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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ugee from Gondan Mali, 1985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본 것일까?

저 양 미간에 어린 슬픔에 견줄 만한 그 무엇이 이 세상에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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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urma-Rharous Mali, 1985

일그러뜨리고 있는 늙은 손,

그 패인 주름들을 비집고,

낡은 육신으로부터 빠져 나오기 위해 쥐어짜는 영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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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porting bags of dirt in the Serra Pelada gold mine Brazil, 1986

아마도 나이키가 만들고 베네통이 광고한 운동화를 신고 있을 저 청년으로 하여금,

고대적인 속박의 포즈를 취하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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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ra Pelada gold mine Brazil, 1986

저 자유로운 영혼들을 묶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데,

저렇게 일관된 상승운동을 지속시키는 것은 또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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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ll view of the Serra Pelada gold mine Brazil, 1986

그것은 어떤 무늬를 만들어내고 있고,

멀리서 보면, 마치 마스게임처럼 아름답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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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ugees from the Bihac pocket waiting for delivery of the letters from relatives and friends who stayed behind; mail is delivered once a week by the International Committee of the Red Cross. Batnoga-Krajina (Croatian territory occupied by the Serbs). 1994

그래도 편지가 오지 않는다면, 그들이 기다리는 그 무엇도 오지 않는다면,

저 응시하는 소년의 눈이 암시하듯, 그들은 자신들의 앞에 둘러쳐진 사슬을 끊거나 비집고,

그 너머로 흘러넘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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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ndless peasants attend a political meeting organized by the MST, the Landless Movement, In preparation for a land occupation. State of Parana, Brazil. 1996.

아이들은 언제나 정면을 주시한다.

그들만이 카메라 이편으로, 텍스트 바깥으로 나갈 수 있어 보인다.

저 순진하기 짝이없어 보이는 여인이 든 손! 무엇을 위해서일까?

그 쪽 말고, 아이를 따라 이 쪽을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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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ter months of occupation of the Cuiaba plantation by landless families, the peasants celebrate the official expropriation. State of Sergipe, Brazil. 1996.


만장일치, . . . 다수결, . . . 그것은 인간의 최후의 비극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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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ross the river looms the modern financial district of Pudong, with the Oriental Pearl TV Tower in the foreground and the Grand Hyatt Hotel to the right. Shanghai, China. 1998.

분쟁과 전쟁 지역 만큼이나, 도시적인 만장일치가 있다.

고요한 기하학적 만장일치라고나 할까?

그것은 가령, 프리츠 랑(Fritz Lang)이 <Metropolis>(1927)의 첫 시퀀스에서 보여주었던 것과

정확히 같은 의미에서의 기하학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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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sants who used to sit on the window ledges of their rural homes continue to do so in crowded apartment buildings. Ho Chi Minh City, Vietnam. 1995.

체계, 효율, . . . 현대의 도덕이 만들어 놓은 무늬들.

그 불특정성 속에서 버림받은 개인들.

현대인이란 말하자면 도회지로 가출한 시골소년 같은 것이다.

또, 현대인의 정서란 바로 그 소년의 배회와 울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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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bies playing on the roof of a FEBEM (foundation for Child Welfare) center in the Pacaembu district. Some 430 children live here, 35% of whom were abandoned on the streets, the others delivered at the center by parents no longer able to care for them. Sao Paulo, Brazil. 1996.

거리에 팽개쳐져 버림받은 아이들, . . . 절망과 좌절로 출발하는.

야들거리는 이들의 몸뚱아리를 품기라도 하듯,

저 뒷편에는 무지막지한 콘크리트 기하학이 가슴을 열고 이들을 감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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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struction of the Rasuna complex of apartment and office buildings in the commercial and financial district of Kuningan. Jakarta, Indonesia. 1996

비록 철근을 딛고 솟아오르긴 했지만,

어쨌든 태양이 가려진 그늘을 벗어나 위로 올라갔던 것이다.

살가도의 작품은 우리에게 차원을 좀 옮겨볼 것을,

개미처럼 이차원에만 머물지 말 것을,

새로운 좌표로 치솟을 것을 독려한다.

저 무늬들을 좀 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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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mp of "Granja Agricola", a squatters settlement where African migrants await permission to travel to the Spanish mainland, Melilla. Spanish enclave on the North African coast. 1997.

이상한 것은,

절망은 어째서 모든 존재들을 기어 들어가게 하는가이다.

절망의 반대편에 있는 것은 희망이 아니라,

바로 절망이다.

이것이 바로 절망의 블랙홀!


사진출처: http://windshoes.new21.org/gallery-salgado.htm


Posted by huun

다들 아는 얘기지만 한번 더 상기하는 의미에서,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맑스(Karl Marx)가 말했던 노동 소외를 간단히 요약해보자. 그것은 노동을 하는 사람이 자신의 노동을 즐겁게 여기지 않는 상태일 것이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일하는 사람이 자신의 일을 고역으로 느낀다면, 그 일을 그만두는 것이 정답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그럴 수가 없다. 굶어죽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길, 자본주의라는 정치-경제 체제가 여차저차 하여 사람들로부터 모든 생산수단(토지, 기계, 건물, 원료 등)을 빼앗고, 오로지 노동력으로만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게끔 했기 때문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굶어죽지 않기 위해 억지로 공장에 들어가 일을 하면서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맑스주의자들의 구호들 속에 항상 등장하는 '빼앗긴 노동', '강요된 노동', '소외된 노동'은 바로 이런 의미이다.

맑스가 쓴 <자본>(Das Kapital)이라는 책에 그 좋은 예가 하나 있다. 19세기에 한 영국 자본가가 공장을 세우기 위해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 그리고 이런 저런 생산수단을 싣고 오스트레일리아의 스완강 지역으로 갔다. 그러나 공장을 세우고 나니 아무도 일하러 나오지 않았다. 당시의 그 지역은 주인 없는 땅이었기 때문에 누구든지 땅을 차지해서 자신만의 경제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공장이 생산을 하려면 즉 자본주의가 가동되려면, 저 사람들로부터 땅이나 일체의 생산수단을 빼앗아, 그들이 공장에 들어와 일하지 않으면 안 되는 환경을 만들어야만 한다. 실제로 영국에서는 중세때부터 수세기에 걸쳐 토지를 합병하고, 농지를 전환하고, 사유화하는 등의 운동이 있었는데, 이를 인클로져(Enclosure movement)라고 한다. 그 과정에서 쫓겨나 갈곳이 없었던 수많은 농민들이 대도시로 몰려들어 공장노동자를 이루게 되었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초석이 되었던 것이다. 산업 경제 개발에 박차를 가하던 6, 70년대의 한국도 이러했을 것이다. 지금의 우리가 그런 일을 직접 경험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자본의 품 안에서 살고 있으니, 자신도 모르게 이미 무엇인가를 빼앗긴 결과 속에서 살고 있는 셈인가?


강요된 일은 우리의 삶을 여러가지 면에서 비참하게 만든다. 그 모든 비참함의 목록을 전부 나열할 수는 없다. 다만, 우리가 쉽게 체감하는 비참함을 단 한가지만 말한다면, 우리는 일하지 않을때 가장 행복해진다는 점이 아닐까? 솔직히 말해 평생 일 안 하고 살았으면 좋겠다. 가장 기다려지는 토요일 오후! 지금은 좀 나아져서 금요일 오후! (엄밀히 말해 나아진 것도 아니다. 휴일을 잘 보내려면 돈이 필요하다) 점점 배가 아파오는 일요일 저녁! 월요병! 실제로 월요일만 되면 배가 아파오는 증후군이 있을 정도이다. 일 자체에서 오는 고역도 있지만, 이제는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불쾌함도 역시 우리의 배를 아파오게 하는 요인이다. 그들은 동료이기 보다는 잠재적 적(敵)이라고 해야 더 옳을 것이다. 노동과 관련하여 겪고 있는 이 모든 불쾌함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월요일만 되면 어김없이 그 현장들 속으로 뛰어든다. 그리고는 불쾌함의 원인이 적응을 못하는 자신의 성격탓이라거나, 사회화가 덜 된 탓이라거나, 등등의 이름모를 죄의식을 가지며, "인내가 부족해!"라고 자위하면서 조용히 자신의 자리에 앉는다. 흔히 인간관계가 좋다고 알려진 사람들은 잘 참는 사람들이다. 기독교에서는 노동이란 낙원에서 추방당한 벌, 즉 인간 자신의 죄값이라고 가르친다. 그래서 삶 자체는 노동의 과정이고, 노동이란 으례 고역이며, 참아야 할 어떤 것이다. 그래서 일주일 내내 힘든 고역을 참고 견뎌 내었다. 그런데 단 하루 좀 편하게 있어볼까 했더니, 별안간 '우리의 일요일'을 '주일'이라고 부르며 교회에 나가 기도를 드리란다. 인생 자체가 무슨 극기(克己) 훈련장 같다.

맑스는 인간의 본질을 노동이라고 보았다. 인간은 일하는 존재이며, 일하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의미했던 노동이란 아담 스미스(Adam Smith)와 같은 고전 경제학자들이 말했던, 또 대부분의 우리가 배워왔던 의미에서의 노동은 아니었다. 그에게 있어 노동이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생산하면서 삶의 충만을 경험하고, 일 그 자체가 주는 행복을 만끽할 수 있는 일이지, 더 많은 임금과 더 많은 댓가를 받음으로써 얻게되는 승리감 따위로 유지되는 그런 저질적 노동이 아니었다. 노동의 의미가 다른 것이다. 타인으로부터 댓가를 바라는 일! 그리하여 지겹고 힘들지만 어쩔 수 없이 하는 일! 눈치보며 하는 일! 잔머리를 굴리는 일! 그 자체 경쟁이고 싸우는 일! . . . 이것이 우리를 노예 상태로 만드는 일이고, 우리의 몸과 마음을 속박하는 쇠사슬이다. 우리가 풀어헤치고 벗어나야 할 것은 궁핍이 아니다. 바로 쇠사슬 그 자체로서의 노동이다. 그런 의미에서 임금투쟁은 근본적이지 못하다. 심지어 그것은 쇠사슬에 흉측한 흠집들만을 냄으로써, 그에 묶인 우리의 상처를 더 아프게 할 수가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보다 많은 월급이 아니라 바로 즐거운 월요일이다. 이것이 바로 맑스가 궁극적으로 원했던 것이 아닐까? 예술가들이 밥을 굶으며 궁핍에 허덕이면서도 자신의 작업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 맛을 본 것이다.


노동을 강요한 것은 삶 자체가 아니다. 여차저차 하여 우리 자신이 만들어낸 체계, 쇠사슬로 발목을 묶었던 고대나, 아버지의 이름 아래 말씀의 무게로 정신을 내리 눌렀던 중세의 서구처럼,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낸 어떤 규칙들이 거꾸로 우리의 노동을, 나아가 우리의 삶을 힘들게 한 것이다.

<문예 노트>
Posted by huun

잘 알고 지내는 선배 K씨가 어느 날 내게 와서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는다. "있지! 내가 변태가 되어 가나 봐." 그의 표정은 불안과 걱정으로 싸여 있는 듯했다. 그의 모습 속에서 자연스럽게 문제의 심각함을 감지할 수 있었다. "아내와 잠자리를 할 때 이상한 느낌을 받았어." 그의 기질로 볼 때 변태적인 면모는 보이지 않는다. 그는 어느 정도는 내성적이며, 그러나 또한 어느 정도는 쾌활하다. 그에게 단점이 있다면 예민하다는 점이다. 가끔은 사람들과 다투는 일도 있으며, 때로는 자신의 파괴적 본성을 감당하지 못하고 폭발할 때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성생활이 변태적인 것이라고 예상할 일은 아니다.

 

"아내와 잠자리를 할 때 감흥이 오지 않을 때가 있어. 예를 들어 피곤할 때라든지, 다른 어떤 걱정이 생겨 거기에 몰두할 때면, 흥분도 안 되고, 그녀가 이리저리 내 몸을 자극 해도 별 감흥이 없을 때가 있어. 그럴 때는 좀 난처하지. 그녀의 애정과 호의에 대한 예의도 아닌 것 같고. . . 그래서 난 억지로라도 여러 가지 외설적인 생각들을 떠올려서 그녀에게 반응하려고 노력하지만 쉽진 않아. 그런데 이상한 것은, 아내의 흰머리를 보면 흥분이 돼! 아내의 흰머리를 처음 보았을 때는 별 감흥이 나질 않았는데, 언제부터인가 그녀의 흰머리가 하나 둘씩 많아지고 이제는 노력해서 찾지 않아도 꽤 잘 보이니까 흥분이 되는 거야. 여자의 흰머리를 보고 성적 흥분을 느끼는 건 나밖에는 없을 거야."

 

그의 설명을 들으니 자신이 변태가 되어 간다는 의미를 이해할 수가 있었다. 얼른 보아도 흰머리와 성적 쾌감은 이해할 수 없는 연결이었다. 물신주의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의 과거사를 들어봐도 흰머리와 섹스가 연결될 지점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무의식의 작용일까. 아니면 그는 일종의 물신 숭배자인가. 성도착이 이렇게 뒤늦은 인생에도 찾아오는 것일까. 여러 가지 생각들이 솟아오른다.

 

그는 결혼한 지 12년쯤 된 중년이다. 그리고 그의 결혼생활이 사실 관능적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친구들이나 동료들과 외설적인 대화들을 즐기지만, 그들이  모두 관능적인 삶을 산다고 할 수는 없다. 그도 역시 이와 다르지 않았다. 그는 적당히 외설을 즐겼으며, 심하지 않게 섹스를 밝혔다. 하지만 그의 외모나 성격 등 여러 부분에서 관능적인 삶을 기대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결혼생활이 무료했던 것은 아니다. 아내의 허물을 공공연히 떠벌리지도 않았으며, 일상에서 오는 심한 권태를 느껴본 기억도 없었다. 그가 아내에 대해 불만을 갖는 것이라고는, 가끔 어린아이 같다는 정도였다. 심지어는 그 어린아이 같은 면이 귀여울 때도 있다고 부연한 적이 있었다. 결혼한 지 꽤 되었으니 성생활에 권태를 느낄 법도하다. 그래서 그걸 극복하기 위해 무언가 일상적이지 않은 행동이나 생각들로 침실을 채우기도 한다. 그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한 생각이다. 그러나 변태가 되어가고 있는 문제는 좀 다르다. 그는 자신의 아내가 지니고 있는 미모나 육체적 미감 그리고 그녀의 애정과 호의의 안락함 등이 주는 성적 흥분보다는, 엉뚱하게도 흰머리에서 오는 쾌감을 더 원하고 있는 것이다.

 

변태에 대해 정의하고 설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거기에는 다양한 병리학적 연구들과 구체적 증상의 사례들을 따져봐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선 성도착이 부정적으로 이해되는 까닭은, 그것이 사회적 소통관계를 부정하고 파괴한다는데 있다. 수많은 변태적 성욕과 그 행위들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눈살을 찌푸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관음증이나 노출증 혹은 매저키즘이나 새디즘과 같은 성도착의 유형들은 모두가 소통관계의 파괴와 부정이라는 형태로 드러난다. 따라서 이들은 다수가 내면화한 사회적 질서나 표현방식을(심지어는 섹스와 관련된 것조차도) 따분하게 여기거나 부정적으로 이해하면서, 그로부터 단절하기 위해 자신만의 특별한 이미지를 발명해 낸다. 예술가들이 주로 이러한 행위에 몰두하는데, 우리가 소위 말하는 은유능력(A를 B로 연결하는 능력)도 일종의 변태적 이미지의 창출이라고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천재의 조건을 은유능력이라고 했는데, 그의 주장을 가만히 살펴보면 천재는 변태성을 갖춘 사람을 의미한다.

 

사회적 질서로부터 변태성의 주체가 일탈하는 과정은 물신주의의 경우를 보면 알 수 있다. 물신 숭배자는 환상(Fantasy)이라는 허구를 내면화하면서, 현실 원칙들을 거부하거나 그 효력을 정지시켜 버린다. 다시 말해 특별한 자신만의 이미지를 만들어 놓고, 불쾌한 현실에 직면하게 되면, 곧바로 그 이미지로 날아오르는 것이다. 간단한 예로, 물신주의자들의 주된 메뉴는 스타킹이나 구두인데, 이것들은 모두가 행복했던 시절의 어머니와 동일한 물신들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을 사랑해주던 혹은 자신이 사랑했던 어머니로 달려가 버리는 것이다. 새디즘은 가학을 받는 자와의 소통을 완전히 부정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래서 새디스트는 피해자에게 많은 말들과 반복적 논증을 진행하지만, 결과적으로 이것은 흉내나 가장에 불과하다. 폭력적 지배자에게 설득이나 소통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새디스트가 매질을 하는 대상으로부터 단절하려는 것은, 그 대상이 구질구질한 현실 속에서 살아남아 노예처럼 살고 있다고 망상하기 때문이다. 그는 그 사람의 노예 같은 면모를 혐오하고, 매질을 통해 그것을 없애버리고 싶은 것이다. 새디즘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와 유사한 형식을 우리나라 어머니들로부터 볼 수 있다. 만일 아이가 누군가에게 매를 맞고 들어왔을 때, 그 어머니는 아이를 위로하거나 달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의 아이를 매질을 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이런 바보 같은 놈. 왜 맞고 다녀!?" 내가 존경하는 바따이유(G. Bataille)라는 프랑스의 이론가는, 새디즘에는 피해자의 어조가 있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아마도 저 어머니의 어조와 유사한 언어를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들 도착의 형태에 대해 소통의 파괴나 부정 혹은 단절과 위반이라는 위험한 술어들을 사용한다고 해서, 이들을 신비적으로 보거나 설명할 수 없는 괴이함 이라고만 말해서는 안 된다. 도착자들은 어떤 경우든지 다른 많은 사람들과 유사한 방식으로 삶을 경험하며 정서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아픔으로 인해 고통을 느끼고 안락 속에서 쾌감을 느끼는 것은 이들도 역시 다르지 않다. 다만 이들은 이러한 경험과 감각들을 다른 사람들과 유사하지 않거나 전혀 다른 방식으로 지각하고 체험한다는 점이 다른 것이다. 고통과 쾌감의 경험들은 그 자체의 물질적 요인(즉 신경물질이나 뇌하수체와 같은)에 의한 것이기보다는 방식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매저키즘이 고통을 통해 쾌감을 경험하는 것은, 고통을 쾌감 자체로 지각해서가 아니라, 고통을 쾌감으로 전환시키는 메커니즘을 보통 사람들과는 상이하게 운용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도착은 생물학이나 의학적인 문제가 아니라, 정신적인 그것도 예술적인 정신의 문제이다. 이들이 감각적 자극을 우리와는 다른 방식으로 수용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이들은 우리와는 전혀 다른 삶을 운용하거나, 더욱 풍부한 삶의 경험을 스스로 요구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또한 이들에게서 발견되는 또 하나의 특징이 있다. 정상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사회적 소통을 위해 어느 정도는 자신의 쾌감을 타인에게 빼앗기거나 포기해야 하는 반면에(중세인들은 이 쾌감을 신에게 돌렸기 때문에, 니체는 이를 더 질병적이라고 말했다), 변태적 주체는 자신이 개발하거나 창출하고 있는 쾌감을 철저히 자기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소통의 거부는 쾌감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노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쾌감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는 이들의 노력이 사회적 일탈이 되는 것은, 사회가 그들에게 무엇인가를 빼앗고자 하는 경우에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들에게서 삶을 운용하는 방식을 배울 수 있어야 한다. 신체를 바라보고 다루는 방식을 존중해야 한다는 말이다.

 

흰머리와 성도착의 관계에 대해서는 섣불리 용어 처리할 문제가 아니다. 사실 우리가 질문해야 하는 문제는 흰머리와 도착의 관계가 아니다. 오히려 흰머리와 쾌감간의 관계에 있다. 그는 왜 흰머리를 보며 쾌감을 느끼는 것일까. 나의 소견으로는 그가 위반을 꿈꾸고 있는 듯하다. 위반은 피상적으로 내면화된 금기나 강요들에 대한 일탈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우리의 사회는 연령이나 계급과 같은 여타 조건들에 의해 사랑의 형태를 규제해 왔다. 그래서 이를 어기는 형태의 사랑을 보게 된다면, 심한 경우에는 범죄의 모습을 띠고 우리에게 나타난다. 하지만 계급을 초월하는 사랑은 언제나 문학적 스캔들의 테마가 되어 왔으며, 제도를 위반하는 불륜과 같은 사랑의 형태는 당사자뿐 아니라 그것을 지켜보는 관찰자들로 하여금 매우 격렬한 관능성을 제공해 주기도 했다. 그는 흰머리를 관찰하면서 자신의 아내를 연상(年上)으로 망상하고 있는 것이다. 흰머리라는 부분적 대상을 통해 그의 아내는 단번에 연상의 여인으로 탈바꿈한다. 보다 존경스러운 상대를 원한다든지 등과 같은, 연상의 여인을 사랑하는 심리적 상태에 대해서는 성급하게 말 할 수 없다. 또한 그가 변태인가 아닌가를 말할 수도 없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흰머리를 보면서 위반을 꿈꾸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아내의 신체의 부분을 이용해서 자신을 통제해 왔던 제한된 사랑의 형태에 저항하고 싶었던 것이다. 여기서 내면화된 제도와 이데올로기는 파괴되고 부인된다.

 

관능성은 파괴하고 거부하고 저항하고자 하는 욕망으로부터 태어난다. 우리의 신체 안에서는 알 수 없는 욕망들이 꿈틀거리고 있다. 이 흐름은 어떠한 제도나 이데올로기로 봉해 버릴 수 있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어떤 식으로든 비집고 나온다. 신체가 억제될 때 욕망은 위반이라는 형태로 드러난다(예를 들어, 꿈이나 잠꼬대나 술주정과 같이 일상적인 것도 포함하여). 이때 사랑은 괴이한 모습을 띠게 되는 것이다. 소리를 내지 않으며 신체 내에 묵직하게 스며있는 욕망은, 현실 속에서 특정한 대상들과 조우하게 될 때(술이나 마약도 이에 해당된다), 부지불식간에 튀어 나와 기괴한 형태로 현실화한다. 이 괴이함이 제도와 이데올로기에 의해 내면화된 소통을 파괴하게 될 때, 우리는 이를 행위 윤리적인 문제들과 혼동하면서, 변태라는 용어로 비하하여 부르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일반인들은 대충 비슷하면 아무데나 용어를 붙여 쓰는 일들을 밥 먹듯이 한다. 그리고 이 잘못된 명명법이 일반화된 관념이 되면 곧 바로 집단이나 사회의 고압적 폭력으로 둔갑한다. 유럽과 미국인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듯이, 차이에 대한 무지는 언제나 차별을 낳는다는 점을 우리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결혼한 지 12년 아니 그 보다 더 오랫동안 잠자고 있었을 욕망이, 이제 비로소 흰머리라는 숨 쉬지 않는 대상에 의해 깨어난다. 흰머리와 성적 쾌감간의 연결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관능적 쾌감이란 유두와 성기와 입술과 항문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신체에 각인 된 사회적 제도와 우리를 내면화하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저항으로부터도 출현한다.

 

 

p.s.

저항과 쾌감에 관한 말이 나와서 말인데, 여러분도 그 이름을 자주 들어보았을 질 들뢰즈(Gilles Deleuze)라는 철학자는 매저키즘이 유머러스하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무엇이 유머러스하다는 말일까? 우선, 매질을 당하면서 쾌감을 느끼는 것은, 때리는 사람을 당혹스럽게 한다. 매질 자체의 의미를 무효화해 버리기 때문이다.

"제발, 때려 주세요!"

"#$%^&*"

그러나 이 보다도 더 재밌는 사실이 있다. 매저키스트는 매질이라는 것을 나쁜 짓을 하고 나면 으례 따라 나오는 처벌이라고 생각한다. 나쁜 짓 그리고 처벌. 나쁜 짓 그리고 처벌. 나쁜 짓 처벌, 나쁜 짓 처벌, 나쁜 짓, 처벌 나쁜 짓, 처벌 나쁜 짓 . . . . 그는 생각한다. 처벌을 먼저 받고 나쁜 짓을 하면 되지 않을까? 들뢰즈는 매저키스트가 매질을 당하면서 쾌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매질이 끝나면 맛보게 될 바로 그 나쁜 짓을 기다리기 때문에 쾌감을 느낀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매저키스트의 쾌감을 예비적 쾌감, 기다림의 미학이라고 정의한다. 한 사악한 어린아이의 예를 통해 말해볼까? 선생님이 아이에게,

"너! 불량식품 사먹으면 때려줄거야!" 하고 경고를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이가 찾아와서 엉덩이를 까며 이렇게 말한다.

"그럼, 먼저 때려주세요!"

" $%^&*()&* "

이 아이가 급진적인 이유는, 더 이상 억압에 대해 저항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아이의 요구는 오히려 매질을 나쁜 짓과 쾌감을 허가해주는 절차로 만들고 있다. 아이는 그 억압을 완전히 거부해버리고, 자신의 쾌감으로 전환시켜 버린 것이다. 흰머리를 보며 즐거워하는 K 선배처럼! 억압은 결코 승리할 수가 없다. 특히 즐기는 자에게는. 




<문예 노트>
Posted by huun

베르그송은 생명의 미시적 운동이 전체 진화과정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 결정일 수 있는가를 한 가지 예를 통해 이론적으로 논증하였다. 물론 그는 실제의 운동이 양적으로 추상화됨으로써 어떻게 왜곡되는가를 설명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 논의에는 그 이상의 것이 있다.


아킬레스는 실제로 어떻게 거북이를 추월할 수가 있는가? 사물의 운동을 공간화해서 이해하는 수학적 방식은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운동을 직선 위의 무수한 점들의 통과와 이행으로 이해한다면(우리는 실제로 이렇게 이해하고 있다), 운동하는 사물은 직선 위의 무한수의 점들에 직면하게 되고, 따라서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의 실제적인 이동은 성립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쏜 화살은 과녁에 도달 할 수 없으며, 아킬레스는 거북을 추월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은 이와는 반대가 아닌가? 우리는 실제로 과녁에 도달하는 화살을 본 바가 있으며,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의 완전한 이행 또한 경험한 바가 있으며, 거북을 추월하는 아킬레스를 보지 않는가? 이론과 경험 사이의 이러한 간극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이것이 바로 베르그송이 『창조적 진화』에서 고대철학과 근대철학을 그리고 나아가 사유의 양(量)적인 메커니즘을 비판하기 위해 제기했던 질문이다. 실제의 경험에 대해 이론적 한계에 직면할 때, 필요해지는 것은 그 경험을 설명해줄 하나의 연역이다. 이 부분에서 베르그송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했던 내용은 존재의 생성(진화)과 지속의 관계에 대한 것이었는데, 그 골자는 다음과 같다: 운동에는 구별되어야 할 두 수준이 내재되어 있다. 한편에는 양적으로 분할 할 수 없는 운동 그 자체(운동성)가 있으며, 다른 한편에는 운동하고 있는 물체가 지나간 공간이 있다. 운동성이란 순수한 질 혹은 강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데, 그럼에도 우리는 이를 측정할 수 있다고 믿으면서, 운동하고 있는 물체가 지나간 공간(궤적)을 운동 그 자체와 혼동한다. 여기에 바로 엘레아 학파의 오류가 있다. 그들은 운동하는 아킬레스로부터 질적 운동성을 제거하고 아킬레스와 거북이 지나간 궤적을 운동 자체와 혼동함으로써, 아킬레스와 거북의 서로 다른 질적 운동을 동질적인 공간에서의 동질적 운동으로 이해한 것이다. 운동 중에 있는 물체를 상상적으로 정지(imaginary stop)시켜놓고 보면, 그 물체가 지나간 공간(거리)를 운동과 동일한 외연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아킬레스의 운동은 동질적인 공간 속에서 앞서가고 있는 거북의 운동과 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따라서 한 점과 다른 점의 거리를 균등 분할하여 측정할 수 있듯이, 운동 역시 그것이 지나간 좌표의 점들의 이행으로 환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은[엘레아 학파] 아킬레스 전체의 운동을 아킬레스의 운동이 아니라 거북의 운동으로 재구성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거북을 쫓고 있는 아킬레스가 아니라, 동일한 종류의 발걸음으로 동시적으로 행위하고 있는 두 마리의 거북을 설정하였기 때문에 이 둘은 절대로 만날 수가 없다."(Henri Bergson.
Time and Free Will. Eng trans by F. L. Pogson. New York, 1921. p. 113)


실제의 운동은 좌표 위에 결정되어 있는 수학적 의미의 점과는 다르다. 하나의 순간으로 즉 움직이지 않는 점으로 파악되는 운동은 우리의 지성이 재구성한 결과이지, 단숨에 일어나는 실제의 운동은 아니다. 아킬레스를 추상적 존재로 파악할 때, 즉 부동하는 점들을 소극적으로 통과하고 있는 수학적 존재로 이해할 때, 우리는 아킬레스를 거북과 동일한 방식의 걸음을 반복적으로 내딛고 있는 존재로 이해한 것이다. 두 마리의 거북이란 그런 의미이다. 존재들의 운동이 동질적인 것으로 간주됨으로써, 아킬레스와 거북은 정도상의 차이만을 갖는 동일한 본질이 된다. 그러나 실질적 존재로서의 아킬레스는 거북을 추월하기 위해 매번 새로운 방식의 적극적인 노력, 직선 위의 점들을 통과하는 것과는 본성적으로 다른 노력을 취하지 않겠는가? 이 노력이란 거북과는 질적으로 다른 아킬레스 자신만의 독자적인 발걸음으로 구성되지 않겠는가? 그러니 그들은 동일한 공간에서가 아니라 서로 다른 수준의 공간(과 시간)에서 서로 다른 운동을 취하지 않겠는가? 따라서 아킬레스와 거북의 한 발 한 발은 동일한 공간 안에서의 점들간의 이동을 의미하지 않는다. 운동이 공간의 이동으로 환원되고 나면, 실제적인 운동은 일어나지 않는다. 보다 더 근본적인 의미에서, 실제의 운동이란 매순간 이루어지고 있는 끊임없는 이행과 생성일 것이다. 그것은 운동체만의 이행과 생성일 뿐만 아니라, 운동체를 포함하고 있는 공간 전체의 이행과 생성이다. 그래서 그 한 발은 아킬레스와 거북 사이에 놓인 장(field), 즉 공간 뿐 아니라 시간을 포함하는 그들간의 관계 전체의 변화를 의미한다. 물론 그 변화란 그들의 의식을 넘어서 있다. 나아가 이것은 이들을 포함하고 있는 우주 전체의 변화를 야기하지 않겠는가? 이는 공간적 운동에만 관련되지 않는다. 유년기에서 청년기 혹은 성년기로의 성장과 같은 존재의 질적 변화에도 동일한 공식을 쉽게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베르그송의 말을 들어보자: "하나의 운동에는 운동하는 사물이 연속하여 지나온 각각의 위치 이상의 것이 있으며, 하나의 생성에는 순간 순간 통과하였던 (정태적인)형상보다 더 한 이상의 것이 있으며, 형태의 진화 또한 하나의 형태에서 다른 하나의 형태로 잇따르는 것 이상의 것이 있다."(Henri, Bergson.
Creative Evolution. Eng trans by Arthur Mitchell (New York: Random House, 1944). p. 343.)


위의 논거를 약간 변형시켜 보면, 우리는 베르그송과 맑스의 놀라운 유사성을 발견하게 된다: 추상은 우리의 무능력을 예증한다. 추상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무엇을 볼 수 있는지, 심지어는 우리 앞에 놓인 대상이 무엇인지 조차 알지 못한다. 우선 추상은 존재를 정지된 것으로 이해하고 이를 고립시켜 놓으면서 출발하기 때문이며, 따라서 정지된 존재의 실제적인 이행과 성장을 설명하기 위해, 그 존재 외부의 원인으로서의 초월적 실체를 가정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존재를 부정(negativity)으로 결정하는 추상은 바로 노예상태를 전제로 한다(맑스는 이를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의 두 원자론의 차이로 설명한 바가 있다. 참고로, 칸트나 버크(Edmund Burke) 그리고 료따르나 들뢰즈가 논의했던 숭고미와 추상충동에 대한 문제는 좀 다른 관점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구체적이고도 실질적인 존재란 바로 (실제로 운동하는 아킬레스처럼) 그 자신 안에서 그 자신에 의해 그 자신의 고유한 역사를 쓰는 존재이다. 인간의 노예성으로부터의 해방을 실현하기 위해, 이미 맑스가 역사적 수준에서 정식화했던 이 내재성의 문제를, 베르그송은 더 근본적인 수준 즉 생명의 진화의 문제로 파고들었다.

<문예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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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권택의 예술에 관한 영화에는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두 주제가 있는데, <취화선>에는 이 두 주제가 상호보완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하나는 예술가의 윤리에 관한 문제이다. 예술가는 예술로써 그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야만 한다. 예술가의 한계란 표현할 수 없음에 직면한 상태이며, 나아가 표현할 수 없음은 죽음을 의미한다. 표현 불가능한 것(실존적 사회적 제약으로 인한)을 표현하는 문제는 언제나 예술적 숭고의 테마가 되어 왔다. 가능하지 않은 것을 표현하려는 욕망이 운명적으로 내재한 존재. 그는 표현을 완성함으로써 죽음을 넘어서거나 아니면 죽음을 지연하기 위해 끊임없이 표현을 반복해야만 한다. 장승업의 고뇌를 단순히 개화당과의 불화로 환원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의 고뇌는 근본적으로 예술적인 것이며, 따라서 다른 어떠한 외재적 요인에 의해서도 규정될 수 없는 능력, 예술가의 내재적 능력에 관한 문제이다("나의 그림은 개화당의 목적과는 다릅니다!").


이런 점에서 윤리는 상호간의 불화나 결합에 관한 규약으로 환원할 수 없다. 거기에는 반드시 외재적 힘이 개입하기 때문이다. 왜 모든 것은 외적인 힘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이것이 임권택의 예술영화에서 항상 등장하는 윤리학적 질문이다. 그가 다루고자 하는 것은 외재성의 구도를 이루는 사회-정치적 윤리가 아니라 바로 예술적 윤리이다. 예술적 윤리에 관한 그의 담론은 한마디로 말해: 예술가는 외재적 원인이 아닌 자기 자신의 원인에 의한 능력을 추구해야만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능력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표현 불가능한 것을 표현하려는 과정 속에 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미학적 전환이라는 두 번째 주제로 나아간다. 천민으로 태어난 장승업은 계급적 조건의 결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데, 예로 유학 전통과의 갈등이 그것이다. 유생들에 따르면 그림이란 의미를 재현하는 수단이며, 이를 위해 심지어는 화폭에 시를 써넣어야만 한다. 그림에 뜻이 없으면 그림이 아니다. 그림은 유배중인 도연명의 자태 뿐 아니라, 그 쓸쓸함까지도 해석하고 표현해야만 한다. 그러나 어떻게 형상과 의미의 이행 혹은 결합이 가능할 것인가? 유학을 배우지 못한 그에게 그림 속에 文을 넣어 붓으로 뜻을 세우는 문제(의제필선)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계급적 한계가 예술적 한계로 확장되어, 표현 불가능성에 대한 강도 높은 고뇌에 직면할 때, 예술가는 근본적인 미학적 전환을 요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이 작품이 장승업의 위대함에 대해 말했다면, 그것은 유학 전통과의 미학적인 단절을 드러내는데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디에서 단절이 일어나는가?


우선 그에게 사물의 의미는 별로 중요치 않다. 형상의 표현은 뜻이 아닌 새로운 방식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의미를 채우지 않고 사물을 표현하는 문제. 그 대답을 위해 장승업이 질문한 것은: 왜 그림은 외적인 힘으로 존재해야 하는가? 그림 자체의 힘은 없는가? 의미를 제거해 버려도 고스란히 남아 있는 그림 자체의 힘은 없는가? 이 영화는 장승업이 후 학도들에게 가르치는 장면을 통해 이 질문에 대한 대답과 아울러 그의 유학 전통과의 단절을 잠깐 보여준다: 돌맹이! 그에 따르면 예술가는 돌맹이조차도 살아있는 것으로 보아야만 한다. 사물을 의미가 아니라 살아있는 것으로 보는 것. 의미는 의식의 본질이지, 존재의 본질은 아니지 않은가? 뜻이 무한히 깃든다면 존재의 숨결이 살아나는가? 의미를 채움으로써 세계를 이해하는 것은 존재의 외적 형식에 의존하는 방식이며, 이는 존재를 죽은 것으로, 병든 반복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장승업에게 예술가의 윤리는 예술 작품의 윤리로 이행하고, 나아가 존재일반의 윤리로 이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의식의 본질에서 존재의 본질로, 죽은 존재로부터 살아있는 존재로, 나아가 의식의 빛이 아닌 그 자신의 빛에 의한 존재로 이행함으로써 조선 회화의 벡터를 바꾸어 버렸다. 그것은 모든 형상적인 것에 질료를 불어넣음으로써만 가능한 일이다. 그로부터 회화의 통사론에는 더 이상 명사들만이 아니라 형용사나 동사와 같은 화용소(話用素)들이 하나 둘씩 채워지기 시작한다. 조선 회화사에서 장승업의 그림이 언제나 생명적인 것과 관계하여 주석이 붙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영화 <취화선>에서 예술가의 윤리와 미학적 전환이라는 두 주제는 상호보완 되어 지속한다. 몇 몇 술어들로 요약해보자: 자신만의 빛으로 살아있는 예술가; 이를 위해 끊임없이 새로워지고 진화하는 존재; 나아가 자신의 한계로 치닫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존재; 이것은 예술가 자신뿐 아니라, 모든 존재를 살아있는 것으로 이해하는 존재론적 긍정이 아니라면 실현될 수 없는 문제이다. 이런 점에서 화덕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장면은 이 두 주제와 관련하여 하나의 역설을 낳는다: 예술가는 살아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 자신의 생물학적 한계에까지도 치달을 줄 알아야 한다. 임권택의 그 마지막 장면은 이런 뜻이다: 장승업은 살기 위해 죽음을 선택한 예술가이다. 이것이 이 영화에서 증명되었어야 할 그의 위대함이다.

<문예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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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죽어버린 것들을 담고 있지만, 말하자면, 더 이상 현실적 효력이 없는 것들로 채워져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죽음 그 자체와 동일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물론 그 본성상 사진은 사물의 죽음을 선언하고 거기에 애도를 표하는 묘비명과도 같다. 앙드레 바쟁(André Bazin)이 말했듯이, 사진은 우리의 공포―특히, 죽음에 대한―를 반영한다. 그러나 그 목적이라든가, 환기하는 효과를 감안해 본다면, 사진은 죽음의 예술과는 관계가 없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사진의 역설이란 이러한 것이다: 사진은 무엇인가를 보존함으로써 그 죽음을 보증하는 동시에 부정한다. 현상으로서의 사진과 그것이 담고 있는 대상 자체는 확실히 구별되어야 한다. 고다르[Jean Luc Godard]는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근육이나 피가 아니야! 그냥 인화용 종이에 찍힌 붉은 색 잉크일 뿐이라구!” 사진이 죽음과 함께 나란히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그것이 멈춘 시간과 관계하기 때문에, 더 정확히는 보존과 관계하기 때문이지, 그 자체 죽음이기 때문은 아니다. 우리는 사진을 통해 죽음을 떠올리지만, 동시에 그것과는 전혀 다른 태도를 갖는다. 사진이 표상 예술과 다른 것이 있다면, 무엇보다도 이 점일 것이다. 가령, 우리는 그림이나 문학작품을 하나의 과거로서 혹은 과거의 기억으로서만 받아들인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들을 어떻게 믿을 수가 있단 말인가? 그리하여 우리는 작품 속에 재현된 대상을 실존적 가치들과 관계 짓기보다는 그 본질의 열림에 더 열중하게 된다. 우리는 젊은 베르테르나 유태인 블룸의 행적을 쫓으며 그들의 실존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속한 어떤 본질이 펼쳐지는 과정을 목도하는 것이다. 재현된 존재란 예고된 본질이 확인되는 형식으로 우리 앞에 주어지는 어떤 것이다. 따라서 소설작품이란 곧 그 자체 베르테르이며 블룸이다. 나아가 그들은 그 자체 인생이며, 우주 자체가 되어야만 한다. 거기서 우리가 갖게 되는 믿음이란 하나의 비전 혹은 통찰이 될 것이다. 문학의 주변에는 언제나 죽음의 악령들이 에워싸고 있으며, 바로 이 암울함 속에서 비극적이지만 의미심장한 삶에의 통찰과 태도가 준비되고 있다. 그것은 죽음을 목도한 한 영혼의 자기 독백과도 같은 것이다. 가령, 허진호 감독의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아이러니컬한 것은 주인공 정원이 사진가라는 점이다. 그 작품은 사진을 죽음과 관계 지음으로써, 무엇인가를 남기는 것으로서, 즉 기억하는 것으로서의 사진의 존재를 강조한다. 그래서 카메라 앞에 서는 모든 사람들은 수의(壽衣)를 맞추거나 한마디의 유언을 남기듯 특별히 마련된 한 차례의 예고된 시간을 경험한다. 그런 식으로 사람들은 사진관을 나오며, 고개를 떨어뜨리고 걸어가면서, 자신만이 완성할 수 있을 어떤 서정시 한편을 읊조릴 것이다. 사진을 문학적 풍요로움으로 전환시킨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정원은 사진가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주변에는 문학적 독백으로 가득 차 있다: “사랑은 추억으로 번진다!”(『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정원의 독백). 그러나 사진 자체는 이처럼 사물의 본질을 이루고 있지 않다. 담긴 대상물조차 그 자신의 본질과는 무관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본질을 펼치는 과정은 더더욱 아니다. 심지어 사진은 사물의 본질을 감추면서만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확실히 그것은 외양이며 현상이며 따라서 실체의 사라짐이다. 문학과는 다르게 사진에 찍힌 블룸은 사진 그 자체가 아니다. 심지어 그 블룸은 사진에 찍힘으로써, 더욱 더 사진과는 무관한 존재가 된다.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종종 실물과의 비교 속에서 실체의 알리바이를 확인하곤 한다: “이 사람 맞아?”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사진에는 실체에 근접하고자 하는 강박이 있다. 보존의 관점에서 본다면, 문학과 사진은 대단히 상반적인 입장에, 전혀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하나는 본질에 닿아있고, 다른 하나는 육체에 닿아 있다. 그래서 정원이 자신의 모습을 사진 속에 담을 때라든가, 어떤 할머니가 장례식에 쓸 사진을 가족 몰래 찍는다든가, 정원과 함께 모든 친구들이 카메라 앞에 선다든가 할 때, 그들이 남기고 싶은 것은 육체 자체이지, 인생의 최종적 본질이나 진실이나 사연이 아니다. 하지만 사진이 남기는 육체란 어떤 육체일까? 가령, 우리는 카메라 앞에서 무엇을 남기고 싶은 것일까? 흐르는 지속의 한복판에서 출처 없이 잘라낸 단순한 어떤 구간일까?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사진이란 철학의 과학적 알리바이, 다시 말해 지식의 세계가 실재와 동일한 위상 속에서 뒤섞이게 된 것이다. 물리학적 혹은 기하학적 규준과 그 공식들이 자연의 존재를 증명하고, 심지어는 그것과 동일시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사진은 영원한 실재―고전철학의 관점에서 파악된―에 대한 우리의 오래된 그러나 막연했던 믿음을, 마치 환각처럼, 감각의 규준과 그 도식들로써 증명한 셈이다. 그리하여 인상파 예술이 그랬듯이, 사진은 회화를 좌절시킨 것이 아니라, 오히려 회화로 하여금 실재에 대한 강박으로부터 벗어나, 그 자신의 본질로 되돌아가게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사진은 죽은 대상(즉 활동을 멈춘)과 관계함으로써 죽음의 영역과 밀접한 연관이 있지만, 한편으로 사진은 그 죽은 대상조차도 현실적으로 살아있었으며, 실재 한다는 믿음을 우리에게 부여함으로써 현실과 관계한다. 대상물이 어떤 것이든지 혹은 그것이 우리에게 어떠한 정서와 효과를 발생시키든지, 일단 사진으로 포착된 존재는 그 존재가 이미 증명된 셈이다. 사진은 존재에 애도를 취하기에 앞서, 그 자체 실제적 기념비가 된다. 보도자료, 증거자료, 법정에서 사용되는 수많은 현실적 증거들! 이들은 모두 확증성을 보증 받기 위해 가장 먼저 사진의 형식을 띠게 될 것이다. 신문에 게시된 사진을 접하는 우리는, 마치 어떤 자명한 수학적 진리에 이른 것처럼, 혹은 어떤 절대적 존재의 서명을 확인한 것처럼, 어떠한 의심도 취하지 않는다. 어떤 대상에 대해 이 만큼 확고한 믿음을 주는 것이 또 있을까? 그것이 과학적 망상인지, 아니면 윤리적 망상인지, 형이상학적 망상인지, . . . 어쨌든 우리는 그로 인해 현실에 절대적인 우월성을 부여하고, 거기에 영원한 가치를 투사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진은 문학이나 그림보다도 훨씬 더 종교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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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에서 표현주의를 뜨거운 상태로 만들기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사물의 질적 변형이나 용질(溶質)의 추출을 위해서는 용광로와 같은 뜨거운 환경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창백한 초록색조차도 야수적 파토스의 환경이 되거나(H. Martis), 여인의 몽상적인 눈 속에 급진적인 거부와 물신주의적 환영이 깃들어 있거나(G. Klimt), 불안과 절망이 신체 밖으로 경련을 일으키며 빠져나와 대기 전체에 파동을 일으키거나(E. Munch), 혹은 히스테리적인 선 위에 일고 있는 도발(E. Schiele)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표현주의가 주로 (신체의)구멍과 관계하는 것은, 단단한 것을 비집고 솟구쳐야할 출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동그란 눈이나 벌어진 입(뭉크) 혹은 환타지에 취해 버린 눈(크림트)이나 치켜 뜬 시선(쉴레), 그리고 빧빧이 발기되었거나 빨갛게 벌어진 성기(쉴레) 등. 이는 예술적 표현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하나의 사회가 질적으로 변화하려면 우선 뜨거워져야 할 것이다. 정치나 역사의 테마들과 관계하는 예술의 이론을 종합해보면 대체로 이 문제에 닿아있음을 보게된다: 어떻게 하면 뜨겁게 달굴 것인가? 무엇이 가장 뜨거워질 수 있을 것인가?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역사에서 형식주의가 비판을 받았던 것은, 그들의 이론이 자칫 세계를 냉각시킬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였다.


가령 에이젠슈타인(Sergei Eisentein)은 베르토프(Dziga Vertov)가 <카메라를 든 사나이>에서 보여주었던 카메라-눈 이론에 대해, 그것은 발전이 완성된 사회에서나 가능한 방식이며 형식주의적 유희라고 비판하였는데, 바로 저와 같은 맥락에서였을 것이다. 그가 원했던 것은 물질과 동일한 혹은 물질 속에 존재하는 차가운 눈이 아니라, 주먹이나 분노 혹은 외침과 같은 것이었으며, 그리하여 단단한 것들을 거대한 우주적 소용돌이 속으로 녹이는 일이었다.


<문예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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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19세기 소설가인 헨리 제임스(Henry James)의 가장 어렵고도 가장 숭고한 소설의 전문이다.

번역을 해서 올렸으면 좋았겠지만, 워낙 방대하고 깊이 있는 문체여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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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미비평 관련 노트

2006/08/27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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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쟁(Andre' Bazin)은 데 시카(Vittorio De Sica)의 『자전거 도둑(Bicycle Thief)』을 공산주의 영화라고 논평한 적이 있는데(주1), 그것은 그 작품이 사회적 환경("도둑질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회") 속에 암묵적으로 내재하고 있는 개인의 무의식적 요구를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영화 어디에도 정치적 기치나 계급 혁명과 같은 공산주의적 테마가 드러나지 않았음에도, 우리는 그 환경을 조용히 목도하면서 이미 공산주의자가 되는 것이다. 정치적 구호가 없이도 우리는 충분히 정치적일 수 있다. 거기에는 리얼리즘 특유의 정치-역사적 낙관(樂觀)이 있는데, 예컨대 작가가 명시적으로 의도를 표명하지 않아도, 사실적 이미지에 충실한 작품은 이미 역사적 또는 이데올로기적 의식을 내포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사실적 이미지는 역사적 필연이 발생하는 환경에 대한 하나의 목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가 그리 간단치는 않다. 사실적 이미지가 무엇인가? 또 그것을 어떻게 도출해 낼 수 있을 것인가? 리얼리즘에서 실재성(reality)의 문제가 종종 실재적인 것(the real)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the mental)의 문제로 환원되곤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따라서 문제가 되는 것은 지각의 대상이 아니라 바로 지각 자체의 환경이다.

사실적 이미지는 우선 일상적인 것들을 통해 나올 것이다. 예를 들면, <자전거 도둑>에서 아버지와 함께 로마 거리를 헤매며 자전거를 찾던 아들이 갑자기 골목길에서 잠시 동안 소변을 본다든지, 자전거를 찾아다닌다고 하는 줄거리 전체의 중심이 갑작스러운 소나기에 의해 중단되어야 한다든지, 소나기가 그치기를 기다리던 부자(父子)는 그들과는 무관한 퀘이커 교도들의 알아듣기 힘든 수다를 듣지 않으면 안 된다든지, 또는 <움베르토 D>에서 한 하녀가 아침에 일어나 기계적인 나른한 몸짓으로 청소를 한다든지, 물 속의 개미를 빠져죽게 한다든지, 커피 분쇄기를 들어올리거나, 발을 쭉 펴서 발가락으로 문을 닫는다든지 하는 것들 말이다. 이와 같은 사소한 사건들은 현실적 존재로서의 인물들이 불가피하게 겪게되는 우연성의 산물일 뿐이다. 만일 영화가 하나의 문학이나 드라마가 되기 위해서는 이 소소한 것들이 제거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바쟁이 데 시카와 자바티니(Zavattini)를 위시한 네오리얼리즘을 새로운 형식으로 규정한 이유는, 우연적이고도 부수적인 사건과 같은 실재의 이미지가 스크린의 새로운 요소들로 채워졌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자바티니는 네오리얼리즘을 "우연성의 예술"이라고 정의한다. 사건과 사건간의 응집력은 느슨하고 산만하여, 예컨대 스타니슬라브스키나 푸도푸킨이 강조했던, 연출에 있어서의 '에너지 보존 원칙'은 존재론적 의미에서 영화적 현실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저 인물들뿐 아니라 실재하고 있는 모든 존재의 행위에는 어떠한 초월성에 종속되지 않은 채 오로지 자신들의 고유한 법칙에 따라서만 존재하는 표면이 있기 때문이다. 그 이미지들은 영화의 최종적 명제를 가시화 하는데 있어서는 불필요할 뿐 아니라 오히려 방해가 될 것이다. 하나의 중심으로부터 독립하여, 신체-기관들간에 서로 운동을 주고받는 이 내재적 행위들은(2), 기능과 의미의 주변에 산발적으로 흩어져있는 여분이며 잉여이지만, 동시에 그 이미지들의 내재성 속에는 중심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한한 존재론적 연민 같은 것이 있다.

잉여실재의 총체가 스크린 위에서 일정한 지속을 이루고 있는 이미지를 바쟁은 날 이미지(fact-image)라고 불렀다. 네오리얼리즘 작가들이 다루었던 재료로서의 현실은, 가령 표현주의에서 보게되는 주관성의 질적 변형에 의한 지각이 아니라, 베르토프(Dziga Vertov)나 페소스(Dos Passos)가 추구했던 것과 같은 맥락에서의 카메라-눈에 의한 지각, 그리고 순전히 베르그송적인 의미에서 양적으로 수축된 순수지각에 머물며, 이는 하나의 전체로 용해될 수 없는 단편적 속성을 띠고 있다. 현실은 더 이상 미리 준비된 주관적 기획에 의해, 특정한 하나의 관점으로 이루어진 이데올로기적 조형성으로 재현될 수 없다는 것, 혹은 모든 사안들이 연출가의 머리 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왔다거나, 마치 역사가 하나의 정신성을 갖기라도 하듯이, 모든 사건들이 주인공의 심리와 행동의 주변에 모여드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네오리얼리즘에 있어 문제는 두 순진한 부자(父子)가 잃어버린 자전거를 찾을 것인가에 있지 않으며, 무산자(無産者)가 될 위기에 처한 안토니오와 브루노의 계급적 심리에 있는 것도 아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 노동자의 구부정하고도 넓은 폭의 걸음걸이, 또는 이와는 대조적으로 아버지의 곁을 따라다니는 꼬마의 종종걸음 같은 것들이 문제인 것이다(3). 그래서 저 인물들에게 동정을 갖고 사회적 불의에 맞서 분노하거나, 나아가 비교적 근본적인 사회 정치적 처방을 통해 그들을 해방시키거나 하는 문제는 이차적 결과일 것이다. 역사적 테마는 실재의 필연적 운동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인위적 변형을 전혀 가하지 않으려는 네오리얼리즘에 있어 잉여실재의 이미지가 중요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역설적인 일이지만, 이때에 예술이 갖추어야 할 형식은 해석이나 표현이 아니라, 관찰(aim at) 그 자체가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연출가뿐 아니라 카메라의 태도와 관계가 깊은 이 개념은, 한마디로 정신의 몽따쥬가 아니라 형사의 시선처럼 실재를 면밀히 주시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만약에 네오리얼리즘 작품들이 관객에게 불가해한 모호성만을 제공한다면, 그것은 바로 관찰과 주시의 상황 속에서 불가피하게 설정된 지각의 환경상태, 즉 실재와 카메라간의 해소할 수 없는 거리에 있을 것이다. 카메라는 표현된 현실이 아니라 그 스스로 존재하는 현실 곁에 머물러야만 한다. 왜냐하면 실재성이란 오로지 존재하는 것들의 내재적 관계 양태들에 의해 발생하는 행위 외에는 어떠한 초월적 힘도 덧붙여질 수 없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의 사건이 연출가의 스타일에 의해 변형되거나, 그의 특정 관점이 덧붙여져서 표현되지 않고도, 그 진실성이 충분히 드러난다면, 그 사건은 이미 스스로 강렬해 지면서 그 자신의 본질이 드러났기 때문일 것이다. 바쟁은 영화가 이데올로기의 심미적 형식인 표현에 감염되지 말 것을, 그리하여 자연을 왜곡하지 않을 것을, 아울러 문학성으로부터 단절할 것을 요청한다. 몽따주를 지양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것이 만들어내는 허구적 이미지들은 영화가 아닌 문학의 본질에 더 가깝기 때문이었다. 네오리얼리즘 작품을 논의하면서 연속쇼트(sequence shot)의 형식을 강조했던 것도, 그 형식의 도큐멘타리적 요소를 통해 몽따주를 지양하고, 나아가 문학이 아닌 영화 고유의 존재론을 확립하려는 데에 있었다. 그에 따르면 영화는 다만 자연이 스스로 강렬해 짐으로써 그 자신의 본질을 표현하지 않을 수 없는 상태일 때 이를 모방하면서 존재와 관계한다. 바쟁이 이를 모방이라고 부른 것에는 좀 유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방이 아니라 일종의 대면상태, 더 심오하게는 기다림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연속쇼트(sequence shot)는 차분하고도 초연한 지각상태 속에서 존재의 내재적 강렬함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형식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다. 바쟁이 말했듯이 이는 스타일의 부재가 아니라 오히려 스타일을 넘어선다. 마찬가지로 이는 수동이 아니라 능동의 초과이다.

바쟁은 관찰이나 주시가 내포하고 있는 심오함을 보여주기 위해, 네오리얼리즘의 몇 가지 형식적 조건들을 제시하고 있다(388-394). 그의 에세이들 중 가장 아름다운 구절의 하나인 이 논의에는, 예를 들어, 연기 관념이나 연출 관념의 소거(消去)와 같은 역설적 방법이 포함된다. 이 모든 논의들을 요약해보면, 그가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은 "중성적 투명성"이라는 용어에 나타나는바, 인간적 지각의 불순물에 의한 빛의 굴절이 최소화되어야 한다는 점이었다(392). 그리하여 자연에 어느 것도 덧붙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 심지어는 남겨진 모든 의심스러운 것들조차도 모조리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전거 도둑>에 관한 에세이에서 그가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심오한 '소멸'의 개념이다(4). 작품 속에서 모든 연기자들의 연기 관념을 소거시키고, 아울러 연출이나 표현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들을 그 한계로까지 소멸시킴으로써, 영화를 표현의 수준이 아닌 존재의 수준으로 밀고 나아가는 것이다.

결국 중요해지는 것은 실재, 실재의 지속, 그리고 카메라의 기다림과 같은 것인데, 이 모든 것들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영상으로부터 모든 명시적인 것들을 소멸시키고 익명(匿名)으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존재론적 객관성을 영화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지각의 환경이란 바로 이 익명에 있다. 그 때문에 배우는 <자전거 도둑>에서의 노동자와 꼬마처럼, 혹은 비스콘티(Luchino Viscontie)의 <대지는 흔들리다>에서 실제 어부들처럼 익명의 존재가 아니면 안 되며, 연출 역시 투명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이 때의 익명이란 모든 이름(identity)들과 그 의식을 넘어서는, 그리하여 지각 불가능한 상태까지 나아가는 초월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바쟁은 배우 관념의 소멸이 연기 스타일의 초월의 결과이며, 마찬가지로 연출의 소멸 또한 서사 스타일에서의 진보의 결과라고 지적한다(392). 이것은 장 미트리(Jean Mitry)가 말했던 공존재(Mitsein, being-with)의 개념(확인되지 않은 누군가의 눈)과도 다른 것이다(5). 왜냐하면 공존재란 함께 움직이거나 함께 존재하고 있는 것에 의한 지각이지만, 소멸된 익명의 지각이란 오히려 레비나스(Emmanuel Levinas)가 말한 바 있는 순수현존, 가령 "There is. . ."와 같이 모든 것이 사라지고 난 이후의 "존재하지 않는 존재(existence without existents)",  나아가 존재를 넘어선 존재의 지각에 가깝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상징계로 포위되지 않은 산만한 잉여실재가 초과하여 차라리 진공상태라고 해야할 것이다. 진공상태의 지각이란 범신론적 의미에서의 신의 지각, 모든 인간주의적 의식이 완전 연소된 상태의 지각, 바로 초인(overman)의 지각이 아닐까? 스피노자(Benedictus de Spinoza)가 『윤리학』에서 논증한 유일 실체로서의 신도 따지고 보면 절대적 권능이 무한해 질수록 소멸해 가는 역설적 신이 아닌가? 우리가 원하는 것은 익숙해진 의식이 아니며, 하나의 관점에의 종속도 역시 아니며, 저편에 대한 적대적 승리는 더더욱 아닐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반대로 그 모든 것들로부터의 해방이 아니겠는가? 맑스(K. Marx)에게 있어 근본적인 문제가 부르주아지에 대한 프롤레타리아의 반 테제가 아니듯이 말이다.

<자전거 도둑>이나 <움베르토 D> 그리고 <대지는 흔들리다>와 같은 영화들을 공산주의적 영화로 정의하게 하는 요소가 있다면, 그것은 데 시카나 자바티니 혹은 비스콘티 등이 노동자나 어부들의 계급의식의 발생을 다루어서가 아니며, 자연과 부르주아지에 대한 역사적 투쟁의 암시 때문도 아니다. 도덕적이고도 정치적인 범주 내에 있는 제 조건들과 관계하는 개인을 제시하고, 그 내용으로부터 필연적으로 파생하는 감동적이고도 낭만적인 메시지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치가 않다. 중요한 것은 예술에 의한 특정한 의식의 계도가 아니라, 그 보다 더 근본적인 수준에서 카메라-지각 자체의 환경을 제시하거나 창조하는 것이다. 공산주의적 인간의 지각 혹은 미래적 인간의 지각. 그 영화들을 공산주의적 영화로 이끄는 것은 바로 이 요소들이다.

(주1)
바쟁, 앙드레.『영화란 무엇인가?』. 박상규 역. 서울. 시각과 언어. p. 382. 이하 본문에 쪽수만 표기하겠음.

(주2)
들뢰즈(G. Deleuze)는 네오리얼리즘 영화의 이와 같은 잉여실재의 이미지에 대해, 베르그송의 용어를 빌어와 "감각-운동적 도식(sensory-motor schemata)"이라고 부른바가 있다(Deleuze, Gilles. Cinema II. Minneapois, 1994. p. 2). 이는 신체나 물질들간의 작용과 반작용이 정신적인 기획에 따라서가 아니라, 그들 자체의 질서에 따라 도식적이고도 기계적인 관계(반사작용과 같은)를 이루고 있음을 의미한다. 잉여실재의 이미지에서 보게되는 소소한 사건들과 몸짓들은 의식으로부터 독립하여 그 자체 내재성을 갖는 행위들로 이루어진다.

(주3)
바쟁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잉여실재를 재료로 다루는데 있어 유사한 두 작가임에도, 로셀리니(Roberto Rosellini)와는 대조적으로 데 시카의 연출에는 인물들에 대한 애정이나 연민이 지배적이라고 지적했다: "그의 등장인물들에 대한 로셀리니의 사랑은 인간들끼리의 교류 불가능성에 대한 절망적인 의식으로써 그들을 감싸는 반면, 데 시카의 그것은 등장인물들 자신으로부터 방사된다. 그들은 있는 그대로의 그들이지만, 데 시카가 그들에 대하여 품고 있는 애정에 의해 내부로부터 비춰진다"(바쟁, 같은 책, 399).

(주4)
참고로, Deleuze는 그의 책 Cinema I 전체를 할애하여 이 소멸개념을 끝까지 밀고 나간 적이 있다. 예를 들어, 지각 자체를 소거하여 물질-빛이라는 운동-이미지의 상태로 나아가는 문제라든지, 지각에 있어서도 역시 고체적 지각에서 액체적 지각으로 그리고 최종적으로 기체적 지각으로 나아가는 과정은, 명시적인 것들(주관성과 객관성 같은)의 양극단 사이에서 왕복운동을 하거나, 점점 정신성에서 물질성로 이행하는 과정을 보여준 것이었다.

(주5)
예를 들어, 무르나우(Murnau)의 『마지막 웃음(The Last Laugh)』의 첫 시퀀스를 보면, 카메라는 특정 인물을 따라가거나, 화면 틀 속에서 특정한 사건을 제시하지 않는다. 카메라는 마치 사람들 틈에 있는 익명의 어떤 사람처럼, 내려가고 있는 승강기 속에서 승강기 밖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문이 열리면 트랙킹 쇼트에 의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승강기 밖으로 미끄러져 빠져나간다. 카메라는 더 이상 인물과 세트에 제한되어 있거나 종속된 것이 아니라, 마치 화면 안에 배치된 요소들과 함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장 미트리는 이와 같은 카메라의 지각이 "공 존재(being-with)"를 의미한다고 지적한다: "그것은 더 이상 인물과 뒤섞이지 않고, 인물들 외부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인물과 함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완전히 영화적인 공존(Mitsein)이다. 혹은, . . . 인물들 사이에서 확인되지 않은 누군가의 익명의 관점이다."(Deleuze Gilles, Cinema I, Minneapolis, 1986. p. 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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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나 종교적 갈등보다도 더 심각한 현대사회의 비극은 아마도 냉소나 권태에 있을 것이다. 대중 매체가 알려주고 있는 그 어수선한 세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우리 개인들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고 있지 않다는 것. 그 창백한 악몽 때문인지 저 밖의 소란함이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실제로 살고 있다는 안도감을 갖게 할 정도이다. 아직은 무엇인가가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절대적인 침묵의 상태가 오지는 않았다는 사실이 말이다. 과연 내가 살아있는 것일까? 소음과 공포와 분노는 사라져야할 비극이 아니라, 소극적이나마 이 끔찍한 악몽을 부정할 수 있게 하는 유일한 구실과도 같은 것이 아닐까? 아직은 시간이 남았다고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라크인들이나 탈북자들과 같이 죽음의 표지에 서있는 자들에 대해 애도를 취할 수가 있다. 애도가 그다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정작 죽음의 표지에 우뚝서 있는 자들은 바로 우리, 모든 감각과 지각이 마비되어, 가르쳐주는 것만을 배우고, 배운 것만을 되뇌이고, 알고 있는 것만을 느끼는, 바로 우리 자신이다. 왜 이렇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것인지. 왜 더 이상 나아갈 수가 없는 것인지. 나는 정말이지 화가나서 미칠지경이다.


영국 작가 테드 휴즈(Ted Hughes)는 글을 쓰라고 한다. 특히 이야기를. 그래서 작년 크리스마스에 무엇을 했는지, 옆으로 누가 지나갔는지, 그의 모습이 어땠는지, 손짓을 어떻게 했는지, 무슨 말을 했는지, 왜 말을 했는지, 어떤 표정으로, 어떤 눈짓으로, 무엇을 가리키며 내게 말했는지를 떠올리라고. 우선 삶에 흥미가 생긴다고.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 글을 쓸때에 우리는 스스로 깨닫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우리가 사물들을 그 자체로 온당하게 이해하고 느낄만큼 자세히 보고 있지 않으며, 깊숙히 이해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한 단어 한 단어를 쓰려면 그 모든 것들을 자세히 기억해야 하는데, 우리 모두는 한 사건에 대한 모호한 인상들만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쓰는 일이 고역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율동을 하기에는 너무나 뻣뻣해진 지각! 내가 겪은 저들을 완전하게 이루고 있는 나머지는 다 빼고, 나에게 직접 감화를 주었던, 혹은 내가 필요하다고 간주했던, 한 두가지 디테일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같은 것을 겪고도 서로들 완전히 다른 기억들로 살아가고 있으며, 우리 모두는 각자만의 방 속에 들어앉아 저 편의 타자들을 바라보고만 있다. 그래서 천적이 많은 설치류의 청각처럼, 거리를 필요로하는 감각기능이 발달한 나머지, 타인들뿐 아니라 사물들의 내부로 파고들어 지각하는 법을 잃어만 간다. 테드 휴즈의 말을 들어보자.


  ". . . 우리 모두가 사건의 다른 측면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우리 나름대로는 옳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우리가 거의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이며, 한 두 가지만 보고 사실들의 모든 것을 판단한다는 것이다. 만일에 배심원들이 평결을 검토하기 위해 방으로 들어가서, 지난주에 당신이 받은 수업을 당신이 기억하는 식으로, 당신의 사건을 기억한다면, 그들의 평결을 납득할 수 있겠는가?

  이 소음많고, 분주하고, 편리한 현대 생활 속에서, 우리는 매일 매일 별로 중요하지 않은 광경들과 소리들로 폭격을 받는다. . . . 그것들은 말 그대로 의미가 없는 것들이다. 교통 소음처럼, 혹은 텔레비젼 소음처럼 그냥 우리의 흥을 돋굴뿐이다. 그렇게 우리는 실제로 듣지 않고 실제로 보지 않고, 다만 모든 것들을 우리 주변으로 미끄러지게 내버려두는 지루한 습관을 발전시킨다. [무감각해지는 법을 배워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우리가 보거나 듣는 모든 것들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며, . . . 우리는 상처도 안 받고, 거기에 열광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인생을 부유하면서 아무것에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마치 수족관의 뚱뚱한 돌고래처럼. 거기에는 상어도 없고 범고래도 없다. 사육사가 가져다주는 음식만 있으면 된다. 거기서 사람들은 창 저편에 서 있지만, 그들은 그냥 다른 세계의 피조물일 뿐이다. 그러니 아무 문제가 없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며, 오로지 우리를 괴롭히는 것이라고는 지루함 뿐이다.

  나는 최근에 한 실험을 적어놓은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잠수함이 물 속으로 항해하는 영화인데, 이 영화를 미국인들과 아프리카 부족 원주민 관객들을 섞어 놓고 보여주었다. . . . 그 영화가 끝이 나고, 그들에게 무엇을 보았는지를 적으라고 했다.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내가 말했듯이, 미국인들은 우리 만큼 살고 있고, 우리 만큼 사물을 본다. 그들의 보고를 보면, 그들이 거의 아무것도 보지 않았다고 생각할 것이다. . . . 그들은 물론 잠수함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어떤 움직임이었는지 거의 대부분 확신할 수가 없었다. 어떤 종류의 잠수함이었는지, 그것이 심지어는 물 속에서 움직였는지 조차 추측하지 못했다. 아프리카인들의 보고는 전혀 달랐다. 아프리카인들은 거의 대부분이 기억하고 있었다. 잠수함의 모양, 시각적인 외모들; 그들은 그 움직임까지도 정확하게 묘사했다; 그들은 물의 외양까지도 자세하게 묘사했고, 잠수함이 지나간 바닷길까지도 자세히 알고 있었다. . . . 당신은 어떨 것 같은가?

  이제 당신이 쓰려는 이 소설에서 다음과 같은 것들을 연습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그냥 쓰기, 혹은 당신의 상상에 맡기기 그리고 펜으로 그것을 따라 최대로 빠르게 쓰기. 그것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자연스러워질때 까지 계속하기. 두 번째로 당신의 관찰을 연습하기. 물론 당신이 특별한 사물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고, 그것들을 소설로 끌어들이고 있음을 알게 되면, 전에 당신이 했던 것보다 더 세밀해져야 한다. 만일에 어떤 사물이나 장소가 글 속에서 실제적이지 않으면, 그것 혹은 그 혹은 그녀는 거기에 없는 것이다. 사물, 사람, 장소들에 대하여 글을 쓸 때의 요점은, 그들이 스스로 드러나서 실제로 거기에 있듯이 써야한다. . . . 그러면 당신의 소설의 매 페이지 마다 새로운 관찰의 연습장이 될 것이다. 곧, 무엇인가가 사진적인 관찰처럼 당신에게 생생하게 다가올 것이다."

(Ted Hughes. "Writing a Novel: Beginning" 중에서. [  ]표시는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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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에 가면 많은 사람들과 기계들의 소음으로 복잡하고 분주해 보이지만, 가만히 앉아서 지켜보고 있노라면, 매우 단순한 동작만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우선 입구를 들어서자마자 고객은 번호표를 뽑는다. 그리고는 자신의 차례를 그냥 앉아서 기다린다. 이 절차는 입구에서 의자까지 나아있는 직선코스를 따라 움직이면 된다. 갈지자로 걷는다든지, 두리번거린다든지, 암묵적인 규칙이 우리의 심리에 그어놓은 선을 벗어나서 사선으로 이동 한다든지, CCTV의 외화면(offscreen)으로 빠진다든지 하는 일 등은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별 탈 없이 살고 싶은 우리들로서는 말이다. 또 특별히 신경을 쓰고 있을 필요도, 그럴만한 일도 없다. 그냥 돌아가는 디지털 번호표만을 지켜보고 있다가, 자신의 번호가 찍히면 직원에게 다가가 사무를 보면 된다. 대체로 그 사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고지서에 적힌 금액과 지불한 현금의 기계적인 산술을 넘어서지 않는다. 수학적 지식이 필요한 것도 아니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참 동안을 고민할 필요조차 없다. 그러다보니 직원들 역시 모든 일들을 계산기로 해결한다.


간혹 직원이 예상한 결과와 계산기가 내 놓은 결과 값이 일치하지 않아 머뭇거리는 사고가 일어나긴 한다. 그러나 그러한 사고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므로, 곧바로 수정하거나 배제해 버릴 것이다. 그러니 우연한 사고란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이며, 존재하지도 않는 것이다. 아주 사소한 일들을 제외하고 나면, 은행 직원들은 거의 하루 종일 숫자들을 반복해서 두드린다. 머리가 복잡하면 일을 그르치게 되므로, 머릿속을 텅 비워 놓지 않으면 안 된다. 계산하고 도출하고 다시 계산하고 지불하고 수금하고 다시 계산하고, . . . 계산기를 두드리는 여직원의 희고 고운 손등과는 대조적으로, 그 아래쪽은 움푹 패인 손가락 마디들이 시커멓게 줄이 가 있어, 그 동안의 기계적인 몸짓이 그녀의 자유롭던 영혼에 아로새겼을 흔적을 쉽게 짐작할 수가 있다. 그 흔적의 증거일까? 고객이 다가가면 왜 왔는지 궁금해 하는 일은 거의 없다. 아니면 그 흔적에 대한 그녀 자신의 시위일까? 얼굴조차 쳐다보지 않는다.


모든 일들은 서류들로 처리되고 그 서류에는 고객들의 얼굴색과 시큰둥한 표정조차도 약속된 기호들로 연산되어 기록된다. 그러다보니 고객은 자신이 지나치게 평준화되어 다루어지는 것에 불쾌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문제를 제기하거나 그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는 않는다. 은행과 같은 곳에 사람들이 들락거리는 첫 번째 목적은 모든 의심과 불안을 제거하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머뭇거리거나 의구심을 갖는 모든 행동을 배제함으로써, 우리는 인생에서 어떤 편안한 안도감을 취한다. 편안한 삶이 대체로 안정된 자연수의 집합으로 이루어진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모두가 피타고라스주의자가 아닐까? 또 그 안도감 속에서 서로를 바라보지만, 그렇다고 해서 뭐 특별한 것이 보이는 것은 아니다. 특별한 것이 보인다면 오히려 머리에 쥐(경련)만 날 뿐이다. 은행과 같은 곳에 가는 두 번째 목적은 바로 단순해지기 위해서일 것이다.


은행의 광경만큼 현대인의 악몽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도 없다. 사실 그 악몽을 거의 감지하지 못하는 우리는 감각의 굳은 정도가 생각보다 심하다. 모든 의례적인 것들! 두려움이나 망설임 없이 자행되는 행동들! 일상적이고도 상투적인 수순들! 어느 하나 위험할 것 없는 예측된 동작들! 사선과 빗금의 부재 혹은 거부! 탈선의 결과 혹은 처벌에 대한 두려움! 따라서 그저 다소간의 권력에서 비롯된 다소간의 우쭐함! 또 그에 적당히 만족하며 살아가는 샛노란 냉소에 깃든 새하얀 권태! 그리하여 아무런 일도 어떠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 버림받은 개인들의 지긋 지긋한 인생! 그 자리에서 번호를 기다리고 있는 몇 십분 동안, 나는 많은 것들을 두리번거리며 쳐다보고 있었지만, 나의 시선과 주의를 잠시만이라도 잡아끄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저들의 불행일 뿐 아니라 나 자신의 불행. 넓은 창으로 난입해 온 빛이 너무 눈이 부셨던 탓일까? 저 앞의 모든 군상들은 그 빛 속에 휘감겨 부드러운 윤곽선 속으로 점차 사라지는 듯 했다. 나는 마치 우리에 갇힌 맹수가 세끼니 제공되는 토끼를 보며 느끼는 권태만큼이나 나른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또 저들 역시 자신만의 정해진 궤도만을 묵묵히 따르고 있을 뿐, 누군가의 시선과 관심을 기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재화의 사회적 생산을 최대로 밀어붙이는 것이 국가적 사활이었던 시절에는 저 묵묵함이 최고의 미덕이었다. 나는 아버지의 미간에서 종종 그 미덕을 보았었다. 그러나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저 묵묵함이란 그 시절의 낭만적 집단주의의 침묵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 아닌가? 지금의 권태는 어쩌면 그 시절부터 예고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너무 무모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잠시 동안의 7, 80년대식 히스테리에서 치유되어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 것일까? 20대 후반의 몇 몇 후배들은(아마 70년대 후반에 태어나 90년도 후반에 대학을 다녔을) 자꾸만 자신들의 자살에 대한 언급을 유행처럼 하곤 했는데, 그것은 사회적 혹은 개인적 불의에 대한 반동이 아니었으며, 권태를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는 적극적(혹은 소극적) 반항조차도 아니었다. 반대로 그 자신의 삶을 반동적 충동을 통해 재확인하고, 심지어는 자살 충동조차도 그 삶의 일부로 용해시켜 버리는 블랙홀과도 같은 권태의 완벽한 수행이었다. 우리 사회에서 자살담(自殺談)만큼이나 지루한 이야기가 또 있을까? 유사-마조히즘(pseudo-masochism)이라고나 할까? 날기는커녕 날갯짓 시늉만으로 만족하는 것이다. 몸에 상처는 고사하고 칼날조차 세우지 못한 것이다. 반동조차도 아닌, 무한한 되돌아오기 자체인 그것은 하품이 그렇듯이 전염성이 있다.


은행이나 대기업과 같은 공공 기관에 예술 작품이 있다는 것은 이례적인 일처럼 보인다. 그러나 예술 작품이 장식으로 이용되면 그 공간은 그럭 저럭 고급스럽고 세련된 분위기로 연출된다. 이것이 저 기관 구매자들의 최종적인 바램일 것이다. 그 이상 무엇이 있겠는가? 그 바램은 예술 작품의 본질과는 관계가 없다. 하나의 장식은 주변 경관이나 실내의 다른 장식들과 어우러져 용해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두드러져 보이거나 특이한 시선을 끄는 장식은 바람직한 것이 못된다. 전체 공간의 한 부분이 되어 그 공간 전체의 수준에서 계획된 분위기를 자아내려는 목적. 고전 미학은 '아름다움'을 정의할 때, 일치된 감정이라든지 혹은 능력의 합목적성과 같은 개념들을 언급하는데, 이것은 개별적인 것과 전체의 유기적 통일성으로 세계를 설명하려는 철학적 의지에서 비롯된다. 이는 정확히 위에서 말한 장식으로서의 바람직함, 즉 저 구매자들의 바램과 일치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공 건물에 세워진 조각상과 그 벽에 걸린 그림으로 가까이 다가가, 한참 동안을 감상하거나 주시하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된다. 경비원이 무서워서가 아니다. 무의미한 짓일 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놓여진 원래의 목적과도 상충하기 때문이다. 전체의 분위기 속에서만 파악되어, 그 자체의 고유함이 드러나지 않은, 돌출될 위험이 거의 없는, 격자로 구획된 선분을 따라 고통없이 아름다움에 이르는, 그리하여 우리가 은행에서 보게되는 직원과 고객의 시선에 깃든, 부드러운 빛과도 같은 편안함을 주는 예술작품. . . . 한마디로 버려지는 것이다. 유기성, 역사, 구조와 같은 개념들과 나란히 놓이게 됨으로써, 예술작품은 어떤 전체의 상관적 좌표 속에서 버림받는다. 이것이 은행과 같은 곳의 익숙하고도 편안한 분위기가 별 탈없이 유지되는 근본적인 이유일 것이다.


만일에 은행 내부의 구석에 놓여진 저 조각상을 좀 유심히 바라본다면 어떻게 될까? 약간 비틀어진 모양이고, 어린 아이의 두 팔을 꼬아 놓은 듯한, . . . 메비우스의 띠 처럼 보이기도 하는, 보통 크기의 조각상이 선반 위에 다소곳이 놓여 있다. 나는 잠시 동안이나마 그 조각상을 보면서, 어떠한 질문들을 하게 되지 않을까? 은행의 소사(小事)들과 같은 부차적인 삶의 필요와는 그 근본에 있어 다른 질문들. 예를들어, 예술가는 무엇을 말하려는 걸까? 저것이 무슨 형상일까? 왜 저렇게 비틀어 놓았을까? 와 같은 평범한 질문들로부터, 저것은 형상이 아니라 특질 자체가 아닐까? 부드럽지만 다소 무거운 듯한 저 색감은 아마도 나의 꿈 속이 아닐까? 어째서 존재는 비틀어진 위상 속에서만 본질적일까? 와 같은 다소 심오한 질문까지. . . . 이미 익숙한 것들만 있어 편안하고도 안전한 그러나 나른한 이 은행에서, 저 작품은 나로 하여금 저와 같은 질문들과 아울러 이름모를 경련같은 것을 일게 할 것이다. 그 작품은 생소한 물건이 아니라 이상함 자체이다. 지적인 질문 이전에 존재하는 경련상태.


사람들은 해석할 수 없거나 설명할 수 없을 때, 즉 애매모호한 상태에 이르게 되면 바로 저러한 경련을 느낀다. 그 발작 속에서 그는 자신의 모든 존재와 시간을 끄집어 내어 삶을 거대한 무게로 감당한다. 그것은 창조를 위한 일종의 준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술가를 포함하여 저러한 경련에 몸부림치는 많은 독신자들은 그와 같은 고독을 일종의 미학적 단련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그 고독을 견디기 힘들때, 자신을 그렇게 만든 예술작품에 대해 냉소적이 된다: "저게 뭐야 ! 저게 무슨 예술작품이야 !"(이런 점에서 결혼과 냉소는 어떤 긴밀한 관계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순간에도 그들은 내심 알 수 없는 좌절감을 맛볼 것이다. 당혹감에서 비롯된 그들의 불평에는 진실같은 것이 있다. 예술작품은 당혹스럽게 하고, 경련을 일으키면서, 우리로 하여금 어떤 단련에 임하게 한다는 것. 어떤 단련? 예를들어, 카프카의 작품들 속에 등장하는 동물에 가까운 자들의 소리를 듣게하고, 은행과 같은 곳에 나 있는 격자 무늬의 선분들 사이 사이에 끼인 고깃덩이를 보게 해주는, 혹은 주파수를 넘어간 파동을 감지하게 하는, 뭐 그런 종류의
새로운 지각으로 나아가는 단련. 예술은 경련을 일으키는 그 무엇이다.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지각으로 나아가는 능력을 준비하게 한다(능력이라는 말은 바로 저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모든 예술의 윤리적 목적일 것이다.

<문예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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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매 순간 현실의 다양성에 직면한다. 가령, 아무데에나 카메라를 들이대고 셔터를 눌러보라. 그 안에 찍힌 현실의 다양성에 놀라게 될 것이다. 두 사람이 지나가고 있다. 그 아래에 강아지 한 마리도. 강아지는 보도 블럭 위에 흩어져있는 수 많은 서로 다른 낙엽들을 밟아가고 있다. 그들이 지나가는 곳에는 플라타너스 나무들이 줄지어 있으며, 바람 때문인지 가지들이 한 곳으로 쏠려 있다. 나뭇잎의 색을 보니 가을이다. 청명하지만 싸늘해 보이는 날씨이다. 그 두 사람은 대화를 하고 있다. 한 사람은 열심이 말을 하고, 한 사람은 화가 나 있는 듯, . . . 이 사물들 뿐만 아니라 그 사물들에 깃든 감정들, 정서들, 힘, 특질, . . . 한이 없다.


그 사진 안에는 무하하게 많은 존재들이 들어가 있으며, 그것들을 셈하려면 평생이 걸릴지도 모를 일이다. 현실은 너무나 다양해서, 그 어떤 것도 똑같은 것이 없으며, 그 어떤 것으로도 한정할 수가 없다. 그런데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 그 다양한 현실 중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만을 선택하여 사물들을 지각한다. 그 두 사람과 강아지 그리고 그 주변에 펼쳐진 무수한 존재들은 엄연히 내 앞에 있는 것이지만, 나 자신과 무관하다면 나는 그들을 알 수가 없으며 알 필요도 느끼지 못한다. 우리는 단지 우리 자신의 필요에 따라 저들의 외형만을 알 뿐이다. 우리의 지각과 그 지각기능이 만들어 놓은 지식이란, 다양한 현실 중에서 어떤 특정 부분, 그것도 나를 위해 필요하다고 가정된 잘려진 조각만을 취하고, 나머지는 팽개쳐 버린다. 우리는 현실을 그 자체로 보지 못하고, 삶이 요구하는, 그리고 신체의 한계가 요구하는 고정된 관점으로 변형된 일부만을 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비극이다. 무식하고 편협하게도 우리는 무한하게 변하고 움직이고 있는 삶 그 자체를 자의적으로 잘라서 박제시켜 놓고 바라보고 있다는 것. 삶 그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오해에 기인하고 있다는 것.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의 지각 능력, 감각 능력, 오성 능력, 이성 능력, . . . 이들을 보다 많은 것으로, 보다 높은 것으로, 보다 탁월한 것으로 확장시켜야만 한다. 카메라가 포착하는 것 보다도 더 많은 실재를 지각하고 느끼도록 노력하고 훈련해야만 한다. 그 전문가들이 바로 예술가들이다. 삶의 요구로부터 자유로운 그들의 놀라운 지각능력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예술가들만큼 현실적으로 중요한 사람들이 또 있을까? 그것은 우리에게 하나의 역설처럼 다가온다: 예술가들은 삶으로부터 초연해지면서, 비로소 삶과 직접적 관계를 갖는다. 베르그송(Henri Bergson)은 이 문제에 대해 짧지만 매우 아름다운 구절들로 표현하고 있다.

". . . 그러나 우리의 실제적 관심이 그것을 옆으로 치워놓는다. . . . 현재의 생활을 유용하게 조명하고 완성시키는 부분만을 인정하는 것이다 . . . 이러한 선택을 유발시키는 데 한 몫을 하는 것이 두뇌이다. 두뇌는 유용한 기억을 현실화시키고 쓸모없는 기억들은 의식의 보다 낮은 층 속에 간직한다. 지각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행위의 보조수단인 지각은 실재 전체에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부분을 분리시켜낸다. 지각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사물 자체가 아니라 우리가 이익을 얻을 수 있는 부분이다. 지각은 미리 분류하고 미리 명칭을 붙인다. 우리는 거의 대상을 보지 않는다. 단지 그 대상이 어느 범주에 속하는가를 알면 족하다. 그러나 때때로 다행스럽게도 그 감각과 의식이 생활과 보다 덜 밀착해 있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자연은 그들의 지각기능을 그들의 행위 기능에 덧붙이는 것을 잊어버렸다. 그들은 사물을 볼 때, 그 사물 자체로 보며 자신들을 통해서 보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행위를 목적으로 지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지각하기 위해 지각한다―다른 목적은 없다. 오직 즐거움을 위해서다. 그들 자신의 어떤 측면을 통해서, 즉 의식을 통해서건 아니면 감각을 통해서건 그들은 초연히 태어난다. 그 초탈이 어떤 감각의 초탈인가 아니면 의식의 초탈인가에 따라, 그들은 각각 화가가 되고 조각가가 되며, 음악가가 되고 시인이 된다. 따라서 우리가 여러 예술에서 보는 것은 좀더 직접적인 실재의 상(像)이다. 그리고 예술가가 더 많은 수의 사물을 보는 이유도 그가 자기의 지각을 이용하는 데 관심을 보다 덜 갖기 때문이다."(앙리 베르그송, 『사유와 운동』, 문예출판사, 2001. pp. 165-167)

<문예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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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한국 사람들에게 커피는 해방의 이미지와 관계가 깊다. 한동안 유럽에서 이교도의 음료로 불리던 커피가 한반도에 들어온 것은 구한말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던 고종이 처음 커피를 마시면서부터라고 전해진다. 확인된 바는 없지만, 명성황후가 가장 애호했던 음료였다고도 들었다. 한 독일인이 정동구락부에서 커피를 팔면서 일반인들도 마실 수 있게 되었고, 이후 명동이나 종로 등지에 여러 다방(진고개 다방이 최초였다던가?)들이 생기게 되었고, 해방 이후 미군에 의해 대중들에게 퍼졌다고 한다. 특히 명동 등지에서 배회하던 많은 지식인과 문인들은 다방에서 커피를 홀짝거리는 것으로 소일을 삼았으며, 카페에서 노닥거리며 신세계의 열망을 나누던 18세기 유럽의 쁘띠 부르주아지처럼, 이들에게 있어 커피 마시는 일은 신선한 바다 바람을 쐬는 일 만큼이나 이국의 취향을 경험하는 것이었다. 심지어는 거의 다방에서 살다시피 하다가 죽은 한 시인(空超 吳相淳)이 죽기 전에 남긴 방대한 양의 방명록 이름이 사실은 다방 이름으로부터 유래하기도 하였다(淸銅文學). 그가 가장 즐기던 메뉴는 허기까지 배려하여 달걀노른자를 띄운 모닝 커피였다고 한다. 더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이야 어찌되었든, 가만히 회상해보면 우리에게 있어 커피란 다름 아닌 서구(western)를 의미한다. 아시아(소위 동양)의 근대사에서 서양의 체취를 더듬다보면, 모르긴 몰라도 맨 먼저 그리고 가장 진하게 저 야릇한 커피향이 스며든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때나 지금이나 서양의 묘한 냄새가 우리들 개개인에게 주는 이미지란 어떤 것이었나? 이 작은 반도에 피비린내를 몰고 온 야수의 이미지였을까? 아니면 다소 그늘진 그 어둠 때문에 신비롭게 뒤틀려 보이는 동양적 혼돈을 가지런히 정돈해 줄 한줄기 계몽의 빛이었을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그보다도 더, 우리에게 있어 서구의 이미지란 우선 자유분방을 환기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환한 빛과는 조금 다른. . . .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 일본인들이 미국이나 유럽으로부터 두려운 와중에 느꼈을, 또 거기서 배운 조선의 지식인들이 다소 허위의식을 가지고 꿈꾸었을, 뭐 대충 그런 저런 식의 이국적 자유분방 말이다. 바다 넘어 그 자유분방은 꽉 막힌 한반도에, 소극적이긴 하지만, 출구 같은 것을 마련해준 것은 아니었을까? 무수한 세월을 버티고 서서 바다 저편에서 불어오는 바람보다도 더 가혹했던 이 땅의 모든 고귀한 가치들, 개인으로서는 그 완강함을 도저히 거부할 수 없어 받아들일 수밖에는 없었을 그 고집 센 가치들, 또 그럭저럭 적응해 나가다 보면 생활에 스며들어 지루해지기 짝이 없었을 그 가치들을 잠깐이나마 잊게 해줄 출구 같은 것 말이다. 아버지에게 매를 맞고 쫓겨나와, 갈 곳이 없어 헤매던 아이가 우연히 알게 된, 불량한 친구들과의 작은 환락 같은. 많이 두렵기도 했겠지만 서구의 이미지란 아버지의 완강한 강요를 뿌리칠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아주는, 혹은 피비린내의 공포와는 아주 다르게 바다 너머로부터 산들거리는 바람을 타고 희미하게 들려오는 어떤 음악소리가 아니었을까?

저와 같은 의미에서 커피는 생활의 여유를 암시한다. 커피의 서구적 이미지에 깃든 부(副)와 풍요의 환타지. . . . 수 십 년간을 궁핍에 허덕이던 우리에게, 서구의 옷을 걸친 모든 것들은 선망과 부러움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언제나 "최 고~급"에 속한 것이었으며, 나아가 생활의 작은 스캔들이었다. 따지고 보면 풍요의 한 결과에 불과한 커피가 우리에게는 마치 물신주의적 환타지처럼 풍요와 여유의 원인으로 보였던 것이다. 어떻게든 그것을 소유하고 나면 그 소유자의 모든 자격이 생기기라도 하듯이! 이러한 환유적 욕망은 특히 여성들이 더 크지 않았을까? 그들에게 서구는 저러한 긍정적인 이미지 모두를 제공해 줄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원했던 것은 서구가 아니었다. 다만 답답한 이 질서를 좀 벗어나고 싶었을 뿐—정신사적 의미에서 외세(外勢)란 우리 자신의 허물이나 과오에 대한 무의식적 공포가 아닐까? 아마도 외세에 대해 민족적 자존심을 내세우며 강한 거부감을 보였던 이들은 그 허물 많은 답답한 질서의 주체였을 것이다—모든 면에서 궁핍했던 우리에게 커피의 본질은 바로 저 환타지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아버지가 존재하지 않는 해방의 환타지. 다도(茶道)라는 이름의 다소 위선적인 절차(그래서인지 녹차는 남성의 냄새가 짙다)를 필요로 하지 않는 쾌활한 환타지. 그러다보니 커피를 마시는 동안 아버지를 닮은 남편의 얼굴을 애인이나 남자친구의 미소로 탈바꿈시키는 평등과 친교의 환타지. 이 모든 것을 몰고 오면서 커피는 거실이라는 그 자체 환타지의 공간을 열어 제친다: 흔들의자, 벽난로, 정원이 보이는 창밖, 고풍스런 Tea Table, 앙징맞은 Tea Spoon, 그에 어울리는 다소곳한 이야기, . . . 거실의 이러한 풍경을 소유하는 순간, 그녀는 이전의 그 자신이기를 멈추고 전혀 다른 인간이 되는 꿈을 꾸며 스르르 잠이 든다.

따라서 커피는 화학식 C8H10O2N4의 크산틴 구조를(그게 뭐지?) 갖는 카페인 향을 띤 음료이지만, 그 본질은 그와 같은 물질이 아니라 물질 주변을 연기처럼 맴돌고 있는 한줄기의 환타지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물질이 아니라 자아의 환영에 도취되어 있다. 커피에 중독된다는 것은 말할 수 없이 깊은 나르시스의 환영을 쫓아 자기 자신의 수렁으로 빨려 들어간다는 뜻이다. 문을 닫고 한 없이 들어앉으려 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알코올 중독이나 미디어 중독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사실 대부분의 중독에는 이와 같은 폐쇄적 욕망이 많이 있다. 그러나 커피는 이 욕망을 육체적 파괴라든가 다른 대상에의 정신적 의존으로 몰고 가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분위기를 통해서만 욕망을 실현한다. 혀끝의 맛으로부터 나오는 감각적 분위기 뿐만이 아니라, 커피를 마시기 위해 필요한 이런 저런 준비물들을 꾸리면서, 우리는 이미 모종의 의식(儀式)과도 같은 분위기에 젖어든다. 커피는 환타지를 조성하는 환경, 즉 분위기를 만드는 가장 훌륭한 물신이다. 멋들어진 잔에, 브라운 색조의 대기(大氣)에, 세련된 이국의 향에, 우아한 손 매무새에, 쁘띠 부르주아의 여유에, . . . 뭐 이런 것들을 자신의 기억과 욕망에 담아 한껏 표현해 보는거다. 그러다가 커피를 마시며 내가 하는 일이란 나를 바라볼 다른 누군가가 되는 것이다. 참으로 묘하게도 우리는 다른 누군가가 되면서 자기 자신에 도취된다.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나르시스가 그랬듯이. . . ! 커피는 나르시스가 선사한 멋들어진 선물이다.

젊은이들은 커피 맛 때문에 그 카페에 가지 않는다. 조명, 의자, 실내 디자인, 분위기, . . . 이런 것들이 카페를 선택하는 이유이다. 그들이 옳다고 생각한다. 식사 후에 커피를 마시는 일 처럼, 단조로운 절차나 의례와 같이 지루한 습관이 되는 한이 있어도, 우리는 곧 죽어도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저러한 물신들을 갖추어야만 한다. 아마도 최근에 가장 유행하는 카페의 유형을 잘 살펴보면, 사람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인간이 되고 싶은지, 무슨 상상을 하는지 알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러나 커피를 포함하여 차를 마시는 모든 일에는 좀 더 급진적인 의미가 있다. 우선 차를 마시는 일은 구체적으로 행동하고 실용적으로 실천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냥 쳐다보거나, 앉아서 생각하거나, 무엇인가를 느끼는 정도에 불과하다. 차를 마시며 하는 유일한 행동이란 그저 입을 놀리면서 해대는 손짓 정도이다. 탁상공론(卓上空論)이란 용어는 아마도 차를 마시는 일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또 그 "탁(卓)"자는 아마도 찻상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차를 마시며 나누는 대부분의 이야기는 금새라도 실현 가능해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 그 자리를 뜨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대화하는 일 만큼이나 게으름을 피우는 일도 없을 것이다. 부지런한 일꾼들이 가장 싫어하는 일 중에 하나가 바로 커피숍에 앉아 얘기하는 일이다. 뭔가를 해 봅시다!하고 외치며 모이는 곳이 커피숍이라면, 십중팔구 그 모임은 남녀의 밀교집단(?) 정도에 머물 가능성이 높다. 차와 커피는 사람들을 동물적이 아니라 식물적인 존재가 되게 한다. 식물을 정성스럽게 길러본 사람들은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안다. 거기에는 자신에게 유해한 환경에 대한 급진적인 거부가 있다.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퇴폐적이 되면서, 그 자신의 환경을 몸소 예증 한다고나 할까? 계란 노른자를 띄운 커피를 즐겼던 공초(空超) 선생의 식물과도 같은 삶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고 죽어 감으로써 탁한 환경을 조용히 거절하는 것이다. 이것은 투쟁이나 저항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문제이다.

그 비(非) 행동적인 거부를 완성시키는 것이 있다. 바로 부르주아적 근검-절제와 가장 대립적인 가치로서의 사치이다. 그것이 불러올 결과 때문인지, 우리는 그 가치를 가장 두려워하고 또 혐오한다: 아무데나 가면 어때? 어차피 똑같은 커피! 더 심하면, 커피숍은 무슨! 집에 가면 얼마든지 있는데! 내 학창시절 어머니는 내게 용돈을 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다방이나 커피숍엔 절대 가지 말거라! 다 쓸데없이 돈 쓰는 거란다! 차라리 친구 만나면 식당이나 빵집에서 얘기해라!" 그러면 나는 돈을 챙긴 후에 꼭 한마디 한다: "배만 채우고 살아요?" 배를 채우기 위해 차를 마시는 얼간이는 없을 것이다. 커피나 차는 아무리 마셔도 배가 부르지 않기 때문이다. 몇 잔만 마시면 오줌이 마렵기 때문에 오히려 귀찮기만 하다. 더구나 커피는 오줌을 많이 나오게 하는 요소가 있지 않은가?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차나 커피 마시는 일을 사치라고 말하고 싶다. 나의 어머니가 우려했던 것은 바로 사치였음을 나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사치를 겁내던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사치란 일종의 자존심이라고. 과도하게 써 버림으로써, 물질적 재화에 미련을 두지 않음으로써, 폭죽을 터뜨리듯이 그것을 한 순간의 유희로 날려 버림으로써, 우리가 아직은 자연에 목숨을 구걸하는 존재는 아니라는 것을, 빵을 살 돈이 부족해도 남아있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오히려 그 물적 재화의 천박한 속성을 거절할 줄 안다는 것을, 그래서 부르주아는 알지 못하는 그 외의 다른 중요한 삶이 있음을 안다는 것을, 소극적이지만 단호하게 주장하는 것이다. 며칠을 굶은 노숙자가 개죽과도 같은 밥그릇을 앞에 두고도 허겁지겁 달려들지 않고, 허름하게 찢겨지긴 했지만 단정하게 정장을 차려 입을 줄 아는 조용한 자존심 같은 것. 차와 커피에는 바로 이와 같은 자존심이 있다. 가난한 연인들이 값싼 라면으로 저녁을 때우면서도, 실내 디자인이 우아한 비싼 커피숍을 찾는 것. 식모처럼 고단한 하루를 보내고도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는 저 여인이, 자신의 본래적 우아함을 훼손시켰던 아버지나 남편 혹은 시어머니 몰래 거실에 나와 따뜻한 커피 한잔을 만끽하는 것. . . . 바로 저와 같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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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커피를 좋아하는 것은 순전히 게으름 탓이다. 가장 흔하고 값쌀 뿐만 아니라, 가장 습관적인 음료, 그래서 또 가장 편리한 음료. 커피는 상품의 이미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예가 될 것이다. 무엇이든 상품이 되고 나면 편리해지고 습관이 된다. 그러다 보니 지겨워지기도 한다. 다른 신선한 음료는 없을까? 이러한 욕망이 채워지려면 부지런해야 하고, 이는 또 새로운 비용이나 에너지를 부를 것이다. 그러니 그냥 저냥 커피를 마시며 살고 있다.

사람들이 대체로 식사 후에 커피를 마시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다른 신선함을 몰라서가 아니다. 식후 커피는 마치 어떤 의례(儀禮)처럼 보인다. 친구를 만나거나 데이트하고 있는 저들을 보면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우선 약속 장소에서 만나면 식사를 하러 간다. 약 30분에서 1시간 정도 지나면, 곧바로 식당을 나와 찻집으로 들어간다. 아주 익숙한 사이가 아니면, 사실 모든 얘기는 이미 식당에서 끝냈을 것이다. 밥 먹고 헤어지기 뭐하니 예의로 차를 마시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배가 부른데도 불구하고, 즉 내가 정말로 마시고 싶은 것인가? 하고 자문을 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내 손은 의무적으로 커피에 닿아 있다. 점심을 먹고 난 후 친구들과 딱히 할 일이 없으면 봉지커피를 타거나, 봉지커피의 변신이랄 수 있는 동전커피를 뽑는다. 동전커피는 따뜻한 물이 나오는 구멍이 외부에 노출되어 위생상 좋지 않을 것이다. 대장균이 꽤 서식하고 있다고 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간혹 배가 아파 오기도 한다. 그런데도 열심히 들 마시고 있다. 마시면 헛배만 부른, 콜라 다음으로 가장 게으른 음료. 가끔은 이게 다 뭐 하는 짓인지 모를 지경이다.


그러나 커피에는 게으르고 지루한 속성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의 속성이 더 많다(이 점이 콜라보다는 우월한 이유이다). 그것은 대체로 커피 자체에 있기보다는 그것이 품고 있는 다른 것에 있을 것이다. 예를 하나 들어볼까? 내가 아는 한 커피는 여자들이 더 좋아한다. 왜일까? 그들에게 카페인을 더 선호하는 호르몬이 있는 것일까? 남자들은 만나면 술을 마시거나 당구를 치지, 커피를 마시기 위해 일부러 다방이나 카페에 가는 일은 드물다. 간혹 실수로 그런 곳에 간다해도, 앉아서 담배만 피워대거나, 쭈뼛 쭈뼛 고개를 젖히며 하품이나 해 대는 게 전부이다. 그러다가 몇 십 분이 지나면 도저히 참지 못하고 이렇게 말한다: "야! 나가자!" 혹은 "술 한잔 어때?" 심한 경우엔 "에이, 지겨워!" 그러나 여자들은 다르다. 그들은 커피숍에서 밤을 샐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들은 커피를 앞에 놓고 하루종일 수다를 떨어도 즐겁다. 담배를 즐겨 피우는 일도 별로 없고, 술을 찾는 일도 많지 않다. 딱히 몸을 기댈 수 있는 물신(fetish)을 별로 가지지 못한 채 살아왔기 때문인지, 이들에게 허락된 저 커피와 그 분위기에 자신들의 몸을 맡기기를 서슴지 않는다. 커피에 죽고 커피숍을 위해 태어난 존재! 이들이 바로 여자들이다. 남자들의 환타지가 술집이라면, 커피숍은 바로 여자들의 환타지일 것이다. 모두가 일종의 출구라는 점에서는 동일한 장소이다. 이렇게 우리는 술에 취하는 것만큼이나 커피에도 취한다.


그러나 알콜도 없는 커피를 마시며 무엇에 취하는 것일까? 아마도 말(言)일 것이다. 그리고 더 정확히는 대화. 커피 뿐 아니라 차를 마시는 일은 대화를 의미한다. 동양인들은 차를 마시면서 자기 자신과 대화하고 싶어했던 것 같다. 그리고는 거기에 도(道)라는 심오한 세계를 품에 안았다. 차를 마시면서 우리는 물질과 정신을 왕복운동 하듯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한다. 자신과 대화하면서 명상 속에 잠기면 나의 몸은 끝간데 없는 정신적 심연으로 빠져들어 에테르 상태가 된다. 그러다가 차를 마시면 입안으로 퍼지는 모든 감각들―뜨거움, 차가움, 신맛, 단맛, 향기―로 인해 내 몸은 다시 공간을 점유하고 무게를 갖는 몽뚱아리가 되어 내려온다. 감각과 추상의 왕복 운동 속에서 나는 마치 그네를 타듯 재미있는 놀이를 즐기는 것이다.


커피를 마시며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있는 저 여자들 역시 수양(修養)에 버금가는 무엇인가를 한다. 이야기를 하면서 그들은 몸을 데운다. 이야기를 하려면 서로가 이미 잘 알고 있거나 비슷한 관심사를 공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낯선 인물이나 사건 혹은 장소들조차도 이야기 속에 들어오면 반복적인 등장으로 친숙해 지고 거기에 특별한 감정이 느껴진다. 두 번째로 지나가는 길이 익숙하고 가깝게 느껴지듯이, 반복은 거리를 없애고 감정을 촉발한다. 사실 우리의 일상은 생각보다 훨씬 낯설다. 저 만치에 떨어져 그 주인인 우리 자신과는 무관한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그러나 이 낯선 일상이 이야기 속에 실리면, 우리는 그것을 이리저리 만져볼 수도 있고 냄새를 맡아볼 수도 있게 된다. 그래서 이야기 속에 누군가가 등장한다면, 그는 웃음거리가 되기도 하고, 선망의 대상이나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한참 지나고 나면 그의 오밀조밀한 사건과 사연들이, 단단히 주름진 색종이가 물 속에서 흐물흐물 퍼지듯이, 하나 둘 씩 시간의 흐름 속에서 서서히 펼쳐진다. 소설가란 먼 거리에서 신비로운 광채를 띤 어떤 것을 이 편으로 가져와, 그 신비를 벗겨보았더니 실은 별것이 아니었다고 사람들로 하여금 환희의 탄성을 지르게 하는 사람이다. 그렇게 해서 이야기를 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은 같은 평면 위에서 인물들을 바라보고 같은 세계를 그린다. 곁에 바짝 붙거나 바로 앞에서 살아있는 사람이나 사물들은 한편으론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때로는 얄밉거나 귀찮기도 하며, 또 때로는 무섭기도 하지만, 모든 것들은 친숙해지지 않을 수 없다. 두려움과 냉소가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사람들은 바로 이야기를 통해, 떨어져 있던 간극이 식혀 놓은 차가워진 신체를 데우며, 가족을 느끼고 외로움을 없앤다. 친해지고 싶은 사람과 식사를 하면서 몸을 데우듯이, 우리는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한다. 커피와 이야기는 살아가는 것 자체이다.


그러다가 간혹 우리의 몸은 매우 뜨거워지는 경우도 있다. 화가 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연민이 느껴지기도 하고, 사랑을 하기도 하고, . . . 이야기를 하다보면, 선한 것과 악한 것은 뜨거운 스프 상태가 되어 잘 구별이 되지 않을 때가 있다. 따지고 보면 선이나 악은 살아가는데 있어 별로 중요하지 않은데도, 사람들은 이야기를 하거나 들으면 저 선과 악을 떠올리며 쉽게 뜨거워진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인생 자체를 그 뜨거움 속에 내맡길 만큼 순진하거나 어리석은 사람은 거의 없다. 이야기는 그냥 놀이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야기 속의 모든 것은 가여워 보이기만 하다. 죽도록 미운 것도 없으며 영원한 사랑도 없다. 지고한 선도 추악한 악도 모두가 그냥 이야기의 한 소절일 뿐이다. 이야기는 우리로 하여금 초인이 되게 한다. 그리고 이 초인은 간혹 뜨거워지는 자신의 몸을 달래기 위해 커피나 차가 필요한 것이다. 사람들이 커피를 들고 대화에 임하려는 것은 미리 뜨거워질 몸을 스스로 배려해서이다. 내 어린 시절 무섭기만 했던 저러한 뜨거움에 울고 있으면, 어른들은 "괜찮아! 다 그런 거야!"라고 타이르곤 했었다. 마찬가지로 커피를 마시며 그 뜨거워질 시간을 기다리는 모든 사람들은 어른이다. 화나는 일이든, 슬픈 일이든, 자신의 통제력으로는 가눌 수 없는 온도를 기꺼이 받아들이며, 커피나 차와 같은 물질의 힘을 빌어 누그러트릴 줄 아는 초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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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 Cinema를 읽기 위해서는 반드시 넘어가야 할 부분이라서 번역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물질과 기억>이라는 제목으로 동문선에서 번역판이 나왔지만, 아마도 역자가 술을 마시고 번역을 한 것이 아닌가 싶다. 책 전부를 번역하고 싶었지만, 시간도 없고 해서, 방학을 이용해 가장 중요한 1장만 손을 대었다. 중간에 주석도 붙여 놓았으니 참고하시라. 본격적으로 보다는, 공부를 위해 번역을 하였으므로, 큰 기대는 없으시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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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기와 관련된 바따유(G. Bataille)의 논의들을 따라가다 보면, 궁극적으로 접하게 되는 하나의 주제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이 주제는 그를 헤겔(F. Hegel)주의적 관점에 위치시키는 결과를 낳게 한다. 초보적 관점에서 볼 때, 그는 헤겔주의자이다. 에로티즘과 위반의 논의들은 절제된 형식을 따라 직선을 그어 가듯이, 하나의 과정 즉 부정적 정서들로 귀결되며, 또 한편으로는 부정의 메카니즘에서 시작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 . .




<문예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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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 접근하는 여러 가지 방법(분류방식, 미적 효과, 역사적 고찰 등)이 있지만, 우선 그것의 본질은 활동하지 않는 시간과 관계가 있다는 점을 지적해야겠다. 사진이 미래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경우라든가, 혹은 현재적 지각에 특별한 촉발을 불러일으키는 경우에도 사진은 과거와 관계를 맺고 있다. 사진을 이해하는데 있어 현상학적 관점이 개입하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듯하다. 일단 사진 속에 담고자 하는 사물이 포착되고 나면, 그 포착된 대상물은 더 이상 살아있길 멈춘다. 사진 속의 객체들은 모두가 정지된 시간에 감싸인 채 얼어붙어 있다. 마치 저 풍경이 시간의 한 구역 혹은 이미지라도 된다는 듯이! 영화는 어떤가! 만일에 우리가 영화를 사진들의 연속적인 결합이라고 간주한다면, 영화의 실체는 매우 우스꽝스러운 모양새를 가지게 될 것이다. 죽은 것을 살아있는 것처럼 보여주려는 노력만큼 부자연스러운 것은 없을 테니까! 베르그송(H. Bergson)이 누누이 강조했듯이, 그것은 생명과 운동에 관하여 잘못된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사진과 영화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오히려 살아있지 않은 사물에 실을 매달아 그것이 마치 움직이는 듯 보이게 하는 인형극과 같은 기술이, 사진들의 연속적인 결합이라고 정의된 영화보다는 훨씬 더 감동적일 것이다. 인형극은 차라리 죽음에 관한 유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영화나 인형극은 죽어있는 시간과 관계가 있음에도, 모두가 운동이나 시간과 직접적으로 호응한다. 그런데 사진은 경우가 좀 다르다. 사진은 존재로부터 그 본성인 시간의 지속을 따로 떼어내고 모든 영혼들을 빼앗아 박제해 놓은 것처럼 무미건조해 보인다. 동작이나 움직임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 보이며, 애초에 그러한 의도조차 가지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사진은 관념과 유사한 외연을 갖는다. 관념은 우선 사물을 운동성으로부터 분리하고 추상한다. 이는 운동이나 생명 그 자체를 다루는 경우에도 그렇다.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흐르는 실재를 경험 내부로 포섭하듯이, 관념은 운동과 시간을 공간적 범주로 고정시킨다. 마찬가지로 사진은 활동이 멈춘 사물의 순간적인 포즈(pose)를 포착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현상학적 에포케(epoche)라고나 할까? 풍경들과 그것들을 둘러싼 모든 시간이 괄호 안에 묶여버렸다. 그렇기 때문에 사진에 포착된 포즈는 사물 그 자체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어떤 경우든지 포즈란 “대상물의 자세(태도)나 카메라를 다루는 사람의 테크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읽어 내려는 의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Roland Barthes, La Chambre Claire(Editions du Seuil, 1981), p.78. 참고로, 이 책은 Richard Howard가 영어로 번역하여 Hill & Wang(New York)에서 1998년에 Camera Lucida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이런 이유에서 사진은 실제의 대상물을 그 내용으로 하면서도, 그 자체와는 직접적인 관련을 맺고 있지 않으며, 따라서 그것은 본질적으로 현상학적이다. 사진에서의 포즈란 의식의 활동이 그려낸 한 폭의 그림, 말하자면 현상학적 노에마(noe`me)이다. 반면에 영화는 사진과 마찬가지로 순간적인 자태들로부터 시작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새로운 자태들로 끊임없이 대체되고 치환되면서, 지시되고 있는 사물의 포즈가 변질되어 노에마는 끊임없이 흐르게 된다. 영화에서의 컷(Cut)은 새로운 것들로 인해 그 고유한 자태를 박탈당하거나 거부된다. 영화가 운동 그 자체의 이미지를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참고로, 우리는 운동이나 시간 속에 순간이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순간성에 관한 이 망상은 두 가지 이미지로 공존하고 있다. 한편에는 완전하고 결정된 순간으로서의 포즈 혹은 자태가 있다. 이것은 말하자면 정신적 순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에는 불완전하고 미결정된 순간으로서의 컷이 있다. 바로 감각적으로 포착된 것으로서의 물질적 순간이다. 또한 이 두 이미지는 운동을 설명하는(혹은 그것을 재구성하는) 두 가지의 관점을 나타내준다―운동에 관한 이 두 가지 관점에 대해서는 질 들뢰즈(Gilles Deleuze)의 Cinema I 첫 장에 자세히 연구되어 있으므로, 나는 그 내용을 요약하는 식으로 활용하겠다. 전자의 경우에는 고전 철학의 관점인데, 여기서 운동은 culminating point, privileged instant, telos, acme` 등의 용어로 정의할 수 있는 정신적 사건들, 즉 지적인 요소들의 변증법적 질서 혹은 이상적인 종합으로 이해된다. 즉 운동이란 영원한 것으로서의 형상이나 이데아들 간의 이행이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있음’과 ‘없음’이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으로서의 운동, 해소할 길 없는 모순 혹은 비존재로서의 운동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후자의 경우에는 현대 과학의 관점을 보여준다. 현대 과학은 운동을 이상적인 것들의 이행이나 종합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하고도 불특정한 파편들의 연속으로 이해한다. 가령, 현대의 천문학은 하나의 궤도와 그것을 횡단하기 위해 필요한 시간의 관계로 운동을 분석하였다(Kepler의 경우). 또 현대 물리학은 떨어지는 물체가 뒤덮어버리는 공간을 시간으로 연결하였다(Galileo의 경우). 현대 기하학은 직선 위를 움직이고 있는 어떤 순간의 점의 위치, 즉 평곡선의 방정식으로 운동을 분석하거나(Descartes의 경우), 공간적 단면이나 구역(section)을 무한하게 근접시킴으로써 곡선 즉 운동을 분석하고 재구성하였다(Newton과 Leibniz의 경우). 어떤 경우든지 현대 과학은 자태들의 변증법적 질서가 아닌 불특정 순간들의 기계적 연속으로 운동을 정의한 것이다. “현대 과학은 무엇보다도 . . . 시간을 독립변수(independent variable)로 취하려는 열망이라고 정의 되어야 한다.”(Henri Bergson, Creative Evolution(Eng trans. Arthur Mitchell, 1954). p. 355.) 마찬가지로 사진과 영화의 존재론적 차이는 바로 저 두 개의 서로 다른 이미지와 관계하는 방식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에는 완결된 풍경의 이미지로서의 포즈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물질적 파편으로서의 컷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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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과 얘기를 해 보면 그 자신도 모르게 내뱉는 어색한 단어나 말버릇 등을 발견하게 된다. 한 때, 정신 분석가들은 이러한 단어나 버릇을 가지고 그 사람의 무의식을 아우르려고 했다. 그들은 이를 징후(symptom)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런데 이 방법은 꽤 설득력이 있었다. 말을 실수한다든가 아니면 그 자신(의식)도 모르게 비집고 솟아오르는 이미지들의 표현을 가만히 살펴보면, 그가 의식적으로 만들어내는 언어의 표면 아래에서 실제로 그를 지배하고 있는 어떤 욕구 혹은 억압을 포착할 수가 있다. 이 욕구나 억압을 잘 숨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서투른 사람도 있다. 또 우리는 서투르긴 하지만 저와 같은 방식에 따라 경험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읽기도 한다. 그 징후라는 것은 바로 그 사람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혹은 무엇을 싫어하고 있는지, 혹은 무엇에 두려워하고 있는지, 혹은 무엇이 그를 저렇게 만드는지 엿볼 수 있도록 해주는 일종의 틈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권력을 하나의 실체로 엿볼 수 있게 해주는 징후 즉 틈새가 있다. 바로 몸과 그 포즈이다. 진정한 권력이란 의식을 사로잡기 이전에 몸을 지배하는 과정으로부터 나온다. 그래서 우리는 언어나 의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우선적으로 몸이 반응함으로써 권력에 화답한다. 권력을 이렇게 정의해보자: 두 손을 모으게 하거나, 머리를 숙이게 하거나, 들어가기에는 너무나 비좁은 곳으로 내 몸을 몰아세우는 힘. 반복하고 싶지 않은 경험을 가능케하는 힘. 내 몸을 무(無)의 상태 쪽으로 몰아가는 힘. 나아가 나의 존재를 스스로 객관화하여 반성하게 하는, 즉 정신을 불러들이는 몸의 상태 혹은 그 자세. 이쯤되면 헤겔이나 사르트르나 푸코 등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너무 복잡하게는 생각하지 말자. 정신이나 시선(視線)과 관계하는 권력에 대하여 그들의 말을 간단히 요약한다면, 권력이란 "나의 존재를 나 자신으로부터 발견할 수 없게 하는 힘" 혹은 "나의 고유한 본성이 나 자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른 어떤 것에 의해 정의되게끔 하는 힘", 좀 지나치게 단순히 말해 "나를 종속시켜 노예로 만드는 힘"이다. 어쨌든 우리의 몸은 의식이 눈치채지 못하는 경우에도 더 빠르고 섬세하게 그 무지무지한 힘에 반응한다. 한 예로, 찰리 채플린은『위대한 독재자』라는 영화에서 몸과 권력의 관계를 의자의 높이로 표현한 적이 있었다: 히틀러는 자신을 방문한 무솔리니의 의자를 자신의 것보다 낮게 함으로써 위계에 관한 암묵적인 동의를 강요한다. 물론 무솔리니가 뚱뚱한 몸에도 불구하고 이를 잘 간파하였으므로, 히틀러의 교활한 술수는 실패하고 만다. 누구든지 자신보다 사회적으로(외면적으로) 더 큰 힘을 가진 사람과의 대화를 상기해 보자. 내 몸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 어떤 포즈로 있는지를 떠올려 보자. 그러면 이 말뜻을 잘 알게 될 것이다.


권력을 환기하는 몸의 포즈들 중 일상 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예가 바로 기다림이다. 기다리는 사람은 언제나 머리를 숙이고 있다. 절망으로 무너진 사람, 궁금해서 두리번 거리는 사람, 화가 나서 눈을 부라리는 사람, . . . 이들은 모두가 고개를 숙이고 기다리는 자신과 기다림의 대상 사이에서 서성이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는 자신으로 되돌아갈 수도 없으며, 기다리게 하는 그것에 치달을 수도 없다. 기다림이란 자신으로부터 빠져나가 버린 영혼이 어디로든 갈 수 없는 상태, 말하자면 연옥의 기로에서 배회하는 부랑아의 포즈라고 말할 수 있다. 이미 기다림이 시작되면 더 이상 선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기다릴 것인가 기다리지 않을 것인가의 문제는 나의 몫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기다리게 하는 그의 특권이다. 묘하게도 기다림의 주체는 기다리는 자가 아니라 바로 그 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기다림이란 언제든지 하나의 권력과 같은 형태로 경험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홍상수의 영화를 보면 인물들이 언제든지 무엇인가를 혹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전화를 기다리거나, 학과장이나 교수가 전화를 끊기를 기다리거나, 약속시간을 기다리거나, 아직 나오지 않은 사람을 기다리거나, 동사무소에서 공무원의 대답이나 결정을 기다리거나, . . . 한이 없다. 우리는 모두가 기다리는 자이거나 기다리게 하는 자이다. 그러다가 화가나면 강원도로 춘천으로 부산으로 경주로 여행을 하거나, 다른 누군가에게 가학적이 되거나, 배회하거나 배신을 한다. 홍상수의 영화에는 대략 네 사람이 등장하는데, 여행하는 사람, 배회하는 사람, 가학적인 사람, 그리고 배신하는 사람이다. 기다리게 하는 사람은 무엇인가를 쥔 사람이며, 기다리는 나는 그것을 욕망 하는 사람이다. 그 출처가 더 이상 나에게 속하지 않은 저당잡힌 욕망! 이것이 기다림의 정의이다. 우리가 기다리면서 화가 나는 이유는 그 시간이 지루하거나 아깝기 때문이 아니다. 복종해야만 한다는 사실! 이미 복종이 시작되었다는 사실! 기다림 속에서 이미 하나의 위계적 질서를 수긍하도록 하는 힘이, 마치 닿고 싶지 않은 어떤 몸뚱아리가 슬며시 내 몸으로 다가오듯, 나를 누르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 불쾌함이 견딜 수 없는 것이다.

<문예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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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침묵

monograph_column 2006/08/08 16:49

여담 한 마디 하겠다. 나는 최근에 말수가 적어졌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꽤 오래 전부터 그렇게 된 것 같다. 특별히 누군가를 만나서 수다를 떠는 경우가 적어졌고, 혼자 살다보니 일주일에 며칠씩이나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보내는 날이 많아져, 자연스럽게 말이 없어진 것이다. 이제는 조리 있게 설명하거나 상대의 말에 재치 있게 응수하는 테크닉조차 다 사라지고 없다. 말이란 습관이 아닌가? 심지어는 사람들을 만나서 잡담을 하는 일이 점점 고역이 되어가고 있다. 물론, 내 직업상 학생들 앞에서 강의를 하지만, 그것은 말하기가 아니라 오히려 글쓰기가 아닌가 싶다. 우선 충분한 생각을 하고, 그 생각을 마음속에서나마 정리하고, 이런 저런 상상을 감미료로 채색하여 준비하는 것이다. 교재가 있으니 할말이 없으면 그것을 읽기만 하면 된다. 그러다 보니 강의 시간에는 학생들을 쳐다보지 않게 되었다. 준비된 것만 잘 기억하여 낭독하고, 마지막에 가서 그들의 수긍하는 고개 짓만 확인하면 만사형통이기 때문이다. 강의란 결코 대화일 수가 없는 것이다. 어쨌든 이런 식으로 나는 몇 년 동안을 말 한 마디 없이 수월하게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말수가 적어진 것은 내 주변의 불가피한 조건들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거기에는 다른 이유가 있다.

우리는 지하철이나 대합실과 같은 공공 장소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대면하고 부딪치지만, 결코 한번도 그들과 시선을 마주치지 않는다. 아무 곳에서나 군중들의 사진을 찍고, 그 사진 속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을 관찰해 보라. 제각각의 낯선 눈빛들에 놀랄 것이다. 자신만의 방으로 향하는 그 시선들은 마치 거리에서 혹은 다리 위를 걷고 있는 뭉크(Edvard Munch)의 초상들을 보는 듯하다. 개인들은 바로 그 낮선 시선을 통해 다가올 미래의 관계에 대한 이름 모를 불안을 표현하는 것처럼 보인다: "날 좀 내버려둬!"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현대인들의 소외는 고립이나 고독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가져올 상상된 결과에 대한 두려움에 있다. 뭉크가 고독을 절망과 관계짓는 것도 다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현대인들의 정신적 소외는 고독이 아니라 오히려 수다가 예증하고 있다. 말을 하지 않으면, 계속해서 말이 이어지지 않으면 죽음 뿐!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침묵이며, 그래서 말이 중단된다면 절대적인 무(無)의 상태에 직면할지 모른다는 막연한 공포에 사로잡힌다. 그러니 우리의 수다는 견딜 수 없는 고독에 대한 가련한 자기변론이 되거나, 나아가 더 심해진다면 환상적 도피 같은 것이 되기 십상이다. 정신적 소외란 고립이나 고독이 아니라 그에 대한 공포, 즉 자기 자신에 직면하기를 두려워하는 일종의 돌림병이다. 그래서 때로 사람들은 이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마치 수건을 돌리듯이 자신의 공포를 한없이 돌려가면서 타인에게 투사하고, 그로부터 일종의 공범의식 같은 것을 만들어낸다. 절대적 무에 직면하지 않도록, "나뿐만이 아니라 바로 당신도 노력을 해야할 것 아니오!"라고. 말이 없는 사람을 보면 왠지 모를 불쾌함이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침묵하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말을 강요하는 관계가 된다. 친구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왜 아무 말도 없어? 얘기 좀 해봐!" 만일 이 대사가 수십 년을 함께 살아온 어떤 부부의 것이었다면, 그들만큼 불행한 관계가 또 있을까? 그 대사가 암시하는 대화의 부재 때문에 불행하다는 말이 아니다. 그들의 불행은 그 대사 자체, 저 수다에 있다는 말이다. 저토록 수다스러운 배우자가 있다면, 당신은 이미 저주받은 인간이다. 사람들이 도서관만큼이나 조용한 출근 만원 지하철을 문제삼지 않는 것은, 그 질식할 것 같은 침묵 속에서나마 저러한 수다를 듣지 않아도 괜찮다는 암묵적인 사회적 합의가 있기 때문이다. 마치 하나의 제도처럼 애초부터 거세되어버린 관계를 축복처럼 묵인하고 있는 그들의 태연한 침묵을 보라. 그러나 삶의 대부분의 시간을 진공 상태의 지하철 속에서 태연한 죽음으로 보낼 수는 없다. 그래서 서로 아무 말이 없는 동안에도 우리는 자주 저와 같은 수다를 듣게된다. 침묵 속의 수다를 느끼는 관계를 우리는 불편한 사이라고 말하곤 한다. 수다쟁이들을 간혹 보게되는데, 내가 보기에 그들은 말을 못하게 하는 억압에 대한 단순한 저항이 아니라, 오히려 입을 막는 소극적 억압보다 더 억압적인 요구, 즉 말하게 하는 강요를 통해 억압을 적극적으로 실행하고 있는 기제이다. 억압적 고문은 말을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말을 강요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히스테리를 넘어 새디즘적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말을 듣기 위해 오랜 시간동안 앉아서 귀를 기울인다. 그러나 그가 하는 모든 말에 흥미를 느끼기 때문에 그러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제대로 된 흥미로운 토론이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똑같이 반복되는 이야기들,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화두들, 이것이든 저것이든 언제든지 교정이 가능한 사실들, 모종의 의도 하에 뒷 냄새를 풍기는 사족(蛇足)들, 다 알고 있어서가 아니라 궁금하지 않은 정보들. . . . 정치가들의 수다야 지적할 가치도 없고, 라디오나 텔레비전에 나오는 뉴스 기자들의 수다를 가만히 듣고만 있어도 역겨움 같은 것을 느낄 때가 있다. 심지어는 모든 방송국의 뉴스가 한결같이 내보내는 똑같은 대사와 똑같은 각도의 카메라를 보고 있으면 겁이 나기까지 한다. 저것이 어떻게 가능한 일일까? 수다가 강요인 이유는 다름 아닌 그 상투성 때문이다. 현대사회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억압은(그래서 심지어 악이 되는) 바로 그 진부하고도 상투적인 말들이 아닐까? 2차 대전 이후 지금까지 미국이라는 나라가 인류의 적(혹은 악)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가공할 만한 그들의 침략 때문이 아니라 맥빠지게 하는 그 진부함과 상투성에 있다. 그들은 예측된 감동을 제조하는 경이로운 능력이 있다. 우리는 그들의 침략전쟁에 반대 할 것이 아니라, 그 보다 더 최선을 다하여, 헐리웃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여인들의 하이힐이 걸쳐진 다리, 키스할 때면 여지없이 올라가는 그 왼쪽 종아리를 잘라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사드의 소설이 독자들에게 고문을 맛보게 해주는 요소는 다양하게 묘사된 새디스트의 외설과 고문들 때문이 아니라, 상투적이고도 진부한 논증이 끊임없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물론 그 반복이야 처절한 의도를 품고 자행되는 것이기 때문에 예술적이라고 말하는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상투성이란 물론 대중매체에 의해 실천된 것이긴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대담함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는 왜소한 부르주아의 산물이다. 자본가들은 결코 도박을 모른다. 시장판에서 살고 있는 개인들은 이를 잘 내면화한 것 같다. 그렇게 해서 사람들은 이 상투성에서 나오는 지루함을 피하기 위해 술을 마시고 수다를 떨거나, 많은 사람들이 들떠있는 장소에 나가 춤이라도 한 판 추고 싶어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것은 기름을 안고 불 속에 뛰어드는 것보다도 더 위험한 짓이다. 그것은 오히려 부르주아가 원하는 것이기도 하다.

거두절미하고, 차라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끊임없이 침묵을 메우려는 두려움에 찬 불필요한 화두들이 아니라, 정말로 값진 화두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되는 자리, 바로 침묵의 자리가 아닐까? 흥미롭고도 중요한(이 둘은 상호 보완적이다) 말이 나오지 않으면 안 되는 고독! 아무 할 말이 없어도 두렵지 않은 정다움! 말하지 않아도 전혀 심리적 처벌이 가해지지 않는 조용한 신뢰! 흥미로운 대화 뿐 아니라, 진정으로 값진 것이 창조되려면 바로 저와 같은 조건들이 마련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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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족의 구조를 밝혀보려던 레비스트로스(Claude Le'vi-Strauss)는 금기의 주제에 직면하면서 혼란에 빠진다. 많은 부분 그가(혹은 인류학) 의존해 왔던 자연/문화라는 구조적 공리를 이 주제에서는 더 이상 유지하기 어렵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인간에게 보편적이고 자연 발생적인 것은 자연적 질서에 속하며, 하나의 규범에 관계하거나 상대적이고 특수한 것은 문화에 속한다"(Le'vi-Strauss 8). 이 공리에는 자연과 문화가 서로 양립할 수 없다는 이분법의 구조(충만한 자기현존으로서의 자연과 파생적이고 변형된 것으로서의 문화)를 전제한다. 그런데 그는 근친상간 금지의 양립성을 발견하면서 이 공리가 포기되어야 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근친상간 금지는 모든 사회에 보편적이므로 자연적 질서에 속하는 반면, 그것은 금지하는 규범으로서 문화적 질서에 속하기 때문이다. 금기는 인류학의 "스캔들"이 되어버린 셈이다. 이 스캔들은 풀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다. 거기에는 욕망과 더불어 위반의 테마들이 얽혀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문화적 본질인 금기로부터 자연적 본성을 발견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금기가 인간의 자연적 본성인 욕망과 맺는 관계 때문일 것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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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드의 <쾌락 원칙을 넘어>에서 중요한 주제별로 선별하여 제목을 달고 주석을 첨가한 발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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