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10'에 해당되는 글 40건

  1. 2006/10/26 Spinoza를 이해하기 위한 몇 가지 개념 정리: 죽음에 대하여 (12)
  2. 2006/10/26 Spinoza를 이해하기 위한 몇 가지 개념 정리: 신이 아담에게 금지한 열매의 의미 (6)
  3. 2006/10/26 Spinoza를 이해하기 위한 몇 가지 개념 정리: 현실을 이해하는 두 길
  4. 2006/10/26 Spinoza를 이해하기 위한 몇 가지 개념 정리: 선/악을 좋음/나쁨으로 바꾸면 무엇이 달라질까? (8)
  5. 2006/10/26 Spinoza를 이해하기 위한 몇 가지 개념 정리: 윤리학과 도덕의 차이 (3)
  6. 2006/10/26 Spinoza를 이해하기 위한 몇 가지 개념 정리: 의식에 대하여 (6)
  7. 2006/10/26 Spinoza를 이해하기 위한 몇 가지 개념 정리: 윤곽
  8. 2006/10/26 Georges Bataille 관련 자료 (1)
  9. 2006/10/26 George Bataille 관련 자료 (2)
  10. 2006/10/26 George Bataille 관련 자료 (3)
  11. 2006/10/26 Decartes의 <Meditation>
  12. 2006/10/26 Decartes의 <Discourse>(2)
  13. 2006/10/26 Decartes의 <Discourse> (1)
  14. 2006/10/25 Epicurus의 <Letters to Monoceus>
  15. 2006/10/25 Epicurus의 Principal Doctrines
  16. 2006/10/25 George Berkeley의 저작
  17. 2006/10/25 Presocratic fragments and testimonials
  18. 2006/10/25 글을 쓰는 모든이들에게!
  19. 2006/10/22 인문학과 선언행위 (6)
  20. 2006/10/19 짧지만 기나긴 행복투쟁 (4)
  21. 2006/10/18 미디어와 사이버공간: 사이버공간과 삶의 세계
  22. 2006/10/18 미디어와 사이버공간: 사이버네틱 윤리학, 하이퍼텍스트와 문학의 미래
  23. 2006/10/18 미디어와 사이버공간: Stuart Moulthrop의 Hegirascope의 몇 가지 형식적 특징
  24. 2006/10/18 미디어와 사이버공간: Donna Haraway의 Cyborg Manifesto에 관한 짧은 해석
  25. 2006/10/18 미디어와 사이버공간: As we may think (by Vannebar Bush)
  26. 2006/10/18 미디어와 사이버공간: 왜 미디어는 메시지인가?
  27. 2006/10/16 에이젠슈타인(S. Eisenstein)의 몽따쥬 이론에서 차이의 문제 (8)
  28. 2006/10/16 에이젠슈타인(S. Eisenstein)의 충돌 몽따쥬 이론에서 변증법
  29. 2006/10/13 일본 미인화 (10)
  30. 2006/10/13 Michel Foucault에 관한 저널 (2)

죽음은 독립된 혹은 폐쇄된 하나의 개체의 관점에서만 성립하는 개념이다. 그러나 신의 관점에서 죽음은 불합리하며 심지어는 불가능하기까지 하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죽음이란 신체를 이루고 있는 부분적 요소들이 더 이상 그 신체를 유지하는 관계를 가지지 않을 때이다. 즉 서로 다른 질서를 갖는 부분 요소들이 특정한 관계 아래에서 특정한 개체를 구성하는데, 만일 이 개체를 특징 짓는 특정한 관계가 해체되거나, 더 이상 부분 요소들의 결합하는 관계가 파괴되기에 이르면 죽음이라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처럼 특정한 신체를 이루고 있는 관계가 파괴되거나 해체된다는 것은 "영원한 진리 그 자체인 이 관계가 더 이상 현재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부분들에 의해 실행되지 않게 될 때를 가리킨다. 사라진 것은 영원한 진리인 관계가 아니다. 사라진 것은 그 관계가 그것들 사이에서 성립되었던 바의 부분들이고, 이제는 다른 관계를 취하고 있는 부분들이다. 예를 들면, 독은 혈액을 해체시켜, 즉 혈액의 부분들을 다른 신체들을 특징 짓는 다른 관계들 속으로 들어가도록 결정한다(더 이상 혈액이 아니다)"(Deleuze 32-33). 죽음은 신체를 이루고 있는 수많은 부분적 요소들의 특정한 관계가 파괴되면서, 이 부분적 요소들이 새로운 특정한 관계로 이행함을 의미한다. 그래서 죽음은 관계 그 자체가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관계를 맺고 있는 부분들이 새로운 다른 부분들과 맺는 새로운 관계의 형성을 의미한다. 진정으로 파괴되는 것은 신체를 특징 짓는 특정한 관계이며, 이 관계 아래 배치된 특정한 부분적 요소들인 것이다. 따라서 신의 관점으로 볼 때, 죽음은 관계 그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관계에서 다른 특정한 관계로의 변형일 뿐이다. 신의 관점에서 절대적인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악은 어떤 무엇도 아니라는 논제는 . . . 온갖 방식을 통해서 서로 결합되는 관계들이 언제나 존재한다는 것이다. . . . [관계들의 적합 부적합에 따른 상이함들] . . . 이런 의미에서, 신체가 시체로 전화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말할 수 있는 죽음이 있다. . . . 슈바르첸 베르크는 죽음은 생물학적 문제가 아니라 형이상학적인, 혹은 윤리학적인 문제라고 말한다: <신체는 시체로 변할 경우에만 죽은 것이다 라고 말할 근거가 없다. . . . 왜냐하면, 때때로 어떤 사람은 아주 심한 변화를 겪어서, 내가 보기에 그 사람이 동일한 사람이라고 쉽게 말할 수 없을 것 같은 일이 일어나기 때문이다"(Deleuze 33-34).

인용 및 참고
Deleuze, Gilles. Spinoza: Practical Philosophy. trans. Robert Hurley. San Francisco, City Lights Books, 1988.
Spinoza, Benedict de. A Spinoza Reader. ed & trans. Edwin Curley. New Jersey, Princeton UP, 1994.

Posted by huun

'윤리'라고 불리는 행위 양식을 금지의 결과라고 이해할 때, 윤리는 가치에 대한 종교적 결정을 수반하게 된다. 가치의 종교적 결정은 존재가 선한 것인가 혹은 악한 것인가를 판별하는 문제이다. 이런 의미에서 존재 양태는 신의 말씀과 계율에 따라 선한 본성과 악한 본성의 두 계열로 분할될 것이다. 그렇다면 윤리학은 선과 악을 결정하는 (의미의)종교적 계열화와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러나 여기에는 한 가지 난점이 있다. 이 난점은 선과 악의 결정이 무엇에 연유하는가에 관한 발생적 정의의 차례가 돌아오면 반드시 맞게 되는 문제이다. 왜냐하면 이 차례가 되면, 지금까지 우리 자신이 결정했던 가치들을 송두리째 포기하고, 모든 존재의 근원을 신의 계율에 맡겨야 하기 때문이다. 윤리가 금지의 결과로서, 존재의 행위를 결정하는 종교적 가치들의 문제로 간주되는 순간,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서는 안 된다: 어째서 신은 아담에게 열매를 금지했는가? 금지된 열매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왜 금지된 열매를 우리 자신의 윤리로서 이해해야 하는가? 이와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없는 아담은 따라서 신의 계율을 금지와 도덕으로 이해한다. 도덕은 계율을 재현하고 받아 적는 과정이다. 신의 법칙과 섭리들이 이러한 식으로 주어질 때, 우리는 신과 그로부터 파생되는 모든 양태들을 원인으로 받아들인다. 우리의 의식이 포착한 자연의 섭리가 원인으로 이해될 때, 그것은 우리 자신을 구성하고, 우리가 복종해야 할 금지가 된다. 그러나 스피노자에게 있어 신의 섭리는 금지를 의미하지 않는다. "신은 아무 것도 금지하지 않는다. 다만 신은, 그 열매는, 그 구성 때문에 아담의 신체를 해체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아담에게 인식시킨다. 열매는 비소처럼 작용한다. . . . 나쁜 것은 중독, 소화불량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논제 . . . 심지어 그것은, 개별적 요소들을 고려한다면 배척이나 알레르기로 이해될 수 있다"(Deleuze 31). 다시 여기서 신체들의 결합 방식들에 대한 설명이 뒤따른다. 각각의 신체들은 자기자신에 적합한 다른 신체와 결합하려는 속성을 갖는다. 또한 이와는 반대로, 신체들은 자기자신과 적합하지 않은 다른 신체와는 해체되려는 속성을 갖는다. 이런 식으로, 결합하려는 속성을 갖는 부분적 요소들의 결합에 따라 특정한 다른 신체가 구성된다. 그렇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 혹은 존재 양태로서 신체는 언제나 결합하려는 본성에 따라 특정한 개체성을 유지한다. 그러나 적합하지 않은 다른 신체와 만날 때 신체는 자신의 특정한 개체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해체될 것이다. 우리가 좋은 것이라고 부르는 것들, 그리고 나쁜 것이라고 부르는 것들, 혹은 선한 것이라고 부르는 것들, 그리고 악한 것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바로 신체들간의 결합하는 관계들에 따라 분류된다. 금지된 열매가 아담에게 나쁜 것으로 이해되는 이유는, 그것이 신의 계율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열매를 섭취함으로써 아담은 더 이상 그 자신을 구성하고 있는 부분적 요소들(신체들)의 결합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며, 이와 마찬가지로 더 이상 아담이라는 특정한 개체성을 지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합하는 관계들의 양태들에 따라 사물들을 분류함으로써, 스피노자는 자연 안의 모든 가치들을 무색 무취화하고 있다. 신체들의 결합 관계. 그리고 이 결합하는 방식에 따라 이러저러한 존재들이 결정된다. 또한 존재의 가치는 결합하거나 해체되는 관계들의 양태에 따라 결정된다: 이런 의미에서 스피노자에게 윤리학은 내재적 존재 양태들의 위상학이다. 스피노자가 기하학적 원리들을 따라 신과 인간 그리고 세계들 간의 윤리를 설명하고자 했던 것은, 존재의 관계 양태로부터 선한 본성과 악한 본성을 구분하고 판별해 내는 모든 종교적 뒷 냄새들을 제거하기 위함에서 비롯된다. 이런 의미에서 윤리학은 더 이상 신학의 문제가 아니라 자연학의 문제이다. 심지어 금지의 의미조차도, 신학적 의미가 아닌 자연학의 관점에서 이해하자. 스피노자의 윤리학은 자연주의적 토대 위에 서 있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악이 어떤 무엇도 아니라면, 그것은 오직 선만이 존재하고 혹은 선만이 존재의 인상을 주기 때문이 아니라, 반대로 악과 마찬가지로 선 또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존재(l'Etre)는 선악을 넘어서 있다"(Deleuze 31).

인용 및 참고
Deleuze, Gilles. Spinoza: Practical Philosophy. trans. Robert Hurley. San Francisco, City Lights Books, 1988.
Spinoza, Benedict de. A Spinoza Reader. ed & trans. Edwin Curley. New Jersey, Princeton UP, 1994.

Posted by huun

현실에 관한 실천적 혼동으로부터 발생하는 본질적으로 다른 두 가지의 관점이 있다. 1) 삶 속에서 맺는 다양한 관계의 양태들을 필연적 법칙으로 이해하는 방향.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현실을 피할 수 없는 당위로 간주하면서, 모든 현실적 실천의 문제를 우리가 파악하는 법칙에 귀속시키며, 우리의 행위능력을 준법의 한계 위에 위치시키는 것으로 만족한다. 이와 같은 윤리는, 우리로 하여금 현실을 인식과 사유의 대상으로 파악하게 하기보다는, 우리의 의식이 포착한 현상을 그 자체 원인으로서 혹은 그 원인에 고유한 결과로서 파악하게 함으로써, 절대적인 명령과 복종의 관계를 상정한다. 자연 안의 다양한 양태들과 이들을 무리 짓는 이러저러한 법칙들을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면, 이 법칙들은 우리에게 부여된 도덕적 명령들로 돌변한다. 자연의 법칙과 질서들이 도덕적 강령들로 변할 때, 우리의 인식과 사유의 능력들은 영원한 진리에 의존하게 되고, 초월적 신의 이미지를 자신 안에 강렬하게 각인시키면서, 우리가 따를 수 있는 한 모든 능력들에 우선하는 하나의 모델을 세우게 된다. 우리는 특정한 하나의 사태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능력들을 제한하고 포기함으로써, 그 사태들과 조건들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암묵적인 복종의 강령들과 타협하면서, 현실을 직시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이 때에 우리는 현실에 대해 아무 것도 알고 있는 것이 없다고, 그리고 우리의 신체가 할 수 있는 능력을 의식이 제한하고 있다고 말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때에 우리는 인식과 사유의 질서가 아닌, 무지한 의식의 법칙에 따라 생각하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최소한 신학은 성서에서 주어진 것들이 인식의 기초라고 생각한다. 비록 그 인식이 합리적인 방식으로 전개되어야 하고, 심지어는 이성에 의해 옮겨지고 번역되어야 한다고 해도 말이다. 여기에서 도덕적이고 창조적이며 초월적인 신이라는 가정이 나온다. . . . 여기에는 존재론 전체를 혼란에 빠뜨리는 혼동이 숨어있다. 이해해야 할 것을 명령과 혼동하고 인식을 복종과 혼동하며 존재(l'Etre)를 당위(Fiat)와 혼동하는 오랜 오류의 역사가 있다. 법칙은 언제나 선악이라는 가치의 대립을 결정하는 초월적 심급이지만, 인식은 언제나 좋음-나쁨이라는 존재 양태들의 질적 차이를 결정하는 내재적 능력이다"(들뢰즈 41-42). 따라서 다음과 같은 또 하나의 방향을 생각해 볼 수 있다. 2) 현실적 관계들을 우리의 신체가 할 수 있는 능력들에 따라 조직하고 구성하는 방향. 스피노자가 『윤리학』을 통해 말하는 신체의 능력이란, 우리가 아는 한에서, 촉발(변용)능력을 말한다. 따라서 자연 안의 모든 개체들은 새롭게 분류되어야 한다. 그에 따르면, 동물들, 식물들, . . . 이러 저러한 다양한 사물들은 형태론적이고 기능적인 기관과 외양들에 따라 군집을 이루지 않는다. 무수히 많은 이 존재들이 서로를 결합하고 자신들의 군집을 형성하는 유일한 방식은 "유(類)나 종(種)과 같은 추상적 개념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촉발 능력에 의해서, 즉 그것들이 <할 수 있는> 촉발들에 의해서, 그것들이 자신들의 능력의 한계 내에서 반응하게 되는 자극들에 의해서"이다(들뢰즈 45). 신체의 능력을 표현하고 그것을 가능케 하기는 하지만, 그 보다는 그 능력들을 제한하고 능력에 앞서 우연적으로 결정된 신체의 기관과 기능에 의해 존재가 분류되지 않는다. 이들은 자신들 안에 본성적으로 가지고 있는 반응 능력, 동일한 기관과 기능 속에서도 무수히 많은 다양한 능력, 현실화된 것으로서 기관과 이 기관에 상응하는 특정한 기능보다도 어쩌면 더 심오한 심급에서 발생했던, 기관이 미 결정된 신체에서조차 잠재하는 능력, 바로 공명하는 능력에 따라 서로를 결합하며 집단을 형성한다. 촉발과 변용은 공명능력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이를 역능(puissance)이라 부른다. 스피노자의 촉발이론 전체는 바로 우리가 어떻게 이 역능을 최대화하고, 어떻게 이 역능을 현실화할 수 있는 관념을 생산하고, 어떻게 이 역능 안에서 자신과 신 그리고 자연의 모든 사물들과 필연적 관계를 맺을 것인가에 관한 실천적 문제들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촉발이론에서 능동 촉발과 수동 촉발, 그리고 수동 촉발에서 기쁜 수동 촉발과 슬픈 수동 촉발, 그리고 기쁜 능동 촉발에 관한 복잡한 문제들을 이해하기 위해 『윤리학』3부(Of the Origin and Nature of the Affects)를 읽어보자!). 확실히 이 이론은 존재의 내재적 양태에 관한 위상학이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법칙들에 조응하는 우리 자신들의 덕목을 말하지도 않으며, 우리 자신의 덕목과 행위 능력들을 법칙들에 따라 설명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 이론 안에서 법칙들은 오로지 우리 자신 안에 본성적인 능력들과 이 능력들간의 관계, 그리고 다른 신체의 능력들과의 관계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윤리학』의 모든 길은 내재성(immanence) 속에서 만들어진다. 그런데 내재성은 무의식 그 자체이며, 무의식의 정복이다. 윤리학적 기쁨은 사변적 긍정(affirmation)의 상응 개념이다"(들뢰즈 47).

인용문헌
들뢰즈, 질. 『스피노자의 철학』. 박기순 옮김. 민음사. 2001.

Posted by huun

선/악을 좋음과 나쁨으로 구별한다는 것은 가치들을 순수 형식적 관계로 표면화한다는 것을 뜻한다. 예를 들어, 스피노자에게 악이란 사물의 본성을 이루고 있는 부분들의 관계를 해체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그에게 더 궁극적인 것으로서 악의 의미는 새로운 관계로의 이행을 의미한다. 신의 관점에서 관계들의 해체(악)는 다른 결합을 가능케 하는 새로운 관계들로의 이행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절대적 가치로서 선과 악의 심급은 좋음과 나쁨의 심급으로 치환되면서, 가치들의 상대적 관계가 형성된다. 가치들의 상대적 관계는 동등한(동일하지 않은) 능력을 가진 신체들간의 만남을 긍정하게 된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은 존재한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이것은 상대적 가치인 한에서 그렇다. 우리는 우리자신에 대해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선과 악으로 혼동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좋은 것과 선, 혹은 나쁜 것과 악은 서로 구별되어야 한다. 가치들을 순수 형식적 관계로 표면화한다는 것은 이 둘을 구분하고, 모든 선과 악이라는 종교적 배후를 관계들로부터 걷어내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가치들의 표면화는 모든 신체들간의 이러저러한 관계들의 우연적 만남을 긍정한다. 표면 위에서 이들간의 만남은 우연적이며 상대적이다. 만남의 우연적 본성이 긍정되기 시작하면, 다음에는 새로운 형태의 관계들이 출현한다. 1) 그것은 우선 죄의식을 없앤다. 슬픈 정념의 도덕적 원인으로서 죄의식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고 느낄 때 발생한다. 수동성이 죄의식과 그와 관련된 모든 슬픈 정념을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슬픈 정념은 또한 수동성을 불러들인다. 이들 양자는 모든 원인을 자기 자신이 아닌 외부에서 찾는다는 점에서 서로 뗄래야 뗄 수가 없다. 이와 같은 이차적 존재에게 다른 모든 존재들은 원인 그 자체가 되거나 혹은 원인과 관계하는 계시가 될 것이다. 이차적 존재는 자기 자신을 하나의 결과로 혹은 목적으로 이해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 앞에 주어진 모든 현실적 관계들은 하나의 명령이 되거나 복종해야 할 법칙이 된다. 그는 삶을 필연적 운명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우리의 의지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긍정은 이와는 반대의 결과를 끌어낸다. 우연의 긍정은 묘하게도 우리를 구속하는 모든 우연적인  것들로부터 자유롭다. 왜냐하면 이 때의 우연성이란 능동적인 것들간의 만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 안에 존재의 원인을 내포하고 있는 존재들간의 관계. 이러한 관계들의 양태를 결정하는 윤리학적 토대는 이제 더 이상 선과 악이라는 "심판의 체계"가 아니라, 좋음과 나쁨이라는 질적 차이가 될 것이다. 절대적 가치가 상대적인 것으로 전환되기 시작하면서, 존재의 문제는 관계들의 양태의 문제로 귀결된다. 2) 능동적인 존재들간의 관계가 존재론적 윤리학의 테마라면, 이제 윤리학은 신체들이 좋은 관계를 맺는가 혹은 나쁜 관계를 맺는가에 따라 그들을 분류하게 된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좋은 관계는 신체들이 서로간에 관계들을 형성하면서 각각 자신 안에 깃든 본성적인 것을 완성하거나, 자신의 능력들을 보다 완전한 것으로 증식시킬 때이다(음식물의 경우). 반대로 나쁜 관계는, 자기 자신의 신체를 구성하는 고유한 관계가 다른 신체와의 관계를 통해 해체될 때이다(혈액을 해체하는 독의 경우). 좋은 관계는 신체의 능력이 보다 완전한 것으로 이행하는 한에서 기쁨을 생산하고, 나쁜 관계는 신체의 능력이 보다 적은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한에서 슬픔을 유발한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신체는 지속과 연장(extension)의 속성 안에 존재한다. 따라서 신체는 자신의 고유한 능력을 유지하고 나아가 보다 완전한 것으로 자기 자신을 확장하려는 노력 속에서 전개된다. 그런 이유에서 좋은 관계는 신체들 각각이 적합한 관계들을 통해 자신들의 능력을 완성시키는 과정이며, 나아가 이 관계는 신체들을 기쁨의 과정으로 유도한다. 이와 같이 능동적인 것들 간의 이러저러한 관계들 속에서 우리는 만남의 새로운 의미를 알게 된다: 능동적인 존재의 양태적 관계. 능동적인 존재는 만남들 속에서 자신에게 적합한 속성을 표현하는 다른 신체들을 선택한다. 자신에게 적합한가 혹은 그렇지 않은가를 구별하는 능력을 통해 신체들은, 자기 자신의 고유한 본성을 표현하고, 자신의 능력과 조응하는 한에서 기쁜 만남을 조직하고, 다른 신체의 능력들을 자신의 고유함 속에서 발견하고, 이들과 결합하고 통일을 이루면서, 자신의 능력을 보다 큰 완전성으로 이끈다. 따라서 모든 결합하는 관계들은 명령이나 법칙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이고 친화적인 양태적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왜냐하면 모든 만남은 그 자신으로부터 조직된 것이기 때문이며, 어떠한 만남도, 필연적으로 결정된 관계(선/악의 경우), 죄의식과 슬픈 정념을 유발하는 관계를 통해서는 나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슬픈 관계, 즉 신체를 결합하는 고유한 관계가 해체되는 관계의 경우, 신체는 더 이상 지속과 연장이라는 고유한 본성을 유지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슬픈 관계 속에서 신체는 수동적이다. 신체가 수동적 본성을 갖추게 되면, 더 이상 자신의 고유한 본성을 표현할 수 없으며, 자신의 능력과 조응하는 다른 신체를 선택할 수도 없으며, 따라서 보다 큰 완전성으로 자기 자신을 이끌 수가 없다. "우연한 만남에 따라 살아가고, 그 결과들을 수동적으로 겪지만, 정작 자신이 겪는 그 결과가 자신에게 불리하게 나타나고 자신의 무능력을 드러낼 때마다 한탄하고 비난하는 사람은 열등하다고, 혹은 예속적이라고, 혹은 약하다고, 혹은 미련하다고 말해질 것이다"(들뢰즈 39). 이들은 모두가 서로를 알 수 없는 무지한 관계들로 삶을 이루며, 따라서 삶을 폭력이나 기만으로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소극적 관계를 통해] . . . 어떻게 좋은 만남보다는 나쁜 만남을 만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죄의식으로 인하여 어떻게 자기 자신을 파괴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원한 때문에 어떻게 타인들을 파괴하지 않을 수 있고, 그리하여 자신의 고유한 무능력, 자신의 고유한 예속성, 자신의 고유한 질병, 자신의 고유한 소화불량, 독약 그리고 독물을 어떻게 도처에 퍼뜨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들뢰즈 40) 윤리학이 선과 악을 좋음과 나쁨(기쁨과 슬픔)으로 치환한다는 것은, 존재들이 맺는 관계가 절대적 법칙에 의해 설명되거나 환원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기 때문에 존재는 다른 존재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능력을 초월적인 법칙에 맡길 수가 없다. 자신의 능력과 본성에 적합한 것(좋은 것, 기쁨을 유발하는 것)과 결합하고, 적합하지 않은 것(나쁜 것, 슬픔을 유발하는 것)을 거부하는 과정은 우선적으로 자신에게 속한 본성과 능력이 어떠한 양태들로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아는 과정이며, 따라서 다른 것들과의 결합과 해체의 과정에서 자신에게 속한 본성과 능력에 적합한 것이 무엇인가를 발견하는 과정이다. 그런 이유에서 상대적 가치들과 우연적 만남들을 단순히 가치들에 대한 순간주의나 관계들에 관한 수동성을 의미한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가치의 내재적 판(The plane of immanence) 위에서 신체들간의 우연적인 만남은 각자의 능동성이 전제되는 한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며, 이러한 능동적인 만남들이 조직되기 위해 필요한 가치들의 상대성은 각자들간에 내재하는 공통성이 전제되는 한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인용문헌
들뢰즈, 질. 『스피노자의 철학』. 박기순 옮김. 민음사. 2001.

Posted by huun

도덕은 결과를 의식하고 그 결과를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것으로 만족한다. 따라서 도덕적 계율들의 토대와 근거 자체에 대한 질문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당위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행위하도록 강요된 초월적인 법칙이다. 그것은 주어진 법칙을 내면화하고 학습하여 우리의 신체를 어떻게 그 내용에 부합시킬 것인가에 집중한다. 그래서 우리는 도덕에서, 그 발생적 과정을 알지는 못한 채, 우리 앞에 미리 던져진 계율들과 덕목들을 발견하게 된다. 도덕은 한편에서는 의식과 나란히 발생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의식으로부터 구성되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의식을 구성한다. 또한 그것은 의식과 결과들의 법칙이기 때문에, 선과 악이라는 초월적 강령들에 의해서만 작동한다. 그러나 스피노자에 따르면, 윤리학은 선과 악이라는 초월적 법칙이 부여한 양적 차이에 의해서가 아니라 좋음과 나쁨이라는 질적 차이의 체계를 통해 구성된다. 이런 이유에서 윤리학은 발생적인데, 우선 그것은 강요되지 않은 질서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강요로 이루어진 제도적 규칙들과는 대비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윤리학적 질서 안에서 관계들의 원인과 결과(인과관계)는 관계 내재적 양상을 띤다. 내재적 관계는 자연 안의 어떠한 신체도 다른 신체에 대해 절대적 원인이 되지 못하며, 신체를 구성하는 어떠한 제1원인도 없음을 의미한다. 윤리학은 "내재적 존재 양태들의 위상학"이다(들뢰즈 40). 우리는 때때로 초월적 법칙이나 계율이 사라질 때 출현하게 될 혼란과 파괴적 상황에 대해 두려움을 갖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 두려움은 법칙을 당위적인 것으로 의식하고 수용하는 태도에서 비롯된 수동적 존재들의 두려움이다. 그것은 우리 스스로가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별하지 못하고 인식(사유)하지 못한다고 가정할 때에 발생한다. 윤리학은 우리가 법칙을 설명할 수 있고, 의식의 수준에서 당위로 부여된 진리들이 어째서 그런지를 인식할 줄 알 때에 비로소 우리 자신의 것이 될 것이다. 존재가 끊임없이 자신의 신체를 통해 가해진 명령과 복종의 법칙을 확인하고 이를 인과적 질서로 내면화하려는 노력이 도덕이라면, 윤리학은 쉼 없는 질문들과 결정(선택)을 창조하고 재창조하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과정은 피부와 근육을 통해 신체 전체에 퍼져있으며, 나아가 우리의 사유의 종합으로 귀결된다. 윤리학의 내재적 본성은 육체와 정신의 순환작용에서 확인될 수 있을 것이다. 육체와 정신은 서로 대립적이지 않으며 서로를 부정하지도 않는다. 이들은 다만 바톤을 이어가면서 증식될 뿐이다. 윤리학의 유일한 토대는 법칙을 이해하는 정신에 있지 않고 좋고 나쁨을 구별할 줄 아는 우리의 연약한 신체에 있다. 그러나 이것이 윤리학의 본질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윤리학의 본질은 적극성에 있는데, 이 적극성이란 연약한 신체로부터 출발하긴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이를 강하게 다져줄 인식(사유)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인용문헌
들뢰즈, 질. 『스피노자의 철학』. 박기순 옮김. 민음사. 2001.

Posted by huun

의식은 결과로서 주어진 실재를 하나의 전체로 이해한다. 그러나 의식은 전체를 이루고 있는 "살아있는 부분"들이 결합하거나 해체되는 관계들의 원인과 본질(원인들의 질서)을 이해하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원인과 본질 그리고 결과로서 전체만을 수용하는 의식은 우리로 하여금 "부적합한 관념들, 혼란스럽고 절단된 관념들, 즉 자신들의 고유한 관계들로부터 분리된 결과들만을 가질 수밖에 없다"(들뢰즈 34-35). 의식은 세 가지 환상으로 구성되고 작용하는데, 1) 의식이 맨 처음 포착한 내용은 신체들과 관념들간의 작용의 결과이기 때문에, 사물의 질서를 역전시켜 이해한다(목적인의 환상). 2) 따라서 신체들간의 관계의 질서에서 파생된 결과를 통해 의식은 자기 자신을 운동의 제1원인으로 간주하게 되면서, 신체를 지배하고 있다고 여긴다(자유명령이라는 환상). 3) 그러나 제1원인으로서 신체에 대한 지배력을 확인할 수 없거나, 목적에 대한 원인으로서 자기 자신을 상상할 수 없게 되면, 보다 큰 전체성으로서, 모든 사물들의 목적으로서, 그리고 자유명령의 주체로서, 이성과 의지를 가지고 있는 신에게 그 영예를 돌린다(신학적 환영). 의식은 이 세 가지 환상들과 분리될 수 없으며, 그로부터 어떠한 원인의 결과들에 따라, 이 결과를 원한다고 말하면서 결과를 원인으로 환상한다. 의식은 원인을 알지 못한 채, 외부적 신체와 외부적 관념들이 우리에게 끼친 결과들만을 수용한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것을 욕망할 때에, 의식이 그 대상을 좋은 것이라고 판단하면서, 우리의 욕구에 의식을 각인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스피노자에게 이 관계는 역전된다. "욕구는 각 사물이, 즉 연장에 속하는 각각의 신체와 사유에 속하는 각각의 영혼, 각각의 관념이 자신의 존재 속에 계속해서 머무르려는 노력(코나투스 conatus)에 다름 아니다"(들뢰즈 36). 자신의 존재 속에 머무르려는 노력은 다양한 다른 신체들과 대상들과 조우하는 과정에서, 매 순간 우리 자신에게 강요하거나 촉발되는 것(변용 affections)에 의해 결정된다. "바로 결정인자로서의 이 변용들이 필연적으로 코나투스에 대한 의식의 원인이 된다"(들뢰즈 37). 코나투스에 대한 의식은 촉발에 의해 일어난다. 또한 기쁨이나 슬픔(즉 매 순간 조우하는 관계들로부터 나오는 결합적 관계나 해체되는 관계)의 반복적 주기는 코나투스의 변용을 발생시키고, 이 변용에 의해 발생하는 이행(즉 보다 큰 전체에서 보다 적은 전체로, 혹은 보다 적은 전체에서 보다 큰 전체로의 이행)의 과정에서 파생되는 지속적인 감정이 의식이다. 의식은 관계들의 결합과 해체에 따라 변형되는 운동의 이행에 관한 감정일 뿐이다. 의식은 우선적으로 신체들의 촉발과 변용들로부터 발생한다. 촉발과 변용은 코나투스의 이행을 촉구하며, 따라서 자기 자신의 존재성에 머무르려는 노력으로서 욕구에 대한 의식을 각인시킨다. 이런 이유에서 의식은 이행에서 나오는, 이 이행에 대한 감정이며, 변용들의 결과이며, 결과들의 법칙이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것을 욕구하고 욕망하는 것은, 의식이 "그 대상을 좋은 것으로 판단하기 때문이 아니라, 반대로 우리가 그것을 좋은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위해 노력하고 그것을 원하고 욕구하고 욕망하기 때문이다"(들뢰즈 36). 관계들의 결합(기쁜 관계)과 해체(슬픈 관계)와 같은 이행과 운동의 결과들에 대한 감정을 통해 의식은 일정한 법칙(도덕, 선악 등)을 도출한다. 즉 의식은 관계들의 결합과 해체의 원인을 모르기 때문에, 결과만을 받아들이고 실천하기 위해 도덕을 만들어낸다. 도덕적 가치들은 의식의 기능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열매와 자신의 신체와의 관계를 알지 못하는)아담은 자신에게 부여된 신의 금지(금단의 열매)의 의미를 명령으로 받아들이고 수용하면서 도덕을 만들어 낸다. 의식은 무지에서 나온다. 그것은 그 자체 결과이며 동시에 결과만을 받아들이고, 수용된 결과를 실천하고자 하는 노력이다. 의식은 수동적 실천의 원인에 불과하다. 그것을 인식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인용문헌
질 들뢰즈. 『스피노자의 철학』. 박기순 옮김. 민음사. 2001.

Posted by huun

의식, 가치(선악의 가치), 슬픈 정념에 대한 비판. 사유, 좋음-나쁨, 기쁨에 대한 옹호. 유물론자, 비 도덕론자, 무신론자로서의 스피노자. 1) 유물론자로서의 스피노자: 의식이 아니라, 신체(그리고 이를 긍정하는 사유)를 새로운 모델로 제시. 2) 비 도덕론자로서의 스피노자: 선-악이라는 도덕적 본질의 가치를 통해서가 아니라, 좋음-나쁨이라는 존재의 양태를 통해 세계를 이해. 3) 무신론자로서의 스피노자: 신에 정체되어 죄의식과 슬픔에 사로잡힌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역능에 적합한 관계를 조직하고 결합함으로써 무한한 증식과 완성을 꾀하는 존재.

Posted by huun

Georges Bataille의 저작 및 그에 관한 연구 목록



Bataille and Surrealist Pornography: Dance or Tread mill?



The Impossible Sacrifice of Poetry: Bataille and the Nancian Critique of Sacrifice



The Work of Alterity: Bataille and Lacan



Bataille and Sartre: The Modernity of Mysticism



La revolte enfantine: on Georges Bataille's "La Morale de Miller" and Jean-Paul Sartre's "Un Nouveau Mystique"



Bataille in Theory: Afterimages (Lascaux)
Posted by huun
TAG

Re-: Re-flecting, Re-membering, Re-collecting, Re-selecting, Re-warding, Re-wording, Re-iterating, Re-et-cetra-ing,...(in) Hegel



Nietzsche at the Altar: Situating the Devotee



Free Time! Ludicity and the Anti-work Ethic



The Scientific Imperative: Improductive Expenditure and Energeticism



The Attraction of Repulsion: the deep and ugly thought of Georges Bataille



Bataille and Mysticism: A "Dazzling Dissolution"



Virile Magic

Posted by huun
Formless: Down and Dirty(interview with curators Rosalind Krauss and Yve-Alain Bois)


Irony/Humor in the Fast Lane: the Route to Desire in "L'Abbe C"




Bataille의 소설: The Story of the Eye


Posted by huun
TAG

Decartes의 <Meditation>

Posted by huun
TAG

Decartes의 <Discourse> (2)

Posted by huun
TAG

Decartes의 <Discourse> (1)

Posted by huun
TAG

Letter to Monoeceus

Posted by huun

Epicurus의 Principal Doctrines

Posted by huun

A Treatise Concerning the Principles of Human Knowledge by George Berkeley

Posted by huun
TAG



Posted by huun

Rene Burri, Japan, 1961


금연(禁煙)이나 아픈 이별을 경험해 본 사람들은 대부분 아는 얘기지만, 모든 일은 첫발을 내딛는 것 즉 결심으로부터 출발한다. 이 말은 인간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가장 천한 미물들뿐 아니라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은 결심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생기론자들 중에는 생명을 정신으로 환원하기도 한다. 심지어는 돌멩이조차도 결심을 해야하지 않을까? 오래 전부터 벼른 것이든 아니면 갑작스런 충동이든 간에, 결심은 주체로 하여금 그 자신의 모든 것과 대면하게 만든다. 그 같은 결심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들, 결심을 할 수 없었던 사연들, 결심을 미루며 해댄 궁색한 변명들, 해이한 자의식과 그로 인한 자기 외면, 실패에의 두려움, 결심에 대한 책임, . . . 등. 이처럼 결심에는 당사자가 감당하기에는 아주 벅찬 무게가 실려있다. 그래서 결심은 시작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의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결심을 앞두거나 결심에 임한 존재는 인생의 결과라고 할 만한 자기 자신의 무게를 초과량으로 경험한다. 철봉에 오래 매달리는 일이 지구를 짊어지는 일 보다도 더 힘든 것처럼. 중력이 잡아당겨 내 몸이 땅 속으로 꺼지지 않도록 버티고 서 있는 일! 아니면 중력을 잃은 내가 스스로 중심이 되어 발목을 잡고 몸뚱아리 전체를 들고 서있는 일! 그리하여 나 자신을 거추장스러운 짐으로 떠맡는 일! 이것이 우리의 실존이다. 실존이 그 자체로 고독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저 동일한 두 존재(들고 있는 나와 들려진 나)가 서로 팽팽히 대면하여 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순간에 우리는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는 불연속 상태가 된다. 물론 다소 상반된 반응들을 취했지만, 키에르케고르나 니체가 간파했듯이 신이 사라진 상태와 같은. 아니면 카프카가 자주 그랬듯이 자신의 방 창가에 서서 창 밖을 바라보던 상태와 같은. 아니면 스피노자가 원했듯이 신이 된 상태와 같은. 아니면 펠리니(Federico Fellini)의 영화 <La Strada> 에서 짐승같은 잠파노가 바닷가에 널브러져 갑자기 하늘과 대지를 보며 울던 상태와 같은. 이 실존적 고독과의 대면이 한없이 유보되었을 때, 다시 말해 해야할 일이 있거나 하고 싶은 일이 있거나 갈 곳이 정해졌을 때처럼, 미래가 연속되어 주저함이 없이 그것을 예측할 수 있을 때, 그래서 어떤 중대한 결심이 필요치 않을 때, 나는 이를 혼미한 상태 즉 중독이라고 부른다. 그러고 보면 삶의 대부분은 중독 상태가 아닐까? 알코올 중독, 마약 중독, 미디어 중독 같은 것들이 문제가 아니다. 우리 모두가 이미 중독 상태이며, 또 그렇지 않으면 살수가 없을 것이다. 작가들이 글을 쓰기에 앞서 언제나 다른 중독상태(담배를 물거나, 수화기를 들거나, 화장실에 가거나, . . .)에 빠져들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저녁에 홀로 남겨져 골목을 두리번 거리는 외톨이처럼. 프랑스의 루이 11세 때 발뤼(Balue)라는 한 국무대신은 반역죄로 약 11년간(1469-1480)을 감옥에서 살았는데, 그 감옥은 그의 몸에 비해 너무 작아서 앉을 수도 누울 수도 없었다. 그의 자세가 고통스러웠다면, 그것은 바로 중독을 벗어난 불연속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시 자신에게로 되돌아와 떠맡게 된 자신의 무게와 힘. 그 고독의 엉거주춤함! 그는 아마도 감당하기 힘든 그 기간 동안 생애를 통틀어 가장 명료한 의식을 취하지 않았을까?

Posted by huun

인문학이란 존재의 사용불가능성과 비효율성을 선언하는 분과이다. 그리고는 그 쓸모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여전히 여기에 이렇게 엄연히 실재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말하자면 인문학은 바로 시간과 지속의 과학인데, 왜냐하면 시간과 지속은 사용불가능한 존재가 실존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인문학이 다루고 있는 시간이란 물리학적 의미에서의 공간적 시간(공간에 덧붙여진 또 다른 형태의 공간 즉 4차원)도 아니고, 자본주의의 관점에서 최대로 단축시켜야 할 부정적 시간도 아니다('시간은 금'이라는 자본주의의 고전적 명제는 시간의 긍정이 아니라 시간의 부정이다). 인문학이 존재에게 부여하는 그 시간은, 무엇인가가 빠르고 순간적이고 한꺼번에 완성되는 것을 가로막는 것, 모든 사물들이 그 자신의 완성을 향하여, 본질의 열림을 향하여 나아가는 과정 속에서, 속도를 낼 수 없도록 방해하는 그 무엇이다. 그 시간은 세계를 지연시키고, 우리를 망설이게하여, 시(詩)를 읽는 독자처럼, 우리로 하여금 오래토록 머무르도록 강요한다(또 이 머무름 속에서만 우리의 삶은 완전해 질 것이다). 이 강요의 한복판에 던져진 우리는 그 지연된 시간 속에서 "적절한 것"을 고뇌하고, 선택하고, 결정하는 과정을 반복함으로써, 자기자신을 스스로 짊어지고 서서히, 아주 서서히 자신의 본질을 펼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간단히 말해, 인문학이란 삶 속에 시간이라고 하는 아주 거추장스러운 과정을 추가한 학문이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인문학은 존재의 비효율적 가치를 긍정하는 유일한 영역이다.

따라서 인문학은 효율성과 사용가능성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와는 완전히 모순적인 관계에 있다. 자본주의적 관점은 존재로부터 시간을 빼앗는 위치에 서 있다. 존재로부터 시간을 빼앗아 물질적이고 육체적이고 공간적인 것만 남겨놓는, 그래서 모든 존재를 불활성의 세계로 둔갑시켜서, 수동적 기능으로 만들어 버리는 체계. 최대효율성의 궁극적인 목표는 바로 순간성과 자동성, 나아가 최대 수동성이다. 그 첨단이 바로 로봇이라는 사실은 우리 다 같이 알고 있는 바가 아닌가? 만일에 인문학에 어떤 위기가 왔다면, 그것은 인문학이 지속 불가능한 환경 속에 있기 때문이다. 인문학에 혐의를 두고 그 환경에 적응을 종용하든지, 아니면 그 반대로 환경을 바꾸든지는 우리가 할 탓이겠지만.

그 수 많은 한국의 인문학자들의 선언과 주장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근본적으로 언급되지 않은 것, 신자유주의라는 다소 중화되어 모호한 이름으로, 그냥 단어들만 부르짖으며 말장난을 하느라고, 그 안에서 허우적거리며 항상 놓쳐버리고 마는 주제: 자본주의! 그들이 비판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변화에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 결코 아니다. 같은 말이지만 대중과 괴리되었기 때문도 아니다(어떤 대중?). 반성을 하지 않았기 때문은 더더욱 아니다(오히려 그들의 반성은 잘못된 문제의식을 보여줄 뿐이다). 바로 인문학적이지 않았다는 것! 여전히 인문학적이지 않다는 것!

왜 그들은 항상 잘 나가다가도 맨 나중에가면, '적응'이라든지, '변화'라든지, '대중화'라든지, '응용'이라든지 하는, 우리를 맥빠지게 하는 추상적 용어들 속에 고착되어 틀어박히고 마는 것일까? 그들이 바로 그 체계의 수혜자들이기 때문이 아닐까? 그들의 실상은 최대효율성의 체계 속에서 교육받고, 교육하고, 그 선배들과 그 스승들이 마련해 준 어떤 어떤 공허한 특권들 속에 안주하여, 실질적 자본의 토대위에 가까스로 앙상하게 버티고 서 있는 상징적-심리적 자본에 도취되어, 거기서 주어지는 가능한 모든 취미와 우울과 혐오 혹은 위선적 자애와 너그러움과 권태등에 휩싸여 허우적거리며, 자신이 비난하고 있는 것이 실제로는 사라지지 않길 바라며(자신도 모르게), 그 안에서 만들어지는 새로운 정서들과 소재들을 발견하면서, 그 건전해보이지만 실은 밀폐된 환락을 만끽하는 존재들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결코 자신들의 그 강건해 보였던 지반, 그 안락한 환경 자체를 문제삼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효율적 체계의 타도!라고 하는 명제의 실천은 냉소적인 그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개인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찬 무시무시한 것들을 불러온다. 그것은 7, 80년대의 공장 등지에서 블루칼라들이 겪었던 무지막지한 공포보다도 더 무시무시한 것일 수도 있다. 그들의 선언이나 주장이 진지하고 진정한 것이라면, 아니 그들이 조금만이라도 총명한 정신의 소유자라면, 자신들이 서 있는 지반의 물적 토대를 송두리채 거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내 짐작으로 속물정신에서 태어난 그들은 결코 그 지반 자체를 문제삼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른채 멋모르고 내뱉고 만 그들의 선언행위는 웃음조차 유발시키지 못한다. 미안한 말이지만, 인문학의 해방은 그들이 있는 곳으로부터는 결코 완성될 수가 없을 것이다.

Posted by huun

이곳으로 이사를 온지 6개월이 훨씬 지났지만, 아직도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하나 있었다. 화장실 벽에 붙여놓은 비누상자와 샤워기가 자꾸만 바닥으로 떨어져 버리는 것이다.

형편을 맞추어서 이사를 오다보니, 좀 허름한 방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고, 방뿐만 아니라 화장실 벽도 낡아 있었다. 못을 박으니 오래된 흰 색 타일이 쪼개져 버리는 바람에 손가락이 두 개는 들어갈 만한 구멍이 나 버렸다. 비누상자를 그냥 바닥에 내버려둘 수도 없었다. 공간이 비좁았기 때문에 샤워를 할라치면 바닥전체가 물에 고여 비누가 풀어헤쳐져 버렸다. 어떻게든 그 비누상자를 바닥으로부터 떼어놓지 않으면 안 되었다.

샤워기도 골치 아픈 문제이다. 공간이 너무 좁은 탓에, 저렇게 높게 매달린 샤워기로 샤워를 하려면, 맞은편 벽을 딱 붙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나마 엉거주춤 선 자세로 샤워를 하려면 최소한 쏟아지는 물이 가슴 정도에 조준이 되어야 하는데, 지금 나의 자세로는 머리에도 조준이 안 될 만큼 샤워기가 너무 높았다. 샤워기 설비업자들은 자신이 설치한 샤워기로 최소한 한번쯤은 반드시 샤워를 할 것을 권고하는 바이다. 필요하다면 관련 입법이 상정되어야 한다. 어쨌든 나는 생활의 편의를 위해 저 조그마한 비누상자를 벽에 고정시켜야 하고, 무성의하게 부착된 샤워기를 내 몸에 맞게 내려서 다시 고정시켜 놓아야 한다. 귀찮은 것이긴 하지만 그리 큰 문제는 아니었다. 며칠을 미루어 놓고 있긴 했지만, 슈퍼에 갔을 때 생각이 났고, 즉시 압착꼭지(?)를 구입해서 붙여 놓았다.

이 압착꼭지에 대해서 설명하자면 아주 긴 평론 하나가 나올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짓은 하지 않겠다. 다만 간단히 소개만 하겠다. 이 물건은 작은 원 모양으로 된 실리콘 혹은 말랑말랑한 플라스틱 재질로 만들어져 있다. 옴폭 들어간 중앙부분, 물갈퀴처럼 얇은 테두리, . . . 벽에 이 물건을 대고 압착시켜 누르면, 공기가 빠져나가 밑면과 벽 사이의 공간이 진공상태가 되어 벽에 달라붙는다. 그 진공상태는 우리로 하여금 두 가지로부터 자유롭게 해준다. 하나는 중력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고, 다른 하나는 시간으로부터 자유롭게 한다. 사물들은 항상 아래로 떨어진다. 이것은 거부할 수 없는 자연의 질서이다. 그러니 공중에 매달린 물건들은 언젠가는 아래쪽으로 떨어지게 된다. 이 자연의 질서는 시간이 보증해준다. 시간은 우리로 하여금 자연의 질서로 되돌아가게 한다. 그 질서로부터 아무리 멀리 떨어져 나와 있다해도, 시간은 우리에게 떠나온 그곳으로 되돌아가라고 명령한다. 그런 의미에서 시간은 모든 것들을 그 본래의 상태로 되돌린다. 마치 물 속에 들어간 사물들이 서서히 풀어헤쳐지는 것처럼. 딱딱한 사각의 비누가 물에 잠겨 풀어지면서, 그 분자들이 더 이상 서로에게 의존하지 않고, 각자의 고유한 본성을 찾아 사방으로 흩어지듯이, 시간은 모든 것들을 흩뿌리며 사물을 그것이 생기기 이전의 분자적 상태로 되돌린다. 내 순수했던 어린 시절이 한참이나 함께 보낸 친구의 눈에서만 서서히 퍼지듯이 말이다. 시간은 정말이지 물과도 같다. 그러니 한참이 지나면 공중에 매달린 것들은 모두가 그 원래의 자리를 찾아 아래로 아래로 떨어져 내리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 압착꼭지는 중력의 질서로부터 벗어나 벽에 단단히 붙어 중력과 시간에 맞서 물건들을 꽉 쥐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중이다. 비누상자와 샤워기를 팽개치지 않고 벽에 달아두려는 내 욕구를 위해. 보다 문화적인 존재를 추구하는 우리를 더욱 편안하게 해줄 목적으로 말이다.

문제는 이 도구조차도 중력과 시간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점이다.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중력과 시간을 하나의 좌절로 경험하게 하는 장본인이다. 벽에 붙인 비누상자가 단 이틀만에 바닥으로 떨어져 버렸다. 경고성의 고함처럼 둔탁한 소리를 내며. 딱! 그리고 약 3시간 후에 샤워기도 떨어져 버렸다. 떨어지는 충격 때문에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샤워기에 금이 나기까지 하였다. 그것들의 추락을 보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다시 붙여 놓아야 하는 무의미한 반복 때문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억지로 확인 받는 듯한 느낌, 어떤 굴욕감 마저 들기 때문이다. 허리를 굽혀 다시 그것들을 붙여 놓았다. 붙일 때에는 벽면을 수건으로 말끔히 닦고, 습기가 없어질 때를 기다려야만 한다. 저것들이 쉽게 떨어지는 이유는 화장실에 습기가 차기 때문이다. 습기는 마치 아라비아의 상인처럼 저 작은 진공의 공간으로 스며들어, 자연의 질서로부터 자유롭던 그 공간에 중력과 시간을 서서히 퍼트린다. 그러니 저것들을 차단하기 위해서는 전보다 더 단단하게 누르지 않으면 안 된다. 공기가 아직 다 빠지지 않았다 싶으면, 손톱으로 밀어서 그 공기를 바깥쪽으로 몰아 낸다. 그래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떼어내고 다시 붙인다. 떨어지는지를 손가락으로 당겨서 확인도 해 보아야 한다. 그러나 그 꼭지들은 5일 이상을 가지 못했다. 밤에 들어와 보면 도둑이라도 다녀갔다는 듯이, 비누, 상자, 샤워기, 꼭지 등이 바닥에 널부러져 있다. 다소 오랜 시간 벽에 붙어 있는 경우에는 머릿속에서 지워져 버리지만, 하루에 두 세 번씩 떨어지는 경우엔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이제는 잘 붙어 있더라도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잊어버릴 만 하면 떨어지고, 잊어버릴 만 하면 떨어지고, . . . 커다란 문제가 아니었으므로 적극적으로 응수하지 않은 탓에, 나는 6개월 이상을 저 꼭지들과 노이로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셈이다.

문득 떠오른 생각이 하나 있다. 저것들을 벽에 붙이기 위해 내가 의존했던 진공상태는 또 하나의 자연의 질서가 아닌가? 자연의 질서로부터 단절하기 위해 오히려 자연의 질서에 의존한 것이 아닐까? 곰곰히 생각해보니 그것은 어리석은 짓 같았다. 습기와 공기를 거부하면서도, 사실은 그것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셈이다. 시간은 모든 것을 되돌린다. 그러니 진공을 이용해 저 물건들을 벽에 붙이는 순간, 이미 바닥으로의 추락은 시작된 셈이다. 더 이상 바람이나 공기를 빼는 일과 같은 헛된 짓은 그만 두어야한다. 새로운 대안이 필요했다. 완전한 단절만이 우리를 구원해줄 것이다! 나는 슈퍼에 달려가 강력 접착제를 구입하였다. 그것은 매우 간단한 처방이었지만, 사실은 지금까지의 어떤 시도보다도 강한 것이었고, 심지어는 급진적이기까지 했다. 나중에 주인에게 싫은 소리를 들을지도 모르지만 미안하지는 않았다. 주인으로서 그의 책임이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지 않은가? 그가 여기서 일주일에 한 번씩은 샤워를 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도 이 대안을 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공기를 빼기 위해 손톱에 힘을 주지 않아도 될 것이다. 늦은 밤에 화장실에서 놀라지 않아도 될 것이다. 주기적으로 나를 괴롭혔던 저것들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될 것이다. 강력 접착제는 타일로 만들어진 벽과 실리콘 재질의 압착꼭지를 동화(同化)시킬 것이다. 그래서 더 이상 그들 사이에 어떠한 이물질도, 공기도, 바람도, 습기도, 자연적 질서도, 그 어떤 것들도 불허할 것이다.

새로운 시도에 임한 나는 약간 흥분하면서 제품을 뜯어 꼭지의 밑면에 조심스럽게 접착제를 발랐다. 강력 접착제는 유제가 나오는 입구가 붙어버려 막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래서 회사들은 뚜껑 안쪽에 작은 바늘을 꽂아두어, 뚜껑을 닫자마자 그 입구가 뚫리도록 하였다. 오랫동안 보관이 가능해진 것이다. 기발한 아이디어일 뿐 아니라, 생산자가 직접 사용을 해보지 않고는 나올 수 없는 매우 섬세한 배려이다. 접착 유제를 바르자마자 벽에 붙이면 안 된다. 접착제가 공기와 어느 정도 작용을 하여 더 단단한 점성을 갖도록 기다려야만 한다. 그것을 부추기기 위해 입 바람을 부는 것은 괜찮다. 기다리는 시간이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잠시동안 숨을 죽이며, 그 물질의 변화를 관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간혹 급한 마음에 접착제를 바르자마자 붙여버리는 초심자도 있지만, 그것은 물건들을 지저분하게만 할뿐 결코 효과를 보지 못한다. 매사에는 때가 있다고 하지 않는가? 기다리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접착 유제의 색이 변해서 굳어가고 있는 듯 하여, 나는 표시해 두었던 부분에 꼭지를 힘껏 밀어 눌러 버렸다. 미끄러지는 느낌이 들어 단단히 손가락을 고정시키고, 약 1분 정도를 숨을 죽이고 누르고 있었다. 부착된 표면을 말리기 위해 입 바람을 부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잠시가 지나고 천천히 손을 떼서 부착된 부위를 눌러 보았다.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실리콘이 타일이 된 것인지, 타일이 실리콘이 된 것인지 알 수가 없을 정도로. 어쨌든 전혀 다른 두 물질이 흡사해진 셈이다. 이젠 습기도 두렵지 않았다. 수학적으로 말해 저들은 완전히 연속(連續)한 것이다. 저것들이 다시 떨어진다면 어제와는 전혀 다른 의미, 즉 더 이상 분리가 아니라 파손이 될 것이다.

무엇인가를 붙잡아둠으로써 우리는 편안해진다. 고정되어 있는 것은 매번 그 자리에 있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그것을 다룰 수가 있다. 비누상자와 샤워기가 그랬듯이, 자꾸 떨어지거나, 변하거나, 불안정한 것들은 내게 새로운 노력들을 강요한다. 그리고는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가 함축하고 있는 불안의 소용돌이 속으로 나를 이끌어, 나를 힘들게 하고 지치게 하고 절망하게 한다. 인간이 더 이상 이주하기를 중단하고, 그 대신 소유와 같은 사회적 행위를 선택하였을 때, 비로소 문화가 시작되었다. 이주하지 않게 되어 편안함을 느꼈지만, 그 대가로 우리는 불안정한 것들을 거부하면서, 미래의 불안을 안고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단단한 것처럼 보이는 곳에 고정되어 붙박이는 것, 혹은 내게서 떨어져 나가는 것들의 소매를 붙잡아 원하는 자리에 붙박아 놓는 것은, 달리 말한다면 다가올 날들을 불안이나 절망과 관련짓는 행위일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두 부류의 인간이 있는 것 같다.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기대하며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는 사람. 그리고 결코 그러한 날들이 오지 않길 바라며 이 순간이 영원하다고 믿는 사람. 안주하기를 선택한 우리 모두는 바로 이 후자가 된 셈인가?

물론 개인이나 사회 모두에게 있어 안주한다는 것은 좋은 것이다. 잠시 동안이지만 그것은 안도감이나 편안함을 갖게 한다. 전통이라든가 역사에 안주해 있는 민족도 있고, 특정 권력집단에 부착되어 안도감에 사로잡힌 개인들도 있다. 충만한 인간관계 속에서 행복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는 모두가 무엇인가에 고정되어 있거나, 무엇인가를 고정시키고 싶어한다. 그런데 그 바램이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는 사실이 우리를 힘들게 한다. 우리는 영원한 정착 혹은 영구적 소유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다만 "내가 죽기 전까지만 이라도 . . .!"라고 주문을 외우며, 고개를 돌려 눈을 감고 외면할 뿐이다. 사실 영원한 소유에 대한 환상의 본질은 바로 저 이기심에 있다: "내가 죽기 전까지만!" 저 압착꼭지들은 언젠가는 떨어질 것이다. 내가 한 일은 저것을 조금 더 강하게 고정시켜 놓았을 뿐이다. 그리고는 잠깐 동안 영원성에 대한 환상으로 우쭐해 있다. 비누상자와 샤워기가 마치 저기 저렇게 영원히 붙어있기라도 하듯이!

의심이 들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꼭지를 부착시키고 난 후 처음 몇 시간 동안은 기분이 매우 좋았다. 오랫동안 미루어오던 청소를 하고 난 후에 느끼는 자신에 대한 대견스러움 같은 것과는 좀 다른 의미에서의 뿌듯함이었다. 그것은 나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과는 수준이 다른 그런 문제였다. 하루가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고, 지금은 한 달이 지났는데도, 저것들은 한 번도 떨어지지 않고 저렇게 건재하게 붙어 있다. 마치 다시는 자신의 고향으로 되돌아가지 않겠다는 듯이. 저들의 저 독신자적인 자세가 믿음직스러웠다. 가끔 가다가 생각이 나서 손가락으로 당겨보았지만, 언제나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다. 나는 그것을 볼 때마다 생활의 승리감 같은 것을 느꼈다. 왠지 뭔가를 획득한 것 같은? 복수를 한 것 같은? 아니면, 뭐랄까 . . . 일종의 소유감이라고 말해두자. 그리고 그 감정은 나를 세속적인 행복감으로 이끌었다.



<문예 노트>
Posted by huun

William Gibson에 따르면, 사이버공간은 '합의된 환각'이다. . . . 거기에는 현재와는 다른 공통적인 미래의 비전이 있으며, 현재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현세보다는 희망하는 공간이나 갈망하는 리얼리티의 비전이 있다. 그것은 먼 눈으로 세계를 보게 한다. 사이버공간 하면 흔히 유토피아를 떠올린다. 유토피아는 어디에도 없는 곳이지만(outopia), 동시에 무언가 좋은 곳(eutopia)이다. 사이버 공간은 '어디에도 없는-어떤 곳'으로 계획되었다. 또한 가상 공간은 일종의 '기적과 꿈의 테크놀러지'이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신'의 놀이를 허가한다. 우리는 거기에서 죽은 것도 살리며, 지능을 부여하기도 한다. 이러한 유토피아적 공간은 초월에 대한 광적인 믿음에서 비롯된다. 신기술이 결국 불완전한 현실세계의 한계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줄 것이며, '다음 세대의 희망이며, 천국의 빛'이라는 환타지 말이다.

유토피아가 새로운 기쁨의 영역일까? 그것은 '좋은 사회를 만나고 경험하는 하나의 스토리'일 수도 있고(Krishan Kumar), 우리는 어디에도 없는-어떤 곳에서 '공동체의 의미와 경험을 새롭게 회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때에 그것은 삶의 이해와 흥겨움을 주고 공공영역을 부활시켜줄 도구'가 될 것이다(Howard Rheingold). 또한 작은 공동체로부터 전지구적 네트워크로 연결된 공동체까지도 가능할지 모른다. 레인골드는 '가상 공동체'가, 전자매체를 통해 공공토론에 지속적으로 참여하고, 인간적 감정을 가지고, 이 공간에서 인간적 유대를 짜 나아간다면, 네트로 연결된 하나의 집단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이를 말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말아야겠다. 지금 여기 불완전한 삶을 초월할 수 있으며, 새로운 대안적 현실인 냥 떠드는 가상기술 혁명 선전가들이 있지만, 이것이 바로 유토피아의 유혹이다: "인간은 한마디로 신들이 되었다. 그렇다면, 물질적 한계와 사회적 분리 속에서의 권력투쟁인 정치는 어떻게 되는가? 유토피아 이론에서 정치에 대한 혐오는 완벽성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어서 빨리 이 망상에서 깨어나야 한다. 사이버공간과 가상현실에 완벽한 대안적 미래는 없다. 우리는 실제세계에서 살고 있고, 그것을 원하는 대로 완벽하게 만들 수가 없다. 신기술을 장려하고 계발하는 제도 기관들이 있지만, 이들은 모두 사회적 정치적 현실 안에 있다. 물질적 제약이 있고 사회적으로 분리된 세계라는 것. 얼마나 우리 자신이 정치적 필요 속에 있는지 기억해야 한다. 유토피아적 환타지는 우리 시대의 사회적 정치적 동요(윤리적 갈등, 민족주의 부활, 도시분할 등)가 가상공간과는 상관없는 딴 세계의 일처럼 본다. 나는 실제세계가 가상공간에 참견해야 한다고 본다. 새로운 무질서와 파멸의 관점에서 사이버공간의 비전을 보아야 한다. 기술적 망상은 자연에 대해 그리고 인간의 본질에 대해 인간이 이성적으로 정복했다는 환타지에 기인한다. 우리는 이 지배와 통제의 환타지를, 정치적 위기와 사회 조직의 와해를 포함해서, '서구의 황폐화'라는 문맥에서 생각해야 한다.

가상공간과 자기정체성

사이버공간과 가상현실에서 가장 많이 논의되는 자기-정체성의 문제는 자유와 선택의 문제가 될 것이다: "인공적 현실 속에서, 육체적 외양은 완전히 조립 가능하다. 크고 아름다운 외모를 마음대로 가질 수 있고, 작고 평범한 외모를 가질 수도 있다. 이렇게 변화된 육체적 속성은 다른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을 상당히 변화시킬 것이다 . . . "

현실적으로 제한된 몸이 인공적으로 극복된다면 정체성은 조립 가능하다. 가상적 존재의 경험이 우리를 흥분케 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구현된 세계의 한계로부터 해방되어 초월성을 갖게되었다는 점 때문이다: "지나친 발전이나 인구폭발, 무자비한 환경파괴로 황폐화된 세계에서 위안이 되는 것은, 물리적 형식이 다차원적 컴퓨터 공간에서 정보의 패턴으로 재구성됨으로써, 그 원래의 순수성을 회복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다. 사이버 공간의 몸은, 황폐화되고 부패된 세계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사이버공간에서, '주체성은 사이버네틱 회로에 분산되어 있다 . . . 자아의 경계는 이제 피부가 아니라, 기술-생체 통합 회로 속에서 몸과 시뮬레이션을 연결한 피드백루프에 의해 결정된다. 이렇게 조정된 현실에서, 자아는 하나의 흐름이나 여러 가지 변형된 실체로 재구성된다. 정체성은 게임이나 소설처럼, 거의 의지에 의해 선택되거나 폐기될 수가 있는 것이다. 기술과 정체성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면, 그 진부한 결과로서, 우리는 새로운 세계를 환타지나 상상으로 만들어 놓으려 할 것이다.

새로운 정체성, 유동적 정체성, 탐험적 정체성 ― 그러나, 그것은 또한 진부한 정체성이다. 오로지 기술만이 새롭다: 사이버공간에서의 게임이나 만남은, 새롭거나 놀라운 것이 전혀 없다. Rheingold는 거기에는 '가면놀이'나 이야기를 즐기는 인간 본연의 뿌리가 여전히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Michael Benedikt는 이를 발전시켜, "사이버공간의 비 물질성과 유연성은 신화적 현실을 표현하는 한 단계이다. . . . 낡은 능력을 확장하고 . . . 허구 속에 안주하여 신화적 지평 위에서 힘을 부여받고 계몽된 능력 . . ."이라고 지적한다. 이 모든 구시대적 꿈과 욕망(사이버-환상에서 보편적인)에는 열정이 결여되고 텅 비었다. 그것은 진부한 구식의 상상력이며, 거기서 새로운 정체성이나 경험을 창조하여 현세적 삶의 한계를 초월한다고 믿는다 . . . 환타지 게임 . . . 낭만적 감수성의 찌꺼기. 상상력은 죽고 오로지 테크놀러지만이 새로운데, 문제는 이 테크놀러지가 실제적인 것처럼 경험하게 해준다는 점에 있다. 물리적 세계 안에서 살아야하는 강요된 현실이 있지만, 새로운 테크놀러지는 물리적 현실과 육체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킨다. 가상 현실은 상상된 것으로, '물리적 세계의 객관성과 무제한성과 검열 없는 꿈과 상상을 결합한다.' 테크놀러지는 전지전능한 환타지에 의해 발명된다. 가상 세계에서 우리는 이전에 부여받았던, 그러나 빼앗긴 모든 만족과 희열을 만끽한다: 이 세계에서 우리는 유년시절의 망상 속에서 만들어진 마술적이고 창조적인 힘을 쇄신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친숙하고 예외가 없다. 친숙함과 예외 없음(familiar and unexceptional), 왜냐하면 가상적 미래의 담론은 현세적인 것 이상이 되지 못하며, (칸트적 의미에서) 정신과 몸이 일치된 단일한 주체성, 즉 감성과 지성의 경험의 "초월적 종합"에 뿌리를 둔, 초월적 상상의 재구성 이상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이버공간에 더 급진적이고 도전적인 세력이 있다. 이 세력의 논의는 더 이상 주체의 존재론적 위상을 수용하지 않고, 현대적 주체성의 파편적인, 복수적인, 그리고 탈 중심적인 조건들만을 그 전제로 받아들인다. 이 논의는 파편화되고 분해된 주체의 포스트 모던적 조건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여기서 개인적 자아는 반드시 단일화되고 응집되어야 한다는 믿음은 관념적이며 망상적이며 향수에 젖은 생각이라고 간주된다. 세계에 관한 포스트 모던적 틀에는 더 이상 칸트적(혹은 데카르트적인) 의미의 인류학이 없다. 사이버공간에는 자기정체성의 복잡함을 탐색할 가능성이 있고, 정신 공간과 육체적 타자간의 관계를 탐색할 가능성이 있다. 우리는 포스트모던 조건(포스트 휴먼)을 분석할 수 있는 가상 실험실을 얻은 셈이다. . . .

사이버공간과 가상현실 논의는 페미니즘에서도 진행되었다. 해러웨이가 그 예인데, 그녀에 따르면 사이보그 정체성은 '경계들의 혼합의 기쁨과 그들의 구성 속에서 책임에 관한 상상력의 원천'을 제시한다. 따라서 사이버 페미니스트는 기쁨과 혼합의 계기에 중요성을 부여한다. Claudia Springer는 '육체의 규정으로부터의 탈출이 주는 스릴'에 집중한다: '경계들의 횡단은 사이보그를 의미하고, 그것은 자아를 완전히 다른 것으로 변형시키며, 기술과 인간의 정체성을 결합시킨다'. 가상현실은 우리로 하여금 가면을 선택하게 하고 여러 정체성을 가질 수 있게 한다. Sadie Plant가 말하듯이, 규격화된 정체성(off-the-shelf identity)은 짜릿한 모험이며, 이 모든 가면을 알고 있는 여성은 이미 이 여행에 익숙해 있다(피지배자의 본질).

사이버공간은 무제한의 자유가 있는 영역으로 상상되며, '자유로운 실험이 가능하며, 경계나 제약이 없는 환경이다' 그것은 여성의 욕망을 어디든 흐르게 할 수 있는 공간이다, Claudia Springer가 말하듯이 그것은 '마이크로 전자 상상력은 우리의 몸을 지우고 의식을 통합해서 하나의 매트릭스를 구성한다 . . . 매트릭스가 어머니나 자궁을 의미하듯이, 사이보그 상상력은 편안함과 안전함으로의 도피에 대한 은유이다. 그것은 세계의 이상화 과정이며, 그곳은 무제한의 전지전능한 경험이 가능한 곳이다.'

사이버공간과 자기정체성의 담론은 현실세계에서의 정체성의 위기라는 문맥에서 생각해야 한다. 정체성의 응집성과 연속성의 상실은 곧 현실의 통제가 실패했음에 기인한다. 자기 정체성의 위기의 문제는 개인뿐 아니라 개인과 사회 간의 관계가 중요한 변형을 겪고 있음을 의미한다. 공적 세계가 단단하다는 믿음에 근거한 정체성이 왜소해짐으로써, 중대한 문화적 변이와 함께 사회적 의미가 상실된다. 이것은 도덕적 관계의 변화를 의미하며, 개인의 정체성과 사회적 현실의 연속적 관계와 고정성을 요구하는 윤리적 삶의 상실을 의미한다. 현실에 의미를 부여할 능력이 사라지면, 정신적 방어물 즉 위험에 빠지지 않기 위해 많은 현실적 자극에 자신을 노출시키지 않으려는 개인의 욕망의 산물이 나오며, 그는 이제 더 이상 세계를 해석할 수가 없다.

이러한 고립, 절연, 유아론은 마약이 되어 개인들로 하여금 단일한 정체성과 응집력을 심리적 사회적 수준에서 포기하게 만들어 버렸다. 그런데 테크놀러지는 정체성의 붕괴와 위기를 부정하고 부인할 수 있게 만든다. 응집력은 이제 변화무쌍한 상상력의 허구로 유지되고, 파편화의 결과로서 스트레스나 피로함이나 충격은 자연스럽게 중화된다. 그리고 경험은 변태적인 쾌락과 놀이의 차원에서 발생한다. Mary Ann Doane이 초기 cinematography 기술이 이와 유사하다고 했다: 두 가지의 충동이 긴장하고 있는데, 하나는 모더니티의 불연속성, 파괴를, 연속의 망상으로 수정하려는 충동이 있으며, 다른 하나는 인간의 기본적 조건으로서 불연속성을 체현하려는 충동이 있다. 영화는 이 둘 다를 효과적으로 가지고 있다. 가상기술은 포스트 모더니티를 저항하거나 긍정한다. 이곳은 이제 현실세계가 요구하는 것들을 지울 수도 있고 초월할 수도 있다(그러나 별 차이가 없다). 또한 마술적 리얼리티로 한계를 초월하고 환타지로 인해 전지전능해진다. 이제 도덕성은 미적 태도의 가능성과 다차원의 게임으로 대체된다.

기술영역은 이제 자신의 세계를 가지고 현실의 복잡성과 중력으로부터 절연되었다(Brenda Laurel, '가상 극장'). 여기서 우리는 구시대의 욕망에 만족하고 환타지를 실현하려 한다. 사이버공간과 가상현실은 특히 투사(projection)적이며, 무의식적 환타지를 표현하고, 나르시스적 퇴행에 민감해진다. 나르시시즘은 현실로부터 퇴행하는 환타지 세계의 재현이다. 거기에는 경계들이 없다(헤러웨이와는 전혀 다른 의미의 경계). 어머니와의 상상적 관계 속에서 전지전능한 만족을 느끼듯이, 가상세계는 방어벽을 구축하고, 그 안에서 모든 소망이 충족된다. 또 어떤 경우에는 정신병적 상태와 일치되어(Peter Weibel은 가상성을 '정신병적 공간'이라 함) 환각적인 소망충족으로 현실을 지배하고, 소망과 현실간의 경계가 불분명해 진다. 이 정신병 공간에서 현실은 거부되고, 자아의 응집력은 조각나고, 경험의 질은 흥분과 열중으로 축소되었다. 이것이 사이버펑크 소설에서 보게되는 것이다.

Marike Finlay는 이러한 나르시스적이고 정신병적인 방어가 포스트모던 주체성의 특징이며, 자아의 위상에 대한 존재론적 회의를 환각으로 대체하여 유아기의 전지전능함으로 퇴행하려는 술책이라고 한다. 여기서 내부와 외부는 동일한 하나로 망상된다. 인공 현실은 쾌락과 욕망의 명령에 순응하는 질서로 고안된 것이며, 실제적이고 물리적인 자아를 부유(suspension)하게 하여 주체를 탈 육화한다. 거기에는 무엇을 상상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 제한할 타자(Other)가 없다. 이러한 현실과 주체성은 단지 반사회적이며, 결국은 비도덕적이다. 부유하는 정체성은 정신분열 혹은 신 나르시즘의 왕국이며, 이것은 나아가 개인간의 관계의 본질을 변화시킨다. 따라서 직접적이고 육체적인 만남이 없는 상태에서 우리의 윤리는 사라질 것이다. 게다가 기계 인터페이스는 도덕과는 상관없는 무관심 속에서 인간관계를 맺게 한다.

신기술의 상상적 가능성을 부정하기보다는 상상력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Winnicott의 잠재적 공간 즉 '인간적 삶의 제 3세계'라는 개념에서 가상현실의 경험을 볼 필요가 있다. 이 공간은 개인 내부도 혹은 공유된 현실 세계 외부도 아니고, 창조적인 놀이와 문화적 경험의 공간이다. 그는 유아기적 망상을 지탱해주는 잠재적 공간과, 미적이고 영적인 창조성으로 연결된 더 성숙한 잠재적 공간과의 연속에 집중한다. 이런 의미에서 마술적 미적(magical-aesthetic) 측면으로서의 기술은 흥미롭다.

그러나 창조적 망상에 안주할 수는 없다. 위니콧은 또한 잠재적 공간에서 환멸의 순간을 강조한다. 이것은 '마술적 통제의 한계를 인정하고 외부세계에서 사람들이 선의지에 의존하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유아기는 '내적인 대상의 투사를 통해 자신이 창조한 세계를 뛰어넘어 볼 수 있는 능력을 발전시킨다'(Thomas Ogden). 개인은 따라서 "실제적인 대상들의 관계로 진입하는 능력을 가지는데, 이는 내적인 대상세계의 전이된 투사 이상의 것이며, 정신적 재현은 그 원천으로부터 그리고 내적 대상들간의 관계로 연상되는 전능한 생각들로부터 증식된 자율성을 획득한다." 잠재적 공간은 과도기적 공간이다. 이것은, 내부와 외부 세계 양쪽의 상호작용을 통해, 도덕적 감각이 전개되는 매개적 공간 안에 있다. 과도기적 경험은 내적 그리고 외적 세계의 차이를 포함한다. 이것은 심미적 횡단이 가능해지는 토대 위에 있다 ― 그리고 활용 가능한 대상 세계의 인정, 즉 사람들과 함께 자신의 밖에 있는 공유된 경험세계의 영역으로 진입할 수 있는 사람의 인정'을 포함한다. 이것이 분별과 감정이입과 도덕적 만남의 능력을 발전시킬 수 있다.


가상 공동체와 집단 정체성
흔히 테크놀러지를 자족적이며 자율적인 영역이라고 추측하기 쉽지만, 테크놀러지 발전은 사회적 정치적 변화와 격변이라는 보다 큰 문맥에 위치시켜야 한다. 세계는 스스로 변형되고 있으며, 그 지도는 깨지고 재배열된다. 이러한 소란한 변형과정을 통해, 우리는 소속감이나 공동체의식을 버리기도 하며 재배치되기도 한다. 가상 공동체는 다른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문화적 정치적 지형 위에 있는 것이다.
가상현실을 흔히 실제세계와 대립하는 것으로 상상하기 쉽다. 새롭고 혁신적인 사회에 대한 관념과 연결되어, 나중엔 일종의 유토피아적 기획으로 제시되기도 한다. 가상현실은 '어디에도 없는-어떤 곳'으로 상상되어, 힘겹고 위험한 현실세계의 대안으로 제시된다. Krishan Kumar가 보았듯이, 이것은 과거의 공간을 유토피아로 대체하는 것이다. 포스트 모던 유토피아는 '토마스 모어의 시대로 가는 것'이다. 가상공간은 일종의 제거된 공간인 셈이다. 유토피아적 사고처럼, 믿음과 희망으로, 이상적이고 보편적인 인간관계나 집단이 있다고 믿는 것이다. . . . 사이버공간은 또한 구원과 초월의 장소이다. 이 새로운 예루살렘의 비전은 분명히 가상현실 기획에서 유토피아적 열광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가상 리얼리스트들이 비현실적인 것은 아니다. 더 실용적이고 정치적인 기질을 가진 다른 이들이 있으며, 이들은 사이버공간과 현실세계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공헌하고 있다. 거기엔 여전히 타락한 세계 속에서 대안적 현실로서의 가상현실의 의미가 있다. 기술사회성은 새로운 형태의 공통체를 발전시키는 토대가 되기도 한다. 네트워크는 '유동적이고 복수적인 선택적 친화성을 강화하기 위한 사회적 절점(nodes)으로 이해된다. 이런 점에서, 가상 공동체는 생존하기 위한 복잡한 그리고 정교한 전략일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인식이 필요하다. 그러한 공동체는 현실적 삶 속에서 그리고 그것과 관계하면서만 존재한다. 가상 공동체의 삶은 물리적 공간과 가상적인 문화의 경계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는 어려운 현실적 상황을 조절하고 적용하는 문제이다.
Howard Rheingold의 책 The virtual Community가 이러한 접근을 시도한다. 서부해안 스타일 특유의 유토피안 냄새가 나긴 하지만, 사회적 질서를 분명히 고려하고 있다. 그는 다소 실용주의적인 접근을 하지만, 또한 그 한계와 약점을 인식한다. 레인골드는 현대의 민주주의적 공동체를 부패하고 손상된 상태로 보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컴퓨터로 매개된 소통은 '실제 삶에서 공공 영역이 점점 사라지면서 사람들의 가슴속에서 자랐던 공동체의 열망'에 의해 가동된다. 레인골드는 함께 즐기기 위해 모이는 이 장소들의 사회적 중요성을 강조한다. '현대 사회의 비공식적인 집회장'이라 할 만 하다. '자동차나 교외, 패스트푸드, 쇼핑몰 등이 전통적인 마을로부터 이러한 '제3의 장소'들을 없앰으로써, 현존하고 있던 공동체의 사회적 조직은 찢겨지기 시작했다.' 그는 가상 테크놀러지가 이러한 상황을 억제하길 바란다. 레인골드의 믿음은 가상 공간이 '점점 사라지는 공동체의 면모를 재건할 수 있는 비공식적인 공공장소의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현실세계에서 잃었던 가치관과 이상을 회복할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이 새로운 매체를 통해 (공통적)관심과 친화력의 보편성으로 연결된 새로운 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레인골드는 이제 우리가 '함께 즐기고 삶을 이해하는 공적 영역을 부활시킬 새로운 도구에 접근했다'고 믿는다.
그러나 전위적이고 미래지향적인 겉모양에도 불구하고, 레일골드의 상상력은 기본적으로 보수적이고 향수에 차있다. 그는 근본적으로 잃어버린 것 즉 공동체의 회복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이 모든 테크놀러지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잃었던 협동정신을 회복하기 위해 컴퓨터 망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뼈아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나무를 자르고 콩 심는 일 보다, 키보드를 누르고, 스크린 앞에서 온종일을 보내는 일이 '진보'적이라고 더 이상 확신할 수 가 없다. 새로운 테크놀러지를 가지면서, 우리는 공동체 정신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대부분 이 테크놀러지가 한 몫을 했다. 그러나 이 말이 새로운 방식으로 서로 돕기 위해 컴퓨터를 이용하지 말라는 말은 아니다."
Net은 가족연대를 새롭게 달궜다('보이지 않는 친구들로 구성된 가족'). 이것은 마을이나 동네의 에토스를 재창조한다. 레인골드는 '온라인 공산주의자들의 장소'에서 '공동체 뿐 아니라 진정한 정신적 연대'를 꿈꾼다. 전자 공동체는 관심사가 공통적이라는 점, 그리고 '공유된 의식'과 '집단정신'의 경험이라는 것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그 이미지는 모계 가족적이며, 그 이상은 통일된, 합의에 의한 상호주의이다. 그의 가상공동체 이미지는 투명한 사회에 관한 '루소적인 꿈'의 전자적 변형체라 할 수 있다. 이 '공동체의 이상은 사람들간의 조화를 표현하고, 상호이해를 통한 일치된 공동체의 열망'인 것이다. 이는 근본적으로는 담을 둘러싸고 전체성에 토대를 둔 사회적 비전이다.
레인골드의 The Virtual Community는 사이버공간에서의 연대와 집단에 대한 실용주의적 해법의 좋은 예이다. 그는 현실적인 문제들을 가상적 해법으로 풀고자한다. 그는 한결 같이 사회적 정치적 개선을 위해 가상 네트워크 기술의 적용가능성을 모색한다(물론, 잘못 적용될 위험은 인식한 채로). 전자매체가 사는 방식을 변화시키고 있다는 인식은 증가하고 있다. Joshua Meyrowitz는 텔레비전이 물리적 장소와 사회적 장소의 관계를 재구성하여 얼마나 사회질서의 논리를 변조시켜왔으며, 그럼으로써 또한 공간적 한계(spatial locality)로부터 공동체를 해방시켜왔는지 관찰해왔다. 그러나 내가 질문하고 싶은 것은 이러한 발전들에 부합하는 것으로서 테크노-공산주의의 타당성이다. 문제가 무엇인지를 보아야 한다. 기술적 미래의 차원에서 일반적으로 제시된 것은 현재의 사회적 관계들과 사회생활의 재현들의 문제가 더 크다는 점이다. 소란스런 변화 속에서, 사람들이나 집단과의 관계의 본질은 더 어렵고 불분명한 것이 되었다. 그러니 새로운 연대의식과 경험을 찾아야 한다. 사이버공간에서의 연대는 작은 마을의 게마인샤프트적인 안전함을 지구촌이라는 국제적 질서로 확장하는 문제인 듯하다. 그러나 그 연속성과 이행의 문제는 믿을 수가 없다. 포스트모던 공간인 디즈니랜드를 보면, 도시생산 없는 도시화가 될 가능성이 크다 . . . 아우라가 없어진 하이퍼 도시, 수백만 시민은 있지만 거주자는 없는 도시 . . . Jean Baudrillard가 말하듯, 그것은 '갑자기 튀어 오른 전체 종합적인 세계이며, 극저온 상태에 있는 전체 역사의 모형'에 불과하다. 가상 네트워크 연대 또한 만찬가지이다. 즉 공동체를 깨우는 주문은 있지만, 한 사회의 생산은 없으며, 집단 정신은 있지만, 사회적 만남은 없고, 온라인 친교는 있지만 하이퍼 공간의 거주자들은 없다. 이것은 또 다른 전체화된 종합적 세계이며, 여기서 역시 역사는 얼어붙어 버렸다, 즉 추상적이고 공허한 공동체생산에 머문다. 따라서 실질적 주체 또한 없다. 우리가 가진 것은 다만 연대와 공동체의 구식형태를 복제함으로써 보존하는 것뿐이며, 결국 대안적 사회가 아니라, 사회의 대안이 되어 버렸다. 이것은 Iris Marion Young이 말하듯이, 공동체를 이상화하여 차이나 불균형이나 주체를 부정하게 된다. 공동체 주창자들은 "사회적 이상으로서 분리보다는 혼합을 긍정함으로써 차이를 부정한다. 그들은 사회적 주체를 하나의 커다란 전체 안에서 개인들간의 동일성과 대칭성에 의해 만들어진 통합 혹은 상호성의 관계로 받아들인다." 사이버공간에서의 존재 ― 실질적 자아들과 상황들이 부유상태에 있는 공간 ― 는 개인들 속에서의 동일성과 대칭성을 도모하고, 물질을 벗고, 장소를 벗어난다. Gerard Raulet이 말하듯이, '주체는 한번에 교환 가능하거나 자의적인 것이 되어 버리고, 순수 기능성으로 축소된다'. 통일성과 상호성의 의미는 공유된 전체 안에서 테크놀러지의 제도를 통해 '인공적으로' 창조되는 것이다.
새로운 테크놀러지는 하나의 투명한 사회를 꿈꾸는 것 같다. "다른 사람에게 투명한, 순전히 동 시간대 같은 공간에 공존하여, 너무 가깝고, 따라서 우리의 비전을 방해할 어떠한 것도 끼어들 여지가 없는 . . . 루소주의적 꿈." 가상 현실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이 즉시성의 경험이다. 만국어를 전달할 수 있는 가상현실(Barrie sherman과 phil Judkins). 이것은 완벽한 매체이며 . . . 보편적 상징들이 보편적 인간성을 만들 것이며, 보편적 문제들이 노출되고 보편적 해법들이 나올 것이다. 이 가상 이데올로기는 소통 유토피아의 구시대적 이상을 영속화한다. 소통의 즉시성은 의식의 공유와 상호 이해로 연결된다. 투명성과 일치의 망상은 공산사회 신화를 만들고, 전지구적 차원의 전자 게마인샤프트를 상상하여, 일종의 에덴의 신화를 만든다.
기술 공동체는 기본적이고 반정치적 이상이다. Serge Moscovici에 따르면, 질서는 현실 속에서 아무런 토대로 가지지 않는다; 그것은 '퇴행적 환타지'이다. 하나의 사회체계는 오로지 '특정한 무질서가 창조될 때, 불확실성이 인정될 때, 특정한 공포를 견뎌낼 때, 존속가능'하다. Richard Sennett는 도시환경에 대한 논의에서 무질서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무질서와 혼란은 사회생활을 문명화하는데 중요한 요소'라고 지적한다. 그는 '게마인샤프트 계획자'들이 커다란 차이들에 직면하면 공동 사회의 차원으로 후퇴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하면서, 이 차이의 부정은 '우리 문명이 인정하기 싫어했던 커다란 공포'를 반영한다고 믿는다: "도시생활은 노출의 공포를 반영한다 . . . 빌딩은 사람들의 차이에 담을 쌓고 . . . 이 차이가 상호적으로 자극을 주는 대신에, 상호간의 강요로 이루어졌다. 이 왕국에서 우리가 가진 것은 김빠지고 중화된 공간이며, 접촉이 배제된 공간이다." 이런 의미에서 가상 공동체는 노출을 통제하고 안전과 질서를 만들려는 열망에서 비롯된다. 이 역시 중화하려는 충동으로 가동되는 것이다.
사이버공간이나 가상현실은 보통은 테크놀러지의 문제이다. 그것은 잘못된 세계를 몇 가지 테크닉으로 고쳐준다. 오히려 너무 쉽게 그렇게 하기 때문에 대안이라 해야할지 의심스럽다. 사실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 차이, 비 대칭성, 갈등으로 구성되어 있는 현실세계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말이다. 샹탈 무페가 말했듯이, 보편적인 관심사나 일치에 관한 이상은 망상이다. 실제 삶에서 적대적 관계의 구성적 역할을 인식해야 한다. 건강한 민주주의는 여러 정치적 입장들의 활기찬 충돌을 요구한다는 점을 인정하자. 가장 중요한 것은, 차이와 대립을 도모할 수 있는 정치적 틀이다. 무페가 "투쟁적 복수주의"라고 말했던 틀. 가상 연대나 집단도 여기서 예외는 아니다. 따라서 테크놀러지는 우선적으로 테크놀러지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사회적 정치적 목표의 안내를 받아야 한다. 이미 말했듯이, 가상 공간은 질서, 도피, 철회 등으로 구축되었다. 사회적 정치적 이론으로 나아가야 한다. 결국 문제는 사이버공간 공동체와 집단성에 대한 논쟁을 넓혀서 정치화해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사는 세계
사이버공간과 가상현실을 너무 쉽게 대안적 공간이나 현실이라고 간주할 수도 있다. 불만족스러운 신체를 욕망에 순응시켜 보다 현실적으로 대체할 수 있기라도 하듯이. 희망과 더 나은 세계에 대한 신념의 원리를 표현하는 유토피아적 관점에서 가상문화를 보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신세계의 희망 대신에, 불만이나 거부로 볼 수도 있다. 그래서 뒤로 돌아가 끝을 보려는 묵시록으로 볼 수도 있다. 초월로서의 퇴행. Dieter Lenzen은 현대사회를 어린 아이의 전체화를 통한 구제라고 해석한 바 있다. 그는 문화적 재건의 기획을 일종의 퇴행이라고 본다. . . . 가상실재에 관한 담론은 이러한 신화(기술진보라는 흔해빠진 형이상학과 함께)를 끌어들일 소지가 많다. 이제 가상문화를 현실세계(가상문화학자들이 스스로의 메타포에 사로잡혀, 죽음을 선언하는 그런 현실세계)에 재배치 해야할 시간이다. 새로운 테크놀러지에 의해 우리 자신이 점점 현실을 이탈하고 장소를 이탈하는 경험 속에서, 현실과 비 현실의 경계에서 부유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가상문화를 신화로부터 벗어나게 하자.

* 이 글은 다음의 논문을 요약 번역한 것이다.
Robins, Kevin. "Cyberspace and the World we live in". Into the Imae: Culture and Politics in the Field of Vision. London: Routledge, 1996.

Posted by huun

공간과 소통은 전자적 virtuality의 차원에서 다시 정의되고 있고, 텍스트와 상호텍스트성은 하이퍼 텍스트성으로 확장되어 이해되고 있다. 사이버네틱스의 문제는 정보기술 뿐 아니라, 그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야기되는 인식론적 윤리적 사회 정치적인 복잡한 결과들을 포함하고 있다. 사이버네틱스는 초기의 패러다임(시각적/물질적 현존이나 선형적 독점적 발화)에 젖어있던 사람들에게는 공포와 혐오를 불러일으키기도 했으며, 반대로, 구식 패러다임을 포기한 자들과 새로운 움직임의 선봉을 꿈꾸는 사람들에게는 환희에 가까운 희망을 보여 주었다. 이 글의 목적은 하이퍼 매체가 읽기 과정을 어떤 식으로 변형시키는가를 분석하고자 한다. 인쇄물에서 디지털 텍스트로의 과도기라 할 수 있는 현재, 나는 지금 한창 대두되고 있는 하이퍼 소설이라는 장르를 미학적으로 접근하고, 여러 형태의 가상현실 매체의 미래를 논하려 한다. 새로운 매체에 대한 극단적인 두 반응이 있지만, 여기서는 사이버네틱스의 미학을 무조건 반대하거나 맹목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이 둘의 적절한 결합에 집중하고자 한다.

사이버네틱스적 읽기는 점점 선형적이고 폐쇄적이고 고립적인 인쇄물 읽기 방식을 대체하고 있다. 하이퍼 텍스트의 이상적인 독자는 대중매체와 정보기술의 상호 텍스트성과 잠재성(virtualities)으로 구성된 독자이다. . . . 내 생각엔, 하이퍼텍스트가 하나의 예술적 형식으로 살아남으려면 다양한 매체(그래픽, 오디오, 필름)의 가상적 즉시성, 자발성, 복잡한 운동, 풍부한 텍스트망과 텍스트를 재구성하기 위한 창조적 매개의 형식이 독자에게 상호 작용할 수 있는 즐거움을 제공해야 한다. 상상적 세계 속에 침잠했다는 즐거움(리얼리즘 문학의 성과)과 도구를 통해 그 세계 속에서 행동할 수 있는 즐거움(가상현실 기술의 목표)을 주지 못하면 하이퍼 텍스트의 그 잠재성은 실현되기 어렵다. . . . Michael Joyce, Carolyn Guyer와 Stuart Moulthrop의 하이퍼 소설을 보면, 이들 모두가 독자에게 새 장르를 알리기 위해 하이퍼 텍스트에 대한 메타서사를 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이퍼텍스가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지 분석하려면 일련의 궤적들을 볼 필요가 있다. 예로, 1945년 Vannevar Bush의 '메멕스'는 개인이 자신의 기록이나 문서 책들을 저장하고, 이 텍스트들간에 경로를 설정하고, 그 안에서 특정한 정보를 검색하거나 불러올 수 있는 장치이며, 이는 기억이 연상으로 연결된 개념들이 의미론적 망으로 조직되어 있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메멕스는 인간의 인식과 유사한 방식으로 자료들을 구조화하도록 고안된 장치이다. 이 생각에 약간 영향을 받아, Theodore Nelson과 Douglas Englebart는 60년대에 텍스트들을 연결 할 수 있는 컴퓨터 시스템을 개발했다. Nelson은 'hypertext'라는 용어를 65년에 만들었고, 80년에 Literary Machines 에 그 개념을 자세히 설명하고, 이 새로운 텍스트성을 "독자들에 의해 조절되는 링크들로 이루어진 비연속적 글쓰기"라고 부연했다.

하이퍼 텍스트는, 구조주의나 포스트 구조주의 이론가들에 의해 발단이 되었던, 쓰고 읽는 방식의 실증적 예를 보여주며(metatext), 이 이론들을 실천으로 이끄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로, 바흐친의 dialogism과 heteroglossia, 레비스트로스의 bricolage, 바르트의 생산자로서의 독자와 소비자로서의 독자의 구분, 데리다의 로고스의 탈 중심화와 현존/부재 이분법의 해체, 들뢰즈 가따리의 rhizome, 그리고 푸코가 말한 독자의 입장(위치)으로서의 저자의 기능 등이 있다. 사이버네틱 효과를 강화하기 위한 하이퍼 소설의 노력은 모더니즘이나 포스트 모더니즘적 실험문학에서도 이미 성취된바 있다. 조이스의 'Ulysses'나 'Finnegan's Wake', 그리고 버지니아 울프의 'the waves', 거트루드 스타인의 'The Making of Americans', 토마스 핀천의 'Gravity's Rainbow',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Pale Fire', 이탈로 칼비노의 'If on a winter's night a traveler'등이 그 예이다. 이 작품들은 사이버네틱스와 자주 연관지어 언급되는 사이버펑크 소설인 윌리엄 깁슨의 'Neuromancer'보다 더 하이퍼 텍스트를 닮고 있다. 깁슨의 소설은 사이버 공간의 미래에서 일어나는 삶을 주제로 다루고 있지만, 그 형식은 전통적인 리얼리즘 방식이다. Moulthrop은 사이버펑크를 하나의 순환으로 묘사하는데 그것은 "여전히 똑같이 꾸러미로 제시된 구식의 미래로 되돌아가 과학소설에 등장하는 결함이 많은 사회를 다루는 소설이나 영화"와 다를 바 없다고 말한다. 그는 깁슨과 같은 사이버펑크 작가들이 버츄얼 문화라는 완전히 다른 경험을 갖게 해줄 전자적 글쓰기 양식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급진적인 하이퍼 텍스트 작가인 멀드롭은 작가들이 경전화된 책에 묶여 소심함을 보인다고 비판한다; 특히, 그는 인쇄물은 사이버펑크 작가들에게는 하나의 장벽이며, 사이버네틱스적인 현실을 강박적으로 재현하려고만 했지, 실제로는 하이퍼 텍스트 미디어를 사용하여 실례를 보여주는 데에는 미흡하다고 지적한다.

한참이 지난 후 Robert Coover 같은 포스트 모던 작가는 자신의 실험을 인쇄물 장벽을 초월하여 확장했다. . . . 특히 그는 집단 글쓰기 구성을 즐겼는데, 그가 보기에 매우 저돌적이며 창의적이었다 . . . : "익명으로 짜여진 조각들로 된 이 공간은 계속 온라인 상태이며, 각각 새로운 워크숍 학생들 집단은 거기서 초대받아 하이퍼텍스트 호텔의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다. 1세기나 2세기 가량 더 두고 보고 싶다".

후버가 발견한 것은 '내러티브의 실질적인 흐름은 조각난 텍스트들간의 연결에서 이루어지지만', 대부분의 창조적 영감은 파편적인 기능을 가진 조각난 텍스트들간의 틈새에서 일어난다는 점이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적 의미에서 내러티브를 구성하는 플롯이나 성격 전개와는 다르게 하이퍼 텍스트의 창조성은 링크, 여정, 순환, 지도제작(주1) 등과 더 관련이 있음을 말해준다. 하이퍼텍스트 작가와 독자의 관계는 특히 위계적 구조를 배제하고, 정보의 불연속적인 조각의 구성을 제시하는 것으로 강조된다. 이 조각들은 독자들이 참여하여 배열하지 않으면 내러티브가 되지 않는다. 가장 효과적인 하이퍼 텍스트는 독자에게 복잡하게 얽힌 텍스트 목록을 조직하게 하는 것이다. 하이퍼 텍스트 시학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유동성, 우연성, 미결정성, 복수성, 불연속성"일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이 방식이 미래적임을 믿고 있기는 하지만, 이것이 작가의 천재성에 위협이 될 수 있고, 탈 중심이나 복수성의 과잉을 초래할 수 있으며, 선형적인 이야기의 교환에 머물 수 있음을 견지한다. 이렇게 볼 때, 하이퍼 텍스트는 너무 과장되거나 힘을 잃고 축 늘어지거나 싸구려 열광이 될 위험도 있다.

조이스의 "Afternoon", 가이어의 "Quibbling", 멀드롭의 "Victory Garden"을 읽고 나면 쿠버가 경고했던 말에 동의할 것이다. 확실히 하이퍼텍스트는 독자로 하여금 공간을 벗어나서 장면들과 인물들의 대화나 환영들을 통해 부유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 . . 이야기를 찾아가는 길들이 미로 같아서, 그것을 찾다보면 적어도 얼마간은 예상치 못한 즐거움을 가질지도 모른다. . . . 그러나 이 즐거움은 깊은 성찰이나 지속적인 만족을 주지는 못한다. 미로 찾기 여행이 주는 강요라 할까? 그것이 물리적 공간이든 텍스트 공간이든 간에 탐정이야기의 플롯같이 해결의 열쇠를 찾기 위해 고문당하는 듯한 이야기는 확실히 독자가 부정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하이퍼 소설의 또 다른 즐거움은 동적인 활동이라 할 만 한데, 마우스를 이리저리 눌러 여러 항목들을 한번에 보고 선택할 수도 있으며, 전혀 다른 새로운 항목으로 이동할 수 있다는 점이 좋다. 그러나 이 또한 실질적인 즐거움을 주지 못한다. 하이퍼 텍스트를 읽고 있자면, 독자는 단순히 표면적인 활동에 머문다. 창조적인 쌍방향적 사이버네틱 경험(MUD, MOOs, MUSHes 게임등?)과는 좀 다른 면모이다.


Michael Joyce의 Afternoon은 하이퍼 소설의 발전을 이해하는데 기본이 되는 텍스트이다. 미스터리는 아니지만 미스터리 같다. 불륜이 일어나고, 혹은 잠재적으로만 일어나고(환상속에서 처럼) 그리고/혹은 일어나지 않고. 마찬가지로, 이야기에 비극적인 자동차 사고가 나오고, 그것은 그리고/혹은 일어나지 않고, 그리고 그 안에서 열광적이고/거나 무관심한 인물의 아들이 죽고, 그리고/혹은 다치고/거나 관련이 없거나. . . 등 조이스의 이야기의 복잡함은 독자들이 요구되는 다른 노드들의 연쇄를 다 여행해야만 특정한 노드로 갈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결정된 경로들은 다른 많은 장소들에서 각각 다른 것으로 횡단한다. 그래서 각각의 경로들은 지나갈 때마다 서로 다르게 링크되거나 연결된다. . . . 그럼으로써 "<만일 내가 네 옛 아내와 잠을 잔다면 어떤 느낌이지?>" 와 같은 질문은 네 개 이상의 이야기 문맥 속에서 매번 다르게 굴절되는 것이다.

스토리 스페이스 프로그램은 기본 옵션을 제공하여 독자가 선택하지 않고도, 텍스트 전체를 이동할 수 있게 한다. 물론 수동적이고, 선형적이고, 비모험적이긴 하지만, 조이스를 포함해서 이 프로그램 제작자들은 이 기본옵션을 통해 변화를 요구하지만 여전히 인쇄문화 습관에 젖은 사람들을 위해서라고 말한다. 기본옵션으로 이야기 전체를 훑고 나면, 이제 부스러기를 고르고, 약간 거칠게, 여기에 있는 단어들을 활동적으로 쫓아 다른 이야기 공간으로 넘어갈 수도 있다. 물론 단어들을 찾는 일은 즐겁지만, 찾아서 클릭하면 다른 스크린으로 넘어가고, 다른 단어를 찾으려면 다시 되돌아와야 한다. 이것은 시간을 소비하는 일이다.


소개말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적는다: "분명한 신호가 없는 것은 당신들을 헷갈리게 하려는 의도에서가 아니라, 호기심을 자극하고 유희를 도모하여 그 깊이에 초대하기 위해서입니다. 관심 가는 단어에 클릭 하세요". 구석에 있는 단어는 경로를 유발하지 못하는데, 이것은 다른 경로에 자리를 내어 준다. 그에 따르면 단어를 선택하는 것은 일종의 'texture'를 이루고 있으며, 독자들과의 실제 상호작용은 "texture의 추구에 있다고 "말한다. Texture를 통해, 조이스는 언외(言外)의 느낌과 낯설음으로부터 공명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 . .


그러나 만일에 그가 생각했던 흥미로운 단어들을 독자가 똑같이 선택한다면, 조이스가 중요하게 생각한 상호작용의 희망은 실현될 것이다. 내가 보기엔, emphysematous라는 이상한 형용사가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다른 많은 말들은 그렇지 못했다. 따라서 조이스의 관점에서 직물화되지 못했다. 조이스의 이 텍스트가 도모하는 상호작용의 성과를 판단하면서 그는 인정하기를 "부분적으로 실패한 시도"라고 했다. "구성적"이기 보다는 "탐색적"일 뿐이다. 탐색적이라는 말은 독자들이 이야기 경로들을 따라 자유롭게 움직이면서 매개되는 것에 제한이 있다느 말이고, 구성적이라는 말은 독자들이 구조적으로 그 텍스트를 변경시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성적 하이퍼 텍스트에서 독자는 저자가 되는 것이다.

독자의 기대와 작가의 생산간의 이러한 갭은 상호작용에 있어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상호작용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독자들과 텍스트 작가들간의 수많은 인터페이스가 있어야 하며, 단어 선택의 경우, 독자들의 노력에 대한 보답이 충분해야한다. . . . 모험의 차원에서 결국 이야기의 놀라움 같은 것 말이다. 하이퍼 작가들에 의해 고안된 비틀고, 바꾸고, 돌고 하는 장치들이 놀라움을 주지는 않는다. 사실 그것을 대신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이 작품의 마지막 경로에 다달았을 때 나는 실망했다. 하이퍼 경험은 선전과는 많이 다르다: 내가 기대했던 끝없는 이야기(칸트적 의미에서 양적/수학적 숭고와 같이)는커녕 너무 단순했다. 그리고  비전통적이거나 거칠기보다는 오히려 섬세하고 절제된 느낌이었다.

조이스 작품에서 보게되는 서정적 아름다움의 경우도, 이야기 진행을 멈추게 하는 경향이 있다. 쿠버가 우려했던 것처럼 서사운동을 멈추게하여 축 늘어지게 할 수 있다는 말이다. . . . 여러 가지로 파편화된 서정적이고 세밀한 묘사들은 우리로 하여금 거기에 머물러 한참 그것을 생각하게 하여, 하이퍼 매체의 활동적 잠재성을 축소하고 정체된 상태의 집중을 요구하기도 하는 것이다.

Guyer의 Quibbling은 조이스의 텍스트보다 덜 완벽하고 꽉 짜여지지 않았다. 가이어의 텍스트는 근사한 산문 몇 편을 통해 중세 수녀 마가렛을 놀랍게 묘사하고 있다. 그녀는 헨리라는 수사와 관능적 관계에 빠진다. . . . 그러나 이 서정적인 구문들은 조이스의 그것 보다 확대되고 이질적이고 대화적인 텍스트로 짜여져 있다. 가이어는 단호하게 관념적 심미주의를 거부하여, 천제로서의 단일한 존재인 작가, 유기적 총체로서의 예술작품, 거리를 두고 관조함으로써 획득되는 감수성(reception) 등의 개념을 거부한다.

가이어는 우선 독자를 위해 지도와 챠트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장소들을 목록으로 만든 지도는 독자들에 대한 그녀의 세심한 주의를 알 수 있다. . . 종종 작가-화자가 독자에게 질문을 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작가의 이야기 선택과 독자의 보고싶은 희망을 둘 다 고려한 것이다: "어디 봅시다. 여기에 링크를 놓을 테니, 한번 찾아보시죠. 미스터리 좋아하죠?"라는 식으로 화자가 독자에게 말을 건내기도 하며, "따라오지만 말고, 저 변덕스러운 것을 잡으세요 . . ." 라고 말함으로써 독자들의 기대나 이야기 전통을 조소하기도 한다.

조이스의 이야기는 중심 인물들의 상호작용을 따라 움직이지만, 가이어의 텍스트는 지각연상을 통해 퍼져나간다. 예로, 한 남자의 팔의 촉각-시각적 굴곡으로 시작하여, 어떤 여자의 등, 다음엔 손에 쥐인 멜론, 다시 점토로 된 병의 굴곡 등으로 이동한다. 다른 형태의 응집력을 위해 이야기의 응집력을 피하면서, 그녀는 일종의 흐르는 망을 구성하여 텍스트 요소들간의 연결을 퍼트리고 있다.

화자는 스스로 이야기 조직을 변화시키면 어떤 효과가 있는지 의심해보고, 그 대답을 하면서, 독자에게 자신의 의도를 밝히기도 한다 . . . . 잡지 목록 중 하나에서 가이어는 Mary Gordon의 에세이집에 대한 비평을 읽은 것을 언급하면서, 자신의 작품에 언급했던 고든의 인용구를 다시 생각해 보기도 한다. . . .

가이어의 텍스트로 알수 있는 것은 상호텍스트성이 하이퍼 소설에서 표제적으로 작동하는 방식이다. 다른 작가나 화자로부터 나온 텍스트 스크린들(보르헤스, 바르뜨, 보들리야르, 베이슨,조지 부시, 바이어니 . . .이들 작가들은 다만가이어의 텍스트에 나오는 B자로 시작하는 이름을 가진 이들일 뿐이다)은 직접적인 코멘트 없이 웹 상에서 짜여진다. 이들간에 연결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독자는 또한 "marginal notes" 메뉴선택을 사용할 수 있는데, 다른 텍스트들을 하이퍼텍스트에 첨가할 수 있다. 이것은 가장 중요한 텍스트에 동화되지 않고 서로 불연속하는 파편들(다른 작가의 텍스트들)을 포함시킴으로써 "main"텍스트의 위계를 부식시키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그 자체로, 하이퍼 텍스트는 바흐친이 말하는 dialogic과 heteroglossic적인 경향으로 간다. 이것은 인쇄 문화의 텍스트가 단일 화자나 작가의 목소리나 관점에 종속된 상태에서 다른 텍스트를 끌어들이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단일목소리/독백적인 텍스트는 다른 모든 작가들을(인용되든, 부연하든 혹은 인유되든) 허수아비로 만들며, 원래 목소리를 묽게 하여 작가가 자신의 위치를 강화하게 한다. 랜도우는 바흐친이 다른 텍스트를 인용하는 방법이 책에서의 형식보다는 하이퍼 텍스트의 형식에 가깝다고 지적한다. 바흐친 주석가인 Caryl Emerson은 바흐친이 인용할 때 "상세하게 인용하고, 각각의 목소리를 완전히 인용한다. 인용하는 작가의 특권적인 힘을 인식한 탓이다"라고 말하고 있다(주2).

Moulthrop의 Victory Garden은 조이스나 가이어의 그것보다 더 복잡하다. 이는 하이퍼 소설 장르가 점점 복잡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이야기 노드의 부분적인 지도를 삽입하고 북쪽 남쪽 정원 구역의 형식으로 경로들을 연결한다. 지도 없이는 읽기가 불편하다. 왜냐하면 이야기 속에는 많은 순환고리들이 있어 단순히 기본 옵션 버튼만을 클릭하는 독자에게는 출구를 제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 . . 빅토리 정원은 독자에게 처음 몇 개의 화면 안에서 경로를 선택하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야기는 진행되지 않는다. . . .

멀드롭의 초기 작품은 핀쳔에 집중해 있었다. . . . 빅토리 정원에서도 핀쳔의 작품의 영향이 많이 있다. 핀쳔의 작품에서 2차대전과 베트남전쟁이 뒤섞인 것과 유사하게 베트남전과 걸프전이 섞여 있다. 빅토리 정원의 주요 인물들 중 하나는 핀쳔의 편집병적 인물인 Boris Urquhart이다. 그는 무의식과 전자적으로 대면할 수 있도록 하는 프로젝트에 가담하여 "세계 최초의 쌍방향적 꿈"을 만들어낸다. 이 작품은 이상한 인물들로 가득차 있고, . . . 이야기의 어조는 갑자기 달라지고 유머러스한 문구들이나 정치적인 심각한 문구들, 포스트 모던적인 매체의 비판과 전화내용 등이 여기저기 병치되어 있다. . . .

조이스나 가이어처럼 멀드롭은 하이퍼 텍스트성에 대해 메타서사적 관찰을 시도한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하이퍼 텍스트는 정보들의 일시적인 흐름을 능동적으로 관리하고 다루기 위한 중요한 도구이다. 이 매체는 "발명하고, 발견하고, 쳐다보고, 여러 가지의 조직적인 구조들을 실험"하는데 꼭 필요하다. 그래야만 정보를 재구성하고 인식의 지도를 제작 할 수 있는 것이다. 불연속하는 이러저러한 텍스트 파편들을 땜질하여 새롭게 결합하는 기술의 효과는 지각이나 개념에 관련된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다. 이러한 신념은 단어들을 만들어내는 것의 중요성을 설명해준다: "비록 단어생산이 가끔은 불연속을 창조하지만, 이는 또한 연결 지형을 만들기도 한다". 멀드롭은 paraknowledge(Lyotard의 paralogy에서 암시 받은)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편집병과 지식의 관계를 설정하고 모든 것이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언급한다. 멀드롭은 질서의 개념은 무질서로부터 출현한다는 카오스 이론을 상기시키고, 하나의 복잡한 시스템에서 확률론적인 요소들의 중요성을 언급한다. 하이퍼텍스트는 독자에게 기본옵션으로 제시된 경로를 바꾸어 정보의 바다에서 길들을 연결하고 찾으라고 요구한다. 하이퍼 텍스트의 혼돈을 보고 있지만 말고, 독자들은 질서를 구성하는 임의적이고 즉흥적인 결합을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하이퍼 텍스트 문학의 미적 가치를 판단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매체에 적합한 규준을 사용해야 한다; 하이퍼텍스트 매체는 독자의 상호작용을 최대화했을 때 완전히 실현된다. 무작위성과 확장성만으로는 하이퍼텍스트 문학의 미적 가치나 성공을 담보해주지 않는다. 사실 무작위성과 확장성은 그 자체로 하이퍼 텍스트 작가가 물신화된 형식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쿠버의 관찰에서 볼 수 있듯이, "언제 어디서든 자기가 원하는 어떠한 방향에서건 이야기를 취할 수 있는 작가의 자유는 의무가 되어 버린다: 결국 그 자유는 마비될 수 있는 것이다". 요즘 몇몇 하이퍼 소설의 생산과 판매에서 보면, 텍스트의 확장, 복수성과 복잡성에 관한 이러한 강조를 볼 수 있다 ― 예로, John McDaid가 쓴 "Uncle Buddy's Phantom Funhouse"의 기술적 포트래치가 있는데, 이것은 Eastgate Systems가 "Five disks Two basement tapes One chocolate box Too many links to count"라고 광고하는 소책자를 판매한다.

복수성과 확장성이 여러 독자들에 의해 텍스트로 확장될 때, 하이퍼텍스트는 그 잠재성을 실현하게 되며 단순한 탐색이 아닌 구성이 된다. 이 효과를 성취한 작품이 바로 Deena Larsen의 "Marble Springs"이다. 역시 Eastgate 판매 책자에서, 이 작품은 "an open constructive hypertext"라고 적혀있다. 라슨의 텍스는 쌍방향적인 시인데, 미 서부 변방에 사는 여인들의 삶을 탐구한다. 디자인은 시편들로 이루어져 유령마을의 교회의 익명의 저자들이 있고, 이들은 독자들을 끌어들여 텍스트 전체에 널려진 실마리에 숨겨진 시인들의 정체성을 찾도록 한다. 이 하이퍼 텍스트는 복잡한 망으로 구성되어 다양한 문화의 여인들간에 상호연결을 가능케 한다. 이것은 라슨의 헌신적 연구에서 구성된 것으로, 그러한 법률, 종교, 이불 누비기나 요리와 같은 주제들에 관한 폭넓은 전기들로 연결된 노드로 구성되었다. 구성적 하이퍼텍스트로서 Marble Springs는 독자를 부추겨서 새로운 인물들과 이야기를 덧붙이게 하여 새로운 연결을 도모한다. 또한 라슨의 텍스트를 역사와 문학 수업에서 일어나는 독자-작가간의 쌍방향적 교육과 창조적 협동과제로 계획할 수 도 있다.

6년 전에 New Literary History에 글을 쓴, Richard Ziegfeld는 하이퍼텍스트 소프트웨어는 곧 독자들에게 문학텍스트를 상호 재구성하게 할 뿐 아니라, 독자들의 반응들로부터 자료들을 모아 미래의 텍스트(예로, cybernetic feedback loop)에서 독자들의 참여에 의해 하이퍼텍스트 매체를 정교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견했었다. 비록 요즘 하이퍼텍스트 소프트웨어는 아직 독자들의 반응을 수집할 능력이 없지만, 새로운 매체에 빠진 많은 작가들 대부분은 하이퍼 텍스트를 자신의 수업에 사용하고 자신의 텍스트를 학생들과 공유하는 학자들이다. 독자가 고무되어 자기 자신을 반추할 수 있도록 하는 가이어의 텍스트와 더불어, 조이스에서 라슨으로 이어지는 궤적은, 독자들의 쌍방향성에 대한 커지는 욕구가 당연하다는 점을 제시하고 있다. 하이퍼텍스트 읽기의 이러한 면모는 아마도 다른 어떤 것보다, 18세기이래, 칸트나 코울리지나 아놀드, 그리고 리차즈와 크린스 부룩등이 말하는 읽기와는 구별되는 것이다. 올바른 반응이라는 개념은 위에서부터 문화를 주입하는 교육적 방식을 특징짓는데, 이 방식은 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주체적 경험의 한계나 특수성을 초월하여 허가받은 문학 독자가 되고, 심미적 수용과 심미적 창조를 일치시키도록 강요했었다. 그러나 하이퍼텍스트 문학은, (고급)문화를 독자에게 하향시키기보다는, (독자의)문화를 상향시키는 것을 겨냥하고 있다.

그러나 만일 하이퍼텍스트가 쓰기, 읽기 연구 비판적 사고를 촉진시키기 위한 교육 도구로 폭넓게 사용된다면, 예술 형식으로서 하이퍼 텍스트는, 오랫동안 계속해서 지배적인 문학매체의 자리를 차지해 왔던 인쇄물과 경쟁해야 할 것이다. 최소한 이것들은 출판과 비평이라는 구비된 제도를 포함하고 있다: . . . Raymond Carver, Jayne Anne Phillips, Brett Easton Ellis 그리고 Bobbie Ann Mason과 같은 신사실주의 작가들의 문학의 위상과 대중성은 포스트모던한 세계에서도 여전히 리얼리즘적 서사가 힘을 가지고 있음을 입증하고 있다. 아직도 전통적인 서사구조를 선호하고 물질적 감각을 즐기고 묶인 책을 들고 다니길 즐기는 독자들이 있는 한, 여전히 문학 인쇄물 산업은 존속할 것이다.

하이퍼텍스트에 도전하는 세력은 가상현실 기술에서 출현할 것이다: 완전히 매몰된 가상 경험(시각 청각 헤드셋이나 장갑 혹은 옷 등을 필요로 하는)은 점점 세련되고; 전자 토론이나 동호회와 같은 것들이 이미 미국에서만 60,000개에 달한다. Marie-Laure Ryan 이 지적하듯이, 가상현실 체험의 힘은 "신체 자체를 매개로한 집중(immersion)과 상호작용"이다. 반면 문학의 경우, 인쇄물이든 하이퍼텍스트든, 독자는 이 두 가지 효과를 동시에 다 경험할 수는 없다(주로 사유의 영역에만 작용). 소설 작품(너무 실물 같아서 독자가 의심하기를 유보하듯이)에 더 더욱 침잠할수록, (텍스트 구성 그 자체에 더 집중하는) 쌍방향적인 메타-소설적 경향은 사라질 것이다. 비록 포스트 모던적인 인쇄물이나 하이퍼 텍스트가 보다 능동적인 독자로 인해 쌍 방향성을 도모하긴 해도, 이 쌍 방향적 소설 형식은 가끔은 허구의 세계에 사로잡히는 독자의 즐거움을 부정하기도 한다. 라이언은 가상현실(신체 내부로부터 허구세계의 경험 뿐 아니라 그 세계 내부에 직접 도구를 통해 상호적으로 개입하는 역할을 제공하는)이 제공하는 특별한 종류의 침잠은 두 관점(작가/독자)을 화해시킬 것이며, "언어를 극적인 연기로 바꾼다"고 지적한다.

비록 모든 문학 읽기는 일종의 행위를 필요로 한다. 가상 세계에서 직접 참여하는 행위와는 상반되는 문학적 리얼리즘의 침잠된 경험에 의해 위임된 행위(신체적 지각적 감각적 경험과 사유의 경험이라는 두 측면을 말함). . . . 상호작용과 협동적 창조를 찾는 사람들을 유혹하려면, 하이퍼 텍스트는 가상현실 기술과 협력해야 한다. 그래야 독자들은 실시간으로 다른 독자들과 극적인 행동의 연기자가 될 것이다.

(주1)

링크는 연속의 의미(소통, 연속)에서 연결이라기 보다는 다른 곳으로 튄다는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여정은 오랫동안 상주하지 않고 머문 자리에 대한 기억을 보존하지 않음을 의미하며, 순환은 프로그램화된 원환적 고리의 뜻이기보다는 거미줄과 같은 망으로 구성되어 우연적으로 출발점이 종착점으로 되는 모양새를 의미한다. 지도제작의 의미는 지도를 가지고 길을 찾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길을 만드는 과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역자)

(주2)

바흐친이 보기에 언어 혹은 발화에서 사물의 의미를 지시하는 측면은 부수적인 것이다. 그에 따르면 언어는 행위 그 자체가 된다. 따라서 의미를 지시하기 위한 표현들보다는 어떠한 목소리(어조, 언어습관 . . .등)를 갖는가에 따라 사회 문화적 의미를 가지게 된다. 바흐친은 따라서 인용할 때, 의미만을 요약한 상투적인 표현 보다는, 직접 말하거나 쓴 사람의 목소리 '아!', '글쎄. . .' 등과 같은 행위적인 측면을 더 강조하여 이를 인용하기를 즐겼다고 한다.(역자)


* 이 글은 Molly Abel Travis의 다음의 논문을 요약 번역한 것이다: "Cybernetic Esthetics, Hypertext and the Future of Literature". Mosaic. 29/4 (Dec. 1996): pp. 115-129.

Posted by huun

이 텍스트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형식적 특징이 있으며, 하이퍼 텍스트의 주목할만한 형식을 이 텍스트의 특징들을 통해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이다.

1. 글이 가만히 붙박혀 있지 않는다.

편집된 화면에 나타나는 일군의 글은 저자가 계획해놓은 절차에 따라 순환적이거나 연결적으로 바뀌면서, 다음 화면의 다른 내용으로 전환된다. 따라서 읽는 사람은 지금 읽고 있는 글의 내용을 마치 버스를 타고 창가에서 지나가는 광경들을 보듯이 쳐다보아야 한다. 다시 말해 그 글들을 꼼꼼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의 행동을 직접 취해서(부라우저 조작) 억지로 붙잡거나 편집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독자는 그 글들에 무심해야 할 것이며, 순차적으로 바뀌는 화면에 눈을 맡기고 따라가야 한다(dive in).

2. 순환적인 화면 전환에서도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출구가 있다.

매 화면에 나타나는 글에는 네 가지의 서로 다른 연결 지점이 마련되어 있다. 따라서 특히 눈에 띠는 단어가 나오거나 관심이 가는 구절이 나오면, 현재 화면상에서 진행되고 있는 순차적인 변환을 다른 방향으로 전환할 수 있다. 이 텍스트의 특징은 순환적인 움직임 속에서 다른 방향으로 전환할 수 있다는 점이다.

3. 전체의 스토리와 내용을 이해하여 큰 틀로 구조화할 수가 없다.

플롯을 따라 짜여진 이야기가 아니라, 이러저러한 파편화된 문구들을 계속해서 연결하여 놓았기 때문에, 하나의 구조를 띠는 것 같으면서도 그 맥락을 전체화할 수가 없다. 따라서 이 텍스트는 처음부터 지도가 없는 셈이다. 지도 없이 떠나는 여행처럼, 이 글들은 처음과 끝이 없으며, 어디에서 시작해도 무관하다. 이 텍스트는 하나의 브리꼴라쥬이다.

4. 저자는 꿈과 같은 무의식의 활동을 텍스트로 재현하고 있다.

파편적으로 흐르거나 다른 곳으로 이탈하게 끔 제작된 이 텍스트는 마치 꿈을 꾸는 사람이 꿈속에서, 이 방 저 방으로 도약하여 본성적으로 다른 내용을 경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지각이나 연상의 흐름처럼, 이리저리 흐르다가 다른 출구로 나가는 방식을 재현하고 있어, 이 텍스트를 따라가다 보면 저자의 꿈의 흐름을 쫓는 듯 하다.

5. 이 텍스트는 의미와 관련하여 메타-텍스트적인 반응을 유도한다.

의미해석의 두 가지 관점이 있는데, 1. 저자가 꾸며놓은 의미에 독자는 침잠되어 그 의미를 내면화하거나 향유하고 느끼는 방식이다(내면화된 독자). 2. 저자가 계획한 의미에 함몰되기보다는, 텍스트에 나타난 의미가 어떻게 제작되고 짜여지는지를 찾는 방식이다(분석적 독자). 독자는 Hegirascope를 읽으면서, 의미해석의 두 번째 방식처럼, 계속해서 넘어가는 구문들과 사방으로 갈라지는 링크들에 침잠되지 못한다. 따라서 이 텍스트에서 잘 드러난 의미를 내면화하고 음미하기보다는(드러난 전체의미 조차 파악 할 수가 없다), 의미가 어떤 방식으로 구성되고 있는지를 분석한다. 이렇게 본다면 더 나아가 독자는 구성된 의미의 수용자가 아니라, 오히려 의미의 구성자라고 까지 말할 수 있다. 하이퍼 텍스트는 메타텍스트적이다.

6. 하이퍼 텍스트는 일종의 프로그램으로 짜여진 퍼포먼스이다.

하이퍼 텍스트는 문자 기호들이 지시하는 의미를 통해 저자와 독자가 연결되는 방식이 아니라, 프로그램 제작을 통해 연결된다. 다시 말해 하이퍼 텍스트는 기호의 의미론적 형식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것은 여러 가지 감각활동 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Hegirascope는 쓰여진 글뿐만 아니라, 여기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구성 요소들, 즉 글자 크기, 색깔, 화면 레이아웃, 화면 색, 이동 속도 등, 각각의 노드와 링크가 구성되는 모든 요소들 자체가 하나의 텍스트의 기능을 하고 있다. 이 요소들은 쓰여진 것이 아니라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지고 제작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하이퍼 텍스트는 하나의 화폭에 그려진 단일한 재료의 의미론적 구성이 아니라, 모든 공 감각적 요소들을 동원하는 일종의 퍼포먼스이다.

7. 선을 벗어난 시간

이 텍스트의 저자인 S. Moulthrop은 이 작품이 시간을 근간으로 하는 텍스트라고 말한 바 있다. 문학을 흔히 시간의 예술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이 텍스트 역시, 저자의 말에 따라, 시간의 예술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텍스트에 구현된 시간은 고전적 형식의 문학(아리스토텔레스적)에서 볼 수 있는 시간의 개념과는 많이 다르다. 우선 이 텍스트의 흐름은 표면적으로 보기에는 순차적이며 선형적인 형태를 띠고 있지만, 이를 구성한 저자나 텍스트를 따라가는 독자의 시간은 전혀 선형적이지 않다. 계속해서 흐르는 창에 짜여진 글은 각각이 서로 다른 제목을 가지고 있으며, 관점과 묘사 혹은 서술 기법 등이 모두 동일하지 않다. 또한 일관적인 단계를 취하지도 않으며, 논리적인 순서를 따르지도 않는다. 특정한 플롯이 없는 것이다. 시간은 고전적 방식의 재현에서처럼 주관적 사유의 계열이 아니라 객관적 신체(혹은 무의식)의 계열에서 진행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시간은 (주관적 형식으로서)사유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가 되었다. 실존하는 몸이 배제되고 있는 경우에도 불구하고, 하이퍼 미디어나 사이버 미디어에 관한 이러저러한 논의들에서 '직접적인 경험의 문제'가 자주 언급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8. 결론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모든 것들이 파편화 되어 있다. 따라서 전체화할 수가 없다. 기억은 임시적이고 과도기적인 방식으로만 기능할수 있다. 오랫동안 머물러 정주할 수가 없기 때문에, 기억은 부분적인 잔상들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나 보니 어떠한 의미가 구성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독자 고유의 mapping이 요구된다. 부분적인 것들은 독자의 임의적인 구성력에 의해 재구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의미는 고정되지 않고 변화하거나 잠재적이다. 이 텍스트는 처음부터 재판(1995년도에 이어 97년도에 다시 수정됨)을 예고하고 있었던 셈이다.

* Stuart Moulthrop의 Hypertext인 "Hegirascope"는 아래의 주소에서 볼 수 있다.

  http://iat.ubalt.edu/moulthrop/hypertexts/HGS/HGS0B1.html

Posted by huun

우리나라에서 해러웨이의 사이보그에 관한 글들은 대체로 소개하거나 인용하면서 전개되는 것 같다. 따라서 해러웨이를 구체적이고 논쟁적인 관점에서 대상으로 다루기보다는, 그녀의 글을 끌어들여 자신의 생각에 후원자의 역할을 기대하는 경향이 많다. 이것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지만, 문제는 사이보그에 관한 해러웨이의 논점을 잘못 해석하거나 자의적으로 절취하는 방식에 있다.

그 중 하나가 해러웨이가 언급하는 사이보그의 이미지를 인간주의적 관점에서 해석하려는 시도이다. 이 논의들의 속뜻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사이보그는 로봇이나 기계 그 자체가 아니다, 그래서 거기엔 구시대의 가치가 존속하고 있다, 또한 새로운 테크놀러지가 구시대적인 가치와 결합되면서 혼종성을 띠고 괴물적 이미지를 드러내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이면에는 구시대적인 가치에 대한 향수를 발생케 하는 것이 있으며 또 그래야만 한다. 왜냐하면 사이보그와 같은 새로운 테크놀러지의 산물은 구시대적인 것 같지만 원래부터 존속해왔던 것으로서 인간의 몸이 없으면 한계로 가득 찬 로봇에 불과하며, 더 나아가 테크놀러지의 주체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은 확장된 테크놀러지와 그 산물로서 기계에 대한 인간주의적 두려움에서 비롯된다: 다른 어떤 것과도 구별되는 순수한 존재로서 인간. 그러나 테크놀러지가 이를 타락시키고, 인간을 기능화 하여 지배의 도구로 전락시켰다. 이런 의미에서 사이보그는 병적이고 불순한 이미지로 가득 찬 괴물이며 하나의 불행이다. 따라서 되돌아가서 타락한 불행의 존재를 타락 이전의 존재로 복원시켜야 한다.

테크놀러지에 관한 이전의 비판적 관점들(해러웨이는 이전의 맑시즘과 몇 몇 페미니스트를 예를 들고 있다)은 사이보그를 인간성의 타락으로 간주하거나 남성적 우월성을 되찾으려는 노력이라고 봄으로써, 인간주의적 관점에 토대를 두고 있는 것에는 모두가 비슷했다고 해러웨이는 지적한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주의적 가치를 복원시키려는 관점이 가지고 있는 문제는, 자기확신에 찬 주체성이나 순수 정체성을 지키고 복원시키려는 의도뿐 아니라, 이를 위해 다른 모든 존재와의 관계를 추상화하는데 있다. 이것은 남성이 여성을 배제하고 타자로 만듦으로써 여성 뿐 아니라, 남성 자신을 추상적 존재로 만들어버린 것과 흡사하다.

따라서 남성에 대립하는 존재로서 여성을 주장하는 이전의 몇 몇 페미니즘의 관점과 다르지 않게, 사이보그를 순수한 인간의 몸이 불순한 것으로 변질되었다고 이해함으로써, 인간적 가치들을 복원시키겠다는 생각은, 인간이 실제로 다른 존재들과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간과하고, 관념적 소망으로 자신의 존재성을 결정하려는 의도와 별로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몇 가지 과정을 통해서 그렇게 되는데, 우선 인간주의는 다른 모든 존재로부터 배타적 차이를 주장함으로써, 인간 자신을 자존적 존재로 만들어 고립화하였다. 따라서 둘째로는, 다른 존재와의 대립적 혹은 대상적 관계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임의적으로 결정하였다. 이것은 마치 여성이 대립적 관계에 있는 남성의 존재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결정함으로써, 스스로 여성이라는 추상적 대립을 상정한 것과 다르지 않은 방식이다. 또한 세 번째로, 모순적 관계 속에서 추상화된 존재는 필연적으로 적(敵)에 상응하는 대등한 힘을 가진 정체성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네 번째로, 이 정체성은 추상화된 방식으로 결정되었기 때문에, 반드시 실질적 힘을 가진 존재가 중화되어 커다란 하나의 전체 속에 용해되어야 한다. 이때에 모든 실질적 존재는, 남성에 대립하는 것으로서 여성, 혹은 자본에 대립하는 소외된 존재로서 노동, 권력의 대상으로서 피지배자, 더 나아가 이성을 가지지 않은 다른 모든 존재와는 구별되는 순수 현존으로서 자아의 정체성을 소유한다. 결국 모순적이거나 대립적 관계 속에서 결정된 존재는 인간주의적 가치(인간/동물, 유기체/기계, 물질/비물질 등의 이분법) 안에서 작동하고 있으며, 이것은 배제되었거나(특히 여성) 타락한 것(순수한 인간성) ― 사실, 이러한 타자들은 지배자에 의해 결정된 존재들이라는 점에서 아이러닉하다 ―을 복권시키는데 집중한다: "신은 죽었다. 따라서 이제는 여신이다."

해러웨이가 사이보그 이미지를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것은 인간주의적 감상이 아니었으며, 대립물의 통일이나 전복도 아니었으며, 순수 현존의 복원은 더더욱 아니었다. 우선적으로 그녀에게 사이보그 이미지의 유용성은 부정에 의한 결정이나 망상적 신념에서 존재의 추상성을 떼어내기 위함이었다. 왜냐하면 사이보그 이미지는 인간주의적 규준들(사유, 감정, 판단, 능동 등) 자체가 이미 추상화된 존재를 규정하고 있고, 이러한 결정은 우리 자신의 신념에 기인하고 있음을 말해주기 때문이며, 사이보그 이미지는 더 이상 이 원형의 규준들이 유효하지 않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며, 나아가 이로부터 파생하는 지배의 수단으로서 존재의 경계구분이나 위계가 파괴되는 지점에 사이보그가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미 우리 자신이 이질적인 것들의 혼합으로서 사이보그임을 알게 된다고 해러웨이는 지적한다. 사이보그 이미지에서는 지금까지의 인간의 위상 자체가 문제시된다. '사이보그 육체는 순수하지 않다. 그것은 에덴동산에서 태어난 것도 아니며 단일한 정체성을 추구하지도 않는다. 기계적인 기술에서 맛보는 강렬한 즐거움은 더 이상 죄가 아니라 형상화의 한 측면이다. 기계는 우리 자신이며 우리의 관점이고 형상화된 우리의 한 모습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이보그는 존재 방식의 문제이며, 그래서 그것은 '우리 자신의 존재론이며 . . . 정치학'이다.

더 이상 완전한 신체를 반영하지도 못하고, 순수하지 못한 불순한 것들의 부분적인 결합으로 구성된 사이보그(의 이미지)는 이런 의미에서 탈 인간화(de-humanization)의 모델인 셈이다: "사이보그는 유기체적 가족의 모델 위에 세워진 공동체의 꿈을 가지지 않는다. 그것은 더 이상 외디푸스적 기획을 가지지 않는다. . . . 사이보그는 . . . 군사주의와 자본주의의 그리고 국가사회주의의 서출내기(illegitimate offspring)이지만, 동시에 그를 낳게 한 원본을 믿지 않는다. 다시 말해 아버지는 이제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었다".

참고문헌

Haraway, Donna. "A Cyborg Manifesto: Science, technology and socialist-feminism in the late twentieth century". Simians, Cyborgs, and Women: The Reinvention of Nature. London: Free Association Books, 1991.

Posted by huun

새로운 과학과 도구의 사용은 과학자들의 연구성과가 현실화되는 데에 어떤 도움이 될까? 우선 물리적 환경의 통제, 의식주 개선, 안전의 보장, 자연상태에 노출된 생물학적 굴레로부터의 해방, 생물학적 진화과정에 대한 지식의 증가, 질병과 수명의 연장, 정신 건강의 개선 등이 있을 것이다. 소통이 발달함으로써 생각을 기록하고 분류하는 기술의 좋은 점은 개인뿐 아니라 종 전체로 확대된다.

  엄청난 연구 성과들이 있지만, 모두가 독립적으로 생산된 것도 아니며, 심지어는 다른 분야의 연구에 의존적이기까지 하다. 또한 시간적 제약, 기억할 수 있는 양의 한계 등으로 인해 학제간의 교량이 될 만한 것들은 피상적 수준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만델의 유전법칙이 한세대동안 빛을 못 본 이유가 그의 저작이 독자에게 전달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듯이, 과학에서 간과해서는 안될 부분은 연구성과 만큼이나 중요한 연구결과의 유포(전달)와 검토일 것이다. 인간의 경험은 엄청나게 늘어나고 있지만, 이를 사용하고 제대로 수용하기 위한 수단은 초보적 수준에 불과하다.

  현대 기술이 등장하기 전 세대에는 복잡성과 불확실성은 동의어였다. 생각은 발전했지만 그것을 현실화할 물리적 기제가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경제적 여건과 생산체제(대량생산이나 노동력 등)의 한계로 인해 현실화할 수 없었던 라이프니츠의 계산기나, 생각은 훌륭했지만 건설 유지비용의 부담 때문에 좌절되었던 베비지의 계산기, . . . 만일에 파라오가 자동차를 구체적으로 디자인하고 실제로 실험해 보았다 해도 그것은 왕국에 엄청난 세 부담을 안겨주면서 실패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요즘엔 타자기, 무비카메라, 자동차, 자동 전화 등 교체 가능한 부속을 장착한 기계나 얇은 유리단자에 싸여 전선에 섬광이 있는 라디오 열이온 진공관 등이 수도 없이 만들어진다. 이들은 섬세한 부속과 함께 장인들의 솜씨를 능가하는 정밀한 공학적 설계로 구성되어 30센트 정도면 거뜬히 만들어진다. 우리는 값싸고 성능 좋은 정밀기계의 시대에 살고 있다.

과학에서 기록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계속 확대되어야 한다. 옛날엔 쓰기와 사진, 인쇄 등으로 기록했지만, 지금은 필름이나 Wax disks나 마그네틱 선으로도 기록한다. 이보다 더 혁신적인 공정이 나타나진 않았지만 여전히 변하고 있고 확대되고 있다.

  사진기술의 발전은 끊임없이 지속되는데, 더 자동화되고 세공이 잘된 민감한 복합물들이 미니카메라 개념을 낳았다. 미래에서나 볼 법한 이러한 카메라는 본체 위에 작은 장치를 달고 평방 3미리 크기의 그림을 찍을 수 있고, 렌즈 초점이 사방에서 가능하며, 육안으로 보이는 어떠한 물체도 볼 수 있고, 자동 노출로 광대역 조명이 가능하여 천연색으로 사진을 찍을 수 있어 입체경이라 할만하다.

  건식사진(dry photography)이 가능할까? 브래디가 남북전쟁 때 찍은 사진은 판을 노출시킬 때마다 젹셔야 했다(습판 사진술 wet collodion process). 지금은 대신에 현상할 때 습기가 필요하다. 미래에는 아마도 젹실 필요가 없을 것이다. 오랫동안 질산염이 주입된 필름을 사용했다. 그래야 현상하지 않고도 찍자마자 사진을 낼 수가 있었다. 암모니아 가스에 노출되면 노출되지 않은 염료는 파괴되고, 사물의 상(象)이 빛에 의해 찍힌다. 또 다른 과정이 있지만 여전히 느리고 서투르다.

  삼십년동안 염료가 주입된 종이를 써서 전기장치에 접촉되는 점들을 검게 만드는 방식을 사용했다. 종이에 포함된 요오드 화합물 속에서 일종의 화학변화를 유도하는 방식이다. 이는 음반을 만들거나 여러 기록장치로 쓰였는데, 바늘이 필름이나 종이 위를 움직이면서 자취들을 남긴다. 바늘 끝의 전기장(electrical potential)은 바늘이 움직일 때마다 변한다. 그러면 바늘이 지나간 선은 전기장에 따라 밝아지거나 어두워진다. 이 장치는 현재 팩스에 사용된다. 두 끝을 가진 바늘이 (열쇠복제처럼) 왔다 갔다 하면서 원본 위를 돌아다니면서 자장을 이용해 변화를 감지하고, 이것이 다른 쪽 바늘로 전송되어 복제되는 것이다. 이 장치는 카메라를 대체하여, 원거리에서도 가능하다. 좀 느리고 화질도 별로 이지만, 또 다른 형태의 건조사진이라고 할 만하다. 그래서 사진이 찍히는 즉시 출력이 가능한 것이다. 이것은 1초간 16개의 선명한 이미지를 전송하는 텔레비전과 큰 차이가 없다. 다만 차이라면, 텔레비전은 바늘대신에 전자빔이 움직인다는 점이고(빠른 스캔), 단순히 화학변화를 일으키는 종이나 필름이 아니라 전자가 닿으면 순간적으로 빛을 내는 스크린을 사용한다는 점이다. 움직이는 영상을 포착하기 위해서는 기록 속도가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빛을 내는 스크린 대신에 화학변화를 이용한 필름은 연속적인 사진이 아닌 한 장의 사진을 전송할 수 있으며, 이는 건조사진으로 빠르게 찍을 수 있는 속성 카메라를 탄생시켰다. 화학 처리된 필름은 지금보다 더 빨리 움직여야 하는데, 이것이 가능하긴 하지만, 문제는 진공상태의 상자 안에 필름을 넣을 때 생기는 방해물들이다. 전자빔은 아주 섬세한 환경에서만 제대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필름과 전자빔의 방을 각각 분리시켜, 서로 다른 쪽에서 작동하게 하는 것이다.

  건조사진처럼, 마이크로 카메라 역시 갈길이 멀다. 기록물을 최소화하는 장치는 영사(影寫)로 가능하다. 광학적 영사와 축소된 사진의 결합은 학문적 목적에 의해 이미 마이크로 필름을 만들어 냈고 잠재 가능성이 많다. 현재 마이크로 필름으로 20배율로의 축소는 이미 도입되었으며, 재 확대되었을 때 완벽한 선명도를 유지하게 했다. 100배율로 축소된 종이두께의 필름을 생각해보면, 책을 종이에 기록한 양과 그것을 마이크로 필름으로 복제한 것 사이에는 10000배의 차이가 난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성냥 갑 만한 크기로 축소 가능한 것이다. 수백만 장서의 도서관도 책상 하나 크기로 축소 가능하다.

  물론 단순한 압축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기록을 만들고 저장하는 일 뿐 아니라 그것을 분류하고 색인하는 검토작업도 필요하다. 하지만 비용을 생각해본다면 압축이 매우 중요하다. 마이크로 필름으로 된 브리태니커를 만들려면 니켈 하나정도의 물질이면 족하다. 또 단 1센트면 어디서든 메일을 보내고 받을 수가 있다. 수백만 권의 책을 복사하고 인쇄하는 비용을 생각해 본다면 그 차이는 엄청날 것이다.

  기록을 하려면 펜을 집어들거나 타이프를 때린다. 그리고 교정, 식자, 인쇄, 제본의 복잡한 과정이 나온다. 그러나 기존의 메커니즘을 변용하고 언어를 변경하면 이러한 복잡한 과정 없이 다양하게 기록할 수 있다.

  Voder라는 기계가 있는데, 키보드를 누르면 말로 변조되어 나온다. 인간의 목소리가 들어간 것이 아니라, 다만 키 동작이 단순히 전기로 만들어진 바이브레이션을 결합하고, 이것이 스피커를 통해 전달되는 것이다. 벨연구소에서는 이를 반대로 바꾼다. 일명 Vocoder라 하는데, 스피커 대신에 마이크로폰을 사용한다. 말을 하면 그에 해당하는 키가 움직인다. 음성학적으로 단순화된 언어로 말소리를 기록하는 속기타이프라이트(stenotype)와 이 Vocoder를 결합시켜서, Vocoder가 속기타이프라이터를 작동시킨다. 이 결과가 말할 때 찍히는 타이프라이터이다. 현재의 우리 언어는 이러한 메커니즘에는 적절하지 않다. 만국어를 만드는 학자들은 어째서 언어를 전송하고 기록하는 기술에 적합한 언어를 발명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특히 과학에서는 아주 중요한 문제인데 말이다.

  앞으로 많은 일들이 일어날 것이다. 자료를 수집하고, 검토하고, 기존자료에서 필요한 재료들을 뽑아내고, 새로운 자료를 만들고 하는 등등. 성숙한 사고를 기계적으로 대체할 수는 없지만, 생산적이고(creative) 반복적인 사고는 기계적인 것의 도움을 많이 받을 것이다.

  계산기(행위)는 반복적 사유 과정이며 오랫동안 기계에 속한 문제였다. 키보드로 조절하고, 숫자에 맞는 키들을 누르는 일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도 피할 수 있다. 광전지를 통해 타이프로 찍혀진 숫자들을 읽는 기계들이 만들어지고, 그에 맞는 키들을 해독하는 기계들이 만들어 졌다. 이것들은 스캐닝을 위한 광전지, 논리적 변이들을 분류하는 전기회로, 솔레노이드의 움직임을 해독하는 계전회로 등의 결합이다. 만일 숫자들을 위치로 찍어 간단히 점들의 집합으로 변환한다면 숫자 해독체계는 더 간단해 질 것이다. Hollorith가 인구조사를 목적으로 만든 펀칭 기계는 카드에 구멍을 뚫어 이러한 메커니즘을 구현했다.

  덧셈은 계산의 한 예에 불과하다. 전산(電算)은 가감승제를 수행한다. 여기에 일시적인 결과저장, 더 나아가 다른 처리를 위해 저장에서 제거하고, 최종결과를 인쇄함으로써 기록한다. 두 가지 방식이 있는데, 하나는 데이터 입력을 손으로 조절하거나 자동으로 조절하는 키보드 기계와 펀치카드 기계이다. 이들은 사실 초보적 수준에 불과하다. 이보다 빠른 전자계산이 물리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출현한다. 이들은 열이온 진공관 장치를 만들어, 초당 100,000번의 전기 임펄스를 계산한다. 미래에는 지금의 100배 이상의 속도를 낼 것이다.

  반복적 사유는 계산이나 통계의 문제로만 환원할 수 없다. 이미 확립된 논리적 과정에 맞게 사실들을 결합하고 기록하는 매순간마다 사유의 창조적 측면이 개입된다(자료나 처리과정을 선택할 때 등). 그리고 다음에는 반복적 조작이 따르며 이것은 기계적인 과정에 속한다. 그런데 이러한 계산은 사업의 필요성이나 확장된 시장이 요구될 때에만 발전한다. 생산방식이 충족될 만큼 발전되었을 때 비로소 대량생산을 가능케 하는 계산기의 진보가 보장되는 것이다. 진보한 분석기계만으로는 그러한 상황은 오지 않는다. 아직까지 시장의 확장도 없고, 빠른 처리방식의 사용자 역시 많이 없기 때문이다. 미분방정식, 함수, 적분 방정식을 푸는 기계, 조수간만을 예측하는 고주파 합성 장치 등 특이한 기계가 많지만 이들은 일부 과학자들에게만 필요하다. 만일 과학적 추론을 논리적 계산과정으로 제한한다면, 물리적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멀리 나아갈 필요가 없다. 포커게임에서 이기려면 확률수학을 사용하는 것으로 족하다. 염주 알을 묶어 쓰는 주판은 아랍인들로 하여금 몇 세기나 앞서서 자리계산법(positional numeration)과 0개념을 생각하게 했다. 아직도 유용하기에 쓰지 않겠는가?

  주판과 현대의 계산기에는 많은 차이가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과학자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아니다. 고등수학에서 요구하는 고통스러운 계산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확립된 공식에 맞추어 세심한 변환을 반복하는 것 이상의 다른 무언가를 위해 계산기를 사용하는 것이다. 수학자는 숫자들을 처리하는 사람이 아니며, 미적분을 적용해서 방정식을 변환하는 사람도 아니다. 이들은 상징적 논리를 고차원의 지대(plane)에 위치시키는 사람이다. 그리고 특히 그가 도출하는 계산과정의 선택 속에서 직관적인 판단을 하는 사람인 것이다.

  언제든 논리적 사유과정이 전개되면, 기계가 출현할 기회는 반드시 생긴다. 형식논리학은 긴요한 수단이 될 수 있는데, 쉽게 하나의 기계를 구성하여 간단히 교차회로(relay circuits)를 사용하면 형식 논리에 맞게 전제를 다룰 수 있다. 또한 전제들의 집합을 장치에 넣고 크랭크를 돌리면, 키보드 덧셈기계보다 더 정확하게, 논리적 법칙에 따라 쉽게 결론들을 뽑아낸다.

  수학적 논리에도 직관이나 판단이 있어야 하듯이, 논리적 진보에는 새로운 심볼리즘이 요구된다. 이것은 논리적 인과관계와는 무관한 것이다. 새로운 상징주의는 아마도 수 체계를 공간으로 치환한 것일텐데, 이것은 수학적 변용을 기계적 과정으로 이끄는 것보다 더 먼저 일어난다. 그래서 수학자들의 엄격한 논리를 넘어서는 일상적인 논리의 적용이 필요하다. 자료를 엄청나게 쌓아놓았지만, 그것을 어떻게 검토하고 처리해야할지 당혹스럽다. 이는 과학에서 자료를 수집하고 추출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획득된 지식을 어떻게 유용하게 뽑아낼 것인가? 사용하기 위해서는 우선 선별해야 한다. 회사에서 고용인들을 관리하기 위해 고용인 카드들을 선별기계에 넣고, 미리 계획된 코드를 넣으면 특정한 지역에 살며 스페인어를 하는 고용인의 목록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파일 안에 있는 수백만 명 중 하나의 지문을 찾으려면 너무 느리다. 물론 선별기계는 빨라질 수 있다. 광전지와 마이크로 필름을 이용하면 훨씬 빠르게 항목들을 검토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 씩 교대로 검토하고 점점 하위 항목들로 내려가서 특정한 조건에 맞는 사람들을 뽑는 이 과정은 단순한 선별에 불과하다. 이보다 더 진보적인 방법이 있는데, 자동 전화교환을 보면 알 수 있다. 여기서는 전부 하나 씩 검토하지 않고, 처음 세 자리로 분류된 것만 검토함으로써 훨씬 빠르고 간단하다. 더 빠르게 하려면 기계적 개폐장치를 열 이온 진공관 개폐기로 대체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백화점에서 신용카드를 이용하면 훨씬 효율적으로 거래가 가능하다(전자빔을 이용한 바코드방식도 그 예이다). 그러나 선별과정의 진짜문제는 색인 체계의 피상성에 있다. 어떤 종류의 자료가 저장고에 쌓이면 알파벳순으로 혹은 번호순으로 파일이 된다. 그리고 정보를 추적해서 분류별로 정보를 찾는다. 여기에 일정한 규칙들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 규칙들은 번거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하나의 항목을 찾으면, 그 경로체계에서 나와서 다시 새로운 경로를 입력해야한다(즉, 분류하고 선택하는 기계적 과정이 Dos의 경우처럼 선형적이다. 여기에는 규칙이 있어야하고, 코드화된 규칙을 사용자가 알고 있어야 한다).

  인간의 마음은 이런 식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것은 연상으로 움직인다(연상체계, 비 선형적, 과(hyper)공간적). 하나의 항목이 선택되면, 그것은 재빨리 연상에 의해 선택된 다른 항목으로 이동한다. 이것은 복잡한 단서나 흔적들(trails)의 망으로 이루어진다. 순차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궤적이나 단서들에 따라 연상되는 데로 이동하는 것이다(꿈의 경우처럼). 기억은 일시적이고 순간적이지만 속도는 엄청나다. 인간의 이러한 정신적 과정을 인위적으로 완전히 복제할 수는 없지만 이를 통해 다른 방식의 체계를 만들 수는 있다. 우선 연상에 의해 선별된 자료들은 색인에 의한 것 보다 더 빠르고 유연하다. 미래에 개인은 체계화된 개인 파일이나 개인 도서관을 가질 수 있다. "memex"가 이를 가능케 한다. 이것은 개인이 모든 책을 기록하고 소통하고 저장하는 장치인데, 엄청난 속도와 유연성으로 자료들을 처리한다. 또한 사용자의 기억이나 연상에 친숙한 대용물이 될 것이다. 데스크형식으로 구성된 이 장치의 대부분의 내용들은 마이크로필름의 형태로 구입할 수 있다. 책과 그림과 잡지 등 모든 종류의 자료들을 저장하고 처리하고, 화면상에서 직접 프로젝션을 통해 자료를 한꺼번에 볼 수도 있다.

  메멕스는 연상적 색인(associative indexing)을 가능케 하는데, 자료의 모든 항목들은 사용자의 의지에 의해 자동적으로 즉시 선별 가능해진다. 우선 사용자가 단서와 흔적들을 만들고, 거기에 이름을 붙이고, 코드화한 이름들을 입력하고 키보드를 누른다. 사용자 앞에는 연결된 두 개의 항목이 보이고 볼 수 있는 장소에 투사된다. 각각의 버튼에는 빈 코드공간이 있고, 포인터가 이들 중 하나의 항목을 선택할 수 있다. 키 하나를 누르면 항목들은 계속해서 연결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언제든지 항목들 중 하나가 보이면, 다른 항목은 버튼 하나만 누르면 그에 상응하는 코드 공간에서 간단히 불러들일 수 있다. 또한, 많은 항목들이 하나의 단서를 형성하기 위해 서로 연결될 때, 이들은 반복해서 다시 볼 수 있다. 책의 페이지를 넘기듯이 레버를 당기기만 하면. 정확히 물리적 항목들이 새로운 책을 만들기 위해 서로 모이는 것과 흡사하다. 예를 들어, 사용자가 활과 화살의 기원과 성질에 대해 관심 있다면, 특히 어째서 터키의 활이 영국의 긴 활보다 더 유리한지에 대해 공부할 것이다. 그는 수많은 관련서적이나 기사들을 자신의 메멕스에 보유하고 있다. 우선 그는 백과사전에서 관심 있는 논문을 찾는다. 그리고 이 찾은 것을 스크린에 남겨 놓는다. 다음에 역사책에서 또 다른 관련 항목을 찾아 이 두 개를 연결시킨다. 이런 식으로 많은 항목들의 단서(흔적)를 만들어 놓는다. 경우에 따라 자신의 코멘트를 삽입하고 이를 중요한 단서와 그것에 연결된 부수적인 단서를 특정한 항목들에 삽입시킨다. 사용하는 재료의 탄력성이 활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증거가 나오면, 그는 부수적인 단서들 위에 가지를 쳐서 교재를 통해 탄력성과 물리적 견고성의 표를 얻게 된다. 그리고는 길게 분석한 그 자신의 페이지를 삽입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백과사전이 출현할 것이다. 연상의 흔적들과 단서들로 그믈망이 이루어진다. 변호사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관련된 견해들과 판례들을 다룰 수 있으며, 동료들이나 권위자들의 경험도 확보한다. 특허 변호사는 많은 양의 특허처리를 불러와서, 친숙한 단서들을 그의 고객의 관심에 맞는 것으로 짜 맞춘다. 의사들은 단서를 쫓아 환자의 복잡한 반응을 이미 연구된 사례들을 가지고 빠르게 유사한 병력으로 치료하고, 참고문헌을 찾아 관련 해부학이나 조직학의 고전들을 참조한다. 화학자들은 유기복합물의 종합을 연구하면서 모든 화학관련 자료를 연구실에서 불러들여, 복합물들의 유사관계를 따라 흔적을 찾고, 부수적인 단서들로 그 복합물의 물리적 화학적 습성을 연구할 수 있는 것이다. 역사학자는 방대한 연대기를 가지고 언제든지 최신의 단서들을 찾아서 모든 시기들을 검토할 수 있다. 새로운 전문직이 출현하여 단서들을 재단하는 사람도 생길 것이다. 이들은 엄청난 양의 기록을 이용해 유용한 단서들을 만들 것이다. 전문가로부터의 유산은 단지 기록 한가지를 추가한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새로운 발판의 계기를 마련해주는 셈이다.

  그러므로 과학은 인간이 생산하고 저장하고 기록을 검토하는 방식들을 충족시킨다. 이는 미래의 수단을 크게 발전시킨다. 모든 종류의 기술적인 문제들은 무시되어 왔다. 그러나 오히려 무시되었던 것은 기술적 진보(열 이온 진공관처럼)를 가속화할 알려지지 않은 수단이다. 현재의 패턴에 고착해서 진부해지지 않기 위해서는 그 가능성들을 말해야 한다. 예언이 아니라 제안의 차원에서 말이다. 예언이란 알려진 것이 확장되어 실재하기 때문이다. 알려지지 않은 것에 기초한 예언이란 다만 두 번 추론된 추측일 뿐이다.

  기록에 필요한 재료들을 창조하고 흡수하는 모든 단계들은 감각들 중 한가지를 통해 이루어진다. 키를 만질 때의 촉감, 말하거나 들을 때의 구강, 읽을 때의 시각 등. 언젠가는 이보다 더 빠르고 직접적인 경로가 만들어지지 않을까?

  눈을 통해 볼 때, 모든 관련 정보들이 시신경 채널을 통해 전기파장이 뇌로 전달된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이것은 정확히 텔레비전 케이블이 보여지는 전기파장들과 유사하다. 이 파장들은 그림을 스캔하는 광전지로부터 방송되는 라디오 전송기로 보내진다. 더 나아가 만일 우리가 적절한 도구를 이용해 그 케이블로 접근할 수 있다면, 우리는 더 이상 그것을 만질 필요가 없다. 이 파장들을 전도체로 뽑아내어 전송되고 있는 장면을 드러내고 재생산할 수 있는 것이다.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두드리는 전화선처럼 말이다. 타자기를 두드리는 사람의 팔 신경에 흐르는 임펄스는 그의 눈과 귀로 번역된 정보들을 손가락으로 보낸다. 손가락이 적절한 키들을 두드리도록 하는 것이다. 이 흐름들을 포착할 수는 없을까? 정보가 뇌로 전달되는 원래의 형태나, 이것이 손으로 전달되어 놀랍게 변형된 형태들이 포착되거나 감지될 수 없을까? 우리는 이미 골전도(bone conduction)로써 귀머거리가 들을 수 있도록 소리를 신경채널에 전달할 수 있었다. 현재처럼 처음의 전기파장을 기계적 메커니즘으로 변형하는 지루함 없이 이러한 것들을 도입할 수 있을까?(아날로그에서 디지털신호로 처럼), 혹은 인간의 메커니즘을 즉각 전기적 형태로 변형하는 일은? 두개골 양쪽에 전극봉을 끼워 뇌파촬영을 하면 잉크로 기록된 흔적을 만들어 뇌 자체의 움직이는 전기현상의 관계를 만들 수 있다. 실제로 기록은 감지되거나 이성적으로 파악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증가하는 대뇌 메커니즘의 잘못된 기능을 잡아낼 수는 있다.

  모든 지각 가능한 외부세계의 형태들은, 소리이건 시야이건 간에, 전기회로를 통해 변형된 흐름 또는 전류의 형태로 환원되어 전송된다. 인간의 구조 내에서도 정확히 유사한 과정이 일어난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의 전기적 현상을 다른 것으로 진행하기 위해 기계적 운동으로 변형시켜야 하는가? 이는 시사하는바가 크다. 그러나 이것은 현실과 즉자성과의 접촉을 잃어버리지 않고는 확실히 보증할만한 예견이 나오기는 힘들다.

  만일 인간이 자신의 과거를 더 잘 회상하고 현재의 문제를 보다 완벽하고 객관적으로 분석할 수 있다면 인간의 영혼은 더 고양될지도 모른다. 인간은 매우 복잡한 문명을 만들었다. 그래서 자신의 기록을 더 완벽하게 체계화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래야만 과학적 실험들을 더 논리적인 결론으로 도출할 수 있고, 별로 좋지도 않은 기억에 지나치게 의존해서 옆길로 새는 일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사물이 이해하기 복잡해도, 필요할 때 다시 옆에 놓을 수 있다는 확신만 든다면, 복잡한 것을 잊을 수 있는 특권을 갖고 이탈하는 것도 재밌을 것이다. 과학을 적용해서 인간은 풍요로운 거주공간을 만들었다. 거기서 건강한 삶을 배우기도 했다. 또 그를 이용해 대량학살도 자행했다. 정말로 좋은 곳에 과학을 써보기도 전에 싸우다 죽을 판이다. 그러나 필요와 욕구에 따라 과학을 적용하는 과정에서, 이를 중단하고 과학이 안겨주는 희망을 잃는 것 역시 불행이 아닐 수 없다.

* 이 글은 1945년 7월에 The Atlantic Monthly 잡지에 실린 Vannevar Bush의 논문 "As we may think"를 요약 번역한 것임.

Posted by huun

기술 매체는 두 방향의 형식적인 운동을 통해 작동한다. 우선, 그것은 연장(延長)의 속성을 갖는 덩어리를 절단한다. 기계 테크놀러지를 보면 이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매체의 절단 기능은 외면적 방식으로 수행된다. 예로, 자동화된 기계는 사물의 본성과는 관계없는 방향을 따라 대상을 절취한다. 모든 사물은 그 자신의 고유한 결을 잃어버리고, 절단의 외면적 운동과 그 힘의 규격에 의해 재단되는 것이다. 나무는 이제 더 이상 갈라지지 않고 잘릴 뿐이다. 이런 식으로 현대적 공간은 기하학을 재현하고 있다. 휴머니즘의 현대적 표현은 바로 이 힘에 대한 역기능으로 일관되어 왔다. 둘째로, 매체는 절단된 것들을 다시 연결하여 일련의 연쇄를 만들어낸다. 이로써 하나의 자동화의 메커니즘이 출현하는데, 무엇보다도 이 자동화는 자연적 인과성을 결여한 상태이다. 왜냐하면 메커니즘의 요소들은 이미 외면적인 방식으로 절단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절연된 관계를 갖는 잘려진 것들이 특정한 연속을 띠기 위해서는 이들의 간극이 얼마나 최소화되는가에 달려있다고 볼 수 있다. 기술 매체의 관건은 거리와 간극의 최소화에 달려 있는 것이다. 시간은 이제 속도로 대체되고 공간은 이를 압축이라는 형식으로 표상한다. 베르그송 식으로 말하자면 시간뿐만 아니라 우리의 의식조차도 지속으로부터 분리되어 공간화 되는 것이다.

이로부터 현대의 미적 표현에 있어 선(線) 특히 직선은 하나의 미덕이 되었다. 현대의 기술매체는 사물의 유기적 연장을 불연속의 연쇄로 치환하고, 이 외삽으로부터 생기는 간극과 균열은 속도의 최대화에 의해 봉합된다. 물질을 생산하는 수단으로서의 생산기계의 자동화는 배치와 순차를 통해 가장 효율적인 공간의 활용, 즉 속도의 최대화를 어떻게 창출할 것인가에 집중한다. 나아가 대중 매체나 컴퓨터와 같은 전자매체가 활용되면서 이 간극은 제로의 상태에 이르게 된다. 다시 말해 공간으로부터 시간성이 완전히 제거됨으로써, 세계는 이제 선분이 아닌 하나의 점의 상태가 된다.

매체는 사물과 현상들의 불연속적 연쇄를 만들 뿐 아니라, 이에 대한 우리의 지각패턴을 동시적인 것으로 만든다. 예를 들어 우선 그것은 감각능력들의 종합적 활용을 요구한다(멀티 미디어를 보라). 나아가 그것은 공간적 거리를 종합함으로써, 이 거리에 상응하는 신체 경험의 간극을 현재적 상태로 만든다. 여기서 공간지각은 매체의 속력의 증감에 의존한다(승강기나 자동차를 보라). 또한 매체는 시간적 차이 역시 무한한 현재 속으로 체포해 버린다. 우리가 지각하는 것은 순간이며, 우리의 지각에 포착된 모든 사물들은 일종의 에테르의 상태가 된다. 그런데 사물의 연쇄과정에서 이렇게 시간의 물질적 두께가 제거되고 나면, 다시 말해 지각의 동시성이 발생하여 물질의 운동에 상응하는 지각의 한계를 넘어서게 되면, 자연적 인과성이 절연되어 요소들 각각 자신 안에 어떠한 것도 내포하거나 지시하지 않았던 연쇄 메커니즘은 또 다른 본성을 갖게 된다. 단순한 시간상의 연쇄가 이제는 인과성을 갖는 새로운 내용으로 변형되는 것이다.

맥루한의 다음과 같은 설명을 보자: "가장 위대한 반전이 전자성(electricity)과 함께 나타난다. 이것은 사물들을 순간적인 것으로 만들면서 연쇄를 없앤다. 그리고 이제 순간적인 속도로 인해, 마치 연쇄나 조작과는 아무 관련이 없던 것처럼, 사물들의 원인이 인식되기 시작하는 것이다"(McLuhan 12). 하나의 관점이 어떻게 생겨나는가의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맥루한이 언급한 영화매체나 큐비즘도 역시 분절과 연속의 메카니즘과 깊은 연관이 있으며, 나아가 이것은 특정한 형식의 인식활동을 만들어낸다. 큐비즘의 발생 시기와 근사(近似)한 영화매체는 분할된 컷들의 단순한 기계주의를 넘어 일종의 구조적 환각을 생산하는 장치가 된다.

기술 매체의 운동이 연결이나 이동인 것만큼이나 그 심층에는 절단과 절연이 있으며, 그들간의 재 연결에는 그에 상응하는 사유활동이 있다. 그런데 자르고 봉합하는 종합형식이 동시성을 띠면서, 매체는 세계를 표면적이고 추상적인 운동으로 치환해 버린다. 이러한 매체의 급진적인 변화는 경험 능력들을 신체로부터 박탈하여 그 자신이 대리자가 된다. 매체는 일종의 신체가 되는 것이다. 매체가 인간의 감각능력을 비롯하여 신체일반의 확장인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이다. 가상현실이라고 부르는 것은 거추장스러운 물질성을 벗어버리고, 과거였다면 반드시 자연적 조건들과 결합함으로써만 현존할 수 있었을 실재성을 그 자체 순수회로로 변형한다. 이로부터 우리는 더 이상 물질의 방해를 받지 않고 효과의 실재만으로도 얼마든지 우리 자신을 연장하고 확장시킬 수가 있게 된다.

맥루한의 관심은 바로 이 매체가 갖는 통합체적인 특성에 있었다. 모든 계열을 합목적성을 띤 사이버네틱 회로망으로 단일화하고 나아가 스스로 실체가 되는 힘. 그는 이 힘이 질료적 경험을 축소하고 추상적 견해와 반응만을 유발한다는 점을 지적한다(주1). 그는 매체가 모든 부분들을 종합하는 원리를 허위적 연결이라고 보았다. 그것이 허위적인 이유는 인식의 실질적 조건인 감각과 지각을 불균형적인 상태로 변형시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차적인 문제는 매체에 의해 형성되는 사회적 관념이나 동의보다는, 매체가 이미 갖춘 추상적 운동에 의해 동질화되는 감각과 지각의 패턴들이다. 감각에서 사유로의 이동이 아니라, 동질적인 추상관념으로부터 감각으로의 이동으로 순서가 역전된다: "기술의 효과는 여론이나 개념의 수준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서서히 우리의 감각이나 지각패턴을 바꾸어 놓는다. 진지한 예술가만이 오로지 형벌을 받지 않고 무사히 기술과 대면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감각의 변화들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McLuhan 19).

단일한 회로로 동화된 신체로부터 우리 자신은 자연스럽게 행위나 관념 뿐 아니라 삶 자체를 단일성과 전체성의 효과 아래로 집결시킨다. 이런 의미에서 매체는 이미 그 자체 하나의 신호이며 메시지이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반응하고 행위하고 사유하도록 강요하거나 권고하기 이전에, 이미 우리 자신의 반응이며 행위이며 사유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다. 매체는 이미 우리 자신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좋거나 나쁘지도 않은"(11) 것으로서 사용이나 방식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좋거나 나쁜 것으로서 우리 자신의 윤리를 결정하는 존재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는 것이 곧 우리 자신이다.

(1)
"토인비는 영매화(etherialization)라는 개념을 통해 매체의 변형적 힘을 논하는데, 이것은 그가 보기에는 모든 조직이나 기술에서 진보적 단일화와 능률의 원리이다. 대체로 그는 이 형식들이 우리의 감각적 반응들에 적합하지 않게 되는 효과를 무시하고 있다. 그는 한 사회에서 매체와 기술의 효과와 관계하는 것은 우리의 관념적 반응이며, 인쇄기술의 결과는 우리의 '관점'이라고 생각한다. 문자성이 발달하고 동질화된 사회 속의 인간은 다양한 것과 불연속적인 삶의 형식들에 민감해지지 않으며 감각적이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그는 3차원의 망상을 통해 자신의 나르시스적 고착의 일부로서 '비밀스런 관점'을 갖게되고, 블레이크나 다윗왕이 간파했던 "우리가 보는 것이 곧 우리 자신이 된다"는 경구와는 담을 쌓는다".(McLuhan 20)

인용문헌
McLuhan, Marshall. Understanding Media: The Extension of Man. New York: McGraw-Hill, 1964.

Posted by huun

예술에 있어 진리(의미)는 표현과 구성으로 인해 발생한다. 이 표현성 때문에 예술은 본질적으로 이론이나 철학과는 구별된다. 세계에 이미 깃들어 있는 의미를 재현하거나 현시하는 문제가 아니라, 결정되지 않은 의미를 구성하고 표현하는 문제가 됨으로써, 예술은 오히려 철학의 토대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진리는 표현과 구성의 문제이지 발견의 문제가 아니다. 영화에서의 몽따쥬가 이를 적절히 예증해주고 있다. 에이젠슈타인은 몽따쥬가 전적으로 영화에만 국한된 개념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에게 있어서는 꽤 타당한 주장이다. 우선 소비에트 사회에서 몽따쥬는 영화 및 예술의 형식으로만 존속할 수는 없었다. 쿨레쇼프(Lev Kuleshov)와 베르토프(Dziga Vertov)를 형식주의로 간주한 소비에트 영화인 총회의 비판을 보라. 이에 따르면 몽따쥬는 더 거시적인 문맥, 다시 말해 사회 전체와의 관계 속에서 고찰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에이젠슈타인이 모색한 것은 몽따쥬의 변증법과의 관계이다. 만일 예술적 형식으로서 몽따쥬가 변증법을 제대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예술의 형식에만 머물지 않고 세계의 일반적 질서를 표현할 것이며, 나아가 그가 이해한 변증법의 진정한 목표로서, 인식 뿐 아니라 세계의 표현과 구성을 도모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에이젠슈타인은 변증법으로 변증법을 표현하는 과정을 몽따쥬에서 구현하고 있다.


그러나 세계와 그 질서인 변증법을 표현해야 한다면, 영화적 표현의 형식에 있어 진정으로 다루어야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이 에이젠슈타인의 몽따쥬 연구에서 끊임없이 등장하는 문제이다. 그의 용어를 빌리자면 우선적으로 영화는 운동 즉 움직임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것은 형상들과 질료의 운동 뿐 아니라 사유의 운동까지도 포함하는 개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운동과 관련하여 영화는 벗어날 수 없는 일반적 조건 하에 있는데, 우선 영화는 움직이지 않는 단편들을 재료로 이용해야 한다는 점, 그리고 자르고 연결하는 단속적 운동을 그 자신의 형식으로 취해야만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베르그송이나 들뢰즈가 질문했던 것과 동일한 형식으로, 에이젠슈타인은 운동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질문 한다: "움직이지 않는 단편들을 연속적으로 보여주면 운동이 일어나는가?"(에이젠슈타인 87). 그러나 그는 운동을 베르그송과는 다른 수준에서 다루고 있다. 그에게 있어 운동은 물질의 수준이 아니라 현상의 수준, 즉 의식에서 일어나는 비연장적 표상의 문제이다. 베르그송이 물질-운동에 관한 질문으로부터 영화를 다루고자 했다면, 에이젠슈타인은 운동의 발생형식에 관한 질문으로부터, 영화 뿐 아니라 예술 일반의 원리를 다루고자 한다: 물질-운동은 어떻게 해서 의식의 표상으로 나타나는가? 혹은 의식-운동은 어떤 원리에 의해 발생하는가?

      "움직임의 관념(혹은 감각)은 대상의 최초의 위상(位相)에서 잔상현상 위에 순간적으로 새로이 눈에 비치는 동일한 대상의 위상을 쌓아올리는 과정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입체사진술에서 두 장의 사진이 겹쳐진 상(象)으로 보이도록 공간적인 깊이를 실현시키기 위한 이유이기도 하다. 동일한 차원에 속하는 두 가지 요소를 겹침으로써 항상 새로운, 그리고 보다 높은 차원이 생긴다. . . . 구체적인 것을 나타내는 낱말(의미)과 또 하나의 구체적인 것을 나타내는 낱말이 나란히 놓여지면 하나의 추상적인 개념(즉 중국어나 일본어에서 볼 수 있는 것)을 산출한다. 그러한 언어에 있어서는 사물을 나타내는 표의문자가 형이상학적(관념적)인 결과를 끌어낼 수 있다. . . . 이미 마음에 인상을 남긴 첫째의 상과 그것에 이어져서 지각되는 두 번째 상과의 윤곽상의 불일치가 충돌을 일으켜서 움직임의 느낌을 낳게 한다. 그때 불일치의 정도가 인상의 강도를 결정하고, 또한 진정한 리듬의 실질적인 요소가 될 긴장을 결정하는 것이다. . . . 회화의 다이너믹한 효과를 구성하는 것은 무엇인가? 눈은 그림 가운데서 한 요소의 방향을 따라간다. 그럼으로써 갖게되는 하나의 시각적 인상을 지속하게 된다. 그리고 그 인상은 두 번째 요소의 방향을 따라 감으로써 갖게되는 인상과 충돌한다. 그러한 방향의 충돌이 원인이 되어 그림 전체를 감상할 때에 다이너믹한 효과를 만드는 것이다."(에이젠슈타인 87-88)

운동의 관념은 벽돌을 쌓아 올리듯이 단편적인 재료들을 축적하고 연결함으로써 발생하지 않는다. 에이젠슈타인에 따르면 쿨레쇼프나 푸도프킨의 몽따쥬에서 구현한 운동의 관념은 이미지들간의 외적인 원인에 의존하여 운동을 재구성한 것이다. 왜냐하면 연결 몽따쥬는 하나의 쇼트가 다른 쇼트와 관계함으로써 운동의 관념을 파생시키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때의 운동은 일련의 쇼트들을 기획된 관념(움직임, 감정, 놀람 등)에 따라 접합시킨 결과이기 때문이다(쿨레쇼프 효과; 벽돌쌓기). 연결 몽따쥬에서 하나의 쇼트는 그 자신의 본질을 가지지 않고, 하나의 전체에 의존하여 유기성의 부분적 요소가 될 뿐이다. 이것이 에이젠슈타인이 연결 몽따쥬와 결별하는 이유이다. 그렇다면 시간적 공간적 계기들을 연결함으로써가 아니라면, 운동의 관념은 어떻게 발생하는 것인가? 이것은 영화에서의 운동-이미지를 논의하고 있는 들뢰즈조차도 미처 질문하지 못한 문제가 아닐까? 움직이지 않는 회화나 사진 뿐 아니라, 심지어 영화에 있어 운동을 구현시키는 형식: 차이! 부분적인 요소들의 유기적 일치가 아니라, 불일치의 차이가 운동의 효과를 발생시킨다. 왜냐하면 언제든지 차이란 관계하고 있는 분자(혹은 세포)의 내적 본질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예로, 샤라쿠(寫樂)의 얼굴판화에서 얼굴 전체를 이루고 있는 기관들은 해부학적 균형에 따라 배열되지 않았다. 샤라쿠의 판화는 마치 눈, 코, 입 등의 각 기관들을 따로 분리하고, 각각의 도화지에 클로즈업하여 묘사한 후, 다시 이 도화지들을 결합시켜 하나의 전체 얼굴을 만든 것처럼 보인다(에이젠슈타인 63-65참조). 마찬가지로 회화에서는 기관과 대상의 중요성에 따라 크기의 비율이 비정상적으로 왜곡된다. 고흐(Vincent Van Gogh)는 농부들의 내적 본질을 표현하기 위하여, 농부의 본질을 이루고 있는 거칠고 두터운 손을 화면의 중앙에 배치하면서 해부학적 변형을 시도했다(The Potato Eater 1885). 이 뿐만이 아니라 그의 대부분의 작품들 속에 부분을 이루고 있는 대상들은, 살아있는 존재로서의 내적 본질이 표현되기 위해 색채 뿐 아니라 원근법적 변형을 이루고 있다. 이것은 기관들의 몽따쥬일 뿐만 아니라 시간의 몽따쥬이기도 하다. 각각의 기관들은 서로 다른 시간 속에서 내적 본질을 통해 묘사된 일종의 몽따쥬의 분자들이다. 샤라쿠와 고흐의 친화성은 작품들 속에 깃든 부분과 전체의 불일치에 있다. 거대하게 왜곡된 양적 파토스나 꿈틀거리는 질적 파토스는, 이들을 감싸면서 전체와의 조화를 강요하고 이들의 변형에 일정한 제약을 가하는 테두리의 진한 윤곽선과 대응하면서 강렬한 긴장을 발생시킨다. 이와 마찬가지로 몽따쥬에서 하나의 쇼트는 그 자신과 구별되어 다른 본질을 갖는 쇼트들과 무수한 결합이 가능하며, 나아가 이것은 운동의 다발적 폭발로 전이될 것이다.


이로부터 에이젠슈타인의 몽따쥬 이론 전반을 지배하고 있는 역동성(dynamism)의 원리가 등장한다. 이미지 방향의 차이, 시간적 혹은 공간적 균형의 차이, 힘의 양의 차이, 질(색채, 부피, 재료 등)의 차이 . . . 이런 식으로 물질의 차이는 현상의 운동으로 이행한다. 차이는 움직이지 않는 이미지들 간의 운동의 현상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차원의 운동을 발생시킨다. 이런 의미에서 색채조차도 하나의 운동이다. 색채는 빛의 진동 양태들이 연결되어서가 아니라 그들의 차이에 의해 나타난다. 유지되고 있는 빛의 진동과 새롭게 지각되고 있는 빛의 진동의 차이. 마찬가지로 음조(音調) 역시 하나의 운동이다. 동일한 두 개의 이차원적 이미지들을 겹치기하고, 그들 사이에 차이가 드러난다면, 공간적 깊이와 함께 새로운 차원의 삼차원 이미지가 발생한다. 에이젠슈타인에게 있어 운동과 그 관념은 차이의 흔적이 만들어낸 차원의 발생(더 정확히는 도약)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의) 몽따쥬 미학이 우선적으로 이미지들의 차이를 다루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운동의 시간적 표현이기도 한 차이는 그에 따르면 영화의 원리일 뿐 아니라, 모든 예술의 원리이며, 나아가 세계가 운동하는 일반적 법칙이기 때문이다: "규칙성, 질서, 완전에의 욕구(이것은 항상 잘못된 완전이다)는 항상 예술을 파괴한다. 예술에 있어서 취미를 유지하는 유일한 가능성은 불규칙성이 갖는 중요함을 예술가와 대중에게 주지시키는 일이다. 불규칙성은 모든 예술의 기초이다"(에이젠슈타인 90; 르느와르 재인용). . . . "조금이라도 찌그러지지 않은 것은 감각에 호소하는 힘이 결여되어 있다. 그로부터 불규칙, 즉 예측치 못한 것, 뜻밖의 일 또는 놀람 등이 아름다움을 구성하는 본질적인 부분이며, 또한 아름다움의 특질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에이젠슈타인 91; 보들레르 재인용). 그러나 차이가 어떻게 해서 질적 도약을 발생시키는가?

참고문헌

에이젠슈타인, 세르게이. 『영화의 형식과 몽타쥬』(영화이론총서 제25집). 정일몽 옮김. 영화진흥공사, 1990.

Posted by huun

예술의 일반적 원리로서의 차이는 잠재적일 뿐이다. 우선 차이는 아직 의식으로 떠오르거나 파토스를 끌어들일 만큼의 강도를 취하고 있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어떠한 저항도 받지 않은 채, 일차적으로 물질들 간의 관계를 구성하고 있는 원리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의 연극 혹은 사건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보다 강렬한 형태로 특화되어야만 할 것이다.

에이젠슈타인의 가장 모호한 개념 중의 하나인 어트랙션(attraction)이 그 예가 될 것이다. 들뢰즈는 에이젠슈타인의 변증법적 편집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힘의 도약이나 개념의 상승에 대해 언급하는 가운데, 어트랙션을 우선 하나의 좋은 구경거리로 간주해야 한다고 지적했는데(Deleuze 36), 이와 동일한 맥락에서 우리는 어트랙션을 잠재적 차이를 특화된 계기로 전환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잭 런던(Jack London)의 원작을 연극으로 꾸민 『멕시코인』에서, 에이젠슈타인은 무대 밖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으로 상상된 무대연출 대신에 무대에 직접 실제의 권투장면을 재현한다. 연출기획에 의해 의도된 연기가 아닌 실제의 행위를 무대에서 실연함으로써, 에이젠슈타인은 간접적인 재현 대신에 직접적인 구체성을 모색한다. 이로부터 관객은 권투시합을 목격하고 있는 것으로 가정된 연기자들의 반응을 통해서가 아니라(대사의 억양, 제스처, 시늉 등), 눈앞에서 직접 벌어지고 있는 행위들을 경험하는 것이다. 여기서 어트랙션의 의미를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구체적 실제의 경험과 그에 대한 흥분이나 놀라움은, 전달되고 있는 사건의 내용이 아니라, 펼쳐진 사건의 주위에서 구체적 실제를 이루고 있는 분자적 요소들에 기인 한다: "링 바닥에 쓰러지는 육체, 가쁜 숨소리, 온몸에 번쩍거리며 흐르는 땀, 팽팽한 피부와 솟아오른 근육을 겨냥해서 찌르듯 강타하는 글러브의 강렬한 자극"(에이젠슈타인 25). 이렇게 해서 우리는 눈앞에 펼쳐진 하나의 스펙터클에 매혹되어 강렬한 파토스를 경험한다. 마이어홀드는 생체-역학적 연기론에서 심리적 사실보다는 신체적 행위를 통해 감정을 유도하고자 했는데, 이와 마찬가지로 어트랙션은 환상이나 관념이 아니라 질료와 지각에 호소하는, 즉 "안에서 밖으로"가 아니라 "밖에서 안으로" 구성하는 예술의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적 행위의 구체성이 놀라움과 같은 강한 감정을 촉발하는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 파토스는 주관적 계열의 내부에서 확립된 인상(의식적 인상 혹은 기억 등)이 객관적 계열의 구체성에 의해 파괴되는 강도에 비례하는 것이다. 베르그송은 하나의 이미지로부터 다른 이미지에 일으킨 동요가 그 자신에게 반사되어 감정이 발생한다고 가르쳤는데, 이것은 파토스를 이미지들 간의 거리, 더 정확히 말해 주체와 대상간의 간격에 의해 설명하는 방식이다. 이에 따르면 파토스는 사물들 간의 인력 뿐 아니라 사물과 의식간의 흡인력을 최대로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어떻게 그럴 수 있을 것인가? 하나의 인상은 새롭게 등장하는 다른 하나의 인상과 차이를 이루면서 강도 높은 대립에 직면하게 된다. 즉 서로 잠재적인 차이만을 가지며 개별적으로 존재하고 있던 두 계기가, 특정한 순간에 동일한 위상을 취할 수 없고, 따라서 하나의 가시적 동력을 획득하게 되는 계기가 있다. 이것이 바로 대립과 모순, 즉 충돌! 이 계기의 표현은 사물들의 차이의 양이 최대화되는 순간을 포착하는 일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멕시코인』의 연출에서 보여준 구체성의 리얼리티가 흥분을 유인하는 주요한 매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재연되고 있는 사건과 관객의 눈이 서로 근접한 위상을 띠고 있었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 사건에 대한 관객의 통상적 관념과 실제의 행위들로부터 지각되는 어트랙션의 충돌, 즉 의식이 실제에 의해 파괴되는 계기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의식은 이런 식으로 충돌에 의해 다른 영역으로 확장될 것이다. 변증법에 따르면 모든 존재는 그 자신의 운동과 변형을 파괴적인 계기 안에서 발견하게 된다. 베르그송이 감정의 발생을 거리의 최소화로 설명한 것이라면, 에이젠슈타인은 이를 차이량(差異量)의 최대화로 설명한다. 보다 상위의 도약 혹은 질적 변형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더욱 더 강렬한 차이를 추구해야만 한다. 그것은 사물이 거대한 팽창에 직면하게 되면서 더 이상 그 자신 안에 머물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만일에 영화가 이를 표현해야 한다면 하나의 부분대상 뿐 아니라 개별적인 쇼트의 강렬함을 최대로 해야 할 것이다.

그의 작품들 안에는 수많은 질적 도약이 등장하는데, 이는 특정한 하나의 계기에 의해 발생한다. 이 계기들은 주로 고함이나 주먹 혹은 불꽃이나 눈물과 같은 파토스의 정점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은 양적인 증식에서 질적인 도약으로 나아가는 변증법적 이미지의 한 표현이다. 그 좋은 예가 『전함 포템킨(Bronenosets Potemkin)』(1925)에 있다. 포템킨 호에서 죽은 바츌린츄크의 시신이 파도를 타고 오데사 항구로 들어오는 장면이 있는데, 마치 한 구의 시신이 우주 전체의 대기를 몰고 오는 인상으로 표현된다. 이 장면은 바다의 반란에서 육지의 반란으로 확대되는 전환점을 이루고 있다. 우선 대기는 안개로 서서히 퍼지고, 물의 흐름이 점차적으로 육지로 향한다. 항구 시퀀스에서는 사람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고, 점점 군중을 이룬다. 서서히 진행되고 있는 감속 편집은 슬픔을 양적으로 증식시키고 있다. 그리고는 어느 순간 갑자기 한 인물로부터 고함이 터진다. 이어 나팔소리, 주먹, 눈물. 그리고 자막: "부분을 위한 전체, 그리고 하나, 바츌린츄크를 위한 전체". 꽉 쥔 주먹들이 가속으로 편집되고, 다시 자막: "전제정치 타도 . . .".


그의 작품에서 도약의 계기가 주로 파토스의 정점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은, 파토스가 행동으로 나아가는 전환점이 되기 때문이다. 변증법에 따르면, 의식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단일자가 자기 자신을 질적으로 변형시키기 위해서는, 즉 하나의 고양된 통일성을 취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대립물을 상정해야만 한다. 이것은 대립물과의 투쟁에서 자신의 힘을 최대로 함으로써 자신의 내부에 속해있던 잠재적 자질을 현실화하기 위함이다. 파괴의 위협에 대한 공포나 대상에 대한 과도한 혐오는 자신과 분리되어 객관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대상을 내부로부터 체험하는 과정이다. 대상을 부정하든지 혹은 흡수하든지, 거기에는 반드시 힘의 최대의 문제가 관건으로 등장한다. 에이젠슈타인에게 있어 충돌은 근본적으로 질적 도약을 의미하지만, 이 보다도 우선적인 것은 대립으로부터 파생되는 힘의 최대화였다. 그의 유인(attraction)의 개념이 바로 이것이다(힘의 최대로서의 감동, 정념, 분노 . . .). 따라서 대립에서 힘의 최대치를 도출하기 위해서는 힘의 팽팽한 긴장이 추구되어야만 한다. 프레임을 짜는데 있어 황금분할과 같은 정확한 휴지점(caesura-point)이 필요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와 같은 분할에서 부분 대상들 간의 대립 뿐 아니라 질적 도약의 단계가 설정 된다: 『낡은 것과 새로운 것(Old and New)』(1929)에서 우유방울로부터 이어지는 급속도의 질적 도약, 즉 색채도약, 시간도약, . . . 개념도약; 『전함 포템킨』에서의 대치하고 있는 힘들 간의 대립과 그로부터 파생되는 새로운 국면들.


차이량의 최대화인 대립과 모순은 부분 대상들 간에 이루어진 우연한 충돌이 아니다. 이는 변증법적 고유의 의미에서 그렇다. 그것은 사물이 질적 변형을 이루거나 보다 상위의 도약을 위해 반드시 겪어야할 필연적인 자기증식 과정이다. 영화에서 표현되어야 할 것은 바로 사물의 자기증식인 충돌이다. 부분적 대상들 간의 충돌의 좋은 예가 『이반 대제』 제1부 마지막 장면에 있다. 황제는 자신을 지지하는 백성을 기다리고 있다. 황제와 백성은 하나의 쇼트 내에서 화면의 오른쪽과 왼쪽의 가장 크거나 가장 작은 형상들로 몽따쥬 된다(에이젠슈타인 228; 263 그림을 참조하라). 여기서 차이량의 최대화는 카메라와 대상의 거리가 두 개의 극단적 형태로 화면 전체에 채워지면서 표현되고 있다(클로즈업과 롱숏의 충돌). 『전함 포템킨』에서 차이량의 최대화는 보다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나 어떤 것이든지 부분대상들 간의 우연한 충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에이젠슈타인이 의도했던 바는 단순히 반란군과 군중 그리고 이를 저지하려는 군대의 격렬한 정치 경제적 대립이 아니라, 사회 전체 나아가 세계를 이루는 필연적 법칙으로서 우주 전체의 대립이다. 따라서 모순은 언제든지 화면 전체의 구조를 이루고 있는 기하학적 충돌이거나(구조물의 윤곽선이나 군대의 진압에서 볼 수 있는 선형적 운동과 반란군이나 민중의 비선형적이고 역동적인 운동에서 볼 수 있는 도형의 충돌, 낮은 지대의 집단과 높은 지대의 집단을 이루는 면의 충돌, 바다와 도시의 공간의 충돌 혹은 그 양의 충돌 등), 프레임의 내용을 가득 채우고 있는 질료의 충돌이거나(빛의 강도에 따라 명암의 대조를 이루는 조명의 충돌, 탄환의 금속성에 의해 찢겨지는 피부와 같은 재료의 충돌), 벌어지고 있는 전체의 사건과 시간의 충돌(에이젠슈타인에 따르면 이것은 slow motion과 stop motion에 의해 달성될 수 있다). 이것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공간과 질료의 충돌, 질료와 시간의 충돌, 공간과 시간의 충돌, 감각들 간의 충돌 . . . .


이런 식으로 세계는 대립과 모순의 양태를 통해 그 자신 안에서 스스로를 전개하고 진화한다. 따라서 대립물들의 충돌은 유기적 조화를 주관하는 초월적 질서 아래 발생하는 우연일 수가 없다. 그들의 양적인 증식은 그 자신의 진화에 있어 필연적 과정이다. 만일에 특정한 틀(프레임)에 의해 그 전개에 제약이 가해지고, 그 틀 안에서 하나의 존재 혹은 여러 존재들이 동일한 위상을 점유할 수 없는 한계에 직면하여,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팽창의 극한에 이르면, 연상의 형식으로든 아니면 관념의 형식으로든, 거기서부터 무엇인가가 빠져나가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에이젠슈타인에게 있어 영화는 예술의 일반 법칙으로서의 충돌을 순전히 변증법적 과정 속에서 실현해야만 한다. 거기에는 증식, 팽창, 내적이고도 필연적인 모순, 충돌,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질적 도약이 표현되어야만 할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에이젠슈타인이 구현하고자하는 변증법을 포즈들의 이상적 종합이라고 보아서는 안 된다. 물론 거기에는 하나 또는 여럿의 포즈를 이루고 있는 정점들이 등장한다(우유방울, 단말마와 같은 총성, 고함, 주먹, 눈물 . . .). 또 이 정점들 간의 이행에 의해서만 운동이 발생할 것이다. 그러나 분할점을 이루고 있는 것들은 주관적 상태의 포즈와는 근본적으로 구별된다. 그들은 정신의 초월적 종합에 의해서가 아니라 강렬한 파토스의 내적 분출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Still from "Battleship Potempkin">

에이젠슈타인은 이미 여러 곳에서 몽따쥬가 내적 과정에 기초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내적 과정은 푸도프킨이 그랬듯이 심리적 사실들의 점진적 변화를 표현하는 것과는 구별된다. 에이젠슈타인에게 있어 심리적 사실이란 행동의 원인이 아니라 오히려 행동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서워서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도망가기 때문에 무서움을 느낀다. 여기에 동력학적 몽따쥬를 강조하는 에이젠슈타인의 행동주의적 경향이 있다. 순서가 완전히 뒤바뀐 것이다. 시민들은 전제정치를 타도하기 위해 주먹을 쥐거나, 눈물을 흘리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들의 주먹이 혁명이 되고, 눈물은 전제정치 타도의 출발이 된다. 주먹을 쥐거나, 눈물을 흘리면서, 그들은 전제정치의 타도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Francis Bacon, Study for the Nurse in the Film

(Francis Bacon, Study for the Nurse in the Film "Battleship Potemkin", 1957)

에이젠슈타인의 몽따쥬에서 자주 언급되는 제3의 개념은 이런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서로 다른 쇼트나 이질적인 존재들이 결합되거나 충돌하면서 어떻게 제3의 개념이 도출되는가? 그는 몽따쥬가 문장구성의 방식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것은 몽따쥬가 언어 특히 은유와 맺는 관계를 지적하기 위함이었다. 심지어는 영화가 문학의 제2시기라고 주장한 바가 있다. 그러나 그는 문학적 상징이나 은유가 쇼트의 몽따쥬와 맺는 관계에는 제약조건이 따른다는 점을 잘 알았다: "이러한 수법은 본질적인 관점(주제의 정서적인 역학화)이 상실되고 있으면 병적으로 쇠퇴해버릴 수도 있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본질적인 것을 상실하자마자 그 수법은 생산적인 힘을 잃고 생명이 없는 문학적인 상징주의와 문체상의 매너리즘에 빠지게 된다"(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에이젠슈타인 103-5를 참조하라). 그가 몽따쥬를 은유와의 관계에서 파악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보다도 은유의 결합이 내재적 속성들의 결합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내재적 속성의 결합은 하나의 단어뿐만 아니라 하나의 쇼트를 형태의 공통성에서가 아니라 질적 공통성에 의존한다. 몽따쥬가 문장구성의 방식에 의거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에는, 내재적 속성들의 형용사적 결합(질적 결합)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그것은 언제든지 감정상태의 최대화와 관계가 있는 것이다. 공장 노동자들의 학살과 황소의 도살이 효과적으로 결합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또한 이것이 모호한 용어인 정서적인 역학화가 가지고 있는 뜻이다. 에이젠슈타인의 변증법을 내재적 속성의 창조 혹은 그 운동성의 최대화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에이젠슈타인의 몽따쥬를 변증법의 표현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것은 언제든지 힘의 최대화와 질적 변화를 수반한다. 그의 몽따쥬에는 행동주의적 성향이 강하게 배어있으며, 이것은 파토스의 구성을 통해 나타난다. 그는 영화가 자연의 재현이 아니라 인식의 구성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그에 따르면 혁명을 요구하는 시기에는 베르토프의 방식이 적절치 못한 예술이었다. 그는 영화 편집이 세계의 운동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세계적 운동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몽따쥬는 변증법의 표현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 변증법의 원리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 변증법은 초월성이나 외재성을 토대로 하는 고대적 변증성이 아니라, 파토스와 행동 그리고 힘의 최대화를 의미하는 내재적 변증성에 기초하고 있다. 그는 변증법의 외재성과 내재성의 주제를 통해, 소비에트 몽따쥬 학파들이 많은 빚을 지고 있던 그리피스에 대한 비판(에이젠슈타인은 그리피스의 평행교차편집이 임의로(외적으로) 설정된 결론에 이르기 위한 단순한 유기성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나아가 부르주아적 인간과 사유에 대한 비판, 그리고 무엇보다도 세계를 이해하고 행동하는 일반적 원리로 제시한다.

참고문헌

에이젠슈타인, 세르게이. 『영화의 형식과 몽타쥬』(영화이론총서 제25집). 정일몽 옮김. 영화진흥공사, 1990.

Posted by huun
1

평소에 일본 문화를 생각하면 언제나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었다. 그 이미지는 서구 유럽이나 동양의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것이었다. 아마도 이 느낌은 일본과 한국의 남다른 역사적 배경과는 관계없이, 많은 사람들이 대체로 갖는 이미지일 것이다. 심지어 서구인들조차도 일본의 이러한 독특함을 알고, 때로는 열광하여 좋아하는 듯하다. 이를 기호의 어떤 것으로 폄하한 사람도 있지만, 그렇게 편협한 관점으로만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얼마 전 일본 근대미술 전시관을 돌아보고, 역시 생각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일본에 대한 나의 느낌을 다시 확인할 수가 있었다. 전시회의 규모가 생각보다는 조야했고, 또 일본에서 예술적 가치를 갖는 작품들이기보다는, 일제 때에 강매 식으로 입수한 것들이기 때문에, 이 몇 점의 작품들로 일본 미술을 언급하고, 나아가 한국이나 중국의 미술과 비교하는 것은 상당히 편협한 일일 것이다. 나에겐 아직 그 만한 자료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평소에 가지고 있었던 일본에 관한 나의 느낌을 언급하고, 이 이미지가 도대체 어디에서 연유한 것인지를 해석하는 것으로 만족해야겠다.

미키 스이잔(三木翠山, 1887-1961)의 “꽃의 여행[花乃旅]”(1939)그 전시회에 걸린 다양한 회화들 속에서 몇 가지 특징을 선별해 볼 수 있었는데, 그것은 단순한 색조와 선, 운동감 없이 정지되어 있는 듯 한 대상들, 형상들의 단순함과 평면성, 비현실적이거나 혹은 아예 배제된 명암, 색채의 분명한 대조를 통한 강렬함과 섬세함 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회화들 중에서 나의 시선을 사로잡은 작품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미키 스이잔(三木翠山, 1887-1961)의 “꽃의 여행[花乃旅]”(1939)이라는 작품이다(아래 각주1 참조). 그리고 이 작품은 위에 열거한 몇 가지 일본 회화의 특징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아마도 내가 일본화들을 볼 때 공통적으로 갖는 느낌과 이미지를 이 그림이 단번에 말해주고 있는 듯 했다. 여인을 감싸고 있는 공간과 그녀의 자태를 완전히 구분하기 위해 묘사된 굵고 검은 선. 그녀가 포함하고 있는 모든 신체 요소들(머리칼, 눈썹, 입술, 코, 목선, 시선, 귓불, 그리고 가장 눈에 띄는, 얼굴과 머리의 우아한 경계 . . .)과 장식들 그리고 옷 주름을 표현하기 위한 섬세한 필선. 운동감이 전혀 없는 형상. 화려한 색조에 담긴 단순함 그리고 명암의 부재에서 오는 평면성. 비현실적 구도와 제재. 붉은색과 검은색 그리고 흰색의 분명한 대조를 통한 강렬함. . . .

이러한 것들이 이 그림의 질료를 이루고 있으며, 이 질료가 발산하는 이미지가 나의 눈을 사로잡은 것이다. 나는 이러한 우키요에 풍의 미인화들을 이리 저리 찾아보았고, 그 작품들 속에서 유사한 이미지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공통적인 이미지를 언어로 재현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는데, 한 마디로 이 이미지를 이렇게 말해보자: 시체의 부패된 신체를 숨기기 위해 몸에 짙은 화장을 하여, 화가는 저 미인의 아름다움을 영원히 살아있는 것으로 만들고자 한다.


2

내가 언어로 재현한 저 이미지는 일본적 감성을 설명할 수 있는 몇 가지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그 요소들은 직접 말하기보다는 일본적 감성에 의해 언어로 재현된 다른 작품을 통해 더 쉽게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이쿠(俳句)이다. 예술적 독특함에 중독된 프랑스인들은 하이쿠를 매우 좋아하는데, 특히 롤랑 바르뜨(Roland Barthes)는 사랑에 관한 한 저서에서 한편의 하이쿠를 인용하고 있다. 이 인용을 통해 그는 사랑의 감정과 그 슬픔의 관계를 하나의 묘한 형태의 사랑과 연결 짓고 있다(일본어로 된 하이쿠가 아니므로, 나는 여기서 영어로 인용해 보겠다).

      The full moon this fall,
      All night long I have paced
      around the pond.(Barthes 97)

어느 가을. 보름달이 한껏 연못 속에 내려 앉아있다. 그 달이 저렇게 연못에 앉아 있는 동안, 나는 온 밤 내내 연못 주위를 서성이고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 연못 주위를 서성이는 것뿐. 환한 달을 가슴속에 파묻고 내 손에 잡아보고 싶지만, 물가를 서성이는 것으로 만족해야하는 애달픔. 아마도 바르뜨는 이 감정을 사랑에 빠진 사람의 애달픔이라고 말하고 싶어 했을 것이다. 그래서 또한 다음과 같이 자신 스스로 하이쿠 한편을 지어 보인다.

      This morning, the bay sparkling,
      I stayed here, motionless,
      Thinking of who is gone.(Barthes 97)

연인이 떠나고 난 후 처음으로 눈을 뜬 첫날 아침. 그/그녀가 배를 타고 지나가며 남긴 자취로 반짝거리는 바닷가. 나는 아무 동작도 없이 여기에 앉아 하염없이 바라본다. 가버린 사람을 생각하며. 나는 허용된 구역의 끝자리를 서성이면서 밤새 혹은 온종일 말더듬이처럼 웅얼거린다. 이 옹알이의 반복은 마치 (마법의)주문이 그렇듯이 모든 에너지를 응축 또는 팽창시킨다.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서 너무나 많은 말을 해대는 반복. 그래서 바르뜨는 예술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글 보다 훨씬 거대하지만 동시에 글을 쓰기에는 너무 빈약하다 . . . 글 속에 이 모든 것을 담는 것은 불가능하다"(Barthes 98). 이때에 영혼은 불순해지고 이미지의 덩어리들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온몸에 히스테리의 경련이 일기 시작하면, 나의 언어는 서서히 수다스럽고 지저분해지기 시작한다. 이런 식으로 영혼과 언어는 서로 채우거나 비우면서 시이소 놀이를 해댄다. 영혼이 수다스러워지면 나는 말이 없고, 내가 수다스러워지면 나의 영혼은 텅 비거나 침묵한다.

3

하이쿠는 일본의 예술에 깃든 하나의 원형처럼 보인다. 그리고 거기에는 묘한 역설이 내재되어 있다. 강렬함과 냉정함. 팽창하는 감정을 표현하고 싶은 열망과 이를 부추기는 감성의 유혹이 한편에 있고, 다른 한편에는 이를 한없이 차단하는 막다른 길이 있다. 그리고 이 사이에 히스테리의 영역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히스테리 영역의 한편에는 한없이 팽창하고 있는 감정의 과잉이 있으며, 또 다른 한편에는 이 감정을 중화하고 정돈하려는 코드가 발생시키는 결핍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미학적 딜레마인데, 이는 우리 자신의 능력들이 서로 충돌하고 있는 데에 기인한다. 가령, 감각능력의 탈 코드화가 이성능력의 지배에 반항하고 있는 것처럼. 이 딜레마 속에서 두 힘의 긴장이 도출되어 하나의 히스테리의 영역이 발생한다. 이 히스테리에 빠진 예술가는 이제 가혹한 에너지의 응축을 감행할 것이다. 너무나 많고 큰 감정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면, 너무나 빈약하여 그 과잉을 감당할 수 없는 예술가의 손놀림은, 거의 아무것도 표현하지 않은 채, 매우 조심스럽고도 섬세하게 그 예술가 자신으로부터 빠져나오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에드가 앨런 포우(Edgar Allan Poe)가 규정했던 아름다움의 영원성에 대한 망상과도 흡사하다(“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소녀의 죽음이다”).

따라서 저 애달픔으로부터 비롯된 미학적 긴장은 우리의 능력을 전혀 다른 곳으로 이동시킨다. 과잉과 결핍의 충돌과 긴장은 우리로 하여금 초 감성이라는 영역으로 스며들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냉정하고도 가혹한 에너지의 응축의 결과가 바로 하이쿠에서 보게 되는 감성의 클라이맥스이다. 클라이맥스에 도달하기 위한 주변의 모든 부수적 서사들을 배제해 버리고, 하이쿠는 그 자체가 하나의 클라이맥스가 되어 버린다. 마치 죽음으로써 자신의 아름다움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그래서 우리가 저 17음절에서 보는 것은 체포된 순간, 즉 모든 우주의 에너지를 하나의 점(點)의 상태로 응축시켜버린 순수 이미지 그 자체이다. 그리고 이 절정 속에 해소할 수 없는 역설이 있다. 감정의 과잉이 극한에 이른 너무나 커다란 영혼 때문에, 이제 예술가의 수다스러움은 점점 침묵이 되어간다. 그리고 이 침묵은 우리 영혼의 강렬한 수다와 불순함을 품게 한다.

4

하이쿠의 이 같은 응축과 긴장이 바로 우키요에의 미인화들로부터 느끼게 되는 저 독특한 이미지가 아닐까? 나는 저 미인의 정지된 포즈 속에서 일종의 수다스러움과 불순함 같은 열정을 읽는다. 작품들이 공통적으로 자아내는 초 감성적 긴장 속에 깃든 강렬한 관능미 또한. 그런데 이 관능미에는 표면화된 사물들의 천박함이 스며들어 있다. 이것은 아마도 사물을 그 자체로 내보이고자 하는 열망에서 비롯된 것 같다. 육체를 육체 자체로 드러내려는 시도 속에서, 관능적 열정은 희미하게 하나의 외설적 형태로 드러나지 않을 수 없다. 하이쿠에서 볼 수 있는 응축된 에너지와는 반대로, 이번에는 모든 영혼의 에너지와 열정을 물질적 자연으로 팽창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한 점(點)의 형태로 응축된 것을 조형적 형상으로 물질화 시키는 과정에서 나오는 천박함 같은 것이다. 물질성 즉 2차적 자연성 그 자체로 육화시키려는 시도는 우키요에의 형식이 반복적 패턴으로 지속되고 있다는 점이 잘 보여주고 있다. 육체 자체의 외설적 조형미는, 강렬한 에너지를 냉혹한 절제 속에서 표현하고 있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여인을 죽은 존재인 것처럼 정지시키고 있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이 죽은 여인을 재생코자 열망하고 있는 것이다(채색된 화려한 색채를 보라). 살아있는 영혼의 열정을 과도하게 억압하여 침묵의 상태로 전이시키는 미학적 절제! 그리고 이 절제로 인해 존재의 운동감을 일거에 제거해 버리고, 이를 하나의 응축된 점이 아닌 다수의 점들의 집합으로 이루어진 사물(死物)의 상태로 치환하는 외설! 이러한 이중적 패턴이 바로 저 미인화의 조형미를 낳고 있는 것이다. 저 싸늘한 전쟁의 강렬함!

5

갑자기 다가온 빙하기로 인해 차가운 얼음으로 정지되어 버린 여인의 가장 아름답던 순간의 포착. 그리고 이제 화가는 그 여인을 유물론적 팽창을 통해 재생시키고자 열망하고 있다. 이로써 우리는 일본 미인화에서 보게 되는 미학적 절제의 밑바닥에는, 자연에 대한 가차 없는 혐오와 자연의 소유라고 하는, 새디즘과도 같은 이중적 망상이 깃들어 있음을 발견한다. 한편에는 실재하는 것으로 만들고 이를 소유하기 위한 강렬함이 있으며, 또 한편에는 수동적이고 운동하지 않는 죽어버린 시체에 대한 혐오와, 이 혐오의 직접적 반응으로서 냉혹한 절제와 냉담함이 있다. 이 두 영역이 한 폭의 작품 안에 동시에 충돌하고 있으며, 이것이 살얼음 같은 긴장을 품고 있는 것이다. 이를 이렇게 말해보면 어떨까? 여인의 아름다움을 영원히 보존하기 위해, 잔혹하고도 가혹한 시간과 운동을 그 여인으로부터 모두 제거해 버린, 화가의 아름다운 시체에 대한 사랑. 그리고 그 애달픔.

참고 문헌
Barthes, Roland. A Lover's Discourse: Fragments. english trans by Richard Howard. New York: Hill and Wang, 1999.


1) 이 작품은 우키요에(浮世繪)라고 하는 일본 특유의 스타일로 제작된 것이다. 우키요에는 일종의 일본식 풍속화인데, 16세기 후반부터 서민들의 문화가 대중화되면서, 物見遊山, 歌舞音曲 등을 다룬 초기 풍속화가 우키요에의 전신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당시의 작가나 감상 계급은 주로 귀족이나 무사계급이 주류를 이루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江戶(에도)幕府를 열고나서 사회적 변화가 매우 빠르게 진전되어, 강호는 신개발지 혹은 신천지였기 때문에 전통으로부터 자유로운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이로부터 강호의 서민들은 직접 그림을 제작하고 감상하는 미술의 주체가 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로부터 서민 예술로서 우키요에가 발생한다. 우키요에는 주로 서민들의 현실적 생활(現世)을 소재로 다루었으며, 특히 향락적이고 선정적인 요소들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특히 유럽과의 무역이 성행하면서, 일본 도자기를 포장한 종이에 그려진 우키요에를 본 유럽인들은 그 독특한 이미지에 매료되었으며, 인상주의 화가들이 이를 모방하여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미키 스이잔의 작품들은 대부분 전통적인 우키요에라기보다는, 그것의 현대적 변형이라 할 만 하다.

Posted by hu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