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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10/18 가시성의 역설 (2)
  2. 2011/10/06 규율적 사회에서의 몸 (3)

자기 자신을 타인 앞에 또는 밝은 곳에 드러내거나 과시하는 것은 자신의 위상을 제한(혹은 부정)하는 역설적 상황을 초래할 수가 있다. 드러내 보임으로써 그 자신이 자아낼 수 있을 모든 신비한 가능성의 힘들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것이 푸코(Michel Foucault)가 지적했던 권력에 있어서의 “가시성(visibilité)의 역설”이다. 앙시엥 레짐(ancient regime)의 전제권력은 보여주는 일에 열정을 쏟아 부은 권력이다. 권력자는 자신을 과시하거나 과장해서 드러내기를 좋아하고, 우쭐해 하며 의기양양한 태도로 자신을 하나의 볼거리(spectacle)로 만들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호화의복, 궁중예식, 왕의거둥, 개선행렬, 공개처형 등, 재화의 엄청난 소비와 지출로 이루어지는 이 모든 비효율적 스펙터클은 그것을 바라보는 이들로 하여금 경이로움, 존경심, 또는 공포감을 일으키는 것을 목적으로 권력을 정복자로서 가시화한다. 대로의 밝은 빛 속에서 만인의 시선을 받으며 서 있거나 걸어가는 권력자는 자신이 바로 “그곳”에 있음을 표명했던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권력자의 이러한 가시성이 증대할수록 피권력자들은 어둠 속에 숨을 수가 있었다. 오히려 드러난 권력의 실체를 볼 수가 있어, 스펙타클의 애초의 의도와는 반대로 권력자의 무한한 권능에 제한을 가하는 결과가 일어난다. 권력자 자신이 스스로 공간과 시간이라는 한정된 조건에 방치됨으로써, 혹은 그 자신의 몸뚱어리가 하나의 사물로서 현시됨으로써, 무한의 절대성을 암시해야 할 권력은 오히려 상대적이고 제한적인 힘으로 하강하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잠재적 “권능(Power, Macht)”과 현실적 “물력(force, Gewalt)”의 역학관계—카네티(Elias Canetti)가 『군중과 권력』(Masse und Macht)에서 구분했던—가 그렇듯이, 힘이 비감각적이고 비실제적이 되어갈수록 그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는 넓어지게 된다. 아니 범위가 넓은 힘일수록 비감각적이고 비실제적이다. 가까이에 있는 힘일수록 그 지속력은 짧다. 먼 곳에서 가능성을 암시하는 힘은 그 반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절대성이란 보이지 않는 비가시성 속에서 현실화된다. 뚜렷이 보이거나, 가까이에 있거나, 언제든지 감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거나, 지시 가능하거나, 표현 가능한 것은 두려움을 갖게 하지 못한다. 단지 이미 사태의 종결이나 다름 없는 주체들의 치열한 행동과 그 행동의 결과들만이 현실을 설명해줄 뿐이다. 그 형태가 어떤 것이든 눈을 감고 잠들어 있는 순간에도 희미하게 아른거리는 존재만이 만인을 지배한다. 어떤 점에서 이것은 스피노자(Baruch Spinoza)나 사드(Donatien Alphonse François, Comte de Sade)가 생각했던 “자연” 혹은 “신”의 모습을 닮아있다. 상상 속에서 언젠가는 도래할 것이라는 막연한 암시로 불안은 존재를 잠식한다. 불안 그 자체가 존재인 것이다. 푸코는 현대적 규율사회의 가시성의 역전—시선 주체의 전도 혹은 가시성의 교환—을 지적했는데, 그것은 타자의 시선을 내면화하는 가운데 발생하는 불안의 잠식에 관한 문제였다. 더 이상 만인이 권력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내면적 타자로서의 권력이 만인을 바라보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권력은 언제나 현시한다. 언제 어디서든 머릿속에 떠오르고 나타나 주시하는 절대적 존재, 바로 이 가시성의 편재는 앞이 아니라 뒤에 임하는 것, 다시 말해 실제가 아니라 효과로서의 시선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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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시와 처벌』에서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는 인간의 몸에 실행하는 다양한 권력의 테크놀로지와 권력을 생산하는 기계들을 열거한다. 그의 책은 주로 17세기와 18세기의 문서들(책이 아닌 다큐멘터리들)을 세분화하여 분류하고 이를 기반으로 세기들의 권력 양태를 폭로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대상을 다루는 그 방식과 태도는 아이러니하게도 18세기적이다. 18세기가 개인의 몸에 그랬던 것처럼, 18세기를 세분화하고 개별화하는 그의 방식은 바로 18세기, 즉 그 대상을 닮아있다. 이 분류학자의 지루한 반복의 고통에 수반하는 인내와 절제의 심층에는 고집스러운 투쟁의 광기가 있다.
 
통제와 규율은 시대에 따라, 맥락에 따라, 그리고 그 방식에 따라 질적으로 다르다. 현시대의 예로도 충분히 예시가 가능한—물론, 그 차이를 나누는 것이 더 중요하겠지만—현대적 권력의 발생적 뿌리랄 수 있는 18세기적 규율은 이전의 시대와 견주어도 그 강제력의 양이 모자람이 없다. 오히려 그것은 더욱 더 포착하기 어렵게 무의식적이고 비가시적이 되어 지배와 통제를 보편적으로 도식화 한다. 권력의 도식적 보편화 또는 보편적 도식화. 이것이 계몽주의와 합리성이라는 이름으로 이데올로기 국가장치들 속에서 실현되어온 "정치적 해부학"(political anatomy)으로서의 규율이다. 권력의 정치적 해부학 즉 규율은 몸을 물리적, 기능적, 질적으로 분해한다. 힘과 특질을 개별화하는 해부학적 파편화에 의해 몸은 세련되고 다루기 쉬운 레고블록(Lego block)이 된다. 마음대로 처분하거나 다룰 수 없는 덩어리로서의 아날로그적 신체가 디지털화된 입자들의 소외된 연합으로 변형되어, 잘게 부수어지면서 동시에 재배열되고, 재배열되는 동시에 잘게 부수어지는 가상적 역학이 군대, 학교, 교회, 병원, 감옥 등, 모든 사회적 장 속에서 잠재화되는 것이다. 이로써 몸을 폐지하고 추방하고 격리하여 인격적으로 가해지던 전근대적인 처벌양식 대신에 몸을 교정하고 교육하고 훈련하는 비인격화된 근대적 규율방식으로의 전환이 일어난다. 나병에 대응하는 국가의 집단화 충동이 페스트에 대한 개별화 충동으로 전환되었던 것처럼, 권력은 전체, 공동체, 집단화의 패러다임에서 개인, 원자, 개체성의 효율적 테크닉으로 조직화한다.

이에 따라 규율적 통제의 변별적 특징들을 간략히 지적해볼 수 있을 것이다.
(1) 규율적 통제는 그 규모에 있어 미시적이다. 통제의 규모는 하나의 덩어리로서의 몸 전체의 수준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통제는 몸 자체가 아니라 몸이 자아내는 질적 변화들로 세분화된다. 전 시대의 구금이나 추방, 학살, 수용과 같은 몸의 “도매처리”(wholesale) 대신에, 기능들 혹은 메커니즘(움직임, 제스처, 태도, 속도 등)에 따라 몸은 잘게 나뉘어 질적으로 부분화된다. 강제력의 미시적 형식을 통해 몸은 “소매”(retail sale)로 다루어지는 것이다. 이로써 몸의 개조가능성 혹은 교정가능성을 전제로 훈련과 같은 페다고지(pedagogy)의 산업-정치적 형식이 새롭게 등장한다.

(2) 규율적 통제는 그 대상에 있어서도 이전 시대와는 구분된다. 통제의 대상은 행동의 표현적 요소나 언어적 측면이 아니다. 몸가짐에서 느껴지는 군인다움이라든가 민첩함 또는 학생의 행동거지에서 보이는 그의 태도와 같은 것을 교정하여 이상적 자태를 조형하는 문제가 더 이상 아닌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몸의 기호와 조형이 아니라 움직임의 효율성 그리고 그 효율적 경제를 실현하기 위해 몸을 어떻게 내적으로 조직화할 것인가에 있다. 내적 조직화가 목표로 하는 것은 이상적인 인간이나 탁월한 개인이 아니라, 비인격적이고도 합리적인 최대 효율성이나 최대 생산성이다. 행동의 결과주의에 대한 이러한 열망은 인간의 몸과 그 행동을 기능적 사물로서, 즉 습관적 자동화의 수단으로서 확립한다. 벽돌쌓기공학(Bricklaying Ergonomics)이나 테일러주의(Taylorism)와 같은 보다 산업-집중화된 몸의 조직화는 이미 일상적 규율화 속에서 다져지고 있었던 것이다. 현대적 몸이란 다름 아닌 경제적-효율적으로 분절된 신체를 의미한다.

(3) 통제의 양상 또한 전 시대에 비해 새롭다. 산출된 결과를 중요시 하는 저러한 행동의 결과주의와는 반대로 통제 방식에 있어서는 중단되지 않고 지속적이다. 즉 행동이 산출한 결과보다는 그 과정 전체가 감독되고 통제되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것이다. 규율에 따라 조직화된 행동 자체가 이미 감시의 과정을 실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벨트시스템과 같은 기계나 새로이 발명된 기구에 달라붙은 몸, 개별적으로 구획된 공간에 배치된 몸, 세분화되어 명시된 시간표에 따라 움직이는 몸, 엄격하게 수행되는 의례(ritual)를 따라 주체(권력)를 내면화하는 몸, 이렇게 몸 마디마디에 가해지는 규칙과 규약과 코드를 통해, 다시 말해 시간과 공간과 운동의 전 영역에 스며든 분할의 코드화에 의해 행위 과정 자체 내에서의 매 순간의 익명의 감시가 “작동”한다. 이것은 특정 인격에 의한 혹은 특정 권력에 의한 감시의 실행이 아니다. 팬옵티콘(panopticon) 시설 내부에 배치된 개인이 자신 안에 “감시자/감시대상의 구도”로 분열되어 예속상태를 스스로 실천하듯이, 움직임 자체가 바로 감시기능의 자동적 가동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지속적이고, 이 지속성 속에서 다루기 쉬운 몸은 쓸모가 있으며 쓸모 있는 신체는 다루기 쉬워야 한다는 “순응성-유용성”(docility-utility)의 도식적 상호관계가 형성된다.

(4) 규율은 몸의 자의적인 소유가 아니다. 그것은 몸을 마음대로 독점하고 전유하는 관계에 근거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규율적 몸은 완전한 물리적 소유물인(재산으로서 마음대로 처분과 양도가 허용된) 노예의 몸과는 다르다. 노예의 몸은 (주인의) 가시적인 폭력에 노출되어 있으며, 신체의 독점권만큼이나 그에 따른 비용을 초래하는 몸이다. 또한 그것은 세분화되어 있지 않으며, 삶 전체에 걸쳐 장악된 무제한적 지배의 관계에 속하긴 했지만, 개인들의 성향이나 변덕에 따라 행사되는 폭력으로 인해 일관성이 비교적 약했다. 반면 규율은 막대한 비용이나 무자비해 보이는 폭력이 없이도, 몸을 물리적으로 또는 서면상 소유하지 않고도 일관적이고도 유연하게 효용성의 효과를 낼 수가 있다. 심지어 규율은 개인으로 하여금 통제와 예속을 자발적으로 원하게 한다는 점에 그 세련됨이 있다.

(5) 규율은 계약에 근거한 일시적 지배가 아니며 토지라든가 생산물을 매개로 이루어지는 간접적인 지배가 아니다. 그것은 봉건적 예속관계와는 다르다. 봉건적 예속은 몸의 지배라기보다는 지대와 공납과 같은 노동 산물의 지배이며, 주종관계를 확인하는 관례적이고 형식적인 징표들을 통해서만 확인되는 간접적인 지배이다. 이와는 달리 규율은 매개되지 않은 몸에 대한 직접적 지배의 형식을 띤다. 그것은 우리가 눈을 감고 있는 동안에도 작동한다. 그것은 사물화에 기초하고 있지만, 근본적으로 사물적 관계를 넘어서 있다. 사물을 넘어서는 사물성, 이것이 현대적 규율을 통한 지배이다.

(6) 현대적 규율통제는 종교적 금욕주의에서 실천하는 유형의 규율과도 다르다. 수도사들의 금욕은 무엇인가를 생산 하거나 힘과 기술을 증대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다. 베버(Max Weber)가 언급했던 탐욕의 고도화된 형식인 부르주아식 금욕주의(inner-worldly asceticism)와는 달리 그들의 금욕주의는 물질적 욕구와 부의 가차없는 포기를 통한 육체의 해방을 목적으로 한다. 절제와 금욕을 통해 효용성을 포기하는 종교적 규율은 이차적인 동기를 가지지 않고 그 자체가 목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도원 내부에 존재하는 복종과 예속의 지배관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규율은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그것을 실천하는 본인의 육체적 정신적 구원(본인에 의한 본인의 지배)을 향해있다. 복종과 효용성의 상호 협착(docility-utility)으로 타자에 의한 신체의 지배, 사용, 그리고 보다 많은 힘과 기술의 증대를 통한 생산성의 최대화가 목적인 현대적 규율통제와는 본성적으로 다른 것이다.

현대적 규율에 의해 조직화된 몸은 비정치화된다. 한편으로 그 몸은 규율적 훈련에 의해 뛰어난 능력과 수완이 탑재되어 효율적이고 경제적인 필요에 적합하게 정향 된 몸이다. 그럼에도 그것은 정치적으로는 무기력하고 역동과 활력이 박탈된 몸이다. 한마디로 경제적 비정치화된 몸이다. 능력과 힘은 있지만 그것의 주체는 아닌 것이다. 현대적 규율은 몸으로부터 그 실체로서의 힘을 소외시킨다. 그리고는 몸으로부터 나올 수 있을 모든 잠재적 역량을 적성, 소질, 재능과 같은 코드화된 능력으로 규격화 한다. 여기서 힘의 양도 혹은 전도가 일어나는데, 마치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과의 소외 속에서 그의 전문지식과 기술이 자신의 지배를 더욱 강화하는 것처럼, 그가 가진 능력은 다름 아닌 그 자신의 예속을 견인하는 추진력이 된다. 이렇게 해서 주권자로서 그리고 계약의 주체로서의 현대인은 국가로부터 권리를 부여 받고, 무리로부터 보호를 받으며, 빵을 위해 회사에 손을 벌린다. 권리와 평화와 빵 아니 국가와 공동체와 회사 그 모든 결과들이 다름 아닌 자신의 힘으로부터 나온 것인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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