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분석에서 다루는 매저키즘의 과정에는 일정한 도식적 추론이 작용한다. 본능들의 역할과 전이과정이 새디즘과 매저키즘이라는 서로 다른 변태성을 특징 짓지만, 이들은 모두 유사하거나 동일한 원인에서 시작한다는 추론이다. 이에 따라 어머니의 역할과 아버지의 역할이 도착의 두 과정에서 다른 방식으로 기능 함에도 불구하고 그 원인은 동일한 곳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매저키즘과 새디즘을 모두 이해하기 위해서는 양자 중 어느 쪽을 선택해도 무관하다. 이들은 동일한 본능의 연속적 전이과정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매저키즘은 아버지의 자리를 차지하고 그의 권위를 훔치려 하는 욕망에서 시작한다(새디스트적 단계). 죄의식이 다음에 나오고, 그로부터 거세의 공포가 차지해 그로 하여금 능동적 목적을 포기하고 어머니의 자리를 차지하여 아버지의 사랑을 구걸하게 된다. 그러나 수동적 역할이 발생시키는 죄의식과 거세 공포의 새로운 발생을 피하기 위해, 이제는 다시 아버지로부터 사랑받기 위한 욕망을 '매 맞고자 하는 욕망'으로 대체한다. 57∼58> 이와 같은 추론에 따르면 매저키즘의 과정은 속죄의 과정인 셈이다. 여기서 매저키스트는 아버지에 대한 저항에서 출발하여 속죄와 처벌의 과정으로 이행하는 외디푸스적 존재이다.

매저키즘에 대한 정신분석의 추론이 문제가 되는 것은 언제나 아버지의 역할을 중심적인 테마로 설정한다는데 있다. 여기에는 새디즘에서 지배적인 아버지의 역할을 여전히 매저키즘에도 접목시켜 보려는 의도가 내포된다. 새디즘이나 매저키즘 모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아버지와는 반대로, 어머니는 부수적이거나 유사 원인으로서 아버지의 결정적 위상을 보조해 주는 요인으로 설명된다. 아버지의 자리를 차지하고 권위를 훔치려는 본능의 공격적 기원이 속죄의식이나 사랑으로 이행되는 과정에서 어머니의 기능으로 치환됨으로써, 매저키스트가 고통을 받는 행위의 본질을 아버지와의 관계구도 속으로 끌어들이게 된다. 매저키스트는 어머니의 자리를 차지하여 아버지의 사랑을 구걸함으로써 반항과 처벌이라는 아버지와의 관계를 애정관계로 변치시킨다. 여기서 어머니의 역할은 아버지와의 관계를 위해 자극제 혹은 속죄의 구실로서 매듭 지어질 뿐이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새디즘에서 보여지는 절대적 아버지의 권위의 실현이라는 테마는 매저키즘적 과정에서 변형된 형태로 다시 재현되고 있다.

    <매저키스트는 죄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는 때려주기를 원한다. 속죄하는 것이다. 그러나 왜? 그리고 무슨 죄로? 그것은 소형으로 제작되어 매 맞는, 그리고 우스꽝스럽고 모욕을 받는 그의 안에 있는 정확히 아버지의 이미지가 아닌가? 그가 보상하려는 것은 그의 아버지와의 닮음이 아닌가? 혹은 그의 안에 있는 아버지다움이 아닌가? 매저키즘의 공식은 모욕을 받는 아버지이다. 따라서 아버지는 때리는 자가 아니라 매 맞는 자이다. 세 어머니의 환타지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세 개로 겹쳐진 여성의 모습으로 모든 부성적 기능이 상징적으로 전이되거나 재분배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아버지는 배제되고 완전히 무효화된다. 마조흐의 작품에서 이상적인 여인이 동물들을 사냥하고 그것으로부터 모피를 약탈하는 장면들은 상징적으로 해석하자면, 여성의 남성에 대한 투쟁이며, 거기서 승리를 경험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여성은 이미 매저키즘이 시작되면서 승리했기 때문이다. 곰이나 모피는 이미 배타적으로 여성적인 의미와 함께 사냥된 것이며 걸쳐진 것이다. 그 동물은 원시적인 창녀 어머니, 탄생 이전의 어머니의 자리를 차지한다. 동물과 모피는 이미 사냥이 완결된 상태이며, 구강 어머니의 자리를 위해 희생되는 것이다. 재탄생이라는 목적을 위해, 즉 아버지가 완전히 배제된 단성생식적 재생(parthenogenetic second birth)을 위해서. 61>

매저키즘의 과정은 아버지에 대한 도전과 투쟁의 과정이 아니며 또한 속죄와 처벌의 과정도 아니다. 그러나 매저키스트의 거부에는 상당한 능동성이 숨어있다. 이미 아버지는 효력이 정지되었으며, 오히려 처벌의 대상은 승리한 어머니에 의해 매 맞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다. 매저키즘에서 아버지는 이미 배제되었으며, 보다 정확히 말해 매저키즘의 전 과정은 이미 승리한 어머니들이 구강적(이상적) 어머니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전개과정이며 통과의례인 셈이다. 양성이 아닌 단성생식의 과정. 이것이 바로 매저키즘적 과정의 에로티즘이다.

매저키스트가 투쟁적이기 보다는 환상을 탐닉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미 내면에 설정되고 결정된 환상을 통해 제도와 아버지는 거부되고 제외된다. 아버지는 동일화의 대상도 아니며 사랑의 주체도 아니며 투쟁의 적도 아니다. 매저키즘에서 아버지는 완전히 거부되며 배제된다. 이것은 소설의 후반부에서 남자의 등장에 대해 매저키스트가 보여주는 반응들 속에서 드러난다. 마조흐 소설들의 마지막에는 남자가 재 등장하는데, 여기서 외디푸스적 여인(새디스틱한 여인)과 새디스틱한 남자의 동맹관계가 나타난다: <『젊음의 샘물』에서 엘리자베스(Elizabeth)와 이폴커(Ipolkar), 『영혼의 낚시꾼』에서 드라고미라(Dragomira)와 부그슬라브(Boguslav), 『비너스』에서 완다(Wanda)와 그리스인 등 … 그러나 … 『비너스』의 마지막에서 볼 수 있듯이, 새디즘적 남자가 승리를 거두게 되면, 모든 매저키스트적 행위는 중단된다; 플라톤에서의 형상(Froms)처럼, 매저키즘은 자신의 반대인 새디즘과 결합하거나 단결하기 보다는 스스로 후퇴하고 파멸된다. 61> 매저키즘적 과정에서 아버지-남자가 출현하는 것은 외디푸스적 어머니가 새디스틱한 인물(남자)과 동맹관계를 형성했을 때인데, 이때 새디스틱한 인물(남자, 아버지)이 승리를 거두게 되면 매저키스트는 이와 동맹관계를 맺거나 투쟁하거나 연합하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 오히려 매저키즘의 과정은 곧바로 중지되어 버린다. 아버지가 매저키즘의 과정 속에 들어올 자리는 없는 것이다.

환타지의 형식 속에서 경험되는 아버지의 배제와 기능의 상실이 바로 매저키즘이 새디즘과 근본적으로 다른 이유이다. 환타지의 형식은 몇 가지 조건들을 수반하는데, 여기에는 기능들의 전이와 치환이 요구되며, 그럼으로써 비로소 어머니라는 상징적 신화를 구성할 수 있다. 매저키스트의 환상에는 본질적으로 어머니의 왕국이 내재한다. 그러나 어머니의 신화를 단순히 아버지와의 투쟁에서 승리한 어머니로 환원해서는 안 된다. 매저키즘의 환상을 이와 같이 투쟁과 승리의 강박충동으로 이해하게 될 때 새디즘과의 혼동을 피할 수 없다. 매저키스트의 환상 어디에도 공포의 음영을 찾아볼 수 없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매저키즘의 전 과정은 이미 승리한 어머니이며, 나쁜 이미지의 두 어머니를 굴복시키고 이상적인 구강적 이미지의 어머니가 권위를 실현하는 테마로 구성된다. 이로써 두 어머니(창녀적 이미지의 어머니와 외디푸스적 이미지의 어머니)의 기능과 역할이 구강 어머니에게 전이되는 과정이 실현된다. 환타지는 두 개의 극단을 중화하고 승화하는 것으로부터 나타난다. 이것이 또한 환타지의 일반적 구조이다.

어머니들간의 기능전환과 구강 어머니의 이상 실현은 매음과 매춘에 대한 매저키즘적 독특함을 설명해 준다. 실제로 마조흐는 완다로 하여금 매춘을 설득하고 권유한다. 그러나 매춘의 행위를 새디스트가 보여주는 매춘의 강요와 동일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매저키즘적 과정에서 매춘은 이상적 어머니에게 나쁜 어머니의 이미지와 기능들이 전이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수행되어야 한다. 선한 어머니로서 순수함을 가지는 한에서 구강 어머니는 모든 기능들을 수행할 수 있는 존재이다. 따라서 창녀 어머니를 위해 남겨진 매춘의 기능을 취해야만 하는 것이다(또한 잔혹함을 집행함으로써 외디푸스 어머니의 새디스틱한 이미지를 변형하고 승화한다. 이로써 매저키스트로 하여금 속죄를 통한 재 탄생의 이상으로 가는 과정이 실현된다). 그러나 새디즘에서 매춘은 외디푸스 어머니를 파괴하기 위해 자궁 어머니의 기능을 끌어들이는 제도로 기능한다   이 과정에서 딸이 공범자가 된다. 결국 새디즘의 매춘과 매저키즘의 매춘은 서로 연결될 수 없는 차이가 있다: <매춘은 두 변태성을 연결시키는 공통적 모습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매춘은 완전히 다른 의미로 작동한다. 1. 사드에게서 보편적 매춘의 꿈은 "객관적 제도"로 구체화되어 어머니(이차적 자연)를 파괴하고 딸을 격상시키는 것이다(어머니는 폐물이 되고 딸은 동반자가 된다). 2. 마조흐에게 매춘의 이상적 형태는 "은밀한 계약"에 근거한다. 거기서 매저키스트는 자신의 아내를 설득하고 선한 어머니의 자격으로 스스로 다른 남자에게 몸을 허락하게 하는 것이다. 매저키즘의 이상으로서 구강 어머니는 다른 여성의 모든 기능들을 흡수한다; 여기서 기능들은 변형되고 승화된다. 63>

이와 같이 아버지가 무효화되는 과정은 환상 속에서 구성되는 세 어머니들의 기능전이를 통해 이루어진다. 아버지의 절대적 기능과 역할이 세 어머니에게 재분배되어 더 이상 아버지가 기능하지 못하는 순수시간의 왕국. 이것이 매저키즘적 환상의 본질이다. 이 왕국에서 <세 여인은 상징계를 구성함으로써, 그 안에서 아버지를 무효화한다. 이와 같은 영원함과 무 시간성의 권력과 통치는 신화의 언어로만 표현될 수 있을 뿐이다. 매저키즘의 본질적 요소는 신화이다. 63> 아버지의 이름으로 등장하게 되는 상징계의 질서는 매저키즘적 신화의 언어를 통해 이제 어머니의 모계적 질서로 대체된다. 자연(어머니)과 대립되어 역사와 문화를 지배하고 그것을 가능케 했던 아버지의 언어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아버지는 이제 문화와 법을 대표하지 않는다. 세 겹으로 주름진 어머니의 왕국에 아버지를 위해 비워둔 자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질서 안에서 어머니는 특별하게 서명되고 계약된 조건들에 따라 법을 재현한다; 그녀는 상징을 탄생시키고, 매저키스트는 이 상징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다. … 아버지는 이제 매저키즘의 상징계에서 아무 것도 아니다(nothing). 상징적 기능을 박탈당하는 것이다. 63>

Posted by huun

매저키즘에서 이상적 여인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마조흐의 소설들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박해자 여성들을 모두 매저키즘의 이상적 여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또한 새디즘과 매저키즘이 추구하는 이상은 서로 어떻게 다른가? 매저키스트가 경험하는 고통의 제공자로서 박해자 여성은 두 가지 서로 다른 층위들 위에 존재한다. 하나는 역사적이고 현실적인 경험 속에서 나타나는 여성의 모습이며, 다른 하나는 환상과 망상 속에서 나타나는 여성의 모습이다. 그러나 이 두 층위가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매저키즘의 망상 속의 여인은 첫 번째 층위의 여성들 속에 위치해 있다고 볼 수 있다. 마조흐의 소설들 속에 등장하는 박해자 여성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묘사되어 있지만, 이들은 몇 가지 중요한 특징들을 공유하고 있다: <모피를 입고, 채찍을 휘두르며, 남자를 노예처럼 다루고 … 진정한 사마리아 여인(Sarmatian woman)의 모습을 하고 있다. 47> 그러나 이들이 공유하는 특징들 속에는 완전히 구별되는 극단적인 두 전형이 나타나고 있다: 1. <그리스적 여인>. 2. <새디스틱한 여인>.

마조흐의 여인들은 그리스적 여인의 이미지로 나타나기도 하며, 때로는 새디스틱한 여인으로 구별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또한 대부분 소설의 초반부에서 후반부로 진행 되어감에 따라 그리스적 이미지의 여인은 새디스틱한 여인으로 탈바꿈 하게된다. 『비너스』,『이혼한 여자』,『싸이렌』등의 초반부에서 보여주는 여인의 모습들은 한결같이 그리스적 여인의 모습이다<48참조>. 이들은 현대적 여성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들은 이교도적이며 관능적이다. 또한 제도 안에 안주하여 살수 없는 존재로서, 제도에 저항하거나 질서를 전복하려 한다. 이들은 여성의 독립과, 남성  여성의 동등함을 주장한다. 또한 이들은 제도로서 결혼을 거부하고, 가부장제를 파괴하며, 여성의 지배를 확신하는 자웅동체이다. 이들은 모두 혼돈이라는 본질을 표현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제도 안에서는 언제나 사악한 마녀, 혹은 창녀의 이미지로 드러난다. <그녀는 현대적이며, 결혼, 도덕, 교회, 국가등과 같은 남성의 산물을 비난한다. 48> 마조흐의 작품들 속에서 그리스적 여인의 모습은 언제나 초반부에 등장한다.

그러나 소설의 후반에 갈수록 처음의 그리스적 여인의 이미지는 새디스틱한 여인의 이미지로 변한다. 매저키스트와의 관계 즉 대화나 계약의 이행의 과정을 통해 박해자 여인들은 점점 새디스틱한 여인으로 변형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사냥하기를 좋아하게 되거나 고문을 즐기게 된다. 이것은 가학을 행하는 것으로부터 삶의 해방을 경험하는 지배자의 모습이다. 따라서 어떤 측면에서는 매저키즘적 자아가 요구하는 이상적 여인으로 기능하는 듯 하다. 그러나 이 여인의 새디스틱한 면모는 사실 독립적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그녀는 다른 제 삼자인 남성의 지배아래 있거나, 혹은 그 남성의 매개를 통해서만 새디즘을 실행한다. 그녀가 행하는 새디즘의 본질은 남성의 지배에 정체된 셈이다. 새디스틱한 여인은 가부장제의 법 아래에서 자신의 본질을 드러낼 뿐이며, 때로는 남성의 피해자로서 혹은 사랑 받는 존재로서 기능하기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그녀는 외디푸스적 어머니의 모습을 하고 있다. 마조흐의 소설에서는 <그리스인, 아폴로 … 등으로 불리는> 제 3자가 등장하는데, 새로 등장하는 이 남성의 매개를 통해 박해자 여성들은 새디즘적 충동을 고양하며 새디스틱한 행위의 자극을 받는다. 새디스틱한 여인은 제 3자를 필요로 하는 것이며, 남자에 의해 고무되고, 남자와 연대함으로써만 해방되는 관능성을 추구한다. 『젊음의 샘물』에서 엘리자베스(Elizabeth Nadasdy) 백작부인, 『파우스타의 하이에나』에서 안나(Anna Klauer), 『영혼의 낚시꾼』에서 드라고미라(Dragomira)와 같은 여인들은 모두 자신의 새로운 애인 혹은 제3의 남성과의 연대나 그들의 지배아래 새디스틱한 행위를 드러낸다.<48참조>

이러한 극단적인 여인들의 두 양태는 매저키즘에서 본질적인 요소로 기능하지 않는다는 것이 중요하다. 즉 매저키스트에게 이 두 극단적인 여성의 모습은 이상적인 여인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첫 번째 여인의 경우에는 아직 매저키즘적 과정이나 행위가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두 번째 여인의 경우에는 매저키즘이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비너스』에서 완다(Wanda)는 초반부에 스스로 그리스 여인으로 설명하지만 후반부로 가면서 점점 새디스트로 변모한다. 그녀는 스스로 자웅동체이며, <고통없는 쾌락, 그리스인의 고요한 관능성 … 을 이상으로 추구하며, 기독교와 현대적 영혼에 의해 교육되는 사랑을 믿지 않는다. 49>고 단언한다. 처음에 그녀는 현대적인 여성으로 묘사되며, 제도와 기독교를 불신하고 여성의 독립을 원하는 자웅동체적인 여인으로 확신한다. 남성의 산물인 기독교는 부패하고 있다고 믿으며, 더 이상 남성의 지배를 묵과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녀는 남성과 투쟁하고 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는 아직 세베린(Severin)의 매저키즘이 등장하지 않았다. 또한 후반부에 드러나는 완다의 새디스틱한 면모는 매저키즘적 과정의 본질적 요소로서 등장하기보다는 새로이 등장한 새디스트인 그리스인의 지배아래 이루어진다. 그녀는 이 제 3자로 하여금 세베린을 처벌하도록 요구하지만, 여기서 매저키즘은 사라져 버린다. 세베린은 두려워하고 있으며, 매저키즘적 쾌감은 새디스트인 제3자의 등장으로 인해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새디스트와의 대면에서 이미 <매저키즘의 존재이유 50>는 상실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소설은 새디즘에 와서 절정을 이룬다: 완다는 잔인한 그리스인과 함께 새로운 잔인성으로 방향 전환하지만 … 세베린은 새디스트 즉 "망치"로 변해버린다. 49>

소설들 속에 등장하는 여인들을 동일한 박해자 여성으로 보아서는 안 되며, 매저키즘적 과정의 동질적 요소들로 보아서도 안 된다. 또한 매저키스트가 여성에게 요구하는 새디즘적 가학의 양태를 단순하게 보아서는 안 된다. 매저키즘의 처음과 끝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사실 매저키스트가 요구하는 계약에 따른 역할을 충분히 소화하고 있다고 보기 힘들다. <여성 박해자들은 이 극단 속에서 두려움과 혐오감과 유혹을 느낀다. 왜냐하면 그녀는 처음의 그 역할을 유지할 능력이 있는지가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 그들은 원시적 창녀 혹은 새디즘과 같은 반대적 극단으로 빠져버리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50> 이들이 극단적인 새디스트로 변하는 것은 오히려 극단으로 치달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보아야 한다. 이들은 반동형성의 기제를 운용하고 있는 셈이다: <완다가 새디스트로 변한 것은 더 이상 세베린이 부여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50> 결국, 두 극단적 여성들의 모습들 속에서는 매저키스트가 요구하는 이상적 여인의 역할을 하기엔 충분하지 못하다. 이들은 매저키스트를 지배하지 못하는 것이다.

매저키즘적 과정에서 본질적인 요소로 기능하고 있는 것은 두 극단적인 여인들이 아니라 오히려 이 두 극단의 사이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혼한 여자』에서 평등주의적 이교도 여인은 주인공이 아니며 … 『싸이렌』에서 창녀 제노비아(Zenobia)는 결국 젊은 나탈리(Natalie)에 의해 패배당하며 … 『영혼의 낚시꾼』에서 새디스트인 드라고미라 역시 솔틱(Soltyk)와 연대하여 새디스트가 되지만 … 결국 젊은 아니타(Anitta)에 의해 패배 당하고 죽음을 맞는다. 49> 이 작품들 속에서 매저키즘의 이상적 요소로 기능하는 여인은 오히려 젊은 나탈리나 아니타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중간지점의 새로운 요소, 진정한 매저키즘적 요소는 무엇인가? 매저키즘의 본질적 요소, 즉 창녀와 새디스트 사이에 있는 매개적, 중간적 여성 유형은 무엇인가? 마조흐의 이상적 여인들의 형태는 양면성이 결합된 형태로 나타난다. 이들은 경험적인 세계에 존재하는 현실적이고 역사적인 모습이기보다는 하나의 환타지 안에서만 가능한 존재들이다. 이런 이유로 마조흐의 이상은 현실세계에서는 주어지지 않는 중화된 이미지로서만 제시될 뿐이다. 이들에게서는 따뜻함과 냉정함이 공존하고, 온화한 마음과 잔혹한 본능이 공존하며, 새디스트적이면서도, 냉혹하지 않으며, 오히려 이성적이고 친절하며 섬세하고 감성적이다. 또한 점잖고 쾌활하면서도 동시에 완고하고 냉정한 모습들이다. -『추함의 미학』에서 어머니의 이미지나 마샤(Martscha)에 대한 묘사들 그리고 로라(Lola)의 양면성, 『신의 어머니』에서 마돈나(Mardona)와 니에라(Niera Baranoff) 등<50∼51참조>. 결국, 이것은 마조흐의 이상이면서 동시에 대자연의 이미지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양면성 사이에는 모성애적이고 감성적인 이미지가 나타난다. 이 여성들은 차갑고 얼어붙은 특질과 엄격하고 가혹한 특질을 공유하면서 동시에 따뜻하고 모성애적인 감성이 자리하고 있다: <마조흐적 꿈에서 삼위일체는 "냉정함-모성애-엄격함", "차가움-감성-잔혹함"으로 요약할 수 있다. 51>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 있지 않다. 극단적 관능성을 보여주는 초반과 후반의 두 여성의 이미지들이 바로 이 매개적 여성의 중화된 이미지로 대체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리스적 여인의 관능성과 혼돈은 이상적 여인의 냉정함과 감성으로 혹은 엄격한 질서로 대체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현실적이고 경험적인 두 극단적 여성들이 소유하는 관능성의 파토스는 <초 감각적 감성 51>으로 치환되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매저키즘에서 이상화된 여인의 초 감각적 감성은 두 가지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하나는 매저키즘이 새디즘과는 완전히 다른 이상화 과정을 밟는다는 점이며, 따라서 다른 하나는 매저키즘이 새로운 형태의 사랑과 쾌감을 도출하고 있다는 점이다.

(1)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새디즘과 매저키즘에는 모두 차가움과 냉정함이 중요한 하나의 기제로 작동하고 있다. 사드는 이를 냉담성(apathy)이라 불렀으며, 마조흐의 소설들 속에서는 얼어붙은(freezed) 이미지들로 묘사되었다. 이 둘에게는 차가움(coldness)의 요소가 있으며,  이러한 유사한 요소들로부터 새디즘과 매저키즘이 소통적 관계를 이룬다는 유추가 가능해진다. 그러나 매저키즘에서 이상화된 이미지(대자연의 모습)가 초 감각적 감성을 띤다는 점은 마조흐가 의미하는 차가움이 결코 새디즘의 차가움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두 변태성에서 작동하는 차가움과 냉정함은 서로 질적인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새디즘에서 냉담성은 이차적 자연의 존재성에 대한 기제로 등장한다. 절대적 악은 감정에 휩싸여서도 안 되며 열정에 사로잡혀서도 안 된다. 순수 악의 실현이란 반드시 현실적이고 경험적인 존재성을 초월해야 하며 이차적 자연으로 떨어져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새디스트의 냉담성은 <감정(feeling) 그 자체를 향하고 있다. 모든 감정 심지어는 악을 행하는데서 오는 감정까지도 비난의 대상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모두 방탕함을 가져오는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방탕함은 에너지의 응축을 막으며, 비 개인적이고 논증적인 관능성(sensuality)의 순수한 요소로 침전해 가는 것을 막기 때문이다. … 모든 열정은 이차적 자연에 머물며, 우리 내부의 선함에 머물기 때문에 비난받아야 한다. 51> 새디즘의 본질적 요소로서 기능하는 이상화된 이미지는 개인을 넘어서는 순수한 관능성이다. 이것은 이차적 자연에서는 볼 수 없는 일차적 자연 그 자체이다. 일차적 자연의 비 개인적인 순수한 관능성은 이차적 자연에 대한 냉담함으로 유지되고 도달된다. 그러나 매저키즘에서의 차가움은 이차적 자연의 파토스나 감정 그 자체를 향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매저키스트는 관능성 자체를 거부하고 있다: <그는 감정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관능성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52> 그리스적 여인의 관능성(열정-파토스)과 새디스트적 여인의 수동성(천박함-조야함)은 이상화된 여인의 초 감각적 감성과 엄격함에 의해 거부되고 치환되고 있는 것이다: 열정과 관능성에 대해서는 냉정함으로 반응하며, 수동성과 조야함에 대해서는 엄격함과 잔혹함으로 처벌한다. 매저키즘에서 얼어붙은 이미지는 이차적 자연의 관능적 쾌감이 중화된 육체 없는 감성(sentimentality)인 것이다. 여기서 이차적 자연으로서 감각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매저키즘의 이상화 과정이 환타지로 구성되는 이유이다.

(2) 매저키즘이 새디즘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상화 과정을 현실화한다는 것을 통해, 우리는 매저키즘이 새로운 형태의 사랑과 쾌감을 도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새디즘의 이상화 과정에서 가장 본질적 요소로 기능하는 것은 비 개인적이고 논증적인 관능성이다. 그러나 매저키즘에서 일차적 자연에 도달하기 위해 보다 본질적인 기능을 하는 것은 관능성이 아니라 감성(sentimentality)이다. 반면에 <관능성(sensuality)은 우리로 하여금 특수성 속에 가두고 이차적 자연의 불완전함에 가둔다. 매저키스트적 이상의 기능은 냉정함(coldness)의 힘으로 차갑고 냉정한 감성의 승리를 확신하는 것이다: 여기서 냉정함은 말하자면 이교도적 관능성을 억압하고 새디스트적 관능성을 다가오지 못하게 하는데 사용된다. 관능성은 거부된다. 52> 이런 식으로 두 극단적인 여인들에서 이차적 자연의 관능성과 파토스가 이상적 여인의 초 감각적이고 초 관능적인 감성으로 치환되는 것이다. 이것은 매저키즘의 과정에서 육체적이고 관능적인 사랑이 없음을 의미한다. 새디스트에게 감정은 거부의 대상이 아니라 부정의 대상이다. 따라서 새디즘에서 감정과 열정은 존재한다. 하지만 매저키스트는 관능적이고 육감적인 사랑을 거부하기 때문에, 두 극단적인 여인들의 관능적 사랑은 매저키스트의 조회대상에서 배제된다. 따라서 관능적 사랑은 매저키즘에서 이미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마조흐는 "성적인 사랑이 결여된" 새로운 인간의 탄생을 공언할 수 있는 것이다. 52> 육체적이고 관능적인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형태의 사랑과 쾌감. 이것이 바로 매저키즘이 새디즘과 다르며 또한 이미 그 자체로 차이화된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는 완전히 다른 형태의 사랑을 원한다. 그에게 육체는 거부되고 사라져 버리거나 심지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육체는 부정되지 않으며 거부되는 것이다. 이것이 또한 매저키즘이 플라톤과 변증법의 메카니즘과 관계하는 이유이다.

매저키즘에서 볼 수 있는 얼어붙은 이미지들은 바로 이 독특한 형태의 사랑을 감싸고 있다. 이차적 자연에 속하는 관능적 이상과 새디즘적 남성지배의 이상에서 새로운 형태의 모계적 이상으로의 전환이 가능한 것은 바로 이 얼음과 같은 냉정함에 기인한다: <이 냉정함 아래에는 초 관능적 감성이 매장되어 있으며, 이것은 모피로 보호되고 있다. 이 감성은 얼음을 통해 빛을 발하며, 새로운 질서의 생성원리로서 기능하며, 특정한 분노이며 특정한 잔혹성이다 … 그것은 초 관능적 감성을 내적 삶으로서 보호하며, 외부적 질서로 표현하며, 분노와 엄격함으로 표현한다. 52> 냉정함 속에는 새로운 잠재성이 응축되어 있다. 이것은 바로 <변증법의 전화> 지점을 말해주고 있다. 하나의 단계에서 다른 하나의 단계로 전이되는 단절의 지점. 매저키즘은 단절의 순간을 쾌감으로 전화한다. 거기에는 숨막히는 서스펜스와 질식의 순간이 내재한다. 따라서 모피는 차갑게 냉각된(될) 그리스 여인의 관능적 미숙함과 남성이 지배하는 기독교적 조야함으로부터 이상적 여인을 보호하기 위한 <실용주의적 기능 53>을 부여받는 것이다. <빙하기의 파국 … 관능성의 억압과 엄격함의 승리 … 얼어붙은 기독교 왕국 … 그리스 세계를 삼키는 빙하기의 파국 … 그리스 여성과 남성의 지배는 약화된다. 5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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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디즘과 매저키즘이 하나의 실체로 보이거나 혹은 두 가지 상이한 본능이 하나의 메카니즘 안에 공존하면서 서로 전이되고 변형되는 것으로 간주되는 새도-매저키즘에는 몇 가지 특징적인 가설들이 있다. 프로이트는 이와 같은 가설을 세가지 범주 속에서 다룬다: 상반성, <경험의 동일성 43>, <변형 44>.

(1) 상반성 - 상반된 본능이나 충동이 동일한 인물에게서 나타날 수 있다는 가설. 그래서 고통의 유발로 쾌감을 느끼는 개인은 고통의 경험으로도 쾌감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새디스트는 동시에 매저키스트라는 주장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러한 가설에는 상반적인 두 영역을 연결해 주는 만족스러운 고리를 제시하지 못한다. 따라서 고통을 유발하는 행위와 고통을 경험하는 행위의 두 경우로부터 어떻게 유사하고 동일한 쾌감이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자연스런 설명이 부족하다.

(2) 경험의 동일성 - 공격과 지배의 새디즘이 매저키즘적 고통을 경험한 후에만 다시 쾌락으로서의 새디즘이 가능하다는 가설. 이것은 프로이트가 새디즘을 두 부분으로 구분한 것에서 기인한다. 하나는 공격적이고 지배적인 새디즘이며, 다른 하나는 순수하게 쾌락지향적인 새디즘이다. 그러나 새디즘의 이 두 영역은 서로 단절되어 있는 독립적인 경험이 아니라, <투사와 퇴행(projection and regression) 44>이라는 기제들을 통해 서로 연속성을 띠고 있다. 또한 중요한 것은 이 연속성이 매저키즘이라는 상반된 경험으로써 유지된다는 점이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새디스트가 고통을 통해 쾌감을 얻을 수 있는 것은 과거에 그가 체험한 고통과 그에 따른 쾌감간의 관계를 경험해 보았기 때문에 가능하다. 43> 다시 말해 타인의 고통으로부터 쾌감을 경험한다는 것은 이미 자신이 고통과 쾌감사이에 어떠한 연관성이나 연결고리 혹은 상관성을 경험해 보아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고통으로부터 쾌감을 느낀다는 것, 바로 매저키즘적 경험인 셈이다. 새디스트는 매저키즘을 본질적이든 혹은 부수적이든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매저키즘적 경험은 새디즘이 단순한 폭력에서 고차원적 쾌감을 도출하는 단계로 승화하고 지양되기 위한 상관적 매개인 셈이다. 매저키즘은 여기서 새디즘의 전개과정에서 하나의 요소로 기능하고 있다. 프로이트는 새디즘이 첫 번째 새디즘에서 두 번째 새디즘으로 변이된다고 보았다. 단순히 폭력적이고 지배적인 새디즘(첫 번째 새디즘)에서 쾌락을 추구하고 망상하는 새디즘(두 번째 새디즘)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고통을 받음으로써 쾌감을 느낀다는 매저키즘적 경험이 매개된다. 이런 식으로 프로이트의 논의에는 다음과 같은 연속성이 유지된다: <단순한 공격적 새디즘 43> ⇒ <자신에게로 역전된 새디즘 44> 즉 고통이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경험 ⇒ <매저키즘적 경험 44> 즉 고통으로부터 쾌감을 경험 ⇒ <투사와 퇴행에 의한 쾌락지향적 새디즘 44> 즉 고통에서 쾌감을 경험하는 매저키즘을 새디즘의 피해자에게 제공하고 투사하면서 다시 새디즘으로 되돌아가는 퇴행적 연결고리가 성립하는 것이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새디즘과 매저키즘이 연쇄적으로 이어지는 메카니즘으로 작용하는 것이 바로 투사와 퇴행이다. 이 기제들은 새디즘이 변이되는 전 과정 속에서 드러나고 있다. 고통을 가하는 새디스트는 자신에게 고통을 투사하고 매저키즘을 경험하면서 다시 이 경험을 피해자에게 투사하고 자신은 새디즘으로 퇴행한다. 이러한 메카니즘의 연쇄과정 속에서 결국 새디즘의 피해자는 매저키스트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전 과정을 운영하고 구현하는 새디스트로부터 피해자는 당연히 고통 속의 쾌락을 경험해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며, 또한 새디스트는 <자신이 영향을 받았던 똑같은 방식으로 쾌락의 대상을 감동시키고 있다고 상상 44>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새디스트의 피해자는 매저키스트인 것이다. 그러나 이 관점은 앞서 논의했듯이 타당성이 없었다.

(3) 변형 - <목적과 대상에 따라 성 본능들이 서로 합치거나 변형된다는 가설 44>. 본능들의 기제로서 변형에 관한 프로이트의 논의는 혼동스럽다. 그가 본능들을 커다란 두 집단(Eros/Thanatos)으로 분류했을 때, 이 두 본능 군(群)의 요소들은 직접적으로 변형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요소들의 직접적인 변형의 결과로서 서로 다른 본능의 구분이 완전히 모호해 지기 때문이다. 변형이란 직접적이고 유효적인 방식으로 발생하는 경우와 간접적으로 발생하는 경우 둘로 구분된다. 간접적 변형은 이분법적 체계 내에서 상반성이나 부정적인 매개를 통해서 발생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형태의 변형이란 언제나 매개적 기능을 갖는 이분법의 다른 항을 요구함으로써만 가능하다. 따라서 여기서는 실질적 변형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외양적이고 형식적인 양적 변형만을 취하게 된다. 그러므로 본능들의 변형가능성이 직접적인 것으로 발생한다면, 프로이트의 구분은 모호한 것이 된다. 목적과 대상에 따라 반대성향의 본능으로 역전하거나 혹은 원래 자신의 본능으로 회귀하면서 성 본능들이 서로 합치되고 변형된다는 논의는 프로이트 자신이 구분한 본능들의 제한적 변형가능성에 모순되는 결과를 낳는다. 이것은 프로이트 자신의 전체적인 체계와는 모순되거나 불일치되는 논의이며, 스스로 자신의 일관성을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본능들의 변형가능성을 이분법적 체계로 제한하고 있으며(에로스/타나토스), 이러한 제한적 변형가능성은 결국 직접적인 변형가능성이나 변형의 다양성을 배제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그래서 예를 들어 사랑과 미움이라는 본능의 요소들은 <질적으로 전혀 다른 본능들(에로스/타나토스)에 속한다는 사실을 통해 서로 직접적인 변형이 이루어진다는 가설을 완전히 부인한다. 44> 프로이트가 방어기제들을 설명하면서 아이러니나 역설 등과 같이 반대적이고 상반적인 요소의 항을 요구하는 언어 체계들을 주로 이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 투사, 반동형성 등. 따라서 그에게 새디즘과 매저키즘의 차이는 외형적이고 양적인 차이이지 실질적인 유효적 차이가 될 수 없다. 직접적 변형은 일어나지 않는다. 다만 하나의 본질과 실체로부터 외형적이고 부정적인 매개를 통한 양적 변형만이 가능하다. 또한 이것은 변태성을 <고착과 퇴행 44>의 기제로 이해하는 것과 자연스럽게 일치된다. <고착과 퇴행의 핵심적 개념은 조푸르와(Geoffroy)의 기형학(발달의 정지와 퇴보)에서 유래되어 직계를 이룬다. 조푸르와의 관점은 변형에 의한 모든 진화를 배제한다. 44> 따라서 프로이트의 설명에 따르면, 변태는 실질적인 변형으로부터 발생하는 진화론적 전개과정이 아니라, 이미 개인의 발달단계에서 잠재적으로 존재하는 한 지점으로 남아있는 시기인 것이다. 이 단계를 벗어나지 못했을 경우에는 고착의 형태로, 다시 이 단계로 되돌아갈 경우에는 퇴행의 형태로. 이런 의미에서 변태성은 생물학적 개인의 발달과정의 한 단계에 불과하다: <변태가 되기(becoming) 보다는 단지 유아기의 변태적 단계를 벗어나지 못했을 뿐이다. 44> 그러므로 <단지 가능한 유형이나 형태의 계층들이 있을 뿐이며, 이 계층들 속에서 발달이 다소 초기의 단계에서 멈추어지거나 '퇴행'이 다소 심하게 나타날 뿐 45>이라고 말하는 조프루아의 개념과 <두 가지 유형의 본능들이 서로 복잡하게 결합하여 전체적인 어떤 형태들의 계층을 이루어내며, 개인들은 이 중 어느 한 계층에서 고착되거나 퇴행한다. 45>는 프로이트의 논의가 완전히 일치한다. 이러한 식으로 프로이트는 고착과 퇴행의 단계적 변화와 발달에 따라 개인을 설명하지만, 또한 변태성을 특징 짓는 다른 부분들에서, <진화와 직접적 변형 가능성들을 가진 다형적 체계를 인정하는 듯하다 - 그러나 또한 신경계와 문화적 구성체의 영역에서는 수용되기 힘들다고 간주한다. 45>

본능들의 복합-결합과 같은 새도-매저키즘적 종합의 원리에서는 이미 보았듯이 몇 가지 특징적인 메카니즘이 발견된다: 대립적이고 상반적인 두 요소들의 필연적 관계, 또한 이 두 요소들을 포함하는 보다 상위의 종합적 실체, 그래서 이러한 실체 내의 모든 요소들의 변형가능성의 제한. 이 특징들은 상반성과 종합 그리고 제한적 변형으로 요약된다. 더욱이 전체-종합의 메카니즘에는 동일성의 본질이 내재한다. 상반적이거나 반대적인 두 요소를 제시함으로써 전개되는 논의의 결과는 언제나 맨 처음 정립된 문제로 되돌아온다. 왜냐하면 두 요소들의 기원이 동일하기 때문이며, 두 번째 제시된 요소는 언제나 맨 처음 정립된 문제로부터 설정된 하나의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이 관점에서는 모순과 통일이라는 변증법적 드라마가 작동하는데, 모순이든 통일이든 어떤 경우든지 동일성을 그 본질로 갖는다. 이와 같은 이유로 새디즘과 매저키즘을 상반적이고 반대적인 두 요소를 포함하는 하나의 실체(새도-매저키즘)로 간주하기 위해서는 고통이나 쾌감이라는 단일한 실체가 요구된다.

새디즘과 매저키즘을 새도-매저키즘적 실체 또는 <고통-쾌감 콤플렉스>로 설명하는 것은 기원의 동일성을 상정하는 것이며, 기원의 동일성을 통해 전혀 다른 두 신경장애의 메카니즘은 공통적인 하나의 물질로부터 파생된 제한적인 변형의 부산물로 환원되는 것이다. <새도-매저키즘, 복합본능 … 등은 성적활동 유형의 특이성을 간과 … 주체의 사용가능한 모든 에너지가 그의 특정한 변태성을 위해 동원된다는 사실을 간과 … 새디스트와 매저키스트는 완전히 자족적이며 개별적인 드라마를 연출 … 내적으로 외적으로 이 양자의 의사소통은 불가능 … 공통적인 리비도 물질이 여기저기 형태를 바꾸어 흘러 다니는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된다. 45> 공통적인 기원을 설정하는 분석은 언제나 개별적 대상들의 특수한 맥락을 놓치기 쉽다. 변형에 관한 논의들이 언제나 이러한 분석에서 두드러지게 등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모든 경험은 동일하지 않으며 각자 경험의 주체에 적합한 특수한 개별적 메카니즘을 갖는다. 그러나 새도-매저키즘 논의에서는 새디즘과 매저키즘의 경험을 서로 동일한 하나의 메카니즘으로 설명함으로써 이 둘의 경험은 동일한 것으로 중화된다. 왜냐하면 가학으로부터 나오는 쾌감과 고통을 통한 쾌감 두 경우 모두 동일한 주체로부터 나오는 동일한 경험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동일한 주체가 경험하는 서로 다른 쾌감의 질은 단지 하나의 원리로 설명 가능한 상반적인 효과일 뿐이다. 그러나 모든 진화과정과 변형의 메카니즘을 하나의 원리나 술어로 설명 가능한 심층적이고 공통적인 하나의 실체나 물질을 전제하는 것은 추상적인 유추에 불과하다: <새디스트의 매저키즘적 성향이 매저키스트의 그것과 같지 않으며, 매저키스트의 새디즘적 성향이 또한 그렇다. 46>

새디스트나 매저키스트가 되지 않고서는 결코 이 둘의 개별적 경험의 질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새도-매저키즘적 진단은 두 개별적 경험을 하나의 명칭으로 양화(量化)시키는 경우이다. 질적으로 전혀 다른 두 신경장애를 하나의 술어로 연결하기 위해서는 공통적인 하나의 물질이나 실체가 요구되는 것이며, 연속적인 진화의 드라마를 연출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상이한 요소들은 하나의 메카니즘과 원리 속으로 제한된다. 여기서 개별적 존재들의 질적 차이가 헐렁한 옷에 의해 덮혀지거나 강제적으로 재단된다. <두개의 다른 기관들이 서로 유사해도 반드시 그 사이에 진화론적 연관성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 연속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서로 상이한 요소들로 구성된 단일한 일련의 연속적 결과들을 연결시키면서 '진화론'에 빠져서는 안된다. … 새디즘과 매저키즘이 같은 기원을 가지며 동시에 병존한다는 생각은 근본적으로 유추에 근거할 뿐이다.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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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와 차이학은 언제나 기원의 다양성을 내포한다. 그것은 동일하다고 간주되는 하나의 존재에서조차도 그렇다. 이런 이유로 차이와 차이학을 위해서는 부지런함이 요구되는 것이다. 마조흐의 문학과 사드의 문학의 경우 많은 부분에서 서로 유사한 특징과 본질들을 공유한다. 이들 모두에게 문학은 <뒤틀린 거울로 자연과 세계를 반사하는 37∼38> 기능을 하며, 역사적 현실 속에서 구성된 모든 전통과 제도는 이들에게 부정과 파괴의 대상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이들에게 역사적 시간은 언제나 혁명적 사태들에 와서야 끝이 난다 - 사드의 경우 1789년 프랑스 혁명, 마조흐의 경우 1848년 오스트리아 제국의 혁명. 또한 이들에게 문학은 세계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역사적 과정 속에서 잠재된 폭력과 극단적 위반의 양태들을 발견하거나 되 비추는 장치이다. 아울러 이 두 작가의 작품들 속에서 쾌감을 도출하는 두 가지 방식에는 상반적이고 대칭적인 유사함을 볼 수 있다. 폭력과 악행을 행함으로써 얻어지는 쾌감과 그것들을 감내 해가며 얻어지는 쾌감간의 미묘한 관계는 경험적 사실들을 통해서 얼마든지 도출할 수 있는 도식이다. 이 두 변태성은 서로 만나기도 하며, 혹은 서로 보완적 관계를 갖는다고. 실제로 마조흐와 사드의 작품들에서는 이러한 도식을 입증해 줄만한 풍부한 예들이 나온다. 사드의 주인공들의 난폭한 행위들은 결국 매저키즘적인 방향전환을 하기도 하며, 마조흐의 주인공은 마지막에 새디즘적 경향을 보여주기도 한다(38∼39참조).

이 두 변태성은 서로 만나고 있으며 어떤 방식으로든 연결되고 있는 것이다. 새도-매저키즘의 개념은 작가들뿐 아니라 정신분석 의사들에게서도 종종 발견할 수 있는 개념이다: <새도-매저키즘적 실체를 프로이드가 발명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크레프트 에빙(Crafft-Ebing)이나 엘리스(Havelock Ellis) 그리고 페게(Fere')의 글들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38> 그러나 이러한 공분모를 통해 이 두 작가를 연결 지을 수는 없는 일이다. 이들이 연결되어 상반성이나 동일성으로 묶이기 위해서는 특별히 요구되는 관점이 선행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저항문학의 역사에서 드러난 두 작가의 삶의 형태 등과 같은 특정한 관점에 의해서만 잠시 연결될 뿐이다. 두 실체간의 보다 본질적인 파악을 위해서는 각각의 실체가 안고 있는 그들만의 기원으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으며, 이들의 상반적 연결에 대해 근본적인 회의가 요구된다. 두 변태성과 두 작가들은 차이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새도-매저키즘이라는 실체를 통해 두 변태성을 정의할 경우, 불가피하게 이 둘을 연결 지을 고리를 필요로 한다. 사실 프로이드나 여타 다른 사람들에 의해 정의된 새도-매저키즘은 변태성의 과정을 속죄나 양심 혹은 죄의식이라는 윤리적 관점에서 마련된 틀이다. 따라서 이러한 관점은 자연스럽게 쾌락과 죄의식의 상호 메카니즘을 통해 변태성을 이해하게 된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새디즘과 매저키즘은 쾌락에 대한 처벌의 과정을 통해 이 죄의식을 드러낸다. 새디즘의 악행은 곧바로 죄의식을 통해 매저키즘으로 변형되고, 매저키즘의 죄의식의 해소는 또다시 새디즘의 악행으로 변형된다는 생각이 새도-매저키즘적 실체에서 가능해 지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새디즘과 매저키즘은 서로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 상호 연결되거나 동일한 하나의 실체에서 드러나는 상이한 측면들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동일한 한 인물로부터 두 가지 변태성이 모두 존재하거나, 서로 다른 인물들은 필연적으로 상호 보완적으로 만나게 될 것이라는 추측이 나오게 된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서든 이러한 추측은 죄의식과 처벌이라는 관념의 틀 안에서만 가능해 지는 생각이며, 따라서 이것은 두 독립된 실체를 하나의 관념적 틀 속으로 환원한 경우이다. 사실 이 두 변태성은 절대로 죄의식과 처벌이라는 동기로 진행되지 않는다. 이들의 도착은, 삶이 그렇듯이, 그렇게 고상한 유희가 아니다. 두 변태성은 오히려 악행과 쾌락을 통해 구성된다고 보아야 한다. 또한 이 둘은 서로 목적과 방식, 심지어는 악행의 동기조차도 다르며, 이 둘은 독립적인 기원을 각각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매저키즘의 마지막에서 볼 수 있는 새디즘의 경향은, 처벌의 고통을 감내함으로써 수행된 죄의식의 해소가 새디스틱한 악행을 허용했다고 볼 수 있으며, 나아가서 금지된 악행의 쾌감을 인가받기 위해 매저키스트는 처벌의 고통을 예비적으로 스스로 원했다고 말할 수 있다. 즉 그는 쾌감을 위해 (예비적으로)처벌을 원하는 것이지, 쾌락에 대한 죄의식을 속죄하기 위해 처벌을 감내하는 것이 아니다: <일단 처벌과 고통이 수행되고 나면, 처벌과 고통들이 금지했던 악의 실행을 허용하고 있는 것이다. 39> 또한 새디즘의 종국에서 나타나는 매저키즘 역시 죄의식과 속죄라는 메카니즘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새디스트는 자신의 악행에 대한 죄의식과 속죄로서 마지막에 매저키즘적 고통을 감내하기 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악행을 스스로 맛봄으로써 자신의 악이 얼마나 완벽하고 성공적이었는가를 확인하는 것이다. <그것은 새디스틱한 행위의 절정이며, 자신의 영광스러운 불명예를 인가해 주는 대관식이다. 새디스트는 자신이 행했던 방식으로 다루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가 받는 고통은 궁극적인 쾌락으로 경험한다. 그것이 죄의식이나 속죄의 필요성을 만족시켜 주기 때문이 아니라, 그로 하여금 양도 불가능한 힘을 확인 시켜주거나 절대적 확신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39> 새디스트는 악행을 되돌려 받으면서 오히려 고통과 모욕과 치욕을 즐기고 있다. 따라서 매저키즘에서 나타나는 새디즘과 새디즘에서 나타나는 매저키즘은 죄의식과 속죄를 통과하면서 발생하는 상반적인 변태성으로의 변형이 아니라 오히려 원래의 변태성을 극대화하는 쾌락의 절정인 것이다.

매저키즘은 새디즘이 아니라 매저키즘적 쾌락을, 새디즘은 매저키즘이 아니라 새디즘적 쾌락을 통해 자신의 변태성을 구성한다. <이들은 각각 자신의 계열을 보다 공고하게 한다. 따라서 새디즘을 매저키즘으로, 매저키즘을 새디즘으로 환원할 수는 없다. 각각의 경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일종의 역설적 산물들로서, 매저키즘의 유머러스한 결과로 나타난 새디즘이며, 새디즘의 아이러니적 결과로 나타난 일종의 매저키즘인 것이다. 39∼40>(주1) 매저키스트는 속죄(보상)로써 새디스트로 변하며, 새디스트는 속죄하지 않는다는 조건에서 매저키즘으로 변한다. 그러나 매저키즘의 경우 속죄의 기능은 악행의 쾌감을 부정하기 보다는 쾌감으로 도달키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는 셈이다. 따라서 두 변태성의 경우 모두에서 우리는 속죄와 처벌의 매카니즘을 본질적인 요소로 간주할 수 없는 것이다.

매저키스트가 보여주는 새디즘은 새디스트의 새디즘과 동일하지 않으며, 또한 새디스트가 보여주는 매저키즘은 매저키스트의 매저키즘과 다르다. 이런 이유로 매저키스트와 새디스트는 또한 서로 상보적일 수 없다. 사실 고통을 주는 것에서 쾌감을 느끼고, 고통을 받는 것에서 쾌감을 느낀다는 점은 이들이 상호보완적이라는 주장에 결정적인 증거가 된다. 이들은 서로 어울리는 한 쌍처럼 보인다. 그러나 매저키스트가 새디스트에게 때려 달라고 요구한다면, 새디스트는 거절할 것이다. 왜냐하면 새디스트는 고통을 쾌락으로 즐기는 피해자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피해자가 자발적으로 고통을 즐긴다면, 새디스트의 입장이 난처해짐과 동시에 피해자의 고통스러운 모습을 통해 쾌감을 도출하는 새디스트로서는 자신의 목적과는 다른 상황에 처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처지는 매저키스트의 경우에서도 같다. 매저키즘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교육과 설득이라는 점뿐만 아니라, 새디스트를 교육하고 설득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넌센스이기 때문이다. 교육과 설득을 통해 그가 원하는 것은 자신의 목적에 맞는 하나의 매저키즘적 본성을 만들어 내는 일이다. 이런 이유로 매저키즘에서 가학을 하는 여성의 역할은 새디즘적 자아의 발현이 아니라, 매저키즘적 자아의 한 요소로 남아있는 일이다. <물론 여성 고문자에게서 새디스트적 성향이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 그러나 그 성향들의 역할은 결코 직접적이거나 진정한 의미로서가 아니라, 다만 그 이전의 (매저키즘적)상황들과 연관되는 한에서만 중요해 진다. 41>

가학하는 여성의 새디스틱한 면은 결코 본질적인 요소로 기능하지 않고 부수적인 요소로 기능한다. 따라서 마조흐가 새디즘의 성향을 가진 여성에게서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새디스트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한 매저키스트를 가학하는 여성이 매저키스트라는 것은 더욱 아니다. <매저키즘에서 가학하는 여성은 결코 새디스트가 될 수 없다. 그 여성은 매저키즘적 상황의 요소로 기능하며, 그 일부로서 매저키스트의 환상이 현실화되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이다. 그녀가 매저키즘적 상황에 속하는 이유는 그 여성이 보여주는 '새디즘'이 진짜 새디스트에게서 발견되는 새디즘이 아니기에 그렇다. 그녀는 매저키즘의 반영 내지는 분신이다. 41> 이것은 새디즘의 경우에도 다르지 않다. 새디즘에서 고문을 당하는 여성은 매저키스트가 아니라 새디즘적 상황의 한 요소인 것이다. 두 변태성에는 쾌감을 도출하기 위한 과정으로서, 상반적인 모습을 띠는 어떠한 요소를 필요로 한다. 매저키즘에서는 새디즘이 아니라 새디즘적 가학을, 그리고 새디즘에서는 매저키즘이 아니라 매저키즘적 고통을.

존재들의 상호보완적 관계나 새도-매저키즘과 같은 동일한 실체의 두 양면적 결합은 존재들을 결코 차이화하지 못한다. 존재들이 진정으로 결합될 수 없는 상황에 처했을 때 비로소 존재들은 환원불가능한 차이를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고문이나 학대가 피해자로 하여금 고통을 제공할 수 없거나, 고통을 통해 쾌감을 제공해 줄 고문자가 고통받는 주체의 목적과 상이한 가학을 행할 때, 이 둘은 서로 만날 수 없으며 양립될 수 없는 관계에 돌입한다. 이들은 모순적이지도 않으며, 갈등하지도 않으며, 목적이 다르며, 심지어 만날 수도 없는 것이다. 존재론적 차이의 이종구조(heterogeniety)내에서는 어떠한 기획도 - 매저키스트의 기획 혹은 새디스트의 기획 - 순조롭지 않다. 만일 새디스트와 피해자 여성이 새디즘적 상황을 연출하거나, 매저키스트와 가해자 여성이 매저키즘적 상황을 재연한다면, 이 여성들은 결코 새디스트나 매저키스트에 대해 존재론적 차이를 갖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들은 새디즘이나 매저키즘 내에 용해된 것이다. 결합과 종합과 통합의 원리는 존재들을 환원하고 용해하는 원리이다. 따라서 새도-매저키즘의 메카니즘은 새디즘 혹은 매저키즘을 하나의 실체로 환원하거나 녹여버린다. 이런 이유로 지금까지 매저키즘은 언제나 새디즘의 부수적인 하나의 결과나 효과로 간주되어 왔던 것이다. <새디즘과 매저키즘을 그 고유한 세계에서 분리하여 추상적인 실체로만 다루게 된다면 혼동이 발생 … 일단 그들을 둘러싼 고유의 환경에서 분리하여 살과 뼈를 제거하고 나면 서로 잘 들어맞는 것처럼 보이게 마련이다. 42> 베르그송의 어조로 말하자면, 새도-매저키즘의 개념은 매저키즘과 새디즘에게 너무도 헐렁한 옷인 셈이다. 따라서 서로 질적인 차이를 보이는 두 변태성은 새도-매저키즘이라는 헐렁한 옷을 입혀놓으면 하나도 다르지 않은 실체들이 된다.

변태성의 과정에서 변태성의 주체와 요소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미 언급한 두 변태성 내에서 하나의 요소로 기능하는 박해자 여성과 피해자 여성의 본질은 각각의 변태성 과정에서 주체로 기능하지 못한다. 매저키즘과 새디즘에서 주체는 매저키스트이며 새디스트이다. 따라서 이 주체가 목적으로 하는 것은 상반된 다른 변태성의 주체가 아니다. 하나의 상황에 둘 이상의 주체가 양립할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는 이런 상황을 모순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해 매저키즘이나 새디즘과 같은 변태성의 상황 내에서 모순적 갈등은 벌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매저키즘의 주체는 매저키스트이며, 박해자 여성은 매저키즘적 행위가 요구하는 특정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새디스트의 피해자가 새디스트이며, 매저키즘의 박해자 여성이 진정으로 새디스트이거나 새디스트를 가장하고 있다는 주장은 신빙성이 없다. 42>

정확히 말해, 매저키즘에서 가학하는 여성이 보여주는 새디스틱한 면은 매저키즘적 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전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그녀는 매저키즘에서 벗어나기 위해 매저키스트가 원하는 능동적 역할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더욱 냉혹하게 함으로써 매저키즘적 상황을 벗어나려 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모피를 입은 비너스』에서 완다가 보여주는 모습들 속에서 잘 볼 수 있다. 그녀는 매저키스트가 원하는 것 이상으로 새디스틱한 면을 보여주지만, 이는 매저키즘적 상황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하나의 아이러니이지 결코 새디스틱한 성향을 통해 쾌감을 즐기는 행위가 아니다. <변태성의 각 주체가 필요로 하는 것은 상반되는 변태성을 가진 '주체'가 아니라 같은 변태성을 가진 사람의 어떤 특정한 '요소'인 것이다. … 매저키즘적 상황의 박해자 여성은 진짜 새디스트도 가짜 새디스트도 아닌 다른 어떤 경우 … 근본적으로 그녀는 매저키즘에 속하지만, 주체가 아니며, 매저키즘의 상황하에서만 '고통을 부과하는' 요소를 구현 … 마조흐와 그 주인공은 계속해서 특이하고 희소성을 가진 여성적 '본성'을 찾아 헤맨다. 42∼43>(주2)

(주1) 매저키즘과 새디즘이 각각 유머와 아이러니를 통해 사유한다는 점은 뒤에서 계속 다룰 것이다. 또한 이 두 사유방식은 초자아와 제도에 대한 저항의 특수한 방식들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들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특수한 방식의 운용을 통해 매저키즘과 새디즘은 겉보기에 상반적인 변태성으로 변형되는 효과를 보이는 것이다.

(주2) 매저키즘적 주체가 현실적 상황이나 이차적 자연을 거부하고 부인함으로써 물신 혹은 부분적 대상과 이차적 자연을 선택하고 타당성을 따지는 사법적 성향을 보인다는 점은 지적한 바 있다. 매저키스트는 박해자 여성에게 매저키즘적 상황이 요구하는 하나의 역할과 요소를 부여함으로써 자신이 목적으로 하는 본질을 찾아 요소들을 횡단한다.

Posted by huun

사드가 의도하는 제도화의 망상은 관점에 따라서는 저항의 한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이 외부대상에게 행하는 저항이든 혹은 자기자신에게 되돌리는 저항이든, 새디즘적 자아에게 순수한 죽음본능의 제도화는 이차적 자연의 불완전성에 대한 불만이며 저항인 것이다. 그리고 사드의 언어에서 우리는 부정의 논증이라는 방식을 보았으며, 그 과정속에서 폭력의 가속화와 응축의 냉담성이라는 기제들을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기제들 속에서 묘사의 반복과 단조로움이라는 미적 효과들도 볼 수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매저키스트도 이러한 방식을 고수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혹은 그것과 반대적인 어떤 메커니즘을 상반된 짝으로서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매저키즘에서 볼 수 있었던 변증법과 설득 그리고 신비적 상상들 속에서 우리는 또 다른 저항의 메커니즘을 볼 수는 없을까? 사드와는 전혀 다른 또 하나의 방어기제를 도출해 낼 수는 없을까? 우리는 이에 대한 답변을 물신숭배(fetishism)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매저키즘적 자아는 새디즘의 부정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서, '거부' 혹은 '부인'이라는 매개로 저항한다. 이것은 부정의 차원과는 전혀 다른 저항의 방식을 보여준다. <거부는 아마도 부정으로도 심지어는 파괴로도 구성되지 않는 새로운 운용의 출발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 그것은 오히려 존재나 현존하는 것의 유효성 혹은 적합성(validity)을 급진적으로 검토하는 것으로 구성된다. 그것은 신념을 지연시키고 주어진 것 즉 즉자를 중화한다. 즉자적인 것을 넘고 자리 바꿈 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지평을 연다. 31>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부정은 그 자체로 아이러니컬한 면모를 띤다. 그것은 존재를 완전히 폐기하지 않으며, 살아 남는 한에서만 가능한 파괴로 운용된다. 따라서 새디스틱한 자아가 자신까지도 부정하는 상황에는 상당한 아이러니가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부정과는 다른 방식을 취하는 거부나 부인의 메커니즘에서는 이러한 아이러니를 볼 수 없다. 왜냐하면 거부와 부인에서는 존재의 유무 자체가 논의되고 있기 때문이다. 새디스트는 근원적 질문방식을 취한다. 따라서 새디즘의 존재론적 파괴에는 이미 존재의 필연을 스스로 내포하고 있다. 그에게 주어진 존재(혹은 파괴대상)는 필연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존재에 대한 근원적 질문(존재란 무엇인가?)은 존재로 부터 근본적으로 벗어나지 못한다. 이에 반해 매저키스트의 질문 방식은 새디스트의 근원성과는 다르다. 그에게 존재는 필연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오히려 매저키스트는 존재의 필연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존재가 왜 필연적인가? 그것이 가능한가? 이런 의미에서 매저키즘에서는 존재의 유효성과 적합성이 급진적으로 검토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거부의 메커니즘에 대한 예를 프로이트가 제시한 물신숭배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물신(대상물 fetish)은 여성남근의 이미지 혹은 대체물로서, 그를 통해 우리는 여성이 페니스가 없다는 주장을 부정할 수 있다. 물신숭배자가 하나의 물신(대상)을 선택하는 것은, 페니스가 없다는 (현실적)사실을 알기 전, 어렸을 때 보았던 마지막 대상물에 의해 결정된다(예로, 발에서부터 위로 점점 바라볼 때 마지막 보았던 신발). 이 대상물, 즉 이 출발지점으로 끊임없이 되돌아 가는 것은, 그로 하여금 아직 의심 속에 던져진(논쟁 중에 있는, 즉 있는가 없는가가 미심쩍은) 기관의 존재를 유효하게(확인) 만든다. 따라서 물신은 하나의 상징이 아니다. 그것은 얼어붙은, 체포된, 이차원적 이미지이며 한 장의 사진이다. 여기로 그는 반복적으로 되돌아가서 움직임의 위험한 결과(즉 현실 속에서 경험하게 되는 결과들)들을 제거하고, 탐구로부터 도출되는 해로운 발견물들을 제거하기 위해 반복적으로 되돌아 간다. 물신은 여전히 신념이 가능했던 마지막 지점이다. 31>


물신 숭배자가 실재적으로 존재하는 이차적 자연의 대상을 보게 되면, 이를 폭력의 강화 혹은 응축의 냉담성으로써 파괴하고 부정하는 메카니즘으로 일차적 자연에 도달하기 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관념 안에 상정된 물신 - 물론 이 물신은 유일한 어떤 것이 아니라, 대상에 각각 조응하는 이미지이며 이차원적 사진이다 - 으로 되돌아 간다. 물신은 이미 관념 안에 포착된 이미지로서, 물신 숭배자는 현실적 대상들 속에서 물신의 이미지를 유추하거나 조합한다. 따라서 현실적 대상으로부터 물신의 이미지를 획득하지 못할 때는 곧바로 이 이미지 속으로 되돌아간다. 이차적 자연의 현실적 대상은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 거부되는 것이다. 부정의 경우처럼 순수망상의 이데아를 이차적 자연에 제도화하려는 의도는 여기서 발생하지 않는다. 실재하는 이차적 자연은 이데아에 조응하면서 끊임없이 그 적합성과 유효성이 조회되고 점검된다. 그것이 적합한지 혹은 유효 한지를 말이다. 따라서 부인과 거부의 메커니즘은 현실적으로 실재하는 대상이나 기관을 선택하는 문제이다. 이런 이유로 물신주의자에게 물신은 여전히 남아 있는 가능성으로서 마지막 지점일 수 있는 것이다. 물신은 실재하는 세계와 관념세계 사이에 위치한 일종의 매개인 셈이다. 물신주의자는 이 중간지점을 계기로 관념세계로 올라간다.

물신주의는 다음의 세가지 기제로 나타난다. (1) 거부 (2) 방어적 중화 (3) 보호와 이상화의 중화. 물신주의자는 평면적이고 이차원적으로만 존재하고 있는 물신으로 반복적으로 되돌아 감으로써, 역으로, 현실적 원리들 즉 고정적이지 않은 이차적 자연으로부터 주어진 문제들에 대해 우선 부인하고 신념을 지연하는 효과를 보여준다. 물신주의자가 되돌아가는 평면적 신념은 긴장으로만 남아있는 이미지이지만, 이를 통해 현실적 즉자들은 효력 정지되며, 그 의미가 지연되는 효과를 드러낸다. 이것은 곧 현실의 거부이며 부인이다: <아니. 여성은 페니스를 결여하고 있지 않아! 31∼32> 부정과 부인의 차이는 현실상황을 수용하는 방식과 태도에 있다. 부정은 그 주어진 현실을 파괴하거나 변화시키려는 의도로 나타나지만, 심층(적 의도)은 언제나 대상(현실)을 존속시키는 한에서 유지된다. 그러나 부인의 과정에서 주어진 대상은 존속되는 형태로 나타나기 보다는, 효력이 정지되고 지연되며 미 결정된 상태로 중화된다. 중화는 물신주의자로 하여금 반복의 순환을 가능케 하는 미적 전개과정이다. 다시말해 물신주의자는 이차적 자연을 중화시키면서 물신으로 되돌아 가며, 물신의 확인으로부터 다시 이차적 자연을 조회하고 검토하도록 하는 왕복운동을 낳는다. 이로써 주어진 대상은 물신과의 조응과 불일치로 인해 끊임없이 그 구성에 있어서 재 배열되는 것이다. 물신주의자에게 현실적으로 주어진 대상은 왕복운동 과정에서 차이화된 것으로 지각된다. 현실적인 대상에 대한 지식에서 오는 고통의 의미를, 이상화된 물신의 이미지를 통해 교환하고 대체하면서, 주체는 끊임없이 자신을 방어하고 보호하기 위해 현실을 재조직하거나 효력을 정지시켜 버린다. 이상화된 세계로의 도약은 이런 식으로 이루어진다. 부인은 새디스트의 부정처럼 현실의 변형을 통해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미 언급했듯이 새디스트가 현실적 대상과 맺는 관계는 아이러니적이지만 - 부정은 대상의 존속을 전제하며, 따라서 새디스트는 이차적 자연과의 필연적 연관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 물신주의자가 주어진 대상과 맺는 관계는 선택적이다. 그는 거부와 부인을 통해 대상을 선택하고 골라낸다. 새디스트의 저항이 모순과 투쟁이라는 특징을 띠는 반면, 물신주의자는 움추리기와 지연 혹은 중화의 특징을 갖는다. 따라서 그에게 현실과 대면하는 모든 순간들 속에서 긴장감이 멈추지 않는다. 이 긴장감은 이상적인 것 속에서 감돈다.

물론 새디즘과 물신주의가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물신과 맺는 폭력의 과정에서 매저키즘과 차이를 갖는다는 것이다. <폭력의 두 가지 다른 유형이 있으며, 물신 자체에 대한 잠재적 폭력이 있으며, 물신의 선택과 구성과 연결 되면서만 발생하는 폭력이 있다. 32> 새디즘에서 물신은 그 자체로 부정되며, 새디스트가 이차적 자연이나 현실상황과 직접 대면하는 순간 물신은 오히려 멀리 달아나 버린다. 새디즘에서 일차적 자연은 이차적 자연의 극복이며, 그로부터 얻어지는 논증적 이성의 열매이다. 따라서 새디스트는 물신 자체 보다는 현실적이고 경험적인 이차적 자연을 주로 다룬다. 이차적 자연으로부터 물러서거나, 그것을 거부하거나, 자신의 이상 속에 숨어있으면서 긴장을 경험하지는 않는다. 이것이 새디스트에게서 물신의 의미가 이차적이며 왜곡된 방식의 의미이다: <물신주의가 새디즘에서는 이차적이고 왜곡된 의미에서만 발생한다. 그것은 거부와 지연과의 필연적 관계를 상실하며, 부정성과 부정의 완전히 다른 문맥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거기서 물신은 응축이라는 새디스트의 과정 속에서 하나의 매개가 된다. 32> 그러나 물신주의가 보여주는 거부와 지연 그리고 중화의 과정은 매저키즘과 일치한다. 매저키즘에서 이차적 자연은 이데아에 도달하기 위한 필연적 과정이 아니다. 그는 꿈 속으로 도약할 뿐이다. 물신은 이차적 도약의 매개이기 보다는 우연히 주어지는 부가물에 불과하다. 매저키즘에서 이데아는 <환타지> - 물신주의에서 선택된 물신 - 속에서 긴장된 채로 남아있다. 따라서 그는 굴욕에서도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으며, 이차적인 이익을 도출할 수 있다. 마조흐의 작품들 속에서 보여지는 서스펜스는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또한 완벽한 세계라는 이상화의 목적은 그 자체로 현실세계와의 관계를 상정한다. 그러나 매저키즘에서 이상화된 세계는 완벽하든 그렇지 않든 현실세계와는 관계를 가지지 않는다. 오히려 매저키스트는 현실세계 자체를 믿지 않는다. 그는 새디스트처럼 <완벽한 세계>를 제도화하기 위해 부정하고 파괴하며 이상화하는 것을 회의한다. 그에게 완벽한 세계란 아무 의미가 없다. 그가 오로지 집중하는 것은 <날개를 달고 꿈의 세계로 도약>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선택한 이상(물신)을 보호하고 방어하기 위해, 이를 끊임없이 위협하는 현실세계를 효력정지 시키고 지연시키는 일에만 관심을 가질 뿐이다. <그 자체로 환타지 속에서 지연되고 있는 하나의 이상을 보호하기 위해, 하나의 순수한 이상적 실재를 창조하기 위해 그가 질문하는 것은 현존하는 실재의 타당성, 적합성, 유효성이다. 매저키즘이 사법적 정신과 완벽하게 맞물리는 점이 바로 이점이다. 33>

따라서 현존하는 실재에 대한 두 가지 상이한 폭력과 도착이 있다. (1) 증명하고 예증하고 논증하는 방식으로 구성되는 부정. 그러나 또한 이러한 부정은 주어진 대상에 의존하거나 대상을 전제하면서 진행되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2) 환타지 속에서 긴장된 채로 남아있는 이상을 상상하면서, 그에 조응하는 대상을 선택하거나 거부하고 부인하는 과정. 또한 이 과정에서 대상의 적합성과 유효성이 급진적으로 검토된다.

물신주의와 매저키즘에서 보여지는 유사한 운용법칙은 실재에 대해 판단을 유보한다는 특징으로 나타나며, 따라서 실재를 미결정된 상태로 지연시키는 목적을 가지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이러한 유보와 지연의 특징은 마조흐의 예술로 하여금 긴장을 극대화하는 효과를 산출해 내고 있는 것이다. 긴장의 효과로부터 그의 예술은 신비적 관조 속에서 오히려 더욱 격렬한 외설적 효과를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이 마조흐 예술의 긴장을 통해서 볼 수 있는 역설이다. 그의 예술은 극도로 절제되어 있으면서 보다 극도로 과장하고 있는 셈이다: <마조흐의 삶과 작품에서 중요한 물신은 모피, 신발, 채찍 … 이상한 모자들 … 다양한 위장이다.『이혼한 여자』에서 … 여러 장면은 물신주의에서 발생하는 분열을 설명해 주며 그에 상응하는 이중적 '긴장'을 설명해 준다. 한편으로 주체는 실재를 알고 있지만 이 앎을 지연한다. 다른 한쪽에서 주체는 자신의 이상에 얽매여 있다. 거기에는 과학적 관찰에 대한 욕망이 있으며, 결과적으로 신비적 관조의 상태가 존재한다. 33>

긴장의 상태를 지연시키는 과정에서 매저키스트는 새로운 이상화의 단계 속으로 진입한다. 그는 이차적이고 경험적인 자연에서 볼 수 없는 이상화된 인간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망상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이차적 자연 속에서 맛볼 수 있는 기쁨들은 <가능한 오래 연기되며 따라서 거부되고 부인된다.> 이것이 바로 외설적 자극을 경험하거나 관능적 상태를 경험하기 직전에 오히려 매저키스트가 종교적 환영에 휩싸이는 이유이다. 그는 <성없는(sexless) 새로운 인간과 자신을 동일시하기 위해, 현실적 실재적 기쁨을 경험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그것을 부인할 수 있는 것이다.> 고통을 통해 쾌감을 경험한다는 매저키즘의 역설은 설명할 길 없는 성도착의 궤변이 아니다. 도착의 의미를 신비적으로 보아서는 안되며, 그것을 일종의 궤변적 일탈로 이해 해서도 안된다. 매저키스트가 쾌감을 지속적으로 지연하고, 고통을 쾌감으로 전환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의 관념에서 이데아를 가능케 하거나(물신), 이상적인 것(성없는 새로운 인간)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되돌아갈 유보조항을 상상하고 있다. 그에게 현실은 반드시 필연적일 이유가 없기 때문에, 그것을 부정함으로써 불가피하게 나타나는 실패에 대한 분노와 절망을 경험하지 않는다. 새디스트가 분노와 절망으로 현실을 부정한다면(제도화의 과정), 매저키스트는 이상적 망상으로 현실을 거부한다(이상화의 과정).

두 도착에서 우리는 반복의 두 양태를 발견할 수 있다. 하나는 강화와 응축이라는 메카니즘의 확대된 반복으로 나타나며, 다른 하나는 긴장과 관련해서 나타난다. 따라서 마조흐의 소설에서는 결정적인 순간에 화면은 정지되며, 모든 움직임들은 갑자기 <얼어붙은> 이미지로 긴장하는 것이다: <주인공은 목을 매거나, 십자가에 박히거나 교수형 당한다. 또한 고문자인 여자가 자신을 하나의 상태, 그림 혹은 사진과 동일시하는 자세를 취하면서 얼어붙기 때문이기도 하다.> 전율과 서스펜스라는 미적 효과들은 반복의 두 양태들과 관련해서 가장 격렬한 효과를 얻는다. 조심스럽게 절제되면서 점점 확대되는 폭력의 강화된 힘은 전율의 효과를 극대화하며, 움직이던 형상들과 속도들이 결정적인 순간에 취하게 되는 얼어붙음과 정지는 숨막힐 듯한 서스펜스의 심미적 효과를 최대로 감싸 안는다. 그리고 이와 같은 극단적 형태의 미적 감흥은 반복이라는 메카니즘 속에서 가장 잘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서스펜스의 미적 쾌감은 사실 마조흐의 예술에서 빼놓을 수 없는 효과들 중 하나이다. 그의 소설들 속에서 외설적 묘사들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비등한 효과들을 낼 수 있다는 사실이 이것을 입증해 주고 있다. 서스펜스에는 상당한 역설이 숨어있다. 우선 묘사들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효과를 낸다는 것뿐만 아니라, 긴장에는 매우 요란한 소음들이 편재한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래서 숨막히는 긴장 속에 가장 격렬한 운동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이며, 창백한 정지화면 속에서 보다 많은 활동들이 밑바닥으로 스며들거나 비 가시적으로 꿈틀거린다. 사실 우리가 저항방식을 설명하면서 보았듯이, 물신주의나 매저키즘은 환유를 통해 세계를 이해한다. 따라서 물신과 이상화된 인간 혹은 다른 어떤 부분대상들이 치환되고 자리 바꿈 되면서 이들의 도착이 형성된다. 이런 이유로 어떠한 대상에 대한 묘사가 정지된 후 나오게 될 연속적 화면들은 곧바로 다른 곳으로 이동하거나 급진적인 단절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효과들은 독자들에게도 일어난다. 우리는 서스펜스의 심미성을 환유와 단절이라고 규정해 볼 수 있다. 긴장의 순간은 다른 장면으로의 치환과 급진적인 이동을 더욱 효과적으로 제시한다. 얼어붙은 화면을 보면서 독자들은 곧바로 물신주의자 혹은 매저키스트로 변화되는 것이다. 긴장 속에는 매우 요란한 소음들이 편재한다. 따라서 마조흐가 외설적 묘사들을 중화하고 정지시키는 가운데서도 가장 커다란 효과를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아무도 점잖음에 대해 이렇게 거의 공격하지 않으면서 지금까지 효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또 다른 예술의 측면을 보여준다. 그는 분위기 소설의 대가이며 암시의 예술가이다. 34>

<죽음의 본능(the Death Instinct)>을 이해하고 그것을 추구하는 두 가지 다른 방식이 있다 - 이미 언급했듯이 죽음의 본능은 절대로 현실세계에서는 주어지지 않는다. 이 차이는 다음과 같은 술어들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1) 사드는 논증과 부정의 메카니즘을 통해 망상을 제도화하며, 이 과정 속에서 폭력의 강화와 응축이라는 구체적 기제들이 기능한다. 따라서 심미적 효과들은 외설적 묘사들을 통해 실현된다. (2) 마조흐는 변증법과 신비적 상상을 통해 이데아를 이해하고 망상하며, 현실세계와 이차적 자연은 그에 의해 거부되거나 부인된다. 현실세계는 따라서 중화되고 지연되며 얼어붙은 이미지로 정지된다. 여기서 긴장(서스펜스)의 심미적 효과들은 암시적 묘사들이 지배하면서 분위기를 연출한다. <새디즘과 매저키즘의 가장 기본적인 구별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사드에게서는 부정적인 것과 부정의 과정, 마조흐에게서는 거부나 부인 그리고 서스펜스의 과정. … 사드에게서는 관조적이며 분석적 방식으로 죽음의 본능을 이해하며, 마조흐는 똑같은 대상을 추구하지만 완전히 다른 방식, 즉 상상 속에서 신비적으로, 변증법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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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증과 변증법이라는 언어의 두 메카니즘은 자연스럽게 두 작가의 묘사의 차이를 도출한다. 두 경우 모두 순수 이데아의 상태를 목적으로 하지만, 사드의 경우 외설적 묘사가 반복되는 반면에 마조흐의 경우에는 외설적 묘사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미 언급했듯이 매저키스트는 고통과 굴욕 자체에서 오는 쾌감을 경험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굴욕적인 상황으로부터 "이차적인 이익"을 이끌어 내고 있으며, 이는 바로 매저키즘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27> 매저키스트의 목적은 고통이나 굴욕에 있지 않으며, 그것과는 전혀 다른 곳에 집중하고 있는 셈이다. 흔히 고통을 넘어서는 쾌감이나 굴욕을 견뎌냄으로써 획득하게 되는 자유로움이나 해방 감이 매저키스트의 쾌락을 결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와 다르다. 그는 굴욕에 처했을 때 그것을 거부하고 부인하는 방식으로 쾌감을 경험한다. 쾌감은 플라톤적 상상력으로 도출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외설적 묘사의 반복이나 노골적인 묘사의 자극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그것을 피함으로써 초월적 묘사가 암시되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직접적인 표현이나 외설적 묘사보다는 우회적인 다른 방식의 묘사가 오히려 더욱 큰 효과를 보여준다.

사드는 부정의 메카니즘으로 말하면서 자신의 망상인 순수 이데아를 실현한다. 물론 부정은 개인적 요소와 비 개인적 요소에서 다르게 나타난다. 여기서 부정의 두 수준을 목격할 수 있다. 하나는 부분적인 과정으로서, 그리고 다른 하나는 총체적인 이데아로서. 부정의 이러한 두 수준은 사드의 세계에 나타난 두 자연의 개념과 일치한다: 이차적 자연과 일차적 자연. 이차적 자연은 경험세계의 영역으로서, 인과관계와 필연의 법칙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 프로이트가 구분한 본능의 두 차원 - 에로스/타나토스 - 에서 에로스의 영역과 일치하는 이차적 자연은 따라서 쾌락원칙의 지배를 벗어날 수 없다. 물론 여기서도 법칙의 부정과 자연으로부터의 위반이 가능하지만, 언제나 그 위반은 법칙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않는 한에서만 가능하다. 따라서 죽음의 본능(Death Instinct or Thanatos)은 아직 완전히 실현되지 않는다. 여기서의 부정과 파괴와 죽음은 쾌락원칙의 지배 안에서만 가능한 제한적 파괴인 것이다. <파괴는 단지 창조와 변화의 역일 뿐이며 무질서는 또 다른 형태의 질서이고 죽음에 의한 해체는 생명의 구성과 동일시된다. 모든 곳에 부정적인 것이 스며들어 있지만 그것이 보여주는 죽음과 파괴는 단지 부분적인 과정일 뿐이다. 27> 이러한 자연 안에서 새디스트는 자신의 망상을 실현할 수 없다. 언제나 이 자연 안에서는 경제의 원리가 지배하고 있으며, 생명의 보존과 유지를 필연적 조건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여기서 절대적 악의 실현과 제도화라는 사드의 망상은 언제나 실패하게 되어 있다. 새디스트는 <완전범죄의 불가능성>을 경험한다. 이차적 자연 안에서 순수한 이데아의 실현이 불가능함을 목격한 새디스트는 실망한다. 심지어는 타인에게 부과한 고통으로부터 이끌어지는 자신의 쾌감마저도 이차적임을 알게 된다. 이차적 자연에서는 철저히 개인화된 요소들 속에 갖혀 버림에 따라 그가 실행하는 악의 차원은 절대적 순수 이데아의 수준에는 도달하지 못하는 것이다(주1). <이러한 자연에 직면할 때 새디스트는 실망 감을 감추지 못한다. 어느 것도 그를 만족시키지 못한다. … 자아-만족 메커니즘에서 부정적인 것은 긍정의 역에 의해서만 가능해 진다는 점이다. 27> 쾌락원리는 부분적 과정으로서의 부정에 의존하는 원리이다. 부정 혹은 부정적인 것은 언제나 살아남는 한에서만 요구되는 자극인 셈이다.

그러나 또 하나의 층위가 있다. 경험적 사실 속에서는 주어지지 않는 자연으로서, 이것은 관념의 수준에서만 영위가능한 <원초적 망상>이다. 일차적 자연에서는 경제적 사유가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지배권이라는 최종적 진리를 초월한다. <일차적 자연은 … 모든 통치권과 모든 법을 초월하는 순수부정의 자연이며, 창조와 개인화 혹은 보존의 필요로부터도 자유롭다. 순수부정은 기반이 불필요하며, 모든 기반을 초월한다.… 이차적 자연만이 경험의 세계를 구성한다. 부정은 다만 부정적인 것이라는 부분적 과정으로만 주어진다. 따라서 근원적 자연은 필연적으로 순수 이데아의 대상으로만 가능하다. 또한 순수부정은 망상이다; 그러나 또한 이것은 이성 자체의 망상이기도 하다. … 그것은 오히려 그가 망상의 관념을 전개하고, 이성의 특권인 과대망상을 전개 시키는데서 오는 내적 필연성이다. 27> 우리는 이와 같은 자연을 파괴적 자연 혹은 타나토스라고 말한다. 이것은 에로스와도 구분되며 쾌락원칙 내에서의 파괴본능과도 구분되는 근본적 부정이다. 여기서 죽음본능은 대문자로 표기된다: the Death Instinct. 일차적 자연에서의 부정은 부분적 과정으로서 제한적일 수 없으며, 근원적 토대의 부정을 의미한다. 이것은 창조와 긍정의 역으로서도 아니며, 경제적 체계 내의 전략으로서 부정도 아니다. 이것은 무(nothing) 그 자체이며 경제를 초월한다. 따라서 이것은 <침묵 30>으로 유지된다. 여기에는 투쟁의 원리로서 지배권을 상정하지도 않으며, 합리주의가 들어설 자리도 없다. 여기서 개인화되는 요소들은 아무 것도 없다. 유지되고 보존되어야 할 어떠한 개인이나 요소들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모든 고통은 절대적 극한 속으로 스며들면서 고통과 쾌락의 경계가 불분명해 진다. 그러나 일차적 자연이 침묵으로 유지됨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또한 모든 사물을 결정하는 기원적 토대가 된다. <모든 것이 이 침묵에 의존한다. … 우리는 이에 대해 논증과 신화의 술어들을 통해서만 말할 수 있다. 30> 이것이 새디스트가 악의 실행들 - 사드의 경우 논증 - 속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절대적 악의 제도화인 것이다.

새디스트의 망상을 통해 구성되는 일차적 자연은 그로 하여금 이차적 자연의 부정을 반복하게 해주는 근원적 동기가 된다. 왜냐하면 폭력의 대상으로서 피해자나 폭력 그 자체 심지어는 자기 자신까지도 아직 이러한 자연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의 실망은 언제나 새로운 폭력과 가학의 메커니즘을 반복하게 해주며 강화시키는 촉매로 작용하는 것이다. 절대적 악을 구체화하고 육화하기 위해서는 이차적 자연과 심지어는 자기자신까지도 부정해야 하는 것이다. 새디스트는 이차적 자연 뿐 아니라, 그것에 갇혀있는 자아 까지도 부정하는 방식으로 묘사한다. 이것이 사드의 언어에서 보여주는 부정의 두 층위이다. 그러나 파괴적 본능이 대상에 집중하면서 부정을 강화하고 반복하는 과정은 만족스러운 것이 아니다. 순수 이데아의 부정이란 그 토대까지도 파괴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대상에 집중하는 자아가 여전히 이차적 자연의 제한적 존재라면 대상의 부정이란 의미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새디스트는 순수 이데아를 실현하고 육화하기 위해 자기자신까지도 파괴하는 완전부정을 실현하고자 한다. 보존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되돌아올 이익이란 어디에도 없는 부정, 이것이 새디스트의 근원적 망상 속에서 드러나는 논증의 제도이다. 사드에게 있어서 제도화는 과장의 아이러니를 요구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일차적 자연의 부정, 즉 총체적인 부정의 가능성은 경험세계에서는 불가능하다. 이것은 순수 이데아의 세계에서만 가능한 어떤 것이다. 지금 여기에 있지도 않으며 존재하지도 않으며, 완전히 폐기되거나 부정되는 <부재하는 대상 즉 악의 개념> 그 자체, 이것은 경험세계에서는 주어지지도 주어질 수 없기 때문에 당연히 논증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이데아를 실현하기 위해 새디스트는 논증을 필요로 한다 - 반면에 매저키스트는 이데아를 논증하지 않으며 상상한다. 외설적 묘사가 새디스트에게는 강화되는 반면, 매저키스트에게는 거의 없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새디스트에게 이러한 논증은 한 번도 그를 만족시키지 못한다. 어떤 경우든 이차적 자연의 존재임을 확인할 뿐이다. 개념적 논증의 완벽함에 대해 확고한 신념을 가지면서만 가능한 이러한 부정의 진리는 매번 그로 하여금 <악의 허위>를 보여주며, 따라서 그는 분노하고 절망하는 것이다. <그가 꿈꾸고 있는 것은 범 우주적인 것이며, 비 개인적 범죄이며 … 영속적인 유효성(perpetual effective)이다. … 새디스트의 임무는 두 요소들 사이에 다리를 놓는 것이다. 즉 실질적인 것, 경험적인 것과, 자신의 마음속에서만 가능한 것, 비 실재하는 것 간의 다리. 이것은 파생적인 것과 근원적인 것 간의 다리이며, 개인적인 것과 비 개인적인 것 간의 다리이다. 28> 이런 식으로 그는 <이성의 순수망상의 이데아>를 완벽하게 전개하려는 의도를 품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성은 경험세계와 이차적 자연 속에 나타나면서 현실화(자신의 범죄가 영속적 효과를 일으키게)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주2). 새디즘적 자아는 논증이라는 형식을 통해 바로 완전부정 혹은 죽음본능(the Death Instinct)의 실현과 제도화라는 임무를 부여 받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어떻게 이러한 도약이 가능해 지는가? <이차적 자연에서 생산된 구체적이고 특정한 고통이 어떤 조건에서 일차적 자연 속에서 스스로 반향되고 재생산되는가? … 이 질문에 대한 해결이 바로, 사드의 글쓰기에서 반복과 단조로움이 의미하는 핵심적인 열쇠가 될 것이다. 28∼29>

새디스트가 자신의 영향력을 일차적 자연에까지 도달시키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부수적이며 구체적인 이차적 자연과 연관된 실행을 통과 하면서만 가능하다. 다시말해 그는 일차적 자연을 논증을 통해서 전개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논증의 과정에서 그는 이차적 자연 속에서 <부분적 귀납과정> 외에는 자신의 총체적 논증을 설명할 수 없다. 부분적 귀납과정은 이차적 자연으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부분적인 폭력의 몸짓을 강화하거나 응축할 뿐이다. 29> 강화와 응축의 형식이 새디스트의 반복 속에서 드러나는 두 개의 커다란 극점이다. 폭력의 강화 속에서 (피해자들의)고통의 강도는 더욱 격렬해 질 것이며, 폭력의 응축은 새디스트의 <냉정함>속에서 재현된다. 가해자의 냉담성과 자기통제는 열정과는 대조적인 것이며, 새디스트는 열정을 경멸한다. 따라서 그에게 악은 기쁨이나 즐거움으로 묘사되지 않으며, 다만 냉담함으로 묘사된다. <폭력은 영감이나 충동에 따라 낭비되어서는 안되며, 폭력이 주는 쾌감에 부속되어서도 안된다. 이러한 쾌감은 난봉꾼을 여전히 이차적인 자연의 상태에 머무르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폭력은 냉정함 속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응축은 바로 이 냉정함, 즉 논증적 이성의 냉정함에 의해 비로소 가능해 진다. … 물론 이러한 냉담성은 강렬한 쾌감을 제공해 준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것은 자아가 이차적인 자연에 참여하여 얻게 되는 쾌감이 아니라 반대로 자아의 내부와 외부에서 동시에 자연을 부정하는 쾌감이며, 나아가 자아 자체마저 부정하는 쾌감이다. 즉 논증적 이성의 쾌감인 것이다. 29> 새디스트의 쾌감의 지연과 완성된 쾌감으로 가기 위한 경로는 이와같이 부정이라는 개념과 연관되면서 이루어진다. 다시말해 논증적 이성이 사용하는 기제는 부정의 거리 두기와 소외에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사드에게서 보여지는 묘사의 기능은 반복과 부정의 틀 속에서 그 효과를 발휘한다. 반복에서 묘사들은 강화되며 또한 응축된다. 묘사들이 강화됨으로써 <피해자수와 고통이 증가>할 것이며 따라서 외설적 묘사와 난삽한 표현들이 효과를 발휘한다. 그러나 이것으로 새디스트의 제도화가 실현된 것이 아니다. 망상은 충족되지 않으며, 따라서 또다른 몸짓이 요구된다. 이 묘사들은 절제되어야 한다. 일차적 자연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이차적으로 주어진 자연들을 강화하고 증가시키는 극대화를 통해서만 가능한 반면, 이러한 열정으로 이차적 자연상태에 집착하는 것은 동시에 여전히 이차적 자연에 머무른 존재성을 확인시켜 줄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이차적 자연에서 고통의 강화를 보여주는 외설적 묘사들 속에서도 냉정함을 잃지 않아야 한다. 그는 열정과 자제의 이중회기를 경험하며, 이러한 과정의 반복과 묘사가 계속해서 유지되고 있다. 반복은 폭력의 강화와 응축으로 점철되고 있다. 이차적 자연과 자신까지도 부정하는 외설적 묘사들의 이러한 반복 속에서 우리는 사드의 글이 지니는 단조로움을 발견하게 된다. <논증적 기능이 묘사적 기능을 복종시키고 절제된 방식으로 묘사적 기능을 확대 응축시킨다. … 묘사는 양적으로 질적으로 세밀해야 하며, 또한 잔인한 행위와 역겨운 행위라는 두 영역을 모두 갖추어야 한다. … 역겨움과 비 순수함, 혹은 잔인성으로부터 쾌감을 갖는다는 것. … 두 경우 모두에서 논증적인 기능이 최고의 효과를 발휘하는 것은 바로 반복이 가지는 강화와 응축의 효과와 묘사의 매개가 완전하게 이루어 질 때이다. 29∼30>

(주1) 이차적 자연과 일차적 자연의 메커니즘은 다음과 같은 술어들과 같은 맥락에서 풀이해 볼 수 있다: 제한경제/일반경제, 제한적 사유/초과적 사유, 지배권/지상권, 경제/비경제,….

(주2)  매저키스트는 그러나 비 개인적 요소를 이차적 자연으로 구체화하지 않으며 오히려 이차적 자연을 거부한다. 따라서 그는 상상 속에서 이데아를 그리면서 상승한다. 새디스트가 자신의 순수관념을 논증을 통해 구체화하면서 끌어 내리려 하는 반면에(스피노자적), 매저키스트는 이차적 자연을 거부하면서 순수관념으로 상승한다(변증법적, 플라톤적). 새디스트는 망상을 현실화하고 실재적인 것으로 육화 하고자 하는 반면에, 매저키스트는 실재적인 것 이차적인 자연을 회의하며 부인하고 감각적인 것을 단계로 초월적이고 관념적인 것으로 상향하는 메커니즘을 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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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와 묘사의 기능은 동작이나 신체적 운동을 통해 확인된다. 다시말해 그 기능의 효과는 동작의 반복을 불러일으키면서 증폭된다. 사드와 마조흐의 언어는 물론 이러한 기능들의 효과들을 가지고 있으며 신체의 자극을 도모한다. 구체적인 동작 표정 혹은 행위들을 요구하거나 지시하는 요소, 그리고 이에 대한 구체적 행동과 동작에 대한 묘사들이 나오는 요소가 포르노 그라피의 전형적 틀이다. 만일 이와 같이 <명령과 외설적 묘사>가 포르노 그라피의 특징적 요소들이라면, 분명 사드와 마조흐의 언어는 포르노 그라피의 틀 안에서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사드의 작품들 속에서 중간중간에 보여지는 논증이나, 마조흐에게서 볼 수 있는 계약과 제휴들(예를 들어, 편지, 광고, 계약서들)은 포르노 그라피의 이러한 면모를 드러내고 있는 요소들이다. 논증이나 계약등은 피해자나 박해자로 하여금 구체적인 신체의 움직임을 강요하거나 요구하는 형태로 나타나며, 이러한 과정 속에서 흥분과 자극의 발생은 곧바로 기쁨과 쾌락의 결정적 요인들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말해 언어와 묘사는 구체적인 실행과 연결되면서, 동작을 강요하며 반복을 가능케 하며 소통되기 위한 기능의 효과를 최대한 발휘한다.

그러나 묘사의 기능이나 외설성의 본질은 이 두 작가들에게 엄연히 다른 방식으로 진행된다. 사드에게 명령은 논증의 형태를 띠며, 공유와 소통을 부정하거나 배제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에게 논증은 설득을 지향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지 않으며 그 자체로 폭력임을 보여주려 한다. 반면에 마조흐의 경우에는 계약과 협약을 통해 박해자(여성)로 하여금 동작의 반복과 활동을 요구한다. 이것은 사드의 경우와는 다르게 소통을 전제로 한 계약으로 이루어 진다는 점이다. 따라서 마조흐에게는 지시의 기능이 설득적인 형식으로 진행되는 것이다. 묘사의 기능에서도 이 두 작가는 서로 다르다. 사드에게 묘사는 외설적인 형태를 드러내지만, 마조흐에게는 그렇지 않다. 이러한 차이들을 본다면, 이 둘을 포르노 그라피의 기능으로서 명령과 묘사라는 단순한 기준으로 포섭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사드는 언어를 논증을 위해 사용한다. 그러나 그에게 논증은 설득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 자체가 폭력임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확실히 논증은 확신시키고 설득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사드의 논증과 증명에는 다른 어떤 것이 있다. 그에게 논증은 허울에 불과하다. 새디스트에게 설득이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드에게서 논증과 폭력의 연결고리는 그가 이성의 논증을 모방하고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다시말해 스스로 폭군이 되기 위한 수단으로서 그는 폭력적 이성의 논증을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논증이나 이성 자체가 하나의 폭력의 형식을 취하고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 그는 논증을 이용한다. 그에게 쾌감이나 논증의 결과들은 공유될 필요도 없다. 논증 자체가 폭력임을 보여주는 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 그는 폭력에 집중한다.(주2) 그러므로 새디스트적 박해자의 논증은 소통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새디스트에게 논증은 피해자와는 무관하다. 그것은 폭력이 피해자와 공유될 필요가 없는 것과 같은 종류의 무관함이다. 피해자는 논증의 증인으로서 혹은 청중으로서, 새디스트 자신의 고독이나 독특함을 확인하는 부수적 역할만을 갖는다. 새디스트의 논증은 설득이 아니다. <피해자에게 가해지는 폭력의 행위들은 논증이 증명하거나 조회하는 폭력의 고차원적 형식의 반영일 뿐이다. 이성적이고 논증적인 박해자는 자신의 고독과 독특함이라는 해석학적 순환에 빠져있다. 이점이 매저키스트적 '교육'과 다르다. 19>

새디스트의 논증적 폭력과 매저키스트의 계약적 설득의 관계를 보다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들 변태성이 구성하는 언어의 이중적 요소를 구별해야 한다: 개인적 요소/비 개인적 요소. 전자는 명령과 묘사들 속에서 박해자의 개인적 취향이나 폭력을 드러낸다. 그러나 후자는 개인적 폭력이나 특수한 묘사들 속에 안주하지 않고 보다 고차원적인 비 개인적 요소를 재현한다. <이것은 순수이성의 이데아로서 비 개인적 폭력과 동일시된다. 20> 따라서 사드의 경우 논증은  비 개인적 요소를 실현하거나 재현하는 폭력의 기제로 짜여진다. 이론적 논증이 완결된 후 이에 대한 구체적인 실행을 통해 새디스트는 자신의 이데아를 피해자의 몸짓들 속에서 구현하려 한다: <"이론적으로 보여줬으니까 … 이제 그것을 실행해 보자구." 19> 그러나 또한 사드에게 논증의 비 개인적 요소는 명령이나 묘사등과 같은 개인적 요소들을 반복하게 하는 효과를 보여주고 있다. 왜냐하면 사드는 논증과 묘사들을 통해 순수이성의 이데아를 구체적 실행들 속에서 재현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며, 순수하게 비 개인적인 요소들은 특정한 관계들 속에서만 경험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상적인 논증들로부터는 외부의 힘을 경험하지 못한다. 새디스트의 힘은 언제나 순수 이성적 논증에서 오는 힘이며, 그러나 또한 이것은 특정한 개인이나 신체들과의 관계들을 통해 구체적으로 재현된다. 이러한 아이러니 - 경험적인 것을 통해 실현되는 이상적인 것 - 가 새디스트로 하여금 반복적인 논증들의 순환을 가능케 한다: <사드에게서 스피노자와의 놀라운 친화성을 보게 된다 … 수학적 영혼으로 고취된 자연과학적, 기계주의적 접근의 시도 … 따라서 이는 끝없는 반복과 반복되는 설명들의 복수적인 양적 팽창과정과 피해자를 증가시키고, 계속해서 수많은 환원불가능한 고독한 논증들의 순환을 되풀이한다. … 순수하게 비 개인적인 요소가 그의 도착에서 보여진다. 그러나 반면에 이러한 유형의 대부분의 개인들은 힘의 감정을 특정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경험한다. 사드는 지리적 수학적 패턴을 띤다. 20>

마조흐의 경우는 이와는 다르다. 사드의 명령과 묘사가 논증적이며 제도적이며 소통을 부정하는 방식이라면, 마조흐의 그것은 설득과 교육의 형태를 띤다. 사드는 피해자의 동의나 설득을 통해 쾌감을 느끼지 않으며, 반대로 동의하지 않거나 설득당하지 않음으로부터 쾌감을 느끼지만, 마조흐의 경우는 동의와 제휴를 필요로 한다. <이것이 마조흐에게서 광고의 언어가 중요한 까닭이다. … 매저키스트는 계약을 선호하며, 새디스트는 이것을 혐오하고 파기한다. 새디스트는 제도가 필요하며, 매저키스트는 계약적 관계가 필요하다. 20> 소유와 제휴는 소통과 연결의 두 방식이다. 전자는 증명이나 논증의 활동을 요구하며, 후자는 설득과 타협이 필요하다. 그래서 전자는 과학(특히 자연과학)과 법의 형태로, 후자는 철학과 정치의 형태로 구성된다. 마조흐의 언어가 변증법적이며 플라톤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새디스트는 제도화된 소유를 통해 사고 하며, 매저키스트는 계약적 제휴나 동맹을 통해 사고 한다. … 소유는 새디스트 특유의 광기이며, 계약은 매저키스트의 광기이다. 그는 여성의 사인이 필요하다. 매저키스트는 교육자이며, 교육적 책무에 내재한 위험을 감수해야만 한다. 21>

매저키즘적 인물들의 모든 고통은 이상(the Ideal)으로 가기 위한 단계들이다. 매저키스트는 이러한 단계들을 (통과의례로서) 순서대로 밟으면서 자신의 이상주의적 쾌락에 대해 <역사적 문화적 비준을 얻으려 한다. 21> 따라서 그는 육체적 육감적 지각과 체험을 하기 전에 종교적 감정이나, 이상적 경험에 휩싸이는 것이 보통이다. 즉 물질적이며 육체적인 이차적 자연의 경험 이전에 이미 그는 비 개인적 요소들 - 평면적 이미지로만 남아있는 물신들 - 로 되돌아 간다. 이것이 물신숭배(fetishism)의 두 가지 기본적 단계이다. 그것은 물질적인 것에 대해 정신적인 것을 통해 정당화하거나 비준을 얻으려는 목적이다. <인간의 신체에서 예술작품으로의 상향, 예술작품에서 이데아로의 상향은 채찍의 그늘 아래에서 일어난다. 마조흐는 변증법적 정신으로 활동한다. 22> 매저키스트는 현실적 고통에 직면할 때 이데아로 되돌아 가는 방식으로 고통을 쾌감으로 경험한다. 즉 그는 이데아로 되돌아 감으로써 느끼는 쾌감을 현실적 고통의 거부로부터 끌어들인다. 그래서 그는 이데아로 가기 위해 고통을 원한다. 매저키스트에게 고통은 쾌감의 조건으로 기능하는 것이다.

또한 매저키스트는 폭력의 피해자 임에도 불구하고 가해자의 입을 빌어서 말한다. 그는 가해자(여성)를 교육시켜야 하며, 계약서의 이행을 위해 그녀를 설득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매저키스트가 탁월한 변증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요소이다. 마조흐의 작품들 속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역할들의 <변증법적 반전>과 <이중반복>의 테크닉들은, 이러한 변증법적 상향과 역할전이들을 강화시키는 기제들이다. <매저키즘의 주인공은 권위적인 여성에 의해 교육받고 변형되는 듯 하지만, 기본적으로 그녀를 교육시키는 것은 그이다. 그녀에게 옷을 입히고 거친말을 하게 하며, 그를 가학하도록 하는 것은 그이다. 이것은 자신도 포함해서 가해자의 입을 통해 말하고 있는 피해자이다. 변증법은 단순히 담론의 자유로운 교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와같이 입장의 전이나 치환을 의미한다. 이것은 역할과 언술의 할당에 있어서 동시에 여러 가지 차원에서의 반전과 이중반복에 의해 이루어지는 장면으로 구체화된다. 22>

우리는 마조흐와 사드의 언어를 구별하기 위해 중요한 두 가지 요소를 말했다. 어느 경우든 개인적인 요소와 비 개인적 요소가 공존하고 있으며, 이들이 이행하는 방향과 단계들의 차이에 따라 마조흐와 사드의 언어를 구분할 수 있는 것이다. 사드는 비 개인적인 순수이성의 이데아를 이차적이며 경험적인 자연과 신체에 구현하고자 하며, 마조흐는 이차적 경험적 자연을 통과하거나 고통을 거부(부인) 함으로써 이상화된 이데아로 상승하려 한다.(주2) 하향과 상향의 두 이미지가 이 둘의 언어를 구별하는 요소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두 이미지가 개인적 요소와 비 개인적 요소의 역할전환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식으로든 이 두 변태성에는 초월적 기능을 지니고 있다: <명령과 묘사의 기능은 분명 자신을 초월하여 보다 고차원적인 것으로, 개인적 요소는 자아 반영을 통해 비 개인적 요소로 방향 전환해야 한다. 23> 다시말해 자신의 언어가 한계에 부딪칠 때, 이들의 언어는 스스로 분열하면서 이 한계를 넘어서려 한다. 이런 식으로 이들의 명령과 묘사는 개인적 요소에서 비 개인적 요소로의 초월적 전환을 추구한다. 다만 사드에게 초월적 전환은 순수이성의 이데아라는 비 개인적 요소를 경험적 자연이라는 개인적 요소 위에 육화하고 재현하려는 망상으로 드러나며, 마조흐에게는 개인적 요소들을 부인하는 과정을 통해 비 개인적 이데아에 도달하려는 환영으로 드러난다. 이런 의미에서 <사드의 경우 언어의 명령적 묘사적 기능은 스스로를 초월하여 순수한 논증적 제도적 기능을 지향하며, 마조흐의 경우 변증법적 신비적 설득적 기능을 지향한다. 23>

어떤 형태로든 개인적인 요소에서 비 개인적인 요소로의 초월적인 기능들이 두 작가의 언어(명령과 묘사)에서 나타난다. 언어의 초월적 기능은 두 가지 형태를 띠고 있다. 1. 논증적, 분석적: 순수이성의 비 개인적 이데아의 제도화. 2. 설득적, 변증법적: 변증법적 정신의 비 개인적 이데아로의 승화.

(주1) 따라서 여기에는 상당한 아이러니가 있다. 뒤에서 계속 논의하겠지만 사드의 언어가 가지는 역설적 면모는 이 폭력과 관련해서 나오게 된다. 사드에게 폭력에 대한 대상집중은 이중적 효과를 띤다. 폭력이 그에게는 자신을 표현하는 수단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대상이기도 하다. 이것이 사드의 언어가 지니는 아이러니적 측면이다. 사드는 아이러니로 말함으로써 아이러닉한 효과들을 발산하고 있는 것이다. 폭군으로서 자연과 신에 대한 증오와 흉내의 아이러니에 관련한 내용은 Georges Bataille, Literature and Evil. Trans by Alastair Hamilton. London: Marion Boyars. 1997. p. 110 참조.

(주2) 앞으로 계속 논의되겠지만, 여기서 '거부'의 의미는 부정과 억압의 의미와는 다르다. 매저키스트가 고통을 거부하는 문제와 고통을 원하는 문제(즉 고통을 끌어들이는 문제)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모순이라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매저키스트의 목적은 고통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매저키스트에게 고통은 쾌감으로 가기 위한 단계인 셈이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의 문제는 앞으로 두 변태성의 쾌락의 도출방식 혹은 저항의 방식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자세히 설명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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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태성을 흔히 일탈의 일종으로 간주한다. 정상적인 성 행태로부터 벗어나서 비 정상적인 성행위를 자행하거나 강요하는 행위. 이와 같은 정의를 수반하기 위해서는 선행과제가 있다. 정상적인 것과 비 정상적인 것의 구분의 확실성.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은 예술에서 다루는 문제는 아니다. 예술은 정의이기 보다는 발견이라 해야 할 것이다. 발견과 표현이 예술 속에서 드러나는 운동이다. 그러나 예술이 정의의 활동이 아니라는 것은, 그것이 곧 정의와 분리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발견과 표현은 정의를 토대로 이루어지기도 하며, 정의를 낳기도 하기 때문이다. 들뢰즈가 매저키즘을 예술 속에서 다루는 목적은 변태성 자체를 변호하기 위함도 아니며, 변태성에 대한 정의를 위함도 아니다. 서두에서 밝히고 있듯이, 변태성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들을 차이화 함으로써, 존재의 보다 미세한 차이들을 발견하고 표현하려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이로써 들뢰즈가 매저키즘과 새디즘을 다루는 방식을 차이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차이학이란 통계적으로 그룹화된 하나의 현상 - 이것을 흔히 실체로 말하는 경우가 있으며, 또한 그렇게 인식하기도 한다 - 을 근본적 실재로 혹은 환원불가능한 존재의 연쇄고리들로 계열화하는 과정을 말하며, 이것은 차이가 나오는 선을 따라 분류하고 경계선을 가르는 작업이다. 이 책은 정신분석에서 종합과 상반성의 원리로 전체화되어 이해되고 있는 새도-매저키즘에 대한 개념을 차이화 과정 혹은 환원불가능한 존재들의 연결고리들의 단절을 분류하는 과정을 통해 새디즘과 매저키즘의 고유한 질적 차이의 메커니즘을 드러내는 작업이다. 차이학은 존재들의 힘을 긍정하는 것이다. 종합이나 상반성의 원리에 의한 전체화는 존재들의 힘을 긍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부정을 통해 존재들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증상들은 전이(轉移) 되어야만 하며, 마조흐와 반대되는 본능은 사드일 것이라는 상반성과 종합의 원리를 따르는 것이 보편화 … 새디즘과 매저키즘의 종합이라는 주제와 새도-매저키즘적 실체의 개념은 마조흐에게 커다란 불이익으로 작용 … 그의 작품이 잊혀지는 것으로 뿐 아니라, 보완성과 변증법적 종합으로 사드와의 관계를 정리하려는 불공정한 가정들 때문에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 13>

우리는 이 책에서 매저키즘과 새디즘의 환원할 수 없는 차이가 증명되고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그들은 테크닉이 다르며, 문제의식, 관심사, 경향들이 완전히 다르다. 따라서 새도-매저키즘이라는 종합적 원리의 실체는 이 둘에게 적용될 수 없다. 우리는 <새도-매저키즘으로 알려진 실체의 개념 13> 자체에 문제 제기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증후군(syndromes) 14>과 <징후(symptoms) 14>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해 진다. 의학에서는 이들을 구별하고 있는데, 후자를 가시화되는 존재들의 양상으로, 전자를 이 존재들의 기원들이 서로 모여 군집을 이루는 현상들의 장소로 분류하고 있다. 다시 말해 <징후는 어떤 질병의 존재를 보여주는 특수한 기호 혹은 신호이며, 증후군은 서로 다른 기원들로부터 제기되어 명시화되며, 다양한 문맥들 속에서 발생되는 징조들이 서로 만나고 교차하는 장소이다. 14> 서로 다른 기원들을 가진 존재들이 이질적 총계를 이루고 있는, 증후군 자체의 개념으로는 존재들의 질적 차이를 분간하기 어렵다. 추상적 개념의 오해와 오류는 이로부터 생겨난다. 심지어 오해와 오류는 마조흐와 사드의 예술을 바라보는 관점에게도 가해질 것이다. 새도-매저키즘의 관점에서 새디즘과 매저키즘을 바라보는 것은 결국 부정의 존재론을 통해 이 둘을 결정하는 메카니즘임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 차이학이 필요하다. 실재하는 것들은 차이화 되어야 한다: <새도-매저키즘은 일종의 증후군으로서, 환원불가능한 인과적 연쇄들로 쪼개져야 한다. 14>

이 둘을 차이화의 과정으로 접근해 가는 방식은 <문학적 접근방식 14>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미 새디즘과 매저키즘이라는 용어가 문학에서 나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예술은 질적인 본성들의 미묘한 차이들과 부분적 대상들의 환원불가능한 즉자적 존재성을 발견하고 표현하는 영역이기 때문이다(주1). 따라서 매저키즘과 새디즘의 차이학은 마조흐와 사드의 문학 속에서 드러난다. 그리고 이 작품들 속에서 매저키즘과 새디즘의 징후들이 어떤 방식으로 드러나고 있으며, 또한 어떤 계열들을 통해 서로 차이화되고 있는지 분명해 질 것이다. 차이학은 두 영역을 비판한다. 하나는 정신분석이며, 다른 하나는 부정과 상반성이라는 추상적 개념화이다. 물론 전자는 후자의 방식으로 매저키즘과 새디즘을 전체화하여 하나의 실체(새도-매저키즘)로 종합한다. 이 책 전체를 통해 우리는 전체화의 메카니즘이 차이학으로 치환되는 과정들을 보게 될 것이다. 각 장들 여기저기서 혹은 각 문단들 여기저기서 매저키즘과 새디즘은 서로 소통하지 않으며, 서로 다른 기원들을 가진 독립적 존재로서 분리되고 있음을 다양한 관점들 속에서 확인하게 될 것이다. <비평적(문학적 의미에서)관점과 임상의학적 관점은 상호 배우는 관계로 진입해야 한다. 증후학(symptomatology)은 언제나 예술의 문제이다; 새디즘과 매저키즘의 의학적 특수성들은 사드와 마조흐의 특별한 문학적 가치들과 뗄 수 없다. 14>

차이학과 증후학은 서로 보완적 관계에 있다. 하나는 특이성들의 발견이라는 측면에서 그리고 하나는 이 특이성들의 재 집단화를 도모한다는 측면에서이다. 그래서 차이학의 진보는 곧 보다 세련된 증후학의 가능성을 의미한다. 우리가 만일 예술을 다양한 질적 차이들의 육화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곧 작품 속에서 특이성들이 어떤 모양새들로 위치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문제인 것이다. 특이성은 환원불가능한 질적차이를 말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은 언제나 단수이며 결코 복수화된 전체로 불리지 않는다. 예술에서 복수성이란 단수들의 복수이지 복수들 그 자체가 아닌 것이다. 동일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예술에서 반복이 결코 반복이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우리는 또 하나의 위험, 오히려 동일한 것에 대한 잘못된 생각보다도 더 치명적인 위험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그것은 동일화의 또 다른 얼굴임에도 불구하고 동일함을 거부하거나 부정하면서 우리의 게으름을 합법적으로 인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서로 동일하지 않음을 발견하거나 주장함을 통해 서로 동일한 것임을 증명하는 방식이다.(플라톤의 아이러니가 이에 해당된다) 그래서 사드와 마조흐의 상호보완적 관계(새도-매저키즘)라는 상반성과 종합의 원리는, 이 두 병리학적 증상들을 동일한 하나의 실체가 갈라진 두 측면으로 간주하려는 위험을 안고 있는 것이다.

    <…나치즘과 사드의 관계에 관한 이론에서, 바타유는 사드의 언어가 역설적으로 피해자의 언어라고 말한다. 피해자만이 고통을 묘사할 수 있으며; 박해자는 제도화된 질서와 힘이라는 위선적인 언어를 사용한다. … "박해자는 권위의 언어를 사용, 침묵하며, 속임수를 묵과하며 … 그러나 사드는 박해자와는 반대적인 태도… 속임수를 거부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태도를 실제 삶에서는 침묵만을 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에게 돌렸으며, 그들을 이용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모순적인 언급을 하도록 했다." 그러면 피해자는 박해자의 언어로 말한다는 이유로 마조흐의 언어도 역설적인가?17>

상반성의 종합원리는 단 한 번의 분석으로 충족된다. 그래서 사드의 언어를 정립하고 나면 그와 상반되는 마조흐의 언어가 이미 정립된 셈이다. 고통에 대한 묘사에는 필연적으로 고통이 수반된다는 역설이 마조흐의 언어에도 동일한 방식으로 적용된다면 - 사드의 경우 가해자는 피해자의 언어로 그리고 마조흐의 경우 피해자는 가해자의 언어로 - 서로 상반된 차이로 연결된 사드와 마조흐는 양적관계로 축소된다. 다시말해 이 둘은 양화된 차이를 띠면서 표정만 다른 동일한 얼굴을 보여주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방식은 증상의 분석에는 적합하지 않다. 왜냐하면 만일 이러한 식으로 두 변태성을 정의하고 명명하게 된다면, 두 변태성에 대한 관점이 달라질 것이며, 따라서 자연스럽게 치료는 전혀 엉뚱한 방식으로 진행될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 특정한 시기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던 질병의 증상들은 역사적 사회적 원인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증상들의 분류방식과 그것들을 차이화하는 관점들에서도 원인이 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역병과 나병이 과거에 보다 보편적이었던 것은 … 지금은 따로따로 분류된 질병의 다양한 유형들을 집단화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16>

따라서 차이학과 증후학은 차이를 양적으로 구별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엇으로도 환원할 수 없는 단절의 순간을 포착함으로써 실질적 차이들을 발견하고 종합하는 문제와 연관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이들은 예술의 문제와 분리될 수 없다. 사드와 마조흐 혹은 새디즘과 매저키즘은 정신분석적 구조의 문제이기 보다는 예술의 문제이다. 이 두 증상들과 징후들은 작품들 속에서 판별되어야 한다. 그랬을 때 비로소 상반성의 종합을 통한 양화에서는 볼 수 없었던 질적차이들의 긍정의 문제가 제대로 제기될 수 있는 것이다. 분석과 통찰은 부지런함을 요구한다. 사드와 마조흐를 말하기 위해서는, 사드를 통해 마조흐를 말하거나 혹은 그 반대를 말함으로써는 충분하지 못하다. 우리는 이 둘 모두를 말해야 한다. 시기적으로도 스타일에서도 전혀 다른 이 두 작가와 이들의 변태성에 대해 막연한 종합의 원리로 연결 지으려는 시도는 언제나 배후에 또 다른 정치가 장악하고 있다. 마조흐가 사드에 비해 적절한 대우를 받지 못했던 것은, 이 둘의 관계를 하나의 실체 속에 가두어 두거나 혹은 다른 하나를 통해 나머지를 판단하는 종합과 대칭의 원리에 있었던 것이다. 이 두 변태성과 두 작가를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최소한 두 가지의 기원을 모두 다루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 둘은 서로 소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차이학은 비교 가능성을 곧바로 종합과 대칭의 원리 속으로 용해하지 않는다.


   (주1)
환원불가능한 즉자적 존재성은 존재들의 질적 차이와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 질적 차이로부터 즉자적 존재성이 결정되기 때문이며, 즉자적 존재성이 또한 질적 차이를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차이는 간단히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부정(negation)의 결정에 의한 차이이며, 다른 하나는 긍정의 차이이다. 부정의 차이는 존재성이 외부 즉 타자로부터 결정되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소쉬르의 기호학에서는 음소들의 결정이 각 음소 자체에서 구성되지 않고 다른 음소와의 차이(부정)에 의해 결정된다. 즉 존재성은 타자와의 차이에 의해 획득된다. 그러나 긍정의 차이는 이와 다르다. 그것은 외부적 타자와의 관계에서 결정되지 않는, 존재 그 자체 내에서 스스로 자신을 감싸고 펼지는 발생적 차이 즉 표현(expression)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존재는 스스로 분리되고 타자가 된다. 이것은 존재의 복수성을 의미하며 이 복수성으로부터 존재성이 드러난다. 이와 같은 차이의 문제는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의 틀을 통해 정립된 것이기도 하지만, 좀더 심오한 분석과 설명이 필요하다. 이에 대해서는 계속 논의할 것이다. 들뢰즈는 예술기호들을 통해 존재들의 질적 차이들을 감싸고 펼치는 차이학의 메카니즘을 『프루스트와 기호들』에서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어, 이 책 여기저기에서 동성애와 자웅동체의 존재들은 서로가 발산하는 기호들을 통해 소통한다. 그러나 이들의 소통은 전체화되고 통계화된 개인을 대상으로 하지 않으며, 이 개인들이 내뿜는 기호들의 부분적 대상들 속으로 향한다. 이러한 메카니즘은 예술에서 가능하다. 예술에서 스타일이 중요해 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스타일은 질적차이를 복수적으로 육화하는 일종의 통로인 셈이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논의는 『프루스트와 기호들』, 서동욱 역, 민음사, 1997. 을 참고. 특히 이 책 pp. 69∼85를 참고.

◆ 이 글은 다음의 자료를 재구성하였음:
Deleuze, Gilles. Masochism: Coldness and Cruelty. Trans by Jean McNeil. New York: Zone Books,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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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venthletter



Temper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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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os



Parmenides



Phaedo



Phaedrus



Philebus



Protagoras



Republ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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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atylus



Critias



Crito



Epinomis



Euthydemos



Gorgias



Hippi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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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nexenus



Meno



Alcibiades1



Alcibiades2



Apology1



Apology2



Cleitoph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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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dicus



Ion



Laches or Courages



Laws



Letters



Lovers



Lysis or friendsh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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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만의 <베니스에서의 죽음>에 관한 한 논문이다. 제목은 "The Perceiver Perceived: Unifying Reason and Instinct in Thomas Mann's Death in Venice"

토마스 만의 저 작품은 고전주의적 세계 속에 내재한 낭만주의적 본성에 대한 놀라운 깨달음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이탈리아의 영화감독 Luccino Visconti가 동명 타이틀로 영화로도 만들었다. 난 그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데, 필요하신 분은 연락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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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간의 내면은 웃음이나 폭소와 같은 비 논리적 표현에 의해 파괴적 계기를 갖는다. 자아의 현실원칙 아래에 구조화된 내면성의 질서들은 인간 본성의 극단적 형태의 분출을 통해 확립된 질서가 파괴되고 새로운 질서로 나아가는 것이다. 울음이나 분노 열정 등과 마찬가지로 웃음과 폭소는 한편으로는 파괴적 본질이 있지만, 다른 한편에는 형성적 힘이 있다. 이런 의미에서 파괴적 본성과 생산적 힘이라는 두 극단적 계기가 동시적으로 공존하는 웃음과 폭소는 일종의 변태성(perversity)의 징후라고 할 수 있다. 존재의 의미와 본질에 집중하기보다는 새로운 것이 어떻게 발생하는가에 관심을 두었던 베르그송(H. Bergson)은 웃음이라는 변태성을 선택하여 이 과정을 논의했으며, 이와 같은 맥락에서 바흐친(M. Bakhtin)은 소설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웃음에 대한 짧은 견해를 언급한다. 바흐친의 경우 소설은 특정한 양식으로 정리된 장르이기보다는 무정형적 특성으로서 구 장르의 파괴와 새로운 장르의 생산이 가능해지는 계기로서 논의된다. 그렇다면 확립된 질서에 의해 구조화된 내면성을 파괴하는 계기로서 비논리적인 웃음의 열정과 변태성 속에 내재하는 일반적 구조와 법칙은 없는 것일까? 있다면 그것은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까? 이것이 이 글이 질문하는 바이다. 따라서 이 글은 표면적으로는 웃음과 그것의 발생적 구조 또는 효과에 관한 논의이지만, 보다 심층적으로는 파괴적 계기와 생산적 계기를 동시에 갖춘 잠재태로서 변태성의 일반적 구조에 관한 논의라고 할 수 있다.


2.

희극성에 관한 독특한 한 논문에서, 베르그송은 웃음에 관계하는 몇 가지 요소들을 제시했는데, 이에 따르면 웃음은 자아의 반성적 기제로서(웃음은 반성으로부터 발생하기도 하며 또한 반성하게 한다), 그리고 무감동(insensibilite')으로부터 환기되는 효과로서, 그리고 사회적 양태로서 공범의식(웃음은 일정한 사회적 코드의 규칙을 따라야 한다)을 갖는 등 여러 가지 요소들로 구성된다. 그런데 이 구성 요소들 중 우리의 관심을 끄는 대목은, 웃음이 무감동으로부터 출현한다는 점이다.


베르그송은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웃음에 통상 수반되는 무감동에 주의를 환기해야 한다. . . . 무관심은 희극성을 감지할 수 있는 천연의 장소이다. 웃음에서 감정보다 더 큰 적(敵)은 없다. . . . 감수성이 예민하고, 삶과 자신을 일치시키면, 희극성이 사라진다. . . . 공감의 최대화는 모든 것을 중요하게 여기게 하며, 모든 것이 준엄한 색채로 보이며, . . . 무관심한 관객의 입장으로 삶을 보면 . . . 모든 것이 희극적이다. . . . 장중함으로부터 익살스러운 것으로의 이행 . . . 희극성은 순수한 지성에 호소 . . ."(베르그송 14).


무관심은 자아가 대상에 대해 혹은 자기 자신에 대해 갖는 거리(distance)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내적 거리이기도 하며 외적인 거리이다. 따라서 희극성은 자아와 관련된 의식과 지성에서 나오기는 하지만, 궁극적으로 그것은 자기 반성적인 거리를 취함을 의미한다. 웃음은 한마디로 말해 자아가 자기자신(혹은 대상)으로부터 멀어지면서 가능해진다.


베르그송이 웃음의 구조를 정식화하면서 한결같이 두 차원의 존재양식(기계적인 것/영혼적인 것, 경직된 것/유연한 것, 반복적인 것/변화하는 것, 지속/물질, 질료/형상 등)을 구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반복에 의해 뻣뻣해진 육체의 경직성과 유연성을 요구하는 상황의 불일치의 경우(17), 곱사등이처럼 신체의 고질이 되어 습관화된 모양과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시선의 경우(28), 감지되기 힘든 움직임을 파악하여 확대함으로써 "형태의 표면적인 조화 아래에 숨겨져 있는 물질의 깊은 반항을 간파해 내고 . . . 여러 형태의 부조화와 변형들을 현실화하는" 풍자화가의 경우(30), 옷과 몸의 부자연스러운 조화 아래에 잠재해 있는 딱딱한 옷과 유연한 신체의 불일치와 대조(39), 움직임과 변화를 계속하면서 유연함을 추구하는 사회와 기존 질서의 판에 박힌 상투적 의례들 간의 충돌과 단절의 경우(44) 등의 예들은 모두가 질료적인 것과 형식적인 것의 불일치, 그리고 유연한 것과 경직된 것의 조화롭지 않음에서 비롯되는 웃음의 근거들이다(주1). 그리고 웃음을 유발하는 이 불일치와 부조화의 근간에는 자아가 세계로부터 거리를 두거나, 자신으로부터 거리를 두면서 분열된 양상을 띠게 됨을 보게 된다.


3.

베르그송의 논의에서 보게 된 두 차원의 존재양식으로 구성된 웃음의 구조를 종합해 보면 심층과 표층이라는 범주로 요약할 수 있다. 심층은 물질의 깊은 심연에서 정체되어 하나의 구조와 본질을 이루고 있는 반면, 표층은 물질의 표면에서 우연적이고 유동적인 현상을 이루고 있다. 베르그송은 이와 같은 존재의 두 차원을 정신과 물질로 치환해서 이해한다. 구조와 본질을 이루는 심층은 주관적 관념의 양태이며, 우연적 현상을 이루는 표층은 물질의 양태인 셈이다(물론 이 둘의 대당 항을 바꾸어서 묘사하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따라서 한 편에는 시간이 정지되어 규칙적인 패턴의 반복이 있으며, 다른 한편에는 끊임없이 흐르며 매 순간 차이나는 지속(duration)이 있다. 이들은 시간의 두 차원으로서, 전자의 경우 주관적 형식의 범주로서, 후자의 경우 물질의 양태로서 시간을 의미한다. 따라서 사물들은 주관적 관념의 형식에 의해 공간적 범주에 고착되기도 하며(뻣뻣이 경화되어 반복적인 패턴을 이루는 것들은 운동의 형식이 공간화된 시간에 고착된 예이다), 물질의 양태로서 변화하는 경험적 시간 속에서 무정형적 성질을 띠기도 하는 것이다(이때에 시간은 변화하는 상황에 의해 체험된 시간이다). 심리적 측면에서 볼 때 심층과 표층의 두 분리된 시간은, 심층의 경우 의도되거나 기억된 내용을 이루며, 표층의 경우 주체의 의도와 기억과는 단절되어 물질의 내용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위에서 언급한 두 존재양식의 불일치에서 비롯되는 웃음은 주관적 관념과 물질의 지속간에 일어나는 충돌과 관계가 깊다. 기계적으로 뻣뻣하게 경화되어 습관화된 외양과 몸짓 등이, 그 반대적인 것으로서 유연하고 자유로운 운동이나 변형과 부딪치면서 발생하는 부자연스러움은 어느 것이든지 우리로 하여금 웃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정신과 물질의 독특한 관계가 출현한다. 우리는 흔히 정신과 물질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정신적인 것은 생명이 없는 물질과는 연결될 수 없다고 믿는다. 자유로운 정신과 그렇지 않은 물질의 분리된 관계는 우리의 관념이 고안해낸 기본적인 이분법적 구조이다. 그러다 보니 둘로 분할 된 두 차원의 존재양식은 안정적 구조 속에 자리를 잡고 각각 자연스러운 영역에 위치하게 된 셈이다. 분리된 관계에 대한 생각 때문에 정신과 사물은 서로를 침해하지 않고 자신만의 고유한 영역을 유지하면서 안정된 구조에 고착된다. 그런데 웃음이 발생하는 순간 이와 같은 안정된 구조는 즉시 파괴되어 버린다. 오히려 정신과 물질이 분리되어 안정된 구조가 파괴되면서 웃음이 발생한다고 말할 수 있다.


두 양식의 충돌로부터 발생하는 부자연스러움은 우리가 믿고 있거나 의도하고 있는 안정된 구조가 파괴되었음을 알리는 신호인 것이다. 분리되어 있다고 믿었던 정신과 물질 혹은 생명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의 단절된 관계가 파괴되면서 웃음이 나온다. 다시 말해 웃음은 우리가 믿고 있었던 관념(정신과 물질의 분리된 관계)이 그것에 반(反)하는 이질적인 양태(부조화로부터 나오는 우스꽝스러움)에 의해 도전을 받으면서 나오는 것이다. 좀 더 나아가 우리의 신념은 부지불식간에 물질의 변화와 변형으로부터 파괴되면서, 한편으로는 웃음을 통해 새로운 계기를 긍정하게 되는 계기를 맞게 된다. 의도된 것이 뒤집혀 지거나 우연한 파격(solecism)에 의해 웃음이 발생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물질은 우리의 사유에 의해 조화로운 질서를 띠게 된다. 주체의 이상과 신념은 무질서한 물질의 세계에 특정한 형식을 부여하면서 의미를 생산한다. 그러나 이 형식이 특정한 계기를 통해 물질의 반항과 충돌하게 되는데, 이 때에 우리는 정신과 물질의 불일치와 부조화를 목격하게 되는 것이다. 이 부조화의 순간이 바로 정신의 반성적 계기이다. 반성적 계기를 통해 정신은 세계에 부여하였던 주관적 형식의 실패와 파괴를 경험한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볼 때 주체의 역사는 이상적 망상과 이 망상의 파괴라는 패턴이 진행되면서 자아와 세계와의 관계가 여러 다양한 형태로 증식되거나 변형된다.


이와 같은 두 계기들이 나타났다가 파괴되는 과정의 사이사이에 바로 반성적 계기들이 출현하는 것인데, 우리가 쉽게 알 수 있는 반성적 계기의 두 가지 경우가 아이러니와 유머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 두 반성적 기제로서 아이러니와 유머는 서로 유사한 발생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아이러니와 유머를 자세히 관찰해보면 언제나 심층적인 것(신념, 의도, 이상 등)과 표층적인 것(물질, 현실, 현상, 리얼리티 등)의 단면화된 불일치를 보게 된다(주2). 따라서 문제는 주체의 관념에서 일어나는 망상과 망상의 실패를 경험하는 반복적인 패턴과 이 연속적 패턴의 단절의 순간에 있다. 웃음이 유발되는 조건으로서 반성적 계기는 이상과 신념에 도취된 자아가 자신으로부터 단절하는 순간에 있는 것이다. 이때에 정신은 자신으로부터 거리를 필요로 한다. 웃음이 유발되는 구조적 조건으로서 정신과 물질의 불일치 관계를 가능케 하는 정신적 조건이 바로 이 거리이다.


현상들이 불일치하거나 조화롭지 않은 면모를 보면서 그것의 우스꽝스러움을 간파해 내고 웃는다는 것은, 그 현상들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음을 뜻한다. 왜냐하면 서로 모순적이고 대립적인 두 양태 모두를 종합적으로 파악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웃음을 아는 존재는 자아를(혹은 자아가 바라보는 대상은 물론이고) 저 편에서 볼 줄 아는 존재이다. 예술에서 감정이입은 거리를 최소화함으로써 자아가 획득하는 지고한 감정의 나르시스적 순화인 반면에, 웃음은 거리의 최대화를 통해 대상을 포함해서 자아가 자신으로부터 비판적으로 결별하는 통찰이다.


4.

그런데 우리는 소설에 관한 바흐친의 매우 긴 에세이에서, 웃음에 대해 베르그송과는 전혀 다른 논의를 보게 된다. 여기에 그 긴 인용문을 한번 옮겨보자:

    ". . . 이 장르[소설]들에서 웃음이 유발되는 기원은 거리를 없애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특별한 의미에 있다: 이들은 민중적인(대중적 웃음) 것으로부터 발생한다. 그것은 정확히 말해 서사시적인 것을 파괴하는 웃음이며, 모든 위계적인 거리(거리를 둠으로써 고착시키기)를 파괴하는 웃음이다. 하나의 주제가 거리를 갖는 이미지로 등장하면 웃을 수가 없다; 웃기려면, 가까워져야 한다. 우리를 웃게 하는 모든 것은 우리 옆에 가까운 곳에 있어야 하며, 모든 희극적인 창작물들은 최대한 근접한 지역 내에 있어야 한다. 웃음은 대상을 가깝게 만들고, 인위적이지 않은 접촉의 지대로 끌어들이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거기서 우리는 그 대상의 모든 면을 친근하게 만지작거릴 수 있으며, 앞뒤로 뒤집어 볼 수도 있으며, 위 아래로 벗겨보기도 하며, 외부의 껍데기를 열어볼 수도, 중심을 볼 수도, 의심을 해볼 수도, 거리를 둘 수도, 외면할 수도, 발가벗길 수도, 노출시켜 볼 수도, 자유롭게 검토하고 실험해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웃음은 대상과 세계에 대한 공포와 신성함을 없앤다. . . . 웃음은 공포를 없애기 위해 필요한 '깔보기'의 가장 중요한 요인이다. 이것이 없다면 아마도 세계를 있는 그대로(realistically) 접근하기 어려울 것이다. . . . 웃음은 대상을 탐색하고 실험해 볼 수 있도록(과학적이든 예술적이든), 그리고 자유롭게 실제로 다루어 볼 수 있다는 환상을 갖도록, 두려움이 없어진 가까운 곳에 대상을 데려다 준다. 웃음과 대중적인 언어를 통해 세계와 친근해지게 된다는 점이 가장 중요하다. 이것이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는 필수적인 단계이다. 그 때문에 아마도 또한 과학적 지식을 가질 수 있으며 생생한 예술적 창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 . ."(Bakhtin 23).


바흐친에 따르면 '거리'는 코믹한 문학에 방해가 된다. 베르그송과 비교해 볼 때 이 논의는 거리에 대한 전혀 다른 시각이 아닐 수 없다. 바흐친이 의미하는 문학에 있어 거리는, 대상을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게 하는 조건이 아니라, 그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상정함으로써, 그것으로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 주관적이고 심미적인 거리이다. 말하자면 이것은 전통과 후광(Aura)을 만들어내는 거리이다. 이러한 거리는 시간을 "절대적인 과거(absolute past)"로 고착시키고, 세계가 현재화되는 것을 거부한다. 진지하고 숭고한 예술(장르로서 양식화된 예술)의 심층에는 언제나 근접할 수 없는 시간으로서 이 절대적 과거가 스며들어 있으며, 개입할 수 없는 위계적 구조로서 작품의 요소들을 지배하고 있는 거리가 내재한다.


서사시나 비극의 심층을 이루는 충동이 언제나 기억(전통이나 영웅에 대한)으로 구성되고, 이들의 심층적 언어가 죽음의 이미지로 짜여진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예술 안에는 웃음이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예술에서 자아와 세계는 분리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자아 자체도 분열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서사시적 의미에서 기억은 자아의 환상 안으로 시간을 끌어들이는 기능을 갖는다. 기억 속에서 과거의 시간들은 현재적 의미로만 구성되고, 주체는 기억을 통해 과거의 시간을 현재적 신념과 기대 속에 재구성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자아는 시간과 관련해 자기 동일적 본성을 띠게 된다. 자아의 자기 동일성이 가장 고양된 형태로 나타나는 시간은 신에 대한 신념일 것이다. 자아에게 있어 신은 가장 먼 존재이다.


5.

이런 의미에서 바흐친의 웃음에 대한 논의는 베르그송의 그것보다 더 나아간 듯 보인다. 그의 논의에서는 웃음의 순수 구조뿐 아니라, 그로부터 파생되는 효과와 웃음의 결과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웃음과 관계하는 거리에 대한 논의는 베르그송과 견해를 달리하면서 그렇게 나아간 듯 보인다. 우선 그에게 있어 웃음의 발생적 기원으로서, 그리고 친숙함과 민중적인 웃음을 가능케 하는, 위계적 거리의 파괴는 고착된 시간(과거)을 살아있는 현재로 끌어들이는 과정을 의미한다. 위계적 거리란 자아와 세계의 단절과 자아 자신의 분열된 양상 속에서 보게 되는 상대적이고 공간화된 거리이기보다는 도달할 수 없는 불가역적인 시간이다. 이런 의미에서 절대적 과거란 주체뿐 아니라 어느 것도 침범할 수 없는 심층적 시간을 말한다.


따라서 바흐친에게 거리를 제거하는 문제는, 심층과 표층이라는 위계적 질서를 새로운 동 시간적 평면 위에 위치시킴으로써, 더렵혀지지 않은 순수한 시간으로서 심층을 다른 이질적인 표층들과 동일한 수준에서 다루고자 하는 노력의 산물인 것이다. 거리가 제거된 지형 위에서 순수한 심층은 어디에도 없으며, 이것은 다른 이질적인 목소리들에 의해 손때가 묻는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은 철학적 사유의 논의이기보다는 정치적 힘의 관계에 더 가깝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주체와 외부세계의 관계에서 빚어지는 웃음의 발생적 구조의 문제보다는, 위계적 거리가 제거됨으로써 발생하는 효과로서 웃음에 관한 논의가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그의 논의는 웃음이 왜 발생하는가 혹은 웃음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하는 본원적인 질문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듯이 보인다. 오히려 웃음에 관한 그의 논의는 그것이 무엇을 발생케 하는가 혹은 어떠한 의미를 생산하는가에 집중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글에서는 주체가 세계와 가지게 되는 망상적 관계에 대한 논의라든지, 내면성을 회복하는 과정으로서 상실된 고향의 주제(루카치의 경우처럼)를 찾기가 힘들다.


예술에서 웃음이 나오려면 모든 예술적 요소들이 동 시간적 지대에 집결되어야 한다. 즉 시간적 배경뿐 아니라 작품이 형상화되기 위해 참여하고 있는 인물들, 언어, 스타일 등 모든 예술적 요소들은 현재화되면서 우리와 친숙한 주제가 되어야 한다. 접근할 수도 개입할 수도 없었던 절대적 시간으로서 전통이나 과거를 현재 속에 위치시킴으로서, 진지함이나 권위와 같은 위계적 거리들이 파괴되면서, 비로소 웃음이 가능해 진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웃음은 이러한 거리들을 파괴한다. 그런 식으로 웃음은 심층 깊숙한 곳에 은폐된 시간과 공간을 밝은 표면으로 끄집어낸다. 들뢰즈(G. Deleuze)는 유머를 "표층의 예술"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모든 사물을(심지어는 정신까지도) 동일한 평면 위에 끌어올림으로써, 그리고 이들을 가까운 곳에 위치시킴으로써, 이제 그들에 대한 신비적인 공포가 사라지고 그들의 신성함이 제거된다. 접근할 수 없었던 가장 먼 존재로서 신은, 이제 두려운 존재로서 그 신성함이 사라지고 살아있는 현재의 이차적 자연 안으로 끌어내려지면서 표면화된다.


6.

거리에 관해 베르그송과 바흐친은 서로 다른 주장을 하고 있는 듯 했다. 그것은 웃음과 관계하는 거리의 의미에 관한 해석에 있었다. 베르그송의 경우 웃음은 거리를 필요로 한다. 열정과 신념이 강렬한 존재는 웃을 수 없다. 반면 바흐친의 경우 웃음은 거리가 사라짐으로써 발생하고 동시에 이 거리를 제거한다. 웃음과 거리에 대한 모순적인 이 두 관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웃음과 관련된 거리의 문제에 대해 베르그송과 바흐친은 다음과 같은 차이를 갖는다: 1) 베르그송의 경우 거리는 웃음을 유발하는 발생적 구조이다. 이 구조는 웃음의 조건이기도 하며 요인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에게 거리는 심층적 관념에 몰입되어 사물을 이해하는 환영으로부터 벗어나 반성적이고 비판적인 계기를 가능케 하는 정신적 조건으로서 상대적 거리를 의미한다. 2) 바흐친의 경우 웃음과 관련하여 거리의 문제는 좀 복잡한데, 그것은 우선 웃음을 유발하는 발생적 구조의 효과와 관련되며, 다음으로 웃음의 결과와 관련된다. 물론 두 경우 모두에서 거리는 제거된다. 여기서 웃음이 발생하기 위해 제거되어야 할 거리는 접근할 수 없는 순수한 심층으로서 절대적 거리를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웃음의 발생적 구조의 효과에 의해 거리가 사라지며, 동시에 웃음의 결과로 인해 거리가 제거된다. 베르그송과 마찬가지로 심층적인 것과 표층적인 것이 동 시간적 지형 위에 단면화됨으로써 심층의 신비주의가 사라지고 공포가 제거되며, 사물은 아주 가까운 곳에서 자유자재로 다루어질 수 있으며, 이것은 곧 주체가 열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짐으로써 가능해지는 비판적 계기(베르그송의 경우)에 의해 도달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그렇게 됨으로써 대상은 매우 가깝고도 친숙한 것이 될 수 있다. 바흐친에게 있어 친근하게 되고, 대상의 권위가 사라지고, 심층적인 것이 파괴되는 것은 웃음의 구조의 효과이며 동시에 웃음의 결과인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거리의 이중적인 본질을 보게 된다. 하나는 비판적이고 객관적인 기제로서 거리이고(베르그송), 다른 하나는 주관적이고 신비적인 효과로서 거리이다(바흐친). 따라서 베르그송과 바흐친은 모순적인 논의를 한 것이 아니라, 서로 같은 내용을 다른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 두 사람에게 웃음은 거의 동일한 의미에서 논의되고 있지만, 웃음과 관계하는 거리의 의미는 서로 완전히 반대적이다. 이로써 웃음은 두 방향을 갖게 되는데, 한편에는 사물로부터 거리를 둠으로써 그에 대해 비판적 성찰을 할 수 있는 기제로서 웃음이 있으며, 다른 한편에는 접근할 수 없는 거리를 제거하는 기능뿐 아니라 돌이킬 수 없는 절대적 과거를 공시적 평면 위에 위치시키면서 과거와 기억을 현재적 관계들로 끌어들임으로써 유발되는 웃음이 있다.


7.

지금까지 논의된 내용을 정리해보자: 베르그송은 웃음의 발생적 구조에 집중한다. 유동적이고 자유로운 것과 경화되고 뻣뻣한 것의 충돌. 이것이 웃음의 발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구조적 조건이다. 따라서 웃음의 구조적 요인은 거리이다. 왜냐하면 충돌과 부조화를 볼 수 있는 반성적이고 비판적 시선은 종합적 판단에 의존하기 때문이며, 이러한 판단은 거리를 둠으로써만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베르그송의 논의들 속에서 아이러니와 유사한 구조를 발견하게 된다. 웃음은 주체가 대상으로부터 일정한 간격과 거리를 가지고 있음을 뜻한다. 웃음은 거리가 없는 관계 속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웃음 속에 이미 대상에 대한(심지어는 자기 자신에 대한) 비판적 본성이 내재해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그렇기 때문에 웃음은 대상을 맹목적으로 신뢰하는 것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행위이며, 웃음은 열정과 신념을 가진 모든 존재에 대한 비판이며, 나아가 그것은 관념에 몰두하는 망상적 자아에 관한 자기비판이 된다. 이것은 정신과 물질이 분리되었다고 믿었던 신념이 파괴되면서 나오는 비판이기도 하며, 심층과 표층이 심연에 가로놓여 순수 영역을 고수하고 있다고 믿는 신념에 대한 경고이기도 하다. 따라서 웃음은 이성을 가진 존재에게 있어 가장 강렬한 형태의 분열증적 표현이다.


그러나 바흐친에게 웃음은 거리가 제거됨으로써만 가능하다. 웃음의 대상은 환원할 수 없는 절대적 과거 속에 위치하여 광채를 발하는 접근 불가능한 대상이 아니라, 언제든지 내가 접촉하고 만지고 볼 수 있는, 무게를 가지지 않는 존재이다. 웃음 속에서 모든 존재는 그 권위를 박탈당하게 되는 것이다. 웃음 속에는 거리가 없으며, 권위가 없으며, 세계는 웃는 주체와 동일한 평면과 시간 속에 위치한다. 고귀한 존재는 웃음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웃음은 그 자체로 대상을 심층으로부터 현재적 표면으로 완전히 끌어올림을 의미한다. 심지어는 자기 자신조차도 표면 위에 드러나 스스로 분열한다. 웃음 속에서 주체는 대상과 거리를 가지지 않으며, 자기자신을 지고한 절대적 시간 속에 고양시키지 않는다.


베르그송은 웃음의 구조와 그 요인에 대한 중요한 연구를 했으며, 바흐친은 웃음의 정치학적 효과와 결과에 집중한다. 이 두 연구자들은 서로 웃음에 대해 동일한 입장을 가지지만, 웃음의 요소를 대립적인 관점에서 논의한다. 이 둘은 상호 보완적인 관계 속에서 정립될 수 있을 것이다. 웃음의 발생적 요인과 그것의 정치적 효과. 이 둘을 종합하면 웃음의 아이러니컬한 특성이 드러나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웃음은 거리를 만듦으로써 거리를 없앤다.



주1)
예를 들어, 자연스럽게 걸어가던 사람이 갑자기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상황을 연상해보자. 장애물의 출현은 상황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며, 따라서 자연스러운 걸음걸이가 유지되려면 장애물을 피해야 한다. 그런데 이 걸음걸이가 기계적이고 반복적인 패턴이 되면서, 변화된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했을 때, 장애물에 걸려(즉 변화된 상황과 충돌)넘어진다. 웃음을 유발하는 우스꽝스러움은 새로운 상황과 부딪치면서, 유연했던 걸음걸이가 기계적인 자동화로 치환되는 상황에서 발생한다. 이런 의미에서 웃음은 가볍고 유연한 것과 기계적이고 뻣뻣한 것과 충돌하면서 나오는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주2)
아이러니와 유머는 동일한 구조를 가지면서도 각각 다른 본질을 띠고 있다. 아이러니의 경우 자아의 반성적 계기는 세계를 부정적으로 사유하는 기제인 반면, 유머의 경우는 긍정적으로 사유한다. 그래서 아이러니의 어조는 주로 짜증과 조소로 점철되는 경향이 있다. 아이러니는 주체의 신념이 물질의 반항과 맞서면서 실패할 운명에 처해있음에 대한 통찰인 반면 이 통찰로부터 고통과 괴로움을 경험하는 정신적 기제이다. 그러나 유머의 경우 이러한 통찰을 긍정한다. 신념과 이상의 불완전성에 대한 부정과 긍정의 사유가 아이러니와 유머의 차이인 것이다. 물론 아이러니에도 유머러스한 측면이 눈에 띠지만, 이때의 웃음은 주로 쓴웃음의 형태를 띤다.


참고문헌

Bakhtin, M. M. The Dialogic Imagination: Four Essays. Trans by Caryl Emerson and Michael Holquist. Austin: University of Texas Press. 1982.

앙리 베르그송. 『웃음: 희극성의 의미에 관한 시론』. 정연복 옮김. 세계사.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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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가 "독특한 일원론"이라고 불렀던 베르그송의 "흐름들의 동시성"이라는 개념. 혹은 본성적으로 다른 단성태(singularity)들의 일원론. 즉 『영화 I』에서 "Dividual" 이라고 명명했던 것. 그리고 베르그송을 해석하면서 "회상의 내재적 판(immanent plane)" 개념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잠재적 실재의 총체. 이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이미지 하나를 제시한다면 아마도 플로베르(Flaubert)가 『보봐리 부인(Madame Bovary)』에서 Emma의 눈을 통해 묘사했던 바로 그 장면이 아닐까? 샤를르 보봐리(Charles Bovary)는 그냥 '수줍은 모습'을 하고 있다. 하지만 엠마의 눈은 "갈색이었고, 그러나 그 긴 속눈썹 아래에는 흑빛이 감도는 듯 했다. 그녀는 눈을 활짝 뜨고 있었기 때문에, 바라보는 누구든지 그 두려움없는 솔직함을 볼 수가 있었다." 그녀의 눈은 하나의 커다랗고도 단일한 흐름이다. 그 눈 뿐만 아니라 그녀 자신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단일한 시간이며, 그 시간은 또한 휘트먼(Walt Whitman)의 "열린개체"처럼, 그녀를 포함하고 있는 우주 전체로 열려져 있다. 플로베르는 엠마의 눈 속에 깃든 그 다채로운 색채들을 통해 깊이를 탐구한다: "아주 가까이서 바라보면, 그녀의 눈은 인생보다도 더 커보였다. 특히나 무엇인가에 깨어나 그 눈꺼풀을 여러 차례 열었다가 닫았다가 할 때에는 더욱 그랬다: 그늘 속에서 바라보면 흑빛이었고, 밝은 빛 속에서는 진푸른빛이었다. 그 눈은 마치 색채들의 층 위에 또 다른 색채들의 층이 뒤덮힌 듯 했고, 그 아래에는 두텁고도 희미한 층이 놓여있었으나, 그 광채나는 표면으로 나아갈 수록 더 밝고 더 투명해졌다."(Gustave Flaubert, Madame Bovary, trans. Francis Steegmuller (Vintage: New York, 1957, reprinted 1992), pp. 3, 39) 우주는 거대한 하나의 단일체이다. 그러나 그 단일성이란 본성적으로 다른 부스러기들, 다양한 흐름들의 집합체로 이루어져 있다. 마치 엠마의 커다란 눈처럼. 그러나 그 각각의 층위는 엠마가 소유하고 있는 본성적으로 다른 개별적인 시간들의 중첩을 이루고, 그 눈의 깊이와 다양성 그리고 단성적인 것들의 분해할 수 없는 결합은 그녀의 온 생애에 걸쳐 내면화된 열정과 그 신비로움을 반영한다. 다양성의 중첩이라고 하는 이 막대한 시간이 바로 결혼 생활 전체를 통해 남편 샤를르를 괴롭히게 될 고난의 징후인 것이다. 그녀의 눈 속에 겹쳐있는 그 층위들은 한 명의 순진한 의사의 통찰로는 결코 헤아릴 수 없는 감정의 두께였으며, 그의 능력으로는 절대로 만족시킬 수 없는 변덕스러운 욕망이었다--우리를 따돌리는 저 가혹하기 그지없는 뒷모습!

그녀의 눈 뿐만 아니라, 만물은 서로 단일한 시간 속에 참여하고 있지만, 또한 그들은 제각각이 본성적으로 다르다. 이것은 모순이 아니라 실재의 다양성과 단일성의 이질적 통일이다: 주관적 객관성, 잠재적 단일성, 경험적 이성, 내재적 초월, 다원론적 일원론, . . . 나아가 그 윤리적 용어: 시멘트를 바르지 않은 돌담! 그 눈을 바라보고 그 깊이를 꿰뚫을 수 있는 능력은 샤를르와 같은 의사가 갖춘 물질적 객관능력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시인이라든가 예술가가 갖춘 직관능력, 들뢰즈의 용어로 "증후학(symptomatology)"을 통해 완성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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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릴 적 한 때 좋아했고, 많이 들었던 칙 코리아(Chick Corea) 음악 하나 . . . 퓨전 삼바리듬과 매혹적인 플로라 퓨림(Flora Purim)의 보컬이 어울리는 곡 . . . <Light as a Feather>(1998)라는 앨범에 실린 첫곡. 이 앨범을 처음 구입해서, 첫곡을 듣는 순간 어린 마음에 받았던 충격이 기억이 난다. 또, 이 앨범에 수록된 곡들 중 가장 듣기가 편하고 쉬운 곡이라서 한 번 올려 보았다. Volume 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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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는 스피노자 철학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논제는 추상관념(abstract concepts)과 공통개념(common notions)간의 본성적 차이라고 지적한다(Deleuze 44). 이 둘의 차이는 존재의 분류방식의 차이 뿐 아니라 신체와 관념 그리고 관념들간에 서로 결합하고 해체되는 양상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아가 이 차이는 존재들이 어떻게 서로 공통성을 가지게되는가의 이론으로 확장된다. 이 둘의 차이를 구분하는 심층적 내용은 초월성과 내재성이다.

추상관념은 존재에 대한 초월적 이해이며, 존재를 초월적으로 구성한다. 다시 말해 추상관념은 신체들간의 관계에 조응하는 관념이 아니라, 관념들간의 관계에 조응하는 일치된 관념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존재 내재적 관념이 아니라 존재로부터 초월적이거나 외재적이다. 왜냐하면 존재는 신체들의 결합과 해체의 관계가 짜놓은 양태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신체 외재적인 관념은 신체들의 공통성이 아니라 정신들의 일치에 의존하기 때문에 추상적일 수밖에 없다. 또한 추상적인 관념은 상상력을 자극케 하거나 상상으로 존재를 이해한다. 왜냐하면 신체로부터 독립하여 그것과 관계를 가지지 않는 관념은 과도한 촉발능력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존재 양태와는 관계없이 상상에 의존하는 촉발은, 존재의 구성 부분으로서 관계를 이루는 다른 신체들을 사유의 대상에서 배제하고, 오로지 사안이 되는 대상의 내적 구조나 단일성 혹은 유기적 체계만을 파악한다. 이런 이유에서 추상적 관념은 신체들간의 관계로부터 발생한 결과(효과)들을 우연적 유사성으로 대체하고 자의적인 유추들로 해석하여 텅 빈 허구들을 만들어낸다. 추상관념은 허구에 의존하며, 또한 허구는 추상관념을 필요로 한다. 추상과 허구는 자의적인 연상에 의해 만들어진 허위적 이미지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둘은 서로 맞닿아 있다.

또한 추상관념은 일반적일 수 없다. 그것이 허위적 이미지이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무엇  보다도 일반성은 구체적인 존재양태 속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어떠한 관념이 일반적인 것은, 존재가 보다 많은 신체들간의 관계에 적합한 공통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지, 일치된 관념 아래 모든 존재가 포함되거나 유사하기 때문이 아니다. 일반적 개념은 신체들에 외재적인 상위의 이미지가 아니라, 신체들간의 내재적 관계를 통해 발생한다. 일반성은 의식이 알고 있는 공통성이 아니라, 신체가 반응하는 공통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추상관념은 일반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지속적이지도 않다.

이런 이유에서 스피노자 주의는 사물들이 소유하고 있는 외재적인 특징이나 특성 혹은 기능적 구조를 통해서가 아니라(예로 강, 종, 속, 류 등에 따른 생물학적 개체 분류들), 변용능력이나 반응능력 그리고 자극능력에 따라 사물들을 분류한다. 우선 변용능력에 따라 존재들이 분류되기 위해서는 이들 각자들에 고유하게 내재하는 능력들이 서로간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표현되고 어떠한 상사성(similarity)을 갖는지 전제되어야 한다: 이들은 어떻게 서로간에 결합하고 해체되는가? 존재들은 관념의 일치가 아니라, 신체들의 능력의 공통성에 따라 서로간에 결합하거나 해체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 종, 속에 따른 분류는 자연 안의 모든 개체들을 초월적 규준 아래 배치한다. 초월적 규준은 존재 자체가 아니라 '존재의 개념'이며, 존재하는 것들의 표면적 유사함(likeness)으로 유추된 하나의 모델이다. 개체들은 이 모델과 적합한가 혹은 그렇지 않은가에 의해 판별된다. 그러다 보니 개체들은 정상과 비정상, 완전함과 불완전함과 같은 비교에 의해 갈라진다. 완전성과 불완전성의 개념은 사유의 양태이지 존재의 양태가 아니다. 적합한 관계의 두 가지 형태가 있는데, 하나는 특정한 하나의 모델에 기초한 닮음과 유사성의 관계이며, 다른 하나는 모델을 전제하지 않고 오로지 관계하는 것들간의 공통성에 기초한 상사적 관계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어째서 스피노자의 분류가, 즉 촉발능력들에 따른 분류가 동일한 규준으로서 혹은 추상적 허구로서 모델을 전제하지 않고, 능력들의 법칙에 따라 재배열되는지를 알 수가 있다.

한편 스피노자 주의는 사물을 수(number)에 의해 계량하지 않는다. 수는 실제하고 있는 존재의 양태들에 적용될 경우 추상적 관념의 매개가 된다. 그래서 수는 "상상의 보조자"(46)라고 말할 수 있다. 우선적으로 수는 실체를 표현하지 못한다. 실체의 무한함은 속성들의 다수성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수는 그 자체 스스로를 현시할 수 없다. 수는 오로지 다른 것들과의 양적 차이에 의해서만 현시될 뿐이다. 수는 속성들을 가지지 않기 때문에, 속성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유비에 의해서만 파악되기 때문이다. 또한 그 자체 자기 자신의 속성들을 가지지 않기 때문에, 수는 구체적일 수가 없으며 추상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는 상상을 불러들인다. 나아가 상상으로 매개된 자연은 허위적 이미지를 남긴다. "자연을 구체적으로 보면 어디에서든 무한을 발견하게 된다. 반면에 [자연을 이루는] 부분들의 수를 추리하는 방식으로는 무한함을 발견할 수 없다. 2, 3, 4. . .를 통하지 않고도 즉각적으로[직관적으로] 무한한 속성들이 긍정될 수 있는 실체도, 무한히 많은 부분들을 가지는 존재 양태도, [수를 통해서는] 무한하지 않다"(46). 존재의 구체적 속성들은 무한한 실존적 긍정성을 가지지만, 이들이 특정한 상상에 의해 즉 허위적 이미지에 의해 재현되고 수적(양적)으로 파악될 때('이것은 . . . 종류에 속한다', 혹은 '이것은 . . . 구성부분들로 이루어졌다' 등), 무한함은 제한되어 양적으로 고착될 것이다. 실체는 수적으로 계량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속성들의 표현에 의해 현시 된다. 이런 의미에서 무한성은 수적인 다수성에 의해서는 나올 수가 없다. 수는 추상적 관념이므로, 실체와 양태를 수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오로지 추상적으로만 그리고 상상으로만 구별하는 것이다.

결국 문제는 내재적으로 결정되는 존재의 의미를 초월적 가치로 확립하는데에 있다. 의미에 대한 초월적 이해는 존재의 발생적 원인을 배제하고, 존재들의 외연적 차이만을 수용함으로써, 초월적으로 상정된 개념(universal idea)에 모든 사물들을 종렬시킨다. 여기서 존재와 무에 대한 절대적 대립이 파생된다. 초월적으로 결정된 개념으로부터 이제 세계는 다음과 같은 절대적 대립 안에서 현시된다: "존재/비존재, 통일성/다양성, 진리/허위, 선/악, 질서/무질서, 미/추, 완전성/불완전성 . . . "(47). 사물의 완전성과 불완전성의 개념이 어떻게 생겨나는가에 대한 논의는 <윤리학, 4부, 서문>에 잘 나타나있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어떤 사물이나 생산물에 대해 완전하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완전함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하며, 또한 그 사물의 창조주의 의도나 목적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자연에 대해 완전한 지식도 가지고 있지 아니하며(우리는 자연의 완전함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창조주의 의도나 목적도 알 수 없을 때, 우리는 이성의 개념적 활동에 의해(칸트의 경우) 완전함의 모델로서 일반적 개념을 설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완전성과 불완전성은 존재의 양태가 아니라 하나의 사유양태인 것이다: "우리는 다만 내재적 의미만을 갖는 것을 초월적인 가치로 확립하고, 상대적인 대립에 불과한 것을 절대적인 대립으로서 규정한다"(47).

한편으로 스피노자의 추상관념에 대한 논의는 특정한 존재에 정향되지 않는다는 것을 지적해야겠다. 다시 말해 추상관념과 추상적 존재는 구별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스피노자는 기하학적 도형들(원, 구 등)이 이성적이고 추상적인 존재들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에게는 단순히 추상관념으로 환원할 수 없는 측면이 있다고 지적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는 이들을 통해 공통개념이 어떻게 구성되는가를 설명할 수 있게된다. 대체로 이성에 의해 만들어진 추상적 존재들에 대해 우리는 그것의 진정한 원인(발생적 원인)을 알지 못한다. 추상적 개념들은 이성의 도약에 의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심지어는 경험적 종합의 경우에도 해당된다(경험주의적 귀납의 오류): "이성적 존재들은 참된 원인에 대한 무지를 함축한다"(47). 그러나 우리는 특정한 기하학적 존재들에 대해 우리에게 적합한 것으로서 이러저러한 정의와 원인들을 부여할 수가 있다. "실제로 우리는 한 도형에 특수한 정의(예로, 중앙의 한 점에서 동일한 거리에 위치하는 점들의 자취로서의 원)를 발생적 정의로(한 쪽은 고정되고 다른 한 쪽은 움직이는 모든 직선에 의해 그려지는 도형으로서의 원 . . . 혹은 반원의 회전으로서 그려지는 도형으로서의 구 . . .) 대체할 수 있다"(47). 이 원인의 규정은 특정한 형태로 우리에게 부여된 추상적 존재에 대해, 초월적 법칙에 의해서가 아니라 대상으로서의 기하학적 존재를 파악하는 우리 자신의 이러저러한 양태들의 집합으로 구성된다. 이것은 단순히 주어진 절차에 의해 하나의 도형을 판별하는 과정이 아니라, 우리에게 조건으로 주어진 특정한 존재(대상)를 우리 자신에 적합한 방식에 따라 이해하는 과정이며, 나아가 우리 자신의 이해능력을 표현하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물론 기하학적 존재들은 여전히 허구적이다. 신체를 통해 경험하고 지각하는 (자연 안의)어떠한 사물들도 기하학적 존재들과 같이 구성되지 않으며, 또 우리가 그것들에 부여하는 이러저러한 원인들에 일치하는 방식으로 발생하지도 않는다. 기하학적 존재들(예로, 점, 선, 원 . . . 등)은 자연의 운동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추상적 존재들이다. 이들은 사유의 결과로서 개념적 양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들을 추상관념이라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 추상관념은 어떠한 존재와 관계하는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사유양태와 관계하는가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정신과 신체가 서로 평행한 관계에 놓여있다는 스피노자의 심신 평행론을 곧바로 진리이론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정신과 신체의 관계에 관한 논의는, 이 둘간에 있을 수 있는 관계를 인과적으로 연결하고, 어느 한쪽에 의한 다른 한쪽의 지배와 우월성을 밝혀 냄으로써 궁극적인 기원을 찾고, 나아가 진리나 의미의 진위를 판별하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이 두 계열간에는 어떠한 실질적 인과성도 없으며, 지배와 우월성도 없다고 말함으로써, 의미가 초월적으로가 아니라 (사유)내재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라고 말하기 위함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의미는 내재적으로 결정된다. 의미의 내재성은 최소한 두 가지의 결과를 발생케 한다. 1. 절대적 의미의 부정. 왜냐하면 의미는 더 이상 초월적 원인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2. 따라서 의미는 생산하고 생산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절대성이 부정되어 초월적 참조대상에의 의존으로부터 벗어나면서, 우리는 원인을 내재적으로 구성하기 때문이다. 문제의 내부에 이미 그 해답이 있다는 말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이다. 존재는 의미의 원인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내재적 원인. 따라서 의미는 능동적 이해능력과 행위능력을 예증한다. 대상적 진리는 실천적이고 자율적인 능력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나는 원인을 자의적으로 구성한다(fingo ad libitum causam) . . . 관념들이 참인 것은 . . . 이 관념들의 진리가 대상에 의존하기 때문이 아니라 사유의 자율적 능력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 . . 기하학적 존재에 관한 허구적 원인은, 신의 능력(선이나 반원을 결정하는 신)에 도달하기 위한 발판으로서, 우리의 이해능력을 발견하기 위해 사용된다면, 훌륭한 출발점이 될 수 있다"(47∼48). 스피노자가 『윤리학』에서 기획했던 기하학적 방식이란 바로 이런 의미이다. 우리는 알 수 없는 법칙들과 원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결과만을 의식할 뿐이다. 노예이며, 불완전한 존재이며, 불행한 자들로서 우리 자신! 그러나 (추상적 허구이긴 하지만) 다시 이 결과들에 대한 원인을 기하학적으로 재구성할 때 생산적으로 된다. 이런 점에서 스피노자의 윤리학은 진리에 관한 어떠한 설명이나 재현과는 관계가 없다. 오히려 그의 사상은 실천에 가장 가깝다고 말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기하학적 개념들은, 그 자신과 관계하는 모든 추상적인 것을 쫓아내고, 그 자신들조차도 내몰아 버리는 허구이다. 결국 이들은 추상관념보다는 공통개념에 더 가깝다"(48).


추상으로서의 기하학적 존재로부터 공통개념이 도출됨으로써, 이성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결합관계 아래에서 구성된다. 공통개념은 존재에 관한 관념들간의 공통성이 아니라, 관계에 직접 참여하고 있는 신체들 각각의 자발적 능력에 따라, 그들 사이에 공통하는 어떤 것에 대한 관념이다: 공통개념은 정신의 공통성이 아니라, 신체들간에 공통하는 어떤 것에 대한 관념이다. 따라서 공통개념은 신체들간에 발생하는 내적인 합의와 이들 서로간의 촉발에 의해 형성된 결합 법칙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공통개념 아래 관계를 맺는 신체들은 그들 자신의 능력과 이해와 촉발의 양상에 의존하게 된다. 특정한 관계에 속하는 부분으로서의 신체들이, 제 각각 자기 자신으로부터 발산되는 능력에 의해, 자신이 속한 관계를 특징짓기 때문에, 공통개념은 그 자체 내재적 구도에서만 형성될 것이다. 원인의 내재성은 공통개념의 형식적 조건이다. 그렇기 때문에 또한 공통개념은 적합한 관념들이 결합하는 방식에 의해 형성된다. 예로, 기하학적 존재에 관한 공통개념에서 보았듯이, 기하학적 도형들에 대해 우리는 우리 자신이 이해하는 능력에 따라, 우리와 적합한 결합관계를 갖는 원인들을 재구성한다.

이런 의미에서 공통개념의 형식적 조건으로서 내재적 원인은 관계에 참여하는 신체들의 능동을 유발한다. 여기에는 우선적으로 결합의 원인이 신체들간의 관계 내에서뿐만 아니라 신체 자체에 준거하는 데에 이유가 있다. 스피노자는 내재적 원인을 맨 처음으로 정의함으로써『윤리학』을 시작한다: "자기 원인에 대해 나는 본질이 존재를 포함하는 것이라고; 혹은 본성은 존재하는 것과 분리해서는 이해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Ethics, I, def. 1). 전통적 관점에서는, 원인과 결과를 분리함으로써, 결과에 대한 원인과 원인의 파생적 의미로서의 결과를 구별했다. 이런 관점에서 유효적 인과성(efficient causality)은 초월적으로 구성된다: 모든 결과는 자기 자신과 다른 외적인 원인을 갖는다. 따라서 이 둘 간에는 근본적으로 공통하는 것이 없다. 신은 만물의 원인이지만, 근본적으로 신과 양태는 서로 동일하지 않으며, 어떠한 점에서도 서로 공통하지 않는다. 따라서 오로지 신만이 능동적이며 자기 자신의 원인이다. 그렇지만 스피노자의 저 정의는 바로 이러한 관점을 전복시킨다. 인과관계를 내재성의 평면으로 끌어내림으로써, 그리고 원인을 더 이상 그 결과와 분리시키지 않음으로써, 신은 그 자신의 결과(양태)를 자기 자신 안에서 발견한다. 마찬가지로 모든 존재들은 자기 자신 안에서 원인을 발견한다: "신은 자기 자신의 원인인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만물의 원인이다(Ethics I, 25, schol.). 그는 자신이 존재하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생산한다"(Deleuze 53).(주1)

이렇게 원인의 내재성은 존재를 그것의 본질과 분리시키지 않음으로써, 관계 속에 있는 모든 존재를 능동적 양태로 전환한다. 스피노자는 이 관계를 속성(attributes)을 통해 설명한다. 신과 양태가 서로 분리되어 공통하는 것이 없지만, 어떤 점에서 속성은 이들이 공통하는 것이 있음을 보여준다. 양태들은 속성 안에서 생산되며, 원인은 속성을 통해 작용한다. 따라서 신은 그 결과로서 양태들과 동일한 속성들을 공유한다. 이 때에 속성은 실체의 본질을 표현하고 양태의 본질들을 함축한다. 속성은 실체의 본질을 펼치고 양태를 감싸면서 스스로를 표현하는 것이다. 스피노자가 속성은 지성의 산물이나 소산적 자연이 아니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각각의 속성은 자기 자신 안에서 스스로를 표현한다(Letter II, to Oldenburg). 현실적으로 이 속성들은 제 각각 차이가 난다. 어떠한 속성도,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다른 것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다른 어떤 것에도 귀속되지 않는다"(Deleuze 51-52).

내재적 원인은 존재를 능동적 양태로 이끌며, 존재의 능동은 속성들 안에서 혹은 속성들을 통해 자기 자신을 표현한다. 그렇기 때문에 능동적 양태들의 관계는 또한 능동적 결합을 구성한다. 이 때에 결합의 능동성은 각각의 존재들에 적합한 방식에 따라 작용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스피노자에게 있어 존재들의 결합이란 곧 자기 자신의 신체를 지속시키고 능력을 증가시키려는 노력, 즉 코나투스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존재는 자신이 감싸고 있는 무수한 질들을 잃지 않고 나아가 증가시키려는 노력으로, 자기 자신과 적합관 관계 속에서 다른 신체와 결합한다. 따라서 서로 관계 맺는 신체들 간에는 공통하는 어떤 것이 반드시 내재한다.

내재적 원인과 이로부터 도출되는 능동성, 그리고 서로 적합한 관계들이 구성되는 양상을 따라가 보면, 어째서 공통개념이 추상적이지 않고 보편적인가를 알게 된다. 추상적인 것과 보편적인 것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공통개념은 정신이 아니라, 우선적으로 신체들간에 공통하는 어떤 것을 표상하기 때문에 추상이 아니라 보편적 관념이다. 결합하는 관계에 참여하는 각각의 신체들의 본성적인 것을 유지하고 확장하고 결합하도록 만들어주는 어떤 것을 표상하는 것으로서 공통개념. "공통개념은 둘 혹은 더 많은 신체들의 결합의 표상이며 이 결합의 단일성이다. 그 의미는 수학적이기 보다는 생물학적이다; 즉 그것은 존재하고 있는 신체들간에 일치되거나 결합된 관계들을 표현한다. . . . 정신에 관계하는 공통성은 여기서 이차적일 뿐이다. 왜냐하면 공통개념이 정신에 관계할 때에는 그 정신에 관한 신체들이 이미 결합되고 결합의 단일성에 의해서만 촉발될 때이기 때문이다"(Deleuze 54-55). 우리는 흔히 사물들과 투쟁적 관계에 있거나 다른 신체들과 대립적 위상에 놓일 때 공통개념을 찾는 경향이 있다. 단일성을 추구함으로써 모순적 관계에 놓인 다른 신체를 제압하려는 의도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최소한 추상에 관계하는 한에서만 가능한 공통개념이다. 니체가 그랬듯이 우리도 곧바로 신체가 하는 일들을 살펴보면, 신체들의 질서는 언제나 이미 서로간에 적합한 결합관계를 갖는 것을 보게 된다. 신체들은 모순적이거나 대립적 관계들로써 결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공통개념은 필연적으로 적합한 관념들이다. 스피노자가 브레이흔베르에게 악이 그 무엇도 아니라고 썼던 것은, 언제나 공통개념을 상정하는 적합한 결합관계들만을 갖는 신체를 하나의 모델로 복원시키기 위함이었다. 게다가 공통개념은 결합의 단일성을 표상하면서, 결합된 신체들 각각에 내재하며 동시에 관계들의 전체에 내재한다. 공통개념이 보편적인 이유는, 그것이 초월적으로 분리된 추상에 의해 강요된 관계를 표상하기 때문이 아니라, 내재적으로 결합된 신체들간의 자발적 친화력으로 구성된 관계를 표상하기 때문이다. 공통개념의 후면에는 언제나 존재의 긍정이 자리잡고 있다. 존재는 자기 자신을 잃지 않으며, 나아가 자신의 능력을 증식하는 것이다: 공통개념은 기쁜 관계를 표상 한다.

공통개념이 어떤 과정을 통해 형성되는가를 짚어 보면, 이성(Reason)과 관계를 맺는 우리 자신에 대해 최소한 두 가지를 알게 된다. 우선적으로 우리 자신은 이성적 존재가 아니라는 점이며, 다음으로 우리는 공통개념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이성적 존재가 된다는 점이다. 공통개념의 적용과 그것의 형성은 그 과정에서 서로 차이가 난다. 우리는 공통개념을 보다 덜 일반적인 것들에 적용함으로써, 이들을 보다 큰 일반성 안으로 포섭한다. 다시 말해 공통개념의 적용은 개별적인 존재들을 전체화한다. 따라서 공통개념은 전체화를 도출하는 미리 결정된 개념의 출발점이 된다. 그러나 공통개념이 형성되는 과정은 이와는 반대이다. 우리의 신체의 질서에 부합하거나 일치하지 않는 다른 질서에 속하는 신체를 만나게 되면, 우리는 슬픈 정념에 사로잡힌다. 이 경우에 우리는 절대로 신체들간에 촉발되는 공통성을 경험할 수가 없다. 슬픔은 공통개념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반대로, 우리가 우연적 발생에 의해 우리 신체의 질서에 적합한 다른 질서에 속하는 신체를 만나게 되면, 특정한 형태의 촉발을 통해 기쁜 정념의 감정을 느낀다. 그러나 아직 우리는 이 정념을 발생케 하는 서로 다른 신체들 간의 공통성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여기서의 공통개념은 우연에 의한 발생이기 때문이기도 하며, 또한 이때의 공통성은 신체들간의 질서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기쁜 정념은 우리의 신체가 할 수 있는 능력을 지속시키거나, 다른 신체들과의 조응에 따라 더욱 커다란 행위능력으로 증식시킨다. 우리의 이해능력과 행위능력을 증식시키는 것으로서 기쁜 정념은 공통개념을 불러들인다.(주2)

따라서 이제 이성이 두 가지 형식으로 각각의 단계를 거치는 것을 보게된다. 1) 기쁜 수동 촉발과 관련되는 이성: "좋은 만남들을, 즉 우리와 결합하고 우리에게 기쁜 정념들(이성과 적합한 감정들)을 불러일으키는 양태들과의 만남들을 선택하고 조직하려는 노력으로서의 이성"(Deleuze 55). 2) 능동 촉발과 관련되는 이성: "공통개념들에 대한 지각과 이해, 즉, 신체들의 결합이 구성되는 관계들에 대한 이해. 이로부터 우리는 다른 관계들을 추론하고, 이 이해에 기초하여 새로운 감정을 경험한다. 이때에 이 경험은 이번엔 능동적 감정들이다(이성에 의해 탄생된 감정)"(Deleuze 56). 『윤리학』2부에서는 공통개념이 논리적으로 적용되는 질서에 대해 규정했던 반면, 4부에 오게되면 공통개념이 어떻게 형성되고 발생하는가에 대해 설명한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공통개념이 구성되는 과정은 감정들과 관련하여 이성이 어떻게 능동적으로 되는가, 그리고 이성이 어떻게 우리로 하여금 기쁜 감정을 반복할 수 있도록 하는가를 명시화하는 것이었다. 수순은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첫 번째 공통개념은 촉발된 신체들의 결합이 우리를 슬픔이 아닌 기쁜 정념으로 이끄는 공통성의 표상이다. 이것은 나의 신체와 관계를 맺는 다른 하나의 신체와의 공통성이다. 따라서 이 공통개념은 최소한의 일반성에 머문다. 그러나 이 최소한의 일반성은 새로운 기쁨의 감정을 도출한다. 기쁨은 반복을 가능케 하지만, 또한 반복은 능동성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때에 이 감정들은 수동적이고 우연적 발생에 의한 정념이 아니라, 신체들의 결합에 참여하여 이들의 능력을 증식시키는 능동적 기쁨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최소한의 일반성으로서의 공통개념과 행위를 불러들이는 능동적 감정들은 우리로 하여금 더 커다란 일반성을 구성하도록 촉구한다. 심지어는 서로 결합하지도 일치하지도 않는 다른 신체와, 따라서 나로 하여금 슬픔에 사로잡히도록 대립하고 모순적인 신체들에서조차 공통성을 찾도록 요구하는 것이다. 이로써 이성은 최소한의 일반성에서 보다 더 큰 일반성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최대한의 일반성으로 나아간 공통개념으로부터 이번엔 또 다른 감정들이 도출된다. 이 감정들은 슬픔 뿐만 아니라 슬픔으로부터 출현한 정념들을 자신의 발아래 굴복시킨다.

들뢰즈는 공통개념 이론이 어째서 가치가 있는지를 몇 가지로 정리하면서, 특히 공통개념은 가장 근본적인 문제들, 즉 우리가 어떻게 적합한 관념을 형성할 것인지에 대한 대답을 제시한다는 점을 지적한다(Deleuze 56). 이로써 스피노자 주의는 재조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성 개성론』이 기하학적 관념들로부터 적합한 출발을 하긴 했지만, 여전히 허구에 침잠했던 반면에, 공통개념 이론은 실제적인 것과 구체적인 것에 관한 수학을 구성하면서, 기하학적 방법의 실천에 제동을 거는 모든 허구와 추상들을 제거했다. 공통개념들은 오로지 현존하는 양태들과 관계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것이다. 이들은 양태들로부터 어떠한 단일한 본질도 구성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들은 결코 허구적이거나 추상적이지 않다; 공통개념은 현존하는 양태들 혹은 개별적인 것들 간에 이루어지는 실제적인 관계들의 구성을 표상한다. 기하학이 오로지 추상적 관계들을 포섭하는 반면에, 공통개념은 우리로 하여금 존재를 그 자체로 이해하게 한다. 즉 살아있는 존재들 안에 필연적으로 구체화된 것들을 이해하게 하는 것이다. 수많은 변이들과 구체적 관계들 속에서 질서를 만들어내는 구체화된 존재들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공통개념은 수학적이기 보다는 생물학적이다. 공통개념은 또한 우리로 하여금 자연 안의 모든 것들이 구성되는 단일성을 이해하게 해주며, 이 단일한 것들의 수많은 변이들의 양태를 이해하게 해주는 자연주의적 기하학을 형성한다"(Deleuze 57).


어떻게 우리에게 적합한 공통개념을 구성할 것인가? 나는 근본적으로 이 질문에 고민하고 대답하는 것이 이론이라고 이해한다. 이는 또한 어떻게 기쁜 감정들을 우리 자신의 내부에서 만들어낼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공통개념은 이론이 설명하고 재현해야할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재현할 대상으로서 초월적 규범이 아니라, 구성해야할 내재적 규율이다. 내재적 규율은 초월적 토대에 의존하지 않는다. 슬픔은 토대를 잃었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토대에 복종함으로써 나온다. 이런 의미에서 추상관념은 무능력한 존재들의 구세주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존재들의 무능력을 입증해주는 증거이다. 또한 추상관념으로 증명된 무능력은 존재로 하여금 한없는 슬픔에 사로잡히게 한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슬픈 존재들은 자신들의 무능력을 치유해줄 지배자(초월적 신)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아울러 이때의 지배자는 무능력한 존재들의 슬픔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공통개념 아래 결합하는 관계에 참여하는 모든 부분적 요소들은 능동적일 수밖에 없다. 더 이상 참조해야할 토대를 잃은 존재들은, 오로지 관계들 속에서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는 능력에 따라 적합성을 찾기 때문이다. 공통개념의 구성이 존재들의 능동을 표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능동적 존재는 원인을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발견한다. 마찬가지로 원인을 내부에서 발견하는 존재는 능동적이다. 내재성은 능동을 도출하고, 능동은 내재성을 표현한다. 그러므로 만일에 능동적인 내재적 존재들이 결합하는 관계에 참여한다면, 그래서 이 관계 아래 공통하는 것을 각자들이 포함하고 있다면, 이 존재들은 최소한의 보편성을, 나아가 최대한의 보편성을 가지게 될 것이다. 보편성의 문제는 관념의 문제 이전에 신체들과 살아있는 양태들의 문제이다. 왜냐하면 이 때의 모든 신체들은 영원한 자연의 법칙 아래, 서로 자발적 친화력으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한에서, 자신들의 능력에 따라, 결합하는 관계를 가지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의『윤리학』은 존재들의 행위에 관한 단순한 법칙들을 나열하고 증명한 도덕이 아니라 공통개념에 관한 연구이다. 그것은 오히려 정치학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말해야 한다. 왜냐하면 정치학이란 지배와 권력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들의 힘의 관계에 관한 고찰이며, 역능(puissance)의 구체적 현실화에 관한 연구이기 때문이다. 『윤리학』을 "존재하는 것들의 내재적 양태들의 유형학"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Deleuze 23). 원인의 내재성, 존재의 능동, 그리고 능동적 기쁨으로서 지복(blessedness)의 보편성(추상적 보편성이 아닌)은 공통개념을 둘러싼 세 개의 축이다. 이 축들 주위에서 존재들은 자신들의 조건에 따라, 자신들의 본성을 잃지 않으며, 자신들의 능력을 증가시키고, 공통하는 기쁨들을 창조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공통개념을 창조적 생산의 이미지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
주1) 그런데 신의 능동과 무한한 능력이 어떻게 존재들의 능동과 무한한 능력으로 치환될 수 있는가? 스피노자는 이를 형식논리학적으로 증명한다. 신의 능력은 절대적이다. 그의 능력은 자연 안의 어느 것도 배제하지 않는다. 또한 신은 절대적 원인이다. 따라서 양태들의 모든 운동과 인과관계 속에서 매번 원인으로서 신이 개입되어야 한다. 양태들의 이행은 그 이행의 첫째 항에서부터 원인으로서의 신과 동일한 순간에 이루어진다: 따라서 "신은 멀리 있는 원인이 아니다. 오히려 이행의 첫 번째 순간에서부터 도달되어야 한다. . . . 원인은 필연적으로 내재적이다"(Deleuze 54).

(
주2) 스피노자에 따르면, 촉발은 이미지 촉발과 감정 촉발로 구분되는데, 이미지 촉발은 신체가 현존하고 있음을 이미지 혹은 관념으로 표상 한다. 따라서 이것은 신체의 특정한 상태를 표상하기 때문에, 비록 이것이 이미지나 관념에 속하지만 여전히 신체와 관계하는 한에서이다. 반면에 감정 촉발은 존재하고 있는 신체의 특정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의 이행에 의해 발생한다. 따라서 감정들은 촉발된 이미지들의 이행과 상관 관계들 속에서 나온다. 보다 큰 완전성으로 이행하는가 혹은 보다 적은 완전성으로 이행하는가에 따라, 신체의 능력은 증가하거나 감소한다. 이때에 보다 큰 완전성으로의 이행 혹은 행위능력의 증가를 기쁨과 사랑이라 하고, 보다 적은 완전성으로의 이행 혹은 행위능력의 감소를 슬픔이라 한다. 그런데, 촉발된 이미지(관념)가 혼란한 이미지가 아니라, 우리의 신체 상태를 본질적으로 표현하거나 적합한 것일 때, 그리고 내적으로 촉발된 이미지가 우리 자신의 본질과 타자의 본질, 그리고 나아가 신의 본질의 내적인 공통성을 나타낸다면, 즉 촉발된 이미지들이 내적 합의에 이르게 되고, 신체의 본성에 적합한 관념이 형성될 때, 촉발 이미지로부터 발생한 감정 촉발은 곧바로 그 자체 행위가 된다. 일치된 관념 아래에서 감정은 행위가 되는 것이다. 나아가 이것은 사랑과 기쁨이 된다. 촉발과 감정, 그리고 기쁨의 발생에 관한 논의는 (Deleuze 48-51)을 참조.

<참고문헌>
Deleuze, Gilles. Spinoza: Practical Philosophy
. trans. Robert Hurley. San Francisco, City Lights Books, 1988.
Spinoza, Benedict de.
A Spinoza Reader. ed &trans. Edwin Curley. New Jersey, Princeton UP, 1994.

Posted by huun

지하철 신길 역을 가보면 5호선과 1호선을 연결하는 지하 통로가 하나 있다. 5호선에서 1호선으로 갈아타려면, 높은 에스컬레이터를 올라가서, 약 150미터 정도가 족히 되는 통로를 따라가야만 한다. 몇 년 전만 해도 그 통로는 텅 빈 그냥 통로였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통로 한복판을 따라 상점들이 쭉 늘어서게 되었다. 노점상보다는 좀 더 그럴듯한 상점이랄까? 내 보기엔 아마도 지하철 관계자에게 적당히 돈을 쥐어주고 얻게된 1평 남짓의 공간일 것이다. 조악하게 세워놓은 가판대 위에는 유행하는 옷이며, 가방이며, 중소기업이 만든 최신형 카세트 녹음기, 악세서리, 기념품. . . 등이 울긋불긋하게 늘어서 있다.


나는 오래 전에 이 통로를 친구와 걸었다. 발랄하게 재잘거리며 그 상점들을 눈요기로 지나갔던 것이다. 그러다가 상점들이 거의 끝나갈 무렵 커다란 돗자리 위에 펼쳐져 있는 비디오 테이프들이 눈에 들어왔다. 영화에 관한 나의 지대한 관심 때문에, 나는 친구를 잡아채어 그 돗자리 주위로 스며들었다. 꽤 많은 비디오 테이프. 그 위에 적힌 가격표: 1장에 2천원, 2장에 3천원, 3장에 5천원, 파격세일, 재고정리. . . . 음, 괜찮은데? 나는 그 테이프 더미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홍상수의 <강원도의 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히치콕의 <토파즈>, <영 이노센트>, 크로넨버그의 <크래쉬>, 오시마 나기사의 <감각의 제국>, 채플린 . . . 나는 얼른 눈에 띠는 테이프들을 집어들었고, 다른 사람에게 선점 당하지 않기 위해, 팔 위에 그 무거운 것들을 안고 이리저리 눈을 돌렸다. 그러다 갑자기 어떤 특별한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구석에 쳐 박혀 보일 듯 말 듯 묻혀있는 페데리코 펠리니의 <8½>! 익히 들어서만 알고 있었고, 구하기 쉽지 않은 영화. 나는 그 감독이 만든 <길>이라는 영화를 4번 보면서, 4번 눈물을 흘렸었다. 내가 만약 <길>에 대해 글을 쓰게 된다면, 아마도 바람과 고독에 관한 주제가 될 것이다. 이 작품은 어떨까? 나는 약간 흥분하면서 <8½>을 집어들어 친구에게 건넸다. 내 눈이 빛나고 있음을 눈치챈 듯, 그녀는 자신의 품에 그것을 얼른 감싸 안았다.


그런데 빛나는 내 눈을 본 사람은 그녀 뿐 만이 아니었다. 그 돗자리 좌판대 주인! 그는 내 나이 또래쯤 되어 보였고, 안경 너머로 나의 흥분을 아까부터 훔쳐보고 있었다. 처음에 나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건 하편이에요. 상편은 지금 없어요."

확인해 보니 정말로 그랬다. 실망했지만, 그래도 사고 싶었다. 상편은 언젠가는 구할 수 있겠지. "괜찮아요. 그래도 살래요."

그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두 번째 대사를 내뱉었고, 나는 들켜버린 내 흥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되었다.

"그거 짝 맞추어 달라고 누가 주문한 건데. . ."

그 말을 들은 후 나는 찬물을 뒤집어 쓴 것 같았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받아쳤다.

"주문 받은 물건을 이렇게 아무데나 굴리세요?"

"어. . . 그게 왜 거기에 있었지? 어쨌든 주문 받은 겁니다."

그는 약간 서투르면서도 단호하게 거절했다. 나는 친구의 품에서 그것을 빼내어 잠시 머뭇거리다가 중얼거렸다.

"그럼 할 수 없지 뭐. . . 그냥 내려놓자."

그리고는 재빠르게 그의 눈치를 살폈다. 나는 의식적으로 표정을 마름질하여, 그 테이프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이 담담하게 다른 테이프들을 둘러보았다. 꼭 사고 싶으니 팔라고 조르거나 부탁하지 않았다. 나의 표정은 그 테이프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잠시 후 지나치듯 물었다.

"짝도 안 맞는데, 뭐 하실려구요?"

아마도 그는 그 테이프를 두고 흥정이라도 해보고 싶었던 듯 하다. 그래서 그 주제를 계속 밀고 나가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일종의 본능처럼 못들은 척 하고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마음속으로 2만원 어치만 살 생각을 했다. 12개를 골라야 정확히 2만원의 계산이 떨어졌지만, 나는 일부러 11개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그에게 가서 품에 있던 테이프를 내려놓으며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 . . 아홉, 열, 열 하나, . . 어? 하나 더 골라야겠네? 뭘 고르지? . . .액션물 하나 고를까? 그냥 이것만 살까?"

나는 옆에 있는 친구에게 농담하듯이 말했다. 그러고 나서 저 쪽으로가 여기저기를 둘러보고 고르는 시늉을 하며, 그 주인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는 잠시 후 점잖게 그 주인에게 다가가 넌지시 말했다.

"아까 그 <8½> 그냥 주시죠!?"

그는 명분과 실리(實利) 사이에서 애매하고도 모호한 (약간 코믹한)표정을 짓다가, "이 테이프들 정말로 싸게 사시는 겁니다. 어디 가서 이 가격에 샀다고 말씀하지 마세요, . . . 주절주절."

궁시렁 거리는 그의 혀에도 불구하고, 이미 그의 발길은 그 테이프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아마도 분명 그 테이프는 한 번도 주문 받은 적이 없었으며, 정찰제가 아니니, 그는 내 흥분을 미끼로 좀 더 받아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상대가 호락호락 하지 않았으므로, 괜한 욕심 때문에 후회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적절한 시간차 공격으로 그를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이다.


좋은 영화들을 싸게 갖게 되어 흐뭇했지만, 그 보다는 무엇보다도 그와의 심리적 흥정에서 승리했다는 쾌감 때문에 우쭐해 있었다. 그리고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모르는 듯한 친구에게 내 영웅담을 은근히 자랑하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그 주인의 잔꾀를 알아챘다는 둥, 냉정하게 표정을 관리하였다는 둥, 이를 속칭 포커 페이스(Poker Face)라고 한다는 둥, 포커 페이스는 노름판에만 있는 기술이 아니라는 둥, 세련된 흥정 테크닉은 살아가는데 있어 아주 중요한 미덕이라는 둥, . . . 잘 보고 배우라는 말까지 곁들여서, 은근히 그녀의 어수룩함을 타이르기까지 했다. 내가 쟁취한 그 심리전의 승전보는 거의 하늘을 찌르고 있었고, 내 손에는 그 전리품들이 잔뜩 쥐어져 있었다. 그러다 보니 발걸음조차도 서사시의 couplet 리듬이 되어가고 있었고, 나는 곧 행진곡이라도 부를 기세였다. (모르는 사람이 약간 있을 수도 있으니 참고로 수다 한마디 하겠다. couplet 리듬이란 서사시에서 영웅의 위대함을 보여주기 위해, 그의 행진하는 걸음걸이를 흉내내어, 장중한 어조로 "하낫 둘 하낫 둘(abab)" 하는 식으로 시의 각운을 맞추는 방식을 말한다. 장중하고 위엄있는 것을 좋아했던 고전주의자들이 주로 많이 사용했지만, 현대의 영국 시인 T. S Eliot은 Prufrock이라는 한 놈팽이가 창녀에게 갈지 말지를 고뇌(?)하고 망설이면서 걸어가는 장면을 이 각운으로 처리한 적이 있다.)


우리는 꽤 시간이 흐르는 동안 걸어가고 있었다(나는 여전히 그 리듬으로. . .). 무언가 생각에 잠겨 한참 동안 말이 없던 그녀가 신이 나있던 내 각운에 파격(solecism)을 하나 삽입하듯 갑자기 내게 물었다.

"그 주인이 잔머리를 굴리고 있었다는 걸 어떻게 알았어? 난 그냥 주문 받은 거라고 하기에, 그런 줄만 알고 있었는데, . . . 나는 아마 죽었다 깨어나도 그 사람이 잔꾀를 부리고 있다고는 간파하지 못할 거야."
그녀는 뭔가 자신이 알지 못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혹은 자신의 삶이 너무 뒤쳐져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작은 불안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본능적으로 알 수 있는 거야! 둔한 감각으로는 절대로 알 수가 없지!"

내 어조는 점점 원망조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서울에서 살기 시작한지 몇 년 되지 않았다. 그래서 사투리 뿐 아니라 지방사람 특유의 어수룩함이 약간 배어있다. 간혹 보이는 그 나른함이 걱정도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못마땅해 하고 있었다. 그래서 사실은 사는데 아무 지장도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 잘 살고 있는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맨 먼저 비난하는 사람은 바로 나였었다. 나의 비난은 주로 영리하게 살아야 한다는 채근에 초점을 두고 있었다. 바보처럼 당하고 살면 안 된다고, 다른 사람들을 잘 간파해야 한다고, 독해야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무시당하거나, 도태된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 . . 뭐 이런 정확한 교재도 없는 교육이 가끔씩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의 교육이 완전히 잘못된 것이었음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 역시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무언가에 떠밀려 내려가듯, 그 교육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거나, 최소한 거부감 없이 실천하고 있지 않은가? 알면서도 말이다. 영리하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사실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요즘 사람들의 행복의 관건이 되어 버린 지 오래이다. 바보처럼 살지 않는 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말인가? 또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잠깐 동안 저 심리전이 내게 가르쳐준 것, 바로 의심하는 능력이었다. 속지 않고 사는 삶! 그것은 바로 누군가를 의심하는 삶이다. 그(그녀)의 말을 믿지 말자! 속셈을 간파하자! 이것이 시장에서 만들어진 상거래 하는 인간들의 심리적 초상이다. 언제부터인가 이 세상에는 모든 사람들이 상인이 되어버렸다(상인 아닌 사람 있으면 손들어 보라!). 우리가 매일 매일 보람을 느낀다고 생각하며 임하고 있는 나의 일터! 내가 앉아있는 자리에서 일어나, 좀 더 넓은 안목으로, 그리고 좀 더 명료한 의식으로, 내 자리가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를 한번 곰곰히 따져보라! 반드시 누군가의 모습이 보일 것이다. 저 만치에서 든든하게 떡 하니 버티고 있는 어떤 모습, 우리가 알게 모르게 계약과 고용이라는 형태로 귀속되어, 보편적인 점원-공동체를 이루며 의지하고 있는, 대머리에 배나온 체형을 하고 입가에는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어떤 모습! (학교에서는 아이들이 이 다음에 놀라지 않도록, 그 모습을 낯설지 않고 친숙한 것으로 받아 들일 수 있도록, 철저히 연습을 시킨다)


어쨌든 비디오 테이프를 팔고 있는 돗자리 주인과 소비자인 나는 시장의 흥정코드 속에서 서로 소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주인 뿐 아니라 나 역시 상거래의 코드로 서로를 보아야 하며, 나는 친구에게조차 그 코드를 권유해야만 한다. 흥정에서 승리하려면 반드시 미끼를 거머쥐어야 한다. 미끼란 바로 상대의 약점을 의미한다. 그래서 내가 잠깐 보였던 흥분의 표정은 그 돗자리 주인에게는 미끼임과 동시에 나의 약점이었던 것이며, 물건을 하나라도 팔아야 한다는 그 상인의 조건은 나의 미끼임과 동시에 그의 약점이었던 것이다. 내가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가진 미끼가 그의 미끼보다는 더 컸기 때문이다. 혹은 그가 발견한 나의 약점보다는, 내가 발견한 그의 약점이 더 커 보이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미끼와 약점의 시이소 놀이를 가만히 보고 있자면, 시장의 코드에는 다음과 같은 공식이 성립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무엇인가를 원하고 욕망하는 것은 나의 약점이며 동시에 상대의 미끼이다. 그러니 승리하려면 자신의 욕망의 표현은 최소화하고, 상대의 욕망은 최대화하라! 당신이 가진 미끼를 상대방이 얼마나 절실히 원하는가에 따라(예로, 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을 거머쥐었다면, 당신의 승리는 확실하다), 당신에게 들려올 승전보의 나팔 소리가 커질 것이다. 그러니 욕망을 최대로 절제하고, 그의 최대의 약점을 잡아야 한다. 그리고 당신의 욕망은 클라이막스에 가서, 그동안 참고 견뎌내었던 고통에 복수라도 하듯이, 한꺼번에 터뜨려야 하는 것이다. 변증법을 공부할 때 자주 보았던 "노예의 부정하는 능력"이 바로 이 비스무레한 것이다. 그는 우선 타인을 부정할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자신을 부정할 줄 알아야 한다. 시장에서 우리는 영리한 노예의 부정이라는 코드를 익혀야만 한다. 그런데 이 부정의 코드는 우리를 끊임없이 배고프게 한다. 아주 오래전부터 인간들은 타인에게 결핍되어 있거나 타인이 원하는 것, 혹은 내가 가지고 있지 않거나 가지고 싶은 것을 서로 주고받으며 살아간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시대는 그 주고받는 행위가 가져다주는 뿌듯함, 충만함을 아주 허기진 행위로 만들어 버렸다. 왜냐하면 주고 받으며 각자에게 결핍되어 있는 것이 채워지기 보다는, 오히려 그 구멍이 더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는 지금 타인의 약점과 결핍을 가리거나 채워주는 것이 아니라, "상품"이라고 하는 그럴듯하지만 기만적이기 짝이 없는 이름으로 타인의 그 약점과 고통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본의 아니게” 끊임없이 이웃의 약점을 찾아 오늘도 아침부터 밤까지 어슬렁거린다. 그녀는 바로 이 빈곤과 허기의 코드를 이해하지 못했다. 왜 그 돗자리 주인과 내가, 보이는 대로 혹은 말하는 대로 믿지 않고, 보이지도 않으며 말하지도 않는 속을 들여다보기 위해 잔꾀를 굴려야하는지, 왜 포커 페이스를 취해서 나를 감추어야 하는지, 부정을 모르는 그녀는 절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한참 동안 말이 없으면서 그녀가 생각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자신의 무능력에 대한 자조였을까? 아니면 잘못된 인생(그나 나나 모두가 불쾌해졌기 때문에)을 살고 있는 돗자리 주인과 나에 대한 측은함이었을까? 사람들의 눈빛을 자세히 보자! 시각(視覺)이란 사물의 표면과 관계하는데도, 우리의 시선은 그 표면에 있지 않고, 보이지도 않는 주름진 심연으로 파고들려 한다. 소외, 고독, 불안과 같이 이제는 너무나 진부해진 주제들은 언제나 저 심층과 관계하고 있다. 펠리니의 영화 <길>에서 짐승 같은 잠파노의 고독 역시 저 심연과 깊은 관계가 있을 것이다(좀 다르긴 하지만). 개인들 각자의 몸에 주름진 심연 뿐 아니라, 개인들 사이에 깊게 패여, 건널 수 없는 강물 하나가 흐르고 있다. 오래 전에 그녀는 내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아무런 심층도 없는, 고요한 상태가 되고 싶어요. 수녀가 되면 그렇게 살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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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에게 있어 선과 악이 좋음과 나쁨으로 치환된다면, 좋음과 나쁨은 어떻게 구분되는가? 즉 어떤 대상들에 대해 우리는 어떤 근거로 그 대상을 좋은 것 혹은 나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여기서 한가지 혼동해서는 안될 것이 있는데, 우리가 어떤 대상에 대해 좋은 것 혹은 나쁜 것이라고 간주할 때에는, 그것을 절대적 가치로서 좋음(선 good)과 나쁨(악 bad)으로 결정한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점이다. 좋음과 나쁨은 가치의 상대적 결정에 의존한다. 따라서 어떤 대상을 내가 좋은 것이라고 말할 때는, 그것이 나의 본성에 적합하거나 나의 본성과 결합하는 관계를 갖는다는 것을 뜻하며, 내가 나쁜 것이라고 말할 때는, 그것이 나의 본성에 적합하지 않거나 나의 본성과 결합하지 않는 관계를 갖는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동일한 대상에 대해 우리는 그것이 어떤 관계 아래에서는 적합하다고 말하기도 하며, 또 다른 관계 아래에서는 적합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사물들은 적합성과 부적합성에 따라 갈라질 것이다: "그 자체로서의 악은 존재하지 않으며, (나에게) 나쁜 것이 존재한다. <인간 신체의 부분들 사이에 존재하는 운동과 정지의 관계가 보존되도록 하는 것은 좋은 것이다. 반대로 인간 신체의 부분들이 다른 운동과 정지의 관계를 갖도록 하는 것은 나쁜 것이다>. 나의 관계와 결합되는 관계를 갖는 모든 대상은 좋은 것이라고 일컬어질 것이다(적합 convenance). 나의 관계를 해체하는 관계를 갖는 모든 대상은, 다른 관계들과 결합되긴 하지만, 나쁜 것이라고 일컬어질 것이다(부적합 disconvenance)"(Deleuze 33). 따라서 우리가 변형과 변화라고 간주하는 것들은 대상 자체의 변형과 변화라고 이해되기 전에, 우선적으로 관계들의 변형과 변화라고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어떠한 행위가 좋은 것인지 혹은 나쁜 것인지를 구분하는 근거는 행위 자체에 있지 않고, 그 행위가 어떤 관계에 의해 생겨난 것인지 아니면 어떤 관계를 생기게 하는지에 달려있다. 그런데 심지어 범죄에 대해서도 이와 같은 규준을 적용할 수 있을까? 스피노자는 네로(Nero)와 오레스테스(Orestes)의 친모살해의 예를 통해 이 문제를 설명한다. 네로가 자신의 어머니(Agrippina)를 살해할 때와는 달리, 오레스테스가 어머니(Clytemnestra, 오레스테스의 아버지 Agamemnon을 죽인)를 죽일 때는 아무도 그를 비난하지 않거나 최소한 그가 무자비한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행위 그 자체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어떠한 행위가 부도덕한 것 혹은 선한 것으로 구별되기 위해서는, 그 행위가 어떠한 사물의 이미지와 연결되는가에 달려있다. "어떠한 행위에 의해 해체되는 관계를 갖는 사물의 이미지와 연결될 때 우리는 이를 나쁘다고 한다(내가 누군가를 때려죽인다). . . . 동시에 같은 행위가 만일 서로 결합하는 관계를 갖는 사물의 이미지와 연결될 때 좋은 것이라고 말한다(연철행위)"(Deleuze 35). 어떠한 행위에 의해 해체되는 사물의 이미지에 연결되는가 혹은 결합하는 사물의 이미지에 연결되는가에 따라 우리는 좋은 것 혹은 나쁜 것이라고 간주하게 된다. 따라서 오레스테스가 친모를 살해 할 때 결합되는 관계의 이미지는, 죽어가는 클리템네스트라와 오레스테의 행위가 아니라, 클리템네스트라에 의해 죽임을 당한 아가멤논의 이미지와 오레스테스의 행위이다. 어머니에 의해 살해된 아버지의 이미지와 아들의 복수의 이미지가 서로 적합한 관계로 연결될 때 우리는 오레스테스의 행위를 긍정적인 것으로 이해하게 된다. 반면에 네로의 경우, 서로 연결되는 이미지는 네로의 살해행위와 아그리피나의 죽음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아들의 행위는 어머니와의 관계를 파괴한다. 연결되는 관계는 아들과 어머니의 관계가 해체되는 이미지일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네로에 대해 나쁜 것 혹은 무자비한 것이라고 간주하게 된다. "다시 말해, 분명히 악덕과 덕은 구별된다. 선한 행위가 나쁜 행위도 구별된다. 그러나 이 구별은 행위 그 자체나 행위의 이미지 자체에서 나오지 않는다('어떤 행위도 그 자체를 고려하면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Deleuze 36). 따라서 의미는 계열화되는 관계들에 따라 결정된다. 의미는 관계들이 적합하거나 부적합한 관계들의 위상학에 따라 발생하는 것이지 그 자체 생기는 것이 아니다.

인용 및 참고
Deleuze, Gilles. Spinoza: Practical Philosophy. trans. Robert Hurley. San Francisco, City Lights Books, 1988.
Spinoza, Benedict de. A Spinoza Reader. ed & trans. Edwin Curley. New Jersey, Princeton UP,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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