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3'에 해당되는 글 5건

  1. 2009/03/30 앎의 두 형식
  2. 2009/03/26 저렴한 미술 전시회
  3. 2009/03/25 혼란스러운 욕망과 물질의 흉내
  4. 2009/03/21 신(新) 물질 간식을 위하여 (10)
  5. 2009/03/19 회화적 공간
지식 혹은 앎이란 무엇일까? "지식이 있다" 혹은 "알고 있다"라고 말할 때는 한 가지 조심스럽게 구분해야 한다. 예컨대, "나는 이것에 대해 지식이 있다", 혹은 "나는 그에 대해 알고 있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무엇을 알고 있다는 것인지, 어떻게 알고 있다는 것인지를 분명하게 밝히거나, 최소한 자신에게 확신을 주어야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앎이란 최소한 두 가지 이상의 형식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푸코(Michel Foucault)는 자신의 저서인 『비정상인들』(Les Anormaux)에서, 한 사회가 "정상"과 "비정상"을 어떻게 구분하고 규격화하는지를 분석한다. 사회가 비정상이라고 규정한 대상은 크게는 괴물이라고 불리는 기형인이나 범죄자를 비롯하여 작게는 예의 없음, 좋지 못한 버릇, 자위행위, . . . 등이 있다. 이 책에서 그는 중요한 두 가지의 앎의 형태를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17세기 유럽에서 범죄자를 다루는 사법체계와 권력이 범죄자에 대한 앎을 어떤 식으로 형성하는지에 대해 간단하지만 강렬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짧은 구절을 발췌하여 한번 읽어보자.


"[…] 권력의 메커니즘은 너무나 강하고, 그 과잉은 너무나 의식적으로 계산되어 있어서 죄의 처벌은, 죄가 아무리 크다고 할지라도 그것의 성질을 규정할 필요가 없었다. 권력의 메커니즘은 군주의 의식 안에 거대한 범죄를 흡수하고, 그 안에서 그것을 과시하며, 마침내 그것을 말살 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하다. 이런 점에서 극단적으로 말하면 거대한 범죄의 성질 같은 것은 있을 필요도 없고, 있을 가능성도 없다. 거대한 범죄의 성질은 없다. 범죄와 그 주변 사이의 투쟁, 격분, 악착스러움만이 있을 뿐이다. 17세기말까지 사람들이 한번도 범죄자의 성질에 대해 질문하지 않은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권력의 체계가 이러했기 때문에 이런 질문은 제기될 필요가 없었거나, 혹은 그것을 아주 주변적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몇몇 텍스트에서, 특히 브뤼노가 1715년에 쓴 에서 여러분들은 다음과 같은 것을 읽을 수 있다. 판사는 피고인을 연구해야 한다. 그의 정신과 습관, 활기와 육체적 상태, 나이, 그리고 성별을 검토해야 한다. 가능하다면 그의 영혼으로 침투해 들어가기 위해 범죄자의 '내면'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와 같은 텍스트는 내가 방금 이야기한 모든 것을 다소 거칠게 전면적으로 부인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텍스트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판사에게 범죄자에 대한 앎을 요구하는 것이 범죄를 이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만 범죄가 저질러졌는지를 알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판사는 제대로 죄인을 심문할 수 있기 위해, 즉 심문의 엉큼한 계약을 그의 주변에 잘 엮어 놓아 그로부터 진실을 짜내기 위해 죄수의 영혼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죄수가 판사의 앎의 대상이 되는 것은 진실을 간직한 주체로서이다. 그것은 결코 죄를 저지른 범죄자로서가 아니다. 왜냐하면 일단 자백을 하고 나면, 바로 이 순간부터 이 모든 앎은 처벌의 결정과 아무런 상관이 없기 대문이다."(『비정상인들』(Les Anormaux), 박정자 역, 동문선, 2001, pp. 107-108).


푸코의 글을 통해 이렇게 유추해볼 수 있을 것 같다. 무엇인가 다른 목적에 이용하기 위한 앎이 있고, 그 자체로 목적인 앎이 있다. 말하자면, "정보"로서의 앎이 있고, "이해"로서의 앎이 있는 것이다. 푸코에 따르면, 판사들이 범죄자를 연구하는 이유는, 범죄자 그 자체가 궁금해서도, 범죄의 본질이 궁금해서도 아니다. 다만 규정된 법 체계 안에서 그의 행위가 범죄인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그가 범죄자로서 적합한지 아닌지를 판별하기 위해, 처벌의 기준을 확정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이러한 앎의 방식은 범죄의 본질을 아는 것이 아니라, 범죄행위의 확인과 인지(認知)이다. 이렇게 사법체계의 앎의 사후형식 때문에 법은 절대로 범죄를 사라지게 하거나 교정할 수가 없고, 오로지 처벌만을 가할 수 있을 뿐이다(애초부터 반항이나 반란의 가능성이 있는 범죄에 본때를 보여주기 위해, 애초의 범죄보다도 더 가혹하고 잔인한 처벌을 통해).


혹시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뭔가를 알고 싶어하거나, 알고 있다고 확신할 때, 이해로서의 앎이 아니라 정보로서의 앎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그것 혹은 그 사람 자체가 궁금한 것인가? 아니면 나의 악착스러운 필요 때문인가? 앎의 두 형식 중에서 후자가 지배하는 사회, 즉 정보만을 필요로 하고, 악착스러운 필요에 사로잡힌 앎 만을 추구하는 사회는 냉소주의가 만연된 사회일 것이다. 아는 것이 없고, 느껴지는 것도 없고, 아무래도 상관없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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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런던에는 Affordable Art Fair라는 미술 전시회가 있다. 굳이 우리말로 옮기자면 <저렴한 미술 전시회> 정도쯤 것이다. 제목에서 있듯이 저렴한 값에 미술품을 감상하고 구입할 있도록 마련된 전시회이다. 1999년도에 처음 런던에서 열렸고, 후로 일년에 차례씩 전시회를 한다. 2009 들어서는 전시회가 3 12일에서 15일까지 런던 Battersea 공원에서 열렸다. 


예술작품을 거래하는 가격이 어느 정도로 저렴한가 하면 최고 3 파운드에서 최저 수십 파운드에 이른다. 참여하는 갤러리도 120여개에 이르고, 행사기간 동안 수만 명의 관람객들이 방문하여 작품을 감상하고 구매한다고 한다. 자세한 정보는 행사 홈페이지(www.affordableartfair.com) 참조하면 같다. 직접 방문해보라는 말이 아니라, 여기에는 우리가 배울 것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자는 말이다.


예술작품을 저렴하게 판매하고 구매하는 관행은 예술의 생산과 유통과 보존 그리고 향유하는 과정의 민주화에 있어 중요한 단초이다. 재력과 권력을 소수가 예술을 독점하여 어두운 금고 같은 곳에 보관을 하고는 아는 사람들끼리 서로 선물을 주고받는 문화는 예술을 신비화하는 문화이다. 예술을 아무나 접근할 없는 신비로운 어떤 것으로 만드는 장본인들은 주로 예술 관련 지식인들과 예술 상인들 그리고 재력의 소비자들이다. 이들은 명성을 만들고 싶어한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예술이 아닌 명성에 열광하기를 원한다. 열광에는 많은 예술가들이 필요치 않으며, 평론가나 상인들이 선전하여 배출한 베스트셀러 작가 몇이면 충분하다. 예술에 대한 열광은 예술가들을 소멸하게 한다. 또한 열광의 본질은 신비화이고, 신비화는 무지의 소산이므로, 이는 예술에 대한 사람들의 냉소만을 환기할 뿐이다.


예술은 인생을 다르게 바라볼 있게 해주는 인간이 만든 유일한 수단이다. 어른이든 아이든 예술을 접하지 못한 인생은 악착같고 반복적인 생존만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며 살아가게 되어 있다. 예술은 숙명적인 것처럼 보이는 완고한 삶의 굴레를 힘들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거리를 두고 단절할 있게 한다. 평소에는 보지 못했던 낯설고도 이질적인 어떤 인생이 액자에 담겨져 놓여있을 , 혹은 인쇄된 활자로 적혀 있을 , 우리는 어느 순간에 홀연한 깨달음 혹은 가벼운 홀가분함을 안고 우리 자신의 인생을 다르게 바라보는 것이다. 삶에 이토록 평화로운 혁명을 있는 수단이 어디에 있을까?


벤야민(Walter Benjamin) 기술복제 때문에 생긴 서구 예술의 변화를 크게 가지로 설명했다. 우선 종교와 계급에 의해 신비화되었던 예술이 신비를 벗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술품을 복제할 있게 되면서 예술은 특정 계급이나 교회의 배타적 보호로부터 해방되어 대중적이고 민주적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편 예술이 흔해빠지게 되고, 원본의 권위와는 무관하게 어느 누구든지 변형하고 왜곡할 있게 되면서, 예술의 가치가 저하되었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 경제적으로 예술이 이용될 있는 소지가 다분해지게 되었다. 나치정권과 파시스트들이 정치를 심미화했던 경우가 좋은 예이다.


요컨대, 예술품의 기술적 복제는 예술을 종교와 계급으로부터 해방시켰지만, 대신에 예술을 무가치한 것으로 전락시킨 것이다. 예술의 이러한 무가치함 속에서 다시 신비화가 일어나는데, 그것이 바로 원본작품에 대한 열광이다. 원본작품은 예술작품이기 보다는 골동품이나 유적, 혹은 물적 재산의 가치를 갖는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향유하는 대상이 아니라, 재력과 권력과 사회적 수완을 상징하는 소유물이 것이다. 뉴욕 미술시장에서 유명한 미술품을 소장하고 있는 계층은 주로 펀드매니저라든가 부동산 업자라는 사실은, 단지 예술 애호 층이 변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예술품이 개인의 소장품 목록에 오르게 되고, 특정 장소의 밀실에 갇히게 것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벤야민은 "예술을 정치화"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술의 정치화란 간단히 말해 예술이 민주적이 되도록, 예술의 가치가 모두에 의해서 부활할 있도록, 예술을 심미적 수준에서가 아니라 사회적 수준에서 다루어야 함을 뜻한다. 판권, 재산권, 배포권, 저작권처럼 예술에 있어 이러한 법적 용어들이 나오게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따라서 보다 많은 사람들이 예술에 접근할 있도록, 보다 많은 예술가들이 자신의 소명을 지속할 있도록, 사회가 그에 합당한 문화를 조성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열린 광장, 열린 시장, 바로 전시회 같은 공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전시회에는 예술적 신비화가 없어 보인다. 예술 공간 전반에 명성이 . 따라서 열광도 없을 것이다. 단지 즐겁고 유쾌한 향유만이 있을 뿐이다. 관객은 이상 이유도 모른 신비화된 명성으로 작품을 감상하지 않고, 순전히 자신의 취향과 기억과 심미적 능력으로 작품들을 대면해야 것이다. 그러다가 왠지 끌리는 작품 앞에서 오랫동안 머무를 것이고, 작품에 머무르고 싶다면 기꺼이 돈을 지불하게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갑자기 작품에 대해, 작가에 대해, 혹은 자신의 인생에 대해 홀연한 깨달음에 도달할지도 모른다. 이것이 예술이다!


값비싼 대가가 필요한 것이 아니므로, 사람들은 자주, 많이 가게 것이고, 새로운 예술가들이 그들의 입담에 오르내릴 것이다. 굉장한 규모의 재력으로 작품에 값을 치르는 특정 소비자가 아니므로, 예술가들이 돈을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명의 베스트 셀러 작가 외에는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신비화된 문화에서의 예술활동에는 비할 바가 못될 것이다. 예술가들에게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돈은 상인들에게!), 자신들의 작품을 감상하고 향유(열광이 아닌) 있는 관객, 그리고 그들이 지속적으로 예술활동을 있을 만큼의 약간의 돈이면 충분하다. 그들이 평생 짊어지고 가야 직업은 사업이 아니라 다름아닌 예술이기 때문이다.


예술가 본인이든, 예술 소비자이든, 혹은 예술 상인이든, 모두의 문화를 고민하자. Why not? 그리고 모델들을 찾아 선례로 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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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이 불안해하는 큰 이유 중 하나는 물질적 부의 양과 행복이 비례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질적으로 풍족할수록 더 행복해지고, 빈곤할수록 덜 행복해 진다고 말이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물질을 양적으로 측정할 수는 있지만, 행복을 양적으로 측정할 수는 없다. 물질적 부는 그 많고 적음을 잴 수 있는 척도가 분명히 있지만, 행복은 주관적이고 심리적인 것으로서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척도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많은 행복"이나 "더 적은 행복", 혹은 "더 큰 행복"이나 "더 작은 행복"과 같이 행복의 많고 적음을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실은 우스꽝스러운 용어법이다. 그것은 마치 "더 크고 많은 음악" 혹은 "더 작고 적은 멜로디"이라고 말하는 것 만큼이나 난센스이다.

이렇게 "더" 그리고 "덜"의 개념으로 사고하고 판단하는 습관은 우리의 삶이 물질이나 물건을 측정하거나 비교하는데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 소유하고 있는 물건들이 얼마나 많은지 비교하다 보니, 그 소유자가 느끼는 행복감도 덩달아 비교가 되는 식이다. 심리적인 가치를 물질이나 물건으로 둔갑시키는 예는 아주 많이 있다. 선물의 가격에 따라 애정과 존경의 정도를 가늠한다든지, 재산의 양으로 인격을 판단한다든지, 성적표의 점수로 능력을 인정해주는 것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예들은 모두가 물질의 양적인 가치와 심리적 질적 가치를 혼동하는 데서 발생하는 윤리적 오류들이다. 에피쿠로스(Epicurus)는 이 오류를 "어리석은 판단(idle opinion)"라고 불렀다고 한다.

물건에 대한 우리의 욕망도 어리석은 판단의 좋은 예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 아니라 쇼핑하는 동물이다. 인간은 물건을 구매하거나 소비하지 않고는 단 하루도 살 수 없어 보인다. 특히 현대인은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울적함을 달래기 위해, 궁핍한 기분을 잊기 위해 쇼핑몰을 기웃거린다(이와는 반대로 기업과 상인은 사람들이 쇼핑몰을 기웃거리도록 그들이 공허해지고 울적해지고 궁핍감을 느꼈으면 하고 바란다). 아름다운 원피스 한 벌이 잃어버린 사랑을 되찾아 준다고 정말로 믿는 푼수 떼기는 없지만, 그래도 어쩐지 한 벌 장만하고 나면 최소한 새로운 사람은 만날 것 같아 보인다. 또 근사한 벤츠가 친구들 사이에서 본질적인 위신을 세워줄 것이라고 정말로 믿는 바보는 없지만, 그래도 어쩐지 한 대 뽑아 동창회에 나가면 왠지 자신감 비슷한 것이 솟아날 것만 같다. 터프해 보이는 흰색 코란도를 타면 기어 다니는 붉은색 티코 운전자를 깔볼 수 있을 것만 같다. 우중충한 철티비 보다는 뽀대나는 MTB가, 한 송이 보다는 한 다발의 장미가, 모나미 보다는 몽블랑이, 인스턴트 보다는 스타벅스 원두가 더 근사해 보이고, 무엇보다도 더 크고 더 많은 행복을 기대해도 될 것만 같다. 그러나 항상 그렇듯이, 저렇게 "더" 부담스러운 물건들이 많을수록, 허기와 공허의 빈 자리는 "더" 커진다.

물질이 우리의 본질적인 행복을 보장해주지 못하는데도, 우리는 왜 자꾸만 물질을 더 선호하는 것일까?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은 이에 대해 귀여우면서도 날카로운 통찰을 우리에게 제시해주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Objects mimic in a material dimension what we require in a psychological one."(Alain de Botton, The Consolations of Philosophy, p. 65)

이를 우리말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물건들은 우리가 심리적인 차원에서 요구하는 것을 물질적인 차원에서 흉내를 낸다."

이 멋진 말이 지적하는 것은, 우리의 '어리석은 판단'이 내포하고 있는 근본적인 무능력과 태만이다. 우리가 심리적인 차원에서 욕망하는 것들, 가령 '사랑', '우정', '행복', '자신감', '자유', . . . 이 가치들은 우리의 복잡하고 미묘한 심리상태이다. 이들은 획득하기가 쉽지 않을 뿐더러 이해하는 것조차 어렵다. 그 불가해한 심리 때문에, 예컨대 우리가 사랑에 빠져 버렸을 때,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입으로 내뱉는 말은 "내 마음 나도 몰라!"이다. 뿐만 아니라 우정이 무엇인지, 행복이 무엇인지, 자유가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그 가치들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을지 도무지 알 길이 없어 잠을 설친다. 이때! 우리는 이들을 대신할 다른 무언가를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좀 더 쉽게 가질 수 있고, 좀 더 분명하게 그릴 수 있고, 좀 더 단단하게 잡을 수 있는 그 무엇, 바로 물건을!

사랑을 심장(Heart, ♡)으로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아마 이런 과정이었을 것이다. 사랑에 빠진 그는 자신의 감정이 어디에서 왔는지, 정체가 무엇인지, 설명할 수 없었다. 단지 아는 것은 그녀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아려오는 것 뿐이었다. 그에게는 이제 사랑=심장이라는 도식이 생긴다. 한편, 사랑 받을 때 그녀는 행복감을 느낀다. 하지만 '사랑을 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사랑을 받을 수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다만 사랑을 받을 때 혹은 오르가즘을 느낄 때, 눈 앞에서 화사한 꽃밭이 보인다. 이제 그녀는 한 다발의 꽃을 받을 때, 사랑을 받는다고 느낀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질주의 쾌감을 주는 자동차가 자유를 주고, 열 잔의 술이 우정을, 고급스러운 저택이 행복을 준다고 믿게 되었다. 물건들이 우리의 심리적 욕망을 닮아가면서 물질적으로 흉내를 내고 있는 것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 정복하려면 참을성이 필요한 우리의 복잡한 감정과 욕망을 감당할 수가 없어, 그것과 대충 닮아 보이는 물건으로 재빨리 얼버무리는 것이다(사실, 문학에서의 은유라든가, 심지어 우리의 언어 자체가 이러한 재빠른 얼버무림이다).

이러한 얼버무림이 좀더 심해지면, 물신주의에서 보는 것과 유사한 가치들의 전도가 일어난다. 다이아몬드가 사랑의 원인이 되고, 대저택과 통장의 잔고가 행복의 출발이 되고, 자동차가 자유의 조건이 되는 식이다. 고착성 혹은 퇴행성 도착이라고 알려진 물신주의자가 스타킹을 성적 쾌감의 증표로 여기듯이, 우리는 손쉬운 방법을 택하여 사회활동이나 우정을 대신해줄 것 같은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며 우두커니 앉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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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기침 소리조차 허락되지 않아, 가뜩이나 작은 도서관 열람실이 우울하게 침체되어 있다. 여기 저기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지겨운 사람들. 군내를 삼키는 소리. 마치 자신들의 육체가 존재하지 않다는 듯, 아니 그러길 바란다는 듯, 그들은 몇 시간 동안을 앉아 책과 펜을 쥐고 도를 닦으며 돌멩이가 되어가는 중이다. 도서관에는 소리 뿐만 아니라 냄새도 나지 않는다. 침묵의 공간에서 텍스트의 침묵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것이다. 침묵은 마치 블랙홀처럼 공간 전체의 대기를 빨아 마셔 버린다.

커피숍에서 뜨겁고 진한 원두커피 한 컵을 사 들고 열람실의 문을 연다. 발 뒤꿈치를 들고, 숨소리를 죽여, 내 자리를 찾아 조용히 착석한다.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가방을 열고 책과 물건들을 꺼낸다. 열람실 안에서는 원칙적으로 음식물을 가져오면 안 된다. 커피는 가져올 수 있지만, 반드시 뚜껑을 닫아 냄새가 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저 돌덩어리들의 침묵과 잠을 방해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나는 뚜껑에 나 있는 작은 구멍으로 커피를 홀짝거린다. 커피는 원래 뚜껑을 확 열고 마셔야 한다. 코를 가까이에 대고 뿜어 나오는 커피 향과 수증기를 함께 들이마셔야 커피의 진정한 분위기를 마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불가능한 일처럼 보인다. 향도 맡을 수 없고, 뜨거운 입 소리를 낼 수도 없다. 이곳은 감각을 삭이는 곳이다. 감각을 깨우지 않고도 사는 법을 연습하는 곳이기도 하다. 육체-물질에 생기가 돌지 않도록, 동요가 일어나지 않도록, 혼란스럽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곳에 오래 다니다 보면, 정말로 돌이 되어가고 있음을 느낀다. 어쩐지 이들의 침묵이 짜증스럽고 화가 난다.

갑자기 나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홧김에 커피 뚜껑을 확 열어버리고 말았다.

야릇한 커피 향이 단숨에 방안 전체에 퍼지는 듯 하다. 사람들의 뒤척이는 소리가 들린다. 그들에게 약을 올리듯, 나는 시치미를 떼고 살짝 소리를 내어 후루룩 거린다. 잠시 후 사람들은 뒤척이며 하나 둘 씩 일어나 가방을 뒤적인다. 지갑을 꺼내 들고는 자리를 비우고 밖으로 나가기 시작한다. 특히 여자들이 더 심하게 동요하는 듯 하다. 뭔가가 되살아난 것이다. 잠시 후 그들도 잔을 들고 들어올 것이다. 감각! 축복인가? 저주인가? 『베를린 천사의 시』에서 인간이 되기를 선택한 천사 가브리엘이 대답해줄 수 있을까?

몇 시간 동안 움직이지 않고 책상 앞에 앉아 책을 읽다 보면 온 몸이 뻐근해지고 쑤셔온다. 자리에서 일어나 혹은 앉은 채로, 몸을 비정상적인 체형으로 늘이거나 줄이면서 뻐근함의 고통을 중화시킨다. 신비주의자들의 수련에 요가의 탄생도 바로 이런 식이었을 것이다. 몸은 생기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활동을 억제하고 정지한 채로 오랫동안 있으면, 몸의 생기와 몸의 물질이 서로 싸움을 벌인다. 전자는 움직이고 싶어하고, 감각을 느끼고 싶어하고, 흐트러지고 싶어하고, 한 없이 떠나고 싶어한다. 반면에 후자는 아버지처럼 이러한 요동을 불허하고 고집스럽게 훼방을 놓으며 생기의 발랄함에 그늘을 드리운다.

(엄밀히 말해 그 고집스러움은 물질 그 자체로 인한 것이 아니라 물질에 투사된 관념 때문이다. 책상 앞에 몇 시간을 앉아있게 하는 것은 육체가 아니라 우리의 어떤 관념적 필요 때문이 아닌가? 지식에 대한 욕구라든가, 취직에 대한 공포라든가, 아니면 행복과 같은 필요 말이다. 육체는 두 파벌로 나뉜 정신적 지대들이 치열하게 벌이고 있는 싸움터일 뿐이다. 그 파벌의 한 편에는 생기가, 다른 한편에는 물질 혹은 물질화된 관념이 자리잡고 있다.)

하여튼 몸이 쑤시는 이유는 생기와 물질 양자의 긴장과 싸움 때문이다. 물질이 승리를 한다면 우리의 몸은 돌처럼 굳어져가며 팔다리와 어깨의 근육에 딱딱한 몽우리나 굳은 살이 박힌다. 물질의 승리가 더 지속될수록 몸의 생기는 점차 정체되어, 급기야는 생기의 정수랄 수 있는 정신조차 그 발랄함과 활력을 잃어버린다. 이를 막기 위해 우리는 가끔씩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움직이고, 산책을 하고, 특히 간식을 먹는 것이다. 물질의 스트레스를 강하게 느끼면 느낄수록 뒤척임과 간식의 양이 많아진다. 이는 결국 또 다른 형태의 정체상태로 이끌 것이다.

문제는 간식이다. 산책과 운동은 많이 할 수록 좋을 수 있지만, 간식은 많이 먹을수록 우리의 생기 쪽 보다는 물질 쪽에 더 영향을 주므로, 결국 많은 간식은 물질을 강화하든가 아니면 비대하게 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앉아있는 것조차 힘들어져 완전한 정체라고 할 수 있는 수면상태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간식을 먹지 않을 수는 없다! 한 잔의 진한 커피, 한 두 조각의 치즈 케이크, 기름 잔뜩 묻은 야채 튀김, 시뻘건 떡볶이, 지독한 냄새의 순대, . . . 이런 불량식품(?) 없이 인생을 어떻게 살 수 있을까? 간식이 불량하면 불량할수록 느껴지는 감각의 맛은 더 짜릿하고 감미롭다. 돌처럼 뻣뻣해진 우리의 몸에 저토록 통쾌하게 반항하고, 반복에 지배된 지루한 일상에 저토록 쾌활하게 반란을 일으키는 물질들이 또 있을까? 그들 앞에서는 산책과 운동의 건전함이 왠지 성직자들의 미소처럼 위선으로 보일 정도이다. 저 간식들은 물질이 아니라 물질의 탈을 쓴 생기가 아닐까? 젊은이들이 더 많이 좋아하고 더 친화력이 있어 보이는 까닭에, 아주 말이 안 되는 추측은 아닐 것이다. 여기에 건강 운운하는 주장은 궁색하고 소심하기 짝이 없어 보인다.

간식 산업이 발전해야 한다. 우리 몸의 물질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 신(新)물질로 이루어진 간식들이 새롭게 쏟아져 나와야 한다. 우리의 정체된 감각에 활력을 주되, 몸을 정체된 상태로 빠뜨리지 않는 그런 간식이 많아져야 한다. 아무리 먹어도 건강이 나빠지지 않도록. 과용에도 중독이 되지 않도록. 무엇보다도 먹을수록 지겨워지지 않도록. 그리하여 우리의 생기가 고집스런 물질을 닮아가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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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적 공간이란 이상화된 공간(idealized space)을 의미한다. 서양에서 르네상스 이후 생겨난 원근법적 공간구성은 이상화 공간의 좋은 예이다. 원근법은 일종의 기하학적 이상으로 세계를 배치하고자 하는 신의 열망과도 같다. 원근법에서는 모든 사물들이 연속적인 질서에 따라 서로 연관이 되어 있고, 이 질서는 무한하게 펼쳐진 공간 안에서 하나의 체계를 이루며 배열된다. 사물들은 가깝고 먼 거리에 따라, 크고 작은 비례와 균형에 따라, 중심과 주변의 위계에 따라, 그 선천적 적절성을 띠고 이 세상에 존재한다. 이 합리적 질서에서 탄생한 무한한 세계를 작은 캔버스에 재현할 수 있다면, 우리는 신의 관점을 경험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것이다(반면에 고대인들은 사물을 재현할 때에 자신의 심리 상태를 반영했다. 심리적으로 느껴지는 바에 따라, 혹은 중요함의 정도에 따라 사물의 크기와 균형을 달리 인식하고 재현했던 것이다).

이상화된 공간에서의 그 신의 눈은 캔버스의 어디에 있는 것일까? 틀림없이 모든 사물들이 무한대로 수렴하는 지점이어야 할 것이다. 등대에서 퍼져 나오는 부채꼴의 빛처럼 세계 전체를 밝혀주고 세계 전체를 감싸고 포함하고 배태할 뿐만 아니라 세계 전체가 소멸해가는 지점, 예컨대 모든 변과 호가 한 곳으로 수렴하는 삼각형 혹은 원뿔의 꼭지점과도 같은 그런 중심 말이다. 신을 위해 그리고 신에게 보여지기 위해 세상이 존재했듯이, 회화적 열망에 의해 배치된 사물들 역시 중심에 위치한 관찰자를 위해 존재한다. 원근법에 있어 소실점의 기능은 모든 시선의 신의 관점에의 일치에 있다. 거기에는 고정성에 대한 열망, 영원성에 대한 열망, 중심에 대한 열망이 짙게 배어있다.  

물론 원근법에 있어 이 관찰자 개념은 대단히 모순적이다. 관찰자란 특정한 위치를 점한 존재인데, 꼭지점이라고 하는 이상적 중심이란 사실 특정한 위치의 부재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2+3=5"와 같이 진술자가 부재하는 진술이다. 무한히 수렴하는 중심으로서의 꼭지점이나 원점이 그렇듯이, 신은 부재하는 존재이며, 부재할 때에만 비로소 그 무한의 신비가 현시한다. 이것이 신의 눈을 경험적으로 재현한다는 시도 자체가 가지는 모순이다.

이런 맥락에서 존 버거(John Berger)는 원근법에는 "시각적 상호성"(visual reciprocity)이 없다고 보았다. 본다는 것은 그 자체가 관계를 맺는 것이다. 대상을 주시하고 포함하고 지배한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와는 반대로 객체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다는 점에서, 시선은 하나의 관계이다. 세계를 바라보는 관찰자는 원리상 그 자신 역시 보여지는 대상이어야 한다. 사물이 보이는 각도, 크기, 균형 등에 따라, 시선의 주체는 건물 위에 있는지, 아래에 있는지, 혹은 공중을 활공하는지, 심지어는 고대인들이 그림을 통해 자신의 심리상태와 도덕을 반영했듯이, 주체는 자신의 위치와 상태를 노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일정한 시선에는 반드시 타자가 상정되어 있다. 바라보는 자의 주체성이란 자의든 타의든 타자와의 상대적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 그러나 신의 관점에는 타자가 없다. 신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특정 위치가 알려지지 않은 채 바라보는 존재이다. 마찬가지로 이상화된 중심에서 주시하는 존재는 변덕스러운 현실의 시간과 공간 내에 위치할 수 없다. 이상적 중심이란 변하거나 이동하지 않는 영점(degree zero)에 다름 아니다. 신의 눈이 그렇듯이, 그것은 오히려 위치 그 자체, 말하자면 위치가 어디인지 질문할 필요도 근거도 없는 초월적 외부의 공간 그 자체다.

모든 그림이 원근법을 쓰는 것은 아니지만, 회화에 재현된 세계는 많든 적든 원근법과 유사한 열망이 내재되어 있다. 회화적 시선에는 과거의 시간이 지배한다. 다르게 말해 한 편의 그림은 세계의 기억이며 요약이다. 화가는 단숨에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 그는 캔버스를 앞에 놓고 많게는 몇 년 적게는 몇 시간 동안 사물을 관찰하고, 기억하고, 그것을 다시 캔버스에 요약해 낸다. 그러는 가운데 화가는 사물과 그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반복적으로 되뇐다. 마치 관람객이 그림을 감상하듯이, 혹은 시인이 떠오르는 섬광을 처음부터 끝까지 암송하는 가운데 수 차례에 걸쳐 후렴구를 반복하듯이, 화가 역시 사물에 다가서고 멀어지면서 선과 면을 중첩시키고 집적하고 쌓는 일을 반복하는 것이다. 따라서 회화적 시간이란 실제의 시간이 아니라 종합된 시간, 즉 세계를 바라보고 지각하는 동안 수용했을 무수한 요소들이 한꺼번에 수렴하여 동시에 펼쳐지는 총체적 시간이다. 흥미롭게도 아른 하임(Rudolph Arnheim)은 시와 그림에 있어서의 시간의 동질성을 주장하는 가운데, 이를 초기 언어 형태와 유사한 어떤 것으로 보았다. 예컨대, 시와 그림은 어머니와의 자족적이고 충만한 이자 관계에 취해있는 아기가 자신의 행복감 전체를 표현하기 위해 내뱉은 한 마디의 옹알이와도 같은 것이다.

Gogh의 의자

위 그림은 고호(Vincent van Gogh)가 아를의 방에서 사용했던 의자의 그림이다. 이 이미지에 대해 우리가 질문하는 내용은 고호 자신의 전기적 사안보다는 고호의 인생 전체, 고뇌 전체, 예술 전체로 향한다. 애초부터 그림에는 육체가 아니라 육체를 감싸고 있는 대기 전체의 음성 혹은 분위기만이 감돌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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