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Gilles Deleuze)의 두 권의 책 <씨네마>는 “이미지”를 존재론적으로 다룬 이미지-존재론이다. 이미지를 의식의 능동적 행태의 과정으로 파악했던 사르트르(Jean Paul Sartre)의 이미지론(<상상력>과 <상상계>)과는 대립하는 위치에서, 사르트르가 간과했던 틈새(영화!)로부터 또 다른 형식의 이미지론이 구성된 것이다. 들뢰즈에게 이미지는 의식 이전에 물질-운동-빛이라는 존재론적 근거 위에서 성립한다. 한편 <씨네마>는 영화 유파들과 편집 형식들을 체계적으로 암시하거나 명시하고 있다는 점에서―본인은 영화사가 아니라고 했지만―일종의 영화사이다. <씨네마>는 역사적으로 수많은 영화유파들의 편집방식에 대한 미학적 아포리즘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 정도이다. 또 한편 <씨네마>는 기호학이다. 들뢰즈는 이미지들을 본성적으로 다른 경향(물질의 계열과 정신의 계열)에 따라 그 차이를 나누면서, 나뉜 이미지들에 꼬리표를 달아두었다. 그 꼬리표에 붙은 이름들은 대부분 퍼스(Charles Sanders Pierce)의 기호분류체계를 따라 진행된다. 이미지 그 자체의 수준에서 분류한 “특질기호”(qualisign), “공기호”(synsign), “법칙기호”(legisign), 이미지가 표상하는 대상과의 관계에서 분류한 “아이콘”(icon), “지표”(indices), “상징”(symbol), 그리고 이미지가 해석자에 의해 표상되는 방식에서 분류한 “해석체”(rheme), “발화기호”(dicisign), “논항”(argument) 등이 그 예인데, 이 기호들은 들뢰즈가 분류하는 운동-물질-빛 이미지의 주관적 변용(지각, 정감, 행동, 추론, 관계, 시간 등)에 따라 대응하는 기호들로 명시된다.

 

그러나 이렇게 다양한 관점의 규정에도 불구하고, <씨네마>는 무엇보다도 베르그송(Henri Bergson)의 이미지론과 그 철학 전반―특히 <물질과 기억>에서 개진한―에 관한 예증적 주석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이미지란 물질이며 정신, 즉 세계 자체이다. 마치 영화가 세계의 이미지이면서 동시에 세계 그 자체인 것처럼 말이다. 독자들은 <씨네마>의 각 장마다 이 같은 베르그송의 테제들에 관한 논증을 접하게 되며, 논증된 명제들은 다시 영화 이미지를 통해 예시되는 과정이 반복되는 거대한 회로와 마주하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베르그송이 자신의 철학을 견지하면서 <창조적 진화>에서 그토록 비판했던 (운동의 허구적 재현으로서의)영화는 그의 철학을 가장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는 매체가 된다. 들뢰즈의 <씨네마>는 “베르그송주의”(Bergsonism)를 영화예술로 육화하는 하나의 프로젝트이다. 물질 이미지가 두뇌 안에서 주관화되면서 형성해가는 역량들의 본성상의 차이를 발견하는 문제, 그리고 그 방법으로서 직관적 나눔과 같은 베르그송주의의 테마들이 그 책 전체를 지배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들뢰즈의 영화론 뿐만 아니라 문학-예술에 관한 그의 대부분의 텍스트에서 핵심을 차지하는 나눔의 방법을 “증후학적 비평”이라고 부른다―이것은 니체적인 용어이다. 물론 증후학은 의학의 한 분과이지만, 증후들(symptoms, signs)의 역동적 변화를 직관하고, 나아가 증후들의 복합으로서의 증후군을 그 본성적 차이에 따라 분류하는 실천적 메커니즘은 예술에 가깝다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증후학적 비평은 이미지와 존재의 “질적인 변화” 속에서 표현되는 실체를 읽어낸다. 즉 예술로서의 증후학 또는 증후학으로서의 예술이란 바로 존재의 표정과 뉘앙스를 관찰하고 파악하는 과정이다. 예컨대, 들뢰즈는 마조흐(Leopold von Sacher Masoch)의 소설에 관한 한 장대한 서문에서 정신분석이 새도-마조히즘이라는 용어로 두리뭉실하게 뒤섞어 놓았던 사드와 마조흐의 예술을 다양한 관점(언어, 스타일, 이상화, 도착, 본능 등)에서 그 본성상의 차이에 따라 나누었는데, 그것은 그들 각각의 표정과 뉘앙스를 긍정한 증후학적 비평의 좋은 예이다. <씨네마> 역시 이미지의 질적 변화, 즉 수많은 영화 유파들에 의해 배열되고 편집되는 방식에 따라 발생하는 이미지의 다양한 표정들 각각을 분류한다. 이로써 지각-이미지, 감정-이미지, 충동-이미지, 행동-이미지, 사유-이미지와 같은 주관성 고유의 각각의 역량들, 그리고 그들을 창조한 예술가들의 특이성이 그 이미지론 안에서 나누어지고 긍정되는 것이다.

 

필자의 책 <들뢰즈의 씨네마톨로지>(이하 <씨네마톨로지>)는 들뢰즈의 영화 이미지론을 이러한 증후학적 관점에서 독해하고, 거기서 핵심적인 몇 가지 개념들과 그 논리를 해설한 일종의 해설서이다. 이 책은 내용상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하나는 들뢰즈가 개진한 이미지 개념의 성격과 이미지론의 철학사적 배경을 이론적으로 소개한 1, 2, 3장이 있다. 여기서는 이미지의 주관적 계열과 객관적 계열을 나누고, 이 두 계열의 관계를 철학적 유물론과 관념론, 그리고 후설과 베르그송을 위시하여 존재론적으로 대립되는 관점들을 다루고 있으며, 객관적 계열의 운동-이미지가 주관화되어가는 정신적 발생과정을 논증한다. 두 번째 부분은 이미지의 주관화 과정에서 생성되는 질적 차이를 영화사에서 회자되었던 여러 유파들의 작품들을 통해 예시하고, 나아가 이미지의 탈주관성(이미지의 소멸)을 논의한 4, 5, 6, 7, 8장이 있다. 여기서는 들뢰즈가 분류한 운동-이미지의 주관적 변용들(지각-이미지, 정감-이미지, 행동-이미지, 시간-이미지)을 새뮤얼 베켓(samuel Beckett)의 영화 뿐 아니라 네오-리얼리즘, 표현주의, 서정주의, 리얼리즘, 그리고 오즈 야스지로(Ozu Yasujiro) 등의 작품을 통해 구체화한다.

 

무엇보다도 <씨네마톨로지>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이미지들의 질적 차이를 발견하고 그 역량들을 긍정하는 증후비평이 “잠재성”을 향한 운동이라는 점이다. 들뢰즈의 철학에서 잠재성은 과거이자 미래이며, 폐쇄적이고 가시적인 것 내부 또는 외부의 열림이다. 예술적 견지에서 잠재성이란 사물들이 자아내는 표정의 실질적 근거라 할 것이다. 따라서 이미지가 질적으로 변화하는 양상에 따라 그것을 나누는 목적은 닫힌 공간 안에서의 우리의 욕망, 삶의 필요, 이해관계 때문에 편협하게 얼버무리고 추려낸 가시적인 이미지의 이면―이전과 이후―에 있는 잠재성을 읽어내기 위한 것이다. 이미지의 본성적 차이의 나눔이란 사물의 표정에 대한 긍정을 넘어 시간에 도달하는 과정이다. 이를 위해 <씨네마톨로지>는 여러 영화감독들과 예술가들이 추구하는 “소멸화” 운동을 제시한다. 예컨대, 표현주의와 서정주의의 정동화 편집, 하워드 혹스(Howard Hawks)나 네오웨스턴의 탈유기적 편집, 네오리얼리즘의 반주관적 편집이나 진공화, 오즈의 탈공간화 등, 본성적 차이로서의 표정과 시간을 동질화된 사물로 가두는 육체와 공간을 식별 불가능한 지점에 이를 때까지 이미지를 나누고 빈 공간을 만들고 가시적인 모든 것을 지워나감으로써 그 표정과 시간을 해방시키는 과정이 펼쳐지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씨네마톨로지>를 “창조적 소멸론”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 이 글은 2012년 하반기에 <연세대학교 대학원 신문>에 게재되었던 책소개의 일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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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느와르(Jean Renoir)가 비판했던 인간 유형은 무리집단이 강요하는 역할에 사로잡혀 자신의 본성에 무지한 인간, 니체(Friedrich Wihelm Nietzsche)식으로 말하자면 "낙타"였다. 르느와르는 마네(Edouard Manet)의 회화처럼 영화를 찍었던 사람이다. 따지고 보면 낙타는 모든 예술가들과 철학자들의 공통의 대상이다. 덮어놓고 남이 하는 대로 따라하거나, 우정이 최고의 미덕인줄 알고 하이에나떼처럼 우루루 몰려다니거나,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는 낙타만 바라보고 있거나, 잘 나가는 낙타들에만 어울리고 싶어하는 부류가 대표적으로 그런 축에 속한다. 낙타는 지배 계급이든 피지배 계급이든 가릴 것 없이 어디에나 존재한다. 르느와르는 The Golden Coach라는 작품에서 연극을 관람하는 두 부류의 계급을 통해 이러한 낙타의 존재를 보여주었다.

 

18세기에 남아메리카를 점령한 스페인군 총독 바이스로이는 식민지 민중과 귀족들을 달래기 위해, 셰익스피어 시대의 영국 왕실이 그랬듯이, 자신의 관저 근처에 전용 극단과 극장을 차려놓고 정기적으로 연극 공연을 주최한다. 이탈리아에서 온 한 극단이 귀족들을 위해 무상으로 공연을 해주고, 대신에 민중들로부터 돈을 받고 공연을 할 수 있도록 허가를 받는다. 극단이 이탈리아 코메디를 공연하게 되는 것으로부터 이 영화는 시작된다. 민중들을 위한 초연은 관객의 싸늘한 반응으로 시작한다. 땅에 파묻혀 사는 농부, 남의 일이라면 이골이 난 노동자, 빨래와 밥 짓는 일만 평생 해온 부녀자들로 이루어진 음울한 관객들이 외국의 코미디를 알 리가 만무했다.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이들은 경전을 듣고 있는 송아지들처럼, 아니 교양수업을 듣고 있는 대학생들처럼 눈만 멀뚱멀뚱 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관객이 배우들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무대 위에서 관객을 바라보고 있는 배우들에게 웃음이 부재한 객석 아니 식민지 전체는 일종의 재앙이었다.

 

차가운 반응은 두 번째 날에 관객으로 들어온 귀족들도 다르지 않았다. 물론 귀족이란 또 다른 형태의 무지렁이들이기 때문에, 이들 역시 코메디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설사 일부 교양을 갖춘 귀족들이 코메디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치더라도, 공연을 보면서 솔직 담백하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낼 수 있는 위인들은 아니었기 때문에, 누군가 먼저 웃어주기를 기다리며 흘깃거리는 눈초리로 부채질만 해댄다. 그렇게 서로의 눈치를 보면서 웃음을 참고 있었다. 우리가 교양을 위선과 동일시 한다면, 그 이유는 교양이라는 것 자체가 어떤 조심성과 은폐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양은 집단적인 현상이고, 집단을 벗어났을 때 교양은 무너진다. 따라서 교양인은 어떤 의미에서든 튀지 않아야 한다. 더우기 감정이 표출되지 않게 하려면 반드시 몰려다녀야 한다. 웃음을 참지못해 감정을 터뜨렸을 때 받게 될 그 이유 모를 텅 빈 비난의 눈초리들은 교양인에겐 사형선고이기 때문이다. 귀족들의 교양이란 한 마디로 말해 위험하지 않은 그냥 밋밋한 따분함일 뿐이다.

 

그러나 민중-낙타든 귀족-낙타든 결국은 웃을 수 밖에 없었는데, 그들 중에는 우상(Idol)이 있었기 때문이다. 민중들 사이에는 당대에 최고의 인기를 끌었던 투우사 라몬이 있었고, 귀족들 사이에는 자신들을 지배하는 영국군 총독이 있었던 것이다. 공연이 끝난 후 라몬의 웃음과 박수소리(실은 다른 이유, 즉 여배우가 마음에 들어)가 들리자 그제서야 민중들은 공연이 자신들을 구원해줄 찬송가라도 된 듯이 괴성에 가까운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를 터뜨린다. 그 후로 민중들 앞에서의 공연은 승승장구한다. 귀족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공연이 끝난 후 한 동안 아무 박수 소리가 들리지 않았는데, 이 때 총독은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는 중이었다. 불을 붙인 후에 총독이 박수를 치자, 그제서야 귀족들은 하이에나떼처럼 주변을 기웃거리며 조심스러운 박수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결국 두 공연 모두 마지막엔 많은 박수를 받으며 성공적으로 막을 내린다.

 

어떻게 하면 이 낙타들의 왕국을 깨뜨릴 것인가? 어떻게 하면 크리스탈 안에서 아우성을 치며 빙빙 돌아가는, 자신에게 부여된 뜻모를 역할들을 연기해대는 낙타-배우들의 왕국으로부터 쏟아져 나와 자신의 본성적 삶으로 나아갈 것인가? 이것이 르느아르가 끊임없이 자신의 작품들을 통해 던진 질문이었고, 영화와 예술로부터 그 미래 비전의 동력을 찾고 싶어했던 것이다. 그러나 영화와 예술에도 역시 낙타들, 더 역겨운 낙타들이 매복해 있음을 그는 알게 되었을 것이다.

 

계급을 막론하고 낙타들이 존재하듯이, 그것은 프랑스나 독일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르느아르나 니체와 같은 위대한 낙타 저격수를 가지지 못한(혹은 아직 발견하지 못한) 한국에는 더욱 더 무성하게 빙빙 돌아가며 들끓고 있다. 해방 이후 왕조를 벗어나 서구식(!) 민주주의(?)가 미국에서 날라온 한 금융사기꾼과 종교집단을 중심으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생각해보라. 낙타들의 현대적 왕국은 이미 그 때부터 포문이 열렸을 것이다. 지금은 어떨까? 세계가 일명 "좀비들의 춤"이라고 부르며, 일부는 열광하고 대부분은 경멸하는, 문화-예술-연예를 빙자하지만 결국 금융-주식으로 귀결되는 신종 semi-sex 산업의 왕국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아래의 두 기사가 대답을 하고 있다.

 

http://goo.gl/ynJUz

http://goo.gl/czLB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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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 my lady

monograph_column 2012/06/04 23:55

중고생 시절에 심취해 있었던 팝음악. 중학생이 되자마자 아버지가 입학 선물로 사주셨던 카세트라디오를 거의 혁대처럼 달고 살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저는 하나에 꽂히면 당분간은 삶을 포기하는 부류였죠). 그때는 영어실력이 없었기 때문에 가사도 모른 채 멜로디만 엉성하게 따라 불렀죠. 심지어는 영어가사를 들리는 대로 한글로 독음해서 적은 후에 달달 외워서 따라 부르곤 했었습니다. 비슷한 취향의 친구들과 독음본을 공유하기도 했습니다. 재혁이라는 악마처럼 이상하게 생긴 친구가 있었는데, 그 녀석은 생긴 건 그랬지만 공부도 잘했고 특히 영어를 잘했는데 영어가사 원본을 따가지고 와서 밤을 새웠다며 충혈된 눈으로 자랑하곤 했습니다. 한번은 Men at Work라는 호주출신 그룹의 "Down Under"라는 유머러스한 곡의 가사를 따왔는데, 너무 그럴듯해서 존경심이 생긴 적도 있었습니다. 우리들 사이에서 가사를 따는 문제는 마치 르네상스 화가들이 현실을 경쟁적으로 복제하려는 충동에 버금가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중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는 팝이든 클래식이든 음악을 거의 듣지 못했고, 나중에 커서는 재즈를 좋아하게 되어 팝음악은 사실상 중학교 시절의 추억으로만 남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팝음악이 간간히 들립니다. 라디오에서 들리는 옛날 팝을 들으며 다소 퇴폐적인 감상에 젖는거죠. 전 같았으면 이런 감상주의적 심리상태를 억지로 떨쳐버리려고 애를 썼을 겁니다. 대중문화 이데올로기 어쩌구 하면서 말이죠. 또 그렇게 해야만 하는 시대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젠 그 시대는 지났습니다.

저는 미국과 그 문화를 경멸하는 편에 속합니다. 특히나 최근의 미국 젊은이들의 행색이나 말투, 시선의 위치, 고개 짓, 제스처, 심지어 숨쉬는 소리조차 역겨움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유학생이든 여행객이든 미국에 갔다 와서 그런 모습을 따라 하면서 우쭐해 하는 동양 젊은이들을 보고 있으면, 솔직히 말해 뺨이라도 갈겨주고 싶은 충동이 올라옵니다. 저의 주관적인 견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문화사적으로 볼 때 현대 미국의 문화 예술은 인류 역사상 가장 투박하고 경박하며 진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半) 종교적 도덕주의와 자본주의가 기괴하게 결합하여 만들어낸 정서라고 할까요? 마치 백인들의 그 살을 파고드는 짧은 손톱의 뭉뚝한 손가락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팝음악을 들으며 생각해보면, 저의 어린 시절 문화가 거의 미국과 연관이 있고, 그 속에 파묻혀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이문구의 <관촌수필>에서는 해방 이후 한반도에 들어온 미국인들이 뱉어놓은 가래침이나 길거리 아무데나 싸 놓은 똥 오줌을 통해 미국인과 한국인의 문화적 연대를 적나라하고도 충격적으로 묘사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한국 영화보다는 미국영화를 더 많이 보고 자랐습니다. 텔레비전을 틀면 주말의 영화니 토요명화니 해가며 나오는 건 어김없이 미국 헐리웃 영화들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라디오에서는 늘어지는 가요보다는 세련된 팝음악이 지배하고 있었죠. 김광한, 김기덕, 이종환, 황인용, . . . 이러한 방송계의 대부들은 모두가 팝음악 DJ들이었습니다. 마치 클래식의 거장들을 소개하듯이 열정적으로 팝음악을 소개하고 전파하는 그들의 격앙된 목소리를 듣고 자랐던 것입니다. 언젠가 황석영 작가가 일본을 다녀와서는 일본의 골목이 고향에 온 듯 친숙하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는데, 따지고 보면 저와 같은 세대에게는 미국의 골목이 그렇지 않을까 예상해 봅니다. 그렇다고 돌이킬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어쨌든 우리의 실존이 되어버린 겁니다. 좋든 싫든 감상주의나 퇴폐주의에도 긍정적 힘이 있다는 그람시(Antonio Gramsci)의 어른스러운 조언을 적극적으로 되새기며, 어쩌면 우리의 삶에 필요한 것은 원리주의적 금욕 자체가 아니라, 그것으로부터도 초연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팝을 들으며 잠깐 듭니다.



팝음악 청취 초창기 시절에 굉장히 좋아하던 노래입니다. 왜 갑자기 이 노래가 듣고 싶어졌는지는 저 역시 오리무중입니다. 영국 그룹 The Moody Blues의 "For My Lady"라는 노래입니다. 이 노래는 가사의 대부분을 독음을 해서 따라 부르곤 했는데, 유독 "gently"라는 단어가 들리지 않아 이 부분은 엉성하게 웅얼거리던 기억이 납니다. 나중에 가사가 정식으로 출판이 되면서 비로소 그 부분이 gently라는 단어였구나 알고는, 영어가 참 어렵구나 깨닫게 된 노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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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시와 처벌』에서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는 인간의 몸에 실행하는 다양한 권력의 테크놀로지와 권력을 생산하는 기계들을 열거한다. 그의 책은 주로 17세기와 18세기의 문서들(책이 아닌 다큐멘터리들)을 세분화하여 분류하고 이를 기반으로 세기들의 권력 양태를 폭로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대상을 다루는 그 방식과 태도는 아이러니하게도 18세기적이다. 18세기가 개인의 몸에 그랬던 것처럼, 18세기를 세분화하고 개별화하는 그의 방식은 바로 18세기, 즉 그 대상을 닮아있다. 이 분류학자의 지루한 반복의 고통에 수반하는 인내와 절제의 심층에는 고집스러운 투쟁의 광기가 있다.
 
통제와 규율은 시대에 따라, 맥락에 따라, 그리고 그 방식에 따라 질적으로 다르다. 현시대의 예로도 충분히 예시가 가능한—물론, 그 차이를 나누는 것이 더 중요하겠지만—현대적 권력의 발생적 뿌리랄 수 있는 18세기적 규율은 이전의 시대와 견주어도 그 강제력의 양이 모자람이 없다. 오히려 그것은 더욱 더 포착하기 어렵게 무의식적이고 비가시적이 되어 지배와 통제를 보편적으로 도식화 한다. 권력의 도식적 보편화 또는 보편적 도식화. 이것이 계몽주의와 합리성이라는 이름으로 이데올로기 국가장치들 속에서 실현되어온 "정치적 해부학"(political anatomy)으로서의 규율이다. 권력의 정치적 해부학 즉 규율은 몸을 물리적, 기능적, 질적으로 분해한다. 힘과 특질을 개별화하는 해부학적 파편화에 의해 몸은 세련되고 다루기 쉬운 레고블록(Lego block)이 된다. 마음대로 처분하거나 다룰 수 없는 덩어리로서의 아날로그적 신체가 디지털화된 입자들의 소외된 연합으로 변형되어, 잘게 부수어지면서 동시에 재배열되고, 재배열되는 동시에 잘게 부수어지는 가상적 역학이 군대, 학교, 교회, 병원, 감옥 등, 모든 사회적 장 속에서 잠재화되는 것이다. 이로써 몸을 폐지하고 추방하고 격리하여 인격적으로 가해지던 전근대적인 처벌양식 대신에 몸을 교정하고 교육하고 훈련하는 비인격화된 근대적 규율방식으로의 전환이 일어난다. 나병에 대응하는 국가의 집단화 충동이 페스트에 대한 개별화 충동으로 전환되었던 것처럼, 권력은 전체, 공동체, 집단화의 패러다임에서 개인, 원자, 개체성의 효율적 테크닉으로 조직화한다.

이에 따라 규율적 통제의 변별적 특징들을 간략히 지적해볼 수 있을 것이다.
(1) 규율적 통제는 그 규모에 있어 미시적이다. 통제의 규모는 하나의 덩어리로서의 몸 전체의 수준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통제는 몸 자체가 아니라 몸이 자아내는 질적 변화들로 세분화된다. 전 시대의 구금이나 추방, 학살, 수용과 같은 몸의 “도매처리”(wholesale) 대신에, 기능들 혹은 메커니즘(움직임, 제스처, 태도, 속도 등)에 따라 몸은 잘게 나뉘어 질적으로 부분화된다. 강제력의 미시적 형식을 통해 몸은 “소매”(retail sale)로 다루어지는 것이다. 이로써 몸의 개조가능성 혹은 교정가능성을 전제로 훈련과 같은 페다고지(pedagogy)의 산업-정치적 형식이 새롭게 등장한다.

(2) 규율적 통제는 그 대상에 있어서도 이전 시대와는 구분된다. 통제의 대상은 행동의 표현적 요소나 언어적 측면이 아니다. 몸가짐에서 느껴지는 군인다움이라든가 민첩함 또는 학생의 행동거지에서 보이는 그의 태도와 같은 것을 교정하여 이상적 자태를 조형하는 문제가 더 이상 아닌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몸의 기호와 조형이 아니라 움직임의 효율성 그리고 그 효율적 경제를 실현하기 위해 몸을 어떻게 내적으로 조직화할 것인가에 있다. 내적 조직화가 목표로 하는 것은 이상적인 인간이나 탁월한 개인이 아니라, 비인격적이고도 합리적인 최대 효율성이나 최대 생산성이다. 행동의 결과주의에 대한 이러한 열망은 인간의 몸과 그 행동을 기능적 사물로서, 즉 습관적 자동화의 수단으로서 확립한다. 벽돌쌓기공학(Bricklaying Ergonomics)이나 테일러주의(Taylorism)와 같은 보다 산업-집중화된 몸의 조직화는 이미 일상적 규율화 속에서 다져지고 있었던 것이다. 현대적 몸이란 다름 아닌 경제적-효율적으로 분절된 신체를 의미한다.

(3) 통제의 양상 또한 전 시대에 비해 새롭다. 산출된 결과를 중요시 하는 저러한 행동의 결과주의와는 반대로 통제 방식에 있어서는 중단되지 않고 지속적이다. 즉 행동이 산출한 결과보다는 그 과정 전체가 감독되고 통제되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것이다. 규율에 따라 조직화된 행동 자체가 이미 감시의 과정을 실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벨트시스템과 같은 기계나 새로이 발명된 기구에 달라붙은 몸, 개별적으로 구획된 공간에 배치된 몸, 세분화되어 명시된 시간표에 따라 움직이는 몸, 엄격하게 수행되는 의례(ritual)를 따라 주체(권력)를 내면화하는 몸, 이렇게 몸 마디마디에 가해지는 규칙과 규약과 코드를 통해, 다시 말해 시간과 공간과 운동의 전 영역에 스며든 분할의 코드화에 의해 행위 과정 자체 내에서의 매 순간의 익명의 감시가 “작동”한다. 이것은 특정 인격에 의한 혹은 특정 권력에 의한 감시의 실행이 아니다. 팬옵티콘(panopticon) 시설 내부에 배치된 개인이 자신 안에 “감시자/감시대상의 구도”로 분열되어 예속상태를 스스로 실천하듯이, 움직임 자체가 바로 감시기능의 자동적 가동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지속적이고, 이 지속성 속에서 다루기 쉬운 몸은 쓸모가 있으며 쓸모 있는 신체는 다루기 쉬워야 한다는 “순응성-유용성”(docility-utility)의 도식적 상호관계가 형성된다.

(4) 규율은 몸의 자의적인 소유가 아니다. 그것은 몸을 마음대로 독점하고 전유하는 관계에 근거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규율적 몸은 완전한 물리적 소유물인(재산으로서 마음대로 처분과 양도가 허용된) 노예의 몸과는 다르다. 노예의 몸은 (주인의) 가시적인 폭력에 노출되어 있으며, 신체의 독점권만큼이나 그에 따른 비용을 초래하는 몸이다. 또한 그것은 세분화되어 있지 않으며, 삶 전체에 걸쳐 장악된 무제한적 지배의 관계에 속하긴 했지만, 개인들의 성향이나 변덕에 따라 행사되는 폭력으로 인해 일관성이 비교적 약했다. 반면 규율은 막대한 비용이나 무자비해 보이는 폭력이 없이도, 몸을 물리적으로 또는 서면상 소유하지 않고도 일관적이고도 유연하게 효용성의 효과를 낼 수가 있다. 심지어 규율은 개인으로 하여금 통제와 예속을 자발적으로 원하게 한다는 점에 그 세련됨이 있다.

(5) 규율은 계약에 근거한 일시적 지배가 아니며 토지라든가 생산물을 매개로 이루어지는 간접적인 지배가 아니다. 그것은 봉건적 예속관계와는 다르다. 봉건적 예속은 몸의 지배라기보다는 지대와 공납과 같은 노동 산물의 지배이며, 주종관계를 확인하는 관례적이고 형식적인 징표들을 통해서만 확인되는 간접적인 지배이다. 이와는 달리 규율은 매개되지 않은 몸에 대한 직접적 지배의 형식을 띤다. 그것은 우리가 눈을 감고 있는 동안에도 작동한다. 그것은 사물화에 기초하고 있지만, 근본적으로 사물적 관계를 넘어서 있다. 사물을 넘어서는 사물성, 이것이 현대적 규율을 통한 지배이다.

(6) 현대적 규율통제는 종교적 금욕주의에서 실천하는 유형의 규율과도 다르다. 수도사들의 금욕은 무엇인가를 생산 하거나 힘과 기술을 증대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다. 베버(Max Weber)가 언급했던 탐욕의 고도화된 형식인 부르주아식 금욕주의(inner-worldly asceticism)와는 달리 그들의 금욕주의는 물질적 욕구와 부의 가차없는 포기를 통한 육체의 해방을 목적으로 한다. 절제와 금욕을 통해 효용성을 포기하는 종교적 규율은 이차적인 동기를 가지지 않고 그 자체가 목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도원 내부에 존재하는 복종과 예속의 지배관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규율은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그것을 실천하는 본인의 육체적 정신적 구원(본인에 의한 본인의 지배)을 향해있다. 복종과 효용성의 상호 협착(docility-utility)으로 타자에 의한 신체의 지배, 사용, 그리고 보다 많은 힘과 기술의 증대를 통한 생산성의 최대화가 목적인 현대적 규율통제와는 본성적으로 다른 것이다.

현대적 규율에 의해 조직화된 몸은 비정치화된다. 한편으로 그 몸은 규율적 훈련에 의해 뛰어난 능력과 수완이 탑재되어 효율적이고 경제적인 필요에 적합하게 정향 된 몸이다. 그럼에도 그것은 정치적으로는 무기력하고 역동과 활력이 박탈된 몸이다. 한마디로 경제적 비정치화된 몸이다. 능력과 힘은 있지만 그것의 주체는 아닌 것이다. 현대적 규율은 몸으로부터 그 실체로서의 힘을 소외시킨다. 그리고는 몸으로부터 나올 수 있을 모든 잠재적 역량을 적성, 소질, 재능과 같은 코드화된 능력으로 규격화 한다. 여기서 힘의 양도 혹은 전도가 일어나는데, 마치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과의 소외 속에서 그의 전문지식과 기술이 자신의 지배를 더욱 강화하는 것처럼, 그가 가진 능력은 다름 아닌 그 자신의 예속을 견인하는 추진력이 된다. 이렇게 해서 주권자로서 그리고 계약의 주체로서의 현대인은 국가로부터 권리를 부여 받고, 무리로부터 보호를 받으며, 빵을 위해 회사에 손을 벌린다. 권리와 평화와 빵 아니 국가와 공동체와 회사 그 모든 결과들이 다름 아닌 자신의 힘으로부터 나온 것인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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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계

monograph_column 2011/08/24 17:44

애초의 계획은 이런 것이었다. 우선 6-7개월 안에 번역을 끝낸다. 그리고 1-2개월에 걸쳐 번역본을 두 세 차례 읽어가며 문장을 다듬는다. 그리고 작업 과정에서 작성했던 메모와 노트와 밑줄을 중심으로 이 책에 관한 장편의 해설 에세이를 야심차게 한 편 쓴다. 그래서 마치 야생 동물을 길들이듯이, 이 불친절하고 오만해 보이는 텍스트의 독자에 대한 만행을 누그러뜨려 나긋나긋해지도록 하면, 누구든 쉽게 이해하고 따를 수 있는 중성의 지도가 만들어질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나의 번역작업은 번역 보다는 논문을 쓰듯이 메모와 자료수집에 더 중점을 두게 되었다.

작업이 진행되면서 애초의 계획은 많은 장애를 겪게 된다. 우선 사실상 가장 중요한 돈 문제가 있다. 사회-내-존재로서 나는 ‘이론을 위한 이론’ 부류에 속한 ‘이 책만을 위한 삶’을 고집할 수는 없었다. 이러한 책은 돈과는 무관한 전혀 다른 이유로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돈벌이가 아닌 전혀 다른 이유 때문에 시작한 일은 취미로 해야 한다. 일에 대한 자세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할애해야할 시간을 말하는 것이다. (취미란 왜 항상 상대적으로 적은 시간만이 허용되는 것일까?) 따라서 이 책의 번역 작업, 더 정확히 작업 시간은 취미처럼 진행되어야만 했다. 애초의 계획인 6-7개월은커녕 작업은 더디어지고 길어졌다. 또 사회-내-존재로서 개인적인 소사들은 일의 매끄러운 진행을 방해한다. 경제적, 사회적, 개인사적인 모든 난삽하고 자질구레한 그러나 피할 수 없는 실재들로 인해 미리 결정해 놓은 목적들은 지리멸렬해 진다. 역설적이게도 학문의 순수성은 부의 산물일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이 강하게 들었다.

그러나 작업을 방해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이 책이 재미가 없다는 것이었다. 위의 외적인 요인들은 일을 더디게 할지는 모르지만, 일에 대한 환멸과 태만의 원인은 되지 못한다. 이 책은 사람을 아주 이상하게 나른해지게 하는 구석이 있다. 구사하는 문체의 난해함과 주제의 단조로운 반복 때문인지, 이유를 알 수 없는 환멸과 태만이 바로 이 책의 독자를 사로잡고 있는 분위기이다. 논리적으로 매끄럽게 잘 연결되거나, 내용이 익숙하거나, 어렵더라도 하다못해 뭔가 새로운 것을 배우는 듯 한 느낌만이라도 주었더라면, 원한감정까지 생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원한 감정, 즉 타인에게 원인을 투사한 무능력의 감각이 번역을 하는 내내 나를 괴롭혔다. 페이지를 쭉쭉 나아갈 수 없는 무기력, 어떤 부분은 알겠지만 그 다음 부분은 알 수 없는 끊임없는 단절감, 의미를 쉽게 결정할 수 없는 모호한 정신상태 속에서의 지속의 고통, . . . 이렇게 텍스트를 쥐고 있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면서, 작업은 쉽게 끊어지고, 머뭇거리게 되고, 문장을 구성하는 실제적 행동성의 발랄함은 사라지고, 생각만 한 없이 깊어지면서, 그렇게 늘어난 시간은 텍스트와 독서경험을 나른한 파편들로 만들어 갔다. 쉬운 몇 마디로 요약할 수 없는 총체성 상실이라는 무능력의 감각은 결국 저자에게 투사된다. 역자인 나는 저자의 글쓰기 능력과 이론적 진정성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텍스트를 쥐고 있는 시간이 길어지고, 경험이 파편화 되어가고, 총체성이 상실되는 해체와 파괴의 과정 속에서 무엇이 생산되었을까? 점점 쓸모가 없어져가는 이 책은 도대체 무엇을 생산하는가? 저자가 말했듯이, 다름 아닌 “두통”이 생산되었다. 더 근사하게 말해 지속 또는 시간(과학의 차원이 아닌)의 경험이 생산된 것이다.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에 이 텍스트를 번역하는 과정 자체의 묘사가 이 책에 대한 가장 적절한 묘사이며 규정일 것이다. 독서 자체가 일종의 퍼포먼스이다. 책을 이루는 구성요소들의 다가(多價)적이고 다중적인 모호함, 그리고 그 책을 읽는 매순간의 딜레마, 그 무엇도 확신을 가지고 결정할 수가 없는 텍스트의 의미, 내용과 의미보다는 수단과 형식으로서의 언어 그 자체에 대한 반성, 나아가 읽고 있는 주체인 나 자신에 대한 자기-지시적 사유, 이러한 것들이 바로 마수미가 우화라고 명명하면서 여러 사례들을 통해 드러내고자 했던 잠재, 또는 더 넓은 의미에서의 가상계의 질서이다. 사물이 쓸모가 없어질 때, 다시 말해 모호, 딜레마, 비결정, 자기 반영과 같은 가상계의 내적 질서에 존재할 때, 그것은 다른 어떤 것이 아닌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지시한다. 유용성, 기능, 총체성과 같은 구식의 존재론적 가치로부터의 해방은 사물의 본질(플라톤과 전혀 다른 관점에서) 또는 사물의 직접적 자기-존재의 현시이다. 가상계에서 시간과 그 경험은 직접적으로 현시된다.

현실계-내 및 사회계-내-존재인 독자들께서는 이제 이 책 전체를 통해 다양한 분야(현상학, 생리학, 물리학, 예술, 미디어, 정치, 심지어 스포츠와 연예에 이르기까지)의 저류에 흐르고 있는 가상계, 다시 말해 간극과 미결정성의 지대를 접하게 될 것이다. 현실계와 사회계 내에서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실재를 살아온 우리는 스스로를 지각의 주체로서 정립하고, 우리 앞에 뚜렷한 윤곽선을 내보이는 사물들, 사람들, 이미지들, 세계-내-존재자 모두를 주체에 대한 존재(대상)로서, 또 주관성에 대한 객관적 실체(객체)로서 규정해왔다. 삶의 필요에서 비롯된 이러한 추상화 운동은 존재를 유용성과 기능에 부합하는 것으로 포섭하면서, 모든 “지각 가능한 것만이 존재 한다”고 하는 자의적이지만 확고부동한 현실의 질서를 조작한다.

그러나 지각 가능하고 사유 가능한 현실적 확신은 새로운(혹은 태곳적) 실재로서의 가상계 안에서 생소해지고 모호해지며 확실성을 잃어간다. 저자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현실계를 파고들어, 우리의 지각과 행위 내에서 운용이 가능한 현실적 대상과 사물들에 카오스적 구도를 끼워 넣어 그 단단하고 명확한 윤곽선들을 흐려놓는다. 지각과 사유가 불가능한 그러나 궁극적이고도 실질적으로 내재하고 있는 가상의 지대를 끄집어내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믿고 있는 현실이 얼마나 모호하고 비결정적인 토대 위에 세워졌는지, 두 눈으로 똑바로 보이는 시각적 대상조차, 심지어 우리가 확신을 가지고 명명하는 색 조차 사실은 명확히 결정할 수 없는 불안정한 지대 위에 서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가령, 그것은 객관적 확실성에 기반을 둔 고전과학 내부의 역설적 불확실성의 미시적 지대―프랙탈이나 카오스 등으로 색인되는 양자역학적 대상들―이기도 하고, 일상에서 접하는 미디어 실천들―텔레비전, 라디오, 영화, 인터넷, 하이퍼텍스트, 가상현실, 기타 모든 문자 및 이미지 매체들―을 통해 전달되어 우리의 감각체계를 변형시키는 정동의 운동이기도 하고, 주변공간과 대기 전체를 변조시키는 미세한 진동의 유도체가 되어 우주 전체를 표현하는 표면-장으로서의 몸(과 그 예술적 퍼포먼스)이기도 하고, 한 영화배우이자 국가 원수인 어떤 인물 또는 가수이자 우상인 어떤 인물의 몸 위상학이 현실화하는 잠재적 정치의 지대이기도 하고, 심지어는 TV에서 방영되는 축구경기의 경기장 내에서 실제적으로 움직이는 선수들, 축구공, 심판, 관중들 이전에 그 장을 결정짓는 근원적 잠재이기도 하다. 이러한 것들에 관한 논의는 우리가 알고 있고 믿고 있는 현실의 질서를 무화시키는 새로운 비-구도를 발생시킨다.

이것은 궤변이 아니라, 존재의 실질적 토대에 대한 사유의 결과이다. 저자가 끊임없이 미시물리학, 생리현상학, 그리고 신경생리학 등의 영역으로 파고들면서도 다시 빠져나와 문화학과 철학의 사변으로 되돌아가는 이유는, 과학이 철학의 물질적 극한으로 그리고 철학이 과학의 주관적 극한으로 향하는, 또는 물질과 정신이 상호역동으로 향하는, 철학과 과학의 구분불가능한 모호한 지대를 검토하려는 의지 때문일 것이다. 그 두 극한 지점 내에 있는 문화, 역사, 예술, 정치, 미디어 등, 모든 개별적 실천들이 가상계라고 하는 비물형적 효과의 지대, 무차별적 비결정성의 단일한 판 위에서 형성되는 과정이 우화처럼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쓸모없음을 자랑스럽게 추구하고, 총체적 기능을 파편화하며, 비-의미로써 두통을 생산하는 이 책의 기능과 의미, 즉 메시지는 무엇인가? "현실과 세계는 미리부터 주어지지 않는다". 이 불확실성의 확실성 또는 비존재의 존재성이 함의하는 바, 세계는 주어진 것이 아니라 창조하는 것이다. 주체는 그 자신의 주체성을 창조한다. 말하자면 세계는 그 자신을 생산한다. 과학도 아니고 철학도 아닌, 논문도 아니고 예술작품도 아닌(소설인가? 시인가?) 마수미의 이 모호한 텍스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지점은 다름 아닌 능산적 자연이라고 하는 스피노자주의의 윤리적 개념일 것이다. 나아가 마수미의 텍스트가 질문하는 바를 이렇게 요약해보자: 근원적 환경으로서의 비결정적 실재로부터 결정적 현실과 의미의 주체가 창조되는 것은 어떠한 질적 과정(혹은 추상화 운동)을 통해서인가?

(<가상계>(갈무리, 2011), 역자후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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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접학 또는 근접공학(proxemics)이라는 분야가 있다. 인간들이 의미를 전달하고, 감정을 느끼고, 의사소통을 하는데 있어 공간이 차지하는 영향 관계를 연구하는 분과이다. 커뮤티케이션을 연구하는 쪽에서 언급되는 이론인데, Edward Hall이라고 하는 문화인류학자는 자신의 저서 The Hidden Dimension에서 인간의 소통관계에 따른 거리영역에 대해 흥미로운 구분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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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령, Intimate Distance Zone은 부부나 연인과 같이 육체적이고 실제적인 접촉이 가능한 영역이고, Personal Distance Zone은 친한 친구끼리 사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영역이다. 악수라든가 가벼운 접촉, 혹은 사적이고 진지한 대화가 가능한 영역이다. 이 영역은 육체적인 지배의 한계점을 이루는 공간이기도 하다. Social Distance Zone은 직장이라든가 동아리 집단에서처럼 업무를 처리하고 집단적인 행동을 도모할 수 있는 영역이다. 그에 따르면 이 공간은 집으로 찾아온 우체부와 집주인, 상점에서 점원과 손님간의 소통공간을 이루고 있다. Public Distance Zone은 소통 하기에는 가장 멀고 광범위한 영역인데, 강연이나 연설과 같이 공적인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정도의 공간이다. "영토유대"가 가장 멀기 때문에, 진실과도 가장 거리가 먼 언어를 구사하는 영역이기도 하다.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양태에 따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감각적 반응에 따라 소통이나 감정의 상태가 다르고, 따라서 관계의 형태도 달라지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실험이 있는데, 규모가 서로 다른 공간(상자) 속에 같은 숫자의 쥐를 각각 수용한 뒤에 행동을 관찰했더니, 좁은 공간의 쥐들이 넓은 공간의 쥐들보다 성향이 포악해졌다는 것이다--심지어는 서로 물어뜯고, 죽이고, 증오하고 그랬다 한다. 자기를 보존(?)하기 위해서인지, 가까운 곳에 다른 쥐들이 있을 경우, 공간압력을 받아 위협감을 느꼈다는 것이다. 참 역설적이다. 아마도 도시인들이 시골사람들에 비해 사납고, 포악하고, 적개심이 더 강한 이유도 바로 저와 같은 환경 속에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비좁은 공간, 가려진 하늘, 밀집된 주거공간, 인간을 위해서가 아니라 산업을 위해 구획된 도시공간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포악해지지 않고 살 수 있겠는가?

그런데 한가지 궁금해진다. 왜 그 실험쥐들은 공간압력에 쉽게 순응해서 자기들을 파괴적인 상태까지 몰고갔을까? 공간이 바뀌어 비좁아 졌다면, 자신들의 습성과 관계를 바꾸면 되지 않았을까? 근접공학에서 말하듯이, 공간 구역에 따라 친밀도와 소통의 형태가 달라진다면, 그래서 Social Zone이나 Public Zone이 어떤 우여곡절 끝에 Intimate Zone으로 바뀌었다면, 자기네들의 습성과 관계도 변하면 되지 않을까? 대도시에 사는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대도시에서 포악하고 사납고, 항상 무엇인가에, 타인에게, 화가난 상태에서 살 것이 아니라, 습성과 관계를 바꾸어 버리는 것이다. 우체부와 주인, 상점 점원과 손님, 청중과 연사의 관계가 아니라, 연인이 된다든가, 부부가 된다든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대도시가 사람들을 밀집된 공간으로 내몰고, 그래서 지하철이라든가, 버스라든가, 공원이라든가, 극장이라든가, . . 인간이 사는 모든 영역들이 점점 좁아져서, 타인을 아무리 거부하려고 해도 거부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왔다면, 자기도 모르게 환경에 순응해서 포악해지고 사나워지고 싸울 것이 아니라, 차라리 Intimate Distance Zone에 맞추어 부부가 되고 연인이 되고 친구가 되는 것이다. 만원 지하철에서는 영순씨와 부부가 되어 포옹을 하고, 그 옆에 앉은 영철씨와 의형제를 맺고, 뚱뚱해서 서있기 힘든 광순씨의 애인이 되어 등을 껴안아주고, 공원에서는 철수씨, 용필씨, 순이씨와 자리 문제로 혹은 주차문제로 싸울 것이 아니라 연인이 되어 다함께 잔디밭에서 나체로 뒹굴고, 극장에서는 왼쪽에 앉은 인철씨와 손을 잡고, 오른쪽에 앉은 선희씨와 서로 사타구니를 쓰다듬고, 머리가 커서 앞을 가리는 상철씨와 불알친구를 맺는 것이다. 만인에 의한 만인의 연인! 어려울게 뭐가 있겠는가? 모든 사람들이 부부가 되고, 애인이 되는 것이다. 저 상자속의 어리석은 실험쥐들보다 얼마나 영특하고 합리적이고 깔끔한 생각인가? 위기를 기회로 전환해서, 도시를 냉소의 공간이 아니라 쾌락의 공간으로 바꾸자! 물론 그러려면, 많은 사람들과 절대로 사랑을 못하게 가로막고 있는 현행 결혼제도라든가, 가정법, 민법과 같이 법과 제도부터 바꿔야겠지만 말이다. 그럴 자신 없으면 공간 환경을 바꾸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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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주로 생활하고 있는 건물의 엘리베이터는 두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

하나는 사방의 벽이 거울의 기능을 한다는 사실이다. 아주 잠깐이긴 하지만, 엘리베이터 1평 남짓의 좁은 공간에서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함께 있다고 생각해보라. 낯설고, 멋적고, 어색하기 짝이 없다. 더욱이 이 엘리베이터의 벽은 사방을 반사하기 때문에, 어디에 시선을 두어도 서로를 바라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정면을 보면 그 사람의 정면이 보이고, 측면을 보면 그 사람의 측면이 보이고, 또 모서리 어느 부분을 보면 그의 뒤통수가 보이기도 한다. 내가 볼 수 있는 만큼 나 역시 타인의 눈을 통해 보이게 된다. 이 타인의 지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사람들은 시선을 피해 이러 저리 눈을 돌려보지만, 결코 빠져나갈 수 없는 상대의 시선과 내 시선의 교차로 위에서 헤맬 뿐이다. 어린 학생들 중에는 이 강요스러운 상황에 어쩔줄을 몰라 노골적으로 심경을 드러내기도 한다. 문 앞에 바짝붙어 있다든가, 애써 다른 사람을 무시하려 한다든가, 건방지게 딴청을 피운다든가, 핸드폰을 꺼내 구조의 전화를 걸려 한다든가, 여학생과 함께 단 둘이 갇히는 경우엔 아주 고역이다. . . 어쩌면 이 고약한 환경은 설계자의 계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시선을 회피해가며 서로를 지옥처럼 여기는 사람들에게 교정의 환경을 제공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굳이 일부러 우리의 상황을 의식적으로 확인할 필요가 있을까? 오히려 강요된 환경이 우리를 지옥으로 만들었던 것은 아닐까? 설계자가 그런 의도였다면, 소외를 잘못 해석한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엘리베이터 앞에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으면, 다른 문이 열리려면 한 참을 기다려야 하는데도 서로를 피해 다른 문 앞에 서거나, 아예 뒤로 돌아가 계단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다른 하나는 엘리베이터 문을 여닫는 버튼이다. 이것은 설계자가 아니라 학교 당국, 즉 엘리베이터 운영자와 관련이 있다. 문을 여는 버튼은 정상으로 작동하는 반면, 문을 닫는 버튼은 그 기능이 정지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무리 버튼을 눌러도 문은 닫히지 않는다. 해당 층에서 문이 열리고 나면 미리 기계에 프로그램되어 있는 몇 분이 지나서야 문이 닫힌다. 이 닫힘 기능의 정지는 대단히 불편하다. 목적층이 되어 사람이 나간 후에도 남아있는 사람들은 기계의 작동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약 1분 정도의 시간이 아주 길게 느껴진다. 더군다나 급한 경우엔 더더욱 조바심이 난다. 건물의 사정을 잘 모르는 외부인들은 문이 닫힐 때까지 버튼을 줄창 누른다. 재밌는 것은 기능이 정지되어 작동이 안 되는 닫힘 버튼이 다른 건물의 엘리베이터에 있는 버튼보다도 더 낡아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무엇에 긁힌 자국도 있다. 서울 사람들이 얼마나 급한 성격의 소유자들인지(심지어 학생조차) 알만하다. 그러나 엘리베이터 당국의 이 조처는 나름대로 합리적 고민의 결과로 보인다. 문을 빨리 닫아버리면 여러가지 심리적 경제적 문제가 생긴다. 사람이 나가자 마자 문을 획 닫아버리면 나온 사람은 아주 불쾌해진다. 거부당한 느낌 같은 것을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받았을 때, 크지는 않지만 작은 스트레스가 개인을 갉아먹는다. 쨉도 여러 번 맞으면 한 방보다 크다. 그러나 당국이 이렇게 세심하게 개인의 불쾌까지 고려해서 이런 조처를 내린 것은 아닐테고, 다른 분명한 이유는, 문을 보다 오래 열어두면, 보다 많은 사람들이 탈 수 있기 때문에, 전기세 등 경제적 효율성이 올라가기 때문일 것이다. 이를 생각해서, 사람들은 불편하지만 그다지 문제삼지 않는 분위기이다. 더우기 이제는 익숙해졌기 때문에, 층에서 누가 나가도 서둘러 문을 닫거나, 문이 닫히기를 안달하지 않는다. 활짝 열린 엘리베이터 문 밖을 바라보며 그냥 잠시 동안 멍하니 서 있을 뿐이다.

그것이 익숙해지다보니 이제는 어떤 점에서는 잘 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단 1분 간의 시간이지만, 그 작은 틈 속에서, 막연하지만 인생의 뜻 깊은 어떤 순간을 갑자기 경험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일어날 때가 간혹 있기 때문이다. 막연하지만 말이다.

p.s. 법의 세계는 이러한 막연한 희망조차 불허하는 것일까? 최근에 알게된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있는데, 법원인지 검찰청인지를 들어가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도록 현관문을 거대한 철제 구조물로 조성한 법대 건물의 엘리베이터에는 이 닫힘 버튼을 정지시켜 놓지 않았다. 따라서 이 건물 안에서는 마음대로 엘리베이터의 문을 열고 닫을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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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나 영화 등 예술작품은 두 번 이상 보아야 한다고 흔히들 말한다. 우리의 물리적 생리적 윤리적 한계 때문에, 첫 눈에는 놓치는 것이 너무 많아 전체를 다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번 세 번 이상을 보아야 보다 많은 이미지를 읽을 수가 있고, 또 그러면서 우리는 그 작품들의 새로운 의미들에 눈을 뜨게 된다. 실제로 두 번 이상 보면 그 작품이 새로워진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홍상수의 작품들은 두 번 세 번 네 번 이상을 보아도 새로움이 일어나는 것 같지가 않다. 처음 보았을 때와 두 번 이상을 보았을 때 의미에서나 심경에서나 큰 변화가 없는 것이다. 특별한 의미가 새롭게 태어나는 것도 아니고, 작가의 의도가 다시 보이는 것도 아니고, 놓쳤던 장면조차 다시 보이는 경우가 흔하지 않다. 그의 작품이 어려워서? 즉 감추어진 것이 많아 아직 뭔가가 나오지 않은 것일까? 아니면 반대로, 너무나 쉽고 뻔해서 첫 눈에 이미 다 드러난 것일까? 전자일 수도 있고, 후자일 수도 있다. 둘 모두일지도 모른다.

그의 작품이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단조로운 사건들로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작품 안에 두고 두고 읽어야 할 어떤 의미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가 제시하는 남녀들의 무의식적 의식적 욕망과 충동들이 동일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 형태도 다르고 질도 전혀 다르다. 가령, <강원도의 힘>에서 상권이 여행중에 보여주었던 충동들은 <생활의 발견>에서의 영수의 그것과는 본성적으로 다르다. 또 여인들의 사랑과 분노 그리고 배신 역시 각각의 인물들이 모두 본성적으로 다르다. 그러나 그러한 차이들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들 안에는 자연적 질서의 반복이라는 거대한 자연주의적 주제가 암암리에 내포되어 있기 때문에(가령, 셰익스피어의 소란을 닮은 <해변의 여인>에서의 한 밤의 소란이 해변 밖으로 한꺼번에 쓸려나가 고요해진 아침에 고현정 분이 난간 계단에 앉아 사색에 잠겼다가, 다시 서울로 돌아가기 위해 차에 오르는 놀라운 장면, 또 대부분의 작품에서 인물들이 되돌아가는 장면 등), 그 차이들은 어느새 거대한 파도 속에서 중화되고 단일화 된다. 격동의 시간들은 인간이 아무리 의미의 겹을 쌓으려 해도 결국은 단조롭고 진부한 행동의 아상블라주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아무리 제 각각 날고 기어봐야 멀리서 보면 모두가 언덕을 구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선(禪)의 요소가 지배적이고 또 선을 추구했던 오즈 야스지로(Ozu Yasujiro)의 세계처럼, 홍상수의 화면에는 주름이 없다. 심지어는 주름과 의미를 만들지 않고 지우는 것이 그의 목적이 아닐까 싶을 정도이다. 여러 번을 보아도 새로운 의미가 나올 것 같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오히려 주름이 너무나 거대해서, 마치 지구의 자전 소음을 우리가 들을 수 없듯이 혹은 태산의 느리지만 강렬한 변화를 우리가 알아차릴 수 없듯이, 주름을 식역 저편에서만 어렴풋이 경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산자락에 끼어 있는 화가가 어떻게 산의 거대한 피마준(披麻皴)을 구사하겠는가?

그런데 최근에 홍상수는 자신의 영화에 영화 감독을 직업으로 삼은 인물을 등장시켜, 자유간접화법 형식으로, 마치 자신의 예술관을 변명하고 옹호하는 듯한 제스쳐를 취한다. 일부 비평가들을 의식해서인지, 자신의 자발적 불만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는 자신의 세계에 스스로 회의감을 품었거나, 아니면 회의적 비전을 의식했거나, 최소한 그것을 사색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의 작품들 속에 등장하는 많은 감독(김상경, 김승우, 이선균 등이 맡았던)들이 영화의 의미(목적, 기능 등)에 대해 말했던 내용이 어떤 일관성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그리고 이 일관성은 최근에 개봉한 <옥희의 영화>의 이선균 분이 시사회에서 술김에 잠깐 진담으로 내뱉은, 아주 모호하고도 혼란스러운 그 "깔때기 이론"에서 다소 분명해지고 있는 것 같다. 그 논조는 물론 예술적 편협, 왜곡, 기만 등에 관한 비판을 담고 있다. 그가 일관되게 구사하는 특유한 화면의 질이나 편집의 양태 또한 이러한 논조를 정당화 한다. 그러나 점점 그의 작품들이 전개되어가는 가운데, 한 가지 의아스러운 것은, 위에서 말한 홍상수의 두 세계(개인적 욕망과 충동의 세계와 반복의 세계)의 역학과는 판이하게도, 이 감독들(홍상수 자신일 수도 있는)은 모든 예술적 시도와 창조조차 편협이나 왜곡으로 혼동하거나 그 둘을 동일시하여, 결국은 아이러니하게도 편협과 왜곡을 피하려는 자신들의 노력이 자기도 모르게 영화를 지리멸렬한 몸짓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하고", "만들어 놓는" 것은 아닌가 싶은 것이다. 투명해지고 단순해지려는 시도가 어쩐지 무의미와 공허를 창조하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한편 반대의 측면에서 생각해 보면, 이들의 생각은 영화를 세계와 혹은 사물 자체와 혼동하는 것은 아닌지, 심지어는 영화를 진리나 실체와 혼동하는 것은 아닌지, 결국 영화에 대한 무의식적 과대평가로 인해, 영화와 현실의 혼동에 이르게 되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영화가 현실과 동일한 그 무엇, 혹은 동일한 밀도의 그 무엇이어야 한다면, 무엇 때문에 그 비좁은 프레임과 필름 공간 속에 현실을 담아야 할까?

자신도 모르게 어떤 세계가 우연적으로 그려진 것이 아니라, 그 세계를 의식하고, 일관되게 체계적으로 그 세계를 창조하는 사람을 우리는 거장이라고 부른다. 아직은, 아니 아직도 어렴풋이 보이는 그의 거대한 세계가 자신도 모르게 해댄 어떤 우연한 몸짓이 아니라 의식적 고뇌에서 나오는 것이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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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니 어제, 그러니까 토요일에, 옛날에 알고 지내던 사람들을 만났다. 점심만 먹고 일찍 나오려고 했는데, 예상했던 것과 달리 저녁에 시간이 좀 남았고, 특히 보고 싶었던 반가운 얼굴이 있어, 저녁 내내 수다를 떨었다.

안 만나던 옛날 사람들을 다시 만나는 것은 상반된 감정이 교차한다. 다시 잘 지낼 수 있을까? 라는 관계에 대한 의구심 혹은 바램, 그리고 다른 한 편엔 불안. 서로에게 익숙해 있고, 서로의 주름 속에 숨어있는 것들을 이미 여러번 보아왔기 때문이다. 결국 바램은 상투적인 반복으로 치닫기 일쑤이다. 이 두 가지 반대되는 감정들이 수다를 떠는 내내 서로를 가르고 있는 테이블 위에서 긴장한다.

그러다가 전혀 새로운 이완상태로 가는 대화를 하기도 한다. 가령, 이런 것이다. 요즘 실버타운에 입주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실버타운에 입주하려면, 보통 보증금 7억에 월 200만원. 그 이상이 훨씬 넘는 곳도 있다고 한다. 그곳에 들어가면, 비슷한 노인들끼리 잘 짜인 프로그램과 복지서비스로 여생을 보낸다. 말하자면 천국의 이미지를 돈으로 현실화시킨 곳이다. 물론 저 만큼의 돈을 내야 가능한 얘기다.

뭐 어쨌든 그렇다 치자. 그런데 문제는 이 노인들이 이곳에서 행복하지가 않다는 것이다. 안 보아도 알 수 있을 그 뻑쩍지근한 천국에서 말이다. 그래서 실버타운에 입주한 노인들이 자식의 집에 가끔씩 들렀다가, 갈때가 되면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고집을 부리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가족과 떨어져 남들과 어울리는 것은 젊을 때나 가능한 일인가보다. 나이가 들면 따뜻한 정을 느끼며 살아야 하는데, 남들끼리는 그러기가 쉽지가 않다. 가령, 그들은 서로 마주보고 앉아 누구 자식이 무슨 직업이고, 돈을 얼마나 벌고, 부모에게 몇 번 찾아와 주고,.. 서로 지지 않고 주눅들지 않기 위해 힘자랑, 돈자랑, 자식자랑, 가문자랑, . . . 뭐 이런 얘기들을 하고 있다고. 그래서 자식에게 오면, 그곳에서 알고 지내던 사람들의 흉을 보고 분개하면서, 다시 그 지옥으로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10년이나 더 살지 말지가 코앞의 걱정인 사람들이 사력을 다해 추구하고 있는 삶과 대화의 주제들이 저러한 것이라면, 이들이 살았던 삶과 철학(?) 그리고 그 자식들의 삶이 선연해진다. 보증금은 그렇다치고, 매달 수백만원을 낼 수 있는 노년의 재력가가 되기 위해 살았을 인생 전체, 그리고 틀림없이 자신과 비슷한 삶을 가르쳤을, 불쌍하지 않지도 않고 불쌍하지도 않은, 그 자식새끼들의 삶 전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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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겁고 축축했던 올 여름 날씨처럼, 8월 들어(특히 지난 주와 이번 주) 유난히 내 일상과 주변이 끈적거리고 지겹다는 느낌이 들었다. 말끔히 건조시켜 잊어버리기 위해 광릉수목원을 다녀왔다. 처음부터 계획했던 것은 아니었고, 친구 H와 점심식사 메뉴를 토론하다가 갑자기 내린 결정이었다. 광릉 근처에 유명한 불고기 집이 있다며 H가 부추겼고, 나는, 고작 불고기 때문에 그 멀리 가자고? 그렇게 해서 핑계거리를 급조한 것이 수목원이었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고, 한 번은 가보고 싶었던 것이 이유였다. 이곳은 1주에 단 하루만, 그것도 예약을 통해서만 입장을 허용한다. 서둘러 인터넷으로 입장 예약을 하고는 H의 차에 올라탔다.

구불구불 찾아가지 않고 주로 대로로 다녔기 때문에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초행길이었지만, 갈 때는 내가 운전을 했다. 광릉 지역의 숲에 이르자 국지성 호우가 쏟아져 시야를 가렸다. 숲길이 구불거려 스릴감이 있었다.

수목원 안에 나 있는 숲길과 호수가 차분했다. 비가 내려 습기를 머금은 숲이 여기저기서 안개를 뿜어댔다. 호수의 물안개는 신령스럽기까지 했다. 숲길을 걸을 땐 땀이 났지만, 잠시 앉아 냉커피를 마시는 동안 우람한 나무의 시원한 입김이 몸을 서늘하게 하는 것 같았다. 잠시 눈을 감고 깊은 숨을 내쉰다. 습한 대기에 실린 깊고도 은은한 숲의 냄새들이 뒤섞여 가슴 속으로 들어왔다. 잔잔한 호수, 노니는 물고기, 안개에 젖은 검은 산, 푸르고 푸른 나무와 숲, . . . 모두가 완벽한 하나의 정물(still life)처럼 보였다. 항상 똑같아 보이고 특별할 것 없이 진부해 보이지만, 자연은 인간에게 도시의 진부함이 줄 수 없는 보편적 해방감을 준다. 잠시만이라도 그 안에서 그들 곁에 있다 나오면, 우리는 어느새 그들처럼 무심해지고, 초연해지고, 혼란스러웠던 동요가 가지런해져,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감을 느낀다. 우리를 포함하고, 우리 안에 있는 이 자연으로부터 워스워즈(William Wordsworth)와 같은 몇 몇 낭만주의자들이 "가장 완벽하고도 순수한 이성의 이미지"를 보았던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앉아 잠시 동안 작은 토론을 벌였다. 나와 친구는 서로 반대의 성격이었다. 나는 항상 욕망에 차있고, 무엇인가를 하고 싶어하며, 먼 곳을 주시하는 쪽이었다. 나는 그것을 열정이라고 주장했지만, H는 결핍감이라고 진단했다. 반면 H는 감정의 기복이 심하지 않고, 큰 욕망에 이끌리는 일이 많지 않으며, 또 쉽게 자신의 욕망을 포기할 줄 알았다. 쉽게 쾌활해지는 법도, 그렇다고 쉽게 우울해지는 법도 없었다. 표정에 큰 변화가 없는 H는 미간을 구기며 먼 곳을 주시하기 보다는 평온한 모습으로 자신이 서 있는 바로 그곳을 생각하는 편이었다. 불규칙적인 나의 일상이 항상 "왜?"라는 질문으로 밤을 새우며 허우적거리는 동안, 규칙적이고도 무미건조해 보이는 H의 삶의 관건은 주로 "무얼 할까?"라든가 "어떻게 가야 할까?"에 있어 보였다. 광릉까지 가기 위해 수목원이라는 명분이 필요했던 나와는 달리, H는 불고기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어디든 갈 위인이었다.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고 해서 연연해하지도 않았다. 때로는 사람이 가벼워 보이기까지 했다. 부질없는 큰 욕망을 포기하면 현재의 작은 욕망들이 중요해진다며, 이렇게 부질없는 욕망을 중화하는 법은 유년기부터 터득한 것이라고 H는 자부했다. 나는 그것이 지혜의 결과가 아니라 좌절과 포기의 결과라고 말해주었다. 희망이 실현되지 못하는 일이 반복될 때(특히 유년기에), 우리는 절망감의 충격을 다시 맛보기가 두려워 욕망을 애초부터 피할 때가 있다. 결국 욕망의 중화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삶을 쾌락이라고 믿고 있는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내 말이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욕망을 중화하려는 시도 자체가 욕망이 너무 큰 것이 아니냐고 덧붙이면서. 그러나 H는 채울 수 없는 것을 다 채우지 못해 고통스러워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자신이 에피쿠로스(Epicurus)라도 된 것처럼 역설했다. 그것은 마치 메뉴에도 없는 음식을 주문하면서 식당 주인을 불러 불평하고 타박하거나 요식업소가 갖추어야 할 기본자세를 연설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베켓(Samuel Beckett)의 두 인물 블라디미르(Vladimir)와 에스트라공(Estragon)처럼, 우리는 다소 진부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욕망에 관한 기본적인 두 입장을 대변하는 듯한 포즈로 잠시 동안 서로 대립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 두 입장이 정말로 우리의 상태를 말해주고 있는지도 확신할 수가 없었다. 내가 정말로 블라디미르의 욕망을 대변하는지, H가 정말로 에스트라공의 욕망을 대변하는지, 심지어는 나와 H가 정말로 대립하는 캐릭터인지조차 명확히 말하기가 어렵지 않은가? 오히려 저러한 문학작품이나 철학이나 인류사를 통해 익히 알려진 욕망들을 H와 내가 역할연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토론은 중단되고, 우리는 빗방울이 퍼뜨리는 동심원으로 가득한 호수의 표면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폐간 시간(오후 6시)이 다 되어 수목원을 나와 바로 그 불고기 집으로 향했다. 멀지는 않았지만 지도를 보고 찾아야 했다. 찾기가 쉽지는 않았다. 지도가 정확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식당의 간판이 없었다! 식당을 지나쳐 한 참을 더 가서 막다른 길이 나오고 나서야 길을 잘못 들었음을 알았다. 다시 뒤돌아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를 더듬어 찾아야 했다. 결국 우리는 한참 동안 헤맨 끝에, 주변에 피어 오르는 연기와 고기 굽는 냄새의 진동으로 식당을 찾을 수가 있었다.

식당주인은 우리더러 1시간 반을 기다려야 한다고 의기양양하게 엄포를 놓았다. 더구나 식사도중에 추가로 주문이 안 되기 때문에, 미리 여유롭게 식사량을 주문하라고 권고했다. 손님이 너무 많아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잠시 망설였다. 한끼 식사를 하기 위해 1시간 반을 기다려야 한단 말인가? 이 허름하고 지저분한 재래식 고기 집에서의 한끼를 위해? 예약을 하려면 빨리 하라며 다음 손님을 부르는 주인 때문에, H는 일단 예약을 하고 보자고 서둘러 말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이대로 그냥 가기에는 아쉽다며. 식당 안에서는 변변히 앉아있을 곳도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쫓기다시피 예약을 한 후 밖으로 나왔다.

1시간 반을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며, 당연히 나는 불평을 했다. 식당주인을 비롯하여, 그 식당을 과장해서 홍보하는 풋내기 블로거들이 음식문화를 망치고 있다고.

흔히 맛집이라고 알려져 많은 사람들이 찾는 식당을 가보면, 대부분 식당주인의 오만방자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그들은 손님들의 사랑에 겨워 아무렇게나 해도 사랑이 지속될 것이라고 착각을 하고 있다. 저 고기집의 주인은 간판조차 붙이지 않고, 멀리에서 그곳을 찾는 손님들을 애먹이며 즐거워한다. 애먹는 동안 그 배고픔과 결핍감을 보상하기 위해 손님들이 더 크고 많은 욕망을 자신에게 쏟아 부어줄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이다. 욕쟁이 할머니 식당이 그렇듯이 배짱을 전략으로 내세운 건지도. 추가주문을 받지 않는 것 역시 터무니 없었다. 그것은 마치 부족한 자원을 호들갑스럽게 선점하려고 달려드는 부동산업자처럼, 자신의 필요와 욕망을 과장해서 예측하고 해석하도록 부추긴다. 심지어 소비의 강요이기까지 하다. 결국 멀리에서 온 손님의 대부분은 평소보다 많은 양을 주문할 수 밖에 없다. 또 식사를 위해 식당에서 1시간 30분을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은, 그 식당의 명성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식당 주인의 비양심적인 상술을 보여줄 뿐이다. 그 시간을 기다려야 식사를 할 만큼 손님이 많다면, 식당의 수입은 매우 높을 것이고, 손님들의 사랑에 대한 보답 차원에서라도 매상의 일부를 투자하여 매장을 넓혀 그들에게 갚아야 한다. 그러나 식당은 수 십 년 전에 지었을 법한 판자집 형태 그대로이다. 바닥이며, 화장실이며, 그 모든 것들이 무허가 건물처럼 허접스럽다. 자신을 찾아오는 손님들이 그렇게 오랜 시간 딱히 앉을 곳도 없는 상태 속에서 기다리는 모습을 보며 즐거워하는 부류의 인간이 과연 음식재료는 제대로 쓸지. 욕망을 과장하고 강요하는 주인의 역겨운 얄팍함을 생각 없이 홍보하고 묵인하면서, 사진을 찍어가며 선전하는 블로거와 이를 또 기다리며 참는 일에는 이골이 난 우리들. 모두가 힘을 합쳐 입맛을 떨어지게 하고 있다고.

이 합리주의적 분노와 불평에 대해 H는 결과론적 낙천주의로 일축했다. H의 생각은 아주 간단하고 명료했다. 맛있다고 하니까, 일단 여기까지 왔으니 먹어보자. 아무리 고치려고 해 봐야 고쳐지지 않는다. 힘들게 왜 내가 그걸 비판하고 괴로워하나. 어차피 마음에 들지 않으면 두 번 다시 안 오면 된다. 우리는 밥을 먹으러 왔지 요식업소 감찰을 나온 것은 아니잖아. 그러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평온한 표정으로 근처에 있는 마트에 들어가 애피타이저(appetizer)라며 오렌지 주스 한 병을 사들고 나오는 것이었다. H의 낙천주의는 대식(大食) 취미로 뚱뚱해진 회의론자(agnosticism)의 아이러니를 조금 닮아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H의 기대를 채워주지 못했다. 고기는 식어 있었고, 양도 그리 많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식당 분위기가 어수선하여 맛을 음미할 수가 없었다. 뒤에서 기다리며 앉아있거나 서 있는 사람들, 지저분한 행주를 들고 쟁반을 쨍그렁 거리며 눈치를 보며 부지런 떠는 종업원들, 뛰어다니는 아이들, 뭐가 좋은지 애를 안고 식당 여기저기를 어슬렁거리며 가정적이고 행복한 아버지-남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는 오버쟁이들 . . . . 기대하던 고기 맛도 그다지 훌륭하지 않았다. 직접 식당 측에서 구워서 내 왔는데, 얇은 돼지고기를 살짝 양념을 하고 구워 불에 그을린 맛이 약간 특이하긴 했지만, 너무 달았고, 또 웬만한 고깃집이면 맛볼 수 있는 흔한 맛에 불과했다. 된장찌개가 조금 맛이 있었지만 그 역시 특별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수시간을 기다리면서 기대할 만한 그런 음식이 결코 아니었던 것이다. 공중화장실에서 서둘러 배설하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은 분위기 속에서, 우리의 식어빠진 식사는 10분도 채 되지 않아 끝나고 말았다.

짜증이 난 쪽은 내가 아니라 H였다. 이미 식당 당국의 모든 처사들에 대해 실망한 나는 음식 맛에 대해서도 기대감이 없었기 때문에, 이 좌절된 욕망이 오히려 통쾌하기까지 했다. 식사가 끝나고 평온한 욕망의 중화상태로 앉아 있던 내 앞에서 H는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식당을 둘러 보았다. 수목원에서 H와 내가 서로 대립되어 자신의 욕망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익숙하게 알려진 욕망의 대변인이 되어 논쟁을 벌였던 것 처럼, 사람들은 누군가가 말로 전달해 준 맛을 이 식당에 직접 찾아와, 터무니 없는 기다림과 음식 맛에 대한 자기 암시를 되뇌며 손수 몸으로 미디어를 재연하고 있는 듯 했다. 감각조차 주어진 대본대로 연기가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포만감은 커녕 허기를 느끼며, 우리는 서울로 돌아왔다. 내가 말이 없어서 그랬는지, H는 차선도 자주 바꾸어 가며 평소보다 거칠게 운전을 했다. 비는 그쳤지만 축축해진 아스팔트에서 바퀴소리가 추적거렸다. 서울에 다 올 때 쯤 우리는 그 고깃집을 이미 다 잊어버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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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퍼플코메디(purple comedy)라고 부르고 싶은 <하녀>를 발표한 임상수 감독. 수 년 전 그는 블랙코미디스러운 <그때 그 사람들>을 통해 권력의 이면 아니 정면을 잘 보여주었었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어째서 임상수 감독은 작품 속의 대통령 역으로 송재호 씨를 캐스팅 했던 것일까? 독선적이지만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 이미지가 지배적으로 만들어지고 조작되었던 박정희씨를 닮은 구석이라고는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 배우를 말이다. 예상과는 달리 그 작품에서는 성대모사도 없었고 흉내도 없었던 것이 의아스러웠다.

성대모사와 흉내가 가장 빈번히 그리고 가장 격렬하게 추대되는 곳은 다름 아닌 정치판이다. 그의 흉내를 내며 그 후광에 기생하려는 현실정치인들이 간혹 있었는데, 이들은 한결같이 어떤 사진 하나를 모사하곤 했다. 그 사진은 공공건물이나 학교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동네 이발소에서조차 어릴 적부터 보아오던 것이었다. 한때 얼굴이 약간 비슷하다고 알려진 어떤 정치인은 선거 기간 내내 그 사진의 모습과 똑같은 구도로 카메라 앞에 서서 목에 부목을 한 것처럼 힘을 주고 다니곤 했다. 단정하게 빗어 4:3 비율로 가림마를 넘긴 특유의 각진 헤어스타일, 정면을 보는지 측면을 보는지 아니면 어떤 대상을 주시하고 있는지 조차 꼬집어 말할 수 없어서 뚫어지게 살펴보면 약간 사팔뜨기 끼가 있어 보이는 모호한 시선(이것이 권력이다!), 윤기가 흘러 빛을 반사하는 듯한 이마와 콧 잔등, 살짝 다문 입술과 돌출한 듯한 입, 작지만 단단해 보이는 얼굴 윤곽선, 야무지게 달려있는 귓 볼, . . . 모든 가치들이 융합되어 있는 듯 하면서도 아무 가치들도 없는 듯한 이미지.

임상수 감독이 인물 캐스팅을 그렇게 한 이유가 코메디였기 때문이었을까? 코메디였다면 더욱 더 비슷한 이미지를 도입했어야 하지 않을까? 오히려 원본보다도 더 원본 같아 원본을 능가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더라면, 그 과장과 왜곡이 풍자를 실감나게 했을 것이다. 위에서 말한 그 정치인이 이에 해당한다. 그는 원본을 능가하여 원본을 닮고자 했기 때문에, 즉 그 자신을 지우는 과정이 그를 코믹하게 한 것이었다. 닮아가고자 애를 쓸수록 처음의 의도와는 달리 원본은 희화화의 가능성이 커진다. 어쨌든 임상수의 작품이 일종의 코메디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부적절한 캐스팅의 이유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추측으로 미루어 보건대, 임상수가 의도했던 것은 권력의 '아이콘'은 아니었던 것 같다. 닮은 모습이란 본질적이기 보다는 신비화되거나 주어진 이미지일 경우가 많다. 그것은 복원이라는 목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며, 복원은 반드시 복원해야 할 이유를 가진다는 점에서 본질이나 실상과는 멀어질 수 밖에 없다. 수많은 역사드라마나 상업 주류 영화의 인물들이 중압감 있는 대사와 자세를 취하는데도 불구하고, 그 무섭게 부라리는 눈매 이면에 항상 코믹한 요소를 빠지지 않고 실어나르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이것이 기호로서의 아이콘의 운명이다. 아이콘은 닮음이 아니라 오히려 원본의 부정에 가깝다.

임상수가 원했던 것은 물론 아이콘이 아닌 '권력의 실상'이었을 것이다. 어떤 실상? 다시 말해 어떤 권력? 그가 생각한 권력은 나쁜 권력도 아니고, 포악한 권력도 아니고, 사디즘도 아니고, 잔인한 권력도, 냉담한 권력도 아니다. 비판과 비난을 받는 동안에도 어떤 위대함을 머금고 있는 그런 권력이 아니다. 그렇다고 친숙하고 자상한 권력 역시 아니다. 그런 식으로 극화된 권력이 아니라 찌질한 권력! 이것이 임상수가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즉 어떤 막연한 추상으로서의 권력이 개인을 통해 육화할 때, 아니 개인이 그 권력을 모사하고 재현하고자 할 때, 그것이 얼마나 유형적으로 물화가 되어 지질한 행태들로 변질되는지를 말이다. 그 행태를 열거하기란 얼마나 쉬운가! 건설업계 똘마니들을 법적으로 비호해주고, 그 댓가로 초중고 학부모들이 자식을 잘 봐달라며(아이러니하게도!) 담임선생들에게 주는 용돈보다는 조금 더 많은(학군에 따라 다를 수도 있지만) 금전의 비호를 받으며, 잘나가는 딴따라 여가수를 불러 앉혀 놓고 치마 속에 손을 넣어가며, 양주를 홀짝이며, 술에 취해 풀린 눈으로 징징 거리는, 소위 술집 여종업원들의 용어로 말해, "일반인 보다 더 난해하게 놀아대며," 그 댓가를 물건들로 교환해버리고 마는 찌질하기 그지 없는 권력. 임상수가 본 권력은 코웃음 밖에는 터져나올 수 없는 그런 성질의 하찮은 것이었다. 말할 수 없이 지리멸렬한 분위기의 배우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때 그 사람들>에서는 우스꽝스럽고도 찌질한 권력의 실상이었다면, <하녀>에서의 권력은 직접적으로 모방권력, 즉 흉내와 연기로 재현하는 권력을 향해 있다. 권력의 흉내는 우선 제스쳐들을 통해 육화된다. 미디어에서 그리고 그것을 따라하는 일반인 찌질이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일명 법조계의 제스쳐가 좋은 예이다. 똘마니들 앞에서 비만스러운 커다란 덩치를 이리저리 흔들어가며 걷는다든가, 윗 저고리가 반쯤은 벌어질 만큼 배와 가슴을 떡하니 내밀고 앉아 몸으로 말을 하고 싶어 한다든가,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는 부하 찌질이들을 좌우로 내려다보며 거만하게 훈시를 내리는 포즈를 취한다든가, 손가락질 하나로 사람을 부른다든가. 이러한 모든 양아치스러운 제스처와 포즈는 지배력을 '보여주기' 위해 혹은 '나타내기' 위해 저변화되어 암암리에 '학습받은' 것으로, 마치 신분을 나타내는 이름표와도 같다. 권력을 암시하는 제스쳐를 취하는 순간, 즉 이러한 이름표를 다는 순간, 익숙하게 보아온 어떤 전도가 일어난다. 역할을 부여받은, 그것도 매우 잠시동안, 폼잡고 사진 한 방 박을 새도 없이 임시로 위임된 지위가, 어느새 어떤 힘을 스스로 생산하는 것처럼 보이는 권력이 된다. 권력이란 흉내, 즉 물화된 형상을 통한 연기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소품들, 전시물들, 전리품들 같은 것이 필요해진다. 이정재 분이 홀짝이던 와인이나, 아침마다 두들겨대는 여유로운 피아노, 가정부에게조차 요구되는 하이힐과 정장, 엄격한 식사시간, 널직한 소파와 같은 것이 그것이다. 그러한 소품들은 이정재 분의 우악스러운 눈매나 인상착의, 무엇보다도 부잣집 아들이라는 선천적-사회 계급에서 흔히 느껴지는 코믹스러운 안하무인 무지막지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걸쳐져야 할 예복의 기능을 한다.

권력과 똘마니의 관계는 관력관계가 아니라 계약관계이다. 둘 모두가 계약의 주체가 되어 서로 종속되어 있는 것이다. 위험성의 정도를 따지자면, 실은 그 관계는 뒤바뀌어 있기조차 하다. 말하자면 그들의 관계는 "권력이 똘마니를 비호하는" 구도가 아니라, "물주에게 고용된 깍뚜기 혹은 기둥서방"의 구도와 같다. 스폰서라는 용어가 이를 잘 말해준다. 흔히들 공정하고 자유로운 경쟁을 부르짖으면서도 약육강식의 사회를 묵인하고 따르는 경제적 이율배반 속에서, 사업을 하려면 법의 비호를 받아야 하는데(그런 점에서 법이란 상부구조가 아니라 순수하게 하부구조적이다), 그러려면 법-물리적 수단으로 비호를 해주는 장정에게 술도 사주고 떡값도 주어야 할 것이다. 개인들이 누리는 권력의 실체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잠시 술잔을 기울여 와인을 홀짝이며, 혹은 다리를 뻗고 소파에 누워 있는 동안 두 손을 모아 와인을 따라주는 정장차림의 가정부를 바라보며, 자신이 무엇인가를 닮은 것 같은 느낌에 도취된 쾌감. 힘 혹은 역량이 특정 개인에 의해 물화(物化)될 때, 그것은 권력이라는 이름으로 이렇게 찌질하고도 코믹한 흉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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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을 배치하든, 이미지를 배치하든, 아니면 단어나 소리를 배치하든, 일정한 형식의 배치는 의미를 만든다. 배치하는 어떤 사람의 의지나 바램을 나타내기도 하고, 배열된 것을 바라보는 누군가의 기억을 불러오기도 하고, 그 배치된 특정 모양이 일으키는 어떤 연상으로부터 유쾌함이나 불쾌함을 유발하기도 한다. 나무 아래에 기대어 앉은 사람, 낭떠러지 위에 놓여진 신발, 주먹으로 움켜쥔 붉은 깃발, 머리에 꽂은 꽃, . . . 이 모든 배치들은 특이한 형상과 의미와 정서를 촉발하여, 그로부터 어떤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사물들의 배치는 구성, 이미지들의 배치는 몽타주, 그리고 단어들의 배치를 통사(syntax)라고 하는데, 이 모두는 의미를 일으키는 형식적 틀이다. 즉 우리는 배치를 통해 특정한 관계를 형성하고, 그 관계의 한 당사자로서 혹은 관계를 바라보는 관찰자로서 거기에 자신의 바램을 투사하며 살아간다. 맥루한(Marshall McLuhan) 식으로 말해 메시지를 창조하는 것이다. 이 배치를 통한 메시지를 가장 빈번하게 실천하는 분야는 물론 저널리즘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단지 알려진 사실들만을 종이에 일정한 형식으로 배열만 했는데도, 우리는 그 뉴스가 정치적으로 좌파인지 우파인지, 혹은 반정부적인지, 친미국적인지 등과 같은 시대적 화두를 판단할 수가 있다.

물론 배치가 교묘하여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 교묘함이 더하면 더 할 수록 메시지의 농도는 더 진해지고, 떨쳐버릴 수 없을 만큼 둔탁해지며, 깊숙이 파고드는 무엇인가가 우리의 신체와 관념에 작용한다. 가령, 최근에 주류언론(관치언론)이 자주 사용하는 공포의 배치가 좋은 예이다.


붉은 줄로 표시한 두 기사들은 서로 순서를 바꾸어가며 며칠 동안 등장한다. 이 두 기사의 관계는 물론 "공포"라고 하는 현대적 무의식을 둘러싼 정치적인 문제이다. 배열의 순서만을 바꾸거나 서로 다르게 함으로써, 그 메시지의 방향과 의미는 전혀 달라지긴 하지만 말이다. 중요한 것은 생물학적 공포가 단지 불가피한 재앙 혹은 자연 재해의 이미지로 등장하는 반면에, 그것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회적 대응들의 성격이 암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자연적 혹은 생물학적 재해 그 자체는 정치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면이 덜하거나 거의 없지만, 그것이 사회적 특정 행위들과 연결되면 마치 그 공포가 사회적 행위의 결과인 것처럼 둔갑해버린다. 두 기사가 지속적으로 같이 붙어 다니는 과정에서 우리는 공포의 원인과 결과 혹은 최소한 공포의 강화 혹은 약화의 특유한 관계들을 우리 스스로가 구성하게 되는 것이다.  두 기사 어디에도 서로를 지칭하거나 서로를 언급하는 내용을 찾아 볼 수 없는 경우일지라도, 두 개의 공포가 서로 붙어있다는 것 만으로도 굉장한 자장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다. 그 에너지는 우리의 집단적 꿈과 기억 그리고 거칠고 저속한 이미지의 형태로 우리의 영혼을 잠식할지도 모를 일이다.

이와는 반대로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는 특정 인물이나 사건 혹은 어떤 이미지를 감추면서 동시에 다른 무엇인가를 들추어내기 위해, 두 뉴스의 배치를 멀리에 두는 경우도 있다.

위 쪽에 배치된 기사는 최근에 뜨거운 이슈가 되고 있는 지방행정도시 문제를 둘러싼 여당과 야당의 충돌이라는 정치적 사안과 관련이 있다. 그 충돌의 와중에 여당 측 한 여자 의원을 위시한 몇 몇 의원들이 야당에 유리한 발언들을 쏟아내고 있는 중이었다(그녀는 지방에 행정도시 추진을 반대하거나 7번 기사처럼 수정을 원하는 여당에 반대한다). 그 여자 의원은 현재 여당의 우두머리 격인 행정수반과 대선 때부터 줄곧 반목과 경계를 거듭해 온 터였는데, 계속해서 수세에 몰리다가, 여당이 패한 얼마 전 보궐선거에서 드러난 여론을 등에 업고 세를 모으기 위해 모처럼의 기회를 이용하여 몇 마디를 한 것이었다. 한편 아래 쪽에 배치된 기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그 여자 의원의 부친이다. 그는 수 십 년 전에 오랫동안 군사독재 정권을 지속해 오다가 자신의 부하에게 총을 맞고 죽은 군인출신 대통령이었다. 문제는 그가 일제식민지 시절 일본 사관학교 출신이었고, 그 동안의 조사에 따라 친일인사로 분류된 서적이 곧 출간될 예정이었는데, 여기에 덧붙여 일제에 혈서로 충성을 맹세한 친일행각 기록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그의 친일은 이미 많이 알려져 있었으므로 특별히 놀랄 것도 없음에도, 난색을 표하며 그의 과거를 다루는 기사를 선택하고 배치한 저 능청! 이 배치의 관점은 역사가 아니라 정치적인 것에 있으며, 이로써 언론사가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어떤 메시지, 즉 동떨어져 보이는 두 사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밀접한 관련성을 통해, 헌법 13조 3항에 위배되는 연좌제(緣坐制) 비스무리한 어떤 증오의 도식이 함축되어 있다. 저 배치는 특정 정치인사의 반(反)여당적 일탈에 대한 관치저널리즘의 전형적인 대응이라고 할 만한 것이다. 기사 8번을 위에서 내리누르는 7번 기사와 아래에서 치고 올리는 9번 기사, 그리고 10번으로 연결되는 배치의 미학을 보라!

맥루한에 따르면 현대의 미디어에서 빈번히 목격할 수 있는 미디어구도의 전형이 있는데, "나쁜 뉴스"와 "좋은 뉴스"가 바로 그것이다. 물론 나쁜 뉴스란 열광, 분노, 공포와 같은 집단적 분출을 조장하는 뉴스이다(정치-문화적 스캔들, 재해, 폭행, 끔찍한 일탈에 관한 기사들). 반면 좋은 뉴스는 이러한 황색저널리즘(혹은 붉은색저널리즘)을 미끼로 특정 집단의 메시지(주로 물건을 파는)를 퍼뜨린다. 나쁜 뉴스가 쏟아내는 무섭고 위험한 이미지가 일련의 경고의 기능을 하는 동안 혹은 그 후에, 다른 한편에서는 그와는 전혀 다른 집단과 세력의 천국의 이미지들이 교차평행편집 스타일로 왔다 갔다 하는 것이다. 모자이크 처리된 거친 다큐멘터리 VCR화면을 바라보며 양미간을 구기고 숨을 헐떡거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나 싶으면, 어느새 카메라는 외부소음이 차단된 스튜디오로 들어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깔끔한 용모로 생글거리는 미소 혹은 단호한 표정을 머금은 여자 앵커의 '모범적' 자태를 보여준다(그녀의 자세와 어조와 표정은 해당 언론이 보여주고 싶어하는 도덕과 정신상태 등을 대표한다). 그녀는 아주 대조적인 또 다른 교훈적이고 바람직한 도덕적 실용주의의 세계를 우리에게 소개하기도 하는데, 거기에는 소시민들의 선행과 도덕의 사례들이 간간히 열거되는 가운데, 무엇보다도 그 세계의 정수는 인상 좋은 선한 용모의 배우들이 직접 가리키고 있는 상품의 꿈같은 화사함이다. 이러한 불행과 구원의 교차편집은 어설픈 얼뜨기들을 유인하는 야바위꾼의 상술처럼 펼쳐진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이 화이트저널리즘의 야바위는 집단의 적개심을 필요로 하는 집권세력의 메시지 또한 어김없이 반복하는 것이다.

선택과 배치. 이것이 저널리즘의 형식적 질서이다. 무엇을 선택했는지(이는 취향을 반영한다). 그리고 그들을 어떻게 배치했는지(이는 욕망을 반영한다). 우리가 뉴스를 바라보며 생각하고 찾아야 할 미로는 바로 이 취향과 욕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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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바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성장하는 것? 아니면 과거와 전통과 관습을 보존하는 것? 그래서 한편으로는 풍요와 부의 시대를, 다른 한편으로는 안정과 질서의 시대를 만드는 것? 어떤 점에서 우리 시대에 성장과 보존은 모순처럼 보이면서도 서로 상호보완적으로 엮여있다. 특히 그것이 어떤 소수의 견해를 대변하는 경우라면 더욱 더.  니체(Friedrich Nietzsche)는 『때아닌 명상』(Unzeitgemässe Betrachtungen, Untimely Meditations, 1873-1876)에서, 삶에 도움을 주는 역사의 서술방법을 세 가지로 나눈 바 있다. 역사가 본질적으로 순수한 지식일 수는 없으므로, 역사 그 자체의 세 가지 방법을 언급함으로써, 그는 자연스럽게 현재적 삶의 세 가지 양태를 지적한 셈이다. 그의 말을 따라가보자.

세 가지 관점에서, 역사는 인간의 삶 속에 속해 있다.
(1) 능동적이고 투쟁적인 강자의 역사
(2) 보존하고 경배하고 찬양하는 인간의 역사
(3) 고통 받으며 해방이 필요한 인간의 역사

이렇게 세 가지 관점은 니체가 언급한 세 가지 역사(혹은 연구방법)와 일치한다.
(1) 기념비적 역사
(2) 골동품 애호가의 역사
(3) 비판적 역사(들뢰즈는 미국영화를 설명하기 위해 이를 변형시켜, '윤리적 역사'라고 불렀다)

기념비의 역사는 능동적이고 힘있는 인간의 관점에서 본 역사이며, 그러한 인간을 정당화하는 역사이다. 대단한 전투를 치른 인간, 모범이 되는 인간, 만인에게 교훈을 주고 위안을 주는 인간, 평범하지 않은 인간의 역사, 즉 "쉴러(Schiller)의 역사"이다. 기념비의 역사는 과거와 현재 모든 시간을 정점(culminating point)으로 환원하고, 가장 높은 것의 위대함으로 세상의 구석구석을 설명하려는 야심이다. 따라서 그 정점에 세워진 기념비의 힘과 가시적인 업적의 크기가 과거의 느낌의 정도를 좌우한다.

이러한 역사에서는 사소한 것에 대한 관심이나 꼬치꼬치 캐묻는 습관을 싫어한다. 심호흡을 크게 하고 세상을 보다 통 큰 진보로 고취하는 일에 열중하여, 괜히 어슬렁거리거나 맴도는 게으름뱅이를 싫어하며, 예술의 다성(多聲)과 산만(散漫)에서 쾌락을 얻는 영혼을 경멸한다. 목표도 동기도 양태도 분명치 않은 모호한 행동들이나 사소한 몸짓들, 그래서 열등해 보이는 것들은 보이지도 않고 저 뒤에서 세상 구석구석을 채우고 있기 때문에, 마치 브뤼겔의 그림에 펼쳐진 중층지대처럼, 산 꼭대기의 위대한 기념비 주변에서 구름처럼 육중한 대기를 형성하며, 이 위대함이 불멸로 나아가는 길을 방해하고, 기만하고, 축축하게 하고, 질식할 만큼 가로막고 있다. 따라서 이들을 모조리 거두어야만 한다.

과거가 기념비로 세워진 찬란한 산맥들 즉 위대함의 연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산맥의 정점들이 수 천 년에 걸쳐 서로 유사하고 무엇인가 상통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서로 조우한다고 생각한다. 현대인은 그들을 닮아야 하며, 그들을 모델로 삼아야 한다. 그래서 과거의 위대한 시간이 다시금 태어나 되살아나게 해야 한다. 그러나 니체에 따르면 이 높은 곳에 위치한 "기념비들은 영원해야 한다는" 불멸에의 요구 때문에, 그 산맥 아래에는 높이 오르지 못한 사소한 존재들의 크고 작은 고함과 울부짖음이 있다. 기념비적 역사는 정점에 올라 가장 높이 빛나는 것만이 존재한다고 억지를 부리는 가운데, 그 반대자들이 "그렇지 않아!" 라든가 "기념비는 만들어지지 말아야 한다!"고 목청껏 소리를 지르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의 대단한 업적, 건물, 탑, 깃발들을 우러러 보고 닮아가느라고, 이들은 현재적 삶의 초라함에 대한 비난의 눈총으로 질식할 것만 같아 숨이 차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기념비란 잉여의 울부짖음이다.

이러한 과거인식, 즉 이전 시대의 정전(canon)과 고귀한 것에 열광하는 정신상태가 필요한 이유는, 니체에 따르면, 그로부터 다음과 같은 유추가 정당화되기 때문이다: "위대함이 이전에 존재했다면 현재의 모든 사건 속에서도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유추는 "현재 자신이 어쩌면 불가능한 것을 바라고 있지는 않을까라고 하는 회의감을 불식"시킬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과거는 마치 현재의 마취제 혹은 신경 안정제처럼 작용한다.

여기에 기념비적 역사의 근본적인 모순이 있다. 마취제로서의 과거는 기념비(혹은 그 가치)를 부정한다. 거추장스러운 실재를 경멸하는 위대한 정신만이 살아남아 그들만이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혹은 기념비를 창조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듣지 않을 수 없는 잉여의 울부짖음이 현재적 과거 속에서 제외되어야 한다면, 기념비의 역사적 조건으로서의 고난과 시련과 차이를 동반한(그래서 기념비가 더 값지고 귀한) 진정한 경주, 진정한 전쟁이 어떻게 가능해질까? 이것이 니체의 탄식이다: 똑같은 샘플과 모델로부터 배운 지식이란 얼마나 덧없고 나약한가! 그 유비는 또한 얼마나 부정확할까! 그 비교의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차이가 간과될까! 과거의 특이성이 현재의 일반성으로, 혹은 그 반대로 현재의 특이성이 과거의 일반성으로 얼마나 무지막지하게 억지로 끼어 맞추어질까! 그리하여 그 모든 날카로운 구석구석과 모서리들이 동일한 반복으로 일치되기 위해 얼마나 부서져야 할까!

똑같은 동기와 똑같은 구원자와 똑같은 파국과 똑같이 결정된 간극으로 역사가 되돌아오는 것이라면, 진리는 차이가 중화된 그러나(아니 그래서 더 쉽게) 모방할 가치가 있다고 칭송되는 도상적(iconic) 범례에 불과하다는 것이 니체의 생각이다. 그것은 일반의 박수와 갈채로 승인된 기념비적 '결과'이다. 그럼에도 이 모범은, 그것의 진정한 원인인 잠재적 잉여들의 희생아래, 그들의 울부짖음을 동력으로 하여 산출된 결과이다. 기념비의 역사가 그 근본적 원인과 점점 멀어지기 때문에, 니체는 이를 "결과들의 컬렉션"이라고 불렀다. 민속축제, 종교적 행사, 군사적 기념일, 문화재, 건출물, . . . 이러한 모든 기념비들에 대한 찬사는 결과 그 자체에 대한 맹목적 열광이며, 진취성이라는 이름을 가슴에 떡 하니 붙인 부적이라는 것이다.

눈에 잘 띄는 곳에 우뚝 솟아 올라 모방하고 따를 가치가 있는 것만이 역사책에 쓰여지는 한, 역사는 결코 새로운 것으로 변하지 않으며, 더 아름다운 것으로 재해석 될 수도 없다. 따라서 "신화적 허구"와 구별이 어려워질 것이다. 세상의 자질구레한 모든 것들이 하나의 빛으로부터 파생하고, 그 빛을 닮아야 하기 때문에, 그 빛을 머금은 과거는 우리의 시야를 멀게 하는 해악이 된다. 닮아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거나 닮아야 하는 것만큼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도 없다. 시대정신을 표상하는 상징(인간이든 사물이든)들이 산맥처럼 봉우리를 형성하여 서로 서로 닮은 꼴로 수 천년 동안 이어져 내려왔다는 것을 철석같이 믿는 순간, 현재의 위대한 활동과 포부와 욕망은 기념비라고 하는 과거의 가면과 무대의상에 의해 탄압을 당한다. 니체에 따르면 기념비적 역사란 당대의 힘과 위대함을 혐오하는 열등한 영혼이 그 추한 안색을 들키지 않기 위해 호들갑을 떨며 연막을 뿌리는 과거에 대한 과도한 찬사이다. 이 찬사로부터 역사의 의미가 뒤집힌다: "죽은 자가 산 자를 묻게 하라!"

한편 두 번째의 역사가 있다. 이것은 기념비가 아닌 과거 그 자체를 신봉하는 보수적인 인간을 위한 역사이다. 그는 과거의 경배를 통해 현재의 삶에 감사한다. 향수도 아닌 이 특이한 과거에의 집착은 수 천년 전부터 지금까지 살아남은 증거들을 보존하는 것으로 실천할 뿐만 아니라 후세대에 남겨줄 조건들을 재생산 하는 것을 삶의 과업으로 여긴다. 삶이란 과거에 바쳐진 헌정사 혹은 봉헌물 외에 그 무엇도 아닌 것이다.

관습적이고 전통적인 가치를 옹호하고 강조하려는 이 영혼은 결국 골동품에 대한 사랑의 역사를 배양하기에 이른다. 그에게는 증거가 필요하고, 증거란 직접 잡을 수 있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조상이 쓰던 가구나 조그마한 기구들을 소유하는 것이 그에게는 과거의 영혼과의 교접이며 배움의 의미 그 자체이다. 물건에 사로잡힌 그의 물신주의적 영혼은 과거에 쌓아 올린 벽, 성문, 속기록, 일기, 유물, 풍물, 행위의 수단들, 친숙한 관습들, 태피스트리, 의상, 보석, 개인물건들로 환원된 과거의 시간을 바라보며 잃어버린 흔적의 향기를 느낀다. 뿐만 아니라 그로부터 자신의 힘, 목적, 열정, 어리석음, 나쁜 버릇을 재발견한다. 가령, 니체에 따르면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정신이 이러한 취향과 매력을 대표한다.

이 골동품 애호가의 경배 정신의 가치는 기념비적 역사의식과는 반대로 그 겸손에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튀지 않은 조건들 심지어는 무미건조한 환경들로부터 기쁨과 만족을 느낄 줄 아는 개인이나 집단의 소박한 정서에 대한 이해와 긍정이 이 역사의식의 정수이다. 역사가 대우를 덜 받았던 인종이나 소박한 사람들에게 그들이 살았던 거주지역과 물건들 그리고 삶의 직접적 편린들을 되돌려주고, 그들 자신의 전통을 연결해주고, 그들을 바로 거기에 살게 해주며, 그들을 안주 없는 유랑과 방랑으로부터 막아주는 것만큼 삶에 봉사하는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물론 개인을 집단과 환경에 고정시키거나, 자질구레하고 고단한 일상의 결과들로 환원하여, 그를 어딘가에 뿌리박게 하는 것은 심각한 곡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나름대로 건강하고, 또 어떤 점에서 공동체에 유익한 것이기도 하다. 유목민들이 그렇듯이 방랑과 모험의 결과들을 경험했던 사람들, 조상과 선배에 대한 신뢰를 포기하고 끊임없이 고결한 것만을 쫓아 다니는 경계 없는 코스모폴리탄은 이 사실을 잘 안다. "뿌리에 매달린 나무열매의 느낌, 성장이 제멋대로나 우연이 아님을 아는 행복감"이 무엇인지를.

그러나 골동품 애호가의 역사는 항상 그 비전의 폭이 좁다. 이것이 니체의 생각이었다. 과거 삶의 복원에 대한 물신주의적 열망은 자신이 알고 있는 몇 가지 지식을 너무 가깝게 들여다보고, 그것의 전체적 맥락으로부터 떼어내어 고립시킨다. 이러한 편협하고도 소심한 시야는 서술하고 있는 대상이 가지는 가치의 경중을 시간 전체의 견지에서 판단할 수 없게 한다. 그의 취향에는 모든 것이 귀중하고 똑같이 중요하게 취급된다. 사물이든 사람이든 과거든 각각 공정하고 따로따로 다르게 구별해야 하는데도, 그 가치와 비례에 있어 아무런 차이를 두지 않았기 때문에, 이 또한 기념비적 역사와 마찬가지로 현재의 과거화 혹은 과거의 현재화라는 위험에 노출되어있는 것이다. 그렇게 골동품에 사로잡혀 차이의 힘을 간과하는 개인은 전적으로 자신의 취향의 비례에 의거하여 과거를 들여다본다. 

특이한 비전의 수준에 속하는 것을 무차별적으로 경배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것 뿐만 아니라, 과거의 것에 고착되어 새로이 다가올 것을 거부하고 적대시하는 습관이 감각적으로 굳어지면, 마치 순수지식의 영역에 오래 전부터 안착해 있는 안주인이라도 된 것처럼, 역사는 더 이상 삶에 봉사하기를 멈추고 존경이라는 명목으로 과거를 다루듯 현재와 미래의 더 위대한 삶 조차 박제해버린다. 골동품 애호가의 역사가 더 이상 현재의 생생한 삶에 열정을 불어넣지 못하게 되는 순간 그 자체 스스로 퇴행적이 된다. 그러면 그 경배심 또한 시들어 버릴 것이다. 순수지식의 허황된 그리고 공허한 영역에 안주한 학자들이 존경심이나 경배도 없이 습관적으로 과거의 궤도를 어슬렁거리며 이기적이고 자기만족적인 배회에 인생을 낭비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맹목적인 수집광과 독서광의 불쌍한 드라마, 남이 말했거나 존재했던 모든 것을 모아대는 반추동물의 드라마를 보게 된다. 이러한 영혼은 어딜 가나 곰팡이 냄새를 풍기게 되어있다. 자신의 귀한 재능과 고결한 욕구를 그야말로 낡은 것에 대한 욕망으로 변질시키고, 때로는 너무 깊이 들어가 단지 전기(傳記)의 증거에 지나지 않는 물건더미가 쌓여가는 것에 쾌감을 느끼는 것으로 만족하기 때문이다.

결국 기념비의 역사와 성격이 전혀 다름에도 불구하고, 골동품 애호가의 역사의 심층에는 그와 마찬가지로 삶의 창조적 가능성의 배제가 있다. 골동품 중독 역사관은 "삶을 보존하는 법만 알지, 창조하는 법은 모른다." 그것은 언제나 새롭게 다가오는 것을 평가절하하고, 경배를 미루어두거나 불경스럽게도 거부하기조차 하는 능동적 인간을 불구로 만든다. 심지어는 기념비 역사의 모토인 위대함과 성장조차에도 관심이 없다. 오래된 무엇인가는 항상 불멸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선조들의 관습과 종교적 믿음 그리고 전해 내려온 정치적 권위의 오랜 시간 겪어온 무게와 깊이 그리고 그 동안 받아온 찬탄과 경이의 양이 얼마인지를 상상해 본다면, 그 귀한 것을 새롭고 낯선 것으로 대체하거나 현존하는 단순한 사실처럼 보이는 것으로 환원하려는 시도가 대단히 건방지고 뻔뻔스러워 보이기 때문이다.

니체는 삶에 봉사하는 역사의 세 번째 방식을 '비판적 역사'라고 불렀다. 이러한 글쓰기는 더 이상 과거에의 종속도 고착도 아닌 해방을 욕망한다. 현재의 부당함과 폭력과 오류를 비판하기 위해, 비판적 역사가는 현재를 낳은 과거로 돌아가 그 원인이 되는 싹을 잘라버릴 것을 독려한다. 독자의 전달이 아니라 장본인의 말을 직접 들어보는 것이 생생하리라.

"과거를 깨부수는 힘을 가져야 한다. 살아가려면 과거를 전유하고 분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는 과거를 심판대로 끌고 와서 가차없이 질문하고 비난을 퍼붓는다. [. . .] 과거는 비난 받아 마땅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인간의 과거이기 때문이다. 인간적인 것 안에서 힘과 나약은 언제나 필멸의 운명에 처한 인간사이다. 인간은 언제나 위대한 힘과 인간적 약점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심판이 의미하는 것은 정의가 아니며, 그 판결을 선언하는 자비도 아니다. 그것은 삶 그 자체, 그 희미하고도, 모호하고도, 끊임없는 자기 욕망의 힘, 바로 삶 그 자체 때문이다. [. . .] 그 판결은 언제나 무자비하고 불공정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순수한 지식의 발로에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 . .] 생겨난 모든 것은 파괴되어 마땅하다. 따라서 아무것도 생겨나지 않는 것이 더 좋았을 수도 있다. 살아가려면 상당한 힘이 있어야 한다. 인생이 얼마나 부당한지를 잊으려면 또한 상당한 힘이 필요하다. 루터 자신은 세상이 단지 신의 망각으로 존재했을 뿐이라는 견해를 피력했다. 만일에 신이 "포병부대"를 떠올렸더라면, 결코 세상은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이 같은 삶은 망각을 이용하여 이 망각의 일시적 파괴를 요구한다. [. . .] 과거가 비판적으로 분석될 때, 그 뿌리를 잘라낼 수가 있으며, 모든 경건함을 넘어 나아갈 수가 있다. 그 과정은 항상 위험하다. 심지어 죽을 때까지. 그래서 이런 식으로 과거를 심판하고 전멸시킴으로써 삶에 봉사하는 사람들 혹은 그 시대는 언제나 그 자신이 위험에 처해있고 다른 이들을 위험에 처하게 한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이미 이전 세대의 산물이며, 또한 그들의 오류와 열정과 범죄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 사슬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비록 그 오류들을 비난하고, 우리 자신이 그들로부터 탈피했다고 생각할지라도, 우리가 그들로부터 태어났다는 사실을 빠져나갈 수는 없는 것이다."

기념비적 역사는 과거를 이용하여 정복의 위대함을 설득하고 정당화하는 과거의 현재화이다. 반면에 골동품 애호가의 역사는 과거에 안주하고 과거를 보존하여 현재를 과거의 현재로 만든다. 비판적 역사는 현재의 부당함으로부터 받는 고통을 제거하기 위해 과거를 심판함으로써 과거를 미래의 현재로 남김없이 바꾼다.

우리에겐 업적과 기념비에 대한 두서 없는 열광이 한 쪽을 사로잡고 있고, 개인의 소박한 그러나 맹목적인 순응주의가 우리의 또 다른 한 쪽을 사로잡고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복의 힘도 아니고, 그렇다고 냉소적이고도 비굴한 평화도 아니다. 평화라는 이름조차도 이제는 어떤 구실이 되어버렸고, 기만과 착취의 한 전략이 되어버렸다. 과거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 그것은 다름 아닌 비판이 아닐까? 또한 비판받아 마땅한 그 과거의 수혜자들의 정당성의 단죄와 그에 대한 거부가 아닐까? 수혜자들이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일지라도.

Posted by huun

엄밀한 의미에서 뉴스와 영화를 명확히 구별 짓기는 쉽지 않다.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때와 장소에 따라 관행처럼 시청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이 뉴스 혹은 영화라고 습관적으로 판단할 뿐이다. 어느 쪽이 더 객관적이지도 않고, 어느 쪽이 더 낭만적이지도 않다. 감독들은 아이디어를 뉴스 매체에 의존하기도 하고, 기자들은 영화를 보면서 머릿속에 담아두었던 그림들을 사건에 투사하기도 한다. 뉴스를 보거나 읽다 보면 기자의 내레이션이나 카메라의 구도가 어디서 많이 본 듯한 형태를 취하며 우리의 시야를 짓누른다. 간혹 뉴스를 보다가 이런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저 기사를 영화나 소설로 만들면 어떨까? 그런 생각이 들 때면, 어김없이 보도되고 있는 화면 속의 그 사건-사실의 저편에 있는 더 커다란 어떤 서사나 음모가 화면 밖으로 펼쳐진다. 전말을 이미 다 알고 있다고 느낄 때만큼 의욕적일 때도 없다. 뭔가 새로운 창작물을 만들고 싶어지거나, 열정적인 에세이를 쓰고 싶어지거나, 그것도 아니면 당장에 친구를 불러 술잔이라도 들고 싶어질 때처럼, 우리는 뭔가를 알고 있다는 사실에 쉽게 흥분한다. 그러나 실은 아무것도 모른다면 어떠할 것인가?

지금  내 앞에는 사진 몇 장이 놓여 있다. 최근 뉴스에 보도된 "더블드래곤" 파업 사태를 다루는 인터넷 동영상 기사를, 서버에서 지워지기 전에 컴퓨터 스크린 샷으로 찍어 놓은 것이다. 동영상에서는 카메라가 공중을 활공하며 건물 옥상을 내려다본다. 옥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소요를 따라다니며, 기자는 마치 축구나 마라톤을 생중계 하듯이, 더 정확히는 영화의 내레이터처럼 벌어지고 있는 진상을 조목 조목 되풀이 한다. 컨테이너가 시위자들이 있는 쪽으로 접근했다느니, 쇠파이프로 경찰 한 명을 잡고 마구 내려친다느니, 검은 연기가 옥상 저편에서 솟아난다느니, 폭발물의 폭음이 터지기 시작한다느니, 도망가는 무리를 경찰이 뒤쫓고 있다느니, 이 편 옥상에선 도망가는 무리에 대고 체류탄을 쏘아댄다느니, . . . TV를 보는 우리들은 그 소요와는 무관한 회색천사(흰색과 구분이 거의 안 되는) 마냥 저 연기가 나는 옥상 위의 불행을 멀리 공중에서 바라보며 혀를 찬다. 혀를 차는 순간 쫓고 쫓기는 양자 모두다 무가치하고 편협한 당사자들임이 조용히 선언되고 만다.

 

그러는 와중에 저 영상물에는 무엇인가가, 결정적인 무엇인가가 빠져있는 것이 아닐까 혹은 과도한 무엇인가가 덧붙여진 것이 아닐까 라는 강한 의구심이 떠나지 않는다. 그 의구심을 증명할 수 없을 때,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말할 수 없을 때, 혹은 말해서는 안 될 것 같은 어떤 묘한 분위기가 주변을 사로잡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육체들의 환각과도 같은 소요들 사이에 웅크리고 있는 혹은 그 변두리의 대기 전체에 엷은 어떤 것이 퍼져있을 때, 우리는 막연하고도 무책임한 뉴스 다큐멘터리 영상에서 빠져 나와 소설을 쓰거나 영화를 찍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기업의 노동자도 아닌, 경영인도 아닌, 주주는 더더욱 아닌 내가 저러한 유형의 뉴스를 접할 때, 저 위에서 뛰어다니거나 마음을 졸이며 TV를 바라보는 이들과는 전혀 다른 상상을 하게 되는데, 가령 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SF 전쟁물 혹은 과학기술과 그 영향이라는 주제 하에 괴기물 유사한 영상이 떠오르는 것이다. 기업의 구조조정이나 노동자들의 파업이 SF와 가지는 밀접한 관계는 근거가 없는 얘기가 아니다. 때로는 사회학과 경제학의 담론보다도 더 치열하고 구체적인 재현의 역사가 SF에는 있다. 뤼미에르 형제의 『도살기계(Charcuterie Me'chanique)』(1895) 이후, 한동안 SF의 역사는 그 아류들에 의해 돼지와 개의 수난과 희생을 등에 업은 소시지 가공의 역사(개에서 소시지로, 소시지에서 개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기계와 공장 생산체제 그리고 생명(동물과 인간)의 해소될 수 없는 투쟁의 역사가 있다. 많은 SF의 아류문학 혹은 영화들이 있지만, 기계권의 출발 자체가 가지는 역사적 조건을 생각해 본다면, 결국 SF의 정수는 사이언스의 주체인 자본의 꿈과 소외된 노동(삶)의 전쟁이라는 오래된 마르크스주의의 테제들 안에 고스란히 안착해 있는 것이다. 그리고 포스트모던 시대에 이는 로봇공학과 우주프로젝트에 의해 범우주적 숭고미학으로 팽창하여 sugarcoating 되고 있다. 그리고 점점 짙어지는 그 그늘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의 지각에서 점점 희박해진다.

마르크스주의 미디어 논자들 중 상당수가 형식주의를 비판했던 골자는, 그것이 항상 카메라를 든 사람을 무기명으로 처리하고 만다는 것이었다. 거기서 모든 시선은 비존재적 추상이 될 운명을 피할 수 없다. 누가 바라보는가? 카메라를 든 자는 어디에 있는가? 시선의 무기명 속에서 우리는 이미 카메라의 눈 자체가 되어버린 것은 아닌가? TV와 라디오 혹은 인터넷 매체의 동영상이나 이미지들을 바라보면서, 하지 않으면 안 될 중요한 질문 하나를 잊은 채 우리는 미디어에 뛰어든다. 공중을 활공하며 소요를 바라보고 있는, 천사와도 같은 저 눈은 결코 화면상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마치 우주 밖에서 포착한 위성사진의 미학과 테크놀러지의 결합된 이미지를 바라보며 신기하게도 내가 그곳의 한 지역에 틀림없이 위치하고 있다고 기하학적 확신을 하듯이, 저 화면에서 쏘고 있는 X선 입자들이 우리의 망막과 신경세포들을 반복해서 두드리는 동안, 최면효과와도 같은 총체성의 눈으로 자기를 바라볼 때 만큼이나 우리 자신을 알고 있는 것 같은 희열과 확신에 찬 자기상호적 Cogito. 현대 미디어의 특징은 담론적 상호성(discursive reciprocity)의 부재 혹은 그것이 가시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누구의 말이고, 누구의 시선인지, 담론의 어떤 주체이고 어떤 위치에서, 무엇을 감추려는지,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 주체든 객체든 미디어 환경 하에서의 추상화. 시-감각이 지배하는 포스트모던 기업문화가 발산하고 있는 모호성의 정치학. 그로 인해 미디어와 그 눈을 우리로부터 육탈시키고 그것과 대면하는 어떤 구도를 만들어낼 것, 결국 미디어의 무의식적 주체가 무엇인지를 기를 쓰고 찾아 나서야만 한다.

더블드래곤 사건에서 특이한 것은 기업 혹은 회사가 완전하게 추상적 무형성을 띤 채 우리 앞에 드러났다는 점이다. 틀림없이 뭔가가 벌어지고 있었고, 어떤 가시적인 움직임들이 거기에 있었지만, 그래서 우리는 그 점에 대해 언론 미디어에서 혹은 우리들 서로간에 그 사실에 대해 말을 한다. 실제로 움직임들의 실행자들(주체가 아닌)은 화염병을 들었건, 펜을 들었건, 체류탄 총을 들었건,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대기 전체에 퍼진 회사의 잠재적 파도에 파묻혀 그것을 위해 싸우고 또 돌진한다. 이상하고도 특이한, 역설처럼 보이지만 실은 너무나도 분명하고 단순한 뜻을 가진 "파산을 통한 회생!"이라는 용어가 주는 압도적인 위협 아래. 문제는 저들이 들락거리며 오르락내리락 해가며, 장악하고 빼앗기고, 육체들을 밀어붙이는 공간으로서, 버려진 농지 아니면 공터인 허허벌판에 건설된 저 공장 건물들이 아니라, 숨을 쉬고 있는 동안에도 연기와 체류 살포액보다도 더 짙은 농도의 선언 혹은 확신을 형성하는 음모이다. 저 용어가 주는 압도적인 위력은, 그것이 "완전하고도 합법적인 해고"를 의미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확신하고 있었던 어떤 것, 다시 말해 그들을 존재하게 하고 그들에게 무모함의 용기를 주었던 프롤레타리아적 Cogito가 자신들이 생각했던 그것이 결코 아니었으며, 이제 완전히 종말을 고하지 않으면 안 되게 한 것에 있다.

"파산을 통한 회생"에는 기업 주체(누구지?)의 관점에서 바라 본 두 가지의 교묘하고도 비가시적인 제스처와 전략의 결합이 내포되어 있다. 하나는 파업이 불러올 필연적인 결과를 단호하게 선언하고 그 당사자에게 책임을 '항변'하는 듯한 효과와 아울러 추후의 사태에 대한 경고의 전략이 그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파괴적 결과를 어떤 식으로든 수습하여 정상적인 상태로 복원해야만 한다는 기업 주체의 도의적 의지를 반영하는 것 같은 제스처를 취함으로써 기업의 사회적 기능과 책임과 사명을 실천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대견스럽게 묘사하면서, 비난 받고 책임을 져야 할 우울한 재앙의 뒤에서 무엇보다도 은유가 아니라 실제로 그것이 회생의 한 형식으로 수용되어 미국(GM의 경우)에서 이미 검증된 것으로, 기업이 본질적으로 무엇에 기반하고 있는 것인지를 직접적으로 보여주지만, 위에서 말한 그 묘사가 미디어에 의해 각색되면서 공장이 세워진 평택 지역에 대한 도덕적 공동체적 책임을 떠맡은 기업의 회생이 곧 주민과 공동체 전체의 회생으로 좋은게 좋은거지 식으로 sugarcoating되어 그 본질적 기반에 연막이 뿌려지는 와중에, '파산을 통한 회생'? 그것이 무슨 말인가? 파산신청을 하고 회사의 문을 닫고 일하는 사람들을 해고하면서 도대체 무엇을 회생시킨다는 말인가? 보존되고 살아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라며 까칠하게 찬물을 끼얹으며 궁극적인 질문을 집요하게 던지기도 전에, 내러티브의 반전으로 질문의 요지를 중화하듯이, 과감한 법적 최종결정의 제스처로 그 연막의 뒤에서 약간의 '장치변환' 혹은 '기호들의 변환'(가령, 소유주 혹은 법인을 바꾸는 절차)을 통해 보존과 회생을 도모한다는 명목으로 가벼운 문서 뭉치를 손에 들고 드디어 사무실로 돌진하며 그 실체가 등장하는 바로 그 채권 소유주들의 실질적인 경제활동으로서의 치고 빠지는 전략이 그것이다. 기업이 파산을 해야 한다는 선고를 그 스스로 내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변증법적 양날치기처럼 뭔가를 보존하고 들어올려야 한다는 회생의 원칙을 고수한다는 미사여구로, 파산과 회생의 각각의 책임소재가 원래의 자리에 속한 것으로부터 빠져 나오거나 식별이 불가능해지는 가운데 적절치 않은 당사자들에게 배분되고 있는 것이다: 파산은 파업 주동자들에게, 회생은 기업주체 경영인과 그 소유주들에게.

이 분배는 미디어의 SF분위기 화면 속에서 우리가 흔하게 보아오던 어떤 심리적 구도를 형성한다. 한편에는 약자를 환기하는 희멀건한 피부색에 금테안경을 쓴 착하고 선량한 기업 상인의 이미지가 노동자보다도 더 힘들게 땀을 흘리며 살아가는 상인의 긍정적 실용도덕주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고, 다른 한편에는 작업장 옥상에 올라가 돈을 더 달라고 생 떼를 쓰며 위협과 폭력을 일삼는 빨간 마후라를 두른 영업 훼방꾼들의 저속한 이미지가 건달의 내러티브 비스무리한 상투적인 미디어 구도에 의해 화면 속에서 끊임없이 우리의 주관적 회로를 고착시킨다. 미디어가 주는 메시지는 파업이란 여전히 어떤 훼방, 철없음, 이기심, 그렇기 때문에 결국은 철회될 수 밖에 없는 쥐불놀이 혹은 할로윈처럼 맹목적 연례 이벤트의 이미지일 뿐이라는 점이다. 회생을 염원하는 반복적인 코멘트("과연 더블드래곤이 회생될 수 있을까요?") 속에는 이미 참담한 심정으로 쏟아내는 초과 데시벨의 어떤 비난과 질책이 있다. 한 가지 문제는 폭도들의 출처가 분명치 않은 외부인으로 묘사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회사의 파산을 주도하고 그 법적 소유관계를 기입한 문건을 쥔 기업주체가 아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파산의 원인을 제공한 당사자이며, 청산에서 남은 잔여 자산의 분배 혹은 변제절차의 몫에서조차 우선순위에서 배제될 것이다. 실상 '파산을 통한 회생'의 의미와 가치 역시 이 우선순위에 비례하여 그 양이 달라지는 용어일 뿐이다. 그렇다면 회생의 주역은 누구란 말인가? 그리고 지붕 위의 저들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어디에서 무슨 이유로 날라와 옥상에 뚝 떨어진 숙주들일까? 아무리 하늘 위에서 천사의 총체적 시선으로 바라보아도 숙주들의 전쟁만 보일 뿐, 파산의 주체이자 회생의 주체, 즉 Alien이 숙주들의 배양과 파괴를 통해 보존하고 싶어했던 바로 그 순수생명은 어디에 있는가?

개인에게 있어 돈이란 사물(성)을 추상화하는 가장 보편적 형식이다. 행복이든 사랑이든 삶의 활력이든 이러한 추상적 가치들은 사물 그 자체로부터는 발생하지 않는다. 물질과 사물에 둘러싸인 우리들은 어떤 식으로든 그들로부터 추상적 보편성을 끄집어내야 할 것이고, 그럴 능력이 없다면, 사물 그 자체를 하나의 추상적 가치로 만들 필요가 있다. 먹을 수도 입을 수도 사용할 수도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더 보편적 실재인 냥, 우리는 사랑과 행복과 능력을 무한하게 약속해줄 것처럼 보이지만 매번 우리를 빠져나가는 보편적 대리물로서의 화폐를 욕망한다. 화폐에의 욕망이란 사물의 무한한 되돌아옴을 보증해주는, 고갈되지 않는 사물의 샘을 소유하는 길이다. 물건이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추상적 가치 자체라고도 할 수 없는 돈은 그런 식으로 의심되지 않는 가치로서 우리의 무의식이 되는 것이다. 파산을 통한 회생에서 우리가 목격한 것이 바로 기업과 기업주체 그리고 우리의 이러한 추상적 관계이다. 회사는 터전이나 특정한 형태의 삶의 장소가 아니라, 자본과 이윤의 이름으로 모든 사물적 관계를 무한히 가능하게 해주고 지역사회 전체를 구원해 줄 것처럼 약속을 해주며, 여기저기로 숙주들을 찾아 떠도는 이해 당사자들의 보편적 화폐이며 순수생명을 닮았다. 이를 온전히 보존하는 것 만으로도 우리는 성공적인 경제와 성공적인 (생명)윤리의 달성에 버금가고("과연 더블드래곤이 회생될 수 있을까요?"), 그 추상적 교환의 실천 속에서 왔다 갔다 주거니 받거니 하는 동안 어느새 합법적 해고든 경제-합리적 구조조정이든 자장가처럼 파도처럼 진통의 효과를 내며 법인의 이름으로 중화되기에 이른다.

공장에서 돌아가는 컨베이어벨트와 그 앞에 죽 늘어선 숙주들의 그림과 유사하게도 사회 전체의 컨베이어벨트와 그 사이사이에서 부대끼는 숙주들의 그림이 있다. 숙주들은 작업장이든 가정이든 지역사회든 아니면 무슨 무슨 청사든 할당된 공간에 붙박여 있고, 이들 안에서 생명을 키워 살아가는 세계령은 바람처럼 은유처럼 떠돌아다니며 정치적 법적 문화적 숙주들을 찾아 선회를 하는 가운데, 그를 불러들이기 위해 실행의 대리인들 그리고 주술인(株術人)들은 서로 간에 인수, 매각, 합병의 무가치하고도 야만적인 피의 강신제를 치른다. 지방(紙榜)을 대체함으로써 새로운 신주와 제주가 들어서면 이 변태적인 형태변이 속에서 지붕 위의 숙주들은, 매 순간 요철을 바꾸어가며 접속단자를 선회하여 종잡을 수 없는 감기 바이러스와 전쟁을 벌이듯이, 실은 세계령을 마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지되는 적은 언제나 그 대리숙주들 뿐이다. 지각할 수는 없지만 가공할 만한 대기전체의 괴물적 기운이 옥상에서 버티고 있는 배제숙주들에게 으르렁거리며 달려든다. 그 기운을 등에 업고 하이테크 살상 장비들을 장착한 전경과 여타 터프가이 스타일 유니폼의 전사들이 크레인에 매달린 컨테이너를 참호 삼아 화염방사기 모드(제작자 혹은 주문자의 욕망을 반영하는)의 물 대포와 가스를 직격으로 쏘아대고, 제대한지 이십 년도 넘은 중년의 배제숙주들은 그들에 맞서 깡마른 다리로 휘청거리며 돌진과 후퇴를 반복한다. 이 양자진영의 숙주들을 둘러싼 대기에는 타오르는 연기보다도 홀가분하게 여기저기에 공통으로 퍼지는 세계령의 열기가 이들을 압도한다. 물론 대리숙주 뿐만 아니라 실행의 주체숙주들이 있다. 그러나 모두가 나름대로 업주이자 상인이므로 누가 더 주체이고 누가 더 객체인지 분간하기가 어려워졌으며, 완전히 뒤섞여 한 몸에 머리가 둘 이상인 더블드래곤의 이미지로 서로를 잠식하고 서로를 태우고 있는 것이다.

일면 SF는 자본의 꿈 내용으로 보인다. 가령 로봇공학의 후원자이자 수혜자는 자본일 뿐만 아니라, 요제프(Joseph Čapek)이든 카렐(Karel Čapek)이든 차펙 형제가 염두에 두었던 것은 다름 아닌 노동 소외였던 것이다. 아시모프(Isaac Asimov)는 1941년 자신이 정식화한 로봇공학의 원칙(인류를 위한! 인류에 의한! 인류의!)을 도구를 정당화 하는 원칙으로 확대시켰는데, 도구에 관한 이 원칙은 자본의 노동에 대한 무의식적 시선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었다: 도구는 위험하지 않아야 한다! 도구는 효율적 기능을 잃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도구는 망가져서는(friction) 안 된다! 그러나 위험하거나 비효율적이거나 망가진다면 어찌해야 할 것인가? 바로 여기에 더블드래곤 사태가 가지는 어떤 한계점, 즉 우리가 다소 구질구질하게 우정 어린 미련을 두고 티격태격 하기도 했던 주제, 인간과 노동 그리고 인간과 자본 그리고 인간과 인간의 오래된 이상적 연관성의 한계점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왜냐하면 한 쪽에서는 문서를 쥔 희멀건한 범생 스타일의 블레이드러너가 은행 문을 박차고 나와 장부기록 제거를 위해 법원 쪽으로 걸어가고 있는 반면, 다른 한 쪽에서는 무장한 터미네이터가 물리적 제거를 위해 헬리콥터와 컨테이너의 줄타기 활극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차없이 완전하게 제거되는 비참 속에서 마후라를 둘러 얼굴을 가려가며 여전히 자신의 미디어 정체성을 의식하던 배제숙주들은 그 자신의 사회적 본질이 단숨에 드러나는 순간을 목도하게 된다. 도구의 명시적 폐지 그리고 물리적 제거의 법적 근거가 마련되는 순간 벨트시스템을 전환하여 새로운 장착과 생산라인 배열과 같은 트랜스포머식 형태 기능 전환과는 수준이 완전히 다른 방식의 완전제거.  이때 법은 세계령의 가장 막강한 전사가 된다. 왜냐하면 제거가 더 이상 약육강식의 야만이나 약자에 대한 강자의 억지와 폭력이라고 하는 외부적 사안이 아니라 '합의'라고 하는 계약상의 절차로서 우리가 이미 참여하여 서명한 가운데 도출된 결과들을 묵인하도록 하는 것은 다름 아닌 법의 이름으로 실행되는 내적 정당화이기 때문이다.

 

미디어의 화면 속에서 파업은 이제 네트워크로 연결된 기업망과 기업을 위시한 지역 경제망 그리고 기업의 제품을 사용하는 소비자, 그 모두의 심리적 피해와 금융계좌상의 경제적 손실로 완벽하게 공식화되어 버렸다. 이제 비로소 SF가 리얼리즘(어떤 리얼리즘인지는 아직 우리가 결정하기 어려운)의 테마가 되어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왜냐하면 음모는 더 이상 환타지의 주제가 아니라 삶 자체의 현실화 기제임을, 그리하여 그 양자 중 누가 모델이고 누가 모방인지를 구분할 수 없는 실상이 펼쳐지고 있음을 우리가 조금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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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프랑스 파리에서는 도시 현대화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오스망프로젝트'(Haussmannization)가 그것이다. 비좁고 불결한 거리, 낡아빠진 건물, 일관되지 않은 도로망, 비위생적인 상하수도, 빈민가와 같은 전근대적 풍경을 현대식 깔끔함으로 재편하려는 시도였다. 이 살균 프로젝트가 겨냥하고 있었던 것은 물론 파리의 도시화, 효율화, 상업화, 합리화였다. 이로부터 파리는 급속도로 기하학적인 풍경을 갖추어가기 시작했고, 이는 곧 '대로'(Grands Boulevards) 주변의 생활 전반에 속도감을 부여해주었다.

(Gustave Caillebotte, Sur Les Champs Elysees, Boulevard Haussmann, 1880)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효율적 속도화 기획과는 다르게 새로운 형태의 시민집단이 생겨났다.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를 위시하여, 훗날 벤야민(Walter Benjamin), 하비(David Harvey),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 케루악(Jack Kerouac), 그리고 짐멜(Georg Simmel) 등에 의해 이론화되어 잘 알려져 있는 현상으로, 다름 아닌 '산보객'(Flâneur)이다.

이 말은 원래 프랑스어 동사 Flâner의 남성명사 Flâneur에서 유래하여, 산보를 하거나 어슬렁거리거나 배회하는 사람을 지칭한다. 보들레르는 이를 도시경험과 연관하여 사용했다. 간단히 산보객이란 '도시를 배회하고 걸어 다니며 도시 생활을 경험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산보객은 도시의 문화적 현상과 현대성(modernity)을 예시하는 눈금자가 된다.

현대성의 지표가 되는 핵심은 물론 사회 안에서의 개인의 위상의 변화일 것이다. 오스망프로젝트가 예시했듯이, 사회규율이 합리적이고 체계적이 되면서 개인의 사적인 삶과 그 자율성은 사회적 힘에 의해 압도된다. 특히 대도시는 익명의 군중 공동체를 만들어 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군중이란 전통적인 지역 공동체로부터 박탈된 개인에 다름 아니었다. 이들은 결속된 근거도 없이 다만 산업사회의 테크놀러지에 의해 불특정 공간에 배치된 원자였다. 전통을 넘어선 현대적 자유가 한편에 있었지만, 한편에는 불안, 박탈감, 고독, 공허와 같이 삶의 추상적 형식이 가하는 정서들이 이들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Gustave Caillebotte, Un Balcon, 1880)

짐멜이 자신의 에세이 "메트로폴리스와 정신적 삶"(The Metropolis and Mental Life)에서 지적했듯이, 현대성은 새로운 사회적 유대 그리고 타자에 대한 새로운 태도를 창출했다. 개인은 시간과 공간을 이전과는 전혀 다르게 수용하여, 그 기하학적 광경이 말해주듯이, 세상에 대해 '무감동한 태도'를 가지게 되었다. 또한 18세기 이전의 정치적 종교적 경제적 사상적 굴레로부터 벗어난 현대인은, 그 자유를 예증해줄 효율적 생산력을 최대로 하기 위해 19세기가 되면서 노동의 분업과 기능적 전문화를 요구 받는다. 이 전문화는 개인이 완전한 하나의 총체로서 다른 개인에 대하여 절대적 존재성을 가질 수 없게 했다. 현대적 의미에서의 전문성이란 말하자면 불완전한 완전성이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개인들은 서로를 배타적(경쟁)으로 수용하면서, 또 한편 서로에게 긴요한 존재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은 서로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되는 보충적 존재였고, 실상은 고립적이면서도 무리로부터 5피트 이상 멀어지면 불안을 느낄 만큼 고립을 가장 두려워하는 독신자였던 것이다.

익명성으로 보장을 받은 자유의 다른 편에 고독과 우울의 정서가 자욱했던 부르주아 개인들은 자신의 자유를 확인하기 위해 혹은 자신의 우울을 치유 혹은 즐기기 위해 거리로 나와 배회와 산보를 한다. 보들레르를 대표로 하는 이들의 우울은 도시를 단지 생활공간이 아니라 하나의 심미적 대상으로 둔갑시키면서, 메트로폴리스 한복판에 침잠하여 거리를 탐색하고 모던을 관찰한다. 보들레르의 말에 따르면 '보도의 식물학자'가 된 것이었다.

(Gustave Caillebotte, Sur Le Pont de l'Europe, 1877)

그러나 이들은 도시에 감동을 느낀 것이 아니라 무감동하고 냉소적인 관찰자였다. 이들은 산업화가 추구했던 도시의 획일화, 속도, 기계화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견지했다. 19세기 영국의 댄디즘(Dandyism)이 보여주었던 퇴폐 그리고 부에 대한 혐오가 그랬듯이, 이들은 도시적 삶의 일부였고 부르주아의 도시적 우수의 탐닉자였지만, 동시에 그로부터 떨어져서 그것을 바라보고 살피고 탐색함으로써, 그 존재 자체가 하나의 제동(制動)이 되었다. 도시 한복판에서 어슬렁거리는 이들은 그 자체가 하나의 망설임이었던 것이다. 이 망설임 속에는 근본적 동기가 있었는데, 바로 사회 기술 메커니즘이 설정해 놓은 초개인적 균등화로 인한 개인의 존재론적 비하에 대한 암묵적 저항이 그것이다. 벤야민 자신이 이미 한 명의 예증적 산보객이었는데, 그것이 한편으로는 하나의 라이프스타일이었지만, 다른 한편에는 사회에 직접 참여하지 않으면서도 높은 통찰력을 갖춘 부르주아지 딜레탕트를 예시한다고 썼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비록 미완성에 그치고 말았지만 파리의 쇼핑 거리에 대한 식물학자와도 같은 관찰을 감행했던 그의 <아케이드 프로젝트>가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느린 산보와 사색은 순수하게 개인적인 행위지만 초개인적 거리 두기의 효과적 기제이다. 그것들은 대단히 비효율적인 가치들을 생산하면서 소리 없이 효율을 잠식한다. 자본의 붕괴는 공장이나 시장 혹은 현장이 아니라, 공원과 산책로에서 시작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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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러니(Irony)를 수사학적으로 설명한다면, 밖으로 표현된 말(외연, denotation)과 그 말이 뜻하는 의미(내포, 함축, connotation)가 서로 일치하지 않거나 모순적인 관계를 갖는 발화행위라고 할 수 있다.

가령, 18세기 영국의 산문작가 조나단 스위프트(Jonathan Swift)는 당대 영국 사회의 아동 학대와 무관심이 사회적 범죄 차원으로 확산되었을 때, 한 팜플렛을 편집하여 주장하기를, 모든 아이들을 도살하고 요리를 만들어 기근을 해결하자고 하였다.

또 한 예로, 영화감독 이광모는 한국 전쟁 세대들의 참혹하고도 불행한 삶을 멀리서 관조하는 장면들을 찍었는데, 그 제목을 "아름다운 시절"이라고 붙였다.

이와 유사한 예로, 이탈리아의 영화감독 로베르토 베니니(Roberto Benigni)는 나치의 무자비한 유태인 학살을 어린아이의 병정놀이로 애써 해석하려는 아버지의 가련한 노력을 통해 환타지의 무기력함을 비극적 유머로 환기하였는데, 그 제목이 바로 "인생은 아름다워!"(La Vita E Bella)였다.

또 다른 예도 있다. 스탠리 큐브릭(Stanley Cubric)은 <닥터 스트레인지 러브>(Dr. Strange Love)라는 영화에서 원자폭탄의 버섯구름 장면에 "What a wonderful world!"라는 음악을 삽입하였다.

좀 더 직접적이고도 일상적인 예로 돌아와, 보고 싶지 않은 친구를 만났을 때, 우리는 간혹 "너 참 반갑다!"라고 비꼬는 경우가 있다. 또 우리는 간혹 잘난척하는 사람을 야유하기 위해 "그래 너 잘났다!"라고 코웃음을 치기도 한다. 또 부패한 정치인들에게 일반인들은 "훌륭한 분들이야!"라고 조롱하기도 하며, 세태를 풍자하기 위해 한 마디로 "멋진 세상이군!"이라고 내뱉는다. 셰익스피어는 이 분야의 대가인데, 젊은이들의 난삽한 연애 혹은 배은망덕을 풍자하기 위해, 신나는 세상(folly, jolly)이라고 지저귀는 듯한 새소리를 흉내내기도 했다.

이러한 수사적인 테크닉이 바로 아이러니이다. 아이러니스트는 고의적으로 마음속의 의도를 숨기고 그 심중의 뜻을 반대로 표현하여, 표면적으로는 자신을 감추면서도 의도하고 있는 뜻을 더 강하고 날카롭게 암시하는 것이다. 말하고 싶은 진짜 의도는 겉으로 부각시키지 않고 숨어서 암시만 하기 때문에, 비난을 받는 상대방은 아이러니스트의 공격에 왠지 불쾌함에도 불구하고, 공식적으로 따지거나 정면으로 응수하기가 힘든 상황이 초래된다.

아이러니와는 약간 거리가 있지만, 이와 유사한 방식의 독특한 냉소도 있다. 도리스 레싱(Dorris Lessing)의 에세이집 <런던스케치>(London Sketch)를 읽어보면, 고장난 지하철 에스컬레이터에 관하여 시민들이 지하철 게시판에 올려놓은 문구가 등장한다. 그들은 직접 공무원에게 불평을 늘어놓는 대신에, "왜 이 에스컬레이터가 이렇게 자주 고장이 나는지 말씀을 드리죠. 그것은 바로 낡았기 때문입니다!"라고 써 놓았다. 레싱은 이 문구가 영국인들의 특유한 냉소주의를 잘 반영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어느 누구도 저 시민이 쓴 문구를 읽고 에스컬레이터의 고장이 세월 탓이라거나 물질의 산화작용 탓이라고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꽃병이 떨어져 깨져버린 것이 중력 탓이라거나, 꽃병과 지구가 충돌한 탓이라고 말하지 않듯이 말이다. 문제의 직접적 원인과 간접적 원인을 뒤섞어 놓음으로써, 자신이 심중에서 지적하고 싶은 원인(지하철 관계자들의 나태함)을 강하게 부각시킨 저 시민은 수사학적 냉소의 싸늘함을 교묘하게 구사한 사람이다.

드러난 것(외연)과 암시하고 있는 것(내포, 함축)이 서로 모순이 되어 히스테리적이 되거나 혹은 일치하지 않음으로써 변태적이 되면서, 주체의 심중에 의도하고 있는 뜻이 극단적으로 드러나는 것. 이 효과적인 방식을 비유적으로 말한다면 "싸늘하게 상처내기"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냉소란 표면상으로는 초연함에 기초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일본이나 독도에 대한 한국인들의 핏대처럼, 상대를 부정하고 비난하기 위해 전면에 직접 나서서 분노를 표출하는 대신에, 상대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말로 표현된 자신의 견해가 뜨겁고 혼란스러운 감정이 아니라 그 거리만큼이나 냉각된 이성에 토대를 두고 있음을 은근슬쩍 드러내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합리적 정당성이 확보된다고 할까? 아이러니스트의 담론이 격한 분노가 자아낼 수 없는 날카로움과 객관성을 환기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냉각된 고체성 때문이다.

그러나 더 자세히 관찰해보면 냉소는 순수한 의미에서의 초연함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가령, 미친 척 하고 복수를 엿보았던 햄릿(Hamlet)은 냉소의 대가였다. 냉소주의는 초연한 척 함으로써 그 반대의 경우보다 더 커다란 효과를 자아내기 위한 수사적 전략, 즉 방법으로서의 초연함을 연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풍자와 야유의 표면에 드러난 초연함의 유희 아래에는 상대에 대한 강렬한 혐오가 스며들어 있다. 마치 살짝 덮인 살얼음 밑의 뜨거운 용암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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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생긴 이래 권력은 항상 공포를 이용하여 대중 다수를 통제해 왔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공포를 이용하기도 했고, 초자연적이고 주술적인 공포를 이용하기도 했고, 인간에게 보편적인 죽음의 공포를 이용하여 구원과 처벌이라는 허구로 인간을 다스리기도 했다. 어떤 점에서 인류의 역사는 공포와의 투쟁의 역사라고 할 만큼, 인간은 자신을 위협하는 그 어떤 무시무시한 것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느 정도 알게 되었듯이, 인간을 괴롭히던 그러한 공포들은 죄다 우리 자신 안에 있는 무지와 왜곡된 마음 때문이지, 실제로 자연적 공포나 초자연적 공포 혹은 사후세계가 객관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현대가 되면서, 인간은 과학적으로 자연을 보게 되었다. 즉 자연이 살아서 우리에게 벌을 주고 상을 주는 식의 인격을 갖춘 존재로 더 이상 생각하지 않게 된 것이다. 인간은 자연을 객관적이며 수학적으로 파악하였고, 무엇보다도 자연을 사물(things)의 질서로 바라보게 되었다. 그래서 자연은 계산과 예측이 가능한 그냥 사물들의 배열이고 관계일 뿐이다. 물론 자연은 아직도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떤 무시무시한 피해를 준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자연에 어떤 죄를 저질러서가 아니라, 어떤 질서의 변화를 아직 우리가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 데에 기인할 뿐이다. 자연의 공포는 우리의 죄나 부도덕이나 사악함에 대해 하늘이 내리는 벌이 아니라 단지 재해이고 재난일 뿐이다. 자연을 맹목적으로 믿지 않게 되자, 우리는 자연으로부터 공포를 물리칠 수 있게 된 것이다(이 몰-공포가 우리를 더 파멸시키는 요인이기도 하지만).

따라서 어떤 점에서 과학적 지식의 진보는 무엇보다도 인간이 공포를 이용한 정치적 탄압으로부터 해방되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자연이나 초자연적 혹은 사후세계를 운운해서는 더 이상 공포감을 줄 수 없고, 유식하고 두려움이 없는 사람들은 더 이상 시키는 대로 복종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현대는 새로운 형태의, 더 많은 종류의 공포를 탄생시켰다. 다른 인종에 대한 공포, 다른 국가에 대한 공포, 다른 계급에 대한 공포, 다른 인간에 대한 공포, . . . 이들은 모두가 적에 대한 공포이며, 이는 다름아닌 차이에 대한 공포이다. 차이에 대한 공포는 우리를 자기중심적으로 고립하게 하고, 불화를 삶의 조건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나와는 다른 존재를 불편해 하는 우리의 삶은 항상 불안하고 무섭다.

현대 산업사회는 인간이 살면서 필요한 물건만 대량 생산한 것이 아니라 아이러니 하게도 빈곤에 대한 공포 역시 대량생산 하였다. 굶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공포가 백화점 쇼윈도의 휘황찬란한 상품들의 퍼레이드 가운데 대기 전체에 퍼져 있다. 이 공포 덕분에 우리는 하루 10시간 이상을 기계처럼 일을 한다. 일이 보장해주는 먹을 것 때문에 공포가 사라진 것인지, 아니면 정신 없이 일을 하다 보니 잠시 잊어버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상하게도 고된 노동은 우리를 편안하게 해 준다. 편하게 쉬는 것이 오히려 불안하고 무섭다.

이 뿐만이 아니다. 최근 들어 인류는 핵의 공포, 범죄의 공포, 미국 발 테러의 공포(즉 테러의 테러)에 휩싸여 있다.

과학이 진보하고 현대적 생산방식이 우리를 자연으로부터 어느 정도 해방시킨 지금에도, 여전히 공포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 지금은 초자연적이고 종교적인 공포가 단지 개인적으로만 잔존하고 있지만, 여전히 사회적 정치적 공포는 대중 다수를 사로잡고 있다. 그리고 그들을 사로잡는 공포들 대부분은 여전히 어떤 보이지 않는 권력과 특정한 세력의 허구의 산물이다.

지난 주 까지만 해도 우리는 보내기 아까운 지도자를 잃어 비통해 했다. 하지만 국화꽃과 향불의 향이 아직 가시지도 않던 와중에, 다른 한 편에서는 그 애도와 슬픔에 찬물을 끼얹듯 서서히 닥쳐온 두 개의 공포가 있었다. 하나는 우리를 단결하게 하는 공포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를 흩어지게 하는 공포이다. 전자는 핵의 공포, 아니 더 정확히 말해 이데올로기 빨갱이 공포라면, 후자는 바이러스의 공포이다. 이들이 점점 강하게 다가온다.

전자는 해방 이후 남한의 태생적 빨갱이 혐오증이 만들어낸 공포이자, 그 이후 군사정권이 가장 심도 있게 창조해 왔던 공포이다. 이 공포는 법에 의해 이미 합법화된 형식의 공포이기도 하고, 심리적으로 볼 때 뿔 달린 괴물의 이미지로 수십 년 간 분위기를 조성해 온 관계로 아주 잘 먹히는 공포 중 하나이다. 이들에 관련된 색과 단어들에 대해 반응하는 몇 몇 사람들을 보면 거의 파블로프의 개 수준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로. 이 공포는 우리 자신이 아닌 적을 향해 단결하게 한다. 즉 흩어지면 죽고 뭉치면 사는 것이다.

반면에 후자는 오래 전부터 인류를 괴롭혀 온 공포이긴 하지만, 현대의 미디어와 결합이 되어 지금은 가장 막강한 신종 공포가 되었다. 이는 어쩌면 다른 모든 공포의 메타포일 수도 있는 공포이며, 그렇기 때문에 SF 영화라든가 소설의 주요 소재가 되고 있는 공포이기도 하다. 그러나 믿지 않을 수 없게도, 이것이 과학적 발견의 산물이라는 데 문제가 있다. 우리는 주술가가 말하는 귀신이나 성직자가 말하는 사후세계를 믿지 않을 수는 있지만, 바이러스를 믿지 않을 수는 없다. 과학이 종교가 된 현대에, 과학자나 의사들의 선언을 뿌리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바이러스는 다른 공포와는 달리 그 실체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아니 과학적으로 존재하는 인류의 보편적 공포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바이러스 역시 정치 권력의 손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권력이 바이러스를 만들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자연적으로 발생한 바이러스 조차 권력은 정치화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바이러스에 대한 인간의 행동을 생각해보라. 바이러스는 가장 훌륭한 통제의 수단이 된다. 바이러스는 우리를 흩어지게 한다. 즉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 바이러스는 인간들의 불신과 냉소와 경계의 천연 자연적 조건 같은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공포를 부추기는 권력은 그 자체가 하나의 공포였다. 적이 쳐들어 오면 내가 너희를 지켜 줄께! 네가 다치거나 나쁜 일이 생기면 내가 막아 줄께! 굶어 죽지 않도록 내가 보호해 줄께! 배려와 보호의 이름으로 사람을 무섭게 하면서, 배려와 보호의 필요를 역설하는 권력은 그 자체가 공포였다. 제대로 된 어느 부모도 아이에게 두려움을 심어가며 자신의 필요를 역설하지는 않는다. 한국에는 두 가지 고질적인 공포가 있었다. 경제라는 이름으로 무의식적으로 내면화한 빈곤의 공포가 하나이고, 체제 안정이라는 이름으로 심리화된 붉은 색에 대한 공포가 다른 하나이다. 전자는 줄곧 있어 오다가 최근엔 더 강화가 된 반면, 후자는 한 동안은 잠잠했던 공포이다. 그런데 최근에 우리는 신종 바이러스라고 하는 또 하나의 생물학적 공포와 아울러, 계속 있어왔던 빈곤의 공포의 강화, 그리고 잠시 사라졌었던 붉은 색의 공포의 귀환, 이 모든 유령들이 다시 떼를 지어 출몰하고 있음을 느낀다. 우리는 이제 초자연적, 종교적 공포를 지나, 과학적 공포, 사회적 공포, 이데올로기 공포, 경제적 공포의 블랙홀로 빨려 들어간다.

비통함이 분노로 치닫기도 전에, 어쩌면 가장 견고하게 뭉쳐야 할 이 때, 한 편에서는 분노의 대상을 엉뚱한 곳으로 돌리고 있는 공포가 북쪽에서 불어오고 있고, 다른 한 편에서는 광장 공포증에 버금가는 위력으로 우리 모두를 각자만의 방안으로 흩어지게 하는 공포가 서쪽에서 불어오고 있으며, 우리 내면에서는 굶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빈곤에 대한 공포가 우리를 다른 생각 하지 말고 작업장으로 가도록 채근한다. 모일 수도 없고 흩어질 수도 없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이 삼중구속 하에서 공포에 질려 새파란 입술로 얼어붙을 판이다. 이 세 가지의 다중적 공포가 재료가 되어 앞으로 어떤 작품들이 만들어질지 주목해보자.

Posted by huun

내가 쓴 글을 칭찬해주시고 직접 추천까지 해주신 선생님이 계셨다. 내겐 아주 영광스러운 일이었고, 당시로서는 학업을 지속하는데 많은 동기를 주신 분이다. 지금은 은퇴를 하시어, 모 신문에서 종종 칼럼을 통해서만 뵐 수가 있을 뿐, 직접적으로 뵙기는 쉽지 않은 분이다. 대내외적 지명도뿐 아니라 한국에서는 쉽게 접하기 힘든 지성의 폭과 깊이, 그리고 흐트러짐 없어 보이는 인격 때문에, 그의 한 마디 한 마디는 학생들의 노트에 그대로 옮겨졌다. 그가 개설한 수업은 말할 것도 없고, 개중에는 작은 식사 모임에까지 가고 싶어하는 이도 있었다. 그의 견해는 우리의 부산스러운 판단력에 일종의 좌표 같은 것이었다.

그분에 대한 나의 존경심이 어떤 종류의 것이었는지 분명히 알게 된 일화가 있다. 우리는 가끔씩 현실정치에 대한 관심으로 특정 정치가들에 대한 그분의 의견을 듣고 싶어하곤 했다. 그럴 때 마다 그 분은 정치의 의미에 대해, 삶과 정치에 대해, 현역 정치가들에 대해, 혹은 옛 세대의 정치가들에 대해 가끔씩 논평을 하곤 했다. 우리는 노무현이라는 정치가가 궁금했다. 당시로서는 예상치도 못하게 대통령이 되어 있던 터였고, 지금 기억으로, 검찰과의 불화 때문에 검사들과의 토론이다 뭐다 해가며 미디어가 시끄럽던 때였다. 그 분은 물론 권위주의나 파쇼정치를 반대했지만, 흔히 중도라는 이름으로 자신도 (알게)모르게 보수주의적 성향이 있었기 때문에(중도란 속물의 혹은 미안한 마음의 말장난일 뿐이다), 노무현을 썩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것이라고 짐작은 했었다. 그러나 그의 반응은 생각보다 훨씬 강도가 쎘다. 단어선택이나 어조는 점잖았지만, 가만히 들어보면 그가 얼마나 낯설어하는지, 얼마나 신뢰하지 않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이유는 많았다. 그는 대체로 노무현이 상징적으로 정치를 한다고 생각했다. 민주, 자유, 특권 없는 평등, 권력타도, 불의에의 비타협, . . . 이러한 구호들이 노무현의 발언에 자주 남발이 되었고, 그는 이를 구체적이지 않은 상징들의 결합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깊은 얘기를 오랫동안 한 것은 아니었지만, 몇 마디의 내용으로 미루어보아, 그의 눈에는 노무현의 정치적 발언, 행보, 판단, 타협하는 방식, 열정, . . . 그 모든 것이 일종의 정치적 쇼맨십과 크게 다르지 않은 종류의 것이었다. 노인인 그가 볼 때(그는 정말로 노인이었다!), 노무현은 치기 어린 아마추어일 뿐이었다. 너무나 뚜렷이 드러나고 드러내는 그 가시적인 열정이 그로서는 지속력도 없고 의미가 덜한 외침일 뿐이라고 말이다. 길지 않은 대답이었지만, 그 견해는 그 동안 내가 그 분께 존경심을 가지면서도 왠지 모르게 한편에서는 동의하기 어려웠던 뭔가를 폭로해 주는 것처럼 보였다.  

돌이켜보건대, 그 깊고도 탁월한 지성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항상 한 가지 빠진 것이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는 믿음이 없었다. 아니 믿음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알듯 모를 듯 믿음을 감추고 싶어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혹은 현실을 전혀 모르고 있거나. 아니 현실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내부에 깊이 들어 앉아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거나. 그는 믿음조차 심미적 형식을 갖춘 하나의 윤리이기를 바랬던 것 같은 의구심이 든다. 젊은 청년의 열정을 무모함에 기반한 서툰 낭만주의로 보고 싶어 했거나, 아니 그 열정이 사악한 제스처일 수도 있다고 의심한 것은 아닌지. 불의의 위험에 몸을 내던지는 행위를 믿지 않거나, 아니 그 전에 우선 팔짱을 끼고는 불의가 무엇인지, 열정이 무엇인지, 믿음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따져봐야 한다고 믿는 아름다운 선비이자 우아한 햄릿처럼. 그는 구체적인 인식과 판단을 주장했지만, 한편으로는 구체적인 것이 어디선가 주어지는 것으로 본 것은 아니었는지. 그래서 그것이 명확한 경험적 형식의 사물로 출현하기를 기다리기만 했던 것은 아닌지. 그와의 대화는 당시에는 의식하지 못했던 어떤 질문을 나로 하여금 항상 품게 했다: "춤을 추시겠다는 겁니까? 말겠다는 겁니까?" 아름다움에 대한 일본인들의 놀라운 열광과 탁월한 심미안을 접할 때, 감탄의 배후에서 간혹 느껴지는 허기가 혹시 이런 종류의 것은 아니었는지. 믿음이라고 불러야 할지 열정이라고 불러야 할지 욕망이라고 불러야 할지 아니면 다른 그 무엇인지는 따져봐야겠지만, 무엇보다도 불신에 사로잡혀 근간을 잃은 냉소적 지성이 도대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 그러한 지성이 할 수 있는 일이 결국은 이미 만들어진 질서 위에서 근엄하면서도 소심한 권위를 치열하게 지키는 것 외에 그 무슨 새로운 것이 만들어질 수 있을지 궁금했다. 내가 우러러보았던 것은 다름아닌 깔끔하게 살균되어 완벽하게 정리된, 냉랭한 몇 권의 책 뿐이었다.

르네상스 플랑드르 화가인 브뤼겔(Pieter Brughel the Elder)의 대단히 흥미로운 그림이 있다. 제목은 <The Procession to Calvary>(1564)이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그림은 십자가 처형을 위해 예수가 언덕으로 십자가를 지고 오르는 모습을 담고 있다. 골고다 언덕 중턱에서 일련의 군대가 그의 고난의 길에 채근질을 하며 동행하고 있고, 저 위쪽으로는 시커먼 까마귀와 검은 먹구름이 자욱한 처형지가 모여든 인파로 인해 둥근 원 모양으로 처형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니까 인류에게 있어 가장 비극적이고 슬픈 사건으로 알려진 기원적 순간의 현장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바램이나 예상과는 다르게, 그 슬픔의 현장 주변에는 시장판 혹은 난장판과도 같은 광경이 펼쳐진다. 슬픔과 탄식에 빠진 마리아와 몇 몇 신자들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무슨 시비가 붙었는지 서로 싸우고 있는 패거리들, 모처럼 생긴 구경거리에 흥분하여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철모르는 아이들과 강아지들, 언덕 여기저기에서는 말 타기 시합, 남의 보따리를 훔쳐 달아나는 도둑, 공놀이, 왁자지껄한 구경꾼들, 풀 죽어 있는 광대, 무엇에도 관심을 두지 않고 땅을 바라보는 노인, . . . 이 광경에서는 도무지 비극적 슬픔이라고는 찾아보기가 어렵다. 무지막지하게 모든 것을 휩쓸어가며 이행해가고 있는 시간 속에서, 단지 한 조그만 동네에서 벌어졌던 스캔들 혹은 구경거리 정도에 불과해 보인다. 희생과 인류의 구원이라고 하는 기독교적 열정에 도리어 찬물을 끼얹어 조롱하듯, 십자가 희생이라는 거대비극은 중심 테마가 되지 못하고 주변부의 일개 소요에 지나지 않게 된 것이다.

브뤼겔의 이 그림에는 한 열정이 현실의 삶에서 어떠한 위상을 갖는지가 잘 나타나 있다. 인류를 구원하겠다, 인간의 죄를 희생으로 상쇄하겠다고 하는 이 종교적 열정. 그러나 무지막지한 현실의 "다양성"은 이 위대한 열정이 실은 세상 모든 것을 대변해 줄 수 없다고 찬물을 끼얹는다. 언덕 끝까지 한 발 한 발 걸어가며 느껴지는 땅의 굴곡처럼, 세상은 너무나 무겁고 두터운 중층 지대로 축적되어 있다, 여전히 아무것도 모른 채 철없이 인생을 허비하는 사람이 너무 많고, 이상한 취향, 별난 성격, 전혀 다른 본성의 소유자들이 너무 많다, 따라서 한 두 마디의 혈서와 다짐 혹은 목청으로는 정리가 되지 않을 뿐더러, 저 산만한 세상을 단숨에 집합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이다. 어떤 점에서 그 야심과 기획은 망상이고 오만일 수 있으며, 한 마디로 말해, "너나 잘하세요!"라고 말이다. 혹은 그 반대일지도 모른다. 당신들의 죄를 갚기 위해 저렇게 피를 흘리며 십자가를 지고 가지 않는가? 지쳐 쓰러진 저 열정에 물 한잔 아니 고개를 좀 돌려 관심을 줄 수는 없는가? 완전히 혼자가 된 인간을 생각해 보았는가? 어떻게 당신들은 그리도 철이 없는가? 그가 죽고 나서야 후회하며 우상을 섬기는 당신들은 얼마나 어리석은 당나귀들인가? 라고 말이다.

브뤼겔이 이 그림에서 무엇을 의도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구원에의 열정을 알아보지 못하는 철없는 세상을 조롱하려고 했는지, 아니면 죄 많은 세상을 구하겠다는 자기확신에 사로잡힌 열정에 찬물을 끼얹으려 했는지는 꼬집어내기 어렵다. 둘 다일 수도 있고, 둘 모두 아닐 수도 있다. 물론 세상은 하나의 목소리로 대변될 수 없으며, 브뤼겔의 그림에는 단숨에 대답할 수 없는 현실의 다중성이 있다. 거기서 한 두 명의 가멸찬 열정이 해답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은 젊지만 얼마나 아마추어적이고, 뜨겁지만 얼마나 무모한가? 어떤 점에서 그 위대한 정신과는 반대편에 서서 세상을 삼켜버리려는 정치적 음모와 파시즘이 그러한 열정의 또 다른 모습은 아니었는가? 하늘을 보라! 당신의 바램과는 달리 임박한 처형 위에는 두렵고 슬픈 먹구름만이 드리워져 있지는 않다. 그 뒤에는 따사로운 햇살의 푸른 하늘이 있고, 또 그 옆에는 짙게 드리운 뭉게구름이 시야를 가리고, 하늘 지평선 저 끝으로 펼쳐진 광활한 대지와 집들과 초목이 현기증 나지 않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열정과 계시가 우리를 대변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사실, 이것이 우리가 처한 불행이다. 우리는 이미 미디어의 의식으로 세상을 볼 수 밖에 없고, 누군가의 눈이 되어 우리의 창을 열 수 밖에 없다.

나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참여정부 내내, 그리고 그가 자살한 오늘까지, 그를 생각하면 항상 브뤼겔의 그림이 떠올랐다. 그가 십자가를 졌다는 말이 아니라(비슷한 용어를 써서 동일한 열광으로 오해 하지는 말자), 한 열정이 세상과 맺고 있는 관계에는 저 그림에서처럼 쉽게 설명하기 어려운 안타까움이 배어있다는 말이다. 열정이 그의 생각처럼 그렇게 잘 통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자신의 뜨거운 견해가 수많은 소요의 일부에 지나지 않을 수 있음을,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그토록 원했던 민주주의란 바로 그 자신의 열정이 단숨에 쉽게 먹히는 것을 방해하는 두터운 다중성에 있음을, 아마도 이것이 정권 말엽에 그가 깨달은 현실일지도 모른다.

그는 물론 인류를 구하겠다는 망상은 없었다. 그의 열정은 순수하게 개인적인 차원의 것이었고, 현실적인 것이었다. 그의 열정이 좌파의 특정 이론이나 당정 차원의 노선, 혹은 집단적 형태의 정치체로 현실화된 것은 아니었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그것이 정치적이고 과학적으로 조직화되지는 못했던 것이다. 이를 과소평가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그의 의지와 열정을 훼손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좌파의 과학적이고 정교한 이론을 잘 알았는지는 따져봐야할 것이다. 그러나 81년 부림사건 이후 노동운동, 6월 항쟁 등 좌파적 경향이 본격화 되어갔다. 그럼에도 좌파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것은 대단히 의아스러운 일이며, 어쩌면 이것이 한국 좌파가 실패할 수 밖에 없는 근본적인 이유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그의 열정이란 조직적인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순수한 것, 비유컨대 때묻지 않은 한 시골청년이 우연히 보게 된 세상의 부당함에 대한 자발적 분노와 패기 같은 것이었다(그렇기에 그 지속력이 경이롭다). 그에게서 풍기는 아마추어적인 분위기는 이러한 청년의 열정에 기인하는 것이지, 흔히 말하듯이 전적으로 능력의 완성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보통은 나이가 들면서 혹은 사회물을 먹으면서 사그러들기 쉬운 그 분노와 패기는, 다행히도 그가 법조계에 그리고 이어 정계에 진출함으로써 어느 정도는 정치적으로 현실화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고 마음을 움직였다.

그는 정치가 야합이나 협잡 음모 혹은 비굴한 타협이 아님을 증명하고 싶어했다. 그는 품위와 위엄을 포기한 그러한 악착스러움이 없이도 성공적인 정치와 삶이 가능함을 보여주려고 했다. 아니 진정한 정치와 삶 그 자체가 바로 그러한 것들을 배제하는 과정임을 말하고자 했다. 그에게 있어 정치는 의로움(義)을 통해서만 완성될 수 있는 것이었다. 도덕성이란 그 결과 혹은 일부일 뿐이다. 우리가 그의 죽음에 가슴이 아프고 눈물이 나는 이유는, 반드시 한번은 청년이었을 우리 모두가 가졌던 그 무엇, 그러나 뒤틀린 삶의 강요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타협하고 굴복하고 비굴해질 수 밖에 없어서 이미 너무 멀리 떠나와 버린 그 무엇, 그러나 여전히 마음 한 구석에 남아 부당함에 직면할 때 강렬히 떠올리지만 아쉽게도 침묵하고 있었던 뜨거운 그 무엇을, 이제는 그 마저도 완전히 송두리째 잃어버린 것 같은 안타까움 때문이다. 청년이었던 우리 모두는 그래서 말할 수 없이 비통하다.

참여정부는 기업이나 언론을 막론하고 특권을 가진 소수와의 싸움, 즉 그들의 부당한 힘과 이익을 약화시키려는 노력으로 점철된 시기였다(성패여부를 떠나서). 따라서 어떤 점에서, 노무현은 상징적 정치를 한 것이 아니라 상징과 투쟁을 한 것이었다. 왜냐면 상징을 만들고, 상징을 유포하고, 상징을 은폐하는 쪽은 항상 그 특권소수였기 때문이다. 특권소수는 자신들의 이익이 커지지 않도록 훼방을 놓는 그를 무척이나 싫어했다. 모르긴 몰라도 노무현 정권이 계속되었다면 밥그릇에 재를 뿌려대는 그를 능히 암살까지 음모했을 만큼 그들의 증오심은 컸다. 이 기간 동안 특권층은 자신의 이익에 닥칠지 모를 심각한 손해가 생존에의 위협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이들의 싸움은 일종의 생존투쟁 같은 성격을 취했고, 그 만큼 대립은 악랄한 형태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일환으로, 그들은 그의 품위를 훼손시키고 싶어했다. 말투라든가 출신이라든가 심지어는 두 부부의 학력까지 운운하며, 오히려 자신들의 천한 근성을 드러내곤 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부도덕과 탐욕에 대한 그의 혐오에 찬 비난에 자존심이 몹시 상했고, 똑같은 방식으로 그에게 되돌려주고 싶어 했다. 그래서 제 아무리 잘난척하는 노무현도 결국은 자신들과 다르지 않은 일개 탐욕의 모리배일 뿐임을 증명하기 위해, 자기들끼리 천박한 루머를 퍼뜨려가며 악인의 소설을 쓰고 증거를 찾아 나섰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정치라는 것이 원래가 의롭지 않은 것, 탐욕에 기반한 것, 다들 그렇게 하는 부당함의 질서 자체라고 만인에게 설파하고 싶어했다. 결국 우리는 정치가들을 믿지 않게 되었고, 그 만큼 우리가 보고 싶은 지도자의 이미지를 노무현에게서 찾고 싶어 했다. 자신들이 만든 루머를 스스로 믿고 있었던 특권층은 노무현에 대한 사람들의 열광을 믿지 않았으며 의아해했다(탄핵이 좋은 예이다). 그건 그의 권모술수와 쇼맨십이 먹힌 결과라고 생각했다. 어떤 측면에서 그들은 도덕적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었는지도 모른다. 거리낌없이 내뱉는 그의 당당함(그들은 오만이라고 불렀던)에 질투심도 느꼈을 것이다. 그들은 유럽의 정치가들처럼 마치 스포츠 게임의 한 역할로서 다시 언제든지 화해가 가능한 공(公)적인 상대로 그를 수용했던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죽일지 모를 적으로, 증오를 품은 사적인 원수로 간주했다. 정치가 당사자들의 이익관계를 대변해주는 활동이 될 때, 다시 말해 정치가가 이익관계의 당사자가 될 때, 정치는 사정없이 악랄해진다는 점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정치가 아닌 생존 전쟁을 벌였던 특권소수는 결국 그 악착같음으로 인해, 그리고 칼을 쥔 몇 몇 심복들의 무의미한 오바로 인해, 그의 죽음을 이루어냈고 일견 승리한 것처럼 보인다.

특권소수의 승리는 그들 자체의 힘보다는 많은 조력자들의 힘이 컸다. 그들은 수적으로는 소수였지만, 그 힘은 다수였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이미 그들의 조력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헤게모니를 장악했던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경제모델도, 잘사는 나라의 뚜렷한 모델도 없이, 그 특권층을 선망하고, 그들이 선호하는 것을 선호하고, 그들이 싫어하는 것을 싫어하고, 그들처럼 부자가 되고 싶어하고, 강남에 살고 싶어했다. 개미든 벌레든 아니면 단순 은행고객이든, 우리는 주주가 되어 그들처럼 대박의 신화를 믿었고, 치고 빠질 기회 즉 스캔들을 기다렸다. 그렇게 우리 모두는 그들을 위해 만들어진 양복을 어색하게 걸친 채 흉내 내며 뻐기고 싶어했다. 이를 부추긴 또 다른 조력자(아니 그 주체)는 바로 언론 미디어였다. 그들 역시 경제를 제1가치로 내걸고(경제가 뭔지도 잘 모르면서), 전국민적 캠페인까지 기획하여, 모든 이의 뇌리 속에 경제, 돈, 부자, . . 이러한 특권층의 강박을 공유하게 했다. 마치 그들의 강박이 아니면 경제는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가 굶어 죽기라도 할 것처럼! 그들의 말과, 인생관, 생활습관은 책, 잡지, 미디어에 출판 방송되어 귀감처럼 다루어졌다. 그들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모든 이의 행동모델이 되어 하나의 거대한 콤플렉스를 형성하면서 우리를 설득했다. 현재의 정치 경제 권력은 이 콤플렉스를 극대화하고자 한다. 미디어의 주체가 이미 그들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의 눈을 통해서만 세상을 바라보고, 창을 열었던 것이다. 이 창을 통해 본 우리의 세상은 가난한 사람들조차 실패한 부자였고, 집값의 하락을 사형선고로 받아들인 집 없는 집주인들, 즉 잠재적 강남인이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노무현에 대한 증오까지 흉내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노무현이 특권소수와의 전쟁에서 실패한 원인은, 그가 특권소수를 일부 계층이나 일부 지역으로 혼동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상대는 국민 전체였는데도 말이다.

결국 특권소수와 최근의 검찰이 창조한 것은 무엇일까? 반추동물의 되새김질처럼 반복적으로 파고든 집요한 조사로 결국 그들이 창조한 것, 그것은 다름 아닌 절망과 허무와 무기력이다. 젊음의 살해! 그것 외에 무엇이 있겠는가? 그들은 우리가 정치가들로부터 보고 싶어했던 어떤 것이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으며, 있다 해도 반드시 실패하고 말 것이라고 믿는 냉소적 현실주의를 행동으로 증명했다. 아마추어리즘이든 무모함이든 서툰 낭만주의이든, 청년기에나 어렴풋이 품고 있다가 상실해버리고 마는 것으로 간주했던 그것이, 그래도 혹시나 현실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지속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기 나름이 아닐까? 라고 망설이고 있는데, "그딴 것은 존재하지 않아!"라고 쏘아붙이며, 경험은 많지만 한 없이 미루고만 있는 쇠잔해진 한 인정머리 없는 노인의 일축처럼. 그들은 한국인에게 가장 소중한 그 무엇을 완전히 망가뜨리고 망쳐놓았다. 정권을 창출한 것도 아니었고, 정치인의 부패를 막은 것도 아니었고, 정의를 수호하거나 도덕성을 지키거나 부도덕을 고발한 것도 아니었다. 위협을 느낀 생존을 위한 투쟁도 아니었다. 손에 든 칼이 진짜로 잘 드는지 확인하기 위해? 아니면 뭔가를 해낼 수 있음을 과시하기 위해? 충성을 증명하기 위해? 법 절차의 문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법 이전의 의지를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장하게도 또 한번 불신과 냉소를 창조하고 말았다. 그래서 우리는 힘이 빠지고, 아무것도 하기가 싫어지고, 정말이지 지겨워진다.

누군가가 죽자마자 모든 대결과 명분들은 철회된다. 마치 한쪽의 죽음이 대결의 고지였다는 듯이, 명분이 마치 살아있는 동안에만 유효한 생물체인 것처럼, 도덕성이나 정의가 마치 싸움의 무기였던 것처럼, 그가 죽고 싸움이 끝나자 심장의 멈춤과 함께 명분도 매장되어 버린다. 머리를 숙이고, 애도를 표하고, 증오의 감정을 풀고, 모든 악착스러움을 접은 평화로운 상태이다. 그러나 죽음 즉 침묵 앞에서는 근본적인 무언가가 드러난다. 그의 죽음 앞에서, 우리는 그 동안 고귀하다고 쥐고 있던 가치들을 떨구고, 잠시겠지만 모든 합리주의적 믿음을 철회하며, 잠시 서서 하늘을 보는 순간 잊고 있던 무언가를 깨닫는다. 우리는 젊음을 잃었다! 배불리 먹여주겠다는 정치? 약자를 위하겠다는 정치? 정규직 노동자를 만들겠다는 정치? 우주를 구원할 이론으로 중무장한 정치? 정치는 약속이 아니다. 장황한 약속으로 실마리를 풀어가며 냉랭하고도 까칠한 능력을 앞세우는 정치와는 본성이 다른, 마음을 움직이는, 감동을 주는, 정치 이전의 정치를 우리는 잃어버린 것이다.

그는 해방 이후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정치가에게서 보고 싶어하는 것을 육화한 유일한 사람이었다(김구 운운하며 오버하지 말자!). 새로움을 탄생시키는 것은 지성이 아니다. 게으르고 늙어빠진 소심한 지성은 항상 처져있지 않은가? 돈 버는 수완도 역시 될 수 없다. 돈은 우리가 버는 것이지 대통령이 버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들은 우리를 절망하게 하고, 힘을 쫙 빠지게 하고, 무엇보다도 지겹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러야 젊음을 육화한 정치가를 만날 수 있을까?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야 우리조차 덩달아 젊어져 그의 무모함마저 믿고 밖으로 나가게 될까? 아니 그러한 것이 있기는 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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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파이어는 항상 몰락을 하는 것일까? 해피엔딩을 일종의 문화적 제도로 삼은 헐리우드에서조차 뱀파이어의 끝은 몰락이다. 그들에겐 삶이 아예 없거나 삶을 지속할 만한 존재론적 근거가 없는 것일까? 흡혈귀가 바이러스 감염과 같은 질병이기 때문인가? 왕성한 식욕과 건장함, 그리고 나약한 인간은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공간을 초월하는 힘과 탄력을 가진 불멸의 존재 같은데도, 그늘진 창백함과 충혈된 동공은 항상 죽음을 연상케 하는 불쾌한 비정상의 비쥬얼을 환기한다.


대부분의 작가나 영화감독은 자신의 종교적 입장과는 무관하게 무턱대고 흡혈귀를 질병으로 규정한다. 그러나 어떤 질병? 인간의 의학이 규범화한 특정 징후를 보이는 그러한 질병? 그러나 딱히 의학적 소견으로 진단을 내릴 만한 징후도 없지 않은가? 다만 혈액을 섭취하지 않으면 기침과 고열과 백화현상 비스무리한 신체적 변화들이 있기는 하다. 결국 그들의 몰락은 피의 문제란 말인가? 마늘에 대한 특이한 혐오를 포함해서, 피를 먹는다든가 하는 식품에 대한 이상취미 때문에? 그러나 자연적으로 그가 갈구하는 음식이 그의 신체를 해체시키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에게는 피가 독이 아니라 생명이 아니던가? 그의 문제는 피의 섭취가 아니라 오히려 섭취를 방해하는 다른 것에 있어 보인다. 허기로 인한 인간의 죽음을 질병으로 보지 않듯이, 허기를 채우기 위한 인간의 무자비한 음식 섭취를 질병으로 보지 않듯이, 많은 흡혈 동물들이 그렇듯이, 흡혈성 역시 질병이라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의학적 생물학적 소견 외의 다른 원인, 가령 피에 대한 금지된 욕구 때문에 어쩔 없이 생명을 죽여야 한다는 생득적 때문에? 종교적 질병으로 인해 그는 항상 십자가를 피해 다니는 것으로 설정된다. 그러나 최근의 영화에서는 십자가가 다지 힘을 발휘하지 못하거나 아예 등장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종교적 질병으로부터 치유된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자연 안의 모든 존재는 아이러니하게도 생명을 파괴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가 없다. 뱀파이어뿐만 아니라 인간과 자연 전체가 원죄의 스캔들이라고 하는 종교적 질병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것이다. 생명이란 죽음으로의 길이고, 창조란 해체이며, 영양이란 분해와 소화이며, 대낮은 밤에서 밤으로의 이행이다.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선천적 죄를 부과해서 존재를 부정하는 방식 자체가 가지는 졸렬함도 있다. 그것은 구차하고도 궁색한 성직자들의 해묵은 변명에 불과할 뿐이다. 뱀파이어 역시 교설의 공포가 기만적임을 이제는 깨달은 같다. 뱀파이어의 종교적 몰락의 시대는 구식이 된지 오래다.


궁금한 것은, 어째서 뱀파이어가 갈구하는 것이 동물의 피가 아니라 반드시 인간의 피인가? 염소의 피라든가 돼지나 닭이나 소의 피로 인간처럼 그럭저럭 살아갈 있다면, 뱀파이어 자신도 몰락하지 않을 있지 않을까? 나아가 동물들을 사육하고 재배를 하여 농사를 지어 살아가는 방식도 생각해 있지 않을까? 고기는 내다 팔아 부수입을 올리고. 밤과 낮을 바꾸어 살아가야 하는 불가피한 조건이 있긴 하지만, 그것이 그의 재배나 목축활동에 치명적인 한계가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과학만능주의 시대에 피의 생화학적 인공생산 역시 생각해 수도 있지 않을까? 결국 그의 몰락은 사려(prudence) 필요로 하는 노동의 부재, 말하자면 창세기적 상상계에서 아직 깨어나지 못한 현실 인식의 부재 혹은 철없던 시절에 길들여졌던 편식습관에의 고착 때문이라고 말해야 할까? 아니면 식품가공을 혐오하는 결벽스러운 자연주의 때문이라고 말해야 할까? 하지만 널린 것이 인간의 피가 아닌가? 노동이나 과학은 필요치 않다. 인간은 많이 있다. 심지어는 너무 많이. 그다지 피를 아끼는 종족도 아니며 오히려 남발하지 않는가? 인간이 많은 세상은 뱀파이어에겐 아직도 하나의 낙원이다. 오히려 동료 흡혈귀가 너무 많아져 피의 수요가 공급을 앞지르지 않도록 동료 흡혈귀와의 야만적 경쟁이 필요할 뿐이다.


피에 대한 욕구가 불가피하게 인간과의 전쟁을 초래하기 때문일까? 뱀파이어의 피에 대한 욕구 만큼이나 인간의 생존 욕구도 있으니까. 그래서 뱀파이어는 항상 인간과 불화하고 그와 욕구의 전쟁을 치른다. 결국 뱀파이어가 몰락한다면, 주로 미국식 뱀프 영화들이 그렇듯이, 인간과의 전쟁에서 패했기 때문인가? 힘이 딸려 도저히 되겠으면 예외 없이 아버지를 호출하여 (이미 치유가 것도 모르고) 십자가를 내밀거나 성수를 뿌려대는 나약한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힘과 탄력으로 공중을 날아다니는 그가? 아무리 칼로 찌르고 총으로 쏘아대도 해체되지 않고 원래의 상태로 회복되는 단단한 육체와 끈적이는 피를 소유한 불사신이? 말도 된다. 인간과 전쟁을 치르고 대립적일 밖에 없기 때문에 몰락해야 한다면, 그것은 뱀파이어를 우리 인간의(특히 미국식 영웅으로서의 인간) 관점에서 결과일 뿐이다. 뱀파이어는 자신의 역사가 없단 말인가? 대낮의 노동과 빛의 역사 만큼이나 잠과 달과 어둠의 역사가 있다.


어느 모로 보나 뱀파이어의 몰락은 필연적 근거가 없어 보인다. 그는 의학적으로도 종교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몰락할 이유가 전혀 없다. 그는 심지어 우월하기까지 하다.


물론 가지 . 어쩌면 가장 많이 야기되는 근거라고도 있는 , 바로 윤리적 질병 때문이라는 이론이다. 말하자면 인간과의 전쟁이 아니라 근본적인 전쟁, 자연과의 전쟁 때문이라고 할까? 쉽게 말해 자연의 자정능력이 감당할 없는 과도한 갈증과 식욕으로 인한 자멸이다. 그래서인지 대부분의 영화감독이나 작가들은 항상 흡혈귀의 '' 방탕함을 연상시키는 관례 같은 것이 있는 같다. 다른 남자의 여자를 유혹하여 그녀들의 뽀얀 목에 깊고 진한 정욕의 붉은 징표를 꽂아대고, 식욕을 채워줄 인간을 찾아 날카로운 송곳니로 무자비하게 천공을 낸다. 끊임없는 쾌락에 대한 갈증. 결과 모든 자원의 고갈 아니면 자신의 고갈. 이것이 뱀파이어라고 하는 윤리적 질병의 몰락의 절차이다. 그러나 욕구가 자연을 초월하고 이탈하고 자정능력을 능가하는 것이라면, 흡혈귀는 자연의 질서 안에 있는 자연적 존재가 아니란 말인가? 그렇다고 초자연적 존재도 아니지 않은가? 그는 대낮의 빛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물론 기독교에서 빛과 십자가의 본질은 물리적 성질이 아니라 초자연성이지만, 어떤 뱀파이어는 선글라스에 선탠 크림을 칠하고 대낮에 출몰한다). 어쨌든 그는 먹어야만 하고 수면이 필요하며, 다른 어떤 존재보다도 자신의 육체로 파고든다. 그는 자연을 초월한 존재이기는커녕 오히려 자연 안에 갇혀 있는 것이다. 사실 그의 과잉 욕구의 진정한 의미가 이것이다. 욕구의 초과는 실상 결핍에 근거하고 있다. 결국 윤리적 질병에 의한 몰락이라는 이론에 따르면, 뱀파이어는 건강하지도, 식욕이 왕성하지도, 자신의 육체와 영혼을 지속시킬 만큼 충분한 참을성이 있지도 않다. 지속 가능한 건강이란 새로운 변화를 수용하는 폭과 깊이의 반영이기 때문이다. 그는 대식가이지만 실은 편식가일 뿐이며, 초월한 보이지만 실은 신경증 환자이며, 당찬 활보의 소유자이지만 실은 어둠 속에 얼어붙은 내성적 히키코모리일 뿐이라는 것이다. 자연적이지도 그렇다고 초자연적이지도 않은 그의 아노미가 이미 그를 창백하게 죽은 존재로 규정한 것일 있다.


그런데 우리는 뱀파이어의 아주 기이한 몰락을 목격하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박찬욱의 <박쥐(Thirst)>에서는 특이하고도 어이없게도 뱀파이어가 자살을 선택한다. 법적이라고 해야 할지 종교적이라 해야 할지 윤리적이라 해야 할지 아니면 바이러스 증상으로 인한 신체적 고통이라 해야 할지 판단하기 어려운 종류의 '죄의식' 혹은 '양심' 휩싸여 있는 흡혈귀를 보게 것이다. 바이러스 때문이든, 사로잡힌 욕망이 금지되었기 때문이든, 아니면 살인을 했기 때문이든, 죄의식의 내용은 자신의 존재가 자연으로부터 이탈하여 자연과 인간에 민폐를 끼치고 있다는 강박이다. 그는 갈증과 욕망을 숨기고 싶어하고 부끄러워하고 저주한다. 그로 인해 양심적인 괴물이 되어 가지 인도주의적 노력으로 양심을 상쇄하고자 한다. 죽어가는 사람(남에게 무엇이든 주길 좋아했던)에게서 약간의 혈액을 나누어 섭취한다든가, 기증된 혈액만을 받는다든가, 살인이 아니라 자살을 도와준다든가 등등. 나아가 성실한 괴물은 피의 농업이나 목축이라도 기꺼이 태세다.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양심도 없으며 식욕과 갈증이 대단히 왕성한 여인-뱀파이어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어쨌든 여기서도 뱀파이어는 전쟁을 치르다가 몰락한다. 하지만 무엇과 전쟁을 치른 것일까? 흡혈귀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전혀 다른 종이 되었을지도 모를 그를 자살로 이끈 것은 깊고도 질긴 어떤 관념이다. 인간이라고 하는, 나아가 정상적이고 윤리적인 인간이라고 하는 관념! 자신이 새로운 종이 모든 가능성을 부정하게 하는 만성적 질병, Human! 질병은 뱀파이어가 아니라 바로 인간성이다. 대낮이 주는 기쁨도 밤이 주는 기쁨도 그렇다고 다른 인간이 주는 기쁨도 없이, 단지 주기적으로 모여 마작으로 시간을 때우거나 성령을 기다리며 기적을 바라는 병든 반복의 소유자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정상인임을 의심 없이 자부하며 다른 모든 존재를 비자연적 괴물로 여기는 고착병. 그는 뱀파이어 자신의 윤리가 아니라 인간의 윤리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여인-뱀파이어는 소심한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아직도 인간인줄 알아?" 뱀파이어는 미결정된 존재이다. 그는 부유한다. 그러나 땅에 발을 내딛고자 , 어딘가에 자신의 힘겨운 육신을 정착시키려 , 주로 인간이라고 하는 만성적 질병에 안착하고자 , 그는 몰락한다.


뱀파이어는 종류의 전쟁을 치르는데, 하나는 갈증과의 전쟁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성과의 전쟁이다. 모두를 포기할 없을 , 그는 스스로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고통스러운 반복을 종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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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홍상수 영상의 중요한 요소인 과잉실재는, 세계를 요약하여 그 힘을 최대화하는 표현(주의)적 경제성과 대립하고 있다. 그 형식적인 예는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예를 들어, 클로즈업의 사용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든지, 혹은 그 고유한 의미에서의 몽따쥬의 사용도 보이지 않는다든지, 혹은 카메라가 특정 인물이나 상황을 전경화하기 위해 그들을 따라다니는 일이 두드러지지 않는다든지(카메라가 인물들을 따라다니는 경우가 있지만, 인물들은 프레임의 다른 모든 요소들 속에 묻혀있을 뿐이다), 혹은 빛과 색채를 회화적으로 사용하여 그들의 과도한 대립이나 강조를 뚜렷이 하는 일이 없다든지, 그리고 화면 구성에 있어서도 역시 의식적 배치가 두드러지지 않는다든지 혹은 숨긴다든지 하는 점이 그것이다. 또한 문학적 주제를 다루는 방식에 있어서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물론 사랑하는 연인들과 이들의 관계 그리고 욕망이나 배신 혹은 권력과 같은 소재들이 있다. 그러나 그의 영화 전체를 자세히 훑어보면, 그러한 소재들이 담론으로 다루어지거나, 서사적 의미작용을 일으키는 메커니즘은 발견되지 않는다. 단지 그 소재들을 둘러싸고 있는 정당화할 수 없는 동작들만 있을 뿐이다. 한마디로 말해 근원적 기원이나 최종적 결론이 없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동작들과 언어는 중심을 가지지 않으며, 따라서 요약되지도 않으며, 그 힘을 최대화할 수도 없다. 홍상수 영화에 있어 유일하게 스며있는 문학적 요소―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는 산만한 실재 그 자체에 대한 이름 모를 의식 외에는 아무것도 없어 보인다. 그래서 모든 문제들은 이야기가 아니라 행동주의적 사실들로부터 파생된다. 또한 이것이 바로 제임스(William James)를 위시하여 몇 몇 화용론자(pragmatists)들이 생각했던 실재이다. 이들이 생각했던 실재란 바로 의미가 결정되지 않은 세계, 미리 결정된 중심을 가지지 않는 세계, 인간적 지각 이전에 존재하는 (지각이)소거된 상태의 세계이다. 그것은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상태들 간의 이행, 나아가 지각의 이행 그 자체가 아닐까? 이를 명시적으로 예증할 수 있는 좋은 이미지가 하나 있다.

홍상수의 두 번째 영화인 <오! 수정>은 개인적으로나 사무적으로나 서로 관계를 맺고 있는 세 사람―영화 감독인 영수, 작가인 수정, 그리고 영수의 돈 많은 후배 재훈―의 사랑 이야기를 몇 편의 에피소드로 꾸며놓았다. 그런데 각각의 에피소드는 동일한 사실에 대해 세 사람 각자의 관점과 기억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니까 하나의 사건이 각 에피소드에 따라 두 번 혹은 세 번 이상 반복되어 제시되지만, 카메라의 위치나 사건의 내용은 매번 약간씩 다르게 편집되어 있는 것이다. 물론 이 작품의 화법은 개인들의 서로 다른 기억과 그 재구성에 의존하고 있지만, 전체 내용을 이루고 있는 형식은 개인들간의 상호 주관적 관계로부터 비롯된다. 이 작품에는 매우 독특한 장면 하나가 있다.

영수는 운전기사와 전화통화 중에 기사에게 모욕적인 발언을 한다. 화가 난 기사는 지금 당장 사무실에 갈 테니 그 자리에 있으라고 경고한 뒤에 전화를 끊는다. 그리고 나서 운전기사와 영수가 사무실에서 맞대면하는 장면이 두 번 등장한다. 이 두 장면은 하나의 사건(두 사람의 대면)을 두 개의 관점에서 바라본 것이다. 첫 번째로 제시된 장면은 영수의 점잖은 사과로 별일 없이 화해하는 것으로 끝난다. 우리는 이 장면이 영수의 기억으로 재구성된 것인지 아니면 객관적 사실로 제시된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그 장면에서 제시된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러나 나중에 다시 등장하는 두 번째 장면은 첫 번째와는 전혀 다른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영수는 운전기사의 폭언과 폭력에 의해 따귀까지 맞으며 모욕을 당한다. 이 장면은 첫 번째 제시되었던 사실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다. 객관성이란 상대적인 한에서만 가능한 것이므로, 어떤 쇼트가 객관적 관점의 위상을 가지려면, 그것이 다른 장면을 교정하거나 대체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두 번째 장면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처음의 점잖은 사과와 화해가 영수의 주관적이고도 자의적인 기억이었다고 확신하게 된다. 이 두 번째 쇼트는 최초의 화해 사실을 교정하면서, 그 쇼트를 (영수의) 주관적 관점으로 변형시키고, 그 자신이 스스로 객관적 관점의 위상을 취한다. 그런데 이 두 번째 장면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장면이 잠시 지속되다가 카메라는 서서히 왼쪽으로 패닝하여 그 수치스러운 장면을 숨어서 바라보는 수정을 담는다. 따라서 첫 번째 제시된 장면을 교정하여 객관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던 이 두 번째 장면은, 사실은 수정의 주관성에 의해 교정된 또 하나의 주관적 이미지였음이 드러난다. 이 두 번째 쇼트에는 아주 복잡한 문제가 있다.

우리는 흔히 영화적 지각의 두 형태(주관적 지각과 객관적 지각)를 말한다. 주관적 지각은 하나의 장면 안에서 부분을 이루고 있는 인물이나 사물에 의해 포착된 지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들뢰즈(G. Deleuze)는 이를 대체로 세 가지로 분류했는데, 우선 눈이 부상당한 사람이 자신의 파이프를 보고 있는 경우에, 이를 흐린 초점으로 처리하는 경우가 있다. 이를 감각적 주관성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카메라의 지각은 부상당한 그 사람의 주관적 감각과 동일한 것이 되어 있다. 다음으로는 춤이나 축제의 풍경이 그 안에 참석하고 있는 어떤 인물에 의해 보여지는 경우이다. 이를 행동적 주관성이라고 부른다. 움직이고 있는 인물이 어떤 대상을 볼 때에는, 그 자신의 움직이는 방식에 따라 풍경이 보이므로(흔들거리거나 빙빙 돌거나), 행동 중에 있는 경우라도 주관적 형식을 띠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감정적 주관성이라고 불리는 것이 있다. 예로, 어떤 여자가 칭찬하고 있는 주인공의 모습이 마치 거대한 나무 위에 군림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이다. 사실은 땅 위에서 단지 시이소 놀이를 하고 있을 뿐이었지만, 카메라는 그 여자의 감정이 투사된 주관성으로 그 주인공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들뢰즈의 지각-이미지에 대한 이 예들은 그의 책 Cinema I (Minneapolice, 1986)에서 p.71쪽을 참고). 이 이미지들이 주관적 특질을 띠고 있다고 간주될 수 있는 것은, 이 장면이 나오기 이전에 혹은 그 이후에 등장하는 다른 이미지들과의 비교를 통해 교정되기 때문이다. 거대한 나무 위에 군림하는 것처럼 보이던 그 인물은 나중에 가서야 시이소에서 내려오는데, 그 때서야 비로소 관객은 그때의 장면이 여자의 주관적 지각이었음을 알게 된다. 또한 이미 관객은 눈이 부상당한 한 남자와 그의 파이프를 본 바가 있기 때문에, 흐릿하게 처리된 그 파이프의 이미지가 그 남자의 주관적 지각이었음을 알게된다. 이렇게 본다면 영화에 있어 주관적 이미지는 다른 이미지와의 비교에 의해서만 판단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객관적 지각이라고 불리는 것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객관적 지각은 흔히 특정한 화면 외부에 있는 누군가의 관점을 통해 보여진 사물이나 풍경을 지칭한다. 확실히 영화에서는 주어진 화면에 속하지 않는 다른 인물이나 사물의 관점에 의해 포착된 지각이 많이 등장한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객관적 지각 역시 상대적으로 혹은 비교에 의해서만 정의될 수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화면 외부에 있다고 간주된 관점은 언제든지 화면 내부의 요소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미 지적했듯이 우리는 영수와 운전기사의 대면을 담은 첫 번째 쇼트를 객관적인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 객관성은 영수가 기사에게 모욕을 당하는 두 번째 쇼트에 의해 교정되어, 이전에 보았던 점잖은 화해가 사실은 (영수의) 주관적 기억을 암시하는 이미지로 대체되었다. 두 번째 장면 역시 마찬가지이다. 관객은 지금 목격하고 있는 수치스런 장면이 객관적인 것이라고 간주하지만, 곧 이어 수정이 목격하는 장면이 등장하면서 그 객관적 이미지는 수정의 주관성으로 대체되는 것이다. 영화에 있어 객관적 지각이란 다른 지각을 수정하고 대체하거나 밀어내면서 나오는 것 같다.

따라서 영화적 지각을 주관성과 객관성으로 뚜렷이 구분하는 것은 명목상으로만 가능할 것이다. 베르그송은 지각에 있어 주관적 지각과 객관적 지각을 뚜렷이 구분하는 것은 이론상의 추론일 뿐임을 분명히 한 적이 있다. 실제의 지각이란 그 두 이미지가 혼동되어 있는 상태일 것이다. 특히 영화에 있어 이미지의 객관성과 주관성은 상대적으로만 파악할 수 있다. 특정한 대상을 선택하여 본다는 것 자체가 이미 주관적 이미지의 투사가 없이는 불가능하며, 또한 주관적 이미지란 이미 특정한 대상이 객관적으로 보여진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양방향 화면(shot-reverse shot)에 있어 관찰자와 관찰대상의 상호보완적 기능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양방향 화면에서의 관찰자와 관찰대상은 서로 교차하면서, 하나가 다른 하나의 관점에 의해 포착되고, 또 그 반대의 관점에 의해 다른 하나가 포착된다. 예컨대, 무엇인가를 바라보고 있는 인물을 보여주고, 이번엔 그가 바라보는 대상을 보여준다. 이때 우리는 전자를 객관적 이미지로, 후자를 주관적 이미지로 결정할 수가 없다. 이미 전자는 모종의 주관성에 의해 포착된 지각일 수 있으며, 반대로 후자 역시 전자의 주관적 지각이 아닌 그 자체 드러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소설에 있어 비 초점화(zero focalization) 형식을 보면 서술자는 인물의 내부와 외부를 자유롭게 왕래하는데, 이것은 객관성을 추구하려는 노력이기보다는, '서술자=신'의 등식을 정당화하기 위한 형식의 최대화라고 말할 수 있다. 모더니스트 소설가들의 양식을 관류하고 있는 '저자의 사라짐'이나 '몰 개성' 혹은 '비 매개'와 같은 개념들 속에는 저자의 신(神)적인 망상의 결과라는 역설이 숨어있다. 저자는 (전통 소설에서처럼)스스로 등장하거나 지시되면서 세계의 일부가 되기를 그치고, 사라짐으로써 오히려 세계에 내재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식된 신이 아니라 매순간 '느껴지는 신'이 된다(Francis Streegmuller, ed. and tr. The Selected Letters of Gustave Flaubert (N.Y., 1957) p.127.). 조이스(James Joyce)는 『율리시스(Ulysses)』에서 서술자의 위상을 범신론적 신으로까지 고양시키고 있는데, 예를 들어, 우선 한 인물이 속해있는 방안의 풍경을 객관적으로 묘사한다. 그리고는 점점 그 인물의 외양으로 묘사가 집중되면서 그 인물 쪽으로 다가간다. 이제 화자와 인물은 너무 가까워져서 거의 구분할 수 없는 상태에 도달하고, 급기야는 그 인물이 보는 방식에 따라 방안과 창문 밖에 펼쳐진 바다를 묘사하기 시작한다. 그 인물 속으로 들어가 버린 것이다(이것은 마텔로 탑에서 친구들과 살고 있는 스티븐(Stephen Dedalus)을 묘사하는 장면을 참고. James Joyce. Ulysses. (Oxford, 1998). pp. 3-9). 조이스는 이를 더 밀고 나간다. 우리에게는 '촬스 삼촌의 원리'로 잘 알려진 자유간접화법이 그 예이다. 어떤 인물을 묘사하기 위해 그 인물의 고유의 어조를 사용하거나, 그 인물의 내적인 상태를 통해 그의 외관을 묘사하는 것이다. 이것은 더 이상 내부와 외부를 순차적으로 왕래하거나 교차하는 것이 아니라 그 두 체계를 동시에 보여주는 방식이다: "He[Bloom] foresaw his pale body reclined in it at full, naked, in a womb of warmth, oiled by scented melting soap, softly laved."(James Joyce. Ulysses (Oxford, 1998). p. 83) 이 예는 목욕탕에서 자신의 몸을 들여다보는 장면을 블룸(Leopold Bloom) 자신의 감각적 주관성("a womb of warmth", "scented melting soap", "softly laved")을 통해 객관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서술자는 인물의 주관성이나 스타일로부터 '감염(contagion)'되어, 내부에 있는 것도 외부에 있는 것도 아니다. 이와 유사하게 영화에서는 양방향 화면의 "극단적인 수축"이 일어나기도 한다. L'Herbier의 El Dorado에 좋은 예가 있는데, 미친 여자의 모습을 (객관적 관점으로)제시하고 난 다음에, 그 여자의 관점에서 그녀가 보고 있는 대상을 흐린 초점으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 두 화면을 결합하여, 무엇인가를 바라보고 있는 미친 여자가 이미 한 화면 안에 흐린 초점으로 제시되는 것이다(이 예는 Deleuze의 Cinema I (Minneapolis, 1986)에서 p. 72를 참고). 이것은 그 여인의 주관적 상태를 통해 포착한 그녀 자신의 객관적 이미지이다. 여기서 객관적 지각과 주관적 지각은 서로 엉키고 수축되어 동시에 펼쳐진다.

물론, 홍상수의 저 장면에는 자유간접 화용법을 직접적으로 사용한 흔적은 발견되지 않는다. 양방향 화면을 역순으로 진행하면서(즉, 관찰자를 보여주고 다음에 관찰대상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관찰대상을 보여주고 관찰자가 나온다), 카메라는 시종일관 외부에 머물러 있다. 만일 수정이 목격하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고, 다음으로 영수가 모욕을 당하는 장면이 나왔다면, 문제는 전혀 달라졌을 것이다. 또한 그 장면 어디에도 수정의 주관적 관점을 예시하는 요소를 찾아 볼 수가 없다. 흐린 초점도 사용하지 않았으며, 수정에게서만 포착할 수 있는 고유한 어조 또한 발견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수정을 객관적으로 보여줄 뿐이었다. 그런데도 어느새 우리는 영수가 모욕을 당하는 장면까지 포함하여 그 장면 전체를 수정의 주관적 포착으로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 장면에서 왼쪽(수정쪽)으로 서서히 이동하는 패닝 과정에서 어떤 알 수 없는 마술이 작용한 것일까? 여기서 패닝의 중요성은 사건의 모든 광경을 하나의 이미지로 보여주기 위해 프레임의 물리적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노력으로 국한되거나, 또한 그것이 단순히 풍경의 흐름을 통해 하나의 지각을 다른 하나의 지각으로 교정했거나 대체했기 때문이 아니다. 여기서 패닝의 더 근본적인 중요성은 카메라가 서서히 이동하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특정한 지각의 체계가 구분될 수 없는 흐름으로 변질되고 있는 이미지를 보여주었다는데 있다. 이것이 바로 베르그송이 말했던 실제의 지각 속에 깃 든 비결정성이다. 규정할 수 없는 실제의 지각 속에서 물질은 정신적 순간의 최초의 결정이 되고, 마찬가지로 정신은 물질적 순간의 최초의 결정이 될 것이다. 그것은 마치 빛의 굴곡이 점점 내 곁으로 나가오더니, 어느새 갑자기 나도 모르게 나의 의식이 되어버리는 사건과도 같다. 사건이 있고 그 사건의 당사자들이 있고 또 그 사건을 외부에서 바라보는 객관적 인물이 있고 그 인물을 다시 화면 안으로 끌어들이는 카메라가 있다. 이들은 모두가 뚜렷이 구분되지 않은 채 서로 엉켜 붙어, 하나가 다른 하나를 교정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스스로 변질되고 흐르면서 상관적 관계를 이루고 있다. 이것이 바로 지각의 중화된 이미지일 뿐 아니라, 지각의 흐름이며 상태들간의 이행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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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이 불안해하는 큰 이유 중 하나는 물질적 부의 양과 행복이 비례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질적으로 풍족할수록 더 행복해지고, 빈곤할수록 덜 행복해 진다고 말이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물질을 양적으로 측정할 수는 있지만, 행복을 양적으로 측정할 수는 없다. 물질적 부는 그 많고 적음을 잴 수 있는 척도가 분명히 있지만, 행복은 주관적이고 심리적인 것으로서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척도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많은 행복"이나 "더 적은 행복", 혹은 "더 큰 행복"이나 "더 작은 행복"과 같이 행복의 많고 적음을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실은 우스꽝스러운 용어법이다. 그것은 마치 "더 크고 많은 음악" 혹은 "더 작고 적은 멜로디"이라고 말하는 것 만큼이나 난센스이다.

이렇게 "더" 그리고 "덜"의 개념으로 사고하고 판단하는 습관은 우리의 삶이 물질이나 물건을 측정하거나 비교하는데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 소유하고 있는 물건들이 얼마나 많은지 비교하다 보니, 그 소유자가 느끼는 행복감도 덩달아 비교가 되는 식이다. 심리적인 가치를 물질이나 물건으로 둔갑시키는 예는 아주 많이 있다. 선물의 가격에 따라 애정과 존경의 정도를 가늠한다든지, 재산의 양으로 인격을 판단한다든지, 성적표의 점수로 능력을 인정해주는 것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예들은 모두가 물질의 양적인 가치와 심리적 질적 가치를 혼동하는 데서 발생하는 윤리적 오류들이다. 에피쿠로스(Epicurus)는 이 오류를 "어리석은 판단(idle opinion)"라고 불렀다고 한다.

물건에 대한 우리의 욕망도 어리석은 판단의 좋은 예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 아니라 쇼핑하는 동물이다. 인간은 물건을 구매하거나 소비하지 않고는 단 하루도 살 수 없어 보인다. 특히 현대인은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울적함을 달래기 위해, 궁핍한 기분을 잊기 위해 쇼핑몰을 기웃거린다(이와는 반대로 기업과 상인은 사람들이 쇼핑몰을 기웃거리도록 그들이 공허해지고 울적해지고 궁핍감을 느꼈으면 하고 바란다). 아름다운 원피스 한 벌이 잃어버린 사랑을 되찾아 준다고 정말로 믿는 푼수 떼기는 없지만, 그래도 어쩐지 한 벌 장만하고 나면 최소한 새로운 사람은 만날 것 같아 보인다. 또 근사한 벤츠가 친구들 사이에서 본질적인 위신을 세워줄 것이라고 정말로 믿는 바보는 없지만, 그래도 어쩐지 한 대 뽑아 동창회에 나가면 왠지 자신감 비슷한 것이 솟아날 것만 같다. 터프해 보이는 흰색 코란도를 타면 기어 다니는 붉은색 티코 운전자를 깔볼 수 있을 것만 같다. 우중충한 철티비 보다는 뽀대나는 MTB가, 한 송이 보다는 한 다발의 장미가, 모나미 보다는 몽블랑이, 인스턴트 보다는 스타벅스 원두가 더 근사해 보이고, 무엇보다도 더 크고 더 많은 행복을 기대해도 될 것만 같다. 그러나 항상 그렇듯이, 저렇게 "더" 부담스러운 물건들이 많을수록, 허기와 공허의 빈 자리는 "더" 커진다.

물질이 우리의 본질적인 행복을 보장해주지 못하는데도, 우리는 왜 자꾸만 물질을 더 선호하는 것일까?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은 이에 대해 귀여우면서도 날카로운 통찰을 우리에게 제시해주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Objects mimic in a material dimension what we require in a psychological one."(Alain de Botton, The Consolations of Philosophy, p. 65)

이를 우리말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물건들은 우리가 심리적인 차원에서 요구하는 것을 물질적인 차원에서 흉내를 낸다."

이 멋진 말이 지적하는 것은, 우리의 '어리석은 판단'이 내포하고 있는 근본적인 무능력과 태만이다. 우리가 심리적인 차원에서 욕망하는 것들, 가령 '사랑', '우정', '행복', '자신감', '자유', . . . 이 가치들은 우리의 복잡하고 미묘한 심리상태이다. 이들은 획득하기가 쉽지 않을 뿐더러 이해하는 것조차 어렵다. 그 불가해한 심리 때문에, 예컨대 우리가 사랑에 빠져 버렸을 때,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입으로 내뱉는 말은 "내 마음 나도 몰라!"이다. 뿐만 아니라 우정이 무엇인지, 행복이 무엇인지, 자유가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그 가치들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을지 도무지 알 길이 없어 잠을 설친다. 이때! 우리는 이들을 대신할 다른 무언가를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좀 더 쉽게 가질 수 있고, 좀 더 분명하게 그릴 수 있고, 좀 더 단단하게 잡을 수 있는 그 무엇, 바로 물건을!

사랑을 심장(Heart, ♡)으로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아마 이런 과정이었을 것이다. 사랑에 빠진 그는 자신의 감정이 어디에서 왔는지, 정체가 무엇인지, 설명할 수 없었다. 단지 아는 것은 그녀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아려오는 것 뿐이었다. 그에게는 이제 사랑=심장이라는 도식이 생긴다. 한편, 사랑 받을 때 그녀는 행복감을 느낀다. 하지만 '사랑을 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사랑을 받을 수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다만 사랑을 받을 때 혹은 오르가즘을 느낄 때, 눈 앞에서 화사한 꽃밭이 보인다. 이제 그녀는 한 다발의 꽃을 받을 때, 사랑을 받는다고 느낀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질주의 쾌감을 주는 자동차가 자유를 주고, 열 잔의 술이 우정을, 고급스러운 저택이 행복을 준다고 믿게 되었다. 물건들이 우리의 심리적 욕망을 닮아가면서 물질적으로 흉내를 내고 있는 것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 정복하려면 참을성이 필요한 우리의 복잡한 감정과 욕망을 감당할 수가 없어, 그것과 대충 닮아 보이는 물건으로 재빨리 얼버무리는 것이다(사실, 문학에서의 은유라든가, 심지어 우리의 언어 자체가 이러한 재빠른 얼버무림이다).

이러한 얼버무림이 좀더 심해지면, 물신주의에서 보는 것과 유사한 가치들의 전도가 일어난다. 다이아몬드가 사랑의 원인이 되고, 대저택과 통장의 잔고가 행복의 출발이 되고, 자동차가 자유의 조건이 되는 식이다. 고착성 혹은 퇴행성 도착이라고 알려진 물신주의자가 스타킹을 성적 쾌감의 증표로 여기듯이, 우리는 손쉬운 방법을 택하여 사회활동이나 우정을 대신해줄 것 같은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며 우두커니 앉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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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기침 소리조차 허락되지 않아, 가뜩이나 작은 도서관 열람실이 우울하게 침체되어 있다. 여기 저기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지겨운 사람들. 군내를 삼키는 소리. 마치 자신들의 육체가 존재하지 않다는 듯, 아니 그러길 바란다는 듯, 그들은 몇 시간 동안을 앉아 책과 펜을 쥐고 도를 닦으며 돌멩이가 되어가는 중이다. 도서관에는 소리 뿐만 아니라 냄새도 나지 않는다. 침묵의 공간에서 텍스트의 침묵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것이다. 침묵은 마치 블랙홀처럼 공간 전체의 대기를 빨아 마셔 버린다.

커피숍에서 뜨겁고 진한 원두커피 한 컵을 사 들고 열람실의 문을 연다. 발 뒤꿈치를 들고, 숨소리를 죽여, 내 자리를 찾아 조용히 착석한다.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가방을 열고 책과 물건들을 꺼낸다. 열람실 안에서는 원칙적으로 음식물을 가져오면 안 된다. 커피는 가져올 수 있지만, 반드시 뚜껑을 닫아 냄새가 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저 돌덩어리들의 침묵과 잠을 방해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나는 뚜껑에 나 있는 작은 구멍으로 커피를 홀짝거린다. 커피는 원래 뚜껑을 확 열고 마셔야 한다. 코를 가까이에 대고 뿜어 나오는 커피 향과 수증기를 함께 들이마셔야 커피의 진정한 분위기를 마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불가능한 일처럼 보인다. 향도 맡을 수 없고, 뜨거운 입 소리를 낼 수도 없다. 이곳은 감각을 삭이는 곳이다. 감각을 깨우지 않고도 사는 법을 연습하는 곳이기도 하다. 육체-물질에 생기가 돌지 않도록, 동요가 일어나지 않도록, 혼란스럽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곳에 오래 다니다 보면, 정말로 돌이 되어가고 있음을 느낀다. 어쩐지 이들의 침묵이 짜증스럽고 화가 난다.

갑자기 나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홧김에 커피 뚜껑을 확 열어버리고 말았다.

야릇한 커피 향이 단숨에 방안 전체에 퍼지는 듯 하다. 사람들의 뒤척이는 소리가 들린다. 그들에게 약을 올리듯, 나는 시치미를 떼고 살짝 소리를 내어 후루룩 거린다. 잠시 후 사람들은 뒤척이며 하나 둘 씩 일어나 가방을 뒤적인다. 지갑을 꺼내 들고는 자리를 비우고 밖으로 나가기 시작한다. 특히 여자들이 더 심하게 동요하는 듯 하다. 뭔가가 되살아난 것이다. 잠시 후 그들도 잔을 들고 들어올 것이다. 감각! 축복인가? 저주인가? 『베를린 천사의 시』에서 인간이 되기를 선택한 천사 가브리엘이 대답해줄 수 있을까?

몇 시간 동안 움직이지 않고 책상 앞에 앉아 책을 읽다 보면 온 몸이 뻐근해지고 쑤셔온다. 자리에서 일어나 혹은 앉은 채로, 몸을 비정상적인 체형으로 늘이거나 줄이면서 뻐근함의 고통을 중화시킨다. 신비주의자들의 수련에 요가의 탄생도 바로 이런 식이었을 것이다. 몸은 생기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활동을 억제하고 정지한 채로 오랫동안 있으면, 몸의 생기와 몸의 물질이 서로 싸움을 벌인다. 전자는 움직이고 싶어하고, 감각을 느끼고 싶어하고, 흐트러지고 싶어하고, 한 없이 떠나고 싶어한다. 반면에 후자는 아버지처럼 이러한 요동을 불허하고 고집스럽게 훼방을 놓으며 생기의 발랄함에 그늘을 드리운다.

(엄밀히 말해 그 고집스러움은 물질 그 자체로 인한 것이 아니라 물질에 투사된 관념 때문이다. 책상 앞에 몇 시간을 앉아있게 하는 것은 육체가 아니라 우리의 어떤 관념적 필요 때문이 아닌가? 지식에 대한 욕구라든가, 취직에 대한 공포라든가, 아니면 행복과 같은 필요 말이다. 육체는 두 파벌로 나뉜 정신적 지대들이 치열하게 벌이고 있는 싸움터일 뿐이다. 그 파벌의 한 편에는 생기가, 다른 한편에는 물질 혹은 물질화된 관념이 자리잡고 있다.)

하여튼 몸이 쑤시는 이유는 생기와 물질 양자의 긴장과 싸움 때문이다. 물질이 승리를 한다면 우리의 몸은 돌처럼 굳어져가며 팔다리와 어깨의 근육에 딱딱한 몽우리나 굳은 살이 박힌다. 물질의 승리가 더 지속될수록 몸의 생기는 점차 정체되어, 급기야는 생기의 정수랄 수 있는 정신조차 그 발랄함과 활력을 잃어버린다. 이를 막기 위해 우리는 가끔씩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움직이고, 산책을 하고, 특히 간식을 먹는 것이다. 물질의 스트레스를 강하게 느끼면 느낄수록 뒤척임과 간식의 양이 많아진다. 이는 결국 또 다른 형태의 정체상태로 이끌 것이다.

문제는 간식이다. 산책과 운동은 많이 할 수록 좋을 수 있지만, 간식은 많이 먹을수록 우리의 생기 쪽 보다는 물질 쪽에 더 영향을 주므로, 결국 많은 간식은 물질을 강화하든가 아니면 비대하게 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앉아있는 것조차 힘들어져 완전한 정체라고 할 수 있는 수면상태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간식을 먹지 않을 수는 없다! 한 잔의 진한 커피, 한 두 조각의 치즈 케이크, 기름 잔뜩 묻은 야채 튀김, 시뻘건 떡볶이, 지독한 냄새의 순대, . . . 이런 불량식품(?) 없이 인생을 어떻게 살 수 있을까? 간식이 불량하면 불량할수록 느껴지는 감각의 맛은 더 짜릿하고 감미롭다. 돌처럼 뻣뻣해진 우리의 몸에 저토록 통쾌하게 반항하고, 반복에 지배된 지루한 일상에 저토록 쾌활하게 반란을 일으키는 물질들이 또 있을까? 그들 앞에서는 산책과 운동의 건전함이 왠지 성직자들의 미소처럼 위선으로 보일 정도이다. 저 간식들은 물질이 아니라 물질의 탈을 쓴 생기가 아닐까? 젊은이들이 더 많이 좋아하고 더 친화력이 있어 보이는 까닭에, 아주 말이 안 되는 추측은 아닐 것이다. 여기에 건강 운운하는 주장은 궁색하고 소심하기 짝이 없어 보인다.

간식 산업이 발전해야 한다. 우리 몸의 물질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 신(新)물질로 이루어진 간식들이 새롭게 쏟아져 나와야 한다. 우리의 정체된 감각에 활력을 주되, 몸을 정체된 상태로 빠뜨리지 않는 그런 간식이 많아져야 한다. 아무리 먹어도 건강이 나빠지지 않도록. 과용에도 중독이 되지 않도록. 무엇보다도 먹을수록 지겨워지지 않도록. 그리하여 우리의 생기가 고집스런 물질을 닮아가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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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적 공간이란 이상화된 공간(idealized space)을 의미한다. 서양에서 르네상스 이후 생겨난 원근법적 공간구성은 이상화 공간의 좋은 예이다. 원근법은 일종의 기하학적 이상으로 세계를 배치하고자 하는 신의 열망과도 같다. 원근법에서는 모든 사물들이 연속적인 질서에 따라 서로 연관이 되어 있고, 이 질서는 무한하게 펼쳐진 공간 안에서 하나의 체계를 이루며 배열된다. 사물들은 가깝고 먼 거리에 따라, 크고 작은 비례와 균형에 따라, 중심과 주변의 위계에 따라, 그 선천적 적절성을 띠고 이 세상에 존재한다. 이 합리적 질서에서 탄생한 무한한 세계를 작은 캔버스에 재현할 수 있다면, 우리는 신의 관점을 경험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것이다(반면에 고대인들은 사물을 재현할 때에 자신의 심리 상태를 반영했다. 심리적으로 느껴지는 바에 따라, 혹은 중요함의 정도에 따라 사물의 크기와 균형을 달리 인식하고 재현했던 것이다).

이상화된 공간에서의 그 신의 눈은 캔버스의 어디에 있는 것일까? 틀림없이 모든 사물들이 무한대로 수렴하는 지점이어야 할 것이다. 등대에서 퍼져 나오는 부채꼴의 빛처럼 세계 전체를 밝혀주고 세계 전체를 감싸고 포함하고 배태할 뿐만 아니라 세계 전체가 소멸해가는 지점, 예컨대 모든 변과 호가 한 곳으로 수렴하는 삼각형 혹은 원뿔의 꼭지점과도 같은 그런 중심 말이다. 신을 위해 그리고 신에게 보여지기 위해 세상이 존재했듯이, 회화적 열망에 의해 배치된 사물들 역시 중심에 위치한 관찰자를 위해 존재한다. 원근법에 있어 소실점의 기능은 모든 시선의 신의 관점에의 일치에 있다. 거기에는 고정성에 대한 열망, 영원성에 대한 열망, 중심에 대한 열망이 짙게 배어있다.  

물론 원근법에 있어 이 관찰자 개념은 대단히 모순적이다. 관찰자란 특정한 위치를 점한 존재인데, 꼭지점이라고 하는 이상적 중심이란 사실 특정한 위치의 부재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2+3=5"와 같이 진술자가 부재하는 진술이다. 무한히 수렴하는 중심으로서의 꼭지점이나 원점이 그렇듯이, 신은 부재하는 존재이며, 부재할 때에만 비로소 그 무한의 신비가 현시한다. 이것이 신의 눈을 경험적으로 재현한다는 시도 자체가 가지는 모순이다.

이런 맥락에서 존 버거(John Berger)는 원근법에는 "시각적 상호성"(visual reciprocity)이 없다고 보았다. 본다는 것은 그 자체가 관계를 맺는 것이다. 대상을 주시하고 포함하고 지배한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와는 반대로 객체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다는 점에서, 시선은 하나의 관계이다. 세계를 바라보는 관찰자는 원리상 그 자신 역시 보여지는 대상이어야 한다. 사물이 보이는 각도, 크기, 균형 등에 따라, 시선의 주체는 건물 위에 있는지, 아래에 있는지, 혹은 공중을 활공하는지, 심지어는 고대인들이 그림을 통해 자신의 심리상태와 도덕을 반영했듯이, 주체는 자신의 위치와 상태를 노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일정한 시선에는 반드시 타자가 상정되어 있다. 바라보는 자의 주체성이란 자의든 타의든 타자와의 상대적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 그러나 신의 관점에는 타자가 없다. 신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특정 위치가 알려지지 않은 채 바라보는 존재이다. 마찬가지로 이상화된 중심에서 주시하는 존재는 변덕스러운 현실의 시간과 공간 내에 위치할 수 없다. 이상적 중심이란 변하거나 이동하지 않는 영점(degree zero)에 다름 아니다. 신의 눈이 그렇듯이, 그것은 오히려 위치 그 자체, 말하자면 위치가 어디인지 질문할 필요도 근거도 없는 초월적 외부의 공간 그 자체다.

모든 그림이 원근법을 쓰는 것은 아니지만, 회화에 재현된 세계는 많든 적든 원근법과 유사한 열망이 내재되어 있다. 회화적 시선에는 과거의 시간이 지배한다. 다르게 말해 한 편의 그림은 세계의 기억이며 요약이다. 화가는 단숨에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 그는 캔버스를 앞에 놓고 많게는 몇 년 적게는 몇 시간 동안 사물을 관찰하고, 기억하고, 그것을 다시 캔버스에 요약해 낸다. 그러는 가운데 화가는 사물과 그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반복적으로 되뇐다. 마치 관람객이 그림을 감상하듯이, 혹은 시인이 떠오르는 섬광을 처음부터 끝까지 암송하는 가운데 수 차례에 걸쳐 후렴구를 반복하듯이, 화가 역시 사물에 다가서고 멀어지면서 선과 면을 중첩시키고 집적하고 쌓는 일을 반복하는 것이다. 따라서 회화적 시간이란 실제의 시간이 아니라 종합된 시간, 즉 세계를 바라보고 지각하는 동안 수용했을 무수한 요소들이 한꺼번에 수렴하여 동시에 펼쳐지는 총체적 시간이다. 흥미롭게도 아른 하임(Rudolph Arnheim)은 시와 그림에 있어서의 시간의 동질성을 주장하는 가운데, 이를 초기 언어 형태와 유사한 어떤 것으로 보았다. 예컨대, 시와 그림은 어머니와의 자족적이고 충만한 이자 관계에 취해있는 아기가 자신의 행복감 전체를 표현하기 위해 내뱉은 한 마디의 옹알이와도 같은 것이다.

Gogh의 의자

위 그림은 고호(Vincent van Gogh)가 아를의 방에서 사용했던 의자의 그림이다. 이 이미지에 대해 우리가 질문하는 내용은 고호 자신의 전기적 사안보다는 고호의 인생 전체, 고뇌 전체, 예술 전체로 향한다. 애초부터 그림에는 육체가 아니라 육체를 감싸고 있는 대기 전체의 음성 혹은 분위기만이 감돌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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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몇 몇 지인들과 함께 강릉에 다녀왔다. 욕망의 끝자락. 바닷가 여행이 항상 그렇듯이, 가는 동안 커져있던 흥분의 상쾌함은 막상 바다에 오니 지속하지 못했다. 파도처럼 혹은 오르가슴처럼 한꺼번에 밀려왔다가 허무하게도 한꺼번에 꺼져버렸다. 어쩌면 내가 기대했던 흥분의 양이 파도의 무지막지함에 비해 너무 왜소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느낄 새도 없이 단숨에 내 가슴이 채워졌던 것이다.

경포대 바닷가를 잠시 거닐다가 바람이 심하게 불어 서둘러 근처 식당으로 들어가 점심을 들었다. 잡담과 함께 한 시간쯤 식사를 마치고, 바람 부는 바닷가로 다시 나왔다. 몹시 추웠기 때문에 어딘가 다시 들어가고 싶었지만, 색다른 곳에 왔다는 이유 때문에 의무적으로 조금 더 버티었다. 모래 위를 걷다가, 파도를 바라보다가, . . . 그러다가 들어갈 곳을 찾았다.

경포대 앞바다를 마주보고 오른쪽 방향으로 조금 내려가다 보면 높은 언덕 위에 멋진 호텔(현대비치호텔) 하나가 서 있다. 오래 전부터 경포대에 오면 매번 눈에 띄어 올려다 보았던 호텔이다. 간혹 밤이면 건물 위쪽에서 바다에 내리 비치는 불빛이 환하게 밝았다. 그 불빛은 바다 중간에 듬성듬성 돌출되어 보이는 작은 돌섬을 무대 조명처럼 비추었다. 호텔 커피숍이나 레스토랑의 넓은 창문에서 내려다 본다면 바다의 모습이 장관일거라고 항상 생각하곤 했다. 아마도 손님들의 시선을 배려한 호텔측의 서비스일 것이다. 아니, 그 광경을 보기 위해 일부러 호텔을 찾는 사람들을 감안했을 테니 서비스가 아니라 마케팅인 셈이다.

밤은 아니었지만, 점심을 마친 후 우리 일행은 그 호텔 커피숍으로 올라갔다. 일행 중 한 명인 L이 그곳을 여러 차례 다녀왔다며, 가보지 못한 나머지 일행에게 소개 차원에서, 말하자면 인도를 한 셈이었다. 자동차로 언덕을 돌아 15미터 정도를 올라가니 바람결에 대나무 밭이 쏴-악 하며 출렁였다. 대나무 주변 여기저기엔 크고 작은 소나무들이 힘차게 솟아 올라 있었다.

호텔 입구에 들어서자 작은 로비가 보였고, 그 맞은 편 후미진 곳에 안내 데스크가 있었다. 유니폼을 입은 여 종업원 두 세 명이 서서 우리를 바라보았다. L이 앞장을 섰고, 나와 일행은 그 뒤를 따라 들어가다가 종업원들과 시선이 마주쳤다. 나는 왠지 멋쩍은 자세가 되어, "숙박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커피숍에 잠깐 갔다 나올 것"이라고 그들에게 말해야 할 것 같았다. 호텔이란 곳은 사유지이고, 데스크에서는 손님들이 들어가고 나가는 일을 관리하는 곳이 아닌가? 더군다나 호텔은 숙박을 위해 만들어진 곳이므로, 숙박도 하지 않을 우리가 건물 안에서 얼쩡거리는 일이 그들의 눈에 얼마나 우스꽝스럽게 보일까?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호텔에서 보이는 바닷가 전망을 오래 전부터 상상했음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올라올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것은 고급호텔이라는 장소에 대한 나의 이러한 선입견 때문이었다. 그곳은 내게 아주 낯설고 어색한 곳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L은 종업원들이 있는 데스크로 가기는커녕, 그들을 무시한 채 입구 바로 옆에 있는 계단 위로 성큼 올라가 버렸다. 나는 순간 뭔가를 깨달았고, 얼른 그들의 눈을 피해 계단으로 따라 올라 갔다. L은 우리의 목적지인 커피숍이 아니라 호텔 2층에 있는 커다란 발코니를 찾았다. 그곳에 오면 으레 그렇게 해야 할 절차를 밟는다는 듯이, 마치 내가 영화관에서 그렇게 하듯이, L은 아주 익숙한 몸동작으로 평소보다도 자연스럽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우리를 작은 기쁨에 빠트릴 음모를 꾸미며 신이 나서 키득거리는 악동처럼.

유리문을 열고 바람 부는 발코니로 나오니 허옇게 밀려오는 파도와 시커먼 바위들이 저 아래에 펼쳐졌다. 내가 상상했었던 바로 그 탁 트인 광경이었다. 그 동안 강릉에 와서 한 번도 가져볼 수 없었던 그런 종류의 시원스러운 쾌감이 밀려왔다. 밤이었다면 더 장관을 이루어 로맨틱 했을 것이다. 우리는 약간 고무되어 사진 몇 장을 찍고, 바다와 하늘을 몇 번 더 주시했다.

내 기억에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호텔이 세워진 언덕 바로 아래 쪽 해변에는 철조망과 돌담이 세워져 있었다. 마치 군사시설처럼 "관계자 외 출입금지"라는 팻말과 철근 바리케이드가 있었기 때문에, 그곳을 지날 때면 내내 우울한 느낌과 아울러 그곳이 궁금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이제와 발코니에서 보니 그 철조망과 바리케이드가 자취를 감추고, 마치 해방이라도 된 듯 시원한 백사장이 다 드러나 있는 것이다. 심지어 바닷가 멀리까지 걸어갈 수 있도록 긴 방파제까지 개방이 되어 있었다. 약간 놀랐다.

내가 그 기억을 일행에게 얘기하자, 일행 중 한 명이 "아마도 정권이 바뀌었기 때문이 아닐까?"하고 의구심을 품었다. 처음엔 어이없는 대답이라고 생각했는데, "현대기업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현 정권"이라는 말을 듣고 나니 수긍이 가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정말로 군사시설이었는지, 아니면 단순히 공공 금지구역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또 그 호텔의 이름이 실제로 현대그룹과 관련이 있는지 조차 알 수 없었지만, 미관상 좋지 못할 뿐만 아니라 마케팅에도 별 도움이 되지 않는 그 오래된 철조망을 치우려면 틀림없이 어떤 억지의 힘이 작용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그러자 일행 중 한 명이 말했다. "그게 바로 현대의 힘이에요!"

발코니에서 내려와 커피숍으로 갔다. 생각보다 커피값이 터무니 없이 비싸지는 않았다. 호텔, 고급 관광지, 리조트, . . . 내가 이러한 고급(?)문화에 낯설었던 본질적인 이유는 내가 잘 몰랐거나 잘못 알았거나 혹은 나의 사회적 계급 탓이 아니라, 다름 아닌 그 "터무니 없음" 때문이다. 사회적 계급이란 그 터무니 없음에 대해 초연해 질 수 있는 힘의 정도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계급이란 그것을 묵인하거나 묵인하지 않거나의 문제이다.

커피를 마시며 넓은 창문 밖에 서 있는 소나무를 바라보았다. 바다, 노을, 소나무, . . . 저녁이 되어 오렌지 색 노을 빛이 날카로운 나뭇잎 사이로 갈라져 창으로 들어왔다. 호텔의 커피숍에 있던 우리 모두는 그 아름다운 광경을 한 동안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 자연 경관조차 아무나 볼 수 없다면 서글픈 일일 것이다. 일행 중 누군가가 말했던 "현대의 힘"에 대해 잠깐 생각하다가 갑자기 궁금해졌다. 그 힘이란 어떤 힘을 말하는 것이었을까? 주눅 들지 않고도 통과할 수단을 거머쥔 몇몇에게만 쾌감을 허락하는 힘? 아니면 그 자신만의 쾌감을 누리는데 만족하는 힘? 바따이유(George Bataille)가 들었던 익살스러운 비유처럼, 다락방에 처박히어 혼자만의 샴페인을 홀짝거리는 힘? 그렇게 외롭고 적대적인 힘이 얼마나 강하고 지속적일 수 있을까? 아니면, 다른 힘이었을까? 모두가 가고싶어 (물고기조차)그곳으로 향하는 강원도의 힘처럼, 경관을 보고싶어 하는 모두에게 철조망과 바리케이드를 거두어 쾌감을 주려는 보편적인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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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洞) 사무소나 구청 같은 곳을 가보면, 어딘지 내 자신이 어색한 포즈를 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왜 이곳에 왔는지를 떠올리며 두리번거리거나, 나의 용무를 맡아줄 공무원이 누구인지를 찾아야 하거나, 어떤 서류를 집어 들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자주 들락거리는 곳이라면 익숙해지겠지만, 그곳은 언제든지 내 의지와는 관계없이 어떤 부름에 의해 가게되는 곳이다. 그래서 일상에서는 잊고 지내는 곳이며 익숙하지 않은 곳이다. 마찬가지로, 갓 들어온 신입사원이나 새내기 학생들을 보면서 우리는 저와 같은 어색한 포즈들을 금새 발견할 수가 있다.

이는 군대에 가본 사람이라면 더 절실히 느껴보았을 것이다. 훈련병 시절 내가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지금 진행하고 있는 이 행위가 끝나고 나면 어떤 행위를 해야할지 전혀 예측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내 동작은 내 의지의 산물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또는 다른 무엇인가의 요구였다. 군대가 훈련병들에게 반복해서 숙지시키려는 것은 개인에 앞선 체계가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군대는 개인에게 모든것을 포기할 것을 끊임없이 권고한다. 이런 이유로 거의 모든 초년병들에게서 볼 수 있는 어색한 몸짓은 바로 의지와 포기의 딜레마에 처한 한 개인의 망설임에 기인한다. 고참이 된 후 내 동료는, 뽀얀 살결을 드러내며 잔뜩 겁에 질려 막 들어온 초년병을 보면서, 내게 이런 말을 했었다: "신참들은 왜 저렇게 한결 같이 똑같지? 다들 겁먹은 얼굴을 하고, 사지가 얼어붙어 뻣뻣하니 말야! 저 우스꽝스럽게 걷고 있는 놈들을 좀 보라구!" 그러나 겉으로 보이는 이 의기양양함 이면에는 포기하기로 작정한 한 인간의 서글픔 같은 것이 있다.

스티븐 소더버그(Steven Souderborg)가 감독한 <카프카>라는 영화에서 주인공 카프카는 문서의 형태로 성(城)의 부름을 받는다. 여차 저차 하여 그는 성의 문서고에 있는 서랍장을 통해 그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우리는 성에 들어간 카프카의 행적을 담은 몇 개의 시퀀스를 목격하게 된다. 그는 신병이라도 된 듯이, 아니면 동사무소에 막 들어간 우리 자신처럼, 여기저기를 서성이며 수상한 포즈를 연출한다. 누가 자신을 부른 것인지, 어디로 가야하는지, . . . 이 방 저 방을 기웃거리며, 들키지나 않을까 숨어보기도 하고, 인기척이 들리면 잔뜩 겁을 집어먹고 얼어붙는다. 이방인이 되어버린 것이다. 제레미 아이언스(Jeremy Irons)는 대체로 저 어색한 포즈를 욕망의 언어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몇 안 되는 연기자 중 한 명이다.

그런데 카프카의 서툴고도 수상한 포즈를 목격하면서 우리는 알 수 없는 불안에 사로잡힌다. 언제든지 그 불안은 서스펜스를 불러들이며, 이 영화가 주는 재미란 바로 그 서스펜스에 있다. 히치콕(Alfred Hitchcok)은 서로 관계 없는 방향으로 나아가던 두 힘이 하나의 지점으로 수렴하는 경향성을 띠고 파국의 상황으로 치닫거나, 균형 잡힌 계획이 깨어질 것을 예고하는 방식으로 서스펜스를 창조한다. 인물들은 자신의 계획을 실현시켜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으면서, 한 편에는 이와 동일한 양의 반 테제의 힘에 직면한다. 가령, <이창>에서 범인을 속임수로 유인하고 그의 집에 숨어들어 증거를 찾는 장면이라든가, <사보타지>에서 길 한가운데 멈춘 자동차와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다른 자동차의 서스펜스라든가, 자유의 여신상에서 하강운동과 상승운동을 봉합했던 소매가 점점 튿어지는 쇼트 등이 그 예이다. 이들은 모두가 파국에 대한 관객의 두려움을 담보로 하여 숨막히는 줄타기 곡예와도 같은 상황을 연출한다. 그 서스펜스의 심층에는 불안이 내재한다. 물론 그것은 인물의 불안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관객, 즉 그 곡예를 목도하고 있는 자의 불안일 것이다. 히치콕의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제임스 스튜어트(James Stuart)의 불안한 눈빛은 도래할 것에 대한 두려움이며, 이것은 그 자신의 것이기보다는(이미 그는 목격하고 있으므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 우리 자신의 불안을 의미한다. 히치콕의 서스펜스는 항상 프레임 밖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언제든지 저 바깥쪽이 문제이다.

따라서 수상하거나 서툰 몸짓은 우리 자신의 두려움을 예증하고 있다. 어떤 두려움? 익숙한 것, 자동화된 것, 매끈한 것이 파괴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대부분의 서스펜스 장르는 자동화된 현실과 그 파국이라는 두 테마를 하나의 구도 안에서 동시에 드러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한 가지 특이한 예로, 이 불안과 두려움을 우스꽝스러운 몸짓으로 표현했던 사람이 바로 채플린(Charlie Chaplin)이다. 그는 순수하게 유쾌한 유머를 구사했던 사람은 아니다. 채플린의 웃음에는 통쾌함이 있기 이전에 불안이 잠재되어 있다. 그래서 그의 유쾌한 해학은 처음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에 맨 나중에 모든 것이 파국으로 돌입하는 순간 발생한다. 이 파국을 끊임없이 지연시키는 사람이 히치콕이라면, 채플린은 이를 기꺼이 드러냄으로써 불안을 웃음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예로, <모던 타임즈>에서 떠돌이의 서툰 몸짓은 제대로 잘 돌아가지 않는 나사못이 됨으로써, 생산라인을 엉망으로 만들고, 결국에는 공장 자체를 파괴하게 된다. 그는 자동화된 몸짓(혹은 사유)을 불안과 견주어 지연시키는 대신에, 궁극적인 파국을 통해 그 자동성을 비웃어버리는 것이다.

결국 카프카나 히치콕 혹은 채플린의 인물들을 보면서 우리가 불안해하는 것은 파국적인 상황에 대한 예고 때문이다.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수상한자를 발견하는 일이 쉽지 않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이러한 일을 주로 매체나 허구를 통해서만 경험한다. 그리고는 이 경험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라고 착각하기도 한다. 주로 매체는 우리에게 실제적인 것에 대한 환각을 통해 어필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조건이 있다. 환각적인 것이 현실적인 믿음이 되려면, 우리 자신의 현실이 자동화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 환각이 더 현실적으로 보일수록 우리는 이미 모든 것에 익숙하게 행동하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모든 일상이 우리에겐 너무나도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는가? 길거리를 다니고, 출근을 하고, 지하철에 앉아 있는 우리 자신을 보라. 수상하거나 어색한 몸짓의 소유자를 찾기가 쉽지 않다. 우리가 공포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은 어디를 가든 이미 수상하거나 서투른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낯선 공간에서조차 금새 그 코드를 해독하여 익숙해 질 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흄(David Hume)이 과학적 현실에 대해 그렇게 말했듯이, 해가 뜨고, 해가 지고, 물이 떨어지고, 별이 뜨는 것처럼, 확고하고도 안정적인 현실을 만드는 것은 바로 반복과 자동이다. 브레히트(Bertolt Brecht)라든가, 러시아 형식주의자라든가, 아니면 벤야민(Walter Benjamin)이라도 좋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현대의 마르크스주의 작가들이 예술을 통해 낯선 장치(alienation)들을 고안하고자 했던 것은, 다름 아닌 익숙하여 자동화된 소외(alienation)에 대한 의식의 대항이었다.

익숙함이 몸에서 일기 시작하면 모든 일들이 마치 죽음 본능에 마취된 듯이 너무나 쉬워지며 편안해 진다. 그러나 이 편안함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는 그와 동일한 양의 불안과 공포를 필요로 한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부정하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반공 교육이 한창이던 내 초등학교 시절 최대의 사건은 간첩에 대한 소문이나 삐라의 발견이었다. 그러나 그 시절 뿐 아니라 지금도 역시 이러한 일들은 실제로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반공체제의 편안한 육체를 보존하기 위해 간첩이나 삐라는 반드시 있어야한다. 그것은 마치 공통의 적(敵)이 설정되고 나면 우정이 돈독해지고, 나아가 우정을 돈독히 하기 위해 공통의 적을 설정하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그것은 우리에게 단순한 허구나 조작이 아니라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사회적 환각이었다. 물론 그것은 언제든지 불안과 공포를 환기시킨다. 우리는 그것을 부정하면서도 요구했던 것이다. 불안의 강도는 바로 저 편안한 육체의 강도와 정확히 비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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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려진 예로, 엥겔스(Friedrich Engels)는 발자크(Honore de Balzac)의 소설이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넘어선 리얼리즘의 승리라고 찬사를 보낸 적이 있었다. 19세기 당시 부르봉 왕조를 지지했던 골수 보수주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발자크가 소설 속에서 보여주었던 관찰과 통찰은 귀족계급의 필연적인 몰락이었기 때문이다. 엥겔스가 발자크의 리얼리즘에서 간파했던 위대함은 그가 비개인성(impersonality)에 도달했다는 사실이었다. 엥겔스에 따르면 진정한 리얼리즘이란 개인의 정치적 신념과 계급 그리고 사회적 이해관계를 넘어서는 상위의 실재에 대한 긍정에 있다. 헨리 제임스(Henry James)라든가 프루스트(Marcel Proust)와 같은 위대한 작가들이 "관점(a point of view)"을 예술가 개인을 넘어서 하나의 세계라고 말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모든 예술의 궁극적 목표 즉 신의 눈을 가질 것!

그러나 이 "신의 눈"이라는 개념을 그렇게 예술적 혹은 역사적으로 거창하게 설명하지 않고도 그 의미를 충분히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일상적 삶 속에서의 작은 윤리를 말해주는 것일 수도 있고, 어떤 작은 사건을 바라보는 진지한 태도를 의미할 수도 있다. 가령, 클린트 이스트우드(Clint Eastwood)의 영화가 좋은 예이다.

그의 영화를 유심히 본 사람들은 잘 알겠지만, 그는 투박한 미국인 답지 않게 꽤 섬세하고, 배려심이 강하고, 사려가 깊다. 말하자면 인생에 대한 깊은 성찰, 아니면 그 맛을 좀 안 다고 할까? 재즈에 대한 깊은 애정에서 나온 섬세함일까?(Charlie Parker에 관한 영화를 비롯하여 이미 그는 재즈에 관한 상당히 수준 높은 영화를 여러 편 만들었다) 어쩌면 정치적으로는 보수주의자이고(그는 공화당 지지자이며, 공화당 집권 당시 공직에도 있었다. 그러나 그 동기에 있어 보수주의적 색채가 분명한 것은 아니었다), 개인적으로는 미국식 관념에 사로잡힌 사람일 수도 있다(그의 영화 대부분은 가족이나 도덕에 있어 미국식 이데올로기가 진하게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화를 보면, 그가 정치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편협한 관점의 소유자는 아님을 느낀다. 그의 작품들을 보고 난 후 짧게 드는 생각은, 한 마디로 그가 뭔가를 좀 아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시시하고 진부해서 거들떠보기도 싫은 미국 상업 영화들 속에 끼어 있는 것이 좀 의아하고, 또 그의 재능이 아까울 만큼.

그의 작품 <아버지들의 깃발>(Flags Of Our Fathers, 2006)은 미국인들의 애국과 영웅주의를 비판 혹은 고무시킨 영화처럼 보이지만, 실은 미국의 문제보다 훨씬 더 중요한 주제를 담고 있다. 물론 이 영화는 미국에 관한 영화이고, 미국적 영화이고, 어떤 점에서는 우리와는 무관한 혹은 어떤 점에서는 미국영화를 볼 때마다 매번 느끼는 그들만의 제스처에 대한 이질감(혹은 역겨움)이 느껴지는, 그래서 우리를 실망시키는 영화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이 작품에서는 놀라운 장면들이 간간히 펼쳐지는데, 초반의 몇 몇 시퀀스에서의 그 "엉성한 전쟁 장면"이 바로 그것이다--어딘가 항상 핀트(focus)를 놓치는 스필버그(Steven Spielberg)가 만든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첫 시퀀스의 장렬한 전투 씬을 비교해보라. 전쟁터에 투입되기 전의 "햇병아리 같은 신병들"(이스트우드는 확실히 미국의 노인이다)과 비교적 의젓한 고참 병사들은 심리적으로 불안해 한다. 그러나 그들은 전쟁을 실감하지는 못한다. 막연한 공포만이 그들의 대화와 표정에 감돌 뿐이다. 심지어는 그것이 죽음인지조차도 감지하지 못한다. 군함에서 장난을 치다가 우연히 한 병사가 바다로 떨어진다. 동료들은 그의 우스꽝스러운 실수에 웃고 떠들며 놀려댄다. 하지만 군함은 그를 구출할 만큼 한가한 작전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므로, 그를 가차없이 버리고 갈 것이고 그는 결국 아무도 구해주지 않아 죽을 것이다.

 전쟁은 이런 식으로 시작한다. 죽음은 아주 우연적이고 사소하게 장난처럼 다가 오지만, 돌이킬 수 없는 어떤 막대함이 더 이상 저항도 거부도 할 수 없이 왔다가 사라져 버린다. 섬에 도착해서도 전쟁은 엉성하게 다가온다. 우리가 상상하는 장렬한 드라마는 고사하고 전쟁이 시작된 것인지 적이 있기나 한 것인지 조차 분간할 수 없는 분위기가 감돈다. 마치 공사장의 인부들처럼 자신 앞에 놓여진 노역의 임무를 수행하듯이, 마치 어제도 해 보았던 일이라는 듯이 일상처럼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 신병은 그 와중으로 끼어들어가 거기서부터 죽음에 적응하고 죽음이 어디쯤에 있는지를 감지해야만 할 것이다. 틀림없이 어디에선가 육중한 철근 덩어리와 금속 탄환들이 이따금씩 순간적으로 날라와 옆에 있는 동료들의 사지를 찢어발기고 머리통을 부수고 있다. 하지만 실감도 나지 않는 장난 같은 전쟁이, 곧 있으면 감독의 컷 소리가 이 모든 것들이 아무 일도 아니었음을 선언할 것 같은, 엉성하고도 어설픈 비극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치열한 싸움과 장렬한 최후는 집으로 되돌아가고 한참이나 지난 후 후방에서만 벌어지는 일처럼.

감각도 없이 얼얼한 상태 속에서 벌어지는 그 엉성한 전쟁장면 전체는 아마도 전쟁에 투입된 신병들의 주관적 관점으로 제시되는 것 같다. 이미 진행되고 있는 죽음들간의 싸움에 점차 적응해야만 하는 시간. 그 첫 전쟁 시퀀스에는 공포가 잠재적으로만 존재한다. 전투 당사자의 주관적 관점! 전쟁의 실상에 대해 그 만큼 객관적인 장면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작품의 핵심은 깃발에 있다: 그 사진 한 장에 찍힌 깃발이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본국의 정치가들은 그 깃발이 미국인의 애국, 전쟁에서의 승리, 영웅의 탄생을 알리는 상징이 되기를 바랬다. 그들은 장병들과 미국인 전체 그리고 더 정확히는 자기 자신들에게 찬사를 보낼 수 있는 깃발을 세우고 싶어했다. 그들의 모든 바램을 표상해주는 하나의 미국, 두 장도 필요 없는 단 하나의 이미지 말이다. 왜냐면 그들은 여전히 전쟁 중이었고, 전쟁을 위해 돈이 필요했고, 지지를 위한 단결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감독이 말하고 싶어하는 바는 분명하다: 사진 한 장이 할 수 없는 일을 영화가 해 주어야 한다; 실상(real image)을 보여주어야 한다; 사진 한 장은 말 수가 너무 적으며 너무 많은 것을 감추고 있다; 그리하여 사건을 어림짐작으로 보게 하고, 현재의 바램을 가지고 과거를 보게 할 소지가 크다; 바램을 비추어 감미로운 색채를 덧붙여 볼 것이 아니라, 과거를 과거 그 자체로서, 가급적이면 무미건조한 상태 그대로,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한 번 보자; 찬사 역시 근거 없는 비난 만큼이나 또 하나의 왜곡일 수 있다; 거짓말쟁이들에게 여지를 주지 말자!

이스트우드가 생각하기에 사진은 아주 위험한 매체이다("모든 문제는 사진 한 장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것은 우리의 편협한 지각처럼 실상으로부터 시간의 지속을 빼고 흔적과 자취만을 남김으로써, 현재 우리가 필요로 하는 정경유착적 유혹에 따라 과거를 바라보게 할 소지가 크다. 그것은 과거의 왜곡, 존재의 왜곡, 삶의 왜곡이 될 수 있다. 사진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감독의 뜻을 해석해보면,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진실이란 물질적 감각의 문제가 아니라 시간과 지속의 문제라는 것이다. "병사들이 깃발을 꽂았다!"가 아니라, "어떤 병사들이 언제 어떻게 어디서 무엇 때문에 . . . . 깃발을 꽂았는가!"여야 한다. 한 장의 사진 속에 수 백 권 분량의 책을 집어넣어야만 한다.

이 때문에 이야기는 시종일관 그 깃발 사진의 알리바이를 파헤치는 롱 컷의 형사물(detective story)처럼 진행된다. 미학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보도를 하듯이, 깃발이 어떻게 세워지게 되었으며, 누가 맨 처음 세웠고, 깃발은 어디에서 가져왔고, 누가 그것을 가져왔고, 누가 세우라고 지시를 내렸고, 몇 시에 언제, 세울 때의 각도는 어떠했고, 대기 상태는 어땠는지, 깃발을 세우고 난 후 병사들의 기분은 어땠는지, 일본군은 어디에 있었는지, 사진은 누가 어떤 카메라로 어떤 각도에서 언제 찍었는지, 왜 하필이면 그 장면을 찍었는지, 영웅을 만들려고 찍었는지, 그 문맥 속에 영웅이 있었는지, . . . 이 모든 물음과 대답들은 형사가 조서를 꾸미듯, 범행 사후 검증 프로그램을 짜듯이 하나씩 하나씩 제시된다. 사진을 빌미로 정치적으로 채색되었던 어떤 비극적 혹은 영웅적 드라마가 건조한 사실들로 해부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감독이 도달한 실상에 대한 결론은 무엇일까? 바로 이것이다: 우리가 상상했던 사진 속 영웅들의 깃발장면은 너무나 실망스럽고, 클라이맥스도 없으며, 무슨 사건이라고도 할 수 없이 흔하고도 우연한 일에 불과했다; 실상을 구체적으로 따져보면, 우리가 생각해 왔듯이 그렇게 영웅적인 존재나 악당의 감동적인 드라마는 존재하지 않는다; 깃발을 꽂는 행위 역시 언제 그것이 일어났는지조차 분간이 안 될 정도의 하나의 지리멸렬한 사실로 흩어질 뿐이다; 실상 안에는 적도 없고 편도 없고 장렬한 음악도 없고 자세히 보려는 클로즈업도 없고 기억에 오래 새기기 위한 슬로우 모션도 없다; 다만 육체와 포탄의 순간적인 충돌들만이 메아리 칠 뿐이다; 말할 수 없이 엉성하고도 어설픈 전쟁의 다른 절차들처럼(전쟁만큼 억지스럽고 엉성한 폭력이 또 있을까?), 깃발을 거는 행위 역시 전투의 한 절차였을 뿐이며, 전투가 끝난 것도 아니었으므로 승리의 선언조차 될 수 없는 그런 것이었다; 오히려 깃발이 걸린 후 한참 동안이나 죽음의 전투가 계속되었다; 사진 한 장이 그 사소한 지점에서 흔적을 남김으로써, 추악한 탐욕을 가진 어떤 집단적 망상이 일부러 오해를 하도록 여지를 주었다; 구체성에 도달할수록 우리가 대면하게 되는 것은 사소하고 우연적인, 심지어는 모호한 대상과 마주하게 된다; 그들이 겪은 그 견딜 수 없는 고통이란 그렇게 명분도 없고, 이유도 없고, 드라마도, 영웅도 없는 모호성으로부터, 사소한 것으로부터 이유도 없이 나자빠지면서부터 시작되었을 뿐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영웅이 아니라 전쟁의 실상을 겪은 실제의 신병들, 그들 각각의 자신의 모습이다; 영웅과 악당이 대립하는 뜨거운 세계는 사후(事後)에 누군가의 필요가 만들어낸 낭만일 뿐이며, 그것은 바로 거기에 있었던 실상의 개인들에 대한 무례이다; 객관성의 상징인 사진 한 장만으로도 우리는 낭만적 열광의 거짓으로 무례를 범한다; 애국과 단결과 영웅의 탄생을 선언하는 깃발은 전쟁을 막아주고 형제의 목숨을 지켜주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전쟁을 필요로 하는 존재이다; 영웅의 깃발은 적으로 하여금 무기를 버리게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우리 자신의 무기를 버리게 하지는 못한다; 전쟁을 그만두기 위해, 전쟁의 억지스럽고도 무지막지한 실상을 겪은 작은 사람들을 제대로 보기 위해, 우리가 해왔던 모든 찬사들을 철회하자! 그들에게 보냈던 모든 환호성에 찬물을 끼얹자!

이것이 바로 영화 전체에 걸쳐 "전장에서의 실제 상황"과 "본국에서의 찬사"를 그리피스(David Wark Griffith)식으로(그 목적은 전혀 다르게) 계속해서 나란히 교차로 편집했던 이유일 것이다.

전쟁 영화를 보면서 후방의 안방의 우리들은 모두가 형식주의자 및 유미주의자가 된다. 마리네티(Filippo Marinetti)의 선언문을 암송하듯이, 우리는 전쟁의 형식미와 전장의 다이나믹을 만끽한다.

   

용맹스럽게 돌진하는 군인들, 터지는 포탄의 카리스마, 화염방사기가 내뿜는 불꽃의 현란한 색채, 나자빠지는 육체들이 표현하는 가공할 기술주의의 힘, 에너지, 속도, 그리고 그 모든 미래적 활력과 미를 하나의 응축된 힘으로 보존하는 위대한 신 즉 자본! 그러나 이 철없는 미학과는 무관하게, 전쟁 영화란 전쟁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영화이다. 그 결과 그 어떤 찬사와 미학도 허용되지 않는, 스스로 소멸되어가거나 스스로를 부정하고 자신의 미를 일그러뜨리는 길을 간다. 명목상 진정한 전쟁 영화는 다큐멘터리 혹은 보도 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아버지들의 깃발>은 그 정치적 관점에 있어 여전히 애송이 티를 벗지 못한 작품이긴 하지만(후속 작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는 그 보다 더 어설픈 문화적 편협이 있다), 그럼에도 미적인 것을 가급적 지양하면서 개인의 실상(전쟁의 실상은 아닌)을 보려는 노력이 가시지 않고 있다.

이 작품을 이렇게 요약해보자: "움직이는 영상을 통해 사리를 밝히고 따져봄으로써, 개인들의 구체적 실상을 보고자 하는 영화적 노력"(이스트우드는 눈매만큼이나 꼬장꼬장한 노인네이다). 이것이 우리의 정신에 기여하는 바가 있다면, 구체성을 사진의 감각-물리적 객관성이 아니라 시간-지속의 관점에서 접근하게 해주었다는데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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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일즈 데이비스(Miles Davis)의 트럼펫 연주가 멋진 <사형대의 엘리베이터>(Ascenseur Pour L'echafaud, 1958)로 잘 알려져 있는 프랑스의 영화감독 루이 말(Louis Malle). 그의 1987년도 작품 <굿바이 칠드런>(Au Revoir Les Enfants)이 최근에 시네큐브(Cinecube)에서 상영되고 있다(그 밖에 여러 작품들을 포함해서). 루이 말은 프랑스인지만 영미문화의 색채를 가장 많이 가진 작가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그의 작품 <아틀란틱 시티>(Atlantic City, 1980)나 <데미지>(Damage, 1992)등은 영어로 제작되었고 각각 미국과 영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굿바이 칠드런> 역시 프랑스(어)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지만, 엮어가는 짜임새가 비교적 영미권의 글쓰기 전통과 상통하는 측면이 없지 않다. 예컨대 정치적인 문제(독일의 침략, 유태인 문제, 소수자 문제 등)를 소재로 하고 있으면서도, 그 기저에는 윤리적 교육의 테마들(관용, 규율, 공존)이 지탱하고 있는데, 영미권의 냄새는 아마도 그 윤리적 접근방식에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작품은 프랑스 영화이고, 프랑스를 위한 영화이고, 프랑스적인 것이 무엇인지에 관한 영화이다. 카톨릭 신앙을 기반으로 한 작은 공동체의 울타리 안에서, 그들이 어떻게 자유를 존중하고 우애와 관용을 미덕으로 여기며 살고 있는지, 우리는 어린 학생들과 그들을 보호하는 어른들의 생활 속에서 조용히 목격하게 된다. 독일과는 전혀 다른 프랑스적인 규율이 현시되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나이지리아 작가인 아체베(Chinua Achebe)는 자신의 소설 <모든 것은 무너져 버린다>(Things Fall Apart)에서 아프리카 원주민의 내적인 삶(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을 길게 보여주었는데, 이를 읽은 우리는 비로소 서구인의 눈이 아니라, 모든 예술의 궁극적 목표인 신의 눈이 되어, 그 자신 안에서 살고 있는 나이지리아 원주민의 진정함을 보게 된다. 루이 말이 도달하고자 했던 것도 바로 이와 유사한 노력, 즉 침략자 독일인과는 무관하게 존재하는 온전히 프랑스적인 규율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프랑스인에게는 다른 나라에는 없는 특유의 관대함이 있다. 이 작품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요소인데, 이는 아이들을 대하는 어른들의 태도에 잘 나타난다. 아이들은 짓궂게 장난을 치고, 심하게 싸우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받는다. 그래도 어른들은 그들을 말리는 경우는 있지만 바로잡기 위해 벌을 주거나 강요를 하지는 않는다. 이는 법치국가 미국이 법적 숙고의 결과를 교육체계에 반영시킨 인권존중의 개념과는 다르다. 그 관대함에는 오랫동안 대물림 해오면서 축적된 인간을 대하는 문화적 본능 같은 것이 있다. 영화 뿐만 아니라 프랑스 문화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느꼈을 법 한데, 그들의 사회 정치적 진보에 대한 열정에도 불구하고, 어디선가 프루스트(Marcel Proust)가 "조그마한 삶(la vie petit)"이라는 말로 가장 멋지게 표현했던, 인간의 작은 몸짓들에 대한 깊은 애정이 배어 있다. 많은 누벨바그(Nouvelle Vague) 집단의 멤버들, 특히 트뤼포(Francois Truffaut)나 루이 말 같은 감독들이 이미지를 왜곡 없이 담고자 했던 것은 다름 아닌 그 애정에서 발산되어 나오는 따뜻한 온도였다. 그들의 관용과 자유의 아상블라주가 발산하는 온도는 정(情)에 기반한 한국인의 정서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따뜻함이다.

그 관대함 때문인지는 몰라도, 독일의 나치스는 프랑스인의 교육과 삶 전체에 규율이 없다고 생각한다. 작품 속에서 독일 게슈타포 장교가 프랑스 아이들을 세워 놓고 "프랑스인에게는 규율이 없다"고 충고한다. 사실 독일군이 유대인을 잡으러 학교에 침입해오기 전까지, 작품의 전체 내용은 프랑스 아이들의 부산한 장난질과 사소한 싸움들, 그리고 아마도 부모에게서 그 방법을 배워 타인을 헐뜯거나, 질투를 하고, 자기만의 탐욕을 위해 개인물품을 암거래하는 장면들로 채워진다. 아이들의 이러한 소란들은 전쟁의 폭력적 상황, 유태인과의 불화 혹은 긴장, 독일의 점령과 같은 위태로운 정치적 환경과 나란히 등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그 작은 시골 마을의 카톨릭 학교는 단단한 기반 위에 안정된 상태로 서 있는 것 같다. 아마도 그 이유는 부산하고 소란한 삶의 밑바닥에 여전히 굳건하게 버티고 있는 자기규율 같은 것 때문이 아닐까 싶다. 살기 위해 불가피하게 터득한 이기적인 습성을 드러내고, 타인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동안에도, 쥴리앙과 보네의 불화와 화해가 그랬듯이, 지나친 것이 무엇인지, 언제 화해를 해야 할지, 또 잃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려면 당사자로서의 자기 자신을 이해관계로부터 잠재적으로 끄집어낼 줄 알아야 한다. 그랬을 때 비로소 그들은 서로 상처를 받는 동안에도, 그것이 그들의 관계를 해치는 그런 상처일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작품은 자기 규율에 관한 영화이다. 신부가 부유층 학부형들 앞에서 "부자들의 탐욕과 종교적 구원의 관계"에 관하여 감동적인 연설을 했을 때, 바로 자기 규율에 대해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작품이 우리에게(한국의 관객에게) 감명을 주는 이유는 친구간의 우정 때문도, 종교적 희생이나 배려 때문도 아닌, 바로 자기규율에서 비롯되는 "윤리적 단호함" 때문이다.

윤리적 단호함은 민족이나 인종 그리고 무엇보다도 종교를 초월해 있다. 가톨릭 신부가 목숨을 걸고 유대인 소년인 장 보네를 나치로부터 은닉해 준 것은 종교적 동기(오히려 방해가 되었을)에서가 아니라 순전히 윤리적 동기였다. 신부의 연설에 감동을 받은 보네는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카톨릭 성체 의식을 받으려 하지만, 신부는 이를 거절한다. 학생들에게 반복해서 가르치는 교육에서도 나타난 바, 신부는 "타자가 함께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또 그러려면 어떠한 단호함이 있어야 하는지를 가르치고 싶었던 것이다.

집에서 가져온 개인 물품을 암거래하는 행위를 신부가 가장 싫어했던 이유도 정확히 같은 이유에서이다. 이 작품에는 두 명의 소수자가 등장한다. 하나는 물론 유대인 장 보네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적 소수자이다. 그는 살기 위해 나치를 피해 역사적 종교적 갈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톨릭 공동체에 숨어 있다. 다른 하나는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어떤 점에서는 장 보네 보다 더 이 작품의 핵심이랄 수 있는 사회적 소수자 즉 조셉이다. 조셉은 이 학교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일종의 하인 청년이다. 장 보네는 위태롭게 피신해 있는 처지이기는 하지만, 수학, 음악, 독서 등 다른 아이들에 비해 지적으로 우수하기 때문에 주변의 선망과 사랑 그리고 질투를 동시에 받는다. 반면에 조셉은 피신해 있는 처지는 아니지만, 비교적 부유층 자제인 학생들에 비해 배우지 못했고, 사회적으로 천한 신분에 속한 소년이다. 그래서 가끔씩 거만한 학생들의 괄시와 무시를 받는다("유대인은 자기네 집으로! 조셉은 돼지 우리로!"). 그런데 조셉은 학교의 물품을 몰래 빼돌려 외부인들과 암거래를 해오고 있다. 학생들이 집에서 가져온 개인 물품들은 교칙상 함께 공유하도록 되어 있지만, 조셉이 학생들과 비밀리에 거래를 하여 개인 물품조차 외부로 팔아먹는 것이다. 결국 이 사실은 신부에게 들통이 나고, 분노한 신부는 암거래를 했던 학생들을 처벌하고, 조셉은 학교에서 쫓겨난다. 이에 앙심을 품은 조셉은 신부가 유대인을 숨겨주고 있음을 게슈타포에게 밀고하고, 독일군이 학교에 침입하여 장 보네 등 학교에 숨은 유대인과 신부를 끌고가 죽인다.

암거래를 했던 학생들과 조셉에 대한 신부의 비판은, 당시 유태인과 외국인을 자기의 땅에서 몰아내겠다고 난리를 치고 다니는 게슈타포 독일군과, 대신해서 그래 주기를 은근히 바라는 유럽 사회의 냉소에 대한 비판과도 맞닿아 있다: 암거래자인 조셉이나 줄리앙 그리고 유럽인 전체는 혼자만의 방 안에서 쨈을 홀짝거리며 숫가락을 빨아대는 초라한 이기주의자 외에 그 무엇도 아니라는 것, 이들의 탐욕스러운 행동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자유와 능력을 자신만을 위해 사용함으로써 자신들이 속한 사회를 차디찬 동토의 섬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특히 조셉의 무지한 암거래에 대한 신부의 태도, 그리고 조셉의 밀고에 대한 줄리앙의 태도는 대단히 단호하기 그지없다. 바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네가 약자라고 해서, 소외되고 가여운 어린 양이라고 해서, 부자들에게 천시를 받았다고 해서, 너의 무지한 행동에 비해 다소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고 해서, 그렇게 탐욕을 쫓아 암거래를 하고, 유대인과 신부를 밀고한 것이 정당한 행위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네가 약자라고 해서 널 용서할 수는 없다. 너는 무지했고, 그 무지로 인해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갔다. 나는 너를 비판하고 규탄한다. 힘들게 산다고 해서, 먹고 살기 바쁘다고 해서, 모든 것이 너의 책임이 아니라고 호소하는 듯한 그 역겨운 표정을 하고 있는 면상에 따귀를 갈겨주고 싶다. 너에게도 네 자신에 대한 단호함은 있어야 한다. 아니 그 누구보다도 더. 관대함이 필요하다면 그로부터 나온 것이어야만 한다. 소수자와 약자란 다름 아닌 그 불투명해진 단호함의 희생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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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고 편한 것을 택하는 것이 사람들의 일반적인 경향이다. 하지만 이러한 습성은 사물의 본질로부터 멀어지기가 쉬워서, 사물에 대한 해석이 단견에 머무르거나, 편협한 판단으로 자연을 망치는 경우가 많다. 본질은 항상 뒤늦게 나오는 법이다. 우리가 시간을 단축시킬수록 그 본질의 지속력 역시 단축되어 꺼져버릴 소지가 크다. 이는 당연한 것인데, 본질은 사물의 핵심일 것이고, 핵심은 사물의 표면이 아니라 깊숙한 곳에 묻혀있기 때문이다. 사물의 핵심에 도달하려면 첫인상이나 단견에 머물러서는 안 되고, 한참 동안 그 사물이 스스로 핵심을 드러낼 때까지 기다리거나, 핵심에 도달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사물의 본질은 시간의 문제이고, 지속과 인내의 결과이다.

사람들은 추상적인 개념에 익숙해있지 않다. 쉬운 예로, 우리는 원(圓)이나 구(球) 보다는 달 또는 쟁반이라고 말해주길 원한다. 원과 구는 감각이나 물질적으로 아직 명확히 결정되지 않은 존재이기 때문에, 내가 그것을 감각적으로 경험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뭔가를 그려보거나 쟁반과 같은 경험적 사물로 직접 치환하는 수고를 겪어야만 한다. 추상은 뭔가를 억지로 떠올리도록 강요하여 우리를 수고스럽게 하는 그 무엇이다. 멍하니 쉬고 싶은데 자꾸만 뭔가를 생각하도록 강요하는 추상이 우리는 싫다. 그래서 들통난 무기력과 자책감을 보상하기 위해 추상적인 모든 것을 허황된 것, 뜬 구름, 위선, . . . 과 같은 오명으로 낙인을 찍는다. 이 오명에는 우리의 좌절감과 게으름, 나아가 뻔뻔스러움 같은 것이 감추어져 있다.

글 보다는 그림이나 사진 혹은 동영상을 찾는 습관도 마찬가지이다. 글에는 감각적 형태가 없다. 아른하임(Rudolf Arnheim)이 어디선가 "구상시"(concrete poetry)를 논의하면서 잠깐 언급했듯이, 글은 마치 거대한 선박의 부속들이 제각각 땅바닥에 널브러져 해체되어 있는 것처럼 기호 조각들로 나열된 꾸러미이다. 우리는 그 조각들을 하나씩 읽고 추상적 사유를 해서 그 부속들이 취하게 될 전체의 이미지를 머릿속에서 스스로 통합하지 않으면 안 된다(글의 능동성이 주는 정서는 아이가 도표도 없이 장난감을 조립하는 노고와 기쁨 이상이 있다). 추상에는 도표도 없고 기준도 없으며 기댈 곳이 없다. 위대한 안토니오니(Michellangelo Antonioni)가 감독한 "잠재성"에 관한 영화 Blow Up에서 어느 화가는 자신이 그린 해석 불가능한 추상화 한 점을 놓고 이렇게 말한다: "기댈 곳을 찾으면 다음에는 아주 쉬워져! 여기가 다리고 여기가 몸이야!" 글과는 반대로 그림은 조각들이 완성된 형태로 우리의 감각에 호소하기 때문에(추상화 역시 색채라든가 선이라든가, 리듬의 측면에서는 역시 감각적이다), 더 쉽고 물질적이고 명확한 접근이 가능하다. 결국 추상에 대한 우리의 거부는 지도 보다는 직접 데려다 주기를, 요리법보다는 요리 자체를 대령해주기를 기대하는 우리의 다소 뻔뻔스러운 바램, 다시 말해 세계가 하나의 완성품으로서 우리 앞에 제시되기를 바라는 노예의 도덕이 많든 적든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니체가 노예를 혐오했던 것은 그 뻔뻔스러운 무기력 때문이 아니었나?).

추상적인 것, 잠재적인 것, 보이지 않는 것, 알려지지 않은 것, 지각되지 않는 것을 사유할 수 없는 영혼은 먼 미래나 깊은 과거를 볼 수가 없다. 미래와 과거는 당장에 눈에 보이고 잡을 수 있는 것 이상의 어떤 비전을 필요로 하는 시간이기 때문에, 감각적이고 물질적인 상태에 사로잡혀 있는 말초적 영혼은 도달하기가 어렵다. 노자의 도덕경(道德經) 1장에는 '소유로부터 벗어날 때 경험하게 되는 보편적이고도 묘한 세계'에 대한 언급이 있다(故常無慾以觀基妙, 常有慾以觀基徼). 바로 감각적이고 물질적인 것을 벗어나 그 "이전" 혹은 "이후"의 잠재적 세계에 도달하는 문제에 대한 가르침이다. 그러나 잠재적 세계는 뭔가가 불명확하고 명확히 결정이 안 된 상태, 더 정확히 말해 저 위의 화가처럼 자기 스스로가 일점(-點)을 찍거나 최초의 결정을 내려야 하는 상태이므로, 거기에 머물러 있는 것이 힘들고 불안해서 우리는 단단하게 기대어 잡을 수 있는 곳을 찾는다. 요즘의 소비사회에서는 불행하게도 그 기댈 곳이 주로 물질-상품-소유물이다. 공허를 식욕이나 쇼핑으로 채우려 하거나, 육체의 소유와 사랑을 쉽게 혼동함으로써, 충만에 도달하는 시간을 손쉽게 단축시킬 것처럼 보이는 물건으로 환원하는 것이다. 책을 읽고, 사색을 하고, 글을 쓰는 일들은 모두가 잠재적 행위들인데, 거기서 기댈 곳이 없어 답답하고 불안한 우리는 이를 견디기 어려워 자꾸만 감각적 물질과 대상 쪽으로 우리의 몸과 마음을 몰고 가려는 충동을 가누지 못한다. 책상에 앉았다가 곧 일어나 커피잔을 찾거나, 손에 쥔 볼펜에 눈길을 주거나, 인터넷 쇼핑몰을 뒤지거나, 담배를 물거나, . . . 그러나 결과는 언제나 더 깊은 허기와 공허와 싫증과 참담으로 끝나기가 일쑤이다.

추상적 사유에 대한 거부, 그리고 사물의 잠재적 징후로부터 발산하는 비전에 대한 무지, 다시 말해 물질적 가시성에의 중독은 단순하기 그지없는 영혼의 표상이다. 또 단순한 인간은 자신의 편견에만 사로잡혀 있지 않고 주변 사람들조차 그 단순성으로 보기 때문에, 윤리적으로도 실패한 사람이 될 소지가 크다. 단순한 눈에 비친 모든 것은 진부하고 따분하고 지리멸렬해 보이기 때문에, 타자가 무가치해 보이고 경시할만한 대상으로 여겨진다. 현대의 악은 도덕적 종교적 타락이 아니라 진부함, 바로 진부한 시선이다.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와 새커리(William MakepeaceThackeray)가 잘 지적했듯이, 진부함의 사회적 원천은 주로 저널리즘에서 출발하는데, 기자와 언론인의 도덕적 타락은 개인의 품성 문제와 경제적 문제 외에도, 그 직업 활동이 취하는 선천적 성질에 기인하는 것이다.

물질에는 심층적인 것이 없다. 그래서 그 양태가 항상 가시적이다. 행위가 가해질 때 물질은 즉각적이고도 분명하게 반응한다. 우리가 의지에 따라 만지는 대로, 물리적 질서에 따라 주무르는 대로, 그것은 어김없이 우리에게 화답을 한다. 적절히 온도만 맞는다면, 물질은 우리의 요구에 반하거나 거짓말하는 법이 없다. 인간이 물질과 싸움을 벌이거나 투쟁적인 관계를 맺는 것은, 물질이 우리를 속이기 때문이 아니라 침묵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물질에 대한 우리의 무지는 순전히 우리 자신의 문제일 뿐이다. 물질에 대한 우리의 행위가 얻게 될 그 결과에 있어 기만적인 구석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것이다. 여기에 물건에 대한 우리의 중독성의 근원이 있다. 행위에 대한 결과의 즉각성과 명쾌함은 우리에게 어떤 희열감을 주는데, 이 희열감 때문에 우리는 자꾸만 그것들에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가령, 공원에서 모형 비행기를 날리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라. 적당한 조작을 통해 조립을 해서 그것을 공중에 날리는 순간, 그들은 물질과 자신 사이에서 일어나는 묘한 질서에의 희열을 느낀다. 또 위키(Wiki) 프로그램이나 설치형 블로그 프로그램을 자신의 서버에 설치하고 필요한 설정을 바꾼다. 서버에 설정된 파일을 올리고 다시 이를 웹브라우저로 확인한다. 자신이 생각했던 대로 바뀐 것을 보고는, 물질적, 현실적, 가시적 실현을 확인한다. 그 순간 자신이 신이 된 것 같은 희열감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즉각적 변화로부터 오는 희열감은 창조의 기쁨이기 보다는, 어떠한 질서에 대한 확신과 그 질서로부터 배제되지 않은 자기자신, 그리고 그로부터 나오는 참여의 안도감 같은 것이다. 주어진 요소들을 짜맞추고 조립하여 그것이 현실적으로 실현되었음을 확인하게 되는 순간 우리는 안도감을 느낀다. 플라톤(Platon)이 말했던 획득의 테크네(techne)가 주는 희열, 혹은 조립품이 주는 기쁨이란 이러한 것이다.

간혹 작가들조차도 이러한 희열감의 함정에 빠진다. 글쓰기의 본질인 잠재적 역량을 키우는데 힘을 쏟는 대신, 새로운 단어와 표현체를 찾고자 열망하는 것이다. 실상 잠재적 역량이 너무 얕고 짧기 때문에, 그들은 그를 대신해줄 적절한 육체와 옷을 찾길 바란다. 그래서 일상적 단어나 문장으로도 충분히 표현이 가능한 경험 위에 어울리지 않는 육체와 옷을 입힌다. 그들의 언어는 너무 수사적이고 장식적이어서, 우리의 눈과 마음은 그들이 어질러 놓은 장식물들을 구별하느라고 정신이 없다. 왜소한 역량에 비해 입은 옷이 너무 커서 공허해지는 것이다. 시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 중에 이런 사람들이 많다. 산문은 지속력이 있어야 하므로 속이기가 쉽지 않은 반면, 시는 쉽게 현혹시키고 속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시를 쓰기 보다는 읽을 줄 아는 것이 더 어렵고 비범한 능력을 필요로 한다.

물질성의 공허함은 패션(Fashion)이 창출하는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패션이란 새로운 취향의 창출이 아니다. 그것은 진부함을 생산하는 운동이다. 왜냐하면 유행이란 단순히 감상이나 유희를 넘어서 구매와 연관이 있어야만 하는데, 구매는 새로움에 대한 호기심이나 실험정신 혹은 탐구정신의 소산이기 보다는, 따분하고 공허한 심리 혹은 진부한 삶 일수록 더 강렬해지고, 또 그러한 삶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한 구절의 시 보다는 신상품 원피스가 더 반갑다. 친구들 틈에서 나를 더 우쭐하게 만들어줄 것 같은 것은 바로 후자이다. 다루기도 쉽고 결과도 명확한 물질성에 비해, 비물질적인 것은 언제나 느리고 더디다. 나의 글 한편이 내 삶을 바꾸어 놓았는가? 나의 도덕과 의로움이 이 사회를 변화시켰는가? 언제쯤이나 도래할지 알 수 없는 그 심연의 시간을 기다릴 수 없어, 우리는 계속해서 울긋불긋한 물질로, 대상으로, 쇼핑몰로, 물건들로, 상징들로 되돌아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나중에 나오기 마련인 그 무엇에 등을 돌린 우리의 삶은 공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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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과 물질 혹은 시간과 공간이 뒤섞여 뒤죽박죽이다! 더 정확히는 지속의 물질화 혹은 시간의 공간화! 그리하여 삶 자체의 결정론적 기계론적 도식화! 무엇보다도 존재의 부정! 이것이 베르그송, 들뢰즈, 나아가 베르그송주의의 비판의 핵심이다. 시간을 공간으로 환원하는 많은 체계들이 있다. 가령, 운동을 운동체나 운동궤도와 뒤섞어 혼동했던 고전철학(아킬레스와 거북의 동질성), 시간을 공간의 좌표체계로 환원하여 공간을 주파하는 운동의 무의식적 단위로 혹은 상대적 좌표에 배열된 불연속적인 간격들로 파편화한 근대 과학(근대역학이나 상대성이론), 더 지독한 경우로는 마르크스가 '사물화 과정'이라고 말했던 것, 즉 효율적이고 용이한 대상으로 존재를 기능화하기 위해 그것으로부터 지속을 배제하여 순간적 상태로 환원하는 자본주의가 그것이다. 효율과 기능에 대하여 지속과 시간은 일련의 장애 즉 병적인 상태에 다름 아니다. 자본주의는 지속의 모든 두께와 부피의 제거, 나아가 본성적 차이의 무화 과정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그러나 베르그송주의는 이러한 역사적 체계들 이전에, 이미 우리의 삶 자체가 하나의 도식화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살기 위해 현실적 필요에 사로잡혀 있다. 지각은 현재 필요한 것만을 수용하고 나머지는 놓쳐버림으로써 사물로부터 그 온전한 실재성을 왜곡하거나 변형한다. 말하자면 지속과 시간을 현재의 필요로 수축시키는 것이다. 현실적 필요의 완성은 바로 행동이다. 행동은 세계를 당기고 밀고 휘어지게 함으로써, 행동의 주체를 세계의 중심에 설정하고, 실재의 모든 시간과 공간을 그 중심에 대한 상대적 존재로 집결한다.

따라서 베르그송주의의 중요한 한 가지 프로젝트는 결정론적 기계론적 사유로부터 시간을 되찾는 '기계'를 발명하는 일이다. 기계론과 결정론에 빠지지 않을 것! 현실적 필요에 사로잡혀 삶을 진부함 속에 가두지 않을 것! 존재로부터 그 고유한 시간, 과거, 지속 전체를 구해낼 것! 이는 마르크스주의가 추구했던 것처럼 사회 경제적 소유관계의 재구성보다도 더 근본적인 힘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가장 훌륭한 기계는 물론 예술이다. 들뢰즈가 생각하는 예술의 힘은 존재 고유의 시간의 보존에 있다. 예술에 관한 그의 대부분의 저작은 '존재의 본성적 차이와 긍정'이라는 주제를 기반으로 한다. 가령 운동, 지각, 감정, 충동, 행동, 지속이 영화 이미지에서 어떻게 자신의 고유한 형태로 현존하는지를 분류하여 그 이미지 각각을 긍정한다든지(『영화』의 경우), 현재와는 본성적으로 무관하게 과거가 그 자체 즉자적으로 존재함을 보여주어 과거, 기억, 시간 전체의 순수현존을 긍정한다든지(『프루스트와 징후』의 경우), 정신분석이 새도-마조히즘이라는 증후군으로 뒤섞어놓았던 두 작가의 고유한 문학 혹은 변태성을 본성적으로 다른 계열들로 나눈다(『마조흐: 냉정함과 잔혹함』의 경우). 존재의 긍정이란 현실적 사회적 관계 속에서 다른 존재와 뒤섞여 있는 동안에도 가지게 되는 권리상의 해방, 즉 존재가 그 자신 안에서의 시간 전체의 보존을 의미한다. 본성상의 차이의 발견과 존재의 긍정이라고 하는 들뢰즈의 예술론은 궁극적으로 시간의 잠재적 보존 그리고 그 직접적 현시의 문제에 다름 아니다.

다른 형태로 질문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지속 혹은 시간 그 자체를 직접적으로 볼 수는 없을까? 시계추의 반복처럼 공간에 끼어 있거나, 달리는 자전거처럼 운동에 실려 있거나, 표정 짓는 얼굴처럼 육체(물질)에 묻어 나오는 식의 간접적 현시 말고, 그들―육체, 기능, 운동, 현재―로부터 해방되어, 그들이 사멸해도 여전히 그 순수현존이 스스로 남아 직접적으로 현시되는 시간 그 자체의 이미지. 어떤 점에서 시간을 직접적으로 본다는 것은 과거를 그 즉자적 상태에서 본다는 것이다. 현재적 필요라든가 이해관계와는 무관하게 그 자체로 존재하는 순수한 상태의 비전의 통찰! 이것이 잠재미학의 조건이며, 이로부터 현시되는 실상의 이미지는 결국 우리를 삶의 긍정으로 이끌 것이다.

시간(이미지)을 직접적으로 드러낼 가능성이 있는 현실적 이미지들이 있다. 들뢰즈는 네오리얼리즘이나 누벨바그와 같은 전후(戰後) 현대영화의 공통적인 형식을 '순수 시지각적 이미지'(image pure optique)라고 불렀다. 예컨대, 고전적 리얼리즘에서는 행동 중심의 이미지가 지배적이었다. 계급이나 공동체 전체를 대변하는 하나의 중심으로서의 주인공이 있고, 그를 둘러싼 사회적 정치적 자연적 환경이 있다. 그는 현실의 필요에 따라 환경을 지각하고, 그의 지각은 곧 행동으로 연결되고, 나아가 그의 행동성은 환경 전체의 변화로 이어져 삶의 새로운 조건이 탄생하는 식이다. 그러나 전후의 현대적 상황은 이러한 행동 중심의 도식(“환경1-행동-환경2”)에 균열이 생겨, 더 이상 지각이 행동으로 혹은 행동이 다른 행동으로 혹은 행동이 환경의 변화로 연장되지 못하고, 그 사이에 중단, 망설임, 머뭇거림, 더듬거림과 같은 특이한 간극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기계적이고 무의식적인 말이나 행동에 난데없이 끼어든 ‘공허’라든가, 일상적인 제스처가 중단되고 갑자기 무언가를 ‘주시’하며 순수한 관조에 사로잡힌 상태라든가, 여행이나 배회를 하는 가운데 맞닥뜨리게 된 어떤 ‘딜레마’, 익숙한 지각이나 사유의 한계를 벗어나는 참을 수 없는 광경의 ‘목격’, 낯선 풍경으로부터 감지하게 되는 ‘위기’ 혹은 막연한 ‘공포’, 이러한 관조적 이미지들은 현실에 행동성의 부재, 박탈, 균열을 끌어들인다. 행동이란 관념적 도식의 현재화 혹은 현재의 물질적 도식화인데, 이 도식 구도에 균열이 일어나 어떤 의도되지 않은 우연적 상황에 처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순수한 시각적 청각적 상황에 내몰리게 되고, 나아가 관조적이 될 것을 강요받는다―한편 이 관조적 상황은 베르그송적인 의미에서 최초의 시간의 발생이며 창조의 징후이다.

관조적 상황에서는 모든 존재가 행위 주체에 종속되기를 그치고 그 고유한 실재성을 취한다. 말하자면 행동적 공간(리얼리즘적 공간)에서 세계를 견인하는 중력으로서의 중심에 난입한 균열로 인해, 관계하는 모든 사물을 특정 상황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다. 이는 여행자나 떠돌이가 낯선 풍경에 직면하여 겪게 되는 모든 감각적 편력을 설명해준다. 생경한 비전에 빠진 여행자는 현실에 적응하기 위해 모든 감각능력을 동원하지만, 사물들은 즉각적으로 무엇인가를 지시하거나 어떤 쓰임을 위해 기능하지 않고, 감각적으로 해방감을 주는 자연물처럼 의미가 미결정적인 상태에서 그 고유한 실재성을 드러낼 것이다(비스콘티의 영화들). 따라서 관조적 이미지에서는 주관성과 객관성, 상상과 실제,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의 구별이 모호해지고 식별 불가능해진다. 현실적 필요로부터 벗어나 필요가 야기하는 행동성을 잃어버린 상황에서, 특정한 목표에 따라 행위 하지 않고 주어진 상황을 미결정된 상태로 지연시킴으로써, 거기서는 구체화된 것도, 정향된 미래도 없으며, 추억이나 몽상 혹은 주관적 공허와 함께 객관적인 사실들이 소멸된다. 그리하여 모든 사물들의 잠재성이 강화된다(안토니오니의 영화들). 관조는 잠재성의 열림 그 자체이며, 이는 우리를 사물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으로 이끈다. 실상의 구체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네오리얼리즘의 인물들 대부분은 어린 아이라든가, 여성이라든가, 낯선 곳에 다다른 여행자라든가, 프롤레타리아와 같이 사회로부터 행동성을 빼앗긴 사람들이다. 그들은 모두가 약자 혹은 소수자로서, 예술가나 작가가 그렇듯이, 사회적 행동 영역을 박탈당하여 상대적으로 무기력한 상태에 처해있다. 이러한 무기력이 그들로 하여금 난폭하게 드러나는 실상을 맞닥뜨리게 하고, 그들은 거기서 표현할 수 없는 날 것 그대로의 실재를 바라본다.

관조적 상황이 가장 절대적인 형태로 현시되는 이미지가 바로 오즈 야스지로의 그 유명한 “정물” 혹은 “베게-샷”(pillow-shot) 혹은 “정적”(cases of stasis)이다. 오즈의 정물은 인물들의 기계적이고 진부한 일상적 제스처들―집에서 직장으로, 직장에서 술집으로, 술집에서 다시 집으로, 혹은 전형적인 말소리와 분위기의 대화―사이에 삽입된다. 그것은 간혹 고층건물로 나오기도 하고, 한적한 공원이나 공터의 자연물, 도시의 작은 골목이나 술집 네온사인, 산이나 바다의 먼 곳, 실내의 텅 빈 복도, 방안의 가구들, 특히 방 안에 배치된 꽃병, 골프채, 술병, 책, 책상, 스탠드, 복도와 벽에 비치는 물그림자, 밤길을 비추는 가로등의 형상으로 등장한다. 들뢰즈는 이 정물이미지가 이탈된 공간이라고 지적하였다. 장면들 간에 연결되는 공간도 아니고, 행동의 매개가 되지도 못하며, 행동하는 인물이 배치되어 있지도 않다는 것이다. 즉 그것은 이야기의 흐름이나 인물들의 관계와는 무관하게 임의로 설정된 일종의 균열이다. 행동에 적합하게 설정되어 움직임이나 시지각 대상에 종속된 리얼리즘적 공간이 아니라, 연결 관계가 완전히 끊어져 순수하게 자율성을 가지는 탈구 상태, 더 정확히 그 자체 지나가는 어떤 것, 즉 이미지에 담긴 특정 대상과도 무관한 지속 그 자체의 직접적인 이미지이다. 들뢰즈는 아름다운 장면 하나를 예로 든다: “『늦봄』에서의 그 꽃병은 딸의 온화한 미소와 복받쳐 오르는 눈물의 장면 사이에 삽입된다. 무엇인가가 생겨나고 변하고 지나간 것이다. 하지만 달라진 것의 형식은 그 자체 달라지지 않았고, 지나가지도 않았다. 이것이 바로 시간, 시간 그 자체, ‘그 순수한 상태의 자그마한 시간’이다. . . . 오즈의 정물은 지속한다. 그 10초 동안의 꽃병이라는 하나의 지속을 취한다. 그 꽃병의 지속은, 변하고 있는 상태들의 연속을 통해, 정확히 바로 그 견디어내고 있는 것의 표상이다.”

사실상 삶을 지배하는 것은 여행이나 배회가 아니라 일상적인 작은 행위들이다. 오히려 여행조차 일상의 한 이면의 반복일 정도이다. 우리가 바라보고 앉아있거나 누워있는 곳은 어김없이 전형적이고 진부한 공간(고궁, 온천지, 술집, 가정, 직장)이며, 우리의 대화 역시 대본이 마련된 퍼포먼스처럼 진부한 말소리와 분위기로 채워진다. 우리는 모두가 아주머니, 아저씨, 아들, 딸, 아버지 혹은 어머니로서 판에 박힌 캐릭터로 살아간다. 들뢰즈가 명명했던 이 “무료한 시간들”은 삶을 변화로 이끌지도 주어진 상황을 파국으로 치닫게 하지도 못한다. 고요한 일상을 뒤흔드는 사건들, 가령 딸의 결혼식이 끝나고 혼자 숨죽여 흐느끼는 아버지의 서글픔(『꽁치의 맛』), 잠든 아버지를 미소를 머금고 바라보다가 갑자기 눈물을 흘리는 딸의 연민(『늦봄』), 죽은 아버지에 대해 모질게 말을 하고 울음을 터뜨리는 딸의 애증(『마지막 변덕』), 심지어 죽음조차도 너무나 일상적이어서 가족이나 친구의 죽음을 바라보는 인간들의 슬픔과 눈물 역시 결국은 진부한 그 무엇이 되어 버린다. 들뢰즈에 따르면 이러한 진부함은 삶 자체 나아가 대자연의 본성에 기인한다. 자연은 빈틈없는 규칙에 따라, 필연적 질서에 따라, 하나의 항에서 다른 항의 연쇄로, 거대한 방정식의 이항(移項)과도 같은 계열들의 움직임으로 짜여있다. 자기중심적으로 부분만을 지각하고 행동하는 인간에게 이 질서는 부서지고 혼란한 형태의 작은 단편들로만 보이기 때문에, 눈앞에 펼쳐진 많은 것들이 우연적이며 특이한 경험이 된다. 일상의 한 국면이 다른 국면과 마주치면서, 마치 그 가운데에 침입한 드라마처럼, 그 국면들이 놀라운 사건이나 강렬한 첨점으로 보이는 것이다. 신의 지각에서 본다면 아주 단순하게 해명 될 만한 자연적 질서의 사소한 단편이 인간에게는 거대한 재앙으로 보이거나, 타인과의 우연한 만남조차 신화적이고 낭만적인 운명의 외관을 취하는 것이다. 낭만주의적 감동은 자연의 풍경에서가 아니라 인간으로부터 나온다. 인간은 수학과도 같은 단순한 자연에 자신의 혼란한 감정을 투영하여, 그 지루한 일상적 규칙으로부터 벗어나 풀길 없는 격정을 만들고자 한다. 친구들의 농담(『꽁치의 맛』)이나 음흉한 익살(『가을햇살』) 혹은 시위 하듯 친정에 와서 살고 있는 여인의 남편에 대한 반항(『동경의 황혼』)처럼, 가만히 있지 못하고 몸과 마음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대자연의 고전주의에 맞선 기약 없는 낭만주의의 반항을 감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식을 버리고 집을 나간 어머니 때문에 생긴 동생의 깊은 상처를 깨달은 언니가 자신의 어린 딸을 생각하여 다시 남편에게 돌아갈 것을 결심하듯, 혹은 아버지가 딸의 죽음을 겪고 난 후 새벽이 지나 아침이 되어 거대한 산이 환하게 드러나고 나무 그림자가 실내 복도를 드리우자 넥타이를 매고 새로운 일상으로 되돌아가듯, 거스를 수 없는 막대한 힘 앞에서 굴복하고 되돌아가지 않을 수 없는 무기력한 반항일 뿐이다. 때문에 우뚝 솟은 나무나 눈 덮인 산, 잔잔한 대양(大洋)의 장엄은 우리의 낭만주의를 부추기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낭만주의가 빚어낸 요란한 동요와 혼란을 아무 말 없이 태연한 일상으로 되돌릴 뿐이다. 자연을 바라보며 우리는 떠나왔던 바로 그곳으로 돌아간다. 이것이 또한 낭만주의자들이 간혹 산의 이미지에서 느끼는 무지막지한 대자연의 숭고이다.

바로 여기에 정물의 이미지가 가지는 심오함이 있다. 정물은 지나가는 그 무엇을 직접적으로 현시한다. 하루의 일상적 사건이 생겨나고, 밤이 되어 하루 동안의 동요를 추스르고 잠에 빠지듯, 정물은 사물의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간의 잠재적 이행을 시각적으로 보존한다. 잠든 인물의 의식이 희미해지거나 꺼져있는 동안에도 날들은 스스로 보존되어 밤과 새벽을 지나 또 다른 날들로 운반될 것이다. 밤이 깊어지고 새벽이 되어 해가 뜨거나, 외출에서 돌아와 잠시 앉아 있는 동안, 잠시 동안의 시간의 변화가 그 정물 안에서 잠재적으로 일어난다. 공간을 이동한 것도 달라진 형상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정물은 시간을 일정한 부피와 두께로서 보존한다. 빛, 명암, 색채 및 실재 전체가 겪는 변화의 구도! 의식적이고 행동적인 지각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형상의 미묘한 질적 변화! 이것이 바로 정물이며 시간 그 자체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정물의 심오한 가치는 삶을 견디어내어야 할 그 무엇으로 체험하는 인물들의 내적 지속을 느끼게 해준다는 점에 있다. 오즈의 영화에는 많은 사회적 변화의 환경이 깔려 있다. 산업사회 혹은 패전의 절망, 전통적 가치의 변화와 붕괴, 이러한 변화를 가장 첨예하게 보존하는 장소로서의 가족과 이웃, 거기서 우리는 가장 일상적이면서도 가장 참을 수 없는 형태의 실상과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오즈의 이미지의 가치는 일상적이고 사소한 삶의 기저에 있는 말해지지 않은 어떤 실상의 목격이다. 가정으로 난입한 산업(『동경이야기』), 의식의 변화(『부초이야기』), 전통과 현대 혹은 세대의 변모와 갈등(『꽁치의 맛』, 『부초이야기』, 『가을햇살』), 패전이후의 달라진 관계들(『꽁치의 맛』)과 같이, 일본인들의 잔잔한 일상 속에 들이닥친 현대성의 병리적 징후뿐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는 삶 속에서 견디기 어려운 것―욕망, 이별, 죽음 등―을 견뎌내어야 하는 고통을 안고, 인간은 삶 자체에 내재한 참을 수 없는 슬픔에 파묻혀 있다. 아름다운 영화 『동경의 황혼』 마지막 장면에서 딸이 죽은 후 밤을 샌 아버지가 맞는 아침의 대기에는 그처럼 가늠하기 어려운 힘겨운 슬픔이 배어있다. 오즈 영화의 전반을 지배하여 정물을 통해 환기되는 이 슬픔의 정서는 무엇인가를 견디고 기다림으로써만 완성될 수 있는 시간 그 자체의 직접적인 계시이다. 결국 다시 대면 할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새벽을 마중하기 위해, 아니면 대자연의 바람 속으로 흩어지기 위해, 삶과 인간에 대해 그 어떤 질문도 유보한 채 조용히 앉아 자기 자신을 기다리는 것이다. 어떤 우여곡절로 인해 빠져나와 버린 일상적 동요가 눈 덮인 산과 고요한 나무를 닮아가며 대자연의 질서로, 빠져나갈 수 없는 그 무지막지한 방정식의 한 항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스스로를 추스른다. 본질적으로 시간은 기다림(혹은 망설임)을 통해서만 체험된다. 특정 대상에 대한 상대적인 기다림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기다림, 즉 자신의 몸뚱이와 과거전체를 직접 짊어지고 견디지 않으면 안 되는 삶의 번민과도 같은 절대적 기다림이다. 오즈의 정물의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정물은 시간-지속-기다림 그 자체인데, 그 기다림에는 하이쿠(俳句)에서의 기레지(切字)가 자아내는 일본 특유의 영탄(詠歎)―지성의 질문과 부정을 통해 존재의 이해에 도달하려는 서구의 지성과는 대조적인―에 비견할만한 삶과 존재의 긍정이 주는 슬픔이 있다. 정물은 그 자체 견디어내는 시간, 견딜 수 없는 내적 동요나 감당할 수 없는 근원적 슬픔을 삭이는 시간이다. 그것은 개인이 의식적으로 경험하는 가장 순수한 형태의 지속-이미지이다. 세계에 대해 심오한 질문에 봉착한 네오리얼리즘의 사유의 시간과는 다르게, 오즈의 정물에는 하염없이 바라보아야만 하는 인간의 말할 수 없는 안타까움과 애달픔의 시간이 있다. 설탕이 물속에서 녹아내리고 물이 끓어 수증기가 피어올라 대기에 퍼질 때까지(『창조적 진화』), 어머니라고 하는 한 사회적 존재로서가 아니라 한 여자 한 인간 나아가 자연이라는 존재론적 수용에 도달할 때까지(『가을햇살』), 죽음을 자연의 한 흐름으로 수용함으로써 슬픔을 가눌 수 있을 때까지(『동경이야기』, 『동경의 황혼』), 소유하거나 지배할 수 없는 욕망이 있음을 깨닫고 그것을 포기할 때까지(『부초이야기』, 『가을햇살』, 『꽁치의 맛』), 개인은 기다림 속에서 자신을 초월한 ‘비개인적인 시간’에 도달한다. 이것이 바로 ‘순수한 관조의 시간’이 최종적으로 이르게 될 일원론, 베르그송주의자 들뢰즈가 말했던 ‘지속의 세 번째 단계’, 즉 물의 흐름과 새의 비상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자기 자신까지도 포함하는 단 하나의 시간이다.

우리는 내면화된 구조와 법칙에 따라 사물을 인지하고 느낀다. 지각과 행동의 대상은 현실적 필요와 흥미를 반영하는데, 우리는 실재의 다양한 측면들 중에서 흥미롭지 않거나 불필요한 것을 지각에서 제외한다. 자연에 대한 이 편협한 이해는 사회 경제적 이해관계라든가, 이데올로기적 믿음, 심리적 요구에 따라, 삶의 요구에 적합한 것만을 수용한 결과이다. 우리는 필연적으로 ‘판에 박힌 것’만을 지각하고, 또 그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진부하고 판에 박힌 연쇄에 균열이 생긴다면 어떨까? 네오리얼리즘의 풍경이나 오즈의 정물의 중요성이 여기에 있다. 그 이미지들은 일상적이고 도식적인 진부함 속에 난입한 단절과 균열이며, 행동적 현실의 파탄과 붕괴이다. 그러나 한편 그 균열은 편협한 행동-도식이 놓쳐버린 어떤 실상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지각 가능한 현실을 넘어서고, 행동보다 더 근원적이고 강렬한 어떤 것의 현시. 실상이란 판에 박힌 인식에서가 아니라 도식화할 수 없는 어떤 것 속에서, 낭만주의자들이 숭고한 자연과의 대면에서 그랬듯이 능력의 불일치와 부조화 속에서, 능력들 각각이 해방되어 반(反)기능적으로 작동하는 과정에서, 즉 알려진 것 외부의 잠재성 속에서 탄생한다. 네오리얼리즘이나 오즈의 이미지는 모두가 잠재적 세계, 즉 가시적이고 결과적인 것 ‘이전’ 혹은 그 ‘이후’의 저편에 은밀하게 내재하는 투시적 세계를 향해있다. 그것은 ‘견딜 수 있는’ ‘허용 가능한’ 지각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이미 습관적 도식이 되어버린 망막의 기능을 효력 정지시켰을 때에만 희미하게 현시되었다가, 우리가 생활의 요구로 돌아갈 때 다시 꺼져버리는 과잉의 세계이며 절대적 타자성의 세계이다.

따라서 실상의 투시는 이미지의 존재론이 정치학으로 나아가는 길과 멀지 않다. 베르그송의 말처럼 이미지란 실재 그 자체이다(“우리는 사물이 있는 바로 그곳에서 사물을 지각한다”). 이미지가 기만적이고 실상을 왜곡하는 부정적 존재라면, 그것은 이미지로부터 흥미로운 것만을 취해 이미지 전체가 아니라 부분만을 수용하는 우리의 판에 박힌 지각과 행동의 악습 탓이다. 거기에는 그 악습이 초래하는 삶의 진부함을 필요로 하고 이용하고 조장하는 현실적 이해관계 혹은 권력이 있다. 삶의 기만을 꿰뚫고 그로부터 단절하려면, 그 무엇도 덧붙이거나 빼지 않은 채 이해관계와 권력이 덧붙여 놓은 색채들을 소거시키고 비워내어 진상을 투시할 수 있어야 한다. 권력과 기만에 맞선 피로한 투쟁이나 구호 그리고 그 힘을 얻기 위한 휴머니즘적 감동으로는 충분치가 않다. 그것은 어쨌든 또 하나의 행동성으로 뒤섞일 것이고, 나아가 또 다른 진부함의 상태로 떨어져 버릴 테니까. 결국 진정한 이미지는 물질과 공간의 도식으로부터 시간을 해방시킬 때에만 현시될 것이다. 이미지가 단지 감각적 운동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지 않아도 혹은 가시적으로 말을 하지 않아도, 담장에 기대어 서 있을 때조차 그 고유의 존재성을 보존하는 자전거처럼, ‘읽혀지는 것’이 되어야만 한다. 읽는다는 것은 사물로부터 잠재적인 것, 즉 과거 전체를 끄집어내는 활동이다. 읽기는 사물의 현재성을 과거로 되돌린다. 그리하여 우리의 현실적 필요 때문에 지각이 왜곡시킨 존재의 고유한 시간을 되찾는 일이다―물론 읽기에 머물지 않고 쓰기(아상블라주)로 더 나아가야겠지만 말이다. 이미지는 그 전체가 읽혀져야 하고, 이 독서 자체가 바로 이미지에 지속을 부여한다. 이것이 들뢰즈가 베르그송주의 전체를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것, 세계에 ‘문학성’을 부여하는 직관의 잠재적 역량―신비주의적 극단으로 치달을 수도 있음을 배제하지 않는―이 아닐까?

감각과 운동을 넘어 참된 시간의 이미지로 열리는 잠재미학의 여러 단계가 존재한다. 우선 이미지는 공간, 감각, 물질의 관계를 벗어나야만 하고, 나아가 운동성으로부터 단절하여 바라보는 단계가 필요하며, 필요와 관심과 이해관계에 따라 이미지의 부분만을 지각하는 편협한 단계를 지나 해방된 지각으로 이미지 전체를 읽을 수 있는 단계로 나아가야만 한다. 지속과 시간의 진정한 이미지는 우주가 책이 되어가는 과정과 나란히 공존한다. 그러나 독서는 진부하고 판에 박힌 세계로부터 실상을 추출해 낼 수는 있지만, 그것 자체로는 판에 박힌 세계의 해방일 수는 없다. 그를 위해서는 다른 역량, 즉 무한한 관계 이미지의 구성으로 사유를 전개하는 쓰기의 역량과 연계되어야만 할 것이다.
. . . (원본 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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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학부생들에게 벤야민(Walter Benjamin)의 잘 알려진 논문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The work of art in the age of mechanical reproduction)을 읽히고 있다. 이 텍스트 말고도 학부생이 읽기에는 다소 버겁다 싶은 텍스트를 여러 개 선별해 놓은 상태이다. 어떤 점에서 이 시도는 모험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발표자를 비롯해서 여러 학생들이 읽는 가운데 어려움을 호소한다. 글의 이해를 위해 마르크스(Karl Marx)나 미학 전반에 관한 배경지식을 필요로 하는 그 내용은 고사하고, 영문 해석조차 버거워 하는 것 같다.


수년 전부터 느끼고 있는 징후가 하나 있는데, 학생들의 독서 능력이 가파르게 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지식의 문제이기도 하고, 또 언어(모국어, 외국어)를 처리하는 기술적 수준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텍스트를 대하는 그들의 태도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 내 생각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벤야민이 자신의 글에서 그렇게 썼듯이, 현대의 기술매체가 젊은 학생들의 지각패턴을 급속도로 바꾸어 놓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의 대상이나 이미지에 오랫동안 머물지 못하는 이 신 인류학적 지각 패턴의 문제는 점차 독서가 불가능해지고 있는 상황으로 치닫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벤야민은 기술복제라고 하는 사회 역사적 환경이 "현대적 위기"를 반영하고 있는 동시에, 그와는 반대로 낡은 이데올로기들 즉 마르크스식으로 말해 신비적 외피를 "청산"해 줄지도 모를 것이라고 아주 "모호하게" 믿고 있었다. 물론 정치적인 입장에서 보면 있을 수 있는 믿음이다. 확실히 테크놀로지는 새로운 지각을 탄생시켰고, 그 지각은 낡은 가치들을 낯설게--너무나 낯설어서 비판적이 되기 보다는 오히려 혐오의 감정이 들게 하는--바라보기 시작했고, 그럼으로써 신비적 외피에 감싸여 몽롱한 미학적 분위기에 취해 있었던 서구인이 그리고 최근엔 동양인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한편, 벤야민 자신이 지적했던 그 위기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도 알고 있던 바, 존재와 사물로부터 "실질적 지속"(substantive duration)이 제거되는 문제, 다시 말해 어떤 실제적 존재가 태어나서 그 자신의 고유한 시간(역사성) 속에서 살아가는 동안 서서히 축적되어 그의 실질적 존재성을 증언해 줄 수 있는 "증언적 가치"(testimonial value)가 그 존재로부터 제거 되는 문제는 어떻게 된다는 말인가? 존재를 증언해주고, 그것의 긍정성을 확보해주고, 궁극적으로 존재의 본질을 보존하는 것은 다름 아닌 그 실질적 지속이다. 그리고 윤리적 관점에서 볼 때, 그 실질적 지속이 윤리적 판단의 근거로서 유효할 수 있도록, 그것을 현시하는 능력이 바로 독서(reading)가 아닌가? 벤야민이 이 사실을 감안하여 말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현대적 테크놀로지가 사람들의 지각에 끼친 영향은 낡아빠진 상부구조를 청산할 수 있는 정치적 가능성 보다는, 오히려 독서능력의 박탈이 더 크지 않을까 싶다. 새로운 형태의 독서 테크놀로지가 있다는 말일까? 아니면 독서를 하지 않아도 되는 새로운 삶의 방식이 있다는 말일까?


그 어느 때 보다도 독서가 필요한 시대이다. 냉소적이 되어가는 정서를 바로잡기 위해. 그리고 더 본질적으로는 빼앗긴 시간을 되찾기 위해.

Posted by hu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