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1'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08/01/30 빈곤의 이데올로기
  2. 2008/01/09 수축과 이완 (2)
  3. 2008/01/08 부연: 믿음과 공포
  4. 2008/01/08 공포영화에서의 테크놀러지와 믿음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1984』에서는 텔레-스크린(Tele-screen)이라는 매체가 나온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일종의 일방향 텔레비젼인데, 사람들은 텔레-스크린을 통해 당의 메시지를 시청하고, 당은 사람들에게(개인에게까지) 메시지를 하달한다. 식당에서 식사를 하든, 집에서 쉬든, 직장에서 일을 하든, 거리를 걷고 있든, 심지어 창밖을 바라보는 동안에도 오세아니아(Oceania) 국민들은 텔레-스크린을 경청해야만 한다. 잠을 자고 일어나면 텔레-스크린에 새겨진 빅부라더(Big Brother)의 눈이 사람들 각자를 주시하며 현실을 일깨운다. 텔레-스크린은 당 간부외에는 절대로 끄지도 켜지도 못하는 명령 그 자체이다. 그러니 윈스턴(Winston Smith)씨처럼 외화면(off-screen)으로 빠져서 기억에 사로잡히거나 자기만의 퇴폐적인 일기를 쓰거나 하는 일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된다. 사상범(thought criminal)이나 하는 짓이기 때문이다.


텔레-스크린이 실시간으로 보도하는 내용은 주로 반역자들의 처형에 대한 소식이나 오세아니아의 승전보--유라시아(Eurasia) 및 이스트아시아(Eastasia)와 벌이는 전쟁, 그리고 무엇보다도 끊임없이 증대하고 있는 재화 생산량이다. 다음주부터 쵸콜릿 배급량이 25그램으로 늘어난다든지, 녹음기 생산량이 14% 증가 했다든지, 기관총과 로켓포가 수백만정 생산되었다든지, 버터나 우유가 20% 더 증가했다든지, 생활수준이 10% 더 나아졌다든지 등등. 사람들은 보도가 나올 때마다 박수를 치고 환호성을 지르며, 뭔가 일이 되어가고 있구나! 잘살게 될거야! 고생한 보람이 있구나! 부강한 나라가 될거야! 더욱 더 충성해야 해! 라고 뿌듯해하며 입술을 치켜 올려(upper lips) 각오를 다진다. 면도날이 없어 일주일째 면도도 제대로 못하면서도 말이다. 진짜 설탕은 고사하고 그를 대신할 사카린조차 구할 수 없으면서도 말이다. 진짜 커피나 흰빵은 구경도 못해봤으면서도 말이다. 최소한 한번만이라도 스크린으로부터 벗어나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자신을 거리를 두고 생각했더라면, 텔레-스크린이 반복해서 전달하고 있는 내용이 언제나 실상과는 반대라는 사실을 충분히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영양상태가 좋지 않아 기운이 없어서인지, 일을 너무 열심히 해서 피로해서인지, 그도 아니면 너무나 영리해서들 그런지, 모두 모여 "2분간의 증오"시간에 "반역자에게 죽음을!" 우렁차게 외치는 힘 외에는, 그 누구도 목청과 핏대를 올릴 힘이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그 미래시대인 1984년을 한참이나 지나 더 미래적인 2010년의 SF적 시대를 코 앞에 바라보고 있는 우리의 실상은 어떠한가? 외견상 오웰이 예견했던 것과는 완전히 반대처럼 보인다. 쏟아지는 재화 속에서 허우적 거리는 현대인들, 길을 나서면 눈에 채이는 상품들, 당장에라도 손을 뻗어 주머니에 넣을수 있을만큼 실질적으로 진열된 식료품이며, 옷이며, 가전제품이며, . . .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상점과 쇼핑몰, 우리의 나약한 감각을 사정없이 폭격해대고 있는 울긋불긋한 물건들, 그리고 그 광고들, 심지어는 남아도는 식량--사카린이 아니라 진짜 설탕, 진짜 커피--을 주체할 수가 없어 매년 수천 수만톤이 바다에 버려지고, 따로 '비용을 들여' 세운 공장으로 운송되어 분해되고 해체되는 제고품들, 쓰레기 하치장에서 나뒹구는 물건들 조차 윈스턴이 신기하게 바라보던 고물상의 물건과는 비교도 안 될만큼 고급스러운 것들이 아닌가? 윈스턴 시대와는 다르게 우리는 질좋은 쓰레기들을 돈을 지불해가며 버리고 있을 정도이다. 텔레스크린이 반복했던 예언이 실현이라도 된 것 처럼.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가가호호 붙박혀 있는 우리의 텔레비젼은 텔레스크린과는 정 반대의 메시지를 우리에게 반복하고 있다. 경제, 실업, 파업, 성장, 민생, 안정, 질서, 교육, . . . 매일매일 반복되고 있는 그 모든 이슈들 속에 감추어진 한 가지 메시지를 찾으라면, 그것은 바로 궁핍과 빈곤의 미래가 아닌가? 우리는 항상 무언가가 부족하다! 언젠가는 바닥이 날 것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모두다 굶어죽을 것이다! (심지어는 음식을 비유하여) 샌드위치가 될 것이다! . . . 그러니, 정신 똑바로 차리자! 질문하지 말고, 되돌아보지 말고, 쉬지도 말라! 끊임없는 생산! 축적! 성장! 만이 살길이다. 질좋고 고급스러운 쓰레기더미 위에서 흥청망청 허우적거리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이상한 것은, 빈곤에 대한 막연한 공포가 극대화된 우리의 이 미래사회에서, 비만에 대한 공포 또한 이렇게 극대화된 시대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오웰의 1984년처럼 피골이 상접한 사람들의 동공 속에 부강하고 풍요로운 국가의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던 것과는 정반대로, 뱃살이 오를대로 올라 개기름 좔좔 흐르는 체구에 TV에 중독된 흐리멍텅한 눈동자 속에는 가난과 빈곤의 해골바가지 깃발이 위협적으로 펄럭이고 있는 것이다. INGSOC의 간부들은 꿈도 꾸지 못했던 첨단-과학-기술-세계화-자본-무한경쟁-파워-국가 시대에.


두 가지의 지배방식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안심시키는 길이 하나이고, 또 하나는 겁을 주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둘 모두는 빈곤을 이용해 왔는데, 전자는 "실질적 빈곤"을 감추고, 후자는 "관념적 빈곤"을 부추긴다. 어떤 경우든 둘 모두는 실상과는 전혀 다르며 실상을 왜곡한다. 빈곤을 감출때 사람들은 가난했고, 아무리 빈곤의 공포를 부추기고 떠벌려도 가난은 해결되지 않았다. 작가나 지식인들조차 알게 모르게 이 빈곤 담론에 몸을 실어 가난과 궁핍을 신비화하고 낭만화하여(고역스러운 밥벌이? 힘겨운 민생?), 빈곤의 실상을 혼탁하게 만들어, 그 공포 자체가 지배와 착취의 한 형태일 수 있음을 고스란히 감춘다. 물론 오웰의 1984년에도 불안과 공포는 있었다. 레지스탕스라고 불리는 골드스타인(Emmanuel Goldstein)-공포, 유라시아-공포, 동아시아-공포가 바로 그것이다. 골드스타인-실존이 진정 존재하는지, 전쟁-실존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지는 알수 없지만, 어쨌든 그 공포들 덕분에 모든이들은 단결할 수 있었고(Studs Turkel은 미국인들의 개별주의를 개탄하며 미국의 단결력에 대한 향수로 2차 대전이 가장 훌륭한 전쟁이었다고 술회한 바 있다), 반역자와 적에 대한 분노 만큼이나 강렬한 충성심과 복종이 가능했다. 우리의 이 미래시대에도 단결과 복종을 부추기는 레지스탕스가 존재한다. 경쟁력이라는 구호 속에 암시된 그 수많은 가상의 적들! 그들과의 전쟁에서 패할 경우 감수해야할 바로 무시무시한 빈곤!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우리를 사로잡는 레지스탕스-공포는 바로 빈곤 그 자체이다.


당 간부인 오브라이언(O'brian)이 윈스턴의 사상범죄를 간파하기 위해 건네 준 책(아이러니하게도 오브라이언 자신이 만든 책)이 있는데, 이 책에서 오웰은 이중사유(double thought)라고 하는 이론을 소개하는 가운데, 전쟁과 빈곤에 관한 가상의 이론을 주장한다. 바따이유(George Bataille)의 일반경제 이론과 약간 비슷하면서도 다른 그 이론에 따르면, 전쟁은 인간이 노동을 통해 생산한 모든 (잉여)생산물의 파괴가 목적이라는 것이다. 외부의 적이 실제로 위협을 가하기 때문도 아니고, 적에 맞서 승리를 하기 위해서도 아니라는 것이다. 즉 전쟁은 실제로 벌어지든 벌어지지 않든 이기든 지든 상관없이 끊임없이 지속되는 것, 즉 전쟁 그 자체가 목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계급사회가 유지되어 지배와 착취가 고착화되려면, 실제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빈곤과 궁핍 그리고 무지가 뿌리내려야 하는데(윈스턴이 하는 일은 바로 이 무지를 조장하기 위해 과거를 지우고 단어를 줄이는 일이다), 빈곤을 가속화하고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전쟁만큼 훌륭한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오웰의 말을 유추해보면, 전쟁은 적과의 생존 투쟁이 아니라 바로 빈곤의 창조이다. 그래서 그것은 지배와 착취의 사회구조를 온전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빅부라더-우상을 위시한 지배 세력이 자신들의 국민들과 벌이는 치열한 싸움이다.


그 형태가 어떤 것이든 우리는 틀림없이 전쟁을 벌이고 있다. 성장과 부의 구호 아래서 실체도 없는 내부 외부의 적과 싸우며, 가난과 빈곤이라고 하는 레지스탕스의 위협에 사로잡혀 막연한 공포를 무의식적으로 내면화한다. 빈곤은 제도가 되었고, 삶의 조건이 되었고, 신비가 되었다. 물론 빈곤은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어떤 형태의 빈곤인지에 대해서는 따져 묻지 않는다. 실질적으로 먹을 것 입을 것이 없어 빈곤한 것인가? 즉 사회적 총 생산력과 인구의 견지에서 실제로 빈곤한 것인가? 아니면 빈곤이 합법화되고 제도화 되어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어떤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인가? 누구의 빈곤이고, 누가 만든 빈곤이고, 누가 극복해야할 빈곤이며, 누구의 논리인가? 몇몇 얼빠진 작가나 예술-사기꾼들이 멋도 모르고 낭만화하면서 사기를 치듯이, 우리가 혹시 가난을 즐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렇게 오랫동안, 마치 가난이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삶의 굴레인 것처럼 여겨지고, 말해지고, 기억되며, 어떻게 이렇게 오랫동안 밥! 밥! 밥! 해가며 모든 것을 송두리채 포기하고 살고 있는 것인가? 어쩌면 오웰이 충고했던 그 빈곤과 무지 덕분에, 짊어지어야 할 책임을 카리스마-우상에게 미루어가며 편안하고 영악하게 살고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Posted by huun

들뢰즈는 베르그송의 '지속(dureé)' 개념을 설명하는 가운데, 정신과 물질의 "이원론적 일원론"에 관한 아름다운 구절들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정신과 물질은 전혀 다른 두 세계 같지만, 실은 하나의 세계가 수축하거나 이완되어 여럿으로 다양하게 공존하는 결과이다. 가령, 정신의 무한한 이완 상태는 회상과 꿈(무의식)이 될 것이고, 그것이 점점 수축되어 지각(perception)이 되다가, 곧 수축된 지각은 점차 물질이 되었다가, 또 더 나아가면 연기라든가 공허와 같은 물질적 이완상태가 무한하게 연장되어 점차 우주론적으로 팽창하게 된다는 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신 속에는 물질의 표상이, 물질 안에는 정신의 형식이, 또 수축 속에는 이완이, 이완 속에는 수축이 내재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현실이란 꿈의 수축상태이고, 꿈이란 현실의 이완상태인 셈이다. 이것이 베르그송주의의 심오한 "이원론적 일원론"이며, 그 안에서 모든 존재는 수축과 이완의 정도들의 공존이라는 것이다.


웃을지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생활의 측면에서 볼 때, 거지라든가 예술가들은 현실적 필요 즉 수축상태를 상실하고 무한한 이완상태의 현실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고, 생활의 필요에 종속되어 부지런한 노동 속에서 긴장된 삶을 사는 사람들은 수축상태의 현실을 사는 사람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공부를 잘하고 출세를 하려면 수축해야 하고, 넓은 시야를 가지려면 이완되어야 할 것이다.

Posted by huun

무력해진 믿음이라는 공포영화의 주제는 초자연적 존재를 등장시키는 영화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귀신과 대면하고 그를 쫓아내고자 하는 과학적 믿음과는 다른 형태의 믿음도 있다. 그것은 현실적 질서 안에서의 다른 세계와 대면하는 믿음인데, 바로 인간의 현실을 미신의 세계가 아닌 범죄의 세계로부터, 더 정확히는 부당함의 세계로부터 지켜야 한다는 법적 믿음(혹은 소유의 믿음)이다. 미국 헐리웃 영화들의 지배적인 테마인 이 믿음은, 이제는 범죄자에 의해 반격을 받아 죽어 가는 경찰관들을 설정함으로써, 그 믿음의 무력함이 점점 극단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것은 과학적 믿음의 무력함에서 나오는 공포와는 또 다른 형태의 공포일 것이다.


간단한 예를 들어, 로버트 드니로(Robert De Niro)가 나오는 『15 minutes』에서의 충격이란, 대중매체를 통해 시민의 우상이 되었던 경찰관이 바로 시민들이 바라보는 텔레비전 속에서 범죄자에 의해 굴욕적인 죽음을 당하는 장면일 것이다. 또 게리 올드만(Gary Oldman)이 출연하는 『Romeo is Bleeding』에서 가장 불쾌하면서도 기괴했던 장면은, 범죄 집단의 하수인으로 전락한 한 경찰관이, 몇 가지 실수로 인해 오히려 그들에 의해 처벌을 받으면서, 애원과 함께 발가락이 잘리는 장면이었다(이것은 아마도 게리 올드만 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이 아닐까 싶다. 그의 연기에는 인간의 타락에 대해 우리가 느끼는 근원적인 공포를 역겨움으로 전환시키는 면모가 있다). 이 외에도 더 많은 목록을 작성할 수 있을 것이다.


5년 전만 해도 스릴러 영화에서 문제 해결을 위해 경찰관이 등장하면 다소 마음이 편해지는 경향이 있었지만, 최근에는 문제 해결에 있어 오히려 방해가 되거나, 심지어는 위협적인 존재가 되어, 더 불안해지기만 한다. 법적인 믿음의 무력함과 불신만을 확인하기 때문일 것이다. 경찰이나 변호사와 같은 법적 존재는 이제 공포영화에서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헐리웃 영화 제작자들이 직면한 문제가 바로 이점일 것이다. 어떤 공포를 만들어내어야 할까? 이 질문은 우리가 가장 믿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것과 관계가 깊다. 우리는 무엇을 믿고 있는가? 혹은 더 나아가 우리에게 믿음이 존재하는가?


아마도 공포의 본질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종교적 믿음의 시련이 될 것이다. 특히 십자가에 매달려 처벌을 받는 신의 아들, 신의 말씀을 실천하는 성직자의 시련과 같은 주제가 그 경우에 해당된다. 그러나 종교적 믿음에 있어 현대적 공포란 그 보다 더 근본적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간단히 말해 그것은 시련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 자체의 문제, 즉 현대인들이 서서히 신의 죽음을 자각하게 되면서 느꼈을 법한 무한한 공포 혹은 불안과 관계가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멜 깁슨(Mel Gibson)의 『예수의 수난(The Passion of the Christ)』(2004)은, 믿음을 불가능하게 하는 외부의 적이나 시련에 맞서는 투쟁과 그 의미를 문제 삼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믿음의 사라짐 혹은 믿음의 존재 자체에 대한 공포, 즉 믿음 내부의 투쟁으로부터 출발한 영화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영화에는 예수가 어떻게 시련을 극복 하는가 혹은 수난이 의미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혹은 왜 그는 수난을 받아야 하는가와 같은 신학적 질문이 불필요해 보인다. 오로지 수난 그 자체, 시련의 강도, 나아가 수난의 형상화가 문제인 것이다. 그것은 믿음이 사라져버릴 것에 대한 공포, 믿음 자체의 회의감에서 오는 공포를 전제로 한다. 마치 사라져버릴 꽃의 아름다움을 보존하기 위해 붓을 들어 난잡에 가까울 정도로 색채를 추구 하듯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불안에서 비롯된 그 믿음은 이미 종교적 의미를 상실한 것이다. 그래서 그 영화는 더 이상 고유한 의미에서의 종교영화라고 보기 어렵지 않나 싶다. 순수한 공포영화라면 맞을까.

Posted by huun

초자연적인 현상과 같이 믿기 어려운 일을 믿을만한 것으로 만들려면 몇 가지 조건들이 수반된다. 예를 들어 개연성이 있는 이야기가 필요할 것이다. 사람들은 비상식적이거나 초경험적인 일은 가급적이면 믿으려하지 않는다. 그것은 조용한 삶에 동요를 일으키는 일이고, 그것을 묵인하고 받아들이려면 개인의 능력 이상의 노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믿음은 아주 오랫동안의 망설임 끝에 내린 최종적인 결정과도 같다. 그래서 믿음은 판단의 영역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실천의 영역에 속한다. 믿음이 쉽게 달라지지 않으며, 끈질기게 사람들의 육신을 붙들고 있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미 너무 많이 와버린 것이다. 그러니 무엇인가를 믿을만한 것으로 만들려면, 이미 와버린 거리만큼 되돌아가도 괜찮을 정도로 매력적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 매력이란 우선 상식의 수준에서 즉 삶에 어떤 동요를 불러오지 않고도(혹은 강요를 받지 않고도) 믿을 수 있는 개연성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사람들이 상식적이지 않은 일에 자기 자신을 내맡기기를 두려워하는 것은, 상식이 습관에 대한 일종의 자기 인식이기 때문이다. 즉 상식이란 안전한 것, 위협적이지 않은 것, 그래서 편안한 것을 뜻한다. 그래서 강요된 믿음은 사람들을 사로잡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래가지도 못한다. 작가들의 픽션이 한낱 거짓말에 불과함에도, 사람들이 반복해서 그것을 찾고 믿는 이유는, 픽션이 바로 상식이나 습관에 호소하기 때문이다. 거짓말인줄 알면서도 그다지 위험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또한 픽션의 즐거움이란 바로 거기에 있다.


다음으로 가급적이면 많은 사람들의 동의가 필요하다(물론 개연성의 한 결과이긴 하지만). 어떤 종류의 현상이 객관적인 것이 되려면 두 사람 이상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 아무리 비현실적인 사건이라고 해도, 그에 관한 여러 사람들의 증언은 심지어는 법적인 효력까지 얻게 된다. 그리고 그 동의라는 것은 대체로 반복적인 경험, 다르게 말해 공통의 경험 속에서 생겨난다. 객관성이란 바로 공범의식(공모의식)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객관성과 공범의식의 관계는 상호보완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객관적이라고 간주된 것을 통해 공범의식이 만들어지기도 하고, 또 어떤 필요에 의해 생겨난 공범의식이 객관성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 둘의 결합 속에서 사건에 대한 공통의 믿음이 발생한다. 이와 같은 공모의식에 의해 발생하였고, 또 끊임없이 유지되고 있는 가장 강렬한 형태의 믿음은 바로 종교일 것이다.


저 두 가지 조건(개연적인 것과 공통적인 것)을 구체화하려면, 당연히 사람들로 하여금 경험적으로 목격하게 해야 할 것이다. 그 경험은 보다 감각적일수록 좋다. 이야기로 전해들은 것보다는 직접 보게끔 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믿고 있는 저 공모의식이 단순히 생각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육체라는 객관화된 현상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임을 스스로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이 점에 있어 소설이나 상상보다는 영화가 더 효과적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저 조건들을 완성하고 실현시키는 가장 훌륭한 수단이 있다면 무엇일까? 바로 과학-테크놀러지가 아닐까? 과학-테크놀러지는 현대에 등장하여 기독교와 같은 초월적 종교를 대체한 새로운 형태의 종교(더 정확히는 성경)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현상들을 감각-경험적으로 목격하게 함으로써, 그들의 믿음을 확고하게 해주었기 때문이다(현미경이나 망원경 혹은 카메라 등이 그 좋은 예일 것이다). 이 감각 내재적 종교가 재현하고 있는 내용은 더 이상 누군가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가 아니며, 권위 있는 사람의 설교를 통해 가지게 되는 믿음 같은 것도 아니다. 그것은 어떤 공동체에 속하게 됨으로써 갖게 되는 그런 종류의 믿음이 아니라, 말하자면 믿음을 가능케 하는 믿음, 혹은 믿음 이전에 존재하는 절대적 사실 같은 것, 즉 증명하거나 직접 보여줌으로써만 가능한 믿음이다. 그래서 그 믿음을 지속시키기 위해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의 동의나 종교적 의식 같은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런 종류의 이차적인 믿음이 아니라, 우리가 말하는 의미에서의 신(神)보다도 더 한 존재, 오히려 신을 의심하게 하는 믿음, 바로 객관성이라는 믿음이다.


Science라고 하는 새로운 형태의 개연적 픽션이 이를 가능케 했다. 그리고 교회나 성당과 같은 이데올로기 기관-장치들을 대체한 현대식 학교가, 종교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인류 차원의 대규모의 교육을 통해 이를 실천한다. 그것은 종교가 생각지도 못했던 객관성을 앞세워서, 막연하게나마 우리가 알고 있었고 은밀히 신뢰해 왔던 신비적 존재(미신이나 종교적 대상들)가, 대낮의 허깨비에 불과했다는 것을 처음으로 가르쳐주었다. 비록 아직도 그 믿음을 갖는 이들이 많지만, 어쨌든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때문에 알 수 없는 어떤 신비물에 불과한 것이며, 따라서 아무도 그것을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그 대상들 역시 이를 잘 알아서인지, 혹은 그 계몽의 빛이 너무 눈이 부셔서인지, 더 이상 대낮에 출몰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드라큐라(Dracula)가 바로 그 전선의 최후까지 살아남은 마지막 존재가 아닐까? 드라큐라의 진정한 적은 십자가가 아니다. 그것은 여전히 중세적 취미를 고수하는 사람들의 뒤늦은 해석에 불과하다. 그의 진정한 적은 바로 빛! 너무나 눈이 부셔서 살짝 만의 노출이라도 모든 어둠을 태워버리는 빛! 모든 존재를 훤하게 드러나게 하여 그 객관적 실체를 믿지 않으면 안 되게끔 하는 빛! 빛은 드라큐라를 물리치거나 찔러 죽이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만든다. 과학은 감각적이고도 물질적인 경험의 세계로 우리를 이끌었으며, 나아가 우리의 삶을 둘로 분리했다. 한편에는 대낮의 객관성, 다른 한편에는 밤의 신비가 그것이다. 그리고 과학이 우리에게 최근 들어 가르쳐주었던 그 몇 안 되는 내용들은, 단 몇 세기 정도의 기간 동안 자연스럽게 우리의 습관적 믿음이 되어 왔다. 과학적으로 설명 가능한 것 즉 과학이 포착할 수 있는 것만을 존재하는 것으로 믿음으로써, 그것은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믿음을 대낮의 생활로부터 몰아내었다. 기독교가 금기(禁忌)라는 수단을 이용해 획득하고 싶어 했던 신의 객관성(기독교는 미신을 싫어한다)을 과학은 빛의 논리(logic)로 달성한다. 그 빛의 논리를 가장 잘 구현해주었던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기계 테크놀러지일 것이다.


빛의 구현으로서의 테크놀러지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예증해주는 것이 바로 영화이다. 영화는 허구적인 내용을 다룰 때에도 이미 그 내용물의 객관성을 전제한다. 말하자면 어떤 식으로든 배우는 존재해야만 하고, 그가 활동하는 환경 역시, 만들어진 세트이건 자연물이건, 주어져 있지 않으면 안 된다(그래서 그래픽과 같은 특수촬영을 주로 사용하는 영화는 그 고유의 의미에서의 영화라고 말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래서 영화는 환상이기 보다는 일종의 환각에 가까운데, 감각에 호소하는 과학적 믿음이 개입했기 때문일 것이다. 초자연적 존재는 거울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오래된 규칙은 바로 저러한 믿음에 기인한다. 가령, 계속해서 등장하는 한 여인이 귀신임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거울에 비추어지지 않는 그녀를 보여주기만 하면 될 것이다. 그 경우에 거울은 객관적 관점을 증명하는 하나의 테크놀러지이다. 물론 영화에서 주관성과 객관성이 언제나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아니며, 또 그 두 관점은 서로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대체로 객관적 대상이란 테크놀러지에 의해 반영(테크놀러지화)됨으로써 가능해지는 것 같다. 또 이것이 주관성이 객관성으로 전환되는 유일한 방식일 것이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오래 전부터 일본의 공포 영화들(최근엔 우리의 영화들까지)은 대부분이 전화라든가, 텔레비전, 통신장비, 비디오, 카메라와 같은 매체들을 등장시켜, 그를 이용해 초자연적 현상을 목격하는 것이 주요 소재로 등장하고 있다. 심지어는 소복을 입은 귀신이 카메라 쪽으로 기괴한 걸음으로 걸어오다가, 급기야는 텔레비전을 뚫고 기어 나오는 이미지까지 묘사한다(이 장면은 1998년에 나카타 히데오가 감독한 『The Ring』(リング)의 한 장면이다). 나는 이 장면을 보면서 충격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정말로 무서웠다. 이 영화는 여러 가지 버전으로 재구성되었는데, 모두가 기술매체에 의해 두 세계가(현실적 세계와 잠재적 세계) 강제적으로 연결된다는 테마로 이루어졌다. 그와 같은 방법이 다른 어떤 공포 영화보다도 무섭고 충격적이었던 이유는, 단순히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던 두 세계가 연결되었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그 보다는 바로 과학-테크놀러지가 거부했던, 그래서 그 믿음에 따라 우리도 역시 인정하지 않았던 그 존재를, 이번엔 다름 아닌 그 과학-테크놀러지를 통해 우리가 직접 목격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상상조차 하지 말 것을 독려했던 그가 오히려 그 객관적 실체를 눈앞에 가져다 놓은 것이다. 카메라에 찍힌 귀신! 거울 속에서 따로 움직이고 있는 또 다른 존재!(이 소재는 김성호가 감독한 『거울 속으로』(2003)에서 효과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러니 상황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처음엔 그냥 막연한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잠재적 존재가 과학-테크놀러지에 의해 현실적이 된 것이다. 그야말로 텔레비전이 그녀를 나오게 하였다. 저 『The Ring』이라는 영화는 (프로이트의 용어를 빌리자면)불안이 경악이 되는 중간 지점에 테크놀러지라는 촉매장치를 삽입함으로써,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믿고 의지하고 있었던 것, 신(神)보다도 더 믿음직했던 우리의 현대적 종교, 즉 객관적 현실에 대한 과학적 믿음이, 오히려 그 자신으로 인해 무력해지고 있음을 가장 훌륭하게 보여준 예이다.


최근 들어 공포영화 작가들이 기계적인 테크놀러지를 통해 초자연적 존재를 보여줌으로써, 그 존재는 우리의 오래된 믿음(과학적 믿음)에 힘입어 실존하는 것으로 둔갑하고, 나아가 이번엔 우리의 믿음 자체까지 무력하게 만드는 효과를 자아내고 있다. 초자연성을 부정하고 몰아내었던 주체(과학-테크놀러지)를 통해 오히려 그 존재를 목격하고 증명하게 하는 방식! 정말로 기막힌 발상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일종의 복수의 한 형식처럼 이루어진 것 같다. 적에게 굴복하고 심지어는 적장의 수하가 되어 우리에게 칼을 들이대도록 명령을 받은 우리의 영웅이라고나 할까?


과학-테크놀러지는 심리적 사실보다는 객관적 물질에 관계한다. 그래서 그것의 미덕은 어떠한 것도 왜곡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반사하고, 작용한다는 점에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적나라함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너무 믿는 경향이 있다. 그 믿음은 전적으로 무의식에 속한다. 사진에 찍힌 피사체를 우리는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믿는다. 귀신이 카메라에 찍혀서 우리가 어떤 놀라움을 갖는 것은, 우리의 믿음 속에서 두 가지 모순되는 경향들이 서로 팽팽하게 싸우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초자연적 존재에 대한 우리의 과학적 믿음, 즉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과학의 언어가 도리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는 것, 즉 그 존재를 믿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 두 모순적 상황이 우리를 당혹감과 놀라움으로 이끌고 있다. 공포영화에는 바로 현대적 믿음의 내재적 모순(충돌)이 있다. 그리고 공포영화란 언제든지 믿음에 관한, 믿음과 그 시련에 관한, 혹은 믿음의 재확인에 관한 영화가 아니면 안 될 것이다.

Posted by hu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