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4'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9/04/28 오즈 야스지로의 다다미 쇼트 (2)
  2. 2009/04/18 사진의 무의식 (4)

2차 대전을 전후하여 활약했던 일본의 유명한 영화감독 오즈 야스지로(Ozu Yasujiro)는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특유의 카메라 시선을 창조했다. 흔히 "다다미 쇼트"라고 불리는 것으로, 피사체를 낮은 자세에서 잡은 장면을 말한다(특히, 인간의 시야와 친숙한 이미지를 만들어내기 위해, 그는 깊이감을 주는 망원렌즈나 넓은 시야를 보여주는 광각렌즈보다는 표준렌즈를 사용했다).

이 장면은 그의 작품 <부초>(floating weeds)의 한 장면을 자른 사진인데, 이를 보면 카메라가 거의 지면에 붙어서 포착한 장면처럼 보인다. 낮은 자세에서 사물을 바라볼 때, 저러한 독특한 이미지가 나온다.

다다미쇼트는 주로 집안이나 방안의 정경을 보여주는데 사용된다.

위의 사진 역시 <부초>의 한 장면인데, 먼 곳으로 유랑하던 남편이 몇 년 만에 돌아와 저쪽 방 안에서 약간 처량하게 담배를 태우고 있는 동안, 아들과 살며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는 그를 위해 술을 데우고 있다. 부엌의 마루 아래쪽에서 그녀를 올려다 보며, 카메라는 마치 그녀의 고독과 원망을 슬쩍 훔쳐보고 있는 듯 하다.

유랑극단의 단원들이 빗소리를 들어가며 처량하게 창 밖을 바라보고 있다. 멋지게 공연하려던 계획은 관객의 냉담으로 수포로 돌아가고, 갑자기 내리는 비는 갈 곳 없는 이들의 절망을 배가한다. 낮은 구도로 그들의 굽은 등 뒤를 포착하여, 마치 옆에서 함께하는 누군가의 공감 어린 시선이 느껴지는 듯 하다.

이 장면은 수 년간 유랑생활을 하던 아버지가 아들과 오랜만에 재회하는 모습이다. 아버지는 자신의 비천한 계급 때문에 아들이 사회적으로 부당한 대접을 받을까 두려워, 아내와 함께 작정을 하여 자신이 삼촌이라고 속인다. 오랜만에 집에 돌아와 힘차게 쭉 뻗어 자란(서로를 꽉 물고 있는 저 단단한 엉덩이를 보라!) 아들을 바라보며, 한편에는 뿌듯함과 대견함이, 다른 한편에는 아버지임을 말할 수 없는 안타까움이 교차한다. 카메라는 마루 아래 쪽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모습 전체를 올려다보며, 아들의 성장이 얼마나 힘찬지, 그리고 아버지의 쇠잔함과 왜소함이 얼마나 초라해 보이는지를 대조하고 있다.

다다미쇼트는 다다미에서 앉은뱅이처럼 좌식 생활을 하는 일본가정 환경에서 일본인들이 사람과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을 반영한다. 또한 마치 가부키나 가면극의 무대 아래에서 무대 위를 관람하고 있는 것 같은 시선을 갖추고, 뒷마당으로 활짝 난 창 밖이 마치 무대의 배경처럼 설정되어, 일종의 액자형(proscenium frontage)의 구도를 드러낸다. 카메라는 가만히 정지한 채로 무대 위를 바라보고 있고, 이 액자 같은 무대 위에서 인물들이 들어오거나(frame in) 밖으로 나감으로써(frame out), 카메라를 움직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장면들을 전환하고 있는 것이다.

다다미 시선의 구도는 서구인이 사물을 바라보는 환경과는 전혀 다르다. 서구인들은 주로 의자에 앉아 있거나 서 있거나 혹은 침대에 누워 있다. 이들은 방바닥에 앉아서 사물을 바라보는 경우가 흔하지 않아, 대부분 선 자세에서 허리 위, 혹은 어깨 정도의 높이에서 사물을 바라보는 구도가 지배한다. 그들의 시선은 행동을 준비하거나, 행동과 관련되어 있는 시선이다. 그러니까 사람이나 사물을 바라보는 자는 그들과 물리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가능성이 큰 것이다.

그러나 다다미 시선은 바닥에 앉아 있거나 누운 자세에서 사람의 무릎 정도의 높이에서 사물을 바라본다. 이는 행동적 시선이 아니라 관조적 시선에 가깝다. 우리는 바닥에 앉거나 누워 뭔가를 생각하고, 사색하고, 관찰하는 시선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다다미 시선은 사물을 바라보는 구도의 독특함을 반영하지만, 무엇보다도 이는 사물에 대한 관찰자의 독특한 태도, 그리고 특유의 정서와 분위기를 반영한다. 서구의 역동적 시선과는 다르게, 관조적 시선에 의해 우리는 사물과 인물들을 가만히 바라보며 연민의 감정을 느낀다. 또한 카메라가 인물들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앉은 자세나 누운 자세로 올려다 봄으로써, 그들이 크고 거대해 보인다. 인물들 곁으로 깊숙이 들어와 앉아 있는 제3의 시선이 그들과 함께하며 감정을 공유하는 것이다. 서구인들은 오즈의 영화를 보고 그 낯섦에 대단히 놀랐다고 한다. 아마도 그들에게 세계가 전혀 다르게 보였고, 전혀 다른 무언가를 촉발했던 것이다.

Posted by huun

사진은 인간의 시각이 기계적인 메커니즘으로 사물에 접근하게 한 최초의 매체이다. 인간의 지각은 시시각각 변덕스럽고, 쉽게 나타났다가 사라져버리며, 개인 안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믿을만한 객관성을 보증하지 못한다. 개인이 목격한 어떤 사건은 법정에서 증언적인 가치로서 참고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명백한 의미에서의 증거가 되지는 못한다. 객관성을 입증하려면 목격자 자체의 신뢰성을 증명해야 하고, 그의 증언에 뭔가 추가로 비인간적인 절차가 필요하다(법은 근본적으로 인간을 불신한다). 예컨대 과학적 증명과 같은 신의 지각에 의존하든가, 아니면 사진이나 동영상과 같은 기계의 지각이 첨부되어야 하는 것이다(디지털 시대엔 또 다른 문제가 있지만).

무엇보다도 카메라는 그 기계의 본성상 객관성의 도구이다. 애초에 사진이 등장한 이후, 그 객관적 성질 때문에 인간은 세계를(인간 자신조차도) 차갑고 비정한 그 무엇으로 경험하기 시작한다.

사진의 객관성은 눈에 보이는 사물에만 관계한 것은 아니었다. 사진은 인간이 지각할 수 없는 무의식적 영역 조차도 객관적인 그 무엇으로 만들었다. 가령 우리는 물건을 쥐거나 길을 걸을 때 손동작이나 걸음걸이를 막연히 추측만 할 뿐이지 손놀림과 발 동작의 세세한 부분까지 포착하고 기억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카메라는 고속촬영이나 렌즈와 같은 보조장치를 이용해서 이들을 잡아내고 보존한다. 벤야민(Walter Benjamin)이 말했듯이, 정신분석이 인간의 충동적 무의식을 밝히는 분야라면, 카메라 기술은 사물의 "시각적 무의식"(the optical unconsciousness)을 밝힌다.

인간이 시각적 무의식을 인식하자마자, 마치 정신분석에 의해 꿈의 세계가 열린 것처럼, 현실은 인간이 바라보고 생각했던 것 이상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현실은 기괴하고 부조리해 보였으며, 더 이상 인간이 상상했던 균형과 비례를 갖춘 정상적인 모습이 아니었다. 카메라 같은 기계가 펼쳐놓은 현실은 기계가 주는 정밀한 대칭의 이미지와는 반대로 뒤틀리고 일그러져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카메라 기계가 보여준 시각적 무의식이 불균형적이고 뒤틀린 현실을 제공하긴 했지만, 오히려 다른 한편 인간이 대상에 깊숙이 파고들어 경험할 수 있는 가능성도 열어주었다. 특히 인물사진에서 그러한 경향은 두드러진다. 사진을 찍는 예술가나 사진에 찍히는 모델의 의식을 넘어서는 시각적 무의식은, 그 인물 자신조차 알지 못했던 어떤 본성을 몸 밖으로 빠져 나오게 한다. 사진에 찍힌 인물은 그 만이 가질 수 있는 어떤 독특함을 외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자기 자신의 무의식적 본성 즉 물리적(육체적) 외양을 넘어선 그의 역사 전체에 비견될만한 특유의 시간을 무심코 드러낸다.

다음 사진을 보자.

이 작품은 케르테츠(André Kertész)가 1926년에 찍은 화가 몬드리안(Piet Mondrian)의 초상사진이다. 케르테츠는 이 외에도 몬드리안에 관한 여러 점의 사진작품을 남겼는데, 이 작품은 몬드리안 개인의 온전한 표정과 포즈를 담고 있다. 케르테츠 자신의 예술적 비전이나, 심지어 모델이 된 화가의 예술 세계와는 무관하게, 여기에는 한 인간이 취하고 있는 순수하게 개인적인 포즈와, 그로부터 피어 오르는 그의 인격 전체의 분위기가 감돈다. 그의 사유(예술)와 전혀 호응하지 않는 비뚤어진 코와 약간 왼쪽으로 일그러진 얼굴 균형,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는 듯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히스테리컬한 손가락, 순수해 보이면서도 어쩐지 (아니 그래서 더) 고집스러운 지성을 품은 시선, 사회적 계급과 소박한 성품이 공존하는 듯한 옷차림, 단정하면서도 비뚤어진 넥타이, 넥타이를 꽉 조여 매어 주름진 와이셔츠, 그리고 낡아 보이는 외투, 날렵하면서도 안정되어 있지 않은 자세, 그리고 약간 경직된 자세 때문인지 움츠러든 목, . . . 이러한 시각적 요소들은 한 개인이 예술이라는 제도 속으로 흡수되기를 거부하고, 온전한 자신을 주장하고 있는 완고하기 그지없는 존재론적 무의식을 표출하고 있다.

사진은 사물의 거죽 즉 외양을 포획하는 일에 만족하는 매체라는 생각은 구시대적이다. 사진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보다 더 많은 것을 우리 앞에 제시한다. 수잔 손탁(Susan Sontag)의 말에 따르면, 사진에는 "우리가 놓쳐버린 10%"가 있다. 만약에 진실이라는 것이 우리의 상상 안에 있지 않다면, 틀림없이 우리를 빠져나간 그 10%에 있을 것이다.

Posted by hu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