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1'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09/01/28 어색한 포즈와 불안 (15)
  2. 2009/01/19 아버지들의 깃발
  3. 2009/01/10 어떤 아버지
  4. 2009/01/04 굿바이 칠드런

동(洞) 사무소나 구청 같은 곳을 가보면, 어딘지 내 자신이 어색한 포즈를 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왜 이곳에 왔는지를 떠올리며 두리번거리거나, 나의 용무를 맡아줄 공무원이 누구인지를 찾아야 하거나, 어떤 서류를 집어 들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자주 들락거리는 곳이라면 익숙해지겠지만, 그곳은 언제든지 내 의지와는 관계없이 어떤 부름에 의해 가게되는 곳이다. 그래서 일상에서는 잊고 지내는 곳이며 익숙하지 않은 곳이다. 마찬가지로, 갓 들어온 신입사원이나 새내기 학생들을 보면서 우리는 저와 같은 어색한 포즈들을 금새 발견할 수가 있다.

이는 군대에 가본 사람이라면 더 절실히 느껴보았을 것이다. 훈련병 시절 내가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지금 진행하고 있는 이 행위가 끝나고 나면 어떤 행위를 해야할지 전혀 예측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내 동작은 내 의지의 산물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또는 다른 무엇인가의 요구였다. 군대가 훈련병들에게 반복해서 숙지시키려는 것은 개인에 앞선 체계가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군대는 개인에게 모든것을 포기할 것을 끊임없이 권고한다. 이런 이유로 거의 모든 초년병들에게서 볼 수 있는 어색한 몸짓은 바로 의지와 포기의 딜레마에 처한 한 개인의 망설임에 기인한다. 고참이 된 후 내 동료는, 뽀얀 살결을 드러내며 잔뜩 겁에 질려 막 들어온 초년병을 보면서, 내게 이런 말을 했었다: "신참들은 왜 저렇게 한결 같이 똑같지? 다들 겁먹은 얼굴을 하고, 사지가 얼어붙어 뻣뻣하니 말야! 저 우스꽝스럽게 걷고 있는 놈들을 좀 보라구!" 그러나 겉으로 보이는 이 의기양양함 이면에는 포기하기로 작정한 한 인간의 서글픔 같은 것이 있다.

스티븐 소더버그(Steven Souderborg)가 감독한 <카프카>라는 영화에서 주인공 카프카는 문서의 형태로 성(城)의 부름을 받는다. 여차 저차 하여 그는 성의 문서고에 있는 서랍장을 통해 그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우리는 성에 들어간 카프카의 행적을 담은 몇 개의 시퀀스를 목격하게 된다. 그는 신병이라도 된 듯이, 아니면 동사무소에 막 들어간 우리 자신처럼, 여기저기를 서성이며 수상한 포즈를 연출한다. 누가 자신을 부른 것인지, 어디로 가야하는지, . . . 이 방 저 방을 기웃거리며, 들키지나 않을까 숨어보기도 하고, 인기척이 들리면 잔뜩 겁을 집어먹고 얼어붙는다. 이방인이 되어버린 것이다. 제레미 아이언스(Jeremy Irons)는 대체로 저 어색한 포즈를 욕망의 언어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몇 안 되는 연기자 중 한 명이다.

그런데 카프카의 서툴고도 수상한 포즈를 목격하면서 우리는 알 수 없는 불안에 사로잡힌다. 언제든지 그 불안은 서스펜스를 불러들이며, 이 영화가 주는 재미란 바로 그 서스펜스에 있다. 히치콕(Alfred Hitchcok)은 서로 관계 없는 방향으로 나아가던 두 힘이 하나의 지점으로 수렴하는 경향성을 띠고 파국의 상황으로 치닫거나, 균형 잡힌 계획이 깨어질 것을 예고하는 방식으로 서스펜스를 창조한다. 인물들은 자신의 계획을 실현시켜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으면서, 한 편에는 이와 동일한 양의 반 테제의 힘에 직면한다. 가령, <이창>에서 범인을 속임수로 유인하고 그의 집에 숨어들어 증거를 찾는 장면이라든가, <사보타지>에서 길 한가운데 멈춘 자동차와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다른 자동차의 서스펜스라든가, 자유의 여신상에서 하강운동과 상승운동을 봉합했던 소매가 점점 튿어지는 쇼트 등이 그 예이다. 이들은 모두가 파국에 대한 관객의 두려움을 담보로 하여 숨막히는 줄타기 곡예와도 같은 상황을 연출한다. 그 서스펜스의 심층에는 불안이 내재한다. 물론 그것은 인물의 불안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관객, 즉 그 곡예를 목도하고 있는 자의 불안일 것이다. 히치콕의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제임스 스튜어트(James Stuart)의 불안한 눈빛은 도래할 것에 대한 두려움이며, 이것은 그 자신의 것이기보다는(이미 그는 목격하고 있으므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 우리 자신의 불안을 의미한다. 히치콕의 서스펜스는 항상 프레임 밖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언제든지 저 바깥쪽이 문제이다.

따라서 수상하거나 서툰 몸짓은 우리 자신의 두려움을 예증하고 있다. 어떤 두려움? 익숙한 것, 자동화된 것, 매끈한 것이 파괴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대부분의 서스펜스 장르는 자동화된 현실과 그 파국이라는 두 테마를 하나의 구도 안에서 동시에 드러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한 가지 특이한 예로, 이 불안과 두려움을 우스꽝스러운 몸짓으로 표현했던 사람이 바로 채플린(Charlie Chaplin)이다. 그는 순수하게 유쾌한 유머를 구사했던 사람은 아니다. 채플린의 웃음에는 통쾌함이 있기 이전에 불안이 잠재되어 있다. 그래서 그의 유쾌한 해학은 처음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에 맨 나중에 모든 것이 파국으로 돌입하는 순간 발생한다. 이 파국을 끊임없이 지연시키는 사람이 히치콕이라면, 채플린은 이를 기꺼이 드러냄으로써 불안을 웃음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예로, <모던 타임즈>에서 떠돌이의 서툰 몸짓은 제대로 잘 돌아가지 않는 나사못이 됨으로써, 생산라인을 엉망으로 만들고, 결국에는 공장 자체를 파괴하게 된다. 그는 자동화된 몸짓(혹은 사유)을 불안과 견주어 지연시키는 대신에, 궁극적인 파국을 통해 그 자동성을 비웃어버리는 것이다.

결국 카프카나 히치콕 혹은 채플린의 인물들을 보면서 우리가 불안해하는 것은 파국적인 상황에 대한 예고 때문이다.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수상한자를 발견하는 일이 쉽지 않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이러한 일을 주로 매체나 허구를 통해서만 경험한다. 그리고는 이 경험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라고 착각하기도 한다. 주로 매체는 우리에게 실제적인 것에 대한 환각을 통해 어필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조건이 있다. 환각적인 것이 현실적인 믿음이 되려면, 우리 자신의 현실이 자동화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 환각이 더 현실적으로 보일수록 우리는 이미 모든 것에 익숙하게 행동하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모든 일상이 우리에겐 너무나도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는가? 길거리를 다니고, 출근을 하고, 지하철에 앉아 있는 우리 자신을 보라. 수상하거나 어색한 몸짓의 소유자를 찾기가 쉽지 않다. 우리가 공포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은 어디를 가든 이미 수상하거나 서투른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낯선 공간에서조차 금새 그 코드를 해독하여 익숙해 질 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흄(David Hume)이 과학적 현실에 대해 그렇게 말했듯이, 해가 뜨고, 해가 지고, 물이 떨어지고, 별이 뜨는 것처럼, 확고하고도 안정적인 현실을 만드는 것은 바로 반복과 자동이다. 브레히트(Bertolt Brecht)라든가, 러시아 형식주의자라든가, 아니면 벤야민(Walter Benjamin)이라도 좋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현대의 마르크스주의 작가들이 예술을 통해 낯선 장치(alienation)들을 고안하고자 했던 것은, 다름 아닌 익숙하여 자동화된 소외(alienation)에 대한 의식의 대항이었다.

익숙함이 몸에서 일기 시작하면 모든 일들이 마치 죽음 본능에 마취된 듯이 너무나 쉬워지며 편안해 진다. 그러나 이 편안함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는 그와 동일한 양의 불안과 공포를 필요로 한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부정하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반공 교육이 한창이던 내 초등학교 시절 최대의 사건은 간첩에 대한 소문이나 삐라의 발견이었다. 그러나 그 시절 뿐 아니라 지금도 역시 이러한 일들은 실제로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반공체제의 편안한 육체를 보존하기 위해 간첩이나 삐라는 반드시 있어야한다. 그것은 마치 공통의 적(敵)이 설정되고 나면 우정이 돈독해지고, 나아가 우정을 돈독히 하기 위해 공통의 적을 설정하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그것은 우리에게 단순한 허구나 조작이 아니라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사회적 환각이었다. 물론 그것은 언제든지 불안과 공포를 환기시킨다. 우리는 그것을 부정하면서도 요구했던 것이다. 불안의 강도는 바로 저 편안한 육체의 강도와 정확히 비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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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려진 예로, 엥겔스(Friedrich Engels)는 발자크(Honore de Balzac)의 소설이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넘어선 리얼리즘의 승리라고 찬사를 보낸 적이 있었다. 19세기 당시 부르봉 왕조를 지지했던 골수 보수주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발자크가 소설 속에서 보여주었던 관찰과 통찰은 귀족계급의 필연적인 몰락이었기 때문이다. 엥겔스가 발자크의 리얼리즘에서 간파했던 위대함은 그가 비개인성(impersonality)에 도달했다는 사실이었다. 엥겔스에 따르면 진정한 리얼리즘이란 개인의 정치적 신념과 계급 그리고 사회적 이해관계를 넘어서는 상위의 실재에 대한 긍정에 있다. 헨리 제임스(Henry James)라든가 프루스트(Marcel Proust)와 같은 위대한 작가들이 "관점(a point of view)"을 예술가 개인을 넘어서 하나의 세계라고 말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모든 예술의 궁극적 목표 즉 신의 눈을 가질 것!

그러나 이 "신의 눈"이라는 개념을 그렇게 예술적 혹은 역사적으로 거창하게 설명하지 않고도 그 의미를 충분히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일상적 삶 속에서의 작은 윤리를 말해주는 것일 수도 있고, 어떤 작은 사건을 바라보는 진지한 태도를 의미할 수도 있다. 가령, 클린트 이스트우드(Clint Eastwood)의 영화가 좋은 예이다.

그의 영화를 유심히 본 사람들은 잘 알겠지만, 그는 투박한 미국인 답지 않게 꽤 섬세하고, 배려심이 강하고, 사려가 깊다. 말하자면 인생에 대한 깊은 성찰, 아니면 그 맛을 좀 안 다고 할까? 재즈에 대한 깊은 애정에서 나온 섬세함일까?(Charlie Parker에 관한 영화를 비롯하여 이미 그는 재즈에 관한 상당히 수준 높은 영화를 여러 편 만들었다) 어쩌면 정치적으로는 보수주의자이고(그는 공화당 지지자이며, 공화당 집권 당시 공직에도 있었다. 그러나 그 동기에 있어 보수주의적 색채가 분명한 것은 아니었다), 개인적으로는 미국식 관념에 사로잡힌 사람일 수도 있다(그의 영화 대부분은 가족이나 도덕에 있어 미국식 이데올로기가 진하게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화를 보면, 그가 정치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편협한 관점의 소유자는 아님을 느낀다. 그의 작품들을 보고 난 후 짧게 드는 생각은, 한 마디로 그가 뭔가를 좀 아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시시하고 진부해서 거들떠보기도 싫은 미국 상업 영화들 속에 끼어 있는 것이 좀 의아하고, 또 그의 재능이 아까울 만큼.

그의 작품 <아버지들의 깃발>(Flags Of Our Fathers, 2006)은 미국인들의 애국과 영웅주의를 비판 혹은 고무시킨 영화처럼 보이지만, 실은 미국의 문제보다 훨씬 더 중요한 주제를 담고 있다. 물론 이 영화는 미국에 관한 영화이고, 미국적 영화이고, 어떤 점에서는 우리와는 무관한 혹은 어떤 점에서는 미국영화를 볼 때마다 매번 느끼는 그들만의 제스처에 대한 이질감(혹은 역겨움)이 느껴지는, 그래서 우리를 실망시키는 영화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이 작품에서는 놀라운 장면들이 간간히 펼쳐지는데, 초반의 몇 몇 시퀀스에서의 그 "엉성한 전쟁 장면"이 바로 그것이다--어딘가 항상 핀트(focus)를 놓치는 스필버그(Steven Spielberg)가 만든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첫 시퀀스의 장렬한 전투 씬을 비교해보라. 전쟁터에 투입되기 전의 "햇병아리 같은 신병들"(이스트우드는 확실히 미국의 노인이다)과 비교적 의젓한 고참 병사들은 심리적으로 불안해 한다. 그러나 그들은 전쟁을 실감하지는 못한다. 막연한 공포만이 그들의 대화와 표정에 감돌 뿐이다. 심지어는 그것이 죽음인지조차도 감지하지 못한다. 군함에서 장난을 치다가 우연히 한 병사가 바다로 떨어진다. 동료들은 그의 우스꽝스러운 실수에 웃고 떠들며 놀려댄다. 하지만 군함은 그를 구출할 만큼 한가한 작전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므로, 그를 가차없이 버리고 갈 것이고 그는 결국 아무도 구해주지 않아 죽을 것이다.

 전쟁은 이런 식으로 시작한다. 죽음은 아주 우연적이고 사소하게 장난처럼 다가 오지만, 돌이킬 수 없는 어떤 막대함이 더 이상 저항도 거부도 할 수 없이 왔다가 사라져 버린다. 섬에 도착해서도 전쟁은 엉성하게 다가온다. 우리가 상상하는 장렬한 드라마는 고사하고 전쟁이 시작된 것인지 적이 있기나 한 것인지 조차 분간할 수 없는 분위기가 감돈다. 마치 공사장의 인부들처럼 자신 앞에 놓여진 노역의 임무를 수행하듯이, 마치 어제도 해 보았던 일이라는 듯이 일상처럼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 신병은 그 와중으로 끼어들어가 거기서부터 죽음에 적응하고 죽음이 어디쯤에 있는지를 감지해야만 할 것이다. 틀림없이 어디에선가 육중한 철근 덩어리와 금속 탄환들이 이따금씩 순간적으로 날라와 옆에 있는 동료들의 사지를 찢어발기고 머리통을 부수고 있다. 하지만 실감도 나지 않는 장난 같은 전쟁이, 곧 있으면 감독의 컷 소리가 이 모든 것들이 아무 일도 아니었음을 선언할 것 같은, 엉성하고도 어설픈 비극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치열한 싸움과 장렬한 최후는 집으로 되돌아가고 한참이나 지난 후 후방에서만 벌어지는 일처럼.

감각도 없이 얼얼한 상태 속에서 벌어지는 그 엉성한 전쟁장면 전체는 아마도 전쟁에 투입된 신병들의 주관적 관점으로 제시되는 것 같다. 이미 진행되고 있는 죽음들간의 싸움에 점차 적응해야만 하는 시간. 그 첫 전쟁 시퀀스에는 공포가 잠재적으로만 존재한다. 전투 당사자의 주관적 관점! 전쟁의 실상에 대해 그 만큼 객관적인 장면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작품의 핵심은 깃발에 있다: 그 사진 한 장에 찍힌 깃발이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본국의 정치가들은 그 깃발이 미국인의 애국, 전쟁에서의 승리, 영웅의 탄생을 알리는 상징이 되기를 바랬다. 그들은 장병들과 미국인 전체 그리고 더 정확히는 자기 자신들에게 찬사를 보낼 수 있는 깃발을 세우고 싶어했다. 그들의 모든 바램을 표상해주는 하나의 미국, 두 장도 필요 없는 단 하나의 이미지 말이다. 왜냐면 그들은 여전히 전쟁 중이었고, 전쟁을 위해 돈이 필요했고, 지지를 위한 단결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감독이 말하고 싶어하는 바는 분명하다: 사진 한 장이 할 수 없는 일을 영화가 해 주어야 한다; 실상(real image)을 보여주어야 한다; 사진 한 장은 말 수가 너무 적으며 너무 많은 것을 감추고 있다; 그리하여 사건을 어림짐작으로 보게 하고, 현재의 바램을 가지고 과거를 보게 할 소지가 크다; 바램을 비추어 감미로운 색채를 덧붙여 볼 것이 아니라, 과거를 과거 그 자체로서, 가급적이면 무미건조한 상태 그대로,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한 번 보자; 찬사 역시 근거 없는 비난 만큼이나 또 하나의 왜곡일 수 있다; 거짓말쟁이들에게 여지를 주지 말자!

이스트우드가 생각하기에 사진은 아주 위험한 매체이다("모든 문제는 사진 한 장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것은 우리의 편협한 지각처럼 실상으로부터 시간의 지속을 빼고 흔적과 자취만을 남김으로써, 현재 우리가 필요로 하는 정경유착적 유혹에 따라 과거를 바라보게 할 소지가 크다. 그것은 과거의 왜곡, 존재의 왜곡, 삶의 왜곡이 될 수 있다. 사진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감독의 뜻을 해석해보면,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진실이란 물질적 감각의 문제가 아니라 시간과 지속의 문제라는 것이다. "병사들이 깃발을 꽂았다!"가 아니라, "어떤 병사들이 언제 어떻게 어디서 무엇 때문에 . . . . 깃발을 꽂았는가!"여야 한다. 한 장의 사진 속에 수 백 권 분량의 책을 집어넣어야만 한다.

이 때문에 이야기는 시종일관 그 깃발 사진의 알리바이를 파헤치는 롱 컷의 형사물(detective story)처럼 진행된다. 미학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보도를 하듯이, 깃발이 어떻게 세워지게 되었으며, 누가 맨 처음 세웠고, 깃발은 어디에서 가져왔고, 누가 그것을 가져왔고, 누가 세우라고 지시를 내렸고, 몇 시에 언제, 세울 때의 각도는 어떠했고, 대기 상태는 어땠는지, 깃발을 세우고 난 후 병사들의 기분은 어땠는지, 일본군은 어디에 있었는지, 사진은 누가 어떤 카메라로 어떤 각도에서 언제 찍었는지, 왜 하필이면 그 장면을 찍었는지, 영웅을 만들려고 찍었는지, 그 문맥 속에 영웅이 있었는지, . . . 이 모든 물음과 대답들은 형사가 조서를 꾸미듯, 범행 사후 검증 프로그램을 짜듯이 하나씩 하나씩 제시된다. 사진을 빌미로 정치적으로 채색되었던 어떤 비극적 혹은 영웅적 드라마가 건조한 사실들로 해부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감독이 도달한 실상에 대한 결론은 무엇일까? 바로 이것이다: 우리가 상상했던 사진 속 영웅들의 깃발장면은 너무나 실망스럽고, 클라이맥스도 없으며, 무슨 사건이라고도 할 수 없이 흔하고도 우연한 일에 불과했다; 실상을 구체적으로 따져보면, 우리가 생각해 왔듯이 그렇게 영웅적인 존재나 악당의 감동적인 드라마는 존재하지 않는다; 깃발을 꽂는 행위 역시 언제 그것이 일어났는지조차 분간이 안 될 정도의 하나의 지리멸렬한 사실로 흩어질 뿐이다; 실상 안에는 적도 없고 편도 없고 장렬한 음악도 없고 자세히 보려는 클로즈업도 없고 기억에 오래 새기기 위한 슬로우 모션도 없다; 다만 육체와 포탄의 순간적인 충돌들만이 메아리 칠 뿐이다; 말할 수 없이 엉성하고도 어설픈 전쟁의 다른 절차들처럼(전쟁만큼 억지스럽고 엉성한 폭력이 또 있을까?), 깃발을 거는 행위 역시 전투의 한 절차였을 뿐이며, 전투가 끝난 것도 아니었으므로 승리의 선언조차 될 수 없는 그런 것이었다; 오히려 깃발이 걸린 후 한참 동안이나 죽음의 전투가 계속되었다; 사진 한 장이 그 사소한 지점에서 흔적을 남김으로써, 추악한 탐욕을 가진 어떤 집단적 망상이 일부러 오해를 하도록 여지를 주었다; 구체성에 도달할수록 우리가 대면하게 되는 것은 사소하고 우연적인, 심지어는 모호한 대상과 마주하게 된다; 그들이 겪은 그 견딜 수 없는 고통이란 그렇게 명분도 없고, 이유도 없고, 드라마도, 영웅도 없는 모호성으로부터, 사소한 것으로부터 이유도 없이 나자빠지면서부터 시작되었을 뿐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영웅이 아니라 전쟁의 실상을 겪은 실제의 신병들, 그들 각각의 자신의 모습이다; 영웅과 악당이 대립하는 뜨거운 세계는 사후(事後)에 누군가의 필요가 만들어낸 낭만일 뿐이며, 그것은 바로 거기에 있었던 실상의 개인들에 대한 무례이다; 객관성의 상징인 사진 한 장만으로도 우리는 낭만적 열광의 거짓으로 무례를 범한다; 애국과 단결과 영웅의 탄생을 선언하는 깃발은 전쟁을 막아주고 형제의 목숨을 지켜주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전쟁을 필요로 하는 존재이다; 영웅의 깃발은 적으로 하여금 무기를 버리게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우리 자신의 무기를 버리게 하지는 못한다; 전쟁을 그만두기 위해, 전쟁의 억지스럽고도 무지막지한 실상을 겪은 작은 사람들을 제대로 보기 위해, 우리가 해왔던 모든 찬사들을 철회하자! 그들에게 보냈던 모든 환호성에 찬물을 끼얹자!

이것이 바로 영화 전체에 걸쳐 "전장에서의 실제 상황"과 "본국에서의 찬사"를 그리피스(David Wark Griffith)식으로(그 목적은 전혀 다르게) 계속해서 나란히 교차로 편집했던 이유일 것이다.

전쟁 영화를 보면서 후방의 안방의 우리들은 모두가 형식주의자 및 유미주의자가 된다. 마리네티(Filippo Marinetti)의 선언문을 암송하듯이, 우리는 전쟁의 형식미와 전장의 다이나믹을 만끽한다.

   

용맹스럽게 돌진하는 군인들, 터지는 포탄의 카리스마, 화염방사기가 내뿜는 불꽃의 현란한 색채, 나자빠지는 육체들이 표현하는 가공할 기술주의의 힘, 에너지, 속도, 그리고 그 모든 미래적 활력과 미를 하나의 응축된 힘으로 보존하는 위대한 신 즉 자본! 그러나 이 철없는 미학과는 무관하게, 전쟁 영화란 전쟁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영화이다. 그 결과 그 어떤 찬사와 미학도 허용되지 않는, 스스로 소멸되어가거나 스스로를 부정하고 자신의 미를 일그러뜨리는 길을 간다. 명목상 진정한 전쟁 영화는 다큐멘터리 혹은 보도 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아버지들의 깃발>은 그 정치적 관점에 있어 여전히 애송이 티를 벗지 못한 작품이긴 하지만(후속 작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는 그 보다 더 어설픈 문화적 편협이 있다), 그럼에도 미적인 것을 가급적 지양하면서 개인의 실상(전쟁의 실상은 아닌)을 보려는 노력이 가시지 않고 있다.

이 작품을 이렇게 요약해보자: "움직이는 영상을 통해 사리를 밝히고 따져봄으로써, 개인들의 구체적 실상을 보고자 하는 영화적 노력"(이스트우드는 눈매만큼이나 꼬장꼬장한 노인네이다). 이것이 우리의 정신에 기여하는 바가 있다면, 구체성을 사진의 감각-물리적 객관성이 아니라 시간-지속의 관점에서 접근하게 해주었다는데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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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대화를 즐겼다. 대화는 언제나 그의 높이를 확인시켜주곤 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얼마나 되는지, 쌓아놓은 것이 얼마나 많은지, 대화는 그러한 재산목록을 확인하고 세어보는 만국 박람회와도 같았다. 모두들 관객처럼 그의 앞에 모여 그가 자랑하는 전리품들을 구경했고, 그러한 것들을 소유하지 못했거나 소유하길 염원하는 그들은 찬사를 보냈다. 그는 흡족해했다. 그는 책을 꽤 읽는 편이었지만, 대부분은 그 박람회를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진열된 목록, 이국적인 이름, 새로운 명칭들이 그의 입에서 쉼없이 암송되었고, 옆자리의 관객들은 그것에 의아해 했지만, 그의 취향으로볼때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는 언제나 대상을 소유하고, 윤곽선을 분명하게 해 놓아야만 만족스러움을 느꼈다. 아무도 부른적이 없거나 이름이 없는 것은 그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결혼을 해야만이 사랑을 얻을 수 있다고 보았던 알베르트처럼, 그는 모든 것과 결혼하고 싶어했다. 심지어 그는 음악조차도 다른 장식물들처럼 선반 위에 놓아두길 원했다. 그래서 그는 큰 소리로 터져나오는 음악은 견디질 못했다. 누군가가 그에게 그 점을 지적하자, 그는 마치 자랑처럼 이렇게 말했다: "그래서 난 항상 음악한테 미안해!" 그는 언젠가는 그 소유물들이 자신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음을 느낄 것이다. 늙어가고 있는 그는, 아니 이미 많이 훌쩍 늙어버린 그는 그것을 조금씩 알기 시작했다. 점점 허기가 지고, 뺨이 야위고, 추해진 몰골에 허리가 휘어, 더 이상 대상 조차 바라볼 수 없게 될 날이 머지 않았음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그는 요즘 말이 많아졌다. 내뱉은 그 모든 단어들이 마치 자신의 소유물인냥, 식사나 술자리에 앉으면 숨쉬기가 버거울 정도로 말이 많았다. 이상한 것은, 그 많은 소유물을 확인하는 절차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 많아질수록 허기는 더 깊어진다는 사실이었다. 우리 모두는 그가 늙어가고 있는 증거라고 생각했다. 그와의 식사는 언제나 빨리 끝났다. 대화를 위해서가 아니라, 고깃국물 속의 고기가 쉽게 동이나 버렸기 때문이었다. 고기에서 국물이 흘러나올때까지 기다릴 만큼 그와 우리는 느긋하지 못했으며, 다른 사람과 함께 국물을 떠 먹는다는 사실을 유쾌하게 여기지 않았다. 윤곽선도 분명치 않고, 그 출처조차 분간할 수 없어 보이는, 모호하기 짝이 없는 그 국물을 너무나도 싫어했던 사람이 바로 그 였으며, 그에게 찬사를 보내던 우리들 역시 감염이 되어, 어느새 그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액체 자체가 그에겐 일종의 파괴였으며 침략이었다. 그냥 두었더라면 국물이 되었을 고깃덩이를 얌체들처럼 빼가는 바람에, 더 이상 국그릇엔 육수가 없었다. 조미료 향내만 진동하는 김빠진 맹물만이 고여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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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일즈 데이비스(Miles Davis)의 트럼펫 연주가 멋진 <사형대의 엘리베이터>(Ascenseur Pour L'echafaud, 1958)로 잘 알려져 있는 프랑스의 영화감독 루이 말(Louis Malle). 그의 1987년도 작품 <굿바이 칠드런>(Au Revoir Les Enfants)이 최근에 시네큐브(Cinecube)에서 상영되고 있다(그 밖에 여러 작품들을 포함해서). 루이 말은 프랑스인지만 영미문화의 색채를 가장 많이 가진 작가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그의 작품 <아틀란틱 시티>(Atlantic City, 1980)나 <데미지>(Damage, 1992)등은 영어로 제작되었고 각각 미국과 영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굿바이 칠드런> 역시 프랑스(어)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지만, 엮어가는 짜임새가 비교적 영미권의 글쓰기 전통과 상통하는 측면이 없지 않다. 예컨대 정치적인 문제(독일의 침략, 유태인 문제, 소수자 문제 등)를 소재로 하고 있으면서도, 그 기저에는 윤리적 교육의 테마들(관용, 규율, 공존)이 지탱하고 있는데, 영미권의 냄새는 아마도 그 윤리적 접근방식에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작품은 프랑스 영화이고, 프랑스를 위한 영화이고, 프랑스적인 것이 무엇인지에 관한 영화이다. 카톨릭 신앙을 기반으로 한 작은 공동체의 울타리 안에서, 그들이 어떻게 자유를 존중하고 우애와 관용을 미덕으로 여기며 살고 있는지, 우리는 어린 학생들과 그들을 보호하는 어른들의 생활 속에서 조용히 목격하게 된다. 독일과는 전혀 다른 프랑스적인 규율이 현시되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나이지리아 작가인 아체베(Chinua Achebe)는 자신의 소설 <모든 것은 무너져 버린다>(Things Fall Apart)에서 아프리카 원주민의 내적인 삶(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을 길게 보여주었는데, 이를 읽은 우리는 비로소 서구인의 눈이 아니라, 모든 예술의 궁극적 목표인 신의 눈이 되어, 그 자신 안에서 살고 있는 나이지리아 원주민의 진정함을 보게 된다. 루이 말이 도달하고자 했던 것도 바로 이와 유사한 노력, 즉 침략자 독일인과는 무관하게 존재하는 온전히 프랑스적인 규율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프랑스인에게는 다른 나라에는 없는 특유의 관대함이 있다. 이 작품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요소인데, 이는 아이들을 대하는 어른들의 태도에 잘 나타난다. 아이들은 짓궂게 장난을 치고, 심하게 싸우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받는다. 그래도 어른들은 그들을 말리는 경우는 있지만 바로잡기 위해 벌을 주거나 강요를 하지는 않는다. 이는 법치국가 미국이 법적 숙고의 결과를 교육체계에 반영시킨 인권존중의 개념과는 다르다. 그 관대함에는 오랫동안 대물림 해오면서 축적된 인간을 대하는 문화적 본능 같은 것이 있다. 영화 뿐만 아니라 프랑스 문화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느꼈을 법 한데, 그들의 사회 정치적 진보에 대한 열정에도 불구하고, 어디선가 프루스트(Marcel Proust)가 "조그마한 삶(la vie petit)"이라는 말로 가장 멋지게 표현했던, 인간의 작은 몸짓들에 대한 깊은 애정이 배어 있다. 많은 누벨바그(Nouvelle Vague) 집단의 멤버들, 특히 트뤼포(Francois Truffaut)나 루이 말 같은 감독들이 이미지를 왜곡 없이 담고자 했던 것은 다름 아닌 그 애정에서 발산되어 나오는 따뜻한 온도였다. 그들의 관용과 자유의 아상블라주가 발산하는 온도는 정(情)에 기반한 한국인의 정서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따뜻함이다.

그 관대함 때문인지는 몰라도, 독일의 나치스는 프랑스인의 교육과 삶 전체에 규율이 없다고 생각한다. 작품 속에서 독일 게슈타포 장교가 프랑스 아이들을 세워 놓고 "프랑스인에게는 규율이 없다"고 충고한다. 사실 독일군이 유대인을 잡으러 학교에 침입해오기 전까지, 작품의 전체 내용은 프랑스 아이들의 부산한 장난질과 사소한 싸움들, 그리고 아마도 부모에게서 그 방법을 배워 타인을 헐뜯거나, 질투를 하고, 자기만의 탐욕을 위해 개인물품을 암거래하는 장면들로 채워진다. 아이들의 이러한 소란들은 전쟁의 폭력적 상황, 유태인과의 불화 혹은 긴장, 독일의 점령과 같은 위태로운 정치적 환경과 나란히 등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그 작은 시골 마을의 카톨릭 학교는 단단한 기반 위에 안정된 상태로 서 있는 것 같다. 아마도 그 이유는 부산하고 소란한 삶의 밑바닥에 여전히 굳건하게 버티고 있는 자기규율 같은 것 때문이 아닐까 싶다. 살기 위해 불가피하게 터득한 이기적인 습성을 드러내고, 타인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동안에도, 쥴리앙과 보네의 불화와 화해가 그랬듯이, 지나친 것이 무엇인지, 언제 화해를 해야 할지, 또 잃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려면 당사자로서의 자기 자신을 이해관계로부터 잠재적으로 끄집어낼 줄 알아야 한다. 그랬을 때 비로소 그들은 서로 상처를 받는 동안에도, 그것이 그들의 관계를 해치는 그런 상처일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작품은 자기 규율에 관한 영화이다. 신부가 부유층 학부형들 앞에서 "부자들의 탐욕과 종교적 구원의 관계"에 관하여 감동적인 연설을 했을 때, 바로 자기 규율에 대해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작품이 우리에게(한국의 관객에게) 감명을 주는 이유는 친구간의 우정 때문도, 종교적 희생이나 배려 때문도 아닌, 바로 자기규율에서 비롯되는 "윤리적 단호함" 때문이다.

윤리적 단호함은 민족이나 인종 그리고 무엇보다도 종교를 초월해 있다. 가톨릭 신부가 목숨을 걸고 유대인 소년인 장 보네를 나치로부터 은닉해 준 것은 종교적 동기(오히려 방해가 되었을)에서가 아니라 순전히 윤리적 동기였다. 신부의 연설에 감동을 받은 보네는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카톨릭 성체 의식을 받으려 하지만, 신부는 이를 거절한다. 학생들에게 반복해서 가르치는 교육에서도 나타난 바, 신부는 "타자가 함께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또 그러려면 어떠한 단호함이 있어야 하는지를 가르치고 싶었던 것이다.

집에서 가져온 개인 물품을 암거래하는 행위를 신부가 가장 싫어했던 이유도 정확히 같은 이유에서이다. 이 작품에는 두 명의 소수자가 등장한다. 하나는 물론 유대인 장 보네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적 소수자이다. 그는 살기 위해 나치를 피해 역사적 종교적 갈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톨릭 공동체에 숨어 있다. 다른 하나는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어떤 점에서는 장 보네 보다 더 이 작품의 핵심이랄 수 있는 사회적 소수자 즉 조셉이다. 조셉은 이 학교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일종의 하인 청년이다. 장 보네는 위태롭게 피신해 있는 처지이기는 하지만, 수학, 음악, 독서 등 다른 아이들에 비해 지적으로 우수하기 때문에 주변의 선망과 사랑 그리고 질투를 동시에 받는다. 반면에 조셉은 피신해 있는 처지는 아니지만, 비교적 부유층 자제인 학생들에 비해 배우지 못했고, 사회적으로 천한 신분에 속한 소년이다. 그래서 가끔씩 거만한 학생들의 괄시와 무시를 받는다("유대인은 자기네 집으로! 조셉은 돼지 우리로!"). 그런데 조셉은 학교의 물품을 몰래 빼돌려 외부인들과 암거래를 해오고 있다. 학생들이 집에서 가져온 개인 물품들은 교칙상 함께 공유하도록 되어 있지만, 조셉이 학생들과 비밀리에 거래를 하여 개인 물품조차 외부로 팔아먹는 것이다. 결국 이 사실은 신부에게 들통이 나고, 분노한 신부는 암거래를 했던 학생들을 처벌하고, 조셉은 학교에서 쫓겨난다. 이에 앙심을 품은 조셉은 신부가 유대인을 숨겨주고 있음을 게슈타포에게 밀고하고, 독일군이 학교에 침입하여 장 보네 등 학교에 숨은 유대인과 신부를 끌고가 죽인다.

암거래를 했던 학생들과 조셉에 대한 신부의 비판은, 당시 유태인과 외국인을 자기의 땅에서 몰아내겠다고 난리를 치고 다니는 게슈타포 독일군과, 대신해서 그래 주기를 은근히 바라는 유럽 사회의 냉소에 대한 비판과도 맞닿아 있다: 암거래자인 조셉이나 줄리앙 그리고 유럽인 전체는 혼자만의 방 안에서 쨈을 홀짝거리며 숫가락을 빨아대는 초라한 이기주의자 외에 그 무엇도 아니라는 것, 이들의 탐욕스러운 행동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자유와 능력을 자신만을 위해 사용함으로써 자신들이 속한 사회를 차디찬 동토의 섬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특히 조셉의 무지한 암거래에 대한 신부의 태도, 그리고 조셉의 밀고에 대한 줄리앙의 태도는 대단히 단호하기 그지없다. 바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네가 약자라고 해서, 소외되고 가여운 어린 양이라고 해서, 부자들에게 천시를 받았다고 해서, 너의 무지한 행동에 비해 다소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고 해서, 그렇게 탐욕을 쫓아 암거래를 하고, 유대인과 신부를 밀고한 것이 정당한 행위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네가 약자라고 해서 널 용서할 수는 없다. 너는 무지했고, 그 무지로 인해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갔다. 나는 너를 비판하고 규탄한다. 힘들게 산다고 해서, 먹고 살기 바쁘다고 해서, 모든 것이 너의 책임이 아니라고 호소하는 듯한 그 역겨운 표정을 하고 있는 면상에 따귀를 갈겨주고 싶다. 너에게도 네 자신에 대한 단호함은 있어야 한다. 아니 그 누구보다도 더. 관대함이 필요하다면 그로부터 나온 것이어야만 한다. 소수자와 약자란 다름 아닌 그 불투명해진 단호함의 희생자이기 때문이다.

Posted by hu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