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8'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0/08/29 욕망의 중화 (22)
  2. 2010/08/16 찌질이들의 흉내

뜨겁고 축축했던 올 여름 날씨처럼, 8월 들어(특히 지난 주와 이번 주) 유난히 내 일상과 주변이 끈적거리고 지겹다는 느낌이 들었다. 말끔히 건조시켜 잊어버리기 위해 광릉수목원을 다녀왔다. 처음부터 계획했던 것은 아니었고, 친구 H와 점심식사 메뉴를 토론하다가 갑자기 내린 결정이었다. 광릉 근처에 유명한 불고기 집이 있다며 H가 부추겼고, 나는, 고작 불고기 때문에 그 멀리 가자고? 그렇게 해서 핑계거리를 급조한 것이 수목원이었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고, 한 번은 가보고 싶었던 것이 이유였다. 이곳은 1주에 단 하루만, 그것도 예약을 통해서만 입장을 허용한다. 서둘러 인터넷으로 입장 예약을 하고는 H의 차에 올라탔다.

구불구불 찾아가지 않고 주로 대로로 다녔기 때문에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초행길이었지만, 갈 때는 내가 운전을 했다. 광릉 지역의 숲에 이르자 국지성 호우가 쏟아져 시야를 가렸다. 숲길이 구불거려 스릴감이 있었다.

수목원 안에 나 있는 숲길과 호수가 차분했다. 비가 내려 습기를 머금은 숲이 여기저기서 안개를 뿜어댔다. 호수의 물안개는 신령스럽기까지 했다. 숲길을 걸을 땐 땀이 났지만, 잠시 앉아 냉커피를 마시는 동안 우람한 나무의 시원한 입김이 몸을 서늘하게 하는 것 같았다. 잠시 눈을 감고 깊은 숨을 내쉰다. 습한 대기에 실린 깊고도 은은한 숲의 냄새들이 뒤섞여 가슴 속으로 들어왔다. 잔잔한 호수, 노니는 물고기, 안개에 젖은 검은 산, 푸르고 푸른 나무와 숲, . . . 모두가 완벽한 하나의 정물(still life)처럼 보였다. 항상 똑같아 보이고 특별할 것 없이 진부해 보이지만, 자연은 인간에게 도시의 진부함이 줄 수 없는 보편적 해방감을 준다. 잠시만이라도 그 안에서 그들 곁에 있다 나오면, 우리는 어느새 그들처럼 무심해지고, 초연해지고, 혼란스러웠던 동요가 가지런해져,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감을 느낀다. 우리를 포함하고, 우리 안에 있는 이 자연으로부터 워스워즈(William Wordsworth)와 같은 몇 몇 낭만주의자들이 "가장 완벽하고도 순수한 이성의 이미지"를 보았던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앉아 잠시 동안 작은 토론을 벌였다. 나와 친구는 서로 반대의 성격이었다. 나는 항상 욕망에 차있고, 무엇인가를 하고 싶어하며, 먼 곳을 주시하는 쪽이었다. 나는 그것을 열정이라고 주장했지만, H는 결핍감이라고 진단했다. 반면 H는 감정의 기복이 심하지 않고, 큰 욕망에 이끌리는 일이 많지 않으며, 또 쉽게 자신의 욕망을 포기할 줄 알았다. 쉽게 쾌활해지는 법도, 그렇다고 쉽게 우울해지는 법도 없었다. 표정에 큰 변화가 없는 H는 미간을 구기며 먼 곳을 주시하기 보다는 평온한 모습으로 자신이 서 있는 바로 그곳을 생각하는 편이었다. 불규칙적인 나의 일상이 항상 "왜?"라는 질문으로 밤을 새우며 허우적거리는 동안, 규칙적이고도 무미건조해 보이는 H의 삶의 관건은 주로 "무얼 할까?"라든가 "어떻게 가야 할까?"에 있어 보였다. 광릉까지 가기 위해 수목원이라는 명분이 필요했던 나와는 달리, H는 불고기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어디든 갈 위인이었다.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고 해서 연연해하지도 않았다. 때로는 사람이 가벼워 보이기까지 했다. 부질없는 큰 욕망을 포기하면 현재의 작은 욕망들이 중요해진다며, 이렇게 부질없는 욕망을 중화하는 법은 유년기부터 터득한 것이라고 H는 자부했다. 나는 그것이 지혜의 결과가 아니라 좌절과 포기의 결과라고 말해주었다. 희망이 실현되지 못하는 일이 반복될 때(특히 유년기에), 우리는 절망감의 충격을 다시 맛보기가 두려워 욕망을 애초부터 피할 때가 있다. 결국 욕망의 중화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삶을 쾌락이라고 믿고 있는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내 말이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욕망을 중화하려는 시도 자체가 욕망이 너무 큰 것이 아니냐고 덧붙이면서. 그러나 H는 채울 수 없는 것을 다 채우지 못해 고통스러워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자신이 에피쿠로스(Epicurus)라도 된 것처럼 역설했다. 그것은 마치 메뉴에도 없는 음식을 주문하면서 식당 주인을 불러 불평하고 타박하거나 요식업소가 갖추어야 할 기본자세를 연설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베켓(Samuel Beckett)의 두 인물 블라디미르(Vladimir)와 에스트라공(Estragon)처럼, 우리는 다소 진부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욕망에 관한 기본적인 두 입장을 대변하는 듯한 포즈로 잠시 동안 서로 대립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 두 입장이 정말로 우리의 상태를 말해주고 있는지도 확신할 수가 없었다. 내가 정말로 블라디미르의 욕망을 대변하는지, H가 정말로 에스트라공의 욕망을 대변하는지, 심지어는 나와 H가 정말로 대립하는 캐릭터인지조차 명확히 말하기가 어렵지 않은가? 오히려 저러한 문학작품이나 철학이나 인류사를 통해 익히 알려진 욕망들을 H와 내가 역할연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토론은 중단되고, 우리는 빗방울이 퍼뜨리는 동심원으로 가득한 호수의 표면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폐간 시간(오후 6시)이 다 되어 수목원을 나와 바로 그 불고기 집으로 향했다. 멀지는 않았지만 지도를 보고 찾아야 했다. 찾기가 쉽지는 않았다. 지도가 정확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식당의 간판이 없었다! 식당을 지나쳐 한 참을 더 가서 막다른 길이 나오고 나서야 길을 잘못 들었음을 알았다. 다시 뒤돌아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를 더듬어 찾아야 했다. 결국 우리는 한참 동안 헤맨 끝에, 주변에 피어 오르는 연기와 고기 굽는 냄새의 진동으로 식당을 찾을 수가 있었다.

식당주인은 우리더러 1시간 반을 기다려야 한다고 의기양양하게 엄포를 놓았다. 더구나 식사도중에 추가로 주문이 안 되기 때문에, 미리 여유롭게 식사량을 주문하라고 권고했다. 손님이 너무 많아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잠시 망설였다. 한끼 식사를 하기 위해 1시간 반을 기다려야 한단 말인가? 이 허름하고 지저분한 재래식 고기 집에서의 한끼를 위해? 예약을 하려면 빨리 하라며 다음 손님을 부르는 주인 때문에, H는 일단 예약을 하고 보자고 서둘러 말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이대로 그냥 가기에는 아쉽다며. 식당 안에서는 변변히 앉아있을 곳도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쫓기다시피 예약을 한 후 밖으로 나왔다.

1시간 반을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며, 당연히 나는 불평을 했다. 식당주인을 비롯하여, 그 식당을 과장해서 홍보하는 풋내기 블로거들이 음식문화를 망치고 있다고.

흔히 맛집이라고 알려져 많은 사람들이 찾는 식당을 가보면, 대부분 식당주인의 오만방자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그들은 손님들의 사랑에 겨워 아무렇게나 해도 사랑이 지속될 것이라고 착각을 하고 있다. 저 고기집의 주인은 간판조차 붙이지 않고, 멀리에서 그곳을 찾는 손님들을 애먹이며 즐거워한다. 애먹는 동안 그 배고픔과 결핍감을 보상하기 위해 손님들이 더 크고 많은 욕망을 자신에게 쏟아 부어줄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이다. 욕쟁이 할머니 식당이 그렇듯이 배짱을 전략으로 내세운 건지도. 추가주문을 받지 않는 것 역시 터무니 없었다. 그것은 마치 부족한 자원을 호들갑스럽게 선점하려고 달려드는 부동산업자처럼, 자신의 필요와 욕망을 과장해서 예측하고 해석하도록 부추긴다. 심지어 소비의 강요이기까지 하다. 결국 멀리에서 온 손님의 대부분은 평소보다 많은 양을 주문할 수 밖에 없다. 또 식사를 위해 식당에서 1시간 30분을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은, 그 식당의 명성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식당 주인의 비양심적인 상술을 보여줄 뿐이다. 그 시간을 기다려야 식사를 할 만큼 손님이 많다면, 식당의 수입은 매우 높을 것이고, 손님들의 사랑에 대한 보답 차원에서라도 매상의 일부를 투자하여 매장을 넓혀 그들에게 갚아야 한다. 그러나 식당은 수 십 년 전에 지었을 법한 판자집 형태 그대로이다. 바닥이며, 화장실이며, 그 모든 것들이 무허가 건물처럼 허접스럽다. 자신을 찾아오는 손님들이 그렇게 오랜 시간 딱히 앉을 곳도 없는 상태 속에서 기다리는 모습을 보며 즐거워하는 부류의 인간이 과연 음식재료는 제대로 쓸지. 욕망을 과장하고 강요하는 주인의 역겨운 얄팍함을 생각 없이 홍보하고 묵인하면서, 사진을 찍어가며 선전하는 블로거와 이를 또 기다리며 참는 일에는 이골이 난 우리들. 모두가 힘을 합쳐 입맛을 떨어지게 하고 있다고.

이 합리주의적 분노와 불평에 대해 H는 결과론적 낙천주의로 일축했다. H의 생각은 아주 간단하고 명료했다. 맛있다고 하니까, 일단 여기까지 왔으니 먹어보자. 아무리 고치려고 해 봐야 고쳐지지 않는다. 힘들게 왜 내가 그걸 비판하고 괴로워하나. 어차피 마음에 들지 않으면 두 번 다시 안 오면 된다. 우리는 밥을 먹으러 왔지 요식업소 감찰을 나온 것은 아니잖아. 그러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평온한 표정으로 근처에 있는 마트에 들어가 애피타이저(appetizer)라며 오렌지 주스 한 병을 사들고 나오는 것이었다. H의 낙천주의는 대식(大食) 취미로 뚱뚱해진 회의론자(agnosticism)의 아이러니를 조금 닮아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H의 기대를 채워주지 못했다. 고기는 식어 있었고, 양도 그리 많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식당 분위기가 어수선하여 맛을 음미할 수가 없었다. 뒤에서 기다리며 앉아있거나 서 있는 사람들, 지저분한 행주를 들고 쟁반을 쨍그렁 거리며 눈치를 보며 부지런 떠는 종업원들, 뛰어다니는 아이들, 뭐가 좋은지 애를 안고 식당 여기저기를 어슬렁거리며 가정적이고 행복한 아버지-남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는 오버쟁이들 . . . . 기대하던 고기 맛도 그다지 훌륭하지 않았다. 직접 식당 측에서 구워서 내 왔는데, 얇은 돼지고기를 살짝 양념을 하고 구워 불에 그을린 맛이 약간 특이하긴 했지만, 너무 달았고, 또 웬만한 고깃집이면 맛볼 수 있는 흔한 맛에 불과했다. 된장찌개가 조금 맛이 있었지만 그 역시 특별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수시간을 기다리면서 기대할 만한 그런 음식이 결코 아니었던 것이다. 공중화장실에서 서둘러 배설하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은 분위기 속에서, 우리의 식어빠진 식사는 10분도 채 되지 않아 끝나고 말았다.

짜증이 난 쪽은 내가 아니라 H였다. 이미 식당 당국의 모든 처사들에 대해 실망한 나는 음식 맛에 대해서도 기대감이 없었기 때문에, 이 좌절된 욕망이 오히려 통쾌하기까지 했다. 식사가 끝나고 평온한 욕망의 중화상태로 앉아 있던 내 앞에서 H는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식당을 둘러 보았다. 수목원에서 H와 내가 서로 대립되어 자신의 욕망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익숙하게 알려진 욕망의 대변인이 되어 논쟁을 벌였던 것 처럼, 사람들은 누군가가 말로 전달해 준 맛을 이 식당에 직접 찾아와, 터무니 없는 기다림과 음식 맛에 대한 자기 암시를 되뇌며 손수 몸으로 미디어를 재연하고 있는 듯 했다. 감각조차 주어진 대본대로 연기가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포만감은 커녕 허기를 느끼며, 우리는 서울로 돌아왔다. 내가 말이 없어서 그랬는지, H는 차선도 자주 바꾸어 가며 평소보다 거칠게 운전을 했다. 비는 그쳤지만 축축해진 아스팔트에서 바퀴소리가 추적거렸다. 서울에 다 올 때 쯤 우리는 그 고깃집을 이미 다 잊어버리고 있었다.

Posted by huun

최근에 퍼플코메디(purple comedy)라고 부르고 싶은 <하녀>를 발표한 임상수 감독. 수 년 전 그는 블랙코미디스러운 <그때 그 사람들>을 통해 권력의 이면 아니 정면을 잘 보여주었었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어째서 임상수 감독은 작품 속의 대통령 역으로 송재호 씨를 캐스팅 했던 것일까? 독선적이지만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 이미지가 지배적으로 만들어지고 조작되었던 박정희씨를 닮은 구석이라고는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 배우를 말이다. 예상과는 달리 그 작품에서는 성대모사도 없었고 흉내도 없었던 것이 의아스러웠다.

성대모사와 흉내가 가장 빈번히 그리고 가장 격렬하게 추대되는 곳은 다름 아닌 정치판이다. 그의 흉내를 내며 그 후광에 기생하려는 현실정치인들이 간혹 있었는데, 이들은 한결같이 어떤 사진 하나를 모사하곤 했다. 그 사진은 공공건물이나 학교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동네 이발소에서조차 어릴 적부터 보아오던 것이었다. 한때 얼굴이 약간 비슷하다고 알려진 어떤 정치인은 선거 기간 내내 그 사진의 모습과 똑같은 구도로 카메라 앞에 서서 목에 부목을 한 것처럼 힘을 주고 다니곤 했다. 단정하게 빗어 4:3 비율로 가림마를 넘긴 특유의 각진 헤어스타일, 정면을 보는지 측면을 보는지 아니면 어떤 대상을 주시하고 있는지 조차 꼬집어 말할 수 없어서 뚫어지게 살펴보면 약간 사팔뜨기 끼가 있어 보이는 모호한 시선(이것이 권력이다!), 윤기가 흘러 빛을 반사하는 듯한 이마와 콧 잔등, 살짝 다문 입술과 돌출한 듯한 입, 작지만 단단해 보이는 얼굴 윤곽선, 야무지게 달려있는 귓 볼, . . . 모든 가치들이 융합되어 있는 듯 하면서도 아무 가치들도 없는 듯한 이미지.

임상수 감독이 인물 캐스팅을 그렇게 한 이유가 코메디였기 때문이었을까? 코메디였다면 더욱 더 비슷한 이미지를 도입했어야 하지 않을까? 오히려 원본보다도 더 원본 같아 원본을 능가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더라면, 그 과장과 왜곡이 풍자를 실감나게 했을 것이다. 위에서 말한 그 정치인이 이에 해당한다. 그는 원본을 능가하여 원본을 닮고자 했기 때문에, 즉 그 자신을 지우는 과정이 그를 코믹하게 한 것이었다. 닮아가고자 애를 쓸수록 처음의 의도와는 달리 원본은 희화화의 가능성이 커진다. 어쨌든 임상수의 작품이 일종의 코메디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부적절한 캐스팅의 이유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추측으로 미루어 보건대, 임상수가 의도했던 것은 권력의 '아이콘'은 아니었던 것 같다. 닮은 모습이란 본질적이기 보다는 신비화되거나 주어진 이미지일 경우가 많다. 그것은 복원이라는 목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며, 복원은 반드시 복원해야 할 이유를 가진다는 점에서 본질이나 실상과는 멀어질 수 밖에 없다. 수많은 역사드라마나 상업 주류 영화의 인물들이 중압감 있는 대사와 자세를 취하는데도 불구하고, 그 무섭게 부라리는 눈매 이면에 항상 코믹한 요소를 빠지지 않고 실어나르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이것이 기호로서의 아이콘의 운명이다. 아이콘은 닮음이 아니라 오히려 원본의 부정에 가깝다.

임상수가 원했던 것은 물론 아이콘이 아닌 '권력의 실상'이었을 것이다. 어떤 실상? 다시 말해 어떤 권력? 그가 생각한 권력은 나쁜 권력도 아니고, 포악한 권력도 아니고, 사디즘도 아니고, 잔인한 권력도, 냉담한 권력도 아니다. 비판과 비난을 받는 동안에도 어떤 위대함을 머금고 있는 그런 권력이 아니다. 그렇다고 친숙하고 자상한 권력 역시 아니다. 그런 식으로 극화된 권력이 아니라 찌질한 권력! 이것이 임상수가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즉 어떤 막연한 추상으로서의 권력이 개인을 통해 육화할 때, 아니 개인이 그 권력을 모사하고 재현하고자 할 때, 그것이 얼마나 유형적으로 물화가 되어 지질한 행태들로 변질되는지를 말이다. 그 행태를 열거하기란 얼마나 쉬운가! 건설업계 똘마니들을 법적으로 비호해주고, 그 댓가로 초중고 학부모들이 자식을 잘 봐달라며(아이러니하게도!) 담임선생들에게 주는 용돈보다는 조금 더 많은(학군에 따라 다를 수도 있지만) 금전의 비호를 받으며, 잘나가는 딴따라 여가수를 불러 앉혀 놓고 치마 속에 손을 넣어가며, 양주를 홀짝이며, 술에 취해 풀린 눈으로 징징 거리는, 소위 술집 여종업원들의 용어로 말해, "일반인 보다 더 난해하게 놀아대며," 그 댓가를 물건들로 교환해버리고 마는 찌질하기 그지 없는 권력. 임상수가 본 권력은 코웃음 밖에는 터져나올 수 없는 그런 성질의 하찮은 것이었다. 말할 수 없이 지리멸렬한 분위기의 배우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때 그 사람들>에서는 우스꽝스럽고도 찌질한 권력의 실상이었다면, <하녀>에서의 권력은 직접적으로 모방권력, 즉 흉내와 연기로 재현하는 권력을 향해 있다. 권력의 흉내는 우선 제스쳐들을 통해 육화된다. 미디어에서 그리고 그것을 따라하는 일반인 찌질이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일명 법조계의 제스쳐가 좋은 예이다. 똘마니들 앞에서 비만스러운 커다란 덩치를 이리저리 흔들어가며 걷는다든가, 윗 저고리가 반쯤은 벌어질 만큼 배와 가슴을 떡하니 내밀고 앉아 몸으로 말을 하고 싶어 한다든가,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는 부하 찌질이들을 좌우로 내려다보며 거만하게 훈시를 내리는 포즈를 취한다든가, 손가락질 하나로 사람을 부른다든가. 이러한 모든 양아치스러운 제스처와 포즈는 지배력을 '보여주기' 위해 혹은 '나타내기' 위해 저변화되어 암암리에 '학습받은' 것으로, 마치 신분을 나타내는 이름표와도 같다. 권력을 암시하는 제스쳐를 취하는 순간, 즉 이러한 이름표를 다는 순간, 익숙하게 보아온 어떤 전도가 일어난다. 역할을 부여받은, 그것도 매우 잠시동안, 폼잡고 사진 한 방 박을 새도 없이 임시로 위임된 지위가, 어느새 어떤 힘을 스스로 생산하는 것처럼 보이는 권력이 된다. 권력이란 흉내, 즉 물화된 형상을 통한 연기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소품들, 전시물들, 전리품들 같은 것이 필요해진다. 이정재 분이 홀짝이던 와인이나, 아침마다 두들겨대는 여유로운 피아노, 가정부에게조차 요구되는 하이힐과 정장, 엄격한 식사시간, 널직한 소파와 같은 것이 그것이다. 그러한 소품들은 이정재 분의 우악스러운 눈매나 인상착의, 무엇보다도 부잣집 아들이라는 선천적-사회 계급에서 흔히 느껴지는 코믹스러운 안하무인 무지막지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걸쳐져야 할 예복의 기능을 한다.

권력과 똘마니의 관계는 관력관계가 아니라 계약관계이다. 둘 모두가 계약의 주체가 되어 서로 종속되어 있는 것이다. 위험성의 정도를 따지자면, 실은 그 관계는 뒤바뀌어 있기조차 하다. 말하자면 그들의 관계는 "권력이 똘마니를 비호하는" 구도가 아니라, "물주에게 고용된 깍뚜기 혹은 기둥서방"의 구도와 같다. 스폰서라는 용어가 이를 잘 말해준다. 흔히들 공정하고 자유로운 경쟁을 부르짖으면서도 약육강식의 사회를 묵인하고 따르는 경제적 이율배반 속에서, 사업을 하려면 법의 비호를 받아야 하는데(그런 점에서 법이란 상부구조가 아니라 순수하게 하부구조적이다), 그러려면 법-물리적 수단으로 비호를 해주는 장정에게 술도 사주고 떡값도 주어야 할 것이다. 개인들이 누리는 권력의 실체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잠시 술잔을 기울여 와인을 홀짝이며, 혹은 다리를 뻗고 소파에 누워 있는 동안 두 손을 모아 와인을 따라주는 정장차림의 가정부를 바라보며, 자신이 무엇인가를 닮은 것 같은 느낌에 도취된 쾌감. 힘 혹은 역량이 특정 개인에 의해 물화(物化)될 때, 그것은 권력이라는 이름으로 이렇게 찌질하고도 코믹한 흉내가 된다.

Posted by hu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