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의 실체는 무엇일까? 작가의 의도 혹은 계획 아니면 비젼? 흔히들 글을 쓰는 일이 견딜 수 없다고 말한다. 때로는 자연과의 투쟁에서 오는 농부의 고달픔에 비유하기도 하고, 겁없는 프로메테우스의 고통에 견주기도 하면서 말이다. 그러면서도 쓴다고, 그래서 위대한 것이라고 말이다. 하기야 고통스럽지 않은 노동이 어디 있겠는가? 어쨌든, 컵을 잃어버린 액체의 긴장처럼, 불안한 상태를 지속시키고 있어야 할테니 말이다. 하지만 사람들 대부분이 글쓰기를 고통스러운 행위라고 보는 이유는 글이 저자의 계획의 산물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신처럼 세계를 만들어야 한다고, 그래서 갖추어야 할 흐름이 있다든가, 지켜야할 규칙이 있다든가, 견뎌내어야 할 의무가 있다든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내 생각에 글의 본질은 그 보다는 조각난 생각들에 있지 않나 싶다. 머릿 속에서 언뜻 언뜻 들었던 통찰, 몽상적인 상태 속에서 떠올랐던 어떤 의미, 예기치도 않았는데 갑자기 우뚝솟아 오르는 본질적인 이미지, . . . 체계나 구조 없이 불쑥 불쑥 고개를 내미는 부스러기 섬광들! 누구에게나 있는!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이든, 받은 사람이든, 인간을 사랑하는 사람이든, 증오하는 사람이든. 진정으로 살다보면 누구에게나 끊임없이 생겨나는 것들, 우리의 작은 관계와 행위들에 특별한 의미를 가지게 해주고, 그렇게 나타났다가 사라져버리고 마는 마음 속의 아포리즘들, 가령, "그에게 그런 면이 있었네?!"하는 식의 질문이나 통찰 말이다. 작가들은 이러한 섬광들을 기록해둔다. 단어 하나, 점 하나, 숨소리까지도. 노트 말이다 노트! 삶을 향유하지 않고 그러한 노트가 가능할까? 위대한 작가들의 작품은 바로 이 섬광들로 채워져 있다. 섬광의 대가인 니체의 죽음은 질병이나 육체의 노쇠함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 섬광으로 벅차오르는 가슴을 가눌 수 없었기 때문이다(혹은, 부지런한 노트가 펜을 쥔 손에 안겨준 심한 경련이 그 벅찬 가슴과 서로 장단이 안 맞았는지도). 작가들은 긴밀한 구성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신처럼 완벽한 어떤 구조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아니다. 본래적으로 타고난 체계화 능력이 있는 사람들도 아니다. 그들은 다만 그 자그마한 섬광들에 민감하고, 그 작은 아포리즘을 잠깐 동안 앉아 노트할 정도의 근면이 있는 사람들일 뿐이다. 그는 나중에가서 그 조각들을 그럭저럭 짜맞추어가며, 그들 사이 사이에 아교와도 같은 통로들을 만들어서 책을 낸다. 그 노동은 의외로 쉽다. 섬광들만 제대로 기록되어 있다면 말이다. 그런 식으로 하나의 세계와 국가가 만들어지는 것 아니겠는가? 글쓰기의 고통은 게으름을 한꺼번에 보상받으려는 헛된 욕심에 대한 자연의 처벌 같은 것이다. 그러한 조각들도 마련하지 않고, 삶 속에서 아무런 섬광도 느끼지 못한 채, 혹은 나타났던 섬광들을 강렬하게 만들지도 못하고, 지리멸렬한 하찮은 점들로 소멸시켜버리는, 그렇게 성의없는 사람들에게나 글쓰기의 고통이 견딜 수 없는 것이다. 당장에 백지를 올려놓고 펜을 들어보라. 흰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먹물이라는 사실 밖에는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글은 하나의 결과일 뿐이다. 처음부터 국가를 만들 수 없고, 처음부터 우주를 만들 수 없듯이. 만일에 신이 하루 아침에 세계를 창조 하였다면, 그의 필력은 정말이지 끔찍하지 않았을까? 글쓰기의 고통이란, 삶을 향유하지 않고, 예를 들면, 원고료와 생활고에 떠밀려, 혹은 시험을 보기 위해(논술이라고?), 삶을 빼앗긴채, 섬광도 없이, 그 작은 빛들이 자발적으로 만들어낸 어떤 질서와 국가와 체계도 없이, 갑자기 하나의 왕국을 만들어 보겠다는 망상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향유를 배우라! 글쓰기는 재주가 아니라 태도이다. (베르칸트가 말했듯이, 아무리 책을 많이 읽고 노력을 해도, 속물들 속에서는 결코 진정한 글이 써질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2007/07'에 해당되는 글 6건
- 2007/07/31 힘들이지 않고, 심지어 즐겁게 글을 쓰는 방법
- 2007/07/28 존재의 시간, 푼크툼 (11)
- 2007/07/26 본성상의 차이와 긍정[편집본]
- 2007/07/14 화장과 아름다움
- 2007/07/09 UFO와 우리
- 2007/07/02 그들만의 재미 (11)
예전에 나는 바르뜨(Roland Barthes)가 쓴 사진에 관한 몇 가지 단상을 읽은 적이 있다. 거기서 나는 사진과 관련한 전문적인 지식을 별로 알아내지 못했으므로 곧 그 책을 기억에서 지워 버렸다. 그러나 한참 지난 후에 문득 이런 질문이 생겨났다: 사진에 관한 글을 쓰면서 그는 왜 사진의 이러저러한 지식에 대해 말하지 않았을까? 아는 것이 없어서?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어서? 그랬다면 그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그 책을 통해 사진을 하나의 방법으로 접근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나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은 대체로 이미지에 의해 사물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사진을 방법으로 보는 것. 이는 결국 사진 뿐 아니라 사물을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이며 동시에 그로부터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 책 전체를 다시 훑어보면서 사실은 특정한 주제에 향해 있었다. 그리고 아마도 바르뜨 역시 이 주제를 가장 흥미롭게 혹은 가장 중요하게 언급하고 싶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주제는 의외로 단순한 구분에서부터 출발하는데, 그것은 사진이 발생시키는(혹은 우리가 발견하는) 서로 다른 두 가지의 감정이다. . . .
마술사의 눈속임에 당하지 않으려면, 두 눈을 크게 뜨고 그가 보여주는 보자기와 손동작을 뚫어지게 관찰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볼수록, 마술사는 더 수월하게 우리를 속일 공산이 크다. 왜냐하면 마술이란 우리 믿음의 완고함과 지각의 편협을 이용해서 우리를 속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특정 부분에 집중하는 동안, 마술사는 바로 우리의 눈앞에서, 장기판을 슬쩍 바꿔치듯, 우리가 믿어 의심치 않는 자연적 질서를 뒤바꾸어 버린다. 한쪽 손에 든 모자를 유심히 보는 동안, 어느새 비둘기는 다른 쪽 손으로 옮겨지는 것이다. 편향된 집중력은 사물에 대한 우리의 지각을 불균형적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 마술은 우리의 편협한 집중행위가 바로 우리 자신의 믿음에 뒤통수를 치게 함으로써 우리를 속인다. 지각의 편협이 더하면 더 할수록, 자연적 질서에 대한 믿음이 강하면 강할수록, 뒤통수의 충격은 더 심해지고, 마술의 신비는 더 깊어진다. 그렇게 우리 자신의 속임수가 꾸며놓은 신비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넋이나가 있는 모습을 신이 바라본다면, 그야말로 우스꽝스러운 진풍경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외모나 미모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에는 바로 그 마술과 유사한 어떤 속임수가 있는 것 같다. 화장이나 장식으로 외모를 연출하는 경우가 좋은 예이다. 얼굴과 몸 주변에 갖가지 장식을 붙이고 색을 칠해서, 보는 사람의 시선을 여러 곳으로 분산시키는 것이다. 얼굴과 몸의 진상을 그 장식과 치장에 분산시켜 분배함으로써, 그 사람 자체가 짊어져야 할 자연적 부담을 그 도구들이 떠맡도록 고용 했다고나 할까? 가령, 목이 짧은 사람은 가슴이 패인 셔츠를 입는다든가, 엉덩이가 크고 처진 사람은 뒷주머니가 큰 바지를 입는다든가, 허리가 굵은 사람은 벨트를 늘어뜨린다든가, . . . 립스틱, 아이섀도, 헤어스타일, 귀걸이, 자극적인 색채들, . . . 그 모든 테크닉들은 마치 일군의 군대처럼 덕지덕지 몸에 달라붙어 그 사람을 흐트러뜨리기 위해 배열된다. 우리는 그렇게 고용된 자극제들에 눈을 빼앗겨 버린다. 틀림없이 전에는 별로 아름다워 보이지 않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녀가 예뻐졌다. 얼굴이나 몸을 성형으로 바꾼 것도 아닌데 말이다. 아마도 화장법, 액세서리, 옷, 제스처, . . . 그것들이 한꺼번에 연대하여 그녀에 대한 나의 시선을 분산시켜 놓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원래의 그녀가 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전과 달라졌을 뿐.
그녀가 장식을 붙이고 화장을 했던 것은 아마도 자신의 모습이 구체적인 실제가 아니라 막연한 전체로 보이길 원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못생긴 다리의 그녀가 치마를 입고 와서는 이렇게 말한다: "다리만 보지 말고 전체를 보아주세요!" 사실 우리는 사물을 막연한 전체로 보아야만 그것을 견딜 수가 있다. 질척거리고 끈적이는 수분과 갖가지 벌레들 그리고 기생충이 뚫어놓은 구멍들로 꽉 찬 섬유질 덩어리가 아니라, 그냥 막연한 하나의 나무를 바라보며 그림을 그리듯이, 혹은 음식물 찌꺼기와 박테리아로 가득한 잇몸이나 치아나 구강이 아니라 그냥 아름다운 연인의 입술에 입을 맞추듯이 말이다. 그런 점에서 화장품이나 장식물은 오히려 사람들 사이의 거리감을 반영한다. 장식물과 화장품을 통해 사람들은 산만해지며 막연해진다. 그것들에 주의를 빼앗겨 그 사람의 실상이 온데간데 없어져버리는 와중에 말이다. 어떤 점에서 외형적인 아름다움이란 우리의 산만함, 태만, 혹은 무성의에 근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아름다움"이라는 개념 자체가 일종의 태만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아름다움이란 조화로운 것, 보기 좋은 것, 균형이 있는 것, 따라서 힘이 덜 들어가는 것, 즉 쾌적한 상태를 유발시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이 주는 쾌적함의 실체는 우리의 능력들(감성, 지각, 이성, 감정 등)이 조화로운 협력을 위해 힘의 안배를 고르게 했을 때 생기는 감정이다. 힘겨운 고통이 약화된 것이다.
하지만 자세히 바라보면, 세상의 모든 것은 불규칙하고, 일그러져 있고, 균형이 깨져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든지 두 눈은 항상 모양이 다르다. 몸의 왼쪽과 오른쪽 역시 균형이 깨져있다. 모든 사물들은 대칭적이지 않으며, 어딘가 일그러져 있다. 그럭저럭 균형을 맞추어가며 힘겹게 버티고 살아갈 뿐이다(그런 의미에서 상품은 그 형식뿐만 아니라 실제 외양에 있어서도 관념의 구현체 혹은 추상물임이 분명한 것 같다). 르느아르(Pierre-Auguste Renoir)가 자신의 회화의 원리로 삼은 것이 바로 이 "일그러짐(irregularity)" 이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얼굴 모습이나 눈동자는 초점이 뚜렷하지 않아, 마치 움직이면서 셔터를 누른 사진처럼, 어딘가가 비뚤어져 있거나 일그러져 있다. 그 역시 세상의 모든 사물들은 일그러져 있다고 생각했다. 세변의 길이가 똑같은 존재라든가, 한 점에서 동일한 거리의 자취와 같은 존재는 현실 세계에는 없다. 색 대비 최대치의 선명한 존재는 우리의 패러노이드가 만들어 놓은 윤곽선에 대한 환상일 뿐이다. 모든 것은 매순간 변하고 있고, 어느 하나 정지되어 있거나, 고정되어 있는 것은 없다. 그러니 고르게 분포된 균형이나 조화나 대칭이란 원리상 불가능한 것이다.
그 일그러진 사물을 지각하고 이해하려면 우리의 힘겨운 노력이 필요하다. 달리는 사자를 쏘아 잡기 어렵듯이, 곡선을 자로 재는 일이 힘겹듯이, 어딘가가 돌출되어 있거나, 비뚤어져 있거나, 움직이거나, 사선이 그어져 있는 사물들을 파악하려면, 매번 다른 방식의 척도가 필요하다. 또한 매순간 다른 체계와 규칙과 방법과 집중력이 요구된다. 그러니 손쉽게 사냥을 하려면 그 실제의 사자를 가상의 점으로 찍어 좌표와 궤도를 설정해야만 할 것이다. 땀을 흘리고, 헐떡거리며, 근육 운동을 해대며, 매순간 변덕스럽게 움직이고 있는 저 일그러진 동물을 가상의 매끈한 그림으로 옮겨놓지 않으면, 오히려 우리 자신이 사자에게 짜증을 부리며 헐떡거리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실상을 아름답고 쾌적하고 조화롭게 만들기 위해서는, 그 일그러진 실상들, 축 쳐진 엉덩이와, 주근깨투성이의 얼굴과, 땀구멍이 깊이 패인 주름들을 들키지 않도록, 사람들이 그 약점들에 집중하지 않도록, 화장품과 향수를 짙게 뿌려, 사람들로 하여금 태만을 유도해야만 할 것이다. 균형미라는 것도 이렇게 생겨난다. 조화의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쾌적한 감정 속에서, 모든 돌출부는 집어넣어야 하고, 푹 꺼진 부분은 마름질로 고르게 펴져야 하고, 삐딱한 사선들은 정직선으로 바로잡혀야 한다. 그리하여 어느 것에도 특이한 시선을 보내지 않도록, 힘을 분산시키고, 연쇄고리들을 만들고, 부분들을 종속적 연대로 편성하여, 막연함을 유발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아름다움(beauty)"이다. 아름다움이란 적당한 외면이며, 냉소이며, 무성의이며, 무엇보다도 종속이다. 그것은 실상의 적나라함에 대한 두려움으로, 실눈을 뜨고 바라본 광경이며, 눈을 감고 외치는 열광이다.
불규칙하고 일그러진 사물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그 강요된 노력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불쾌하고 힘겹고 고통스러운 어떤 것으로 경험한다. 그에 대한 거부가 그 사물을 추하게 보이게 한다. 못생기고 추한 존재의 근원은 바로 실상을 대면하는 우리의 태도, 즉 그에 대한 우리의 태만과 무성의와 두려움과 무능력에 있다. 쾌적함에 대한 환상이 커질수록 불쾌한 것은 많아지고, 참을 수 없는 고통은 증식한다.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이 커질수록 삶은 견딜 수 없다. 균형 잡힌 신체, 안정된 삶, 질서가 잘 잡힌 사회, 조화로운 관계 등, 우리를 쾌적하게 해줄 것 같은 막연한 이상이 지나치게 커질수록 화장의 마술은 더욱 강력한 효과를 발휘하게 될 것이다. 문제는 아름다움이 아니다. 실상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그것을 수용하는 태도. 우리 자신의 속임수와 환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은 그 뿐이다.
지아 장커(賈樟柯)의 영화 "Still Life (三峽好人)"(2006)에 펼쳐진 광경들은 마치 외계인이 하늘에서 내려다보듯, 낯선 나그네가 아직 도착하지 않은 마을을 산마루에서 관망하듯, 마천루-쇼트라고 이름 붙일만한 전체성이 깊숙히 배어 있다. 사실주의적 관점에서 볼때, 막노동꾼인 한샨밍이 높은 곳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장면은 놀랍기 그지 없다. 마치 역사적 운명을 떠맡은 한 전사의 고뇌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역사적 존재의 역설이란 바로 그가 민중들 속에 있으면서도 동시에 그들로부터 우뚝 솟아 마천루의 지각을 소유해야 한다는 점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에는 이상망측한 장면이 두 개가 나온다. 처음엔 야릇한 빛을 내면서 하늘로 날아다니는 괴물체가 등장한다. 이 괴물체는 샨밍의 에피소드에서 센홍의 에피소드로 첫 번째 전환되는 순간에 나온다. 그것이 날아다니면서 서로 무관한 두 주인공이 마치 같은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임을 말해주는 것처럼 말이다. 하늘 높이 치솟은 십자가라든가, 허공에서 펄럭이는 국기를 바라보며 하나의 시간과 하나의 공간을 상상하듯, 관객은 그 괴물체를 통해 서로 떨어진 인물들이 함께 살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무관하게 살아간다. 두번째는 센홍의 에피소드에서 나온다. 센홍이 남편을 찾아와 잠시 동안 그의 친구집에 머무는데, 근처의 산 위에 우뚝 서 있었던 특이하게 생긴 철탑이 갑자기 불을 내뿜으며 하늘로 날아가는 장면이다.
원래 지아장커의 이 작품은 도큐멘타리 요소가 아주 짙은 사실주의적 분위기의 작품이다(이미 싼샤(三峽)의 댐건설과 중국 노동자들에관한 도큐멘타리 "동(東)"이 만들어졌는데, 이 작품과 연관이 깊다). 자연을 파괴하며 개발 이데올로기에 흠뻑 패인 중국의 자본주의, 그리고 그 체제의 음영 아래 벌레들처럼 이리저리 이사를 다니며, 헤어진 가족과 그리운 짝을 찾아 헤메는 군상들, 남편을 찾는 일에 피로해 끊임없이 물을 먹어대는 센홍, 아내와 딸 생각에 혹은 아슬아슬한 광경들에 말문이 막힌 샨밍, 혼자 남아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는 군상들, . . . 어느모로 보나 사회 비판적 요소가 짙은, 혹은 개인의 삶에 관한 사실주의 작품이다. 실제로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이 사회적 관계를 다룬다(<소무>에서의 소매치기, <플랫폼>에서의 가무단, <임소요>에서의 실업자 등).

그런데 그 두 괴물체(아마도 UFO)가 등장하면서, 관객의 그러한 믿음은 불안해진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이 영화를 SF 전쟁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감독은 무협물을 의도했다고 한다). 산업사회 이전의 산과 자연 속에 난데 없이 떨어져버린 첨단 기계문명(컴퓨터, 핸드폰, 기중기 . . .), 더 이상 인간의 주거공간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다른 무엇인가를 위해 세워지는 듯한 거대한 건설물들, 시야를 압도하는 기계 덩어리들, 알 수 없는 존재의 어떤 엄청난 음모가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생기를 잃은 노예나 벌레처럼 맴도는 슬픈 얼굴의 인간들, 유난히 땀을 흘려 구릿빛 피부를 하고 먼 곳을 주시하는 멍한 눈빛들, . . .

그들은 외계의 어떤 존재가 만들어 놓은 낯선 건축물들 위에서, 아래에서, 또 그 안에서, 그것들이 한꺼번에 무너지거나 세워지는 것을 무심히 바라보며 서있다. 샨밍과 센홍의 멍해진 동공처럼, UFO를 보고도 놀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지아장커는 어느 인터뷰에서, 난데 없이 등장하는 초현실적 UFO를 통해 인물들의 고독한 감정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지만(아마도 Michelangelo Antonioni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특히 그의 영화 L'eclisse에서의 그 텅빈 아파트단지 장면들이 그렇다), 그건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고다르(Jean Luc Godard)의 "Alphaville"과 마찬가지로, SF라고 불러왔던 환타지 계열은 실은 사실주의의 한 갈래였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전사의 탄생이 아닐까? 현재의 중국이 아니라, 미래 사회의 태동 말이다.
소설 좋아하는 사람들은 잘 알겠지만, Issac Ashimove라는 작가가 있다. 과학소설도 쓰고 영화 시나리오도 쓰고 . . . 과학이나 미래사회와 관련하여 이런 저런 글을 쓰는 사람이다. 얼마 전에 우리나라 극장에서 개봉한 영화 <아이로봇>(I Robot)도 그가 쓴 시나리오이다. 나는 사실은 그 사람에 대해 잘 모른다. 얼굴도 본적이 없고, 소설을 꼼꼼히 읽어본 적도 없다. 이름만 들어서 알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얼마 전 학기 중에 그 소설가가 쓴 아주 짧은 단편(?) 하나를 읽은 적이 있다. 수업시간에 영어로 된 글을 학생들에게 읽혀야 했고, 이것저것 꼼꼼히 읽고 고르는 것이 좀 번거로운 것 같아, 영어 교재에 포함된 글 하나를 선택하였는데, 바로 그의 글이었다. 제목은 "The Fun They Had"였고, 에피소드 형식이었다. 완결된 작품이 아니라 <Earth Is Room Enough>이라는 다른 작품의 일부였으므로, 장편소설처럼 결말의 쾌감을 주는 글은 아니었다.
이 에피소드는 Margie라는 10대 소녀가 2157년 5월 17일자 일기(日記)에 기록한 내용을 중심으로 쓰인 것이다. 그녀의 동네친구 Tommy는 옛날 조상들이 읽었던 "진짜 책(real book)", 즉 현재 우리가 읽는 종이책을 발견하였고, Margie와 Tommy는 오래된 그 책에 호기심이 생겼다. 이들은 옛날의 종이책과 현재 자신들이 읽는 전자책의 차이(종이책에는 똑같은 내용이 항상 붙어있고, 전자책에 쓰인 내용은 변하고 움직인다는 등의 차이)를, 그리고 나아가 옛날 학교와 자신들의 현재 학교를 비교하였다. 이후 학교에 관한 이야기가 계속 된다: Margie는 미래사회에 보편적인 형태가 될 가택교육을 받고 있으며, 그녀의 선생님은 컴퓨터이며,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진 컴퓨터 학습 과정에 따라 초등, 중등, 고등교육을 이수하고 있으며, 며칠 전 프로그램에 이상이 생겨 수리통을 맨 장학사(프로그램 수리 기술자)가 다녀갔으며, Margie는 매일 똑같이 컴퓨터 앞에 앉아 기계의 지시에 따라 지겹게 학습하고 있으며, 그래서 장학사가 미웠으며, 다시 되돌아온 선생님(컴퓨터)이 싫어졌으며, . . . 등등. 이 에피소드의 초반부는 Margie가 사는 시대의 책과 교육 그리고 아이들의 학교생활(집안에서 학습할 수 있도록 마련된 schoolroom 생활) 등이 간단한 대화들을 통해 암시되고 있다.
Margie는 진짜 책에 적힌 그 옛날의 학교생활에 대해 호기심은 있었지만, 몇 가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컴퓨터(regular teacher)보다 똑똑하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학생들을 가르칠까! 어떻게 아이들이 한 장소에 모여 수업을 듣고 생활을 할 수가 있을까! 어떻게 같은 내용을 똑같이 받아 적고 배울 수가 있을까! 잠시 후 수업시간이 되자, 그녀의 어머니가 Margie를 재촉했다. 그녀는 자신만을 위해 마련된 컴퓨터 선생님 앞에 다시 앉아, 실수 하나 없이 되뇌는 반복적인 지시를 따라 분수덧셈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그녀는 한숨을 쉬며 잠깐 동안 그 옛날 학교를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는 부러워하는 듯이 그 학교를 상상했다. 이 글은 다음과 같이 단편소설에서나 나올법한 구절로 끝을 맺는다: "마지는 그 아이들이 학교생활을 얼마나 좋아했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그녀는 그 아이들이 누렸을 그 재미(the fun they had)를 생각하고 있었다."
별로 재미없는 글이었다. 이 글을 선택한 것을 후회하였다. 어떻게 이 지루한 내용을 가지고 수업을 할까! 무슨 얘기를 해야 할까! 미래의 교육과 현재의 교육? 미래의 학교를 언급하면서 현재의 학교를 비판해볼까? 아니면 현재 교육의 긍정적인 면을 들어서 미래에 있을 법한 잘못된 교육을 유추해볼까? 컴퓨터 교육이라는 것이 과연 옳은 길일까? 컴퓨터가 할 수 없는 더 중요한 것을 가르치는 것이 교육의 목표라고 말해볼까? 언어교육이나 컴퓨터 교육은 사회에 잘 적응하고 순응하는 인간을 만드는 좋은 장치라고 떠들어볼까? 이런 사회적인 주장을 할라치면, 나는 너무 들뜨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자제해야 한다. 아직 애들인데. . . 또 아이들이 그러한 것들을 이해나 할까? 괜히 빈축만 사는 것 아닐까?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 . Margie와 Tommy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사는 애들일까? 또 요즘 애들은 도대체 무엇을 가장 좋아하는 것일까? 두뇌가 있기는 한 것일까? 말도 안 듣고, 공부도 하기 싫어하고, 내 얘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무슨 얘기를 해야 그 애들의 흥미를 끌 수가 있을까? 최근엔 강의평가도 무시할 수 없는 부담이 되고 있다. 애들을 완전히 잘못 가르치고 있는 거야! 자극이 없으면 거들떠도 안 보니 말이야! 개그맨이라도 되어야 할 판이다! 이게 무슨 교육인가? . . . 결국 아이들의 재미를 돋굴 능력이 없다면, 그들을 좀 진지한 상태에서 집중하도록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러려면 그들 스스로 다소 죄의식 같은 것을 갖게 해주어야 한다. 약간 심각한 표정으로, 너희들은 지금 성의 없이 학교생활을 하고 있다든지, 공부를 왜 그렇게 안 하느냐고, 교육에 대해서 너희들이 한 가지라도 생각이나 해 보았느냐고, 교육의 주체는 바로 너희들이다고, 그런데 스스로 노예상태를 자초하느냐고, Margie나 Tommy를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라고, . . . 등등, 무게를 실은 몇 가지 질문들과 명제들을 가지고 수업의 신성함을 그럭저럭 이용하면 될 것 같았다. 다소 어려운 숙제 하나를 내 주는 것도 잊지 말아야겠다.
생각이 이쯤에 이르고 나니,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강의 노트가 필요할 것 같았다. 서둘러서 컴퓨터 앞에 앉아, 교재의 내용에 맞게 다음과 같은 강의 노트를 단숨에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신이 나기까지 하였다.
소개: 이 글에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학생들에게 질문해보자.(미리 얘기를 해서 읽혀야겠다)
문단 1, 2, 표시부분 해석해주기 :
미래에 일어난 이야기, 책에 관한 . . . 미래에는 지금 우리가 보는 책을 "a real book"이라고 부른다는 점을 숙지시키자. 소설적 표현이다.
문단 3, 표시부분 해석해주기 : 옛날 책과 현대 책의 비교: 움직임/고정
옛날 책은 종이에 붙박여서 고정되어 있다고(stand still), . . . 반면에 요즘 책은 스크린 위에서 자신이 갈 길을, 가도록 예정 되어 있는 길을 움직이고(moving) 있다고, . . . 대표적인 예가 바로 하이퍼텍스트(Hypertext)일 것이다. Stuart Moulthrope이라는 사람이 만든 하이퍼텍스트에 접속해서 사이트를 직접 보여주자. http://iat.ubalt.edu/moulthrop/hypertexts/HGS/HGS064.html, . . . . 최근에 유행하는 Wiki도 역시 그 예를 들어보자. . . (파워포인트 필요함)
문단 4, 표시부분 해석해주기 : 책의 용량에 관하여
옛날 책은 글자들을 다 채운 채로 완결된 것이므로, 한번 읽고 나면 버린다. 그러나 텔레비전 스크린은 많은 책을 담고도, 다른 책을 더 실을 수가 있으므로, 버리지 않는다. 재수용할 수 있는 기능에 있어 옛날 책은 쓸모가 없다. 더구나 책들이 쌓이면 공간을 너무 많이 차지해서 문제이다. 이 모든 책들을 시디 몇 장에 구우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이사를 할라치면 책 옮기는 값이 거의 전체 이사비용을 차지한다. 책이 없으면 홀가분해 질 것 같다. 심지어 내 인생은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불행해진 것 같다(이런 이야기 하면 아이들이 웃어줄까? 사람들을 재밌게 하려면, 나 자신을 좀 비하시킬 필요가 있다). 책이 내게 준 것은 커다란 방을 얻어야 한다는 경제적 부담 외에는 그 무엇도 없는 것 같다. 미래의 책이 공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자료를 찾아 정리해서 읽혀야겠다.
문단 5 ∼ 문단 10
대화 내용이므로, . . . 생략 . . . 간단히 개요만 설명해주자.
문단 11 ∼ 문단 14 : Margie가 주로 어떻게 교육을 받고 있는가?
예로, 지리과목에 관한 모든 과정이 프로그램으로 입력되어 있다. 구체적으로 설명해 줄 것, . . . 우리는 어떻게 하고 있나? 예로, 내가 만들었던 사이버 강좌, . . . 프로그램 기술의 한계에 맞추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변형시켜야 했던 강좌내용, . . 컴퓨터를 통해 할 수 있는 학습이란, 혁명적인 기술이 등장하지 않는 한, . . . 프로그램화된 내용을 기계적으로 학습하는 것에 의존할 것이다. 또 프로그램의 궁극적인 목적은 효율성과 반복(이 둘은 결국 같은 것이지만)이므로, 한번만 쓰고 버리지는 않을 것이며, 아마 몇 세대에 걸쳐 동일한 교육 프로그램이 활용될 것이다. 미국식 교육이 이런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져 있다. 주어진 과제라든가, 전문적인 지식에 대한 훌륭한 기능인은 잘 만들 수 있지만, . . 창의력은 떨어지고, 임의의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은 부족할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경험한 결과 미국인 치고 멍청이가 아닌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었다. 현재 미국식 교육과, 미국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지적하면서 이 얘기를 확대해보자. 우리의 대학은 점점 미국식 교육을 따르고 있다. 순응적인 인간, 기능적인 인간, 전문가, . . . 등을 만들어내고 싶은 것이다. 이것은 기업이 요구하는 방향이기도 하다. 지금의 대학은 완전히 기업의 대학이 되었다. 예전의 대학은 다소 추상적이고 관념적이고 철학적인 것을 추구했다. 대학이 상아탑(象牙塔)이라고 했을 때의 상아탑은 예술 지상 주의적이고, 고고하고, 학자적이고, 세속적인 것에 관심이 없고, 현실 도피적이고, 이상주의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tour d'ivoire) . . 그러나 지금의 대학은 현실 도피적이 아니라, 현실 지향적, 오히려 솔선수범하여 앞서서 현실적 인간(즉 현실 순응적 인간)을 만들고 있다. 토플이나 토익의 좋은 점수를 획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 되었고, 학위를 따는 일이 학생의 관건이고, 취직시키는 일이 대학의 임무가 되었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 실업자가 많은지 모르겠다.(인문학이 취직도 안 되고, 점점 학교의 운영에서 뒷전에 밀리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기인한다. 우선적으로는 돈이 안 되기 때문이고, 취직이 안 되기 때문이고, 즉, 기업이 필요로 하는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고, 우리 자신이 이미 인문학적 삶으로부터 즉 상아탑과 관련한 삶으로부터 너무 많이 벗어났기 때문이다. 취업시키는 일이 학교의 임무인 것은 예전에 상업고등학교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었고, 학교의 목표가 취업이라는 것은 참 이상했었다. 지금은 대학이 상업학교가 된 것일까?) 그러다 보니 기업이 요구하는 인간교육이 필요하다. 기업이 요구하는 인간이란 어떤 인간인가? 기능인이다(이점을 강조하자. 하지만 너무 비판적인 어조를 강하게 해서는 반감만 살 것이니, 부드럽게 그러나 강하게). 프로그램화된 체계에 자신의 신체와 정신을 잘 적응시켜서,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소화해 내는 인간, . . 채플린의 <모던 타임스>의 예를 들어서 설명하자. 그 영화에는 돌아가는 콘베이어 벨트에 몸을 적응시키지 못해 안간힘을 쓰는 한 노동자가 나온다. 가려운 곳이 있지만 긁을 수가 없는 노동자, . . . 심지어는 기업이 팔기 위해 고안한, 먹여주는 기계에 몸을 맡겨야 하는 노동자가 등장, . . . 자본주의 사회는 최소의 노동력으로 최대의 생산을 추구하는 사회이다. 그러니 기계라든가, 컴퓨터라든가, 프로그램화된 효율성이 점점 더 강화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환경이다. 그런 사회가 되려면, 기계나 컴퓨터를 잘 다루는 사람들이 필요하고, 그 프로그램에 익숙한 인간을 만드는 일이 절실히 필요하다. 우리가 배우는 모든 언어들, . . 대학교육이 주로 언어교육에 치중하는 것(영어뿐만 아니라, 컴퓨터 언어, 등)은 적응된 인간을 만들기 위한 과정에 있기 때문이다. 지금 대학에 설치되어 있는 모든 컴퓨터, 학과에서 다루고 있는 정보사회에 관련된 문화와 코드들, . . 언어교육, . . . 학생들로 하여금 그러한 사회의 언어를 가르치는 것(Margie가 6살 때 배운 천공암호(a punch code)와 같은 것을 우리는 대학에서 배우고 있는 것이다), . . . 언어를 배우는 이유는? 창조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일차적인 목적은 바로 적응하기 위함이다. 영어를 거의 모국어처럼 배우려는 것은, 바로 영어를 쓰지 않으면 안 되는 환경에 적응하기 위함이다. 어떤 환경인가? 미국이 지배하는 환경, . . 혹은 19세기 이후 영국이라는 제국주의가 만들어 놓은 환경이다. . . 우리보다는 잘 사는 일본만 해도 얼마 전에는 영어를 많이 가르치지 않았다고 한다. 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미국이 지배하는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에(이런 정치적인 얘기까지 해야 할까? 학생들을 집중시키려면 다소간의 뜨거움이 필요하긴 하다), 우리는 그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영어를 배우고 있듯이, 인간의 노동력을 최소화시키는 사회에서 기업이 지배하는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이에 적응하여 잘 살기 위한 언어를 우리는 배우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컴퓨터 언어이다. 마우스 다루는 법도 일종의 언어이다. . . . 여기서는 홈스쿨이라는 것이 단순히 부모들의 취향에 의해, 혹은 낭만적인 선택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지만, 그것은 일종의 환상, . . 기업이 사회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컴퓨터 교육이나, 기계교육, 프로그램화된 효율적 교육 등은 필연적인 것이고, 학생들은 그런 교육을 받으면서, 배운 것 하나 밖에 할 줄 모르는, 편협하고 경직된 인간이 될 것이다. 자신들이 받고 있는 교육으로부터 다소 자유롭고, 거리를 두면서, 비판할 줄 아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자(이 부분에서는 그들을 똑바로 보면서 말하자). 이쯤에서 두 부류의 지식인에 대해 말해보자: 기능적 지식인과 비판적 지식인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자 . . . Margie가 안고 있는 문제, 그 아이가 학교를 싫어하는 것, . . . 바로 아직도 어린이에 불과한 말랑말랑한 사람인데도, 점점 뻣뻣하게 굳어가고 있는 자신의 몸에 대한 짜증과 냉소일 것이다. 기지개를 좀 피게 해 주어야 한다.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rough and tumble의 삶을 살게 해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로 편협한 인간이 된다. 성적 떨어졌다고 자살하는 나약한 인간이 되거나, 자신의 즐거움을 스스로 만들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혹은 컴퓨터 매체에 기대는 무능한 인간이 된다. 현재 총학생회 구호. . ."타성을 넘어. . ."를 인용하면서 얘기해보자 . . . 학교 당사자들이니 무슨 의미인지 잘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숙지시키자.
문단 15∼32 : 공동체 생활의 결핍에 관한 문제 / 학원과 학교의 차이?
학원과 학교의 차이가 무엇인가? 우선 Margie는 인간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teacher는 여기서 인간이 아니다. 책을 제본하는 것이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옛날에는 수서본(manuscript)으로 만들었다) 제본 기계이듯이, Margie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아이를 가르치고 질문하고 평가하는 것은 나와 같은 사람이 아니라, 하드디스크나 스크린 같은 것이다. 이미 말했듯이, 효율성이나 전문지식을 배우는 것이 모든 학교 교육의 요체라고 간주되는 사회에서, 인간과의 공동체 생활이나 인간관계는 교육의 본질을 이루지 못한다. 학원과 학교의 차이를 보면 이해가 갈 것이다. 학원이란 특정한 전문지식을 빠르게 얻기 위해 (필요하다면 단기 속성으로) 가는 곳이다. 정보와 전문지식(즉 적응하기 위한 언어)을 습득하는 것이 학원의 궁극적 목적, . . 그러다 보니, 학원생들은 다른 친구가 불필요 하다, . . 그 지식을 전수해주는 강사나 프로그램만 필요한 것이다, . . 원생들은 결코 서로 어울리거나 , . 심지어 밥조차 함께 먹지 않는다. . . 냉랭한 분위기 속에서, . . 주변의 사람들이 귀찮은 존재, 성가신 존재이다. Margie의 경우엔 이보다 더 나아가서, 인간이 무엇을 가르칠 수 있다는 것조차 믿지 않고 있으며, 심지어 인간은 무능해서 teacher 즉 기계보다 열등한 존재라고 믿고 있다. 인간은 두려운 존재이기까지 하다(그녀는 옛날식의 교육에서 인간선생님이 자신의 방으로 들어와 있는 것을 아주 이상하게 생각한다). 정보습득사회, 기능인을 만드는 사회, 프로그램에 익숙한 사회, 소외된 사회 속에서, 인간들은 서로가 낯선 존재가 된다. 낯선 사람이 자신의 집에 들어오는 것이 싫다고 말하지 않는가? 이런 사회에서는 사람이 가장 무섭다. . . . 그러다 보니, 한 곳에서 함께 무엇인가 같은 것을 배운다는 것이 낯설다, . . 각자만의 방에 들어앉아, . . 자신만의 프로그램에 젖어드는 학생들. . . 고립된 아이들, . . . 물론, 각자의 개성에 맞는 교육이 필요하긴 하다. 29번 문단에서 하는 말이 일견 필요하기는 하다. 지금의 학교는 학생들을 너무 마름질하려고 한다. 동질적인 인간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18문단부터 보면, Margie는 인간이 무엇을 가르치고, 인간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배운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왜일까? 학생들에게 질문해보자.
Reading 1과 Reading 2를 모두 종합해서, . .
(1) home schooling의 가장 큰 장점은?
학교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 친구들과의 갈등 등을 피할 수 있다(reading 1의 2번째 문단)
다양한 정보매체를 활용할 수 있어, 전통 교육이 수용할 수 없는 다양성을 꾀할 수 있다(reading 1의 3, 4문단)
교육의 유연성(flexibility)을 확보할 수 있어서, 학생의 수준이나 특성에 맞는 단계 등을 조절할 수 있다(reading 1의 7문단)
전통 학교 교육은 배움을 훈육(길들여지기)의 과정으로 만든 측면이 많은데, 이를 어느 정도는 탈피할 수가 있을 것이다(예를 들어, reading 1의 6문단에서 project 부분)
강요된 교육, 즉 동질화된 배움을 피할 수 있다. (reading 2의 29문단)
(2) home schooling의 가장 큰 문제?
부모와 오래 있게 되어 독립심을 없앨 수 있다는 것과, 가정 중심의 교육이 이루어지므로, 학생이 고립될 수 있고, 심리적으로 위축될 수가 있다.(reading1의 8문단 초반부분)
학생이 제대로 배우고 평가를 받았는지 확인할 수 있는 공인된 자격의 문제가 있을 수 있다(reading1의 8문단에서 중간 부분). 그러나 이 문제는 기술적으로 해결가능성이 있음.
학교 경험을 통해, 사회를 배우고 공동체 생활의 규범이나 윤리를 익힐 수 있는 기회가 상실될 수 있다.(reading1의 8문단 하단부분) 그렇게 됨으로써, 학교에 다니는 재미까지도 사라질 수 있다. Margie가 안고 있는 문제가 바로 이점일 것이다.
. . . 등등
이렇게 두서없는 메모들을 적어놓고, 마음속에 하나씩 정리를 하였다. 대충 수업의 윤곽이 보였다. 이제 수업용 게시판에 들어가 수업 전에 해 와야 할 숙제만 내주면 준비는 그럭저럭 끝날 것 같다. 숙제를 내 주기 위해 깊이 고민하지는 않았다. 글 전체를 읽고 그 제목인 "The fun they had"의 의미에 대해, 즉 작품 맨 나중에 Margie가 생각한 그 재미, 옛날 학생들이 가졌을 그 재미가 무엇인지, A4 한 장 내지 두 장 정도 길이의 에세이를 써서 가져오라고 주문하였다. 그리고 나서 생각해보니, 꽤 괜찮은 숙제였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자신들의 학교생활에 관한 에세이가 될 테니 말이다. 나 역시 그 재미에 대해 생각을 해 보았지만, 사실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다른 곳에 있었다. 미래사회에 도래할 컴퓨터화된 교육과, 그 교육을 받은 학생들의 행동 성향, . . . 사유패턴, . . . 등, 교육전반에 관한 이론적인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 방대한 견해와 이론들을 모두 정리할 수는 없었으므로, 또 교육이 나의 궁극적인 관심사는 아니었으므로, 내가 알고 있었거나 평소에 생각했던 몇 가지 어설픈 개념어들을 주어모아 수업시간에 활용할 참이었다. 그러고 나니 모든 것이 완벽해 보였다. 그러나 역시 잘 모르는 분야를 언급하기 위해 필요한 자료들을 뒤지는 것은 힘든 일이었고, 무엇보다도 얘깃거리를 만들 수가 없어 고역이었다. 앞으로 이런 주제는 가급적이면 자제해야 겠다.
수업은 그럭저럭 끝났다. 따지고 보면 상식을 넘지 않는 수준의 언변이었고, 별 말도 하지 못한 채, 말도 안 되는 교육철학(나의 전공도 아니고, 그 주제에 대해 별로 많은 생각도 해보지 않은. . . )을 들먹이며 그럭저럭 시간을 때운 셈이다. "철학"이나 "교육" 혹은 "미국"과 같은 용어들을 자주 사용하면, 애 어른 할 것 없이 귀를 쫑긋한다. 흥미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왠지 알아야할 것 같은 의무감, 모르면 지식집단의 대열에서 뒤쳐질 것 같은 불안감, . . . 같은 이유 때문이다. 우리는 아주 어릴 적부터 그렇게 배워왔고, 또 그렇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인생의 무게를 얻기 위한 한 방식이다.
숙제를 걷어 한 줌 쥐고 내 자리로 돌아 왔다. 출석부에 체크하기 위해 한두 개를 읽었다. 예상대로 특별한 에세이는 보이지 않았다. 내가 암시한 대로, 혹은 내가 그동안 가르쳐 준대로 잘 정리가 된 에세이였다. 학생들은 내가 아무리 복잡하게 말을 해도, 내 강의를 몇 번 듣고 나면,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무엇을 좋은 가치로 생각하고 나쁜 가치로 생각하는지, 무슨 대답을 해야 정답이 되는지, 심지어는 내가 정치적으로 좌측에 속하는지 우측에 속하는지조차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인지 간혹 정치적인 주제를 언급할 때면, 이건 무슨 수업시간이 궐기 대회장을 방불케 하는 경우도 있다. 그들은 잘 알지 못하면서도 함께 흥분하고 동요하는 법을 오래전부터 배운다. 어쨌든 학생들은 학기 초반에 이미 분위기 파악을 해두고 시작한다. 수업이 편해지기 때문이다.
이것저것 읽다가 중간쯤에 끼어 있는 한 장짜리 에세이가 눈에 띄었다. 인쇄한 것이 아니라 손으로 직접 쓴 것이었고, 군데군데 수정 화이트(correction pen) 자국이 선명하게 보였다. 아주 잘 쓴 글은 아니었지만, 마지막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Margie가 살고 있는 시대에는 학교라는 것이 따로 없고 각자가 집에서 컴퓨터를 이용해 공부한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 학교의 여러 특성 중 "함께"라는 것이 그녀에게 무엇보다도 신선하고 재미있게 다가왔을 것이다. 함께 함으로써 가질 수 있는 재미들, 그것들이 Margie가 상상한 옛날 학교의 즐거움이 아니었을까? 몇 가지 예를 들어 보자면, 동일한 내용의 수업을 받기 때문에 부여되는 숙제도 같을 것이다. 그러므로 친구들의 숙제를 베낄 수도 있을 것이고, . . . (생략) . . . 또한 선생님이 인간이기 때문에 컴퓨터와는 달리 실수 하는 경우도 일어날 것이다. 짭짤한 재미이다. 수업시간 중에 친구들과 떠들며 장난칠 수도 있을 것이고, 점심시간에 도시락을 먹는 일도, 몰래 잠자는 일도, 옆 친구에게 쪽지를 보내는 일도, . . . Margie가 상상했을 과거 학교의 즐거움들일 것이다. . . . "
그 에세이는 나를 놀라게 했다. 점심을 먹으며 한동안 그 생각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저 평범한 글에서 내가 놀란 것이 무엇이었는지는 금 새 알아차릴 수 없었다. 친구와 얘기를 하는 동안에도, 내 마음은 그 에세이를 생각하고 있었다. 글을 쓴 학생의 얼굴도 생각이 났다. 놀라움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근본적으로 대답할 수는 없었지만, 다만 한참이 되어서야 어렴풋이 느끼게 된 사실 하나가 있다. 수업을 잘 하기 위해 Margie의 이야기를 정리해가며 거의 한 나절을 고민했던 내 노력은, 한 가닥 깃털에 짓눌린 바위처럼, 저 가벼운 에세이에 의해 무색해졌다는 사실이다. 너무나도 쉽게 세계에 접근하는, 또 본질에 종속되지 않는, 그렇기 때문에 가장 본질적인 것에 접근하는 저 아이들. 한참이 지나서 다시 교재를 뒤적여가면서 Margie의 에피소드를 읽어보았다. 그리고는 며칠 전만 해도 보이지 않던 구절, 대답도 몰랐으면서 학생들에게 내 주었던 그 숙제의 정확한 답이 될 만한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작가는 컴퓨터가 지시하는 분수덧셈 연습을 따라하는 그녀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마지는 한숨을 쉬며 따라 하였다. 그녀는 그 옛날 학교를 생각하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들이 어렸을 적에 다녔을 그 옛날학교를. 이웃에 사는 온 동네 애들이 모여서, 운동장에서 웃고 소리 지르고, 교실에 앉아 받아 적고, 방과 후엔 같이 집에 갔었을. 그들은 같은 것을 배웠기 때문에, 서로 숙제도 도와주고, 그에 대해 얘기도 했을 것이다."
그들은 내가 가지 못해 망설이거나, 찾지 못해 우물쭈물 거리는 것을 너무나도 쉽게 다가가고 찾는다. 바닷가에서 가장 돋보였던 그들의 젊음 탓일까? 바닷가에서 흠뻑 젖을 줄 아는 이들은 저들 밖에 없다. 물속에서 빠져나와 축축하면서도 파닥거리는 그들의 몸뚱아리는 항상 바다의 본질에 닿아있는 것만 같다. 거기엔 근처도 가보지 못한 나는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지며 수치감이 밀려왔다. 그리고 일종의 미안함 같은 것이 생겼다. 그 재기발랄하고 홀가분해 보이는 저들 앞에 서있는 나는 얼마나 무겁고, 꾀죄죄하고, 우중충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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