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5'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09/05/27 애도문: 젊음의 살해 (11)
  2. 2009/05/19 뱀파이어의 몰락 (2)
  3. 2009/05/10 잠재 이미지: 지각의 중화 혹은 이행

내가 쓴 글을 칭찬해주시고 직접 추천까지 해주신 선생님이 계셨다. 내겐 아주 영광스러운 일이었고, 당시로서는 학업을 지속하는데 많은 동기를 주신 분이다. 지금은 은퇴를 하시어, 모 신문에서 종종 칼럼을 통해서만 뵐 수가 있을 뿐, 직접적으로 뵙기는 쉽지 않은 분이다. 대내외적 지명도뿐 아니라 한국에서는 쉽게 접하기 힘든 지성의 폭과 깊이, 그리고 흐트러짐 없어 보이는 인격 때문에, 그의 한 마디 한 마디는 학생들의 노트에 그대로 옮겨졌다. 그가 개설한 수업은 말할 것도 없고, 개중에는 작은 식사 모임에까지 가고 싶어하는 이도 있었다. 그의 견해는 우리의 부산스러운 판단력에 일종의 좌표 같은 것이었다.

그분에 대한 나의 존경심이 어떤 종류의 것이었는지 분명히 알게 된 일화가 있다. 우리는 가끔씩 현실정치에 대한 관심으로 특정 정치가들에 대한 그분의 의견을 듣고 싶어하곤 했다. 그럴 때 마다 그 분은 정치의 의미에 대해, 삶과 정치에 대해, 현역 정치가들에 대해, 혹은 옛 세대의 정치가들에 대해 가끔씩 논평을 하곤 했다. 우리는 노무현이라는 정치가가 궁금했다. 당시로서는 예상치도 못하게 대통령이 되어 있던 터였고, 지금 기억으로, 검찰과의 불화 때문에 검사들과의 토론이다 뭐다 해가며 미디어가 시끄럽던 때였다. 그 분은 물론 권위주의나 파쇼정치를 반대했지만, 흔히 중도라는 이름으로 자신도 (알게)모르게 보수주의적 성향이 있었기 때문에(중도란 속물의 혹은 미안한 마음의 말장난일 뿐이다), 노무현을 썩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것이라고 짐작은 했었다. 그러나 그의 반응은 생각보다 훨씬 강도가 쎘다. 단어선택이나 어조는 점잖았지만, 가만히 들어보면 그가 얼마나 낯설어하는지, 얼마나 신뢰하지 않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이유는 많았다. 그는 대체로 노무현이 상징적으로 정치를 한다고 생각했다. 민주, 자유, 특권 없는 평등, 권력타도, 불의에의 비타협, . . . 이러한 구호들이 노무현의 발언에 자주 남발이 되었고, 그는 이를 구체적이지 않은 상징들의 결합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깊은 얘기를 오랫동안 한 것은 아니었지만, 몇 마디의 내용으로 미루어보아, 그의 눈에는 노무현의 정치적 발언, 행보, 판단, 타협하는 방식, 열정, . . . 그 모든 것이 일종의 정치적 쇼맨십과 크게 다르지 않은 종류의 것이었다. 노인인 그가 볼 때(그는 정말로 노인이었다!), 노무현은 치기 어린 아마추어일 뿐이었다. 너무나 뚜렷이 드러나고 드러내는 그 가시적인 열정이 그로서는 지속력도 없고 의미가 덜한 외침일 뿐이라고 말이다. 길지 않은 대답이었지만, 그 견해는 그 동안 내가 그 분께 존경심을 가지면서도 왠지 모르게 한편에서는 동의하기 어려웠던 뭔가를 폭로해 주는 것처럼 보였다.  

돌이켜보건대, 그 깊고도 탁월한 지성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항상 한 가지 빠진 것이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는 믿음이 없었다. 아니 믿음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알듯 모를 듯 믿음을 감추고 싶어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혹은 현실을 전혀 모르고 있거나. 아니 현실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내부에 깊이 들어 앉아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거나. 그는 믿음조차 심미적 형식을 갖춘 하나의 윤리이기를 바랬던 것 같은 의구심이 든다. 젊은 청년의 열정을 무모함에 기반한 서툰 낭만주의로 보고 싶어 했거나, 아니 그 열정이 사악한 제스처일 수도 있다고 의심한 것은 아닌지. 불의의 위험에 몸을 내던지는 행위를 믿지 않거나, 아니 그 전에 우선 팔짱을 끼고는 불의가 무엇인지, 열정이 무엇인지, 믿음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따져봐야 한다고 믿는 아름다운 선비이자 우아한 햄릿처럼. 그는 구체적인 인식과 판단을 주장했지만, 한편으로는 구체적인 것이 어디선가 주어지는 것으로 본 것은 아니었는지. 그래서 그것이 명확한 경험적 형식의 사물로 출현하기를 기다리기만 했던 것은 아닌지. 그와의 대화는 당시에는 의식하지 못했던 어떤 질문을 나로 하여금 항상 품게 했다: "춤을 추시겠다는 겁니까? 말겠다는 겁니까?" 아름다움에 대한 일본인들의 놀라운 열광과 탁월한 심미안을 접할 때, 감탄의 배후에서 간혹 느껴지는 허기가 혹시 이런 종류의 것은 아니었는지. 믿음이라고 불러야 할지 열정이라고 불러야 할지 욕망이라고 불러야 할지 아니면 다른 그 무엇인지는 따져봐야겠지만, 무엇보다도 불신에 사로잡혀 근간을 잃은 냉소적 지성이 도대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 그러한 지성이 할 수 있는 일이 결국은 이미 만들어진 질서 위에서 근엄하면서도 소심한 권위를 치열하게 지키는 것 외에 그 무슨 새로운 것이 만들어질 수 있을지 궁금했다. 내가 우러러보았던 것은 다름아닌 깔끔하게 살균되어 완벽하게 정리된, 냉랭한 몇 권의 책 뿐이었다.

르네상스 플랑드르 화가인 브뤼겔(Pieter Brughel the Elder)의 대단히 흥미로운 그림이 있다. 제목은 <The Procession to Calvary>(1564)이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그림은 십자가 처형을 위해 예수가 언덕으로 십자가를 지고 오르는 모습을 담고 있다. 골고다 언덕 중턱에서 일련의 군대가 그의 고난의 길에 채근질을 하며 동행하고 있고, 저 위쪽으로는 시커먼 까마귀와 검은 먹구름이 자욱한 처형지가 모여든 인파로 인해 둥근 원 모양으로 처형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니까 인류에게 있어 가장 비극적이고 슬픈 사건으로 알려진 기원적 순간의 현장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바램이나 예상과는 다르게, 그 슬픔의 현장 주변에는 시장판 혹은 난장판과도 같은 광경이 펼쳐진다. 슬픔과 탄식에 빠진 마리아와 몇 몇 신자들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무슨 시비가 붙었는지 서로 싸우고 있는 패거리들, 모처럼 생긴 구경거리에 흥분하여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철모르는 아이들과 강아지들, 언덕 여기저기에서는 말 타기 시합, 남의 보따리를 훔쳐 달아나는 도둑, 공놀이, 왁자지껄한 구경꾼들, 풀 죽어 있는 광대, 무엇에도 관심을 두지 않고 땅을 바라보는 노인, . . . 이 광경에서는 도무지 비극적 슬픔이라고는 찾아보기가 어렵다. 무지막지하게 모든 것을 휩쓸어가며 이행해가고 있는 시간 속에서, 단지 한 조그만 동네에서 벌어졌던 스캔들 혹은 구경거리 정도에 불과해 보인다. 희생과 인류의 구원이라고 하는 기독교적 열정에 도리어 찬물을 끼얹어 조롱하듯, 십자가 희생이라는 거대비극은 중심 테마가 되지 못하고 주변부의 일개 소요에 지나지 않게 된 것이다.

브뤼겔의 이 그림에는 한 열정이 현실의 삶에서 어떠한 위상을 갖는지가 잘 나타나 있다. 인류를 구원하겠다, 인간의 죄를 희생으로 상쇄하겠다고 하는 이 종교적 열정. 그러나 무지막지한 현실의 "다양성"은 이 위대한 열정이 실은 세상 모든 것을 대변해 줄 수 없다고 찬물을 끼얹는다. 언덕 끝까지 한 발 한 발 걸어가며 느껴지는 땅의 굴곡처럼, 세상은 너무나 무겁고 두터운 중층 지대로 축적되어 있다, 여전히 아무것도 모른 채 철없이 인생을 허비하는 사람이 너무 많고, 이상한 취향, 별난 성격, 전혀 다른 본성의 소유자들이 너무 많다, 따라서 한 두 마디의 혈서와 다짐 혹은 목청으로는 정리가 되지 않을 뿐더러, 저 산만한 세상을 단숨에 집합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이다. 어떤 점에서 그 야심과 기획은 망상이고 오만일 수 있으며, 한 마디로 말해, "너나 잘하세요!"라고 말이다. 혹은 그 반대일지도 모른다. 당신들의 죄를 갚기 위해 저렇게 피를 흘리며 십자가를 지고 가지 않는가? 지쳐 쓰러진 저 열정에 물 한잔 아니 고개를 좀 돌려 관심을 줄 수는 없는가? 완전히 혼자가 된 인간을 생각해 보았는가? 어떻게 당신들은 그리도 철이 없는가? 그가 죽고 나서야 후회하며 우상을 섬기는 당신들은 얼마나 어리석은 당나귀들인가? 라고 말이다.

브뤼겔이 이 그림에서 무엇을 의도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구원에의 열정을 알아보지 못하는 철없는 세상을 조롱하려고 했는지, 아니면 죄 많은 세상을 구하겠다는 자기확신에 사로잡힌 열정에 찬물을 끼얹으려 했는지는 꼬집어내기 어렵다. 둘 다일 수도 있고, 둘 모두 아닐 수도 있다. 물론 세상은 하나의 목소리로 대변될 수 없으며, 브뤼겔의 그림에는 단숨에 대답할 수 없는 현실의 다중성이 있다. 거기서 한 두 명의 가멸찬 열정이 해답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은 젊지만 얼마나 아마추어적이고, 뜨겁지만 얼마나 무모한가? 어떤 점에서 그 위대한 정신과는 반대편에 서서 세상을 삼켜버리려는 정치적 음모와 파시즘이 그러한 열정의 또 다른 모습은 아니었는가? 하늘을 보라! 당신의 바램과는 달리 임박한 처형 위에는 두렵고 슬픈 먹구름만이 드리워져 있지는 않다. 그 뒤에는 따사로운 햇살의 푸른 하늘이 있고, 또 그 옆에는 짙게 드리운 뭉게구름이 시야를 가리고, 하늘 지평선 저 끝으로 펼쳐진 광활한 대지와 집들과 초목이 현기증 나지 않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열정과 계시가 우리를 대변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사실, 이것이 우리가 처한 불행이다. 우리는 이미 미디어의 의식으로 세상을 볼 수 밖에 없고, 누군가의 눈이 되어 우리의 창을 열 수 밖에 없다.

나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참여정부 내내, 그리고 그가 자살한 오늘까지, 그를 생각하면 항상 브뤼겔의 그림이 떠올랐다. 그가 십자가를 졌다는 말이 아니라(비슷한 용어를 써서 동일한 열광으로 오해 하지는 말자), 한 열정이 세상과 맺고 있는 관계에는 저 그림에서처럼 쉽게 설명하기 어려운 안타까움이 배어있다는 말이다. 열정이 그의 생각처럼 그렇게 잘 통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자신의 뜨거운 견해가 수많은 소요의 일부에 지나지 않을 수 있음을,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그토록 원했던 민주주의란 바로 그 자신의 열정이 단숨에 쉽게 먹히는 것을 방해하는 두터운 다중성에 있음을, 아마도 이것이 정권 말엽에 그가 깨달은 현실일지도 모른다.

그는 물론 인류를 구하겠다는 망상은 없었다. 그의 열정은 순수하게 개인적인 차원의 것이었고, 현실적인 것이었다. 그의 열정이 좌파의 특정 이론이나 당정 차원의 노선, 혹은 집단적 형태의 정치체로 현실화된 것은 아니었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그것이 정치적이고 과학적으로 조직화되지는 못했던 것이다. 이를 과소평가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그의 의지와 열정을 훼손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좌파의 과학적이고 정교한 이론을 잘 알았는지는 따져봐야할 것이다. 그러나 81년 부림사건 이후 노동운동, 6월 항쟁 등 좌파적 경향이 본격화 되어갔다. 그럼에도 좌파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것은 대단히 의아스러운 일이며, 어쩌면 이것이 한국 좌파가 실패할 수 밖에 없는 근본적인 이유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그의 열정이란 조직적인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순수한 것, 비유컨대 때묻지 않은 한 시골청년이 우연히 보게 된 세상의 부당함에 대한 자발적 분노와 패기 같은 것이었다(그렇기에 그 지속력이 경이롭다). 그에게서 풍기는 아마추어적인 분위기는 이러한 청년의 열정에 기인하는 것이지, 흔히 말하듯이 전적으로 능력의 완성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보통은 나이가 들면서 혹은 사회물을 먹으면서 사그러들기 쉬운 그 분노와 패기는, 다행히도 그가 법조계에 그리고 이어 정계에 진출함으로써 어느 정도는 정치적으로 현실화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고 마음을 움직였다.

그는 정치가 야합이나 협잡 음모 혹은 비굴한 타협이 아님을 증명하고 싶어했다. 그는 품위와 위엄을 포기한 그러한 악착스러움이 없이도 성공적인 정치와 삶이 가능함을 보여주려고 했다. 아니 진정한 정치와 삶 그 자체가 바로 그러한 것들을 배제하는 과정임을 말하고자 했다. 그에게 있어 정치는 의로움(義)을 통해서만 완성될 수 있는 것이었다. 도덕성이란 그 결과 혹은 일부일 뿐이다. 우리가 그의 죽음에 가슴이 아프고 눈물이 나는 이유는, 반드시 한번은 청년이었을 우리 모두가 가졌던 그 무엇, 그러나 뒤틀린 삶의 강요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타협하고 굴복하고 비굴해질 수 밖에 없어서 이미 너무 멀리 떠나와 버린 그 무엇, 그러나 여전히 마음 한 구석에 남아 부당함에 직면할 때 강렬히 떠올리지만 아쉽게도 침묵하고 있었던 뜨거운 그 무엇을, 이제는 그 마저도 완전히 송두리째 잃어버린 것 같은 안타까움 때문이다. 청년이었던 우리 모두는 그래서 말할 수 없이 비통하다.

참여정부는 기업이나 언론을 막론하고 특권을 가진 소수와의 싸움, 즉 그들의 부당한 힘과 이익을 약화시키려는 노력으로 점철된 시기였다(성패여부를 떠나서). 따라서 어떤 점에서, 노무현은 상징적 정치를 한 것이 아니라 상징과 투쟁을 한 것이었다. 왜냐면 상징을 만들고, 상징을 유포하고, 상징을 은폐하는 쪽은 항상 그 특권소수였기 때문이다. 특권소수는 자신들의 이익이 커지지 않도록 훼방을 놓는 그를 무척이나 싫어했다. 모르긴 몰라도 노무현 정권이 계속되었다면 밥그릇에 재를 뿌려대는 그를 능히 암살까지 음모했을 만큼 그들의 증오심은 컸다. 이 기간 동안 특권층은 자신의 이익에 닥칠지 모를 심각한 손해가 생존에의 위협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이들의 싸움은 일종의 생존투쟁 같은 성격을 취했고, 그 만큼 대립은 악랄한 형태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일환으로, 그들은 그의 품위를 훼손시키고 싶어했다. 말투라든가 출신이라든가 심지어는 두 부부의 학력까지 운운하며, 오히려 자신들의 천한 근성을 드러내곤 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부도덕과 탐욕에 대한 그의 혐오에 찬 비난에 자존심이 몹시 상했고, 똑같은 방식으로 그에게 되돌려주고 싶어 했다. 그래서 제 아무리 잘난척하는 노무현도 결국은 자신들과 다르지 않은 일개 탐욕의 모리배일 뿐임을 증명하기 위해, 자기들끼리 천박한 루머를 퍼뜨려가며 악인의 소설을 쓰고 증거를 찾아 나섰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정치라는 것이 원래가 의롭지 않은 것, 탐욕에 기반한 것, 다들 그렇게 하는 부당함의 질서 자체라고 만인에게 설파하고 싶어했다. 결국 우리는 정치가들을 믿지 않게 되었고, 그 만큼 우리가 보고 싶은 지도자의 이미지를 노무현에게서 찾고 싶어 했다. 자신들이 만든 루머를 스스로 믿고 있었던 특권층은 노무현에 대한 사람들의 열광을 믿지 않았으며 의아해했다(탄핵이 좋은 예이다). 그건 그의 권모술수와 쇼맨십이 먹힌 결과라고 생각했다. 어떤 측면에서 그들은 도덕적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었는지도 모른다. 거리낌없이 내뱉는 그의 당당함(그들은 오만이라고 불렀던)에 질투심도 느꼈을 것이다. 그들은 유럽의 정치가들처럼 마치 스포츠 게임의 한 역할로서 다시 언제든지 화해가 가능한 공(公)적인 상대로 그를 수용했던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죽일지 모를 적으로, 증오를 품은 사적인 원수로 간주했다. 정치가 당사자들의 이익관계를 대변해주는 활동이 될 때, 다시 말해 정치가가 이익관계의 당사자가 될 때, 정치는 사정없이 악랄해진다는 점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정치가 아닌 생존 전쟁을 벌였던 특권소수는 결국 그 악착같음으로 인해, 그리고 칼을 쥔 몇 몇 심복들의 무의미한 오바로 인해, 그의 죽음을 이루어냈고 일견 승리한 것처럼 보인다.

특권소수의 승리는 그들 자체의 힘보다는 많은 조력자들의 힘이 컸다. 그들은 수적으로는 소수였지만, 그 힘은 다수였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이미 그들의 조력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헤게모니를 장악했던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경제모델도, 잘사는 나라의 뚜렷한 모델도 없이, 그 특권층을 선망하고, 그들이 선호하는 것을 선호하고, 그들이 싫어하는 것을 싫어하고, 그들처럼 부자가 되고 싶어하고, 강남에 살고 싶어했다. 개미든 벌레든 아니면 단순 은행고객이든, 우리는 주주가 되어 그들처럼 대박의 신화를 믿었고, 치고 빠질 기회 즉 스캔들을 기다렸다. 그렇게 우리 모두는 그들을 위해 만들어진 양복을 어색하게 걸친 채 흉내 내며 뻐기고 싶어했다. 이를 부추긴 또 다른 조력자(아니 그 주체)는 바로 언론 미디어였다. 그들 역시 경제를 제1가치로 내걸고(경제가 뭔지도 잘 모르면서), 전국민적 캠페인까지 기획하여, 모든 이의 뇌리 속에 경제, 돈, 부자, . . 이러한 특권층의 강박을 공유하게 했다. 마치 그들의 강박이 아니면 경제는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가 굶어 죽기라도 할 것처럼! 그들의 말과, 인생관, 생활습관은 책, 잡지, 미디어에 출판 방송되어 귀감처럼 다루어졌다. 그들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모든 이의 행동모델이 되어 하나의 거대한 콤플렉스를 형성하면서 우리를 설득했다. 현재의 정치 경제 권력은 이 콤플렉스를 극대화하고자 한다. 미디어의 주체가 이미 그들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의 눈을 통해서만 세상을 바라보고, 창을 열었던 것이다. 이 창을 통해 본 우리의 세상은 가난한 사람들조차 실패한 부자였고, 집값의 하락을 사형선고로 받아들인 집 없는 집주인들, 즉 잠재적 강남인이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노무현에 대한 증오까지 흉내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노무현이 특권소수와의 전쟁에서 실패한 원인은, 그가 특권소수를 일부 계층이나 일부 지역으로 혼동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상대는 국민 전체였는데도 말이다.

결국 특권소수와 최근의 검찰이 창조한 것은 무엇일까? 반추동물의 되새김질처럼 반복적으로 파고든 집요한 조사로 결국 그들이 창조한 것, 그것은 다름 아닌 절망과 허무와 무기력이다. 젊음의 살해! 그것 외에 무엇이 있겠는가? 그들은 우리가 정치가들로부터 보고 싶어했던 어떤 것이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으며, 있다 해도 반드시 실패하고 말 것이라고 믿는 냉소적 현실주의를 행동으로 증명했다. 아마추어리즘이든 무모함이든 서툰 낭만주의이든, 청년기에나 어렴풋이 품고 있다가 상실해버리고 마는 것으로 간주했던 그것이, 그래도 혹시나 현실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지속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기 나름이 아닐까? 라고 망설이고 있는데, "그딴 것은 존재하지 않아!"라고 쏘아붙이며, 경험은 많지만 한 없이 미루고만 있는 쇠잔해진 한 인정머리 없는 노인의 일축처럼. 그들은 한국인에게 가장 소중한 그 무엇을 완전히 망가뜨리고 망쳐놓았다. 정권을 창출한 것도 아니었고, 정치인의 부패를 막은 것도 아니었고, 정의를 수호하거나 도덕성을 지키거나 부도덕을 고발한 것도 아니었다. 위협을 느낀 생존을 위한 투쟁도 아니었다. 손에 든 칼이 진짜로 잘 드는지 확인하기 위해? 아니면 뭔가를 해낼 수 있음을 과시하기 위해? 충성을 증명하기 위해? 법 절차의 문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법 이전의 의지를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장하게도 또 한번 불신과 냉소를 창조하고 말았다. 그래서 우리는 힘이 빠지고, 아무것도 하기가 싫어지고, 정말이지 지겨워진다.

누군가가 죽자마자 모든 대결과 명분들은 철회된다. 마치 한쪽의 죽음이 대결의 고지였다는 듯이, 명분이 마치 살아있는 동안에만 유효한 생물체인 것처럼, 도덕성이나 정의가 마치 싸움의 무기였던 것처럼, 그가 죽고 싸움이 끝나자 심장의 멈춤과 함께 명분도 매장되어 버린다. 머리를 숙이고, 애도를 표하고, 증오의 감정을 풀고, 모든 악착스러움을 접은 평화로운 상태이다. 그러나 죽음 즉 침묵 앞에서는 근본적인 무언가가 드러난다. 그의 죽음 앞에서, 우리는 그 동안 고귀하다고 쥐고 있던 가치들을 떨구고, 잠시겠지만 모든 합리주의적 믿음을 철회하며, 잠시 서서 하늘을 보는 순간 잊고 있던 무언가를 깨닫는다. 우리는 젊음을 잃었다! 배불리 먹여주겠다는 정치? 약자를 위하겠다는 정치? 정규직 노동자를 만들겠다는 정치? 우주를 구원할 이론으로 중무장한 정치? 정치는 약속이 아니다. 장황한 약속으로 실마리를 풀어가며 냉랭하고도 까칠한 능력을 앞세우는 정치와는 본성이 다른, 마음을 움직이는, 감동을 주는, 정치 이전의 정치를 우리는 잃어버린 것이다.

그는 해방 이후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정치가에게서 보고 싶어하는 것을 육화한 유일한 사람이었다(김구 운운하며 오버하지 말자!). 새로움을 탄생시키는 것은 지성이 아니다. 게으르고 늙어빠진 소심한 지성은 항상 처져있지 않은가? 돈 버는 수완도 역시 될 수 없다. 돈은 우리가 버는 것이지 대통령이 버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들은 우리를 절망하게 하고, 힘을 쫙 빠지게 하고, 무엇보다도 지겹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러야 젊음을 육화한 정치가를 만날 수 있을까?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야 우리조차 덩달아 젊어져 그의 무모함마저 믿고 밖으로 나가게 될까? 아니 그러한 것이 있기는 한 건가?

Posted by huun

뱀파이어는 항상 몰락을 하는 것일까? 해피엔딩을 일종의 문화적 제도로 삼은 헐리우드에서조차 뱀파이어의 끝은 몰락이다. 그들에겐 삶이 아예 없거나 삶을 지속할 만한 존재론적 근거가 없는 것일까? 흡혈귀가 바이러스 감염과 같은 질병이기 때문인가? 왕성한 식욕과 건장함, 그리고 나약한 인간은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공간을 초월하는 힘과 탄력을 가진 불멸의 존재 같은데도, 그늘진 창백함과 충혈된 동공은 항상 죽음을 연상케 하는 불쾌한 비정상의 비쥬얼을 환기한다.


대부분의 작가나 영화감독은 자신의 종교적 입장과는 무관하게 무턱대고 흡혈귀를 질병으로 규정한다. 그러나 어떤 질병? 인간의 의학이 규범화한 특정 징후를 보이는 그러한 질병? 그러나 딱히 의학적 소견으로 진단을 내릴 만한 징후도 없지 않은가? 다만 혈액을 섭취하지 않으면 기침과 고열과 백화현상 비스무리한 신체적 변화들이 있기는 하다. 결국 그들의 몰락은 피의 문제란 말인가? 마늘에 대한 특이한 혐오를 포함해서, 피를 먹는다든가 하는 식품에 대한 이상취미 때문에? 그러나 자연적으로 그가 갈구하는 음식이 그의 신체를 해체시키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에게는 피가 독이 아니라 생명이 아니던가? 그의 문제는 피의 섭취가 아니라 오히려 섭취를 방해하는 다른 것에 있어 보인다. 허기로 인한 인간의 죽음을 질병으로 보지 않듯이, 허기를 채우기 위한 인간의 무자비한 음식 섭취를 질병으로 보지 않듯이, 많은 흡혈 동물들이 그렇듯이, 흡혈성 역시 질병이라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의학적 생물학적 소견 외의 다른 원인, 가령 피에 대한 금지된 욕구 때문에 어쩔 없이 생명을 죽여야 한다는 생득적 때문에? 종교적 질병으로 인해 그는 항상 십자가를 피해 다니는 것으로 설정된다. 그러나 최근의 영화에서는 십자가가 다지 힘을 발휘하지 못하거나 아예 등장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종교적 질병으로부터 치유된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자연 안의 모든 존재는 아이러니하게도 생명을 파괴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가 없다. 뱀파이어뿐만 아니라 인간과 자연 전체가 원죄의 스캔들이라고 하는 종교적 질병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것이다. 생명이란 죽음으로의 길이고, 창조란 해체이며, 영양이란 분해와 소화이며, 대낮은 밤에서 밤으로의 이행이다.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선천적 죄를 부과해서 존재를 부정하는 방식 자체가 가지는 졸렬함도 있다. 그것은 구차하고도 궁색한 성직자들의 해묵은 변명에 불과할 뿐이다. 뱀파이어 역시 교설의 공포가 기만적임을 이제는 깨달은 같다. 뱀파이어의 종교적 몰락의 시대는 구식이 된지 오래다.


궁금한 것은, 어째서 뱀파이어가 갈구하는 것이 동물의 피가 아니라 반드시 인간의 피인가? 염소의 피라든가 돼지나 닭이나 소의 피로 인간처럼 그럭저럭 살아갈 있다면, 뱀파이어 자신도 몰락하지 않을 있지 않을까? 나아가 동물들을 사육하고 재배를 하여 농사를 지어 살아가는 방식도 생각해 있지 않을까? 고기는 내다 팔아 부수입을 올리고. 밤과 낮을 바꾸어 살아가야 하는 불가피한 조건이 있긴 하지만, 그것이 그의 재배나 목축활동에 치명적인 한계가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과학만능주의 시대에 피의 생화학적 인공생산 역시 생각해 수도 있지 않을까? 결국 그의 몰락은 사려(prudence) 필요로 하는 노동의 부재, 말하자면 창세기적 상상계에서 아직 깨어나지 못한 현실 인식의 부재 혹은 철없던 시절에 길들여졌던 편식습관에의 고착 때문이라고 말해야 할까? 아니면 식품가공을 혐오하는 결벽스러운 자연주의 때문이라고 말해야 할까? 하지만 널린 것이 인간의 피가 아닌가? 노동이나 과학은 필요치 않다. 인간은 많이 있다. 심지어는 너무 많이. 그다지 피를 아끼는 종족도 아니며 오히려 남발하지 않는가? 인간이 많은 세상은 뱀파이어에겐 아직도 하나의 낙원이다. 오히려 동료 흡혈귀가 너무 많아져 피의 수요가 공급을 앞지르지 않도록 동료 흡혈귀와의 야만적 경쟁이 필요할 뿐이다.


피에 대한 욕구가 불가피하게 인간과의 전쟁을 초래하기 때문일까? 뱀파이어의 피에 대한 욕구 만큼이나 인간의 생존 욕구도 있으니까. 그래서 뱀파이어는 항상 인간과 불화하고 그와 욕구의 전쟁을 치른다. 결국 뱀파이어가 몰락한다면, 주로 미국식 뱀프 영화들이 그렇듯이, 인간과의 전쟁에서 패했기 때문인가? 힘이 딸려 도저히 되겠으면 예외 없이 아버지를 호출하여 (이미 치유가 것도 모르고) 십자가를 내밀거나 성수를 뿌려대는 나약한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힘과 탄력으로 공중을 날아다니는 그가? 아무리 칼로 찌르고 총으로 쏘아대도 해체되지 않고 원래의 상태로 회복되는 단단한 육체와 끈적이는 피를 소유한 불사신이? 말도 된다. 인간과 전쟁을 치르고 대립적일 밖에 없기 때문에 몰락해야 한다면, 그것은 뱀파이어를 우리 인간의(특히 미국식 영웅으로서의 인간) 관점에서 결과일 뿐이다. 뱀파이어는 자신의 역사가 없단 말인가? 대낮의 노동과 빛의 역사 만큼이나 잠과 달과 어둠의 역사가 있다.


어느 모로 보나 뱀파이어의 몰락은 필연적 근거가 없어 보인다. 그는 의학적으로도 종교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몰락할 이유가 전혀 없다. 그는 심지어 우월하기까지 하다.


물론 가지 . 어쩌면 가장 많이 야기되는 근거라고도 있는 , 바로 윤리적 질병 때문이라는 이론이다. 말하자면 인간과의 전쟁이 아니라 근본적인 전쟁, 자연과의 전쟁 때문이라고 할까? 쉽게 말해 자연의 자정능력이 감당할 없는 과도한 갈증과 식욕으로 인한 자멸이다. 그래서인지 대부분의 영화감독이나 작가들은 항상 흡혈귀의 '' 방탕함을 연상시키는 관례 같은 것이 있는 같다. 다른 남자의 여자를 유혹하여 그녀들의 뽀얀 목에 깊고 진한 정욕의 붉은 징표를 꽂아대고, 식욕을 채워줄 인간을 찾아 날카로운 송곳니로 무자비하게 천공을 낸다. 끊임없는 쾌락에 대한 갈증. 결과 모든 자원의 고갈 아니면 자신의 고갈. 이것이 뱀파이어라고 하는 윤리적 질병의 몰락의 절차이다. 그러나 욕구가 자연을 초월하고 이탈하고 자정능력을 능가하는 것이라면, 흡혈귀는 자연의 질서 안에 있는 자연적 존재가 아니란 말인가? 그렇다고 초자연적 존재도 아니지 않은가? 그는 대낮의 빛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물론 기독교에서 빛과 십자가의 본질은 물리적 성질이 아니라 초자연성이지만, 어떤 뱀파이어는 선글라스에 선탠 크림을 칠하고 대낮에 출몰한다). 어쨌든 그는 먹어야만 하고 수면이 필요하며, 다른 어떤 존재보다도 자신의 육체로 파고든다. 그는 자연을 초월한 존재이기는커녕 오히려 자연 안에 갇혀 있는 것이다. 사실 그의 과잉 욕구의 진정한 의미가 이것이다. 욕구의 초과는 실상 결핍에 근거하고 있다. 결국 윤리적 질병에 의한 몰락이라는 이론에 따르면, 뱀파이어는 건강하지도, 식욕이 왕성하지도, 자신의 육체와 영혼을 지속시킬 만큼 충분한 참을성이 있지도 않다. 지속 가능한 건강이란 새로운 변화를 수용하는 폭과 깊이의 반영이기 때문이다. 그는 대식가이지만 실은 편식가일 뿐이며, 초월한 보이지만 실은 신경증 환자이며, 당찬 활보의 소유자이지만 실은 어둠 속에 얼어붙은 내성적 히키코모리일 뿐이라는 것이다. 자연적이지도 그렇다고 초자연적이지도 않은 그의 아노미가 이미 그를 창백하게 죽은 존재로 규정한 것일 있다.


그런데 우리는 뱀파이어의 아주 기이한 몰락을 목격하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박찬욱의 <박쥐(Thirst)>에서는 특이하고도 어이없게도 뱀파이어가 자살을 선택한다. 법적이라고 해야 할지 종교적이라 해야 할지 윤리적이라 해야 할지 아니면 바이러스 증상으로 인한 신체적 고통이라 해야 할지 판단하기 어려운 종류의 '죄의식' 혹은 '양심' 휩싸여 있는 흡혈귀를 보게 것이다. 바이러스 때문이든, 사로잡힌 욕망이 금지되었기 때문이든, 아니면 살인을 했기 때문이든, 죄의식의 내용은 자신의 존재가 자연으로부터 이탈하여 자연과 인간에 민폐를 끼치고 있다는 강박이다. 그는 갈증과 욕망을 숨기고 싶어하고 부끄러워하고 저주한다. 그로 인해 양심적인 괴물이 되어 가지 인도주의적 노력으로 양심을 상쇄하고자 한다. 죽어가는 사람(남에게 무엇이든 주길 좋아했던)에게서 약간의 혈액을 나누어 섭취한다든가, 기증된 혈액만을 받는다든가, 살인이 아니라 자살을 도와준다든가 등등. 나아가 성실한 괴물은 피의 농업이나 목축이라도 기꺼이 태세다.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양심도 없으며 식욕과 갈증이 대단히 왕성한 여인-뱀파이어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어쨌든 여기서도 뱀파이어는 전쟁을 치르다가 몰락한다. 하지만 무엇과 전쟁을 치른 것일까? 흡혈귀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전혀 다른 종이 되었을지도 모를 그를 자살로 이끈 것은 깊고도 질긴 어떤 관념이다. 인간이라고 하는, 나아가 정상적이고 윤리적인 인간이라고 하는 관념! 자신이 새로운 종이 모든 가능성을 부정하게 하는 만성적 질병, Human! 질병은 뱀파이어가 아니라 바로 인간성이다. 대낮이 주는 기쁨도 밤이 주는 기쁨도 그렇다고 다른 인간이 주는 기쁨도 없이, 단지 주기적으로 모여 마작으로 시간을 때우거나 성령을 기다리며 기적을 바라는 병든 반복의 소유자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정상인임을 의심 없이 자부하며 다른 모든 존재를 비자연적 괴물로 여기는 고착병. 그는 뱀파이어 자신의 윤리가 아니라 인간의 윤리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여인-뱀파이어는 소심한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아직도 인간인줄 알아?" 뱀파이어는 미결정된 존재이다. 그는 부유한다. 그러나 땅에 발을 내딛고자 , 어딘가에 자신의 힘겨운 육신을 정착시키려 , 주로 인간이라고 하는 만성적 질병에 안착하고자 , 그는 몰락한다.


뱀파이어는 종류의 전쟁을 치르는데, 하나는 갈증과의 전쟁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성과의 전쟁이다. 모두를 포기할 없을 , 그는 스스로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고통스러운 반복을 종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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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홍상수 영상의 중요한 요소인 과잉실재는, 세계를 요약하여 그 힘을 최대화하는 표현(주의)적 경제성과 대립하고 있다. 그 형식적인 예는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예를 들어, 클로즈업의 사용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든지, 혹은 그 고유한 의미에서의 몽따쥬의 사용도 보이지 않는다든지, 혹은 카메라가 특정 인물이나 상황을 전경화하기 위해 그들을 따라다니는 일이 두드러지지 않는다든지(카메라가 인물들을 따라다니는 경우가 있지만, 인물들은 프레임의 다른 모든 요소들 속에 묻혀있을 뿐이다), 혹은 빛과 색채를 회화적으로 사용하여 그들의 과도한 대립이나 강조를 뚜렷이 하는 일이 없다든지, 그리고 화면 구성에 있어서도 역시 의식적 배치가 두드러지지 않는다든지 혹은 숨긴다든지 하는 점이 그것이다. 또한 문학적 주제를 다루는 방식에 있어서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물론 사랑하는 연인들과 이들의 관계 그리고 욕망이나 배신 혹은 권력과 같은 소재들이 있다. 그러나 그의 영화 전체를 자세히 훑어보면, 그러한 소재들이 담론으로 다루어지거나, 서사적 의미작용을 일으키는 메커니즘은 발견되지 않는다. 단지 그 소재들을 둘러싸고 있는 정당화할 수 없는 동작들만 있을 뿐이다. 한마디로 말해 근원적 기원이나 최종적 결론이 없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동작들과 언어는 중심을 가지지 않으며, 따라서 요약되지도 않으며, 그 힘을 최대화할 수도 없다. 홍상수 영화에 있어 유일하게 스며있는 문학적 요소―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는 산만한 실재 그 자체에 대한 이름 모를 의식 외에는 아무것도 없어 보인다. 그래서 모든 문제들은 이야기가 아니라 행동주의적 사실들로부터 파생된다. 또한 이것이 바로 제임스(William James)를 위시하여 몇 몇 화용론자(pragmatists)들이 생각했던 실재이다. 이들이 생각했던 실재란 바로 의미가 결정되지 않은 세계, 미리 결정된 중심을 가지지 않는 세계, 인간적 지각 이전에 존재하는 (지각이)소거된 상태의 세계이다. 그것은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상태들 간의 이행, 나아가 지각의 이행 그 자체가 아닐까? 이를 명시적으로 예증할 수 있는 좋은 이미지가 하나 있다.

홍상수의 두 번째 영화인 <오! 수정>은 개인적으로나 사무적으로나 서로 관계를 맺고 있는 세 사람―영화 감독인 영수, 작가인 수정, 그리고 영수의 돈 많은 후배 재훈―의 사랑 이야기를 몇 편의 에피소드로 꾸며놓았다. 그런데 각각의 에피소드는 동일한 사실에 대해 세 사람 각자의 관점과 기억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니까 하나의 사건이 각 에피소드에 따라 두 번 혹은 세 번 이상 반복되어 제시되지만, 카메라의 위치나 사건의 내용은 매번 약간씩 다르게 편집되어 있는 것이다. 물론 이 작품의 화법은 개인들의 서로 다른 기억과 그 재구성에 의존하고 있지만, 전체 내용을 이루고 있는 형식은 개인들간의 상호 주관적 관계로부터 비롯된다. 이 작품에는 매우 독특한 장면 하나가 있다.

영수는 운전기사와 전화통화 중에 기사에게 모욕적인 발언을 한다. 화가 난 기사는 지금 당장 사무실에 갈 테니 그 자리에 있으라고 경고한 뒤에 전화를 끊는다. 그리고 나서 운전기사와 영수가 사무실에서 맞대면하는 장면이 두 번 등장한다. 이 두 장면은 하나의 사건(두 사람의 대면)을 두 개의 관점에서 바라본 것이다. 첫 번째로 제시된 장면은 영수의 점잖은 사과로 별일 없이 화해하는 것으로 끝난다. 우리는 이 장면이 영수의 기억으로 재구성된 것인지 아니면 객관적 사실로 제시된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그 장면에서 제시된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러나 나중에 다시 등장하는 두 번째 장면은 첫 번째와는 전혀 다른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영수는 운전기사의 폭언과 폭력에 의해 따귀까지 맞으며 모욕을 당한다. 이 장면은 첫 번째 제시되었던 사실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다. 객관성이란 상대적인 한에서만 가능한 것이므로, 어떤 쇼트가 객관적 관점의 위상을 가지려면, 그것이 다른 장면을 교정하거나 대체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두 번째 장면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처음의 점잖은 사과와 화해가 영수의 주관적이고도 자의적인 기억이었다고 확신하게 된다. 이 두 번째 쇼트는 최초의 화해 사실을 교정하면서, 그 쇼트를 (영수의) 주관적 관점으로 변형시키고, 그 자신이 스스로 객관적 관점의 위상을 취한다. 그런데 이 두 번째 장면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장면이 잠시 지속되다가 카메라는 서서히 왼쪽으로 패닝하여 그 수치스러운 장면을 숨어서 바라보는 수정을 담는다. 따라서 첫 번째 제시된 장면을 교정하여 객관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던 이 두 번째 장면은, 사실은 수정의 주관성에 의해 교정된 또 하나의 주관적 이미지였음이 드러난다. 이 두 번째 쇼트에는 아주 복잡한 문제가 있다.

우리는 흔히 영화적 지각의 두 형태(주관적 지각과 객관적 지각)를 말한다. 주관적 지각은 하나의 장면 안에서 부분을 이루고 있는 인물이나 사물에 의해 포착된 지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들뢰즈(G. Deleuze)는 이를 대체로 세 가지로 분류했는데, 우선 눈이 부상당한 사람이 자신의 파이프를 보고 있는 경우에, 이를 흐린 초점으로 처리하는 경우가 있다. 이를 감각적 주관성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카메라의 지각은 부상당한 그 사람의 주관적 감각과 동일한 것이 되어 있다. 다음으로는 춤이나 축제의 풍경이 그 안에 참석하고 있는 어떤 인물에 의해 보여지는 경우이다. 이를 행동적 주관성이라고 부른다. 움직이고 있는 인물이 어떤 대상을 볼 때에는, 그 자신의 움직이는 방식에 따라 풍경이 보이므로(흔들거리거나 빙빙 돌거나), 행동 중에 있는 경우라도 주관적 형식을 띠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감정적 주관성이라고 불리는 것이 있다. 예로, 어떤 여자가 칭찬하고 있는 주인공의 모습이 마치 거대한 나무 위에 군림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이다. 사실은 땅 위에서 단지 시이소 놀이를 하고 있을 뿐이었지만, 카메라는 그 여자의 감정이 투사된 주관성으로 그 주인공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들뢰즈의 지각-이미지에 대한 이 예들은 그의 책 Cinema I (Minneapolice, 1986)에서 p.71쪽을 참고). 이 이미지들이 주관적 특질을 띠고 있다고 간주될 수 있는 것은, 이 장면이 나오기 이전에 혹은 그 이후에 등장하는 다른 이미지들과의 비교를 통해 교정되기 때문이다. 거대한 나무 위에 군림하는 것처럼 보이던 그 인물은 나중에 가서야 시이소에서 내려오는데, 그 때서야 비로소 관객은 그때의 장면이 여자의 주관적 지각이었음을 알게 된다. 또한 이미 관객은 눈이 부상당한 한 남자와 그의 파이프를 본 바가 있기 때문에, 흐릿하게 처리된 그 파이프의 이미지가 그 남자의 주관적 지각이었음을 알게된다. 이렇게 본다면 영화에 있어 주관적 이미지는 다른 이미지와의 비교에 의해서만 판단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객관적 지각이라고 불리는 것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객관적 지각은 흔히 특정한 화면 외부에 있는 누군가의 관점을 통해 보여진 사물이나 풍경을 지칭한다. 확실히 영화에서는 주어진 화면에 속하지 않는 다른 인물이나 사물의 관점에 의해 포착된 지각이 많이 등장한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객관적 지각 역시 상대적으로 혹은 비교에 의해서만 정의될 수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화면 외부에 있다고 간주된 관점은 언제든지 화면 내부의 요소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미 지적했듯이 우리는 영수와 운전기사의 대면을 담은 첫 번째 쇼트를 객관적인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 객관성은 영수가 기사에게 모욕을 당하는 두 번째 쇼트에 의해 교정되어, 이전에 보았던 점잖은 화해가 사실은 (영수의) 주관적 기억을 암시하는 이미지로 대체되었다. 두 번째 장면 역시 마찬가지이다. 관객은 지금 목격하고 있는 수치스런 장면이 객관적인 것이라고 간주하지만, 곧 이어 수정이 목격하는 장면이 등장하면서 그 객관적 이미지는 수정의 주관성으로 대체되는 것이다. 영화에 있어 객관적 지각이란 다른 지각을 수정하고 대체하거나 밀어내면서 나오는 것 같다.

따라서 영화적 지각을 주관성과 객관성으로 뚜렷이 구분하는 것은 명목상으로만 가능할 것이다. 베르그송은 지각에 있어 주관적 지각과 객관적 지각을 뚜렷이 구분하는 것은 이론상의 추론일 뿐임을 분명히 한 적이 있다. 실제의 지각이란 그 두 이미지가 혼동되어 있는 상태일 것이다. 특히 영화에 있어 이미지의 객관성과 주관성은 상대적으로만 파악할 수 있다. 특정한 대상을 선택하여 본다는 것 자체가 이미 주관적 이미지의 투사가 없이는 불가능하며, 또한 주관적 이미지란 이미 특정한 대상이 객관적으로 보여진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양방향 화면(shot-reverse shot)에 있어 관찰자와 관찰대상의 상호보완적 기능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양방향 화면에서의 관찰자와 관찰대상은 서로 교차하면서, 하나가 다른 하나의 관점에 의해 포착되고, 또 그 반대의 관점에 의해 다른 하나가 포착된다. 예컨대, 무엇인가를 바라보고 있는 인물을 보여주고, 이번엔 그가 바라보는 대상을 보여준다. 이때 우리는 전자를 객관적 이미지로, 후자를 주관적 이미지로 결정할 수가 없다. 이미 전자는 모종의 주관성에 의해 포착된 지각일 수 있으며, 반대로 후자 역시 전자의 주관적 지각이 아닌 그 자체 드러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소설에 있어 비 초점화(zero focalization) 형식을 보면 서술자는 인물의 내부와 외부를 자유롭게 왕래하는데, 이것은 객관성을 추구하려는 노력이기보다는, '서술자=신'의 등식을 정당화하기 위한 형식의 최대화라고 말할 수 있다. 모더니스트 소설가들의 양식을 관류하고 있는 '저자의 사라짐'이나 '몰 개성' 혹은 '비 매개'와 같은 개념들 속에는 저자의 신(神)적인 망상의 결과라는 역설이 숨어있다. 저자는 (전통 소설에서처럼)스스로 등장하거나 지시되면서 세계의 일부가 되기를 그치고, 사라짐으로써 오히려 세계에 내재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식된 신이 아니라 매순간 '느껴지는 신'이 된다(Francis Streegmuller, ed. and tr. The Selected Letters of Gustave Flaubert (N.Y., 1957) p.127.). 조이스(James Joyce)는 『율리시스(Ulysses)』에서 서술자의 위상을 범신론적 신으로까지 고양시키고 있는데, 예를 들어, 우선 한 인물이 속해있는 방안의 풍경을 객관적으로 묘사한다. 그리고는 점점 그 인물의 외양으로 묘사가 집중되면서 그 인물 쪽으로 다가간다. 이제 화자와 인물은 너무 가까워져서 거의 구분할 수 없는 상태에 도달하고, 급기야는 그 인물이 보는 방식에 따라 방안과 창문 밖에 펼쳐진 바다를 묘사하기 시작한다. 그 인물 속으로 들어가 버린 것이다(이것은 마텔로 탑에서 친구들과 살고 있는 스티븐(Stephen Dedalus)을 묘사하는 장면을 참고. James Joyce. Ulysses. (Oxford, 1998). pp. 3-9). 조이스는 이를 더 밀고 나간다. 우리에게는 '촬스 삼촌의 원리'로 잘 알려진 자유간접화법이 그 예이다. 어떤 인물을 묘사하기 위해 그 인물의 고유의 어조를 사용하거나, 그 인물의 내적인 상태를 통해 그의 외관을 묘사하는 것이다. 이것은 더 이상 내부와 외부를 순차적으로 왕래하거나 교차하는 것이 아니라 그 두 체계를 동시에 보여주는 방식이다: "He[Bloom] foresaw his pale body reclined in it at full, naked, in a womb of warmth, oiled by scented melting soap, softly laved."(James Joyce. Ulysses (Oxford, 1998). p. 83) 이 예는 목욕탕에서 자신의 몸을 들여다보는 장면을 블룸(Leopold Bloom) 자신의 감각적 주관성("a womb of warmth", "scented melting soap", "softly laved")을 통해 객관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서술자는 인물의 주관성이나 스타일로부터 '감염(contagion)'되어, 내부에 있는 것도 외부에 있는 것도 아니다. 이와 유사하게 영화에서는 양방향 화면의 "극단적인 수축"이 일어나기도 한다. L'Herbier의 El Dorado에 좋은 예가 있는데, 미친 여자의 모습을 (객관적 관점으로)제시하고 난 다음에, 그 여자의 관점에서 그녀가 보고 있는 대상을 흐린 초점으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 두 화면을 결합하여, 무엇인가를 바라보고 있는 미친 여자가 이미 한 화면 안에 흐린 초점으로 제시되는 것이다(이 예는 Deleuze의 Cinema I (Minneapolis, 1986)에서 p. 72를 참고). 이것은 그 여인의 주관적 상태를 통해 포착한 그녀 자신의 객관적 이미지이다. 여기서 객관적 지각과 주관적 지각은 서로 엉키고 수축되어 동시에 펼쳐진다.

물론, 홍상수의 저 장면에는 자유간접 화용법을 직접적으로 사용한 흔적은 발견되지 않는다. 양방향 화면을 역순으로 진행하면서(즉, 관찰자를 보여주고 다음에 관찰대상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관찰대상을 보여주고 관찰자가 나온다), 카메라는 시종일관 외부에 머물러 있다. 만일 수정이 목격하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고, 다음으로 영수가 모욕을 당하는 장면이 나왔다면, 문제는 전혀 달라졌을 것이다. 또한 그 장면 어디에도 수정의 주관적 관점을 예시하는 요소를 찾아 볼 수가 없다. 흐린 초점도 사용하지 않았으며, 수정에게서만 포착할 수 있는 고유한 어조 또한 발견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수정을 객관적으로 보여줄 뿐이었다. 그런데도 어느새 우리는 영수가 모욕을 당하는 장면까지 포함하여 그 장면 전체를 수정의 주관적 포착으로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 장면에서 왼쪽(수정쪽)으로 서서히 이동하는 패닝 과정에서 어떤 알 수 없는 마술이 작용한 것일까? 여기서 패닝의 중요성은 사건의 모든 광경을 하나의 이미지로 보여주기 위해 프레임의 물리적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노력으로 국한되거나, 또한 그것이 단순히 풍경의 흐름을 통해 하나의 지각을 다른 하나의 지각으로 교정했거나 대체했기 때문이 아니다. 여기서 패닝의 더 근본적인 중요성은 카메라가 서서히 이동하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특정한 지각의 체계가 구분될 수 없는 흐름으로 변질되고 있는 이미지를 보여주었다는데 있다. 이것이 바로 베르그송이 말했던 실제의 지각 속에 깃 든 비결정성이다. 규정할 수 없는 실제의 지각 속에서 물질은 정신적 순간의 최초의 결정이 되고, 마찬가지로 정신은 물질적 순간의 최초의 결정이 될 것이다. 그것은 마치 빛의 굴곡이 점점 내 곁으로 나가오더니, 어느새 갑자기 나도 모르게 나의 의식이 되어버리는 사건과도 같다. 사건이 있고 그 사건의 당사자들이 있고 또 그 사건을 외부에서 바라보는 객관적 인물이 있고 그 인물을 다시 화면 안으로 끌어들이는 카메라가 있다. 이들은 모두가 뚜렷이 구분되지 않은 채 서로 엉켜 붙어, 하나가 다른 하나를 교정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스스로 변질되고 흐르면서 상관적 관계를 이루고 있다. 이것이 바로 지각의 중화된 이미지일 뿐 아니라, 지각의 흐름이며 상태들간의 이행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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