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한 해의 약 3분의 2를 번역 작업을 하면서 보냈다. 프레드릭 제이미슨(Frederik Jameson)의 『지정학적 미학(Geopolitical Aesthetic)』을 완역하는 것이었다. 그의 글은 난해하기로 악명이 높다. 그래서 그 대단한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현재 우리나라에 번역된 그의 온전한 저작은, 내가 알기로는 2권 정도가 고작이다.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이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는 80년대 중반에 한국에서 민족문학 계열 잡지와 인터뷰까지 한 적이 있었다. 나 역시 그 내용을 읽었고, 무슨 말인지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그의 글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이론의 내용에 대한 통찰에서 나온 관심이 아니라, 그의 유명세에 대한 독자의 허위의식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그 후 그의 책 한 권(The Cultural Turn: Selected Writings on the Postmodern 1983-1998)을 읽으며 세미나를 한 적이 있었다. 하도 유명한 사람이라서, 더군다나 마르크스 진영의 마지막 주자(자칭)라고 해서, 어린 마음에, 멋 모르고 집어 들고는 의기양양하게 페이지를 넘긴 것이다. 그러나 수 주일이 지난 후, 나는 앞으로는 절대로 그의 글을 읽지 않기로 결심을 했다. 글이 읽기가 어려워서 그런 것이 아니라, 좋은 글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기만처럼 보이기도 하고, 신비화같기도 하고, 명성이 다소 과장된 것은 아닌가? 하고 말이다. 어린 마음에 나는 신비적 껍데기로부터 합리적 핵심을 추출하는 식의 부정과 보존이 아닌, 과감한 단절과 거부로써 대답하기로 다짐하였다: 반 쯤 읽은 책을 미련 없이 덮어 버렸다. 아쉽지도 않았고, 의지력에 관한 나 자신의 실망감 같은 것도 전혀 없었다. 그리고는 기억 속에서 완전히 그를 배제해 버렸다.

그런데 세월이 한 참이나 지난 후에, 마치 실재계(the real)의 무시무시한 귀환처럼, 그가 다시 돌아온 것이다. 어찌 어찌하여, 어쩔 수 없이, 그의 책 한 권을 번역하지 않으면 안 될 처지가 되어 버렸다. 아, 견디기 힘든 현실이여! 어쨌든 그렇게 해서 나는 하루에 약 대 여섯 시간을 꼬박 할애하여, 대략 두 문단씩 번역을 하였다. 그야말로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약 7개월 아니 8개월 정도 걸린 것 같다. 그것도 출판사의 비합리적인 독촉으로 부랴부랴 서둘러가며 . . . (이 기간 동안 나는 대략 두 서너명의 출판업자들을 만났는데, 그들과의 관계 이후, 나는 부르디외(Peirre Bourdieu)의 장(Champ)이론이 어째서 사회학을 연구하는 사람보다 오히려 문학-예술을 연구하는 사람에게 더 중요한지를 알았다.)

개인적으로 힘든 작업이었다. 후회를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의 글쓰기에 대한 불신감은 철없던 시절보다도 더 커져있었다. 비평가들의 글을 가만히 살펴보면, 자신의 바닥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텍스트 속에 아주 많은 개념적 우회로들을 매설해 놓는다. 이것이 현대비평가들의 특징이다. 아도르노 같은 사람들은 그러한 전략이 자본의 상품화에 휘말리지 않는 한 방법이라고, 복잡한 현대 사회를 기술하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방식의 리얼리즘은 힘들다고 넉두리를 늘어 놓았지만, 어쨌든 자신의 텍스트에서 바닥을 드러내는 것은, 다시 말해 자신의 논의를 누구나 쉽게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도록 친절하고도 명료하게 글을 쓰는 것은, 날 좀 쉽게 잊어주세요! 혹은, 어서 페이지를 넘겨 다른 곳으로 가세요! 라고 메가폰을 들고 소리를 지르는 것만큼이나 어설픈 짓이다. 테리 이글턴(Terry Eagleton)은 간혹 노동자들을 위해(?) 문학이나 이론을 쉽게 설명하는 소책자를 이례적으로 내곤 했는데, 대학생 수준이면 충분히 읽을 만한 개론적이고도 초보적인 접근법임에도 불구하고, 간혹 대가들에게서만 접할 수 있는 표현들을 볼 수가 있어, 그의 글을 읽다보면 역시 거장으로서의 힘이 느껴진다(가령, 프로이트의 외디푸스 컴플렉스의 비사회성에 대한 최근의 많은 비판을 방어하면서, 그 이론이 실은 사회적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넌지시 언급하는 대목, 등) 하지만 그러한 책은 독자가 읽으면서 감탄하는 것이 전부이다. 그런 식의 글쓰기는 독자를 영원한 독자로, 지식의 소유자 또는 소비자로 머물게 할 뿐이다. 독자로 하여금 글을 쓰게 하는 글쓰기(writerly text)! 이것이 현대적 방식의 글쓰기이다. 작가들은 더 이상 독자에게 뭔가를 가르쳐주거나 친절한 설명을 하는 선생님 같은 존재가 아니라, 동료로서, 함께 고민하고 이야기하는 대화상대로서, 독자들에게 끊임없이 말을 건넨다. 그런데 이것은 오히려 독자로 하여금 글을 읽는 것을 어렵게 한다. 텍스트는  오래된 친구들끼리만 주고받는 암호처럼 난해해지고 암시적이 되는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현대의 독자는 작가와 대화를 할 수 있을 만큼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그 난해한 암호들을 해독할 수 있을 만큼 문학적 예술적 해석능력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작가들에게 있어 독자는 바로 작가들 자신이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작가들은 점점 더 난해하고, 수수께끼 같은 글쓰기를 추구한다. 마치 그것이 지식과 통찰의 깊이라도 된다는 듯이.

그렇지만 눈치가 좀 빠른 독자들은, 그 난해한 매설들 속에서도, 작가의 어떤 징후를 읽는다. 다시 말해, 작가는 어떤 식으로든 결국은 드러내지 않을 수 없는, 최종적 결정 혹은 최후의 테제가 있다는 것이다. 어떤 작가는 온통 그 테제에 머물러 있거나, 그 주변을 맴도는 경우도 있다. 독자들은 이 테제를 확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작가의 깊이와 그 통찰력에 진정으로 매료된다. 작가의 딜레마가 이것이다. 그는 가장 보여주고 싶지 않은, 혹은 노출될까봐 가장 두려운 그 바닥을 언젠가는 드러내야만 하는 것이다. 위대한 작가들은 그것을 드러내는 시기를 잘 선택하고, 또 적절하게 잘 드러낼 줄 안다. 야바위꾼들처럼 어떤 이미지나 분위기가 아니라 진정한 통찰을 말이다. 아도르노로부터 많은 것을 배운 제이미슨 역시, 자본주의로부터 빠져나가는 전략 때문인지, 복잡한 사회를 한꺼번에 드러내야하는 부담때문인지, 아니면 바닥을 드러내지 않기 위한 몸부림인지, 굉장한 난해함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하지만, 그 역시도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최종적 테제들이 드러날 때가 있는데, 또 있어야만 하는데, 내 생각에 그것은 아주 어설픈 방식으로 도달하는 섬광들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 섬광들은 간혹 우리를 맥빠지게 하는 것은 아닌지, 다소 실망스러운 감정을 느낄때가 있다. 헤겔이나 마르크스를 좀 자세히 읽은 독자들이라면 누구나 외우고 있는, 가령 토대와 상부구조의 나선형 변증법이라든가, 좀 더 최근으로 와서는 벤야민 류의 현대인의 알레고리적 총체성이라든가, 앤더슨(Benedict Anderson)의 상상적 총체성에 이르기까지, 다소 진부해진 그 테제들을 슬쩍 내밀고는 휙 달아나(수줍음 때문인지, 야바위꾼 기질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복잡하게 진열된 후기자본주의의 백화점식 담론들로 치고 빠져버리는 바람에, 도무지 그가 어디로 간 것인지 찾을 수가 없다. 아니, 그가 결국은 어느 쪽으로 나오게 될지 빤히 보이는 것 같아 맥이 빠진다. 그런데도 그 테제들 주변에는 어김 없이 어떤 애매한 글쓰기의 연막이 작전을 벌이고 있고, 이것이 독자로 하여금 그의 글을 뚜렷하게 말할 수 없게 한다. 그래서 독자들은 그가 뭔가 대단한 것을 숨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며, 자신의 통찰력의 깊이에 막연한 미안함과, 이해하기 어려운 글에 대해 어떤 외경심을 가지게 된다. 정확히 말해 독서의 신비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물론 본인뿐 아니라 해설가들은 그 이유를 다양하게 설명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소문만 무성한 것은 아닌지, 이를 writerly text라고 해야할지, 그가 얼마나 오랫동안 읽힐지, 잘 모르겠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이렇게 발이 빠르고 어수선한 마르크스주의자는 처음본다. 그래도 긍정적으로 말한다면, 모더니즘의 아방가르드 형식과 마르크스주의의 내용을 변증법으로 꼬아서 만든, 일종의 모더니스트-마르크스주의라고 해야할까? 혹은 글쓰기의 벤야민-브레히트적 실천이라고 해야할까? 그런데 그 낯설기 효과가 너무 많이 나아간것 같아, 잠에서 깨어나기는 커녕 다시 기절해 버릴 만큼 얼얼해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제이미슨씨! 밖으로 나가 보물이나 범인을 찾기에는 지도가 너무 복잡한 것 아닙니까? 이 지도 맞아요?

어쨌든, 다섯 시간에서 여섯 시간, 그러니까 거의 한 나절 동안 의자에 앉아서, 대략 평균 10개에서 15개의 문장을 우리말로 옮겨 가며, 어떤 경우엔 1개의 문장을 1시간 동안 바라보며, . . . 작업을 끝냈다. 그 미친 짓을 끝내고 나서, 나는 시간의 막대함 같은 것을 느꼈다. 그리고는 중간 중간에 메모해 놓은 생각들을 그럭저럭 조합해서 역자 후기를 썼다. 그 후기를 올려 본다. 잘 쓴 글은 아니지만, 고생 끝의 추억이 될 만한 에세이다. 진흙탕 속에서 피어난 한 송이 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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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소설가로부터 전해들은 비법 가지 소개하겠다. 아는 사람들은 테지만, 그래도 실천하기는 쉽지 않은 비법이다. 우리가 너무나 오만하고, 무성의하고, 넘겨 짚는 습관이 너무 오래 되었기 때문에.

비법은 다음과 같다. 좋아하는 작가나, 마음에 드는 책을 선택해서, 하루에 일정 량을 정해 놓고 책을 베낀다. 타자기로 치지 말고, 직접 손으로 정성스럽게 글자 글자를 옮겨 적는 것이다. 그렇게 베끼다 보면 무슨 일이 생기는가 하면, 작가의 글과 생각과 느낌 등을 자신도 모르게 곱씹게 되고, 곱씹는 행위는 바로 작가가 글을 쓰면서 찾아 헤매었던 험한 길을 함께 동행하고 있는 것과 비견할 만한 여행을 하고 있는 셈이 된다. 그러다 보면, 흉내도 내보고, 말도 걸어보고, 간혹 그를 제치고 앞서가기도 한다.

작가들은 전에 경험했던 일이나, 읽었던 글이나, 만났던 사람들을 계속해서 다시 되돌아가 곱씹는 사람들이다. 나쁜 마음을 가지고, 그들에게 해를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유로워지기 위해 그것들을 곱씹는다. 수학문제 풀듯이, 했던 것을 풀고 풀고 풀고, . . . 하다 보면, 어느새 자신이 문제로부터 자유로워지듯이, 작가들은 경험을 되풀이하고, 다시 돌아가 음미해 봄으로써, 처음이라서 당혹스러워 어쩔 몰라 했던 경험을 여유로운 마음으로 다시 자신의 것으로 되새긴다. 그렇게 힘들게 얻은 노하우는, 바람직한 관계와 보다 쉬운 길을 찾을 있도록, 우리에게 삶의 지도 같은 것을 제시해주는 자료가 된다.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다. 해야 일들이 아주 많고, 그래서 귀찮은 일이기도 하고, 번거롭기도 하고,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것은 마치 깊고 깊은 중에서 길을 찾는 것과도 같다. 깊은 골짜기, 비좁은 샛길, 울창한 나무들, 빼곡한 바위들, 듬성 듬성 파헤쳐진 구덩이들, . . . 앞에 놓인 모든 것들은 쉽게 길을 찾는 것을 방해하고, 이상 앞으로 가지 못하도록 좌절하게 한다. 작가는 길을 찾아 복잡한 방해물들을 하나씩 하나씩 제쳐가며, 풀어가며, 발자국, 발자국 앞으로 내딛는다. 지도를 찾기 위해, 넓은 광장에서 쉬기 위해.

독서라는 것은 바로 그와의 동행이다. 동행이 쉬운 작가도 있고, 동행이 까다로운 작가도 있다. 친절하게 배려를 해주는 작가도 있고, 따라 오든 말든 앞으로 자신의 길만 가는 작가도 있다. 그가 험하고 깊은 굴곡의 길을 가면 수록 우리는 따라가지 못해 중간에 포기하고 나와, 그를 불평하거나 비난하거나, 아니면 자신의 무능력과 무기력을 한탄하기도 한다. 그러나,  험한 길일 수록, 돌파하기가 쉽지 않은 길일 수록, 깊고 깊은 길을 따라 수록, 광장은 넓어지고, 휴식은 영원해지고, 자유는 커지고, 기쁨은 배가 된다. 복잡한 길이 힘들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머리에, 혹은 중턱에 주저 앉아 쉬고 싶어 하지만, 실은 비좁은 샛길에서 빽빽한 돌멩이들을 피해, 다리를 오므리고, 몸을 움츠리고 앉아, 불편하게 견디고 있는 것일 뿐이다. 그러면서 자신의 인생을 후회하고, 한탄하고, 원한을 갖는다.

그러지 않으려면 독서를 해야 한다. 책이 아니어도, 글자가 아니어도, 독서를 해야  한다. 그리고 작가를 따라 베껴야 한다. 빠르고 날렵하게 달리고 있는 그를 따라, 그의 지팡이를 잡고, 그가 가는 발길을 발자국씩 따라가 봄으로써, 그와 비슷한 정도의 깊이와 폭의 여행을 해보는 것이다. 그렇게 차례 동행을 하고 나면, 자신이 어떤 길을 가야 할지, 길이 적당한 길인지, 그렇지 않은지, 너무 얕은 길은 아닌지, 너무 엉성해서 혹시 빠질 수도 있는 함정은 아닌지, 가지 말아야 길은 아닌지, . . . 판단하기 어려운 사안들에 대한 식견과 통찰, 노하우가 자신도 모르게 생기게 된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Posted by hu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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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민(Walter Benjamin)의 글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한 국왕이 어릴적 맛보았던 산딸기 오믈레트를 다시 맛보고 싶어, 유능한 요리사를 불러 명령하였다.

50여년 전 짐의 선왕은 동쪽에 있는 나쁜 이웃 왕과 전쟁을 했었지. 그때 그 왕이 싸움에 이겨 우리들은 도망을 쳐야만 했어. 그래서 우리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도망을 쳐 드디어 어느날 어느 어두컴컴한 숲속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때 우리는 숲속에서 길을 잃어 허기와 피로에 지쳐 거의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어느 조그만 오두막을 발견하게 되었지. 그 오두막에는 한 노파가 살고 있었는데, 그 노파는 뛰어나와 우리를 반기면서 손수 부엌에 나가서 곧 무엇을 들고 나왔는데, 그것이 바로 산딸기 오믈레트였어. 내가 이 오믈레트를 한입 입에 넣자마자 나에겐 기적처럼 힘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고, 또 새로운 희망이 샘솟는 것 같았어. . . . 그러나 짐이 훗날 이 요리가 생각이 나서 짐의 전 제국을 뒤져 그 노파를 찾아보게 했지만 그 노파는 물론이고 그 노파의 산딸기 오믈레트를 요리해 줄 만한 사람을 찾을 수가 없었어. 그대가 만약 짐의 이 마지막 소원을 성취시켜 준다면, 짐은 그대를 사위로 삼아 이 제국의 후계자로 만들걸세. 그러나 만약 나의 기대를 만족시켜 주지 못하면 그대는 죽어야만 하네.(『벤야민의 문예이론, 민음사, 2000, 24-25쪽)

그러나 요리사는 한참을 생각 하더니 다음과 같이 말을 하였다.

폐하! 정 그러시다면 교수형리를 곧장 불러주십시오. 물론 저는 산딸기 오믈레트 요리법과 하찮은 냉이에서 시작해서 고상한 티미안 향료에까지 이르는 모든 양념을 훤히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오믈레트를 만들 때 어떻게 저어야 마지막 제 맛이 나는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폐하! 저는 죽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제가 만든 오믈레트는 폐하의 입에 맞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폐하께서 그 당시에 드셨던 모든 양료(養料)를 제가 어떻게 마련하겠습니까? 전쟁의 위험, 쫓기는 자의 주의력, 부엌의 따뜻한 온기, 뛰어 나오면서 반겨주는 온정, 어찌 될지도 모르는 현재의 시간과 어두운 미래--이 모든 분위기는 제가 도저히 마련하지 못하겠습니다.(같은책, 25쪽)

결국 요리사는 목숨은 건졌지만 파면되고 말았다. 사람들은 간혹 벤야민을 신비적이라고, 독일인 답지 않다고 말들을 한다. 그들이 주로 객관화된 현실에 익숙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벤야민의 글에 짙게 배인 베르그송의 영향탓이 아닐까 싶다. . . 아우라! 잘라내거나 요약할 수 없는 그 잠재적 시간!

Posted by huun

벤야민(Walter Benjamin)은 종종 브레히트(Bertolt Brecht)를 방문하였다. 그들은 여러차례에 걸쳐 카프카(Frantz Kafka), 루카치(George Luka'cs), 독일, . . 등에 관하여 토론과 대화를 했는데, 그것은 사실 토론이나 대화였다기 보다는, 으레 친한 친구들이 모이면 그렇듯이, 또 그렇지 않으면 친해질 수가 없듯이, 말하자면 각자들의 생각을 꺼내놓고는, 서로 얼마나 다른지, 또 얼마나 같은지를 가늠해가며, 그들의 최종 목적인 공통의 다짐 같은 것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1934년 6월 24일에 벤야민은 브레히트를 방문하였다. 그는 브레히트가 소유하고 있는 서재의 천정을 떠받치고 있는 대들보에 다음과 같이 적힌 문구를 보았다: "진실은 구체적이다!"

브레히트는 이 문구에 대한 대답으로, 그 위에 또 이렇게 적었다: "나 역시 또한 이 말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내 서재였다면, 나는 맨 아래에 이렇게 적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구체적인 것은 언제나 모호하다!"

Posted by hu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