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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7/25 도시와 산보객 (14)
  2. 2009/07/18 냉소의 온도 (2)

19세기 프랑스 파리에서는 도시 현대화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오스망프로젝트'(Haussmannization)가 그것이다. 비좁고 불결한 거리, 낡아빠진 건물, 일관되지 않은 도로망, 비위생적인 상하수도, 빈민가와 같은 전근대적 풍경을 현대식 깔끔함으로 재편하려는 시도였다. 이 살균 프로젝트가 겨냥하고 있었던 것은 물론 파리의 도시화, 효율화, 상업화, 합리화였다. 이로부터 파리는 급속도로 기하학적인 풍경을 갖추어가기 시작했고, 이는 곧 '대로'(Grands Boulevards) 주변의 생활 전반에 속도감을 부여해주었다.

(Gustave Caillebotte, Sur Les Champs Elysees, Boulevard Haussmann, 1880)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효율적 속도화 기획과는 다르게 새로운 형태의 시민집단이 생겨났다.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를 위시하여, 훗날 벤야민(Walter Benjamin), 하비(David Harvey),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 케루악(Jack Kerouac), 그리고 짐멜(Georg Simmel) 등에 의해 이론화되어 잘 알려져 있는 현상으로, 다름 아닌 '산보객'(Flâneur)이다.

이 말은 원래 프랑스어 동사 Flâner의 남성명사 Flâneur에서 유래하여, 산보를 하거나 어슬렁거리거나 배회하는 사람을 지칭한다. 보들레르는 이를 도시경험과 연관하여 사용했다. 간단히 산보객이란 '도시를 배회하고 걸어 다니며 도시 생활을 경험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산보객은 도시의 문화적 현상과 현대성(modernity)을 예시하는 눈금자가 된다.

현대성의 지표가 되는 핵심은 물론 사회 안에서의 개인의 위상의 변화일 것이다. 오스망프로젝트가 예시했듯이, 사회규율이 합리적이고 체계적이 되면서 개인의 사적인 삶과 그 자율성은 사회적 힘에 의해 압도된다. 특히 대도시는 익명의 군중 공동체를 만들어 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군중이란 전통적인 지역 공동체로부터 박탈된 개인에 다름 아니었다. 이들은 결속된 근거도 없이 다만 산업사회의 테크놀러지에 의해 불특정 공간에 배치된 원자였다. 전통을 넘어선 현대적 자유가 한편에 있었지만, 한편에는 불안, 박탈감, 고독, 공허와 같이 삶의 추상적 형식이 가하는 정서들이 이들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Gustave Caillebotte, Un Balcon, 1880)

짐멜이 자신의 에세이 "메트로폴리스와 정신적 삶"(The Metropolis and Mental Life)에서 지적했듯이, 현대성은 새로운 사회적 유대 그리고 타자에 대한 새로운 태도를 창출했다. 개인은 시간과 공간을 이전과는 전혀 다르게 수용하여, 그 기하학적 광경이 말해주듯이, 세상에 대해 '무감동한 태도'를 가지게 되었다. 또한 18세기 이전의 정치적 종교적 경제적 사상적 굴레로부터 벗어난 현대인은, 그 자유를 예증해줄 효율적 생산력을 최대로 하기 위해 19세기가 되면서 노동의 분업과 기능적 전문화를 요구 받는다. 이 전문화는 개인이 완전한 하나의 총체로서 다른 개인에 대하여 절대적 존재성을 가질 수 없게 했다. 현대적 의미에서의 전문성이란 말하자면 불완전한 완전성이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개인들은 서로를 배타적(경쟁)으로 수용하면서, 또 한편 서로에게 긴요한 존재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은 서로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되는 보충적 존재였고, 실상은 고립적이면서도 무리로부터 5피트 이상 멀어지면 불안을 느낄 만큼 고립을 가장 두려워하는 독신자였던 것이다.

익명성으로 보장을 받은 자유의 다른 편에 고독과 우울의 정서가 자욱했던 부르주아 개인들은 자신의 자유를 확인하기 위해 혹은 자신의 우울을 치유 혹은 즐기기 위해 거리로 나와 배회와 산보를 한다. 보들레르를 대표로 하는 이들의 우울은 도시를 단지 생활공간이 아니라 하나의 심미적 대상으로 둔갑시키면서, 메트로폴리스 한복판에 침잠하여 거리를 탐색하고 모던을 관찰한다. 보들레르의 말에 따르면 '보도의 식물학자'가 된 것이었다.

(Gustave Caillebotte, Sur Le Pont de l'Europe, 1877)

그러나 이들은 도시에 감동을 느낀 것이 아니라 무감동하고 냉소적인 관찰자였다. 이들은 산업화가 추구했던 도시의 획일화, 속도, 기계화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견지했다. 19세기 영국의 댄디즘(Dandyism)이 보여주었던 퇴폐 그리고 부에 대한 혐오가 그랬듯이, 이들은 도시적 삶의 일부였고 부르주아의 도시적 우수의 탐닉자였지만, 동시에 그로부터 떨어져서 그것을 바라보고 살피고 탐색함으로써, 그 존재 자체가 하나의 제동(制動)이 되었다. 도시 한복판에서 어슬렁거리는 이들은 그 자체가 하나의 망설임이었던 것이다. 이 망설임 속에는 근본적 동기가 있었는데, 바로 사회 기술 메커니즘이 설정해 놓은 초개인적 균등화로 인한 개인의 존재론적 비하에 대한 암묵적 저항이 그것이다. 벤야민 자신이 이미 한 명의 예증적 산보객이었는데, 그것이 한편으로는 하나의 라이프스타일이었지만, 다른 한편에는 사회에 직접 참여하지 않으면서도 높은 통찰력을 갖춘 부르주아지 딜레탕트를 예시한다고 썼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비록 미완성에 그치고 말았지만 파리의 쇼핑 거리에 대한 식물학자와도 같은 관찰을 감행했던 그의 <아케이드 프로젝트>가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느린 산보와 사색은 순수하게 개인적인 행위지만 초개인적 거리 두기의 효과적 기제이다. 그것들은 대단히 비효율적인 가치들을 생산하면서 소리 없이 효율을 잠식한다. 자본의 붕괴는 공장이나 시장 혹은 현장이 아니라, 공원과 산책로에서 시작될지도 모른다.

Posted by huun

아이러니(Irony)를 수사학적으로 설명한다면, 밖으로 표현된 말(외연, denotation)과 그 말이 뜻하는 의미(내포, 함축, connotation)가 서로 일치하지 않거나 모순적인 관계를 갖는 발화행위라고 할 수 있다.

가령, 18세기 영국의 산문작가 조나단 스위프트(Jonathan Swift)는 당대 영국 사회의 아동 학대와 무관심이 사회적 범죄 차원으로 확산되었을 때, 한 팜플렛을 편집하여 주장하기를, 모든 아이들을 도살하고 요리를 만들어 기근을 해결하자고 하였다.

또 한 예로, 영화감독 이광모는 한국 전쟁 세대들의 참혹하고도 불행한 삶을 멀리서 관조하는 장면들을 찍었는데, 그 제목을 "아름다운 시절"이라고 붙였다.

이와 유사한 예로, 이탈리아의 영화감독 로베르토 베니니(Roberto Benigni)는 나치의 무자비한 유태인 학살을 어린아이의 병정놀이로 애써 해석하려는 아버지의 가련한 노력을 통해 환타지의 무기력함을 비극적 유머로 환기하였는데, 그 제목이 바로 "인생은 아름다워!"(La Vita E Bella)였다.

또 다른 예도 있다. 스탠리 큐브릭(Stanley Cubric)은 <닥터 스트레인지 러브>(Dr. Strange Love)라는 영화에서 원자폭탄의 버섯구름 장면에 "What a wonderful world!"라는 음악을 삽입하였다.

좀 더 직접적이고도 일상적인 예로 돌아와, 보고 싶지 않은 친구를 만났을 때, 우리는 간혹 "너 참 반갑다!"라고 비꼬는 경우가 있다. 또 우리는 간혹 잘난척하는 사람을 야유하기 위해 "그래 너 잘났다!"라고 코웃음을 치기도 한다. 또 부패한 정치인들에게 일반인들은 "훌륭한 분들이야!"라고 조롱하기도 하며, 세태를 풍자하기 위해 한 마디로 "멋진 세상이군!"이라고 내뱉는다. 셰익스피어는 이 분야의 대가인데, 젊은이들의 난삽한 연애 혹은 배은망덕을 풍자하기 위해, 신나는 세상(folly, jolly)이라고 지저귀는 듯한 새소리를 흉내내기도 했다.

이러한 수사적인 테크닉이 바로 아이러니이다. 아이러니스트는 고의적으로 마음속의 의도를 숨기고 그 심중의 뜻을 반대로 표현하여, 표면적으로는 자신을 감추면서도 의도하고 있는 뜻을 더 강하고 날카롭게 암시하는 것이다. 말하고 싶은 진짜 의도는 겉으로 부각시키지 않고 숨어서 암시만 하기 때문에, 비난을 받는 상대방은 아이러니스트의 공격에 왠지 불쾌함에도 불구하고, 공식적으로 따지거나 정면으로 응수하기가 힘든 상황이 초래된다.

아이러니와는 약간 거리가 있지만, 이와 유사한 방식의 독특한 냉소도 있다. 도리스 레싱(Dorris Lessing)의 에세이집 <런던스케치>(London Sketch)를 읽어보면, 고장난 지하철 에스컬레이터에 관하여 시민들이 지하철 게시판에 올려놓은 문구가 등장한다. 그들은 직접 공무원에게 불평을 늘어놓는 대신에, "왜 이 에스컬레이터가 이렇게 자주 고장이 나는지 말씀을 드리죠. 그것은 바로 낡았기 때문입니다!"라고 써 놓았다. 레싱은 이 문구가 영국인들의 특유한 냉소주의를 잘 반영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어느 누구도 저 시민이 쓴 문구를 읽고 에스컬레이터의 고장이 세월 탓이라거나 물질의 산화작용 탓이라고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꽃병이 떨어져 깨져버린 것이 중력 탓이라거나, 꽃병과 지구가 충돌한 탓이라고 말하지 않듯이 말이다. 문제의 직접적 원인과 간접적 원인을 뒤섞어 놓음으로써, 자신이 심중에서 지적하고 싶은 원인(지하철 관계자들의 나태함)을 강하게 부각시킨 저 시민은 수사학적 냉소의 싸늘함을 교묘하게 구사한 사람이다.

드러난 것(외연)과 암시하고 있는 것(내포, 함축)이 서로 모순이 되어 히스테리적이 되거나 혹은 일치하지 않음으로써 변태적이 되면서, 주체의 심중에 의도하고 있는 뜻이 극단적으로 드러나는 것. 이 효과적인 방식을 비유적으로 말한다면 "싸늘하게 상처내기"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냉소란 표면상으로는 초연함에 기초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일본이나 독도에 대한 한국인들의 핏대처럼, 상대를 부정하고 비난하기 위해 전면에 직접 나서서 분노를 표출하는 대신에, 상대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말로 표현된 자신의 견해가 뜨겁고 혼란스러운 감정이 아니라 그 거리만큼이나 냉각된 이성에 토대를 두고 있음을 은근슬쩍 드러내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합리적 정당성이 확보된다고 할까? 아이러니스트의 담론이 격한 분노가 자아낼 수 없는 날카로움과 객관성을 환기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냉각된 고체성 때문이다.

그러나 더 자세히 관찰해보면 냉소는 순수한 의미에서의 초연함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가령, 미친 척 하고 복수를 엿보았던 햄릿(Hamlet)은 냉소의 대가였다. 냉소주의는 초연한 척 함으로써 그 반대의 경우보다 더 커다란 효과를 자아내기 위한 수사적 전략, 즉 방법으로서의 초연함을 연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풍자와 야유의 표면에 드러난 초연함의 유희 아래에는 상대에 대한 강렬한 혐오가 스며들어 있다. 마치 살짝 덮인 살얼음 밑의 뜨거운 용암처럼.

Posted by hu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