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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되었든 살아가려면 누군가를 만나야 한다. 물론 아무도 만나지 않고 은둔 속에서 살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삶이라기 보다는 삶으로부터의 초월을 지향하는 것이다. 먹고 살려면 만나야 하고, 관계의 그물을 짜기 위해 두툼한 수첩을 준비해야 한다. 인터넷에는 살아가기 위해 부벼대는 이 관계의 몸부림이 즐비하다. 물리적 의미에서의 육체를 점점 잃어가는 이들은 또 다른 육체 속으로 기생하여 그 숙주들의 방 안에서 섹스를 하고, 울부짖으며, 사유를 한다. 공허와 무의미로 다시 추락하지 않기 위해 이들은 기기들을 부여잡고 파워-스위치를 끌 줄을 모르며, 손과 눈을 뗄 줄을 모른다. 너저분함으로부터의 초월에 실패한 나, 아주 많이 화가 나 있던 나 역시 결국은 그 빛 속으로 나와야 할 것이다. 기괴하게도, 관계로부터 고통 받지 않기 위해, 상처 받지 않기 위해, 불나방처럼 다시금 관계속으로!

졸라(Emile Zola)를 위시하여 자연주의 작가들에 대한 위스망스(Joris-Carl Huysmans)의 비판은 그들이 병든반복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었다. 물질주의적 중언부언으로 인해 그들의 세계는 제자리 걸음, 더 정확히는 "고정된 원 위에서 맷돌을 돌려대느라 숨을 몰아쉬며" 퇴락의 반복을 초래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그는 물질의 지대를 넘어서는 순수 잠재성의 지대를 탐색하기 시작한다. 위스망스는 자신의 소설에 대한 서문을 20년 후에 새로 쓰면서 병든반복을 넘어서는 영원회귀의 섬광이 될 만한 통찰을 다음과 같이 간략히 적는다.
"실상 자신이 쓴 문장들을 몇 년이 지난 후에 바라보는 것만큼이나 실망스럽고 괴로운 일도 없다. 문장들은 이를테면 침전물이 생기면서 맑아지고 책 깊숙히 찌꺼기들을 가라앉힌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 책이란 나이를 먹으면서 맛이 좋아지는 포도주 같지는 않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일단 맑아진 후, 각각의 장들은 김빠진 술처럼 맛을 잃어버리고 그 향기는 시들고 마는 것이다."(조리스-카를 위스망스, <거꾸로>(문학과지성사, 1993), p. 9. >
퇴락의 반복이 초래하는 권태와 공허 뒤에는 또 다른 심오한 반복이 있다. 키에르케고르(Soren Kierkegaard)가 말했듯이, 동일한 반복의 두 계열이 있는 것이다: 과거로 가는 반복, 그리고 미래를 향한 신념과 확신의 반복. 우리의 목적은 글과 문장이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표식 같은것에 불과하다. 심오함은 글과 문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곳, 영원회귀가 일어나는 다른 지대 속에 있다. 물론 추억을 더듬듯이 과거를 향해 그 표식으로 되돌아 오지만, 표식 아래에 쌓여있는 침전물의 부정적 결과인 권태와 공허는 다른 반복을 가능케 하는 토양이 된다. 이전의 표식이 따분할 만큼 우리는 커져있고, 증식하고 있으며, 달라졌기 때문이다(키에르케고르가 말했던 "부조리의 힘"이란 다름 아닌 "역설을 가능케하는 시간"일 것이다) 결국 새로운 글을 써야하는 것이다.
http://imnews.imbc.com/weeklyfull/weekly04/2989993_6416.html
국내든 해외든 집단이 한 개인을 따돌리거나, 강자가 약자를 괴롭힌다고 하는 또 다른 진부한 형태의 뉴스이다. 폭행이란 강자에게는 행사되지 않는다. 폭행은 전적으로 약자에게, 즉 무기를 접고 이미 백기를 들고 있는 자(이것이 약자의 정의이다)에게 안도감 속에서 행사되는 '상대적 강자'의 사후 선언이다. 강자에게는 행사 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 역시 또 다른 약자이다(이것이 또한 강자의 정의가 아닌가?). 이런 점에서 보면 폭행은 비굴이나 비겁의 범주에 속한다.
저 젊은이들은 노숙자나 부랑자가 거기에 존재하고 있다는 이유로, 그가 저기서 그냥 걸어가거나 앉아 있다는 사실 때문에 화가 난 것이다. 그의 행색이 역겹고, 그의 냄새가 싫고, 그냥 밉고, 옆에 있다는 것이 견딜 수가 없고, 쉬워 보이고, 몇 대 갈겨준다 해도 별 해가 없을 것 같다. 저들의 폭행은 대응이 아니라(정당하든 정당하지 않든) 존재를 규정하는 방식이다. 주변에 보이는 존재를 규정하는 방식을 젊은 애들 스스로 만들어낸 것일까? 노숙자를 왜 싫어하게 된 것일까? 그를 때려도 괜찮다는 생각은 어떻게 가지게 된 것일까?
아이들은 자신의 행위를 동영상을 찍어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자랑하듯이 보여주었다. 이것이 문화이다: 저러한 뉴스에서 어김없이 등장하는 가장 진부한 시츄에이션은 폭행을 당한 노숙자에 대한 사람들의 동정과 구호품 공세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등장하는 크리스마스 트리, 그 옆에 앉아 선물 꾸러미를 안고 울고 있는 부랑자, . . . 폭력은 직접적인 폭행을 통해 행사되기도 하지만, 동정이나 연민과 같은 잠재적 폭력으로도 행사된다. 인터넷과 미디어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노숙자 데이빗씨에게 선물을 보내고 동정어린 손길을 보냈다. SNS 미디어를 통해 그를 돕자는 카페가 만들어진다. 그는 얼굴을 가리고 눈물을 흘린다. 기자들이 편집을 했기 때문에, 봉변을 당한 것이 억울해서 흘리는 눈물인지, 동정에 대한 고마움에 배인 감동의 눈물인지, 아니면 이 모든 상황이 어처구니 없어 나오는 하품의 국물인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마지막에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일자리도 구하고 술도 끊어야죠."
경우에 따라서는 고귀하다 할 분노는 말할 것도 없고 차라리 불만이나 불평보다도 저열한 윤리적 감정으로서의 동정과 연민이 뉴스언론과 기자들의 도덕 원리의 근간이 되는 한, 텔레비전이나 신문을 무심코 바라보고 있는 우리들은 그냥 방에 가만히 앉아 있는 동안에도 이미 누군가에게 테러와 폭행을 가할 수 있다. 연민과 동정에 있어 가장 치열한 종교집단이나 국가가 다른 한편 가장 급진적이고 잔혹한 폭행과 전쟁을 일삼는 경우를 항상 보는것도 이와 무관치는 않을 것이다. 선과 악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자기 자신을 타인 앞에 또는 밝은 곳에 드러내거나 과시하는 것은 자신의 위상을 제한(혹은 부정)하는 역설적 상황을 초래할 수가 있다. 드러내 보임으로써 그 자신이 자아낼 수 있을 모든 신비한 가능성의 힘들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것이 푸코(Michel Foucault)가 지적했던 권력에 있어서의 “가시성(visibilité)의 역설”이다. 앙시엥 레짐(ancient regime)의 전제권력은 보여주는 일에 열정을 쏟아 부은 권력이다. 권력자는 자신을 과시하거나 과장해서 드러내기를 좋아하고, 우쭐해 하며 의기양양한 태도로 자신을 하나의 볼거리(spectacle)로 만들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호화의복, 궁중예식, 왕의거둥, 개선행렬, 공개처형 등, 재화의 엄청난 소비와 지출로 이루어지는 이 모든 비효율적 스펙터클은 그것을 바라보는 이들로 하여금 경이로움, 존경심, 또는 공포감을 일으키는 것을 목적으로 권력을 정복자로서 가시화한다. 대로의 밝은 빛 속에서 만인의 시선을 받으며 서 있거나 걸어가는 권력자는 자신이 바로 “그곳”에 있음을 표명했던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권력자의 이러한 가시성이 증대할수록 피권력자들은 어둠 속에 숨을 수가 있었다. 오히려 드러난 권력의 실체를 볼 수가 있어, 스펙타클의 애초의 의도와는 반대로 권력자의 무한한 권능에 제한을 가하는 결과가 일어난다. 권력자 자신이 스스로 공간과 시간이라는 한정된 조건에 방치됨으로써, 혹은 그 자신의 몸뚱어리가 하나의 사물로서 현시됨으로써, 무한의 절대성을 암시해야 할 권력은 오히려 상대적이고 제한적인 힘으로 하강하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잠재적 “권능(Power, Macht)”과 현실적 “물력(force, Gewalt)”의 역학관계—카네티(Elias Canetti)가 『군중과 권력』(Masse und Macht)에서 구분했던—가 그렇듯이, 힘이 비감각적이고 비실제적이 되어갈수록 그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는 넓어지게 된다. 아니 범위가 넓은 힘일수록 비감각적이고 비실제적이다. 가까이에 있는 힘일수록 그 지속력은 짧다. 먼 곳에서 가능성을 암시하는 힘은 그 반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절대성이란 보이지 않는 비가시성 속에서 현실화된다. 뚜렷이 보이거나, 가까이에 있거나, 언제든지 감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거나, 지시 가능하거나, 표현 가능한 것은 두려움을 갖게 하지 못한다. 단지 이미 사태의 종결이나 다름 없는 주체들의 치열한 행동과 그 행동의 결과들만이 현실을 설명해줄 뿐이다. 그 형태가 어떤 것이든 눈을 감고 잠들어 있는 순간에도 희미하게 아른거리는 존재만이 만인을 지배한다. 어떤 점에서 이것은 스피노자(Baruch Spinoza)나 사드(Donatien Alphonse François, Comte de Sade)가 생각했던 “자연” 혹은 “신”의 모습을 닮아있다. 상상 속에서 언젠가는 도래할 것이라는 막연한 암시로 불안은 존재를 잠식한다. 불안 그 자체가 존재인 것이다. 푸코는 현대적 규율사회의 가시성의 역전—시선 주체의 전도 혹은 가시성의 교환—을 지적했는데, 그것은 타자의 시선을 내면화하는 가운데 발생하는 불안의 잠식에 관한 문제였다. 더 이상 만인이 권력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내면적 타자로서의 권력이 만인을 바라보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권력은 언제나 현시한다. 언제 어디서든 머릿속에 떠오르고 나타나 주시하는 절대적 존재, 바로 이 가시성의 편재는 앞이 아니라 뒤에 임하는 것, 다시 말해 실제가 아니라 효과로서의 시선이기 때문이다.
『감시와 처벌』에서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는 인간의 몸에 실행하는 다양한 권력의 테크놀로지와 권력을 생산하는 기계들을 열거한다. 그의 책은 주로 17세기와 18세기의 문서들(책이 아닌 다큐멘터리들)을 세분화하여 분류하고 이를 기반으로 세기들의 권력 양태를 폭로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대상을 다루는 그 방식과 태도는 아이러니하게도 18세기적이다. 18세기가 개인의 몸에 그랬던 것처럼, 18세기를 세분화하고 개별화하는 그의 방식은 바로 18세기, 즉 그 대상을 닮아있다. 이 분류학자의 지루한 반복의 고통에 수반하는 인내와 절제의 심층에는 고집스러운 투쟁의 광기가 있다.
통제와 규율은 시대에 따라, 맥락에 따라, 그리고 그 방식에 따라 질적으로 다르다. 현시대의 예로도 충분히 예시가 가능한—물론, 그 차이를 나누는 것이 더 중요하겠지만—현대적 권력의 발생적 뿌리랄 수 있는 18세기적 규율은 이전의 시대와 견주어도 그 강제력의 양이 모자람이 없다. 오히려 그것은 더욱 더 포착하기 어렵게 무의식적이고 비가시적이 되어 지배와 통제를 보편적으로 도식화 한다. 권력의 도식적 보편화 또는 보편적 도식화. 이것이 계몽주의와 합리성이라는 이름으로 이데올로기 국가장치들 속에서 실현되어온 "정치적 해부학"(political anatomy)으로서의 규율이다. 권력의 정치적 해부학 즉 규율은 몸을 물리적, 기능적, 질적으로 분해한다. 힘과 특질을 개별화하는 해부학적 파편화에 의해 몸은 세련되고 다루기 쉬운 레고블록(Lego block)이 된다. 마음대로 처분하거나 다룰 수 없는 덩어리로서의 아날로그적 신체가 디지털화된 입자들의 소외된 연합으로 변형되어, 잘게 부수어지면서 동시에 재배열되고, 재배열되는 동시에 잘게 부수어지는 가상적 역학이 군대, 학교, 교회, 병원, 감옥 등, 모든 사회적 장 속에서 잠재화되는 것이다. 이로써 몸을 폐지하고 추방하고 격리하여 인격적으로 가해지던 전근대적인 처벌양식 대신에 몸을 교정하고 교육하고 훈련하는 비인격화된 근대적 규율방식으로의 전환이 일어난다. 나병에 대응하는 국가의 집단화 충동이 페스트에 대한 개별화 충동으로 전환되었던 것처럼, 권력은 전체, 공동체, 집단화의 패러다임에서 개인, 원자, 개체성의 효율적 테크닉으로 조직화한다.
이에 따라 규율적 통제의 변별적 특징들을 간략히 지적해볼 수 있을 것이다.
(1) 규율적 통제는 그 규모에 있어 미시적이다. 통제의 규모는 하나의 덩어리로서의 몸 전체의 수준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통제는 몸 자체가 아니라 몸이 자아내는 질적 변화들로 세분화된다. 전 시대의 구금이나 추방, 학살, 수용과 같은 몸의 “도매처리”(wholesale) 대신에, 기능들 혹은 메커니즘(움직임, 제스처, 태도, 속도 등)에 따라 몸은 잘게 나뉘어 질적으로 부분화된다. 강제력의 미시적 형식을 통해 몸은 “소매”(retail sale)로 다루어지는 것이다. 이로써 몸의 개조가능성 혹은 교정가능성을 전제로 훈련과 같은 페다고지(pedagogy)의 산업-정치적 형식이 새롭게 등장한다.
(2) 규율적 통제는 그 대상에 있어서도 이전 시대와는 구분된다. 통제의 대상은 행동의 표현적 요소나 언어적 측면이 아니다. 몸가짐에서 느껴지는 군인다움이라든가 민첩함 또는 학생의 행동거지에서 보이는 그의 태도와 같은 것을 교정하여 이상적 자태를 조형하는 문제가 더 이상 아닌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몸의 기호와 조형이 아니라 움직임의 효율성 그리고 그 효율적 경제를 실현하기 위해 몸을 어떻게 내적으로 조직화할 것인가에 있다. 내적 조직화가 목표로 하는 것은 이상적인 인간이나 탁월한 개인이 아니라, 비인격적이고도 합리적인 최대 효율성이나 최대 생산성이다. 행동의 결과주의에 대한 이러한 열망은 인간의 몸과 그 행동을 기능적 사물로서, 즉 습관적 자동화의 수단으로서 확립한다. 벽돌쌓기공학(Bricklaying Ergonomics)이나 테일러주의(Taylorism)와 같은 보다 산업-집중화된 몸의 조직화는 이미 일상적 규율화 속에서 다져지고 있었던 것이다. 현대적 몸이란 다름 아닌 경제적-효율적으로 분절된 신체를 의미한다.
(3) 통제의 양상 또한 전 시대에 비해 새롭다. 산출된 결과를 중요시 하는 저러한 행동의 결과주의와는 반대로 통제 방식에 있어서는 중단되지 않고 지속적이다. 즉 행동이 산출한 결과보다는 그 과정 전체가 감독되고 통제되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것이다. 규율에 따라 조직화된 행동 자체가 이미 감시의 과정을 실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벨트시스템과 같은 기계나 새로이 발명된 기구에 달라붙은 몸, 개별적으로 구획된 공간에 배치된 몸, 세분화되어 명시된 시간표에 따라 움직이는 몸, 엄격하게 수행되는 의례(ritual)를 따라 주체(권력)를 내면화하는 몸, 이렇게 몸 마디마디에 가해지는 규칙과 규약과 코드를 통해, 다시 말해 시간과 공간과 운동의 전 영역에 스며든 분할의 코드화에 의해 행위 과정 자체 내에서의 매 순간의 익명의 감시가 “작동”한다. 이것은 특정 인격에 의한 혹은 특정 권력에 의한 감시의 실행이 아니다. 팬옵티콘(panopticon) 시설 내부에 배치된 개인이 자신 안에 “감시자/감시대상의 구도”로 분열되어 예속상태를 스스로 실천하듯이, 움직임 자체가 바로 감시기능의 자동적 가동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지속적이고, 이 지속성 속에서 다루기 쉬운 몸은 쓸모가 있으며 쓸모 있는 신체는 다루기 쉬워야 한다는 “순응성-유용성”(docility-utility)의 도식적 상호관계가 형성된다.
(4) 규율은 몸의 자의적인 소유가 아니다. 그것은 몸을 마음대로 독점하고 전유하는 관계에 근거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규율적 몸은 완전한 물리적 소유물인(재산으로서 마음대로 처분과 양도가 허용된) 노예의 몸과는 다르다. 노예의 몸은 (주인의) 가시적인 폭력에 노출되어 있으며, 신체의 독점권만큼이나 그에 따른 비용을 초래하는 몸이다. 또한 그것은 세분화되어 있지 않으며, 삶 전체에 걸쳐 장악된 무제한적 지배의 관계에 속하긴 했지만, 개인들의 성향이나 변덕에 따라 행사되는 폭력으로 인해 일관성이 비교적 약했다. 반면 규율은 막대한 비용이나 무자비해 보이는 폭력이 없이도, 몸을 물리적으로 또는 서면상 소유하지 않고도 일관적이고도 유연하게 효용성의 효과를 낼 수가 있다. 심지어 규율은 개인으로 하여금 통제와 예속을 자발적으로 원하게 한다는 점에 그 세련됨이 있다.
(5) 규율은 계약에 근거한 일시적 지배가 아니며 토지라든가 생산물을 매개로 이루어지는 간접적인 지배가 아니다. 그것은 봉건적 예속관계와는 다르다. 봉건적 예속은 몸의 지배라기보다는 지대와 공납과 같은 노동 산물의 지배이며, 주종관계를 확인하는 관례적이고 형식적인 징표들을 통해서만 확인되는 간접적인 지배이다. 이와는 달리 규율은 매개되지 않은 몸에 대한 직접적 지배의 형식을 띤다. 그것은 우리가 눈을 감고 있는 동안에도 작동한다. 그것은 사물화에 기초하고 있지만, 근본적으로 사물적 관계를 넘어서 있다. 사물을 넘어서는 사물성, 이것이 현대적 규율을 통한 지배이다.
(6) 현대적 규율통제는 종교적 금욕주의에서 실천하는 유형의 규율과도 다르다. 수도사들의 금욕은 무엇인가를 생산 하거나 힘과 기술을 증대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다. 베버(Max Weber)가 언급했던 탐욕의 고도화된 형식인 부르주아식 금욕주의(inner-worldly asceticism)와는 달리 그들의 금욕주의는 물질적 욕구와 부의 가차없는 포기를 통한 육체의 해방을 목적으로 한다. 절제와 금욕을 통해 효용성을 포기하는 종교적 규율은 이차적인 동기를 가지지 않고 그 자체가 목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도원 내부에 존재하는 복종과 예속의 지배관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규율은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그것을 실천하는 본인의 육체적 정신적 구원(본인에 의한 본인의 지배)을 향해있다. 복종과 효용성의 상호 협착(docility-utility)으로 타자에 의한 신체의 지배, 사용, 그리고 보다 많은 힘과 기술의 증대를 통한 생산성의 최대화가 목적인 현대적 규율통제와는 본성적으로 다른 것이다.
현대적 규율에 의해 조직화된 몸은 비정치화된다. 한편으로 그 몸은 규율적 훈련에 의해 뛰어난 능력과 수완이 탑재되어 효율적이고 경제적인 필요에 적합하게 정향 된 몸이다. 그럼에도 그것은 정치적으로는 무기력하고 역동과 활력이 박탈된 몸이다. 한마디로 경제적 비정치화된 몸이다. 능력과 힘은 있지만 그것의 주체는 아닌 것이다. 현대적 규율은 몸으로부터 그 실체로서의 힘을 소외시킨다. 그리고는 몸으로부터 나올 수 있을 모든 잠재적 역량을 적성, 소질, 재능과 같은 코드화된 능력으로 규격화 한다. 여기서 힘의 양도 혹은 전도가 일어나는데, 마치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과의 소외 속에서 그의 전문지식과 기술이 자신의 지배를 더욱 강화하는 것처럼, 그가 가진 능력은 다름 아닌 그 자신의 예속을 견인하는 추진력이 된다. 이렇게 해서 주권자로서 그리고 계약의 주체로서의 현대인은 국가로부터 권리를 부여 받고, 무리로부터 보호를 받으며, 빵을 위해 회사에 손을 벌린다. 권리와 평화와 빵 아니 국가와 공동체와 회사 그 모든 결과들이 다름 아닌 자신의 힘으로부터 나온 것인데도 말이다.
서구의 사유에는 기원에 도달하는 두 계열이 존재한다. 하나는 빼기이고, 다른 하나는 더하기이다. 빼기는 순수성을 지향하며, 경험 가능한 모든 요소들을 사유 가능한 단일성으로 환원한다. 반면 더하기는 순수성을 전혀 다른 관점에서, 다시 말해 사유 가능한 모든 단일성을 경험 불가능한 다양성의 지대로 펼침으로써 모든 환원적 요소들을 해체한다. 가령, 순수 시각에 대한 두 계열의 관점의 차이를 생각해 보면, 전자의 경우는 모든 감각작용들, 즉 협동일관적이고, 복합적이고, 융합적인 감각작용들을 지우고 공허에 가까운 순수시각을 보려고 하는 반면, 후자에게 순수시각이란 시각의 협동일관적, 융합적, 복합적, 잠재적, 가상적 감각작용의 결합으로 정의될 것이다. 순수성이란 '무'라든가 '극'과 같은 어떤 상태가 아니라 출발 혹은 기원이다. 단순성에서의 출발인지 아니면 복잡성에서의 출발인지는 서로 분리될 수 없는 두 계열의 각각의 위치에 의해 결정되는데, 하나는 복잡성의 피로감으로부터 벗어나 어디론가 귀환하고 싶어하는 열망으로, 다른 하나는 단순성의 단조로움으로부터 벗어나 어디론가 떠나려는 열망으로 구별된다. 이로써 두 계열의 뜻밖의 아이러니가 나오는데, 전자는 삶을 지움으로써 그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반면, 후자는 삶을 더함으로써 그것을 넘어서고자 한다.
애초의 계획은 이런 것이었다. 우선 6-7개월 안에 번역을 끝낸다. 그리고 1-2개월에 걸쳐 번역본을 두 세 차례 읽어가며 문장을 다듬는다. 그리고 작업 과정에서 작성했던 메모와 노트와 밑줄을 중심으로 이 책에 관한 장편의 해설 에세이를 야심차게 한 편 쓴다. 그래서 마치 야생 동물을 길들이듯이, 이 불친절하고 오만해 보이는 텍스트의 독자에 대한 만행을 누그러뜨려 나긋나긋해지도록 하면, 누구든 쉽게 이해하고 따를 수 있는 중성의 지도가 만들어질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나의 번역작업은 번역 보다는 논문을 쓰듯이 메모와 자료수집에 더 중점을 두게 되었다.
작업이 진행되면서 애초의 계획은 많은 장애를 겪게 된다. 우선 사실상 가장 중요한 돈 문제가 있다. 사회-내-존재로서 나는 ‘이론을 위한 이론’ 부류에 속한 ‘이 책만을 위한 삶’을 고집할 수는 없었다. 이러한 책은 돈과는 무관한 전혀 다른 이유로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돈벌이가 아닌 전혀 다른 이유 때문에 시작한 일은 취미로 해야 한다. 일에 대한 자세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할애해야할 시간을 말하는 것이다. (취미란 왜 항상 상대적으로 적은 시간만이 허용되는 것일까?) 따라서 이 책의 번역 작업, 더 정확히 작업 시간은 취미처럼 진행되어야만 했다. 애초의 계획인 6-7개월은커녕 작업은 더디어지고 길어졌다. 또 사회-내-존재로서 개인적인 소사들은 일의 매끄러운 진행을 방해한다. 경제적, 사회적, 개인사적인 모든 난삽하고 자질구레한 그러나 피할 수 없는 실재들로 인해 미리 결정해 놓은 목적들은 지리멸렬해 진다. 역설적이게도 학문의 순수성은 부의 산물일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이 강하게 들었다.
그러나 작업을 방해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이 책이 재미가 없다는 것이었다. 위의 외적인 요인들은 일을 더디게 할지는 모르지만, 일에 대한 환멸과 태만의 원인은 되지 못한다. 이 책은 사람을 아주 이상하게 나른해지게 하는 구석이 있다. 구사하는 문체의 난해함과 주제의 단조로운 반복 때문인지, 이유를 알 수 없는 환멸과 태만이 바로 이 책의 독자를 사로잡고 있는 분위기이다. 논리적으로 매끄럽게 잘 연결되거나, 내용이 익숙하거나, 어렵더라도 하다못해 뭔가 새로운 것을 배우는 듯 한 느낌만이라도 주었더라면, 원한감정까지 생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원한 감정, 즉 타인에게 원인을 투사한 무능력의 감각이 번역을 하는 내내 나를 괴롭혔다. 페이지를 쭉쭉 나아갈 수 없는 무기력, 어떤 부분은 알겠지만 그 다음 부분은 알 수 없는 끊임없는 단절감, 의미를 쉽게 결정할 수 없는 모호한 정신상태 속에서의 지속의 고통, . . . 이렇게 텍스트를 쥐고 있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면서, 작업은 쉽게 끊어지고, 머뭇거리게 되고, 문장을 구성하는 실제적 행동성의 발랄함은 사라지고, 생각만 한 없이 깊어지면서, 그렇게 늘어난 시간은 텍스트와 독서경험을 나른한 파편들로 만들어 갔다. 쉬운 몇 마디로 요약할 수 없는 총체성 상실이라는 무능력의 감각은 결국 저자에게 투사된다. 역자인 나는 저자의 글쓰기 능력과 이론적 진정성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텍스트를 쥐고 있는 시간이 길어지고, 경험이 파편화 되어가고, 총체성이 상실되는 해체와 파괴의 과정 속에서 무엇이 생산되었을까? 점점 쓸모가 없어져가는 이 책은 도대체 무엇을 생산하는가? 저자가 말했듯이, 다름 아닌 “두통”이 생산되었다. 더 근사하게 말해 지속 또는 시간(과학의 차원이 아닌)의 경험이 생산된 것이다.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에 이 텍스트를 번역하는 과정 자체의 묘사가 이 책에 대한 가장 적절한 묘사이며 규정일 것이다. 독서 자체가 일종의 퍼포먼스이다. 책을 이루는 구성요소들의 다가(多價)적이고 다중적인 모호함, 그리고 그 책을 읽는 매순간의 딜레마, 그 무엇도 확신을 가지고 결정할 수가 없는 텍스트의 의미, 내용과 의미보다는 수단과 형식으로서의 언어 그 자체에 대한 반성, 나아가 읽고 있는 주체인 나 자신에 대한 자기-지시적 사유, 이러한 것들이 바로 마수미가 우화라고 명명하면서 여러 사례들을 통해 드러내고자 했던 잠재, 또는 더 넓은 의미에서의 가상계의 질서이다. 사물이 쓸모가 없어질 때, 다시 말해 모호, 딜레마, 비결정, 자기 반영과 같은 가상계의 내적 질서에 존재할 때, 그것은 다른 어떤 것이 아닌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지시한다. 유용성, 기능, 총체성과 같은 구식의 존재론적 가치로부터의 해방은 사물의 본질(플라톤과 전혀 다른 관점에서) 또는 사물의 직접적 자기-존재의 현시이다. 가상계에서 시간과 그 경험은 직접적으로 현시된다.
현실계-내 및 사회계-내-존재인 독자들께서는 이제 이 책 전체를 통해 다양한 분야(현상학, 생리학, 물리학, 예술, 미디어, 정치, 심지어 스포츠와 연예에 이르기까지)의 저류에 흐르고 있는 가상계, 다시 말해 간극과 미결정성의 지대를 접하게 될 것이다. 현실계와 사회계 내에서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실재를 살아온 우리는 스스로를 지각의 주체로서 정립하고, 우리 앞에 뚜렷한 윤곽선을 내보이는 사물들, 사람들, 이미지들, 세계-내-존재자 모두를 주체에 대한 존재(대상)로서, 또 주관성에 대한 객관적 실체(객체)로서 규정해왔다. 삶의 필요에서 비롯된 이러한 추상화 운동은 존재를 유용성과 기능에 부합하는 것으로 포섭하면서, 모든 “지각 가능한 것만이 존재 한다”고 하는 자의적이지만 확고부동한 현실의 질서를 조작한다.
그러나 지각 가능하고 사유 가능한 현실적 확신은 새로운(혹은 태곳적) 실재로서의 가상계 안에서 생소해지고 모호해지며 확실성을 잃어간다. 저자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현실계를 파고들어, 우리의 지각과 행위 내에서 운용이 가능한 현실적 대상과 사물들에 카오스적 구도를 끼워 넣어 그 단단하고 명확한 윤곽선들을 흐려놓는다. 지각과 사유가 불가능한 그러나 궁극적이고도 실질적으로 내재하고 있는 가상의 지대를 끄집어내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믿고 있는 현실이 얼마나 모호하고 비결정적인 토대 위에 세워졌는지, 두 눈으로 똑바로 보이는 시각적 대상조차, 심지어 우리가 확신을 가지고 명명하는 색 조차 사실은 명확히 결정할 수 없는 불안정한 지대 위에 서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가령, 그것은 객관적 확실성에 기반을 둔 고전과학 내부의 역설적 불확실성의 미시적 지대―프랙탈이나 카오스 등으로 색인되는 양자역학적 대상들―이기도 하고, 일상에서 접하는 미디어 실천들―텔레비전, 라디오, 영화, 인터넷, 하이퍼텍스트, 가상현실, 기타 모든 문자 및 이미지 매체들―을 통해 전달되어 우리의 감각체계를 변형시키는 정동의 운동이기도 하고, 주변공간과 대기 전체를 변조시키는 미세한 진동의 유도체가 되어 우주 전체를 표현하는 표면-장으로서의 몸(과 그 예술적 퍼포먼스)이기도 하고, 한 영화배우이자 국가 원수인 어떤 인물 또는 가수이자 우상인 어떤 인물의 몸 위상학이 현실화하는 잠재적 정치의 지대이기도 하고, 심지어는 TV에서 방영되는 축구경기의 경기장 내에서 실제적으로 움직이는 선수들, 축구공, 심판, 관중들 이전에 그 장을 결정짓는 근원적 잠재이기도 하다. 이러한 것들에 관한 논의는 우리가 알고 있고 믿고 있는 현실의 질서를 무화시키는 새로운 비-구도를 발생시킨다.
이것은 궤변이 아니라, 존재의 실질적 토대에 대한 사유의 결과이다. 저자가 끊임없이 미시물리학, 생리현상학, 그리고 신경생리학 등의 영역으로 파고들면서도 다시 빠져나와 문화학과 철학의 사변으로 되돌아가는 이유는, 과학이 철학의 물질적 극한으로 그리고 철학이 과학의 주관적 극한으로 향하는, 또는 물질과 정신이 상호역동으로 향하는, 철학과 과학의 구분불가능한 모호한 지대를 검토하려는 의지 때문일 것이다. 그 두 극한 지점 내에 있는 문화, 역사, 예술, 정치, 미디어 등, 모든 개별적 실천들이 가상계라고 하는 비물형적 효과의 지대, 무차별적 비결정성의 단일한 판 위에서 형성되는 과정이 우화처럼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쓸모없음을 자랑스럽게 추구하고, 총체적 기능을 파편화하며, 비-의미로써 두통을 생산하는 이 책의 기능과 의미, 즉 메시지는 무엇인가? "현실과 세계는 미리부터 주어지지 않는다". 이 불확실성의 확실성 또는 비존재의 존재성이 함의하는 바, 세계는 주어진 것이 아니라 창조하는 것이다. 주체는 그 자신의 주체성을 창조한다. 말하자면 세계는 그 자신을 생산한다. 과학도 아니고 철학도 아닌, 논문도 아니고 예술작품도 아닌(소설인가? 시인가?) 마수미의 이 모호한 텍스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지점은 다름 아닌 능산적 자연이라고 하는 스피노자주의의 윤리적 개념일 것이다. 나아가 마수미의 텍스트가 질문하는 바를 이렇게 요약해보자: 근원적 환경으로서의 비결정적 실재로부터 결정적 현실과 의미의 주체가 창조되는 것은 어떠한 질적 과정(혹은 추상화 운동)을 통해서인가?
"매일 일어나는 상호주관적 세계에서는 물론 다수의 시야 축이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여전히 유사성과 자기-동일성에 종속되어 하나의 단일한 선을 따라 배열된다. 이 선은 그 자체로는 비시각적(nonvisual)이다. 그것은 일종의 서사선(a narrative line)이다. 가족 관계 혹은 직장에서, 우리는 할당된 사회적 역할을 연기한다. 우리는 그 대본을 해석하고, 우리 자신이 된다는 것 즉 부모나 아이, 어머니나 아버지, 고용주와 고용자, 경찰과 범죄자가 된다는 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한 하나의 “마음의 그림”을 시각적으로 소묘하고 형태를 만든다. 그리고 우리와는 다르지만 보완적인 인물 역에 종사하는 타인들을 위해 그 가시화된 그림을 육화한다. 그 각각의 역할을 연기하는 가운데, 어떤 특별한 타인이 우리를 알아봐주면, 그에 따라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인식한다. 우리를 받쳐주는 조연배우의 눈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반영하고, 그들 역시 우리의 눈 속에 있다. 상호간의 차이는 한 쌍으로 된 두 눈의 망막 표면들 사이에서 펼쳐진다. 일련의 조절된 식역(識閾)을 가로질러 그 두 사회적 연기자들을 실어 나르는 하나의 서사선이 그 표면들 사이로 지나간다. 동일한 서사에 공동으로 참여하고 있어서, 우리는 서로 차이나기보다는 근본적으로 서로가 닮아있다. 나 자신과 나의 반영적 보완자 간의 차이는 움직임을 허용하는 최소한의 차이이다. 시야 축은 약간 비틀린 각을 이루어, 상호간에 자기-규정적 인지는 항상 미세하게 빗나간다. 이와 같은 원근법적 이접(perspectival disjunction)은 융합을 예방할 정도로 불균형을 창출한다. 정지 상태로부터 구제되었기 때문에, 삶은 계속되는 것이다. 모든 것은 변하지만 최소한의 변화, 즉 동일성과 대체로 일치되는 비대칭-유발의 역동적 왜곡만이 있다. 우리는 성장을 한다. 나이가 들어, 심지어 어떤 역할들이 뒤바뀌어, 어쩌면 부모가 되어, 어쨌든 유년기를 다 써버리고 성인이 된다. 그러나 우리는 나이든 육신이 아무리 뒤틀리고, 정신이 아무리 집중력을 잃어간다 해도, 우리 자신 이상으로 더 자랄 수는 없다. 특별한 순간들은 눈에 띄게 뚜렷이 나타나, 가족사진 앨범 속에 완벽한 그림이 된다: 생일, 졸업, 결혼, 기념일, 승진축하, 퇴직 등. 평범하고, 늙은, 일상 속의 우리는 형식화된 포즈들로 사진에 찍혀 보존되어 삶의 구절들의 연속을 통해 나아간다. 우리의 삶은 연속으로 이어지는 타블로에 담겨, 즉 체계적으로 그러나 조용하게 과녁을 빗나가는 형편없이 진부한 대본에 구두점을 찍는 연속 샷에 담겨 우리의 눈 앞을 지나간다. 연속적인 진행은 있지만 진정한 변형, 즉 감지하기 어려운 운동은 없는 것이다. 우리가 어디를 가든, 거기엔 우리가 다시 등장한다. 우리 자신을 빠져나갈 수 없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죽는다. [이것이 현대-스타일의 유토피아이다]."(Brian Massumi, Parables for the virtual: Movement, Affect, Sensation, Durham & London: Duke University Press, 2002. pp. 232-233) ([ ]표시는 역자가 넣었음)
"철학을 거의 전투적으로 반대하는 몇 몇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과학자들이 공포소설의 주인공이라면, 그들이 하는 일은 그들의 도망이 멈출 때 시작할 것이다. 겁에 질린 주인공이 뒤를 돌아볼 수있을 만큼 멀리 앞으로 돌진해서 자신이 보았던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질 때, 과학은 시작된다. 외계인일까? 돌연변이일까? 아니면 철학자일까? 식별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 안도감을 느낀다. 계획을 세우자. 이것 저것 꾸며보자. 그래야 그것을 식별할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쫓고, 미끼를 놓고, 결국 함정에 빠뜨린다. 그러고나서 그것을 꼭 잡고, 캐내고, 결국 절단한다. 공을 들여, 조각 조각, 그것의 정체를 꿰어 맞춘다. 그러면 괴물 하나가 목격되고, 나는 새로 발견한 확신을 가지고 그것을 향해 달려간다. 이제 알 것만 같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볼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다음에 나올 것은 지난 번에 나온 것과 다르지 않다고. 내가 만들어 낸 이 동일성을, 일치하든 일치하지 않든 내 인지 능력 테스트에 적용한다. 내가 관찰한 것들을 다른 사람들과 열심히 공유한다. 같은 방법론을 고수하는 다른 사람들도 내 발견을 인정한다. 그 탐구 결과는 재생산되고 입증된다. 이제 낯선 것의 침략으로부터 행성을 구하기 위해 예방책들이 취해질 수 있게 되었다." (Brian Massumi, Parables for the virtual: Movement, Affect, Sensation, Durham & London: Duke University Press, 2002. pp. 232-233)
제이미슨(Fredric Jameson)은 필리핀 영화감독 키드랏 타히믹(Kidlat Tahimik)의 영화, 『향기로운 악몽』(The Perfumed Nightmare)을 언급하면서, 그의 영화가 well-made(예술적 태도로서)가 아닌 점을 칭찬한다. 프루스트(Marcel Proust)의 생각처럼 물론 예술가의 스타일은 그의 세계관 혹은 통찰의 관점 전체를 반영하지만, '태도'에 대한 언급은 예술의 윤리적 지침을 제시하는 것과는 일견 다른, 새로운 형식적 아니 비형식적 전략 같은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다. 타히믹의 작품에서 은은하게 스며들어 있거나 발산하고 있는 '솔직 담백함'이 좋은 예가 된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아마도 그것은 버나드 쇼(Bernard Shaw)가 입센(Henrik Ibsen)의 토론극에 찬사를 보내며 마음 속으로 생각했고, 결국 그 자신도 적극적으로 도입했던, 입센의 극 속에서 함축하고 있는 어떤 태도와 관련이 있는 맥락이 아닐까 하는 점이다. 가정적인 여성으로서의 Nora가 죽 그래왔듯이, 예술은 더 이상 화장을 해서도, 그러니까 결코 그 자신 안에 상관적 타자(결국 고객이나 소비자가 될 수 밖에 없을)를 꿈꾸어서도, 또 유럽 모더니즘의 가식적인 포커페이스가 한 때 그랬듯이, 더 이상 자신이 뭔가를 알고 있는 것처럼 위장을 해서도, 그러니까 자신 안의 메타주체 아니면 더 나아가 대타자를 움켜쥐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왜곡이 문제가 아니라 허기와 공허가 문제이다. 우리는 너무 지겨워졌고 너무 지쳐있고, 그래서 언제나 그래왔듯이 이제는 진정한 뭔가가 필요하다.
쇼는 틀림없이 입센 극의 위대함을 마지막 부분의 "토론"에서 찾았을 것이다. 문제는 토론이라는 형식의 민주적 성격에 있는 것이 아니라(토론은 본질적으로 힘의 연장 혹은 지연으로 결코 민주적이지 않다), 테이블에 앉기까지의 어떤 근본적인 변화 혹은 토론의 주관적 조건으로서의 주체의 정신상태 즉 태도이다. Nora가 남편과 토론을 벌인 것은, 그로부터 해답을 얻기 위해서도, 자신의 문제를 남편과 상의하기 위해서도, 남편의 배려를 요구하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거기서 토론은 선언 같은 것, 더 정확히 말해 비로소 그녀를 안전한 가정으로부터 구해내는 단절과 거부의 형식이었다. 모든 냉소로부터의 단절(왜냐하면 냉소는 남편의 월급봉투를 고대하는 주부 인생의 전-의식적 자기혐오이므로), 모든 불성실과 태만으로부터의 단절(왜냐하면 태만과 불성실은 방관하고 있는 인형들의 존재방식이므로), 모든 소유관념 즉 사물성으로부터의 단절(왜냐하면 사물성은 인생을 허기지고 공허하게 하는 모든 말장난의 근원이므로), 그렇게 모든 노예근성으로부터 단절하여 자기자신을 새로운 유형의 인간으로 점차 개조하는 이정표! 이것이 니체를 닮은 활력 만땅의 쇼가 입센의 예술의 현대성으로부터 발견한 (진지한)토론의 의미이다. 타히믹이 유럽과 미국 나아가 본질적으로 자본에 대해 "조용히 거부하면서" 보여주었던, 비판을 넘어서는 소박파(Art Naïf) 특유의 솔직 담백한 도큐멘타리스러운 영상이, 모든 예술의 상품 타자성으로부터 박차고 나와, 거리에서 구걸을 할지언정 결코 되돌아가지 않는 새로운 유형의 예술과 그 제작 형식을 제시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거칠고 어설픈 브리꼴라쥬 형식의 낯설음은 모든 '진지한' 단절과 비판의 불가피한 아니 의기양양한 선택이다. (2009. 8. 5)
가령, 고독의 역설을 생각해보자. 고립이 깊어져 혼자가 되어갈수록 주변과의 일체감 혹은 공감의 가능성은 커진다. 어떤 점에서 고독은 일체감 혹은 소통이라고 해도 좋을, 즉 고립으로부터의 급진적이고도 본원적인 해방의 인간적 조건이다. 물리적 상황이나 육체가 주변으로부터 단절하고, 그 외연적인 관계가 끊어지면, 비로소 외연 너머의 감각적 지대와 내면이 고개를 든다. 소리, 냄새, 촉감, 표현내용으로서의 정동, . . . 완결된 형태를 뚜렷이 그릴 수 없는 부분적 충동들의 세계, 즉 그 모든 감각적 추상이 구체적이고도 현실적인 행동성을 대체한다. 이것은 퇴행이나 장애가 아니라 새로운 능력의 열림이다. 이 능력의 열림을 경험적으로 목격할 수 있는 사례를 들어야 한다면, "장애인"이라고 빈약한 근거로 거칠게 잘못 불리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우리는 망설임 없이 단언할 수 있다. 가령, 시력을 잃은 맹인은 발소리를 통해 사람을 식별한다. 혹은 얇은 지팡이 하나로 자신이 딛고 서 있는 지면의 총체적 촉지면을 느낌으로써, 시력을 가진 사람들은 상상하기 어려운 촉각의 세계에 이른다. 망막이나 안구와 같은 육체적 처리기관의 단계에서 빛-물질을 포기하고 나면, 이제 물질의 소리의 측면 혹은 질의 측면이 새로운 가능성으로 육체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모든 존재에 내재하고 있는 힘은 장애물을 넘기 위해, 자신에게 주어진 물질-장애를 처리하기 위해, 도구로서의 새로운 능력(faculties)을 열어젖힌다. 그렇다면 "장애인"이라는 용어는 무엇을 지칭하는 것일까? 무엇에 대한 장애라는 것일까?
지금까지 편협하게 우격다짐 식으로 편성된 세계구도는 우리가 가진 모든 능력에 적합한 형식으로 새롭게 다시 짜야 한다.
아래의 구절은 한국의 영문학과에서 나온 한 학위논문의 구절이다. 우연히 접하게 된 구절이었기 때문에, 특별한 목적이나 이유 없이 아무데서나 발췌한 구절이다. 그러니 발췌된 내용을 꼼꼼히 읽어볼 필요는 없다. 논문들을 찾아서 읽어본 사람은 잘 알겠지만, 이러한 식의 논문은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이 구절을 보고 있노라면, 한국의 정치적 현실인지, 역사적 현실인지, 문화적 현실인지, . . . 같은 것들이 뒤죽박죽 머리 속을 채운다. 속물의 욕망을 포부로 들이마시는 한국인들은 그 무엇도 스스로 할 수 없는, 그저 남들이 만들어 놓은 질서에 잘 적응하는 것을 최고의 명예로 삼으며 노예처럼 살아가는 것이 고작으로 보인다. 예나 지금이나 한국인들은 바다 건너로 나가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들은 언제나 되돌아오기 위해 그러한 포부를 꿈꾼다. 위에 보이는 언어 속물이 그 예이다. 이러한 가운데 한민족의 문화사 아니 한반도의 역사 전체는 어떤 역설을 형성한다. 주로 지식인들에 의해 주도된 그것은 바로 언어에 있어 "단절의 연속"이라는 역설이 아닐까 싶다. 그 역설 속에서 한국인들은 지식과 사유와 감성과 기억 자체의 파편화된 분열을 경험한다. 이 분열을 역동이라고 불러야 할까?
수 주? 아니 수 개월 전 어느 날, 마치 헤롤드 핀터(Harold Pinter)의 난입극을 보는 것처럼, 개도 아니고 돼지도 아닌 기묘하게 생긴 두 명의 짐승들이 난입해와 꽥꽥 거리며 울부짖는 통에 잠을 설쳤다. 그 울부짖음은 고통스러워 보였고, 쌓여있던 무엇인가를 내 뱉는 성토 같아 보였고, 어떤 점에서는 애처로워 보였지만, 울부짖음의 덩어리가 가지런히 분절되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말해 말이 아니었기 때문에, 도무지 무엇을 고통스러워하는지, 무엇을 내뱉는 것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카프카의 동물들처럼, 그 소리는 그냥 거기에 "어떠한 고통의 울부짖음이 존재한다"고 하는 사실만을 드러낼 뿐이었다. 분절되는 소리를 낼 수 없는 동물들은 또한 분절되는 소리를 들을 수 없으므로, 나 역시 그 울부짖는 소리에 아무런 응답을 할 수가 없었다. 시도를 해볼까 했지만, 그들은 들을 수 없을 것이고, 오히려 내 소리에 자극을 받아 더 꽥꽥 거릴 것 같았다. 단지 그 소리가 잦아들어 평정을 되찾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울부짖음의 본질은 그 동물 자신이 왜 울부짖고 있는지 스스로 알지 못한다는 점에 있다. 울부짖음의 코믹함이란 바로 울부짖음 자체가 울부짖게 한다는 사실이다. 그 울부짖는 이유를 스스로 알게 될 때, 울부짖음은 멈춘다. 그것을 알게 될 때까지 울부짖음은 계속되거나, 아니면 몽둥이나 어떤 두려움 때문에, 혹은 대부분은 스스로 열기가 빠져 사그러들 뿐이다. 사그러들고 나면, 마치 발광을 하다가 꽁무니를 빼는 똥개나 이유도 없이 갑자기 울음을 뚝 그쳐버린 어린아이처럼, 머쓱한 표정으로 갈길을 가는 것이다. 울부짖음을 들으며 내가 혼란스러워지거나 정념에 사로잡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설사 그것이 나를 향한 것이라 할지라도, 울부짖음에 화가 나지는 않는다. 단지 성가시거나 당혹스러울 뿐이다. 고통이 있다면 어떤 크고 작은 상실감 이랄까? 그러니까 마치 길을 가다가 우연히 사고를 당해서 내 물리적 몸의 한 부분을 잃었다든가, 물건을 잃어버렸다든가, 하던 일을 방해를 받았다든가 하여, 돌이킬 수도 후회할 수도 없이 벌어진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아무 소용이 없는 종류의 상실감. 혹은 본의 아니게 어떤 고약한 소동에 휩쓸리고 난 후의 당혹감.
울부짖음을 듣고 있자니 잠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나가다가 난데없이, 혹은 내가 어쩌다가 본의 아니게 개를 자극하게 되어, 개가 달려들어 나를 물었다고 가정해보자. 충동을 누를 수 있는 이성의 힘이 우세한 사람이라면 말을 하거나 달랠 수 있겠지만, 개에게 그런 것을 기대할 수는 없다. 개의 충동은 오로지 몽둥이 외에는 막을 도리가 없다. 하지만 몽둥이가 주변에 없다면, 혹은 몽둥이를 집어들 겨를도 없이, 막무가내로 달려든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살기 위해 나 역시 개가 되어 악착같이 물어뜯고 싸워야 할까? 아니면, 힘이 닿는 한에서 적당히 피하고, 적당히 물리치고, 적당히 대응하면서 최대한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지켜야 할까? 아니면 개의 충동이 누그러질 때까지 이를 악물고 참아내야 할까?
분절 없는 정념에 사로잡힌 울부짖음은 어떤 덩어리처럼 나오기는 하지만, 항상 비틀려 있고, 가운데가 뚝뚝 잘려져 나가 있으며, 파편들이 나뒹굴고, 하나의 울부짖음이 다른 울부짖음으로 파고들어, 분절의 모든 가능성들을 차단해버리고, 중간과 중간을 뚝 잘라 부스러기들로 만들어 버린다. 정념과 충동은 모든 자연을 부스러기와 파편들로 향하게 하고, 또 모든 자연을 조각 내고, 그렇게 잘려져 나간 부분대상들에 모든 총력을 기울여 그 대상을 숭배한다. 그래서 분노는 맥주병이 되고, 원한은 칼날이 되고, 슬픔과 억울은 고층빌딩의 난간이 된다. 이것이 바로 충동이 이들을 소통하지 못하게 하는, 단지 직접적 가해, 공격, 상처들만 나뒹굴게 하는 이유이다.
생명에 위협이 느껴진다면 아마도 나 역시 본능적으로 악착같이 물어뜯게 될 것이다. 이 위협과 공포에 대한 본능적 반응 때문에, 화와 충동에는 항상 약자의 가련함이 있다. 저 동물들의 울부짖음 역시 어떤 공포와 고통의 산물이 아니겠는가?(그러나 궁금한 것은 도대체 무엇이 그렇게 공포스럽고 고통스러웠던 것일까? 모든 자연적 공포가 말살된 이 대도시에서!) 결국 생명에 위협이 되지 않을 때, 정념에 사로잡힌 혼란에 뒤섞이지 않으려면 숨을 죽이고 가만히 있는 수 밖에 없다. 소란은 반드시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릴 것이다. 정념의 혼란은 지속적이지도,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도, 무게도 없다. 그것은 한 순간의 끓어오르는 수증기의 부글거림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결국 남는 것은 속을 비우고 난 공허감, 과거 오래 동안 삭힌 냄새를 풍기며 몸 밖으로 빠져나와 버린 질척한 국물, 충동의 소란이 휘젓고 간 후 잘려져 나간 부스러기와 파편들 뿐이다. 그래서 그들의 소리가 아무리 애처로워 보이고, 당장에 임박한 문제가 그들의 고통을 누그러트리는 문제라고 해도, 결코 그들과는 뒤섞일 수도, 뒤섞여서도 안 되는 것이다. 서둘러 도망을 가야 한다.
대중 미디어는 거의 매일 소셜네트워크니 사이버스페이스니 해가며 인터넷을 통한 사람들의 접속관계에 대한 보도로 울부짖는다. 미국에서 온 트위터, 페이스북, . . .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그 양상, 파급력, 기능, 효율을 과장해가며 소셜미디어 네트워크의 열광을 창조해낸다. 이 과장으로 공허한 미래-현대인이 창조된다. 소셜네트워크라고 하는 열광적 공허의 접속양태가 창출하게 될 많은 것들 중에, 그 중엔 물론 긍정적인 것도 있을 것이고 부정적인 것도 있겠지만, 최후의 승자는 무엇일까? 바로 접속단말기(또는 그 생산자)가 아닐까? 그리고 그에 부수적으로 기생하는 자질구레한 업자들. 화려하게 치장한 무대위의 모든 무희들이 최종적으로 지시하는, 이 과장의 한 가운데에서, 울부짖는 보도들의 스크립트와 동영상 속에서 어떤 식으로든 (우연을 각색하면서까지) 빠지지 않고 항상 등장하는 매체. 스마트폰 혹은 무슨 무슨 "탭", 무슨 무슨 "패드"로 불리는 미학적 기기들. 일찌기 산업을 토대로 성장했던 영화 제도와 마찬가지로(위대한 고다르가 <경멸Le Mepris>에서 그 역학을 잘 보여주었듯이), 앞으로 언론사의 기사와 보도에는 반드시 글을 쓴 해당 기자의 이름 뿐만 아니라 보도의 후원자(스폰서)--연예인을 뒤에서 놀아가며 보호해주는 사람도 스폰서라고 부른다--가 누구인지도 기록해야 한다는 조항을 입법화 했으면 좋겠다. 보도의 주체를 그 막연한 객관주의적 얼버무림으로부터 떼어내기 위해서.
스폰서: 화대를 대주는 쪽.
스폰시: 화대를 받으며, 스폰서에게 다른 가치를 주는 쪽. 쾌락을 주거나 선전을 해주는 쪽.
영화 <아이들>은 "팩트(fact)는 환상일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을 밑바닥에 품고 있다. 왜냐하면 팩트의 본질은 모호성에 있기 때문이다. 가령, 시체 옆에 칼을 든 남자가 서 있다. 그는 죽이기 위해 칼을 찌른 후인가? 아니면 살리기 위해 찔려 있는 칼을 뺀 것인가? 이렇게 해서, 팩트는 기억이라느니, 필요라느니, 아니면 "욕망을 반영한다"는 식의 인식론적 존재론의 오래된 화두들이 등장한다. "이것이 사실이다!"는 진술은 보고나 기술이 아니라 표현이라는 것이다. 내 경험에도, 사람들은 보고싶은 것만 보고, 말하고 싶은 것만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보는 방식, 말하는 방식은 바로 그 사람이 사물에 더 가까운 사람인지, 신에 더 가까운 사람인지를 말해주는 것이다.
모든 팩트의 실상에 도달하기 위해, 혹은 쉽게 말해 칼을 든 저 남자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다름 아닌 "시간"이다. 이것이 바로 전후 유럽의 네오리얼리즘과 누벨바그 등의 현대적 영화감독들이 그토록 고민했던 "베리떼(verite)"의 최종 종착지가 시간인 이유이다. 따라서 시간을 제거할수록 베리떼는 물건너 간다. 그리고 그 균열 사이에서 폭력이라고 하는 듣기도 싫은 단어가 탄생한다.
영화 <아이들>에서는 살인보다도 더 끔찍하고 소름끼치는 폭력이 등장한다: 속단!
여기서는 속단의 두 가지 형태 혹은 동기가 제시되고 있다. 하나는 믿음에서 비롯되는 끼워맞추기식 속단이 그것이고(교수가 대변하는). 다른 하나는 필요(욕망)에서 비롯되는 선택식 속단(PD가 대변하는)이 그것이다. 믿음이든 필요이든, 아니면 그 어떤 다른 정념이든, 이들은 실상을 보려는 욕망이 아니라, 보고싶고, 봐야만 하는 것을 욕망한다. 모호성의 근원적 환경인 리얼리티의 다양성은 "상식"이라는 무시무시한 무지 아래, "확신"이라는 저열한 의기양양 아래 무식하기 그지없이 왜곡된다. 영화의 나중에 가서(실상은 항상 나중에 나온다) 밝혀지게 되는 그 전화통화, 즉 아들로 추정되는 목소리와 어머니의 전화통화에서 보듯이, 실상은 항상 비상식적인데도 말이다.
어쩌면 지식인에게 필요한 것은 용기나 정의감이 아니라, 유보시키는 힘, 햄릿과도 같은 우유부단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햄릿의 고뇌를 흔히 우주론적이라고 말하지만, 내가 보기엔 가장 현실적인 것으로 보인다. 살인이나 학살과 같은 명시적 폭력보다도, 우리는 실제로 비명시적 폭력을 일삼는 괴물들에 더 자주 더 깊숙히 더 지속적으로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스캇 펙(M. Scott Peck) 이라는 미국의 정신과 의사이면서 기독교 관련 작가가 있다. 비록 기독교적 관점에서 영성(spirituality)과 믿음에 관한 글을 쓰고는 있지만, 비교적 포용력을 발휘하고자 노력은 하는 것 같다. 그는 과학과 종교의 내밀한 관계성을 언급하는 칼 융(Carl Jung)이나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의 현대적 반복이라고 스스로를 정의하기도 한다. 또 기독교 뿐만 아니라 불교(특히 선불교)와 다른 여타 종교들에 관해서도 비교적 열려고 노력은 한다. 뉴에이지(New Age) 경향도 있다. 그래서인지 미국에서는 상당한 독자가 있고, 당연히 한국에서도 꽤 많은 독자가 생긴 것으로 알고 있다. 최근에 의뢰를 받아 그의 책 한 권에 관하여 번역 감수를 하고 있는데, 여기 저기를 읽다가 흥미로운 대목이 있어 소개하려고 한다. 지옥에 관한 그의 얘기이다. 이 구절에서 스캇 펙은 판타지 소설가 루이스(C. S. Lewis)의 소설인 <천국과 지옥의 이혼>(The Great Divorce)이라는 작품을 소개하면서 지옥에 관해서 언급한다. 소설 속의 인물들은 어찌어찌 하여 천국에 갔는데 천국을 체험하고 나서 거의 모두가 자기들이 살던 곳(지옥으로 묘사된)으로 다시 되돌아 가기로 결정한다. 천국에 갔던 사람들이 어째서 다시 지옥으로 되돌아가려고 마음먹은 것일까?
[. . .] 그의 소설 《천국과 지옥의 이혼 The Great Divorce》은 지옥(루이스는 지옥을 비참하고 우울한 영국의 중부 도시로 묘사하고 있다)에 있던 사람들이 가까스로 천국행 버스를 타게 된 과정을 다룬 이야기다. 천국은 아주 밝고 유쾌하고 즐거운 곳이다. 이 사람들은 친구들과 친지들로부터 엄청난 환대와 온정을 받는다. 그러던 마지막 날, 이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을 제외하고 다시 버스에 올라탄다. 그 한 사람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하지가 않다. 이 한 사람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다시 지옥으로 가기로 결정한다!
이유가 뭘까? 루이스는 여러 예를 들었다. 무례를 무릅쓰고 과감하게 사례들을 요약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겪은 전형적인 사건을 인용해 보겠다.
버스에 있던 사람들 가운데 조카에게 환대를 받았던 한 사람을 예로 들어보자. 이 남자는 천국에서 조카를 만나게 되어 깜짝 놀란다. 왜냐하면 이 젊은이는 도무지 천국에 있기에 가당치도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조카는 아주 반기는 모습이었고 천국은 밝고 유쾌한 곳이다. 그 남자는 이렇게 말한다. “여긴 아주 훌륭한 것 같고 나는 여기 머물고 싶구나. 너도 알다시피 난 콜럼비아 대학 역사학 교수였잖니. 여기도 대학이 있니?”
조카는 대답한다. “그럼요, 삼촌.”
“그럼 난 종신 재직권을 얻을 수 있겠구나.”
“당연히 그러실 거예요. 천국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종신 재직권을 가지거든요.”
삼촌은 깜짝 놀란다. “아니, 어떻게 모든 사람들이 종신 재직권을 얻을 수 있단 말이냐? 적임자와 비적임자를 구분해야 되지 않겠니?”
조카는 이렇게 말한다. “여기선 모든 사람들이 적임자랍니다. 삼촌.”
삼촌은 더 이상 함께 앉아있기도 싫었지만, 계속해서 조카에게 질문을 한다. “너도 알겠지만, 나는 학장이었다. 여기서도 학장이 될 수 있겠지.”
“유감스럽지만, 여기엔 학장이란 건 없어요. 그런 식으로 일을 처리하지 않아요.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 책임이 있고 그래서 의견을 모아 일을 하기 때문에 학장이란 직책은 필요하지 않아요.”
그때 바로 삼촌이 침을 튀겨가며 툴툴거린다. “적임자와 쓰레기를 구분하지도 않는 이런 설익은 조직에 내가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야.” 그러고는 이 남자는 버스에 올라타 지옥으로 돌아가 버린다.
지옥에 대한 나의 견해는 확실히 루이스와 같다. 지옥문은 넓게 열려 있다. 사람들은 지옥에서 곧바로 걸어나올 수 있다. 이들이 지옥에 있는 이유는 나오지 않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 . .] 희망도 갖지 못하도록 사람들을 벌주고 부활의 기회도 없이 영혼을 파괴하는 곳이 지옥이라는 견해를 나는 받아들일 수 없다. 끓는 기름에 사람들을 튀겨버릴 심사였다면 신은 일부러 그토록 복잡하게 영혼을 창조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Morgan Scott Peck, Further Along the Road Less Traveled, New York, 1998. pp. 170-171.)
근접학 또는 근접공학(proxemics)이라는 분야가 있다. 인간들이 의미를 전달하고, 감정을 느끼고, 의사소통을 하는데 있어 공간이 차지하는 영향 관계를 연구하는 분과이다. 커뮤티케이션을 연구하는 쪽에서 언급되는 이론인데, Edward Hall이라고 하는 문화인류학자는 자신의 저서 The Hidden Dimension에서 인간의 소통관계에 따른 거리영역에 대해 흥미로운 구분을 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실험이 있는데, 규모가 서로 다른 공간(상자) 속에 같은 숫자의 쥐를 각각 수용한 뒤에 행동을 관찰했더니, 좁은 공간의 쥐들이 넓은 공간의 쥐들보다 성향이 포악해졌다는 것이다--심지어는 서로 물어뜯고, 죽이고, 증오하고 그랬다 한다. 자기를 보존(?)하기 위해서인지, 가까운 곳에 다른 쥐들이 있을 경우, 공간압력을 받아 위협감을 느꼈다는 것이다. 참 역설적이다. 아마도 도시인들이 시골사람들에 비해 사납고, 포악하고, 적개심이 더 강한 이유도 바로 저와 같은 환경 속에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비좁은 공간, 가려진 하늘, 밀집된 주거공간, 인간을 위해서가 아니라 산업을 위해 구획된 도시공간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포악해지지 않고 살 수 있겠는가?
그런데 한가지 궁금해진다. 왜 그 실험쥐들은 공간압력에 쉽게 순응해서 자기들을 파괴적인 상태까지 몰고갔을까? 공간이 바뀌어 비좁아 졌다면, 자신들의 습성과 관계를 바꾸면 되지 않았을까? 근접공학에서 말하듯이, 공간 구역에 따라 친밀도와 소통의 형태가 달라진다면, 그래서 Social Zone이나 Public Zone이 어떤 우여곡절 끝에 Intimate Zone으로 바뀌었다면, 자기네들의 습성과 관계도 변하면 되지 않을까? 대도시에 사는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대도시에서 포악하고 사납고, 항상 무엇인가에, 타인에게, 화가난 상태에서 살 것이 아니라, 습성과 관계를 바꾸어 버리는 것이다. 우체부와 주인, 상점 점원과 손님, 청중과 연사의 관계가 아니라, 연인이 된다든가, 부부가 된다든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대도시가 사람들을 밀집된 공간으로 내몰고, 그래서 지하철이라든가, 버스라든가, 공원이라든가, 극장이라든가, . . 인간이 사는 모든 영역들이 점점 좁아져서, 타인을 아무리 거부하려고 해도 거부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왔다면, 자기도 모르게 환경에 순응해서 포악해지고 사나워지고 싸울 것이 아니라, 차라리 Intimate Distance Zone에 맞추어 부부가 되고 연인이 되고 친구가 되는 것이다. 만원 지하철에서는 영순씨와 부부가 되어 포옹을 하고, 그 옆에 앉은 영철씨와 의형제를 맺고, 뚱뚱해서 서있기 힘든 광순씨의 애인이 되어 등을 껴안아주고, 공원에서는 철수씨, 용필씨, 순이씨와 자리 문제로 혹은 주차문제로 싸울 것이 아니라 연인이 되어 다함께 잔디밭에서 나체로 뒹굴고, 극장에서는 왼쪽에 앉은 인철씨와 손을 잡고, 오른쪽에 앉은 선희씨와 서로 사타구니를 쓰다듬고, 머리가 커서 앞을 가리는 상철씨와 불알친구를 맺는 것이다. 만인에 의한 만인의 연인! 어려울게 뭐가 있겠는가? 모든 사람들이 부부가 되고, 애인이 되는 것이다. 저 상자속의 어리석은 실험쥐들보다 얼마나 영특하고 합리적이고 깔끔한 생각인가? 위기를 기회로 전환해서, 도시를 냉소의 공간이 아니라 쾌락의 공간으로 바꾸자! 물론 그러려면, 많은 사람들과 절대로 사랑을 못하게 가로막고 있는 현행 결혼제도라든가, 가정법, 민법과 같이 법과 제도부터 바꿔야겠지만 말이다. 그럴 자신 없으면 공간 환경을 바꾸든가!
속물의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면, 그것은 부지런하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속물은 일찍 일어나고, 일찍자고, 맡은바를 게을리하지 않으며, 뚜렷한 목표의식으로 일상을 채운다. 속물의 행동강령은 부지런이다. 방탕하거나, 게으르거나, 자신의 의무에 의구심이 강한 사람은 속물이 되기 어렵다. 한 사회에서 좋은 직업군이나 상위계층에 속하는 사람들의 거의 대부분이 속물로 채워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들의 행동강령 속에 녹아들어 있는 뚜렷한 목표가 바로 그들이 현재 처해있는 사회적 위상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속물의 가장 최악의 덕목 또한 이 부지런에 있다. 속물은 마주보고 서있는 앞사람 그리고 함께 앉아있는 옆사람에게 자신과 마찬가지의 목표의식과 부지런을 강요한다. 자신만이 힘들게 사는 것 같아 억울해서인지, 아니면 그러고 사는 것이 너무도 좋아 전도를 하고 싶어서인지, 아니면 열등한 영혼을 공유해서 분산시키고 싶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사실은 배가하지만), 어쨌든 부지런한 그들은 부지런을 강요한다. 헉슬리(Aldous Leonard Huxley)가 말했듯이, 속물근성은 "행동을 자극해서 바쁘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래서 속물근성으로 가득찬 사회는 "마치 벼룩이 잔뜩 묻은 개처럼" XX 발광을 한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인류 역사상 모든 진정한 예술가들(헉슬리에 따르면, 예술속물 혹은 문화속물도 있으므로)의 개인사는 속물과의 투쟁사, 아니 희생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William Thackeray가 편집했던 잡지 <펀치>(Punch)의 1892년 어느 날 삽화에는 뿌리깊은 '상처'를 안고 '열등감'으로 살 수밖에 없는 속물의 내적본질을 잘 담은 한 대화가 수록되어 있다. 삽화에서 한 신흥부르주아 여인은 딸에게 이렇게 가르친다. "우리와 사귀고 싶어 환장한 사람들은 우리가 사귈만한 사람들이 아니란다. 우리가 사귀어야 할 사람들은 오로지 우리와 사귀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 뿐이란다!"
내가 주로 생활하고 있는 건물의 엘리베이터는 두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
하나는 사방의 벽이 거울의 기능을 한다는 사실이다. 아주 잠깐이긴 하지만, 엘리베이터 1평 남짓의 좁은 공간에서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함께 있다고 생각해보라. 낯설고, 멋적고, 어색하기 짝이 없다. 더욱이 이 엘리베이터의 벽은 사방을 반사하기 때문에, 어디에 시선을 두어도 서로를 바라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정면을 보면 그 사람의 정면이 보이고, 측면을 보면 그 사람의 측면이 보이고, 또 모서리 어느 부분을 보면 그의 뒤통수가 보이기도 한다. 내가 볼 수 있는 만큼 나 역시 타인의 눈을 통해 보이게 된다. 이 타인의 지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사람들은 시선을 피해 이러 저리 눈을 돌려보지만, 결코 빠져나갈 수 없는 상대의 시선과 내 시선의 교차로 위에서 헤맬 뿐이다. 어린 학생들 중에는 이 강요스러운 상황에 어쩔줄을 몰라 노골적으로 심경을 드러내기도 한다. 문 앞에 바짝붙어 있다든가, 애써 다른 사람을 무시하려 한다든가, 건방지게 딴청을 피운다든가, 핸드폰을 꺼내 구조의 전화를 걸려 한다든가, 여학생과 함께 단 둘이 갇히는 경우엔 아주 고역이다. . . 어쩌면 이 고약한 환경은 설계자의 계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시선을 회피해가며 서로를 지옥처럼 여기는 사람들에게 교정의 환경을 제공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굳이 일부러 우리의 상황을 의식적으로 확인할 필요가 있을까? 오히려 강요된 환경이 우리를 지옥으로 만들었던 것은 아닐까? 설계자가 그런 의도였다면, 소외를 잘못 해석한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엘리베이터 앞에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으면, 다른 문이 열리려면 한 참을 기다려야 하는데도 서로를 피해 다른 문 앞에 서거나, 아예 뒤로 돌아가 계단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다른 하나는 엘리베이터 문을 여닫는 버튼이다. 이것은 설계자가 아니라 학교 당국, 즉 엘리베이터 운영자와 관련이 있다. 문을 여는 버튼은 정상으로 작동하는 반면, 문을 닫는 버튼은 그 기능이 정지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무리 버튼을 눌러도 문은 닫히지 않는다. 해당 층에서 문이 열리고 나면 미리 기계에 프로그램되어 있는 몇 분이 지나서야 문이 닫힌다. 이 닫힘 기능의 정지는 대단히 불편하다. 목적층이 되어 사람이 나간 후에도 남아있는 사람들은 기계의 작동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약 1분 정도의 시간이 아주 길게 느껴진다. 더군다나 급한 경우엔 더더욱 조바심이 난다. 건물의 사정을 잘 모르는 외부인들은 문이 닫힐 때까지 버튼을 줄창 누른다. 재밌는 것은 기능이 정지되어 작동이 안 되는 닫힘 버튼이 다른 건물의 엘리베이터에 있는 버튼보다도 더 낡아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무엇에 긁힌 자국도 있다. 서울 사람들이 얼마나 급한 성격의 소유자들인지(심지어 학생조차) 알만하다. 그러나 엘리베이터 당국의 이 조처는 나름대로 합리적 고민의 결과로 보인다. 문을 빨리 닫아버리면 여러가지 심리적 경제적 문제가 생긴다. 사람이 나가자 마자 문을 획 닫아버리면 나온 사람은 아주 불쾌해진다. 거부당한 느낌 같은 것을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받았을 때, 크지는 않지만 작은 스트레스가 개인을 갉아먹는다. 쨉도 여러 번 맞으면 한 방보다 크다. 그러나 당국이 이렇게 세심하게 개인의 불쾌까지 고려해서 이런 조처를 내린 것은 아닐테고, 다른 분명한 이유는, 문을 보다 오래 열어두면, 보다 많은 사람들이 탈 수 있기 때문에, 전기세 등 경제적 효율성이 올라가기 때문일 것이다. 이를 생각해서, 사람들은 불편하지만 그다지 문제삼지 않는 분위기이다. 더우기 이제는 익숙해졌기 때문에, 층에서 누가 나가도 서둘러 문을 닫거나, 문이 닫히기를 안달하지 않는다. 활짝 열린 엘리베이터 문 밖을 바라보며 그냥 잠시 동안 멍하니 서 있을 뿐이다.
그것이 익숙해지다보니 이제는 어떤 점에서는 잘 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단 1분 간의 시간이지만, 그 작은 틈 속에서, 막연하지만 인생의 뜻 깊은 어떤 순간을 갑자기 경험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일어날 때가 간혹 있기 때문이다. 막연하지만 말이다.
p.s. 법의 세계는 이러한 막연한 희망조차 불허하는 것일까? 최근에 알게된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있는데, 법원인지 검찰청인지를 들어가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도록 현관문을 거대한 철제 구조물로 조성한 법대 건물의 엘리베이터에는 이 닫힘 버튼을 정지시켜 놓지 않았다. 따라서 이 건물 안에서는 마음대로 엘리베이터의 문을 열고 닫을 수가 있다.
문학이나 영화 등 예술작품은 두 번 이상 보아야 한다고 흔히들 말한다. 우리의 물리적 생리적 윤리적 한계 때문에, 첫 눈에는 놓치는 것이 너무 많아 전체를 다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번 세 번 이상을 보아야 보다 많은 이미지를 읽을 수가 있고, 또 그러면서 우리는 그 작품들의 새로운 의미들에 눈을 뜨게 된다. 실제로 두 번 이상 보면 그 작품이 새로워진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홍상수의 작품들은 두 번 세 번 네 번 이상을 보아도 새로움이 일어나는 것 같지가 않다. 처음 보았을 때와 두 번 이상을 보았을 때 의미에서나 심경에서나 큰 변화가 없는 것이다. 특별한 의미가 새롭게 태어나는 것도 아니고, 작가의 의도가 다시 보이는 것도 아니고, 놓쳤던 장면조차 다시 보이는 경우가 흔하지 않다. 그의 작품이 어려워서? 즉 감추어진 것이 많아 아직 뭔가가 나오지 않은 것일까? 아니면 반대로, 너무나 쉽고 뻔해서 첫 눈에 이미 다 드러난 것일까? 전자일 수도 있고, 후자일 수도 있다. 둘 모두일지도 모른다.
그의 작품이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단조로운 사건들로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작품 안에 두고 두고 읽어야 할 어떤 의미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가 제시하는 남녀들의 무의식적 의식적 욕망과 충동들이 동일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 형태도 다르고 질도 전혀 다르다. 가령, <강원도의 힘>에서 상권이 여행중에 보여주었던 충동들은 <생활의 발견>에서의 영수의 그것과는 본성적으로 다르다. 또 여인들의 사랑과 분노 그리고 배신 역시 각각의 인물들이 모두 본성적으로 다르다. 그러나 그러한 차이들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들 안에는 자연적 질서의 반복이라는 거대한 자연주의적 주제가 암암리에 내포되어 있기 때문에(가령, 셰익스피어의 소란을 닮은 <해변의 여인>에서의 한 밤의 소란이 해변 밖으로 한꺼번에 쓸려나가 고요해진 아침에 고현정 분이 난간 계단에 앉아 사색에 잠겼다가, 다시 서울로 돌아가기 위해 차에 오르는 놀라운 장면, 또 대부분의 작품에서 인물들이 되돌아가는 장면 등), 그 차이들은 어느새 거대한 파도 속에서 중화되고 단일화 된다. 격동의 시간들은 인간이 아무리 의미의 겹을 쌓으려 해도 결국은 단조롭고 진부한 행동의 아상블라주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아무리 제 각각 날고 기어봐야 멀리서 보면 모두가 언덕을 구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선(禪)의 요소가 지배적이고 또 선을 추구했던 오즈 야스지로(Ozu Yasujiro)의 세계처럼, 홍상수의 화면에는 주름이 없다. 심지어는 주름과 의미를 만들지 않고 지우는 것이 그의 목적이 아닐까 싶을 정도이다. 여러 번을 보아도 새로운 의미가 나올 것 같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오히려 주름이 너무나 거대해서, 마치 지구의 자전 소음을 우리가 들을 수 없듯이 혹은 태산의 느리지만 강렬한 변화를 우리가 알아차릴 수 없듯이, 주름을 식역 저편에서만 어렴풋이 경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산자락에 끼어 있는 화가가 어떻게 산의 거대한 피마준(披麻皴)을 구사하겠는가?
그런데 최근에 홍상수는 자신의 영화에 영화 감독을 직업으로 삼은 인물을 등장시켜, 자유간접화법 형식으로, 마치 자신의 예술관을 변명하고 옹호하는 듯한 제스쳐를 취한다. 일부 비평가들을 의식해서인지, 자신의 자발적 불만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는 자신의 세계에 스스로 회의감을 품었거나, 아니면 회의적 비전을 의식했거나, 최소한 그것을 사색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의 작품들 속에 등장하는 많은 감독(김상경, 김승우, 이선균 등이 맡았던)들이 영화의 의미(목적, 기능 등)에 대해 말했던 내용이 어떤 일관성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그리고 이 일관성은 최근에 개봉한 <옥희의 영화>의 이선균 분이 시사회에서 술김에 잠깐 진담으로 내뱉은, 아주 모호하고도 혼란스러운 그 "깔때기 이론"에서 다소 분명해지고 있는 것 같다. 그 논조는 물론 예술적 편협, 왜곡, 기만 등에 관한 비판을 담고 있다. 그가 일관되게 구사하는 특유한 화면의 질이나 편집의 양태 또한 이러한 논조를 정당화 한다. 그러나 점점 그의 작품들이 전개되어가는 가운데, 한 가지 의아스러운 것은, 위에서 말한 홍상수의 두 세계(개인적 욕망과 충동의 세계와 반복의 세계)의 역학과는 판이하게도, 이 감독들(홍상수 자신일 수도 있는)은 모든 예술적 시도와 창조조차 편협이나 왜곡으로 혼동하거나 그 둘을 동일시하여, 결국은 아이러니하게도 편협과 왜곡을 피하려는 자신들의 노력이 자기도 모르게 영화를 지리멸렬한 몸짓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하고", "만들어 놓는" 것은 아닌가 싶은 것이다. 투명해지고 단순해지려는 시도가 어쩐지 무의미와 공허를 창조하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한편 반대의 측면에서 생각해 보면, 이들의 생각은 영화를 세계와 혹은 사물 자체와 혼동하는 것은 아닌지, 심지어는 영화를 진리나 실체와 혼동하는 것은 아닌지, 결국 영화에 대한 무의식적 과대평가로 인해, 영화와 현실의 혼동에 이르게 되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영화가 현실과 동일한 그 무엇, 혹은 동일한 밀도의 그 무엇이어야 한다면, 무엇 때문에 그 비좁은 프레임과 필름 공간 속에 현실을 담아야 할까?
자신도 모르게 어떤 세계가 우연적으로 그려진 것이 아니라, 그 세계를 의식하고, 일관되게 체계적으로 그 세계를 창조하는 사람을 우리는 거장이라고 부른다. 아직은, 아니 아직도 어렴풋이 보이는 그의 거대한 세계가 자신도 모르게 해댄 어떤 우연한 몸짓이 아니라 의식적 고뇌에서 나오는 것이기를 기대해본다.
오늘, 아니 어제, 그러니까 토요일에, 옛날에 알고 지내던 사람들을 만났다. 점심만 먹고 일찍 나오려고 했는데, 예상했던 것과 달리 저녁에 시간이 좀 남았고, 특히 보고 싶었던 반가운 얼굴이 있어, 저녁 내내 수다를 떨었다.
안 만나던 옛날 사람들을 다시 만나는 것은 상반된 감정이 교차한다. 다시 잘 지낼 수 있을까? 라는 관계에 대한 의구심 혹은 바램, 그리고 다른 한 편엔 불안. 서로에게 익숙해 있고, 서로의 주름 속에 숨어있는 것들을 이미 여러번 보아왔기 때문이다. 결국 바램은 상투적인 반복으로 치닫기 일쑤이다. 이 두 가지 반대되는 감정들이 수다를 떠는 내내 서로를 가르고 있는 테이블 위에서 긴장한다.
그러다가 전혀 새로운 이완상태로 가는 대화를 하기도 한다. 가령, 이런 것이다. 요즘 실버타운에 입주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실버타운에 입주하려면, 보통 보증금 7억에 월 200만원. 그 이상이 훨씬 넘는 곳도 있다고 한다. 그곳에 들어가면, 비슷한 노인들끼리 잘 짜인 프로그램과 복지서비스로 여생을 보낸다. 말하자면 천국의 이미지를 돈으로 현실화시킨 곳이다. 물론 저 만큼의 돈을 내야 가능한 얘기다.
뭐 어쨌든 그렇다 치자. 그런데 문제는 이 노인들이 이곳에서 행복하지가 않다는 것이다. 안 보아도 알 수 있을 그 뻑쩍지근한 천국에서 말이다. 그래서 실버타운에 입주한 노인들이 자식의 집에 가끔씩 들렀다가, 갈때가 되면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고집을 부리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가족과 떨어져 남들과 어울리는 것은 젊을 때나 가능한 일인가보다. 나이가 들면 따뜻한 정을 느끼며 살아야 하는데, 남들끼리는 그러기가 쉽지가 않다. 가령, 그들은 서로 마주보고 앉아 누구 자식이 무슨 직업이고, 돈을 얼마나 벌고, 부모에게 몇 번 찾아와 주고,.. 서로 지지 않고 주눅들지 않기 위해 힘자랑, 돈자랑, 자식자랑, 가문자랑, . . . 뭐 이런 얘기들을 하고 있다고. 그래서 자식에게 오면, 그곳에서 알고 지내던 사람들의 흉을 보고 분개하면서, 다시 그 지옥으로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10년이나 더 살지 말지가 코앞의 걱정인 사람들이 사력을 다해 추구하고 있는 삶과 대화의 주제들이 저러한 것이라면, 이들이 살았던 삶과 철학(?) 그리고 그 자식들의 삶이 선연해진다. 보증금은 그렇다치고, 매달 수백만원을 낼 수 있는 노년의 재력가가 되기 위해 살았을 인생 전체, 그리고 틀림없이 자신과 비슷한 삶을 가르쳤을, 불쌍하지 않지도 않고 불쌍하지도 않은, 그 자식새끼들의 삶 전체 말이다.
질투의 경우 보다 실질적인 횡단(transgression)이 일어난다. 질투란 연인으로부터 발견한 많은 영혼과 풍경에서 나의 부재를 각성하거나 망상하면서 생기는 감정이다. 그것은 사랑하는 애인에 의해 발산된 징후에 의해 펼쳐지는 세계가 나와는 전혀 무관한 어떤 실재임에 대한 통찰이다. 내 눈에 보이는 애인의 모든 말과 몸짓은 매순간이 배신이며 거짓이며 이별의 선언이다. 그러나 나를 배신하는 그 풍경들로 인해 나는 더욱 더 애인에 대한 열망과 사랑에 이끌린다. 질투에 빠진 나는 애인이 생각하고 느끼고 바라보고 경험하는 모든 있을 법한 행위와 상황들을 밝히기 위해 고통스런 해석을 쉼 없이 감행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랑이 언제나 좌절로 귀결되는 것은 필연적인 과정이다. 해석 행위가 깊어질수록 나는 애인의 세계로부터 배제되고,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 중 하나의 대상에 불과한 존재가 될 뿐이다. 질투하는 여성이나 남성은 연인의 조각난 영혼들과 부스러기의 세계 속으로 끊임없이 파고들어야 할 운명에 처한다. 그 세계는 내가 결코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이며, 거짓말과 배신으로 베일이 가려져 애인의 표정이나 말의 진실을 감추고 있는 암흑의 세계이다. 바로 이 세계와의 대면 속에서 횡단이 일어난다. 애인이 내뱉는 단어 한마디는 그녀의 동성애 상대와의 대화를 암시하기도 하고, 슬쩍 엿본 그녀의 곁눈질 속에는 다른 남성에 대한 타오르는 욕망이 있으며, 내게 보내는 미소와 호의조차도 하나의 거짓된 음모로 꾸며지며, 감추고 있는 표정들 하나하나가 천근만근의 비수가 되어 가슴에 꽂힌다. 그것은 “연적戀敵을 발견하는 것보다도 더 잔인한 부분 대상들”을 발견하면서 겪어야할 절망적인 전투이다.(Deleuze, Proust and Signs, 139~141)
<들뢰즈의 잠재론: 소멸과 창조의 형이상학>중에서 pp. 372-373에서 발췌
뜨겁고 축축했던 올 여름 날씨처럼, 8월 들어(특히 지난 주와 이번 주) 유난히 내 일상과 주변이 끈적거리고 지겹다는 느낌이 들었다. 말끔히 건조시켜 잊어버리기 위해 광릉수목원을 다녀왔다. 처음부터 계획했던 것은 아니었고, 친구 H와 점심식사 메뉴를 토론하다가 갑자기 내린 결정이었다. 광릉 근처에 유명한 불고기 집이 있다며 H가 부추겼고, 나는, 고작 불고기 때문에 그 멀리 가자고? 그렇게 해서 핑계거리를 급조한 것이 수목원이었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고, 한 번은 가보고 싶었던 것이 이유였다. 이곳은 1주에 단 하루만, 그것도 예약을 통해서만 입장을 허용한다. 서둘러 인터넷으로 입장 예약을 하고는 H의 차에 올라탔다.
구불구불 찾아가지 않고 주로 대로로 다녔기 때문에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초행길이었지만, 갈 때는 내가 운전을 했다. 광릉 지역의 숲에 이르자 국지성 호우가 쏟아져 시야를 가렸다. 숲길이 구불거려 스릴감이 있었다.
수목원 안에 나 있는 숲길과 호수가 차분했다. 비가 내려 습기를 머금은 숲이 여기저기서 안개를 뿜어댔다. 호수의 물안개는 신령스럽기까지 했다. 숲길을 걸을 땐 땀이 났지만, 잠시 앉아 냉커피를 마시는 동안 우람한 나무의 시원한 입김이 몸을 서늘하게 하는 것 같았다. 잠시 눈을 감고 깊은 숨을 내쉰다. 습한 대기에 실린 깊고도 은은한 숲의 냄새들이 뒤섞여 가슴 속으로 들어왔다. 잔잔한 호수, 노니는 물고기, 안개에 젖은 검은 산, 푸르고 푸른 나무와 숲, . . . 모두가 완벽한 하나의 정물(still life)처럼 보였다. 항상 똑같아 보이고 특별할 것 없이 진부해 보이지만, 자연은 인간에게 도시의 진부함이 줄 수 없는 보편적 해방감을 준다. 잠시만이라도 그 안에서 그들 곁에 있다 나오면, 우리는 어느새 그들처럼 무심해지고, 초연해지고, 혼란스러웠던 동요가 가지런해져,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감을 느낀다. 우리를 포함하고, 우리 안에 있는 이 자연으로부터 워스워즈(William Wordsworth)와 같은 몇 몇 낭만주의자들이 "가장 완벽하고도 순수한 이성의 이미지"를 보았던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앉아 잠시 동안 작은 토론을 벌였다. 나와 친구는 서로 반대의 성격이었다. 나는 항상 욕망에 차있고, 무엇인가를 하고 싶어하며, 먼 곳을 주시하는 쪽이었다. 나는 그것을 열정이라고 주장했지만, H는 결핍감이라고 진단했다. 반면 H는 감정의 기복이 심하지 않고, 큰 욕망에 이끌리는 일이 많지 않으며, 또 쉽게 자신의 욕망을 포기할 줄 알았다. 쉽게 쾌활해지는 법도, 그렇다고 쉽게 우울해지는 법도 없었다. 표정에 큰 변화가 없는 H는 미간을 구기며 먼 곳을 주시하기 보다는 평온한 모습으로 자신이 서 있는 바로 그곳을 생각하는 편이었다. 불규칙적인 나의 일상이 항상 "왜?"라는 질문으로 밤을 새우며 허우적거리는 동안, 규칙적이고도 무미건조해 보이는 H의 삶의 관건은 주로 "무얼 할까?"라든가 "어떻게 가야 할까?"에 있어 보였다. 광릉까지 가기 위해 수목원이라는 명분이 필요했던 나와는 달리, H는 불고기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어디든 갈 위인이었다.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고 해서 연연해하지도 않았다. 때로는 사람이 가벼워 보이기까지 했다. 부질없는 큰 욕망을 포기하면 현재의 작은 욕망들이 중요해진다며, 이렇게 부질없는 욕망을 중화하는 법은 유년기부터 터득한 것이라고 H는 자부했다. 나는 그것이 지혜의 결과가 아니라 좌절과 포기의 결과라고 말해주었다. 희망이 실현되지 못하는 일이 반복될 때(특히 유년기에), 우리는 절망감의 충격을 다시 맛보기가 두려워 욕망을 애초부터 피할 때가 있다. 결국 욕망의 중화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삶을 쾌락이라고 믿고 있는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내 말이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욕망을 중화하려는 시도 자체가 욕망이 너무 큰 것이 아니냐고 덧붙이면서. 그러나 H는 채울 수 없는 것을 다 채우지 못해 고통스러워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자신이 에피쿠로스(Epicurus)라도 된 것처럼 역설했다. 그것은 마치 메뉴에도 없는 음식을 주문하면서 식당 주인을 불러 불평하고 타박하거나 요식업소가 갖추어야 할 기본자세를 연설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베켓(Samuel Beckett)의 두 인물 블라디미르(Vladimir)와 에스트라공(Estragon)처럼, 우리는 다소 진부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욕망에 관한 기본적인 두 입장을 대변하는 듯한 포즈로 잠시 동안 서로 대립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 두 입장이 정말로 우리의 상태를 말해주고 있는지도 확신할 수가 없었다. 내가 정말로 블라디미르의 욕망을 대변하는지, H가 정말로 에스트라공의 욕망을 대변하는지, 심지어는 나와 H가 정말로 대립하는 캐릭터인지조차 명확히 말하기가 어렵지 않은가? 오히려 저러한 문학작품이나 철학이나 인류사를 통해 익히 알려진 욕망들을 H와 내가 역할연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토론은 중단되고, 우리는 빗방울이 퍼뜨리는 동심원으로 가득한 호수의 표면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폐간 시간(오후 6시)이 다 되어 수목원을 나와 바로 그 불고기 집으로 향했다. 멀지는 않았지만 지도를 보고 찾아야 했다. 찾기가 쉽지는 않았다. 지도가 정확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식당의 간판이 없었다! 식당을 지나쳐 한 참을 더 가서 막다른 길이 나오고 나서야 길을 잘못 들었음을 알았다. 다시 뒤돌아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를 더듬어 찾아야 했다. 결국 우리는 한참 동안 헤맨 끝에, 주변에 피어 오르는 연기와 고기 굽는 냄새의 진동으로 식당을 찾을 수가 있었다.
식당주인은 우리더러 1시간 반을 기다려야 한다고 의기양양하게 엄포를 놓았다. 더구나 식사도중에 추가로 주문이 안 되기 때문에, 미리 여유롭게 식사량을 주문하라고 권고했다. 손님이 너무 많아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잠시 망설였다. 한끼 식사를 하기 위해 1시간 반을 기다려야 한단 말인가? 이 허름하고 지저분한 재래식 고기 집에서의 한끼를 위해? 예약을 하려면 빨리 하라며 다음 손님을 부르는 주인 때문에, H는 일단 예약을 하고 보자고 서둘러 말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이대로 그냥 가기에는 아쉽다며. 식당 안에서는 변변히 앉아있을 곳도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쫓기다시피 예약을 한 후 밖으로 나왔다.
1시간 반을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며, 당연히 나는 불평을 했다. 식당주인을 비롯하여, 그 식당을 과장해서 홍보하는 풋내기 블로거들이 음식문화를 망치고 있다고.
흔히 맛집이라고 알려져 많은 사람들이 찾는 식당을 가보면, 대부분 식당주인의 오만방자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그들은 손님들의 사랑에 겨워 아무렇게나 해도 사랑이 지속될 것이라고 착각을 하고 있다. 저 고기집의 주인은 간판조차 붙이지 않고, 멀리에서 그곳을 찾는 손님들을 애먹이며 즐거워한다. 애먹는 동안 그 배고픔과 결핍감을 보상하기 위해 손님들이 더 크고 많은 욕망을 자신에게 쏟아 부어줄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이다. 욕쟁이 할머니 식당이 그렇듯이 배짱을 전략으로 내세운 건지도. 추가주문을 받지 않는 것 역시 터무니 없었다. 그것은 마치 부족한 자원을 호들갑스럽게 선점하려고 달려드는 부동산업자처럼, 자신의 필요와 욕망을 과장해서 예측하고 해석하도록 부추긴다. 심지어 소비의 강요이기까지 하다. 결국 멀리에서 온 손님의 대부분은 평소보다 많은 양을 주문할 수 밖에 없다. 또 식사를 위해 식당에서 1시간 30분을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은, 그 식당의 명성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식당 주인의 비양심적인 상술을 보여줄 뿐이다. 그 시간을 기다려야 식사를 할 만큼 손님이 많다면, 식당의 수입은 매우 높을 것이고, 손님들의 사랑에 대한 보답 차원에서라도 매상의 일부를 투자하여 매장을 넓혀 그들에게 갚아야 한다. 그러나 식당은 수 십 년 전에 지었을 법한 판자집 형태 그대로이다. 바닥이며, 화장실이며, 그 모든 것들이 무허가 건물처럼 허접스럽다. 자신을 찾아오는 손님들이 그렇게 오랜 시간 딱히 앉을 곳도 없는 상태 속에서 기다리는 모습을 보며 즐거워하는 부류의 인간이 과연 음식재료는 제대로 쓸지. 욕망을 과장하고 강요하는 주인의 역겨운 얄팍함을 생각 없이 홍보하고 묵인하면서, 사진을 찍어가며 선전하는 블로거와 이를 또 기다리며 참는 일에는 이골이 난 우리들. 모두가 힘을 합쳐 입맛을 떨어지게 하고 있다고.
이 합리주의적 분노와 불평에 대해 H는 결과론적 낙천주의로 일축했다. H의 생각은 아주 간단하고 명료했다. 맛있다고 하니까, 일단 여기까지 왔으니 먹어보자. 아무리 고치려고 해 봐야 고쳐지지 않는다. 힘들게 왜 내가 그걸 비판하고 괴로워하나. 어차피 마음에 들지 않으면 두 번 다시 안 오면 된다. 우리는 밥을 먹으러 왔지 요식업소 감찰을 나온 것은 아니잖아. 그러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평온한 표정으로 근처에 있는 마트에 들어가 애피타이저(appetizer)라며 오렌지 주스 한 병을 사들고 나오는 것이었다. H의 낙천주의는 대식(大食) 취미로 뚱뚱해진 회의론자(agnosticism)의 아이러니를 조금 닮아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H의 기대를 채워주지 못했다. 고기는 식어 있었고, 양도 그리 많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식당 분위기가 어수선하여 맛을 음미할 수가 없었다. 뒤에서 기다리며 앉아있거나 서 있는 사람들, 지저분한 행주를 들고 쟁반을 쨍그렁 거리며 눈치를 보며 부지런 떠는 종업원들, 뛰어다니는 아이들, 뭐가 좋은지 애를 안고 식당 여기저기를 어슬렁거리며 가정적이고 행복한 아버지-남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는 오버쟁이들 . . . . 기대하던 고기 맛도 그다지 훌륭하지 않았다. 직접 식당 측에서 구워서 내 왔는데, 얇은 돼지고기를 살짝 양념을 하고 구워 불에 그을린 맛이 약간 특이하긴 했지만, 너무 달았고, 또 웬만한 고깃집이면 맛볼 수 있는 흔한 맛에 불과했다. 된장찌개가 조금 맛이 있었지만 그 역시 특별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수시간을 기다리면서 기대할 만한 그런 음식이 결코 아니었던 것이다. 공중화장실에서 서둘러 배설하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은 분위기 속에서, 우리의 식어빠진 식사는 10분도 채 되지 않아 끝나고 말았다.
짜증이 난 쪽은 내가 아니라 H였다. 이미 식당 당국의 모든 처사들에 대해 실망한 나는 음식 맛에 대해서도 기대감이 없었기 때문에, 이 좌절된 욕망이 오히려 통쾌하기까지 했다. 식사가 끝나고 평온한 욕망의 중화상태로 앉아 있던 내 앞에서 H는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식당을 둘러 보았다. 수목원에서 H와 내가 서로 대립되어 자신의 욕망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익숙하게 알려진 욕망의 대변인이 되어 논쟁을 벌였던 것 처럼, 사람들은 누군가가 말로 전달해 준 맛을 이 식당에 직접 찾아와, 터무니 없는 기다림과 음식 맛에 대한 자기 암시를 되뇌며 손수 몸으로 미디어를 재연하고 있는 듯 했다. 감각조차 주어진 대본대로 연기가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포만감은 커녕 허기를 느끼며, 우리는 서울로 돌아왔다. 내가 말이 없어서 그랬는지, H는 차선도 자주 바꾸어 가며 평소보다 거칠게 운전을 했다. 비는 그쳤지만 축축해진 아스팔트에서 바퀴소리가 추적거렸다. 서울에 다 올 때 쯤 우리는 그 고깃집을 이미 다 잊어버리고 있었다.
최근에 퍼플코메디(purple comedy)라고 부르고 싶은 <하녀>를 발표한 임상수 감독. 수 년 전 그는 블랙코미디스러운 <그때 그 사람들>을 통해 권력의 이면 아니 정면을 잘 보여주었었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어째서 임상수 감독은 작품 속의 대통령 역으로 송재호 씨를 캐스팅 했던 것일까? 독선적이지만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 이미지가 지배적으로 만들어지고 조작되었던 박정희씨를 닮은 구석이라고는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 배우를 말이다. 예상과는 달리 그 작품에서는 성대모사도 없었고 흉내도 없었던 것이 의아스러웠다.
성대모사와 흉내가 가장 빈번히 그리고 가장 격렬하게 추대되는 곳은 다름 아닌 정치판이다. 그의 흉내를 내며 그 후광에 기생하려는 현실정치인들이 간혹 있었는데, 이들은 한결같이 어떤 사진 하나를 모사하곤 했다. 그 사진은 공공건물이나 학교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동네 이발소에서조차 어릴 적부터 보아오던 것이었다. 한때 얼굴이 약간 비슷하다고 알려진 어떤 정치인은 선거 기간 내내 그 사진의 모습과 똑같은 구도로 카메라 앞에 서서 목에 부목을 한 것처럼 힘을 주고 다니곤 했다. 단정하게 빗어 4:3 비율로 가림마를 넘긴 특유의 각진 헤어스타일, 정면을 보는지 측면을 보는지 아니면 어떤 대상을 주시하고 있는지 조차 꼬집어 말할 수 없어서 뚫어지게 살펴보면 약간 사팔뜨기 끼가 있어 보이는 모호한 시선(이것이 권력이다!), 윤기가 흘러 빛을 반사하는 듯한 이마와 콧 잔등, 살짝 다문 입술과 돌출한 듯한 입, 작지만 단단해 보이는 얼굴 윤곽선, 야무지게 달려있는 귓 볼, . . . 모든 가치들이 융합되어 있는 듯 하면서도 아무 가치들도 없는 듯한 이미지.
임상수 감독이 인물 캐스팅을 그렇게 한 이유가 코메디였기 때문이었을까? 코메디였다면 더욱 더 비슷한 이미지를 도입했어야 하지 않을까? 오히려 원본보다도 더 원본 같아 원본을 능가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더라면, 그 과장과 왜곡이 풍자를 실감나게 했을 것이다. 위에서 말한 그 정치인이 이에 해당한다. 그는 원본을 능가하여 원본을 닮고자 했기 때문에, 즉 그 자신을 지우는 과정이 그를 코믹하게 한 것이었다. 닮아가고자 애를 쓸수록 처음의 의도와는 달리 원본은 희화화의 가능성이 커진다. 어쨌든 임상수의 작품이 일종의 코메디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부적절한 캐스팅의 이유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추측으로 미루어 보건대, 임상수가 의도했던 것은 권력의 '아이콘'은 아니었던 것 같다. 닮은 모습이란 본질적이기 보다는 신비화되거나 주어진 이미지일 경우가 많다. 그것은 복원이라는 목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며, 복원은 반드시 복원해야 할 이유를 가진다는 점에서 본질이나 실상과는 멀어질 수 밖에 없다. 수많은 역사드라마나 상업 주류 영화의 인물들이 중압감 있는 대사와 자세를 취하는데도 불구하고, 그 무섭게 부라리는 눈매 이면에 항상 코믹한 요소를 빠지지 않고 실어나르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이것이 기호로서의 아이콘의 운명이다. 아이콘은 닮음이 아니라 오히려 원본의 부정에 가깝다.
임상수가 원했던 것은 물론 아이콘이 아닌 '권력의 실상'이었을 것이다. 어떤 실상? 다시 말해 어떤 권력? 그가 생각한 권력은 나쁜 권력도 아니고, 포악한 권력도 아니고, 사디즘도 아니고, 잔인한 권력도, 냉담한 권력도 아니다. 비판과 비난을 받는 동안에도 어떤 위대함을 머금고 있는 그런 권력이 아니다. 그렇다고 친숙하고 자상한 권력 역시 아니다. 그런 식으로 극화된 권력이 아니라 찌질한 권력! 이것이 임상수가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즉 어떤 막연한 추상으로서의 권력이 개인을 통해 육화할 때, 아니 개인이 그 권력을 모사하고 재현하고자 할 때, 그것이 얼마나 유형적으로 물화가 되어 지질한 행태들로 변질되는지를 말이다. 그 행태를 열거하기란 얼마나 쉬운가! 건설업계 똘마니들을 법적으로 비호해주고, 그 댓가로 초중고 학부모들이 자식을 잘 봐달라며(아이러니하게도!) 담임선생들에게 주는 용돈보다는 조금 더 많은(학군에 따라 다를 수도 있지만) 금전의 비호를 받으며, 잘나가는 딴따라 여가수를 불러 앉혀 놓고 치마 속에 손을 넣어가며, 양주를 홀짝이며, 술에 취해 풀린 눈으로 징징 거리는, 소위 술집 여종업원들의 용어로 말해, "일반인 보다 더 난해하게 놀아대며," 그 댓가를 물건들로 교환해버리고 마는 찌질하기 그지 없는 권력. 임상수가 본 권력은 코웃음 밖에는 터져나올 수 없는 그런 성질의 하찮은 것이었다. 말할 수 없이 지리멸렬한 분위기의 배우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때 그 사람들>에서는 우스꽝스럽고도 찌질한 권력의 실상이었다면, <하녀>에서의 권력은 직접적으로 모방권력, 즉 흉내와 연기로 재현하는 권력을 향해 있다. 권력의 흉내는 우선 제스쳐들을 통해 육화된다. 미디어에서 그리고 그것을 따라하는 일반인 찌질이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일명 법조계의 제스쳐가 좋은 예이다. 똘마니들 앞에서 비만스러운 커다란 덩치를 이리저리 흔들어가며 걷는다든가, 윗 저고리가 반쯤은 벌어질 만큼 배와 가슴을 떡하니 내밀고 앉아 몸으로 말을 하고 싶어 한다든가,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는 부하 찌질이들을 좌우로 내려다보며 거만하게 훈시를 내리는 포즈를 취한다든가, 손가락질 하나로 사람을 부른다든가. 이러한 모든 양아치스러운 제스처와 포즈는 지배력을 '보여주기' 위해 혹은 '나타내기' 위해 저변화되어 암암리에 '학습받은' 것으로, 마치 신분을 나타내는 이름표와도 같다. 권력을 암시하는 제스쳐를 취하는 순간, 즉 이러한 이름표를 다는 순간, 익숙하게 보아온 어떤 전도가 일어난다. 역할을 부여받은, 그것도 매우 잠시동안, 폼잡고 사진 한 방 박을 새도 없이 임시로 위임된 지위가, 어느새 어떤 힘을 스스로 생산하는 것처럼 보이는 권력이 된다. 권력이란 흉내, 즉 물화된 형상을 통한 연기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소품들, 전시물들, 전리품들 같은 것이 필요해진다. 이정재 분이 홀짝이던 와인이나, 아침마다 두들겨대는 여유로운 피아노, 가정부에게조차 요구되는 하이힐과 정장, 엄격한 식사시간, 널직한 소파와 같은 것이 그것이다. 그러한 소품들은 이정재 분의 우악스러운 눈매나 인상착의, 무엇보다도 부잣집 아들이라는 선천적-사회 계급에서 흔히 느껴지는 코믹스러운 안하무인 무지막지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걸쳐져야 할 예복의 기능을 한다.
권력과 똘마니의 관계는 관력관계가 아니라 계약관계이다. 둘 모두가 계약의 주체가 되어 서로 종속되어 있는 것이다. 위험성의 정도를 따지자면, 실은 그 관계는 뒤바뀌어 있기조차 하다. 말하자면 그들의 관계는 "권력이 똘마니를 비호하는" 구도가 아니라, "물주에게 고용된 깍뚜기 혹은 기둥서방"의 구도와 같다. 스폰서라는 용어가 이를 잘 말해준다. 흔히들 공정하고 자유로운 경쟁을 부르짖으면서도 약육강식의 사회를 묵인하고 따르는 경제적 이율배반 속에서, 사업을 하려면 법의 비호를 받아야 하는데(그런 점에서 법이란 상부구조가 아니라 순수하게 하부구조적이다), 그러려면 법-물리적 수단으로 비호를 해주는 장정에게 술도 사주고 떡값도 주어야 할 것이다. 개인들이 누리는 권력의 실체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잠시 술잔을 기울여 와인을 홀짝이며, 혹은 다리를 뻗고 소파에 누워 있는 동안 두 손을 모아 와인을 따라주는 정장차림의 가정부를 바라보며, 자신이 무엇인가를 닮은 것 같은 느낌에 도취된 쾌감. 힘 혹은 역량이 특정 개인에 의해 물화(物化)될 때, 그것은 권력이라는 이름으로 이렇게 찌질하고도 코믹한 흉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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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이 '나'를 욕망하는 통로인 듯 합니다..아는 이는 이들을 보고 발화자가 아니라 발자화라고 하더군요.
네...끊임없이 '나'를 욕망하는 통로라. . .
그런데 "발자화"가 무슨 말인가요?
사람이 말을 내뱉는게 아니라 말이 사람을 내뱉는다, 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아하! 그렇게 깊은 뜻이. . .
트위터의 부정적인 측면에도 불구하고, . . . 묘한 쾌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쾌감인지는 분석해봐야겠지만 말이죠. . .
날씨 정말 좋네요.^^
여고생들을 데리고 시립미술관 앞뜰에서 재잘거림을 듣는데 어찌나 싱그러운 향내가 나던지...몸은 피로한데 오월의 여운이 가득 남네요.
신록과 햇살이 비춰주는 여학생들의 맑은 피부와 웃음소리,재잘거림의 어울림.당시에는 당사자들은 지들의 모습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겠지만요.
친구 불러 술한잔 하려했더니 산꼭대기에 있다기에 마침 발바닥도 불이나던차 일찍 들어와 양말 부터 벗어 놓고 쉬다가 ^^
그냥 인사 남겨요.(오늘은 자게판에 포스팅도 하나 했습니다. 비는 시간에 일자리에서 쓰는 컴으로요^^)
좋은 시간 보내세요.날이 정말 좋아요.
베리베리 나이스입니다.
네. . 요즘 상쾌한 날씨 정말 좋습니다.
모든 것에 적절하다는 말 외에는 달리 적절한 말이 없을 정도로요...^^
요즘에 학생들에게 낭만주의 시를 가르치고 있는데요(오늘이 수업이었죠), . . 낭만주의 문학에는 우울한 작품들이 많습니다.
창밖의 날씨와는 전혀 맞지 않아 수업분위기가 산만하죠. . . 밖에 나가 놀고 싶어하는 학생들에게 죽음이니 운명이니 하는 따위의 말들이 귀에 들어겠나 싶어, 한편으론 미안하기도 합니다.
게시판에 글 올리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었군요. . .음. . .
점점 애물이 되어가는 게시판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중입니다. . . . . . .
게시판...글올리는 게 아주 불가능한 건 아닌데...그게 일하는 시간의 개방된 공간의 번잡한 일터이거든요.
여러모로 제가 애물단지를 만든 듯 싶어 죄송한 마음입니다...
이렇게 하시면 어떨까요? 아주 간략하게 내용물을 확 줄이신 다음 정말 훈님의 게시판으로 사용하시는 거요.
아니면 자꾸 진드기?^^가 붙어서 지금도 성가시긴 하시겠지만 기왕 있는 거 저만 자주 올리지 않으면 서서히 글 올리실 분들이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들구요. 그게 사실 좋은 모습이잖아요?늘 제가 바라던 것이 그것인데...전 일터에서 아주 가끔만 올리겠습니다.
아니면 트윗도 하시니까 이참에 아주 치워버리시는 방법도 있구요. 그래도
여기와서 뭐라 투덜대지 않겠다고 약속드립니다. ^^
-그리고 위의 이제하 선생님 글 댓글에 붙기엔 부적당하단 생각이 들어서 삭제하였습니다.제가 좀 이렇게 덜렁거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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