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음

note_fragmentary_aporism 2007/05/31 14:43

도서관과 같이 조용하고, 정숙한 곳에는 소음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실상과 아주 다르다. 도서관에는 약간의, 아니 절대적으로 소음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소음 때문에 엄청난 고통에 시달리는 것은, 이상하게도 소음들 속에서가 아니라, 정숙과 고요와 침묵 속에서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옆 사람의 책넘기는 소리나, 뒤척이는 소리, 또는 숨소리가 아니다. 침묵 소리! 아마도 우리 자신으로부터 새어나오는, . . . 시간을 견디며 끙끙 거리는 고요한 소리! 이를 들키지 않으려면, 다른 소음이 필요한 것이다.

창밖에서 들려오는 먼 잡음들 때문에 아까부터 신경이 쓰였는지, 옆 자리에 앉아있던 한 여선생이 급기야는 벌떡 일어나 창문가로 간다. 그리고는 견고하게 설치된 방음 창문을 신경질적으로 닫아버렸다. 뭘 모르는 선생 같으니라구! 이제 그녀의 고통은 보다 구체적이고, 더욱 견딜 수 없는 것이 될 것이다. 이 침묵 속에서, 숨이라도 제대로 쉴 수 있을까? 당신의 그 침묵 소리에 고막이 터지지 않고도 앉아 있을 수 있을까? 집중은 커녕, 뇌리 속에 산만하게 펼쳐질 그녀의 시간은, 오분도 견디지 못하고 그녀를 일어서게 만들 것이다. 옆에 있는 나를 잊고, 당신의 소리를 감추고, 이 고요를 외면하려면, 그 창문은 그냥 내버려 두었어야 했어! 피할 수 없는 우리 자신의 침묵의 소리가 지옥이 되지 않기 위해, 우리의 책임을 타인에게 떠넘기지 않기 위해, 마치 주술적으로 쓰이는 주물(呪物)이나 희생양처럼, 아니면 향수처럼, 우리가 내뿜는 지독한 냄새와 소리들을 중화시켜줄, 외부의 소음이 필요하다.

Posted by huun
TAG ,

친구들은 눈을 감아주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서로의 결점과 오류들을 이해해 준다. 친구는 내가 보고 싶지 않고 듣고 싶지 않은 나 자신의 실상을 들추어내거나 따져 묻지 않는 자이다. 그는 나를 덮어주고, 망을 보아주고, 곁에서 시름과 고통의 위안이 되어주며, 나를 편안하게 해주는 고마운 사람이다. 우정은 사랑처럼 나를 특별한 존재로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아니 오히려 특별한 존재가 되는 것을 싫어하지만, 사랑의 고통을 견딜 수 없을 때, 위안을 받기 위해 찾아가는 환상의 귀의처이다. 그리하여 우정은 우리를 고립되지 않은 존재, 고독감을 떨쳐버리게 해줄 존재, 대면하고 싶지 않은 나 자신의 가장 무시무시한 상태와 맞닥뜨리지 않아도 세상 사는데 별 문제가 없음을 일깨워주는 존재, 우리를 사회적 존재이게끔 해준다. 그리하여 사회 속에서, 사회인으로서, 섬이 되지 않고, 잘 어울릴 수 있도록 도와준다. 우정은 우리의 고립과 외로움을 편안한 관용으로 덮어준다. 그러나 이렇게 형성된 진실이란 무슨 쓸모가 있단 말인가? 우리의 사이좋은 우정과 조화로운 통일로 만들어진 진실이 도대체 무슨 효력이 있단 말인가? 나의 무능력을 치유하고 위로해줄 친구의 그 칭찬 한마디는 나를 더욱더 화나게 할 뿐이다. 그의 위로가 실연의 고통을 잊게 해주지는 못한다. 그렇게 마련된 진실이라면 너무나 초라하고도 왜소하지 않은가? 들뢰즈에 따르면 우정의 철학이란 바로 협잡과 합의의 철학이다. 그것은 진실을 제대로 보지 않고, 애써서 그것을 외면하는 길임을 뜻한다. 진실은 가혹하지만 엄밀한 어떤 것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우리는 그 무엇도 걸치지 않고, 맨몸으로 나가야할 시간을 피할 수 없다. 이것이 베르그송이 직관의 비판능력이라고 말했던, 소크라테스의 신 다이몬이 귓가에 속삭이며, 우리를 아포리아(aporia)의 상태 속으로 밀어 넣는 무시무시한 시간이다. 실재는 난입하는 그 무엇이다. 그것은 우리의 지성을 강요하고, 지성의 잘못을 질책함으로써, 지성의 굳은 몸체들을 대기 속으로 흩뿌리는 그 무엇이다.

Posted by huun

진실을 찾아 나서는 자는 철학자보다는 오히려 "애인의 거짓말 때문에 고통 받는 질투에 빠진 남자", "찾기를 강요하고 우리에게서 평화를 빼앗아가는 어떤 징후의 폭력"에 맞닥뜨린 사람이라고 Deleuze(혹은 Proust)는 말했다. 지적이고 분별이 있는 사람은 언제나 명확하고 객관적인 의미를 제시한다. 또한 자연으로부터 윤곽선이 뚜렷한 형태들을 자신의 지식으로 취한다. 그들은 쓰여진 책을 통해 진실을 찾아나서길 좋아하는 모범생이다. 하지만 지식이 만들어지는 것은 그러한 길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와 같은 지성이 만들어 낸 진리 말고도, 우리는 다른 풍요로운 방식으로, 즉 사물의 징후로부터 출발하여 진실에 도달할 수 있다. 지적이거나 위대한 사람보다는, 평범하거나 결점이 있는 사람들이 더 많은 징후를 가지고 있고, 그것이 그의 존재를 더욱 풍요롭게 해준다. 그것은 예술가들을 풍족하게 해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성의 노동과 임무를 가지고 세계에 뛰어들어 노력하는 학자들보다는,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며 인생을 보내는 사람들, 직업도 없이, 그렇다고 예술을 할 만큼 능력도 없는 실망스러운 인간”들이 더욱 더 징후에 있어 풍요로운 진실에 도달할 수가 있다. 가령,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이란 바로 허송세월을 보낸 시간을 의미한다. 그러나 쓸모없이 보내버린 시간, 즉 훌륭한 사람을 만나 진지한 대화를 하거나 지적인 모임에 나가 무엇인가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사교계에 드나들며 사람들과 노닥거리고, 여인들과 사랑에 빠지고, 감각적 경험에 사로잡혀 봄으로써, 오히려 우리는 사람들과 풍경과 이 세계에 대한 진실을 배울 수가 있다. 우리는 완전한 이상적 대상에서 보다는, 불완전한 인간들과 비틀린 물질적 감각에 쉽게 매료된다. 또 결함 없는 위대한 한 인물 보다는 평범한 여인을 통해 인간과 세계의 근원적 진실에 도달할 수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 사유의 지적인 활동이 강렬하게 활동하여, 대상들로부터 본질을 발견하고, 세계의 진실에 도달하게끔 하는 것은, 그 비틀린 경험과 비균형적 경험 속에서 규정하기 어려운 징후들의 난입을 직면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실재와 그 징후가 우리에게 직접 던져주는 것으로, 우리가 직접 풀어내고 해석하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이다. 그것은 친구들이 모여 합의한 해답과는 판이하게 다른 해답을 도출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어떤 여인과 사랑에 빠지고, 그 여인에게서 어떤 진실을 발견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녀와 매끈한 소통을 하거나, 합의된 대화에 이르렀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 의미가 무엇인지, 그 진실이 어디에 감추어져 있는지 알지 못한 채, 그녀가 발산하는 낯선 징후들을 해석하기 위해, 우리 자신을 잃어가며, 시간을 낭비해가며 알몸으로 달려드는 직관능력 덕분일 것이다. 선생님이 제시한 문제들 속에서는 그 무엇도 배울 수가 없다. 그렇게 의무와 노동에 사로잡힌 배움을 통해 얻은 진실은 “필연성이 결여”되어 있다. 억압적이고 부정적인 반성적 노동이 만들어낸 진실은 추상적이고 인위적일 뿐이다. 그 진실은 그것을 배우는 나 자신과는 무관한 진실이며, 따라서 이렇게 말해도 저렇게 말해도 되었을 법한 임의적 진실에 불과하다.

진실이란 정다운 대화 속에서가 아니라 참을 수 없는 폭력 속에서 피어난다. 우리는 고통을 겪음으로써만, 통증이나 갈증이나 제지된 욕구를 통해서만, 그 추동적 힘에 직면해서만 비로소 의미와 진실을 찾으려 한다. 진리를 사랑한답시고 고통도 없이 달려드는 얼뜨기 속물 학자로부터는 그 무엇도 배울 것이 없다. 그 보다는 오히려 애인의 얼굴에서 거짓말의 징후를 간파하고 질투에 빠진 남자가 참된 것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그 속물 학자로서는 결코 자신에게 가해오는 인상들에 아프지도 않고, 그것을 해석해야할 어떠한 필연적 운명적 책임도 느끼지 못하는 반면, 질투에 빠진 남자는 인상과 징후들의 폭력에 맞서 그 누구보다도 민감해지기 때문이다. 질투의 고통만이 애인의 거짓말과 사랑의 진실을 찾는다. 진실이란 사회 속에서가 아니라 근원적인 것에 대한 질문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 사회의 지배계급은 그 사회의 진실에 접근할 수가 없는 것이다. 어떤 놀라운 경험 때문에 우리의 기억이 작동하듯이, 고통은 지성으로 하여금 진리와 의미를 찾도록 강요한다. 필연적 진실이 태어나려면, 우선 실재가 뿜어내는 징후의 폭력에 직면해야만 한다. 지성은 실재의 징후들로부터 어떤 강요를 받아야만 하고, 이것인가 저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빼앗긴 채, 모든 도구와 무기와 갑옷을 벗은 맨 몸으로 실재를 대면해야만 한다.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지성은 등장하게 될 것이다.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느낌으로써만, 그 징후들의 의미와 본질을 찾아내고 진실의 근처로 다가갈 수가 있다.

Posted by huun

어느 곳에 가든지 특유한 바람이 분다. 이곳과 저곳이 다르지 않은 하나의 바람, 모두의 바람일텐데, 그 곳에서만 맞을 수 있는 아주 특유한 바람 말이다. 그곳의 어느 누구도 그 바람은 피할 수가 없다. 숨을 쉬기 위해, 말을 하기 위해, 노래를 부르기 위해, 그들은 그 하나의 바람을 마치 꿈처럼 품어야만 한다.  간혹 바람은 너무나 가혹하고 무자비해서, 사람들은 그 바람을 맞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친다. 방안으로, 지하실로, 모퉁이로 기어들어, 마치 한 번도 숨을 쉬어본 적이 없었던 유충처럼, 웅크리고 앉아 물체가 되어간다. 어둠이 내리고나서야 시린 눈을 씻을 수 있고, 그제서야 사물들이 제대로 보이면, 마음을 놓고 잠을 청할 것이다. 그 바람은 어떤 인물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사람들의 숨소리로 퍼지기도 하며, 때로는 옷깃 속에서 슬며시 새어나오기도 한다. 그들이 결국 나중에서야 그 바람이 자신의 품 속에서 풍겨나오는 것임을 알아차리고 나면, 물체가 되어 숨어있던 곳으로부터 다시 천천히 기어 나오기 시작할 것이다. 어둠의 막 앞에 서 있을 때에만 비로소 시리지 않던 자신들의 뜨거운 욕망으로. 눈이 부셔 그 무엇도 볼 수 없을 햇빛 속으로.

Posted by huun

읽기는 무엇인가를 떠올리기이다. 무엇을 읽으며 우리는 자신 안에 잠재되어 있었던 모든 시간을 깨운다. 살아가는 동안 삶의 갖가지 필요와 환상들로 인해 굳은 살이 배겨, 지리멸렬한 정신적 기능들이 되어 버리고 만 그 시간을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삶의 불행을 부수기 위해 읽는다. 읽음으로써, 그렇게 퇴화되어 있었던 우리의 잠재적 본질들을 조금씩 조금씩 끄집어내어, 우리는 한줌을 쥐고는 어디론가 홀연히 떠나 버린다. 읽기가 필요한 이유는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책을 쓴 저자의 정신세계를 본받기 위해서도 아니다. 그 책과 저자가 우리에게 갈길을 예시해 주기 때문에 읽기가 필요한 것도 아니다. 그들과 내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이미 나에겐 길이 있고, 나 자신이 이미 한 명의 저자인데. 책은 우리에게 어떤 영감을 주기 때문에 필요하다. 다른 동료 예술가의 작품을 보며, 베끼거나 배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작품을 구상하는 예술가처럼, 우리는 책을 읽으며, 그 책의 저자가 아니라, 우리 자신으로 돌아간다. 프루스트의 생각처럼, 우리는 다른 누군가의 독자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독자이다. 책과 나는 무관하지만, 또 누가 알겠는가? 꼭꼭 숨은 한 귀퉁이의 짧은 구절이 나의 과거 전체를 감싸쥐고 있을지. 우리는 읽어야만 한다. 불행해지지 않기 위해. 읽기는 우리를 머물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읽어야만 한다. 머물지 않기 위해.

Posted by huun
TAG , ,

진실이란 무엇이어야 하는가? 적어도 우리 마음대로, 임의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실은 형사가 용의자에게 강요하듯 내던지는 질문 속에도, 고문에 견디지 못해 내뱉는 용의자의 자백 속에도 있지 않다. 진실은 범인이 아니다. 살인범은 누구인가? 이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 진실이 될 수는 없다. 어쩌면 진실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이 괴상망측한 살인사건이, 점차 감당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실재로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는 한 촌뜨기 형사의 눈빛 속에, 그리고 용의자 사진이 잔뜩 붙어있는 수첩을 찢어버리며, 자신의 믿음을 철회하는, 비로소 진지해진 그의 태도에 있을 것이다: "니 말이 맞다. . . . 씨발! 서울에서는 이런 일 자주 일어나나?"

진실은 범인이 아니라, 엄청난 폭력과 대면한 후에 깨닫게 된 형사 자신의 한계일 것이다.

Posted by huun

아인쉬타인이 상대성이론에서 주장했던 동시성의 파괴(특권적 체계의 부정)를 비판하면서, 베르그송은 단일한 시간의 실재에 대해 논증한다. 그의 비판의 기본 틀은, 상대성 이론이 공간과 시간을 혼동했으며, 아인쉬타인이 주장했던 동시성의 파괴는 수학적 시간의 동시성, 시계의 동시성, 공간화된 시간의 동시성, 혹은 상징적 시간의 동시성의 파괴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그러한 상징의 동시성의 파괴에도 불구하고, 예를 들어, Pierre와 Paul의 상대적 운동이나, Jean과 Jacques의 상대적 크기에도 불구하고, 사라지지 않는 하나의 단일한 시간, 그리고 오히려 그들의 상징적 실재를 가능케 하는 일원론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베르그송은 지속의 일원론적 가능성을 논증한다. 다소 복잡하지만, 그 논의를 간단히 요약하면, 다원론에서 일원론으로의 이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 <물질과 기억>에서 주로 상정했던, 일반적 다원론 혹은 절대적 다원론

모든 존재는 그 자신의 지속과 흐름과 기억과 시간을 갖는다. 이들은 각각이 질적으로 다르며, 보편적 다양성을 형성하고 있다. 새의 비상, 물의 흐름, 배의 미끄러짐, 나의 의식, . . . 모두가 자신만의 시간 속에서 흐르고 있는 것이다.


(2) <창조적 진화>에서 부분적으로 언급했던, 제한적 다원론 혹은 상대적 다원론

모든 존재는 그 자신의 지속과 흐름과 기억을 갖지만, 서로간의 관계 혹은 실제적 참여 속에서, 흐름의 관계를 형성한다. 가령, 나는 설탕물을 마시려면, 설탕이 녹기를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된다. 기다림은 흐름의 동시성 혹은 서로 다른 내적 지속에의 참여를 통한 공존을 보여주는 실존적 근거가 된다.


(3) <지속과 동시성>에서 주장했던, 비개인적이고, 절대적이며, 단일한 시간의 일원론

일반적 다원론과 제한적 다원론은, 닫힌 좌표, 닫힌 체계를 이루고 있다. 제한적 다원론의 경우, 흐름의 공존은 수동적 경험 속에서, 우연적으로 형성된 공존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설탕이 녹기를 기다리는 행위는 여전히 자신 안에 머물러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참여와 공존의 본성이 무엇인지 설명할 길이 없이, 단지 우연적으로 경험만할 뿐이다. <지속과 동시성>에서 베르그송은 상대성 이론의 수학적 시간을 넘어서는 실재적 시간을 언급하면서, 모든 지속을 하나의 단일성으로 묶어주는 일원론적 시간의 가능성에 대해 언급한다. 주장은 아인쉬타인에게 가해지는 마디의 질문으로 요약할 있을 것이다: 피에르와 폴의 상대적 운동, 혹은 쟝과 쟈크의 상대적 크기를 바라보는 당신, 물리학자로서의 당신은 어디에 있는가? 만일에 당신이 피에르의 좌표계나 폴의 좌표계 중 한 쪽에 있다면, 피에르와 폴의 차이는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들뢰즈는 그 일원론적 시간이 삼중성(Triplicity)을 띄고 있다고 설명하면서, 모호하지만 놀라운 해석을 내리고 있다.


    "내가 강둑에 앉아 있을 , 물의 흐름, 배의 미끄러짐 혹은 새의 비상, 깊은 내적 삶의 계속되는 속삭임은, 내가 어떻게 주의를 집중하는가에 따라, 나에게는 개의 서로 다른 흐름이 되기도 하고, 단일한 하나의 흐름이 되기도 한다."(DS, 52(67)). 여기서 베르그송은 주의력에다가 "나누지 않고도 배분할 있는 능력" "하나이면서도 동시에 여럿이 있는" 능력을 부여한다.(Bergsonism, 80)


베르그송이 자주 예를 드는 "음악"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가 것이다. 우리는 음악을 들을 , 음표 하나 하나를 떠올리거나 구별하지 않는다. 멜로디 전체를 하나의 단일한 흐름으로 듣는다. 하지만, 흐름들 가운데, 내가 특히 어떤 음에 주의를 집중한다면, 음악의 흐름은 중단되고, 내가 집중한 음표만이 떠올려질 것이다. 베르그송은 예를 통해, 지속이 가지고 있는 "분할과 연속의 " 언급하고 있다. 지속(반성, 주의력, 의식, 사유, 회상, 음미, 주관성 . .) 단일한 하나의 흐름이면서, 동시에 다수의 흐름들이다. 그것은 존재를 직접 나누지 않고도 분할 있는 , 하나이면서도 여럿일 있는 힘이다. 물의 흐름, 배의 미끄러짐, 새의 비상, 나의 의식의 흐름들은, 내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단일한 하나의 흐름이 되기도 하고, 각각이 다른 여럿의 흐름들로 분할되기도 하는 것이다.
(
참고: 잠재적이고 연속적 다수성으로서의 지속을 베르그송은 어떻게 설명하나? 우선, 지속은 본성적으로 다른 것들로 나뉘어진다. 하지만, 나뉨은 우리의 의식이 마음을 먹고 나눔을 적절히 행했을 때만이 현실화된다. 마음을 먹지 않으면 나누어지지 않는다. 가령, 책을 읽는 행위를 생각해보자. 물질로서, 공간으로서의 책이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붙들고 페이지를 넘기며 수많은 잠재적, 본성적으로 다른 흐름들로 끊임없이 나눈다. 그렇지만, 그것은 여전히 물질로서, 공간으로서의 책으로 남아있다. 우리가 만일에 나눔을 행하지 않은 상태나 위치에 자리를 잡는다면, 오로지 잠재적이고, 단일한 하나의 시간만이 있을 것이다. 나와 새의 비상과, 아킬레스의 발걸음과 거북의 발걸음, 물의 흐름은 하나의 단일하고도 보편적인 시간으로 흐를 것이다. . .그러다가 우리가 갑자기 어느 순간 나눔을 행하게 된다면, 본성적으로 다른 흐름들이 나뉘어져, 가령, 아킬레스의 흐름과 거북의 흐름으로 나뉘고, 나의 흐름과 물의 흐름으로 나뉘고, 이렇게 본성적으로 다른 개의 흐름들로 나뉠 것이다. 이것은 아킬레스와 거북의 운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둘의 본성적으로 다른 질적 변화를 의미한다.)


그러나 들뢰즈는 여기서 나아간다. 베르그송이 지속에게 부여한 그러한 분할과 연속의 힘보다, 심오하고, 훌륭한 힘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감쌀 있는 (the power to encompass itself)"이다.


    [. . .] 물의 흐름, 새의 비상, 삶의 속삭임은 가지 흐름을 형성한다; 그러나 그것은 오로지 나의 지속이 흐름들 하나에 속하기 때문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른 나머지 흐름들을 포함하고 있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흐름은 되는가? 가령, 나의 지속과 새의 비상은 되는가? 왜냐하면 흐름은 번째의 다른 흐름 안에 포함되지 않으면 공존한다거나 동시적이라고 말해질 없기 때문이다. 새의 비상과 나의 지속이 동시적이 되려면, 나의 지속이 둘로 나뉘어져야 한다. 그래서 나뉘어진 다른 지속이, 새의 비상을 포함하고, 동시에 나의 원래 지속도 포함함으로써, 나뉘어진 지속 안에서 원래의 지속이 반성되어야만 한다: 따라서 흐름들의 근본적인 삼중성이 있다.  (Bergsonism, 80)


의식의 흐름과 날아가는 새의 흐름이 공존하고 있다고 말할 있는 근거는, 관점에 있는 것도 아니고 새의 관점에 있는 것도 아니다. 둘이 공존하려면, 3 흐름이, 나의 흐름과 새의 흐름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는, 그래서 흐름이 동시에 붙들고 있는 번째 흐름이 나오지 않으면 된다. 그렇게 해서 나와 새의 공존이 가능해지려면, 나는 둘로 분열되어야만 것이다. 분열된 하나의 지속, 새의 지속과 나의 지속 모두를 포함하고 있는 3 지속이 안으로부터 나올 때만이, 비로소 자신과 새는 공존할 수가 있다. 이것은 일종의 코기토(Cogito)와도 같은 것인데, 새와 내가 공존하기 위한 조건은, 내가 자신과는 다른 낯선 존재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이다. 자신으로부터 낯설어지는 것은 말하자면, 좌표계의 전면적인 단념이고 포기이며, 자신과 거리를 두고 3자의 관점에서 나를 하나의 요소로 알아야 하는 것이다. . . 공존은 비개인화되기, 역사성을 갖기, 3자가 되기, . .아인쉬타인에 대한 베르그송의 질문의 요체가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흐름들이 매번 본성상의 차이를 가지며, 수축과 이완의 차이를 가지며, 차이들의 조건이 되는 단일하고도 동일한 하나의 시간 안에서 소통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 . . '오로지 하나의 비개인적인 시간만이 있게 것이다. 그리고 안에서 모든 사물들은 흐르게 것이다.' "(Bergsonism, 82)).

피에르와 폴의 상대적 운동과 시간지연에 있어, 동시성의 파괴를 말하고 있는 물리학자 자신은 실제로 어디에 있는 것인가? 새의 흐름과 물의 흐름을 구분하듯이, 피에르의 시간과 폴의 시간을 상대적 관계 속에서 구분하는 물리학자는 어디에 있는가? 베르그송은 상대적 물리학의 시간 이전에 이미 물리학적 시간을 가능케 실제의 시간을 상정한 것이다 . . 그렇기문에 그는 아인쉬타인이 동시성을 파괴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시성을 공고히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반성, 주의력, 회상, 음미와 같은 주관성의 능력은 다른 지속을 열어 제치고( 본성적인 차이를 구분하고), 다른 지속을 포함하기도 하고(하나의 시간으로 단일화하고), 나아가 자기 자신조차도 하나의 요소로서 포함한다. 이것은 바로 회상과 사색의 힘이라고 말할 것인데, 이것은 지속과 주관성의 본질을 드러내는 문제이다. "그것은 단순히 나누어질 없는 것이 아니라, 아주 특별한 형태의 나눔이다; 그것은 단순한 연속이 아니라 아주 특별한 형태의 공존, 흐름의 동시성이다."(Bergsonism, 81) . . . 우리를 내적인 지속으로 이끄는 것은, 공존하는 요소들이 서로 동시에 붙들고 흐를 있는 3 길로 나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흐름의 동시성" 본질적인 측면이다. . . . (들뢰즈가 Cinema에서 언급했던 Dividual 문제 역시 이와 같은 뜻이다) . . . . 이런 점에서 베르그송의 다원론과 일원론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 일원론은 독특한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무한한 현실적 흐름들(일반화된 다원론) 있다. 흐름들은 필연적으로 동일한 잠재적 전체에 참여하고 있다(제한된 다원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유일한 시간이 있다(일원론). . . . 잠재적 다양성은 하나의 단일한 시간을 내포할 뿐만 아니라, 잠재적 다양성으로서의 지속이 바로 단일하고도 동일한 시간이다."(Bergsonism, 82-83).

Posted by huun

자본이나 노동 혹은 재산의 소유와 같이 지배관계를 규정하는 정치경제학적 요소들을 파악하기 전에 짚고 넘어 가야할 주제: 이 사회는 묘하게도 지배자보다 피지배자들이 더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급 관계가 초래하는 부도덕과 비효율을 세 살 먹은 애들조차도 분명히 의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때는 계급성에 관한 분명한 의식을 취하는 것이 관건이었던 적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허구한날 서로들 앉기만 하면 불만에 차 내뱉는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실상 우리가 흔히 말하는 지배자들은 소수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수적으로나 질적으로 얼마나 왜소하고 보잘 것 없는 존재인지는 한 사회나 특정 집단이 뜨거운 소용돌이에 휘말렸을 때를 떠올려 보면 명백히 알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좀 서둘러서 고백하자면 그들은 아무것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 . . 어째서 인류는 여전히 지배관계를 존속시키고 있으며 오히려 더 강화하고 있는 것일까? 더 구체적으로 말해 지배자의 위상에 도달하기 위해 항상 조심스럽게 긴장하면서 투쟁하는 역사로서의 지배권(支配圈) 전체가 유지되는 근본적인 심리학은 무엇일까?

심리학의 대가 니체(F. Nietzsche)의 대답을 들어보면, 그것은 지배자의 강압적 힘이나 피지배자라고 간주되는 이들의 무지 때문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도덕과 처벌로 이루어진 잔인한 문화 내에서의 인간 관계를 통해 개인이 겪는 쾌감과 고통의 함수 때문이다. 니체의 말을 길게 요약해보면 이렇다: 도덕의 목표는 도덕적인 인간을 만드는 것이다. 도덕적인 인간이란 자신의 말과 행동에 책임을 지는 인간이며,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에게 자기의 의지 즉 미래를 약속할 줄 아는 인간이며, 심지어는 도덕이 요구하는 행위양식(관습)을 자율로서 이해하고 실천하는 인간이다. 책임과 의무를 자신의 존재양태로 스스로 인식하는 인간! 자신의 의지와 힘과 자유의 의지를 굽히지 않는 그 자신 스스로 주권자인 인간! 도덕이 양성하고자 하는 완성된 인간이란 바로 주권적 개체(sovereign individual)를 말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몇 가지 조건이 따른다. 책임 있는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본능적으로 양심을 갖는 인간이 되어야 하며, 미래를 약속하는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타인에 의해서든 자신에 의해서든 예측가능한 인간이 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도덕을 하나의 자율로서 이해하고 실천하기 위해서는 기억력이 좋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것이 주권적 개체의 양성을 목표로 하는 도덕의 3부 모델이다. 한편에는 왠지 미안한 마음(양심이나 죄의식이나 유죄임의 자백)이 있어야 하며, 다른 한편에는 행위의 규약(약속이나 다짐이나 지속적인 의지)을 잘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억을 잘해야 한다는 것은 저 두 모델의 조건이면서 동시에 종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 둔하고 경박하고 찰나적인 인간이, 스스로 미안한 마음이 들어 미래의 행위를 다짐하고, 그것을 죽을 때까지 잊지 않도록 할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하면 그의 자백과 다짐의 자국을 그의 마음 깊숙이 새겨 넣을 수가 있을까? 어떤 것이 기억에 남으려면 고통이 있어야 한다. 뜨겁고 따갑고 쓰라린 것이 가장 오랫동안 남아 있다. 바로 이 고통과 기억이라는 심리학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로부터 형벌이 태어난다. 우리의 마음이 엄숙하고 무거워질 때면 과거의 고통스러운 기억들이 어김없이 등장한다. 예를 들면 종교적 희생이나 제의라든지, 사법적 고문과 형벌, 금욕주의, . . . 등, 이 모든 절차들은 고통의 재생을 위해 기억이 필요한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잔인한 고통이 필요하다. 준엄한 형법은 인간의 건망증을 치료하기 위해, 그리고 순간적인 감정과 욕망에 사로잡힌 노예의 뇌리에서 사회적 공동생활에 필요한 몇 가지 규정들을 사라지지 않게 하기 위해, 인간의 야만적인 본능과 추한 언행을 통제하기 위해, 고통을 사용하여 마음속에다가 몇 가지 기억의 이미지를 아로새겨 온 것이다. 신체의 일부를 돌로 치는 형벌, 사지를 찢어 죽이는 형벌, 삶아 버리는 형벌, 불로 지지는 형벌, 어떤 단단한 이(異)물질을 그의 몸 속으로 쏘아서 죽이는 형벌, 밧줄에 목을 매다는 형벌, 태생적 죄인을 의미하는 붉은 색 십자가 낙인을 모든 이들의 마음속에 깊숙이 새겨 넣는 창세기적 형벌, 선량함과 겸손과 예절이라는 이름으로 이리저리 따돌려가며 개인을 밑도 끝도 없이 주눅들게 하는 형벌, . . . 이 모든 것들이 바로 '왜 당신은 미안해하지 않는가?'라고 따져 묻는 문화, 도덕과 처벌이 서로 얽히고 설키며 자아낸 잔인한 문화가 아니겠는가? 이러한 문화는 관객을 필요로 한다. 그 처벌의 광경이 발산하는 뜨거운 빛을 내면(內面) 깊숙이 하나의 인상으로 새겨 넣을 관객을. 형벌에는 연극과 축제의 요소가 참으로 많이 들어 있다고 니체가 말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잔인한 문화에는 희생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잔인한 종류의 인간 역시 존재한다. 마찬가지로 도덕적 인간이 되기 위해 고통을 각인하는 자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고통을 주는 자, 고통을 즐기는 자가 있는 법이다. 채찍에는 고통뿐만 아니라 쾌락이 있다. 채찍과 그 형태는 다르지만 본질에 있어 동종의 계보를 갖는 연민이나 동정과 같은 매저키즘적 정서에도 역시 쾌락이 있다. 프로이트가 고통과 쾌락의 연결 즉 고통이 쾌락이 되고 쾌락이 고통이 되는 그 알 수 없는 신비에 대해 언급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흔히들 말하는 '사랑의 매'라고 해서 다를까? 우리는 선생님이나 부모 혹은 그럴만한 자격이 있다고 믿는 자들이 행하는 처벌을 저 용어로 정당화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간혹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을 추상화해서 그의 모든 표현이나 행위를 그 추상적 사랑과 혼동한다. 아주 위험한 경우이다. 선의의 매라는 것에도 역시 다소간의 쾌감이 있는 법이다. 그러나 어떤 쾌감이 있다는 말인가? 누군가에게 고통을 줌으로써 얻을 수 있는 쾌감이란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역사적으로 볼 때 처벌은 오로지 악행을 범한 자의 양심이나 책임 때문에 가해지지는 않는다. 유죄인 사람만이 형벌을 받아야 한다는 전제 아래 처벌이 행해진 것도 아니다. 근본적으로 처벌이란 자신이 피해자라고 스스로 간주하는 자가 가해자라고 판단된 자에게 가하는 일종의 분노이다. 피해자의 의식은 재산상의 손해나 신체의 상해와 같이 구체적인 물적 변동에 의해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예를 들어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아랫사람의 거만한 태도에서 느끼는 불쾌함이나, 백인이 흑인의 피부색을 보고 느끼는 불결함이나, 그 외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발생하는 언짢음을 포함하여 모든 감정상의 동요로부터도 야기된다. 이와 동일한 의미에서 사회적 분노의 표현이 바로 형법의 기원이 아니겠는가?


이와 같이 도덕과 법(즉 제도와 계약)의 형식으로 분노와 고통을 해소하는 예를 니체는 채권자와 채무자의 배상형식을 통해 설명하였다. 누군가에게 손해를 입힌 자(채무자)는 피해를 입은 자(채권자)의 고통을 보상하고 그 부채를 상환하기 위해, 혹은 부채 상환 약속의 신용을 얻기 위해, 혹은 그 약속의 진지함과 신성함을 보증하기 위해, 그리고 그 책임과 의무를 자신의 양심에 새겨두기 위해, 예를 들면 자신의 재산이나 신체의 일부 혹은 처(妻)나 가족 심지어는 목숨을 저당 잡힐 것을 맹세한다. 이 저당물은 그에게 보다 소중한 것일수록 적합할 것이다. 반면에 채권자는 자신이 입은 손해의 고통을 상쇄해 줄 보상을 어떤 식으로든 받을 수 있는 권리를 보증 받는다. 보상은 주로 손해에 상당하는 것으로 판단되는 금전이나 토지 혹은 그 외의 소유물이 될 수도 있으며, 심한 경우에는 직접적인 손해나 피해를 고의로 입힐 수도 있다. 예를 들면, 고문을 가하거나 모욕을 준다든가 혹은 샤일록(Shylock)이 안토니오(Antonio)에게 그랬던 것처럼 육체의 일부를 베어내는 일 등이 가능했던 것이다. 만일 누군가가 (고의든 아니든) 내 발을 밟아 나를 아프게 했다면, 나 역시 그의 발을 밟아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최소한 나와 동일한 고통을 그에게 줄 수가 있는 것이다. 배상이란 한마디로 물적 혹은 심리적 복수의 권리를 말한다.


따라서 채권자가 자신의 손해에 대해 받을 수 있는 보상의 본질은 누군가에게 고통을 줄 수 있는 자격에 있으며, 그 자격으로부터 발생하는 쾌감을 즐길 권리를 말한다. 타인에게 고통을 줄 수 있는 형벌권 혹은 타인의 고통을 볼 수 있는 관람권은 하나의 자격이고 권리일 뿐만 아니라 그로부터 무르익는 무한한 쾌락이다. 무력한 자에게 마음껏 휘두를 수 있는 권력의 쾌감! 악을 저지를 수 있는 자격을 갖춤으로써 생기는 탐욕스러운 쾌감! 타인의 불행을 보며 은근히 자신의 우월감을 확인하는 음흉한 쾌감! 나아가 동정과 연민으로 더 우울하게 만드는 그리스도적 쾌감! 이 모든 폭행의 향락은 사회적 지위가 낮고 천한 사람일수록 더 커지는 법이다. 드높은 지위를 미리 맛보는 경험은 그 낙차가 크면 클수록 달콤하다. 채무자에게 형벌을 가함으로써 채권자는 자신도 모르게 지배권(支配圈)에 참여하는 것이다. 따라서 마침내는 그 역시 다른 사람을 아랫사람으로 경멸하고 학대하고 야유할 수 있다는 우월감을, 아니면 자신의 권력에 따라 채무자를 처분할 수 있는 집행권이 관료에게 넘어갔다 해도, 최소한 그 사람이 경멸 당하고 야유거리가 되는 불행을 안전한 발코니에 멀찌감치 앉아 목격할 수 있다는 우월감과 그 권리의 현실적 가능성을 경험하는 것이다. 지배권의 역사란 바로 저 자격과 권리에 도달하여 지상에서 가장 달콤한 고통의 쾌락을 맛보는 과정이 아니겠는가? 작든 크든 다들 그러고 있지 않은가? 내 주변에서도 하루에 몇 번씩 저 지독한 냄새를 맡는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맨 위에서 했던 질문, 즉 우리는 더 많은 피지배자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 의식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지배권이 여전히 존속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강화되고 있는지를 설명해 줄 심리적 근거가 아니겠는가? 한마디로 말해 즐거운 것이다.


그러니 누가 그 쾌락을 맛보는가? 라고 질문하지 말자. 국왕도 아니며, 귀족도 아니며, 자본가도, 남성도, 영국, 미국, 유럽, 아버지, 관료, . . . 에이! 모두가 아니다. 이 모든 도식화된 지배주체를 통해 지배권을 설명하는 것은 너무도 성급하고 추상적일 뿐만 아니라 서툴기 짝이 없는 대답이 될 것이다. 이미 위에서 지적했듯이 이 모든 결과들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더 근본적인 것을 고민하자. 예를 들면 지금까지 설명한 이런 것 말이다: 사람들의 모든 행동거지와 미세한 숨소리까지, 행위의 양태 전반을 하나의 지배권의 구도로 견인하는, 그리하여 우리 스스로가 지배의 무의식을 실천하고, 또 모든 이들이 추구하고 있는 생활의 경향, 이데올로기보다도 훨씬 더 깊숙이 윤리적 에피스테메를 이루고 있는 모종의 쾌감들 말이다.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지배권에의 참여를 독려하고, 그 권역에 대한 사회적 합의와 정당화를 가능케 한다. 헤게모니? 아비투스? 그 보다 더 적절한 말은 없을까? 지배권의 쾌락이란 지배자의 쾌락이 아니다. 취향에 따라 혹은 주어진 몫에 따라 혹은 능력에 따라, 우리 모두는 많든 적든 자신이 취할 수 있는 이런 저런 고통의 쾌감들을 통해 살맛을 느낀다. 서로들 마주 앉으면 불평의 원인이고, 돌아서면 불만의 씨앗이며, 자리에 누으면 불면(不眠)의 테마임에도 불구하고, 지배권이 끊임없이 유지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Posted by huun

대단히 엉뚱하게도, . . . 대기업 회장이 자신의 아들과 함께 망나니 같은 폭력을 휘둘렀다고, 기자들 및 언론은 의기양양하게, 할 일을 했다는 듯!, 협잡의 화신인 경찰까지 조심스럽게 질책해 가면서, 목청을 높인다.(곧 있으면 잊혀지겠지만)

상당히 못마땅하고, 걱정스러운 것은, . . . 물론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저렇게 비본질적인 주제에 대해 호들갑을 떪으로써, 공사(公私) 구분 못하는 한 망나니 업주의 사건을 마치 한국 사회의 기업인과 기업 그리고 그 권력의 문제를 폭로하고 고발하고 있는 것 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보라! 이제 기업 권력도 잘못하면 단죄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업주의 특정 일탈 행위에 찍은 방점에 머물러 버림으로써, 오히려 한국 사회 내에서의 기업적 권력의 구조와 본질이, 조폭과 무고한 소시민이라는 신파적 상상의 권력관계로 또 다시 슈거코팅(Sugar Coating) 되어 버리는 것 같아 못마땅하다. 항상 느끼는 바이지만, 기자들과 언론의 사색 능력으로는 결코 과학적 본질을 지각할 수 없는것 같다. 과학은 엄청나게 좋아하면서 말이다. 바로 그 권력의 이데올로기에 젖어 교육을 받고, 그 권력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선발되어 취업을 하고, 그 권력의 이데올로기로부터 월급을 받아, 그 품에서 행복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인지. . . . 문제는 특정 기업인에 대해 가끔씩 터트리는 일탈(편법 자금, 불법 증여, 탈세, 자질구레한 폭력들. . )이 아니다. 그러한 것들은 지저분한 결과들일 뿐이며,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본질을 제대로 볼 수 없게 하는 연막이 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기업과 기업주들에게 느끼는 반감이나 적대감은 막연한 형태의 느낌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 실체가 막연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 느낌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가늠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사람들은 욕을 하고 손가락질을 하면서도, 술자리에서 일어나 무기력의 우울감을 짊어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막연한 감정과 분노로는 해결가능성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참담한 심정으로 아침에 일어나 신문을 주어들고는 가시적이고 분명하게 보이는 스캔들 속에서 그 원인을 찾고 싶어한다. 가령, 어떤 기업인이 무고한 시민에게 권력을 이용하여 폭력을 썼다든지, 법적 절차를 무시하고 불법적으로 재산을 증여했다든지, 회계 장부를 이중으로 기록했다든지 하는 식 말이다. 하지만 그러한 방식의 관점에 고착되어 있으면, 기업 권력의 문제는 해결될 수 없고, 반감은 더욱 모호한 감정으로 발전하게 될 소지가 크다. 우리는 사회의 안녕을 위해 일탈과 범죄를 근절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을 가만히 따지고 보면, 일탈과 범죄는 근절되어야 할 것이기 보다는, 사회의 특정 권력이 유지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유산균 혹은 가끔씩 재접종이 필요한 불주사(BCG) 같은 것이다. 범죄가 저질러지고, 그것을 법의 이름으로 처벌할 수 있는 힘이 대중들에게 있다는 확신을 갖게 해주는 것만큼 사회 권력을 공고히 하는 좋은 방법은 찾기 어렵다. TV나 신문에 소개되는 다큐멘터리 같은 화질의 범죄현장과 고개숙인 범인들을 눈쌀을 찌푸리며 바라보면서, 묘하게도 우리가 취하는 태도는 건전한 사회와 건전한 인간의 존재를 확신한다는 사실이다. 맨눈으로는 볼 수 없는 저 외계의 끔찍한(그래서 항상 모자이크 처리되는) 어떤 것 때문에, 오히려 그것을 바라보고 비난하고 단죄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현재의 우리 자신, 그리고 저들 부정적인 인생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은 현재의 우리 자신에 안도감을 갖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기업주가 권력을 이용해서 아들을 위해 폭력을 사용한 사건이 저렇게 들뜬 어조로 보도가 되는 가운데, 우리의 귓가에는 아주 조용히 다정하게 속삭이고 있는 은밀한 목소리가 들린다. 그것은 바로 "존경받는 기업주", "자본의 선용", "덕망있는 권력"과 같은 신화가 혹시나 실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라고 하는 환상이다. 기업주 자체, 자본 자체, 권력 자체를 결코 바라볼 수 없게 하고, 문제삼을 수 없게 하는 언론의 저 달콤한 부정은, 우리의 뇌리에 꾸욱 자국을 남기고는, 나약해진 우리의 육체와 정신에 가끔씩 출몰하는 상상적이고 허왕된 어떤 바램들이 실현되기라도 할 것처럼 우리를 기만한다.

지식인들이 해야할 역할은 사람들의 막연한 반감을 보다 과학적이고 첨예한 본질적 문제들 쪽으로 제시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대중들의 모호한 느낌이 예리해지고, 그 날카로운 정신을 문제 해결의 수단으로 발전시킬 수가 있다. 그랬을 때 비로소 우리는 무기력과 절망을 넘어선다. 그런데 기자들이나 언론 전체가 바라보고 있는 관점과 문제의식은 언제나 문제를 더욱 더 모호하고, 감정적이고, 신파적인 대립구조 또는 일탈적 범죄들로 몰고 간다. 문제를 사정없이 망치고 있는 것이다. 기자들과 언론은 여러가지 방법으로 어김없이 우리를 실망시킨다. 그 단순한 시각이 너무 시시해서 실망하고, 이해의 깊이가 너무나 떨어져서 실망하고, 때로는 경찰이나 업주들처럼 협잡꾼의 미소를 보는 것 같아 실망하고, 간혹 오버해서 짜증이 나고, 이런 저런 이유들로 우리의 양 미간은 여지없이 구겨진다. 물론, 저 사건은 근본적인 권력의 한 결과이므로, 당연히 처벌해야 하고, 만인에게 그 사실이 폭로 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언론은 언제나 그 수준에 머물러 있다. 그렇기 때문에 몇 주가 지나면, 아무도 그 사건을 기억하지 않고, 또 시간이 지나면 동일한 사건들이 생겨난다. 기업과 업주의 근본적인 문제는 특정인의 일탈과 편법과 부패가 아니다. 문제를 그런 식으로 개인화하고 삼류 영화 구도로 만들어 버리면, 본질을 드러내는 것은 고사하고, 실상을 왜곡만 할 뿐이다. 속빈 냄비처럼 호들갑을 떨어 실상을 스캔들로 만들어 버리는 철딱서니 없는 보도가 아니라, 냉철하고 진지하고 진정성이 있는 보도를 하길 바란다. 기업주의 악덕이 아니라, 기업주 일반의 본질을 드러내는데에 까지 나아가야 한다. 다시 말해, 기업주는 정당한 존재인가? 기업주가 이 사회에 필요한가? 한 개인의 저러한 엄청난 사회적 부(富)를 인정해야 하는가? 한 개인이 저와 같은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은 어떤 것인가? 해결 가능성이 있는가? . . . . 와 같은 방식의 질문과, 그 질문의 해답을 찾는 기사를 쓰는 것이 보다 본질에 근접한 접근법이 될 것이다. 물론 선결조건으로, 자신이 그러한 질문으로부터 자유로워야겠지만 . . .

Posted by hu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