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07'에 해당되는 글 13건

  1. 2006/07/25 Benedict Anderson의 상상의 공동체에 관한 짧은 요약 (1)
  2. 2006/07/17 브록백 마운틴 (6)
  3. 2006/07/17 표현과 신비 (8)
  4. 2006/07/16 소비사회와 총체성의 음모 (3)
  5. 2006/07/16 어느 낙타 이야기 (9)
  6. 2006/07/16 질투 (10)
  7. 2006/07/16 에너지의 두 체계 (27)
  8. 2006/07/16 진정한 것에 대하여 (9)
  9. 2006/07/14 사랑의 윤리학 (4)
  10. 2006/07/14 망상과 환상 (2)
  11. 2006/07/14 사회 (2)
  12. 2006/07/14 문형(文形, Figure)에 관하여 (18)
  13. 2006/07/11 인사말


근대적 의미의 국가나 민족은 세계의 정치 경제적 질서 속에서 점점 달라지고 있다. 노동인구나 자본의 이동과 같은 국제적 신질서는 우리로 하여금 국가나 민족의 개념을 수정해서 이해할 것을 요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의 변형된 형태이긴 하지만 여전히 국가 전체주의나 종교적 민족주의 등이 실질적 질서를 구성하고 있거나 우리의 관념을 지배하고 있다. Benedict Anderson의 『민족주의의 기원과 전파 』라는 책은 국가나 민족의 발생이 어디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또한 어떻게 각 집단들을 하나의 통일적 질서로 묶고 있는가에 관한 연구이다. 이 글은 바로 앤더슨의 저 책 중에서 상상의 공동체에 관한 중요한 논의를 담고 있는 제 2장의 요약이다. 상상된 공동체라는 제목이 말해주고 있듯이, Anderson은 민족주의를 근대적 형태의 종교라는 관점에서 둘을 비교하고 있다. . .



<문예노트>
Posted by huun

이안(Lee Ang) 감독의 영화 <브록백 마운틴(Brokeback Mountain)>의 관객들이 주목해서 보아야 할 것은, 대중매체가 선전하는 대자연의 아름다운 풍경이나 동성연애가 아니다. 아름다운 풍경이란 가끔 피로를 풀기 위해 여행하는 사람이 잠깐 기지개를 펴면서 느끼는 세속적 포만감일 뿐이다. 대자연에 대한 이런 식의 이해는 도시인의 무성의한 냉소주의를 반영한다. 그것은 안락한 차 안에서 달콤한 음악을 들으며 시골길을 달리다가, 갑자기 어떤 생각에서인지 창문을 내리고 멈춰 서서, 초가을의 황금물결을 바라다보며 뿌듯해하는 류의 자연관에 불과하다. 우리와는 무관한 것으로서의 자연,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해 우리의 환타지로 유출된 자연. 우리가 이 영화에서 그러한 것만을 보며 만족한다면, 그저 그런 상투적인 속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여행자의 앵글로는 자연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직접 들어가서 봐야만, 즉 잠을 자고, 밥을 짓고, 시간을 때우는, 거기서 실제로 살고 있는 자로서, 자연과 직접 대면하는 그런 상황 속에서 느껴지는 자연을 볼 줄 알아야 한다. 풍경으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장소와 현장으로서의 자연을 투시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사실, 미 대륙의 자연환경이란 우리가 생각하듯 그렇게 아름다운 것만이 아니다. 거기에는 유럽이나 아시아와는 그 성격이 전혀 다른 종류의 자연사가 있다).

역설적이게도, 자연 속에 직접 뛰어든 사람에게 있어 가장 큰 관건은 그곳으로부터 빠져 나오는 일이다. 마치 풋내기 마라톤 선수가 출발선 앞에서 의기양양하게 거울을 보며 폼을 잡다가, 출발선으로 뛰어든 후에 맞닥뜨린 현실이랄까? 헤어나지 못해 허우적 거리다가 주저앉기 십상인. 이것이 바로 저편에서 흐믓해 하던 여행자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입장의 미국인 청년들 잭(Jack Twist)과 에니스(Ennis Delma)의 대자연이었다. 이 영화는 미국인들이 거대한 대륙의 평원에 뛰어들어 살아가면서, 여행자처럼 그냥 고개를 숙이고 되돌아갈 수는 없는, 그 암흑으로부터 빠져 나오는 문제를 다루고 있는 영화이다. 그리고 이것은 실제로 미국의 성스러운(?) 개척사의 그늘에서 눈에 띄지 않던 현장인들이 느꼈던 대자연과의 미국적 대면, 즉 낭만주의와 이상주의와 그들 특유의 낙천주의와 공존했던 미국적 프론티어라인의 실상이었던 것이다. 대자연이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빠져 나오고 싶은, 역겹고 무자비한 것이다. 양떼들을 먹어 치우는 코요테, 무서운 곰, 이들을 몰아내기 위한 카우보이의 총질, 거친 벌판이나 산속에서의 야영, 그 고독과 밤의 광란, 야밤의 추위나 갑작스러운 폭풍, . . . 이러한 드라마와도 같은 모험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대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가혹함이란 무엇보다도 드라마의 부재, 드라마가 불가능한 바로 그 일상적 진부함에 있다. 황량한 대륙의 바람. 정지한 듯 보이는 거대한 뭉게구름. 방문을 닫아버린 디킨슨(Emily Dickenson)이 창가의 일상에서 느꼈을 뜨겁지만 싸늘한 한낮의 햇볕. 꿈쩍도 하지 않고 언제나 저기에 버티고 있는 저 거대한 브록백. 우람한 전나무들의 반복. 그 안에서의 목동들과 양떼들의 반복. 태엽시계의 바늘이나 대수방정식과도 같은 대자연의 일상. 간간히 반복되는 기타의 늘어지는 선율. . . . "하루에 네 시간 이상을 이 짓이군! 아침 먹으러 내려왔다, 다시 양 보러 올라가고, 저녁 먹으러 내려왔다, 또 양 보러 올라가고, 밤잠 설치며 코요테나 감시하고. . . 먹고, 지키고, 자고, 먹고, 지키고, 자고 . . . Shit!" 오즈 야스지로(Ozu Yasjiro, 小津安二郞)나 홍상수의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기계적이고도 진부한 일상들이 비좁은 도시에서가 아니라, 막대한 대자연 한 가운데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공간과 시간 전체를 무지막지한 법칙의 흐름 속으로 흡수해 버리는, 중력과도 같은 지긋지긋하고도 끔찍한 힘! 그 힘에 붙들려 잭과 에니스는 온전한 의미에서 정주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없는 하루 하루를 무의미하게 살아간다. 도무지 그들이 산에서 언제 내려올 수 있을지 가늠조차 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그리고 이것이 브록백에서의 미국 카우보이의 실상이었고, 두 젊은 낭만주의적 이탈기계로 하여금, 그들 안에 내재해 있는 힘과 동요를 견딜 수 없게 만드는 것이었다. 대자연이란 견딜 수 없게 하는 그 무엇이다. 갑자기 눈이 내리고, 우박이 떨어지고, 온 몸을 얼어붙게 하는, 가혹한 자연의 섭리들. 모비딕(Moby dick)의  그 써늘한 회백의 색채처럼, 인간적 감동과는 무관한, 미동조차 하지 않는, 무심하고, 비개인적인 자연. 이것이 바로 멜빌(Herman Melville)을 한참이나 지나 20세기가 되어서야 깨닫고 괴로워 했던 미국인들의 자연주의이다.

그와 같은 진부한 삶은 대자연의 침묵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제2의 자연은 그것과 너무나 흡사해서, 아니 그것을 넘어서서, 우리로 하여금 다시 한번 과묵하게 한다. 스티븐 소더버그(Steven Soderbergh)는 <Bubble>에서 가구점의 카탈로그 만큼이나 지루하고 진부한 미국인의 일상을, 몇 가지의 놀라운 카탈로그 쇼트들의 모음으로 보여주었다(그 영화에서의 살인은 첫 장면에서 해가 뜬 새벽의 찬 공기를 마시는 순간부터 이미 준비되고 있었다: 파헤쳐지는 공동묘지, 잠에서 깨어나 눈을 뜬 채 뭔가 생각에 사로잡힌 Martha, 강렬하지만 단조로운 기타의 스트로크. . .). 물건들뿐만 아니라 우정, 데이트, 사랑, 자애, 신의(信義), 종교, . . . 그 모든 것들은 집안과 인생에 비치해 두어야 할 빠트려서는 안 될 어떤 품목들이고, 그들은 그 품목들의 소유를 통해 공동체에 참여한다. 한마디로 말해 인생은 실제로 카탈로그의 산물이고, 카탈로그의 집결체이며, 카탈로그는 상품 사회 미국의 삶 그 자체이다. 그것은 19세기의 휘트먼(Walt Whitman)이 시에서 구가했던 카탈로그 집합체와는 그 본질에 있어 전혀 다른 것이었다.

전형적인 미국식 인지방식의 하나인 카탈로그는 <브록백 마운틴>에서도 확인할 수가 있다. 몇 가지만 나열해 보자.

컨트리 음악 / 청바지 / 카우보이 모자 / 집단 댄스 파티 / 술집에 걸린 커다란 성조기(일찍이 미국의 실내에서 성조기 만큼 자연풍경의 역할을 한 사물도 없을 것이다) / 남자와 여자 그리고 그들의 만남과 카-섹스(이 영화에서 흥미로운 것은, 남자들끼리의 관계가 암묵적으로 과도하게 금기시 되고 있어서인지, 남녀 관계만큼 따분한 것이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 보기에도 낯설어 보이는 노동 / 결혼 / 세상에서 가장 따분한 침실(미국 영화 대부분이 그렇지만, 게슴츠레한 눈으로 집세걱정을 하며, 입 냄새가 진동할 것 같은 숨을 헐떡거리며 서로를 만지는 에니스와 그 부인의 애로장면은, 정말이지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오고 싶을 정도로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 인형 같은 아이들(그 최악의 의미에서. 한편, 소더버그는 <Bubble>에서 진짜로 인형 공장을 등장시켜, 마치 그 인형들이 마지막 크레딧에서 처럼 일그러진 모습에서 점차 어른들의 꿈의 투사로 변형되어 가는 것처럼 다룬다) / 주말마다 등장하는 교회(미국에서의 교회란 사교를 넘어 하나의 일터이다. 한편, <Bubble>에서는 교회에 앉아 무엇인가에 도취된 몽환적 상태에 빠져 있는 미국인 Martha의 소름 끼치는 얼굴이 클로즈업 된다) / 그리고 이 모든 끔찍한 미국의 악몽을 종합하는, 말하자면 사람들로 하여금 설교(말씀)를 들을 때와 동일한 표정과 포즈를 취하게 하는, 가장 위대한 신 즉 자연 즉 텔레비전!

이들의 삶은 파큘라(Alan Pakula) 감독의 <암살자(Parallax View)>에서 기자가 요원 테스트를 받을 때, 반사회적인지 아닌지, 정신질환적인지 아닌지 등을 파악하기 위해 제시되었던 바로 그 카탈로그 사진들 속에 있는 삶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다. 그것은 미국식의 세속적 도덕주의의 건전함 속에 깃든 어떤 우울한 색채였고, 첫 눈에 주목할만한 트레일러 지배인의 그 청교도적이고도, 고압적이고도, 고지식한 눈매에서 읽을 수 있는 분위기였다(백인 남자들은 대체로 과묵하다. 단순해 보이기도 하고, 우직해 보이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도덕적이고 둔해 보인다. 그들의 손가락의 움직임을 살펴보면 알게 된다. 그들은 감성보다는 의무에 더 쉽게 반응하기 때문에, 그들과 쾌활한 대화를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들과 좀 길게 대화를 하려면, 그것이 어떤 것이든 사회적 의무에 충실해야 하고, 그럼으로써 모종의 자격 같은 것을 가져야만 한다).

그러나 사실 여기에는 미국적 일상의 진부함 뿐만이 아니라 일상 자체의 진부함이 있다. 이 영화는 수 많은 카이보이들이 등장했던 서부영화에서는 거의 한번도 볼 수 없었던 목동의 실상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양떼를 몰고, 맹수들을 쫓는 일을 넘어서서, 야영을 하고, 텐트를 치고, 말뚝을 박고, 불을 지피고, 설거지를 하고, 돌무더기를 쌓고, 나무를 자르고, 끼니를 때우고, . . . 뿐만 아니라, 보이지는 않지만 아주 많은 생활의 행위들, . . . 이는 인물들로 하여금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큰 흐름에 참여하는 큰 행동이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벗어난 아주 작은 행동들을 요구한다(이러한 행동을 하기 위해 필요한 삶의 요령[tip]들은, 거대한 물리학 이론이나 생물학 논문을 쓰는 것 만큼이나 중요한 일이고, 미국적 지식의 화용론적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들이다). 그 행동들은 최종 결말이나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취해진 액션이 아니라, 감지하기 어려운 어떤 작용과 반작용의 결과로 인해 별 뜻 없이 생겨났다가, 어느새 그것을 취한 자신도 모르게 사라져 버리고 마는 표정이나 제스처의 변화를 뜻한다. 우리가 삶의 실상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바로 그 감지할 수 없는 표정이나 제스처들의 묶음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삶은 큰 행위로서의 드라마가 아니다. 그것은 보이지도 않고, 의식되지도 않고, 따라서 존재하지도 않는, 사실상 죽어버린 시간들 속에서 탄생한다. 어느 누구도 부른 적이 없었음에도, 스스로 난데없이 튀어나와 버리는 그 자유-모티브들! 이것이 삶의 역설이다.

삶에는 멋진 드라마도 없고, 격렬한 총질도 없으며, 가슴에 깊이 새겨야 할 어떤 의미 있는 상징이나 그 가치들조차 찾아보기가 어렵다. 그것은 브록백 산맥에 둘러싸여 뜻 없이 먹고 자는 저주와도 같은 삶이다. 그 저주란 가령 끌로드 시몽(Claude Simon)이 심지어 광폭한 전쟁이 지나고 난 흔적 속에서도 발견하였던, 그러한 진부함의 저주이다: "도로를 따라 길게 장식된 화장지의 꽃 줄 광경처럼, 그것은 마치 창자가 다 드러난 여행 가방에서 도무지 헤아릴 길 없이 많은 옷가지가, 대부분이 흑백으로 풀어 헤쳐진 것 같다"(Claude Simon, La route des Flandres (Paris: Minuit, 1960), p. 29.) 시몽의 비유가 주는 슬픔이란 전쟁과 그 가혹한 죽음이 아니라, 바로 우리 삶의 견딜 수 없는 어떤 사소하고도 가벼운 상태를 폭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전쟁뿐만 아니라 감옥에도, 심지어 죽음의 순간에도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Bubble>에서 Martha는 감옥에 투옥된 후에도, 아침에 일어나 어제와 마찬가지로 양치질을 하며 새로운 일상을 맞는다. 혹은, Emily Dickinson의 한 화자는 무덤 속에서 영원히 잠이 들기 직전의 몽롱한 비애의 순간에 갑자기 날아든 파리 한 마리의 성가신 날개 짓과 웅-웅 거리는 소리를 감지한다). 온갖 쓸모 없는 수많은 객체들, 쓰레기통 옆에 떨어진 자그마한 휴지조각 같은, 이미 죽어버린 삶의 무의미를 반복적으로 상기시켜주는, 매일 아침 쉼 없이 쏟아지는 먼지들과 싸우듯이, 그 무수한 부수적인 것들을 끊임없이 매 순간 참아내야 한다는 것!

비극적인 냉소주의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또 다시 대자연으로 되돌아가야 할 것이다. 그 정도야 어찌되었든,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냉소주의자가 된다. 거기에는 일상의 진부함의 결과라고만은 말할 수 없는 그 이상이 있다. 견디지 않으면 안 되는 일상이지만, 한편 우리는 간혹 혹은 자주 그 반복적인 일상을 견딜 수 없는 무엇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냉소주의란 무기력한 낭만주의이다. 이것이 바로 영화 전체에 감돌고 있는 잭과 에니스의 생활에의 냉소적 정서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어떤 식으로든 다시 대자연으로 되돌아가야만 한다. 산에서 집으로, 집에서 산으로, 혹은 멕시코로, . . . 인간은 가눌 수 없는 요동을 잠재우기 위해, 양떼나 소떼처럼 이리저리 자기 자신을 유목한다. 우리가 아는 것과는 다르게, 여행이란 광포하고도 웅장한 대자연의 낭만주의적 경험이 아니다. 그러한 낭만주의는 자연 속이 아니라, 인간의 저 깊은 곳에 잠들어 있는 내재적 저주이기 때문이다. 인간만이 오로지 이탈하고 싶어하며, 파문을 일으키고, 반복적인 리듬을 못 견디어, 그 방정식에 동요를 일게 한다. 그 청년들의 사랑 역시 그 저주 탓일 것이다. 그들은 애초부터 동성연애자도 아니었으며, 새벽의 한기가 그들을 사랑하게 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우리는 진부한 일상들 속에서, 그러한 내재적 성질들이 도저히 참고 견디어낼 수 없는 지경에 이를 때, 가령 야스지로의 영화 <가을햇살(秋日和)>에서 보듯이, 일상에 매인 힘없는 노인들의 작지만 갑작스러운 농담이나, <늦봄(晩春)>에서의 순종적인 딸이 언뜻언뜻 보여주는 복받치는 울음과 같이,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그 감정의 광풍들이 견딜 수 없을 때, 저기서 저렇게 굳건히 버티고 서 있는 대자연의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며, <동경 이야기(東京物語)>에서 방에 앉아 창 밖의 정물(靜物)을 보며 마음을 달래는 노인들처럼, 자신 안에서 일고 있는 격동을 그 불변의 거대한 흐름을 닮아가며 조용히 잠재우기 위한 것이다(이것이 바로 노엘 버치[Noël Burch]가 명명했던 야스지로 특유의 베개 샷[Pillow Shot]의 미학적 의미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행이란 떠나는 것이 아니라 되돌아오기이다. 이것이 바로 여행의 진정한 의미일 것이다. 밤을 새야 할지도 모르니, 여기서 짐 자무쉬(Jim Jarmusch)라든가 홍상수의 작품 얘기는  빼자.

따라서 이 영화에는 두 개의 자연 혹은 반복이 있다. 근원적이고도 1차적인 자연. 경험적으로는 파악될 수 없으며, 느껴지는 것조차 불가능한. 그러나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숙명과도 같은 자연. 그 자신 스스로 그것이 되고 싶어 했던 사드(Marquis de Sade)의 표현에 따르면, "눈을 감고 있는 동안에도 효력을 미치는 절대적 악". 아마도 근대 물리학이 정식화하고자 했던 거대한 방정식. 무자비하고도 무차별적인 범우주적인 반복. 그리고 다른 한편에는, 그 자연을 닮아가는 또 다른 2차적 자연이 있다. 한편으로는 혐오스럽고, 또 한편으로는 애처로운. 근원적 자연을 벗어날 수 없는 존재가, 그 흐름 속에 자신을 내맡겨 놓고 사는 가운데, 도식적인 몸짓들로 이루어진 가벼움과 사소함. 그러나 무엇보다도, 언제나 제자리로 되돌아옴으로써 허탈함을 자아내는 반복. 그리고 이 두 자연에 둘러싸인 두 인간의 위험하고도 격렬한 여행을 동반한 위태로운 낭만주의가 있다. 결국 그들은 어떤 어떤 산자락에 위치한 사람들이다. 무슨 마을이나 무슨 집에 들어 앉아 있는 동안에도. 그러나 그들은 산이나 계곡으로 떠났다가 되돌아 온다. 그 왕복운동의 반복은 그들의 고립을 심화시키지만, 더 정확히 말하면 그들이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우리는 이 영화로부터 미국적 삶의 실상을 보아야만 할 것이다. 영화는 세 번 이상을 볼 것을 권유한다. 그럼으로써, 단계적으로나마 보다 많은 실상에 근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1) 전면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감동적인 혹은 격렬한 낭만주의. 그래서 노동이나 만남이나 섹스나 관계들의 실상, 즉 행위의 실상 뿐만 아니라, 그러한 행위의 삶 속에서 그들이 견딜 수 없어 하는 어떤 감정. 그래서 그 격동을 잠재우고 다시 일상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떠날 수 밖에 없었던 그 여러 종류의 여행(동성애는 그 중 하나이다).

(2) 차가운 계곡의 대기라든가. 끝없이 나 있는 산맥의 줄기라든가. 전나무에 달린 자그마한 잎새라든가. 또 그 모든 것들을 비추는 싸늘한 햇볕. 혹은 주인공들의 행동의 배후에서 움직이는 다른 존재들. 가령, 산으로 가기 전 트레일러에서 두 청년이 기다리는 동안, 저편에서 잠깐 지나가고 있는 이름 모를 두 미국 소녀라든가. 에니스가 산에서 내려와 왠지 모를 구역질을 하고 있는 동안, 저 뒤에서 자그마하게 일고 있는 바람 먼지라든가. 물컵에 침을 뱉는 고압적인 인상의 잭의 아버지와 기죽은 착한 어머니, 그리고 그들이 사는 말없고 우울한 가정들. 그들의 공포를 말해주는 황량한 벌판과 을씨년스럽게 서있는 바람 부는 집. 먼지. 에니스를 좋아하게 된 어떤 여인의 능숙한 그러나 판에 박힌 춤 솜씨, 고개를 숙이고 있는 에니스의 큰딸 알마(Alma)의 모습에서 보이는 순진해 보이지만 어떤 욕망 혹은 동경. 그 밖의 모든 잠재적인 것들.

(3) 마지막으로, 그 모든 사람이나 사물과 감정들을 한꺼번에 드러내는 회상과도 같은 하나의 분위기 혹은 느껴지는 단일한 시간. 가령, 잭이 어린 시절을 보냈을 써늘한 방. 상처 많은 책상과 초라한 가구들. 때묻은 물건들. 잭을 둘러싼 미국 전체의 주름진 세월. 보니체르(Pascal Bonitzer)가 말했던 얼룩(tâche)처럼, 혹은 바르뜨의 푼크툼(punctum)처럼, 혹은 겹쳐진 셔츠에 묻은 피얼룩에 깃든 에니스 델마와 잭 트위스트의 고유한 시간. 이 외에도 무수한 사례들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왜 그들의 고유한 시간을 보고 느끼기 위해 노력해야만 할까?

미국인들은 우리를 '동양인'이라고 부른다(유럽인도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그래서 중국인이나 일본인이나 한국인을 그 동양인이라는 용어 속에 뒤섞어서 이해하기 때문에, 그 구체적인 모습들을 잘 구별하지 못한다. 미국 영화에 등장하는 한국인이나 중국인이나 일본인들을 보라(심지어는 중국어를 쓰는 한국인이 등장하기도 한다). 뭐가 뭔지도 모른 채 모든 동양을 뒤섞어 놓았던, 롭 마샬(Rob Marshall)의 <게이샤의 추억(Memoirs of A Geisha)>이 좋은 예일 것이다. 간단한 예로, 그 영화에 등장한 게이샤의 모습과 미조구찌 겐지(溝口健二)의 작품에 나오는 게이샤의 모습만 비교해보아도, 그 맥 빠지는 오해가 무엇인지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어느 나라를 가든 영어밖에 쓸줄 모르는 미국인들의 그러한 이해는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를, Martha의 끔찍한 파란 눈처럼, 텔레비전 스크린에 혼을 빼앗긴 반수면 상태의 두뇌환경 속에서 바라보기 때문이다. 분명히 잘못된 이해이다. 그러한 진부한 시선은 우선 당사자들을 매우 불쾌하게 하는, 아주 무례한 이해 방식일 뿐만 아니라, 잭과 에니스의 일상처럼, 그 자신 스스로 따분한 삶에 젖어들기 때문이다. 자신이 중심이 되어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으로는 결코 공존이란 가능할 수가 없다. 공존이란 개인성을 벗어나 자신의 이해와 흥미로부터 단절하고, 괴롭지만 사물의 실상을 보려는 노력 속에서만 가능해진다. 한참을 기다리며 바라보지 않으면 안 되는 그 실상들. <브록백 마운틴>으로부터,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낭만적인 자연풍경이나 정치적 주제로서의 동성연애를 확인하는 것에 머물러서는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가 그들에게 원하는 방식으로 그들을 보아야 한다. . . . 그렇지만, 점점 반수면 상태로 빠져들고 있는 우리들에게 영화는 과연 실상의 충격을 줄 수 있을까?




<문예노트>
Posted by huun

K는 몇 해동안 한 예술가와 친분을 가져왔다. 그들은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은 서로 달랐지만, 서로의 교제와 우정에 만족해 했다. 그들은 간혹 자신들의 작품을 주고 받았다. 특별한 날의 선물처럼, 그것들을 받아들고 좋아했다. K는 예술가의 그림에 너무도 기뻐한 나머지, 그 작품에 대한 찬사와 비평을 헌사하였다. 읽혀지는 의미라든가, 형식의 새로움이라든가, 느껴지는 분위기 등, . . . 자신이 알고 있는 희귀한 단어들을 꿰어가면서, 그의 그림들을 단어들로 다시 세우고는 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작품들의 의미가 발견될 수 있다고 믿었고, 그것은 곧 친구의 작품을 정당화하는 일이라고 뿌듯해했다. 그리고 그의 정당화는 대부분이 긍정적인 것이었다. . . .




<문예 노트>
Posted by huun

프레드릭 제이미슨(Frederic Jameson)이라는 미국의 한 문화 평론가는 글을 별로 잘 쓰지 못하는 사람이다. 아는 건 많은 사람인데, 그다지 세련되지 못한 스타일에다가, 잡다한 지식들을 뒤섞어가면서, 자신만이 알고 있는 용어라든가 개념들을 남발하는 부류이다. 싸르트르의 제자였다는데, . . . 그는 철학, 미학, 문학, 영화, 심지어는 건축, . . . 안 건드리는 분야가 없다. 영화에 대한 관심도 그냥 관심이 아니라,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한, 암시장에서나 구할 수 있는 어디 저 제3세계 작품들을 가져다 놓고 분석이랍시고, 궁시렁 궁시렁 댄다. 아마도 마르크스주의자들 중에서 가장 털털한 사람이 아닐까 싶다. 노력은 많이 하지만, 끼는 부족한 사람이랄까? 하지만, 가만히 읽다 보면, 간혹 광인이 해대는 횡설수설 속에서, 섬광처럼 출현했다가 금새 사라져 버리고 마는, 어떤 빛과도 같은 통찰을 접하게 된다.


소비 자본주의의 문화생산은 상품(과 그 교환)의 형식을 취하고 있어서("문화를 제공할 테니, 돈을 달라!"), 우리들은 그 문화적 내용 보다는, 무의식적이고도 집단적인 형식의 소비와 구매를 실천함으로써(구매란 결코 개인의 취향의 전개과정이 아니다), 그 상품의 형식을 실현하고 있다. 좌측이든 우측이든, 상류이든 하류이든, 그와 같은 교환의 일상적 실천 속에서, 우리는 사회에 범재하고 있는 신과도 같은 어떤 것에 대해 암묵적으로 동의한다. 개인들의 집단적 소비실천은 마치 슈퍼에서의 구매행위가 사회 참여의 한 형태인 양 알레고리화되어, 무의식적인 환상을 통해, 추상적 총체성(totality)의 관념으로 나아가는 것이다(가령, "구매자는 소비주체이고, 소비공동체의 일원이며, 경제의 주체이다!"라는 식의). 그리고 미디어는 이 총체성을 사실적으로 입증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어떤 편안한 귀속감과 아울러 그에 동반되는 알길없는 어떤 허기를 느끼게 한다(그래서인지, 가령, 텔레비젼과 스낵의 밀착 관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하다).


이러한 논의는 넓게는 맥루한(Marshall McLuhan)의 미디어 이론("미디어는 국가이고 세계이다"), 좁게는 앤더슨(Benedict Anderson)의 민족 공동체(상상으로 만들어진 경험의 총체) 논의에까지 연관을 지을 수 있을 것이다. 제이미슨은 이와 같은 총체성의 관념을 획책하는 모든 담론과 실천과 이데올로기를 '음모(conspiracy)'라는 용어로 처리하고 있다. 그리하여 음모에 관한 영화(첩보 영화, 정치 스릴러, 범죄 스릴러 등)들을 바로 이 자본주의적 소비와 마케팅, 그리고 그 시스템이 만들어 놓은 총체적 공간, 충만하면서도 텅 빈 공간 속에 참여하고 있는, 우리 자신들의 정서의 초상을 어떤 한 구절을 통해 묘사하고 있다.


참고로, 제이미슨의 그 구절은 Alan J. Pakula의 편집증 3부작(Paranoid Trilogy)중에서, <암살자(The Parallax View)>에 등장하는 한 인물에 대한 설명에서 비롯된다. 주인공(기자)은 음모를 밝히기 위해 패럴랙스 회사에서 모집하는 요원선출 시험에 지원하고, 나중에 이 회사에서 직원 한 사람이 주인공을 만나 합격을 통지하기 위해 파견된다. 그는 주인공에게 매우 상냥하고, 차분하며, 인간적인 유대감과 동정심 같은 것을 보여줌으로써(매우 놀라운 장면이었다), 함께 일할 동료의 우정과 신뢰를 다지는 방식으로 접근한다. 동료애는 회사에 대한 충성심으로 확대되고, 결국 주인공은 암살계획에 교묘하게 이용되어 죽음에 이른다. 제이미슨은 이 직원을 "음모의 대리인"이라고 지칭하면서,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체계와 기업의 대리인으로서, 무의식적 임무를 부여받은 이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지적하고 있다.


그의 글을 그대로 직역해서 옮기면, 아방가르드의 꼴라쥬나 정신분열자의 책상을 보는 것 같은 관계로, 약간의 위험을 무릅쓰고, 우리의 습관적인 지각이 허용하는 한계 내에서, 우리가 그 의미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주석을 첨가하고 의역하여 옮겨 보겠다.

" . . . [이 영화는] 음모를 수행하는 주체들을 특별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을 말해야 할 것이다. 즉 그 거친 사람들, 원흉들, 음모의 가담자들 중에서 한 사람은 조용하고 차분하며, 서두르거나 재촉하는 일 없이 사람을 상냥하게 대하면서, 마치 그것이 기업의 태도인 냥 행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 . . 이들은 [기업의 피해자들에 비해] 잘 차려입고, 잘 먹고, 말 그대로 개인적인 기질을 결여하고 있다[즉, 개인성을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자신은 임무를 수행하는 역할에 불과함을 분명히 한다]. . . 이들은 비교적 우리 사회에서 특권을 함축하고 있는 자들이다. . . . 그러나 그들 역시 착취당하는 인물들이다. . . . 임무에 사로잡힌 자들, . . . 그러나 이들은 희생자들이 사로잡혀 있는 공포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임무에 사로잡힌 자들이다. 이 음모의 대리자들이 가지고 있는 근심(Sorge)은 웃는 얼굴로 신뢰를 보여주어야 하는 문제이다. 그리고 그 임무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기업 차원의 문제이며, 네트워크 또는 제도의 존속이나, 추상적인 혼란이나 태만에만 관심을 두고 있다. . . . [그 추상적 혼란과 태만 속에서] . . . 이들은 모두가 . . . 집단적 조직 그 자체의 텅 빈 공간에 참여하고 있다. 이들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개인으로서의 자신의 현존을, 강하면서도 상냥한 배려, 그 무게중심은 전혀 다른 곳에 있는, 즉 어떤 목적의식에 골몰해 있지만 동시에 거기에는 무관심한 친절에다가 쏟아 붓는다. 그러나 이 같이 전혀 다른 종류의 배려는, 비개인화되어 있으면서도, 또한 그 고유의 불안, 말하자면 개인의 행위에 대해 어떠한 개인적인 결과도 파생하지 않는, 무의식적이고 기업 차원의 불안을 수반한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이 흘리는 땀은 이중의 책무에 복무하고 있다. 하나는 그 집단적 책임이라는 뱃지로서. 그리고 클로즈-업의 친밀감 속에서 느껴지는 모든 불쾌함의 실체로서[즉,땀이란 성실과 노력의 도덕적 기호이므로, 동료애나 친밀감을 내포하고 있지만, 동시에 그것은 축축한 습기로서, 불쾌감을 자아낸다]. . . . [그래서 땀은] . . . 간혹 가다가 다른 감각 수준 위에 투사된 하나의 지표인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친밀함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떤 발견을 뜻한다. 즉 우리가 무의식중에 하나의 집단적 네트워크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의 발견. 그리고 멜로드라마가 없이도 우리가 얼마나 쉽게 상처받는지를 입증해주는 그 생소한 육체적 온기를 우리가 깨닫기 전에, 심지어는 고독한 순간에도 조차, 우리들은 이미 너무나 가까워져 있다는 사실의 발견[여기서 제이미슨이 말하는 가까움이란, 서로 시선을 주고 받으면서, 의식 속에 스스로 각인한 타자성(otherness)에 의해 만들어진 관계에서 비롯된 부정적인 형태의 가까움을 의미한다]. 사르트르에서 푸코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그들을 넘어 현대 페미니즘에서도, 시선(視線)은 특권적인 존재론적 공간이었으며, 그 공간 속에서 우리의 권력은 상실되고, 조작 가능한 객체들로서 극화되고 배치되었다. . . . [그것은 권력 공간, 즉 텅 빈 대타자(the absent Other)나 팬옵티콘 감시탑(Panopticon watch tower)을 투영하고 있다] . . . 음모는 승리한다. . . . 그러나 그것은 피해자들이 결여하고 있는 특별한 형식의 '권력'을 음모가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음모는 집단적인데 반해, 피해자들은 각각의 소외된 상태 속에서 전혀 집단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Fredrick Jameson, the geopolitical aesthetic: cinema and space in the world system, Indiana: Indiana University Press, 1992. pp. 65-66.) [ ]표시는 역자의 주석임.

<문예 노트>

Posted by huun

내가 다니는 학교는 본관건물이 사각의 도우넛과 같다. 마치 거대한 요새나 큐브처럼, 건물 터 중앙에 있는 사각의 광장 주변에 7-8층의 시멘트 건물이 솟아 있다. 자료를 뒤지거나 누군가에게 물어본 적이 없으므로,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아마도 군대문화의 산물인지도 모르겠다. 그 건물 안에는 교수들의 연구실 뿐 아니라 동아리 방이나 강의실 등, 학교가 갖추어야할 기관들이 온통 들어서 있다. 계단이 복잡하게 지그재그 형식으로 되어 있어, 처음에 온 사람은 방을 찾기가 쉽지 않다. 내가 이곳에 오게 된지 거의 1년이 지나서야 건물의 패턴을 파악할 정도였다. 사방이 막혀있었고, 창문 대부분은 바깥쪽이 아니라 중앙의 광장 쪽으로 나 있기 때문에, 여름에는 창문을 열어놓아도 통풍이 되지 않아 수업하기가 고역이었다. 바람이 부는 날에도 언제나 창밖은 고요했다. 학생들이 창밖으로 담뱃재를 털어 버리기 때문에, 짓궂은 녀석들은 그 광장을 세계에서 가장 큰 재떨이라고 부르곤 한다. 그 광장은 잔디가 무성히 나 있고, 상록수나 단풍 등이 몇 그루 듬성듬성 자라있었다. 학생들에 대한 배려로 여기저기에 벤치도 놓여있다. 주변에는 트랙이 둘러쳐져, 학생들은 그 가장자리로 조깅이나 도보 혹은 데이트나 수다 등으로 계절을 보낸다. 수업이 지겨워져 바깥을 보면 그런 풍경들이 잔잔히 들어온다.

언제부터인가 그 잔디 광장에는 낙타 한 마리가 매어져 있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어떤 필요에서인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오히려 여기저기에 똥오줌을 싸 놓아 (냄새는 말할 것도 없이) 푸르렀던 광장을 온통 황갈색으로 물들이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소리를 지르는 통에, 시끄러워서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저 지저분하고도 무례한 동물이 학교에, 더구나 강의실이나 연구실이 직접 보이는 광장에 존재한다는 것이 납득이 되지 않았다. 학생과 선생들에게서 당장 불만이 터져 나왔지만, 아무도 저 동물에 대해 항의는커녕 당국에 문의조차 하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가 지나면서 저 동물은 이 학교에 엄연히 존재하게 되었다. 그리고 아무도 더 이상 불만을 가지지 않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녀석이 가엽다는 생각도 하게 되고, 또 창 밖에서 진풍경을 자아내어 즐겁기도 하고, 나중에는 학생들끼리 공모를 하여 이름까지 붙여주었다. 어떤 학생들은 그 동물의 팬클럽까지 만들었다. 동물에 대한 사랑이 극진한 녀석들은 수업시간 내내 창밖만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점에 대해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나오지 않았다. 낙타는 학교 공동체의 일원임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누구도 낙타를 보살펴주는 사람은 없었다. 먹이를 주지도 않았으며, 집을 만들어주지도 않았다. 별로 넓지 않은 광장의 잔디와 많지 않은 나무 열매를 가지고도 녀석이 오랫동안 살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일까 궁금했다. 거의 1년 반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는데, 녀석에게는 등에 나 있는 봉(峯)에 자신의 음식을 비축해 두는 습관이 있었다. 그러니까, 초목이 무성한 봄여름에 잔뜩 비축을 해두고, 초목이 없는 늦가을과 겨울부터는 비축해 놓은 것을 반추하여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초봄에는 큰 혹이 작아지거나 없어지다가, 초가을이 되면 다시 그 혹은 몸집보다도 커져서 대체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러다보니 그의 일생은 두 패턴으로 나뉘게 되었다. 초봄이 되면 이리저리 자리를 옮겨가며 주변의 식물들을 먹어치우고, 늦가을이 되면 비대해진 몸으로 자리를 잡고 엎드려 아무 하는 일 없이 칼로리를 소비해가면서 살이 빠지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럼에도 꾸준히 그의 몸이 커져가면서 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봉 속에 조금 씩 조금 씩 쌓아놓는, 인생 전체에 걸친 어떤 이름 모를 비축 때문이었다. 이 동물에게 비축과 반추는 거의 본능이 되어가고 있었으며, 저축과 소비에 관한 그 본능적 계산은 경제학자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그의 본능이 이렇다보니 신체에도 변화가 일어나, 처음에는 하나였던 봉이 지금은 둘이 되었고, 세 번째 봉이 조금씩 솟아오르는 중이었다. 흔히 이 동물의 종을 단봉과 쌍봉으로 나누어 분류하지만, 내 소견으로 그 봉의 개수는 정확히 그의 성장 일반과 일치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비축과 반추의 반복은 이 혐오스런 동물에게는 일종의 자본인 셈이다. 흥미롭게도 봉이 하나 더 생긴 것은 이 광장에 매여 있던 때부터라고 알려졌다. 그가 한 번도 광장 밖을 나가지 않고도 그럭저럭 이 생활에 견딜 수 있었던 것도 아마 저 봉의 신비 때문일 것이다.

저 동물이 잘 견딜 수 있었던 생물학적 수단 외에 다른 이유도 있었다. 사회학적 이유일까? 정신분석적 이유일까? 아니면 인식론적 형이상학적 이유일까? 아니면 마르크스-레닌주의 정치경제학 비판적 이유일까? 아니면 포스트모더니즘적 냉소주의적 해체주의적 아방가르드의 분열증적 주체의 욕망의 이유일까? 아니면, . . . 어쨌든, 그 동물의 목에는 두꺼운 밧줄이 매여 있고, 그 밧줄은 광장 한 가운데에 박혀있는 묵직한 말뚝에 고정되어 있었다. 줄이 꽤 길어서 제법 자유롭게 광장을 활보할 수는 있었다. 다만 트랙을 넘지 않는 길이였으므로, 그에게 허용된 자유는 반지름과 π의 계산만으로도 정확히 가늠이 되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낙타의 운동 범위가 대체로 평균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쉽게 말하자면, 녀석은 가운데 쪽으로는 절대로 가는 일이 없고, 그렇다고 매어진 밧줄이 팽팽해 질 때까지 나아가지도 않았다. 그러다 보니 풀이 무성한 지대와 그렇지 않은 지대가 마치 토성의 띠처럼 어떤 무늬를 자아내고 있다. 그 무늬는 석양이 질 때면 아름답게 보이기까지 했다. 이제는 그 동물도 그 무늬를 사랑하고 있는 듯해 보인다. 그래서인지 간혹 그가 인간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정신의 탄생을 보여주고 있었으며, 그의 등에 솟아오른 봉과 상호 결합하여 광장을 하나의 유기적인 소우주로 만들고 있었다.

간혹 무슨 이유에서인지 녀석은 화가 나서 날뛰는 경우도 있다. 여기에 온 후로 약 6개월 동안은 그 정도가 심해 모든 사람들이 싫어했다. 우-워-억, 우-워-억 . . . 소리를 지르며, 입에는 게거품을 물고, 그 밧줄이 끊어져라 팽팽해 질 때까지 트랙 밖으로 나아가려 안간힘을 쓴다. 그러나 밧줄은 그의 분노와 욕구보다도 강했으므로, 곧 화를 누그러트리고 기진맥진하여 다시 평균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러고 나서는 편안하고도 행복한 신음을 내며 사지를 뻗고 잠이 들었다. 트랙 밖으로 나아가고 싶은 욕구는 분명했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혹은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자신의 욕구가 무엇인지, 심지어는 욕구가 있는지 조차도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 헷갈리고 있었을 것이다. 결국 트랙으로의 외출은 말하자면 체조나 운동이 되어가고 있었고, 이제는 그도 그 환경을 만족스러워하는 듯 했다. 그래서인지 그는 한 번도 말뚝 자체를 문제제기 하지는 않은 것 같다. 말뚝이 여전히 아무런 쟁투의 흔적 없이 저기에 저렇게 우뚝 솟아 있으니 말이다. 마치 그것이 처음부터 영원히 거기에 있다는 듯이. 그 동물은 자신의 목에 길게 매여 있는 밧줄과 그 영원한 말뚝이 너무 멀어서인지, 아니면 말뚝을 아버지로 여기고 있는 탓인지, 아니면 현기증을 피하기 위해서인지, 한 번도 그 거리의 인과관계에 대해서는 질문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반복해서 광장의 끝에만 갔다가 머리를 숙이고 되돌아올 뿐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그에게 다행스러운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짓을 반복하던 세월도 다 지나가고, 그 밧줄이 끊어질 듯 팽팽해지는 것을 보았다는 사람은 이젠 아무도 없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은 이를 매우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저 혐오스러운 동물이 안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 말하는 사람도 없다. 사실 아는 사람도 없었으므로. . . . 그가 이 광장의 일원이 되었던 것은, 모든 사람들이 그리고 그 자신이 스스로 자연스러움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 후 부터일 것이다. 그를 위해 울리는 것은 아닌데도, 이제 그는 1시간에 2번 울리는 종소리에 맞추어 긴장하고 이완하고 긴장하고 이완하고 . . . 뭐 이런 범 우주적인 반복의 운동을 자신의 숙명으로 받아들이며 잘 살고 있다. 모든 수업이 끝나 방과 후가 되면 사람들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고, 그 동물에 대한 관심도 사라져 버린다. 그래서 저녁 이후엔 그가 어떻게 사는지 아무도 모른다. 해가 다 진 저녁이 되고, . . . 밤이 되고, . . . 새벽이 오면, 자신이 새겨 놓은 무늬, 아름다운 반복의 무늬가 펼쳐진 넓은 광장에, 혼자 서 있거나 잠이 들었을 것이다.

Posted by huun

질투

monograph_column 2006/07/16 23:48

추상적인 것은 나를 고통스럽게 하거나 동요시키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내가 실제로 느끼거나 알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추상적인 것으로부터 벗어나려면, 고단한 노동과 인내와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와는 반대로 추상적인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은 또한 너무나도 쉬운 일이다. 그것을 그냥 생각 속에서 지워버리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잘 알고 있지 못하거나 느껴지지 않는 것은 별 어려움 없이 잊어버릴 수가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이미지는 그렇지가 못하다. 그것이 내 눈에 혹은 다른 나의 감각으로 밀고 들어와 나를 동요시키면, 나는 아무런 저항 없이 굴복해야만 한다. 가령, 사랑하는 사람이 내게 헤어지자고 말했다. 그런데 난 처음에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정작 내가 그 말을 이해했던 것은, 한참이 지난 후 길을 걷다가 사람들 틈에서 우연히 맡게 된, 그러나 그 사람 곁에 있었다면 늘 맡았을 어떤 냄새 때문이었다. 나는 두리번거리며 문득 어떤 절망적인 깨달음에 이른다. 우리가 어떤 것을 깨닫는 순간은 이렇게 무엇엔가 두리번거릴 때이다. . . .




<문예 노트>

Posted by huun

에너지를 수용할 그릇의 용적 때문이든, 아니면 그 밖의 다른 이유에서이든, 에너지의 증가가 특정한 한계(긴장)에 이르게 되면, 계속 증가하는 그 에너지의 처리와 소비에 관련된 두 가지 경제가 등장한다. (1) 과잉 에너지를 저장하거나 처리할 다른 신체나 장소를 물색하는 경우: 가령,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보자. 알베르트의 관점에서 볼 때, 열정이 너무 과도하게 된다면 죽음을 선택하겠다는 베르테르의 처리방식은, 남아도는 에너지의 포기에 불과한 것이다. 그는 이를 현실도피 혹은 비겁함이라고 단정한다. 그에 따르면, 이 열정이나 에너지는 계속 축적되거나 보존되어야만 한다. 산다는 것! 생활의 지속을 위해 우리는 계속해서 쌓아 놓고 조금씩 절약하며 사용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그 에너지를 담을 장소로서 새로운 다른 존재들이 필요해 진다. 로테, 가족, 동업자, 사업, . . . 이렇게 해서 알베르트에게 생활의 모든 측면은 소유의 문제로 귀결되며, 이것이 바로 그가 언제나 에너지의 영속성을 보장하는 것으로서, 제도의 언어, 계약의 언어, 권력의 언어를 통해 말을 하는 이유이다. (2) 과잉 에너지를 아무런 조건이나 유보 없이 낭비해 버리는 경우: 베르테르는 알베르트와의 자살에 관한 논쟁에서, 알베르트가 자살을 비겁함이라고 간주한 것에 대해, 이 낭비의 경제방식을 설명함으로써 응수한다. 베르테르의 요체는, 신체가 노쇠하거나 더 이상 어떠한 에너지를 변형하거나 수용할 수 없을 때 파괴되거나 죽듯이, 우리의 열정이 극단적인 상태에 이르러 더 이상 이 열정을 감당할 수 없을 때, 우리의 정신은 죽음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에 따르면, 사랑 때문에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에게 비겁자! 라고 비난을 하거나(알베르트가 그랬듯이), 시간이 해결해 줄거야! 라고 위로하는 일은 터무니없는 짓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비난과 위로는, 모든 기력을 소진하여 더 이상 자신을 유지할 수 없어 죽음에 직면한 노인에게, 비겁자! 라고 말하거나 혹은 시간이 해결해 줄 테니 그만 일어나시오! 라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점점 팽창하는 베르테르의 열정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초과 상태에 이르러, 결국 그는 이 경제의 극단적 형태인 육체의 파열을 선택한다: 죽음! 열정을 대기중에 흩뿌린다고나 할까? 이 방식에 따른다면 자살은 가장 급진적인, 절대적 자유이다.


에너지의 처리와 소비에 관한 두 체계가 있는데, “한편에는 부르주아의 포획경제가 있으며, 다른 한편에는 분산적이고 낭비하고 광란하는 변태적 경제가 있다”(Roland Barthes. A Lover's Discourse: Fragments. english trans by Richard Howard. New York, Hill and Wang, 1999. p.85). 또한 이 두 경제 체계는 각각 충만함과 아름다움에 대해 상반적인 해석을 내리는데, 한쪽은 아름다움을 죽음에 관계짓고, 다른 한 쪽은 그것을 소유에 관계짓는다. 그런데 이러한 상반된 입장은 아이러닉한 결과를 낳는다: 괴테가 베르테르를 통해 주장한 자살론이, 당시 젊은이들에게 유행이 되어(베르테리즘), 많은 희생자들을 낳게 한 원인이라고 영국의 한 주교로부터 비난받았을 때(심지어 연미복이나 자살의 유행은 19세기의 문학비평의 판도에 영향을 미쳤다), 괴테는 다음과 같은 말로 응수한다: “당신들의 경제 체제는 수천 수만의 희생자들을 필요로 하는데, 베르테르와 같은 젊은이 몇 명의 죽음쯤이야 무엇이 문제가 되겠는가?” 한편에는 죽음의 긍정이 있고(베르테르), 다른 한편에는 죽음의 부정이 있다(알베르트). 그런데 묘하게도 이 두 입장의 본질과 그 결과는 서로 반대가 되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문예 노트>

Posted by huun

사물을 이루고 있는 두 가지 질서에 대해 말하기 위해, 약간 단순하긴 하지만, 경험적으로 알기 쉽게 나무의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나무는 우리가 흔히 눈으로 보거나 손으로 만져보는 방식으로 확인 가능한 외형을 가지고 있습니다. 공간적인 외형을 취하고 있는 것이죠. 나뭇가지도 있고, 뿌리도 있고, 줄기, 몸통, . . . 이렇게 어떤 윤곽선을 가지고 있는 형태, 위치, 규모와 같은 공간적 위상을 가늠하면서 우리는 보통 나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나무를 이루고 있는 것은 우리가 감각적으로 식별 가능한 형태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나무의 형태 아래에는 보다 근본적인 물질을 이루고 있는 섬유질이 있습니다. 그러나 더 자세히 바라보면, 나무의 질료인 섬유질 역시 어떤 점에서는 또 하나의 공간적 외형을 가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수분이라고 하는 또 다른 질료가 있습니다. 이러한 위상을 계속 확장시켜보면, 수분은 또 무엇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무엇 무엇은 또 무엇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고, . . .분자, 원자, 양자, 쿼크, . . . 한이 없습니다.

이러한 생물학적 실재 외에도, 나무는 계절에 따라 그 색과 부피와 길이, . . 모든 것들이 변하고 있습니다. 바람에 흔들리므로 공간적으로 멈추어 있지도 않고, 풍화를 겪기 때문에 화학적으로 정지해 있지도 않고, 세월이 지나면서 외형이 변화할 뿐만 아니라, 그 질료들까지도 변질되어 전혀 새로운 질을 취하기도 하는 것이죠. 광합성도 합니다. 한없는 자연의 변화 속에서, 스스로 변하면서 살아가는 가운데, 나무를 이루는 모든 것들은 범우주적인 흐름과 함께 끊임없이 생성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외형을 이루고 있는 형상과, 그 형상의 실질적인 질료를 각각 현실태(actuality)와 잠재태(virtuality)라고 부릅니다. 이들은 서로가 서로를 감싸고 있고, 포함되어 있는 관계가 교차하고, 서로를 교환하면서, 다중적 총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가 나무를 말하거나 생각할 때에는 우리의 눈이나 촉각과 같은 (인간적)감각이 포착한 대상 혹은 특정한 윤곽선을 갖는 형태를 떠올리지만, 실재로서의 "나무"는 그것을 넘어서 있으며, 우리의 감각과 의식을 초과하고 있는 것이죠. 즉 나무는 과잉된 어떤 것입니다. 그것은 섬유만을 뜻하는 것도 아니고, 또한 수분은 더더욱 아니죠. 그 중 어느 하나를 결정하여 나무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나무의 실재는 바로 그 모든 것의 총체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무뿐만 아니라 모든 실재는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변화와 변질과 운동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입니다.

나무를 이렇게 생각하다보니, 사물의 질서가 두 개로 나뉘어져 있음을 알게 됩니다.

(1) 하나는 우리가 이름으로 부르는 것, 형상을 가지고 있는 것, 흐름이나 운동이 어떤 순간에 완결된 상태(culminating point, pose), 윤곽선이 뚜렷한 상태, 공간화 되어 특정한 위치를 취하고 있는 상태, 감각으로 식별 가능한 상태, 의식에 의해 구체화 된 상태, 현실화된 상태(the actual), . . . 가령, 사물들은 우리가 식별가능한 색이나 형태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붉은 사과, 푸른 하늘, 잿빛 바다, . . 등. 이들은 모두가 사물의 특정 상태(a state of being)를 이루고 있는 것이죠. 이 상태는 그 사물의 전면에서 대표를 이루고 있다고 하여 표상(representation)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고대인들은 이 특정 상태들 간의 이동과 이행을 운동, 흐름, 실재라고 생각했습니다. 단편적인 사진들의 연속이 한편의 움직이는 영상을 만들고 있는 것처럼.

(2) 사물의 또 다른 질서도 있어요. 그것은 바로 그 사물의 공간적 외형이나 형상의 이면에 실재하고 있는 흐름, 리듬, 운동, 변질과 같은 것이죠. 바로 위에서 설명했던 잠재적인 것(the virtual)이 바로 그것입니다. 가령, 공간적인 운동의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사자가 먹이를 구하기 위해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이리 저리 위치 이동을 합니다. 관찰 가능한 현실적인 운동을 하는 것이죠. 그런데 이러한 위치 이동의 심층에는 또 다른 형태의 운동이 있습니다. 바로 사자의 근육운동에서 비롯되는 몸의 변화, 허기 상태, 나아가 공간의 멀고 가까운 상태에 따라 그 동물 전체의 경험적 상태가 변화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잠재적이냐 하면, 아직 어떤 특정 상태로 현실화되어 드러나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섬유질에 대한 수분이 그렇듯이, 수분에 대한 분자가 그렇듯이, 엄연히 현실적인 상태의 뒤에 숨어서 실재하고 있는 것이고, 많든 적든 그 사자의 현실적 운동에 실질적 영향을 미치고 있기도 하고, 그 영향을 받기도 하는 겁니다. 잠재적인 것 역시 하나의 실재인 것이죠. 그리고 바로 이 두 질서의 총체를 우리는 "실재"(Reality)라고 부릅니다. 실재는 옛날 관념론자들이 말했던 식으로 모순이 없는 완전무결한 초월적 상태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삶 그 자체를 이루고 있는 모든 것의 총체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 사자뿐만 아니라, 그 사자를 둘러싼 모든 경험적 우주적 총체. 이것이 바로 실재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물리적, 생물학적, 역학적 실재 외에 또 다른 실재가 있어요. 나무는 우람해 보이기도 하고, 날씬해 보이기도 하고, 또 유구한 모습으로 믿음직스럽게 보이기도 합니다. 어떨 때 보면 슬퍼 보이기도 하죠. 우울해보이기도 하고, 발랄해 보이기도 하고, . . . 한이 없습니다. 이것은 무엇일까요? 단순히 그것을 바라보거나 경험하는 의식 주체의 주관적 상태일 뿐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주관적 상태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러한 것들도 역시 나무의 어떤 속성이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주체의 의식에 난데없이 그 속성들이 존재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나무가 소유하고 있는 어떤 느낌이고, 이 느낌의 속성은 나무의 물질적 상태와 질료들이 모여서 하나의 총체를 이루면서 효과를 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나무를 보며 아버지를 떠올리거나, 어머니를 떠올리거나, 세월 자체를 떠올리는 것은, 순전히 우리의 주관적 상태만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어떠어떠한 주관적 상태가 그 나무의 물질적 속성들이 내고 있는 잠재적 효과들과 공명(resonance)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공명 속에서 개별적인 존재자들은 하나의 단일한 흐름들 속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마음대로 나무의 흔들림을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그 흔들림 속에서 생겨나는 어떤 감정 상태나 상상을 만들어내려면, 그 나무가 바람에 의해 흔들릴 때 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죠. 바로 그 기다림이 우리의 주관적 상태가 결코 우리 자신만의 문제가 아님을 예증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감정 상태들은 나무의 물질적 조건들 속에 묶여 있는 것이긴 하지만, 그래서 물질적인 것들이 사라진다면, 그것들 역시 현실적으로 드러날 수 없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물질 자체는 아닙니다. 물질들 속에 깃들어 있는 어떤 잠재적인 것이죠. 이것은 드러날 수도 있고, 드러지 않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그것은 나무의 속성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것은 허상이 아닙니다. 잠재적인 것입니다. 내 손에 지금 볼펜 한 자루가 쥐어져 있어요. 다른 볼펜들과 모양이나 구성물이나 색, . . .등등, 물리적인 상태들은 다른 볼펜들과 별로 다를 것이 없는 평범한 볼펜입니다. 그런데, 이 볼펜을 쥐면 다른 볼펜에서는 느낄 수 없는 어떤 것이 있어요. 눈을 감고 다른 볼펜을 쥔다면, 그 느낌이 사라져 버리겠죠. 오래된 물건은 눈으로 보지 않고 만져만 보는 것으로도 금방 식별 가능한 경우를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물건만이 가지는 특별한 어떤 질료인 것이죠. 예술 작품으로서의 도자기가 그 좋은 예입니다. 도자기 애호가들이 도자기를 보며 즐거워하는 것은, 가격이나 역사가 아니라, 바로 그 도자기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느낌입니다. 가격이나 역사는 그 느낌이라고 하는 실체의 결과나 조건일 뿐이죠. 실체와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사람은 사회적 존재이기도 하고(어머니, 아버지, 간호사, 의사, 딸, 이웃 . . . 등), 생물학적 혹은 육체적 존재이기도 하고(여자, 인간, 동물, . . . DNA, 세포, 피부를 소유한), 물리적 존재(공간을 점유하면서 신체를 확장하는), 기하학적 존재(특정 공간 상태 속에서 좌표를 갖는)이기도 합니다. 철학적 존재(가치관, 윤리, 비젼, 미적 감각, 호감, 추상관념, 이데올로기를 소유한)이기도 하죠. 심지어는 꿈을 꾸는 존재, 거짓말하는 존재, . . . 한이 없습니다. 그리고 특정한 어떤 하나의 실재가 그녀 자신이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모두가 동등한 가치를 갖는 그녀의 실재인 것이죠. 우리는 그 잠재적인 실재를 어떤 필요에 따라, 특정한 기준과 체계를 가지고 그 실재를 분류하고(생물학적 분류, 기하학적 분류, 철학적 분류, . . .), 그렇게 분류된 현실태에 이름을 붙인다. 하나의 존재가 탄생하는 것이죠.

그러나 그 사람은 사회적 혹은 과학적 질서에만 속한 존재는 아닙니다. 그(녀)에게는 그 모든 것들이 최종적으로 드러나는 실재, 즉 그녀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것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고유한 슬픔, 온화함, 무게(물리적인 것이 아닌), 다정함, 성마름, 열정, 질투, 날카로움, . . . 또 그 모든 것의 총체로서의 그 사람! . . . 슬픔이나 온화함이라고 해서, 일반화된 슬픔이나 온화함이 아니라, 그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슬픔과 온화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겪어본 사람만이 알고 있는, . . . 동물적 기호(sign) 같은. 동물들은 아마도 이 기호들로 소통하지 않을까 싶네요. 그것은 물질과 육체 속에 담겨있고, 물질과 함께 존재하고 있고, 물질들 사이에서, 물질들의 배열과 관계 방식에 따라 전혀 다른 효과를 보이긴 하지만, 절대로 물질이나 육체 자체는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결코 사회도 아닙니다. 과학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 사람의 물질이나 육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 고유의 존재를 부여해주는 서명(signature)이라 할까요? 그것은 육체를 넘어서 있고, 육체가 사라져도 남아있는 그 무엇이며, 어쩌다가 어떤 우연적인 만남이나 일치에 의해, 시간의 흐름 속에서 드러나는 그 존재의 본질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진정한 것(the real)이라고 부릅니다. 이 진정한 것은 윤곽선이나 외형처럼, 다른 존재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물이나 사람 자신 안에 깃들어 있고, 그 스스로 만들어지는 것이죠. 그 볼펜에서 내가 느꼈던 진정한 것뿐만 아니라, 영철만이 가지고 있는 진정한 것이 있으며, 영희만의 진정한 것이 있고, 모든 사람들이 그 자신만의 고유한 진정함이 있습니다(자본주의가 욕을 먹는 이유가 바로 이 진정함을 공간적이고 양(量)적인 가치들로 난도질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요?). 그 육체와 사회와 물리적 세계를 넘어서는 잠재적 영혼이라고나 할까요? 이것은 허상이 아니라, 존재가 가지고 있는 (시간속의)최종적인 본질입니다. 기억의 총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기억은 허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와는 반대로, 어떤 사물을 그것이게끔 해준다. 기억이 아니라면, 내 앞에 펼쳐진 이 모든 주변의 사물들이 그냥 순간의 점들로 흩어져버릴 것이고, 우리의 의식은 영원한 변화와 흐름의 급류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매순간 멀미를 느끼며 살아야 할 것이다. 기억은 사물들을 지속하게 한다. 그래서 그 사물을 시간 속에서 그 자신이게끔 만들어 준다. 허상이 아니라, 오히려 존재를 확고하게 만드는 것이다. 인간만의 특이한 기억이 있긴 하지만, 기억은 인간의 전유물은 아니다. 또 기억은 인간적 의식의 결과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우리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에는 의식을 벗어난 몸과 사물들 속에 깃든 기억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억은 심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인 것이죠. 기억은 심리를 넘어서 있고, 오히려 그것을 파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매우 중요한 사실입니다).

어쨌든 그 진정한 것은 순간적인 것도 아니고, 공간적인 것도 아니고, 육체적인 것도 아니고, 오로지 시간을 통해서만, 시간에 의해서만 완성됩니다(여기서 말하는 시간은 과학적 시간, 즉 단위로 쪼개어 양적인 것들의 연속을 가정한 수학적 시간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지속하고 있는 우리의 경험 자체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주 오랜 시간이 아니면 결코 드러나지 않는 최종적인 본질 같은 것이라 할까요? 본질은 언제나 맨 나중에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오랫동안 지내온 사람에게서만 가지게 되는 진정함이 있습니다. 나의 오래된 친구의 눈 속에만 깃들어 있는 나의 어린 시절 같은. 이력서나, 건강 진단서나, 외모나, 한 두 마디의 어설픈 사회적 표현과 같은 순간적인 것들 속에서는 담아낼 수 없는. . . . 그렇기 때문에, 가령, 진정한 인간관계는 도덕과 예절의 문제가 아니라 예술의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예술이 추구하고 있고, 남기고 싶어 하는 것이 바로 그 진정한 것이니까요. 한폭의 그림은 형상이나 표상을 남긴 것이 아닙니다. 육체를 남긴 것도 아니고, 과학적 정보를 남긴 것도 아니고, 한 사회의 역사를 남긴 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진정한 것! 그것을 남긴 것입니다. 만일에 우리가 살아가면서, 물건이든, 동물이든, 사람이든, 혹은 그 무엇이든, 저 진정한 것(the real thing)을 느낀다면, 우리는 그 대상의 최종적 본질, 즉 실재에 직접 위치한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추상적인 얘기가 아니라, 가장 경험적인 얘기입니다.

이렇게 해서 경험하는 시간만이 또한 유일하게 단일한 시간이 되겠죠. 할수만 있다면, 공동체라는 이름을 거기에 붙여도 되지 않을까 싶네요. 가령, 예술의 언어인 은유의 예를 들어보죠. "나무는 세월이다"라는 은유를 보면, 나무라고 하는 물질적 실체와 세월이라고 하는 개념적 추상이 서로 공명하고 있습니다. 나무의 어떤 본질과 세월의 어떤 본질이 드러난 에피파니(epiphany)의 순간 같은 것이죠. 어떤 본질? 가령, 유구함이라든가, 막대함이라든가, 숭고함이라든가, . . . 예술의 언어는 과학이나 법의 언어처럼 사물이 현실적으로 드러난 순간적 상태를 표현하지 않습니다. 잠재적인 것, 즉 그 사물 고유의 진정함(the real)을 표현하는 겁니다. 공간과 수(number)의 언어인 과학의 언어가 그 사람의 다정함을 말해주겠습니까? 재판장에서 범람하는 법의 언어가 과연 저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당신의 아들의 상냥함을 판단해 주겠습니까? 법의 언어는 결과의 언어일 뿐인데 말입니다. . . . 김우창 선생님은 "시가 가장 객관적이다"라고 말씀하셨는데, 바로 이런 뜻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나에 관한 어떠한 서류도 내게는 너무 크거나 너무 작은 옷이어서, 오히려 나에 관한 시 한편이 내 몸에 가장 잘 맞는 옷이라는 것이죠. 과학이 진정한 사회를 만들지 않습니다. 법은 더더욱 아닙니다(그렇다고해서, 과학과 법을 송두리채 폄하 하거나 거부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관계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것이죠). 오로지 예술만이 진정한 사회를 만듭니다. 왜냐하면, . . . 오래된 시간을 통해 드러난 그 유구함이나 숭고함은 나무의 속성이기도 하고, 세월의 속성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것을 표현하고 있는 우리 자신의 내적인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세 흐름이 공명하는 가운데, 실재의 단일한 시간을 획득한 것이죠. 우리가 죽을때 까지 찾아나서야 할, . . . 진정한 공동체의 형성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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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횡설수설하는 말을 믿지 않을 것이다. 시를 운동경기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면, 모든 글의 제목들을 주름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단어가 변태적이라고, 혹은 문장들이 미쳤다고 말할 수가 있을까? 이러한 말들을 믿지 않는다면, 도대체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말 그 자체일까? 문법일까? 약속? 규칙? 그렇다면 단어들의 호응하는 관계가 일탈적이고 일그러진 모든 말들은 믿겨지기 위해 우리의 경험 내부로, 마무리가 잘 된 연결 관계들로 되돌아와야 할 것이다. 이때에 우리는 삶을 이해하는 두 가지 기로에서 방황한다. 우리의 삶에서 추방되어야 할 언어가 돌연히 난입하고, 우리 자신이 이미 이 언어에 매우 깊숙이 연루되어 있다는 생각에 다다르면, 우리는 미치기 시작한다. 그것은 추방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미 나는 여기에 너무나 깊이 빠져있다! 내가 미치기 시작하면 사물들은 이리저리 갈라지고 흩어지고 조각나기 시작한다. 이렇게 해서 아포리즘이 써진다.


니체(F. Nietzsche)의 어수선한 아포리즘을 읽다보면, 사물과 현상들이 무수하게 갈라지는 것을 보게 된다. 은유적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다. 그는 대상의 갈라지는 선과 에피파니의 빛을 따라 이리저리 자리를 옮기면서, 어떠한 흠집도 내지 않기 위해, 그것의 결을 따라 매우 조심스럽게 표면을 벗겨내고 있는 것 같다. 핵심을 발견하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다시 증축하기 위해서인가? 근대 수학은 아무런 흠집을 내지 않고도 존재를 고스란히 가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방법은 너무나도 거칠다. 라이프니츠나 뉴턴보다도 더 섬세한 미분이 필요하지 않을까? 니체가 시도한 작업들은 수학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너무도 생소할지도 모른다. 그의 미분은 우선적으로 표면의 결을 발견하면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저마다 자신의 표면에 포함하고 있는 시간의 결 혹은 주름들. 그래서 잘려져 나간 것들에 익숙하지 않고, 마침표가 찍히지 않은 불완전한 것들에 생경한 우리에게, 사물은 한없이 갈라지고 부서지고 파편들이 된다는 것을 가르치면서도, 자신이 다루는 어떠한 것도 손상시키지 않는다. 쌓아놓은 모래성이 한꺼번에 무너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모래알을 하나 씩 하나 씩 떼어내듯, 갈라지는 선과 빛을 따라 사물의 표면들을 벗겨낸다. 시간의 무게에 짓눌려 잘려나간 고대 화석 앞에 선 한 고고학자의 흥분과 섬세함의 십분의 일이라도 가질 수만 있다면! 그러면 더 이상 존재는 잘리기 위해 이리저리 놓이고 거칠게 다루어질 수가 없을 것이다. 움직여야 할 것은 대상이 아니라 바로 나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베르테르가 사랑한 로테는 움직이지 않는다. 움직이는 것은 베르테르이다. 로테는 말해지지 않은, 아직 드러나지 않은 진리와도 같다.


나는 우선 내 앞에 마주한 대상이 포함하고 있는 무수하고도 무한한 속성들을 발견함으로써 사랑에 빠진다. 존재에의 긍정이란 한마디로 말해 무한한 속성의 발견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속성의 무한함은 연인에게 속한 무수한 속성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그 보다는 우선 나의 속성을 촉발케 하는 연인의 속성을 다른 어떤 것으로도 교환하거나 치환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심지어 그(녀)에게만 속하는 그 단성성(singularity)은 어떠한 단어로도 바꿀 수가 없다. 존재에 깃든 단성성이란 원자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것을 넘어서 있거나 언제나 일탈한다. 에피쿠로스는 이를 증명하기 위해 클리나멘(clinamen)이라는 존재를 고안해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오로지 일반적인 의미에 불과한 하나의 단어에, 그(녀)의 충성스러운 대변인이 되어 서명이라도 하듯, 소유를 암시하는 수식어를 하나 첨가할 수 있을 뿐이다: “그(녀)의 미소! 그(녀)의 향기! 그(녀)의 순진함! . . . ”. 좀더 나아가 나의 격앙된 감정이 들킬 만큼 나의 어법이 서툴러지거나 유치해지면, 내 언어는 더 상투적이고 진부해져서 이렇게 말하기 시작한다. “그(녀)의 따뜻한 미소! 그(녀)의 따뜻하고도 감미로운 향기! 그(녀)의 따뜻하고도 감미롭고 사랑스러운 순진함! . . .”. 일이 이 지경이 되고 나면 나는 나 자신도 알 수 없는 이러 저러한 감각 이미지들을 아무 곳에나 제 멋대로 결합시키기까지 한다. 그러나 어떠한 짓도 실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를 파고드는(그래서 내가 굴복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 이미지는 치환이나 재현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녀)를 긍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결국 나는 이렇게 벌려놓은 모든 것들을 한꺼번에 표현함으로써 끝마무리를 지을 수 있다고 스스로 위로하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이라는 모호한 후렴구를 내뱉으며 잠이 들기 시작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긍정의 과정은 사랑 받는 연인의 본질의 발견 뿐 아니라 나 자신의 본질의 발견에서 비롯된다. 속성은 사랑의 대상에 속한 것임에도, 언제나 사랑하는 주체의 영역에서 발생한다. 이런 의미에서 사랑은 반드시 능동을 포함하고 있다. 긍정은 능동을 지시하고, 능동은 긍정을 생산한다. 이것이 바로 사랑으로부터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유일한 윤리학이다. 베르테르가 로테에게 그랬듯이,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연인을 함부로 다루지 않기 위해 스스로 움직여야만 한다. 그 자신이 다가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이는 사랑에 빠진 사람이 피할 수 없는 사랑의 명제이다. (무한한 공간에서 움직이고 있는 두 사람이 있다. 이 두 사람의 수동과 능동에 의해 주파수가 맞았다. 사랑이 기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말이다). 내 안에서 발산하는 능동은 스스로 형상이 되거나 스스로를 재현한다. 때로는 대상의 가치에 대해 채울 수 없는 의혹을 한껏 품다가 가냘픈 충동을 느껴 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혹은 사라진느(Sarrasine)처럼 사랑하는 여인을 상상하며 수도승의 엄격함으로 조각을 하기 시작한다. 처음부터 베르테르는 자신의 편지를 로테에게 보낼 의도가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은 이런 식으로 거울단계에 머무르고 싶어 하거나 우상숭배자가 되기도 하며(사랑이 좌절되었을 때, 사라진느는 조각상을 깨는 것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가장 소극적인 나르시시즘에 빠지거나, 간혹 물신주의자가 된다.


어쨌든 이들은 모두가 하나의 무늬를 짜 놓고 싶어 하며, 이것이 바로 사랑에 빠진 연인으로 하여금 언제나 글을 쓰도록 하는 동인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말하자면 글을 쓰는 사람이다. 마찬가지로 사랑에 빠지면 시를 쓰기 시작한다. 이들은 모두가 문형 제작자이다. 또한 긍정과 능동을 운용하여 문형을 제작하는 이들은 모두가 윤리학자이다.

<문예노트>
Posted by huun

글쓰기의 두 가지 동인을 생각해보자. 1) 실재하는 것의 완전한 소유를 위해 글이 짜여진다. 재현과 모사의 행위는 내가 손을 뻗쳐 닿을 수 있도록 대상을 실제로 여기에 다시 위치시키려는 의도에서 출발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기쁨의 대상이므로 반복하고 재생산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파시즘의 전(前) 단계를 취한다. 이때에 소유의 과정으로서 글쓰기는 동일한 구절들과 표현들로 반복되고 과장되어야 한다. 이렇게 강박 신경증에 사로잡힌 나는 표현의 수사적인 면모를 거부하고, 심지어는 수사 자체를 혐오한다. 문학적 사실주의는 사유의 유물론적 확장의 결과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연인을 실재로 만들어내고자 한다. 그러나 묘하게도 이때에 사랑 받는 연인은 하나의 조형적 형상을 띠며 정지해 있다. 베르테르의 문형에 의해 재현된 로테는 일종의 조형미를 갖춘 조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라진느가 재현한 잠비넬라(Zambinella)의 조각처럼, 로테는 베르테르의 반복적 문형 속에서 핏기 없는 조각이 되어 버린다(문형의 첫 번째 아이러니). 2) 문형의 첫 번째 아이러니의 결과로서, 이제는 소유의 좌절과 그 보상을 위해 새로운 형태의 글이 짜인다. 글쓰기는 이제 더 이상 소유의 망상으로 추동된 우상숭배가 아니라 기억의 판타지로 채색된 물신주의의 성향을 띤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모든 관능적 욕망에 제동을 걸고, 신체적 절제를 통해 심미적 취향에 빠져 버린다. 나는 이때에 모든 대상을 살아있는 것으로 복원시키기 위해 특수한 이미지를 찾아내서 거기에 색을 입히기 시작한다. 조각난 것들이 유기적 전체로 보이기 위해서는, 마치 부패된 시신에 대한 혐오감을 피하기 위해 마련된 화장처럼, 과도한 허구의 질서로 공백들을 채우는 것이다(문형의 두 번째 아이러니). 베르테르가 그랬듯이, 손수건에 관한 수많은 요설(饒舌)들을 보면, 손수건 문학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고려해봐야 할 판이다.

<문예 노트>

Posted by huun

사회

note_fragmentary_aporism 2006/07/14 14:03

아마도 아담과 이브로부터 시작된 자의식은 인간이 자기 자신의 본질을 변형시킬 수 있게 한 최초의 과오(?)였을 것이다. 부끄러움을 느끼기 시작하면 개인은 자신에게 속한 본성을 다른 본질에 속하는 이미지로 변질시키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것은 정확히 자신의 본성을 표상적 대리물로 치환하는 과정을 따른다. 이 대리물은 다른 개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일종의 기호가 되어 특정한 하나의 사회를 이루며 교환된다. 부끄러움은 이제 두려움과 불안이 되고, 그는 사회적 놀이에 예속되어 자신에 속한 모든 본성적인 것을 이 교환에 맡겨 버린다. 그런 의미에서 교환은 위험하지가 않다. 그것은 어떤 경우에도 되돌아오는 놀이이며, 아무도 거기서 손실에 대한 책임이나 위험을 발견하지 못한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어떻게 해서 우리는 어떠한 위험도 무릅쓰지 않고 교환을 할 수 있는 것일까? 타자의 시선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일단 다른 사람의 눈을 통해 자기 자신 뿐 아니라 모든 사물을 보게 되면, 묵묵히 규칙을 따름으로써 들키지 않고, 자신이 속한 한 사회가 마련해 놓은 의식(儀式)에 참여하기 시작한다. 떼지어 사는 사교적인 무리들은 이와 같이 집단적 환영(幻影)에 사로잡힌다. 이들에게 관건은 살아남는 것이 아닐까?

<문예 노트>

Posted by huun


― 글, 시, 비유, . . . 이들을 사랑에 빠진 자의 언어가 짜놓은 무늬라고 정의해보자. 그리고 그들을 통틀어서 문형(文形, figure)이라고 불러보자.


― 사랑에 빠진 사람의 언어에는 언제나 “나”가 등장한다. "나", "내가" 화자가 됨으로써, 형태상 전면에 부각된 나! 그러나 사실상 나는 가장 깊숙이 그러나 가장 가까이 숨어버린다. 어째서 '내'가 화자가 되어야 하는가? 사랑의 이야기 속에는 왜 내가 복귀되어야 할까? 가장 구체적인 존재로서 나 만큼 사랑을 말할 수 있는 주체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사랑에 빠진 모든 언어의 근본적 시점은 일인칭 화자이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 사랑에 빠진 나는 내 앞의 모든 것들을 극화(劇化, dramatization)하기 시작한다. 또 그래야만 가장 잘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주인공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혹은 그녀와 관계하는 다른 많은 인물들,
이들(간)의 감정들, 몸짓들, . . . 아주 복잡한 실재가 가지런히 정돈되기 시작한다. 이야기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 모든 감정과 인상과 몸짓들을 표현할 수 있을까? 주인공이 없이 어떻게 이 모든 이야기들을 이끌어 나갈까? 이 지루한 시간을 구원해주는 것은 오로지 이야기 뿐. 또 이야기는 이 지루한 시간 자체를 고스란히 느끼게 해줄 것이다. 나는 맨 앞에서 말하는 화자이며 동시에 어디에서든 현존하는 주인공이다. 그런데 극화하는 화자로서, 그리고 극화된 주인공으로서 나는, 오히려 그것 때문에 가장 깊숙이 숨지 않을 수 없다. 모든 것들이 살아 있으니, 나 역시 움직이지 않을 수 없지 않은가! 도대체 내가 있는 곳은 정확히 어디인가? 사랑에 빠진 사람! 글을 쓰는 사람! 이들은 모두가 길을 잃은 자들이다.


― 사랑에 빠진 사람은 감동하거나 좌절할 때 언어를 찾는다. 갑자기 그의 연상에 떠올려진 연인의 미소 때문에, 아니면 더 이상 몸속에서 팽창하고 있는 기운을 가눌 수가 없어서, 그래서 또한 이리저리 이 방 저 방을 배회하다가, . . . 로테를 사랑한 베르테르를 보라! 갑작스런 언어의 분출은 그를 수다쟁이로 만든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언어로의 분출이라고 말해야 할까? 무엇인가 밖으로 빠져나가거나, 아니면 무엇인가 갑자기 혹은 우연히 안으로 난입해버린 것이다. 베르테르의 수많은 편지들! 문형에 관한 모든 문제들은 여기서 시작된다.


― 문형은 산채로 포착된, 생포된 말들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으며, 그 무엇으로 귀속되지도 않는다. 다만 살짝 숨어서 단 한번만 엿 볼 수 있을 뿐. 문형을 한 폭의 이미지로 말해야 한다면? 부서진 몸짓들! 숨어 엿보기 때문에, 그리고 아주 가까이서 보기 때문에, 모든 것은 부서진 채로만 보인다. 가령, 누군가 숨어서 베르테르의 좁다란 방을 엿본다고 해보자. 이리저리 방황하는 몸짓을. 혹은 그의 편지를 훔쳐본다고 해보자. 그 횡설수설하는 말들을. 꿈틀거리는 존재는 한꺼번에 너무나 많은 것이 이리저리 너저분하게 어질러져 있다. 그래서인가? 생명 앞에 선 지성은 한 없이 부분에만 고착한다. 그렇기 때문에, 지성을 소유한 존재는, 사랑에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를 엿보는 자 역시, 밀도가 낮은 그물망처럼 아주 많은 것들을 놓쳐 버린다. 그는 오로지 몇 안 되는 잔상들만을 소유한 채, 그들 사이에 가능한 빈약한 조합에 모든 것을 맡겨 버린다. 그런데도 즐거워하고 있다. 어쨌든 꿈틀거리고 있으니 말이다.


― 문형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혹은 문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랑의 감정이 있어야 한다. 문형은 누구나 소유하거나 공유하는 담론이 아니라, 오로지 사랑에 빠진 사람에 의해 만들어지고 이해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그 목적은 소통이 아니다. 도대체 누구와 소통을 한단 말인가? 특별한 섬광을 발견하거나 경험한다면, 그는 곧 바로 이 무형의 섬광에 특정한 모양새를 갖춘 육체를 부여한다. 기쁨의 강도에 따라, 그 부름에 따라 반복하고 싶기 때문이다. 문형은 반복의 언어이지, 소통의 언어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을 혐오하기까지 한다.


― 세련된 문화의 주체, 즉 일반인들의 관점에서 볼 때, 문형은 반복적 패턴과 지루한 코드들로 이루어진 것처럼 보인다. 중세 기사 로맨스나 궁정 연애담 혹은 여인의 이야기들의 일정한 패턴이 그 좋은 예일 것이다. 이는 용질(溶質)이 형태를 갖추기 위해 단단해지는 주조 과정에서는 불가피한 일일 것이다. 과잉된 촉발로부터 비롯된 감정이 형체를 갖고 단단해지기 위해서는 언어의 허용된 경계를 넘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문형은 언제나 낡은 코드의 끝자락에서 서성이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다. 이 끄트머리에서 그는 더 이상 나아갈 수가 없다. 이리저리 구석들을 탐색하지만 곧 좌절하면서, 끊임없이 입에서 맴도는 같은 말들의 참담한 반복만이 있을 뿐이다. 유치하기 짝이 없는 연속되는 감탄사들! 그 반복되는 역겨운 말들! 그 낭만주의! 오! 사랑! 이걸 어쩌지! 말할 수 없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일반인들이 보기에 그것은 마치 말더듬이의 웅웅거리는 소리와 흡사하다. 마치 잠자(Gregor Samsa)나 화부의 울부짖음이나, 이름 모를 동물소리. 반복. 과잉. 말더듬. . . . 이들은 모두 문화가 우리에게 금지하거나, 우리로 하여금 지양하도록 권고하는 있는 변태성이다. 걷잡을 수 없는 이 변태성의 분출을 막기 위해 개인과 사회는 대단히 중화된 여러 가지 형태들을 고안해 낸다. 허가받은 변태성! 결혼! 잘 다듬어진 욕망! 이 변태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모르긴 몰라도 동일한 위험의 강도(强度)에 자신을 내맡기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래서 사랑의 감정이 없는 존재는 문형을 이해할 수가 없다. 문형이란 문화적 제한구역의 경계 주위에서 배회하는 연인이 남겨놓은 자취들이다. 연인은 그 제한구역을 넘어서지 못한 채 그 너머를 바라보고 갈망한다. 그러나 한편, 이 제한된 구역의 경계 근처에 가보지 못한다면,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도 없거니와, 알고 싶어 하지도 않을 것이다. 다만 그것이 신비체험을 경험한 이방인의 헛소리일 뿐이라고 단정해 버리고,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방으로 되돌아가 버리기 십상이다.

<문예 노트>

Posted by huun

인사말

분류없음 2006/07/11 00:40

여기에 기록된 것들은 책을 읽다가 남기고 싶은 구절도 있고, 갑자기 떠오르는 아포리즘도 있고, 집중을 필요로 하는 분석도 있고, 차분하게 적어내린 단상도 있고, 두서 없이 끄적인 노트와 메모 등이 있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이들은 내 외로움을 잊게해 줄 유일한 수단이 되어버렸다. 또 당신들을 만나게 해 줄 단 하나의 통로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옥이 된다 해도 내 책임은 아니다. 어떤 악마의 짓이겠지!


이곳이 작은 섬광이 될 수만 있다면, 잠시나마 당신의 눈을 부시게 할 수만 있다면 바랄 것이 없겠다.


<문예노트>
Posted by hu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