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imnews.imbc.com/weeklyfull/weekly04/2989993_6416.html
국내든 해외든 집단이 한 개인을 따돌리거나, 강자가 약자를 괴롭힌다고 하는 또 다른 진부한 형태의 뉴스이다. 폭행이란 강자에게는 행사되지 않는다. 폭행은 전적으로 약자에게, 즉 무기를 접고 이미 백기를 들고 있는 자(이것이 약자의 정의이다)에게 안도감 속에서 행사되는 '상대적 강자'의 사후 선언이다. 강자에게는 행사 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 역시 또 다른 약자이다(이것이 또한 강자의 정의가 아닌가?). 이런 점에서 보면 폭행은 비굴이나 비겁의 범주에 속한다.
저 젊은이들은 노숙자나 부랑자가 거기에 존재하고 있다는 이유로, 그가 저기서 그냥 걸어가거나 앉아 있다는 사실 때문에 화가 난 것이다. 그의 행색이 역겹고, 그의 냄새가 싫고, 그냥 밉고, 옆에 있다는 것이 견딜 수가 없고, 쉬워 보이고, 몇 대 갈겨준다 해도 별 해가 없을 것 같다. 저들의 폭행은 대응이 아니라(정당하든 정당하지 않든) 존재를 규정하는 방식이다. 주변에 보이는 존재를 규정하는 방식을 젊은 애들 스스로 만들어낸 것일까? 노숙자를 왜 싫어하게 된 것일까? 그를 때려도 괜찮다는 생각은 어떻게 가지게 된 것일까?
아이들은 자신의 행위를 동영상을 찍어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자랑하듯이 보여주었다. 이것이 문화이다: 저러한 뉴스에서 어김없이 등장하는 가장 진부한 시츄에이션은 폭행을 당한 노숙자에 대한 사람들의 동정과 구호품 공세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등장하는 크리스마스 트리, 그 옆에 앉아 선물 꾸러미를 안고 울고 있는 부랑자, . . . 폭력은 직접적인 폭행을 통해 행사되기도 하지만, 동정이나 연민과 같은 잠재적 폭력으로도 행사된다. 인터넷과 미디어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노숙자 데이빗씨에게 선물을 보내고 동정어린 손길을 보냈다. SNS 미디어를 통해 그를 돕자는 카페가 만들어진다. 그는 얼굴을 가리고 눈물을 흘린다. 기자들이 편집을 했기 때문에, 봉변을 당한 것이 억울해서 흘리는 눈물인지, 동정에 대한 고마움에 배인 감동의 눈물인지, 아니면 이 모든 상황이 어처구니 없어 나오는 하품의 국물인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마지막에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일자리도 구하고 술도 끊어야죠."
경우에 따라서는 고귀하다 할 분노는 말할 것도 없고 차라리 불만이나 불평보다도 저열한 윤리적 감정으로서의 동정과 연민이 뉴스언론과 기자들의 도덕 원리의 근간이 되는 한, 텔레비전이나 신문을 무심코 바라보고 있는 우리들은 그냥 방에 가만히 앉아 있는 동안에도 이미 누군가에게 테러와 폭행을 가할 수 있다. 연민과 동정에 있어 가장 치열한 종교집단이나 국가가 다른 한편 가장 급진적이고 잔혹한 폭행과 전쟁을 일삼는 경우를 항상 보는것도 이와 무관치는 않을 것이다. 선과 악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