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6'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09/06/27 수잔 손택: 해석에의 반대 (2)
  2. 2009/06/18 문명의 그늘 (2)
  3. 2009/06/12 공포의 축제 (2)

한때는 '대중문화의 퍼스트레이디'로 잘 알려졌던 뉴요커(New Yorker) 수잔 손택(Susan Sontag). 예술에 대한 사랑과 강박의 소유자. 그럼에도 그녀는 자기 스스로 "강박적 모럴리스트"라고 부르길 꺼리지 않았다. 아름다움과 도덕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던 것 같다.

그녀는 예술에 대한 사랑을 분석가나 연구자로서가 아니라, 한 명의 감상자 혹은 숭배자로서 감추지 않는다. 예술작품을 분석의 대상이 아니라 마치 애인에 대한 욕망과 관능으로 이해하겠다는 태도이다. 그녀는 이를 예술의 "성애학"(erotics)이라고 부르고 싶어했다. 프랑스인 글쟁이 바르뜨(Roland Barthes)의 예술론의 한 측면인 감각주의와 뉴욕 예술계 특유의 냉소적 분위기가 뒤섞여 (적잖이 속물스러운) 변용을 일으키는 것 같기도 하지만, 어쨌든 예술작품뿐만 아니라 경험에 있어서의 관능성의 회복, 이것이 그녀의 주장이다. 어떤 점에서 볼 때, 그녀가 주장했던 전체 논지는 현대의 복제 산업이 만들어 놓은 불감증에서 느껴지는 불쾌감의 표현에 다름 아니다(그럼에도 그녀는 현대성이 여성을 해방시킨 유일한 시대라고 옹호하기도 하지만).

그녀는 1966년에 이 불쾌감의 한 몸짓으로, 어쩌면 불쾌감의 근원이라고 판단했던 누군가에게 항변하는 대응시선으로, 맹랑한 제목의 글을 발표했다. 그녀를 일약 스타의 반열에 오르게 해준 에세이 <해석에의 반대>(Against Interpretation)가 그것이다. 여기서 그녀는 해석행위를 불감증을 일으키는 근원으로 규정한다. 그녀의 항변에는 일부분 일리가 없지 않다. 그녀의 말을 들어보자:

    " 예술 쪽으로 눈을 돌려보면, 해석이란 작품 전체로부터 몇 가지 요소들(요소 X, 요소 Y, 요소 Z, 등)을 뽑아내는 것을 의미한다. 해석의 임무는 사실상 번역의 임무와 같다. 해석자는 말한다. 보세요! 저 요소 X가 정말로 A인 것이 안 보이세요? 저 Y가 정말로 B가 아닌가요? 저 Z가 정말로 C가 아닌가요? [. . .] 해석은 맨 처음 후기 고대 문화에 나타나는데, 이 때는 과학적 계몽주의를 통해 소개된 '사실주의적' 세계관에 의해 신화의 힘과 신뢰성이 깨졌던 때이다. 신화로부터 벗어나려는 의식을 지배하고 있었던 의심—종교적 상징의 '그럴듯함'에 대한 의심—이 생기자, 고대의 텍스트는 더 이상 그 원시적 형태로 수용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고대의 텍스트와 '현대적' 요구를 화해시키기 위해 해석이 필요해지게 되었다. 그래서 스토아학파는 신들이 도덕적이어야 한다는 자신들의 견해와 일치시키기 위해, 호머의 서사시에 나오는 제우스와 그 떠들썩한 일족의 무례한 행태를 알레고리로 만들어 버렸다. 그들의 설명에 따르면, 제우스와 레토의 부정을 통해 호머가 진정으로 말하고자 했던 것은 권력과 지혜의 연합이었다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알렉산드리아의 필로(Philo)는 구약의 역사적 이야기를 영혼의 패러다임으로 해석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40년 동안 사막에서 방랑을 하다가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출애굽기가 실은 개인 영혼의 해방, 시련, 최후의 구원에 대한 알레고리라는 것이다. 해석은 이렇게 텍스트의 분명한 의미와 (현대)독자의 요구 사이에 불일치를 전제한다. 해석은 그 불일치를 해소하려는 것이다. 여러 가지 이유로 텍스트를 받아들일 수 없게 된 상황이지만, 폐기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해석은 옛날 텍스트, 즉 너무나 소중해서 개작하거나 거부할 수 없는 텍스트를 보존하려는 급진적인 전략이다. 해석자는 그 텍스트를 실제로 지우거나 다시 쓰지 않고도 그것을 바꾸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그 텍스트의 진정한 의미를 드러내어 단지 텍스트를 이해 가능한 것으로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해석자가 텍스트를 아무리 많이 바꾸어도(또 다른 유명한 예로는, 틀림없이 관능적이기 그지없는 아가서(the Song of Songs)를 '영적으로' 해석한 유대교와 기독교가 있다), 이미 거기에 존재하고 있는 어떤 의미를 읽어낸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 . .] 이해한다는 것은 해석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해석한다는 것은 현상을 바꾸어놓는 것, 그것에 대한 등가물을 찾는 것이다. [. . .] 해석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정하듯이) 절대적인 가치, 시간을 초월한 능력의 왕국에 자리잡은 어떤 정신의 몸짓이 아니다. 인간의 의식이 역사적 산물이라는 견지에서, 해석은 그 자체로 평가 받아야 한다. 어떤 문화적 문맥에서 보면, 해석은 해방적 행위이다. 그것은 죽은 과거를 개정하고 재평가하고 탈출하는 수단이다. 다른 문화적 맥락에서 보면, 그것은 반동적이고, 무례하고, 비겁하고, 답답하다." (Susan Sontag, "Against Interpretation", A Susan Sontag Reader, New York, Random House, 1982, pp. 97-98.)

손택의 말을 넓게 생각해보면, 해석은 적든 많은 왜곡이고 기만이다. 해석은 텍스트의 다양성으로부터 해석자 자신이 보고 싶어하는 요소만을 잡아내어 자신 쪽으로 끌어 당기는 행위이다. 그래서 해석은 과거의 현재화이고, 차이의 동질화이다. 가령, 카프카의 텍스트를 '현대 사회의 소외'라든가 '개인의 고독'이라고 하는 한 두 가지의 규정된 관점으로 읽는다든가, 현재의 필요에 따라 역사적 사실이나 영토의 소유관계를 (재평가가 아닌) 현재적으로 규정하고 싶다든가, 그 묘사가 너무나 다양해서 하나의 의미로는 말할 수 없는 브뤼겔(Pieter Breughel)의 작품 <Procession to Calvary> 안에서 '십자가 처형'이라는 부분적인 주제에 적합한 몇 개의 장면만을 시퀀스로 떼어내어 그 작품 전체를 성화로 간주한다든가, 연예인이나 스포츠스타 혹은 정치가의 특정 모습만을 담은 스틸컷을 스캔들 기사와 나란히 병치한다든가, . . . 이 같은 모든 정당화 행위들, 즉 현재의 욕망을 투사해서 과거를 왜곡하기,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개인의 주장과 의지로 환원하기, 전체를 보지 않고 부분만 떼어내어 편집하기, 미리 알려진 교리와 믿음에 기대어 새로운 상황을 규정하기, . . . 를 손택이 우려했던 것은 지식의 정치적 사용에 의한 훼손이다. 이로 인해 예술작품이든 삶이든 그 고유한 관능성과 투명성을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물론 해석하지 않고 살 수는 없다. 아니 해석이 아닌 삶이 존재할까? 손택도 밝혔던 바, "니체가 말하는 해석의 의미", 즉 삶에는 진리가 아니라 해석만이 있다고 니체(Friedrich Nietzsche)가 말했을 때의 그 해석의 의미를 부정할 수는 없다. 원리상 현재란 새로운 경험들을 맨몸으로 직접적으로 대면해야 하는 상태이고, 이를 해석하지 않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예컨대 현대성의 한 진기한 현상으로 볼 수 있는 연쇄살인의 명확한 의미를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 안에 미리 결정되어 있는 해답이 있는지조차 알 수 없다. 우리가 가진 지식과 기억을 통해 해석할 도리 밖에.

결국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고, 자신의 필요에 따라 주변을 해석하고, 과장하고, 비유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손택이 하고 싶었던 말은 우리의 전반적인 경향성, 더 정확히 말해 우리의 해석 행위조차 하나의 반성적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해석행위 자체는 시간을 초월한 관점을 소유한 신의 활동이 아니라 역사적 산물이기 때문이다. 즉 해석이란 필요에 의해 자행된, 사실에 가해지는 폭력이다. 역설적이게도 우리의 해석이 역사의 산물임을 받아들일 때, 해석의 굴레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해석을 반대하는 가운데 그녀는 자신의 '성애학'을 특징짓는 술어로 관능성을 말했을 뿐만 아니라, 경험의 "직접성"(immediacy) 혹은 "투명성"(transparency)을 강조하고 있다. 같은 맥락에서, 삶에는 해석만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니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삶의 능동적 창조에 관한 것이었지, 삶 자체를 어떤 혼탁한 의견에 의한 왜곡과 기만이라고 정의한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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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원이란 속물근성적인 문명의 허영과 오만에 찬 향수이다. 고향 사진을 한 장 찍어 사진첩 혹은 벽걸이에 꽂아두는 것과는 비교할 수가 없는 것이다. 동물원에서 일어나는 일은 자연사적 사건이 아니라 문명의 한 스캔들이다. 그것이 식물이나 동물들로부터 일어난 것일지라도. 아래의 흥미로운 기사를 보라.

http://nownews.seoul.co.kr/news/newsView.php?id=20090618601007

이 에피소드에는 자연을 바라보는 문명의 공포가 뚜렷이 드러나 있다. 어른이 순진무구한 아이의 행동을 바라보며 불안해하고 걱정하고 놀라며 공포에 떠는 그러한 모습과는 전혀 다른. 칼을 쥔 당사자로서는 칼의 용도조차 알지 못했을 것이다. 칼은 물론 자르거나 찌르거나 파고들어 사물을 해체한다. 그러나 칼에는 수많은 윤리적 가치가 내재한다. 물건을 자르고, 찌르고, 줄을 끊고, 사람의 육신을 해체하고, 피를 내고. 그 중에 어떤 기능을 선택할지는 순전히 칼을 쥔 자의 생각에 달려 있다. 요리사의 칼, 어머니의 칼, 범죄자의 칼, 어린 아이의 칼. 문명의 반대편에 서 있는 고릴라로서는 칼이 음식을 자르는 도구라는 생각조차 했을 리 만무하다. 아니 쥐는 부분이 칼 자루일 것이라는 생각조차. 그냥 우연히 날카로운 곳을 피해 잡다 보니 칼자루였을 것이고, 그냥 우연히 장난을 치다 보니 칼을 휘두르는 꼴이 된 것이다. 자연은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우연이니까. 하물며 칼이 생명을 해치고 살생을 하는 범죄 행위의 도구라는 생각은, 범죄의 개념조차 없는 그에게 있을 수도 없지 않은가? 그는 그냥 인간이 떨어 뜨려 놓은 칼을 호루라기를 주어 불어보듯이 이리저리 휘둘러 보았다. 그러나 칼을 들고 장난을 치는 고릴라를 바라보며, 소스라치게 놀란 표정과 신음을 냈던 관람객들이 상상했던 것은 무엇일까? 휘둘려지는 허연 칼과 그것을 쥔 고릴라의 특유한 외모를 결합했던 것일까? 그래서 그 동안 자신이 문명인으로서 마음 속 깊이 새겨둔 어떤 이미지가 환기되었던 것일까? 검은 색의 털이 온 몸에 무성하게 나 있어 무지막지하고 무섭게 생긴 동물이 금속성의 강한 해체 도구를 들고 뛰어 다닐 때, 문명이 쉽게 머리 속에서 떠올릴 수 있는 그러한 이미지를. 예를 들면, 기자가 찍었을 수많은 사진들 중에서 하나를 뽑아 저기에 게시된 저 이미지와 같은, 정확히 인간의 모습을 닮아 더 끔찍해 보이는 그러한 이미지를. 어떤 점에서 문명이란 만물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싶어 안달이 난 강박 아니면 부정적 나르시즘일 것이다.

칼의 존재는 칼을 쥔 자 뿐만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자의 상상 속에도 있다. 칼을 보며 우리가 상상하는 것! 자연에 대하여 혹은 순진무구에 대하여 문명이 상상하는 것! 그것이 바로 칼의 존재이며, 칼을 쥔 우리의 상황을 표상한다.

Posted by huun

인류가 생긴 이래 권력은 항상 공포를 이용하여 대중 다수를 통제해 왔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공포를 이용하기도 했고, 초자연적이고 주술적인 공포를 이용하기도 했고, 인간에게 보편적인 죽음의 공포를 이용하여 구원과 처벌이라는 허구로 인간을 다스리기도 했다. 어떤 점에서 인류의 역사는 공포와의 투쟁의 역사라고 할 만큼, 인간은 자신을 위협하는 그 어떤 무시무시한 것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느 정도 알게 되었듯이, 인간을 괴롭히던 그러한 공포들은 죄다 우리 자신 안에 있는 무지와 왜곡된 마음 때문이지, 실제로 자연적 공포나 초자연적 공포 혹은 사후세계가 객관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현대가 되면서, 인간은 과학적으로 자연을 보게 되었다. 즉 자연이 살아서 우리에게 벌을 주고 상을 주는 식의 인격을 갖춘 존재로 더 이상 생각하지 않게 된 것이다. 인간은 자연을 객관적이며 수학적으로 파악하였고, 무엇보다도 자연을 사물(things)의 질서로 바라보게 되었다. 그래서 자연은 계산과 예측이 가능한 그냥 사물들의 배열이고 관계일 뿐이다. 물론 자연은 아직도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떤 무시무시한 피해를 준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자연에 어떤 죄를 저질러서가 아니라, 어떤 질서의 변화를 아직 우리가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 데에 기인할 뿐이다. 자연의 공포는 우리의 죄나 부도덕이나 사악함에 대해 하늘이 내리는 벌이 아니라 단지 재해이고 재난일 뿐이다. 자연을 맹목적으로 믿지 않게 되자, 우리는 자연으로부터 공포를 물리칠 수 있게 된 것이다(이 몰-공포가 우리를 더 파멸시키는 요인이기도 하지만).

따라서 어떤 점에서 과학적 지식의 진보는 무엇보다도 인간이 공포를 이용한 정치적 탄압으로부터 해방되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자연이나 초자연적 혹은 사후세계를 운운해서는 더 이상 공포감을 줄 수 없고, 유식하고 두려움이 없는 사람들은 더 이상 시키는 대로 복종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현대는 새로운 형태의, 더 많은 종류의 공포를 탄생시켰다. 다른 인종에 대한 공포, 다른 국가에 대한 공포, 다른 계급에 대한 공포, 다른 인간에 대한 공포, . . . 이들은 모두가 적에 대한 공포이며, 이는 다름아닌 차이에 대한 공포이다. 차이에 대한 공포는 우리를 자기중심적으로 고립하게 하고, 불화를 삶의 조건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나와는 다른 존재를 불편해 하는 우리의 삶은 항상 불안하고 무섭다.

현대 산업사회는 인간이 살면서 필요한 물건만 대량 생산한 것이 아니라 아이러니 하게도 빈곤에 대한 공포 역시 대량생산 하였다. 굶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공포가 백화점 쇼윈도의 휘황찬란한 상품들의 퍼레이드 가운데 대기 전체에 퍼져 있다. 이 공포 덕분에 우리는 하루 10시간 이상을 기계처럼 일을 한다. 일이 보장해주는 먹을 것 때문에 공포가 사라진 것인지, 아니면 정신 없이 일을 하다 보니 잠시 잊어버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상하게도 고된 노동은 우리를 편안하게 해 준다. 편하게 쉬는 것이 오히려 불안하고 무섭다.

이 뿐만이 아니다. 최근 들어 인류는 핵의 공포, 범죄의 공포, 미국 발 테러의 공포(즉 테러의 테러)에 휩싸여 있다.

과학이 진보하고 현대적 생산방식이 우리를 자연으로부터 어느 정도 해방시킨 지금에도, 여전히 공포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 지금은 초자연적이고 종교적인 공포가 단지 개인적으로만 잔존하고 있지만, 여전히 사회적 정치적 공포는 대중 다수를 사로잡고 있다. 그리고 그들을 사로잡는 공포들 대부분은 여전히 어떤 보이지 않는 권력과 특정한 세력의 허구의 산물이다.

지난 주 까지만 해도 우리는 보내기 아까운 지도자를 잃어 비통해 했다. 하지만 국화꽃과 향불의 향이 아직 가시지도 않던 와중에, 다른 한 편에서는 그 애도와 슬픔에 찬물을 끼얹듯 서서히 닥쳐온 두 개의 공포가 있었다. 하나는 우리를 단결하게 하는 공포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를 흩어지게 하는 공포이다. 전자는 핵의 공포, 아니 더 정확히 말해 이데올로기 빨갱이 공포라면, 후자는 바이러스의 공포이다. 이들이 점점 강하게 다가온다.

전자는 해방 이후 남한의 태생적 빨갱이 혐오증이 만들어낸 공포이자, 그 이후 군사정권이 가장 심도 있게 창조해 왔던 공포이다. 이 공포는 법에 의해 이미 합법화된 형식의 공포이기도 하고, 심리적으로 볼 때 뿔 달린 괴물의 이미지로 수십 년 간 분위기를 조성해 온 관계로 아주 잘 먹히는 공포 중 하나이다. 이들에 관련된 색과 단어들에 대해 반응하는 몇 몇 사람들을 보면 거의 파블로프의 개 수준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로. 이 공포는 우리 자신이 아닌 적을 향해 단결하게 한다. 즉 흩어지면 죽고 뭉치면 사는 것이다.

반면에 후자는 오래 전부터 인류를 괴롭혀 온 공포이긴 하지만, 현대의 미디어와 결합이 되어 지금은 가장 막강한 신종 공포가 되었다. 이는 어쩌면 다른 모든 공포의 메타포일 수도 있는 공포이며, 그렇기 때문에 SF 영화라든가 소설의 주요 소재가 되고 있는 공포이기도 하다. 그러나 믿지 않을 수 없게도, 이것이 과학적 발견의 산물이라는 데 문제가 있다. 우리는 주술가가 말하는 귀신이나 성직자가 말하는 사후세계를 믿지 않을 수는 있지만, 바이러스를 믿지 않을 수는 없다. 과학이 종교가 된 현대에, 과학자나 의사들의 선언을 뿌리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바이러스는 다른 공포와는 달리 그 실체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아니 과학적으로 존재하는 인류의 보편적 공포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바이러스 역시 정치 권력의 손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권력이 바이러스를 만들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자연적으로 발생한 바이러스 조차 권력은 정치화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바이러스에 대한 인간의 행동을 생각해보라. 바이러스는 가장 훌륭한 통제의 수단이 된다. 바이러스는 우리를 흩어지게 한다. 즉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 바이러스는 인간들의 불신과 냉소와 경계의 천연 자연적 조건 같은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공포를 부추기는 권력은 그 자체가 하나의 공포였다. 적이 쳐들어 오면 내가 너희를 지켜 줄께! 네가 다치거나 나쁜 일이 생기면 내가 막아 줄께! 굶어 죽지 않도록 내가 보호해 줄께! 배려와 보호의 이름으로 사람을 무섭게 하면서, 배려와 보호의 필요를 역설하는 권력은 그 자체가 공포였다. 제대로 된 어느 부모도 아이에게 두려움을 심어가며 자신의 필요를 역설하지는 않는다. 한국에는 두 가지 고질적인 공포가 있었다. 경제라는 이름으로 무의식적으로 내면화한 빈곤의 공포가 하나이고, 체제 안정이라는 이름으로 심리화된 붉은 색에 대한 공포가 다른 하나이다. 전자는 줄곧 있어 오다가 최근엔 더 강화가 된 반면, 후자는 한 동안은 잠잠했던 공포이다. 그런데 최근에 우리는 신종 바이러스라고 하는 또 하나의 생물학적 공포와 아울러, 계속 있어왔던 빈곤의 공포의 강화, 그리고 잠시 사라졌었던 붉은 색의 공포의 귀환, 이 모든 유령들이 다시 떼를 지어 출몰하고 있음을 느낀다. 우리는 이제 초자연적, 종교적 공포를 지나, 과학적 공포, 사회적 공포, 이데올로기 공포, 경제적 공포의 블랙홀로 빨려 들어간다.

비통함이 분노로 치닫기도 전에, 어쩌면 가장 견고하게 뭉쳐야 할 이 때, 한 편에서는 분노의 대상을 엉뚱한 곳으로 돌리고 있는 공포가 북쪽에서 불어오고 있고, 다른 한 편에서는 광장 공포증에 버금가는 위력으로 우리 모두를 각자만의 방안으로 흩어지게 하는 공포가 서쪽에서 불어오고 있으며, 우리 내면에서는 굶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빈곤에 대한 공포가 우리를 다른 생각 하지 말고 작업장으로 가도록 채근한다. 모일 수도 없고 흩어질 수도 없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이 삼중구속 하에서 공포에 질려 새파란 입술로 얼어붙을 판이다. 이 세 가지의 다중적 공포가 재료가 되어 앞으로 어떤 작품들이 만들어질지 주목해보자.

Posted by hu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