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6'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07/06/15 협잡꾼과 배신자
  2. 2007/06/14 예술과 삶 (2)
  3. 2007/06/12 사랑의 풍경들
  4. 2007/06/05 뒷 모습

내가 알고 있는 한 일류대 학생인 S를 생각해 본다. 몇 년전에 내 수업을 들었던, 아주 똑똑한 학생이었다.

물론 내가 다니는 학교에는 똑똑한 학생들이 아주 많다. 공부로 치자면 고등학교때 나름대로 날고 기던 녀석들이니 말이다. 아직 어린 나이인데도 불구하고, 간혹 보이는 그들의 성실과 진중함에 경의를 표한다. 하지만 끼가 있는 학생들은 흔치가 않다. 일단 시험 점수만 좋으면 좋은 대학 갈 수 있는 교육 환경 탓인지, 그들의 성실과 영리함에도 불구하고 무엇인가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지우기가 어렵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에 재빠르게 적응하고, 경쟁에서 승리하는 법을 터득하면서, 어렸을 때부터 머리가 길러져 있다. 그래서 시험이라든가, 성적이라든가, 취업이라든가, 영어라든가, 출세라든가 하는, 근거가 분명치 않은데도, 사람들이 확고하게 믿고 있는 가치들을 내면화하고, 쟁취하고,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훈련되어 있는 것이다.

그들은 정말로 빠른 두뇌를 가지고 있다. 아무리 어려운 문제들도 그 해답을 척척 찾아 풀어낸다. 도저히 풀수 없는 문제들도, 그 나름대로 얼버무리는 법을 찾아, 위기를 모면하고, 자신을 쾌적한 상태로 몰고갈 줄을 안다. 그들의 지능, 임기응변, 직감, . . . 사는데 필요한 그러한 능력들이 그들에게는 놀라운 정도로 발달되어 있다.

하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그 놀라운 두뇌는 어떤 점에서는 하나도 쓸모가 없는 경우가 있다. 오히려 그러한 빠른 두뇌가 자신에게나 타인에게나 해가되고, 독이되는 경우가 더 많이 있는 것이다. 지능이 가지고 있는 단점들, 가령, 오만, 편견, 이기심, 냉소, . . . 같은 것들 때문이 아니다. 이러한 단점들은 그들의 지능이 타인들에게 나쁜 영향을 주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단점은 바로 그들 자신에게 나쁜 영향을 주는 단점이다. 그것은 바로, 자신에게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는 (개인적)능력으로 인해, 주어진 환경이 가하는 보편적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바로 그 주어진 환경 속에 안주해서, 그 환경이 주는 혜택에 만족하며, 그러한 삶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습성이다. 뛰어난 지능이 오히려 그들을 망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사회의 악습을 불변의 진리처럼 확고하게 만들고 보존하는 이들은 다름아닌 저러한 지능들이다. 그도 그럴 것이, 무엇 때문에 바뀌길 바라겠는가?

그들은 시험을 잘 보지만, 어째서 시험이 필요한지에 대해서는 질문하지 않는다. 그들은 영어 성적이 뛰어나지만, 어째서 영어를 공부해야 하는지, 왜 영어인지, 왜 미국인지에 대해서는 질문하지 않는다. 그들은 좋은 직장에 취업하기 위해 자신을 가꾸고, 가치를 올리는 법을 잘 알지만, 어째서 취업을 하기 위해 경쟁을 해야 하는지, 싸워서 이겨야 하는지, 왜 싸워야 하는지, 왜 자신의 의지도 아닌 기업의 의지로 자신의 삶이 결정되는지에 대해서는 질문하지 않는다. 그들은 싸워서 이기는 법은 잘 알지만, 싸움을 중단할 방도에 대해서는 질문하지 않는다. 그들은 강남에 살지만, 왜 강남과 강북이 있는지는 질문하지 않는다. 그들은 순진한 모습이 가시지 않은, 아직은 영글지 않은 속물이지만, 일류대학이 무엇인지를 본능적으로 알고 있으며, 일류대학 물을 먹은 자의 자리가 어딘지를 꿰뚫어 보며, 가슴 속에는 항상 일류 대학의 뱃지가 달려 있음을 스스로 본다. 그러나 일류대학의 존재 자체에 대해서는 질문하지 않는다. 또 그들은 성적을 잘 받기 위해 선생님에게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터득한다. 하지만 무엇이 진정한 타협이고 대화이고 처신인지에 대해서는 질문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 앞에 던져진 문제는 묵묵히 잘 풀지만, 자신의 문제를 만들 줄 모르며, 문제가 무엇인지 모르며, 질문한다는 행위 자체에 대해 생소해 있다. 그들은 그 모든 것들을 난데없이 뚝 떨어진 천재지변인냥 받아들인다. 그리고는 그냥 적응하고 감수하며 살아간다. 한마디로 영리한 노예가 되어가는 것이다. 영리한 노예는 다른 노예를 이기기 위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대화한다. 그리고는 교육을 통해, 최고의 협잡꾼이 되는 방법을 터득한다. 간혹 잘 영글은 협잡꾼으로 성장한 이들 중에는, 그 협잡의 미소에서 나오는 지독한 악취 때문에, 도저히 함께 밥을 먹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경우도 있다.

지식인의 두 부류가 있는데, 하나는 사회의 유기적 질서를 온전하게 만드는데 필요한 지식인이다. 이 지식인은 성실하고, 일처리가 재빠르며, 위험성이 없고, 사회와 우애가 돈독한 지식인이다. 이 지식인은 사회가 필요로하는 지식인이고, 사회가 요구하는 지식과 기술과 능력을 온 몸에 갖추고, 다소곳이 부름을 기다리는 지식인이다. 한마디로 "괜찮은 녀석"이다. 하지만 또 다른 부류의 지식인도 있다. 그 지식인은 사사건건 사회와 불화를 맺는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사회 밖에서, 사회를 향해 비판하고, 자신이 원하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힘겨운 싸움을 계속한다. 저 위의 "유기적 지식인"과 이 "비판적 지식인"의 차이가 있다면, 바로 질문 내용의 차이인데, 전자는 사회가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질문한다면, 후자는 바로 사회가 무엇인지를 질문한다는 것이다. 이 비판적 지성이 갖추어야 할 능력은 영어실력도 아니고, 직감도 아니고, 재빠른 일처리도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일종의 인문학적인 끼가 있어야 한다. "괜찮은 녀석" 혹은 "협잡꾼"이 아닌 "배신자"의 끼 말이다. 협잡꾼의 입장에서 볼 때, 이 배신자의 배신은 정말로 기분을 잡치고, 실망스러우며, 식욕을 떨어뜨린다. 그래서 그 배신자는 대체로 혼자서 밥을 먹거나, 아니면 굶는 경우가 허다하다. 하지만, 그런 지식인은 한국에는 별로 없다. 식사는 반드시 함께 해야하는 한국인의 정서에 맞지 않아서인지, . . .

S 얘기를 하다가 이상한 얘기까지 나왔는데, . . . 내가 하려고 했던 말은, 아직은 명확히 알 수 없지만, 그에게는 약간의 "배신자의 끼"가 보인다는 말을 하려고 했던 것이다. 대부분이 군대에 갔다 오고 졸업반이 되면서 아주 늠름하고 의젓한 "괜찮은 놈"이 되어간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지만 말이다. . . .

녀석이 최근엔 철학에 빠져 있다고 했다. 자기에게 맞는 전공이 뭔지 몰랐는데, 알고 보니 철학이었다고. 가슴이 뿌듯하다고, 계속 공부하겠다고, 갈길이 열린 것 같다고. 그래서 내가 약간 걱정투로 얘기해 주었다.

"신중하게 생각해라. 밥 굶을 수도 있다!"

그랬더니 녀석이 이렇게 말했다.

"그냥 굶을래요!"

나중에 든 생각인데, 녀석이 완전히 날 배신한 거다. 2년 전인가? 처음에 내가 그에게 밥을 사준 적이 있었다(탕수육과 짜장면). 내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밥 먹으러 가면서 진한 경상도 사투리로, 녀석이 난데 없이 이렇게 말했던 것을 틀림없이 기억한다.

"나중에 돈 많이 벌어서, 선생님한테 맞있는거 사줄거예요!"

배신자에게는 언제나 배고픔이 따르지만, 주변 사람들도 배고프게 한다는 사실 정도는 그도 알기를 바란다. 배신자의 친구가 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굶을 각오가 없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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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누군가의 글에 매료 되었을때, 글을 쓴 사람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 작품 만큼이나 그의 삶도 아름다울 것이라고 말이다. 당연한 일처럼 보이지만, 실은 아주 우스꽝스러운 넌센스 중의 하나이다. 이러한 넌센스는 예술을 대하는 우리의 전반적인 태도(주로 속물적인) 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나아가 이는 예술과 예술가 그리고 예술작품을 마음대로 뒤섞어서, 그들을 한꺼번에 폄하하거나 망치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 예술가나 작가 개인의 전기적 사실들에 대한 관심, 가령, 그의 출신은 어디인지, 학력은 어떤지, 유년시절이나 가족관계는 어땠는지, 연애를 얼마나 했는지, 버릇이나 취향이 무엇인지, 동성애자는 아닌지, 결혼은 했는지, 주변의 누구와 친분이 있었는지, 도덕심이 어땠는지, 성격은 어떤지, 앉은 자리가 얼마나 높았는지 하는 식으로, 한 개인과 작품에 접근함으로써, 우리는 예술가의 본질로부터 멀어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심지어는 예술가 개인에 대한 실망감을 그의 작품에 대한 비난으로 대신하는 어처구니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든 예술과 개인, 예술과 삶을 묶어서 예술이 삶으로부터 따돌림 당하는 일을 막아보려 한다. 그래도 예술은 삶에 꼭 필요하다든지, 살아가는데 도움이 된다는 식으로 말이다. 미안한 얘기지만, 그들은 예술의 적이다. 인맥과 겸손으로 작업을 하는 협잡꾼들은 주로 그런 인간들 속에서 나온다.

한 번만 숨을 죽이고 생각을 해보자. 만일에 하나의 작품이, 그 예술가나 작가의 전기적인 사실들과 동류의 문제이고, 그 예술가 개인의 삶과 구분되지 않는 것이라면, 그래서 그의 전기적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작품이 평가될 수 있는 것이라면, 도대체 예술 작품이란 무슨 쓸모가 있단 말인가? 가령, 프루스트(Marcel Proust)의 작품이 그의 소소한 과거사에 관한 이야기이고, 그의 개인적 시간 경험의 기록이며, 그가 관계한 많은 사교계와 사랑에 관한 보고서이며, 그 주변 인물들에 대한 소묘이며, 작가 개인의 정신적 성장의 과정에 불과한 것이라면, 그래서 마르셀(작가의 이름이며 주인공의 이름이기도 한) 개인에 대한 이해가 작품의 이해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은 것이라면, 그의 소설이 벽장 속의 사진첩과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예술작품이나 이론은 작가나 예술가 개인의 사회적 삶과는 본질적으로 아무 관련이 없다. 가령, 방금 전 불륜의 밤을 보낸 후에 쓴 한 예술가의 연애시는 얼마든지 위대하다. 왜냐하면 그의 작품과 이론은, 육체와 대상에 필연적으로 묶여있는 그의 지리멸렬한 삶보다 더욱 심오한 어떤 통찰 속에서, 그의 내적인 영혼에 관계하고 있기 때문이다.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일은 단순히 한 개인의 경험의 기록이나 감정 표현이 아니다. 그런 이유였다면, 당장에 손에든 책과 그림을 던져버리고, 차라리 당신 자신의 일기를 써라! 작품은 그 개인의 삶을 뛰어넘는 것이다. 그래서 작품은 현실세계에서 살아가고, 생각하고, 사회적 관계를 맺는 바로 그 개인이 아닌, 전혀 다른 존재(심지어는 인간 조차도 아닌), 전혀 다른 관점과 세계와 가능성의 펼침이다. 우리가 그림 앞에서 모자를 벗고, 소설 속에서 전 우주의 떨림을 체험하고, 그 예술가에게 위대함의 찬사를 보내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그렇치 않다면 예술작품은 화장실의 신문지보다도 가치가 없다. 예술가는 사실들을 가지고 자질구레하게 신변의 넋두리를 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현실적 존재를 넘어서기 위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붉게 충혈된 동공으로 새벽의 작업실을 빠져나온다. 우리가 그 작품에 빨려들어 매료되는 것은, 그의 덕망도, 인품도, 겸손도 아닌, 그가 펼쳐 놓은 어떤 풍경, 우리와는 전혀 다른 세계 때문이다. 삶이 없어도 예술은 존재한다거나, 예술이 삶을 대신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그것과 그것은 근본적으로 다른 문제라는 말이다. 신변잡기의 얘기를 썼다 해도, 그의 작품은 그 자신과 무관하다. 신적인 광채를 지닌 작품을 쓴 작가를 실제로 만나보면, 초라하기 그지없는 모습의 한 주정뱅이 노인을 발견하고는(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의아해 하며 그의 작품을 다시 보는 경우가 있는데, 바로 예술과 삶을 혼동한 우리의 편견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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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이나 사물에는 변하지 않는 하나의 모습이 있다고들 한다. 영원히 같은 모습의 정체성 혹은 본질이 있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조금만 더 냉정하게 세계를 바라본다면 삽시간에 허공으로 꺼져버릴 만큼 근거가 빈약한 믿음이다. 사물을 바라보고 대하는 우리의 변덕스러운 모습만 보더라도 이 말을 쉽게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친한 사람, 사랑하는 사람, 애뜻한 사람, 미운 사람, 혐오스러운 사람, . . . 그들의 정체성 때문에 그러한 관계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정체성에 대한 우리의 믿음 때문에, 우리는 아주 많은 가능성들을 스스로 포기한다. 그들로부터 우리는 풍경들을 바라보고, 그들 중 어느 하나의 풍경이 우리를 만나게 한다. 풍경이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만일에 우리가 사랑하게 된다면, 그것은 단지 하나의 행운일 것이다.

나의 변덕은 내 앞에 펼쳐진 모든 것들의 변화와 다양성을 말해준다. 가령, 하늘을 보라. 그리고 하늘이 무엇인가? 혹은 하늘은 무슨 색인가? 라고 질문을 해보라. 우리는 쉽게 대답할 수가 없다. 우리가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 대답할 수 없음 자체가 하늘이기 때문이다. 바다는 또 무엇인가? 바다는 무슨 색인가? 이 또한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그 대답없음 자체가 바로 바다이기 때문이다. 그들에 대해 대답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을 때, 우리는 그들을 제대로 본 것이다. 하늘, 바다, 노을, 뿐만 아니라 내 작은 방 창틈으로 새어들어오는 자그마한 빛, . . . 그들은 본성이 없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것들을 '하늘', '바다', '노을', '빛' 이라고 부르고, 그들을 식별해 내는 것은, 단지 우리의 어림짐작으로, 우리의 무딘 지각이 뭉뚱그려 놓은 통계 때문이다. 현실이란 잡히지 않는 기체-연기가 무리를 이루며 모인, 혹은 우리가 뭉뚱그려 놓은 여럿의 덩어리-몸둥이들의 집합이다. 현실은 한 두가지의 통계일 뿐이다. 사랑은 또 어떤가? 우리는 사랑이 하나의 감정 상태인 것처럼 믿고 열광한다. 하지만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랑의 대상들, 애인들의 수 만큼이나 많은 사랑이 있으며, 뿐만 아니라 한명의 애인에게 조차 매순간의 서로 다른 사랑과 질투와 고통이 있다. 그 감정들은 서로 뒤섞이지 않으며, 각각의 세계와 각각의 풍경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한 사랑을 다른 한 사랑과 혼동하지 않고, 그 사랑을 다른 사랑과 대체하거나 교환하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의 태만과 무성의는, 바꿀 수 없고 대체할 수 없는 그 각각의 사랑을 마치 하나의 감정이라도 되듯 뭉뚱그려 뒤섞는다.

현실을 이루고 있는 것이 그 덩어리-몸둥이라고 해서, 하나의 현실, 하나의 본질이 있다고 믿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 몸둥이에는 아주 많은 주름들이 나 있고, 그 몸둥이의 실상은 바로 그 주름의 변화이기 때문이다. 예이츠(William Butler Yeats)가 평생을 찾아 헤매던 풍경: "어머니가 아들에게서 보는 것, 예술가가 장미에게서 보는 것, 수녀가 마리아 상에서 보는 것!" 주름이 만들어 놓은 각각의 풍경들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그 각각의 풍경에 맞는 전혀 다른 광학 도구들을 필요로 한다. 사랑의 주름을 생각해보라.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뒤척일 때마다, 웃을 때마다, 담요에서 먼지가 일어나듯, 그녀의 주름들 속에 숨어있던 어떤 미지의 영혼들이 작은 몸짓과 뒤척임 속에서 퍼져나와, 방금전에 내가 보았던 그녀의 풍경을 지워버리고, 전혀 다른 풍경을 펼쳐놓는 바람에, 나는 새로운 돋보기로 그것을 관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들여다보다가 내 스스로 웃기도 하고 찌푸리기도 하며 진풍경을 자아낸다. 그 하나의 풍경은 내가 바라보는 하나의 관점이고, 다른 여인과 구별되는 바로 그녀(전체)는 그 관점들의 통계이다. 그녀가 퍼뜨리는 풍경과 관점들이 요술을 부려, 내가 믿었던 그녀가 아님을 보게 되었을 때, 알 수 없고 소유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 풍경 속에 내가 없을 때, 그 저주같은 풍경들이 점점 내 눈에서 증식하여, 그녀를 사랑하는 내게 되려 적이되어 몰려올 때, 나는 배신감과 질투의 포로가 될 것이다. 그 관점과 풍경들은 마치 기차여행에서 보게되는 창문의 풍경처럼, 이리로 갔다가 저리로 갔다가 종잡을 수 없는 부스러기와 조각들로 펼쳐져, 내가 믿고 있었던 그녀의 본질을 해체한다. 나는 더 이상 어제의 그녀를 찾을 수 없으며, 내일의 그녀를 예측할 수가 없다.

하늘을 바라보며 발견하게 되는 그 무수한 관점들의 수 만큼이나 많은 우리의 자아가 있다. 창틈으로 새어 나오는 빛과 세상의 모든 빛의 수 만큼이나 많은 우리의 영혼이 있다. 사랑하는 애인의 그 복잡한 모습 만큼이나 많은 자아와 관점이 우리를 사로 잡고 있다. 푸르스트(Marcel Proust)는 이렇게 말한다. 애인이 떠났을 때, 그녀를 상대했던 내 안의 수많은 자아들 모두에게, 그녀가 떠났음을 각각 알려주어야 한다고.

우리는 사랑하며 잠에 빠진다. 잠 속에서 보게 되는 그 많은 풍경의 방들을 돌아다니듯, 각각 밀폐된 방안으로 연기처럼 스며들듯, 사랑은 우리를 이방 저방을 옮겨다니게 하고, 애인이 내뿜는 풍경에 길을 잃고 방황하게 한다. 잠과 마찬가지로, 사랑에서 깨어난다는 것은, 그 많은 풍경들로부터, 그 풍경의 방들 속에서 펼쳐지는 것들로부터, 내가 지금 앉아있거나 서 있는 이 현실의 방으로 자리를 옮기는 것이다. 혹은 그 많은 풍경들에 빠지기 전의 자아, 단 하나의 풍경에 고착된 허전한 자아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결국, 잠과 마찬가지로, 사랑에서 깨어난다는 것은 그 아름다운 풍경들을 져버리고, 잠에서 깨어나 내가 누군지 여기가 어딘지를 정신없이 서둘러 선택하듯이, 불안 때문에 아니면 두려움 때문에, 단단하게 마련된 사슬들을 몸에감고, 덩어리-몸둥이가 되어 스스로 한 곳에 묶여 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찬란한 순간들을 포기한 채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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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cis Bacon, Study for a Portrait of Van Gogh IV  1957

말이 없는 곳에 있다보면, 눈에 보이는 모습이 우리를 필요 이상으로 압도할 때가 있다. 특히 도서관에 앉아 있는 뒷 모습이 그렇다. 그는 항상 내가 앉은 자리에서 한 칸 앞 쪽에 앉아있다. 나와 마주보는 사람이 없을 때에는, 어김없이 그의 뒷모습을 보게 된다. 구석자리에 조용히 앉아 무엇인가를 들여다보고 있는. 깔끔하게 올려친 뒷통수. 한 번도 벗어 본 적이 없을 것 같은 그 고동색 얇은 반코트. 자리에 앉아 책을 읽거나, 노트를 정리하거나, 잠시 책상에 엎드려 잠을 잘 때에도, 그는 언제나 그 코트를 입고 있다. 언제 드나드는지 알아챌 수 없을 만큼 조용한 걸음걸이. 가지런히 놓인 왼편의 책과 오른편의 노트, 그리고 노트 위에 검은색과 붉은색 두 개의 펜. 나는 한 번도 그와 마주친 적이 없다. 그래서인지 그의 앞 모습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언제인가 3층 창밖으로 머리를 내밀어 바깥을 바라보고 있는데, 저 쪽 아래 잔디밭 옆으로 그가 지나가고 있었다. 여전히 뒷 모습이었다. 연두색 잔디와 고동색 코트가 어울리지 않아서였는지, 그를 보며 잠깐 생각에 빠져 버리고 말았다. 멀리에서 보니, 꾸부정한 어깨임을 처음으로 알았다. 검은색 가방을 들고, 긴 우산을 지팡이처럼 짚어가며, 고개를 숙인채, 여전히 조용한 발걸음으로, 모퉁이를 돌아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다. 하늘엔 세상의 모든 구름들이 끝없이 엉켜있어, 그 회색빛을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멀미가 날 것 같았다. 비가 올 것 같았지만, 정오가 훨씬 넘었는데도 비는 오지 않았다. 대신에 부드러운 바람만 불고 있었다. 그의 먼 뒷모습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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