다.

이러한 역사에서는 사소한 것에 대한 관심이나 꼬치꼬치 캐묻는 습관을 싫어한다. 심호흡을 크게 하고 세상을 보다 통 큰 진보로 고취하는 일에 열중하여, 괜히 어슬렁거리거나 맴도는 게으름뱅이를 싫어하며, 예술의 다성(多聲)과 산만(散漫)에서 쾌락을 얻는 영혼을 경멸한다. 목표도 동기도 양태도 분명치 않은 모호한 행동들이나 사소한 몸짓들, 그래서 열등해 보이는 것들은 보이지도 않고 저 뒤에서 세상 구석구석을 채우고 있기 때문에, 마치 브뤼겔의 그림에 펼쳐진 중층지대처럼, 산 꼭대기의 위대한 기념비 주변에서 구름처럼 육중한 대기를 형성하며, 이 위대함이 불멸로 나아가는 길을 방해하고, 기만하고, 축축하게 하고, 질식할 만큼 가로막고 있다. 따라서 이들을 모조리 거두어야만 한다.

과거가 기념비로 세워진 찬란한 산맥들 즉 위대함의 연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산맥의 정점들이 수 천 년에 걸쳐 서로 유사하고 무엇인가 상통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서로 조우한다고 생각한다. 현대인은 그들을 닮아야 하며, 그들을 모델로 삼아야 한다. 그래서 과거의 위대한 시간이 다시금 태어나 되살아나게 해야 한다. 그러나 니체에 따르면 이 높은 곳에 위치한 "기념비들은 영원해야 한다는" 불멸에의 요구 때문에, 그 산맥 아래에는 높이 오르지 못한 사소한 존재들의 크고 작은 고함과 울부짖음이 있다. 기념비적 역사는 정점에 올라 가장 높이 빛나는 것만이 존재한다고 억지를 부리는 가운데, 그 반대자들이 "그렇지 않아!" 라든가 "기념비는 만들어지지 말아야 한다!"고 목청껏 소리를 지르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의 대단한 업적, 건물, 탑, 깃발들을 우러러 보고 닮아가느라고, 이들은 현재적 삶의 초라함에 대한 비난의 눈총으로 질식할 것만 같아 숨이 차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기념비란 잉여의 울부짖음이다.

이러한 과거인식, 즉 이전 시대의 정전(canon)과 고귀한 것에 열광하는 정신상태가 필요한 이유는, 니체에 따르면, 그로부터 다음과 같은 유추가 정당화되기 때문이다: "위대함이 이전에 존재했다면 현재의 모든 사건 속에서도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유추는 "현재 자신이 어쩌면 불가능한 것을 바라고 있지는 않을까라고 하는 회의감을 불식"시킬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과거는 마치 현재의 마취제 혹은 신경 안정제처럼 작용한다.

여기에 기념비적 역사의 근본적인 모순이 있다. 마취제로서의 과거는 기념비(혹은 그 가치)를 부정한다. 거추장스러운 실재를 경멸하는 위대한 정신만이 살아남아 그들만이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혹은 기념비를 창조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듣지 않을 수 없는 잉여의 울부짖음이 현재적 과거 속에서 제외되어야 한다면, 기념비의 역사적 조건으로서의 고난과 시련과 차이를 동반한(그래서 기념비가 더 값지고 귀한) 진정한 경주, 진정한 전쟁이 어떻게 가능해질까? 이것이 니체의 탄식이다: 똑같은 샘플과 모델로부터 배운 지식이란 얼마나 덧없고 나약한가! 그 유비는 또한 얼마나 부정확할까! 그 비교의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차이가 간과될까! 과거의 특이성이 현재의 일반성으로, 혹은 그 반대로 현재의 특이성이 과거의 일반성으로 얼마나 무지막지하게 억지로 끼어 맞추어질까! 그리하여 그 모든 날카로운 구석구석과 모서리들이 동일한 반복으로 일치되기 위해 얼마나 부서져야 할까!

똑같은 동기와 똑같은 구원자와 똑같은 파국과 똑같이 결정된 간극으로 역사가 되돌아오는 것이라면, 진리는 차이가 중화된 그러나(아니 그래서 더 쉽게) 모방할 가치가 있다고 칭송되는 도상적(iconic) 범례에 불과하다는 것이 니체의 생각이다. 그것은 일반의 박수와 갈채로 승인된 기념비적 '결과'이다. 그럼에도 이 모범은, 그것의 진정한 원인인 잠재적 잉여들의 희생아래, 그들의 울부짖음을 동력으로 하여 산출된 결과이다. 기념비의 역사가 그 근본적 원인과 점점 멀어지기 때문에, 니체는 이를 "결과들의 컬렉션"이라고 불렀다. 민속축제, 종교적 행사, 군사적 기념일, 문화재, 건출물, . . . 이러한 모든 기념비들에 대한 찬사는 결과 그 자체에 대한 맹목적 열광이며, 진취성이라는 이름을 가슴에 떡 하니 붙인 부적이라는 것이다.

눈에 잘 띄는 곳에 우뚝 솟아 올라 모방하고 따를 가치가 있는 것만이 역사책에 쓰여지는 한, 역사는 결코 새로운 것으로 변하지 않으며, 더 아름다운 것으로 재해석 될 수도 없다. 따라서 "신화적 허구"와 구별이 어려워질 것이다. 세상의 자질구레한 모든 것들이 하나의 빛으로부터 파생하고, 그 빛을 닮아야 하기 때문에, 그 빛을 머금은 과거는 우리의 시야를 멀게 하는 해악이 된다. 닮아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거나 닮아야 하는 것만큼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도 없다. 시대정신을 표상하는 상징(인간이든 사물이든)들이 산맥처럼 봉우리를 형성하여 서로 서로 닮은 꼴로 수 천년 동안 이어져 내려왔다는 것을 철석같이 믿는 순간, 현재의 위대한 활동과 포부와 욕망은 기념비라고 하는 과거의 가면과 무대의상에 의해 탄압을 당한다. 니체에 따르면 기념비적 역사란 당대의 힘과 위대함을 혐오하는 열등한 영혼이 그 추한 안색을 들키지 않기 위해 호들갑을 떨며 연막을 뿌리는 과거에 대한 과도한 찬사이다. 이 찬사로부터 역사의 의미가 뒤집힌다: "죽은 자가 산 자를 묻게 하라!"

한편 두 번째의 역사가 있다. 이것은 기념비가 아닌 과거 그 자체를 신봉하는 보수적인 인간을 위한 역사이다. 그는 과거의 경배를 통해 현재의 삶에 감사한다. 향수도 아닌 이 특이한 과거에의 집착은 수 천년 전부터 지금까지 살아남은 증거들을 보존하는 것으로 실천할 뿐만 아니라 후세대에 남겨줄 조건들을 재생산 하는 것을 삶의 과업으로 여긴다. 삶이란 과거에 바쳐진 헌정사 혹은 봉헌물 외에 그 무엇도 아닌 것이다.

관습적이고 전통적인 가치를 옹호하고 강조하려는 이 영혼은 결국 골동품에 대한 사랑의 역사를 배양하기에 이른다. 그에게는 증거가 필요하고, 증거란 직접 잡을 수 있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조상이 쓰던 가구나 조그마한 기구들을 소유하는 것이 그에게는 과거의 영혼과의 교접이며 배움의 의미 그 자체이다. 물건에 사로잡힌 그의 물신주의적 영혼은 과거에 쌓아 올린 벽, 성문, 속기록, 일기, 유물, 풍물, 행위의 수단들, 친숙한 관습들, 태피스트리, 의상, 보석, 개인물건들로 환원된 과거의 시간을 바라보며 잃어버린 흔적의 향기를 느낀다. 뿐만 아니라 그로부터 자신의 힘, 목적, 열정, 어리석음, 나쁜 버릇을 재발견한다. 가령, 니체에 따르면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정신이 이러한 취향과 매력을 대표한다.

이 골동품 애호가의 경배 정신의 가치는 기념비적 역사의식과는 반대로 그 겸손에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튀지 않은 조건들 심지어는 무미건조한 환경들로부터 기쁨과 만족을 느낄 줄 아는 개인이나 집단의 소박한 정서에 대한 이해와 긍정이 이 역사의식의 정수이다. 역사가 대우를 덜 받았던 인종이나 소박한 사람들에게 그들이 살았던 거주지역과 물건들 그리고 삶의 직접적 편린들을 되돌려주고, 그들 자신의 전통을 연결해주고, 그들을 바로 거기에 살게 해주며, 그들을 안주 없는 유랑과 방랑으로부터 막아주는 것만큼 삶에 봉사하는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물론 개인을 집단과 환경에 고정시키거나, 자질구레하고 고단한 일상의 결과들로 환원하여, 그를 어딘가에 뿌리박게 하는 것은 심각한 곡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나름대로 건강하고, 또 어떤 점에서 공동체에 유익한 것이기도 하다. 유목민들이 그렇듯이 방랑과 모험의 결과들을 경험했던 사람들, 조상과 선배에 대한 신뢰를 포기하고 끊임없이 고결한 것만을 쫓아 다니는 경계 없는 코스모폴리탄은 이 사실을 잘 안다. "뿌리에 매달린 나무열매의 느낌, 성장이 제멋대로나 우연이 아님을 아는 행복감"이 무엇인지를.

그러나 골동품 애호가의 역사는 항상 그 비전의 폭이 좁다. 이것이 니체의 생각이었다. 과거 삶의 복원에 대한 물신주의적 열망은 자신이 알고 있는 몇 가지 지식을 너무 가깝게 들여다보고, 그것의 전체적 맥락으로부터 떼어내어 고립시킨다. 이러한 편협하고도 소심한 시야는 서술하고 있는 대상이 가지는 가치의 경중을 시간 전체의 견지에서 판단할 수 없게 한다. 그의 취향에는 모든 것이 귀중하고 똑같이 중요하게 취급된다. 사물이든 사람이든 과거든 각각 공정하고 따로따로 다르게 구별해야 하는데도, 그 가치와 비례에 있어 아무런 차이를 두지 않았기 때문에, 이 또한 기념비적 역사와 마찬가지로 현재의 과거화 혹은 과거의 현재화라는 위험에 노출되어있는 것이다. 그렇게 골동품에 사로잡혀 차이의 힘을 간과하는 개인은 전적으로 자신의 취향의 비례에 의거하여 과거를 들여다본다. 

특이한 비전의 수준에 속하는 것을 무차별적으로 경배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것 뿐만 아니라, 과거의 것에 고착되어 새로이 다가올 것을 거부하고 적대시하는 습관이 감각적으로 굳어지면, 마치 순수지식의 영역에 오래 전부터 안착해 있는 안주인이라도 된 것처럼, 역사는 더 이상 삶에 봉사하기를 멈추고 존경이라는 명목으로 과거를 다루듯 현재와 미래의 더 위대한 삶 조차 박제해버린다. 골동품 애호가의 역사가 더 이상 현재의 생생한 삶에 열정을 불어넣지 못하게 되는 순간 그 자체 스스로 퇴행적이 된다. 그러면 그 경배심 또한 시들어 버릴 것이다. 순수지식의 허황된 그리고 공허한 영역에 안주한 학자들이 존경심이나 경배도 없이 습관적으로 과거의 궤도를 어슬렁거리며 이기적이고 자기만족적인 배회에 인생을 낭비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맹목적인 수집광과 독서광의 불쌍한 드라마, 남이 말했거나 존재했던 모든 것을 모아대는 반추동물의 드라마를 보게 된다. 이러한 영혼은 어딜 가나 곰팡이 냄새를 풍기게 되어있다. 자신의 귀한 재능과 고결한 욕구를 그야말로 낡은 것에 대한 욕망으로 변질시키고, 때로는 너무 깊이 들어가 단지 전기(傳記)의 증거에 지나지 않는 물건더미가 쌓여가는 것에 쾌감을 느끼는 것으로 만족하기 때문이다.

결국 기념비의 역사와 성격이 전혀 다름에도 불구하고, 골동품 애호가의 역사의 심층에는 그와 마찬가지로 삶의 창조적 가능성의 배제가 있다. 골동품 중독 역사관은 "삶을 보존하는 법만 알지, 창조하는 법은 모른다." 그것은 언제나 새롭게 다가오는 것을 평가절하하고, 경배를 미루어두거나 불경스럽게도 거부하기조차 하는 능동적 인간을 불구로 만든다. 심지어는 기념비 역사의 모토인 위대함과 성장조차에도 관심이 없다. 오래된 무엇인가는 항상 불멸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선조들의 관습과 종교적 믿음 그리고 전해 내려온 정치적 권위의 오랜 시간 겪어온 무게와 깊이 그리고 그 동안 받아온 찬탄과 경이의 양이 얼마인지를 상상해 본다면, 그 귀한 것을 새롭고 낯선 것으로 대체하거나 현존하는 단순한 사실처럼 보이는 것으로 환원하려는 시도가 대단히 건방지고 뻔뻔스러워 보이기 때문이다.

니체는 삶에 봉사하는 역사의 세 번째 방식을 '비판적 역사'라고 불렀다. 이러한 글쓰기는 더 이상 과거에의 종속도 고착도 아닌 해방을 욕망한다. 현재의 부당함과 폭력과 오류를 비판하기 위해, 비판적 역사가는 현재를 낳은 과거로 돌아가 그 원인이 되는 싹을 잘라버릴 것을 독려한다. 독자의 전달이 아니라 장본인의 말을 직접 들어보는 것이 생생하리라.

"과거를 깨부수는 힘을 가져야 한다. 살아가려면 과거를 전유하고 분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는 과거를 심판대로 끌고 와서 가차없이 질문하고 비난을 퍼붓는다. [. . .] 과거는 비난 받아 마땅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인간의 과거이기 때문이다. 인간적인 것 안에서 힘과 나약은 언제나 필멸의 운명에 처한 인간사이다. 인간은 언제나 위대한 힘과 인간적 약점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심판이 의미하는 것은 정의가 아니며, 그 판결을 선언하는 자비도 아니다. 그것은 삶 그 자체, 그 희미하고도, 모호하고도, 끊임없는 자기 욕망의 힘, 바로 삶 그 자체 때문이다. [. . .] 그 판결은 언제나 무자비하고 불공정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순수한 지식의 발로에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 . .] 생겨난 모든 것은 파괴되어 마땅하다. 따라서 아무것도 생겨나지 않는 것이 더 좋았을 수도 있다. 살아가려면 상당한 힘이 있어야 한다. 인생이 얼마나 부당한지를 잊으려면 또한 상당한 힘이 필요하다. 루터 자신은 세상이 단지 신의 망각으로 존재했을 뿐이라는 견해를 피력했다. 만일에 신이 "포병부대"를 떠올렸더라면, 결코 세상은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이 같은 삶은 망각을 이용하여 이 망각의 일시적 파괴를 요구한다. [. . .] 과거가 비판적으로 분석될 때, 그 뿌리를 잘라낼 수가 있으며, 모든 경건함을 넘어 나아갈 수가 있다. 그 과정은 항상 위험하다. 심지어 죽을 때까지. 그래서 이런 식으로 과거를 심판하고 전멸시킴으로써 삶에 봉사하는 사람들 혹은 그 시대는 언제나 그 자신이 위험에 처해있고 다른 이들을 위험에 처하게 한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이미 이전 세대의 산물이며, 또한 그들의 오류와 열정과 범죄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 사슬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비록 그 오류들을 비난하고, 우리 자신이 그들로부터 탈피했다고 생각할지라도, 우리가 그들로부터 태어났다는 사실을 빠져나갈 수는 없는 것이다."

기념비적 역사는 과거를 이용하여 정복의 위대함을 설득하고 정당화하는 과거의 현재화이다. 반면에 골동품 애호가의 역사는 과거에 안주하고 과거를 보존하여 현재를 과거의 현재로 만든다. 비판적 역사는 현재의 부당함으로부터 받는 고통을 제거하기 위해 과거를 심판함으로써 과거를 미래의 현재로 남김없이 바꾼다.

우리에겐 업적과 기념비에 대한 두서 없는 열광이 한 쪽을 사로잡고 있고, 개인의 소박한 그러나 맹목적인 순응주의가 우리의 또 다른 한 쪽을 사로잡고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복의 힘도 아니고, 그렇다고 냉소적이고도 비굴한 평화도 아니다. 평화라는 이름조차도 이제는 어떤 구실이 되어버렸고, 기만과 착취의 한 전략이 되어버렸다. 과거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 그것은 다름 아닌 비판이 아닐까? 또한 비판받아 마땅한 그 과거의 수혜자들의 정당성의 단죄와 그에 대한 거부가 아닐까? 수혜자들이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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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밀한 의미에서 뉴스와 영화를 명확히 구별 짓기는 쉽지 않다.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때와 장소에 따라 관행처럼 시청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이 뉴스 혹은 영화라고 습관적으로 판단할 뿐이다. 어느 쪽이 더 객관적이지도 않고, 어느 쪽이 더 낭만적이지도 않다. 감독들은 아이디어를 뉴스 매체에 의존하기도 하고, 기자들은 영화를 보면서 머릿속에 담아두었던 그림들을 사건에 투사하기도 한다. 뉴스를 보거나 읽다 보면 기자의 내레이션이나 카메라의 구도가 어디서 많이 본 듯한 형태를 취하며 우리의 시야를 짓누른다. 간혹 뉴스를 보다가 이런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저 기사를 영화나 소설로 만들면 어떨까? 그런 생각이 들 때면, 어김없이 보도되고 있는 화면 속의 그 사건-사실의 저편에 있는 더 커다란 어떤 서사나 음모가 화면 밖으로 펼쳐진다. 전말을 이미 다 알고 있다고 느낄 때만큼 의욕적일 때도 없다. 뭔가 새로운 창작물을 만들고 싶어지거나, 열정적인 에세이를 쓰고 싶어지거나, 그것도 아니면 당장에 친구를 불러 술잔이라도 들고 싶어질 때처럼, 우리는 뭔가를 알고 있다는 사실에 쉽게 흥분한다. 그러나 실은 아무것도 모른다면 어떠할 것인가?

지금  내 앞에는 사진 몇 장이 놓여 있다. 최근 뉴스에 보도된 "더블드래곤" 파업 사태를 다루는 인터넷 동영상 기사를, 서버에서 지워지기 전에 컴퓨터 스크린 샷으로 찍어 놓은 것이다. 동영상에서는 카메라가 공중을 활공하며 건물 옥상을 내려다본다. 옥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소요를 따라다니며, 기자는 마치 축구나 마라톤을 생중계 하듯이, 더 정확히는 영화의 내레이터처럼 벌어지고 있는 진상을 조목 조목 되풀이 한다. 컨테이너가 시위자들이 있는 쪽으로 접근했다느니, 쇠파이프로 경찰 한 명을 잡고 마구 내려친다느니, 검은 연기가 옥상 저편에서 솟아난다느니, 폭발물의 폭음이 터지기 시작한다느니, 도망가는 무리를 경찰이 뒤쫓고 있다느니, 이 편 옥상에선 도망가는 무리에 대고 체류탄을 쏘아댄다느니, . . . TV를 보는 우리들은 그 소요와는 무관한 회색천사(흰색과 구분이 거의 안 되는) 마냥 저 연기가 나는 옥상 위의 불행을 멀리 공중에서 바라보며 혀를 찬다. 혀를 차는 순간 쫓고 쫓기는 양자 모두다 무가치하고 편협한 당사자들임이 조용히 선언되고 만다.

 

그러는 와중에 저 영상물에는 무엇인가가, 결정적인 무엇인가가 빠져있는 것이 아닐까 혹은 과도한 무엇인가가 덧붙여진 것이 아닐까 라는 강한 의구심이 떠나지 않는다. 그 의구심을 증명할 수 없을 때,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말할 수 없을 때, 혹은 말해서는 안 될 것 같은 어떤 묘한 분위기가 주변을 사로잡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육체들의 환각과도 같은 소요들 사이에 웅크리고 있는 혹은 그 변두리의 대기 전체에 엷은 어떤 것이 퍼져있을 때, 우리는 막연하고도 무책임한 뉴스 다큐멘터리 영상에서 빠져 나와 소설을 쓰거나 영화를 찍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기업의 노동자도 아닌, 경영인도 아닌, 주주는 더더욱 아닌 내가 저러한 유형의 뉴스를 접할 때, 저 위에서 뛰어다니거나 마음을 졸이며 TV를 바라보는 이들과는 전혀 다른 상상을 하게 되는데, 가령 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SF 전쟁물 혹은 과학기술과 그 영향이라는 주제 하에 괴기물 유사한 영상이 떠오르는 것이다. 기업의 구조조정이나 노동자들의 파업이 SF와 가지는 밀접한 관계는 근거가 없는 얘기가 아니다. 때로는 사회학과 경제학의 담론보다도 더 치열하고 구체적인 재현의 역사가 SF에는 있다. 뤼미에르 형제의 『도살기계(Charcuterie Me'chanique)』(1895) 이후, 한동안 SF의 역사는 그 아류들에 의해 돼지와 개의 수난과 희생을 등에 업은 소시지 가공의 역사(개에서 소시지로, 소시지에서 개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기계와 공장 생산체제 그리고 생명(동물과 인간)의 해소될 수 없는 투쟁의 역사가 있다. 많은 SF의 아류문학 혹은 영화들이 있지만, 기계권의 출발 자체가 가지는 역사적 조건을 생각해 본다면, 결국 SF의 정수는 사이언스의 주체인 자본의 꿈과 소외된 노동(삶)의 전쟁이라는 오래된 마르크스주의의 테제들 안에 고스란히 안착해 있는 것이다. 그리고 포스트모던 시대에 이는 로봇공학과 우주프로젝트에 의해 범우주적 숭고미학으로 팽창하여 sugarcoating 되고 있다. 그리고 점점 짙어지는 그 그늘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의 지각에서 점점 희박해진다.

마르크스주의 미디어 논자들 중 상당수가 형식주의를 비판했던 골자는, 그것이 항상 카메라를 든 사람을 무기명으로 처리하고 만다는 것이었다. 거기서 모든 시선은 비존재적 추상이 될 운명을 피할 수 없다. 누가 바라보는가? 카메라를 든 자는 어디에 있는가? 시선의 무기명 속에서 우리는 이미 카메라의 눈 자체가 되어버린 것은 아닌가? TV와 라디오 혹은 인터넷 매체의 동영상이나 이미지들을 바라보면서, 하지 않으면 안 될 중요한 질문 하나를 잊은 채 우리는 미디어에 뛰어든다. 공중을 활공하며 소요를 바라보고 있는, 천사와도 같은 저 눈은 결코 화면상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마치 우주 밖에서 포착한 위성사진의 미학과 테크놀러지의 결합된 이미지를 바라보며 신기하게도 내가 그곳의 한 지역에 틀림없이 위치하고 있다고 기하학적 확신을 하듯이, 저 화면에서 쏘고 있는 X선 입자들이 우리의 망막과 신경세포들을 반복해서 두드리는 동안, 최면효과와도 같은 총체성의 눈으로 자기를 바라볼 때 만큼이나 우리 자신을 알고 있는 것 같은 희열과 확신에 찬 자기상호적 Cogito. 현대 미디어의 특징은 담론적 상호성(discursive reciprocity)의 부재 혹은 그것이 가시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누구의 말이고, 누구의 시선인지, 담론의 어떤 주체이고 어떤 위치에서, 무엇을 감추려는지,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 주체든 객체든 미디어 환경 하에서의 추상화. 시-감각이 지배하는 포스트모던 기업문화가 발산하고 있는 모호성의 정치학. 그로 인해 미디어와 그 눈을 우리로부터 육탈시키고 그것과 대면하는 어떤 구도를 만들어낼 것, 결국 미디어의 무의식적 주체가 무엇인지를 기를 쓰고 찾아 나서야만 한다.

더블드래곤 사건에서 특이한 것은 기업 혹은 회사가 완전하게 추상적 무형성을 띤 채 우리 앞에 드러났다는 점이다. 틀림없이 뭔가가 벌어지고 있었고, 어떤 가시적인 움직임들이 거기에 있었지만, 그래서 우리는 그 점에 대해 언론 미디어에서 혹은 우리들 서로간에 그 사실에 대해 말을 한다. 실제로 움직임들의 실행자들(주체가 아닌)은 화염병을 들었건, 펜을 들었건, 체류탄 총을 들었건,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대기 전체에 퍼진 회사의 잠재적 파도에 파묻혀 그것을 위해 싸우고 또 돌진한다. 이상하고도 특이한, 역설처럼 보이지만 실은 너무나도 분명하고 단순한 뜻을 가진 "파산을 통한 회생!"이라는 용어가 주는 압도적인 위협 아래. 문제는 저들이 들락거리며 오르락내리락 해가며, 장악하고 빼앗기고, 육체들을 밀어붙이는 공간으로서, 버려진 농지 아니면 공터인 허허벌판에 건설된 저 공장 건물들이 아니라, 숨을 쉬고 있는 동안에도 연기와 체류 살포액보다도 더 짙은 농도의 선언 혹은 확신을 형성하는 음모이다. 저 용어가 주는 압도적인 위력은, 그것이 "완전하고도 합법적인 해고"를 의미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확신하고 있었던 어떤 것, 다시 말해 그들을 존재하게 하고 그들에게 무모함의 용기를 주었던 프롤레타리아적 Cogito가 자신들이 생각했던 그것이 결코 아니었으며, 이제 완전히 종말을 고하지 않으면 안 되게 한 것에 있다.

"파산을 통한 회생"에는 기업 주체(누구지?)의 관점에서 바라 본 두 가지의 교묘하고도 비가시적인 제스처와 전략의 결합이 내포되어 있다. 하나는 파업이 불러올 필연적인 결과를 단호하게 선언하고 그 당사자에게 책임을 '항변'하는 듯한 효과와 아울러 추후의 사태에 대한 경고의 전략이 그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파괴적 결과를 어떤 식으로든 수습하여 정상적인 상태로 복원해야만 한다는 기업 주체의 도의적 의지를 반영하는 것 같은 제스처를 취함으로써 기업의 사회적 기능과 책임과 사명을 실천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대견스럽게 묘사하면서, 비난 받고 책임을 져야 할 우울한 재앙의 뒤에서 무엇보다도 은유가 아니라 실제로 그것이 회생의 한 형식으로 수용되어 미국(GM의 경우)에서 이미 검증된 것으로, 기업이 본질적으로 무엇에 기반하고 있는 것인지를 직접적으로 보여주지만, 위에서 말한 그 묘사가 미디어에 의해 각색되면서 공장이 세워진 평택 지역에 대한 도덕적 공동체적 책임을 떠맡은 기업의 회생이 곧 주민과 공동체 전체의 회생으로 좋은게 좋은거지 식으로 sugarcoating되어 그 본질적 기반에 연막이 뿌려지는 와중에, '파산을 통한 회생'? 그것이 무슨 말인가? 파산신청을 하고 회사의 문을 닫고 일하는 사람들을 해고하면서 도대체 무엇을 회생시킨다는 말인가? 보존되고 살아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라며 까칠하게 찬물을 끼얹으며 궁극적인 질문을 집요하게 던지기도 전에, 내러티브의 반전으로 질문의 요지를 중화하듯이, 과감한 법적 최종결정의 제스처로 그 연막의 뒤에서 약간의 '장치변환' 혹은 '기호들의 변환'(가령, 소유주 혹은 법인을 바꾸는 절차)을 통해 보존과 회생을 도모한다는 명목으로 가벼운 문서 뭉치를 손에 들고 드디어 사무실로 돌진하며 그 실체가 등장하는 바로 그 채권 소유주들의 실질적인 경제활동으로서의 치고 빠지는 전략이 그것이다. 기업이 파산을 해야 한다는 선고를 그 스스로 내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변증법적 양날치기처럼 뭔가를 보존하고 들어올려야 한다는 회생의 원칙을 고수한다는 미사여구로, 파산과 회생의 각각의 책임소재가 원래의 자리에 속한 것으로부터 빠져 나오거나 식별이 불가능해지는 가운데 적절치 않은 당사자들에게 배분되고 있는 것이다: 파산은 파업 주동자들에게, 회생은 기업주체 경영인과 그 소유주들에게.

이 분배는 미디어의 SF분위기 화면 속에서 우리가 흔하게 보아오던 어떤 심리적 구도를 형성한다. 한편에는 약자를 환기하는 희멀건한 피부색에 금테안경을 쓴 착하고 선량한 기업 상인의 이미지가 노동자보다도 더 힘들게 땀을 흘리며 살아가는 상인의 긍정적 실용도덕주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고, 다른 한편에는 작업장 옥상에 올라가 돈을 더 달라고 생 떼를 쓰며 위협과 폭력을 일삼는 빨간 마후라를 두른 영업 훼방꾼들의 저속한 이미지가 건달의 내러티브 비스무리한 상투적인 미디어 구도에 의해 화면 속에서 끊임없이 우리의 주관적 회로를 고착시킨다. 미디어가 주는 메시지는 파업이란 여전히 어떤 훼방, 철없음, 이기심, 그렇기 때문에 결국은 철회될 수 밖에 없는 쥐불놀이 혹은 할로윈처럼 맹목적 연례 이벤트의 이미지일 뿐이라는 점이다. 회생을 염원하는 반복적인 코멘트("과연 더블드래곤이 회생될 수 있을까요?") 속에는 이미 참담한 심정으로 쏟아내는 초과 데시벨의 어떤 비난과 질책이 있다. 한 가지 문제는 폭도들의 출처가 분명치 않은 외부인으로 묘사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회사의 파산을 주도하고 그 법적 소유관계를 기입한 문건을 쥔 기업주체가 아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파산의 원인을 제공한 당사자이며, 청산에서 남은 잔여 자산의 분배 혹은 변제절차의 몫에서조차 우선순위에서 배제될 것이다. 실상 '파산을 통한 회생'의 의미와 가치 역시 이 우선순위에 비례하여 그 양이 달라지는 용어일 뿐이다. 그렇다면 회생의 주역은 누구란 말인가? 그리고 지붕 위의 저들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어디에서 무슨 이유로 날라와 옥상에 뚝 떨어진 숙주들일까? 아무리 하늘 위에서 천사의 총체적 시선으로 바라보아도 숙주들의 전쟁만 보일 뿐, 파산의 주체이자 회생의 주체, 즉 Alien이 숙주들의 배양과 파괴를 통해 보존하고 싶어했던 바로 그 순수생명은 어디에 있는가?

개인에게 있어 돈이란 사물(성)을 추상화하는 가장 보편적 형식이다. 행복이든 사랑이든 삶의 활력이든 이러한 추상적 가치들은 사물 그 자체로부터는 발생하지 않는다. 물질과 사물에 둘러싸인 우리들은 어떤 식으로든 그들로부터 추상적 보편성을 끄집어내야 할 것이고, 그럴 능력이 없다면, 사물 그 자체를 하나의 추상적 가치로 만들 필요가 있다. 먹을 수도 입을 수도 사용할 수도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더 보편적 실재인 냥, 우리는 사랑과 행복과 능력을 무한하게 약속해줄 것처럼 보이지만 매번 우리를 빠져나가는 보편적 대리물로서의 화폐를 욕망한다. 화폐에의 욕망이란 사물의 무한한 되돌아옴을 보증해주는, 고갈되지 않는 사물의 샘을 소유하는 길이다. 물건이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추상적 가치 자체라고도 할 수 없는 돈은 그런 식으로 의심되지 않는 가치로서 우리의 무의식이 되는 것이다. 파산을 통한 회생에서 우리가 목격한 것이 바로 기업과 기업주체 그리고 우리의 이러한 추상적 관계이다. 회사는 터전이나 특정한 형태의 삶의 장소가 아니라, 자본과 이윤의 이름으로 모든 사물적 관계를 무한히 가능하게 해주고 지역사회 전체를 구원해 줄 것처럼 약속을 해주며, 여기저기로 숙주들을 찾아 떠도는 이해 당사자들의 보편적 화폐이며 순수생명을 닮았다. 이를 온전히 보존하는 것 만으로도 우리는 성공적인 경제와 성공적인 (생명)윤리의 달성에 버금가고("과연 더블드래곤이 회생될 수 있을까요?"), 그 추상적 교환의 실천 속에서 왔다 갔다 주거니 받거니 하는 동안 어느새 합법적 해고든 경제-합리적 구조조정이든 자장가처럼 파도처럼 진통의 효과를 내며 법인의 이름으로 중화되기에 이른다.

공장에서 돌아가는 컨베이어벨트와 그 앞에 죽 늘어선 숙주들의 그림과 유사하게도 사회 전체의 컨베이어벨트와 그 사이사이에서 부대끼는 숙주들의 그림이 있다. 숙주들은 작업장이든 가정이든 지역사회든 아니면 무슨 무슨 청사든 할당된 공간에 붙박여 있고, 이들 안에서 생명을 키워 살아가는 세계령은 바람처럼 은유처럼 떠돌아다니며 정치적 법적 문화적 숙주들을 찾아 선회를 하는 가운데, 그를 불러들이기 위해 실행의 대리인들 그리고 주술인(株術人)들은 서로 간에 인수, 매각, 합병의 무가치하고도 야만적인 피의 강신제를 치른다. 지방(紙榜)을 대체함으로써 새로운 신주와 제주가 들어서면 이 변태적인 형태변이 속에서 지붕 위의 숙주들은, 매 순간 요철을 바꾸어가며 접속단자를 선회하여 종잡을 수 없는 감기 바이러스와 전쟁을 벌이듯이, 실은 세계령을 마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지되는 적은 언제나 그 대리숙주들 뿐이다. 지각할 수는 없지만 가공할 만한 대기전체의 괴물적 기운이 옥상에서 버티고 있는 배제숙주들에게 으르렁거리며 달려든다. 그 기운을 등에 업고 하이테크 살상 장비들을 장착한 전경과 여타 터프가이 스타일 유니폼의 전사들이 크레인에 매달린 컨테이너를 참호 삼아 화염방사기 모드(제작자 혹은 주문자의 욕망을 반영하는)의 물 대포와 가스를 직격으로 쏘아대고, 제대한지 이십 년도 넘은 중년의 배제숙주들은 그들에 맞서 깡마른 다리로 휘청거리며 돌진과 후퇴를 반복한다. 이 양자진영의 숙주들을 둘러싼 대기에는 타오르는 연기보다도 홀가분하게 여기저기에 공통으로 퍼지는 세계령의 열기가 이들을 압도한다. 물론 대리숙주 뿐만 아니라 실행의 주체숙주들이 있다. 그러나 모두가 나름대로 업주이자 상인이므로 누가 더 주체이고 누가 더 객체인지 분간하기가 어려워졌으며, 완전히 뒤섞여 한 몸에 머리가 둘 이상인 더블드래곤의 이미지로 서로를 잠식하고 서로를 태우고 있는 것이다.

일면 SF는 자본의 꿈 내용으로 보인다. 가령 로봇공학의 후원자이자 수혜자는 자본일 뿐만 아니라, 요제프(Joseph Čapek)이든 카렐(Karel Čapek)이든 차펙 형제가 염두에 두었던 것은 다름 아닌 노동 소외였던 것이다. 아시모프(Isaac Asimov)는 1941년 자신이 정식화한 로봇공학의 원칙(인류를 위한! 인류에 의한! 인류의!)을 도구를 정당화 하는 원칙으로 확대시켰는데, 도구에 관한 이 원칙은 자본의 노동에 대한 무의식적 시선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었다: 도구는 위험하지 않아야 한다! 도구는 효율적 기능을 잃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도구는 망가져서는(friction) 안 된다! 그러나 위험하거나 비효율적이거나 망가진다면 어찌해야 할 것인가? 바로 여기에 더블드래곤 사태가 가지는 어떤 한계점, 즉 우리가 다소 구질구질하게 우정 어린 미련을 두고 티격태격 하기도 했던 주제, 인간과 노동 그리고 인간과 자본 그리고 인간과 인간의 오래된 이상적 연관성의 한계점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왜냐하면 한 쪽에서는 문서를 쥔 희멀건한 범생 스타일의 블레이드러너가 은행 문을 박차고 나와 장부기록 제거를 위해 법원 쪽으로 걸어가고 있는 반면, 다른 한 쪽에서는 무장한 터미네이터가 물리적 제거를 위해 헬리콥터와 컨테이너의 줄타기 활극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차없이 완전하게 제거되는 비참 속에서 마후라를 둘러 얼굴을 가려가며 여전히 자신의 미디어 정체성을 의식하던 배제숙주들은 그 자신의 사회적 본질이 단숨에 드러나는 순간을 목도하게 된다. 도구의 명시적 폐지 그리고 물리적 제거의 법적 근거가 마련되는 순간 벨트시스템을 전환하여 새로운 장착과 생산라인 배열과 같은 트랜스포머식 형태 기능 전환과는 수준이 완전히 다른 방식의 완전제거.  이때 법은 세계령의 가장 막강한 전사가 된다. 왜냐하면 제거가 더 이상 약육강식의 야만이나 약자에 대한 강자의 억지와 폭력이라고 하는 외부적 사안이 아니라 '합의'라고 하는 계약상의 절차로서 우리가 이미 참여하여 서명한 가운데 도출된 결과들을 묵인하도록 하는 것은 다름 아닌 법의 이름으로 실행되는 내적 정당화이기 때문이다.

 

미디어의 화면 속에서 파업은 이제 네트워크로 연결된 기업망과 기업을 위시한 지역 경제망 그리고 기업의 제품을 사용하는 소비자, 그 모두의 심리적 피해와 금융계좌상의 경제적 손실로 완벽하게 공식화되어 버렸다. 이제 비로소 SF가 리얼리즘(어떤 리얼리즘인지는 아직 우리가 결정하기 어려운)의 테마가 되어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왜냐하면 음모는 더 이상 환타지의 주제가 아니라 삶 자체의 현실화 기제임을, 그리하여 그 양자 중 누가 모델이고 누가 모방인지를 구분할 수 없는 실상이 펼쳐지고 있음을 우리가 조금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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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프랑스 파리에서는 도시 현대화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오스망프로젝트'(Haussmannization)가 그것이다. 비좁고 불결한 거리, 낡아빠진 건물, 일관되지 않은 도로망, 비위생적인 상하수도, 빈민가와 같은 전근대적 풍경을 현대식 깔끔함으로 재편하려는 시도였다. 이 살균 프로젝트가 겨냥하고 있었던 것은 물론 파리의 도시화, 효율화, 상업화, 합리화였다. 이로부터 파리는 급속도로 기하학적인 풍경을 갖추어가기 시작했고, 이는 곧 '대로'(Grands Boulevards) 주변의 생활 전반에 속도감을 부여해주었다.

(Gustave Caillebotte, Sur Les Champs Elysees, Boulevard Haussmann, 1880)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효율적 속도화 기획과는 다르게 새로운 형태의 시민집단이 생겨났다.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를 위시하여, 훗날 벤야민(Walter Benjamin), 하비(David Harvey),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 케루악(Jack Kerouac), 그리고 짐멜(Georg Simmel) 등에 의해 이론화되어 잘 알려져 있는 현상으로, 다름 아닌 '산보객'(Flâneur)이다.

이 말은 원래 프랑스어 동사 Flâner의 남성명사 Flâneur에서 유래하여, 산보를 하거나 어슬렁거리거나 배회하는 사람을 지칭한다. 보들레르는 이를 도시경험과 연관하여 사용했다. 간단히 산보객이란 '도시를 배회하고 걸어 다니며 도시 생활을 경험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산보객은 도시의 문화적 현상과 현대성(modernity)을 예시하는 눈금자가 된다.

현대성의 지표가 되는 핵심은 물론 사회 안에서의 개인의 위상의 변화일 것이다. 오스망프로젝트가 예시했듯이, 사회규율이 합리적이고 체계적이 되면서 개인의 사적인 삶과 그 자율성은 사회적 힘에 의해 압도된다. 특히 대도시는 익명의 군중 공동체를 만들어 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군중이란 전통적인 지역 공동체로부터 박탈된 개인에 다름 아니었다. 이들은 결속된 근거도 없이 다만 산업사회의 테크놀러지에 의해 불특정 공간에 배치된 원자였다. 전통을 넘어선 현대적 자유가 한편에 있었지만, 한편에는 불안, 박탈감, 고독, 공허와 같이 삶의 추상적 형식이 가하는 정서들이 이들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Gustave Caillebotte, Un Balcon, 1880)

짐멜이 자신의 에세이 "메트로폴리스와 정신적 삶"(The Metropolis and Mental Life)에서 지적했듯이, 현대성은 새로운 사회적 유대 그리고 타자에 대한 새로운 태도를 창출했다. 개인은 시간과 공간을 이전과는 전혀 다르게 수용하여, 그 기하학적 광경이 말해주듯이, 세상에 대해 '무감동한 태도'를 가지게 되었다. 또한 18세기 이전의 정치적 종교적 경제적 사상적 굴레로부터 벗어난 현대인은, 그 자유를 예증해줄 효율적 생산력을 최대로 하기 위해 19세기가 되면서 노동의 분업과 기능적 전문화를 요구 받는다. 이 전문화는 개인이 완전한 하나의 총체로서 다른 개인에 대하여 절대적 존재성을 가질 수 없게 했다. 현대적 의미에서의 전문성이란 말하자면 불완전한 완전성이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개인들은 서로를 배타적(경쟁)으로 수용하면서, 또 한편 서로에게 긴요한 존재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은 서로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되는 보충적 존재였고, 실상은 고립적이면서도 무리로부터 5피트 이상 멀어지면 불안을 느낄 만큼 고립을 가장 두려워하는 독신자였던 것이다.

익명성으로 보장을 받은 자유의 다른 편에 고독과 우울의 정서가 자욱했던 부르주아 개인들은 자신의 자유를 확인하기 위해 혹은 자신의 우울을 치유 혹은 즐기기 위해 거리로 나와 배회와 산보를 한다. 보들레르를 대표로 하는 이들의 우울은 도시를 단지 생활공간이 아니라 하나의 심미적 대상으로 둔갑시키면서, 메트로폴리스 한복판에 침잠하여 거리를 탐색하고 모던을 관찰한다. 보들레르의 말에 따르면 '보도의 식물학자'가 된 것이었다.

(Gustave Caillebotte, Sur Le Pont de l'Europe, 1877)

그러나 이들은 도시에 감동을 느낀 것이 아니라 무감동하고 냉소적인 관찰자였다. 이들은 산업화가 추구했던 도시의 획일화, 속도, 기계화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견지했다. 19세기 영국의 댄디즘(Dandyism)이 보여주었던 퇴폐 그리고 부에 대한 혐오가 그랬듯이, 이들은 도시적 삶의 일부였고 부르주아의 도시적 우수의 탐닉자였지만, 동시에 그로부터 떨어져서 그것을 바라보고 살피고 탐색함으로써, 그 존재 자체가 하나의 제동(制動)이 되었다. 도시 한복판에서 어슬렁거리는 이들은 그 자체가 하나의 망설임이었던 것이다. 이 망설임 속에는 근본적 동기가 있었는데, 바로 사회 기술 메커니즘이 설정해 놓은 초개인적 균등화로 인한 개인의 존재론적 비하에 대한 암묵적 저항이 그것이다. 벤야민 자신이 이미 한 명의 예증적 산보객이었는데, 그것이 한편으로는 하나의 라이프스타일이었지만, 다른 한편에는 사회에 직접 참여하지 않으면서도 높은 통찰력을 갖춘 부르주아지 딜레탕트를 예시한다고 썼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비록 미완성에 그치고 말았지만 파리의 쇼핑 거리에 대한 식물학자와도 같은 관찰을 감행했던 그의 <아케이드 프로젝트>가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느린 산보와 사색은 순수하게 개인적인 행위지만 초개인적 거리 두기의 효과적 기제이다. 그것들은 대단히 비효율적인 가치들을 생산하면서 소리 없이 효율을 잠식한다. 자본의 붕괴는 공장이나 시장 혹은 현장이 아니라, 공원과 산책로에서 시작될지도 모른다.

Posted by hu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