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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07/02/08 S. T. Coleridge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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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 2007/02/01 데리다 입장
  30. 2007/02/01 데리다 입장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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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삼 년 전쯤, 친구는 내게 식물 하나를 선물하였다. 꽃무늬로 사방에 돋을 새긴 작은 화분에, 네 가닥의 잎이 단도처럼 쭉 뻗어 오른 것이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산세베리아(Sansevieria, Bowstring Hemp), 혹은 천년란(千年蘭)이라고 부르고, 꽃말은 관용이라고, . . . 전자파를 차단해주는 식물이라며 어디서 정보를 듣고는, 컴퓨터 앞에 많은 시간 동안 앉아있는 나를 배려해서 사 온 것이다. 난 동물들뿐 아니라 식물을 기른다는 것에 대해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아니 주제넘은 짓이라고 생각을 했다. 간혹 길을 가다 보면 멋진 옷으로 잘 차려 입고, 쇠사슬 목걸이를 채워 강아지들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면상들을 보게 되는데, 그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침을 뱉어주고 싶은 생각이 들곤 했었다. 식물이라고 다를까? 차라리 요긴하게 쓸만한 물건을 선물하지, . . . 살아있는 식물은 별로 달갑지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내 건강을 걱정해준 마음도 있고, 또 하도 성화를 부리기에, 어쩔 수 없이 눈에 띄지 않게 책상 한 구석에 밀어 놓았다. 전자파를 차단하려면 가급적 스크린과 내 눈 사이에 있어야 할 텐데, 저만치 구석에 숨어 있으니, 선물의 용도는 이미 무의미해진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녀가 가끔씩 집에 와서 물을 주거나 먼지를 닦아 내어 돌보았던 것 같은데, 나는 저 식물이 정말로 저기에 있는지 조차 의식하지 못했다. 어쩌다가 스크린이 너무 눈이 부셔, 녹색을 보면 괜찮아진다는 말을 떠올리고는, 잠깐씩 응시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렇게 쳐다보는 동안에도 나는 저것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알게 되었다. 저것이 내 책상 한 구석을 점유한지 이 삼 년이 훨씬 넘었는데, 또 나는 물도 한 번 제대로 뿌려본 적도 없는데, 어느새 이파리가 세 가닥이나 자라나 있는 것이다. 하나는 가장 높이 솟아 올라 있었고, 나머지 둘은 서로를 정답게 감싸 안으며, 체조를 하듯이, 아니 탱고를 추듯이 비틀어져가며 자라나고 있었다. 처음엔 이파리가 네 가닥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식물인줄 알았는데, 지금 자세히 보니 두 뿌리를 가진 두 개의 식물, 즉 한 쌍의 식물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한 쌍 중 한 뿌리에서는 뾰족이 높게 치솟아 투사의 모습을 한 이파리가 생겨나고 있고, 다른 뿌리에서는 두 가닥이 무용수들처럼 나선형을 이루며 꼬여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뿌리의 저 아래쪽을 돋보기로 자세히 보니, 이미 또 다른 두 가닥의 이파리가 조금씩 조금씩 돋아나고 있었다. 정말이지 놀라운 일이었다. 처음에도 그랬지만, 난 아직도 저 식물의 본래 모습이 무엇인지, 앞으로 어떤 모습일지 전혀 예측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원래 한 뿌리가 두 뿌리로 변한 것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두 뿌리였는지, 아니면 세 뿌리가 될지, 아니면 그 이상이 될지, 아니면, 결국에 가서는 하나의 거대한 뿌리에 매달려 공존하고 있는 잔가지들인지, . . .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들 자신도 모를 것이다. 이제는 화분이 아주 작게 느껴졌다. 저것들이 자라나 언젠가는 저 단단한 화분도 깨트리게 되겠지. 화분이 너무 단단해 깨트릴 수 없다면, 그냥 죽어버리던가.


저렇게 무럭무럭 커 가고 있는 걸 보며, 저 식물이 나를 거부한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하니, 조금은 위안이 되었다. 환경이 맞지 않아 죽어가는 식물을 보고 있으면, 마치 누군가로부터 거절을 당한 듯한 불쾌함이 느껴진다. 난 처음에 저것이 내 방에 들어온 순간, 얼마 되지 않아 죽어버릴 것이라고 단정했었다. 내 몸에서 풍기는 냄새라든가, 호흡이라든가, 정신과 영혼이 오염시킨, 이 음산하고도 폐쇄적인 방안의 공기에, 저것이 질식해 버릴 것이라고,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나 조차 숨이 막혀 버릴 것이라고, . . . 정말로 나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저 미물에게 어리석은 희망을 품지 않고, 오히려 귀찮아 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죽어가거나 시들어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 일은 너무도 괴로운 일이다. 그래서인지 난 살아있는 것이 곁에 있다는 사실이 유쾌하지 않았다. 특히 식물의 죽음에는 동물과는 전혀 다른 서글픔이 있다. 살아있는 존재에 대한 나의 거부는, 말하자면 나 자신의 절망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바래가고 있는 녹색의 식물들을 방 안에 들여놓으며, 또 하나의 절망과 죽음을 하루 하루 바라보게 될 줄 알았다. 그런데 나를 비웃듯, 저것이 저렇게 버젓이 고개를 쳐들고 살아있는 것이다.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내가 잠에 들어 있거나, 나 자신의 의식에 빠져 몽롱한 상태에 있거나, 어떤 일에 열중해 있는 동안에도, 저 식물은 내 옆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 방에는 스스로 달라져가는 것이 나 말고도 또 있었던 것이다. 살아있는 존재는 의식을 넘어서 있다. 그것은 우리가, 즉 의식적 존재가 의식을 하든, 하지 않든, 싫든, 좋든, 필요하든, 필요하지 않든, 우리와는 무관하게, 우리를 외면하며, 자신 안에서 스스로 살아간다. 어느 날 내 의식에 주의력이 생겨나서 바라보고 이해한 것은 그 결과일 뿐이다. 식물은 그 자체가 시간-존재이다. 지각할 수 없는 흐름 속에서, 동물의 자연에의 투쟁이나 공간적 운동보다도 더 급진적이고 강렬한 삶이 거기에는 있다. 그래서 식물은 경이로운 존재이다. 그것은 살아있는 동물이 움직이거나 자라난 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차라리 붙박여 있는 책상이나, 콘크리트 건물이나, 조각난 쇳덩어리가 꿈틀거리며 커가고 있는 것을 보는 것 만큼이나 놀라워 보인다.

Posted by huun

괴로운 일이지만 불가피한 우리의 인간적 조건(혹은 한계)에 대해 비판을 하고, 우리가 자부하는 이성의 능력으로 그 조건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자. 잠정적이지만 이 과정을 일종의 윤리적 완성의 길이라고 불러보자. 나 혼자만의 연구가 아니라 함께 고민하고 풀어야 할 몫이라는 명목 하에 설득을 해야 할 입장이므로, 또 스타일을 추구하며 멋을 부리기에는 별로 시간이 없는 중요한 문제이므로, 그 모든 개인기를 접고(항상 노력 중이지만), 담백한 문체로, 사례를 들어가면서 가급적이면 쉬운 얘기로부터 시작하겠다.

의사이면서 작가인 케이트 스케넬(Kate Scannell)이라는 사람이 쓴 글 중에 "Skills and Pills"라는 짧은 에세이가 있다. 이 에세이는 암이나 에이즈 같은 불치의 환자들을 대하면서 느꼈던 개인적 심정, 의사로서의 자신의 직분에 대한 사명감, 나아가 자신의 인생의 변화 등을 병원생활의 사례를 적어가며 쓰고 있다. 글을 따라 그 내용을 간략히 소개해 보겠다:

그녀는 처음부터 에이즈 환자들을 맡을 생각은 없었다. 다만 대학에서의 연구보다는 지역 사회 의료 활동에 관심이 있었을 뿐이었다. 지금은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에이즈 환자들이 있는 병동에서 2년 이상을 근무하고 있는 중이다. 근무한지 얼마 안 되어서는 에이즈 환자들의 슬픔, 복잡한 질병상태,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 등을 경험하면서, 절망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이들의 모습에 놀랐다. 절대로 극복할 수 없는 나락 아래에서도, 작은 희망으로 살아보려고 애쓰는 그 애처로운 안간힘들에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그녀는 자신이 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의사로서의 지식을 최대로 동원하는 것, 자신의 손에 든 노련한 솜씨(skills)와 가방에 든 약(pills)뿐임을, 그리하여 그들을 치료하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어느 누가 보아도 그녀의 그와 같은 결심은 자신뿐 아니라 환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었으며, 가장 최선의 선택처럼 보였다. 그 이후 그녀의 생활은 에이즈 환자들을 돌보고 치료하는 일과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병원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마치 야전장(夜戰場)의 신병처럼, 질병과 싸우고 또 싸우고, 적이 보이지 않으면 현미경을 들이대어 색출하고, 보이는 적은 메스의 날카로움으로 모조리 자르고 태우고 . . . 자신이 보고 배운 의학의 놀라운 발전과 의학적으로 첨예한 문제들이, 서로 서로 부딪치면서 불꽃을 뿜으며 드러나도록 만반의 태세를 갖추어가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은 에이즈 전문 저격수와도 같았다.

환자들의 수척함이 너무 심해서, 언젠가 사진에서 본 아우슈비츠 포로들은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였다. 종양으로 심하게 손상된 한 젊은이는 노틀담의 곱추를 연상케 한다. 이들과 함께 하면서 질병과 싸우고 있는 그녀를, 적을 앞에 두고 차디찬 심장을 소유한 병사와 같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녀 역시 인간이었으므로 환자들에 대한 동정심과 가슴 아픈 연민이 없었을 리 없다. 그녀는 이 병동의 슬픈 이야기와 불행을 입 밖에 낸다든가, 다른 사람들에게 전한다든가 하지 않았으며, 자신이 왜 이들에게 감화되어 뜨거운 가슴을 억누르며 전쟁을 벌이고 있는지 조차 말하지 않았다. 자신이 보고 겪은 저 불행을 아무에게나 함부로 내뱉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냉철한 과학자였을 뿐만 아니라, 타인의 불행을 즐기지도 않았고, 인간에 대한 진지함도 견지할 줄 아는 겸손한 사람이었다.

그럭저럭 몇 달이 지났다. 그러다가 라파엘(Raphael)이라는 한 환자가 들어왔다. 그녀는 이 22살의 청년을 잠깐 동안 겪으며, 의사로서의 인생에 큰 변화가 일어났음을 고백한다. 그 청년은 크게 부풀어 오른 자주색 혹 덩어리들이 두 눈을 가리고 있어서 앞을 볼 수 가 없었다. 흐르는 눈물은 눈꺼풀을 힘들게 쥐어짜야만 겨우 압착되어 비집고 나올 정도였다. 짙은 자주색 다발성 종양들이 림프 마디로 이리저리 스며들어 입천장까지 타고 올라와 버렸다. 또 다른 종양 덩어리가 오른쪽 발바닥에서 다리를 타고 올라와 걸을 수도 없었다. 폐 주변에는 액체 덩어리들이 누르고 있어 숨을 쉬기도 힘들었다. 그의 상태는 처참했다. 라파엘은 몇 번이나 그녀에게 도와달라고 요청을 하였다.

우리의 저격수는 그 구조 요청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떠올려야 하는지, 또 무엇이 중요한지를, 이내 갈고 닦은 실력으로 자동인형처럼 하나 씩 하나 씩 수행한다. 그녀의 귀에는 오래 전 선생님들이 의술을 연마하면서 가르쳐주었던 그 목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호흡 장애를 바로 잡아야지!" "아냐! 아냐! 빈혈 먼저 판독하고 !" "전해질 장애 교정하고, 약으로 붓기를 빼라구!" "그래! 그래! 간단한 문제가 아냐!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구! 마지막으로 카포시 육종 잊지 말라구!" 그녀는 한쪽으로는 라파엘의 애원을 들으면서, 다른 한 쪽으로는 참호에서 불호령처럼 떨어지는 명령을 무전기로 하달 받듯이, 단호한 선생님들의 최첨단 조언을 듣고 있었다.

긴박한 와중에도 그녀의 활약은 대단하였다: 환자의 요청이 긴박해질 때마다, 그녀는 환자의 신체 정보를 채취하기 위해 정맥과 동맥에, 딱딱하게 부어오르거나 종양으로 굳은 부분을 잘 골라 피하여, 재빠르게 그러나 슬며시 주사바늘을 꽂는다. 라파엘은 괴로움을 견디지 못해 다시 도와달라고 흐느낀다. 그러면 이번엔 신(神)만이 할 수 있을 생명(숨) 불어넣기처럼, 환자의 코에 플라스틱 캐뉼러를 꽃아 산소를 공급한다. 그러나 여전히 그가 다시 도와달라고 애원한다. 이번엔 그에게 꽂힌 IV line으로 칼륨을 투여한다. 그리고는 환자의 상태에 대해 조언을 잊지 않는다. "고비는 넘겼어요! 화학요법은 아침에 얘기해 보도록 하죠!" 그리고는 "휴우 !!" . . . 병원을 나오면서 그녀는 지쳐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최선을 다했다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해버렸다고, 가방을 비웠다고, 그러니 환자의 불행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신으로부터 왠지 모를 확신을 느꼈다. 그 확신은 모든 것을 소모해버린 자만이 느낄 수 있는 쾌감 같은 것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그 날 밤 병원 당직 의사가 그 환자로부터 부름을 받았다. 라파엘은 그 의사에게도 도와달라고 애원하였다. 그런데 당직 의사는 라파엘의 몸에 꽂힌 정맥 주사와 칼륨을 모두 중단하고, 혈액검사와 수혈도 취소하였다. 그리고는 라파엘에게 간단히 몰핀(진통제)만을 투여해 주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라파엘은 당직 의사에게 미소 지으며 감사의 인사를 하고, 그 날 밤 서서히 숨을 거두었다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사실적 이야기의 끝이다.

이렇게 읽어가다 보니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무엇이 문제일까? 그녀는 최선을 다하지 않았던가? 환자의 불행을 저버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불행을 진심으로 가슴아파 하지 않았던가? 의사로서 양심적이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사명감을 가지고 직분을 다 했으며, 개인이 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자신에게 그리고 타인에게 성실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런 의사 아니 그런 인간을 찾아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어느 모로 보나 그녀는 의사로서 또 인간으로서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인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이 아닌가? 그런데 라파엘은 그런 그녀를 몰라준 것일까? 너무 아파서 정신이 없었던 것일까? 종양이 뇌까지 퍼진 것일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한참 후 그녀는 라파엘을 생각하면서, 무엇이 문제였는지, 어째서 라파엘은 그녀의 정성이 아닌 당직 의사의 성의 없는 조처에 미소를 지었는지를 회고하고 있다.

    ". . . 가끔 라파엘을 생각하면서, 그에게 용서를 빈다. 그가 죽은 후부터는 이전과 똑같이 치료할 수 없었다고. . . . 눈동자가 달라졌다고, . . . 이제는 화자의 말 속에 숨은 소리를 더 분명히 듣고 있다고. . . . 죽어서 질병에 찌든 시체로부터 빠져나와, 자유롭게 날아오르는 라파엘의 영혼처럼, 수년 동안 내게 스며든 전통 서구 의학이 마련해 준 옷이 너덜너덜해진 넝마처럼 흐드러져 버렸다고. 이제 내 안의 목소리를 다시 듣게 되었다고, 나를 가르쳐준 늙은 현자들의 합창이 아닌 연민 어린 감성이 더 크고 또렷이 들린다고. 나는 가끔 꿈을 꾼다. 수년 동안 의술을 배우며 긴장하고, 온 힘을 소진하고, . . . 24시간 내내 힘겹게 싸우며, 전통 서구 의학으로 중무장한 의사가 되려고 주어 모았던 잡석 더미에 압사 당하는 꿈을. 그 잡석들 중에는 다음과 같은 단단한 구조의 부분을 이루는 것들도 있다: 더 많은 테크놀로지를 끌어들이려는 경향; 유능한 의사라면 절대로 생명을 "잃지" 않고 구해낸다고 하는 왜곡된 철학; 환자를 다룰 때에 감각(sensor)을 사용한다든가 직관적 통찰에 의존하는 의사에 대한 가혹한 징벌; 연민에 호소하여 환자를 진단하고 치료하는 의술의 금기 등."

서구인으로서 그리고 그 당사자로서 그녀가 취하고 있는 서구 의학(과학)에 대한 회의는 문제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녀가 어떤 계기를 통해 저러한 통찰에 이르게 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저 구절 속에서 읽을 수 있는 그녀와 라파엘의 관계 뿐 아니라, 의학, 과학, 나아가 그것들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어떤 윤리적 문제이다.

한마디로 말해 그녀의 반성은 서구 의학이 물질적인 것만 보았다는 깨달음에서 비롯된다. 사물은 지각-감각으로 포착할 수 있는 물적 상태를 취하고 있다. 거기에는 일정한 형태의 부피가 있고, 크기가 있으며, 온도가 있다. 또 사물은 특정한 외형을 취하고 있으며, 이 외형은 사회적 기능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기도 하고, 자연적 관계의 질서에 따라 형성된 것이기도 하다. 또 사물들은 특정 공간에 위치하고, 그 공간의 일정량을 점유하고 있다. 그래서 두 사물이 동일한 공간에 위치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공간 속에 위치한 사물들은 불연속 하여 서로 간에 고립되어 있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사물들은 자신이 위치하고 있는 공간의 한계를 점하고, 혹은 그 한계를 모양 짓는 윤곽선(figure)을 띠고 있다. 우리의 지각-감각은 그 윤곽선이 마련해 놓은 구분에 따라 사물들을 구별한다. 그래서 산의 윤곽이 있으며, 나무의 윤곽이 있으며, 집의 윤곽, 사람의 윤곽, 물의 윤곽, 빛의 윤곽이 있다. 지각-감각이란 모든 사물을 공간 속에 위치시키고, 그 공간적 위치로부터 판독된 표면과 윤곽선을 식별하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사물은 사회적인 용도 또는 기능이 있다. 어떤 관점에서 사물은 무엇인가에 쓰이도록 생겨났으며, 무엇인가에 ‘대해’ 혹은 무엇인가를 ‘위해’ 작용-반작용이나 기능을 하도록 되어 있다. 사물의 이와 같은 사회적 용도나 기능은 그 사물을 항상 다른 사물들과 상대적인 관계(‘. . .에 대해’, ‘. . . 를 위해’)를 갖도록 해준다. 그래서 이 관점에서 건물의 본질은 시멘트로 지어진 구조물로서의 그 건물 자체보다는, 주거환경으로서, 거주민들을 위한 거주지로서 존재한다. 또 그러한 용도와 기능을 위해 그 건물의 디자인이 결정될 것이다. 이때에 사물의 기능과 형태는 합목적적인 일치를 이루고 있다고 말한다. 인공물이 아닌 자연물의 경우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물이 취하고 있는 물적 상태란 컵에 담겨진 용액으로서의 물, 마실 수 있는 것으로서의 물, 혹은 산소와 수소의 특수한 결합으로서의 물, 물이라고 명명된 것으로서의 물, . . . 한이 없다.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집을 돌보는 가장으로서의 아버지, 살림을 꾸리는 안주인으로서의 어머니, 가르치는 사람으로서의 선생님, 여자를 보호하는 남자, 질병을 고치는 의사, . . . 이렇게 모든 존재자들은 물적 상태 즉 외면적인 형태와 기능을 가지고, 다른 존재자들과 사회적이고 상대적인 관계를 통해 살아간다. 라파엘 역시 물적 상태의 존재이다. 그는 육체적 존재이며 특정 좌표를 점유하고 일정량의 에너지를 사용하고 있는 공간적 존재이다. 또한 사회적 존재이기도 한 그는 누군가의 아들이고, 누군가의 고용자이며, 누군가의 친구이다. 또한 지금 그는 이 병원의 환자이다. 사회적 존재인지 육체적 존재인지 아니면 다른 어떤 존재인지 결정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의사에게 있어 라파엘은 악성 질병에 시달리고 있는 환자이다. 따라서 그의 본질은 (일시적이지만) 질병 속에 혹은 질병의 치유 속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서구 의학(혹은 과학)은 이 질병을 육체적인 것, 더 정확히 말해 물적 상태의 존재로 환원하여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의사에게 있어 라파엘은 기관 부위별로 분류된 육체 혹은 질병을 담고 의료기기에 놓여있는 사물(死物) 외에 그 무엇도 아니다. 라파엘의 육체적 상태란 바로 수학적 육안(수와 양으로 측정된)으로 보이는 혹은 과학적 지각(현미경의 지각, 청진기의 지각, 의사의 지각)에 의해 포착된 질병의 표현이다. 이렇게 해서 라파엘은 수와 양, 공간, 좌표들 위에 마취되어 놓인다.

수학적 혹은 과학적 지각이 존재의 의미를 인식하는 방식에는 몇 가지 특징적인 것이 있다. 두서너 가지만 추려보겠다.

(1) 저 방식은 모든 사물의 흐름과 운동을 정지시킨다. 그것은 마치 저격수가 날아가는 새를 맞추기 위해 겨냥하고 있는 구멍 속의 한 점과 그 새의 운동성을 일치시키듯이, 사안이 되고 있는 특정 구역을 절단하여 그 구역이 속해 있었던 원래의 전체의 흐름으로부터 완벽하게 고립시키고 추상한다. 이런 식으로 우리 모두는 원자적 존재이다.

(2) 흐름과 운동성이 제거된 추상적 존재들은 스스로를 표현할 수 없으므로, 우리가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그것과 동류(同類)의 다른 존재와의 지시 관계가 상정되어야만 한다. 사물들을 현실적으로 구별하기 위해서는 공간적인 한계(윤곽선)와 특정한 위치(고정성) 같은 것이 필요하고, 그 공간성과 고정성은 사물들을 상대화함으로써만 분명해 질 것이다. 우리가 객관적이라고 혹은 현실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모두가 이러한 외면적 관계 혹은 상대적 관계를 취하고 있다. 이것은 언어의 질서, 지성의 질서 혹은 수의 질서에 속하는 문제이다. 가령, 우리는 절대적 크기라든가 절대적 양과 같은 개념을 생각할 수가 없다. 사물의 크기나 양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려면 다른 것과 대 보거나, 특정 좌표에 배치하여 관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자연수 2는 그 스스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다른 자연수 1이나 3이 아닌 것으로서만 존재한다. 또한 단어 “길”은 그 자체 절대적 존재가 아니라, 단어 “김”이나 단어 “골”이나 단어 “굴”이 아닌 것으로서, 다시 말해 그 단어와 통사적 관계를 맺는 다른 단어와의 차이나 부정에 의해서만 존재할 뿐이다. 이렇게 서로간의 현실적 관계 즉 외면적 관계 내에서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은 다른 것과 상대적이다. 특히 어떤 것이 “더 . . . 한가” 혹은 “덜 . . . 한가”를 따져봄으로써 훨씬 선택이 용이해지기도 한다(주1). 이들은 모두가 사회적 존재이다. 언젠가 카프카(F. Kafka)는 이런 종류의 사유를 통한 존재의 이해를 두고 허기가 느껴진다고 말한 바가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가 텅 비어있기 때문이었다.

(3) 이와 같이 수적이고 양적인 사유 체계 속에 우리의 근본적인 환상이 있다. 비교하거나 부정하는 행위에서처럼, 사물들을 상대적 지시 관계로 이해하려면 특정한 기준이 있어야 한다. 전혀 다른 본성을 갖는 사물들이라고 해도, 이 관계에 들어가는 대상들은 동일한 하나의 기준(본성)을 공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푸른 하늘과 붉은 하늘은 비교할 수 있어도, 푸른 하늘과 선인장은 비교하지 않는다. 또 우리는 “효율성”을 “(비)효율성”으로 부정할 수는 있어도, “효율성”을 “허기”로 부정할 수는 없다. 어떤 경우든지 상대적 지시 관계란 본성의 동일화이며, 이 동질성의 체계 속에서 사물들은 본성상의 차이가 소거되고 정도상의 차이만을 갖는 동일한 본성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운동을 수와 공간의 이행으로 이해한 엘레아학파를 비판하면서, 베르그송[H. Bergson]이 아킬레스와 거북을 두 마리의 거북이라고 표현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들은 본성상이 차이가 없이 동일한 것으로 뒤섞여 버렸기 때문이었다)

(4) 지시적 관계를 이루기 위해서는 둘 이상의 짝이 필요한데, 만일에 그러한 짝이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실은 이것이 더 중요한 문제인데, 가령 라파엘과 같은 환자가 그녀 앞에 주어졌듯이, 우리 앞에 제시된 사물이 둘이 아닐 때, 하나 즉 일자(一者)일 때, 그래서 동일하거나 유사한 짝을 발견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하는가? 이 때에 긴요하게 쓸 수 있는 우리의 고유한 능력이 있다. 바로 우리 자신을 투사하는 것이다. 나 자신을 기준으로 하여 비교를 하든가 아니면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기억이나 지식을 견주어, 우리 앞에 주어진 그 대상과 공유하고 있다고 가정된 동일한 본성(기준)을 우리 자신으로부터 도출해내는 것이다. 우리의 아주 오래된 습관, 즉 세계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으며, 나를 주목하고 있다는 유아적 습관은 바로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홀로 설 수 없는 우리의 정신적 박약! 다시 말해 언제나 하나의 중심, 기둥을 움켜쥐어야만 비로소 일어설 수 있는 나약하기 짝이 없는 오만!

물론 의사들은 라파엘을 환자로 간주하면서 자신들과 견주어 비교하거나 동일한 것으로 다루지는 않는다. 대신에 그 자신의 기억이나 배운 지식을 그 환자와 견주어 생각한다. 이렇게 해서 라파엘의 물적 상태들은 그녀의 기억과 지식이 되어, 암이라든가 에이즈라든가 나병이라든가 하는 그녀의 명명법으로 만들어진 좌표와 공간 속에서 뒤섞인다. 의학의 역사는 일종의 분류의 역사라는 말이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질병이란 특정한 형태로 분류되어 특정한 형태의 치료방식이 결정된 분류된 증후들이라는 것이다. 질병의 이름이 주로 증후들을 발견하고 분류한 사람의 이름에서 명명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옛날에 역병이나 나병환자들이 많았던 이유는 사회적 역사적 이유 때문이기도 하지만, 질병을 분류하는 당시의 관행이 특정한 유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과 기억과 개념들을 가지고 새로운 것들을 마중 나간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이란 우리 자신이 질문하고 해답을 선택하여 결정한 용어와 개념들의 총체에 불과하다. 우리가 철썩 같이 믿고 움켜쥔 그 기둥이 사실은 바로 우리 자신의 넓적다리였다는 것! 공중으로 뛰어올라 떨어지지 않기 위해 꽉 붙든 것은 고작 우리 자신의 발모가지였다는 것!

또한 그 용어와 개념들을 우리가 선택하고 결정하는 행위는, 우리에게 주어진 외적인 조건들로부터 자유로운 상태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가령, 우리는 안경을 쓰고 있는 조건 속에서 사물을 보기도 하고, 현미경을 들여다보기도 한다. 맨눈이라고 다를까? 근시(近視)일 수도 있고, 원시(遠視)일 수도, 색맹일 수도, 시력 1.5일 수도, 또 1,0일 수도, . . . 자연적 조건 역시 완전한 기둥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녀가 깨달았던 서구과학의 조건이란 바로 사물들을 겨냥해서 공간 속에 정지시켜 놓고 바라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조건이었다. 우리는 어떤 특정한 위치에 서서 사물들을 바라보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관점(인간적 관점)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다. 더욱이 과학은 우리의 신체 위에 여러 가지 보철물들(수, 테크놀로지, 개념, 언어 등)을 삽입해서, 그렇게 확장된 공간의 넓이만큼이나 왜곡된 상(像)을 가지고 진리를 만들어 낸다. 우리가 상상으로 정지시켜 이해하고 있는 저 표범은 사실은 아주 빠르게, 우리가 눈치 챌 수도 없을 만큼 빠르게 달리고 있는 중이다. 환자를 질병이라는 물질 상태 즉 스스로는 표현할 수 없는 육체 덩어리로 파악하면서, 심지어는 푸줏간의 고깃덩어리처럼 부위별로 뚝 잘라 사진도 찍고 채취도 하고 해가며, 그 죽은 것을 되살리기 위해 기억을 불러들이고, 오래 전의 그 수다스러운 늙은 현자들의 합창을 떠올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조건! 그녀에게 있어 라파엘의 소리는 들리지 않은 것이 아니라 불필요했던 것이 아닐까?

이는 의사들이나 과학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수학이나 과학 성적이 좋지 못한 우리 또한 무엇이든지 이미 잘 알고 있다고 믿는 것을 경유하여 세계를 바라보고 판단하고 반응하고 행동한다. 유사하거나 동일하다 싶으면 같은 것으로 간주하고, 어떤 이유에서인지 마음속의 욕망과 바람을 가지고 적당히 눈감으면서 사물들을 뒤섞어 혹은 상대화하여 이해한다. 머릿속에 만들어 놓은 허구를 무엇인가에 혹은 누군가에게 투사하고, 마치 보자기로 물건을 뒤덮어 버리듯이, 제멋대로 어림짐작으로 지각을 기억으로 덮어 버린다. 이러한 만행은 머릿속에 한두 가지의 지식을 담고 있는 사람들이 더 잘 한다. 비교하거나 견주어서 생각할 기준을 이미 가지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저 사람? 응 . . . 내가 저런 사람은 좀 알지!” 이러한 부류의 인간은 자신이 보고 싶어 하는 것, 욕망하는 것(대부분 타인을 부정하는)을 마음속에 그려놓고, 타인으로부터 그것과 비슷해 보이는 이미지들을 추상하고, 거칠게 묶어서, 바다보다도 넓은 편견의 고랑 한복판에 타인을 끌어들여 그의 순수한 셔츠에 흙탕물을 튀긴다.

과학은 사물을 객관화하고, 양적으로 잘라내고(가령, 수학적 미분의 균등분할처럼), 혈액으로 분류하고, 세포를 떼어내어, 공간에 버티고 있는 물질적 상태의 불연속으로 이해함으로써, 그 사물을 대하는 사람과 대상을 분리하여 서로 무관한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이런 말을 고의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하는 말인데, 과학이 나쁘다거나 없애자는 말이 아니다. 그 조건과 한계를 말하는 것이다). 그녀가 라파엘의 소리를 자신이 알고 있는 늙은 현자들의 목소리로 대체했던 것은, 그녀 자신이 라파엘에 대해 무지했으며 무관했기 때문이다. 무지(無知)란 기억을 떠올리거나 암기 하는 능력의 부재가 아니라, 바로 내적인 체험의 부재를 의미한다. 아마도 그녀의 귀에는 카프카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동물소리 같은 것만 들렸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라파엘의 소리를 성실히 듣지 않았으며, 라파엘의 본질과는 아무 상관이 없을지도 모르는, 단지 자신만이 알고 있는 편협한 기억과 지식에 의존했다. 의사들은 환자의 통증조차도 생리학적 수치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의 이와 같은 기하학적 믿음이 그들을 부정확하며 무식한 사람처럼 보이게 하는 이유이다. 의사는 환자가 아픔을 호소하거나 외과적 상태에 대한 심리적 변화를 호소하면 대체로 믿지 않으려 한다. 그들은 심리 현상이나 감정과 같은 주관적 경험을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감정이나 심리가 다소 변덕스러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엄연히 어떤 상태를 반영하고 있는 영향 관계이며, 우리의 조건을 이루고 있는 심리적 실재이다. 심지어는 의사들조차도 매시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환자의 호소를 엄살쯤으로 생각하면서, 자신의 지식 안에 그 통증이 아직 등록이 되지 않은 탓인지, 자신도 알 수 없는 어떤 불쾌한 감정에 사로잡혀 그를 윽박지르기까지 한다. 실제로 내 경험상 이런 의사도 있었다.
"아프다구요? 그럴리가요?!"
" . . . . ?! . . @#$%^&*"

사물들을 무관한 것으로 고립시켜서 파악하는 방식으로 수 년 동안 중무장된 그녀는, 단 한 번도 라파엘 같은 사람을 알지도 못했으며, 그와는 무관한 관계 속에서 그의 치료를 담당했으며, 그녀가 해댄 일이라고는 기껏해야, 그의 애원이 들릴 때 마다 자신들이 만든 기계를 들이대어, 피를 뽑고, 살 속에 주사바늘을 밀어 넣어 투약하는 일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녀의 성실과 진지함이란 얼마나 조잡하고 가볍고 무성의한 것인가! 그것이 뭔지도 모르면서, 눈을 가리고 자신들이 만든 신체 지도만 보면서, 환자의 몸에다가 금속과 기계들을 삽입해대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그것도 일이라면 뭐 할 말은 없다. 현대 과학은 주관성을 배제함으로써, 마치 의사들이 의학을 일종의 공업으로 이해하고, 스스로를 육체 수리공으로 축소시켜버렸듯이, 사물로부터 시간을 몰아내고, 내적 체험의 기회를 박탈하고, 그것을 침상 위에 마취된 환자로 간주해 버렸다. 그녀가 미안해했던 것은 그를 살려주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다. 질병을 잘못 판단했기 때문도 아니다. 가방에 아직 남아있는 것이 있었기 때문은 더욱 아니다. 라파엘을 온전한 존재로 알지 못했다는 것, 편협하게 한쪽 부분만 알고 있었다는 것, 과학이 너무나 투박하고 거칠고, . . . 그래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너무나 무례하게 굴었다는 것, 그것을 사과하고 싶었던 것이다.

과학이 일반화시킨 사물의 단단한 외형이나, 텅 빈 물적 상태와는 본성적으로 다른 질서가 있다. 비교나 부정과 같은 외면적인 관계를 가지고는 설명할 수 없는 내적 질서, 그래서 존재를 보다 완전하게 하는 것, 존재가 본질을 그 자신 안에서 스스로 표현하게끔 하는 것. 가령, 저기에 서있는 저 건물은 그 용도나 기능만이 아니라, 그것 자체가 품고 있는 육중함이라든가 우람함 혹은 높게 치솟은 빼어남이 있다. 칼은 자르는 도구이며 무기이지만, 동시에 그 칼끝에는 날카로움이 서려있다. 그녀는 의사이며 여자이며 혹은 어머니이지만, 그녀 자신만의 온화함, 열정, 좌절, 미소가 있다. 이 바위덩이는 움직이지 않고 쓸모도 없고, 그냥 여기에 던져져 한없이 이렇게 있지만, 그 자신만의 고유한 단단함이 있다. 라파엘은 종양덩어리들이 흉측하게 둘러싼 육체의 소유자 혹은 질병의 발현이지만, 그 자신만의 슬픔과 절망과 포기가 있다. 이들은 모두가 권리상 본성상 그 자신 안에 존재한다. 물론 이 모든 감정들(affects)은―사람만이 감정의 소유자가 아니다. 사물들도 그 자신의 감정이 있다―자신들을 담고 있는 육체나 외형을 필요로 한다. 물질로서의 칼이 없다면 그 날카로움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건물의 형상이 없다면 그 육중함과 빼어남 역시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육체가 아니라면 그 온화함이나 미소가 무슨 현실적 효력이 있겠는가? 바위덩이가 아니라면 그 단단함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용기(容器)에 담겨진 물이 그렇듯이, 저러한 감정들 역시 육체나 물질에 담기면서만, 그 조건에 묶이면서만 현실적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의 본질을 그릇으로부터는 찾을 수 없듯이, 그 감정들은 육체가 아니며, 육체로는 설명할 수가 없다. 오히려 육체를 파고들기도 하고, 거기에 흔적을 남기고, 힘의 덩어리를 느끼게 하고, 육체 안팎으로 이리저리 들락거린다. 얼굴이 그 좋은 예일 것이다. 얼굴은 육체가 아니다. 그것은 그 자체 감정이다. 몸속에서 무수하게 울려대고 있는 분자들의 진동과 그 감정들은 안면 근육이라고 하는 육체를 통해 표현되고 있다. 우리가 누군가의 얼굴에서 느끼는 그 고유함은 안면 근육 때문이 아니다. 안면 근육 위에 표현된 것이긴 하지만, 안면 근육과는 본성적으로 다른 감정들, 혹은 무수한 시간 속에서 축적된 고유한 진동의 패턴, 혹은 다른 육체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표현하는 얼굴의 진정한 주체 때문이 아닐까? 얼굴의 색조를 이루고, 얼굴에 파선을 내고, 얼굴을 강렬하게 하고, 평온하게 하고, 그 안면 근육에 말할 수 없는 파동 같은 열정을 표현하게 하는 것! 지각이나 지시체계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 느껴지는 것! 그것이 무엇인지 정의 내릴 수는 없지만, 기구나 연장을 들이대면서 대면하는 의사들이 알고 있는 그런 존재는 아닐 것이다. 최소한 언제나 표정을 관찰하라고 권유하는 바이다. 그러다보면 언젠가는 그의 육체로부터 무엇인가가 빠져나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라고.(주2)

따라서 참을성 있는 사람도 있고, 민감한 사람도 있으며, 외과적 상태에 무디게 반응하는 사람, 소심한 사람, 대담한 사람, 겁쟁이 등 무한하게 있을 수 있다. 그들은 동일한 물적 상태를 소유한 육체들이지만, 본성적으로 다른 감정의 표현들 역시 가지고 있다. 육체란 그것을 소유한 사람의 감정과 분리되지 않는다. 존재를 완전하게 이해하려면 바로 그것까지도 느껴야 한다. 따라서 의학이나 과학의 인간적 완성이란 그 분야 자체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명목상 인간들의 수만큼이나 다양한 의학이 필요하다). 그것은 보다 더 심오한 차원에서 제기되지 않으면 안 될 문제이다. 더 정확히 말해 사물의 완전한 이해란 시간의 차원에서 드러난 본질의 문제이다. 왜냐하면 조바심을 견디지 못해 우리 자신 안에서 저 사물과 비교할 기준을 아무리 도출해 낸다고 해도, 감각이 허용하는 한계 내의 저 육체들을 들여다보면서 내가 알고 있는 기억으로 그것을 뒤덮어 버리거나, 내 의식의 빛으로 그것을 환희 투사한다고 해도, 그 본질이 드러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 생각 속에 있는 그런 것이 아니라, 그것과는 무관하게 그 자체로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스스로 자신의 본질을 드러낼 때까지 기다리는 것, 오로지 기다림을 통해서만 우리는 그 사물 자체에 도달하고, 그 사물이 스스로 표현하고 있는 감정을 느낄 수가 있다. 본질은 언제든지 나중에, 맨 나중에 나타나는 법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시간성 속에서 배워야할 윤리이다. 한꺼번에 이루어지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다. 그것은 적당한 거리에서 이루어지는 순간적 지각이나 삽시간의 포착이 아니라, 가까이 다가가거나 아니면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지 않으면 결코 드러나지 않는다.(주3)

사물의 단단한 그러나 얇은 윤곽선 아래에는 무거운 상태가 내재하고 있다. 어떤 통증이 배제된 채로는 느낄 수 없는. 가까이 다가가 접촉함으로써 발생하는 피부의 자극일 수도 있지만, 오랜 시간에 쌓인 감내, 그 무게가 주는 통증이랄까? 그래서 마음대로 어떻게 해볼 수 없는. 그냥 곁에서 기다리는 수밖에는 없는. 그래서 가령, 환자를 완전히 안다는 것은, 그의 육체 상태를 포함하여, 그를 표현하는 것 혹은 그의 뉘앙스를 보는 능력의 문제이다. 이것이 바로 의사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갖추고 완성해야 할 능력일 것이다. 수학의 균등분할 식의 거친 미분이 아니라 예술의 섬세한 미분, 시간이 아니라면 결코 완성할 수 없는, . . . "질적 미분"의 능력!

이것을 깨달은 그녀는 실제로 어떻게 했을까? 다소 소박한 형태이긴 하지만 그녀가 선택한 방식을, 그리고 그 우울함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통찰을 들어보자.

    "결국, 내가 진찰하면서 쏘아대었던 과녁은 점점 희미해지고 작아졌다. 나는 더 이상 이 경이로운 질병 때문에 공포에 질리지 않았으며, 더 이상 악몽을 꾸지도 않았다. 이따금 울기도 했고, 곁에 서서 임종을 지켜보기도 했다. 그들의 소리를 또렷이 듣고, 그들을 분명히 보고, 머릿속에서 만큼이나 마음속에 있는 진실을 그들에게 분명히 말할 수 있음을 알고 나니, 이젠 환자들과 소통할 수도 있게 되었다. 몇 몇 에이즈 환자들에게는 "복잡한 의학적 질병" 대신에, 아이스크림이나 동네 제과점 빵을 가장 중요한 치료법으로 대체해 왔다. 나는 공식적으로 햇볕 쬐기나 Macy's 백화점으로의 여행을 처방하였으며, 내 구닥다리 솜씨와 알약이 필요 없는 환자들에게는 마사지를 처방하였다.

    일일 회진 시간에는, 어떤 정신착란 증세가 있는 에이즈 환자를 방문하였다. 그는 가끔 도리깨질을 하면서, 자신의 텍사스 목장에 돌아가서 돼지와 닭을 기른다고 생각하였다. 며칠 동안 우리는 말썽부리는 돼지들에 대해, 그리고 어떻게 하면 달걀을 팔아 수지맞을 수 있을지에 대해 토론하였다; 한번은 옆집(다른 병동의 다른 환자)을 방문하여 농장식 아침을 먹었다. 그는 한 번도 내 청진기를 보거나 자신의 팔에 꽂힌 주사바늘을 보지 않았다; 죽을 때 평화로웠고 고통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모든 에이즈 환자들은 자신의 질병과 죽음을 깨닫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몇 가지 단계를 경험한다(주4). 그럴 때면 나 역시 에이즈의 유령들에 맞서고 있는 의사로서 비슷한 단계를 거쳐 왔다고 느낀다.

    나는 이 질병의 슬픔과 순응 사이에서 흔들거리고 있다. 나는 희망을 현실로 누그러트리는 법을 배우고 있다. 내가 본 모든 죽음들에 대답해야만 하는 오랜 불행을 통해, 평화를 찾는 법, 하루하루를 약속된 내 죽음과 편안하게 나란히 걷는 법을 배워왔다. 그리고 나는 감사한다. 내 자신의 목소리를 다시 듣고, 연민을 느낄 줄 아는 감성의 힘을 다시 느끼게 된 것을. 가끔 라파엘 생각이 난다."

(주1)
비교를 통해 사물을 이해하는 방식에는 부정(否定)의 관념―가령, B의 부정으로서의 A, 없음의 부정으로서의 있음, ". . . 이 아님"으로서의 ". . . 임", 죽음이 아님으로서의 삶, 정지의 부정으로서의 활동 등―이 있다는 점,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사유에 있어 근본적 무기력 상태를 발생시키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너무 이론적이고 복잡하므로 하지 않겠다.

(주2)
베르그송주의자인 들뢰즈(G. Deleuze)라는 철학자는 "탈영토화(deterriorization)"라는 용어를 쓰면서, 예술의 목적이 탈영토화라고 말했는데, 바로 육체로부터 그 감정들을 빼어내는 것, 육체로부터 그 미소와 온화함과 빼어남을 해방시키는 것, 종양으로 죽어 가는 물적 상태로부터 그 슬픔과 절망과 포기를 자유롭게 하는 것, . . . "고양이는 빼고 그 미소만을 추출하는 것" , . . . 그리하여 사람이나 물건과 같은 육체들이 사라져도 남아야할, 그 자체 느껴지는 영원한 본질을 온전히 보존하는 것, . . . 이것이 바로 예술가들이 하는 일이라는 뜻 이었다: "젊은 여자는 수천 년 전에 취했던 자세를, 더 이상 그녀에게 의존하지 않는 몸짓을 그대로 유지한다. 대기는 작년 어느 날 한줄기의 바람과 빛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그것은 그 날 아침 그것을 들이마셨던 어느 누구와도 관계가 없다."

(주3)
가령, 영화에서 만큼이나 문학 고유의 클로즈업이 있다. 영화적 클로즈업이 사물에 가까이 접근하거나 크게 확대하는 방식이라면, 문학의 클로즈업이란 바로 시간성 속에서 드러나는 본질의 열림을 의미한다. 공간적 클로즈업이 사물의 감정을 추상해내는 것만큼이나, 시간적 클로즈업은 기다림 속에서 사물로 파고들게 한다. 이야기가 그 좋은 예이다. 도망치고 있는 사람을 멀리서 보면서, 뒤쫓는 경찰이 보이면 그가 도둑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혹은 시계를 자꾸만 들여다본다면 우리는 그가 약속시간에 늦었음을 생각한다. 지각의 대상이 포착된 것이다. 그러나 도망가면서 그가 경험하고 있을 공포와 긴장을 느끼려면 직접 가까이 다가가지 않으면 안 된다. 경찰이나 시계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영화는 사물을 지각할 수 있게 하는 공간적 정보들(거리나 주변 환경 등)을 클로즈업으로 제거하고, 그 사물을 독단적 대상―비판과 성찰이 불가능한 대상―으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그것으로부터 감정을 추출해낸다. 클로즈업으로 포착된 대상은 지식이나 지각의 대상이 아니라 그 자체 느껴지는 것이 된다. 가까이 다가가 보라. 감정이 느껴질 것이다. 이것은 또한 최근의 광고가 상품의 이미지를 통해 소비자들을 감동시키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러나 문학에서는 이와 같이 공간적 조건들의 변형을 통해서가 아니라, 예를 들어 그의 사연이나 이야기를 들어보는 식으로, 시간적 수준에서 그 도둑을 가까이 들여다 볼 것이다. 그래서 문학은 광고가 절대로 도달할 수 없는 독특한 클로즈업을 소유하고 있다. 어쨌든 영화적 클로즈업은 우리를 감동하게 하는 반면, 시간의 클로즈업은 우리로 하여금 연민을 느끼게 한다(그리하여 우리를 초인이 되게 한다).

(주4)
Kubler-Ross 도식이라고 부르는데, 이에 따르면 환자들은 대략 다섯 단계의 과정을 거친다고 한다. 첫 번째는 부정의 단계이다(This isn't happening to me!). 두 번째는 분노의 단계이다(Why is this happening to me!). 세 번째는 타협의 단계이다(I promise I'll be a better person if . . . ). 네 번째는 절망의 단계이다(I don't care anymore). 그리고 다섯 번째는 순응의 단계이다(I'm ready for whatever comes).

Posted by huun

이 글은 미국의 철학자 Martha Craven Nussbaum의 저서인 Love's Knowledge : Essays on Philosophy and Literature 중에서 한편의 논문인 "Finely aware and Richly responsible: The literature and the moral imagination"을 재구성하였다. 이 저작에서 Nussbaum은 문학과 철학, 욕망과 윤리 등 다소 상반적이거나 대립적인 관계처럼 보이는 문제들을 여러 문학작품의 예를 통해 논의하고 있다. 이를 위해 그녀는 미국 19세기 작가인 Henry James의 The Golden Bowl이라는 작품을 다룬다. 그러나 그녀는 두 대립적인 영역에서 어느 한쪽의 승리를 선언하기 보다는, 어떻게 서로 다른 두 세계가 조율될 수 있을까? 에 대해 질문하고 있다.

1.
명료한 인식과 통찰을 방해하는 외부적인 조건들 속에서도, 진실을 보고 재현하려는 노력이 헛되지 않다고 헨리 제임스(Henry James)는 생각했다. 이러한 노력들 속에서 도덕적 상상력의 역할은 "아무 것도 잃지 않(게 하)는"(on whom nothing is lost)것이며, 이것이 바로 이 글이 다루고 있는 궁극적인 테마이다.1) 즉 아무 것도 잃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또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Maggie와 Adam의 번민은 승인된 도덕 안에서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있다.2) 이것은 또한 죽음과의 맞대면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의 상상적(미몽) 관계의 죽음, 낙원 속 사랑의 죽음, 탄생과 죽음이 공존하는 현실세계의 수긍.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딸이 사라진 삶을 인정해야 하며, 딸의 입장에서는 그녀의 탄생(여인으로서, 현실세계로의 탄생)이 결국 아버지의 제도적 권위와 위엄에 대한 거부를 의미하며, 이것이 결국 아버지를 살지 못하게 한다는 죄의식을 견뎌야 하는 것이다. 제도 속에서의 아버지의 위엄을 보존하는 문제와, 자율적 존재로서 딸의 (아버지로부터의)분리의 문제. 이것이 이 소설에서 전형적인 도덕적 딜레마이다(욕망과 그것의 포기).

이들은 삶의 관계들이 부여하는 긴장으로부터 도피하고 싶어하지만, 그들은 낙원의 아름다움(부녀간의 충만한 관계)을 더럽히지 않고 여기로부터 벗어나야 하는 것이다: 딸을 포기해야 하는 고통. 아버지를 포기하지 않고서는 남편을 사랑할 수 없는 고통. 이것은 결국 확장되어 범 우주적인 회의와 실존적 선택의 문제로 나아간다: "왜 배 안에서 함께 살수는 없을까? . . . 왜 항상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따라서 여기에는 희생이 따른다. 아버지는 Charlotte과 미국으로 가야만 하며, 더 이상 딸을 자신의 낙원에서 보호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이것이 궁극적인 해결책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한쪽의 희생을 강요하게 되는 것이지, 양쪽이 모두 원해서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희생조차도 욕망할 수는 없을까?).

선택의 문제는 본질적으로 선택의 대상들을 양적(量的)으로 규정하게 한다. 왜냐하면 선택은 하나의 관점에서만 수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며, 이 과정에서 대상들은 비교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더 나아가 단일한 관점 안에서 선택의 항(대상)들은 양립 불가능하다. 그러나 남편과 아버지 중 하나만을 선택(혹은 포기)해야 한다는 Maggie의 딜레마가 해소되는 과정은, 바로 이 양립 불가능한 두 선택의 사안이 양립 가능한 것으로 치환되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녀는 단일한 관점을 파괴하면서 시작한다. 남편 Amerigo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에서, Maggie는 사랑의 양태를 복수화 함으로써, 남편과 아버지가 서로 비교될 수 없음을 말한다: 질투에 싸인 관능적 사랑과 그것을 넘어서는 사랑.3)

사랑에 대한 그녀의 이러한 이해는, 아버지와의 관계를 확립된 가치들이 아닌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려는 시도 속에서 나타난다. 제도로부터 보호되어 한번도 의심해 보지 않았던 두 사람의 관계는, 부지불식간에 밀려오는 Maggie의 감성적 직관에 의해 점검되기에 이른 것이다. 사랑에 관한 Maggie의 고백은 (아버지와 딸의)관습적으로 추상화된 논의가 아니라 질투나 성욕까지도 포함하는 매우 현실적인 논의이다. 이제 그녀의 사유 안에서 아버지라는 제도적 존재는(딸로서 자기 자신을 포함하여) 사라져 버리고, 욕망을 가진 살아있는 실존으로 이해되고 있다. 아버지는 이제 살아있는 실존으로서 한 남자가 되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버지 역시 새로운 인지방식을 취하게 되는데,4) 이로써 자신이 이미 경험했었던(그러나 어느 누구에게도 자신의 경험을 설득시키지 못했던) 것을 딸이 겪고 있음을 그녀의 대사들과 그녀의 이미지들 속에서 포착하게 된다. 그녀의 경험이 자신의 그것과 다르지 않음을 파악하게 됨으로써, 그의 사유에서 제도적으로 부여된 기능화된 존재로서 딸은 사라져버린다. 무의식적으로 느끼고 있었지만 애써 의식의 표면으로 떠올려 이해하고자 노력하지 않았던, 부녀 관계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보여주는 그녀의 대사에서,  그는 그녀의 관능성과 자유로움 그리고 성숙한 이미지들을 보게 되는 것이다: "따뜻한 여름 바다에서 부유하는 . . . 은빛의 . . . 경쾌하고도 찬란한 . . . 물고기". Maggie는 이제 아버지의 보호를 받으며 한없는 안락 속에서 미몽의 상태에 빠진 아이가 아니다. 오히려 두 부녀의 관계의 본질을 언급함으로써, 아버지로 하여금 살아있는 존재를 발견하게 해주는 여인이 되었다.

이와 같은 이미지의 발견은 확립된 가치와 고정된 윤리의식까지도 문제 삼을 줄 아는 아이의 순진 무구한 유희를 그녀에게서 보게 되며(유희로 가득 찬 인생), 그는 아무런 반론 없이 수긍하면서 만족해하는 구경꾼처럼 그녀를 바라보게 된다. 더욱이 이 같은 태도의 변화는 그녀에 대한 긍정적 이해로 나아가게 되는 동기가 되는데, 그것은 아버지가 딸의 통찰력을 수긍하고 이해하고 공감함으로써 그녀를 자신과 동등한 실존적 존재로 여기게 되었다는 점이다. 딸은 더 이상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며, 능동적이고 자율적인 개체임을 이해하는 과정은, 존재의 소유가 어떻게 존재의 긍정으로 전환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지금까지 기능화된 존재로서 소유대상(혹은 보호대상)은 포기되어야 한다.

이로써 희생의 의미는 새로운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강요된 희생이기보다는 발견을 통한 소유의 (자발적인)포기를 뜻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찬탄과 고통이 동시에 출현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새로운 존재의 발견이며 동시에 소유로 굳어버린 자아가 파괴되는 상반되는 경험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Maggie의 존재뿐 아니라 Adam 자신의 발견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소유대상의 상실뿐 아니라 소유하려는 자아의 파괴를 의미한다. 견고하게 구성되어 굳어버린 자아를 파괴하지 않고는 새로운 존재가 될 수 없으며, 심지어는 그것을 발견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녀가 관계 자체를 문제 삼았을 때는, 뻣뻣하게 굳어서 자리잡은 확립된 가치들 속에서 내면화된 자아를 파괴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자연스럽게 관점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다: James는 희생을 상상적인 해석행위로 이해한다. 그것은 Adam의 (제도적)욕망에 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여인으로서 Maggie의 존재를 (새롭게)인지함으로써 가능해지는 것이다. 실존은 양적으로도 개념적으로도 교환하거나 환원할 수 없다. 따라서 소유(possess, grasp)를 포기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James가 의미하는 바 희생적 지각(직관)이다.

이러한 희생적 지각은 어떻게 발생하는가? Henry James는 이것을 시적인(lyric) 언어로만 포착할 수 있다고 이해한다. 시적인 언어는 사물의 본질을 정의(define)하거나 분석하지 않기 때문이며, 사물을 양화(量化) 하거나 고문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언어는 질료들과 기호들의 발산을 감지하는 언어이다: 예술언어의 질문방식은 "이것은 … 무엇인가?"가 아니라 "이것은 … 어떠한가?"이다. 시적이고 서정적인 예술언어의 표현은 질료의 문제로부터 시작한다. 따라서 존재를 도덕적으로 수긍하고 긍정하는 문제는 단순히 (본질의)이해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지들(징후들)의 충만한 개별성과 관련되면서 나타나게 된다. James가 현실적 존재들의 관계를 이러한 질료적인 언어로 이미지화하지 않았더라면, 이 장면들이 환기하는 긍정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도덕적인 주제들은 상상적인 해석과 실존의 긍정을 통해서만 가능해지는 문제이며, 상상적 해석과 존재의 긍정은 이미지들(기호들, 징후들, 양태들)과 연관된다. 물론 이미지는 개념적으로가 아니라 질적인 섬세함 속에서, 그러한 언어들을 통해 부지불식간에 튀어나온다. Maggie의 에피파니처럼 말이다.(의식의 눈뜸; 사랑의 지식)

기호와 인상들이 만들어내는 이미지는 개별적으로만 출현한다. 만일에 작가가 동일한 존재나 상황에 대해 다른 용어나 어조 혹은 어구들로 표현했다면(paraphrase), 그 느낌들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윤리적 판단의 문제와도 관련된다. 스타일의 문제는 단순히 형식의 문제가 아니라 통찰력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말하는가의 문제는 무엇을 말하는가의 그것과 분리되지 않는다(사랑은 어떻게 표현하는가의 문제이다): 중요한 것은 뉘앙스와 어조의 섬세한 디테일이 지배적으로 스며들어 있다는 점 . . . 만일 Adam이 이러한 단어들과 목소리와 어조로 이 순간에 적절하게 잘 말하지 않았더라면 더 이상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고 할 수 없었을 것이다 . . . 그의 조심성과 조용함이 이 성과의 일부를 이룬다 . . . 도덕적 담론의 "뻣뻣한 용어들"로는 . . . 고매한 가치를 무디게 할 뿐이다. 일종의 "민첩한 새처럼" 이 용어들을 유연하고도 유쾌하게 날아다니는 새처럼 . . . 이 가치들을 잃지 않고 다른 말로 쓰려면 다른 작품을 쓰는 도리밖엔 없다. 작품뿐만 아니라 존재와 상황은 언제나 특수하며 단수적(개별적)이다. 그것은 언어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한마디로 말해 존재는 유일하다. 그것은 언제나 그 자신이 아닌 다른 것들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구별되며 차이 난다.

그러나 문제는 단수적인 차이 자체가 아니라, 거기서 발생하는 정서(기쁨)에 있다. 어느 것으로도 교환하거나 치환할 수 없는 능동적 존재의 발견. Maggie의 실존뿐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도. Adam의 희생이 슬프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것은 자율성으로 채워진 능동적 희생이다: 그녀를 물고기의 이미지로 감지하는 것은 정확히 말해, 그녀를 아는 것이며, 그들의 관계(상황)를 이해하는 것이며, 이 관계 속에서 "아무 것도 잃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 . . James가 보기에 도덕적 지식이란 단순히 명제들을 개념적으로 포착하는 것이 아니며, 심지어는 특수한 사실들을 지적으로 소유(grasp)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감지(perception)하는 것이며, 전체의 복합성을 보는 것이며, 명료함 속에서 구체적 현실을 느끼는 것이며, 풍부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감지하고 느끼는 활동은 실존의 무한함을 사유의 틀 속으로 채워 넣기 위해 고문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물 그 자체가 뿜어내는 관점의 여러 양상들을 가능한 한 잃어버리지 않고 가장 가까이서 음미하는 활동이다. 예술언어는 철학언어보다 더 가깝다. Maggie를 아는 것은 그녀의 분리된 존재, 그녀의 적실성(felicity)을 보고 느끼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인식하는 것이 가장 잃지 않는 방식이다. 만일 그가 이러한 반응과 이미지들이 없이 동일한 일반적 사실들만을 포착했다면, 그래서 제도적으로 기능화된 딸로서 그녀를 이해하고자 했더라면, 그녀를 진정으로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녀 역시 아버지를 기획된 가치들과 제도가 부여한 역할로서 자랑거리 혹은 일종의 예술품(work of art)이 아니라 살아있는 존재로 이해함으로써, 도덕적 균형과 사랑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이것 역시 소유를 포기하는 문제이다: "그의 힘은 곧 그녀의 힘이고, 그의 긍지는 곧 그녀의 긍지이며, 그들은 서로 점잖게 겨루고 있었다. . . . 동등함, . . . 상호작용 . . . 대상의 힘이며 동시에 해석의 힘 . . . 둘 다 긍정됨 . . . 서로를 포기하면서 동시에 서로의 존엄성을 보존하려는 노력 . . . 모두 도덕적 위엄을 달성 . . .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서로간의 풍부한 끈을 만들어냄 . . . 도덕적 소통 . . . 유사한 그림을 공유"(153). 여기서 그림을 공유한다는 바가 의미하는 것은 동등하게 같은 세계에서 공존하는 원리를 이해한다는 것이다. 예술적 공유가 아니라면 어떻게 동일한 것을 관점들의 차이로 공유할 것인가? 따라서 이 소설에서 보게 되는 다양한 이미지들이 딸의 것인지 혹은 아버지의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이다. . . . 이미지와 그림들의 공유; 이미지들은 두 사람 모두에게 속한다. 같은 그림이 각각의 관점으로 스며 듦 . . . 두 의식과 두 관점을 용해 . . . 이것은 그들의 분리와 독립성을 혼동시키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관심과 주의가, 어떻게 동일하게 창조된 듯 보이는 세계에 서로 다른 두 분리된 개체들을 거주하게 하는가를 보여주는 문제이다(고립되고 단절된 신체들이 같은 세계에서 공존하는 주제).

2.
그러나 이러한 초 감성적 존재들의 도덕성은 원리와 공약 같은 것들이 없다면 자칫 자의적인 내면의 심미적 특질로 과장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한 좋은 예를 James는 Bob과 Fanny의 관계를 통해 보여준다. 즉 책임이 없다면 감성적 지각이 얼마나 위험한 유희가 될 수 있는가. 그리고 지각없는 의무가 얼마나 둔하고 맹목적인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5)

여기서 책임의 의미를 다른 측면에서 보면, 진지함이나 문제의 심각함에 대한 통찰로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또한 내적인 강렬함과 연결될 것이다. 이미 Adam의 희생의 예에서 보았듯이, 윤리적 책임은 개인의 욕망을 억압하는 방식이어서는 곤란하다. 억압은 윤리적 사유의 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외면적인 원인이며 동기이기 때문이다. 윤리는 개인의 욕망을 억압하는 기제가 아니라, 억압으로부터 욕망을 끌어내는 방식, 즉 내적인 강렬함을 발생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그랬을 때 비로소 이 강렬함과 진지함을 잃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고, 섬세한 배려들이 가능해진다.

물론 예술적 창조는 자의적으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이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에서 비롯된다. 예술가들의 의무는 리얼리티를 정직하고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일반적 원리들과 내면화된 규칙들을 배제하는 것으로는 이러한 정직함을 유지하기 힘들다. 진지함은 원리와 습관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데, 왜냐하면 이 원리들은 자의적으로 도출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필연적인 경로들을 통해 발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훌륭한 지각(perception)의 과정은 필연적인 조건(natural reality)들을 고려하지 않고는 가능하지 않다. 즉흥적인 행위가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자유는 필연에 대한 통찰인 것이다(심포니와 재즈의 예). 즉흥연주를 토대로 하는 재즈에서도 조화의 문제가 배제되지 않는다. 오히려 독특한 개인의 특수성을 조화의 관점에서 이해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연주가 바로 이것이다.6)

어떠한 창조적 행위에서도 역사, 원리, 구조 혹은 문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며 그것에 책임이 있다. 전통적인 문맥을 완전히 벗어나려 해도 그것은 불가능하다. 새로운 상황에 쉽게 동화되고 변화되는 관점은 James 식의 윤리가 아니다. 확립된 가치들과 체계는 몸을 둔하게 하지만 동시에 삶을 유지하는 조건이 되어 버렸다. 이를 쉽게 떨쳐버릴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필연적인 조건들 속에서 선택된 삶의 양식이기 때문이다. 불가피한 것에 대한 통찰은 요소들에 충실한 것이며, 이것이 또한 진지함을 이루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Maggie는 아버지를 쉽게 잊을 수 없으며, 아버지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들 상호간의 조심스러움의 전체 과정은 "바로 그들 사이의 얇은 막이 아주 사소한 잘못으로도 뚫어질 수 있다는"것을 아는 과정이다. 훌륭한 즉흥연주란 이 "예민한 직물"을 보존하는 것이지, 찢는 것이 아니다(156). 재즈 연주가들은 자신에게 집중하는 시간 속에서, 가장 윤리적인 섬세한 배려들을 보존한다. 연주가들은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보다도 재즈적 윤리는 내면적인 강렬함과 진지함으로 발생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내면성, 즉 내적 강렬함으로부터 발생해야 한다(발생적 윤리). 외면적인 악보나 지휘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율적이고도 강렬한 내면적 진지함에 의해 주변에 펼쳐진 다양한 형태의 문맥들이 고려되는 즉흥연주여야 한다는 말이다. 이 내적 강렬함이 어디서 나오는가? 이 대답을 대신해서, 우리가 분명히 알고 있는 것은, 그것이 뻣뻣한 용어들과 동일성으로 고착된 가치들 속에서는 결코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풍부하게 해석하고 반응하는 능력이 없다면, Maggie와 Adam은 어떠한 규칙과 확고한 공약들이 운용되는지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섬세한 지각이 없는 단순한 의무는 맹목적이며 따라서 그것은 아무런 힘이 없다(Bob의 경우).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의 문제는 구체적 상황, 즉 우리가 지금 어디에서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가를 발견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감성적 직관은 언제나 사유와 이성에 앞선다. 우리 자신을 보편성 속에 안주하도록 하는 것은 게으름을 감추려는 노력이다: 둔감함은(obtuseness) 한마디로 윤리적 실패이다.

3.
이 작품은 반복해서 개별적인 것을 잘 조율해서 지각하는 문제와 규칙이 지배하는 일반적 의무간의 대조적 관계에 대한 고찰을 하고 있다. 나아가 이 두 세계가 각각 독립적으로는 왜 도덕적으로 충분하지 못한가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기도 하다.

① Bob은 규칙과 일반적 개념에 몰두하는 인물; 특수한 것을 무시함; 지적반응의 결여; 즐거움의 부재 . . . . ② Fanny는 극단적 감성주의자; 위험할 정도로 섬세하게 조율된 지각을 소유; 일반적 규칙의 극단적 거부. 따라서 그녀의 상상력은 너무 자유롭고 산만하고 화려하다(157-58). 이 두 대조적인 성격의 인물들로부터 작가가 질문하는 것은 어떤 것이 완성된 인식(fine awareness)인가 하는 점이다. 이와 관련하여 Fanny의 예를 통해 경고하는 것은 규칙과 조화를 거부하는 극단적 감성주의가 자칫 자아 도취적인 환타지에 이를 수 있다는 점, 남편의 간단명료한 사고가 나름대로 가치가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감성적 지각 그 자체는 실천적 추론에 있어 자기 충족적인 형식이 아니라는 것이며, 스타일 자체만으로는 불충분하다는 것이며, 도덕적 가치는 내용과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감성적 지각은 존재의 능동성을 발견하지만, 매우 우연적이며 따라서 그것은 수동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기쁨을 촉발하긴 하지만, 우연적이며 수동적이다. 그래서 그것은 그 자체 스스로를 반복하거나 (선험적으로)구성하지는 못한다. 여기서 요구되는 것이 바로 이론적 사유이다. 이론적 양식(common-sense)은 우리가 어디서부터 지각이 시작되어야 하는지, 단수적인 것(차이)들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 또한 이들의 기쁜 경험들을 어떻게 반복할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는 지표로 작용한다(기쁨과 반복의 메카니즘. 반복의 이중성).

결국 James는 지각과 규칙의 대화(dialogue)를 통해 어떻게 윤리적 토대, 책임 있는 비전이 구성되는지를 말하고 있다(우연과 필연의 계주관계, 주사위 놀이, 수동촉발과 능동촉발의 관계, 영겁회기). 결국 Fanny와 Bob은 서로에게 무엇이 일어났는지를 인정하고, 그들의 맹목성이 빚은 결과들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인다. 그녀는 남편에게서 도덕적 고통의 "보다 섬세한 의미"를 감지하고, 이것이 남편의 옛 의무감에서 배양된 것임을 이해한다. 반면에 Bob은 그녀가 매우 약한 배에서 위험스럽게 항해하고 있음을 상상한다. 결국 그는 그녀를 위해 "신비로운 연못가에서" 그녀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 그녀가 언제라도 필요하다면 그에게 신호를 보낼 수 있도록 그녀의 옆에 있어야 함을 깨닫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지각의 예민한 감성과 이성의 단조로움, 발랄함과 완고함은 모두 삶의 토대로 기능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그러나 언제나 전자가 먼저 나온다). 이 둘은 모두 "신비스러운 연못"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이 혼합은 보편성을 넘어서는 사랑하기에 의해 가능해 질 것이다. 규칙과 지각의 대화는 사랑에 의해 고무되고 유지된다. 사랑은 지각의 영역이며 어떠한 도덕적 일치에도 우선한다(사랑은 상대방이 뿜어내는 기호들에 예민해지고, 그 기호들을 특화하는 활동). James는 도덕적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만일 우리가 실제적인 것의 공유된 지각을 얻으려면, 불일치와 질적인 차이들 속에서 우선 사랑을 해야 할 것이라고 밝힌다(불일치 속에서 일치를 경험하는 것으로서 사랑; 금지됨으로써 더 달콤해지는 단절되고 고립된 존재들의 유일한 통로로서 사랑; 사적인 관계, 즉 상대방을 어떤 것으로도 치환할 수 없는 유일한 존재로 만드는 관계; 그러나 이 사랑은 잘 짜여진 온전한 기능을 갖는 개인이 아닌 부분적 대상을 특화하는 작용이다; 제도적(통계적)으로 구분된 남/녀의 파괴). 사랑은 정의와 윤리에 앞선다. 다시 말해 사랑은 윤리의 토대이며 나아가 삶의 토대이다.

James가 말하는 "비결(getting the tip)"은 지각과 사랑에 근거한 도덕성 안에서 가능하다. 이것은 추상적인 법의 언어에서가 아니라, 친구의 안내에 의해, 혹은 사랑하는 사람의 안내에 의해(단어로, 이야기로, 이미지로), 구체적인 상황의 새로운 면을 보면서 시작된다. "tip"을 준다는 것은 넌지시 실마리를 주는 것이다. 이것은 말을 통해서가 아니라, 부지불식간에 느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존재의 근원과 본질을 질문하는 방식(…은 무엇인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양태들을 포착하는 방식(…은 어떠하다)으로 가능해 진다. 스타일이 중요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표현하는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James식의 지각과 행위는 James식의 예술적 산문으로만 표현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존재와 사물에 가장 근접한 방식이다.

비결을 주고받는 것은 추상적 결정론이나 철학적 산문에서는 불가능하다. 심지어 이러한 작품들 속에서도 우리는 직관적 방식으로 구체성에 도달하지 않는가?(수학적 직관의 경우) 비결을 아는 것은 단순한 기술 습득이 아니라 올바른 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규칙은 존재하지만 그것이 체계를 만들지 않는다. 규칙은 경험적 내면화가 이루어놓은 양상에 따라 성숙해 진다(장인들의 섬세함). 이 과정에서 단일한 하나의 관점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관점의 복수들이 내재한다. 마찬가지로, 사물의 질적인 차이들은 특이성을 가지며 비결정적이다. 사물의 특이성과 비결정성은 기호학적 담론의 텅빈 계사(繫辭)로서의 의미가 아니라 그것이 꽉 들어차 있기 때문에, 무한하게 감싸여 있는 질료들 때문에, 더 이상 하나의 관점으로는 판단할 수 없는 혼란의 상태를 의미한다(기관없는 신체, 부정사, 지속, 순수시간, 아이온적 시간). 그러나 또한 이것은 새로운 존재가 발생하고 그것을 볼 수 있는 계기이며 동력이기도 하다. Maggie가 아버지를 그리고 아버지가 Maggie를 무엇으로도 치환 가능한 텅빈 실재가 아니라 꽉 들어찬 질료로 보게 되었다는 것은 하나의 관점으로는 도저히 담아낼 수 없는 존재를 보았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존재는 풍요롭다.

James는 단순히 언어적 재현만을 하지 않았다. 거기에는 무언가(something) 설명할 수 없는 어떤(something) 섬세함이 있다("어떤"이라는 말버릇의 징후들). Maggie는 이를 상상력으로 창조적으로 이루고 있으며, 이것은 작가의 말들 속에서 적절하게 번역되고 있다. Maggie가 이것을 적절하게 말로 옮겼는가는 이차적인 문제이다. 사실 감성적 지각에는 말이 필요 없다. 그러나 우리의 행위들은 예술적으로 표현된(putting) 일련의 형태로 이루어진다. 질료들은 예술이라는 그릇 속에 담기면서 육화된다.

4.
그렇다면 철학 텍스트는 왜 중요한가? 문학 텍스트 자체는 다른 도덕적 관심의 개념들과 자신을 분리시켜 구별 짓거나 특화 하지는 못한다. 이성, 사유, 철학 텍스트는 다른 개념들과의 관계를 조망하도록 하는 역할을 갖는다. 비판하고 분류하는 작용이 철학 텍스트의 실질적 역할인 것이다. 만일 그것이 방자하지 않고 겸손하다면 말이다. "Aristotle이 말하듯이 철학적 설명은 구체적인 특수성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겸손해야 한다. 그것은 단지 방향을 안내해주는 윤곽 혹은 도안만을 제시해야 하는 것이다. 실질적인 삶의 내용은 그 윤곽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문학텍스트의 동반자로서, 동맹자로서, 제안하고 암시하는 기능으로서"(숲과 나무의 관계)(161). 결국 문학은 삶의 내용을, 그리고 철학은 그것의 형식을 이루고 있는 셈이다. 마치 문학이라는 질료를 담아 내는 그릇처럼.

James에 의하면 윤리적 행위와 관련하여 창조의 관점에서 그것을 파악하는 것은 근거 없는 상대주의에 빠지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창조란 실질적인 것에 관계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술은 보는 것을 다룬다 . . . 그것은 삶의 정원에서 그 소재를 뽑아낸다"(163; James 재인용). James에게 창조는 상대주의적인 것도 자의적인 것도 아니다. James 식의 예술은 어떠한 것으로부터도 창조적 자유를 느끼지 못한다. 제대로 말하기 위해 얽매인 존재, 아무 것도 놓치지 않는(놓칠 수 없는) 존재, 둔하지 않으며 민첩한 존재. . . . 보고 듣고 느끼고 판단하는 인간 능력의 섬세한 발전; 덜 놓치는 능력. 그래서 더 책임이 있는 것. 이것이 바로 James가 말하는 도덕적 지각(상상력)인 것이다.

소설은 바로 그것이 우리의 직접적인 삶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우리 스스로를 삶으로부터 거리 두게 만들며, 이를 지각할 수 있는 윤리적 입장을 갖도록 한다(심미적 자율성). 여기서 우리는 소유하지 않는 사랑을 발견하며, 선입견 없는 배려와 분별 있는 관계들을 맺는다. 이미 언급했듯이 윤리적 판단의 문제는 대상을 그리고 우리 자신을 어떻게 파악하고 이해하는가에 달려있다. 감성적 직관은 가장 대상에 근접하게 하는 수단이다(직접 자료로서의 지속/방법으로서 직관). 대상에 얼마나 가까운가에 따라 판단에서 발생하는 기쁨은 커질 것이다. 대상을 제대로 구체적으로 보지 않고 판단이 가능할까? 이런 이유에서 예술적 감성과 상상력은 이미 윤리의 테마이다.


1) 이 글은 Martha Nussbaum의 다음 논문을 재구성한 것이다: Nussbaum, Martha Craven. "Finely aware and Richly Responsible: The literature and the moral imagination". Love's Knowledge: Essays on Philosophy and Literature. New York,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92. pp. 148-67. 이 책 전체의 주제가 주로 문학과 철학, 욕망과 윤리 등의 관계인데, 저자는 이 문제를 대립적 관점에서 보기도 하며, 또 이 두 항을 어떻게 조율할 수 있는가 등을 다루고 있다. 이 책의 주제를 잘 반영한다고 여겨지는 논문 중 하나인 이 글은 Henry James의 The  Golden Bowl(이하 "황금잔")을 다루면서 이러한 문제들을 개괄적으로 논의한다.

2) James의 소설 "황금잔"의 주요 모티브는 Adam Verver와 그의 딸인 Maggie Verver의 복잡한 윤리적 관계를 다루는 이야기이다. 여기서 다루어지는 이 두 사람의 관계는 아버지와 딸이라는 제도적 관계를 넘어서는 실존적 인간관계를 의미한다. 처음에 이들은 한번도 서로(의 관계)에 대해 의심해보지 않았다. 아버지에 대한 딸의 지극한 효성과 딸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 이들은 충만한 부녀관계 속에서 언제나 함께 였으며, 한번도 자신들의 제도적 관계를 의심해보지 않는다. 그러나 Maggie가 남편인 Amerigo에 대한 강렬한 사랑과 아버지에 대한 사랑(효성)이 공존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된 후, 그녀는 아버지와의 제도적이고 상상적인 관계 자체를 회의한다. 이제 두 사람은 부녀관계를 넘어서서 실존적 관계를 고민한다. 그녀에게 Adam의 존재는 무엇인가? 아버지와 딸로서가 아닌 동등한 인간적 관계에서 이 두 사람은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가? 남편에 대한 관능적인 사랑과 아버지에 대한 연민은 어떻게 다르며, 또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 이러한 고민들 속에서 Maggie는 아버지에게 자신의 남편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게 된다.

3) 이 장면에서 Maggie는 아버지에게 남편에 대한 관능적 사랑과 아버지에 대한 지고한 사랑을 매우 섬세하고도 조심스럽게 고백한다. 그녀는 아버지를 향한 사랑에 대해 "가장 깊은 사랑은 질투를 넘어서며, 모든 것을 초월해 버리므로, 아무 것도 그 사랑을 꺾을 수 없다"고 말한다: "Oh, it's you, father, who are what I call beyond everything. Nothing can pull you down"(150쪽; James 재인용).

4) Adam은 딸의 고백을 들으면서 아련히 밀려오는 하나의 이미지를 마음속에 그려본다. 이 때 그는 그녀의 자태를 보면서 어느 것으로도 포획할 수 없는 한 마리의 물고기를 연상한다. "찬란한 은빛 바다 속에서 노닐고 있는 자유로운 한 마리의 물고기". Adam은 이 물고기의 비유를 통해 딸이 더 이상 아버지의 보호와 그늘 아래에서가 아니라 자기자신에게서 나오는 빛으로 자유롭게 살아가는 실존임을 이해하게 된다.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자기자신만의 실존(151쪽).

5) 이 작품에는 Adam과 Maggie 뿐 아니라, Amerigo와 Charlotte, 그리고 Bob과 Fanny가 등장한다. Bob과 Fanny는 서로 대조적인 특징을 띠는 인물들이다. Nussbaum은 이 작품에 등장하는 두 인물을 통해, 이성적인 것과 감성적인 것, 철학적 언어와 문학적 언어, 윤리적 사유와 욕망 등의 대립적인 항들을 서로 비교하면서 고찰하고 있는데, 이 때에 Bob과 Fanny에게서 볼 수 있는 특성들이 위의 대립적 관계의 전형을 나타내고 있다고 논의한다.

6) 재즈에서 즉흥연주는 연주자 개인의 자율적 패턴을 모티브로 이루어지지만, 동시에 함께 연주하는 다른 연주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그렇게 할 뿐이다. 그러나 이 때에 연주자들간의 관계는 삶 속에서 보게 되는 공약적인 조화와는 차이가 있다. 이들은 자신에게 집중하는 자율성을 상대 연주자와의 관계 안에서 통찰하게 된다. 그렇지 않다면 자신의 자율성 자체에 위협을 주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재즈 연주에서 타자는 방해되는 존재가 아니라 자아를 구성하는 일부가 되어야 한다. 그랬을 때 연주자들은 조화로운 연주에서 나오는 기쁨을 만끽할 수 있다. 연주자를 초월한 외면적 공약으로서 악보에 의존하는 연주가 아니라, 연주자들의 개별적이고 특수한 문맥들에 의해 능동적이고 자율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관계. 아마도 이것이 Nussbaum이 이 글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발생적 윤리일 것이다.

Posted by huun

영국 낭만주의 개관

2007/02/08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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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nry adams

2007/02/08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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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bert Browning 노트

2007/02/08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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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T. Coleridge 노트

2007/02/08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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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Keats 노트

2007/02/08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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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Steinbeck 노트

2007/02/08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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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omas hardy 노트

2007/02/08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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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lt Whitman 노트

2007/02/08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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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결론적으로 말해, 역사란 비개인성에 도달한 상태이다. 그것은 나의 현재적 관심과 필요와 이해관계의 관점에서 벗어나, 존재를 그 자체로 보려는 노력이고, 그 가능성에 대한 비젼이다. 오로지 이 방식만이 모든 존재들을 종속 상태로부터 해방시키고, 그들 자신의 고유한 존재성으로 되돌아갈 수 있게 한다. 이것이 역사성의 정신적 토대이자 조건이며, 우리와 같은 고매한 취향의 소유자를 흥분시키는 유일한 시간이다.

미국인들이 만든 문화 상품은 언제나 굉장한 규모와 테크놀로지로 우리를 놀라게 하다가, 시간이 지나면 어김없이 우리를 실망시킨다. 멜 깁슨이 또 등장했으니, 그의 얘기를 잠깐 해보자. 그의 영화에 대해서는 예술적인 관점에서보다는 상품의 관점에서 얘기를 해야 한다. 하지만 모두들 박수를 치고 있으니, 한번 따져볼 수 밖에.

그의 영화 이미지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가 대단한 강박과 집착의 소유자인 것처럼 보인다. 그의 강박적 태도의 요체는 한 마디로 말해, "실재적인 것"을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는 말할 것도 없고, <아포칼립토>에서 그가 주로 심혈을 기울였던 것은 언어와 역사의 고증이었던 것 같은데(인물들, 건축, 공동체, 문화, 제례, . .), 고증에 대한 미국인들의 열망을 나는 잘 믿지 않지만, 어쨌든 그의 영화를 보면 바로 생생한 것, 실재적인 것에의 철저하고도 고집스런 집착이 있어 보인다. 긍정적으로 말해 일종의 역사성에 도달하고자 하는 시도가 아닐까 싶다. 설정된 인물들의 본래의 언어를 영화 속에 그대로 안배하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단적인 예로,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의 첫 시퀀스에서 보여주었던 그 놀라운 아람어를 듣는 순간, 우리는 경련을 일으키게 된다. 화면 속의 인물들과 예수와 그들을 감싸고 있는 시간 전체가,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내 안에서가 아니라, 전혀 다른 존재로부터, 바로 그들 고유의 존재로부터 튀어나와 버린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예수와 함께 그 많은 인물들이 모여서 알 수 없는 아람어를 읊조리는 시간 동안, 우리는 정서적으로 혹은 감정적으로 어떤 야수에게 침탈 당한 것처럼, 우리의 내부로부터 요동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순전히 고대 아람어 하나만으로도 그런 느낌을 받는다. 그 시간은 나와는 완전히 무관한 타자로부터 경험된 것이다. 영화를 보며 우리는 동네 뒷동산이 아니라 진정한 여행을 하고 싶어 한다. 멜 깁슨은 이를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처럼 보인다. 멜 깁슨의 인터뷰 내용 한 구절을 들어보자.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처럼 <아포칼립토>를 마야어로 촬영한 건 정말 옳은 판단이었다. 어렸을 때 추억을 떠올려보면 더욱 극명하다. 그 당시 본 것들 가운데, 한 무리의 바이킹이 수녀원을 습격하는 내용의 영화가 있었다. 덩치가 산 만한 바이킹 남자가 천천히 배에서 내려 수녀에게 말을 건넨다. 얼마나 흥분되는 장면이던지, 하지만 내 감응은 바로 다음 순간 산산조각 났다. 바이킹이 영어로 "나는 여기 내 선조들의 도끼를 가지러 왔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건 마치 "안녕, 난 로스ㅡ앤젤레스 동쪽에서 왔어"라는 말과 똑같이 들렸다. 하지만 만약 그 바이킹이 아주 낮은 음성의 독일어를 사용했다면, 오, 나는 아마 그 자리에 얼어붙어 오줌을 싸고 말았을 지도 모른다.

위 내용을 보면 그는 뭔가를 아는 사람임엔 틀림없다. 그 자신이 한 명의 관객으로서, 그리고 이제는 이미지를 직접 디자인하는 감독으로서, 실재적인 것에 대한 집착과 철저함에 찬사를 보낸다. 모름지기 예술가라면 철저해야 한다. 자신이 다루는 재료의 티끌 하나라도 성의 없이 대충 마무리 지어서는 안 된다. 관객이 문제가 아니다. 하늘이 보고 있기 때문이다. 예술성의 깊이는 곧 예술가의 윤리이다(임권택 감독의 예술에 관한 영화들 대부분은 바로 이 주제를 담고 있다). 남의 작품을 베낀다든가, 적당히 얼버무린다든가, 눈속임을 한다든가 하는 예술가에게 우리가 비난을 하는 것은, 결코 그가 법을 어겼거나 도덕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이 아니다. 바이킹 영화의 영어 더빙처럼, 시시하기 때문에, 우리를 맥 빠지게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예술적 타락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술적 윤리와 예술성은 같은 말이다. 어린 멜 깁슨이 그 바이킹 장면에 실망하면서 감독에게 항의하고 있었던 것은, 바로 "왜 바이킹의 고유함을 훼손시키는가?"이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과연 멜 깁슨이 예술적인가? 그는 정말로 철저한 사람인가? 많이도 필요 없고, 한 가지만 말해보자. <아포칼립토>의 첫 시퀀스와 두 번째 시퀀스는 마야인들의 사냥과 마을 공동체에 관한 긴 내러티브로 꾸며져 있다. 이 두 시퀀스에서 우리는, 고대 마야인이라고 지시된(referred), 원시인들처럼 가죽을 걸치고, 그들 고유의 언어를 사용하고, 수십 수백의 집단이 각자의 가족을 이루며, 여가 생활과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 . . 정확히 미국인들의 가족을 보게 된다. 심지어는 기독교적인 냄새까지 나는 가족의 모습, 헐리웃 영화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전혀 낯설지 않은 그런 행복하고도 건전한 가족의 모습 말이다. 시퀀스가 끝나고, 그들이 단잠에서 깨어나면, 침입자가 쳐들어오지만 않았더라면, 다들 모여 당장에 예배당이라도 나갈 것 같은 그런 분위기의 공동체. 놀랍게도, 철저한 이미지를 추구할 것 같았던 기독교인 멜 깁슨의 말을 한번 들어보자.

    프란체스코회 수도사였던 디에고 드 란다가 쓴 정말 좋은 책(<유카탄 지역 문물들의 제 관계>1566), . . .  관습과 사회적 습속을 직접 목격하고 쓴 책, . . . 드 란다는 그 책에서 마야 문명과 용기, 절제, 의지, 서로 화합하는 기독교적 미덕을 보여준 원주민들의 모습을 자주 묘사했다. 이는 영화 속 표범 발의 마을을 형상화 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영어로 바이킹의 언어를 더빙한 것에 대해 실망했던 그가! 더 무시무시한 더빙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디에고 드 란다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서는 생략하겠다. 나 역시 오줌을 지릴 뻔 하다가, 그 헐리웃-예배당-oriented 패밀리들을 보는 순간(실은 사냥하면서 미국식 장난을 치던 청년들의 모습이 더 먼저였지만), 완전히 기분을 잡쳤다. 나는 그 영화를 보면서 더 이상 기대감을 접고, 고차원적 흥분을 포기한 채, 헐리웃 액션영화를 보듯, 이미지의 감각적 자극이 주는 진부한 쾌감에만 몰두하며 스크린을 보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중간 부분에서 대단히 감각적으로 보여주었던 마야인들의 희생제의의 경우, 타락한 정치 지도자들에 의해 정치적으로 이용된 어리석은 대중의 종교적 야만적 열광 쯤으로 해석한 것은, 오히려 현대 서구 사회 특히 미국의 정치-종교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 같았다(스포츠, 전쟁, 종교, . . 미국의 정치 문화를 비판한 것일까?).

더빙은 우리를 맥 빠지게 한다. 언어 뿐만 아니라 주관성의 더빙은 더 그렇다. 역사에 있어, 문제는 누가 침략을 했는가? 왜 멸망을 했는가?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와 같은 것이 아니다. 언어와 건축물과 육체들의 배열과 운동, 그리고 몇 몇 감각적 이미지들을 고스란히 재현하는 것으로는 충분치가 않다(아니, 오히려 그것은 불가능하다). 진정한 역사성에 도달하려면, 진정한 실재성을 보여주려면, 보다 근본적인 철저함이 있어야 한다. 언어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관점으로부터, 자신의 신념으로부터 벗어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과거는 현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와 과거에 관한 이러한 편협한 관점 속에서 얼마나 많은 오류들이 있었나! 역사적 고증은 기계나 사진 혹은 남아있는 자료들의 감각적 직접성이 아니라, 주관성 내부로부터 시작하는 직접성이어야 한다. 역사는 비개인적 관점에 도달한 상태라고 했던 나의 명제는 바로 이런 뜻이다. 영화는 문학이나 다른 매체와는 다르게, 이미지를 직접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매체이다. 그러나 그 직접성이란 감각 이미지의 영역에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바이킹에게 그들 고유의 언어를 돌려주고자 했던 멜 깁슨 자신의 철학처럼, 영화는 마야인들의 언어 뿐만 아니라 그들의 과거 전체를 되돌려 주기 위한 노력이어야 한다는 것! 상품과 예술의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예술이란 생생하고도 사실적인 것의 소유가 아니라 과거 전체를 되돌려 주기이다. 또 그렇게 함으로써만 비로소 예술은 역사적인 것을 구체화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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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연구지가 권위를 가질 수 있는 방법은 학술진흥재단(Korea Research Foundation, 이하 '학진', www.krf.or.kr/)에 등재되는 일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그 학술지에 게재된 논문들은 일종의 제도적 혹은 법적인 인가를 받게 되는 셈이다. 한국에서 학진에 등재된 학술지는 분야에 관계없이 대략 1500여개이다. 학계에서 어슬렁거려본 사람들은 다 아는 일이지만, 학진 등재 학술지에 논문을 얼마나 게재하는가에 따라, 일종의 학업 성적표와 같은 등급이 암암리에 정해진다. 학계에서 계속 어슬렁거리려면 좋든 싫든 등재 학술지에 논문을 써서 제출해야만 한다(공부하는 백수들이 놀고먹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하지 않아도 누가 뭐라고 하지는 않는다. 다만 도태될 뿐이다. 그 집단이 싫거나, 도태되었다 싶으면, 밖으로 나와 다른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저렇게 등재가 되어 어느 정도 권위가 인정된 대부분의 학술지에서는 논문 게재료를 받는다. 그러니까 일반 잡지처럼 논문을 투고하여 채택이 되면 투고자에게 원고료를 주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투고자가 논문을 실어 달라고 돈을 내야 한다. 그래야만 심사를 해주고, 게재 여부를 판단해 준다. 죽었다 깨어나도 돈 버는 일에는 소질이 없는 학삘이 백수들에겐 대단히 불합리한 일처럼 보이지만 말이다. 그러나 아주 가끔은 논문 원고료를 주는 곳도 있다. 재단이 돈이 많거나, 무슨 무슨 프로젝트를 성사시켜 지원을 많이 받거나 하면, 대단한 선물을 풀어 놓듯, 학술지 게시판에는 거의 "font-size"는 30pt에, "font-weight"는 볼드(bold)에, "font-color"는 레드(red)나 크림슨(crimson)이나, 심한 경우에는 딥핑크(deeppink)의 스타일로  '원고료 지급!'이라는 글자를 적어 놓는다. 원고료 수십 만원 때문이기 보다는, 권위를 인정받아야 하니까, 이왕이면. . .! 하는 마음으로 연구자들은 논문을 어렵게 준비한다.


얼마 전에 모 대학 연구소에서 발간하는 학술지에서 원고료를  준다기에, 나 역시 한참을 망설이다가 투고를 준비한 적이 있었다. 시간이 촉박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다시 쓸 수는 없었고, 예전에 써 놓았던 논문 한편을 골라, 편집 규정에 맞게 수정을 하고 보충을 한 것이다. 학술지 측에서 원하는 원고 매수가 약 A4용지 20매 내외였으므로, 그에 부합하는 양의 논문을 찾아 컴퓨터 폴더 목록을 한 참을 뒤졌다(내게는 발표하지 않은 논문들이 많이 있다). 최근 들어 나는 글을 짧게 쓰는 경향이 생겼기 때문에(이것은 글쓰기 취향 때문이 아니라, 본인의 현실적인 상황의 결과이다), 할 수 없이 오래 전에 작성했던 것을 뒤져야 했다. 다행히 적당한 분량의 논문을 찾아 검토를 해본 결과, 적당히 장 별 제목과 편집 배열을 조정하면, 그럭저럭 학술지용 논문 한편은 나올 법 했다. 그러나 학술논문 쓰기가 그렇게 쉬운가? 학술논문의 경우엔, 내용이 얼마나 좋은가 하는 문제는 오히려 부차적인 문제일 정도이다. 문제는 바로 편집규격에 맞게 글자들을 배열해야 하는 것이다. 권위가 높은 학술지일수록 편집 규정은 엄격해 진다. 그 유명한 MLA(The Modern Language Association, http://www.mla.org/) 같은 곳에서는 편집규정을 위한 책이 발간될 뿐만 아니라, 종종 신간을 발행하여 변경사항들을 바로잡기도 한다. 논문을 쓰려면 편집에 관한 책부터 뒤져서, 한 권을 통달해야 할 정도이다(실제로 그런 사람은 없지만). 과학 논문의 경우엔 따로 팀을 구성하여 편집본을 작성하기도 한다.


그런 문제들이야 그쪽 사정이고, . . . 어쨌든 나는 그다지 크지도 않은 대학 연구소 모집 논문을 작성하였다. 연구소 측에서 요구하는 편집 규정본은 대략 10장 정도의 분량으로 되어 있었는데, 처음부터 꼼꼼히 살펴서 나의 논문과 대조를 해가며, 거의 이 삼 일에 걸쳐 규격에 맞게 서식을 조절하였다. 그 모든 것을 전부 언급할 수는 없고, 특징적이다 싶은 것만 몇 가지 추려서 적어보겠다. 실은 그 규정본 파일을 다시 열고 싶지 않아, 기억에 의존한 목록이므로, 세세한 부분은 좀 다를 수도 있겠지만, 내 이야기의 요체를 이해하는 데는 별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글을 통해 아는 것과는 느낌이 다를테니, 시간이 있는 사람은 한글 2004나 2005 프로그램을 열고, 아래에 적힌 대로 하나씩 실행을 해보길 권한다.


    논문의 맨 앞 페이지에는 국문초록을 작성해야 하고, 맨 뒤 페이지에는 영문초록(Abstract)을 작성해야 한다. 규모가 작은 논문이므로, 각각 A4 용지 1장 내외 정도면 적당하다. 국문초록의 경우, 맨 윗줄에서 두 칸(폰트크기는 구체적으로 정해주지 않았지만, 아마도 제목이 될 폰트와 같은 크기일 것이다)을 띄우고 "국문초록"이라는 제목을 쓴다. 제목은 중고딕체로 17포인트를 주고, 텍스트 배열(align)은 중간(center)으로 한다. 그리고 다시 한 칸을 띄우고(역시, 폰트크기는 몇으로 하고 칸을 띄우는지는 가르쳐주지 않았다), 논문 작성자 이름을 쓴다. 이름은 12포인트로 하고, 서체는 신명조로 한다. 텍스트 배열은 오른쪽. 그리고 다시 한 칸을 띄우고, 초록의 내용을 쓰되, 들여쓰기를 한 글자하고, 서체는 신명조, 크기는 10포인트로 하고, 줄 간격은 170%로 한다. 장평은 언급되지 않았다. 다시 한 칸을 띄우고, 주제어를 쓴다. 주제어는 들여쓰기를 하지 않고, 중고딕체로, 10.5포인트를 준다. 이제 페이지를 바꿔서, 두 칸을 띄우고 논문 제목을 쓴다. 폰트크기는 17포인트로 하고, 서체는 신명조로, 굵게 한다. 다시 한 칸을 띄우고, 12포인트를 주어 이름을 쓰되, 배열은 오른쪽에 한다. 다시 한 칸을 띄우고 배열은 다시 왼쪽으로 와서, 목차를 쓴다. 목차는 신명조로 하되, 들여쓰기 하지 않고, 목차의 번호는 장, 절, 항, 등에 따라 I, 1, 1), . . . 순으로 한다. 목차를 다 썼으면, 다시 두 칸을 띄우고, 신명조 12포인트로, 농도(weight)는 굵게(bold) 해서, 장(Chapter) 제목을 적는다. 텍스트 배열은 가운데. 다시 한 칸 띄우고, 한 글자 들여쓰기, 신명조 10포인트, 줄 간격 170%. 다음 장으로 넘어갈 때에는 두 칸을 띄우고, 제목을 적고, 다시 한 칸을 띄우고, 본문으로 들어간다. . . . 인용을 할 경우, 3줄 이상을 인용할 때에는 별도의 단락으로 처리 하되, 한 칸을 띄우고, 들여쓰기를 하지 않고, 신명조에 크기는 9.5포인트로 하고, 단락 전체를 두 칸을 들여쓰기 한다. 따옴표는 쓰지 않는다. 다만, 본문 중에 인용을 할 때에는 따옴표를 쓴다. 각주의 처리는, 본문의 번호와 각주의 번호 모두 1), 2) 식으로 한쪽만 괄호를 하고, 각주 내용은 9.5포인트에 들여쓰기는 하지 않는다. 각주와 본문의 구분선 길이는 전체 본문 너비의 1/3로 하고, 구분 선 위 쪽은 1.8mm의 간격을, 구분 선 아래는 1.5mm의 간격, 각주 사이에는 1.5mm의 간격을 준다. 국문 서적의 경우엔 저자의 이름을 쓰고, 쉼표를 하고, 하나짜리 꺾쇠 안에 논문 제목을 쓰고, 두 개짜리 꺾쇠 안에는 책의 제목을 쓴다. 다시 쉼표, 지역 이름을 쓰고, 출판사를 쓰고, 년도를 쓰고, 페이지는 p. 12. 혹은 pp. 12-13. 식으로 쓴다. 같은 책이나 같은 논문을 바로 다음에 다시 인용할 때에는 저자이름, 쉼표, "같은 책"(혹은 같은 논문), 쉼표, 페이지를 쓰고, 전에 언급한 책이나 논문이지만, 바로 앞에서 언급하지 않은 경우, 예전에는 op., cit., loc., '앞의 책', '전 게서', '상 게서' 등의 명칭을 썼지만, 지금은 저자, 쉼표, 책 제목 혹은 논문 제목, 쉼표, 쪽수만을 순서대로 쓴다. . .  


우리는 아직도 본문을 벗어나지 못했다. 본문은 커녕, 각주조차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대충이나마 이런 식으로 끝 페이지에 있는 영문초록까지 열거를 해보려고 했지만, 무의미한 것 같아, 또 갑자기 안 좋은 기억이 되살아나는 관계로, 여기까지만 하고 마치겠다. 다만, 저 위에 열거했던 규정은 전체 규격의 1/10도 안 된다는 점만 지적하면서.


안 좋은 기억이라고 말했던 이유는, 규정집을 보며 열심히 글자들을 배열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변태성욕자가 지시하는  이런 저런 명령들을 직접 몸으로 실행하는 상대여성이 지금의 나와 같은 기분이 아닐까? 포르노그라피의 기본적인 구조는 지시(명령)와 행위로 이루어져 있는데, 특히 권력관계를 암시하는 경향이 강한 도착의 경우, 지시는 극단적인 형태의 명령이나 가학이 되기도 한다. 변태성욕자가 상대 여성에게 내리는 그 명령들은  "옷을 벗어!"라든가 "자리에 누워!"와 같은 식으로 행위 자체의 직접적인 명령이 아니라, 행위가 암시하는 어떤 질적인 이미지들을 추구하는 식으로 내려진다. 가령, 이런 식이다: "꽃병이 있는 곳에서만 바지를 내리도록 해! 시선은 정면을 주시해서는 안 돼!"


아마도 그러한 예들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람은 사드(The Marquis de Sade) 일 것이다. 가령, 그의 작품 <쥘리에트(Juliette)>에서, 쥘리에트에게 독살되는 클레어윌은 식탁에서 식사를 할 때에 마치 침대에서 성교를 하듯 특이하고도 기괴한 태도들을 취한다.


    "그녀가 먹는 것은 오로지 닭고기와 사냥에서 잡은 고기 뿐이다. 그 고기는 항상 뼈가 발라져서, 온갖 모양의 장식과 치장으로 뒤덮여 제공된다. 평소에 마시는 음료는 계절에 상관없이 단맛을 내어 얼린 물이다. 그리고 이 물을 담은 모든 물병마다 레몬즙 스무 방울과 오렌지 꽃 추출물 단 두 숟가락을 첨가한다."(The Marguis de Sade, Juliette, Tr. Austryn Wainhouse, New York: Grove Press, 1968. p. 295)


혹은 다른 곳에서,


    "테이블 윗면은 무릎을 꿇은 노예들의 등이 되고, . . . 네가 보는 이러한 탁자, 등불, 의자들은 각각 한 무리의 소녀들을 교묘하게 배치하여 만든 것이다. . . . 열 두명의 벌거벗은 소녀들 . . . 여덟이나 열명의 처녀의 피로 만든 소시지와 두 개의 고환으로 만든 밀가루 과자 . . . 열 여덟 병의 그리스 와인 . . ."(티모 에이락시넨, 『사드의 철학과 성 윤리』, 서울: 인간사랑, 1997. pp. 252-253.)


혹은 다른 곳에서,


    "우리의 결혼식 날 밤에 그는 나에게 자신의 취향에 조심하라고 했다. . . . 나는 그에게 복종을 맹세했다. . . . 나의 남편은 변덕스럽게 자기를 빨아달라고 했다. . . . 그리고는 이상한 행위를 요구했다. 내가 몸을 숙여 나의 궁둥이와 항문을 그의 얼굴 정면에 두고, 그의 불알에서부터 귀두까지 힘차게 빨아대는 동안, 나는 그의 얼굴에 똥을 싸야 한다! 그는 그것을 먹어버린다."(The Marguis de Sade, "Philosophy in the bedroom", Three Complete Novels -- Justine, Philosophy in the Bedroom Eugenie de Franval, and Other Writings. Ed. And tr. Austryn Wainhouse and Richard Seaver, New York: Grove Press, 1965. p. 202.)


아니면, 좀 희화적으로 말해:


    "팬티의 오른쪽 사타구니 부분을 왼쪽 엄지손가락과 검지손가락으로 잡고, 반대편 왼쪽방향 중앙부분으로 음모가 보이도록 약 5센티미터를 당기고, 장지손가락의 첫 번째 마디를 질 속에 넣고, 오른손은 왼쪽 어깨의 삼각근 부분을 살포시 감싼 채, 고개는 오른쪽으로 돌리고, 시선은 아래로 떨구면서, 저기에 놓여 있는 저 모피코트를 갈망하듯 주시하는 거야! 내가 들고 있는 이 채찍에 대한 공포의 눈빛으로! 물론 왼쪽 발엔 지퍼를 내린 채 가죽 부츠를 신고! . . . 신명조 10pt, 줄간격 170%, 폰트 weight는 굵게 . . . "(모피를 입은 비너스를 창녀로 만들고 싶어하는 어느 마조히즘 혐오주의자 인터뷰 속기록 중에서)


이러한 각각의 개별적인 명령과 행위들은 변태성욕 주체의 과거라든가, 그가 성장하면서 보냈던 시간 전체를 환기하면서, 그가 겪었던 경험의 질적인 이미지를 강렬하게 드러낸다. 어떤 행위들을 반복하다 보면, 마치 죽은 물건으로부터 영혼이 빠져나가듯, 경험의 질적인 이미지들이 살아나 대기로 흩뿌려지는 경향이 있다. 거기서 환타지도 나오고, 환각도 나오고, 망상도 나오고 그러는 것이다. 그 행위들이 반복적이면 반복적일수록 강렬함은 증대한다. 사드의 작품을 보면, 난봉꾼들은 변태성의 쾌락을 맛보기 전에, 철학이나 종교에 관하여 장시간의 토론과 설교를 함으로써 예비적인 단계를 취한다. 토론, 철학적 논증, 종교적 설교는 다양한 형식적 규정본을 필요로 하는 일이지만, 무엇보다도 철학과 종교와 법과 같은 것들 그 자체가 하나의 규정집이다. 그 난봉꾼들은 세 단계의 변태성의 과정, 즉 사유(논증)하고 해방(가학행위)되고 휴식(토론)을 취하는 과정 속에서, 사회의 불의라든가, 권력의 악덕에 대해 비난하고 분석하는 일을 반복한다. 그들의 감각적인 쾌락은 사색적인 요소가 없이는 강렬해지지 않으며 증대될 수도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들의 쾌락을 배가시키는 요소는 바로 명령과 행위의 반복이 나타내는 제의적인(ritual, 祭儀) 요소이다. 행위들이 제의적인 성격이 강해질수록, 그 행위가 주는 쾌락의 질적인 측면들이 보다 더 현실적이고 실천적이 된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행위를 요구하는 주체뿐만 아니라, 그것을 직접 수행하는 쪽도 해당되는 말이 아닐까 싶다. 영혼을 부르기 위해 향불을 피우고, 다양한 다기(茶器)나 제기(祭器)들을 배열하고, 가령 우리의 전통적 제례 의식의 절차들, 즉 강신(降神), 진찬(進饌), 초헌(初獻), . . . 합문(闔門), . . . 사신(辭神) . . . 이 모든 사소한 절차들은, 정신적인 것 즉 영혼에 속하는 것을 행위를 통해 물질적인 것으로 팽창시키는 기능을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변태성의 주체는 눈을 감으면 사라져 버릴 수도 있는 망상적 쾌락의 이미지들을 지루하고도 엄격한 절차들의 반복을 통해 현실적 효력을 보증 받고, 자신의 망상의 힘을 스스로 느끼며 제의적 쾌락에 사로잡힌다. 우리가 몇 년 전에 요란하고 시끌법석하게 관람을 했던 장선우 감독의 <거짓말>을 보면, 주인공이 상대여성에 의해 몽둥이로 맞으며 변태적 쾌락에 사로잡히는데, 거기서 사용된 그 몽둥이는 길이 두께 재질 등의 정확한 계산에 의해 선별된 것이었다. 한마디로 말해, 몽둥이는 환타지로 가기 위해 치밀하게 배치된 성스러운 제기(祭器)였던 것이다.


이제 다시 나의 얘기로 돌아와서. 나는 그 학술지의 규칙들이 요구하는 지시문을 따라 한 줄 한 줄씩 수행해 가는 동안, 저 명령들 속에 혹시 무슨 심오한 뜻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제사를 지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지방을 쓰고, 그 내용을 읊조리며, 술을 따르고, 향을 피우고, 절을 하고, . . . 그렇게 제의 규칙들을 수행해 가다 보면 나 자신 스스로 머리가 숙연해지고, 엄숙한 분위기가 감돌면서, 죽은 영혼과 살아있는 나 사이에 어느새 거부할 수 없는 신비한 끈 같은 것이 묶여 있는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된다. 그러는 가운데 어떤 상징적 환타지가 강림하는 것을 느끼기도 한다. 학술논문에 요구하는 그 각각의 규정들은 혹시 어떤 환타지를 암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 규정이 어떤 공통성을 줌으로써, 복잡성을 피하기 위한 것이라는 설명도 일리는 있다. 하지만 공통성을 주기 위한 것이라면, 가급적이면 단순한 원리로 이루어져야 하지 않을까? 가령, 모든 서체를 10으로 한다든가, 제목은 반드시 1칸을 띄어야 한다든가, . . 통일적인 형식이 되려면, 오히려 단순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학술지마다 규정들도 다르고, 통일성은 전혀 없다. 그 논문을 다른 학술지에 보내려면, 전혀 새로운 편집 규정에 따라 하나씩 다시 수정해야만 할 것이다. 각각의 행과 제목과 주석과 본문과 문헌목록 등에 대한 그 개별적인 지시의 복잡성은 오히려 모호한 것을 낳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 복잡한 명령들이 지켜지게 하기 위해서는 더욱 복잡한 규칙들을 만들고 통제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령, "제목 위는 두 칸을 띄우고, 그 아래는 한 칸을 띄운다"는 규정을 보면, 제목의 폰트가 몇 인가에 따라, 제목 위의 폰트 크기와 제목 아래의 폰트 크기는 전혀 달라진다.  그 규정이 엄격히 지켜지려면, 제목 위의 빈 칸의 폰트 크기와 제목 아래 빈 칸의 폰트 크기가 따로 정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복잡성이 배가 되는 것이다.


학술논문의 경우 변태성의 주체가 누구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변태성과 성질이 유사한 상징적 환타지가 거기에 있는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그 객체인 나는 수십 만원의 화대를 위해 그 요구를 묵묵히 완수하면서, 마디 마디 몸을 더듬듯이 행위 절차들을 하나씩 수행하는 동안, 그 미로가 복잡하면 복잡할수록 더욱 더 거부할 수 없는 힘과 권위를 느끼며 어렴풋이 숭고체험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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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비판적 초국주의 문화연구에 관한 노트



이 논문은, 제목이 지시하듯이 '비판적 초국주의<critical transnationalism>'의 관점에서, 호주의 정치, 경제, 역사, 문화등 제 이론적 지형의 윤곽을 그리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최근의 문화연구에서 등장하고 있는 "공간"에 대한 중요성은, 시간적 의미의 역사나 민족, 정체성의 개념을 벗어나, 보다 공시적이고 복합적인 세계질서 속에서 역사를 파악하려는 움직임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근대의>역사적 산물인 호주를 단순히 민족국가의 한 형태로, 혹은 독립된 하나의 국가로만 이해하기 보다는 근대이후 세계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기능하는, 다양하고 복잡한 양태의 사회구성체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세계적 질서 속에서 호주가 어떠한 위상을 가지고 있는가의 문제는 단순히 호주 내부의 지형, 즉 종래의 개념이라 할 수 있는 민족 혹은 국가의 개념을 넘어선 초민족적, 초국가적 틀 속에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초민족적 틀 속에서 호주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선 "호주를 지리적 특수성과 공간적 결집을 이루는 민족국가로서의 호주와, 복합적이며 때로는 양립불가능한 담론영역의 무제한 확산에 의해 절합되는 담론적 지명으로서의 '호주'를 구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저자들은 주장한다. 이 둘의 관계는 그러나 고정된 관계설정이 아니라, 시간적 공간적 특수성에 따라 매우 능동적이고, 유동적으로 변형되는 관계를 구성하며 또한 재구성된다.

 저자들에 따르면, 최근 호주에서 야기되고 있는 지적논쟁의 핵심적 내용은 두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첫째, 호주를 '아시아의 일부'로 인식하고, 인식되어야 한다는 것. 둘째, 호주의 역사적 뿌리를 여전히 대영제국의 정착식민지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전자의 입장은 호주를 과거의 산물, 혹은 과거에 소급하는 민족의 단위로 이해하지 않고, 현 담론의 흐름속에서 진보적인 관점을 유지하려는 것으로, 정치 경제 지리학적 세계질서 속에서 호주를 새로이 구성하며 인식하자는 주장이라면, 후자는 호주를 역사적 시각으로 끌어들여, 식민주의 역사와의 밀접한 관계라는 궤적을 소급하는 것이다. 이 논문은 후자의 입장을 수용하면서, 전자의 입장이 어떻게 수용될 수 있으며, 비판될 수 있는지를 모색하려는 시도이다.

 서구중심적 동양론자들의 구분에 의해, 세계는 서구와 동양이라는 이분법으로 구분되어 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호주는 이러한 구분을 통해 서구의 일부로 인식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와같은 조건들 속에서 호주의 '아시아화'는 이분법을 벗어나는 듯 하다. Huntington의 권고, 즉 경제적 협조체제를 위해서는 문화적 토대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지적이 있지만, 종래의 서구/동양이라는 이분법적 틀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 '아시아화' 담론도 유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지에도 불구하고 호주의 '아시아화'는 아시아를 여전히 경제적, 정치적 대상으로 간주하고 있으며, 문화적 토대의 이질성에 의해, 여전히 이분법을 고수하는 경향을 띠고 있다. 따라서 비판적 초국주의적 관점은 이러한 이분법의 재생산을 재고해야 한다. 그러므로 호주는 서구와 아시아의 어느쪽으로도 고정적으로 편입될 수 없으며, 이것은 담론적으로 이루어지는 '호주'의 구성과 재구성에 능동적인 관점을 가져야 한다는 점이다.

 호주와 <서구>유럽과의 관계, 호주와 아시아와의 관계를 말하는 것은 매우 복잡한 설명들과 분석이 요구된다. 호주는 서구 제국주의의 산물이면서, 동시에 아시아에 대해 민족적 우월감을 가지고 있는 제한적인 제국주의였다는점 때문이다. 호주가 서구 제국주의의 전초기지이며 아시아를 끌어들이기 위한 전략적 지대로 기능했다는 점은, 호주가 서구와 동일시 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 오히려 서구가 만들어 놓은 근대성의 산물이라는 점을 말해준다. 아시아와 호주의 근대성은 따라서 서구에 의해 굴복당한 한에서만 가능할 수 있었다. 이러한 "비자발적 근대성"은 일본의 경우에서도 볼 수 있다. 경제대국으로 자리하는 일본은 그러나 문화적으로 열등감을 지우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서구 정착 식민지로서, 호주 역시 어떤 면에서는 서구 근대성의 주체로서 기능하는 듯 하지만, 서구가 아닌, 서구에 종속되었던, 서구보다는 열등한, 근대성의 산물이다.

 그러나 저자들은 여기서 서구의 근대성이 최근 실패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아시아 경제권의 급 부상과 새로운 국제질서 속에서 서구화 근대화라는 모토는 허구가 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설득력은 힘을 잃어가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또한 여전히 잔존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것은 현재 세계의 구조적 틀과 기본적 토대를 생산해 왔기 때문이다. 근대화의 산물인 구별된 민족국가는 세계자본주의 질서 내에서, 무역, 국제관계라는 비대해지는 복잡한 세계통신망을 통해 그 경계가 사라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역으로 생각해 본다면, 오히려 근대적 지배체제가 더욱 공고해 지고 확장되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않된다. 즉, 월러스틴이 말하듯이 '서방'문화에 의해, 자본주의에 의해 건드려지지 않은 문화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저자들은 또한 비판적 초국주의 관점이 인류학과 사회학을 분리된 학문체제<이것은 근대성의 산물이다>로 보지 않고 끊임없이 넘나드는 장으로 본다고 지적한다. 사회학이 과거 서구사회 자신의 문화에 관심을 가졌다면, 인류학은 서구가 아닌 타자의 문화에 관심을 가졌다. 비판적 초국주의 문화연구는 모든 문화를 동일성과 차이성을 동시에 가진 문화로 이해한다. 즉 서구근대가 만들어 놓은 자기동일화나  차이<즉 차별>가 아닌 새로운 개념의 허물없는 차이를 지향한다. 따라서 비판적 초국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하나의 문화연구가 아닌 "특수한 문화연구 전통의 다수성"이 존재한다. 이런 의미에서 역사적 특수성은 매우 중요한 개념이 될 것이다.

 특수성의 강조는 자연스레 민족적 차별성의 개념으로 전화된다. 또한 이 차별성은 다시 정체성의 문제로 환원될 것이다. 그러나 정체성에 대한 인식은 비판적으로 다시 보아야 한다. 예로 탈식민이론은 호주를 제국주의와의 관계하에서 보는 반면에, 민족정체성의 기획 역시 제국주의의 산물이라는 점은 간과하고 있다. 따라서 민족정체성에 대한 관심은 탈 보편화에 대한 추구 뿐만 아니라 공간적, 초민족적 컨텍스트를 고려해야만 한다. 이와 궤를 같이하여, 저자들은 "지방적<the local>인 관점과 국가적<the national>인 관점"이 동시에 병치되어 연구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종래의 문화연구는 언제나 제도, 민족, 국가 등의 전체주의적 관점을 통해 거대 구조를 설명하고 비판하는 것으로만 일관해 왔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틀은 지방적이고, 국소적이며, 특수한 지역들의 특수한 경험이라는 정황의 특수성과 함께 고려되지 않으면 안되며, 이러한 병치를 통해 비로소 실천적 문화연구가 가능해 진다는 것이다.

 전세계 자본주의 팽창은 핵심부/주변부 구조의 재구성을 특징으로 한다. 이것은 성장주의와 근대화의 수사(修辭)력, 그리고 독점자본주의를 낳게한다. 그러나 제3세계 국가들의 경제적 성장은 유럽자본주의가 만들어 놓은 구조에 동요효과를 가져오며, 민족적 경계들로 이루어진 국가들의 구분은 이제 고정되지 않고 국경들을 넘나드는 역동적인 움직임으로 포착된다. 따라서 핵심부/주변부라는 구조는 '흐름'이라는 개념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이 문화적 흐름들은 서로 이접되며, 결합하고, 또한 분리되는 매우 중층적 관계들을 가지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공간에서 강조되어야 하는 것은 이 흐름들이 가로지르는 공간들의 역사적 문화적 형세이며 특수성이다.

 실제로 존속하는 핵심부/주변부의 관계가 이제는 복수화되고 더 이상 고정되지 않는다는 사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전지전능한 핵심으로서 '서구'담론의 힘이 여전하다는 것은 중요하다. 호주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관계가 모호한 것으로 남게되는데, 최근 아시아의 급부상 ― 예로, 경제적 발전과 유교적 가치관의 확대등… ― 으로 인해 서구의 담론에서 확실한 담보물이었던 주변부/핵심부의 관계가 전복된다는 사실이, 이미 서구의 일부로 간주되었던 호주에게 역시 위기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서구'는 '호주'에게 문화적 힘이라는 풍부한 자원을 제공하고, 이 힘을 통해 '아시아'와의 대결에서 우월감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우월감은 다시 우려감으로 변질된 것이다. 서구는 아니면서도 서구의 역할을 부분적으로 수행해 왔던 호주가, 이제는 비서구의 출현으로, 서구가 안아야할 몫을 가지게 된 것이다.

 탈식민적 관점에서 호주를 바라보는 것, 그리고 비 서구 민족들을 바라보는 것은 전략적으로 유용하기도 하다. 예로, 캐나다, 뉴질랜드의 동맹은 이러한 탈식민적 관점, 즉 이들은 모두 대영제국의 정착식민지였다는 역사적 사실에 대해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들이 식민 지배권력과의 모순적 관계속에서 탈식민 민족국가의 분명한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해도 이것은 여전히 근대화기획이 만들어 놓았던 민족정체성의 응집력을 다시 강화하게 된다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왜냐하면 제국주의와 식민화라는 근대적 기획이 사라졌든, 혹은 지속되든, 탈식민화에 대한 관심은 결국 과거의 패러다임으로 갈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탈식민 이론은 근대적 질서라는 옛 고정성과 계몽주의의 도덕적 확신이 흔들리고 있는 현대세계와 절합한다. 탈식민이론이 발전하는 동기는, 경제적 차원으로 빠르게 전환되고 있는 시점에서도 여전히 현재적 컨텍스트를 끊임없이 제공하고 있는 문화적 세습을 이분법적 관계가 생산하고 있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검토하려는 요구에서 나온다는 점이다. 비판적 초국주의 문화연구는 따라서 국가<민족>내부에 놓여진 특수한 탈식민적 경험들을 국가<민족>들간의 상대적인 문맥에 위치시키는 것이다. 필자들도 예를들고 있듯이 말레이지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호주등은, 모두 과거 식민지배의 경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전혀다른 식민경험과 문화적 차이들을 형성해 왔다. 호주 역시 이러한 특수성의 탈식민성 위에 놓이게 된다는 것이다. 근대성이라는 제국주의의 산물은 이렇게 보편적인 하나의 기획으로만 바라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원적인 근대성으로 구성된 세계를 인식하는, 즉 이 근대성이 만들어 놓은 경계들이 더 이상 영토상의 민족국가들간의 경계와는 필연적으로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랬을 때 비로소 "근대 민족국가의 일부로서 '호주'라는 자신만의 용어처리를 상술할 수 있을 것이며, 또한 배제가 아닌 포함, 친숙하면서도 이질적인 '서구'와의 관계, 그리고 또한 이질적이면서도 친숙한 '아시아'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설명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적어도 '아시아' 자체가 아닌, '아시아' 속의 '호주'를 수용하는 개념, 다시말해, '아시아인'이며 동시에 '아시아인이 아닌' 이질적인 (탈)근대적 존재로서의 호주"에 대한 호주적 상상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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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적 초국주의 문화연구에 관한 노트(주1)



개요

이 논문은 문화연구에서 비판적 초국주의(critical transnationalist)관점을 현 '호주'의 지엽적인 문화와 정치적 맥락으로부터 전개하고자 한다. 비판적 초국주의는, 국제관계들 속에서 호주의 위상이라는 지배적인 담론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소위 'push into Asia'라는 이슈들과 아울러, 최근 호주 민족국가의 지리 경제적, 지정학적 관심사들을 다룬다. 특히, 이 논문이 목표하는 것은 '아시아'와 '서구'간의 이분법적 분리를 탈구조화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분법적 분리는 호주의 '아시아 화'라는 공식적 담론 속에서도 여전히 구성되고 있다. 이를 위해 우선, 세계는 상호 연결되며 의존하는, 그러나 또한 변별적 근대성을 가지는 집합체로 이해되는 것이 필요하다. 식민지 팽창을 통해 보편화되고 있는 서구의 근대성 기획이 성공하면서도 패배하고 있음을 동시에 암시하는 근대성 말이다.

이러한 역사적 관점으로부터, '아시아'와 '호주'는 더 이상 절대적 이분법의 대립적 항들로 나타나지 않으며, 또한 유럽의 식민지/근대화 기획의 역사적 산물로만 드러나지는 않는다. 이 논문은 따라서 공식적 국제질서뿐 아니라 문화연구의 측면에서, 호주의 특권적 위치를 비판하는 작업이 될 것이다. 비판적 초국주의 문화연구는 민족국가의 구심성을 근대적  세계체제 내에서 심각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호주 민족국가의 위상은 초국적 틀 속에 놓여진다. 이것은 자본주의 세계체제라는 유동적이며 역동적인 힘들 속에서 강조되는, 호주의 복잡하고도 모순적인 역할에 기인한다. 이 힘들은 바로 최근 '호주'와 '아시아'의 대립적 친선을 구성하는 힘들이다. 그러나, 이 친선―희망하면서도 이론(異論)이 제기되는― 은 분명 그에 상응하는 맥락을 수반해야 한다. 즉 백인 정착 식민지로서의 '호주'와 그것과는 다른 '아시아' 둘 모두가 지니고 있는, 서로 다르게 갈라진 (탈)식민지라는 역사적 사태들의 배경 속으로, 이들을 포함시키거나 혹은 부정하는 맥락을 생각하지 않고는 제대로 이해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비판적 초국주의를 촉진시키기 위해서는 문화연구들과 탈 식민주의 이론간의 교차지점들에 대한 이해가 절실히 필요하다.


* 핵심용어 *

문화연구; 아시아; 호주; 탈 식민주의(postcolonialism); 민족(nation)/민족주의(nationalism); (전)지구화(globalization)


최근 유행하는 '문화연구'에 대한 최근의 한 논문에서, Fredric Jameson은 '공간적 차원의 문화연구'의 중요성이 필연적임을 인정하고 있다. 이러한 공간에 대한 관심은 ― 보다 구체적으로는 문화이론과 문화적 실천의 공간적 결정에 대한 관심 ― 문화연구가, 그 실무자들에 의해 점점 국제적 기획의 일환으로 인지되고 경험되고 있는 지금, 매우 절박하고도 중요한 것으로 인식된다는 점을 말해준다. 문화연구의 이러한 국제화에 대해 초국적 문화연구는 총체적인 의문들에 봉착하게된다: 즉, 문화 연구를 통해 어떠한 세계적 질서가 구성될 것인가? 문화연구가 추구하는 세계는 어떠한 종류의 공간인가? 그리고 그것은 그 세계 속에서 자신의 공간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이 논문이 시도하려는 것은 문화연구의 비판적 초국주의적 관점을 위한 하나의 지형을 그려보는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결코 공간적으로 중립적인 입장에서 만들어 질 수는 없다. 실제로, 우리의 주요 논지의 하나는 비판적 초국주의가 언제나 특수한 공간적/문화적 맥락으로부터 분명해 질 것이라는 점, 그리고 정치적 특수성, 필연성과 관련을 맺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야만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힘에 의해 조장되고 있는, 단정적이고 제압적인 또 다른 형태의 초국주의의 재생산을 피할 수 있다. 호주에서 이 논문을 쓰고 있을 때, 우리는 어떻게 비판적 초국주의 관점을 전개할 수 있는가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 관점으로부터 비로소 특수한 역사적 국면을 맞고 있는 세계 속에서, 이 나라의 위치에 대한 비판적 이해에 생산적으로 개입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 과정에서 ― 예증이나 표본을 통해 이루어 질 것이며, 이 논문의 문맥 속에서는 부득이 잠정적이고 도식적으로 남게될 것이다 ― 우리는 비판적 초국주의적 실천이 어떻게 문화연구에서 도출될 것인가를 분명히 하고자 한다.(주2)

호주의 문화적 위치를, 호주의 관점에서, 초국적 틀로 이론화하는 작업은 먼저 지리적 특수성과 공간적 결집을 이루는 민족국가로서의 호주와, 다양하면서 때로는 양립 불가능한 담론영역의 무제한 확산에 의해 절합하는 담론적 지명으로서의 '호주'를 구분하는 것이다. 이 둘의 관계는 정체되지 않으며, 변화와 논쟁의 주요 테마를 이룬다. 다시 말해, 거기에는 '호주'의 묘사를 둘러싼 끊임없는 투쟁이 있다는 말이다. 또한 호주라는 민족국가와 등가성을 지닌, '호주'라는 지명은 단순히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항상 능동적으로 구성되며 또한 재구성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징적 의미로서 '호주'의 구성은 민족국가 호주의 행정정책들에 대한 지원과 비판에 유용한데, 필연적으로 이것은 '호주'의 정체성 확립을 위한 기반에 역행하는 일련의 차이들과 관련 된어 일어난다. 이 차이들은 국가의 (상징적)경계들을 넘어선 초국적 영역에 위치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최근 두 가지 관심영역이 국내의 지적논쟁들을 불러일으키며, '호주'가 초국적 틀 속에 담론으로 위치해 있는 뚜렷한 두 가지 행로를 반영하고 있다. 첫 번째로, 최근 공공담론 내에서 끊임없는 요청들이 있다. 이 요구들은 주로 정계, 그리고 재계인사들에 의해 제기되는데, 호주가 '아시아의 일부'가 되거나 혹은 그렇게 인식하(되)도록 하는 요구이다. 두 번째로, 이것은 때에 따라 첫 번째와 뚜렷한 대조를 보여주기도 하는데, 호주의 역사적 뿌리를 대영제국의 정착 식민지로 여전히 보는 관점이다. 호주의 문화연구에서 이 같은 관심은 '탈 식민성'에 대한 비판적 안목으로 표현되며, 호주를 '탈 식민국가'로 부르자는 경향과 관련된다: 예를 들어, 이 논문이 처음에 발표되었던 회의에서 그러한 경우를 볼수 있었다. 이들의 상이한 담론영역들 속에서, 각각의 입장들은 초국적 맥락 속에서 '호주'에 대한 제각각의 선별적인 이해의 공간을 열어놓고 있다. 후자가 목적으로 하는 것은 '호주'에 대한 상상력에, 확고한 역사적 시각을 끌어들이는 것이며, 또한 (대영제국)식민주의 역사와의 밀접한 의존관계의 궤적을 소급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탈 식민주의 담론은 과거에 대해 속죄 내지는 상환이라는 관점으로 이해가 쏠리게 된다. 반면에 전자는 급진적인 성향으로 간주될 수 있는데, 이미 설정된 '호주'의 개념을 근본적으로 뒤흔든다는 점을 표방하는 한에서 그러하며, 또한 '아시아'를 호주의 운명으로 간주하는 한에서 그러하다. 그래서 전자는 세계 속에서 호주의 위치를 미래지향적 담론으로 조율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들 두 관점을 현저하게 대립되는 담론으로 병치시킴으로써, 우리는 비판적 초국주의 관점이 어떻게 호주 문화연구에 생산적으로 개입하고 기여할 수 있는지를 정교화 하고자 한다. 보다 엄밀히 말해, 우리는 공공 정치담론 속에서 '아시아적 방향전환'의 선례들을 따르려 하며, '아시아적 방향전환'의 개념이 ― 즉, 호주가 '아시아의 일부'라는 주장이 더 큰 함축된 내용을 가졌다고 보려는 비판적 이해 ― 비판적 초국적 문화연구에서 호주가 하나의 '탈 식민국가'라는 주장이 갖는 몇 가지 한계들을 노출시키고 그것들을 제한할 수 있다는 점을 제시하려는 것이다. 거기서 오는 그물효과(net effect)는 '호주'의 위상에 대한 이해를 점점 다양화하고 복잡하게 할 것이다. 전지구적 자본주의에 의해 창출된 최근 새로운 세계의 질서 혹은 무질서 속에서 말이다.

역사적으로, 호주 내 지배적 정치담론은 이 지역을 북아시아 이웃들과는 전혀 다른, 그리고 때로 이들에 대한 위기감에 기인하여, '서구' 혹은 '유럽'과 동질적인 나라로 간주하려는 경향이 자리잡아 왔다. 이 대립적인 관계구성은 본질주의자들이 만들어 놓은 서구와 동양(지금은 아시아라는 용어로 환원된다)이라는 이분법에 근거하는 것이었다. '서구'와 '나머지'라는 이름으로 분류되는, 서구 중심적 동양주의자들의 구분에 의한 '호주'설정의 결과와 효과들은 최근 미국 정치학자인 Samuel Huntington에 의해 다시 다루어지고 있는데, 특히 권위 있는 잡지인 Foreign Affairs에 실린 그의 논문 '문명의 충돌(The clash of civilization?)'이 주목할 만 하다. Huntington의 관점에서 세계는 '일곱 혹은 여덟 개 정도의 주요 문명'으로 분리된다(1993:25).(주3) 그는 냉전종식과 함께 이데올로기 갈등의 종식이후, 국제적 분쟁은 점점 문화적 차이들로부터 비롯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자신의 논의를 개진하는 가운데, 그는 한 나라가 어떠한 '문명'으로부터 다른 문명으로 변화하려는 시도가 ― 어리석음이 아니라면 ― 불가능하다는 점을 주지하면서 호주에 대해 경고성의 발언을 한다:


Owen Harries는 호주가 결국 분열된 나라가 되기 위해 (그의 관점에서는 현명치 못한)기를 쓰고 있다고 지적했다. 비록 서구뿐 아니라 ABCA 군, 그리고 서구의 지식집단(intelligence core)으로 가득 차 있긴 하지만, 최근의 그 지도자들은 실제로는 서구로부터의 이탈을 획책하고 있으며, 자국의 정체성을 아시아 국가로 재정의 하고 이웃국가들과의 긴밀한 연계를 장려하고 있다. 호주의 미래는, 그들이 주장하기를, 동아시아의 역동적인 경제적 발전들과 함께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지금까지 지적해 왔듯이, 긴밀한 경제적 협조체제는 자연스레 보편적인 문화적 토대를 조건으로 한다는 점이다. (Huntington 1993:45)


그러한 문화적 토대는, Huntington에 따르자면, 호주에는 존재하지도 존재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아시아'와 '서구'는 본질적으로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두 개의 서로 다른 '문명'이기 때문이다. (Huntington의) 확고부동한 이데올로기적 권고에도 불구하고, '호주'를 '아시아화'하려는 생각은, 정치적 위기상황에서는 필연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는 반면에, 비판적 담론을 획득할 수는 있다. 만일 그것이 서구중심주의적 일반론 해체의 가능성을 담보해주는 이유라면 말이다. 즉 '아시아'와 '서구'를 서로 극단적으로 배제하는 범주로 환원함으로써, 위험하게도 유럽 중심적 동양론의 유산을 재생산할 소지를 다분히 안고 있는 일반론의 해체가능성 말이다.

지난 10여년간 호주의 공식적인 대중설득은 변해왔다. '아시아로의 진출(push into Asia)'에 대한, '아시아 끌어들이기(enmesh with Asia)'에 대한, 그리고 '아시아에 없어서는 안될 필수요소(part of Asia)'가 되기 위한 요청들이 있었다. 이러한 극적 변화의 동기는, 호주 민족국가 스스로 북쪽으로 진출하려는 달아오르는 지역으로 자리 매김 하기 위한, 경제적 필요의 인식에 기인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경제적 '아시아화'라는 표류는, 지금까지 '호주'가 가지고 있던 문화적 상상 속에서 보다 포괄적인 변화와 교체들을 수반해 왔다. 이것은 호주 내 사업가들이 아시아를 무역대상으로서 혹은 시장으로서, 이 지역의 다양한 특이성과 감성에 대해 민감하다는 것으로 예증된다. 아시아 지역언어 교과과정 반영이 점점 강조된다든지,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통해) 국민들 사이에서 '아시아적 정서'를 고양시키려는 노력 등을 통해 알 수 있다. 바꿔 말해, 거기에는 확고한 욕망이 국가 지도자들 사이에 만연되어 있다는 것이다. 즉 경제적 '아시아화' 뿐만 아니라 문화적 '아시아화'와 같은 종류의 욕망 말이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영향력 있는 수사력을 통한 호주의 '아시아화'는, 호주(회사) 그리고 아시아(회사)간의 간극을 메우려는 끊임없는 (경제적)욕구 위에서, 다만 '호주'와 '아시아'라는 담론의 이분법적 대립을 종식시키는 것만으로 만족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호주의 '아시아 끌어들이기'를 가장 강력하게 지지하는 사람들 중 하나인 James Mackie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곧, 매우 곧, 우리는 그들(아시아인들)을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바라는 조건에 의해서 말입니다. … 만일 우리가 그들에게 계속 등을 돌린다면 … 우리는 고립될 것이며 하나의 국가로서 하찮은 존재가 될 운명에 처할 것입니다. (Perera에서 인용, 1993: 17)


언뜻 보기에 자의식을 버리는 듯한 이러한 태도는 사실은 '아시아'가 '그들'의 왕국에 담을 쌓고 있다는 인식의 효과를 가져오는데,(주4) 수사적 설득의 취지가 아시아와의 만남을 겨냥했을 지라도,  동양론(Orientalism) 서 비롯되는 이분법은 결코 '아시아화'라는 그 실용적 담론으로부터는 전복될 수 없다는 점을 시사한다: 단순히 복잡함을 제시하거나 (진보가 아닌) 새로움만을 낳을 뿐이다.

초국적 담론이 보다 설득력을 갖기 위해서는 이 둘 사이에 존재하는, 자기 입장만을 변호하는 이분법의 재생산을 재고해야만 하며, 또 이것을 넘어서는 '호주'와 '아시아'의 관계를 생각해야만 할 것이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여기가 바로 비판적 초국주의 문화 연구가 개입할 수 있는 지점이다. 첫 번째 단계로, 근래 문화연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움직임, 즉 '서구'와 '아시아'를 담론적 구성들로 간주하려는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러한 인식에 기반 하여, 표상적 타자화라는 동양론자들의 진행이 중단되고 또한 그에 따라 아시아를 다시 친숙하게 하려는 움직임은, 더 이상 극단적인 둘로 구별되는 문화적 장―즉, '서방'세계의 일부로서 그러나 지리적으로는 아시아에 위치한―으로 묶여있지 않으며, 정치적으로는 언제나 이미 서구화된 아시아 지역에서 없어서는 안될 구성요소로서, 호주 민족국가가 겪게되는 국제적 경험을 반영하기 위한 노력이 진행되면서, 그러나 동시에 자신의 '정체성'은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는 '호주'로 위치전도 시키는데 용이할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아시아'와 '서구' 둘 다 개개의 구성요소로 그리고 같은 근대적인 세계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비 자발적 근대성(Involuntary modernities)


만일 '아시아'가 더 이상 타자(Other)로 인식되지 않아야 한다면, 그것은 동양론적 담론의 도덕적/이데올로기적 책임(혹은 양심)에 의해서가 아니라, 아시아라 불리는 그 지역이 현대 세계의 조건들 속에서 하나의 고유한 구성요소로서, 그리고 하나의 힘으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유럽의 식민 제국주의 역사 역시 여기서 활동하기 시작한다. 호주와 아시아 국가들 사이의 관계에서 한가지 중요한 요소는, 그들 모두 서로 다른 방식으로 나타나는, 이와 같은 역사의 산물들 혹은 효과라는 사실이다. 그 역사는 바로 유럽으로부터 비롯되어 다른 여러 나라들에게 수출된 근대성까지도 연루되어 있는 역사이다. 호주의 '아시아' 담론에서 여전히 지배적인 이분법은 '아시아'와 '호주'라는 근대 유럽식의 구조설정과 병행하면서 동시에 반대하고 있다는 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아시아'를 담론에 의해 동양으로 구성한 장소이며, '서구'가 자신을 정체화 하기 위한 타자로서, '호주'는 '서구'의 전초기지로 설정되었으며, 또한 유럽의 바깥 공간에서 유럽식 근대성의 원리에 따라 한 사회를 바라보려는 시도로 설정되었다. 이것은 바로 다음과 같은 관점에 의해서이다. 즉 지리적으로 북쪽에 가까운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가 호주의 자의적 방식에 의해 극동아시아로 지정될 수 있었다는 관점. 그리고 그 지역에 대한 호주의 공식적 선입견이, 동남아시아에 대한 객담들(예를들어 ASEAN에 대한 외교적 초점에서 볼 수 있다)로 지배되고 있을 때, '동남아시아'라는 범주는 다만, Milton Osborne이 지적하듯, 2차 대전 중 '군사적 사태들의 결과'로 나타났다는 사실이 점점 밝혀지고 있다. 이러한 범주의 근거가 되는 것이 비록 '인류학자들과 역사가들이, 우리가 지금 부르고 있는 동남아시아와 그 이외의 다른 (아시아)나라들의 지역들간에 발견되는 어떠한 유사성들을 설명하기 시작했던 시기, 즉 전쟁 전부터이지만 말이다(Osborne, 1990:4).' 다양한 귀족집단들이 행한 의례, 의식들 같은 여러 종류의 유사성들은, '동남아시아'를 (근대적으로) 새롭게 구성하는 것으로부터 호주를 배제하는데 확실한 설득력을 지녔을 것이며, 따라서 호주는 '서방'으로 분류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호주'와 마찬가지로 '아시아'는('아시아'와 마찬가지로 '호주'는) ― 현재는 자주독립체를 형성한 근대 민족국가들까지도 ― 유럽 식민팽창주의의 산물인 것이다. 이것은 심지어 유럽의 강국들에 의해 물질적으로는 식민화되지 않았던 나라들까지도 포함된다. 예를 들어 Naoki Sakai가 일본과 관련지어 파악했듯이, '일본'은 담론적 구성체로서 서구의 외부가 아니다: '심지어 그 배타주의(particularlism)에 있어서도, 일본은 이미 어디에서나 존재하는 서구와 연관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일본은 역사적으로도 지정학적으로도 서구의 바깥으로 볼수 없다'(Sakai, 1989:113). 근대 세계 체제에서, 아시아는 자신의 존재성을 서구로부터 빚진 것이다. 이것이 바로 Sakai가 명명하는 '비 서구의 비자발적 근대성'의 요체이다:


동양에서 근대성은 (…) 근본적으로 서구의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통제에 복속 되었다. 근대의 동양은 침략 당함으로써만 탄생될 수 있었으며, 서구에 의해 굴복 당하고, 침탈 당함으로써만 가능했었다. 다시 말해 동양은 서구의 대상이 됨으로써만 근대시대에 돌입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비서구 국가들에게 근대성의 진리는, 그러므로, 서구의 반향인 것이다. (…) 물론, 동양은 서구의 팽창에 반응했으며 거기에 반항을 배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반항의 과정 속에서 동양은 서구의 지배에 용해되었으며, 자신도 모르게 유럽 중심적이고 일원론적 세계역사의 완결에 봉사했던 것이다.(SaKai, 1989:114-15)(주5)


비자발적 근대성이라는 중요한 개념은 근대적 세계체제 속에서 아시아 사회구성체 합병을 위한 구성적 토대인 내재분열(inherent displacement)(주6)을 강화한다<또한 그로부터 나온다. 역주>. 그것은, 예를 들어 Miyoshi 와 Harootunian의 용어에서 볼 수 있듯이, 왜 '일본의 역사가, 지배적인 타자이면서도 스스로 변두리화하는 혼합된 감성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설명해 준다.(1989:xi) 마치 호주의 탈 식민적 위상을 확보하는데 필수적인 근대성이, 파생적이며, 간접적이며, 인위적인 성질을 띠었듯이 말이다. 이러한 형식적인 의미에서, 호주와 일본은 일반적 인식보다 훨씬 더 태만한 태도를 취해왔다. 둘 다 유럽에 비해 그 보편적 근대성 기획의 출처와 관련해서는 중심에서 이탈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공통점을 희석시키는 것은 '호주'가 제도적 담론적으로 '서구'의 내부에 위치했던 반면, '일본'은, 비록 주변에서지만 경제대국의 지위에도 불구하고, 낡은 핵심부/주변부 논리에 따라, 세계 헤게모니의 핵심으로 진입하는 문제에서는 여전히 '비서구'의 일부로 남아있게 된다는 사실이다. 좀 다른 측면에서, R. Rhadakrishnan이 지적하듯이, '이러한 분리는 지배적 보편세계의 이데올로기를 공고히 하는 범행을 저지르게 된다. 서구의 지도(指導)는 자연스러운 것이며, 동양의 정체성은 언제나 자기 자신과 불일치 한다는 전제 하에, 격차해소라는 영원한 게임에서 늘 따라와야 할 것이라는 그런 이데올로기의 유지 말이다(Rhadakrishnan, 1992:86)'.

이와 같은 이원론(二元論)의 재생산을 피할 수 있는 한가지 방법은, 근대성(기획)의 강제적인 전유(專有) 가 주변부내에서 어떻게 복합적이고 토착화된 근대성을 출현토록 하는지 그 방식들을 전면 검토해 보는 것이다. 이 복합적이고 토착화된 근대성은 지금 옛 유럽-미국 핵심부들이 전망하는 '서구의 쇠퇴'를 초래할 위협을 가하고 있다.(주7) 일본을 필두로 하는 소위 아시아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세력의 부각은, 서구 근대성의 헤게모니에 대한 재점검의 필요성을 입증해 준다.

David Morley와 Kevin Robins가 관찰한 바와 같이:


일본의 중요성은 그 복잡성에 있다: 비 서구라는 점, 그러나 더 이상 서구가 보는 관점의 동양과 어울릴 수 없다는 점; 일본은 근대를 주장하고, 그러나 또한 우리와 같은 형태의 근대성에는 회의(懷疑)하기를 요구하고 있다. (Morley and Robins, 1992: 155)


그러나 '우리와 같은 근대성'이라는 이들 담론 속의 용어는 유럽식의(그 자체로 하나의 추상인) 근대성이지, 호주 근대성이 지닌 탈식민적인 상표는 아니라는 점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호주인의 관점에서, 일본의 근대성은 서구에 대해 가져왔던 동일화를 호주가 문제시하지 않았던 점에 대해 반성의 기회를 제공할 수 있으며, 따라서 또한 (탈식민적)탈중심성의 경험에 대해, 적절한 타협과 아울러 면밀한 관심의 초점을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이다.(Chakrabarty, 1992를 보라). 서구에 대한 일본의 끊임없는 강박관념은 ― 특히 미국에 대해(미국 또한 자체 내에서 유럽의 근대성과 거리를 가지고 있다) ― 마치 주인과 노예(타자)의 관계처럼, 자신들의 차별성을 끊임없이 유지하도록 강요하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따라서, 적어도 경제적 차원에서의 소위 서구의 쇠퇴는, 그러나 문화적 헤게모니에 있어서는 여전히 서구가 지배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Yoshino, 1992; Iwabuchi, 1994를 보라). 하지만 탈 식민적 관점에서 보면, 호주 역시 이렇게 관념상으로 존재하는 '서구'와의 관계에서는 탈 중심화되어 있다(Gibson, 1992를 보라). 비 서구의 문맥에서 보면, '서구'는 정체성에 대한 조직적인 (진부한)표현으로부터, 지명된 타자로, 즉 (비 서구)민족 자아의 신체 대부분을 관통하는 강력한 힘을 가진 타자로 변형된다.(주8) 그러므로, 서구로부터 배제된 일부국가들에서 일어나는 '서구화'에 대한 관심이 두드러진다. 우리가 인식해야 할 것은 호주 역시 자신을 '서구적인' 존재로 굳게 믿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구화/근대화라는 세계체제를 형성한 출처가 아닌 하나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역사적으로, 호주의 (체제)수립은, 처음에는 정착 식민지로서 그리고 후에야 비로소 독립된 민족국가로서, 따라서 결국 근대성이라는 유럽의 기획아래 놓이게 되었던 것이다(비록 독립 후 점잖게나마 과거 유럽식의 식민화/근대화 기획을 모방했을지라도 말이다).(주9)

결정적으로, 근대화 기획은 실패했다. 유럽의 제국적 폭력이 어떠했는가는 중요치 않다. 혹은 감수성이 강한 비 유럽인들이 어떻게 새로운 방식들을 수용했는가 역시 중요치 않다. 또한 '근대화'와 '서구화'가 궁극적으로는 완전해 질 수 없다는 점 역시 그렇다. 왜냐하면 전체화된 '근대/서구'식의 삶의 방식이라는 관념은 그 자체로 삶과는 동떨어진 하나의 허구였기에 그러하다. 이것은 유럽자신에게 조차도 그렇다. 왜냐하면 유럽 내에서도 역시 전혀 다른 문화적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며, 그 역사적 흔적을 근대성이라는 보편화 기획이 지워버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양한 식민화가 '유럽' 내부에서도 이루어진 것이 사실이긴 해도―예를 들어 프랑스에 의한 Breton 지역의 식민화나 영국에 의한 아일랜드 식민화처럼―서구의 외부세계(즉 비 서구적 타자)의 식민화 또는 정착 식민지와는 대조적으로 '유럽'내부에서 전개된 수사학에 의해 포섭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근대 팽창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지표들 중 하나는 식민지화와 비 식민지화(decolonization, 즉 자치가 부여된 식민지. 역주)의 경험이었다. 보편화된 세계의 근대성이라는 환상이 좌초되는데 기반이 된 암초는, 현실적으로 환원할 수 없는 문화적 차이였던 것이다. 이 차이는 바로 근대기획이 말살하고자 한 것이었으나 결국 불가능함만을 알게 해준 것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근대성 기획이 완전히 실패한 것은 아니다. 따지고 보면, 그것은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세계의 구조적 틀과 기본적 토대를 생산해 냈던 것이다: 세계 자본주의는, 구별된 (민족)국가들로 분할되었지만, 무역이나, '국제관계'라는 확고한 체제, 그리고 점점 더 비대해져 가는 복잡한 세계통신망을 통해 긴밀하게 상호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근대적 세계체제 속에서, Immanuel Wallerstein의 용어를 빌리자면, 외부는 없으며, 우리는 언제나 그리고 이미 체제의 내부에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전체화된 이 세계적 질서와 무질서 속에서, 적어도 구조적 차원에서, 더 이상 진정으로 서로 다른 문화란 없다는 것 ― 다시 말해, 좀 넓은 의미로 '서방'문화에 의해, 즉 자본주의에 의해 건드려지지 않은 문화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맥에서 우리가 지금 '포스트 모던'한 세계에 살고 있다는 주장은 경청할 만 하다. 단일화되었지만 그러나 뿌리깊이 파편화 된 세계체제의 생산 속에서 근대성의 성패를 동시적으로 경험하는 우리가, 이 포스트 모더니티를 전지구적 문맥에서 이해한다면 말이다. 즉, 근대성의 보편화기획의 실패에서 나온 효과가 특수화되고, 토착화된 근대성의 확산을 생산해 왔으며, 그것은 하나의 전지구적 스케일로 볼 때 포스트 모던한 경험으로 묘사될 수 있는, 미분된(differentiated) 근대성의 공존이며 또한 동시적(에) (비)통분가능성(<in>commensurability)이라는 점이다.(주10)



국가/국제적인 것에 대한 문제설정 (Problematizing the (inter)national)


문화연구, 특히 호주 문화연구에서 비판적 초국주의라는 개념의 몇 가지 제한범위들에 대해 윤곽을 그려 볼 수 있다. 비판적 초국주의 관점은 서구와 비 서구라는 이분법적 구분도, 근대성을 보편화하는 가설도 재생산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목적으로 한다. 즉 병치되고, 모순되고, 그리고 언제나 이미 끝났지만 또한 여전히 전개해 나가고 있는 근대성을 중복된 하나의 장으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으로부터, 문화연구는 포스트모던하며 분과학문을 넘나드는(transdisciplinary) 재구성을 통해, 인류학과 사회학을 하나의 세계 속으로 결합시키는 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 통합된 세계에서 근대적 분과학문들간의 구별은 가치가 없어지게 된다. 만일 사회학이 과거 '우리자신'으로서의 '서구'사회 즉, 재현의 인식론에서 볼 수 있는, '우리의' 혹은 '우리와 같은' 문화에 관심을 가졌으며, 인류학이 '우리와 다른', 혹은 '우리가 아닌' 타자로 구성된 문화에 관심을 가져 왔었다면, 비판적 초국주의 문화연구는 모든 문화가 '우리'(같은) 또한 '우리'(같지 않은) 하나의 세계를 반영하며, 그 세계 속에서 활동한다. 그것은 또한 이론적 도구를 필요로 한다. 이를 통해 하나의 세계 속에서, 허물없는 차이(familiar difference)의 실천들을 타진해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라는 개념이 이제 어디에나 있는 그런 세계에서, '우리'가 이제 더 이상 근대 이데올로기가 원하고 있는 자기 동일화된 존재가 아닌 그런 세계에서, 심지어 계몽주의 전통의 핵심부인 미-구라파 지역에서조차 말이다.

따라서 초국주의적 '차이'의 확산은 문화연구의 과제들을 복잡하게 한다. 이것은 최근 문화연구의 영미 계 지배에 대한 저항들에서도 입증된다. 이들은 대부분 캐나다와 호주의 전문가들에 의해 제기되고 있는 문제이다(Morris 1992; Blundell, 1993 을 보라).(주11) 그리고 이 문제제기는 문화연구를 사회학이나 인류학 같은 지배적이고, 보편화된 근대적 분과학문들과는 다른(different) 하나의 담론구성으로 윤곽을 그리는 전조가 된다. 또한 여기에만 국한되지 않고, 철학(계몽주의 분과학문의 최선봉인), 심리학 혹은 경제학에까지 확산될 것이다. 논의를 확대시키자면, 여기에는 하나의 문화연구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다만 문맥에 따라 특수한 문화연구 전통의 다수성만이 있을 뿐이다. 이 다수성은 민족국가들의 특이성을 근거로 하는 경향을 띠어왔다. 이것은 독특한 호주 문화연구에서 요구되는 토대들을 구성한다. 따라서 호주 문화연구는 이론적인 관심들과, 실질적 이해관계들에 의해 특징지을 수 있으며, 역사적으로 특수한 '호주'의 근대성을 통해 정교화 될 것이며, 아울러 그 근대성을 담론의 장으로 끌어들이고 맞서게 될 것이다.

여러 면에서 이 민족적 차별성에 대한 강조는 중요하며 또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예를 들어, Graeme Turner는, 국수주의적(nationalist) 문화연구가 아닌 민족적(national) 문화연구의 지형을 정교화 하면서, 영국과 호주의 민족문화를 구별한다. 그에 따르면, 영국 민족 문화 내 텔레비전 광고 등에서 'Britain'을 거의 호명하지 않는 것은―즉, 탈 호명―'영국을 묘사할 때, (영국인의)국적은 매우 당연한 것이며, 이미 언제나 적절하다는' 인식에서 나오는 자연스런 결과라는 것이다. 반면에 '호주의 재현 양식들에서는, 이미지화된, 신화화된 민족으로 분명히 묘사되며, 그것을 조회함으로써 거리를 갖는다'는 것이다.(Turner, 1993:8)(주12) 터너가 여기서 지적하는 핵심은 호주의 민족적 조건의 특수성과 관련이 깊다: '새로운 나라에서 사는 것은 특히 구체적이고, 변화무쌍한 그러나 강압적인 국가형성 과정 속에서 파생되는 사태들과의 부단한 만남이 될 것이며, 또한 그것들에 개입할 수 있는 가능성은 제한적일 것이다'(8). 그는 더 나아가 언제나 이미 문제가 되고 있는 민족정체성 경험의 효과는, '하나의 층위뿐 아니라 다른 층위들과의 연관 하에 다루는 것이 불가피한, 호주의 컨텍스트 내에서 이루어지는 문화연구작업에 많은 근거들을 제공하고 있다고 주장한다(9). Turner는 이점을 이용해서 호주문화 연구자료 모음집 속에 있는 자신의 많은 에세이들이 왜 그토록 호주의 민족정체성을 문제시하고 있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민족정체성에 대한 이와 같은 관심집중은 그에 상응하는 비판적 자기인식을 필요로 한다. 반성하지 않는 민족주의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말이다. 곧 밝히겠지만, Turner가 일깨워주는 것은 역사적으로 결정된 호주의 특수한 민족정체성이 영국과 관련이 있으며, 나아가 세계와 연관이 있다는 점을 인식하는 방식으로 탈 식민 이론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로부터 우리는 탈 식민이론이 '호주'―아울러 다른 여러 나라들―를 이해하는 방식에 있어 중요한 용례들을 가지고 있는 반면에, 민족정체성 기획 자체는 문제삼지 않는 경향이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개념적으로 그리고 실천적으로 많은 것들을 생략할 수 있다는 점을 말이다. 우리는 계속 논의를 진행시켜 개념적으로 진행되는 생략들을 다룰 것이다. 그러나 잠시 실천적인 생략의 예를 언급하는 것 역시 가치가 있을 것이다.

호주 문화연구는 지금까지 지역적 특수성에 대한 질문에 소홀해 왔다. 예를 들면, 입장을 분명히 하는 장소로서의 민족에 대한 과도한 관심의 초점으로 인해, 다른 정치적 단위들―예로, 신 남부 웰시(New South Welsh)정체성, 혹은 서구식 호주 정체성 같은―과의 연관 하에서 진행되는 정체성의 논의에는 관심이 적었다.(주13) 이 문제에 대해서는 또한, 시드니(Sydney)와 멜버른(Melbourne)의 문화적 차이에 관한 오래된 논쟁들이 최근의 호주 문화연구 담화들 속에서 제대로 인식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드러나며(Docker,1974를 보라), 브리스베인(Brisbane), 아델레이드(Adelaide), 케언스(Cairns), 퍼스(Perth), 혹은 그 밖의 다른 도시들과 관련지어 추가로 다루어지고 있는 않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이 문제를 발전시켜왔던 단초는(이것은 매우 중요한데) John Frow와 Meaghan Morris가 자신들의 저서 '독자들을 위한 호주문화연구(Australian Cultural Studies reader,1993)'의 서문에서 '장소의 실제(The practice of place)'라고 표현한 것에서 시작된다. 여기서 그들은, 정체성이 확고한 장소들 속에서 얻은 경험의 특수함, 그리고 거기서 나오게 되는 문제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지역적 경험'의 해석학적 설명들은,  '위치'와 '지식'간의 친밀한 연계라는 인식경험을 상술하려는 의도였는데도 불구하고, Turner에 의해 개괄된 '민족적 선취(national preoccupations)'와의 구체적인 연결을 전체적으로 도출하지는 못하고 있다. 호주공간에서의 이들 두 가지 차원의 경험이(지역적인 것과 민족적인 것; 해석적인 것과 제도적인 것) 비판적으로 병치되고 그것이 다른 하나에 효과적인 영향을 주게 된다면, 그에 잇따른 연구들은, 호주의 문화연구에서 보다 반성적인 '민족적' 발화입장을 도출해낼 수 있으며, 단일화된 민족국가 호주의 담론과 보다 유동적이고 이질적인 '호주'의 담론들간의 관계를 문제설정 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개념적 수준에서, 민족 정체성에 대한 관심이, 탈 보편화를 위한 장치에는 중요한 반면에, 만일 역사적 문맥뿐만 아니라, 공간적, 초국적 정황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것 역시 충분히 만족스럽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 민족의 개념은 이들과 함께 문제제기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까지 문화연구는 대부분이 본질적 혹은 체제 내부적 이성에 해당하는 민족적인 것(the national)의 개념에만 문제의식을 가져왔다: 예를 들어, 민족이란 하나의 상상된 공동체라는 점만을, 민족적 '정체성'은 처음부터 주어진 것이기보다는 역사적으로 구성된 것이라는 점만을, 모든 민족의 '단일성', '단결'은 다만 소수집단의 강제된 동화와 그들에 대한 억제를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다는 점만을 계속해서 지적함으로써, 그에 상응하는 문제의식만을 가져왔던 것이다. 위에서 우리가 언급한, 지역적인 것(the local)과 민족적인 것(the national)을 병치시키는 것은 민족정체성의 구성에 대한 내재적 비판이라는 바로 이 목적에 유용할 것이며, 또한 인종, 성, 그리고 계급 등과 같은 내부적 파편화라는 또 다른 중요한 지표들에 대한 관심을 집중시키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아울러 민족에 대한 이러한 내재적, 역사적 탈 신화화 뿐 아니라 국제적 공간질서 속에서 민족주체라는 특권화된 수사학적 위상의 개념을 구조적으로 비판하는 것도 중요하다.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듯이, 보편화된 근대성을 위해 이데올로기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우선 특수성의 공인된 지표로서, 보편적으로 인식되고 그 타당성이 인정되었던 '민족국가'이다. Wallerstein을 인용하자면, '근대적 세계체제 내에서, 민족주의는(유일한 것은 아니지만) 지방(배타)주의의 제 1원리로서, 가장 폭넓은 호소력을 지니며, 가장 오랫동안 자리잡은 힘이며, 가장 정치적인 영향력이며, 그 지속력에 있어 가장 육중한 무기이다'(1991:185). 이렇게 공식적으로 재가된 보편주의적 배타주의로부터 나오는 국제주의는―이것은 UN에서 거의 구체적으로 제도화된 것이기도 하다―전지구적 문화를 위한 하나의 모델을 구성하는데, 이것은 서로 구별되고, 상호 배타적인, 단일한 민족 단위들간의 상호관계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지만, 사실 구체적이고 핵심적인 내용을 들여다보았을 때는, 국제주의가 선언하고 있는 이 요소들간의 동등한 지위나 위상이라는 의미는 매우 형식적인 허울에 불과할 뿐이다. 이렇게 부조리 하지만 그러나 매우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환상을 내포하는 동등함의 개념이 목표하는 것은 '다양성 속의 상상적 단일체'의 수립이다. 전지구적 '상상 공동체'는 형식적으로는 등가의 단위로, 원리적으로는 상호 교환적이지만, 실제로는 구성요소들로 분할된, 상호 배타적인, 단일화된 민족적 상상 공동체에 불과한 것이다. 마치 참가에 가장 큰 의의(?)가 있는, 올림픽 경기에 참가한 개별화된 팀들처럼 말이다. 분명히 이러한 보수적 다원주의의 국제/국가간의 '차이(difference)'에 대한 견제는 근대성 기획의 성공을 위한 중요한 지표들 중 하나인데, 비판적 초국주의 관점에서는 묵과할 수 없는 개념이다. 민족국가의 이데올로기와 그 실천은 가장 미시적으로 편재하고 있는 유럽근대성의 수출품으로서, 그것에 대한 정치학은 우리가 인식해야 할 과제이며, 민족국가 그 자체에 대한 개념, 그리고 그것의 합법화를 위한 수단으로 채택되는, 민족정체성을 구성하기 위한 전략상의 의존들은 문제시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특성으로, 호주의 민족정체성에 대한 관심은 결국 호주 민족국가가 부분적으로 또 하나의 성공적인, 그러나 동시에 매우 특수한, 유럽근대성의 지대 내에 있다는 최종적 이해 속에 던져져야 한다. 비판적 초국주의 관점에서, 개별 민족국가들의 서로 다른 만남들과 이들의 토착화로부터 흘러나온 (탈)근대적 특수성, 그리고 이들 민족국가들의 존재를 생산하는데 일조 했던 근대성은 충분히 인식되어야 할 것이다. 민족주의의 정치학은 민족적인 것(the national)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매우 쉽게 생겨날 수 있는 것이며, 때로는 권력을 갖지 않은 민족국가를 위해 전략적인 본질주의로 옹호되기도 하는데, 이데올로기의 한 부분으로서, 그 민족국가의 역사적 특수성을 망각하면서, 특정한 민족국가 구성체들의 일면적인 역사 문화의 특질만을 강조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것이 바로 호주와 '호주'담론 둘 모두를 초국적 틀 속에서 비판적으로 (재)검토하는데 이론적 출발점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제안하는 것이다. 그 후의 문제의식은 어떻게 이 초국적 틀을 설명할 수 있는가 이다.



전지구적 자본주의로의 진입(Entering global capitalism)


'아시아적 전환(the Asian turn)'이라는 슬로건 이면에 감춰진 경제적 요구는, 비판적 초국주의가 문화적 동향(東向)과 상호관계들을 구체화할 때, 자본주의적 질서의 구조적 추이들(trends)의 중요성을 무시하거나 간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만일 근대성 기획이 '형식적'으로 구별된 '민족국가'들로 이루어진―주로 분리된 경제체제, 특수한 민족문화 그리고 민족의 운명에 대해 자주적인 요구들로 이루어진―하나의 세계를 창조했다는 가정 하에서도, 이 특이성들은 점점 초국가적 통신 기술체계(transnational communications technologies)와 같은 많은 발전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으며, 더욱 중요한 것은 초국가적 자본의 힘과 그 효과들로 인해 민족적(국가적) 경계가 점점 축소되고 있다는 점이다. Robert Ross와 Kent Trachte가 지적하듯이, '전지구적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체계는 지난 20년 동안의 그것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것이다'(1990: 6). 즉 1960년대 말 이후로부터 말이다. 같은 맥락으로, Manual Castells 역시 '모든 경제적 (생산)과정에 있어 가속화된 국제화'를 묘사한 바가 있다(1989: 26). 이것이 가능해 지게 된 것은 새로운 정보기술의 발전에 힘입은 바 크며, 그로부터 자본주의의 전지구적 실천을 변형시켜 왔던 것이다.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팽창에서 한가지 근본적인 양상은 핵심부/주변부 구조의 재구성에 있었으며, 이것은 성장주의(developmentalism)와 근대화의 수사학, 그리고 독점 자본주의를 특징짓는 것이었다. 이러한 변형을 위한 경제적 동기들은 매우 복잡하며, 이 글에서의 관심사는 아니다. 따라서 옛 주변부들의 부분적 공업화의 증가가 이 변화의 중요한 하나의 양상이 되어왔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에 대해 Ross 와 Trachte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독점 자본주의 시기에, 성장을 특질 짓는 지역적 패턴은 변해왔다. 제3세계 국가들이 제조업의 성장을 경험했을 뿐만 아니라, 선진 공업국가들의 경제보다도 더욱 빠른 성장을 해왔다. 유럽대륙 내부에서의 최근의 성장패턴 역시 같은 것이 사실이다. (Ross 와 Trachte, 1990: 96)


잘 알려져 있듯이, 이러한 성장이 가장 괄목할 만 했던 지역은 '동아시아'였다. 1965년에서 1981년 사이에, 홍콩, 대만, 한국, 싱가포르, 말레이지아, 그리고 태국과 같은 나라들 모두가 제조업 부문 실질성장률이 10%를 넘어섰다. 인도네시아에서는 1965년과 1980년 사이 7.9%의 성장률을 보였는데, 1970년과 1981년 사이에는 13.9%로 증가했다. 같은 시기동안에 주변부가 아닌 핵심부 국가들 중 아무도 10%이상을 넘지 못했으며, 일본은 세계 경제체제 내에서 구조적으로 변화한 위치에 있는 나라로, 1965-1970사이에 16.3%의 성장률을 보였지만 1970-1981년 사이에는 4.2%라는 급속한 하락을 보여주기도 했다(Ross and Trachte, 1990: 95). 이렇게 서로 다른 성장률로 가늠되는 제조업 현장에서의 변화는 값싼 노동력과 노동탄압(non-unionized labour)이라는 담보를 통해 부분적으로 촉진되어 왔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 변화들은 '동아시아' 민족국가들에게 새로운 경제력을 부여하는 역할을 해온 것도 사실이다. 이 변화는 또한 권력과 종속이라는 사회 공간적 구축 망의 중복과 교차를 새롭게 설정하는 과정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Arif Dirlik가 상술하고 있듯이, '자본주의라는 서사는 이제 더 이상 유럽의 역사 서사가 아니다. 비 유럽 자본주의 사회는, 처음으로, 자본주의 역사 속에서 자신들의 요구나 주장을 관철시키게될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이다'(1994: 51). 말하자면, 세계사적 규모로 볼 때, 비서구적 근대성을 취한 나라들은, Dipesh Chakrabarty의 말에 의하면,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 유럽에서 파생된 제도들의 정치적 상상력을 통해서 역사적 동일화를 구축해온 양식에 근거하는, 우리의 근대 역사에 '차이'라는 글자를 새겨넣기' 시작했다는 것이다(Charkrabarty, 1993: 30).

이러한 발전은 핵심부/주변부, 특히 '서구'와 '아시아'라는 관계설정에 동요효과(unsettling effect)를 가져오게 된다. 근대의 절정기에 주변부/핵심부라는 이분법은 확실한 신원보장의 틀이었다. 예를 들어 이 신원보장을 통해 각각의 민족국가들이 구분되는데, 제1, 제2, 그리고 제3세계라는 메타포로 환원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간단한 구분은 점점 적절치 못한 것으로 변화되기 시작한다. Arjun Appadurai는 이에 대해, '세계의 문화 경제는 복잡하고, 중첩되고, 이접적인(disjunctive) 질서로 보아야만 한다. 그리고 이것은 더 이상 기왕의 중심-주변부라는 모델로 이해될 수 없다(이것은 또한 중심/주변부의 다수라는 설명으로도 불가능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1990: 6).(주14) Appadurai는 핵심부/주변부라는 이분법적 구조 대신에 흐름(flow)이라는 개념적 도식으로 대체할 것을 제안한다. 이론적으로 이 변화는 독점자본주의라는 고정성에서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특징인 국경들을 넘나드는 대량의 움직임으로의 이동을 표현하고 있다. 전자는 민족국가들의 경계선 내부에서 법인자본과 국가경제간의 긴밀한 상호연결로 예증되고 있던 반면에, 후자에게 국경선 그 자체는 민족국가들의 주권을 상대화시키는 것이다. 그는 전지구적 문화흐름을 다섯 가지 정도의 범위로 제한하고 있다: 국민, 매체, 기술, 화폐와 지식의 범위가 그것이다. 이들은 '상상된 세계라고 부를 수 있는 일종의 빌딩 블럭들을 형성하고 있다. 즉, 복합적 세계인 것이다. 이것은 역사적 상황에 놓여진 전 세계의 사람들과 집단들의 상상력으로 구성된다'(1990: 7)

그러나 이들 복합적 상상세계는―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해줄 이접적 문화흐름들은―아무렇게나 구성되는 것은 아니다; 결국, 세계 자본주의의 움직임은 빈 공간을 대신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언제나 그리고 이미 채워지며, 구성된 공간인 것이다.  사실, 강조되어야 할 것은 이들 흐름들이 가로지르는 공간들의 역사적 문화적 형세이며 특수성이다. 지난 시대의 유산들은―그리고, 우리가 잠시후 언급하겠지만, 특히 식민주의적 유산들은―문화적 흐름이라는 현재 궤도에서 강력한 결정소로 남아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아마도 그 핵심/주변의 도식을 흐름이라는 구도로 완전히 대체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 지속성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 둘을 절합 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맡아야할 이 전지구적 난제들을 구성하는 언제나 유동적이며, 다차원적이고, 이질적인 그래서 또한 모호한 관계성의 해몽을 말이다. 고정된 핵심과 주변이라는 개념으로부터 흐름이라는 개념으로 탈주하는 이론적 과도기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세계 자본주의의 확대를 통해, 힘의 관계라는 낡은 뿌리체계를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다는 점이며, 오히려 보다 새롭고, 보다 중층적인 지형을 되새기게 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힘들의 갈등 현장으로서 경제적 담론과 문화적 담론의 해체와 탈구(disarticulation)를 통해서 말이다.

일본의 예로 다시 돌아가 보면, 지난 몇 십년 전 지배적 경제력을 가진 나라로서 일본의 급부상은, 계몽주의적 가치로 별문제 되지 않았던 자본주의 근대성의 본산, 즉 '서구'의 근대적 관념을 뒤흔드는(deconstruction) 효과를 가져왔다. 좀더 일반적으로 아시아 자본주의와의 관계를 볼 때, 최근 '동아시아'에서 소위 유교적 가치관(Confucian values)의 눈부신 부상을 목도(目睹)해 왔다.(주15) 이것은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Dirlik이 지적하듯이, 그것은 '본토(즉 비서구인)의 문화와 (서구)자본주의 서사의 절합'이라는 측면 때문이다(1994: 52). 그렇다고 해서 '서구'의 이데아(idea)가 이제 그 힘을 잃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에 대해서는 Stuart Hall이 제대로 바라보고 있는데, 그것은 '전지구적 힘의 관계라는 하나의 시스템 내부에서 작동하는 유기적인 요소이자 동시에 모든 사고방식과 발화방식을 조직화하는 개념이며 용어라는 점이다'(1992: 278).

이 두 경향들의 관계는 모순적이다. 한편으로는 실제로 존속하는 핵심부/주변부의 관계가 이제는 복수화되고 더 이상 고정되지 않는다는 사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전지전능한 핵심으로서  '서구'담론의 힘이 여전하다는 점이 그것인데, 이는 특히 호주에게 여러 문제점들을 암시하고 있다. 전지구적 자본주의 시기에서, 호주 민족국가는 점점 동아시아의 NIEs, 즉 신 공업경제(newly industrialized economies)에 경제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있다. 이러한 진전으로 이전의 위계를 전례 없이 전복시켰다는 사실에 대해 인식과 우려를 촉발 시켜왔다. 힘없는 타자(Other)로서의 아시아가 이제는 (경제적으로)주변화된 '호주'와의 관계에서 중앙통제의 역할을 하는 중심부의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는 우려를 말이다. 그러나 동시에, 호주는 '서구'와의 관계에서도 유사한 계층관계, 즉 여전히 주변부로 남아있는데, 따라서 역사적으로 그리고 어느 정도는 문화적으로 일부분으로만 남아있다는 점이다. '서구'는 '호주'에게 (문화적)힘이라는 풍부한 자원을 제공하는데, 이 힘을 통해 '아시아'와의 대결에서 우월감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우월감은 우려감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싱가포르의 수상인 Lee Kuan Yew의 말을 빌리자면, 만일 호주가 변하지 않는다면, '아시아의 하얀 쓰레기'로 변해버릴 위험에 있다. 간단히 말해, 최근의 전세계 역사적 국면은 세계 속에서 호주의 재현에 관한 문제의 차원에서 매우 어려운 상황이라는 점이다. 탈 중심감의 고조가 깊이 스며들어 있다거나, 문화적 역량에서 옛 핵심부라는 위치가 위협 당하지는 않는다 해도, 경제적 어려움을 안고 있는 호주는, Andrew Milner의 표현을 따르자면, '갑자기 표류하게된 유럽 정착 식민지로서, 이성으로도 상상으로도 생각지 못했던 아시아의 물결에 밀리는 하얀 쓰레기'로서의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1990: 39).



탈식민적 난관(Postcolonial predicaments)


'탈 식민성'이라는 범주는 호주 문화연구에서 '호주'를 이해하는데 있어 지금까지 가장 두드러진 관심의 하나였다. 그것이 중요한 이유는 탈 식민주의가 하나의 이론적 관점으로서, 호주라는 나라를 초국적 틀이라는 역사적 결정 속에 위치시켜 놓았기 때문이다. 탈 식민이론은 짧은 역사를 가지지만, 여기서 자세히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다. 우리의 목적은 우선 '호주'를 이해하고, '아시아'와의 관계를 조망하는데 있어, 탈 식민적 관점을 수용할 때 어떤 효과가 가능한지를 검토해 보는 것이다. 포스트 콜로니얼이라는 범주의 수용은, 지나간 과거의 특수성과 현재와 미래에 미치는 그 효과―대영제국의 정착 식민지로서의 호주의 역사―를 근간으로 하여, 뚜렷한 초국적 관계 구성을 강화한다. 이렇게 호주 문화연구에 있어 탈 식민주의 관점을 전유하는 것은 또한 동맹관계들을 결성하기 위한 전략을 제공해 오기도 했다―예를 들어, 캐나다와 뉴질랜드와의 동맹을 들 수 있다(주16) ― 이들은 모두 대영제국의 정착식민지였다는 역사적 사실에 대해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다. 탈 식민적 '정체성'이라는 수사적 전유는 하나의 민족적 자기정의(self-definition)의 행위이다. 그것은 고의적인 민족자아의 탈 중심화이며, 자기의식을 상대화시키는 것이며, 근대적 체제라는 옛 핵심부와의 관계, 이 경우에서는 영국과의 관계에서 자기 주변화를 꾀하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

Turner는 탈 식민성이 가지는 난제를 일련의 이중구속(double binds) 혹은 이중 접기의 차원에서 설명하고 있다:


(이중구속은) 탈 식민국가(민족)와 그 타자인 식민지배 권력간의 복잡하고 모호한 관계로부터 나온다. 타자(즉 지배권력)와의 연결을 우선 깨어야하는 것이 탈 식민적 관점인 반면에, 호주인들은 자신들의 차이를 규정하려는 시도를 여전히 이분법 체계에 의존함으로써 그들(타자)과 다시 관련짓게 된다. ― 예로, 전통적으로 접힌 호주/영국의 구분을 이번엔 그 반대로 다시 접는다. 물론 탈 식민적 정체성의 여부는 식민주의적 틀을 뒤 업는 것에 달려 있지만, 그러한 전복이 효과적이었음을 입증하는 가장 강력한 증거는 식민지배권력이 그것을 인정했을 때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심지어 탈 식민성의 위상마저도 지배권력을 지닌 타자의 승인 하에 있음을 말해준다는 억지도 무리가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다. (Turner, 1992: 426-7)


Turner는 다음과 같이 결론 내린다. '탈 식민성이 의미하는 것은 모순들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비 일관적으로 보일 수 있는 태도들을 영유하는 것이다'(1992: 427). 그러나 탈 식민적 인식의 난관에 대한 이러한 설명이 시사하는 것만큼, 또한 그것은 호주의 초국가적 상황을 묘사하는데 있어 중요한 단초로 이해될 수 있는 탈 식민성을 어떻게 일반화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점들을 드러내고 있다. Turner가 묘사하고 있듯이, 탈 식민 담론은 우선 제 식민지 경험을 지배하고 있는 이분법적 구조를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이런 식으로 보면, 이 이론적 기획은 하나의 중요한 감성적 향수 속에 있는 것이다. Fernando Coronil이 적고 있듯이, 그것은 '식민경험을 벗어난 사회를 마치 과거 식민지의 배제의 결과인 것처럼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1992: 102). '호주'의 현재상황을 이해하려는 문화연구 관점에서, 그러한 도식화는 유용한 것이기는 하나 다소 한계가 있다. 탈 식민적 상황을 이용하는 것은 순진한 담론적 제스쳐가 아니다: 옛 식민지배권력과의 모순적 관계 속에서 탈 식민 민족국가의 분명한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해도, 어쨌든 그것은 전략적으로 (민족)정체성의 응집력을 과도하게 강화하는 근거를 구성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탈 식민 이론이 비판적 초국적 문화연구에서 중요한 기여를 하고 있다는 점을 확신하고 있다. 최근에 탈 식민이론에 대해 비판적인 한 토론에서, Dirlik은 그것을 현대세계에 대한 맑시즘적 이해방식에서 동떨어진 것으로 바라보았다. 그의 견해로, 탈 식민 담론이 가지고 있는 문제는 그것이 '삶의 물질적 조건, 즉 현대사회가 누리고 있는 '기본적'원리로서 전 세계 자본주의라는 조건을 자신의 인식에서 배제하고 있다'고 말한다(1994: 99). 실제로 그는 '탈 식민 담론이 주장하는 분열과 지역적 우연성에의 가치부여, 그리고 유동적 관계와 주체의 교차 가능한 입장들에 대한 단언들 속에서, 탈 식민 담론은 '세계자본주의' 체제 내부를 맴도는 삶의 묘사로 해석될 소지를 다분히 가지고 있다'고 지적한다(97). 『자본(The Capital)』이 19세기 공업 자본주의 하에서의 삶의 묘사로 해석되듯이, 거기서 탈 식민 담론은 무엇을 읽어야 하는가! 물론 『자본』은 탈 식민 담론에서 놓치고 있다고 Dirlik이 본 도덕적 비판을 포함하고 있었다.

탈 식민 이론의 효용은, 우리가 보기에, 확실히 그것이 근대적 질서라는 옛 고정성과 계몽주의의 도덕적 확신이 흔들리고 있는 현대세계와 절합 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우리가 도덕적 비판의 상실을 지지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도덕적 비판의 중요성이 어느 때보다도 대두되고 있는 지금, 그것이 형성될 수 있는 기반들이 긴급히 요구되며, 그에 상당하는 맥락의 실체화가 필요하다는 점을 탈 식민적 비판이―그리고 또한 초국적 문화연구도―인식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탈 식민 이론이 세계자본주의 체제에서 급속도로 퍼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식민화와 정착 식민지라는 구조가 만들어 놓은 민족국가들이 이제 대중의 목소리를 찾기 시작했으며, 그들의 과거에 대한, 그리고 그것이 현재에 끼치는 영향력에 대해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탈 식민이론이 발전하는 동기는, 경제적 차원으로 빠르게 전환되고 있는 시점에서도, 여전히 현재적 컨텍스트를 끊임없이 제공하고 있는 문화적 세습을 이분법적 관계가 생산하고 있다는 사실이 현재 무엇을 함축하고 있는지 검토하려는 요구에서 나온다는 점이다. Bill Ashcroft, Gareth Griffiths 그리고 Helen Tiffin이 문학연구에서의 탈식민이론을 다룬, The Empire Writes Back(1989)의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탈 식민이론은 작가들이나 지식인들의 새로운 능력, 즉 이전의 식민 지배하에서 진행되었던, 옛 핵심부인 서구의 논리와 아울러 '근대화'가 부여했던 식민주의의 파생물로서의 비평가에서 벗어난 새로운 능력의 결과라고 암시한다. 이러한 역사적 결과들은 세계의 질서 혹은 무질서 속에서 지속적으로 진행되는 변형들과 관련을 맺고 있다. 그것은 탈 식민 이론이 발전되어 왔던 그 세계가 전 지구적 자본주의라는 세계이기 때문이며, 이론적 개념들과 분석적 통찰의 대부분이―예를 들어, 잡종성(hybridity), 분산(diaspora), 흉내(mimicry)등과, 보다 일반적으로는 정체성에 대한 문제의식 그리고 이론의 문화 정책적 인식 등―탈 식민적 관심사들의 특수성을 넘어서는 잠재적 응용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것이 탈 식민 이론을 현대세계에 대한 비판적 초국주의의 문화연구와 연관지을 수 있는 지점이라 할 수 있다.

근대적 세계체제의 구조화에 '기초적인' 범주로서, 자본주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Dirlik의 논의가 틀리지 않은 반면, 탈 식민 이론이 우리에게 제공할 수 있는 것은 복잡한 역사적 과정에 대한 통찰을 제공해 준다는 점이다. 그 과정들을 통해, 식민주의의 종말이라는 사태에 직면한 모든 나라들이 타의적이며 동시에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다시 그 세계 체제 속으로 끌어들이게 되었다. 피 식민지배자는 다만 민족국가 건설의 필요성과 민족 정체성에 대한 관심만을 가지면서, 민족국가의 위상을 취함으로써만 근대세계의 일부로 인식될 뿐이었다. Turner에 의해, 일련의 이중구속으로 적절히 묘사된 이러한 역사적 문제의식은, 여전히 탈 식민적 민족국가들이 처해있는, 심지어는 국가 간의 경계들이 초국적 자본에 의해 무작위로 구분되고 있는 현실을 지적해 주고 있다. 그러나 이 이중구속들은 다만 역사적, (개념적으로)민족적, 그리고 지정학적 특수성의 문맥에서 구체적으로 작동될 때 비로소 효과가 있다. 비판적 초국적 문화연구가 할 수 있는 것은 민족내부에 놓여진 특수한 탈 식민적 경험들을 민족들간의 상대적인 문맥에 위치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문맥 속에서 우리가 질문할 수 있는 것은 탈 식민적 민족국가들이 제자리를 찾기 위해 분투하는 균형 잡힌(혹은 그렇지 않은) 근대성들간의 관계들이다. 동시에 이들 민족국가들 자신은 근대성 기획의  성공과 패배가 공존할 수 있음을 입증하는 증거들임을 기억하는 것이다.



결론(Conclusion)


Ulf Hannerz는, 세계 자본주의가 핵심부/주변부 구조를 변형시키듯이, 이와 같은 발전과 관련되어 문화적 교체가 어떻게 해서 불균형적으로 일어나는지 지적해 왔다. 그는 옛 정착 식민지들의 예를 들어 설명하는데, '혈족관계나 친족관계 그리고 조상이라는 역사적 끈들이 주변부를 특수한 중심부에 연결시킨다'(1989: 67)고 지적한다. 그리고 주장하기를:


탈 식민 시대에, 탈 식민 영토의 사람들이 영어와 불어, 그리고 포르투칼어를 계속 사용하면서, 옛 중심-주변의 관계들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만약, 중심-주변의 관계들이 현재와 관련된, 그리고 정치적 경제적 힘의 구조와 관련된 문화적 지체를 나타내는 경향이 있음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또한 일본이 세계 속에서 보다 큰 문화적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Hannerz, 1989: 67)


위의 인용은 오늘날 세계 속에서 호주가 처한 상황에서, 두 가지 중요한 중심 축을 뚜렷하게 설명해 준다: 하나는, 호주와 유럽의 연계에 대한 문화적 지속을 설명해 주며, 다른 하나는 문화적으로 커다란 의미를 갖는 영향력으로서 '아시아'의 중요성을 맥락화 한다는 점이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실제와 상상간의 연속과 불연속이라는 복잡한 절합이 바로 이것인데, 거기서 우리는 비판적 초국주의가 이점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의미에서, 과거 식민적 관계에 대한 편협한 생각이나 강조는 현대의 세계적 질서 또는 무질서 속에서 복잡하고 모순적이며 다면적인 호주의 입장에 대한 올바른 통찰이 불가능하게 되는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 이점에 대해 Suvendrini Perera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호주에서,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탈 식민적' 조건에 대한 최근의 인식들과 그에 대한 찬미 어린 연구들은 때때로 옛 식민 지배자들이 버린 망토의 지방 상속자로서, 호주 자신의 민족적 자아-이미지에서 비롯된 문제들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역사는 호주를 한쪽 끝에는 유럽(특히 영국), 그리고 다른 한쪽에는 '아시아'와 불평등적이며 거슬리는 삼각관계를 낳게 한다. 이와 같은 관계는 계층구조의 지속적 재배열의 일종으로 인식될 수 있으며, 이것은 또한 군사적, 경제적 그리고 문화적 우월감 ― 이것은 또한 시기적으로 '인종적'우월감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 이라는 현재의 조건들에서 비롯된다. (Perera, 1993: 16-17)


이 삼각관계에 대한 Perera의 강조는 특히 시사하는 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대영제국 정착 식민지로서의 특수한 역사, 그리고 '아시아'와의 새로운 관계를 구성하면서 맞닥뜨리게되는 현대의 문화 정치 그리고 담론적 난관들 사이에서, 결정적인 연관을 도출할 수 있음을 말해준다. '호주'가 전통적으로 스스로를 '유럽'과 동일시 해왔다는 그 사실이 이제 '아시아'로 방향전환 하려는 시도를 복잡하게 한다. 다시 말해, '유럽'을 '아시아'로 곧바로 자의적으로 대체할 수 없는 것이다; 확고하게 자리잡은 역사적 과정들이 여전히 영향력이 있고 그것이 오히려 현대적 관계들을 굴절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호주, 캐나다 그리고 뉴질랜드(그리고, 남아프리카에 대한 문제제기가 필요하다)와 같은 나라들이, 과거 대영제국의 식민지라는 보편적 역사를 갖는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또한 아직까지 그 의미가 이론화되지 않은 탈 식민성의 특수한 절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그 중요성을 다루어야 하는 긴급한 요구들이 생겨난다. Vijay Mishra 와 Robert Hodge가 주장하듯이:


(유색인종이 아닌)백인 식민지의 특수한 역사를 인식하는 것이 특히 중요하다. 그것은, 메트로 폴리탄적 중심이 분산된 후, 영국에 의해 매우 다른 방식으로 다루어지고 있었다. 다시 말해, 영국은, 이 식민지인들에게는 제국의 중심(즉 타자)이 아닌 모국(Mother Country)이었다는 점이다. (Mishra and Hodge, 1993: 39)


이들은 계속해서 말하기를, '메꿀 수 없는 간극'이 백인 정착 식민지(white settler colonies)와 유색인종 비 정착 식민지(non-white non-settler colonies) 사이에 존재했다는 것이다.(주17) 이 간극은 살펴볼 논쟁거리인데, 현재에도 여전히 중요한 차이들을 창출해 내고 있다. 이 차이들은, 전(前)식민 토착문화 위에서 영국식민화와 이민의 영향력이 절합하는 가운데 보여지며, 현재 호주와 '아시아'의 친선을 복잡하게 하는 장벽들과 관련될 수 있다. '아시아'는 지금 민족국가들을 형성하고 있으며, 세계 자본주의의 배치와 배열들 속에서 경제적인 부각에도 불구하고 거의 호주만큼이나 '탈 식민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탈 식민성은 다양한 방식으로 절합 되는데, 이들 민족국가들이 근대 열강들과 색다르게 맺는 제휴의 결과들로 나타난다. 이 과정에서 어떤 나라들은 균형 있는 또 어떤 나라들은 그렇지 않은 절합을 취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소위, 말레이지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그리고 호주의 탈식민적 절합에 대한 초국주의의 비교적 관점은 시사하는 바가 클 것이다. 말레이지아는 영국의 식민지였지만, 이주 식민지는 아니었으며, 지금은 독자적인 말레이 토착문화 위에 자신들의 민족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인도네시아는 영국이 아닌 독일 식민지였다. 독일의 식민정책은 영국의 그것과는 상당히 달랐다. 이들 말레이지아와 인도네시아는 이미 공용어(Bahasa Malaysia/Indonesia)를 가지고 있다(이 둘은 기본적으로 같은 언어이다). 그러나 둘다 자신들의 차이와 특수성을 주장하고 있다. 그들의 서로 다른 특수한 식민경험이 두개의 탈 식민 민족국가들 사이에 영토상의 경계를 낳게 되었다는 것이 주 요인이다. 따라서 이제는 이것이 합법화되어, 문화적으로 새로운 탈 식민성을 재생산할 필요를 가지게 된 것이다. 싱가포르는 공식적으로 (영국령)해협식민지의 하나이지만 지금은 독립된 민족국가로서, 민족 기질상 말레이지아와 많은 점을 공유하고 있지만, 이주민들에 의해 압도적으로 인구를 구성하고 있다는 사실로 보아서는 호주와 공유하는 점이 많다―싱가포르에서는, 말레이 민족이 아닌 중국계가 지배적 인종집단이다. 이들은 지금은 동남아시아 지역 내에서 자신들만의 팽팽한 긴장을 가지고 있다. 반면에 호주 탈 식민 역사의 한가지 중요한 측면으로 백호주의정책(White Australia Policy)을 들 수 있다. 이것은 비록 공식적으로는 약 20년 전에 포기된 것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많은 말레이지아인들, 싱가포르인들, 그리고 인도네시아인들에 대해 호주 백인종의 우월함을 증명해주는 증거로 작용하는 상상의 세계를 품고 있다―따라서 그들의 관점에서, 호주는 절대 '아시아의 일부'가 될 수 없었다. 이렇게 서로서로 교차되고 가로지르는 역사적 궤도는, 다양한 영역과 범위의 전(前)식민 문화들의 흔적들과 결합되면서, 한편으로는 서로 겹쳐지고 포개지며, 또 한편으로는 부조리한 탈 식민 근대성을 생산해 왔다. 이러한 양면적인 성격이 여전히 영향력을 가지고 있으며, 이접적인 세계문화 흐름들의 벡터를 억제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Appadurai가 지적한바 있다 ― 예를 들어, 수많은 말레이지아 학생들과 싱가포르 학생들은 호주인들이 경영하는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으며, 이것은 그 자체가 이미 세계자본주의라는 체제 하에서 고등교육이 갖는 상품화의 결과인 것이다.

간단히 말해, 그러한 비교적 관점을 취하는 기획은 식민사업의 미분적(differential)효과들을 표면에 등장시킬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세계적 질서 내에서 특수한 공간들을 절합하고 주조해 왔기 때문이며, 그 세계적 질서자체를 절합 하는데 도움이 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다원적인 근대성으로 구성된 세계를 인식하는, 즉 이 근대성이 만들어 놓은 경계들이 더 이상 영토상의 민족국가들간의 경계와는 필연적으로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을 인식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며, '서구'와 '아시아'라는 근대적 이분법의 해체를 도모하게 될 수 있을 것이다. 사실상, 근대성 기획이 식민화를 통해서 가능할 수 있었다는 주제 및 전제가, 비판적 초국주의에 의해 촉발된 탈식민 연구와 문화연구에서 보편적으로 인지된 관심사라는 점이 중요하다. 역사적으로, 탈 식민 시기가 의미하는 것은 단일한 근대성 기획의 실패와 종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모순적이고 불일치 하는 근대성들간의 통분가능성 혹은 불가능성에 초점을 맞춘 비판적 초국적 문화연구가 가능해지는 인식론적 시기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랬을 때, 호주 문화연구에서 전략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아시아로의 방향전환'은 근대 민족국가의 일부로서 '호주'라는 자신만의 용어처리를 상술할 수 있을 것이며, 또한 배제가 아닌 포함, 친숙하면서도 이질적인 '서구'와의 관계, 그리고 또한 이질적이면서도 친숙한 '아시아'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설명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호주의 '아시아화'라는 개념은 현재의 국소화된 지리-경제적 요구들과 (탈)식민적 '서구화'라는 과거의 역사적 유산 사이에서 포착된 발상으로, 적어도 '아시아' 자체가 아닌, '아시아' 속의 '호주'를 수용하는 개념, 다시 말해, Huntington교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아시아인'이며 동시에 '아시아인이 아닌' 이질적인 (탈)근대적 존재로서의 호주가 가능할지 혹은 불가능할지, 그 의미에 대해 호주적 상상력을 배양하는데 일조 할 수 있을 것이다.


(주1)

이 논문은 호주의 Griffith 대학에서 1993년 7월에 열린 "Post-colonial Formations: Nations, Culture, Policy"라는 논의에서 처음 발표된 것을 대폭 수정한 것이다. 여기저기에서 우리들은 원발표문들의 표시를 해두었다. 원본에 대한 자세하고도 날카로운 비평을 해준 Meaghan Morris에게 감사를 드리고자 한다. 이 수정된 논문은 1994년 8월 하와이 호노룰루의 동서문화연구 센터(Cultural Studies, East-West Center)에서 함께 작업한 동료들을 방문하면서 작성된 것이다. 작업의 책임자인 Geoffrey White와 지원을 아끼지 않은 Wimal Dissayanake에게 감사를 드린다. // 참고로, 이 글은 Stratton and Ang의 「호주의 아시아화: 비판적 초국주의의 문화학을 향하여」를 번역한 것이며, (『호주 문화학 입문: 문화 읽기와 쓰기』. 지구문화사, 2000)에 실린 내용이다.(역주)

 

(주2)

우리는 이점을 "Stratton and Ang" 에서 더 밀고 나갔다.(근간)


(주3)

Huntington은 '서구, 유교, 일본, 이슬람, 힌두, 스라브정교, 라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문명'으로 구분한다(1993:25). 이상한 것은 '아시아'는 여기서 적어도 네가지의 서로다른 '문명'으로 분리되어 왔다는 점이다.


(주4)

이것은 다음과 같은 효과를 말한다. 타협과 제휴의 필요성에 대한 성찰을 말하면서도 결국 그 생각에는 아시아와 제휴하기 위해서는 서구 자신이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하며, 자의식을 먼저 제거해야 한다는 인식이 깔려있는 것이다. 이것은 오히려 아시아가 자신들의 담을 쌓고 있다는 (비난의)뉘앙스를 짙게 풍기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보기에 따라서는 자의식의 제거나 제휴에의 손길은 위선적인 양면성이 있는 것이다. 또한 이 위선적인 양면성은 서구의 우월감에서 비롯되어, 이 우월감을 우회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효과를 보여준다.(역주)


(주5)

물론, 이 여기서 '서구'와 '동양'이라는 용어의 사용이 동질적으로(homogenizing use) 사용되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이문제를 거론하지는 않겠다.


(주6)

'displacement'의 개념은 단순하지 않다. 예를들어 탈식민 담론에서 이 개념은, 현실적으로 체험된 세계와 언어에 의해 묘사된 세계의 불일치라는 분열적 양상을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불일치는 특히, 정착 식민지에서 두드러질 수 있는데, 이민자와 원주민들간의 언어의 공유(영어를 모국어로써, 외국어로써 사용하는)에도 불구하고, 세계를 인식하는 양식은 불일치 한다는 점에서, 이들은 분열적인 관계를 보여준다. 철학적 개념에서, 언어와 세계의 관계가 보여주는 불일치, 즉 언어의 자기결여(self-need)는 그러나 끊임없이 대상을 지시하고, 대상으로 다가가려는 재현, 즉 자기 충족(self-sufficiency)의 욕망으로 인해, 새로운 의미들과 새로운 언어들을 계속 창조하며,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대치(displacement)하는 분열과 자기모순의 작용을 하고 있다. 본문에서 예를들고 있는 일본의 경우는, 물론 언어를 통한 타자화를 적용할 수 없겠지만, 과거 근대성 기획을 내면화 함으로써 ― 물론, 일본의 경제적 발전은 이에 힘입은 바이다 ― 경제적 지배와 동시에 문화적 열등을 갖는 자기내부의 분열을 경험하고 있다. 이렇게 대체에서 빚어지는 자기모순과 분열을 통해, 근대성 기획은 그 지속력이 강화된다. 따라서 역자는 이 'displacement'라는 용어를 '불일치, 대체…' 보다는, 보다 구체적인 의미인 '분열'이라는 말로 번역했다. (역주)


(주7)

점점 확대되는 '문명의 충돌(clash of civilizations)'이라는 Huntington의 표현은, 이렇게 인식된 '서구의 쇠퇴(the decline of the West)'에 대한 하나의 답변이다.


(주8)

이 부분에 대한 원문은 다음과 같다: … 'Western' is transformed from an organic topos of identity into a powerful, explicitly named other ― an Other which has the power to penetrate the body of the (non-Western) national Self;…', 역자는 여기서 'named'라는 표현에 주목하고자 한다. 이 구절은 서구제국의 이데올로기 효과와 힘은 크게 두가지 단계를 통해 실현되며, 이러한 단계는 변형되면서 일정한 반복적 패턴을 가지게 된다는 뜻으로 변형해서 이해할 수 있다. 즉 신체로 부터 무의식, 하부구조로 부터 상부구조로, 물질로 부터 관념으로 등의 일련의 단계를 밟는다는 점이다. 여러 가지 제도나 언어, 교육(이것은 그자체로는 제도를 필요로 한다), 신체적 억압 등의 단계는, 비로소 이데올로기나 무의식으로 변형되어 각인(interpellated)된다. 각인은 신체에서 의식으로, 그리고 무의식으로 새롭게 새겨진다. 따라서 구체적이며 실질적인 제국의 행위들로 부터 수동적인 식민지의 개인들은(주체들), 단계의 변형을 경험하면서, 스스로 능동적인 개인들로 변형된다. 이데올로기의 구성적 특징은 개인이라는 구체적인 개인(주체)들을 통해 실현되며 표상된다. 따라서 식민지의 주민들은, 일상생활 속에서 습관, 관례(rituals), 양심 등의 실질적인 행위들을 능동적으로 수행함으로써, 변형된 또다른 실질적 단계를 갖게 되며, 개인들은 항상 지명된 타자(named), 즉 '서구'라는 관념적 존재를 무의식적으로 가지게 된다. 이런 식으로 서구의 힘은 비 서구의 신체를 꿰뚫는 힘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역주)


(주9)

이런 문맥으로 보면, 훨씬 극단적이던 일제 식민주의 또한, 그 방식들에서, 유럽 제국주의의 계승으로 부터 자극된 것임을 숙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주10)

세계자본주의 체제내에서 각 민족, 국가들은 서로다른 생산형태와 문화적 차이들을 가지고 있으며, 생산방식, 생산관계들이 서로 미분된다. 이들은 차별성을 가진 관계들로 서로 상호연결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미분된 차이는 자본주의 체제내에서 어떠한 공통분모나 공리로 인해, 서로 환원이 가능한 차이들이기도 하다. 미분된 통약성으로 부터 우리는 차이가 더 이상 본질적으로 차이가 아님을 알 수 있으며, 차이들은 하나의 본질 ― 서구, 이성, 자본주의, 경제 등 ― 로 환원가능한 공리계 내부의 차이들임을 알 수 있다.(역주)


(주11)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논의는 Stratton 과 Ang(근간)을 보라.


(주12)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부르지 않는다는 것은, 자기동일화의 기본적 행위이다. 따라서 호주를 객관적 관찰의 대상으로 제시하거나, 이미지화 하거나, 호명하는 행위를 통해서 타자화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역주)


(주13)

흥미롭게도, 1980년대 중반에 호주연구에서 불거진 퀸스정체성(Queensland identity)의 특수함에 대한 작은 논쟁을 볼 수 있다(Bulbeck 1987 을 보라). 그러나 이것은 호주 문화연구의 관심들중 하나의 요소로만 인식되어 왔다. '호주'와 관련된 북쪽 지역(Northern Territory)의 정체성에 관해서는, Stratton(1989)을 보라.


(주14)

여기서 Arjun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t>he global cultural economy has to be seen as a complex, overlapping, disjunctive order, which cannot any longer be understood in terms of existing center-pheriphery models…'.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관사 the에서 t에 괄호를 묶음으로서 he 라는 남성대명사를 지칭하는 이중적 효과를 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서구 근대성의 보편화, 동일화체계는 남성중심적임을 나타내는 효과를 보인다. (역주)


(주15)

동아시아, 특히 싱가포르에서 유교적 가치관에 대한 새로운 중요성의 비판적 논의에 대해서는 Chua<1990>을 보라.


(주16)

이 논문의 초판(early version)이 나왔을 때 가졌던 회의에서, 뉴질랜드, 캐나다 그리고 호주의 참가자들은 '탈식민 구성체(Postcolonial Formations)'라는 기치아래 회합했다는 사실에서도 입증된다.


(주17)

여기서 '백인(white)'이라는 범주를 단순히 인종적 용어의 차원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근대', '유럽식' 그리고 '서구적'이라는 매우 역사적인 용어들과 연루되는 차원에서 생각해야 한다.

Posted by hu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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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질이란 무엇인가? 무엇이 본질적인가? 문학(예술)과 관련하여 이 문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또한 문학에서 본질은 스타일과 어떤 관계를 가지는가? 문학작품에서 관점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철학에서 전체화(부분과 전체의 관계)의 문제가 문학(예술)에서 어떻게 논의될 수 있는가? 전체화에 관련해 문학(예술)적 모델은 따로 존재하지 않는가? 있다면 그것은 어떤 형태인가? 이 글은 이 질문들에 대한 탐구와 해석으로 구성되었다.

I.

사물의 본질에 관한 니체(F. Nietzsche)의 질문방식을 들뢰즈(G. Deleuze)는 "극화"라는 용어로 개념화했다("Nietzsche" 75∼79). 이 논의는 플라톤과 대립적인 쌍으로 진행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본질의 정의와 관련하여 플라톤이 질문하는 방식은 실재하는 사물의 상위원리를 결정하면서 시작된다. 즉 큰 것과 작은 것의 본질은 각각 '큼'과 '작음'이라는 근원적인 기원(개념)에 의해 정립되는 것이다. 이것이 사유의 출발점이며 동시에 세계의 시작이다. 이 방식은 사물의 외부에서 그 본질을 규정하는 원리이다. 따라서 자연의 각각의 사물들은 하나의 본질 아래 배열되고 분배된다. 만일 운동과 관련하여 자연을 정의할 수 있다면, 개별적인 것으로서 자연의 운동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원인에 의해 발생하지 않는다. 그에 따르면 힘은 주어지는 것이다. 자연은 언제나 자신을 분배하고 지시하는 기원적인 제3의 원리에 관계하는 한에서만 증명될 뿐이다. 소크라테스가 보여주는 아이러니가 언제나 승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현자는 대화에서 미리 결정된 해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해답은 드러나지 않는 심층적 의미로서, 그러나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하나의 본질로서 자연을 초월한다. 변증법은 대화의 기술이 아니다. 그것은 교설의 위장일 뿐이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에게 대화는 탐구의 과정이 아니라 준비된 정답에 도달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은 자연을 따르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정의할 대전제를 재현하고 확인하는 과정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미 마련된 그 해답이다. 그것은 경험적인 것 이전에 미리 결정되어 모든 사물들 위로 부지불식간에 도약을 해버린 임의적 관념이기 때문이다. 우연적이고 임의적인 관념. 한 번도 그 발생적 원인을 확인하지 못한 채, 아름다움-큼-작음이 어째서 필연적으로 존재하는가에 대한 대답은 미루어진 채, 법과 도덕의 원천이 되어버린 이데아. 이것은 사물의 본질이 아니라 의식의 본질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이데아 아래에서 개별자들은 서로 불연속하면서 오로지 그 관념과의 관계만을 유지할 따름이다. 자연 안의 모든 사물들은 종적(縱的)인 관계들로만 채워질 것이다. 이로써 개별적인 것들과 이들을 하나의 본질로 꿰뚫는 기원적인 것 혹은 전체적인 것과의 관계는 마름질 잘된 하나의 체계를 구성하게 된다. 이 체계 아래에서 부분은 전체와 기원에 정체된다. 또한 이 체계 내에서 우리는 파편적인 것들을 끌어 모아 하나의 전체를 구성할 수 있거나, 혹은 그 각각의 부스러기를 통해 전체를 이해할 수 있으며, 심지어는 실재의 근원적 기원을 단편화된 부분들 속에서 발견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우주 전체가 이미 부스러기 안에 들어있다는 생각이 가능한 이유이다. 또한 이와 마찬가지로 그 반대 역시 얼마든지 가능해진다. 그러나 우리가 실재하는 사물들로 눈을 돌려보면 혼란스러워 진다. 개별적인 것들의 상대적 가치들 속에서 사물들의 아름다움과 크고 작은 성질들은 혼합되어 있음을 보기 때문이다. 사물들 자체는 크고 동시에 작다. 심지어는 아름다우면서 동시에 추하다.

이런 이유에서 니체의 질문은 사물들 안으로 그리고 이 사물들이 직접 참여하고 있는 관계들 속으로 파고든다. 그는 "아름다움이 무엇인가?"라고 질문하지 않고, 오히려 "무엇이 아름다운가?"라고 질문한다. 이 질문은 소크라테스의 심층적인 사유아래 포섭된 개별적이고 가변적인 것들에 대한 단순한 물음이 아니다. 사물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한 이러한 질문은 더 이상 개별적인 것들을 근원적인 상위의 원리에 환원하지 않기 위함 이었다. 따라서 본질은 부스러기들간의 관계들 속에서, 횡단하고 있는 부분적인 대상들간의 힘의 관계들 속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 이었다(주1). 니체에 의하면 본질은 그것을 담고 있는 대상 혹은 주체로부터 초월해있지 않다. "왜냐하면 본질은 단지 사물의 의미와 가치이기 때문이다; 본질은 사물을 향한 친화력을 가진 힘들에 의해 그리고 그 힘들을 향한 친화성을 가진 의지에 의해 결정된다"(Deleuze, 같은 책 77). 누가 보는가? 무엇을 보는가? 어디에서? 그리고 언제? 등을 질문하지 않고는 더 이상 본질과 의미에 관한 맑은 대답을 기대할 수가 없다. 본질은 관점의 현실화(구체화)이기 때문이며, 관점은 일자(一者)로서 이데아가 아니기 때문이다. 관점은 오히려 니체 식으로 말하면 일종의 힘에 가깝다. 따라서 하나의 본질이 있는 것이 아니라 본질들이 있다. 이것은 하나의 사물과 대상에 관련될 때에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본질을 힘과 복수적인 관점으로 설명하는 방식은 더 이상 본질과 의미를 이미 준비된 단일한 개념으로 사유하지 않겠다는 것을 뜻한다. 본질과 관련하여 모든 질문과 해답을 임의적이고 우연적으로 결정된 사유의 체계로 환원하지 않는 방식. 따라서 사물의 본질은 그것을 명령하고 지시하는 외부의 힘에 의존하지 않고, 그들간의 연속적인 관계들 속에서 그리고 그의 내부에서 생성하는 힘들 속에서 발생한다. 이것이 소피스트가 보여주었던 "경험적이고 복수적인 기술(art)"로서 니체가 이해한 비극적 질문방식이다(Deleuze 같은 책 76).

본질에 관한 두 가지 방향이 있는데, 하나는 대상을 그것의 본질로부터 떼어놓고, 이 대상을 본질로부터 파생된 실재(파생실재)로 정의하면서, 이들을 기원과 전체로서 본질에 포섭하는 방향이다. 이때 본질이란 전체와 기원의 다른 말이다. 다른 하나는 실재하는 것들의 본질을 단일한 전체나 기원으로 환원하지 않으면서, 실재하는 것들간의 운동과 힘들의 관계들로 복수화한다. 본질은 이 관계들 속에서 발생하는 가치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두 번째의 방향이 니체가 의미한 극화의 방향이며 비극적 방향이다. 비극적 세계 내의 존재는 시간적 존재로서 무수한 관점들과 함께 운동한다.

 

II.

의미는 해석하는 주체나 해석하는 활동에 전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주체에게 사물은 관찰하고 해석하는 방식으로만 현존한다. 이는 해석이 객관적 대상과의 필연적인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에도 그렇다. 세계는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고 그것에 대해 요구하는 방식으로만 우리에게 주어진다. 그러므로 세계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은 대상 자체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러나 또한 주체 내부의 관념적 연상에 의존하지도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세계에 대한 이해의 두 방향(1. 대상에 집중하는 방향(객관주의) 2. 주관적 연상으로 환원하는 방향(심리적 주관주의))은 해석의 활동이 무엇과 관계하면서 시작되는지를 혼동하면서 나오게 된 결과이다. 우리는 주관에 외재적인 대상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보여주는 징후들과 관계하면서 만 활동한다. 따라서 이 징후들을 대상과 동일한 것으로 혼동하면서, 대상의 면밀한 관찰이 우리로 하여금 궁극적인 이해를 가져다 준다고 믿음으로써, 우리는 한없는 실망만을 경험하게 된다. 이 방향에서는 관찰대상이 선재된 소여(所與)로 주어지며, 해석활동의 모든 양상은 이 소여된 대상에 정체된다. 따라서 해석하는 활동의 주체들인 심성능력들 역시 정향된다. 여기서 오게 되는 실망은 두 측면에서 우리를 좌절하게 하는데, 하나는 완전한 리얼리티를 재현할 수 없으며 심지어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좌절이고. 다른 하나는 이 재현불가능성의 결과로서 우리의 무능력에 관한 좌절이다. 해석의 두 번째 방향의 경우는 의미를 주체의 주관적인 해석이나 심리적 연상에 의존하는 문제로 환원하는 경우이다. 이것은 사물의 의미를 연상 메커니즘의 연쇄고리로써 이해하는 방향이다. 그러나 이는 대상이 나타내는 징후들과 그 대상을 동일하게 생각하여, 대상에 대한 관찰과 증언들만으로도 충분히 대상의 본질을 꿰뚫을 수 있다고 믿는 것만큼이나 임의적이다. 따라서 이 방향은 사물들이 본질적으로 어떻게 다른지 구별하지 못한다. 연상 작용은 사물과의 필연적 관계를 맺지 못하고 우연적이며, 그 연상의 메커니즘 안에서 사물들은 양적으로만 분할 될 뿐이다. 이것이 바로 주관적 연상주의나 심리주의가 공허한 이유이다. 이 두 방향은 물질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한다. 이들은 우리로 하여금 좌절케 하거나 혹은 허기를 느끼게 한다.

사물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은 사물이 소유하고 있는 징후들과 관계하지만 사물 자체로부터는 거리를 갖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물과 완전히 단절되어 주체로 환원되지도 않는다. 이런 이유에서 의미와 본질은 인식의 대상 자체와 동일하지 않으며, 또한 그 만큼 인식의 주체와도 구별된다. 그렇다면 의미(본질)는 무엇인가? 그것은 존재가 궁극적으로 자기자신을 드러내는 최종적인 성질이다. 그래서 본질은 차이가 남으로써만 현실화한다. 이것은 외재적인 차이일 뿐 아니라 내적인 차이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우리가 경험적으로 파악 가능한 대상들 간의 차이 뿐 아니라 대상과 주체의 차이이며 주체 자신의 차이이다. 본질은 대상으로서 지시된 특정한 내용이 아니다. 그것은 사물들이 시간의 계기와 운동의 지속 안에서 긍극적으로 특별하게 그리고 개별화되어 드러나는 일종의 형식이다. 본질은 다수의 내용들로 이루어져 차라리 그것은 내용이 없다고 말해야 한다. 본질은 실질적이고 근본적인 차이이지만 또한 형식으로서 드러난다. 이것이 바로 본질이 예술에서 에피파니의 형식으로만 드러나는 이유이며, 물질의 거추장스러움을 벗어버리고 순수한 정신적 계기들 속에서 나타나는 이유이다. 본질은 확실히 주관성의 한 영역에 속하지만 일단 그것이 표현되고 나면 마치 독립된 실재처럼 주관성의 영역을 넘어버린다. 따라서 해석되고 표현된 본질은 주체 자체의 본질이기보다는 차라리 하나의 세계의 본질이다.

차이는 그 자체 어느 것으로도 환원되거나 치환할 수 없는 유일하고 독특한 존재성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것은 양적으로(개념적으로) 구분된 두 대상들간의 비교를 통해서는 나타나지 않으며, 시간 속에서 발생하는 그 자체 본성적인 성질을 통해 나타난다. 그것은 다른 것과 비교될 수 없는 궁극적(순수한) 차이이다. 이런 의미에서 징후들과 인상들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본질이 드러나는 문제는, 대상이나 주체로 환원되지 않는 즉자적 존재, 진정한 타자를 발견하는 문제이다(주2). 프루스트(M. Proust)는 이것을 "질적인 차이"라고 말했으며, 헨리 제임스(Henry James)는 이를 "상상적 해석"에 의해서만 얻게 되는 어떤 것이라고 했다. 질적인 차이는 관점들의 차이이기도 하며 관점 그 자체의 차이이다. 이런 식으로 본질은 질적 차이의 문제로부터 시작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더 이상 드라마적으로 주인공에 정체된, 혹은 주체의 자기의식에 사로잡힌 그런 타자가 아니라, 그 자체 실재하는 환원 불가능한 즉자적 타자를 발견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질은 순전히 정신적인 계기들을 통해서만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우선 물질 즉 질료들과 관계하면서 출현한다. 프루스트의 무의식적 기억이 이를 예증하고 있다.

하나의 관점은 하나의 세계를 표현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주체는 각각 하나의 관점으로 자신들만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 이 세계는 다른 세계와 본질적으로 다르며, 시간의 지속 안에서 그 자체  차이나는 그런 세계이다. 내재적으로 차이나는 세계. 따라서 각각의 주체는 자신만의 세계를 표현하며, 이 세계들은 예술 안에서 발생한다. 예술에서는 하나의 세계가 아니라 세계들이 있으며, 주체 자신만의 세계가 아니라 본질의 세계, 다시 말해 즉자적인 타자가 공존하는 것을 보게 된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니체는 철학의 질문이 아닌 비극적 질문을 던졌던 것이다. 극화의 형식은 세계를 용해하는 본질의 이데아를 관점의 복수주의로 치환해 버렸다. 헨리 제임스는 어째서 소설에 있어 관점의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했을까? 그가 이해한 도덕적 상상력은 관점의 테마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매기와 아담의 단편적 이미지(주3)의 예를 통해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매기가 감싸고 있는 본질의 환원불가능성, 절대적 차이, 질적이고 본성적 차이일 것이다.

사랑은 고통을 수반하게 마련인데, 이는 사랑하는 연인에 대한 해석이 모순적이기 때문이다. 즉 사랑한다는 것은 연인이 뿜어내는 징후들과 인상들을 개별화하는 것이며 이들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연인이 함축하고 있는 세계를 발견하고, 자신의 내면적 세계를 펼치려는 노력 속에서 전개된다. 사랑은 현실적으로 나타나지 않는 그러나 실재하는 어떠한 세계를 표현하고자 한다. 그것은 연인이 감싸고 있는 세계의 발견이며 동시에 자신 속에 감싸인 세계의 전개이다. 그러나 이 펼치고 전개하는 과정은 또한 끊임없이 질투를 생산한다. 해석의 과정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이 경험하는 것은 언제나 타자이기 때문이다. 해석은 자기자신을 타자로 만들어야 할 뿐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타자를 경험한다. 어떤 것으로도 담아 내거나 잴 수 없는 궁극적 차이. 사랑이 고통스러운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해석하는 과정 속에서 깨닫게 되는 대상의 즉자적 존재. 이것은 한없이 자신을 배제하고 연인의 세계로부터 그를 쫓아내어 버리는 그런 세계이며, 주체의 주관적이고 자발적인 연상으로는 절대로 나오지 않는, 심지어는 주체 안에 스며들어 본성적으로 다른 존재이게끔 하는 그런 세계이다. 질투는 이러한 세계를 발견하게 되면서 나오게 된다. 사랑의 징후들을 해석하려는 노력, 연인의 몸 속에 감싸인 영혼과 본질의 세계를 발견하고 찾아내려는 노력은 언제나 사랑하는 사람을 배제함으로써 좌절하게 한다. 사랑은 좌절의 과정이다. 매기가 발산하는 이미지들을 통해 아담이 깨달은 것은, 자신이 완전히 소유할 수 없는 그 자체 빛을 지닌 그런 존재를 매기로부터 발견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더 이상 매기는 제도가 부여한 역할로서, 소유된 존재로서 딸이 아니라 타자가 되어 버렸다. 이것은 마르셀(Marcel)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가 알베르틴(Albertine)과의 이별에서 경험한 충격은, 자신의 주관적 메커니즘으로는 절대로 소유할 수 없는 즉자적 존재가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갑자기 들이닥쳤다는 사건에 기인한다(주4).

그러나 거기서 나오는 고통은 본질과 의미가 비자발적이고 무의식적으로 출현하면서 경험된 것이다. 마르셀에게 그것은 하나의 폭력으로 난입한 것이다. 본질은 모든 존재를 의식의 메커니즘 안으로 흡수하는 개념적 활동에 의해서가 아니라 부지불식간에 출현한다는 것. 즉자적 존재는 주관적이고 논리적인 연쇄로 연결되는 고리가 아니라, 그 자체 실재하는 타자이기 때문에, 이것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순간적으로 도약을 해야 한다. 그것은 자발적인 기억으로 발생하지 않는다. 이런 이유에서 시간조차도 존재의 층위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것은 관념의 산물이 아니라 존재의 양식이기 때문이다. 시간은 이미 펼쳐져서 그 지형 안에 사물들이 적절히 배열되거나 좌표들로 위치를 점하는 공간화 된 범주가 아니라, 차라리 모든 존재들 속으로 스며들어가 이들의 본질이 표현되길 기다리고 있는 주름과도 같다. 그것은 실재하는 것들 속으로 들어가면서 서서히 물 속에서 퍼지는 "일본종이"처럼 펼쳐지기 시작한다. 프루스트가 말한 "무의식적 기억"은 정신과 사유 안에 포로가 된 양적 차이의 세계가 아니라, 전혀 이질적이며 시간에 있어 완전히 질적 차이를 갖는 세계로 도약하게 한다. 우리는 특정한 감각적 성질들을 경험하면서, "무의식적 기억"을 통해 과거의 세계로 이동하는 것이다. 이 세계는 마치 물질의 단절과도 같아서, 도저히 개념적 연상이나 논리적 인과관계로는 설명하기 힘든, 그러나 허구로서가 아닌 잠재적 실재로서 타자를 구성한다. 진정한 타자성의 세계. 따라서 이것이 갑자기 우리의 신체로 난입해 들어올 때, 우리는 고통을 느끼며 불현듯 경련을 일으킨다. 왜냐하면 질적으로 차이나는 존재의 발견과 해석을 제대로 하려면 응고된 주체와 개인성이 파괴되어야하기 때문이다. 고통은 에피파니의 징후인 것이다. 소유로써 사유하는 응고된 주체에게 타자의 출현은 우연적이며, 주체는 수동적이어야 하며, 따라서 그것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주5).

 

III.

근원적 시간과 본질로서 차이는 어떻게 육화 하는가? 그것은 우선 물질적인 것들을 통해 나타난다. 개념적 사유가 제공해주는 것이라고는 기껏해야 이차원적 이미지들간의 텅 빈 차이들일 뿐이라면, 그래서 존재들 간에 그리고 그들 자체 내에서 발생하는 본성적 차이가 관념의 연쇄들로는 나타나지 않는다면, 질적 차이는 우선 질료적으로 출현할 것이다. 본질적 차이는 존재가 소유하고 있거나, 주체가 자신의 신체 안에 비밀스럽게 감싸고 있는 무한한 성질들, 즉 무형의 질료들을 통해서만 나타난다.

아담이 매기로부터 발견한 그 심오한 이미지는 그의 의식 속에서 개념화되고, 균등한 분할구조로 분류된 개인으로서의 매기가 아니었다. 그가 포착한 그 이미지는 오히려 매기 자체가 아니라, 그녀를 구성하고 있으나 그녀 자체는 아닌, 자신의 딸로서, 아메리고의 아내로서 혹은 샤롯테의 친구로서, 기능화된 신체로서가 아닌 그녀의 본질이었다. 이 본질만이 그녀를 다른 존재로 운반해준다. 매기라는 개인은 이 본질이 두드러지면서 바다가 되며, 커다란 산이 되기도, 혹은 아주 작은 하나의 우주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제 아담에게는 한 마리의 물고기가 되어 버렸다. 지금 그녀의 어떤 알 수 없는 부분적 대상들이 물고기 쪽으로 운반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매기가 고백하면서 사용했던, 그녀의 입에서 발화되어 분절된, 언어가 지시하는 내용들의 이미지를 통해 그녀를 물고기로 운반한 것은 아니었다. 말의 통사적 구조나 의미론적 담론은 존재의 본질을 드러내 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확실히 이 때의 언어는 양화 되어 구조화된 하나의 체계이기 때문이다. 소쉬르(F. Saussure)가 기호를 둘(기표와 기의)로 분할했을 때, 이들을 물질과 연결짓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의 관심은 어떻게 소리 이미지들이 의식의 영역으로 용해될 수 있을 지에 대한 염원에서 시작된다. 따라서 그에게 말은 소리 자체가 아니라 의식의 이미지들이다: 언어는 구조의 문제이다. 만일 아담이 매기를 통해 본 그 이미지의 본질을 이해하려 한다면, 이런 식의 언어담론에서는 불가능하다.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녀를 이루고 있는 신체와 색과 어조, 몸짓들과 윤기들, (말의)소리들과 같은 질료의 층위들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를 언어담론의 어떠한 영역으로 정위(正位)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통사론도 의미론도 음운론도 심지어는 음성학도 아니다. 본질적 이미지는 최소한 화용론에서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만이 니체의 질문형식에 가장 가까울 것이기 때문이다.

말은 하나의 구조적 체계를 이루고 있기는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보다 앞서는 더 근본적인 층위로서 질료가 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말을 단순히 분절되어 양적으로 고착된 구조로 파악하는 것은 초보적 단계에서나 가능한 생각이다. 언어는 질료들이 펼쳐지는 과정이라고 이해되어야 한다. 발화된 기호와 분절된 소리가 지시하는 의미체계의 기능으로 언어를 환원해서는 곤란하다. 우리는 마디로 짜여진 소리가 지시하는 기의들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오히려 사물에 더욱 풍부하게 반응하고 이들을 발산하는 물질, 지시체계를 들락거리고 그 회로의 주위에서 미세하게 흘러 다니는 물질을 통해 소통하는 것이다. 언어의 재료는 통사구조나 기호가 아니다. 제1의 재료들은 기표와 기의를 넘어서는 다른 곳, 바로 질료에 있다: 언어는 질료의 문제이다. 화가에게 색과 선과 면(面)의 덩어리들이 재료이듯이, 음악가에게는 음계나 악보가 아니라 소리이듯이, 발화자의 재료는 분절된 기호들이 아니라 표정이며, 소리이며, 심지어 냄새이다. 언어는 우선적으로 사유와 구조의 문제가 아니라 표현의 문제이며 표현의 층위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언어를 최소한 화용론의 영역에 끌어들여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표면적으로 볼 때 언어의 의미체계가 양적인 구조를 띠는 것은 사실이다. 작가의 고통은 여기에 기인한다. 무한한 실재들과 내면에 감싸인 무형의 세계를 어떻게 양적으로(그리고 양적인 도구로) 다듬을 것인가? 용기에 담기 위해 그 세계를 깎아야만 하는 고통. 글쓰기는 확실히 사유의 영역과 더욱 밀접한 관계가 있는 듯 하다. 작가는 구조를 통해서만 세계를 창조하게 될 것이다. 글은 말을 못하기 때문이다. 거기엔 표정이 없으며, 색도, 선도, 면도, 소리도 없다.

그러나 작가에게 언어가 재료이고, 그것이 사유의 영역에 더 밀접하다면, 문학작품이 사유의 문제에만 머물러야 할까? 예술작품을 하나의 유기적인 구조이며 견고한 체계라고만 이해해야 할까? 만약에 존재의 본질적 차이가 질적으로만 등장한다면, 문학작품은 사물의 본질을 드러내지 못하는 것인가? 아담이 포착한 매기의 이미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글 자체가 질료적일 수는 없을까? 그래서 문학작품 자체가 질료의 순간을 드러내도록 하는 특정한 시간의 계기를 가질 수는 없는 것일까? 문학작품으로 하여금 의미체계를 넘어서 질적 차이를 표현하는 질료가 되도록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문체(style)이다. 그러나 이것이 물질 자체라는 의미가 아니라, 질료적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는 의미에서이다. 정신이 질료적인 것과 가장 근접한 순간, 그 두 층위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변형된 순간. 정신이 질료적으로 변형된 것인지, 질료가 정신적으로 변형된 것인지 알 수 없는 그 순간. 문체가 아니라면 문학은 한 번도 이 순간을 맛보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문체를 통해 글 속에서 표정을 읽으며, 소리를 들으며, 심지어는 냄새를 맡는다. 동시에 우리는 어느 것으로도 교환될 수 없는 유일한 존재를 보게 된다. 더 이상 분할 할 수 없는 최종적 양태로서 유일한 존재. 이것이 본질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러한 것들이 바로 문학이 우리를 흥분하게 하는 이유이다. 문체가 아니었다면 문학은 경험의 교본이 되었거나 신체를 길들이는 기구가 되었을 것이다. 억압이란 한마디로 무한한 질료들을 양적 구조에 가두는 과정이며, 또한 같은 말이지만 거기서 나오는 고통이란 즉자적 존재가 중력의 굴레에 붙들리는 아픔이다. 작가에게 글쓰기는 고통이지만, 그러나 동시에 문학(예술)만이 가장 그를 기쁘게 한다. 왜냐하면 그는 문체를 통해서 질적 차이를 실재하는 것들 속에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체에 의해 사물과 존재의 질적 차이가 육화 된다. 언어의 질료적 층위는 바로 스타일을 통해 발생하는 것이다. 문학에서 스타일은 그림에서의 색이며, 발화에서의 표정이며, 소리, 선, 면, 질감의 덩어리라고 말할 수 있다. 본질은 단어들이 배열되는 구조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일단 이것들이 배열되기 시작하면 이들은 서서히 색을 드러내고 부지불식간에 표정을 내 비추며 냄새들을 풍기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이들을 발산하는 그 대상에 대해 어느 것으로도 치환할 수 없는 묘한 뉘앙스를 맛보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이 뉘앙스들로부터 포착한 심오한 이미지들에 대해 기호화된 매체를 가지고 설명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우리는 다만 이와 유사한 본질을 갖거나 동류의 다른 이미지들로 밖에는 표현할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이건 마치 . . . 같아", "이건 저것이야"라고 말하기 시작한다. 매기는 이런 식으로 물고기로 운반되었다. 예술에서 스타일이란 한마디로 메타포이다. 마찬가지로 본질은 은유를 통해 나온다. 사물이 시간 속에서 드러나는 최종적 계시의 양태: 매기(의 본질)는(은) 물고기이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것은 예술 어디에도 전체로서 일자(一者)를 발견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은유는 개별적인 하나의 체계가 파편화되고 부스러기들이 되면서 만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매기와 물고기는 각각 조각 나면서 만 결합한다. 이들이 하나의 통계화된 전체로서, 모든 본능들을 흡수하는 자아로서, 하나의 유기적 체계로서 각각 존재한다면, 이 단절된 두 신체가 어떻게 결합할 수 있겠는가? 아담이 매기의 이미지를 통해 이해한 내용은 더 이상 자신의 개념적 연쇄로는 아무 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그는 시인이나 화가가 되면서 만 이 모든 그림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헨리 제임스에게 그토록 관점의 주제가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특정한 하나의 관점이 출현하고, 다시 다른 하나의 관점이 도약하고, 그리고 또 다른 관점들이 발생하면서, 또는 이 관점들이 결합하고 공명하면서, 효과들이 발산되면서 세계들이 증식한다. 특정한 하나의 순간. 그리고 하나의 육체에서 다른 하나의 육체로 횡단하는 선분들. 그러나 어떠한 전체도 상정하지 않는 시간. 단일화나 통일을 불허하는 시간. 분할할 수 없는 특권화된 순간. 이것이 바로 관점이다.

이런 이유로 개인들 작가들 독자들 모두는 서로 그 자신으로서, 자아로서 소통하지 않는다. 이들은 서로 차이가 나면서 소통하는데, 이 차이란 아무 것도 대신해주지 않는 고유한 하나의 관점을 의미하며, 또한 이들을 소통하게 해주는 것은 주체가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뿜어내거나 포착하는 특정한 질료의 시간들, 징후들, 그리고 인상들을 통해서이다. 베르그송은 이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을 "도약"이라고 말했으며, 프루스트는 "경련을 일으키는 인상"이라고 불렀다(주6). 여기서 동일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으며, 따라서 표상 된 것 역시 어디에도 없다. 그것은 각각 개인들의 육체 속에, 표정 속에, 말들, 심지어 단어들의 배열 속에 담겨져 있지만, 강도 높은 친화력을 가진 그러나 다른 육체에 속한 관점들과 우연한 계기들을 통해 부지불식간에 만난다. 라깡이 개념화했던 부분적 욕망과 부분적 대상간의 관계를 니체식으로 본다면 관점(힘)들 간의 친화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단일한 전체에 의해 강요된 친화성이 아니라는 점이다. 부분적 욕망들은 오로지 부분적 대상들과만 관계할 뿐이다. 마들렌이 꽁부레를 불러들이고, 커피 잔에 온통 발백의 세계가 펼쳐지고, 매기가 물 속에서 놀 듯이 말이다.

 

IV.

생각해보면 문학(작품)에서는 본질을 발견하고 그들을 펼쳐내는 것만큼이나, 이들이 어떻게 하나의 전체를 이루는가 역시 중요한 문제이다. 그것이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개별적인 작품들을 각각 동일한 그것으로 식별할 수 있겠는가? 부분적인 대상들간에 서로 공명하고 소통하는 테마가 문학작품 전체의 통일성을 설명해준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 공명과 소통들은 자기자신의 힘에만 집중할 뿐이지, 자신과 아무 관계도 없는 다른 부분대상들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론 이 테마(부분적 대상들간의 소통)에 의해서만 전체성의 이미지를 생각해 볼 수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부분적인 것과 전체적인 것의 관계를 검토할 때에 우리는 종종 두려움을 가지는 경향이 있는데, 그 이유는 어느 하나의 층위가 손상되거나 파손될 것이라는 우려에서이다. 확실히 다수적이고 부분적인 것으로서 질료는 단일화된 전체성과의 관계에 의해 환원 불가능한 즉자성을 잃어버리는 듯 보이며, 따라서 형태를 알지 못하는 질료들의 즉자성은 형태를 부여하는 단일한 전체로서 일자를 거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플라톤의 입장에서 볼 때 물질이 포함하고 있는 다수의 질료적 운동은 동일성을 표상하는 형상에 저항하며, 더 나아가 단일한 판단의 준거로서 전체성을 훼손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상대적 가치가 우리에게 주는 공포이다: 어떻게 하나의 사물이 동시에 둘 이상의 시간의 층위에 관여하는가! 어떻게 동일한 존재가 복수적으로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가! 사물의 크기가 어떻게 동시에 크거나 작을 수 있으며, 아름답고 추함이 어떻게 동시에 가능할 것인가! 한편 이러한 공포는 한 가지 구조적 조건에 의해 생겨나는데, 그것은 두 층위가 서로 대립하고 있다고 간주함으로써 이다. 이것이 바로 관념의 모순적 구조인 셈이다. 관념은 공존의 구조를 곧바로 모순의 구조로 변환시키면서 활동한다. 의식에 있어 변증법의 테마가 부정과 모순의 메커니즘을 통해 발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한 이를 피하기 위해 에피쿠로스(Epicurus)는 자연학을 윤리학의 토대로 정립하면서, 판단의 규준으로서 모든 감각이 어째서 참인가를 가르쳤던 것이며(에피쿠로스 51∼88.), 니체는 관점의 무수함을 주장했으며, 제임스는 매기와 아담의 분할된 관점을 질료적 언어(서정적 언어)속에 녹아 들게 함으로써 매기의 존재를 잃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그리고 프루스트는 식물에게서 배운 한 가지 모델을 통해, 모든 부분적인 것들이 어떻게 횡단하는지를 보여준다(Deleuze, "Proust" 133∼44). 그러나 이들이 그렇게 했던 것은 부분적인 것들을 특화 시키고 전체적인 것을 훼손하여, 그것과 대립적인 위치에 서있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이들은 다만 그 공포로부터 벗어나고, 통일성 훼손이라는 죄의식을 없애고자 함이었다.

따라서 개요는 다음과 같다: 부분들을 종합하는 통일성으로서 전체는 다수의 부분들과 대립적이지 않다. 단일한 전체성은 존재한다. 이것은 질료적으로 특화 된 부분적 징후들이 마치 하나의 전체를 이루는 듯 보이는 문학작품을 보아도 금새 알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이 통일성이 없었다면 우리는 제임스의 소설을 프루스트의 그것과 구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차이는 전체와의 관계 속에서만 특화 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차이를 차이이게 하는 원인으로서 전체라는 의미가 아니다. 전체로서 단일자는 차이나는 것들을 손상시키지 않는 한에서만 의미가 있다는 말이다. "다자(多者)들의 통일로서 전체성, 다수성의 통일로서 전체성, 조각들의 통일체로서의 전체성은 존재하며 또 존재해야만 한다. 이때 일자와 전체는 다자와 그 부분들을 주관하는 원리가 아니라, 반대로 이 다자들로부터 생기는 '효과'이다. 일자와 전체는 원리로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효과로서, . . . 작동할 것이다"(Deleuze, 같은 책 163).

여기 하나의 주어가 있으며, 이에 달라붙어 연쇄하는 수많은 술어들이 있다. 복수적으로 따라붙는 이 술어들은 각각이 하나의 세계를 표현하고 있으며 이 세계들이 하나의 전체를 구성한다. 술어는 각각 자신만의 고유한 고리들을 가지고 세계를 표현할 뿐이다. 우리는 이 각각의 조각 난 세계들을 끌어 모아 하나의 전체를 구성하고 여기에 이름을 부여한다. 의식의 개념적 범주들은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다(칸트의 경우 이 각각의 세계들이 시간과 공간, 그리고 언어의 범주들 안에서 하나의 전체를 구성하고, 나아가 전체의 전체로서, 최종적 단일자로서 신을 정립했듯이). 그러나 이 세계들은 자신들의 외부에 있는 그 단일한 전체의 원리에 의해 표현되지 않는다. 술어의 세계들은 대전제에 정체된 대자적 존재가 아니라 그 자체 본질을 갖는 즉자적 존재이다. 그들은 "조명 속에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들로부터 나오는 빛 속에서 나타난다". 같은 말이지만 주어가 술어들을 주관하지 않는다. 오히려 술어 자체와 술어들간의 효과로서 주어가 나온다. 다만 그것이 말에서 맨 앞에 나오는 이유는 모든 부분들의 원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반대로 맨 나중에 나온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다시 역순으로 자연에 되돌려 주기 위함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문체라고 부르는 것은, 단일한 전체로서, 하나의 기원과 원리로서 개념적으로 미리 정립된 주어를 가지고 술어들을 배분하고 조합하는 문제가 아니라, 반대로 무수하게 산재하는 부스러기들 중에서 (공명하는)어떤 세계들을 끌어 모아 어떻게 순열(permutation)로 배치할 것인가의 문제인 것이다.

Proust가 언급했던 무의식적 기억은 개별화된 존재의 시간 속에서 드러나는 질료적이고 본성적인 차이를 통해 하나의 세계를 다른 세계와 공명하게 한다. 이 세계들간의 공명은 통계적으로 배분되어 일정한 집합을 이루는 분포들이나 전체화된 특정의 개인들(개체들) 간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보다 궁극적인, 더 이상 환원할 수 없는 즉자적 차이들이 서로 연결되는 과정에서 드러난다. 이 과정에서 분류체계는 완전히 달라진다. 개체가 감싸고 있는 개별화된 징후들(부분적 대상)은 각각이 특정한 시간을 가지면서, 유일한 차이들을 발산하지만, 동시에 이들은 예술 속에서 은유를 통해 서로 횡단한다. 은유란 징후들의 횡단 그 자체이다. 은유 안에서 부분적 대상들은 서로 일치되지도 전체화되지도 않으면서 서로서로 소통하고 협약하는 것이다. 이들은 충돌하면서 만 연결된다. 이 부분적인 대상들의 불일치와 일치의 메커니즘과 유사한 형태를 띠는 것은 칸트가 발견했던 숭고미와 능력들(이성, 오성, 상상력 들)간의 역설적인 관계일 것이다(주7).

프루스트는 식물의 성(性)을 비유로 자웅동체의 양성애 과정을 이론화했는데, 이 전체과정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성의 횡단(transsexual)"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Deleuze, "Proust" 136). 하나의 개체 안에 공존하는 이질적인 두 성(性)은 각자가 자신의 짝을 찾아 다른 개체들 속으로 파고든다. 이들의 성은 생물학적으로 분류되어 생식의 기능에 따라 구분되는 개체성(남/여)이 아니라 개별화된 징후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하나의 개체(남자 혹은 여자)안에 다수의 성들이 있으며, 이들의 성은 서로 사랑하기 위해 다른 개체 안에 감싸인 다수의 성들과 교차하고 횡단한다. 이들이 자신들도 모르게 드러내는 몸짓과 표정과 미소들은 남자 안에 숨어버린 여성을, 혹은 여자의 몸 속에 침입한 남성을, 심지어는 이 둘을 하나의 신체 안에서 모두 드러내면서, 서로를 유혹하고 끌어당긴다. 우리가 그것들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그들에게서 순간적으로 특별화된 징후들, 개별화된 질료들을 통해서만 접근해야 한다.

그런데 은유가 바로 이 양성애와 닮았다. 하나의 사물 안에서, 서로들 간에는 전혀 소통하지 않던 이질적인 유일한 징후들은, 어떤 특정한 조건들과 시간 속에서, 다른 사물들이 뿜어내는 개별화된 징후들과 공명하는 것이다. 본질은 이런 식으로 우리에게 뛰어든다. 그것은 개인이나 개별자의 본질일 뿐 아니라, 그들과는 구별되는 그러나 그들 안에 이리저리 꽉 들어찬 하나의 혹은 다수의 독립적인 세계와 같다. 개인들 안에 감싸여 있는 본질의 세계(그러나 플라톤의 그것과는 엄연히 구분되는). 그래서 개인으로서 남자와 여자의 사랑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가 감싸고 있는 무한한 질료들 혹은 무수한 세계들의 사랑이라고 해야 옳다. 매 순간 뿜어대는 징후들간의 만남. 이 세계들은 신체의 기관으로서 커다란 눈을 바다가 되게 하며, 뛰는 심장을 대지가 되게 한다. 은유가 이들을 결합하고, 이들은 예술 속에서 서로 횡단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횡단은 서로 다름, 즉 차이를 부정하지 않으면서 단절된 육체들을 소통하게 한다. 차이나고 단절된 육체들간의 거리를 제거하지 않으면서, 횡단성은 자신만의 독특한 체계를 가지고 서로 다른 두 존재를 결합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전체성의 새로운 모델이다. 예술 작품에서 볼 수 있는 규약들과 배열과 통계들은 우리가 삶 속에서 지루하게 보았던 그런 규칙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전체성의 이미지로서 동시에 기원의 이미지로서 하나의 이데아가 나오고 나면, 모든 육체들이 강요된 친화력으로 무장해야 하는 과정과는 아무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은유(예술)가 사랑하는 여인의 모습을 바다로 이끌어 물고기를 만들고, 새로운 다른 세계를 불러들였다. 그러나 매기의 존재는 미리 결정된 이데아를 닮기 위해 다치지 않아도 된다. 은유는 본질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포착된 특정한 본질을 표현할 뿐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녀의 몸 주위에 이러저러한 세계들이 하나 둘씩 달라붙어 몸이 불어난다. 그녀의 세계는 물고기뿐 아니라 바다와 산들로 채워지며 세계들이 늘어난다. 이 세계들은 플라톤의 세계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세계이다. "예술 덕분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단 하나의 세계만을 보지 않고, 세계가 증식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독특한 예술가들의 수만큼이나 많은 세계들을 우리 마음대로 가질 수 있으며, 무한하게 회전하고 있는 세계들보다 더 많은, 각자가 서로 다른 세계들을 가지게 된다"(Deleuze, 같은 책 162; Proust 재인용).

 

V.

우리는 통일성의 새로운 모델을 예술에서 발견하고자 했다. 이는 본질의 결정이 단일한 원리로서 정립되면서, 개별적인 것들을 이 원리 아래 부분으로 포섭하는 전체화의 모델을 지양하기 위함 이었다. 왜냐하면 이 모델은 존재를 부정하고 그것의 본성적 차이를 양적으로 제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질에 관해 다른 방식의 질문이 요구되어, 본질에 관한 새로운 이해로서, 그것을 변화하는 시간과 특수성의 계기들 속으로 끌어내렸다. 존재의 본질은 하나의 원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개별화된 의미와 가치들로 복수화된다. 니체의 경우 이 과정을 힘의 관계들 속에서 설명하고 있으며, 이것이 그가 의미한 바 극화이다.

극화는 문학(예술)적 모델의 다른 말이다. 예술에서 존재들은 질적 차이를 통해서만 현실화하며, 이 때문에 생동하는 즉자성을 잃어버리지 않고 육화 한다.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이 예술에서 스타일이라 할 수 있는데, 스타일이란 여기에 없으며 우리의 주관적 사유능력으로는 경험할 수 없는 질적 차이를 현실적인 시간 속에서 경험하게 해준다. 우리는 스타일을 통해, 눈앞에 보이지 않는 대상을 바로 앞에서 만지고, 냄새 맡고, 맛을 보게 된다. 따라서 개념적 연상구조에서는 포착할 수 없는 세계들의 질적 차이를 실질적인 것으로 느낄 수 있게 한다. 이것이 헨리 제임스가 의미하고자 했던 질료의 매개로서 서정적 언어이다. 예술 언어에서 존재는 더 이상 관념의 논리적 연상에 의해 사유되는 이차원적 이미지가 아니다. 그것은 시간의 계기들과 개별화된 운동들 속에서 질적으로 육화 되는 세계들이다.

그런데 예술적 모델에서 존재는 통계적으로 구분되고 분배되는 하나의 전체로서가 아니라 근원적으로 차이나는 부분 대상들로 국소화된다. 또한 이 부분적 대상들은 다른 부분적 대상들과 교차되는 방식으로 공명하는데, 이 공명하는 양상이 문학에서 스타일을 이루는 것이다. 이렇게 개별적인 것들은 하나의 전체 안에서 동일화되거나 부분적 기능을 가지지 않고, 서로 유사한 계기들 속에서 복수화된 관점들로 현현한다. 이때 전체가 구성되는 배열이 달라지는 것이다. 예술에서 통일적 전체는 개별자들의 관계에 따라 체계를 달리한다. 이런 이유에서 우리는 예술작품의 어느 한 부분만을 떼어내도 전혀 다른 뉘앙스로서 전체를 경험하며 심지어는 완전히 다른 작품을 보게 되는 것이다. 예술적 전체성이란 한마디로 관점들이 무리 짓는 효과로서 등장한다. 이것은 전체화된 하나의 원리(본질)로 존재를 포섭하는 방식과는 반대로, 각각의 관점들 안에서 존재를 표현하는 양식이다. 즉자적 존재는 궁극적인 성질들을 자신 안에서 드러내는 것이다. 예술은 본질을 초월적으로가 아닌 내재적으로 표현한다. 따라서 예술에서 단일한 하나의 전체란 어디에도 없다.

예술에서 부분과 전체의 관계는, 전체의 부분들이 아니라 부분들의 전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전체성은 조합의 메커니즘이 아니라 순열적 배열이다. 우리는 이에 대한 몇 가지 예들을 프루스트와 제임스의 언어들 속에서 살펴보았다. 프루스트에 따르면 예술은 횡단적 통일성이라는  전체화의 새로운 모델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주1) 라깡(J. Lacan)에 따르면 욕망의 흐름은 특정한 형태로 전체화된 대상에 향하지 않는다. 개인은 전체로서 욕망하는 존재가 아니라, 환원할 수 없는 부분적인 욕망들을 포위하고 있는 존재이다. 또한 부분적인 욕망은 부분적인 대상을 취한다. 따라서 어떤 것을 욕망할 때에는 전체로서 대상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시간 속에서 보여지는 특정한 면들에 향해있다. 횡단이란 전체화된 개인들 속의 특정한 면들과 대상의 특정한 면들이 서로 교차되어 연결됨을 의미한다.

 

(주2) 들뢰즈는 베르그송(H. Bergson)과 프루스트 양자의 시간관과 관련하여, 시간의 존재론적인 층위와 심리적인 층위를 구분해서 현재와 과거의 관계들을 논의한다. 이 논의에 따르면, 현재를 중심으로 표상되는 과거는 현재와 질적인 차이를 가지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는 주체의 직관활동을 통해 과거를 재구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재의 직관이나 지각은 과거의 기억과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 과거와 현재가 서로 연쇄적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생각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과거는 존재하지 않으며, 언제나 변하지 않는 현재를 통해서만 표상될 뿐이라는 내용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과거든 미래든 질적인 차이는 없으며, 현재의 주체의 기억은 과거가 되고, 주체의 기대는 미래가 된다. 이 경우 과거는 현재의 의식으로 구성된 이차원적 이미지일 뿐으로 현재의 어느 것으로도 환원 가능하다. 반면에 베르그송과 프루스트는 과거가 현재와는 구별되는 즉자적 존재성을 띤다고 이해한다. 과거는 주체의 현재적 활동의 소산이 아니라, 그 자체 변하지 않는 환원 불가능한 존재론적 시간 속에 있다. 이런 이유로 이들에게 현재와 과거는 사라지거나 현존하는 연속적 관계가 아니라, 각각 동시에 공존하는 시간의 두 차원이라고 말한다. 현재의 경우 활동적인 형식으로, 과거의 경우 활동이 중단되고 보존되는 방식으로. 그래서 주관적 연상의 고리들 속으로 과거(의 존재)를 흡수하는 주체의 현재적 활동으로서, 자발적인 기억이나 의식적인 지각은 존재의 질적 차이를 파악하지 못한다. 반면에 현재의 물질적 경험들(예로, 소리나 맛 색깔 등의 질적 성질의 포착)을 통해 무의식적으로 나타나는 과거의 기억(비자발적 기억)은(예를 들어, 그의 작품 『읽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주인공은 마들렌 과자의 맛을 통해 최초로 그 맛을 경험했던 과거의 고향 꽁부레를 떠올린다), 주체가 의식의 자발성을 통해 연상한 과거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현재와 불연속하면서 존재론적으로 공존하는 즉자적 존재로서의 과거는 연상의 의식적 고리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비자발적 기억에서처럼 주체의 의식과는 관계없이 부지불식간에 주체의 지각을 자극하고 압도해 버린다. 이렇게 갑자기 침입해오는 존재의 즉자성 앞에서 주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마 "경련(catalepsis)"이외엔 없을 것이다. 시간에 있어 두 차원의 문제와 그와 관련된 프루스트의 비자발적 기억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Deleuze, "Bergsonism" 51∼72, "Proust" 52∼66)를 참조.

 

(주3) 너스바움(M. Nussbaum)은 헨리 제임스의 The Golden Bowl에서 주인공인 매기(Maggie Verver)와 그녀의 아버지 아담(Adam Verver)간의 선택의 딜레마를 욕망과 책임의 두 대립적인 관계로 풀어서 다루면서, 이 부녀의 갈등이 (자발적)희생을 통해 존재를 긍정함으로써 어떻게 서로 상처받지 않고 행복해 질 수 있는가를 이 소설의 한 장면을 제시하면서 전개한다. 이 소설의 주요 모티브는 아담과 그의 딸인 매기의 복잡한 윤리적 관계로 시작된다. 여기서 다루어지는 두 사람의 관계는 아버지와 딸의 제도적 관계를 넘어서는 실존적 인간관계를 의미한다. 처음에 이들은 한 번도 서로(의 관계)에 대해 의심해보지 않았다. 아버지에 대한 딸의 지극한 효성과 딸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 이들은 충만한 부녀관계(제도적 관계) 속에서 언제나 함께 였지만, 제도적 기능을 넘어서는 실존으로서 자신들의 존재에 대해 반성하지 않는다. 그러나 매기가 남편인 아메리고(Amerigo)에 대한 강렬한 사랑과 아버지에 대한 사랑(효성)이 공존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된 후, 그녀는 아버지와의 제도적이고 상상적인 관계 자체를 회의한다. 이제 두 사람은 부녀관계를 넘어서 실존적 관계에 위치한 것이다. 그녀에게 아담의 존재는 무엇인가? 아버지와 딸이 아닌 동등한 인간적 관계에서 이 두 사람은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가? 남편에 대한 관능적인 사랑과 아버지에 대한 연민은 어떻게 다르며 또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 이러한 고민들 속에서 매기는 아버지에게 자신의 남편에 대한 관능적 사랑과 아버지에 대한 지고한 사랑을 섬세하고 조심스럽게 고백하게 된다. 그녀는 아버지를 향한 사랑에 대해 "가장 깊은 사랑은 질투를 넘어서며, 모든 것을 초월해 버리므로, 아무 것도 그 사랑을 꺾을 수 없다"(Nussbaum 150; James 재인용)고 말한다. 이때 아담은 딸의 고백을 들으면서 아련히 밀려오는 하나의 이미지를 마음속에 그려본다. 그녀의 자태를 보면서 그는 어느 것으로도 포획할 수 없는 한 마리의 물고기를 연상한다: "찬란한 은빛 바다 속에서 노닐고 있는 자유로운 한 마리의 물고기"(151). 아담은 이 물고기의 비유를 통해 딸이 더 이상 아버지의 보호와 그늘 아래서가 아니라 자기자신에게서 나오는 빛으로 자유롭게 살아가는 실존임을 이해하게 된다. 무엇으로도 교환할 수 없는 그녀 자신만의 존재.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Nussbaum, "Finely Aware" 148∼57)을 참조. 본 논문은 너스바움이 제시한 이 부녀의 장면을 간헐적으로 언급하면서, 너스바움이 전개하고 있는 존재의 긍정의 문제와 환원 불가능한 즉자적 존재성의 논의를 유사한 맥락에서 보여주고 있다.

 

(주4) 너스바움은 또한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주인공인 마르셀과 알베르틴의 이별장면을 통해, (사랑의)인식이 과연 어떠한 조건들(과학적이고 자발적인 지성 혹은 비자발적인 인상들) 속에서 가능해지는가를 논의하고 있다. 이것은 인식 일반에 관한 논의로 확장될 수 있는데, 프루스트에 따르면 본질과 의미에 관한 인식은 과학적이고 자발적인 지성이 아니라, 주체의 의식에서는 예기치 못한 사건과 인상들을 통해 가능해 진다. 마르셀이 알베르틴에 대한 사랑을 깨달은 것은 그녀를 소유하고 있다고 여길 때가 아니라, 반대로 그녀가 이별을 선고함으로써, 마르셀이 그녀를 소유할 수 없는 존재로 깨달은 후이다. 본 논문은 프루스트와 관련된 몇 가지 개념들과 예들이 있으며, 주인공의 이별의 경험을 통해 전개되는 인식의 조건들의 주제 역시 너스바움(프루스트)의 주제와 같은 맥락에서 다루고 있다. 이에 관한 자세한 논의는 (Nussbaum 261∼274)를 참조.

 

(주5) 바따이유(G. Bataille)는 헤겔적인 어조로 에로티즘을 정의한다: 그것은 소유하지 못하는 금지된 대상에 대한 강렬한 (위반의)욕망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대상은 심지어는 신비롭기까지 하다.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Bataille, "Share" 51∼8)을 참조.

 

(주6) 들뢰즈는 생명이 분화하는 과정, 즉 새로운 것이 어떻게 발생하는가를 말하기 위해 이와 유사한 이미지를 끌어들인다. 그에 따르면 새로운 것은 필연적 연쇄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연적이고 선택적인 과정 속에서 생긴다. 이 선택의 순간에 망설임이 등장하는데, 이 망설임이 바로 경련의 순간이다. "Biologists, for example, teach us that the development of the body proceeds by fits and starts: a butt of a limb is determined to be a paw before it is determined to be the right paw, etc. It is possible to say that the animal body "hesitates," and that it proceeds by way of dilemmas. Similarly, reasoning proceeds by fits and starts, hesitates and bifurcates at each level."(Deleuze, "Logic" 280) 강조는 필자가 했음.

 

(주7) 칸트는 『판단력 비판』에서 숭고미를 개념화하는 가운데, 숭고 체험은 능력들간의 일치된 조화가 파편화되면서 만 가능해진다는 점을 논의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형태를 가늠할 수 없는 무형적이고 기형적인 대상에 직면했을 때, 상상력은 이성이 명령한 이념의 실현, 즉 전체성의 현시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자신의 극한에까지 능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포착과 총괄이라는 자신의 능력들로는 이 대상을 전체화할 수 없음에 대해, 자신의 한계를 이성에게 되돌리면서, 이념의 전체성을 직접 체험하게 된다. 그래서 "자신의 모든 능력이 하나의 이념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것임을 인정하게 만드는 것이 이성임을 깨닫게 된다." 이때에 숭고미를 체험하게 되는데, 이는 상상력이 전체성의 거대함이나 이념의 막대함을 체험(칸트는 이를 경외심이나 존경과 같은 소극적 방법이라 함)하는 과정에서 나온다. 즉 숭고미는 상상력과 이성이 서로 갈등하면서 체험되는 것이다. 들뢰즈는 이 과정을 능력들이 불일치하면서 일치되는 체험이라고 설명하면서, 『판단력 비판』을 칸트의 작품들 중 가장 훌륭한 저작이라고 언급한다. 숭고미와 능력들의 불일치에 관한 자세한 논의는 (Deleuze, "Kant" 50∼52)를 참조.

 

 

참고 문헌

Bataille, Georges. "The History of Eroticism", The Accursed Share: An Essay on General Economy. 2 vols. New York: Zone Books, 1993.

Deleuze, Gilles. Bergsonism. Tr. Hugh Tomlinson and Barbara Habberjam. New York: Zone Books, 1997.

-----. Kant's Critical Philosophy. Tr. Hugh Tomlinson and Barbara Habberijam. London: The Athlone Press, 1995.

-----. The Logic of Sense. Tr. Mark Lester. New York: Columbia UP, 1990.

-----. Nietzsche and Philosophy. Tr. Hugh Tomlinson. London: The Athlone Press, 1983.

-----. Proust & Signs. Tr. Richard Howard. Minneapolis: U of Minnesota P, 2000.

Fink, Bruce. The Lacanian Subject. Princeton: New Jersey, 1995.

Nussbaum, Martha C. Love's Knowledge: Essay on Philosophy and Literature. Oxford: Oxford UP, 1990.

에피쿠로스. 「헤로도투스에게 보내는 편지」.『쾌락』. 오유석 역. 서울: 문학과지성사, 1998.

Posted by hu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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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와 나는 최근에 인터넷에 떠도는 어떤 mp3 파일 하나를 다운 받아 듣고, 그 매체의 장르 분류에 관하여 토론을 한 적이 있었다. 그 파일은 어떤 게임업체 콜 센터 상담원과 꼬마 아이의 대화 내용을 수록한 것이었는데, 그 내용은 이미 오래 전에 검색엔진을 떠돌며 사람들의 폭소를 자아냈던, 말하자면 아이의 순진무구한 장난끼에 당혹스러워 어쩔 줄 몰라 하는, 목소리 예쁜 한 처녀의 수난개그 장르였다. 이와 유사한 장르의 우스개 꺼리는 아주 많이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선생님-수난 장르이다. 아이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상담원이나 선생님의 당혹스러워하는 모습에 즐거운 이유는, 그 모습을 보며  "경직된 규칙이 무너지는 것"을 목격하기 때문이다. 수난 당사자의 뻣뻣함의 정도가 크면 클 수록 그 쾌감은 더 커진다.

(파일듣기)

이런 류의 개그나 시추에이션은 최근에는 미래사회의 버전으로 각색되어 많이 나와 있다. 그것들은 대부분이 미래사회가 인간을 규칙과 체계의 노예로 만드는 내용을 담고 있고, 그에 맞서 투쟁하는 인간의 위대함과 용기 같은 것이 골자로 되어있다. 저 mp3 파일의 주인공인 그 꼬마 역시 규칙에도 없는, 말도 안 되는, 터무니 없는, 그러나 용광로처럼 뜨거운 질문 공세를 퍼부음으로써, 헤드폰을 머리에 장착하고 114톤 혹은 "솔"톤(비인간적이고 무차별적인 경쾌함이라고 잘 알려진)의 방탄벽으로 중무장한, 기계처럼 뻣뻣하기로 유명한 콜 센터 상담원을 순식간에 녹여버려, 중앙처리시스템 대마왕의 저주에 찬 고주파 외피(일명, 인비져블(invisible) 신 물질 구속복이라 불리는)로부터 그녀를 구해낸 것이었다. 잠깐 동안이긴 했지만, 그녀는 잃어버렸던 웃음을 되 찾았다. 물론 그 신 물질의 중층결정(overdetermined) 분자구조를 해체하는데 있어 꼬마의 순진-공세-무기로는 어림도 없었던 관계로, 그 저주는 아직도 풀리지 않아 해피엔딩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다시 재생된 외피가 그녀를 거두어갔던 것이다. 그러나 웃음의 온기를 맛본 그녀는 틀림없이 힘을 얻어, 그 차가운 물질에 맞설 수 있는 정신 에네르기 호르몬을 스스로 산출하여, 해방을 위해 그 냉기 안에서 부단히 투쟁하지 않을까? 더 이상 힘없고 나약하고 냉소적이었던 이전의 그녀가 아닐 것이다. 꼬마의 위대한 용기가 헛되지 않도록 바랄 뿐이다. 이렇게 해서 나는 작자미상의 그 mp3파일의 정확한 장르를 분류하였다. 이름 하야,  "SF-전쟁-미녀-구출-개그".

그런데, 친구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그는 전혀 딴판의 장르를 주장했다. SF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지만, "개그라니!" 말도 안 된다는 것이었다. 굳이 분류를 하자면, Vintage 버전을 새롭게 각색한 "심리-범죄-스릴러"장르라고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은 꽤 정교하고 섬세하기까지 했다. 심지어 그는 그 파일이 단순한 스릴러 장르 오디오물이 아니라, X-파일일 가능성도 배제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선, 그는 강한 어조로 그 상담원의 목소리를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표정을 볼 수 없는 상태에서, 사람의 심리상태를 가장 물질적으로 반영하는 것은 바로 목소리인데, 그 상담원의 목소리를 가만히 들어보면, 두 사람의 순진무구하고 유쾌한 대화 뒤에는, 음산한 배경음악처럼, 음울한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는 것이다. 꼬마의 뜨거운 공격에 터져 나오는 웃음을 고통스럽게 참고 있는 신음소리하며, 그녀를 구해 내고는 탄성을 지르던 꼬마의 간절한 기쁨조차 묵살해 버리는 무정함하며, 남자 요원을 따돌리며 뭔가를 숨기고 있는 듯한 말투하며, 아름다운 목소리를 이용하여 음해하려는 시도, 가령, "결제"라든가 "카드"와 같은 코드네임을 자꾸만 언급하면서, 미리 파 놓은 함정인 은행계좌 쪽으로 꼬마를 유인하려 한다든지, 심지어는 그의 어머니를 언급하면서 가족까지 연루시키려는 무자비함하며, 꼬마에게서는 더 이상 얻을 것이 없다는 듯, 혹은 목표는 꼬마가 아니라는 듯, 혹은 아이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서둘러서 전화를 끊으려는 조바심 하며, "바람의 나라 전쟁"에 대해 뭔가를 알고 있다는 듯한 분위기하며, 꼬마에게 감정이 생길까봐 두려운 나머지 정을 떼려는 그 가혹함 하며, . . .

협박을 당하고 있는 상황이 아니고서야, 뒤에 누군가가 검은 그림자에 숨어 보이지 않은 채, 복면을 하고 칼이나 총을 들이대며 통화를 감시하는 상황이 아니고서야, 저 웃음 속에서 살짝 엿볼 수 있는 착한 마음의 소녀가, 어떻게 저렇게 고통스러워하며 냉정하게 전화를 받고 끊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저것은 소녀의 의지일 수 없다는 것이다. 저 파일이 조작된 것이 아니라면, 틀림없이 익명의 제보자(도청꾼, 일명 청파라치)에 의해 유출된 외계물(alien) 침입 협박 사건, 아니면, 최소한 살인 사건의 일부 내용일 것이라는 주장이다. "틀림없이 저기엔 음모가 있어! 시커먼 복면을 한 그림자가 있다구!" 그러니 범인 즉 그림자의 실체를 잡기 위해 뒷 조사와 신고를 해야 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저 파일은, 그냥 장르를 분류하고 즐기다가 다음 날이 되면 까맣게 잊어버리는(우리는 지금까지 그렇게 했다!), 영화나 오디오와 같은 문화물(혹은 문화상품)이 아니라, 실제상황이며, 위험에 처한 한 생명의 목숨이 달린 SF-인간비극-다큐멘타리라는 것이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니 그의 생명존중주의에 경의를 표한다!

하지만, 경찰에 신고를 하자는 그의 제안에 대해, 나는 반대 의사를 분명하게 표명했다. 그림자 복면을 하여 보이지 않는 저 외계물은 틀림없이 경찰서나 관공서에 이미 침투했을 것이고, 구속복보다도 더 어두운 법복 속에 숨어, 이미 그들을 숙주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뿐! 게릴라가 되어, 참을성을 가지고, 매복을 하여, 기회를 엿보며, 우리가 직접 그림자의 실체를 관찰하고 조사해보는 일 뿐인가?

Posted by huun

기억과 사랑

2007/02/01 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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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드만 아이러니

2007/02/01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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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드만 semiology rhetoric

2007/02/01 0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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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 입장

2007/02/01 0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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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 입장 개요

2007/02/01 0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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