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들은 점점 소음을 견딜 수 없어 한다. 데이빗 린치(David Lynch)의 놀라운 영화 Eraser Head에서의 그 끊임없는 소음들처럼, 현대인은 틀림없이 분열증적인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소음을 견딜 수 없는 것은, 문 밖이 소란스럽기 때문이기 보다는 오히려 우리의 내면이 너무 고요하고, 공허하고, 텅 비어 있기 때문은 아닌지 질문해 보아야 한다. 반복적 질서에 대한 우리의 강박이 우리 자신을 병적으로 만든 것은 아닌지, 아니면 자연의 리듬 내부에, 시간 내부에 종양이 생긴 것은 아닌지 말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고통을 겪고 있는 소음이란, 자전이나 공전을 해가며 지축이 흔들리는 소음이 아니라, 혹은 우주 전체가 팽창하며 쏟아내는 소음이 아니라, 또 우리를 둘러싸고 우리의 숨소리까지 규정하며 매일 매일 돌아가는 체계 전체의 무의식적 소음이 아니라, 기껏해야 바로 옆 사람의 작은 기침소리, 잠시 동안의 망치소리, 볼펜이 책상에 긁히는 소리와 같이, 우리의 지각 내부에 들어와 지각 가능한 소음들 혹은 의식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소음들이다(이는 병적인 상태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에 소음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소음에 대한 우리의 현명한 태도와 생각이 사회적 요구가 되었다. 이제 그 요구를 만족시킬 만한 방책을 몇 가지 생각해보자.
1.
소음에서 생길 수 있는 화를 면하는 최상책은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소음으로부터 잠시 피해보라. 그리고 그것을 잊어라. 도서관 같이 자리를 옮겨도 무관한 곳에서는 이 방법이 좋다. 다시 돌아와야 하는데, 여전히 그 소음이 사라지지 않았다면, 다시 피해보라. 그리고 다시 돌아가라. 그렇게 반복하다 보면 마치 종소리(교회 종, 학교 종, 등등)처럼 습관이 되어 그럭저럭 견딜만한 경우도 있다.
2.
소음이 당신을 괴롭힌다면, 감정으로 반응하거나, 신경질을 내거나, 짜증을 내지 말라. 즉 소음이 절대로 감정의 불길로 번지지 못하게 하라. 감정이란 대개 원인에 대한 그릇되거나 혼란스러운 견해에서 생기는 경우가 많고, 또 감정은 사물을 혼동하고 상황을 뒤섞어서 받아들인다. 그래서 단순한 물리적 소음이 우리의 감정과 뒤섞여 처음의 그것보다 훨씬 그 크기가 커진다.
감정을 제거하려면 그 소음의 원인을 올바로 파악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사람이 내는 소리인지, 물건이나 동물의 소리인지, 등등. 물건이나 동물이 내는 소리에 감정에 휩싸이는 얼간이는 없을 것이다. 사람 소리의 경우, 그것이 일부러 내는 소리인지, 무의식적으로 내는 소리인지, 잠시 동안만 내는 소리인지, 계속 그럴 것인지 등등. 소음의 원인과 실체를 하나씩 하나씩 파악하는 가운데, 우리는 이미 혼란한 감정으로부터 벗어나고 있음을 느낀다. 소음에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심지어 그 소음이 도대체 어디에서 누가 내는 것인지도 정확히 모르고 있는 경우가 많다. 원인을 모를 때 우리는 불안과 공포와 불쾌함이라는 감정의 불길에 속을 태운다. 그럴수록 심호흡을 하며 억지로라도 사색을 실천하라. 무엇이든 사색의 대상이 되는 순간 뜨거움이 식어가며 제자리를 찾는다. 사색은 사물로부터 떨어져서 사물들의 질서를 멀리서 바라보고 짚어가는 행위이다. 감정과 뒤섞이지 않도록, 나와 무관한 것이 되도록, 소음과 거리를 두고 관조하기를 권한다. 가령,
"킁킁거리며 내 공부를 방해하는 저 작자의 코를 비틀어버리고 싶다!"
가 아니라,
"그는 왜 자꾸 코를 킁킁 거리는 것일까? 감기에 걸린 것일까? 아니면 축농증인가?"
3.
소음이 누군가의 행위에 의해 발생하는 것일 때, 가령 누가 발을 구른다든가, 망치를 두드린다든가, 헛기침을 반복해서 한다든가, 볼펜 소리를 심하게 낸다든가 해도, 절대로 그 장본인에게 가서 조용히 해달라고 항의를 하거나 부탁조차 하지 말라. 소음을 내는 장본인은 그 소음을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처음엔 물론 그 부탁을 들어줄 것이다. 그러나 그 소음은 그의 생활 습관이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에,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서는 의식적으로 자신의 습관을 제한하고 부정해야만 한다. 따라서 아무리 정중히 부탁을 해도, 그는 십중팔구 당신의 부탁을 들어주지 못한다. 그가 나빠서가 아니라(나쁜 경우도 있다) 당신의 지각구조와 다르거나, 신경이 무디거나,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자신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내던 소리들이 당신의 부탁으로 인해 뇌리에 인식이 되면, 이제 그는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검열하게 될 것이고, 이는 틀림없이 그에게 억압으로 작용할 것이다. 결국 그의 배려는 오래가지 못하고, 그 악마 같은 소음이 다시 터져 나올 것이다. 심하면 자신을 억압한 당신에게 도리어 그 소음을 비수로 삼아 당신을 찌르게 될지도 모른다. 위에서 말한 나쁜 경우가 바로 이것이다.
일이 이쯤 되면, 소음은 이제 더 이상 물리적 사안이 아니라, 자존심의 사안, 윤리적 사안으로 확대되어 전쟁이 발발한다. 부탁을 거절당한 수모와 행동을 억압받은 분노의 전쟁! 가장 고통스러운 타자의 지옥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불리한 쪽은 당신이다. 왜냐면 그는 자신의 소음이 당신에게 고통을 줄 수 있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 인류가 오래 전부터 구가해온 묘한 쾌감, 즉 누군가를 고통스럽게 함으로써 얻게 되는 달디 단 쾌감을 만끽하게 될 기회를 안은 것이기 때문이다. 참을성 없이 그에게 다가가 스스로 권력을 양도하지 말라.
4.
만일에 그가 고의적으로 나를 향해, 내게 무엇인가를 어필(appeal)하기 위해, 혹은 내게 해코지 하기 위해 소음을 내는 것이라면, 더더욱 그에 반응해서는 안 될 것이다. 나의 신경질적인 반응과 짜증과 성화는 바로 그가 바라는 바이며, 그의 유혹에의 화답이기 때문이다. 결코 대꾸하지 말라. 반응이 없다고 판단되면, 그 자신도 곧 자신의 행위에 대해 깨닫는 바가 있거나, 아니면 허탈해진 마음으로 점차 자신의 행동을 그칠 것이다. 아니면 말고.
5.
또 한가지 삼가 해야 할 것은, 그가 내는 소음의 고통만큼 그에게 되갚아 주겠다는 생각으로, 그와 똑같은 짓을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점이다.
"내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너도 느껴보아라! 내 너에게 한 수 가르쳐주마!"
이런 식의 응대는 유치하고 단순하다. 왜냐면,
"그래, 이렇게 고통스러운 경험을 저 분이 먼저 했다니, 미안하군. 이제라도 그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조용히 하자!"
라고 생각하는 어린 양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위에서처럼, 당신은 다시 한번 그와 전쟁을 벌여야 할 것이다.
6.
소음이 견딜 수 없는 고통인 것은 본질적으로 그것이 물리적으로 내 감각을 때리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보다는 우리가 그 소음으로부터 어떤 "의도"를 상상 한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이 상상은 결국 윤리적 문제로까지 번진다. 처음엔 단지 소음이 귀찮고 성가신 것이었지만, 그것이 반복되어 시간이 지나면 소음은 나에 대한 그 사람의 무례함으로 둔갑한다. 그러다가 좀 더 지나치면 그 무례함은 나에 대한 무시 혹은 해코지로 부풀려 해석된다. 인간의 태생적 한계는 자연 안의 모든 현상을 자기가 중심이 되어 생각한다는데 있다. 평소 안면이 있던 어떤 사람이 저쪽에서 내 쪽으로 걸어오다가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 골목으로 들어가 버린다. 그것을 목격한 나는 생각한다.
"왜 나를 피하지?"
이 지독한 자격지심의 본질에는 골목으로 들어간 그 사람과는 전혀 상관없는 자기만의 망상이 있다. 그 망상 속에서, 나는 그 사람의 어떤(혹은 모든) 행동을 "나에 대한" 혹은 "나의" 그 무엇으로 바꿔놓은 것이다. 자격지심으로 가득 찬 한 인간의 소심한 유아론과 오만은 결국 자신을 불면의 고통 속으로 내몰아 버리고, 결국 다음날 그는 자신의 존재를 확인 받기 위해 그 사람을 반복해서 찾아가 뜬금없는 식사를 제안하거나, 더 심해지면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그 사람의 뻔뻔한 면상과 자존심에 얼룩이져 보기 흉한 자기 모습을 저울질 하여 공평한 보상을 마음 속에 담아 두었다가, 어느 날 그의 눈 인사를 차가운 냉소의 외면으로 되갚아 준다.
자신 앞에서 벌어지는 현상들 속에서 잠시만이라도 자기 자신을 빼면 많은 일들이 산뜻한 우연으로 지나쳐간다. 가령, 그는 원래 그 골목으로 들어갈 참이었는데, 우연히 내가 목격한 것일 뿐이다. 그러나 온통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 지독하게 소심하고 오만한 우리는 그 우연 속에 자신을 억지로 집어 넣어 끈적이는 필연으로 만들어 자연을 망친다.
저 쪽에서 어떤 여인이 자꾸만 이쪽을 보는 것 같다. "나한테 관심 있나?"
이와 마찬가지로 그가 내는 소음을 나 자신과 연관 짓거나, 그의 의도를 상상하지 말자! 그 소리는 우연히 거기서 들리는 것이고, 그는 나를 알지도 못하며, 나에겐 관심조차 없다.
언제부터인가 내가 사는 아파트에서 일주일에 두 세 번은 꼭 망치질 소리가 들린다. 소리의 방향을 추정해보건대, 틀림없이 옆 집에서 나는 소리이다. 처음엔 그냥 성가시다고 생각했지만, 점점 소리가 심해지고 시간도 길어지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내가 집에 있을 때에만, 아니면 책을 읽을 때에만 소리가 나는 것 같다. 귀에 거슬리기 시작하자, 이제 그 소음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그와 나의 어떤 윤리적 관계를 말해주는 징후처럼 들린다. 나는 이제 이곳으로 이사 온 후부터 일어났던 그와 나의 별볼일 없었던 관계들에 대해 곰곰이 생각에 빠진다.
"내가 시끄럽게 했나? 청소기 소리가 컸나? 화장실에서 내는 소리가 하수구를 통해 그에게 들렸나? 나한테 기분 나쁜 일이 있나? 엘리베이터에서 모른 척 해서? 문을 꽝 소리 내어 닫아서? 치사한 새끼! 조용히 해달라고 말해볼까? 또 그럴 거야. 절대 말해선 안 돼. 도대체 어떤 종류의 인간일까?"등등
몇 번 마주친 적도 없고, 인사조차 제대로 해 본적 없는 그와 나 사이에, 몇 칠 동안 내가 묶어 놓은 두텁고도 끈적거리는 동아줄 때문에, 나는 마치 우리가 깊고도 오래된 숙원(宿怨)처럼 느껴진다. 어느 날 엘리베이터에 그와 나란히 타게 되었을 때, 나는 그의 얼굴을 곁눈질로 째려보기 시작한다. 그의 모습을 떠올릴수록 점점 인간의 어떤 고약한 기질을 익히는 것만 같다. 그의 고약함인지 나의 고약함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나 나중에 "우연히" 알게 된 사실인데, 그 망치 소리는 아파트 전 가구가 번갈아 가며 창문을 수리하는 소리, 즉 봄이 되어 이사철이 되면서 새로 이사온 가구들이 집 단장을 하는 소리였다. 결국 그 망치소리는 한 가구에서 두 번 이상 두드리는 소리는 아니었던 것이다. 다만 아파트의 구조상 모든 소리가 같은 곳에서 나는 것처럼 내 고막이 들었을 뿐이었다. 내 청각의 무능 탓으로 돌려봐야 소용없는 일일 것이다. 더군다나 옆집 사람은 망치질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이와 같은 일에 대처하는 좋은 지침서 하나를 소개한다.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의 세네카(Seneca)에 관한 귀여운 글이다. 자격지심이나 소심함과 같은 천한 본성(abjectness)이 어째서 결국은 타인을 모함하거나 괴롭히게 되는지(이런 사람들과는 멀리 떨어져야만 화를 면한다), 또 어떻게 해서 "화(anger, 火)"가 잘못된 추론에서 비롯된 "이성"의 산물인지, 또 어째서 소음과 우리 자신 사이에 불길이 번지지 않도록 끈적이는 필연의 끈을 제거하고 우연성의 방화벽을 세워야 하는지에 대해 잘 설명하고 있다. 읽어보길 바란다.
Alain de Botton, The Consolations of Philosophy, New York, 2000. pp. 100-105.
한글 번역본도 있는데, 번역 제목이 좀 해괴하지만 상관은 없다.
알랭 드 보통,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 생각의 나무, 2000. pp. 159-167.
7.
관점을 전환해보라. 번뇌와 고민 속에서 허우적거리다가도, 약간의 기술적(technical) 대안에 눈을 돌리면, 인간 대 인간의 윤리적 문제까지 불길이 번지지 않고도 의외로 쉽게 해결되는 경우가 있다. 어쩌면 이 방법이 당신들이 찾는 바로 그것일지도 모르겠다.
기술적으로 소음을 해결하는 방법이 없지 않다. 지금 당장 인터넷 검색엔진에 들어가 "백색소음"(white noise)이라는 단어를 입력해보라. 소음에 고통을 받고 있으면서도, 이 단어를 아직도 모르고 있다면, 당신은 참을성이 많은 사람이거나, 감각에 무딘 사람이거나, 십중팔구 현실에 안주하는 게으른 사람일 것이다. 이상한 것은 한국인들 역시 소음으로 고통을 받고 있으면서도, 이 백색소음 관련 상품이나 프로그램이나 심지어는 그 흔한 파일 하나 변변한 것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있긴 하지만 컴퓨터로 쓸 수 있는 것은 없고, 고가의 기계를 구입해야만 하는 것 뿐이다. 현실에 안주하기를 좋아하고, 감각도 무디고, 참을성이 많고, 돈만 생각하고, 이기적이기까지 한 한국인들에게 그러한 기술적 대안을 바란다는 것이 무리일까?
백색소음이란 주파수 대역이 골고루 퍼져있는 소음을 말한다. 파도소리, 빗소리, 바람소리, 전기잡음소리 등은 특이한 패턴 없이, 특정하게 거슬리는 소음 없이, 여기저기에 편재되어있는 일군의 반복되는 소음군(群)이다. 빗소리나 파도소리가 신경이 쓰이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소음인데도 불구하고 특정한 패턴이 없기 때문에, 그 소리에 머물러서 집착을 하거나 의식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백색소음을 듣고 있으면 자극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거나 신경이 쓰이지 않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자장가나 산책과 같은 반복적인 리듬과 정신작용의 특별한 관계가 있다. 백색소음이 무엇인지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은 각설하고, 여기에 그 샘플 파일 몇 개를 올려 놓겠다. 한국 사이트에서는 찾을 수가 없어, Google 이나 uTorrent 를 기웃거리면서 찾은 파일이다. 샘플이긴 하지만, 좋은 프로그램을 사용하면 그럭저럭 쓸만하다.
양에 차지 않는다면, 직접 해외 사이트에 접속하여 CD나 프로그램을 구입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http://www.purewhitenoise.com/
http://whitenoisemp3s.com/
http://www.burninwave.com/
다음은 저 위의 샘플파일들을 요긴하게 작동시킬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이것저것 사용해 보았는데,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프로그램들 중에서 여기에 올린 이 프로그램이 가장 좋았다. 사용에 전혀 제한이 없고, 특히 여러 개의 파일을 동시에 열어놓을 수가 있다. 내려 받아서 설치하면 자동으로 샘플 파일들이 폴더에 생성되고, 더 필요한 분들은 다른 곳에서 샘플 파일을 구해서 사용하면 될 것이다.
이제 저 백색소음이라는 "기술적 미봉책"에 대해, 잠시 동안 이론적인 분석에 들어가 보겠다. 어떤 관점에서 볼 때, 이 아이디어는 대단히 탁월한 통찰에서 출발한 기술이다. 소음의 고통은 소음 그 자체의 물리-감각적 성질에 있기 보다는 심리적 사안에서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이미 언급했듯이, 소음에 대한 우리의 고통은 우리 내면의 침묵과 고요에서 비롯된다고 말할 수 있다. 지금까지 기울여왔던 우리의 노력들을 생각해보라. 그것은 모두가 들려오는 어떤 소리를 제거하거나, 그것과 멀어지거나, 그것을 배제하고 외면할 수 있는 길의 모색이었다고 정의 해야 할 것이다. 다르게 말해, 들려오는 소리를 부정하고 우리가 바라 마지않는 어떤 고요한 상태 쪽으로, 더 정확히 우리 자신 안으로 자꾸만 정향(定向)시키는 과정이었던 셈이다. 도서관이 그 좋은 예이다. 도서관에서 신경에 거슬리는 거의 모든 소음은 소음 그 자체 보다는 도서관 공간에 대해 가지는 우리의 이상(the ideal), 고요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그 비정상적인 우리의 요구 탓이 더 크다. 볼펜을 떨어뜨리거나, 작은 기침소리, 글을 쓸 때 펜이 바닥에 긁히는 소리, 마우스 클릭하는 소리, . . . 이 모든 사소한 천둥소리들은 조용함이 만들어 놓은 심리적 규정의 산물이다. 도서관이 아니었다면 이 소리들은 지극히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우며, 불가피한 소리이다. 관점에 따라서는 반복되는 기침소리조차 정상적인 상태이다. 고요함은 주변의 모든 소리들을 아주 특별한 울림으로 듣게 한다(존재에 민감해지고, 그 특별한 울림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 시인들은 고요를 찾긴 한다). 음성 물리학자들은 이 특별한 울림을 "특정 주파수 대역"의 소리라고 물질적 명명을 할 것이다. 바로 이 "특정"(privileged)한 것! 수 만가지 현상 중에서 어떤 특정한 것을 선택하고 결정하고 그것에 민감해지는 것! 이 민감성의 이면에는 다름 아닌 자기 중심적인 세계관이 많든 적든 웅크리고 있다. 도서관만큼 고독하고, 소외되고, 자기중심적이며, 편집증적인 공간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그런 점에서 볼 때, 도서관에서 쓰여진 한 권의 훌륭한 책은,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식으로 말해, 그야말로 "악의 꽃"인 셈이다.
그러나 백색소음은 그와는 완전히 반대의 접근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특정 주파수 대역의 소음을 제거하거나 부정하는 대신에, 모든 주파수 대역의 소음을 받아들임으로써, 내게 들리는 그 특정 소음을 다수의 주파수 속에 뒤섞어 버린다. 그럼으로써 그 특별한 소리(privileged sounds)는 사소한 일개 불특정한 소리(any-sound-whatevers)로 관점이 전환된다. 소음은 없어져야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필요한 것이다! 이것은 거슬리는 소음에 대한 냉소나 부정이 아니라, 그 소음을 소음 자체로 놓아두는 가운데, 우리의 편협한 태도에 대한 조용하고도 과감한 거부에 다름 아니다. 여기에는 자연의 본성에 대한 심오한 이해가 있다. 자연의 소리에는 특정 주파수를 지향하거나 집중되는 소음이 없다. 아니 모든 주파수를 포함(포용)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한 말이다. 다시 말해 자연 자체에는 규정된 것이 없는 것이다. 반면에 인간의 생활 특히 도시의 생활은 학습의 부담에 갇혀 있다. 도시에서는 길을 지나가는 것조차 학습의 결과이다. 길을 건너거나, 골목을 다니거나, 시선을 돌리거나, 사소한 행동들까지도 규정하는 명령 체계들이 암묵적으로 제정되어 있기 때문에, 차도, 신호등, 도로, 계단, 건물, . . . 그 모든 환경들은 우리가 익히고, 거기서 필요한 의미를 구별하여 찾아 지켜야만 하는 특정화 과정 그 자체이다. 이것이 또한 문화의 의미이다. 문화는 우리의 근육과 두뇌를 특정한 지역으로 뭉치게 한다. 그래서 50분이 지나면, 혹은 저녁이 되면, 혹은 평일이 지나면, 뭉친 근육을 풀기 위해 한 번씩 기지개를 펴야 하는데, 이것이 다름아닌 자연으로 돌아가기이다. 자연 속에서 우리는 학습의 부담으로부터 해방된다. 나무를 보거나, 강가에 앉아 있거나, 바다, 산, 바람, . . . 자연물은 무질서하게, 자신만의 길을 따라, 서로 외면하며(냉소가 아닌), 각자가 불특정한 그 무엇이 되어 살아간다. 거기서는 어떤 의미를 찾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고 그럴 필요도 없다. 저렇게 우람하고도 기괴하게 자라나고 있는 나무로부터 도대체 우리가 무슨 의미를 찾을 수 있겠는가? 나무의 기괴함을 보며 우리는 구토(la nause'e)가 아니라 지각의 해방을 경험한다. 파도 소리를 들으며, 바람 소리를 맞으며, 빗소리를 들으며, 우리는 자신의 소심한 편집증의 지대로부터 벗어나 그것들의 반복적인 리듬 속에 실리어 흐름이 되어간다. 그러면 심신이 안정되고, 숙면을 취하게 된다. 이 선(禪)적인 역설과 테크놀로지가 만나는 효과는 다분히 심리적인 것이지만, 이로써 우리는 "대범한 지대"에 자리하게 되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포기하고 열어 놓음으로써, 우리는 모든 것에 이르게 된다!
8.
마지막으로, 우리가 인간으로서, 사회적 동물로서, 위의 문명적이고 기술적인 미봉책 보다는, 그나마 어른스럽고, 평화적이고, 긍정적이고, 윤리적인 방법이 없지는 않다. 한편으론 내키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감정을 벗어나 이성을 찾는다면 못할 것도 없는 방법이다. 바로 그 소음의 장본인과 아는 사이가 되어 친해지는 것이다. 타인의 소음이 견디기 어려운 것은 불신과 냉소 탓이 크다. 공간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서적으로 소외된 채로 살고 있는 도시 현대인은 타인의 침해를 두려워하고 혐오스럽게 생각한다. 누가 피부에 닿거나, 말을 걸거나, 가까이 있거나, 쳐다보기만 해도 우리는 스릴러의 범인과 마주한 것처럼 불안을 느낀다. 미국인들은 공공장소에서 누군가를 수 십 초 이상 주시하는 행위를 삼간다고 한다. 멋 모르는 어린 아이를 데리고 다닐 때는 반드시 아이에게 그 사항을 숙지시켜야 한다.
서로들 그러고 있자니 서로가 야속하고 괘씸하고 울화가 치미는 것 아니겠는가? 고의로 질러대는 가래침 뱉는 소리, 재촉하거나 놀라게 하는 자동차 경적 소리, 옆 사람 들으라고 과장되게 질러대는 헛기침 소리, 노인들의 큰 목소리 등은 소외된 영혼들의 냉소와 불안의 가련한 울부짖음이다.
특히 냄새와 소리는 가장 직접적이고 깊숙이 파고드는 침해이다. 닿거나 쳐다보는 행위는 내 신체 밖에서 벌어지는 잠재적 위협일 뿐이다. 아직 내 안으로 들어온 것은 아니기 때문에, 나는 그것으로부터 피할 수도 있고 외면할 수가 있다. 그러나 냄새나 소리는 이미 내 몸 속으로, 폐부 깊숙이 파고든 하나의 사건이다. 나는 이미 숨을 들이켰고 영혼은 떨렸다. 냄새와 소리는 떨쳐버리거나 외면할 수가 없이, 그냥 감수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 폭력 그 자체인 것이다.
현대의 도시인이 아닌 전통 사회 사람들은 이 폭력을 어떻게 견뎠을까? 바로 공동체 의식을 가짐으로써 그 폭력을 하나의 친숙한 관례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가족이나 친구의 소음을 성가신 것으로 여길 수는 있지만 고통으로 받아들이지는 않듯이, 타인에 대한 불신과 냉소를 없애고 나면 그의 소음이 그럭저럭 견딜만해 진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의 소리가 친숙하게 들리기까지 한다.
모든 존재는 소리를 낸다. 가만히 놓여 있는 책상이나, 심지어는 내가 살고 있는 이 집 자체도 소리를 내고 있다. 대낮에 아무도 없는 집에 혼자 앉아 있어보라. 몸을 부식시키는 시간을 견뎌내며, 커져가는 자신의 영혼의 무게를 짊어지며 끙끙거리는 기압 소리가 집에서, 거리에서, 골목에서, 온통 울려 퍼지고 있는 것을 느낄 수가 있을 것이다. 소리란 바로 존재의 알리바이(alibi) 그 자체이다. 그가, 그 무엇인가가, 누군가가 바로 거기에 있다는 것! 따지고 보면 이것만큼 우리를 안심시키는 일이 또 어디에 있을까?
그러니 당신을 괴롭히는 저 옆 사람의 소음과 친숙해지기 위해, 존재를 받아들이기 위해, 그에게 다가가 인사 한마디 정도를 해보라. 혹시 아는가? 그의 난데없는 다정함에 사랑에 빠질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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