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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9/20 세이렌(Seiren), 즉 포스트모던 신화
  2. 2007/09/11 나의 선인장!
  3. 2007/09/10 여름 방학

사실은, 예술의 기능을 그 본질과 동일한 위상에 놓았던 브레히트(Bertolt Brecht)는, 한 희랍신화를 새로 번역하는 가운데 예술의 기능에 대한 그의 심중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었다. 바로 오디세우스(Odysseus)와 세이렌(Siren)의 한판 대결에 관한 그의 코멘트(혹은 의문)가 그것이다. 그의 의문은 아주 간단한데, 요점은 이러하다: 오디세우스는 거짓말쟁이가 아닐까? 세이렌이 그 매혹적인 노래를 불렀음에도 불구하고, 오디세우스가 그 유혹을 이겨냈다는 사실을 어떻게 믿을 수가 있겠는가? 세이렌은 죽었고, 선원들은 귀가 막혀 있었고, . . . 돛대에 사슬을 묶고 그녀들의 노래를 들었다고 주장한 것은 이제 오디세우스뿐이지 않은가? 그리고는 다음과 같은 코멘트를 잊지 않는다.

    이 천하 무적의, 닳고 닳은 여자들이 아무런 행동의 자유도 없는 사람들에게 정말 자기들의 예술을 낭비했을까? 그것이 바로 예술의 본질이란 말인가? 그래서 나는 오히려 그 마녀들이 뭔가 있는 힘을 다해 외치는 것처럼 뱃사람들이 본 것은, 실은 그녀들이 그 째째하고 소심한 촌놈에 대해 욕을 퍼부은 것이었으며, 우리의 주인공은 그래도 결국은 좀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짐짓 몸부림 친 것이었다고 믿고 싶다.(『상어가 사람이라면』, 한마당, 1993. pp.23-24)

결국은 예술의 기능에 관한 문제가 되겠지만("예술로 무엇을 할 것인가?"), 그보다도 우선 예술의 실현에 있어 그가 필요로 했던 것, 즉 예술의 조건은 바로 살아있는 관객이었던 것이다. 밀랍으로 틀어막아 아무것도 들을 수 없고, 쇠사슬로 몸을 묶어 소리 나는 쪽으로 접근할 수조차 없는 반수면 상태의 식물인간들에게 예술은 무슨 예술! 그래서 그는 무대 위에 끊임없이 낯선 장치들을 고안한다(중국 경극이나 스타니슬라프스키로부터 착안한, 행위의 분리, 대사의 인용, 인위적 연기나 제스처, 서사의 역사화 등). 그의 시도들을 현실과의 단절이라고 불러야 할지, 아니면 무디어진 지각과의 단절이라고 불러야 할지, 아니면 더 그럴 듯하게 무디어진 지각이 주조해낸 현실로부터의 단절이라고 불러야 할지. 어쨌든 어떤 경우든지, 그의 단절 프로젝트는 지각이든 현실이든, 그 도식으로부터의 깨어남이었고, 마치 하이든의 교향곡처럼, 수면상태의 관객을 깨우는 일이었다(마르크스주의자들은 언제나 잠이 들지! 혹은 그들의 관객은 언제까지 잠을 자고 있을지!). 알튀세(L. Althusser)의 술어를 빌자면, '다중적 모순으로 충만한 실재'로의 외출이랄까? 그것은 마치 빔 벤더스(Wim Wenders)가 『베를린 천사의 시(Der Himmel Ueber Berlin)』(1987)에서 보여주었듯이, 모순 없는 영원한 시간 속에 살던 천사 가브리엘이 인간이 된 바로 그 순간부터 직면해야 했던 충돌이라든가, 아니면 전혀 다른 맥락에서, 역시 빔 벤더스가 『사물의 상태(The State of things)』(1982)의 초반 시퀀스에서 보여 주었듯이, 감독의 "컷(Cut)" 소리가 들리는 순간, 모든 인물들과 스텝들이 텍스트 밖으로 빠져 나와, 냄새가 나고, 시야가 트이고, 모순으로 충만한 대기의 소란한 충돌소리가 들렸던 것과 정확히 같은 순간이었을 것이다. 브레히트의 말은 바로 예술이 그 순간을 열어 젖혀야 한다는 것이었다.(문학에서는 러시아의 형식주의자들이, 그리고 그 유명한 영화적 충돌의 신화를 만든 에이젠슈타인도 좋은 예가 될 것이다).

따라서 브레히트가 고전시학 혹은 모방시학에 가한 그 비판이란, 따지고 보면, 그것이 너무나 진부하다는 것, 카타르시스가 아니라 쏟아지는 하품과 그 찔끔거리는 눈물을 견딜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 지긋지긋한 현실을 무대 위에서도 보라고? 맙소사! 흉내 낼 것이 그렇게 없단 말인가? 그것은 자연의 실상이 아니라, 그 도식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 권력관계를 깨지 않고서는 실상에 도달할 수가 없는 거야! 그러려면 당신들의 그 몽롱한 상태로는 불가능해! 일어나라고! 일어나! 어쨌든 브레히트는 살아있는 관객이 필요했고, 상연도 하기 전에 예술이 떠맡은 임무, 즉 졸고 있는 관객을 깨우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그 임무가 예술의 본질이 되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그의 시대, 후기 공장 자본주의 시대에 예술이 처한 조건이었으며, 세이렌에 관한 브레히트의 정치-경제-예술론이 의미했던 바이다. 사실 그 때만 해도 희망은 있어 보였을 것이고, 심지어는 생산력의 최대화라고 하는 그 시대의 야심 혹은 적의 구호에 몸을 싣고, 승리감에 도취된 전진 퍼레이드에 동참하는 것도 적지 않은 즐거움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술의 본질이 그러한 임무에 있다면, 한 가지가 궁금해진다. 관객이 잠에서 깬다면, 즉 밀랍이 뚫리고 밧줄이 풀어져 행동의 자유가 생겨났다면, 예술은 그들에게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 실상, 살아서 저기에 저렇게 뻣뻣이 눈 부릅뜨고 깨어있는 관객이라면 굳이 예술이 필요할까? 그랬다면 예술은 그 기능과 본질을 달리해야 할 것이다. 브레히트 말대로 만일에 세이렌이 진정한 예술가였다면, 바로 그러한 과업, 저 무지한 뱃놈들을 좀 깨우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당시에 밀랍에 귀가 막힌 선원들이나, 우리 자신은 들은 바가 없으므로, 오디세우스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는데, 그의 말에 따르면, 세이렌은 실패했다. 노래가 쳐졌기 때문인지, 아니면 관객이 수면제를 먹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서 우리의 질문은 이것이다: 예술은 아무 문제가 없단 말인가?

카프카(F. Kafka)? 그는 물론 예술가이고(브레히트보다도 더), 전혀 다른 관점의 소유자이다. 브레히트는 카프카가 시대착오적이라고 말했지만, 그것은 카프가가 본질에 접근했기 때문에 그렇게 보였던 것이다. 본질(특히 시대를 초월한)이란 행동 속에서가 아니라 관조 속에서만 드러나기 마련이다. 카프카가 마르크스주의자들과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면, 바로 이 점일 것이다. 행동과 실천의 범주들 속에서 사유하는 정신은 카프카와 같은 식물학적 관점의 예술론이 변태스러워 보였을 것이고, 혹은 동물들의 울부짖음이나 식물들의 잠재적 운동처럼 지각이 전혀 불가능한 소리였을 것이고, 따라서 브레히트 자신의 야심찬 단절 프로젝트에는 아무런 쓸모가 없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카프카 역시 세이렌을 예술가로 생각한 것에는 이견이 없었다. 다만 그는 오디세우스가 세이렌의 노래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었던 것은 한줌의 밀랍과 한 다발의 밧줄이 아니라, 바로 그러한 유치한 수단을 가지고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는 단-순-진-무식에 있었다고 생각했다. 무엇이든 뚫어 버리는 세이렌의 노래를 듣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그 무엇으로도 당해낼 도리가 없는 교만, 자만심이라고. 브레히트 말마따나 노래를 부른 것이 아니라 욕을 해대고 있었는지(브레히트 자신의 욕이기도 한), 아니면 밀랍과 밧줄만을 꽉 움켜쥔 오디세우스의 도취된 자만 혹은 단호함에 말문이 막혀서인지(이렇게 놓고 보니 카프카 역시 브레히트와 그 다지 멀리 있지만은 않다), 어쨌든 세이렌은 노래를 부른 것이 아니라 침묵을 하고 있었다고. 오디세우스의 눈에 비친 그녀들이 "고개를 돌리고", "깊은 호흡을 내쉬며", "눈물이 고인 눈"과 "반쯤 열린 입을 통해" 아름다운 아리아를 부르고 있었던 것은, 승리감의 지속을 위해, 그 교만을 보증하기 위해, 그 판타지와 공모하여 자신의 시(視)-지각-기억이 만들어낸 어떤 환각이 아니었을까?

예술가는 침묵하는 존재이다. 심지어 그가 노래를 부르고, 문장을 지으며, 표현을 하는 동안에도, 그의 본질은 언제나 침묵 속에 있다. 교만에 빠진 우리는 침묵을 바라보며 성급해지고, 그러다가 감춰놓았던 것을 우리 스스로 폭로해 버리고, 석연찮은 승리감으로 주춤해 한다. 그렇게 침묵 속에는 교만한 정신의 생장과 소멸의 드라마가 있다. 무서운 것은 세이렌의 노래가 아니다. 소수자(minor)와 마찬가지로 예술가의 언어는 바로 침묵이다―가령, 테오 앙겔로풀로스(Theo Angelopoulos)가 <울부짖는 초원(Trilogy: The Weeping Meadow)>에서 보여주고자 했던 것, 바로 소수자의 침묵과 아코디언 연주의 상동관계처럼. 그 침묵의 소리가 단-순-진-무식이나 권력에 미약하나마 흠집을 내고 해를 가했다면, 그것은 대기에 퍼진 어떤 불안 때문일 것이다. 세이렌은 침묵을 들을 수 없는 교만한 정신의 소유자를 어떻게 대했는가?

    ". . . 그 섬뜩한 머리카락을 온통 바람결에 나부끼게 했고, 바위 위에서 발톱을 한껏 드러내놓고 힘을 주고 있었다. 그들은 더 이상 유혹하려 하지 않았다. 다만 오디세우스의 커다란 두 눈이 뿜는 빛을 될 수 있는 한 오랫동안 놓치지 않으려고 했다."(『변신(카프카단편전집1)』. 솔 출판사, 2003. p575.)

그러나 이제 정신을 차리고 우리의 얘기로 돌아와서. 우리의 무대 위에 서 있는 예술이란 과연 어떤 예술이란 말인가? 브레히트가 생각했듯이, 잠든 관객을 깨우는 예술? 아니면 카프카가 보았듯이, 식물과도 같은 침묵의 운동 속에서, 권력과 체계와 그 교만을 또렷이 주시하는 예술? 우리가 처한 실상에 따라, 나는 이렇게 말해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세이렌이 실패를 했다면, 그것은 뱃사람들의 게으름 때문이 아니었다고. 그들은 죽은 것도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잠든 것도 아니었다고. 교만은 더욱 아니었다고. 그와는 반대로 귀를 틀어막고, 몸을 칭칭 감아, 화려하고도 요란한 유혹들을 거부했던 것이라고. 화끈한 도시의 플레이보이가 유혹에 취해 한판 멋지게 놀아 보려다, 빈 주머니로 머리를 쭈뼛거리며 나오지 않으려면, 바로 저러한 결연한 단-순-진-무식이 아니면 안 된다고.

브레히트의 주문과는 달리, 우리 사회에서 살아있다는 것은, 오히려 아무 일도 안 하고 버티는 일, 귓구멍에 밀랍이 아니라 시멘트를 발라서라도, 그 유혹들을 듣지 않는 일이 아닐까? 수렁에 빠진 뮤즈의 딸 세이렌의 노래는 예술이 아니라, 바로 딴따라였다는 것! 그래서 그녀들은 더 이상 가여운 요제피나(Josephina)라든가 죽어가는 단식광대가 아니라, 대머리에 배 나온 율리시스(Leopold Bloom)가 드나들던 Ormond Bar에서 호객을 하며, 손님을 위해 젓가락 아니 포크와 나이프를 두드리며 몽롱한 노래들을 반복해서 불렀던 호스티스 미나(Mina Kennedy)와 리디아(Lydia Douce)였다는 것! 오디세우스의 그 단호함(그는 집에 가서 빈대떡을 붙여먹고 싶었던 것이다)에 좌절했던 것은, 그녀의 예술혼의 좌절이 아니라, 호객의 실패였다는 것! 더 이상 구매자가 없어, 더 이상 돈벌이가 되지 않아, 굶어 죽어가며 화장한 얼굴이 추해질까 봐 자살한 것은 아닐까? 소비유혹('당신은 특별한 사람입니다!'), 욕망의 조작과 단일화('삶을 드립니다!', '아름다운 세상!', '편리한 사회!', '언제 어디서나 누구든지!'), 그리고는 결국 다양성의 부정, . . . 이러한 것들이 바로 소비사회의 음모이고, 이 음모 속에서는 구매만 잘하는 관객이면 만사가 오케이! 아니면, 보다 고급스러운 취향을 선택할 줄 아는 관객, 그래서 보다 부가가치가 높은, 이윤이 높은 상품을 구매할 만큼은 깨어있는 존재, 한마디로 말해 도시적 취향의 세련된 관객이 필요한 것이다. 고다르(Jean Luc Godard)가 자신의 영화 『카르멘(Pre'nome Carmen)』에서 보여 주려고 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카르멘이라는 여인이 가진 아름다움의 바로 그 현대적 실체! 다시 말해 매디슨 애비뉴(Madison Avenue)의 끔찍하고도 소름 끼칠 만큼 정교한 심리학과 그 정신조작기술(psychic technology)에 의해 서서히 우리에게 역하(subliminal) 이식되고 있는, 그 진부하고도 판에 박힌 모델, 그리고 그 아름다움의 실체! 눈을 보지 마라! 걸려든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두 눈을 똑바로 떠서, 그 상투적 아름다움에 가려진 썩어가는 속살을 보는 일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반수면 상태의 우리를 홀리고 있는, 더욱 더 그 진부함의 황홀경에 빠지게 하는 눈을 쳐다보지 않는 것이 아닐까?

우리의 시대에 브레히트의 바램은 정말로 터무니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공장 자본주의가 주류를 이루던 그의 세대는, 우리처럼 쇼핑몰 자본주의를 이해하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다소 비관적인 소리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감독의 컷 소리가 우리를 영화 밖으로 나가게 해주지는 못했던 것이다. 얼핏 보기엔 이사야의 예언과 비슷하게(실은 전혀 다른 차원에서), 바빌로니아 카페 앞에서 도깨비처럼 화장한 세이렌들의 춤판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차라리 영화보다도 더 영화적인 현실, 더 이상 모순이란 존재하지 않는, 따라서 충돌소리조차 들을 수 없는 현실이 촬영로케를 빠져나오면 찬란하게 펼쳐진다(백화점, 쇼우 윈도우, TV, 쇼핑몰, . . .그리고 무엇보다도 조화의 판타지를 내면에 아로새기는 훈련장, 학교!). 예술에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살아 있는 관객이 없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예술 자체의 딴따라 기질이 아닐까? 대중문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보다도 더 포퓰러한, 고급의 탈을 쓴 딴따라를 말하는 것이다. 그들은 이제 생포되어 오히려 선봉이 되었다. 심하게 말하자면, 총알받이가 되어, 첨병이 되어,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난 것이다. 그렇다! 예술은 더 이상 살아있는 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잠든자! 더 정확히 말해 아무런 불평 없이 예술을 소비해줄 구매자를 필요로 한다. 관객의 고급스럽고 세련된 취향과, 그러한 관객을 양산하기 위해 이런 저런 교육이 필요해지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솔직히 말해 나는, 신장 개업집 앞에서 한 짐을 풀어놓고 풍선을 날려가며, 저것이 경찰차의 협박 사이렌인지, 구급차의 공포의 사이렌인지, 소방차의 야단법석 사이렌인지, 아니면 짐 모리슨(Jim Morrison)이 무대 위에서 딸딸이를 쳐가며 중얼거리던 최면의 싸이키델릭 사이렌인지, 도무지 분간이 되지 않는 요란한 사이렌을 울려가며, 배꼽을 드러내고, 어수선한 도시 한가운데 왠지 모를 황량함이 깔린 아스팔트 위에서, 도대체 저 아이들이 누구를 위해 저렇게 길거리에서 춤을 추고 있는 것인지, 자신을 위해서인지, 고객을 위해서인지, 업주를 위해서인지, 아니면 신-민족성을 위해서인지, 짐 모리슨을 위해서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도취된 표정과 몸부림으로 흔들고 있는 나이 어린 세이렌들과, 어떤 어떤 거대한 상인들에 고용되어(딴에는 계약이라는 이름으로), 판매량을 올리기 위해 떠들어대는 그들의 허풍과 과분한 찬사에 도취되어, 펜이나 붓을 휘저어대며, 문학상이나 비평가상이나 또 여타 무슨 무슨 상-수상-생산품을 제조해내는 자칭 뮤즈들과의 차이를, 나의 오성으로는 도저히 분간할 수가 없다.

카프카가 생각했던 침묵하는 예술가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 침묵을 들을 수 있는 경야(經夜)의 관객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차라리 아무것도 듣지 않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오로지 스켄들을 암묵적인 모토로 삼으며 아무 뜻도 없는 쓰레기 같은 수다로 인생을 허비하는, 뉴스나 미디어의 주체가 바라는 세계를 감사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것이 세이렌이라고 하는 포스트모던 신화에 관한, 비관적인, 그러나 실상의 지도이다.



<문예노트>
Posted by huun

논리학에서는 인과관계나 모순관계를 나타내는 접속사들―그러나, 그러므로 등―을 사용한다. 이 접속사들은 항들의 관계를 종속적인 것으로, 즉 관계의 원인을 항들 내부 속에서 찾는다. 가령, “A 그러므로 B”에서는 A가 B의 원인이 된다든지, “A 그러나 B”에서는 두 항이 투쟁하여 하나를 제거하려는 경향이 있다든지, 아니면 B가 A를 근거로 새로운 관점으로 이탈하거나 반대한다든지 하는 식이다. 어느 모로 보나 두 항의 관계의 원인은 둘 내부―두 항들 중 하나―에 있고, 힘의 관계가 권력적이거나 종속적인 구조를 갖는다. 들뢰즈(Gilles Deleuze)는 유럽식 특히 프랑스식 사유를 "하나의 점을 찍는 방식"이라고 말했다. 가령, 우리는 "비가 내린다" 혹은 "태양이 이글거린다"라고 말함으로써, 마치 "비"라든가, "태양"과 같은 하나의 점이 미리 존재하고, 그 점이 부슬부슬 내리거나 이글거리는 속성들을 소유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마치 손을 뻗으면 당장에라도 만질 수 있기라도 하듯. 선분은 점들의 집합이라고 생각하듯이 말이다. 그런 식으로 점을 찍고 나면 모든 술어적 관계들이 종속적으로 배열되어, 근원 또는 기원이 생기고, 제1원인이 탄생한다. 문장에서 주어가 술어들의 주체이고 세대주가 되듯이 말이다. 다수의 실질적 원인들을 거꾸로 뒤집어서, 그 결과를 맨 앞에 세우고는, 마치 그 결과가 원인인냥, 주인인냥, 전도된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거꾸로 내리는 비 혹은 타들어가는 태양이라도 된다는 듯이. 존재란 무엇인가? 자아인가? 감각인가? 물인가? 흙인가? 들뢰즈는 바로 이러한 종속적 사유를 관계판단의 논리로 은폐하는 영역이 바로 논리학이라고 말한다. 관계의 원인이 항들 내부에 배열되어, 하나가 다른 하나를 주관하거나, 제1의 원리가 되는 방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들뢰즈는 이러한 구조적 논리학을 넘어서 진정한 관계의 아상블라주를 위해 "등위접속사(그리고)"를 사용하라고 권한다. 등위접속사는 항들을 종속시키지 않고, 동등한 관계에서 공존하게 한다. 그것은 구조적 종속으로 관계를 판단하는 접속사가 아니라 파편들을 긍정하는 접속사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새롭게 등장하는 항들을 이전의 항에 대한(~ 에 의한, ~의) 관계로 배열하지 않기 때문이다. "A 그리고 B"에서는 관계의 원인이 항들 속에 있지 않다. 그 어느 누구도 제1원인이 되지 못하며, 다만 선후 관계 속에서 어느 것도 훼손시키지 않고, 공존 속에서 관계를 만들어낼 뿐이다. 그들의 관계는 관계하고 있는 항들 밖에 존재한다. 등위접속사 "그리고"는 미리 기획된 전체도 가지지 않고, 관계하고 있는 존재들을 종속시키지도 않고, 그들이 근접해 있거나, 그들 간에 선분이 그어짐으로써, 어떤 효과로서 전체가 발생한다. 이것이 바로 휘트먼(Walt Whiteman)의 "카탈로그"나 "행렬문장"과 같은 파편적 글쓰기가 예증해주고 있는 아상블라주(assemblage)이다. 그것은 하나이면서도 다수이고 다수이면서도 하나인, 결코 하나로 붙일 수 없는 것임에도 하나의 효과를 내고 있는 엠마(Emma)의 눈과도 같다.

그건 그렇다치고, 언젠가 내가 노트에 메모한 내용 중에, 바로 저 등위접속사를 "긍정의 접속사"라고 적으며, 그 예로 괄호 속에 이렇게 적은 것이 눈에 띄었다: "나 그리고 선인장!, 나의 선인장!" . . . 앞에 것은 이해가 되는데, "나의 선인장"은 왜 적었을까? 소유격 아닌가? 선인장은 나의 소유물이고, 나는 선인장의 주인이 아닌가? 긍정적 관계가 아니지 않은가?

지금 생각해보니, 아마도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며 저 메모를 했을 것 같다. 나는 물론 선인장을 소유하고 있다. 내가(더 정확히는 친구가) 비용을 지불하고 사들였기 때문에, 저 선인장은 내 소유로 된 방에 귀속되어 있고, 우리는 법적인 질서 혹은 여타 형태의 사회적 질서 속에서 소유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선인장의 존재의 원인은 아니지 않은가? 물이 컵에 담겨 있다고 해서, 컵이 물의 존재의 원인이 아니듯, 관계의 위계를 표상(representation)하는 종속이나 소유 형식이 관계 자체의 본질은 아니지 않은가? 오히려 자연 안의 모든 관계는 본질적으로 이미 긍정의 접속사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스피노자의 능산적 자연처럼, 자연은 다수의 종속적 관계 속에서도 여전히 하나의 공존의 관계가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나의 선인장"은 "나 그리고 선인장"이라는 긍정의 관계 위에서만 성립가능한 표상적 관계이다.

Posted by huun

옷을 갈아입는 바람에 신분증을 놓고 왔다. 지하철을 타기 직전에 알고 있었지만, 다른 선생이 열람실 안에 있겠거니 생각을 하고 그냥 지하철을 타 버렸다. 그러나 평소 같았으면 항상 자리에 있던 선생이 오늘은 나오지 않았다. 불도 꺼져있었고, 문도 잠겨 있었다. 보안설정이 되어 있음을 알리는 파란불 두 개도 문 고리 옆에서 번쩍이고 있었다.

잠시 망설이고 있는데, 복도 저편에서 청소하는 아주머니가 보였다. 무슨 대청소를 하는 날이었는지, 교실에 있던 모든 의자와 책상들이 복도로 나와 있었고, 아주머니 몇 명은 이 교실 저 교실에서 덜그럭거리며 소리를 내고 있었다. 내 눈에 띈 그 아주머니는 잠시 나와서 쉬고 있는 듯 했다. 그녀는 양말을 벗은채 앞에 놓인 의자 위에 다리를 올려놓았다. 내가 다가가자, 무슨 일인지 궁금하다는 듯이,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저, . . . 401호 연구실이 문이 잠겨 있는데, . . ."
내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그녀는 바로 대답을 했다.
"저희는 몰라요. 들어갈 수가 없어요."
"아, . . 열 수 없으신가보죠?"
"네 . . ."
아침에 와 보면 항상 휴지통이 비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마도 착각을 한 것 같았다. 나는 더 할말이 없어, 보안요원을 떠올리며 돌아섰다. 걸어가고 있자니, 다소 멀어진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1층 관리실에 가보세요. 아마 거기서 열어줄 거예요."
나는 대꾸하지 않은 채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갔다.

1층 로비에는 흔히 보안요원이나 관리 아저씨가 앉아 있었지만, 지금은 한가한 방학중이어서인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뒤편으로 돌아가 관리실도 가 보았지만, 문이 잠긴채 아무도 없었다. 약간 난감했다. 기다려야 하나? 어딜 간 것일까? 곧 오긴 오는건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로비 저 쪽에서 낮익은 얼굴이 보였다. K교수였다. 나는 잠깐 머뭇거리며, 그녀에게 가서 인사를 해야할지 말아야 할지를 고민했다. 그녀는 학생처럼 캐쥬얼한 옷차림에 여행가방 같은 보따리를 들고는 문 밖으로 나가려는 듯 했다. 걸어가며 내 쪽을 쳐다본 것 같은데, 나를 알아보지는 못했다. 혹은 다들 그렇듯이, 보았지만 그냥 지나치고 싶었는지도.

수년 전에 잠깐 동안 함께 일을 하게되어 알게 된, 말하자면 선배였다. 일을 하는 동안은 편하게 지냈지만, 그녀가 교수가 된 이후로는 그렇지 못했다. 학교에서 우연히 마주친 적이 여러 번 있었는데, 만나면 서로 오랫 동안 머물러 있지는 않았다. 처음엔 4-5분 정도 서로의 근황을 물어보았고, 두 번째는 한 번 놀러오라는 인사만 하고는 바쁘게 지나가 버렸다. 세 번째는 눈 인사만 하고 지나쳤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하지만 왠지 이상하고도 불합리한 일들 중의 하나라는 생각이 그녀를 마주칠때면 들곤 했었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나는 천천히 그녀 쪽으로 다가갔고, 그녀 역시 천천히 문 밖 쪽으로 걸어갔다. 처음엔 그녀가 문 밖으로 나가면, 나도 그냥 돌아서려고 작정했다. 하지만 내 걸음이 좀 더 빨라서인지, 그녀의 걸음이 느려서인지, 이제는 작은 목소리로 부를 수 있을 만큼 가까이에 있었다. 나는 뒤에서 부르듯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그녀는 뒤를 돌아 나를 보았다. 의외라는 듯 미소를 지으며 나를 알아보았다.
"아,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어요?"
"저야 뭐, 그냥 그렇죠."
대답을 하는 동안 그녀의 목덜미와 어깨가 보였다. 목이 둥글게 라운드처리가 된 티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왼쪽 목 부분에는 악세서리처럼 작은 꼬리표 같은 것이 달려 있었다. 상표 이름이 영어로 씌여 있었지만, 너무 작아 읽을 수는 없었다. 그 꼬리표는 특별한 이유 없이 달려있는 헝겊 조각이었는데도, 자그마하게 박음질된 영어 문자들과 그 색깔 덕분에, 평범한 티셔츠에 불과한 그녀의 옷을 세련된 그 무엇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것을 잠시 바라보고 있는데, 그녀가 말했다.
"어제 잠을 잘 못 주무셨나봐요? 안색이 . . . "
간 밤에 잠이 오질 않아 아침까지 뒤척였고, 겨우 점심 때 즈음에 일어나 부랴부랴 나오는 터였다.
"아, 네, 좀 . . . 티가 많이 나나요?"
"얼굴에 씌여 있네요. . . . 그래, 요즘엔 어떻게 지내세요?"
언제나 그랬듯이 상냥한 목소리로 그녀가 물었다.
"그냥, 뭐, 이것저것 쓰고 있죠."
"뭘 쓰시고 계세요? 이론에 관한?"
"네, 그냥, 예술에 관한 논문을 쓰고 있어요. . . 선생님은 요즘에 어떻게 지내세요?"
나는 말을 돌려 그녀에게 물었다.
"저도 그냥 뭐 . . . "
"방학인데, 어디 안 가세요?"
"글쎄요, . . 어딜 갈 수가 없어요. 애가 이제 중3이 되어서, . . ."
"아, 네, . . "
"애들 대학 보내기가 너무 힘든가봐요?! 지금 중3인데도, 뒷바라지 할 것이 얼마나 많던지 . . . 도통 다른 일에 신경을 못쓰겠어요."
그녀는 이제 부조리한 교육의 가장 직접적인 당사자가 된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뭔가 힘을 줄 수 있는 말을 해주어야 겠다고 느꼈다. 그래서였는지 하마터면 대학과 교육제도에 관하여 험담까지 할 뻔 했다. 하지만 흔히 하는 따분한 멘트 말고, 우리 사이에 할 수 있는 말은 별로 없었다.
"그럼요, 말로 다 못하죠. 요즘엔 정말로 애들 대학 보내는 부모는 대단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이렇게 말하자, 처음엔 호기심을 가지며 듣는 듯 하더니, 금새 그녀의 안색이 약간 바뀌는 것 같았다. 내 말에 동의를 한 것인지, 아니면 너무나 진부한 대답이어서인지, 아니면 다른 어떤 생각이 들어서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그다지 흥미로운 대답을 듣지 못했기 때문이었을지도.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도 가지지 않은 내가, 그녀의 귀를 솔깃하게 해줄만한 코멘트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잠시라도 더 머물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떠나려는 듯 문 밖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대학을 보내는 거야 뭐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닌데, 좋은 대학 보내기가 . . ."
그리고는 가방을 어깨에 저며 메고는 문 고리를 잡고 서서히 밀기 시작했다. 어쨌든 만나서 반가웠다고, 또 나중에 보자고, 바빠서 이만, 그럼 잘 지내라는 등등의 메세지를 한꺼번에 담은 눈인사를 하며 그녀는 밖으로 나갔고, 나 역시 약간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다시 로비로 돌아와 관리실을 살폈다. 여전히 사람이 없었다. 살펴보니 로비 데스크 구석에 관리자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곧바로 나는 휴대폰을 들어 전화를 했다. 음악소리가 몇 초간 들리더니 그가 전화를 받았다. 그는 잠에서 깨어난 듯한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누구십니까?"
"네, 저, 401호 문이 잠겨서요."
"보안카드 없어요?"
"네, 오늘 안 가져왔거든요 . . ."
그는 잠시 생각을 하는 듯 하더니, 뭐라고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전화를 끊었다. 오겠다는 것인지, 전화가 그냥 끊어진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잠시 후 관리실 쪽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관리실 안 쪽에 또 하나의 방이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낮잠을 자고 있었던 듯 싶다. 가끔 로비에서 보았던 관리 아저씨였다. 그는 불만에 싸인 얼굴로 고개를 숙이며 내 쪽으로 걸어 나왔다.
"카드 가지고 다니세요."
그는 나즈막히, 그러나 짜증이 섞인 투로 말했다.
"네, 죄송합니다."
나는 짧게 대답을 하며 그를 따랐다. 어깨를 앞으로 많이 굽힌 50대 중년이었다. 아직도 잠에서 덜 깨어서인지, 오른쪽 손으로 히스테리컬하게 귀를 긁어가며 앞서가고 있었다. 나는 뒤를 따르며 붉게 물든 그의 목덜미와 주름을 보았다. 엘리베이터 앞에 섰을 때, 그는 잠에서 깨어나 정신이 맑아진 것 같았다. 무엇때문인지 방금 전과는 기분이 달라보였다. 심지어 그는 작게 휘파람까지 불며, 이쪽으로 탈까? 저쪽으로 탈까? 하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잠시 동안의 침묵이 흘렀다. 엘리베이터 문이 거울처럼 반사가 되어, 우리 두 사람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왔다. 각자 벽을 바라보며 눈을 부딛치지 않으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4층까지는 꽤 긴 시간이었다.

방으로 들어와 자리에 앉자마자 다시 일어섰다. 캐비넷에 있는 컴퓨터를 가져오기 위해서였다. 방을 나와 의자들이 널부러져 있는 복도를 걸어갔다. 캐비넷은 복도 끝에 있었고, 거기까지 가는 동안 교실에서 바쁘게 손 발을 놀리며 청소하는 아주머니들이 보였다. 내가 캐비넷을 열자마자 한 아주머니가 복도에 나와 나를 쳐다 보았다. 그녀는 개의치 않고 다시 가던 길을 가기 시작했다. 나는 컴퓨터를 빼 내어 손에 들고, 그녀가 가는 길을 따라 뒤에서 걷고 있었다. 곧 다른 아주머니가 교실에서 나와 내 뒤를 따르고 있었다. 복도에 있는 의자들 때문에 우리는 한 줄로 나란히 걸어야 했다. 그녀는 걸어가며 내 앞에 있는 아주머니에게 말을 걸었다.
"그 불 언니 혼자 달수 있겠어? 언니?"
그녀의 말은 누구나 사용하는 평범한 단어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앞에 가는 언니를 배려해주는 따뜻한 말이었지만, 크게 떠벌리는 듯한 목소리의 톤과, 째지는 듯한 말씨와 어조는 이상하게도 천박함이 배어있었다. 그녀는 "언니"라는 단어를 유난히 반복해서 발음함으로써, 그 언니에게 무엇인가를 전달하고 싶어 하는 듯 했다. 그러자 이에 화답하듯, 내 앞의 아주머니가 말했다.
"응, 괜찮아, 내가 충분히 달 수 있어."
언니의 대답 역시 아우의 걱정에 고마워하듯 따뜻한 말투를 자아내려는 듯 했다. 동료간의 우애를 보여주는, 그러나 약간은 과장된 그들의 그 짧은 대화는, 그들이 사력을 다해 힘겹게 끌고 가고 있는 수레처럼 느껴졌다. 한 번도 타 보지 못해 어색한, 아니 올라타기 위해 또 하나의 일을 해야하는 수레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들은 그 이상의 다른 것을 바라고 있지는 않아 보였다. 뒤에서 오던 아주머니가 물었다.
"그럼, 고기는 내가 가져갈까?"
"응, 그려, 고기하고, 술 두병하고 가져가."
"비닐에 싸야지?"
"아니, 싸지 말고 그냥 가져가도 돼."
"그래, 알았어, 빨리와."
그들은 일을 빨리 끝내고 파티라도 할 참인듯 했다. 아마도 언니는 마무리 일을 하러 가는 중이었고, 아우는 파티 준비를 위해 어딘가로 삼겹살 몇 점과 소주를 나를 것이다. 조용 하면서도 날렵한 걸음걸이로 각자가 할 일을 절도있게 분담하고 있는 모습이 대단히 진지해보였다. 큰 소리로 나눈 대화였지만, 마치 귀속말을 주고받으며, 아무도 모르게 군침도는 세기의 밀회라도 즐길 분위기였다. 나는 자리로 돌아와 컴퓨터를 연결하고 잠시 생각에 빠졌다. 알 수 없는 전율이 감돌았다.

Posted by hu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