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洞) 사무소나 구청 같은 곳을 가보면, 어딘지 내 자신이 어색한 포즈를 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왜 이곳에 왔는지를 떠올리며 두리번거리거나, 나의 용무를 맡아줄 공무원이 누구인지를 찾아야 하거나, 어떤 서류를 집어 들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자주 들락거리는 곳이라면 익숙해지겠지만, 그곳은 언제든지 내 의지와는 관계없이 어떤 부름에 의해 가게되는 곳이다. 그래서 일상에서는 잊고 지내는 곳이며 익숙하지 않은 곳이다. 마찬가지로, 갓 들어온 신입사원이나 새내기 학생들을 보면서 우리는 저와 같은 어색한 포즈들을 금새 발견할 수가 있다.
이는 군대에 가본 사람이라면 더 절실히 느껴보았을 것이다. 훈련병 시절 내가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지금 진행하고 있는 이 행위가 끝나고 나면 어떤 행위를 해야할지 전혀 예측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내 동작은 내 의지의 산물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또는 다른 무엇인가의 요구였다. 군대가 훈련병들에게 반복해서 숙지시키려는 것은 개인에 앞선 체계가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군대는 개인에게 모든것을 포기할 것을 끊임없이 권고한다. 이런 이유로 거의 모든 초년병들에게서 볼 수 있는 어색한 몸짓은 바로 의지와 포기의 딜레마에 처한 한 개인의 망설임에 기인한다. 고참이 된 후 내 동료는, 뽀얀 살결을 드러내며 잔뜩 겁에 질려 막 들어온 초년병을 보면서, 내게 이런 말을 했었다: "신참들은 왜 저렇게 한결 같이 똑같지? 다들 겁먹은 얼굴을 하고, 사지가 얼어붙어 뻣뻣하니 말야! 저 우스꽝스럽게 걷고 있는 놈들을 좀 보라구!" 그러나 겉으로 보이는 이 의기양양함 이면에는 포기하기로 작정한 한 인간의 서글픔 같은 것이 있다.
스티븐 소더버그(Steven Souderborg)가 감독한 <카프카>라는 영화에서 주인공 카프카는 문서의 형태로 성(城)의 부름을 받는다. 여차 저차 하여 그는 성의 문서고에 있는 서랍장을 통해 그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우리는 성에 들어간 카프카의 행적을 담은 몇 개의 시퀀스를 목격하게 된다. 그는 신병이라도 된 듯이, 아니면 동사무소에 막 들어간 우리 자신처럼, 여기저기를 서성이며 수상한 포즈를 연출한다. 누가 자신을 부른 것인지, 어디로 가야하는지, . . . 이 방 저 방을 기웃거리며, 들키지나 않을까 숨어보기도 하고, 인기척이 들리면 잔뜩 겁을 집어먹고 얼어붙는다. 이방인이 되어버린 것이다. 제레미 아이언스(Jeremy Irons)는 대체로 저 어색한 포즈를 욕망의 언어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몇 안 되는 연기자 중 한 명이다.
그런데 카프카의 서툴고도 수상한 포즈를 목격하면서 우리는 알 수 없는 불안에 사로잡힌다. 언제든지 그 불안은 서스펜스를 불러들이며, 이 영화가 주는 재미란 바로 그 서스펜스에 있다. 히치콕(Alfred Hitchcok)은 서로 관계 없는 방향으로 나아가던 두 힘이 하나의 지점으로 수렴하는 경향성을 띠고 파국의 상황으로 치닫거나, 균형 잡힌 계획이 깨어질 것을 예고하는 방식으로 서스펜스를 창조한다. 인물들은 자신의 계획을 실현시켜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으면서, 한 편에는 이와 동일한 양의 반 테제의 힘에 직면한다. 가령, <이창>에서 범인을 속임수로 유인하고 그의 집에 숨어들어 증거를 찾는 장면이라든가, <사보타지>에서 길 한가운데 멈춘 자동차와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다른 자동차의 서스펜스라든가, 자유의 여신상에서 하강운동과 상승운동을 봉합했던 소매가 점점 튿어지는 쇼트 등이 그 예이다. 이들은 모두가 파국에 대한 관객의 두려움을 담보로 하여 숨막히는 줄타기 곡예와도 같은 상황을 연출한다. 그 서스펜스의 심층에는 불안이 내재한다. 물론 그것은 인물의 불안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관객, 즉 그 곡예를 목도하고 있는 자의 불안일 것이다. 히치콕의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제임스 스튜어트(James Stuart)의 불안한 눈빛은 도래할 것에 대한 두려움이며, 이것은 그 자신의 것이기보다는(이미 그는 목격하고 있으므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 우리 자신의 불안을 의미한다. 히치콕의 서스펜스는 항상 프레임 밖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언제든지 저 바깥쪽이 문제이다.
따라서 수상하거나 서툰 몸짓은 우리 자신의 두려움을 예증하고 있다. 어떤 두려움? 익숙한 것, 자동화된 것, 매끈한 것이 파괴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대부분의 서스펜스 장르는 자동화된 현실과 그 파국이라는 두 테마를 하나의 구도 안에서 동시에 드러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한 가지 특이한 예로, 이 불안과 두려움을 우스꽝스러운 몸짓으로 표현했던 사람이 바로 채플린(Charlie Chaplin)이다. 그는 순수하게 유쾌한 유머를 구사했던 사람은 아니다. 채플린의 웃음에는 통쾌함이 있기 이전에 불안이 잠재되어 있다. 그래서 그의 유쾌한 해학은 처음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에 맨 나중에 모든 것이 파국으로 돌입하는 순간 발생한다. 이 파국을 끊임없이 지연시키는 사람이 히치콕이라면, 채플린은 이를 기꺼이 드러냄으로써 불안을 웃음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예로, <모던 타임즈>에서 떠돌이의 서툰 몸짓은 제대로 잘 돌아가지 않는 나사못이 됨으로써, 생산라인을 엉망으로 만들고, 결국에는 공장 자체를 파괴하게 된다. 그는 자동화된 몸짓(혹은 사유)을 불안과 견주어 지연시키는 대신에, 궁극적인 파국을 통해 그 자동성을 비웃어버리는 것이다.
결국 카프카나 히치콕 혹은 채플린의 인물들을 보면서 우리가 불안해하는 것은 파국적인 상황에 대한 예고 때문이다.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수상한자를 발견하는 일이 쉽지 않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이러한 일을 주로 매체나 허구를 통해서만 경험한다. 그리고는 이 경험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라고 착각하기도 한다. 주로 매체는 우리에게 실제적인 것에 대한 환각을 통해 어필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조건이 있다. 환각적인 것이 현실적인 믿음이 되려면, 우리 자신의 현실이 자동화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 환각이 더 현실적으로 보일수록 우리는 이미 모든 것에 익숙하게 행동하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모든 일상이 우리에겐 너무나도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는가? 길거리를 다니고, 출근을 하고, 지하철에 앉아 있는 우리 자신을 보라. 수상하거나 어색한 몸짓의 소유자를 찾기가 쉽지 않다. 우리가 공포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은 어디를 가든 이미 수상하거나 서투른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낯선 공간에서조차 금새 그 코드를 해독하여 익숙해 질 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흄(David Hume)이 과학적 현실에 대해 그렇게 말했듯이, 해가 뜨고, 해가 지고, 물이 떨어지고, 별이 뜨는 것처럼, 확고하고도 안정적인 현실을 만드는 것은 바로 반복과 자동이다. 브레히트(Bertolt Brecht)라든가, 러시아 형식주의자라든가, 아니면 벤야민(Walter Benjamin)이라도 좋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현대의 마르크스주의 작가들이 예술을 통해 낯선 장치(alienation)들을 고안하고자 했던 것은, 다름 아닌 익숙하여 자동화된 소외(alienation)에 대한 의식의 대항이었다.
익숙함이 몸에서 일기 시작하면 모든 일들이 마치 죽음 본능에 마취된 듯이 너무나 쉬워지며 편안해 진다. 그러나 이 편안함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는 그와 동일한 양의 불안과 공포를 필요로 한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부정하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반공 교육이 한창이던 내 초등학교 시절 최대의 사건은 간첩에 대한 소문이나 삐라의 발견이었다. 그러나 그 시절 뿐 아니라 지금도 역시 이러한 일들은 실제로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반공체제의 편안한 육체를 보존하기 위해 간첩이나 삐라는 반드시 있어야한다. 그것은 마치 공통의 적(敵)이 설정되고 나면 우정이 돈독해지고, 나아가 우정을 돈독히 하기 위해 공통의 적을 설정하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그것은 우리에게 단순한 허구나 조작이 아니라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사회적 환각이었다. 물론 그것은 언제든지 불안과 공포를 환기시킨다. 우리는 그것을 부정하면서도 요구했던 것이다. 불안의 강도는 바로 저 편안한 육체의 강도와 정확히 비례한다.
우리가 상상하는 장렬한 드라마는 고사하고 전쟁이 시작된 것인지 적이 있기나 한 것인지 조차 분간할 수 없는 분위기가 감돈다. 마치 공사장의 인부들처럼 자신 앞에 놓여진 노역의 임무를 수행하듯이, 마치 어제도 해 보았던 일이라는 듯이 일상처럼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 신병은 그 와중으로 끼어들어가 거기서부터 죽음에 적응하고 죽음이 어디쯤에 있는지를 감지해야만 할 것이다. 틀림없이 어디에선가 육중한 철근 덩어리와 금속 탄환들이 이따금씩 순간적으로 날라와 옆에 있는 동료들의 사지를 찢어발기고 머리통을 부수고 있다. 하지만 실감도 나지 않는 장난 같은 전쟁이, 곧 있으면 감독의 컷 소리가 이 모든 것들이 아무 일도 아니었음을 선언할 것 같은, 엉성하고도 어설픈 비극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치열한 싸움과 장렬한 최후는 집으로 되돌아가고 한참이나 지난 후 후방에서만 벌어지는 일처럼.
이에 대해 감독이 말하고 싶어하는 바는 분명하다: 사진 한 장이 할 수 없는 일을 영화가 해 주어야 한다; 실상(real image)을 보여주어야 한다; 사진 한 장은 말 수가 너무 적으며 너무 많은 것을 감추고 있다; 그리하여 사건을 어림짐작으로 보게 하고, 현재의 바램을 가지고 과거를 보게 할 소지가 크다; 바램을 비추어 감미로운 색채를 덧붙여 볼 것이 아니라, 과거를 과거 그 자체로서, 가급적이면 무미건조한 상태 그대로,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한 번 보자; 찬사 역시 근거 없는 비난 만큼이나 또 하나의 왜곡일 수 있다; 거짓말쟁이들에게 여지를 주지 말자!
실상을 구체적으로 따져보면, 우리가 생각해 왔듯이 그렇게 영웅적인 존재나 악당의 감동적인 드라마는 존재하지 않는다; 깃발을 꽂는 행위 역시 언제 그것이 일어났는지조차 분간이 안 될 정도의 하나의 지리멸렬한 사실로 흩어질 뿐이다; 실상 안에는 적도 없고 편도 없고 장렬한 음악도 없고 자세히 보려는 클로즈업도 없고 기억에 오래 새기기 위한 슬로우 모션도 없다; 다만 육체와 포탄의 순간적인 충돌들만이 메아리 칠 뿐이다; 말할 수 없이 엉성하고도 어설픈 전쟁의 다른 절차들처럼(전쟁만큼 억지스럽고 엉성한 폭력이 또 있을까?), 깃발을 거는 행위 역시 전투의 한 절차였을 뿐이며, 전투가 끝난 것도 아니었으므로 승리의 선언조차 될 수 없는 그런 것이었다; 오히려 깃발이 걸린 후 한참 동안이나 죽음의 전투가 계속되었다; 사진 한 장이 그 사소한 지점에서 흔적을 남김으로써, 추악한 탐욕을 가진 어떤 집단적 망상이 일부러 오해를 하도록 여지를 주었다; 구체성에 도달할수록 우리가 대면하게 되는 것은 사소하고 우연적인, 심지어는 모호한 대상과 마주하게 된다; 그들이 겪은 그 견딜 수 없는 고통이란 그렇게 명분도 없고, 이유도 없고, 드라마도, 영웅도 없는 모호성으로부터, 사소한 것으로부터 이유도 없이 나자빠지면서부터 시작되었을 뿐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영웅이 아니라 전쟁의 실상을 겪은 실제의 신병들, 그들 각각의 자신의 모습이다; 영웅과 악당이 대립하는 뜨거운 세계는 사후(事後)에 누군가의 필요가 만들어낸 낭만일 뿐이며, 그것은 바로 거기에 있었던 실상의 개인들에 대한 무례이다; 객관성의 상징인 사진 한 장만으로도 우리는 낭만적 열광의 거짓으로 무례를 범한다; 애국과 단결과 영웅의 탄생을 선언하는 깃발은 전쟁을 막아주고 형제의 목숨을 지켜주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전쟁을 필요로 하는 존재이다; 영웅의 깃발은 적으로 하여금 무기를 버리게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우리 자신의 무기를 버리게 하지는 못한다; 전쟁을 그만두기 위해, 전쟁의 억지스럽고도 무지막지한 실상을 겪은 작은 사람들을 제대로 보기 위해, 우리가 해왔던 모든 찬사들을 철회하자! 그들에게 보냈던 모든 환호성에 찬물을 끼얹자!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작품은 프랑스 영화이고, 프랑스를 위한 영화이고, 프랑스적인 것이 무엇인지에 관한 영화이다. 카톨릭 신앙을 기반으로 한 작은 공동체의 울타리 안에서, 그들이 어떻게 자유를 존중하고 우애와 관용을 미덕으로 여기며 살고 있는지, 우리는 어린 학생들과 그들을 보호하는 어른들의 생활 속에서 조용히 목격하게 된다. 독일과는 전혀 다른 프랑스적인 규율이 현시되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나이지리아 작가인 아체베(Chinua Achebe)는 자신의 소설 <모든 것은 무너져 버린다>(Things Fall Apart)에서 아프리카 원주민의 내적인 삶(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을 길게 보여주었는데, 이를 읽은 우리는 비로소 서구인의 눈이 아니라, 모든 예술의 궁극적 목표인 신의 눈이 되어, 그 자신 안에서 살고 있는 나이지리아 원주민의 진정함을 보게 된다. 루이 말이 도달하고자 했던 것도 바로 이와 유사한 노력, 즉 침략자 독일인과는 무관하게 존재하는 온전히 프랑스적인 규율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집에서 가져온 개인 물품을 암거래하는 행위를 신부가 가장 싫어했던 이유도 정확히 같은 이유에서이다. 이 작품에는 두 명의 소수자가 등장한다. 하나는 물론 유대인 장 보네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적 소수자이다. 그는 살기 위해 나치를 피해 역사적 종교적 갈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톨릭 공동체에 숨어 있다. 다른 하나는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어떤 점에서는 장 보네 보다 더 이 작품의 핵심이랄 수 있는 사회적 소수자 즉 조셉이다. 조셉은 이 학교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일종의 하인 청년이다. 장 보네는 위태롭게 피신해 있는 처지이기는 하지만, 수학, 음악, 독서 등 다른 아이들에 비해 지적으로 우수하기 때문에 주변의 선망과 사랑 그리고 질투를 동시에 받는다. 반면에 조셉은 피신해 있는 처지는 아니지만, 비교적 부유층 자제인 학생들에 비해 배우지 못했고, 사회적으로 천한 신분에 속한 소년이다. 그래서 가끔씩 거만한 학생들의 괄시와 무시를 받는다("유대인은 자기네 집으로! 조셉은 돼지 우리로!"). 그런데 조셉은 학교의 물품을 몰래 빼돌려 외부인들과 암거래를 해오고 있다. 학생들이 집에서 가져온 개인 물품들은 교칙상 함께 공유하도록 되어 있지만, 조셉이 학생들과 비밀리에 거래를 하여 개인 물품조차 외부로 팔아먹는 것이다. 결국 이 사실은 신부에게 들통이 나고, 분노한 신부는 암거래를 했던 학생들을 처벌하고, 조셉은 학교에서 쫓겨난다. 이에 앙심을 품은 조셉은 신부가 유대인을 숨겨주고 있음을 게슈타포에게 밀고하고, 독일군이 학교에 침입하여 장 보네 등 학교에 숨은 유대인과 신부를 끌고가 죽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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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의 제목에서 영화 하나가 떠오르는군요.
욕망이란 이름의 전차의 비비안 리.그녀의 이름이 화이트였던가요?
'어색한 포즈와 불안'만큼 우리에게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없지 싶읍니다. 자무쉬의 영화 데드맨에서 윌리엄 블레이크는 꽃파는 아가씨에 대한 연민 때문에 결국 쫓겨 죽어가는 신세가 되지만요.^^ 웃는 이유는 영화 데드맨이 윗트가 가득해서 그 생각이 나서입니다.
꼭 본문 내용과 조금 핀트가 다른 이야기를 해서 죄송합니다^^
네 무명씨님 . . .
원래는 이름이 블랑쉬(Blanche)인데, 영어로 하면 화이트가 되겠네요... ^^
불어로 be^te blanche (white beast)라고 하면 불안을 일으킨다는 뜻이 있습니다. 아마도 백색의 모호함 때문이 아닌가 싶네요... 그런데 거기에 연민까지 있을줄은 미처 . . . 음
짐 자무시의 그 영화에서는 조니뎁(Johnny Depp)이 주인공 아닌가요? 제가 조니뎁을 좋아합니다. 조니뎁을 색깔로 비유한다면 백색에 가까운 회색 정도가 아닐까 싶은데 . . . 그것도 불안과 관련이 있을까요?
저도 핀트 좀 벗어나서 말해봤습니다^^
조니뎁은 불안과 관계있는 것 같지 않네요.^^ 그렇게 느껴 본 적이 없는 것 같읍니다.그저 연민이란 단어에 대한 저의 연상 작용 때문에 데드맨이 생각난 것입니다.
흰색의 불안을 예를 들자면 저는 앙드레김의 흰옷들이 불안해 보입니다^^ 순백색의 위태로움은 그것이 아무리 반복과 자동을 겪어도 역시 현실적인 안정을 주는 색은 아닌 것 같읍니다.더군다나 동화 속의 왕자 공주 컨셉은,ㅎ
huun님의 본문으로 돌아가서 ^^, 마지막 문장에 동의 합니다.'불안의 강도는 저 편안한 육체의 강도에 정확히 비례한다'는 문장요.
네 . . 무명씨님 ^^
그런데 어디서 들은 말인데,
앙드레김이 그렇게 욕을 잘 한다면서요?
그것도 무지막지한 목소리로요 . . .?!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인생은 참으로 요지경이 아닐수 없네요 ^^
앙드레김에 대해 한 가지 궁금한게 있는데,
왜 그 분은 그렇게 머리에 검은색 잉크를 칠하고 다니는지 . . .혹시 아시나요?
가발을 쓰면 괜찮을 것 같은데 . . . 일부러 페인트칠을 했다고 자랑이라도 하듯이, 이마에 까지 검게 칠하고 다니던데 . . 정말 궁금합니다.
욕 잘한다는 말 저도 들었읍니다^^
검은 잉크는 저도 궁금합니다.
본인은 디자이너로서의 개성이라 여기겠지요.
제 느낌은 서양광대가 연상 되는데.
이렇게 화제거리가 되고 있는 걸 보면 앙드레 김도 '낯설게 하기'에 어느 정도 성공한 것 같읍니다 의도를 했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요.^^그 독특하게 어눌한 말씨와 더불어 머리의 그 잉크인지 무엇인지로.
http://blog.naver.com/yupspd/10039843196
'천사 추락하다' 라는 좀 재밌는 작품이 있어서 한번 들러 보시라고.
네 . .
Sun Yuan & Peng Yu의 작품이군요 . .
저 분들 작품에서 흥미로운건 재료라고 합니다. 실제로 사람이나 동물의 송장에서 피부를 떼어다가 만드는 작가들로 유명하다고(중국인들 참 엽기적이에요^^) . .
꼼꼼히 따져봐야겠지만, . . 저 작가들이 주로 다루는 주제는 "죽음" 혹은 "필멸(mortal)"이라고 하는데, . . 실사와 똑같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만들지만, 실은 그 반대의 속뜻을 가지고 있는 셈이죠. . 만물의 한계(천사조차도?!)를 반어적으로 말하기라고 하듯이요 . .
송장 얘기 하다보니까 . . 중국인들의 만두가 생각나네요 . .
아직도 인육만두(붉은 깃발이 걸린 만두집)가 있다고 누가 그러던데 . . 설마 농담이겠죠^^
카니발리즘이라고 하던가요?그러챦아도 머리가 딸리는데 책 본지가 하도 오래돼서 매사 늘 더듬거립니다.불쌍한 일이지요.^^
인육 먹는 데에도 여러 이유와 행태가 있다던데... 인육만두라니 으스스합니다. 그러나 중국이라면 어쩌면 어딘가에 그런 만두집이 있을 수도 있지 싶읍니다. 중국에 대한 선입견이겠죠?
아주 옛날에 어떤 일본인이 파리 아파트에서 애인을 살해한후 냉장고에 보관해 놓고 꺼내먹곤 했다는 엽기적인 실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 일본인은 결국 일본에서 책을 쓰고 많은 팬들의 지지가 있었다고...지지의 이유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었다고 *----*부들부들,
잔인한 기질을 말하자면 일본인들을 빼놓을 수 없겠죠.
중국인들과는 또 다른 종류의 엽기인데 . .
좋게 말하면, 인간적 개인성 이상의 것을 추구하려는 과정에서 생긴 정서가 아닌가 싶습니다.
"심중"(心中)이라는 말이 있는데, 현실적으로 뛰어 넘을 수 없는 것을 죽음으로 넘는다는 뜻이랍니다. 예를들면, 사랑하는 두 연인을 부모가 반대해서 헤어져야 한다면 동반 자살을 해서 사랑을 지킨다든지, 적에게 패배했을 때 자결로 자존심을 지킨다든지, . .
그런 정서가 없는 한국인들이 보았을 때는 잔인하고 독해 보이지만, 또 그들이 한국인들을 볼 때는 저차원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독한 종들은 당해낼 도리가 없죠.
아무리 그래도, 애인을 살해하고 냉장고에 보관하면서 꺼내먹곤 했다는 인간을 지지했다는 말은 납득이 잘 안 되네요. . . .
일본인들의 그런 독한 정신상태가 간혹 "정신을 놓고 저지른 행동"과 "의지력으로 이룬 비범한 행동"을 혼동하는 경우가 있으니까요 . . . 주로 그런 혼동은 극우 파쇼 근성이 있는 똘아이들에게 흔하죠. . .
그런데 그 책 좀 한번 읽어보고 싶네요. 혹시 제목과 저자 이름 아세요?
하도 오래된 일인지라...하지만 실제였던건 분명합니다.^^
무슨 시사잡지 종류에 나왔던 기사거든요. 히어로가 된 것은 타부를 뛰어넘었기 때문이라는.
식인종들 중에는 죽은자의 영력을 받기위해 사람을 먹는 종족들도 있다는 이야길 들은 적이 있읍니다만. 너무 사랑해서 먹어치웠다는 건지...
네이버 검색결과 이름은 사가와 잇세이 이고 사건은 1981년 일이고 책이름은 '안개 가운데'라는 군요.12만부가 팔렸답니다.
보셨으리라 생각되어 관련해 올린 주소들을 삭제합니다.너무 엽기적이라 선정적인듯 싶어서.제가 맘이 좀 약합니다^^
아니 . . 왜요?!
덕분에 재밌는 기사들을 접했다 싶었는데요 . . .
그 주소 다시 올려주시면 안 될까요?
이미 모두 읽긴 했지만, 다시 한번 차근차근 읽으려고 벼르고 있던 참이었는데 . . . 지우셨네요 . . 다시 올려주시면 좋겠습니다.^^
문예노트의 우아함을 깰까 싶어서 지웠던 것인데 다시 올려달라 하시니.^^;;
http://blog.naver.com/bbarksan?Redirect=Log&logNo=60014212295
http://app.yonhapnews.co.kr/YNA/Basic/article/Press/yibw_showpress.aspx?contents_id=RPR20090123009700353
위의 두개는 후일담이고 아래는 지난번 보신 것들입니다.
http://redhawkblog.tistory.com/289
http://blog.naver.com/uenen35?Redirect=Log&logNo=140013041452
http://blog.naver.com/smilesunkr?Redirect=Log&logNo=120021156837
^^ 우아함이 다 얼어죽었나 보네요 . .
아마도 진짜 우아함을 말하려면,
보고싶지 않은 것을 없애거나 안 보는 것이 아니라,
직시하고 수용하는 태도나 방식이 아닐까 싶은데 . .
그만큼 어려운 거겠죠 ^^
어쨋든 주소 감사합니다. 잘 보겠습니다.
제가 요즘에 Dexter라고 하는 미국드라마를 보고 있습니다(제가 미드족은 아닙니다) . . 연쇄살인마에 관한 얘기인데, . . 1시즌을 거의 하루 이틀에 다 보고 있는 중입니다. 한국의 경우 연쇄살인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점점 미국처럼 사회문제가 되고 있네요. 개인의 질병으로 심리화(psychologizing)할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접근해야 할 것 같은데, 기자들이나 학자들이나 그럴 의향은 없어 보이더군요. . . 돈과 권력을 유지할 스캔들에만 관심이 있지 . . .
Dexter 같은 영화들을 보니까 . . 미국영화들을 보고 그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 미국이라면 전부 따라하고 싶어하니까요 . . 자살이 많아지면 그것도 따라하려나?
예전에 몹시 찌는 여름날 트윈픽스 13편을 한번에 다 보고 쓰러졌던 기억이 있읍니다.영화를 몹시 보던 때였는데 정말 어질어질 하더군요.
어지러우시겠읍니다.
우아하다니까 화를 내시는군요. ^^
폄훼할 생각 전여 없었읍니다. 제가 스스로 자기 검열을 좀 했읍니다.
제가 아쉽게 여기는 것은 강호순 사건으로 도배가 되는 바람에 용산참사가 덮여져 버린 것입니다. 제가 무슨 대단한 애국자는 아니지만
가카 께서는 운도 좋다는 생각이 강호순 기사를 보노라면 매번 듭니다.
트윈픽스는 저도 재밌게 보았습니다.
TV 드라마인데도, 데이빗 린치 특유의 그로테스크는 여전하더군요.
Dexter는 그만큼은 못하지만, 그래도 볼만합니다.
그리고,
운이 좋아서라기 보다는, 그렇게 상황들을 만들어내고, 상황을 이용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권력과 미디어는 돗수가 너무 높거나 아니면 너무 낮은 광학이기 때문에 일단 의심을 하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봅니다. 모르긴 몰라도 사건 자체가 심하게 과장되어 있거나, 심지어는 완전히 창작된 상황일지도 모를 일이지요.
미디어에 분노하고 시비를 따지는 것 자체가 어쩌면 시나리오의 일부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전혀 다른 방식의 문제제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은데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