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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11/10 배치는 메시지다 (7)
  2. 2009/11/07 낯설게하기와 폭로 (3)

사물을 배치하든, 이미지를 배치하든, 아니면 단어나 소리를 배치하든, 일정한 형식의 배치는 의미를 만든다. 배치하는 어떤 사람의 의지나 바램을 나타내기도 하고, 배열된 것을 바라보는 누군가의 기억을 불러오기도 하고, 그 배치된 특정 모양이 일으키는 어떤 연상으로부터 유쾌함이나 불쾌함을 유발하기도 한다. 나무 아래에 기대어 앉은 사람, 낭떠러지 위에 놓여진 신발, 주먹으로 움켜쥔 붉은 깃발, 머리에 꽂은 꽃, . . . 이 모든 배치들은 특이한 형상과 의미와 정서를 촉발하여, 그로부터 어떤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사물들의 배치는 구성, 이미지들의 배치는 몽타주, 그리고 단어들의 배치를 통사(syntax)라고 하는데, 이 모두는 의미를 일으키는 형식적 틀이다. 즉 우리는 배치를 통해 특정한 관계를 형성하고, 그 관계의 한 당사자로서 혹은 관계를 바라보는 관찰자로서 거기에 자신의 바램을 투사하며 살아간다. 맥루한(Marshall McLuhan) 식으로 말해 메시지를 창조하는 것이다. 이 배치를 통한 메시지를 가장 빈번하게 실천하는 분야는 물론 저널리즘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단지 알려진 사실들만을 종이에 일정한 형식으로 배열만 했는데도, 우리는 그 뉴스가 정치적으로 좌파인지 우파인지, 혹은 반정부적인지, 친미국적인지 등과 같은 시대적 화두를 판단할 수가 있다.

물론 배치가 교묘하여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 교묘함이 더하면 더 할 수록 메시지의 농도는 더 진해지고, 떨쳐버릴 수 없을 만큼 둔탁해지며, 깊숙이 파고드는 무엇인가가 우리의 신체와 관념에 작용한다. 가령, 최근에 주류언론(관치언론)이 자주 사용하는 공포의 배치가 좋은 예이다.


붉은 줄로 표시한 두 기사들은 서로 순서를 바꾸어가며 며칠 동안 등장한다. 이 두 기사의 관계는 물론 "공포"라고 하는 현대적 무의식을 둘러싼 정치적인 문제이다. 배열의 순서만을 바꾸거나 서로 다르게 함으로써, 그 메시지의 방향과 의미는 전혀 달라지긴 하지만 말이다. 중요한 것은 생물학적 공포가 단지 불가피한 재앙 혹은 자연 재해의 이미지로 등장하는 반면에, 그것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회적 대응들의 성격이 암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자연적 혹은 생물학적 재해 그 자체는 정치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면이 덜하거나 거의 없지만, 그것이 사회적 특정 행위들과 연결되면 마치 그 공포가 사회적 행위의 결과인 것처럼 둔갑해버린다. 두 기사가 지속적으로 같이 붙어 다니는 과정에서 우리는 공포의 원인과 결과 혹은 최소한 공포의 강화 혹은 약화의 특유한 관계들을 우리 스스로가 구성하게 되는 것이다.  두 기사 어디에도 서로를 지칭하거나 서로를 언급하는 내용을 찾아 볼 수 없는 경우일지라도, 두 개의 공포가 서로 붙어있다는 것 만으로도 굉장한 자장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다. 그 에너지는 우리의 집단적 꿈과 기억 그리고 거칠고 저속한 이미지의 형태로 우리의 영혼을 잠식할지도 모를 일이다.

이와는 반대로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는 특정 인물이나 사건 혹은 어떤 이미지를 감추면서 동시에 다른 무엇인가를 들추어내기 위해, 두 뉴스의 배치를 멀리에 두는 경우도 있다.

위 쪽에 배치된 기사는 최근에 뜨거운 이슈가 되고 있는 지방행정도시 문제를 둘러싼 여당과 야당의 충돌이라는 정치적 사안과 관련이 있다. 그 충돌의 와중에 여당 측 한 여자 의원을 위시한 몇 몇 의원들이 야당에 유리한 발언들을 쏟아내고 있는 중이었다(그녀는 지방에 행정도시 추진을 반대하거나 7번 기사처럼 수정을 원하는 여당에 반대한다). 그 여자 의원은 현재 여당의 우두머리 격인 행정수반과 대선 때부터 줄곧 반목과 경계를 거듭해 온 터였는데, 계속해서 수세에 몰리다가, 여당이 패한 얼마 전 보궐선거에서 드러난 여론을 등에 업고 세를 모으기 위해 모처럼의 기회를 이용하여 몇 마디를 한 것이었다. 한편 아래 쪽에 배치된 기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그 여자 의원의 부친이다. 그는 수 십 년 전에 오랫동안 군사독재 정권을 지속해 오다가 자신의 부하에게 총을 맞고 죽은 군인출신 대통령이었다. 문제는 그가 일제식민지 시절 일본 사관학교 출신이었고, 그 동안의 조사에 따라 친일인사로 분류된 서적이 곧 출간될 예정이었는데, 여기에 덧붙여 일제에 혈서로 충성을 맹세한 친일행각 기록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그의 친일은 이미 많이 알려져 있었으므로 특별히 놀랄 것도 없음에도, 난색을 표하며 그의 과거를 다루는 기사를 선택하고 배치한 저 능청! 이 배치의 관점은 역사가 아니라 정치적인 것에 있으며, 이로써 언론사가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어떤 메시지, 즉 동떨어져 보이는 두 사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밀접한 관련성을 통해, 헌법 13조 3항에 위배되는 연좌제(緣坐制) 비스무리한 어떤 증오의 도식이 함축되어 있다. 저 배치는 특정 정치인사의 반(反)여당적 일탈에 대한 관치저널리즘의 전형적인 대응이라고 할 만한 것이다. 기사 8번을 위에서 내리누르는 7번 기사와 아래에서 치고 올리는 9번 기사, 그리고 10번으로 연결되는 배치의 미학을 보라!

맥루한에 따르면 현대의 미디어에서 빈번히 목격할 수 있는 미디어구도의 전형이 있는데, "나쁜 뉴스"와 "좋은 뉴스"가 바로 그것이다. 물론 나쁜 뉴스란 열광, 분노, 공포와 같은 집단적 분출을 조장하는 뉴스이다(정치-문화적 스캔들, 재해, 폭행, 끔찍한 일탈에 관한 기사들). 반면 좋은 뉴스는 이러한 황색저널리즘(혹은 붉은색저널리즘)을 미끼로 특정 집단의 메시지(주로 물건을 파는)를 퍼뜨린다. 나쁜 뉴스가 쏟아내는 무섭고 위험한 이미지가 일련의 경고의 기능을 하는 동안 혹은 그 후에, 다른 한편에서는 그와는 전혀 다른 집단과 세력의 천국의 이미지들이 교차평행편집 스타일로 왔다 갔다 하는 것이다. 모자이크 처리된 거친 다큐멘터리 VCR화면을 바라보며 양미간을 구기고 숨을 헐떡거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나 싶으면, 어느새 카메라는 외부소음이 차단된 스튜디오로 들어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깔끔한 용모로 생글거리는 미소 혹은 단호한 표정을 머금은 여자 앵커의 '모범적' 자태를 보여준다(그녀의 자세와 어조와 표정은 해당 언론이 보여주고 싶어하는 도덕과 정신상태 등을 대표한다). 그녀는 아주 대조적인 또 다른 교훈적이고 바람직한 도덕적 실용주의의 세계를 우리에게 소개하기도 하는데, 거기에는 소시민들의 선행과 도덕의 사례들이 간간히 열거되는 가운데, 무엇보다도 그 세계의 정수는 인상 좋은 선한 용모의 배우들이 직접 가리키고 있는 상품의 꿈같은 화사함이다. 이러한 불행과 구원의 교차편집은 어설픈 얼뜨기들을 유인하는 야바위꾼의 상술처럼 펼쳐진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이 화이트저널리즘의 야바위는 집단의 적개심을 필요로 하는 집권세력의 메시지 또한 어김없이 반복하는 것이다.

선택과 배치. 이것이 저널리즘의 형식적 질서이다. 무엇을 선택했는지(이는 취향을 반영한다). 그리고 그들을 어떻게 배치했는지(이는 욕망을 반영한다). 우리가 뉴스를 바라보며 생각하고 찾아야 할 미로는 바로 이 취향과 욕망이다.

Posted by huun
현재 브레히트(Bertold Brecht)식 낯설게 하기의 가장 좋은 소재는 상품이 아닐까? 상품은 너무나 친숙해졌고, 아름다워졌고, 편안해졌고, 신비스러워졌다. 포스트모던 브레히트는 상품의 이 허울을 벗겨내기 위해, 이들의 구성요소들, 부속들, 쓰레기로 만들어지는 실체들, 그 조잡하고 무의미한 성분들과 관계들에 대한 가차없는 폭로가 필요해 보인다. 예술가들은 상품을 해부하고(비유적으로가 아니라 물리적으로), 날 재료들을 가리거나 그들을 봉합하는 거친 재봉선을 들추어내고, 속을 보여주고, 창자들을 빼내어, 그 날 재료들을 드러내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보이지 않는 옷처럼 걸치고 있는 이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물건들의 실체가 무엇인지, 자신들의 등판과 어깨에 무엇을 걸치고 있는지, 기업이 들추어내기를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물건들에 대한 관심과 취향과 흥미를 떨어뜨리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일이 필요한 것이다(작은 예로, 얼마 전에 일부 영리한 젊은 층이 문화-경제적으로 시도했던 특정 기업 상품불매 광고 운동에 대한 기업과 사법부의 흥분된 반응을 보라. 우리는 치명적인 약점 하나를 발견한 셈이다). 고다르(Jean Luc Godard)가 영화를 감동적이지 않은, 재미없고 시시하고 엉성하고 부산하고 산만하고 지루한 것으로 만들었던 것처럼 예술 자신을 재미없게 할 것이 아니라, 상품과 그 이미지를 시시하게 만드는 일, 이것이 예술가들이 (무엇보다도 그 자신들을 위해) 해야 할 현대적 과업이 아닐까? 감동적이고, 아름답고, 뭉클하게 만드는 예술가들은 가짜이며, 점점 더 마취되기를 원하는 관객들과 아울러 함께 놀아나고 있는 공범자이다. 앤디워홀(Andy Warhol)? 물론 그는 상품을 신비화한 장본인이다. 그는 한 꺼풀만 벗겨내면 쓰레기가 되었을 그 무엇들에 대해 아무도 그 한 커플을 벗겨내지 못할 것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그 얇은 가리개를 이용하여 아우라를 재구축했던 것이다. 그는 결국 영리한 사기꾼이었지만, 현대의 예술가가 필요한 능력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와 같은 사기꾼 근성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상품의 아우라는 파괴되어야 하지 않는가? 브레히트나 고다르의 방식이 옳지 않았을 수도 있다. 예술은 자기자신을 망가뜨리고, 스스로를 드러내고, 자기를 지시하고, 자기를 반영함으로써, 오히려 스스로를 아무도 신뢰하지도 흥미로워하지도 않고 관심을 두지 않는 괴물로 만들었던 것은 아닐까? 교화는 행동과 결단을 촉구하지 못한다. 그것은 윤리적으로도 조차 지속되기가 어렵다. 인간이 돼지가 되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돼지가 인간이 될 수는 없지 않은가? 인간이 돼지라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그 지성이란 것이 생각처럼 그렇게 쉽게 결단하고 행동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브레히트는 이성을 일깨워 행동을 촉구했지만, 실은 이성은 행동을 방해한다. 서사극보다는 오히려 그람시(Antonio Gramsci)의 지적처럼 멜로드라마가 더 효과적이었을지도 모른다. 대중을 교육시키려는 생각보다는, 그들에게 네가 본 것을 폭로하라! 도덕과 집단적 정의에 호소했던 미국의 전 근대적 저널리즘식 폭로(muckrakers)가 아니라, 개인의 이익과 취향과 쾌락에 호소하는, 폭로의 예술, 폭로의 기교가 필요한 것이다. 낯설게 하기가 예술의 형식으로서 아직도 유효하다면, 교화가 아닌 폭로를 위한 것이 되도록 할 것.
Posted by hu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