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시와 처벌』에서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는 인간의 몸에 실행하는 다양한 권력의 테크놀로지와 권력을 생산하는 기계들을 열거한다. 그의 책은 주로 17세기와 18세기의 문서들(책이 아닌 다큐멘터리들)을 세분화하여 분류하고 이를 기반으로 세기들의 권력 양태를 폭로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대상을 다루는 그 방식과 태도는 아이러니하게도 18세기적이다. 18세기가 개인의 몸에 그랬던 것처럼, 18세기를 세분화하고 개별화하는 그의 방식은 바로 18세기, 즉 그 대상을 닮아있다. 이 분류학자의 지루한 반복의 고통에 수반하는 인내와 절제의 심층에는 고집스러운 투쟁의 광기가 있다.
 
통제와 규율은 시대에 따라, 맥락에 따라, 그리고 그 방식에 따라 질적으로 다르다. 현시대의 예로도 충분히 예시가 가능한—물론, 그 차이를 나누는 것이 더 중요하겠지만—현대적 권력의 발생적 뿌리랄 수 있는 18세기적 규율은 이전의 시대와 견주어도 그 강제력의 양이 모자람이 없다. 오히려 그것은 더욱 더 포착하기 어렵게 무의식적이고 비가시적이 되어 지배와 통제를 보편적으로 도식화 한다. 권력의 도식적 보편화 또는 보편적 도식화. 이것이 계몽주의와 합리성이라는 이름으로 이데올로기 국가장치들 속에서 실현되어온 "정치적 해부학"(political anatomy)으로서의 규율이다. 권력의 정치적 해부학 즉 규율은 몸을 물리적, 기능적, 질적으로 분해한다. 힘과 특질을 개별화하는 해부학적 파편화에 의해 몸은 세련되고 다루기 쉬운 레고블록(Lego block)이 된다. 마음대로 처분하거나 다룰 수 없는 덩어리로서의 아날로그적 신체가 디지털화된 입자들의 소외된 연합으로 변형되어, 잘게 부수어지면서 동시에 재배열되고, 재배열되는 동시에 잘게 부수어지는 가상적 역학이 군대, 학교, 교회, 병원, 감옥 등, 모든 사회적 장 속에서 잠재화되는 것이다. 이로써 몸을 폐지하고 추방하고 격리하여 인격적으로 가해지던 전근대적인 처벌양식 대신에 몸을 교정하고 교육하고 훈련하는 비인격화된 근대적 규율방식으로의 전환이 일어난다. 나병에 대응하는 국가의 집단화 충동이 페스트에 대한 개별화 충동으로 전환되었던 것처럼, 권력은 전체, 공동체, 집단화의 패러다임에서 개인, 원자, 개체성의 효율적 테크닉으로 조직화한다.

이에 따라 규율적 통제의 변별적 특징들을 간략히 지적해볼 수 있을 것이다.
(1) 규율적 통제는 그 규모에 있어 미시적이다. 통제의 규모는 하나의 덩어리로서의 몸 전체의 수준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통제는 몸 자체가 아니라 몸이 자아내는 질적 변화들로 세분화된다. 전 시대의 구금이나 추방, 학살, 수용과 같은 몸의 “도매처리”(wholesale) 대신에, 기능들 혹은 메커니즘(움직임, 제스처, 태도, 속도 등)에 따라 몸은 잘게 나뉘어 질적으로 부분화된다. 강제력의 미시적 형식을 통해 몸은 “소매”(retail sale)로 다루어지는 것이다. 이로써 몸의 개조가능성 혹은 교정가능성을 전제로 훈련과 같은 페다고지(pedagogy)의 산업-정치적 형식이 새롭게 등장한다.

(2) 규율적 통제는 그 대상에 있어서도 이전 시대와는 구분된다. 통제의 대상은 행동의 표현적 요소나 언어적 측면이 아니다. 몸가짐에서 느껴지는 군인다움이라든가 민첩함 또는 학생의 행동거지에서 보이는 그의 태도와 같은 것을 교정하여 이상적 자태를 조형하는 문제가 더 이상 아닌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몸의 기호와 조형이 아니라 움직임의 효율성 그리고 그 효율적 경제를 실현하기 위해 몸을 어떻게 내적으로 조직화할 것인가에 있다. 내적 조직화가 목표로 하는 것은 이상적인 인간이나 탁월한 개인이 아니라, 비인격적이고도 합리적인 최대 효율성이나 최대 생산성이다. 행동의 결과주의에 대한 이러한 열망은 인간의 몸과 그 행동을 기능적 사물로서, 즉 습관적 자동화의 수단으로서 확립한다. 벽돌쌓기공학(Bricklaying Ergonomics)이나 테일러주의(Taylorism)와 같은 보다 산업-집중화된 몸의 조직화는 이미 일상적 규율화 속에서 다져지고 있었던 것이다. 현대적 몸이란 다름 아닌 경제적-효율적으로 분절된 신체를 의미한다.

(3) 통제의 양상 또한 전 시대에 비해 새롭다. 산출된 결과를 중요시 하는 저러한 행동의 결과주의와는 반대로 통제 방식에 있어서는 중단되지 않고 지속적이다. 즉 행동이 산출한 결과보다는 그 과정 전체가 감독되고 통제되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것이다. 규율에 따라 조직화된 행동 자체가 이미 감시의 과정을 실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벨트시스템과 같은 기계나 새로이 발명된 기구에 달라붙은 몸, 개별적으로 구획된 공간에 배치된 몸, 세분화되어 명시된 시간표에 따라 움직이는 몸, 엄격하게 수행되는 의례(ritual)를 따라 주체(권력)를 내면화하는 몸, 이렇게 몸 마디마디에 가해지는 규칙과 규약과 코드를 통해, 다시 말해 시간과 공간과 운동의 전 영역에 스며든 분할의 코드화에 의해 행위 과정 자체 내에서의 매 순간의 익명의 감시가 “작동”한다. 이것은 특정 인격에 의한 혹은 특정 권력에 의한 감시의 실행이 아니다. 팬옵티콘(panopticon) 시설 내부에 배치된 개인이 자신 안에 “감시자/감시대상의 구도”로 분열되어 예속상태를 스스로 실천하듯이, 움직임 자체가 바로 감시기능의 자동적 가동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지속적이고, 이 지속성 속에서 다루기 쉬운 몸은 쓸모가 있으며 쓸모 있는 신체는 다루기 쉬워야 한다는 “순응성-유용성”(docility-utility)의 도식적 상호관계가 형성된다.

(4) 규율은 몸의 자의적인 소유가 아니다. 그것은 몸을 마음대로 독점하고 전유하는 관계에 근거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규율적 몸은 완전한 물리적 소유물인(재산으로서 마음대로 처분과 양도가 허용된) 노예의 몸과는 다르다. 노예의 몸은 (주인의) 가시적인 폭력에 노출되어 있으며, 신체의 독점권만큼이나 그에 따른 비용을 초래하는 몸이다. 또한 그것은 세분화되어 있지 않으며, 삶 전체에 걸쳐 장악된 무제한적 지배의 관계에 속하긴 했지만, 개인들의 성향이나 변덕에 따라 행사되는 폭력으로 인해 일관성이 비교적 약했다. 반면 규율은 막대한 비용이나 무자비해 보이는 폭력이 없이도, 몸을 물리적으로 또는 서면상 소유하지 않고도 일관적이고도 유연하게 효용성의 효과를 낼 수가 있다. 심지어 규율은 개인으로 하여금 통제와 예속을 자발적으로 원하게 한다는 점에 그 세련됨이 있다.

(5) 규율은 계약에 근거한 일시적 지배가 아니며 토지라든가 생산물을 매개로 이루어지는 간접적인 지배가 아니다. 그것은 봉건적 예속관계와는 다르다. 봉건적 예속은 몸의 지배라기보다는 지대와 공납과 같은 노동 산물의 지배이며, 주종관계를 확인하는 관례적이고 형식적인 징표들을 통해서만 확인되는 간접적인 지배이다. 이와는 달리 규율은 매개되지 않은 몸에 대한 직접적 지배의 형식을 띤다. 그것은 우리가 눈을 감고 있는 동안에도 작동한다. 그것은 사물화에 기초하고 있지만, 근본적으로 사물적 관계를 넘어서 있다. 사물을 넘어서는 사물성, 이것이 현대적 규율을 통한 지배이다.

(6) 현대적 규율통제는 종교적 금욕주의에서 실천하는 유형의 규율과도 다르다. 수도사들의 금욕은 무엇인가를 생산 하거나 힘과 기술을 증대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다. 베버(Max Weber)가 언급했던 탐욕의 고도화된 형식인 부르주아식 금욕주의(inner-worldly asceticism)와는 달리 그들의 금욕주의는 물질적 욕구와 부의 가차없는 포기를 통한 육체의 해방을 목적으로 한다. 절제와 금욕을 통해 효용성을 포기하는 종교적 규율은 이차적인 동기를 가지지 않고 그 자체가 목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도원 내부에 존재하는 복종과 예속의 지배관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규율은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그것을 실천하는 본인의 육체적 정신적 구원(본인에 의한 본인의 지배)을 향해있다. 복종과 효용성의 상호 협착(docility-utility)으로 타자에 의한 신체의 지배, 사용, 그리고 보다 많은 힘과 기술의 증대를 통한 생산성의 최대화가 목적인 현대적 규율통제와는 본성적으로 다른 것이다.

현대적 규율에 의해 조직화된 몸은 비정치화된다. 한편으로 그 몸은 규율적 훈련에 의해 뛰어난 능력과 수완이 탑재되어 효율적이고 경제적인 필요에 적합하게 정향 된 몸이다. 그럼에도 그것은 정치적으로는 무기력하고 역동과 활력이 박탈된 몸이다. 한마디로 경제적 비정치화된 몸이다. 능력과 힘은 있지만 그것의 주체는 아닌 것이다. 현대적 규율은 몸으로부터 그 실체로서의 힘을 소외시킨다. 그리고는 몸으로부터 나올 수 있을 모든 잠재적 역량을 적성, 소질, 재능과 같은 코드화된 능력으로 규격화 한다. 여기서 힘의 양도 혹은 전도가 일어나는데, 마치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과의 소외 속에서 그의 전문지식과 기술이 자신의 지배를 더욱 강화하는 것처럼, 그가 가진 능력은 다름 아닌 그 자신의 예속을 견인하는 추진력이 된다. 이렇게 해서 주권자로서 그리고 계약의 주체로서의 현대인은 국가로부터 권리를 부여 받고, 무리로부터 보호를 받으며, 빵을 위해 회사에 손을 벌린다. 권리와 평화와 빵 아니 국가와 공동체와 회사 그 모든 결과들이 다름 아닌 자신의 힘으로부터 나온 것인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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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계

monograph_column 2011/08/24 17:44

애초의 계획은 이런 것이었다. 우선 6-7개월 안에 번역을 끝낸다. 그리고 1-2개월에 걸쳐 번역본을 두 세 차례 읽어가며 문장을 다듬는다. 그리고 작업 과정에서 작성했던 메모와 노트와 밑줄을 중심으로 이 책에 관한 장편의 해설 에세이를 야심차게 한 편 쓴다. 그래서 마치 야생 동물을 길들이듯이, 이 불친절하고 오만해 보이는 텍스트의 독자에 대한 만행을 누그러뜨려 나긋나긋해지도록 하면, 누구든 쉽게 이해하고 따를 수 있는 중성의 지도가 만들어질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나의 번역작업은 번역 보다는 논문을 쓰듯이 메모와 자료수집에 더 중점을 두게 되었다.

작업이 진행되면서 애초의 계획은 많은 장애를 겪게 된다. 우선 사실상 가장 중요한 돈 문제가 있다. 사회-내-존재로서 나는 ‘이론을 위한 이론’ 부류에 속한 ‘이 책만을 위한 삶’을 고집할 수는 없었다. 이러한 책은 돈과는 무관한 전혀 다른 이유로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돈벌이가 아닌 전혀 다른 이유 때문에 시작한 일은 취미로 해야 한다. 일에 대한 자세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할애해야할 시간을 말하는 것이다. (취미란 왜 항상 상대적으로 적은 시간만이 허용되는 것일까?) 따라서 이 책의 번역 작업, 더 정확히 작업 시간은 취미처럼 진행되어야만 했다. 애초의 계획인 6-7개월은커녕 작업은 더디어지고 길어졌다. 또 사회-내-존재로서 개인적인 소사들은 일의 매끄러운 진행을 방해한다. 경제적, 사회적, 개인사적인 모든 난삽하고 자질구레한 그러나 피할 수 없는 실재들로 인해 미리 결정해 놓은 목적들은 지리멸렬해 진다. 역설적이게도 학문의 순수성은 부의 산물일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이 강하게 들었다.

그러나 작업을 방해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이 책이 재미가 없다는 것이었다. 위의 외적인 요인들은 일을 더디게 할지는 모르지만, 일에 대한 환멸과 태만의 원인은 되지 못한다. 이 책은 사람을 아주 이상하게 나른해지게 하는 구석이 있다. 구사하는 문체의 난해함과 주제의 단조로운 반복 때문인지, 이유를 알 수 없는 환멸과 태만이 바로 이 책의 독자를 사로잡고 있는 분위기이다. 논리적으로 매끄럽게 잘 연결되거나, 내용이 익숙하거나, 어렵더라도 하다못해 뭔가 새로운 것을 배우는 듯 한 느낌만이라도 주었더라면, 원한감정까지 생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원한 감정, 즉 타인에게 원인을 투사한 무능력의 감각이 번역을 하는 내내 나를 괴롭혔다. 페이지를 쭉쭉 나아갈 수 없는 무기력, 어떤 부분은 알겠지만 그 다음 부분은 알 수 없는 끊임없는 단절감, 의미를 쉽게 결정할 수 없는 모호한 정신상태 속에서의 지속의 고통, . . . 이렇게 텍스트를 쥐고 있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면서, 작업은 쉽게 끊어지고, 머뭇거리게 되고, 문장을 구성하는 실제적 행동성의 발랄함은 사라지고, 생각만 한 없이 깊어지면서, 그렇게 늘어난 시간은 텍스트와 독서경험을 나른한 파편들로 만들어 갔다. 쉬운 몇 마디로 요약할 수 없는 총체성 상실이라는 무능력의 감각은 결국 저자에게 투사된다. 역자인 나는 저자의 글쓰기 능력과 이론적 진정성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텍스트를 쥐고 있는 시간이 길어지고, 경험이 파편화 되어가고, 총체성이 상실되는 해체와 파괴의 과정 속에서 무엇이 생산되었을까? 점점 쓸모가 없어져가는 이 책은 도대체 무엇을 생산하는가? 저자가 말했듯이, 다름 아닌 “두통”이 생산되었다. 더 근사하게 말해 지속 또는 시간(과학의 차원이 아닌)의 경험이 생산된 것이다.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에 이 텍스트를 번역하는 과정 자체의 묘사가 이 책에 대한 가장 적절한 묘사이며 규정일 것이다. 독서 자체가 일종의 퍼포먼스이다. 책을 이루는 구성요소들의 다가(多價)적이고 다중적인 모호함, 그리고 그 책을 읽는 매순간의 딜레마, 그 무엇도 확신을 가지고 결정할 수가 없는 텍스트의 의미, 내용과 의미보다는 수단과 형식으로서의 언어 그 자체에 대한 반성, 나아가 읽고 있는 주체인 나 자신에 대한 자기-지시적 사유, 이러한 것들이 바로 마수미가 우화라고 명명하면서 여러 사례들을 통해 드러내고자 했던 잠재, 또는 더 넓은 의미에서의 가상계의 질서이다. 사물이 쓸모가 없어질 때, 다시 말해 모호, 딜레마, 비결정, 자기 반영과 같은 가상계의 내적 질서에 존재할 때, 그것은 다른 어떤 것이 아닌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지시한다. 유용성, 기능, 총체성과 같은 구식의 존재론적 가치로부터의 해방은 사물의 본질(플라톤과 전혀 다른 관점에서) 또는 사물의 직접적 자기-존재의 현시이다. 가상계에서 시간과 그 경험은 직접적으로 현시된다.

현실계-내 및 사회계-내-존재인 독자들께서는 이제 이 책 전체를 통해 다양한 분야(현상학, 생리학, 물리학, 예술, 미디어, 정치, 심지어 스포츠와 연예에 이르기까지)의 저류에 흐르고 있는 가상계, 다시 말해 간극과 미결정성의 지대를 접하게 될 것이다. 현실계와 사회계 내에서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실재를 살아온 우리는 스스로를 지각의 주체로서 정립하고, 우리 앞에 뚜렷한 윤곽선을 내보이는 사물들, 사람들, 이미지들, 세계-내-존재자 모두를 주체에 대한 존재(대상)로서, 또 주관성에 대한 객관적 실체(객체)로서 규정해왔다. 삶의 필요에서 비롯된 이러한 추상화 운동은 존재를 유용성과 기능에 부합하는 것으로 포섭하면서, 모든 “지각 가능한 것만이 존재 한다”고 하는 자의적이지만 확고부동한 현실의 질서를 조작한다.

그러나 지각 가능하고 사유 가능한 현실적 확신은 새로운(혹은 태곳적) 실재로서의 가상계 안에서 생소해지고 모호해지며 확실성을 잃어간다. 저자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현실계를 파고들어, 우리의 지각과 행위 내에서 운용이 가능한 현실적 대상과 사물들에 카오스적 구도를 끼워 넣어 그 단단하고 명확한 윤곽선들을 흐려놓는다. 지각과 사유가 불가능한 그러나 궁극적이고도 실질적으로 내재하고 있는 가상의 지대를 끄집어내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믿고 있는 현실이 얼마나 모호하고 비결정적인 토대 위에 세워졌는지, 두 눈으로 똑바로 보이는 시각적 대상조차, 심지어 우리가 확신을 가지고 명명하는 색 조차 사실은 명확히 결정할 수 없는 불안정한 지대 위에 서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가령, 그것은 객관적 확실성에 기반을 둔 고전과학 내부의 역설적 불확실성의 미시적 지대―프랙탈이나 카오스 등으로 색인되는 양자역학적 대상들―이기도 하고, 일상에서 접하는 미디어 실천들―텔레비전, 라디오, 영화, 인터넷, 하이퍼텍스트, 가상현실, 기타 모든 문자 및 이미지 매체들―을 통해 전달되어 우리의 감각체계를 변형시키는 정동의 운동이기도 하고, 주변공간과 대기 전체를 변조시키는 미세한 진동의 유도체가 되어 우주 전체를 표현하는 표면-장으로서의 몸(과 그 예술적 퍼포먼스)이기도 하고, 한 영화배우이자 국가 원수인 어떤 인물 또는 가수이자 우상인 어떤 인물의 몸 위상학이 현실화하는 잠재적 정치의 지대이기도 하고, 심지어는 TV에서 방영되는 축구경기의 경기장 내에서 실제적으로 움직이는 선수들, 축구공, 심판, 관중들 이전에 그 장을 결정짓는 근원적 잠재이기도 하다. 이러한 것들에 관한 논의는 우리가 알고 있고 믿고 있는 현실의 질서를 무화시키는 새로운 비-구도를 발생시킨다.

이것은 궤변이 아니라, 존재의 실질적 토대에 대한 사유의 결과이다. 저자가 끊임없이 미시물리학, 생리현상학, 그리고 신경생리학 등의 영역으로 파고들면서도 다시 빠져나와 문화학과 철학의 사변으로 되돌아가는 이유는, 과학이 철학의 물질적 극한으로 그리고 철학이 과학의 주관적 극한으로 향하는, 또는 물질과 정신이 상호역동으로 향하는, 철학과 과학의 구분불가능한 모호한 지대를 검토하려는 의지 때문일 것이다. 그 두 극한 지점 내에 있는 문화, 역사, 예술, 정치, 미디어 등, 모든 개별적 실천들이 가상계라고 하는 비물형적 효과의 지대, 무차별적 비결정성의 단일한 판 위에서 형성되는 과정이 우화처럼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쓸모없음을 자랑스럽게 추구하고, 총체적 기능을 파편화하며, 비-의미로써 두통을 생산하는 이 책의 기능과 의미, 즉 메시지는 무엇인가? "현실과 세계는 미리부터 주어지지 않는다". 이 불확실성의 확실성 또는 비존재의 존재성이 함의하는 바, 세계는 주어진 것이 아니라 창조하는 것이다. 주체는 그 자신의 주체성을 창조한다. 말하자면 세계는 그 자신을 생산한다. 과학도 아니고 철학도 아닌, 논문도 아니고 예술작품도 아닌(소설인가? 시인가?) 마수미의 이 모호한 텍스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지점은 다름 아닌 능산적 자연이라고 하는 스피노자주의의 윤리적 개념일 것이다. 나아가 마수미의 텍스트가 질문하는 바를 이렇게 요약해보자: 근원적 환경으로서의 비결정적 실재로부터 결정적 현실과 의미의 주체가 창조되는 것은 어떠한 질적 과정(혹은 추상화 운동)을 통해서인가?

(<가상계>(갈무리, 2011), 역자후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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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접학 또는 근접공학(proxemics)이라는 분야가 있다. 인간들이 의미를 전달하고, 감정을 느끼고, 의사소통을 하는데 있어 공간이 차지하는 영향 관계를 연구하는 분과이다. 커뮤티케이션을 연구하는 쪽에서 언급되는 이론인데, Edward Hall이라고 하는 문화인류학자는 자신의 저서 The Hidden Dimension에서 인간의 소통관계에 따른 거리영역에 대해 흥미로운 구분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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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령, Intimate Distance Zone은 부부나 연인과 같이 육체적이고 실제적인 접촉이 가능한 영역이고, Personal Distance Zone은 친한 친구끼리 사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영역이다. 악수라든가 가벼운 접촉, 혹은 사적이고 진지한 대화가 가능한 영역이다. 이 영역은 육체적인 지배의 한계점을 이루는 공간이기도 하다. Social Distance Zone은 직장이라든가 동아리 집단에서처럼 업무를 처리하고 집단적인 행동을 도모할 수 있는 영역이다. 그에 따르면 이 공간은 집으로 찾아온 우체부와 집주인, 상점에서 점원과 손님간의 소통공간을 이루고 있다. Public Distance Zone은 소통 하기에는 가장 멀고 광범위한 영역인데, 강연이나 연설과 같이 공적인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정도의 공간이다. "영토유대"가 가장 멀기 때문에, 진실과도 가장 거리가 먼 언어를 구사하는 영역이기도 하다.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양태에 따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감각적 반응에 따라 소통이나 감정의 상태가 다르고, 따라서 관계의 형태도 달라지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실험이 있는데, 규모가 서로 다른 공간(상자) 속에 같은 숫자의 쥐를 각각 수용한 뒤에 행동을 관찰했더니, 좁은 공간의 쥐들이 넓은 공간의 쥐들보다 성향이 포악해졌다는 것이다--심지어는 서로 물어뜯고, 죽이고, 증오하고 그랬다 한다. 자기를 보존(?)하기 위해서인지, 가까운 곳에 다른 쥐들이 있을 경우, 공간압력을 받아 위협감을 느꼈다는 것이다. 참 역설적이다. 아마도 도시인들이 시골사람들에 비해 사납고, 포악하고, 적개심이 더 강한 이유도 바로 저와 같은 환경 속에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비좁은 공간, 가려진 하늘, 밀집된 주거공간, 인간을 위해서가 아니라 산업을 위해 구획된 도시공간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포악해지지 않고 살 수 있겠는가?

그런데 한가지 궁금해진다. 왜 그 실험쥐들은 공간압력에 쉽게 순응해서 자기들을 파괴적인 상태까지 몰고갔을까? 공간이 바뀌어 비좁아 졌다면, 자신들의 습성과 관계를 바꾸면 되지 않았을까? 근접공학에서 말하듯이, 공간 구역에 따라 친밀도와 소통의 형태가 달라진다면, 그래서 Social Zone이나 Public Zone이 어떤 우여곡절 끝에 Intimate Zone으로 바뀌었다면, 자기네들의 습성과 관계도 변하면 되지 않을까? 대도시에 사는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대도시에서 포악하고 사납고, 항상 무엇인가에, 타인에게, 화가난 상태에서 살 것이 아니라, 습성과 관계를 바꾸어 버리는 것이다. 우체부와 주인, 상점 점원과 손님, 청중과 연사의 관계가 아니라, 연인이 된다든가, 부부가 된다든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대도시가 사람들을 밀집된 공간으로 내몰고, 그래서 지하철이라든가, 버스라든가, 공원이라든가, 극장이라든가, . . 인간이 사는 모든 영역들이 점점 좁아져서, 타인을 아무리 거부하려고 해도 거부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왔다면, 자기도 모르게 환경에 순응해서 포악해지고 사나워지고 싸울 것이 아니라, 차라리 Intimate Distance Zone에 맞추어 부부가 되고 연인이 되고 친구가 되는 것이다. 만원 지하철에서는 영순씨와 부부가 되어 포옹을 하고, 그 옆에 앉은 영철씨와 의형제를 맺고, 뚱뚱해서 서있기 힘든 광순씨의 애인이 되어 등을 껴안아주고, 공원에서는 철수씨, 용필씨, 순이씨와 자리 문제로 혹은 주차문제로 싸울 것이 아니라 연인이 되어 다함께 잔디밭에서 나체로 뒹굴고, 극장에서는 왼쪽에 앉은 인철씨와 손을 잡고, 오른쪽에 앉은 선희씨와 서로 사타구니를 쓰다듬고, 머리가 커서 앞을 가리는 상철씨와 불알친구를 맺는 것이다. 만인에 의한 만인의 연인! 어려울게 뭐가 있겠는가? 모든 사람들이 부부가 되고, 애인이 되는 것이다. 저 상자속의 어리석은 실험쥐들보다 얼마나 영특하고 합리적이고 깔끔한 생각인가? 위기를 기회로 전환해서, 도시를 냉소의 공간이 아니라 쾌락의 공간으로 바꾸자! 물론 그러려면, 많은 사람들과 절대로 사랑을 못하게 가로막고 있는 현행 결혼제도라든가, 가정법, 민법과 같이 법과 제도부터 바꿔야겠지만 말이다. 그럴 자신 없으면 공간 환경을 바꾸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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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주로 생활하고 있는 건물의 엘리베이터는 두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

하나는 사방의 벽이 거울의 기능을 한다는 사실이다. 아주 잠깐이긴 하지만, 엘리베이터 1평 남짓의 좁은 공간에서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함께 있다고 생각해보라. 낯설고, 멋적고, 어색하기 짝이 없다. 더욱이 이 엘리베이터의 벽은 사방을 반사하기 때문에, 어디에 시선을 두어도 서로를 바라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정면을 보면 그 사람의 정면이 보이고, 측면을 보면 그 사람의 측면이 보이고, 또 모서리 어느 부분을 보면 그의 뒤통수가 보이기도 한다. 내가 볼 수 있는 만큼 나 역시 타인의 눈을 통해 보이게 된다. 이 타인의 지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사람들은 시선을 피해 이러 저리 눈을 돌려보지만, 결코 빠져나갈 수 없는 상대의 시선과 내 시선의 교차로 위에서 헤맬 뿐이다. 어린 학생들 중에는 이 강요스러운 상황에 어쩔줄을 몰라 노골적으로 심경을 드러내기도 한다. 문 앞에 바짝붙어 있다든가, 애써 다른 사람을 무시하려 한다든가, 건방지게 딴청을 피운다든가, 핸드폰을 꺼내 구조의 전화를 걸려 한다든가, 여학생과 함께 단 둘이 갇히는 경우엔 아주 고역이다. . . 어쩌면 이 고약한 환경은 설계자의 계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시선을 회피해가며 서로를 지옥처럼 여기는 사람들에게 교정의 환경을 제공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굳이 일부러 우리의 상황을 의식적으로 확인할 필요가 있을까? 오히려 강요된 환경이 우리를 지옥으로 만들었던 것은 아닐까? 설계자가 그런 의도였다면, 소외를 잘못 해석한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엘리베이터 앞에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으면, 다른 문이 열리려면 한 참을 기다려야 하는데도 서로를 피해 다른 문 앞에 서거나, 아예 뒤로 돌아가 계단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다른 하나는 엘리베이터 문을 여닫는 버튼이다. 이것은 설계자가 아니라 학교 당국, 즉 엘리베이터 운영자와 관련이 있다. 문을 여는 버튼은 정상으로 작동하는 반면, 문을 닫는 버튼은 그 기능이 정지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무리 버튼을 눌러도 문은 닫히지 않는다. 해당 층에서 문이 열리고 나면 미리 기계에 프로그램되어 있는 몇 분이 지나서야 문이 닫힌다. 이 닫힘 기능의 정지는 대단히 불편하다. 목적층이 되어 사람이 나간 후에도 남아있는 사람들은 기계의 작동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약 1분 정도의 시간이 아주 길게 느껴진다. 더군다나 급한 경우엔 더더욱 조바심이 난다. 건물의 사정을 잘 모르는 외부인들은 문이 닫힐 때까지 버튼을 줄창 누른다. 재밌는 것은 기능이 정지되어 작동이 안 되는 닫힘 버튼이 다른 건물의 엘리베이터에 있는 버튼보다도 더 낡아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무엇에 긁힌 자국도 있다. 서울 사람들이 얼마나 급한 성격의 소유자들인지(심지어 학생조차) 알만하다. 그러나 엘리베이터 당국의 이 조처는 나름대로 합리적 고민의 결과로 보인다. 문을 빨리 닫아버리면 여러가지 심리적 경제적 문제가 생긴다. 사람이 나가자 마자 문을 획 닫아버리면 나온 사람은 아주 불쾌해진다. 거부당한 느낌 같은 것을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받았을 때, 크지는 않지만 작은 스트레스가 개인을 갉아먹는다. 쨉도 여러 번 맞으면 한 방보다 크다. 그러나 당국이 이렇게 세심하게 개인의 불쾌까지 고려해서 이런 조처를 내린 것은 아닐테고, 다른 분명한 이유는, 문을 보다 오래 열어두면, 보다 많은 사람들이 탈 수 있기 때문에, 전기세 등 경제적 효율성이 올라가기 때문일 것이다. 이를 생각해서, 사람들은 불편하지만 그다지 문제삼지 않는 분위기이다. 더우기 이제는 익숙해졌기 때문에, 층에서 누가 나가도 서둘러 문을 닫거나, 문이 닫히기를 안달하지 않는다. 활짝 열린 엘리베이터 문 밖을 바라보며 그냥 잠시 동안 멍하니 서 있을 뿐이다.

그것이 익숙해지다보니 이제는 어떤 점에서는 잘 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단 1분 간의 시간이지만, 그 작은 틈 속에서, 막연하지만 인생의 뜻 깊은 어떤 순간을 갑자기 경험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일어날 때가 간혹 있기 때문이다. 막연하지만 말이다.

p.s. 법의 세계는 이러한 막연한 희망조차 불허하는 것일까? 최근에 알게된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있는데, 법원인지 검찰청인지를 들어가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도록 현관문을 거대한 철제 구조물로 조성한 법대 건물의 엘리베이터에는 이 닫힘 버튼을 정지시켜 놓지 않았다. 따라서 이 건물 안에서는 마음대로 엘리베이터의 문을 열고 닫을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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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나 영화 등 예술작품은 두 번 이상 보아야 한다고 흔히들 말한다. 우리의 물리적 생리적 윤리적 한계 때문에, 첫 눈에는 놓치는 것이 너무 많아 전체를 다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번 세 번 이상을 보아야 보다 많은 이미지를 읽을 수가 있고, 또 그러면서 우리는 그 작품들의 새로운 의미들에 눈을 뜨게 된다. 실제로 두 번 이상 보면 그 작품이 새로워진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홍상수의 작품들은 두 번 세 번 네 번 이상을 보아도 새로움이 일어나는 것 같지가 않다. 처음 보았을 때와 두 번 이상을 보았을 때 의미에서나 심경에서나 큰 변화가 없는 것이다. 특별한 의미가 새롭게 태어나는 것도 아니고, 작가의 의도가 다시 보이는 것도 아니고, 놓쳤던 장면조차 다시 보이는 경우가 흔하지 않다. 그의 작품이 어려워서? 즉 감추어진 것이 많아 아직 뭔가가 나오지 않은 것일까? 아니면 반대로, 너무나 쉽고 뻔해서 첫 눈에 이미 다 드러난 것일까? 전자일 수도 있고, 후자일 수도 있다. 둘 모두일지도 모른다.

그의 작품이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단조로운 사건들로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작품 안에 두고 두고 읽어야 할 어떤 의미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가 제시하는 남녀들의 무의식적 의식적 욕망과 충동들이 동일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 형태도 다르고 질도 전혀 다르다. 가령, <강원도의 힘>에서 상권이 여행중에 보여주었던 충동들은 <생활의 발견>에서의 영수의 그것과는 본성적으로 다르다. 또 여인들의 사랑과 분노 그리고 배신 역시 각각의 인물들이 모두 본성적으로 다르다. 그러나 그러한 차이들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들 안에는 자연적 질서의 반복이라는 거대한 자연주의적 주제가 암암리에 내포되어 있기 때문에(가령, 셰익스피어의 소란을 닮은 <해변의 여인>에서의 한 밤의 소란이 해변 밖으로 한꺼번에 쓸려나가 고요해진 아침에 고현정 분이 난간 계단에 앉아 사색에 잠겼다가, 다시 서울로 돌아가기 위해 차에 오르는 놀라운 장면, 또 대부분의 작품에서 인물들이 되돌아가는 장면 등), 그 차이들은 어느새 거대한 파도 속에서 중화되고 단일화 된다. 격동의 시간들은 인간이 아무리 의미의 겹을 쌓으려 해도 결국은 단조롭고 진부한 행동의 아상블라주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아무리 제 각각 날고 기어봐야 멀리서 보면 모두가 언덕을 구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선(禪)의 요소가 지배적이고 또 선을 추구했던 오즈 야스지로(Ozu Yasujiro)의 세계처럼, 홍상수의 화면에는 주름이 없다. 심지어는 주름과 의미를 만들지 않고 지우는 것이 그의 목적이 아닐까 싶을 정도이다. 여러 번을 보아도 새로운 의미가 나올 것 같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오히려 주름이 너무나 거대해서, 마치 지구의 자전 소음을 우리가 들을 수 없듯이 혹은 태산의 느리지만 강렬한 변화를 우리가 알아차릴 수 없듯이, 주름을 식역 저편에서만 어렴풋이 경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산자락에 끼어 있는 화가가 어떻게 산의 거대한 피마준(披麻皴)을 구사하겠는가?

그런데 최근에 홍상수는 자신의 영화에 영화 감독을 직업으로 삼은 인물을 등장시켜, 자유간접화법 형식으로, 마치 자신의 예술관을 변명하고 옹호하는 듯한 제스쳐를 취한다. 일부 비평가들을 의식해서인지, 자신의 자발적 불만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는 자신의 세계에 스스로 회의감을 품었거나, 아니면 회의적 비전을 의식했거나, 최소한 그것을 사색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의 작품들 속에 등장하는 많은 감독(김상경, 김승우, 이선균 등이 맡았던)들이 영화의 의미(목적, 기능 등)에 대해 말했던 내용이 어떤 일관성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그리고 이 일관성은 최근에 개봉한 <옥희의 영화>의 이선균 분이 시사회에서 술김에 잠깐 진담으로 내뱉은, 아주 모호하고도 혼란스러운 그 "깔때기 이론"에서 다소 분명해지고 있는 것 같다. 그 논조는 물론 예술적 편협, 왜곡, 기만 등에 관한 비판을 담고 있다. 그가 일관되게 구사하는 특유한 화면의 질이나 편집의 양태 또한 이러한 논조를 정당화 한다. 그러나 점점 그의 작품들이 전개되어가는 가운데, 한 가지 의아스러운 것은, 위에서 말한 홍상수의 두 세계(개인적 욕망과 충동의 세계와 반복의 세계)의 역학과는 판이하게도, 이 감독들(홍상수 자신일 수도 있는)은 모든 예술적 시도와 창조조차 편협이나 왜곡으로 혼동하거나 그 둘을 동일시하여, 결국은 아이러니하게도 편협과 왜곡을 피하려는 자신들의 노력이 자기도 모르게 영화를 지리멸렬한 몸짓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하고", "만들어 놓는" 것은 아닌가 싶은 것이다. 투명해지고 단순해지려는 시도가 어쩐지 무의미와 공허를 창조하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한편 반대의 측면에서 생각해 보면, 이들의 생각은 영화를 세계와 혹은 사물 자체와 혼동하는 것은 아닌지, 심지어는 영화를 진리나 실체와 혼동하는 것은 아닌지, 결국 영화에 대한 무의식적 과대평가로 인해, 영화와 현실의 혼동에 이르게 되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영화가 현실과 동일한 그 무엇, 혹은 동일한 밀도의 그 무엇이어야 한다면, 무엇 때문에 그 비좁은 프레임과 필름 공간 속에 현실을 담아야 할까?

자신도 모르게 어떤 세계가 우연적으로 그려진 것이 아니라, 그 세계를 의식하고, 일관되게 체계적으로 그 세계를 창조하는 사람을 우리는 거장이라고 부른다. 아직은, 아니 아직도 어렴풋이 보이는 그의 거대한 세계가 자신도 모르게 해댄 어떤 우연한 몸짓이 아니라 의식적 고뇌에서 나오는 것이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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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니 어제, 그러니까 토요일에, 옛날에 알고 지내던 사람들을 만났다. 점심만 먹고 일찍 나오려고 했는데, 예상했던 것과 달리 저녁에 시간이 좀 남았고, 특히 보고 싶었던 반가운 얼굴이 있어, 저녁 내내 수다를 떨었다.

안 만나던 옛날 사람들을 다시 만나는 것은 상반된 감정이 교차한다. 다시 잘 지낼 수 있을까? 라는 관계에 대한 의구심 혹은 바램, 그리고 다른 한 편엔 불안. 서로에게 익숙해 있고, 서로의 주름 속에 숨어있는 것들을 이미 여러번 보아왔기 때문이다. 결국 바램은 상투적인 반복으로 치닫기 일쑤이다. 이 두 가지 반대되는 감정들이 수다를 떠는 내내 서로를 가르고 있는 테이블 위에서 긴장한다.

그러다가 전혀 새로운 이완상태로 가는 대화를 하기도 한다. 가령, 이런 것이다. 요즘 실버타운에 입주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실버타운에 입주하려면, 보통 보증금 7억에 월 200만원. 그 이상이 훨씬 넘는 곳도 있다고 한다. 그곳에 들어가면, 비슷한 노인들끼리 잘 짜인 프로그램과 복지서비스로 여생을 보낸다. 말하자면 천국의 이미지를 돈으로 현실화시킨 곳이다. 물론 저 만큼의 돈을 내야 가능한 얘기다.

뭐 어쨌든 그렇다 치자. 그런데 문제는 이 노인들이 이곳에서 행복하지가 않다는 것이다. 안 보아도 알 수 있을 그 뻑쩍지근한 천국에서 말이다. 그래서 실버타운에 입주한 노인들이 자식의 집에 가끔씩 들렀다가, 갈때가 되면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고집을 부리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가족과 떨어져 남들과 어울리는 것은 젊을 때나 가능한 일인가보다. 나이가 들면 따뜻한 정을 느끼며 살아야 하는데, 남들끼리는 그러기가 쉽지가 않다. 가령, 그들은 서로 마주보고 앉아 누구 자식이 무슨 직업이고, 돈을 얼마나 벌고, 부모에게 몇 번 찾아와 주고,.. 서로 지지 않고 주눅들지 않기 위해 힘자랑, 돈자랑, 자식자랑, 가문자랑, . . . 뭐 이런 얘기들을 하고 있다고. 그래서 자식에게 오면, 그곳에서 알고 지내던 사람들의 흉을 보고 분개하면서, 다시 그 지옥으로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10년이나 더 살지 말지가 코앞의 걱정인 사람들이 사력을 다해 추구하고 있는 삶과 대화의 주제들이 저러한 것이라면, 이들이 살았던 삶과 철학(?) 그리고 그 자식들의 삶이 선연해진다. 보증금은 그렇다치고, 매달 수백만원을 낼 수 있는 노년의 재력가가 되기 위해 살았을 인생 전체, 그리고 틀림없이 자신과 비슷한 삶을 가르쳤을, 불쌍하지 않지도 않고 불쌍하지도 않은, 그 자식새끼들의 삶 전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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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겁고 축축했던 올 여름 날씨처럼, 8월 들어(특히 지난 주와 이번 주) 유난히 내 일상과 주변이 끈적거리고 지겹다는 느낌이 들었다. 말끔히 건조시켜 잊어버리기 위해 광릉수목원을 다녀왔다. 처음부터 계획했던 것은 아니었고, 친구 H와 점심식사 메뉴를 토론하다가 갑자기 내린 결정이었다. 광릉 근처에 유명한 불고기 집이 있다며 H가 부추겼고, 나는, 고작 불고기 때문에 그 멀리 가자고? 그렇게 해서 핑계거리를 급조한 것이 수목원이었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고, 한 번은 가보고 싶었던 것이 이유였다. 이곳은 1주에 단 하루만, 그것도 예약을 통해서만 입장을 허용한다. 서둘러 인터넷으로 입장 예약을 하고는 H의 차에 올라탔다.

구불구불 찾아가지 않고 주로 대로로 다녔기 때문에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초행길이었지만, 갈 때는 내가 운전을 했다. 광릉 지역의 숲에 이르자 국지성 호우가 쏟아져 시야를 가렸다. 숲길이 구불거려 스릴감이 있었다.

수목원 안에 나 있는 숲길과 호수가 차분했다. 비가 내려 습기를 머금은 숲이 여기저기서 안개를 뿜어댔다. 호수의 물안개는 신령스럽기까지 했다. 숲길을 걸을 땐 땀이 났지만, 잠시 앉아 냉커피를 마시는 동안 우람한 나무의 시원한 입김이 몸을 서늘하게 하는 것 같았다. 잠시 눈을 감고 깊은 숨을 내쉰다. 습한 대기에 실린 깊고도 은은한 숲의 냄새들이 뒤섞여 가슴 속으로 들어왔다. 잔잔한 호수, 노니는 물고기, 안개에 젖은 검은 산, 푸르고 푸른 나무와 숲, . . . 모두가 완벽한 하나의 정물(still life)처럼 보였다. 항상 똑같아 보이고 특별할 것 없이 진부해 보이지만, 자연은 인간에게 도시의 진부함이 줄 수 없는 보편적 해방감을 준다. 잠시만이라도 그 안에서 그들 곁에 있다 나오면, 우리는 어느새 그들처럼 무심해지고, 초연해지고, 혼란스러웠던 동요가 가지런해져,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감을 느낀다. 우리를 포함하고, 우리 안에 있는 이 자연으로부터 워스워즈(William Wordsworth)와 같은 몇 몇 낭만주의자들이 "가장 완벽하고도 순수한 이성의 이미지"를 보았던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앉아 잠시 동안 작은 토론을 벌였다. 나와 친구는 서로 반대의 성격이었다. 나는 항상 욕망에 차있고, 무엇인가를 하고 싶어하며, 먼 곳을 주시하는 쪽이었다. 나는 그것을 열정이라고 주장했지만, H는 결핍감이라고 진단했다. 반면 H는 감정의 기복이 심하지 않고, 큰 욕망에 이끌리는 일이 많지 않으며, 또 쉽게 자신의 욕망을 포기할 줄 알았다. 쉽게 쾌활해지는 법도, 그렇다고 쉽게 우울해지는 법도 없었다. 표정에 큰 변화가 없는 H는 미간을 구기며 먼 곳을 주시하기 보다는 평온한 모습으로 자신이 서 있는 바로 그곳을 생각하는 편이었다. 불규칙적인 나의 일상이 항상 "왜?"라는 질문으로 밤을 새우며 허우적거리는 동안, 규칙적이고도 무미건조해 보이는 H의 삶의 관건은 주로 "무얼 할까?"라든가 "어떻게 가야 할까?"에 있어 보였다. 광릉까지 가기 위해 수목원이라는 명분이 필요했던 나와는 달리, H는 불고기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어디든 갈 위인이었다.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고 해서 연연해하지도 않았다. 때로는 사람이 가벼워 보이기까지 했다. 부질없는 큰 욕망을 포기하면 현재의 작은 욕망들이 중요해진다며, 이렇게 부질없는 욕망을 중화하는 법은 유년기부터 터득한 것이라고 H는 자부했다. 나는 그것이 지혜의 결과가 아니라 좌절과 포기의 결과라고 말해주었다. 희망이 실현되지 못하는 일이 반복될 때(특히 유년기에), 우리는 절망감의 충격을 다시 맛보기가 두려워 욕망을 애초부터 피할 때가 있다. 결국 욕망의 중화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삶을 쾌락이라고 믿고 있는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내 말이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욕망을 중화하려는 시도 자체가 욕망이 너무 큰 것이 아니냐고 덧붙이면서. 그러나 H는 채울 수 없는 것을 다 채우지 못해 고통스러워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자신이 에피쿠로스(Epicurus)라도 된 것처럼 역설했다. 그것은 마치 메뉴에도 없는 음식을 주문하면서 식당 주인을 불러 불평하고 타박하거나 요식업소가 갖추어야 할 기본자세를 연설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베켓(Samuel Beckett)의 두 인물 블라디미르(Vladimir)와 에스트라공(Estragon)처럼, 우리는 다소 진부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욕망에 관한 기본적인 두 입장을 대변하는 듯한 포즈로 잠시 동안 서로 대립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 두 입장이 정말로 우리의 상태를 말해주고 있는지도 확신할 수가 없었다. 내가 정말로 블라디미르의 욕망을 대변하는지, H가 정말로 에스트라공의 욕망을 대변하는지, 심지어는 나와 H가 정말로 대립하는 캐릭터인지조차 명확히 말하기가 어렵지 않은가? 오히려 저러한 문학작품이나 철학이나 인류사를 통해 익히 알려진 욕망들을 H와 내가 역할연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토론은 중단되고, 우리는 빗방울이 퍼뜨리는 동심원으로 가득한 호수의 표면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폐간 시간(오후 6시)이 다 되어 수목원을 나와 바로 그 불고기 집으로 향했다. 멀지는 않았지만 지도를 보고 찾아야 했다. 찾기가 쉽지는 않았다. 지도가 정확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식당의 간판이 없었다! 식당을 지나쳐 한 참을 더 가서 막다른 길이 나오고 나서야 길을 잘못 들었음을 알았다. 다시 뒤돌아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를 더듬어 찾아야 했다. 결국 우리는 한참 동안 헤맨 끝에, 주변에 피어 오르는 연기와 고기 굽는 냄새의 진동으로 식당을 찾을 수가 있었다.

식당주인은 우리더러 1시간 반을 기다려야 한다고 의기양양하게 엄포를 놓았다. 더구나 식사도중에 추가로 주문이 안 되기 때문에, 미리 여유롭게 식사량을 주문하라고 권고했다. 손님이 너무 많아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잠시 망설였다. 한끼 식사를 하기 위해 1시간 반을 기다려야 한단 말인가? 이 허름하고 지저분한 재래식 고기 집에서의 한끼를 위해? 예약을 하려면 빨리 하라며 다음 손님을 부르는 주인 때문에, H는 일단 예약을 하고 보자고 서둘러 말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이대로 그냥 가기에는 아쉽다며. 식당 안에서는 변변히 앉아있을 곳도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쫓기다시피 예약을 한 후 밖으로 나왔다.

1시간 반을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며, 당연히 나는 불평을 했다. 식당주인을 비롯하여, 그 식당을 과장해서 홍보하는 풋내기 블로거들이 음식문화를 망치고 있다고.

흔히 맛집이라고 알려져 많은 사람들이 찾는 식당을 가보면, 대부분 식당주인의 오만방자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그들은 손님들의 사랑에 겨워 아무렇게나 해도 사랑이 지속될 것이라고 착각을 하고 있다. 저 고기집의 주인은 간판조차 붙이지 않고, 멀리에서 그곳을 찾는 손님들을 애먹이며 즐거워한다. 애먹는 동안 그 배고픔과 결핍감을 보상하기 위해 손님들이 더 크고 많은 욕망을 자신에게 쏟아 부어줄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이다. 욕쟁이 할머니 식당이 그렇듯이 배짱을 전략으로 내세운 건지도. 추가주문을 받지 않는 것 역시 터무니 없었다. 그것은 마치 부족한 자원을 호들갑스럽게 선점하려고 달려드는 부동산업자처럼, 자신의 필요와 욕망을 과장해서 예측하고 해석하도록 부추긴다. 심지어 소비의 강요이기까지 하다. 결국 멀리에서 온 손님의 대부분은 평소보다 많은 양을 주문할 수 밖에 없다. 또 식사를 위해 식당에서 1시간 30분을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은, 그 식당의 명성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식당 주인의 비양심적인 상술을 보여줄 뿐이다. 그 시간을 기다려야 식사를 할 만큼 손님이 많다면, 식당의 수입은 매우 높을 것이고, 손님들의 사랑에 대한 보답 차원에서라도 매상의 일부를 투자하여 매장을 넓혀 그들에게 갚아야 한다. 그러나 식당은 수 십 년 전에 지었을 법한 판자집 형태 그대로이다. 바닥이며, 화장실이며, 그 모든 것들이 무허가 건물처럼 허접스럽다. 자신을 찾아오는 손님들이 그렇게 오랜 시간 딱히 앉을 곳도 없는 상태 속에서 기다리는 모습을 보며 즐거워하는 부류의 인간이 과연 음식재료는 제대로 쓸지. 욕망을 과장하고 강요하는 주인의 역겨운 얄팍함을 생각 없이 홍보하고 묵인하면서, 사진을 찍어가며 선전하는 블로거와 이를 또 기다리며 참는 일에는 이골이 난 우리들. 모두가 힘을 합쳐 입맛을 떨어지게 하고 있다고.

이 합리주의적 분노와 불평에 대해 H는 결과론적 낙천주의로 일축했다. H의 생각은 아주 간단하고 명료했다. 맛있다고 하니까, 일단 여기까지 왔으니 먹어보자. 아무리 고치려고 해 봐야 고쳐지지 않는다. 힘들게 왜 내가 그걸 비판하고 괴로워하나. 어차피 마음에 들지 않으면 두 번 다시 안 오면 된다. 우리는 밥을 먹으러 왔지 요식업소 감찰을 나온 것은 아니잖아. 그러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평온한 표정으로 근처에 있는 마트에 들어가 애피타이저(appetizer)라며 오렌지 주스 한 병을 사들고 나오는 것이었다. H의 낙천주의는 대식(大食) 취미로 뚱뚱해진 회의론자(agnosticism)의 아이러니를 조금 닮아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H의 기대를 채워주지 못했다. 고기는 식어 있었고, 양도 그리 많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식당 분위기가 어수선하여 맛을 음미할 수가 없었다. 뒤에서 기다리며 앉아있거나 서 있는 사람들, 지저분한 행주를 들고 쟁반을 쨍그렁 거리며 눈치를 보며 부지런 떠는 종업원들, 뛰어다니는 아이들, 뭐가 좋은지 애를 안고 식당 여기저기를 어슬렁거리며 가정적이고 행복한 아버지-남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는 오버쟁이들 . . . . 기대하던 고기 맛도 그다지 훌륭하지 않았다. 직접 식당 측에서 구워서 내 왔는데, 얇은 돼지고기를 살짝 양념을 하고 구워 불에 그을린 맛이 약간 특이하긴 했지만, 너무 달았고, 또 웬만한 고깃집이면 맛볼 수 있는 흔한 맛에 불과했다. 된장찌개가 조금 맛이 있었지만 그 역시 특별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수시간을 기다리면서 기대할 만한 그런 음식이 결코 아니었던 것이다. 공중화장실에서 서둘러 배설하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은 분위기 속에서, 우리의 식어빠진 식사는 10분도 채 되지 않아 끝나고 말았다.

짜증이 난 쪽은 내가 아니라 H였다. 이미 식당 당국의 모든 처사들에 대해 실망한 나는 음식 맛에 대해서도 기대감이 없었기 때문에, 이 좌절된 욕망이 오히려 통쾌하기까지 했다. 식사가 끝나고 평온한 욕망의 중화상태로 앉아 있던 내 앞에서 H는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식당을 둘러 보았다. 수목원에서 H와 내가 서로 대립되어 자신의 욕망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익숙하게 알려진 욕망의 대변인이 되어 논쟁을 벌였던 것 처럼, 사람들은 누군가가 말로 전달해 준 맛을 이 식당에 직접 찾아와, 터무니 없는 기다림과 음식 맛에 대한 자기 암시를 되뇌며 손수 몸으로 미디어를 재연하고 있는 듯 했다. 감각조차 주어진 대본대로 연기가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포만감은 커녕 허기를 느끼며, 우리는 서울로 돌아왔다. 내가 말이 없어서 그랬는지, H는 차선도 자주 바꾸어 가며 평소보다 거칠게 운전을 했다. 비는 그쳤지만 축축해진 아스팔트에서 바퀴소리가 추적거렸다. 서울에 다 올 때 쯤 우리는 그 고깃집을 이미 다 잊어버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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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퍼플코메디(purple comedy)라고 부르고 싶은 <하녀>를 발표한 임상수 감독. 수 년 전 그는 블랙코미디스러운 <그때 그 사람들>을 통해 권력의 이면 아니 정면을 잘 보여주었었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어째서 임상수 감독은 작품 속의 대통령 역으로 송재호 씨를 캐스팅 했던 것일까? 독선적이지만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 이미지가 지배적으로 만들어지고 조작되었던 박정희씨를 닮은 구석이라고는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 배우를 말이다. 예상과는 달리 그 작품에서는 성대모사도 없었고 흉내도 없었던 것이 의아스러웠다.

성대모사와 흉내가 가장 빈번히 그리고 가장 격렬하게 추대되는 곳은 다름 아닌 정치판이다. 그의 흉내를 내며 그 후광에 기생하려는 현실정치인들이 간혹 있었는데, 이들은 한결같이 어떤 사진 하나를 모사하곤 했다. 그 사진은 공공건물이나 학교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동네 이발소에서조차 어릴 적부터 보아오던 것이었다. 한때 얼굴이 약간 비슷하다고 알려진 어떤 정치인은 선거 기간 내내 그 사진의 모습과 똑같은 구도로 카메라 앞에 서서 목에 부목을 한 것처럼 힘을 주고 다니곤 했다. 단정하게 빗어 4:3 비율로 가림마를 넘긴 특유의 각진 헤어스타일, 정면을 보는지 측면을 보는지 아니면 어떤 대상을 주시하고 있는지 조차 꼬집어 말할 수 없어서 뚫어지게 살펴보면 약간 사팔뜨기 끼가 있어 보이는 모호한 시선(이것이 권력이다!), 윤기가 흘러 빛을 반사하는 듯한 이마와 콧 잔등, 살짝 다문 입술과 돌출한 듯한 입, 작지만 단단해 보이는 얼굴 윤곽선, 야무지게 달려있는 귓 볼, . . . 모든 가치들이 융합되어 있는 듯 하면서도 아무 가치들도 없는 듯한 이미지.

임상수 감독이 인물 캐스팅을 그렇게 한 이유가 코메디였기 때문이었을까? 코메디였다면 더욱 더 비슷한 이미지를 도입했어야 하지 않을까? 오히려 원본보다도 더 원본 같아 원본을 능가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더라면, 그 과장과 왜곡이 풍자를 실감나게 했을 것이다. 위에서 말한 그 정치인이 이에 해당한다. 그는 원본을 능가하여 원본을 닮고자 했기 때문에, 즉 그 자신을 지우는 과정이 그를 코믹하게 한 것이었다. 닮아가고자 애를 쓸수록 처음의 의도와는 달리 원본은 희화화의 가능성이 커진다. 어쨌든 임상수의 작품이 일종의 코메디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부적절한 캐스팅의 이유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추측으로 미루어 보건대, 임상수가 의도했던 것은 권력의 '아이콘'은 아니었던 것 같다. 닮은 모습이란 본질적이기 보다는 신비화되거나 주어진 이미지일 경우가 많다. 그것은 복원이라는 목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며, 복원은 반드시 복원해야 할 이유를 가진다는 점에서 본질이나 실상과는 멀어질 수 밖에 없다. 수많은 역사드라마나 상업 주류 영화의 인물들이 중압감 있는 대사와 자세를 취하는데도 불구하고, 그 무섭게 부라리는 눈매 이면에 항상 코믹한 요소를 빠지지 않고 실어나르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이것이 기호로서의 아이콘의 운명이다. 아이콘은 닮음이 아니라 오히려 원본의 부정에 가깝다.

임상수가 원했던 것은 물론 아이콘이 아닌 '권력의 실상'이었을 것이다. 어떤 실상? 다시 말해 어떤 권력? 그가 생각한 권력은 나쁜 권력도 아니고, 포악한 권력도 아니고, 사디즘도 아니고, 잔인한 권력도, 냉담한 권력도 아니다. 비판과 비난을 받는 동안에도 어떤 위대함을 머금고 있는 그런 권력이 아니다. 그렇다고 친숙하고 자상한 권력 역시 아니다. 그런 식으로 극화된 권력이 아니라 찌질한 권력! 이것이 임상수가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즉 어떤 막연한 추상으로서의 권력이 개인을 통해 육화할 때, 아니 개인이 그 권력을 모사하고 재현하고자 할 때, 그것이 얼마나 유형적으로 물화가 되어 지질한 행태들로 변질되는지를 말이다. 그 행태를 열거하기란 얼마나 쉬운가! 건설업계 똘마니들을 법적으로 비호해주고, 그 댓가로 초중고 학부모들이 자식을 잘 봐달라며(아이러니하게도!) 담임선생들에게 주는 용돈보다는 조금 더 많은(학군에 따라 다를 수도 있지만) 금전의 비호를 받으며, 잘나가는 딴따라 여가수를 불러 앉혀 놓고 치마 속에 손을 넣어가며, 양주를 홀짝이며, 술에 취해 풀린 눈으로 징징 거리는, 소위 술집 여종업원들의 용어로 말해, "일반인 보다 더 난해하게 놀아대며," 그 댓가를 물건들로 교환해버리고 마는 찌질하기 그지 없는 권력. 임상수가 본 권력은 코웃음 밖에는 터져나올 수 없는 그런 성질의 하찮은 것이었다. 말할 수 없이 지리멸렬한 분위기의 배우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때 그 사람들>에서는 우스꽝스럽고도 찌질한 권력의 실상이었다면, <하녀>에서의 권력은 직접적으로 모방권력, 즉 흉내와 연기로 재현하는 권력을 향해 있다. 권력의 흉내는 우선 제스쳐들을 통해 육화된다. 미디어에서 그리고 그것을 따라하는 일반인 찌질이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일명 법조계의 제스쳐가 좋은 예이다. 똘마니들 앞에서 비만스러운 커다란 덩치를 이리저리 흔들어가며 걷는다든가, 윗 저고리가 반쯤은 벌어질 만큼 배와 가슴을 떡하니 내밀고 앉아 몸으로 말을 하고 싶어 한다든가,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는 부하 찌질이들을 좌우로 내려다보며 거만하게 훈시를 내리는 포즈를 취한다든가, 손가락질 하나로 사람을 부른다든가. 이러한 모든 양아치스러운 제스처와 포즈는 지배력을 '보여주기' 위해 혹은 '나타내기' 위해 저변화되어 암암리에 '학습받은' 것으로, 마치 신분을 나타내는 이름표와도 같다. 권력을 암시하는 제스쳐를 취하는 순간, 즉 이러한 이름표를 다는 순간, 익숙하게 보아온 어떤 전도가 일어난다. 역할을 부여받은, 그것도 매우 잠시동안, 폼잡고 사진 한 방 박을 새도 없이 임시로 위임된 지위가, 어느새 어떤 힘을 스스로 생산하는 것처럼 보이는 권력이 된다. 권력이란 흉내, 즉 물화된 형상을 통한 연기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소품들, 전시물들, 전리품들 같은 것이 필요해진다. 이정재 분이 홀짝이던 와인이나, 아침마다 두들겨대는 여유로운 피아노, 가정부에게조차 요구되는 하이힐과 정장, 엄격한 식사시간, 널직한 소파와 같은 것이 그것이다. 그러한 소품들은 이정재 분의 우악스러운 눈매나 인상착의, 무엇보다도 부잣집 아들이라는 선천적-사회 계급에서 흔히 느껴지는 코믹스러운 안하무인 무지막지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걸쳐져야 할 예복의 기능을 한다.

권력과 똘마니의 관계는 관력관계가 아니라 계약관계이다. 둘 모두가 계약의 주체가 되어 서로 종속되어 있는 것이다. 위험성의 정도를 따지자면, 실은 그 관계는 뒤바뀌어 있기조차 하다. 말하자면 그들의 관계는 "권력이 똘마니를 비호하는" 구도가 아니라, "물주에게 고용된 깍뚜기 혹은 기둥서방"의 구도와 같다. 스폰서라는 용어가 이를 잘 말해준다. 흔히들 공정하고 자유로운 경쟁을 부르짖으면서도 약육강식의 사회를 묵인하고 따르는 경제적 이율배반 속에서, 사업을 하려면 법의 비호를 받아야 하는데(그런 점에서 법이란 상부구조가 아니라 순수하게 하부구조적이다), 그러려면 법-물리적 수단으로 비호를 해주는 장정에게 술도 사주고 떡값도 주어야 할 것이다. 개인들이 누리는 권력의 실체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잠시 술잔을 기울여 와인을 홀짝이며, 혹은 다리를 뻗고 소파에 누워 있는 동안 두 손을 모아 와인을 따라주는 정장차림의 가정부를 바라보며, 자신이 무엇인가를 닮은 것 같은 느낌에 도취된 쾌감. 힘 혹은 역량이 특정 개인에 의해 물화(物化)될 때, 그것은 권력이라는 이름으로 이렇게 찌질하고도 코믹한 흉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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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을 배치하든, 이미지를 배치하든, 아니면 단어나 소리를 배치하든, 일정한 형식의 배치는 의미를 만든다. 배치하는 어떤 사람의 의지나 바램을 나타내기도 하고, 배열된 것을 바라보는 누군가의 기억을 불러오기도 하고, 그 배치된 특정 모양이 일으키는 어떤 연상으로부터 유쾌함이나 불쾌함을 유발하기도 한다. 나무 아래에 기대어 앉은 사람, 낭떠러지 위에 놓여진 신발, 주먹으로 움켜쥔 붉은 깃발, 머리에 꽂은 꽃, . . . 이 모든 배치들은 특이한 형상과 의미와 정서를 촉발하여, 그로부터 어떤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사물들의 배치는 구성, 이미지들의 배치는 몽타주, 그리고 단어들의 배치를 통사(syntax)라고 하는데, 이 모두는 의미를 일으키는 형식적 틀이다. 즉 우리는 배치를 통해 특정한 관계를 형성하고, 그 관계의 한 당사자로서 혹은 관계를 바라보는 관찰자로서 거기에 자신의 바램을 투사하며 살아간다. 맥루한(Marshall McLuhan) 식으로 말해 메시지를 창조하는 것이다. 이 배치를 통한 메시지를 가장 빈번하게 실천하는 분야는 물론 저널리즘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단지 알려진 사실들만을 종이에 일정한 형식으로 배열만 했는데도, 우리는 그 뉴스가 정치적으로 좌파인지 우파인지, 혹은 반정부적인지, 친미국적인지 등과 같은 시대적 화두를 판단할 수가 있다.

물론 배치가 교묘하여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 교묘함이 더하면 더 할 수록 메시지의 농도는 더 진해지고, 떨쳐버릴 수 없을 만큼 둔탁해지며, 깊숙이 파고드는 무엇인가가 우리의 신체와 관념에 작용한다. 가령, 최근에 주류언론(관치언론)이 자주 사용하는 공포의 배치가 좋은 예이다.


붉은 줄로 표시한 두 기사들은 서로 순서를 바꾸어가며 며칠 동안 등장한다. 이 두 기사의 관계는 물론 "공포"라고 하는 현대적 무의식을 둘러싼 정치적인 문제이다. 배열의 순서만을 바꾸거나 서로 다르게 함으로써, 그 메시지의 방향과 의미는 전혀 달라지긴 하지만 말이다. 중요한 것은 생물학적 공포가 단지 불가피한 재앙 혹은 자연 재해의 이미지로 등장하는 반면에, 그것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회적 대응들의 성격이 암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자연적 혹은 생물학적 재해 그 자체는 정치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면이 덜하거나 거의 없지만, 그것이 사회적 특정 행위들과 연결되면 마치 그 공포가 사회적 행위의 결과인 것처럼 둔갑해버린다. 두 기사가 지속적으로 같이 붙어 다니는 과정에서 우리는 공포의 원인과 결과 혹은 최소한 공포의 강화 혹은 약화의 특유한 관계들을 우리 스스로가 구성하게 되는 것이다.  두 기사 어디에도 서로를 지칭하거나 서로를 언급하는 내용을 찾아 볼 수 없는 경우일지라도, 두 개의 공포가 서로 붙어있다는 것 만으로도 굉장한 자장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다. 그 에너지는 우리의 집단적 꿈과 기억 그리고 거칠고 저속한 이미지의 형태로 우리의 영혼을 잠식할지도 모를 일이다.

이와는 반대로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는 특정 인물이나 사건 혹은 어떤 이미지를 감추면서 동시에 다른 무엇인가를 들추어내기 위해, 두 뉴스의 배치를 멀리에 두는 경우도 있다.

위 쪽에 배치된 기사는 최근에 뜨거운 이슈가 되고 있는 지방행정도시 문제를 둘러싼 여당과 야당의 충돌이라는 정치적 사안과 관련이 있다. 그 충돌의 와중에 여당 측 한 여자 의원을 위시한 몇 몇 의원들이 야당에 유리한 발언들을 쏟아내고 있는 중이었다(그녀는 지방에 행정도시 추진을 반대하거나 7번 기사처럼 수정을 원하는 여당에 반대한다). 그 여자 의원은 현재 여당의 우두머리 격인 행정수반과 대선 때부터 줄곧 반목과 경계를 거듭해 온 터였는데, 계속해서 수세에 몰리다가, 여당이 패한 얼마 전 보궐선거에서 드러난 여론을 등에 업고 세를 모으기 위해 모처럼의 기회를 이용하여 몇 마디를 한 것이었다. 한편 아래 쪽에 배치된 기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그 여자 의원의 부친이다. 그는 수 십 년 전에 오랫동안 군사독재 정권을 지속해 오다가 자신의 부하에게 총을 맞고 죽은 군인출신 대통령이었다. 문제는 그가 일제식민지 시절 일본 사관학교 출신이었고, 그 동안의 조사에 따라 친일인사로 분류된 서적이 곧 출간될 예정이었는데, 여기에 덧붙여 일제에 혈서로 충성을 맹세한 친일행각 기록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그의 친일은 이미 많이 알려져 있었으므로 특별히 놀랄 것도 없음에도, 난색을 표하며 그의 과거를 다루는 기사를 선택하고 배치한 저 능청! 이 배치의 관점은 역사가 아니라 정치적인 것에 있으며, 이로써 언론사가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어떤 메시지, 즉 동떨어져 보이는 두 사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밀접한 관련성을 통해, 헌법 13조 3항에 위배되는 연좌제(緣坐制) 비스무리한 어떤 증오의 도식이 함축되어 있다. 저 배치는 특정 정치인사의 반(反)여당적 일탈에 대한 관치저널리즘의 전형적인 대응이라고 할 만한 것이다. 기사 8번을 위에서 내리누르는 7번 기사와 아래에서 치고 올리는 9번 기사, 그리고 10번으로 연결되는 배치의 미학을 보라!

맥루한에 따르면 현대의 미디어에서 빈번히 목격할 수 있는 미디어구도의 전형이 있는데, "나쁜 뉴스"와 "좋은 뉴스"가 바로 그것이다. 물론 나쁜 뉴스란 열광, 분노, 공포와 같은 집단적 분출을 조장하는 뉴스이다(정치-문화적 스캔들, 재해, 폭행, 끔찍한 일탈에 관한 기사들). 반면 좋은 뉴스는 이러한 황색저널리즘(혹은 붉은색저널리즘)을 미끼로 특정 집단의 메시지(주로 물건을 파는)를 퍼뜨린다. 나쁜 뉴스가 쏟아내는 무섭고 위험한 이미지가 일련의 경고의 기능을 하는 동안 혹은 그 후에, 다른 한편에서는 그와는 전혀 다른 집단과 세력의 천국의 이미지들이 교차평행편집 스타일로 왔다 갔다 하는 것이다. 모자이크 처리된 거친 다큐멘터리 VCR화면을 바라보며 양미간을 구기고 숨을 헐떡거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나 싶으면, 어느새 카메라는 외부소음이 차단된 스튜디오로 들어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깔끔한 용모로 생글거리는 미소 혹은 단호한 표정을 머금은 여자 앵커의 '모범적' 자태를 보여준다(그녀의 자세와 어조와 표정은 해당 언론이 보여주고 싶어하는 도덕과 정신상태 등을 대표한다). 그녀는 아주 대조적인 또 다른 교훈적이고 바람직한 도덕적 실용주의의 세계를 우리에게 소개하기도 하는데, 거기에는 소시민들의 선행과 도덕의 사례들이 간간히 열거되는 가운데, 무엇보다도 그 세계의 정수는 인상 좋은 선한 용모의 배우들이 직접 가리키고 있는 상품의 꿈같은 화사함이다. 이러한 불행과 구원의 교차편집은 어설픈 얼뜨기들을 유인하는 야바위꾼의 상술처럼 펼쳐진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이 화이트저널리즘의 야바위는 집단의 적개심을 필요로 하는 집권세력의 메시지 또한 어김없이 반복하는 것이다.

선택과 배치. 이것이 저널리즘의 형식적 질서이다. 무엇을 선택했는지(이는 취향을 반영한다). 그리고 그들을 어떻게 배치했는지(이는 욕망을 반영한다). 우리가 뉴스를 바라보며 생각하고 찾아야 할 미로는 바로 이 취향과 욕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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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바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성장하는 것? 아니면 과거와 전통과 관습을 보존하는 것? 그래서 한편으로는 풍요와 부의 시대를, 다른 한편으로는 안정과 질서의 시대를 만드는 것? 어떤 점에서 우리 시대에 성장과 보존은 모순처럼 보이면서도 서로 상호보완적으로 엮여있다. 특히 그것이 어떤 소수의 견해를 대변하는 경우라면 더욱 더.  니체(Friedrich Nietzsche)는 『때아닌 명상』(Unzeitgemässe Betrachtungen, Untimely Meditations, 1873-1876)에서, 삶에 도움을 주는 역사의 서술방법을 세 가지로 나눈 바 있다. 역사가 본질적으로 순수한 지식일 수는 없으므로, 역사 그 자체의 세 가지 방법을 언급함으로써, 그는 자연스럽게 현재적 삶의 세 가지 양태를 지적한 셈이다. 그의 말을 따라가보자.

세 가지 관점에서, 역사는 인간의 삶 속에 속해 있다.
(1) 능동적이고 투쟁적인 강자의 역사
(2) 보존하고 경배하고 찬양하는 인간의 역사
(3) 고통 받으며 해방이 필요한 인간의 역사

이렇게 세 가지 관점은 니체가 언급한 세 가지 역사(혹은 연구방법)와 일치한다.
(1) 기념비적 역사
(2) 골동품 애호가의 역사
(3) 비판적 역사(들뢰즈는 미국영화를 설명하기 위해 이를 변형시켜, '윤리적 역사'라고 불렀다)

기념비의 역사는 능동적이고 힘있는 인간의 관점에서 본 역사이며, 그러한 인간을 정당화하는 역사이다. 대단한 전투를 치른 인간, 모범이 되는 인간, 만인에게 교훈을 주고 위안을 주는 인간, 평범하지 않은 인간의 역사, 즉 "쉴러(Schiller)의 역사"이다. 기념비의 역사는 과거와 현재 모든 시간을 정점(culminating point)으로 환원하고, 가장 높은 것의 위대함으로 세상의 구석구석을 설명하려는 야심이다. 따라서 그 정점에 세워진 기념비의 힘과 가시적인 업적의 크기가 과거의 느낌의 정도를 좌우한다.

이러한 역사에서는 사소한 것에 대한 관심이나 꼬치꼬치 캐묻는 습관을 싫어한다. 심호흡을 크게 하고 세상을 보다 통 큰 진보로 고취하는 일에 열중하여, 괜히 어슬렁거리거나 맴도는 게으름뱅이를 싫어하며, 예술의 다성(多聲)과 산만(散漫)에서 쾌락을 얻는 영혼을 경멸한다. 목표도 동기도 양태도 분명치 않은 모호한 행동들이나 사소한 몸짓들, 그래서 열등해 보이는 것들은 보이지도 않고 저 뒤에서 세상 구석구석을 채우고 있기 때문에, 마치 브뤼겔의 그림에 펼쳐진 중층지대처럼, 산 꼭대기의 위대한 기념비 주변에서 구름처럼 육중한 대기를 형성하며, 이 위대함이 불멸로 나아가는 길을 방해하고, 기만하고, 축축하게 하고, 질식할 만큼 가로막고 있다. 따라서 이들을 모조리 거두어야만 한다.

과거가 기념비로 세워진 찬란한 산맥들 즉 위대함의 연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산맥의 정점들이 수 천 년에 걸쳐 서로 유사하고 무엇인가 상통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서로 조우한다고 생각한다. 현대인은 그들을 닮아야 하며, 그들을 모델로 삼아야 한다. 그래서 과거의 위대한 시간이 다시금 태어나 되살아나게 해야 한다. 그러나 니체에 따르면 이 높은 곳에 위치한 "기념비들은 영원해야 한다는" 불멸에의 요구 때문에, 그 산맥 아래에는 높이 오르지 못한 사소한 존재들의 크고 작은 고함과 울부짖음이 있다. 기념비적 역사는 정점에 올라 가장 높이 빛나는 것만이 존재한다고 억지를 부리는 가운데, 그 반대자들이 "그렇지 않아!" 라든가 "기념비는 만들어지지 말아야 한다!"고 목청껏 소리를 지르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의 대단한 업적, 건물, 탑, 깃발들을 우러러 보고 닮아가느라고, 이들은 현재적 삶의 초라함에 대한 비난의 눈총으로 질식할 것만 같아 숨이 차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기념비란 잉여의 울부짖음이다.

이러한 과거인식, 즉 이전 시대의 정전(canon)과 고귀한 것에 열광하는 정신상태가 필요한 이유는, 니체에 따르면, 그로부터 다음과 같은 유추가 정당화되기 때문이다: "위대함이 이전에 존재했다면 현재의 모든 사건 속에서도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유추는 "현재 자신이 어쩌면 불가능한 것을 바라고 있지는 않을까라고 하는 회의감을 불식"시킬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과거는 마치 현재의 마취제 혹은 신경 안정제처럼 작용한다.

여기에 기념비적 역사의 근본적인 모순이 있다. 마취제로서의 과거는 기념비(혹은 그 가치)를 부정한다. 거추장스러운 실재를 경멸하는 위대한 정신만이 살아남아 그들만이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혹은 기념비를 창조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듣지 않을 수 없는 잉여의 울부짖음이 현재적 과거 속에서 제외되어야 한다면, 기념비의 역사적 조건으로서의 고난과 시련과 차이를 동반한(그래서 기념비가 더 값지고 귀한) 진정한 경주, 진정한 전쟁이 어떻게 가능해질까? 이것이 니체의 탄식이다: 똑같은 샘플과 모델로부터 배운 지식이란 얼마나 덧없고 나약한가! 그 유비는 또한 얼마나 부정확할까! 그 비교의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차이가 간과될까! 과거의 특이성이 현재의 일반성으로, 혹은 그 반대로 현재의 특이성이 과거의 일반성으로 얼마나 무지막지하게 억지로 끼어 맞추어질까! 그리하여 그 모든 날카로운 구석구석과 모서리들이 동일한 반복으로 일치되기 위해 얼마나 부서져야 할까!

똑같은 동기와 똑같은 구원자와 똑같은 파국과 똑같이 결정된 간극으로 역사가 되돌아오는 것이라면, 진리는 차이가 중화된 그러나(아니 그래서 더 쉽게) 모방할 가치가 있다고 칭송되는 도상적(iconic) 범례에 불과하다는 것이 니체의 생각이다. 그것은 일반의 박수와 갈채로 승인된 기념비적 '결과'이다. 그럼에도 이 모범은, 그것의 진정한 원인인 잠재적 잉여들의 희생아래, 그들의 울부짖음을 동력으로 하여 산출된 결과이다. 기념비의 역사가 그 근본적 원인과 점점 멀어지기 때문에, 니체는 이를 "결과들의 컬렉션"이라고 불렀다. 민속축제, 종교적 행사, 군사적 기념일, 문화재, 건출물, . . . 이러한 모든 기념비들에 대한 찬사는 결과 그 자체에 대한 맹목적 열광이며, 진취성이라는 이름을 가슴에 떡 하니 붙인 부적이라는 것이다.

눈에 잘 띄는 곳에 우뚝 솟아 올라 모방하고 따를 가치가 있는 것만이 역사책에 쓰여지는 한, 역사는 결코 새로운 것으로 변하지 않으며, 더 아름다운 것으로 재해석 될 수도 없다. 따라서 "신화적 허구"와 구별이 어려워질 것이다. 세상의 자질구레한 모든 것들이 하나의 빛으로부터 파생하고, 그 빛을 닮아야 하기 때문에, 그 빛을 머금은 과거는 우리의 시야를 멀게 하는 해악이 된다. 닮아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거나 닮아야 하는 것만큼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도 없다. 시대정신을 표상하는 상징(인간이든 사물이든)들이 산맥처럼 봉우리를 형성하여 서로 서로 닮은 꼴로 수 천년 동안 이어져 내려왔다는 것을 철석같이 믿는 순간, 현재의 위대한 활동과 포부와 욕망은 기념비라고 하는 과거의 가면과 무대의상에 의해 탄압을 당한다. 니체에 따르면 기념비적 역사란 당대의 힘과 위대함을 혐오하는 열등한 영혼이 그 추한 안색을 들키지 않기 위해 호들갑을 떨며 연막을 뿌리는 과거에 대한 과도한 찬사이다. 이 찬사로부터 역사의 의미가 뒤집힌다: "죽은 자가 산 자를 묻게 하라!"

한편 두 번째의 역사가 있다. 이것은 기념비가 아닌 과거 그 자체를 신봉하는 보수적인 인간을 위한 역사이다. 그는 과거의 경배를 통해 현재의 삶에 감사한다. 향수도 아닌 이 특이한 과거에의 집착은 수 천년 전부터 지금까지 살아남은 증거들을 보존하는 것으로 실천할 뿐만 아니라 후세대에 남겨줄 조건들을 재생산 하는 것을 삶의 과업으로 여긴다. 삶이란 과거에 바쳐진 헌정사 혹은 봉헌물 외에 그 무엇도 아닌 것이다.

관습적이고 전통적인 가치를 옹호하고 강조하려는 이 영혼은 결국 골동품에 대한 사랑의 역사를 배양하기에 이른다. 그에게는 증거가 필요하고, 증거란 직접 잡을 수 있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조상이 쓰던 가구나 조그마한 기구들을 소유하는 것이 그에게는 과거의 영혼과의 교접이며 배움의 의미 그 자체이다. 물건에 사로잡힌 그의 물신주의적 영혼은 과거에 쌓아 올린 벽, 성문, 속기록, 일기, 유물, 풍물, 행위의 수단들, 친숙한 관습들, 태피스트리, 의상, 보석, 개인물건들로 환원된 과거의 시간을 바라보며 잃어버린 흔적의 향기를 느낀다. 뿐만 아니라 그로부터 자신의 힘, 목적, 열정, 어리석음, 나쁜 버릇을 재발견한다. 가령, 니체에 따르면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정신이 이러한 취향과 매력을 대표한다.

이 골동품 애호가의 경배 정신의 가치는 기념비적 역사의식과는 반대로 그 겸손에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튀지 않은 조건들 심지어는 무미건조한 환경들로부터 기쁨과 만족을 느낄 줄 아는 개인이나 집단의 소박한 정서에 대한 이해와 긍정이 이 역사의식의 정수이다. 역사가 대우를 덜 받았던 인종이나 소박한 사람들에게 그들이 살았던 거주지역과 물건들 그리고 삶의 직접적 편린들을 되돌려주고, 그들 자신의 전통을 연결해주고, 그들을 바로 거기에 살게 해주며, 그들을 안주 없는 유랑과 방랑으로부터 막아주는 것만큼 삶에 봉사하는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물론 개인을 집단과 환경에 고정시키거나, 자질구레하고 고단한 일상의 결과들로 환원하여, 그를 어딘가에 뿌리박게 하는 것은 심각한 곡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나름대로 건강하고, 또 어떤 점에서 공동체에 유익한 것이기도 하다. 유목민들이 그렇듯이 방랑과 모험의 결과들을 경험했던 사람들, 조상과 선배에 대한 신뢰를 포기하고 끊임없이 고결한 것만을 쫓아 다니는 경계 없는 코스모폴리탄은 이 사실을 잘 안다. "뿌리에 매달린 나무열매의 느낌, 성장이 제멋대로나 우연이 아님을 아는 행복감"이 무엇인지를.

그러나 골동품 애호가의 역사는 항상 그 비전의 폭이 좁다. 이것이 니체의 생각이었다. 과거 삶의 복원에 대한 물신주의적 열망은 자신이 알고 있는 몇 가지 지식을 너무 가깝게 들여다보고, 그것의 전체적 맥락으로부터 떼어내어 고립시킨다. 이러한 편협하고도 소심한 시야는 서술하고 있는 대상이 가지는 가치의 경중을 시간 전체의 견지에서 판단할 수 없게 한다. 그의 취향에는 모든 것이 귀중하고 똑같이 중요하게 취급된다. 사물이든 사람이든 과거든 각각 공정하고 따로따로 다르게 구별해야 하는데도, 그 가치와 비례에 있어 아무런 차이를 두지 않았기 때문에, 이 또한 기념비적 역사와 마찬가지로 현재의 과거화 혹은 과거의 현재화라는 위험에 노출되어있는 것이다. 그렇게 골동품에 사로잡혀 차이의 힘을 간과하는 개인은 전적으로 자신의 취향의 비례에 의거하여 과거를 들여다본다. 

특이한 비전의 수준에 속하는 것을 무차별적으로 경배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것 뿐만 아니라, 과거의 것에 고착되어 새로이 다가올 것을 거부하고 적대시하는 습관이 감각적으로 굳어지면, 마치 순수지식의 영역에 오래 전부터 안착해 있는 안주인이라도 된 것처럼, 역사는 더 이상 삶에 봉사하기를 멈추고 존경이라는 명목으로 과거를 다루듯 현재와 미래의 더 위대한 삶 조차 박제해버린다. 골동품 애호가의 역사가 더 이상 현재의 생생한 삶에 열정을 불어넣지 못하게 되는 순간 그 자체 스스로 퇴행적이 된다. 그러면 그 경배심 또한 시들어 버릴 것이다. 순수지식의 허황된 그리고 공허한 영역에 안주한 학자들이 존경심이나 경배도 없이 습관적으로 과거의 궤도를 어슬렁거리며 이기적이고 자기만족적인 배회에 인생을 낭비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맹목적인 수집광과 독서광의 불쌍한 드라마, 남이 말했거나 존재했던 모든 것을 모아대는 반추동물의 드라마를 보게 된다. 이러한 영혼은 어딜 가나 곰팡이 냄새를 풍기게 되어있다. 자신의 귀한 재능과 고결한 욕구를 그야말로 낡은 것에 대한 욕망으로 변질시키고, 때로는 너무 깊이 들어가 단지 전기(傳記)의 증거에 지나지 않는 물건더미가 쌓여가는 것에 쾌감을 느끼는 것으로 만족하기 때문이다.

결국 기념비의 역사와 성격이 전혀 다름에도 불구하고, 골동품 애호가의 역사의 심층에는 그와 마찬가지로 삶의 창조적 가능성의 배제가 있다. 골동품 중독 역사관은 "삶을 보존하는 법만 알지, 창조하는 법은 모른다." 그것은 언제나 새롭게 다가오는 것을 평가절하하고, 경배를 미루어두거나 불경스럽게도 거부하기조차 하는 능동적 인간을 불구로 만든다. 심지어는 기념비 역사의 모토인 위대함과 성장조차에도 관심이 없다. 오래된 무엇인가는 항상 불멸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선조들의 관습과 종교적 믿음 그리고 전해 내려온 정치적 권위의 오랜 시간 겪어온 무게와 깊이 그리고 그 동안 받아온 찬탄과 경이의 양이 얼마인지를 상상해 본다면, 그 귀한 것을 새롭고 낯선 것으로 대체하거나 현존하는 단순한 사실처럼 보이는 것으로 환원하려는 시도가 대단히 건방지고 뻔뻔스러워 보이기 때문이다.

니체는 삶에 봉사하는 역사의 세 번째 방식을 '비판적 역사'라고 불렀다. 이러한 글쓰기는 더 이상 과거에의 종속도 고착도 아닌 해방을 욕망한다. 현재의 부당함과 폭력과 오류를 비판하기 위해, 비판적 역사가는 현재를 낳은 과거로 돌아가 그 원인이 되는 싹을 잘라버릴 것을 독려한다. 독자의 전달이 아니라 장본인의 말을 직접 들어보는 것이 생생하리라.

"과거를 깨부수는 힘을 가져야 한다. 살아가려면 과거를 전유하고 분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는 과거를 심판대로 끌고 와서 가차없이 질문하고 비난을 퍼붓는다. [. . .] 과거는 비난 받아 마땅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인간의 과거이기 때문이다. 인간적인 것 안에서 힘과 나약은 언제나 필멸의 운명에 처한 인간사이다. 인간은 언제나 위대한 힘과 인간적 약점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심판이 의미하는 것은 정의가 아니며, 그 판결을 선언하는 자비도 아니다. 그것은 삶 그 자체, 그 희미하고도, 모호하고도, 끊임없는 자기 욕망의 힘, 바로 삶 그 자체 때문이다. [. . .] 그 판결은 언제나 무자비하고 불공정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순수한 지식의 발로에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 . .] 생겨난 모든 것은 파괴되어 마땅하다. 따라서 아무것도 생겨나지 않는 것이 더 좋았을 수도 있다. 살아가려면 상당한 힘이 있어야 한다. 인생이 얼마나 부당한지를 잊으려면 또한 상당한 힘이 필요하다. 루터 자신은 세상이 단지 신의 망각으로 존재했을 뿐이라는 견해를 피력했다. 만일에 신이 "포병부대"를 떠올렸더라면, 결코 세상은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이 같은 삶은 망각을 이용하여 이 망각의 일시적 파괴를 요구한다. [. . .] 과거가 비판적으로 분석될 때, 그 뿌리를 잘라낼 수가 있으며, 모든 경건함을 넘어 나아갈 수가 있다. 그 과정은 항상 위험하다. 심지어 죽을 때까지. 그래서 이런 식으로 과거를 심판하고 전멸시킴으로써 삶에 봉사하는 사람들 혹은 그 시대는 언제나 그 자신이 위험에 처해있고 다른 이들을 위험에 처하게 한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이미 이전 세대의 산물이며, 또한 그들의 오류와 열정과 범죄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 사슬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비록 그 오류들을 비난하고, 우리 자신이 그들로부터 탈피했다고 생각할지라도, 우리가 그들로부터 태어났다는 사실을 빠져나갈 수는 없는 것이다."

기념비적 역사는 과거를 이용하여 정복의 위대함을 설득하고 정당화하는 과거의 현재화이다. 반면에 골동품 애호가의 역사는 과거에 안주하고 과거를 보존하여 현재를 과거의 현재로 만든다. 비판적 역사는 현재의 부당함으로부터 받는 고통을 제거하기 위해 과거를 심판함으로써 과거를 미래의 현재로 남김없이 바꾼다.

우리에겐 업적과 기념비에 대한 두서 없는 열광이 한 쪽을 사로잡고 있고, 개인의 소박한 그러나 맹목적인 순응주의가 우리의 또 다른 한 쪽을 사로잡고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복의 힘도 아니고, 그렇다고 냉소적이고도 비굴한 평화도 아니다. 평화라는 이름조차도 이제는 어떤 구실이 되어버렸고, 기만과 착취의 한 전략이 되어버렸다. 과거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 그것은 다름 아닌 비판이 아닐까? 또한 비판받아 마땅한 그 과거의 수혜자들의 정당성의 단죄와 그에 대한 거부가 아닐까? 수혜자들이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일지라도.

Posted by huun

엄밀한 의미에서 뉴스와 영화를 명확히 구별 짓기는 쉽지 않다.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때와 장소에 따라 관행처럼 시청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이 뉴스 혹은 영화라고 습관적으로 판단할 뿐이다. 어느 쪽이 더 객관적이지도 않고, 어느 쪽이 더 낭만적이지도 않다. 감독들은 아이디어를 뉴스 매체에 의존하기도 하고, 기자들은 영화를 보면서 머릿속에 담아두었던 그림들을 사건에 투사하기도 한다. 뉴스를 보거나 읽다 보면 기자의 내레이션이나 카메라의 구도가 어디서 많이 본 듯한 형태를 취하며 우리의 시야를 짓누른다. 간혹 뉴스를 보다가 이런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저 기사를 영화나 소설로 만들면 어떨까? 그런 생각이 들 때면, 어김없이 보도되고 있는 화면 속의 그 사건-사실의 저편에 있는 더 커다란 어떤 서사나 음모가 화면 밖으로 펼쳐진다. 전말을 이미 다 알고 있다고 느낄 때만큼 의욕적일 때도 없다. 뭔가 새로운 창작물을 만들고 싶어지거나, 열정적인 에세이를 쓰고 싶어지거나, 그것도 아니면 당장에 친구를 불러 술잔이라도 들고 싶어질 때처럼, 우리는 뭔가를 알고 있다는 사실에 쉽게 흥분한다. 그러나 실은 아무것도 모른다면 어떠할 것인가?

지금  내 앞에는 사진 몇 장이 놓여 있다. 최근 뉴스에 보도된 "더블드래곤" 파업 사태를 다루는 인터넷 동영상 기사를, 서버에서 지워지기 전에 컴퓨터 스크린 샷으로 찍어 놓은 것이다. 동영상에서는 카메라가 공중을 활공하며 건물 옥상을 내려다본다. 옥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소요를 따라다니며, 기자는 마치 축구나 마라톤을 생중계 하듯이, 더 정확히는 영화의 내레이터처럼 벌어지고 있는 진상을 조목 조목 되풀이 한다. 컨테이너가 시위자들이 있는 쪽으로 접근했다느니, 쇠파이프로 경찰 한 명을 잡고 마구 내려친다느니, 검은 연기가 옥상 저편에서 솟아난다느니, 폭발물의 폭음이 터지기 시작한다느니, 도망가는 무리를 경찰이 뒤쫓고 있다느니, 이 편 옥상에선 도망가는 무리에 대고 체류탄을 쏘아댄다느니, . . . TV를 보는 우리들은 그 소요와는 무관한 회색천사(흰색과 구분이 거의 안 되는) 마냥 저 연기가 나는 옥상 위의 불행을 멀리 공중에서 바라보며 혀를 찬다. 혀를 차는 순간 쫓고 쫓기는 양자 모두다 무가치하고 편협한 당사자들임이 조용히 선언되고 만다.

 

그러는 와중에 저 영상물에는 무엇인가가, 결정적인 무엇인가가 빠져있는 것이 아닐까 혹은 과도한 무엇인가가 덧붙여진 것이 아닐까 라는 강한 의구심이 떠나지 않는다. 그 의구심을 증명할 수 없을 때,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말할 수 없을 때, 혹은 말해서는 안 될 것 같은 어떤 묘한 분위기가 주변을 사로잡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육체들의 환각과도 같은 소요들 사이에 웅크리고 있는 혹은 그 변두리의 대기 전체에 엷은 어떤 것이 퍼져있을 때, 우리는 막연하고도 무책임한 뉴스 다큐멘터리 영상에서 빠져 나와 소설을 쓰거나 영화를 찍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기업의 노동자도 아닌, 경영인도 아닌, 주주는 더더욱 아닌 내가 저러한 유형의 뉴스를 접할 때, 저 위에서 뛰어다니거나 마음을 졸이며 TV를 바라보는 이들과는 전혀 다른 상상을 하게 되는데, 가령 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SF 전쟁물 혹은 과학기술과 그 영향이라는 주제 하에 괴기물 유사한 영상이 떠오르는 것이다. 기업의 구조조정이나 노동자들의 파업이 SF와 가지는 밀접한 관계는 근거가 없는 얘기가 아니다. 때로는 사회학과 경제학의 담론보다도 더 치열하고 구체적인 재현의 역사가 SF에는 있다. 뤼미에르 형제의 『도살기계(Charcuterie Me'chanique)』(1895) 이후, 한동안 SF의 역사는 그 아류들에 의해 돼지와 개의 수난과 희생을 등에 업은 소시지 가공의 역사(개에서 소시지로, 소시지에서 개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기계와 공장 생산체제 그리고 생명(동물과 인간)의 해소될 수 없는 투쟁의 역사가 있다. 많은 SF의 아류문학 혹은 영화들이 있지만, 기계권의 출발 자체가 가지는 역사적 조건을 생각해 본다면, 결국 SF의 정수는 사이언스의 주체인 자본의 꿈과 소외된 노동(삶)의 전쟁이라는 오래된 마르크스주의의 테제들 안에 고스란히 안착해 있는 것이다. 그리고 포스트모던 시대에 이는 로봇공학과 우주프로젝트에 의해 범우주적 숭고미학으로 팽창하여 sugarcoating 되고 있다. 그리고 점점 짙어지는 그 그늘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의 지각에서 점점 희박해진다.

마르크스주의 미디어 논자들 중 상당수가 형식주의를 비판했던 골자는, 그것이 항상 카메라를 든 사람을 무기명으로 처리하고 만다는 것이었다. 거기서 모든 시선은 비존재적 추상이 될 운명을 피할 수 없다. 누가 바라보는가? 카메라를 든 자는 어디에 있는가? 시선의 무기명 속에서 우리는 이미 카메라의 눈 자체가 되어버린 것은 아닌가? TV와 라디오 혹은 인터넷 매체의 동영상이나 이미지들을 바라보면서, 하지 않으면 안 될 중요한 질문 하나를 잊은 채 우리는 미디어에 뛰어든다. 공중을 활공하며 소요를 바라보고 있는, 천사와도 같은 저 눈은 결코 화면상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마치 우주 밖에서 포착한 위성사진의 미학과 테크놀러지의 결합된 이미지를 바라보며 신기하게도 내가 그곳의 한 지역에 틀림없이 위치하고 있다고 기하학적 확신을 하듯이, 저 화면에서 쏘고 있는 X선 입자들이 우리의 망막과 신경세포들을 반복해서 두드리는 동안, 최면효과와도 같은 총체성의 눈으로 자기를 바라볼 때 만큼이나 우리 자신을 알고 있는 것 같은 희열과 확신에 찬 자기상호적 Cogito. 현대 미디어의 특징은 담론적 상호성(discursive reciprocity)의 부재 혹은 그것이 가시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누구의 말이고, 누구의 시선인지, 담론의 어떤 주체이고 어떤 위치에서, 무엇을 감추려는지,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 주체든 객체든 미디어 환경 하에서의 추상화. 시-감각이 지배하는 포스트모던 기업문화가 발산하고 있는 모호성의 정치학. 그로 인해 미디어와 그 눈을 우리로부터 육탈시키고 그것과 대면하는 어떤 구도를 만들어낼 것, 결국 미디어의 무의식적 주체가 무엇인지를 기를 쓰고 찾아 나서야만 한다.

더블드래곤 사건에서 특이한 것은 기업 혹은 회사가 완전하게 추상적 무형성을 띤 채 우리 앞에 드러났다는 점이다. 틀림없이 뭔가가 벌어지고 있었고, 어떤 가시적인 움직임들이 거기에 있었지만, 그래서 우리는 그 점에 대해 언론 미디어에서 혹은 우리들 서로간에 그 사실에 대해 말을 한다. 실제로 움직임들의 실행자들(주체가 아닌)은 화염병을 들었건, 펜을 들었건, 체류탄 총을 들었건,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대기 전체에 퍼진 회사의 잠재적 파도에 파묻혀 그것을 위해 싸우고 또 돌진한다. 이상하고도 특이한, 역설처럼 보이지만 실은 너무나도 분명하고 단순한 뜻을 가진 "파산을 통한 회생!"이라는 용어가 주는 압도적인 위협 아래. 문제는 저들이 들락거리며 오르락내리락 해가며, 장악하고 빼앗기고, 육체들을 밀어붙이는 공간으로서, 버려진 농지 아니면 공터인 허허벌판에 건설된 저 공장 건물들이 아니라, 숨을 쉬고 있는 동안에도 연기와 체류 살포액보다도 더 짙은 농도의 선언 혹은 확신을 형성하는 음모이다. 저 용어가 주는 압도적인 위력은, 그것이 "완전하고도 합법적인 해고"를 의미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확신하고 있었던 어떤 것, 다시 말해 그들을 존재하게 하고 그들에게 무모함의 용기를 주었던 프롤레타리아적 Cogito가 자신들이 생각했던 그것이 결코 아니었으며, 이제 완전히 종말을 고하지 않으면 안 되게 한 것에 있다.

"파산을 통한 회생"에는 기업 주체(누구지?)의 관점에서 바라 본 두 가지의 교묘하고도 비가시적인 제스처와 전략의 결합이 내포되어 있다. 하나는 파업이 불러올 필연적인 결과를 단호하게 선언하고 그 당사자에게 책임을 '항변'하는 듯한 효과와 아울러 추후의 사태에 대한 경고의 전략이 그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파괴적 결과를 어떤 식으로든 수습하여 정상적인 상태로 복원해야만 한다는 기업 주체의 도의적 의지를 반영하는 것 같은 제스처를 취함으로써 기업의 사회적 기능과 책임과 사명을 실천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대견스럽게 묘사하면서, 비난 받고 책임을 져야 할 우울한 재앙의 뒤에서 무엇보다도 은유가 아니라 실제로 그것이 회생의 한 형식으로 수용되어 미국(GM의 경우)에서 이미 검증된 것으로, 기업이 본질적으로 무엇에 기반하고 있는 것인지를 직접적으로 보여주지만, 위에서 말한 그 묘사가 미디어에 의해 각색되면서 공장이 세워진 평택 지역에 대한 도덕적 공동체적 책임을 떠맡은 기업의 회생이 곧 주민과 공동체 전체의 회생으로 좋은게 좋은거지 식으로 sugarcoating되어 그 본질적 기반에 연막이 뿌려지는 와중에, '파산을 통한 회생'? 그것이 무슨 말인가? 파산신청을 하고 회사의 문을 닫고 일하는 사람들을 해고하면서 도대체 무엇을 회생시킨다는 말인가? 보존되고 살아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라며 까칠하게 찬물을 끼얹으며 궁극적인 질문을 집요하게 던지기도 전에, 내러티브의 반전으로 질문의 요지를 중화하듯이, 과감한 법적 최종결정의 제스처로 그 연막의 뒤에서 약간의 '장치변환' 혹은 '기호들의 변환'(가령, 소유주 혹은 법인을 바꾸는 절차)을 통해 보존과 회생을 도모한다는 명목으로 가벼운 문서 뭉치를 손에 들고 드디어 사무실로 돌진하며 그 실체가 등장하는 바로 그 채권 소유주들의 실질적인 경제활동으로서의 치고 빠지는 전략이 그것이다. 기업이 파산을 해야 한다는 선고를 그 스스로 내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변증법적 양날치기처럼 뭔가를 보존하고 들어올려야 한다는 회생의 원칙을 고수한다는 미사여구로, 파산과 회생의 각각의 책임소재가 원래의 자리에 속한 것으로부터 빠져 나오거나 식별이 불가능해지는 가운데 적절치 않은 당사자들에게 배분되고 있는 것이다: 파산은 파업 주동자들에게, 회생은 기업주체 경영인과 그 소유주들에게.

이 분배는 미디어의 SF분위기 화면 속에서 우리가 흔하게 보아오던 어떤 심리적 구도를 형성한다. 한편에는 약자를 환기하는 희멀건한 피부색에 금테안경을 쓴 착하고 선량한 기업 상인의 이미지가 노동자보다도 더 힘들게 땀을 흘리며 살아가는 상인의 긍정적 실용도덕주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고, 다른 한편에는 작업장 옥상에 올라가 돈을 더 달라고 생 떼를 쓰며 위협과 폭력을 일삼는 빨간 마후라를 두른 영업 훼방꾼들의 저속한 이미지가 건달의 내러티브 비스무리한 상투적인 미디어 구도에 의해 화면 속에서 끊임없이 우리의 주관적 회로를 고착시킨다. 미디어가 주는 메시지는 파업이란 여전히 어떤 훼방, 철없음, 이기심, 그렇기 때문에 결국은 철회될 수 밖에 없는 쥐불놀이 혹은 할로윈처럼 맹목적 연례 이벤트의 이미지일 뿐이라는 점이다. 회생을 염원하는 반복적인 코멘트("과연 더블드래곤이 회생될 수 있을까요?") 속에는 이미 참담한 심정으로 쏟아내는 초과 데시벨의 어떤 비난과 질책이 있다. 한 가지 문제는 폭도들의 출처가 분명치 않은 외부인으로 묘사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회사의 파산을 주도하고 그 법적 소유관계를 기입한 문건을 쥔 기업주체가 아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파산의 원인을 제공한 당사자이며, 청산에서 남은 잔여 자산의 분배 혹은 변제절차의 몫에서조차 우선순위에서 배제될 것이다. 실상 '파산을 통한 회생'의 의미와 가치 역시 이 우선순위에 비례하여 그 양이 달라지는 용어일 뿐이다. 그렇다면 회생의 주역은 누구란 말인가? 그리고 지붕 위의 저들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어디에서 무슨 이유로 날라와 옥상에 뚝 떨어진 숙주들일까? 아무리 하늘 위에서 천사의 총체적 시선으로 바라보아도 숙주들의 전쟁만 보일 뿐, 파산의 주체이자 회생의 주체, 즉 Alien이 숙주들의 배양과 파괴를 통해 보존하고 싶어했던 바로 그 순수생명은 어디에 있는가?

개인에게 있어 돈이란 사물(성)을 추상화하는 가장 보편적 형식이다. 행복이든 사랑이든 삶의 활력이든 이러한 추상적 가치들은 사물 그 자체로부터는 발생하지 않는다. 물질과 사물에 둘러싸인 우리들은 어떤 식으로든 그들로부터 추상적 보편성을 끄집어내야 할 것이고, 그럴 능력이 없다면, 사물 그 자체를 하나의 추상적 가치로 만들 필요가 있다. 먹을 수도 입을 수도 사용할 수도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더 보편적 실재인 냥, 우리는 사랑과 행복과 능력을 무한하게 약속해줄 것처럼 보이지만 매번 우리를 빠져나가는 보편적 대리물로서의 화폐를 욕망한다. 화폐에의 욕망이란 사물의 무한한 되돌아옴을 보증해주는, 고갈되지 않는 사물의 샘을 소유하는 길이다. 물건이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추상적 가치 자체라고도 할 수 없는 돈은 그런 식으로 의심되지 않는 가치로서 우리의 무의식이 되는 것이다. 파산을 통한 회생에서 우리가 목격한 것이 바로 기업과 기업주체 그리고 우리의 이러한 추상적 관계이다. 회사는 터전이나 특정한 형태의 삶의 장소가 아니라, 자본과 이윤의 이름으로 모든 사물적 관계를 무한히 가능하게 해주고 지역사회 전체를 구원해 줄 것처럼 약속을 해주며, 여기저기로 숙주들을 찾아 떠도는 이해 당사자들의 보편적 화폐이며 순수생명을 닮았다. 이를 온전히 보존하는 것 만으로도 우리는 성공적인 경제와 성공적인 (생명)윤리의 달성에 버금가고("과연 더블드래곤이 회생될 수 있을까요?"), 그 추상적 교환의 실천 속에서 왔다 갔다 주거니 받거니 하는 동안 어느새 합법적 해고든 경제-합리적 구조조정이든 자장가처럼 파도처럼 진통의 효과를 내며 법인의 이름으로 중화되기에 이른다.

공장에서 돌아가는 컨베이어벨트와 그 앞에 죽 늘어선 숙주들의 그림과 유사하게도 사회 전체의 컨베이어벨트와 그 사이사이에서 부대끼는 숙주들의 그림이 있다. 숙주들은 작업장이든 가정이든 지역사회든 아니면 무슨 무슨 청사든 할당된 공간에 붙박여 있고, 이들 안에서 생명을 키워 살아가는 세계령은 바람처럼 은유처럼 떠돌아다니며 정치적 법적 문화적 숙주들을 찾아 선회를 하는 가운데, 그를 불러들이기 위해 실행의 대리인들 그리고 주술인(株術人)들은 서로 간에 인수, 매각, 합병의 무가치하고도 야만적인 피의 강신제를 치른다. 지방(紙榜)을 대체함으로써 새로운 신주와 제주가 들어서면 이 변태적인 형태변이 속에서 지붕 위의 숙주들은, 매 순간 요철을 바꾸어가며 접속단자를 선회하여 종잡을 수 없는 감기 바이러스와 전쟁을 벌이듯이, 실은 세계령을 마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지되는 적은 언제나 그 대리숙주들 뿐이다. 지각할 수는 없지만 가공할 만한 대기전체의 괴물적 기운이 옥상에서 버티고 있는 배제숙주들에게 으르렁거리며 달려든다. 그 기운을 등에 업고 하이테크 살상 장비들을 장착한 전경과 여타 터프가이 스타일 유니폼의 전사들이 크레인에 매달린 컨테이너를 참호 삼아 화염방사기 모드(제작자 혹은 주문자의 욕망을 반영하는)의 물 대포와 가스를 직격으로 쏘아대고, 제대한지 이십 년도 넘은 중년의 배제숙주들은 그들에 맞서 깡마른 다리로 휘청거리며 돌진과 후퇴를 반복한다. 이 양자진영의 숙주들을 둘러싼 대기에는 타오르는 연기보다도 홀가분하게 여기저기에 공통으로 퍼지는 세계령의 열기가 이들을 압도한다. 물론 대리숙주 뿐만 아니라 실행의 주체숙주들이 있다. 그러나 모두가 나름대로 업주이자 상인이므로 누가 더 주체이고 누가 더 객체인지 분간하기가 어려워졌으며, 완전히 뒤섞여 한 몸에 머리가 둘 이상인 더블드래곤의 이미지로 서로를 잠식하고 서로를 태우고 있는 것이다.

일면 SF는 자본의 꿈 내용으로 보인다. 가령 로봇공학의 후원자이자 수혜자는 자본일 뿐만 아니라, 요제프(Joseph Čapek)이든 카렐(Karel Čapek)이든 차펙 형제가 염두에 두었던 것은 다름 아닌 노동 소외였던 것이다. 아시모프(Isaac Asimov)는 1941년 자신이 정식화한 로봇공학의 원칙(인류를 위한! 인류에 의한! 인류의!)을 도구를 정당화 하는 원칙으로 확대시켰는데, 도구에 관한 이 원칙은 자본의 노동에 대한 무의식적 시선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었다: 도구는 위험하지 않아야 한다! 도구는 효율적 기능을 잃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도구는 망가져서는(friction) 안 된다! 그러나 위험하거나 비효율적이거나 망가진다면 어찌해야 할 것인가? 바로 여기에 더블드래곤 사태가 가지는 어떤 한계점, 즉 우리가 다소 구질구질하게 우정 어린 미련을 두고 티격태격 하기도 했던 주제, 인간과 노동 그리고 인간과 자본 그리고 인간과 인간의 오래된 이상적 연관성의 한계점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왜냐하면 한 쪽에서는 문서를 쥔 희멀건한 범생 스타일의 블레이드러너가 은행 문을 박차고 나와 장부기록 제거를 위해 법원 쪽으로 걸어가고 있는 반면, 다른 한 쪽에서는 무장한 터미네이터가 물리적 제거를 위해 헬리콥터와 컨테이너의 줄타기 활극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차없이 완전하게 제거되는 비참 속에서 마후라를 둘러 얼굴을 가려가며 여전히 자신의 미디어 정체성을 의식하던 배제숙주들은 그 자신의 사회적 본질이 단숨에 드러나는 순간을 목도하게 된다. 도구의 명시적 폐지 그리고 물리적 제거의 법적 근거가 마련되는 순간 벨트시스템을 전환하여 새로운 장착과 생산라인 배열과 같은 트랜스포머식 형태 기능 전환과는 수준이 완전히 다른 방식의 완전제거.  이때 법은 세계령의 가장 막강한 전사가 된다. 왜냐하면 제거가 더 이상 약육강식의 야만이나 약자에 대한 강자의 억지와 폭력이라고 하는 외부적 사안이 아니라 '합의'라고 하는 계약상의 절차로서 우리가 이미 참여하여 서명한 가운데 도출된 결과들을 묵인하도록 하는 것은 다름 아닌 법의 이름으로 실행되는 내적 정당화이기 때문이다.

 

미디어의 화면 속에서 파업은 이제 네트워크로 연결된 기업망과 기업을 위시한 지역 경제망 그리고 기업의 제품을 사용하는 소비자, 그 모두의 심리적 피해와 금융계좌상의 경제적 손실로 완벽하게 공식화되어 버렸다. 이제 비로소 SF가 리얼리즘(어떤 리얼리즘인지는 아직 우리가 결정하기 어려운)의 테마가 되어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왜냐하면 음모는 더 이상 환타지의 주제가 아니라 삶 자체의 현실화 기제임을, 그리하여 그 양자 중 누가 모델이고 누가 모방인지를 구분할 수 없는 실상이 펼쳐지고 있음을 우리가 조금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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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프랑스 파리에서는 도시 현대화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오스망프로젝트'(Haussmannization)가 그것이다. 비좁고 불결한 거리, 낡아빠진 건물, 일관되지 않은 도로망, 비위생적인 상하수도, 빈민가와 같은 전근대적 풍경을 현대식 깔끔함으로 재편하려는 시도였다. 이 살균 프로젝트가 겨냥하고 있었던 것은 물론 파리의 도시화, 효율화, 상업화, 합리화였다. 이로부터 파리는 급속도로 기하학적인 풍경을 갖추어가기 시작했고, 이는 곧 '대로'(Grands Boulevards) 주변의 생활 전반에 속도감을 부여해주었다.

(Gustave Caillebotte, Sur Les Champs Elysees, Boulevard Haussmann, 1880)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효율적 속도화 기획과는 다르게 새로운 형태의 시민집단이 생겨났다.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를 위시하여, 훗날 벤야민(Walter Benjamin), 하비(David Harvey),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 케루악(Jack Kerouac), 그리고 짐멜(Georg Simmel) 등에 의해 이론화되어 잘 알려져 있는 현상으로, 다름 아닌 '산보객'(Flâneur)이다.

이 말은 원래 프랑스어 동사 Flâner의 남성명사 Flâneur에서 유래하여, 산보를 하거나 어슬렁거리거나 배회하는 사람을 지칭한다. 보들레르는 이를 도시경험과 연관하여 사용했다. 간단히 산보객이란 '도시를 배회하고 걸어 다니며 도시 생활을 경험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산보객은 도시의 문화적 현상과 현대성(modernity)을 예시하는 눈금자가 된다.

현대성의 지표가 되는 핵심은 물론 사회 안에서의 개인의 위상의 변화일 것이다. 오스망프로젝트가 예시했듯이, 사회규율이 합리적이고 체계적이 되면서 개인의 사적인 삶과 그 자율성은 사회적 힘에 의해 압도된다. 특히 대도시는 익명의 군중 공동체를 만들어 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군중이란 전통적인 지역 공동체로부터 박탈된 개인에 다름 아니었다. 이들은 결속된 근거도 없이 다만 산업사회의 테크놀러지에 의해 불특정 공간에 배치된 원자였다. 전통을 넘어선 현대적 자유가 한편에 있었지만, 한편에는 불안, 박탈감, 고독, 공허와 같이 삶의 추상적 형식이 가하는 정서들이 이들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Gustave Caillebotte, Un Balcon, 1880)

짐멜이 자신의 에세이 "메트로폴리스와 정신적 삶"(The Metropolis and Mental Life)에서 지적했듯이, 현대성은 새로운 사회적 유대 그리고 타자에 대한 새로운 태도를 창출했다. 개인은 시간과 공간을 이전과는 전혀 다르게 수용하여, 그 기하학적 광경이 말해주듯이, 세상에 대해 '무감동한 태도'를 가지게 되었다. 또한 18세기 이전의 정치적 종교적 경제적 사상적 굴레로부터 벗어난 현대인은, 그 자유를 예증해줄 효율적 생산력을 최대로 하기 위해 19세기가 되면서 노동의 분업과 기능적 전문화를 요구 받는다. 이 전문화는 개인이 완전한 하나의 총체로서 다른 개인에 대하여 절대적 존재성을 가질 수 없게 했다. 현대적 의미에서의 전문성이란 말하자면 불완전한 완전성이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개인들은 서로를 배타적(경쟁)으로 수용하면서, 또 한편 서로에게 긴요한 존재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은 서로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되는 보충적 존재였고, 실상은 고립적이면서도 무리로부터 5피트 이상 멀어지면 불안을 느낄 만큼 고립을 가장 두려워하는 독신자였던 것이다.

익명성으로 보장을 받은 자유의 다른 편에 고독과 우울의 정서가 자욱했던 부르주아 개인들은 자신의 자유를 확인하기 위해 혹은 자신의 우울을 치유 혹은 즐기기 위해 거리로 나와 배회와 산보를 한다. 보들레르를 대표로 하는 이들의 우울은 도시를 단지 생활공간이 아니라 하나의 심미적 대상으로 둔갑시키면서, 메트로폴리스 한복판에 침잠하여 거리를 탐색하고 모던을 관찰한다. 보들레르의 말에 따르면 '보도의 식물학자'가 된 것이었다.

(Gustave Caillebotte, Sur Le Pont de l'Europe, 1877)

그러나 이들은 도시에 감동을 느낀 것이 아니라 무감동하고 냉소적인 관찰자였다. 이들은 산업화가 추구했던 도시의 획일화, 속도, 기계화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견지했다. 19세기 영국의 댄디즘(Dandyism)이 보여주었던 퇴폐 그리고 부에 대한 혐오가 그랬듯이, 이들은 도시적 삶의 일부였고 부르주아의 도시적 우수의 탐닉자였지만, 동시에 그로부터 떨어져서 그것을 바라보고 살피고 탐색함으로써, 그 존재 자체가 하나의 제동(制動)이 되었다. 도시 한복판에서 어슬렁거리는 이들은 그 자체가 하나의 망설임이었던 것이다. 이 망설임 속에는 근본적 동기가 있었는데, 바로 사회 기술 메커니즘이 설정해 놓은 초개인적 균등화로 인한 개인의 존재론적 비하에 대한 암묵적 저항이 그것이다. 벤야민 자신이 이미 한 명의 예증적 산보객이었는데, 그것이 한편으로는 하나의 라이프스타일이었지만, 다른 한편에는 사회에 직접 참여하지 않으면서도 높은 통찰력을 갖춘 부르주아지 딜레탕트를 예시한다고 썼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비록 미완성에 그치고 말았지만 파리의 쇼핑 거리에 대한 식물학자와도 같은 관찰을 감행했던 그의 <아케이드 프로젝트>가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느린 산보와 사색은 순수하게 개인적인 행위지만 초개인적 거리 두기의 효과적 기제이다. 그것들은 대단히 비효율적인 가치들을 생산하면서 소리 없이 효율을 잠식한다. 자본의 붕괴는 공장이나 시장 혹은 현장이 아니라, 공원과 산책로에서 시작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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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러니(Irony)를 수사학적으로 설명한다면, 밖으로 표현된 말(외연, denotation)과 그 말이 뜻하는 의미(내포, 함축, connotation)가 서로 일치하지 않거나 모순적인 관계를 갖는 발화행위라고 할 수 있다.

가령, 18세기 영국의 산문작가 조나단 스위프트(Jonathan Swift)는 당대 영국 사회의 아동 학대와 무관심이 사회적 범죄 차원으로 확산되었을 때, 한 팜플렛을 편집하여 주장하기를, 모든 아이들을 도살하고 요리를 만들어 기근을 해결하자고 하였다.

또 한 예로, 영화감독 이광모는 한국 전쟁 세대들의 참혹하고도 불행한 삶을 멀리서 관조하는 장면들을 찍었는데, 그 제목을 "아름다운 시절"이라고 붙였다.

이와 유사한 예로, 이탈리아의 영화감독 로베르토 베니니(Roberto Benigni)는 나치의 무자비한 유태인 학살을 어린아이의 병정놀이로 애써 해석하려는 아버지의 가련한 노력을 통해 환타지의 무기력함을 비극적 유머로 환기하였는데, 그 제목이 바로 "인생은 아름다워!"(La Vita E Bella)였다.

또 다른 예도 있다. 스탠리 큐브릭(Stanley Cubric)은 <닥터 스트레인지 러브>(Dr. Strange Love)라는 영화에서 원자폭탄의 버섯구름 장면에 "What a wonderful world!"라는 음악을 삽입하였다.

좀 더 직접적이고도 일상적인 예로 돌아와, 보고 싶지 않은 친구를 만났을 때, 우리는 간혹 "너 참 반갑다!"라고 비꼬는 경우가 있다. 또 우리는 간혹 잘난척하는 사람을 야유하기 위해 "그래 너 잘났다!"라고 코웃음을 치기도 한다. 또 부패한 정치인들에게 일반인들은 "훌륭한 분들이야!"라고 조롱하기도 하며, 세태를 풍자하기 위해 한 마디로 "멋진 세상이군!"이라고 내뱉는다. 셰익스피어는 이 분야의 대가인데, 젊은이들의 난삽한 연애 혹은 배은망덕을 풍자하기 위해, 신나는 세상(folly, jolly)이라고 지저귀는 듯한 새소리를 흉내내기도 했다.

이러한 수사적인 테크닉이 바로 아이러니이다. 아이러니스트는 고의적으로 마음속의 의도를 숨기고 그 심중의 뜻을 반대로 표현하여, 표면적으로는 자신을 감추면서도 의도하고 있는 뜻을 더 강하고 날카롭게 암시하는 것이다. 말하고 싶은 진짜 의도는 겉으로 부각시키지 않고 숨어서 암시만 하기 때문에, 비난을 받는 상대방은 아이러니스트의 공격에 왠지 불쾌함에도 불구하고, 공식적으로 따지거나 정면으로 응수하기가 힘든 상황이 초래된다.

아이러니와는 약간 거리가 있지만, 이와 유사한 방식의 독특한 냉소도 있다. 도리스 레싱(Dorris Lessing)의 에세이집 <런던스케치>(London Sketch)를 읽어보면, 고장난 지하철 에스컬레이터에 관하여 시민들이 지하철 게시판에 올려놓은 문구가 등장한다. 그들은 직접 공무원에게 불평을 늘어놓는 대신에, "왜 이 에스컬레이터가 이렇게 자주 고장이 나는지 말씀을 드리죠. 그것은 바로 낡았기 때문입니다!"라고 써 놓았다. 레싱은 이 문구가 영국인들의 특유한 냉소주의를 잘 반영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어느 누구도 저 시민이 쓴 문구를 읽고 에스컬레이터의 고장이 세월 탓이라거나 물질의 산화작용 탓이라고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꽃병이 떨어져 깨져버린 것이 중력 탓이라거나, 꽃병과 지구가 충돌한 탓이라고 말하지 않듯이 말이다. 문제의 직접적 원인과 간접적 원인을 뒤섞어 놓음으로써, 자신이 심중에서 지적하고 싶은 원인(지하철 관계자들의 나태함)을 강하게 부각시킨 저 시민은 수사학적 냉소의 싸늘함을 교묘하게 구사한 사람이다.

드러난 것(외연)과 암시하고 있는 것(내포, 함축)이 서로 모순이 되어 히스테리적이 되거나 혹은 일치하지 않음으로써 변태적이 되면서, 주체의 심중에 의도하고 있는 뜻이 극단적으로 드러나는 것. 이 효과적인 방식을 비유적으로 말한다면 "싸늘하게 상처내기"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냉소란 표면상으로는 초연함에 기초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일본이나 독도에 대한 한국인들의 핏대처럼, 상대를 부정하고 비난하기 위해 전면에 직접 나서서 분노를 표출하는 대신에, 상대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말로 표현된 자신의 견해가 뜨겁고 혼란스러운 감정이 아니라 그 거리만큼이나 냉각된 이성에 토대를 두고 있음을 은근슬쩍 드러내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합리적 정당성이 확보된다고 할까? 아이러니스트의 담론이 격한 분노가 자아낼 수 없는 날카로움과 객관성을 환기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냉각된 고체성 때문이다.

그러나 더 자세히 관찰해보면 냉소는 순수한 의미에서의 초연함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가령, 미친 척 하고 복수를 엿보았던 햄릿(Hamlet)은 냉소의 대가였다. 냉소주의는 초연한 척 함으로써 그 반대의 경우보다 더 커다란 효과를 자아내기 위한 수사적 전략, 즉 방법으로서의 초연함을 연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풍자와 야유의 표면에 드러난 초연함의 유희 아래에는 상대에 대한 강렬한 혐오가 스며들어 있다. 마치 살짝 덮인 살얼음 밑의 뜨거운 용암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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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생긴 이래 권력은 항상 공포를 이용하여 대중 다수를 통제해 왔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공포를 이용하기도 했고, 초자연적이고 주술적인 공포를 이용하기도 했고, 인간에게 보편적인 죽음의 공포를 이용하여 구원과 처벌이라는 허구로 인간을 다스리기도 했다. 어떤 점에서 인류의 역사는 공포와의 투쟁의 역사라고 할 만큼, 인간은 자신을 위협하는 그 어떤 무시무시한 것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느 정도 알게 되었듯이, 인간을 괴롭히던 그러한 공포들은 죄다 우리 자신 안에 있는 무지와 왜곡된 마음 때문이지, 실제로 자연적 공포나 초자연적 공포 혹은 사후세계가 객관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현대가 되면서, 인간은 과학적으로 자연을 보게 되었다. 즉 자연이 살아서 우리에게 벌을 주고 상을 주는 식의 인격을 갖춘 존재로 더 이상 생각하지 않게 된 것이다. 인간은 자연을 객관적이며 수학적으로 파악하였고, 무엇보다도 자연을 사물(things)의 질서로 바라보게 되었다. 그래서 자연은 계산과 예측이 가능한 그냥 사물들의 배열이고 관계일 뿐이다. 물론 자연은 아직도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떤 무시무시한 피해를 준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자연에 어떤 죄를 저질러서가 아니라, 어떤 질서의 변화를 아직 우리가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 데에 기인할 뿐이다. 자연의 공포는 우리의 죄나 부도덕이나 사악함에 대해 하늘이 내리는 벌이 아니라 단지 재해이고 재난일 뿐이다. 자연을 맹목적으로 믿지 않게 되자, 우리는 자연으로부터 공포를 물리칠 수 있게 된 것이다(이 몰-공포가 우리를 더 파멸시키는 요인이기도 하지만).

따라서 어떤 점에서 과학적 지식의 진보는 무엇보다도 인간이 공포를 이용한 정치적 탄압으로부터 해방되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자연이나 초자연적 혹은 사후세계를 운운해서는 더 이상 공포감을 줄 수 없고, 유식하고 두려움이 없는 사람들은 더 이상 시키는 대로 복종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현대는 새로운 형태의, 더 많은 종류의 공포를 탄생시켰다. 다른 인종에 대한 공포, 다른 국가에 대한 공포, 다른 계급에 대한 공포, 다른 인간에 대한 공포, . . . 이들은 모두가 적에 대한 공포이며, 이는 다름아닌 차이에 대한 공포이다. 차이에 대한 공포는 우리를 자기중심적으로 고립하게 하고, 불화를 삶의 조건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나와는 다른 존재를 불편해 하는 우리의 삶은 항상 불안하고 무섭다.

현대 산업사회는 인간이 살면서 필요한 물건만 대량 생산한 것이 아니라 아이러니 하게도 빈곤에 대한 공포 역시 대량생산 하였다. 굶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공포가 백화점 쇼윈도의 휘황찬란한 상품들의 퍼레이드 가운데 대기 전체에 퍼져 있다. 이 공포 덕분에 우리는 하루 10시간 이상을 기계처럼 일을 한다. 일이 보장해주는 먹을 것 때문에 공포가 사라진 것인지, 아니면 정신 없이 일을 하다 보니 잠시 잊어버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상하게도 고된 노동은 우리를 편안하게 해 준다. 편하게 쉬는 것이 오히려 불안하고 무섭다.

이 뿐만이 아니다. 최근 들어 인류는 핵의 공포, 범죄의 공포, 미국 발 테러의 공포(즉 테러의 테러)에 휩싸여 있다.

과학이 진보하고 현대적 생산방식이 우리를 자연으로부터 어느 정도 해방시킨 지금에도, 여전히 공포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 지금은 초자연적이고 종교적인 공포가 단지 개인적으로만 잔존하고 있지만, 여전히 사회적 정치적 공포는 대중 다수를 사로잡고 있다. 그리고 그들을 사로잡는 공포들 대부분은 여전히 어떤 보이지 않는 권력과 특정한 세력의 허구의 산물이다.

지난 주 까지만 해도 우리는 보내기 아까운 지도자를 잃어 비통해 했다. 하지만 국화꽃과 향불의 향이 아직 가시지도 않던 와중에, 다른 한 편에서는 그 애도와 슬픔에 찬물을 끼얹듯 서서히 닥쳐온 두 개의 공포가 있었다. 하나는 우리를 단결하게 하는 공포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를 흩어지게 하는 공포이다. 전자는 핵의 공포, 아니 더 정확히 말해 이데올로기 빨갱이 공포라면, 후자는 바이러스의 공포이다. 이들이 점점 강하게 다가온다.

전자는 해방 이후 남한의 태생적 빨갱이 혐오증이 만들어낸 공포이자, 그 이후 군사정권이 가장 심도 있게 창조해 왔던 공포이다. 이 공포는 법에 의해 이미 합법화된 형식의 공포이기도 하고, 심리적으로 볼 때 뿔 달린 괴물의 이미지로 수십 년 간 분위기를 조성해 온 관계로 아주 잘 먹히는 공포 중 하나이다. 이들에 관련된 색과 단어들에 대해 반응하는 몇 몇 사람들을 보면 거의 파블로프의 개 수준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로. 이 공포는 우리 자신이 아닌 적을 향해 단결하게 한다. 즉 흩어지면 죽고 뭉치면 사는 것이다.

반면에 후자는 오래 전부터 인류를 괴롭혀 온 공포이긴 하지만, 현대의 미디어와 결합이 되어 지금은 가장 막강한 신종 공포가 되었다. 이는 어쩌면 다른 모든 공포의 메타포일 수도 있는 공포이며, 그렇기 때문에 SF 영화라든가 소설의 주요 소재가 되고 있는 공포이기도 하다. 그러나 믿지 않을 수 없게도, 이것이 과학적 발견의 산물이라는 데 문제가 있다. 우리는 주술가가 말하는 귀신이나 성직자가 말하는 사후세계를 믿지 않을 수는 있지만, 바이러스를 믿지 않을 수는 없다. 과학이 종교가 된 현대에, 과학자나 의사들의 선언을 뿌리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바이러스는 다른 공포와는 달리 그 실체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아니 과학적으로 존재하는 인류의 보편적 공포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바이러스 역시 정치 권력의 손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권력이 바이러스를 만들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자연적으로 발생한 바이러스 조차 권력은 정치화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바이러스에 대한 인간의 행동을 생각해보라. 바이러스는 가장 훌륭한 통제의 수단이 된다. 바이러스는 우리를 흩어지게 한다. 즉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 바이러스는 인간들의 불신과 냉소와 경계의 천연 자연적 조건 같은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공포를 부추기는 권력은 그 자체가 하나의 공포였다. 적이 쳐들어 오면 내가 너희를 지켜 줄께! 네가 다치거나 나쁜 일이 생기면 내가 막아 줄께! 굶어 죽지 않도록 내가 보호해 줄께! 배려와 보호의 이름으로 사람을 무섭게 하면서, 배려와 보호의 필요를 역설하는 권력은 그 자체가 공포였다. 제대로 된 어느 부모도 아이에게 두려움을 심어가며 자신의 필요를 역설하지는 않는다. 한국에는 두 가지 고질적인 공포가 있었다. 경제라는 이름으로 무의식적으로 내면화한 빈곤의 공포가 하나이고, 체제 안정이라는 이름으로 심리화된 붉은 색에 대한 공포가 다른 하나이다. 전자는 줄곧 있어 오다가 최근엔 더 강화가 된 반면, 후자는 한 동안은 잠잠했던 공포이다. 그런데 최근에 우리는 신종 바이러스라고 하는 또 하나의 생물학적 공포와 아울러, 계속 있어왔던 빈곤의 공포의 강화, 그리고 잠시 사라졌었던 붉은 색의 공포의 귀환, 이 모든 유령들이 다시 떼를 지어 출몰하고 있음을 느낀다. 우리는 이제 초자연적, 종교적 공포를 지나, 과학적 공포, 사회적 공포, 이데올로기 공포, 경제적 공포의 블랙홀로 빨려 들어간다.

비통함이 분노로 치닫기도 전에, 어쩌면 가장 견고하게 뭉쳐야 할 이 때, 한 편에서는 분노의 대상을 엉뚱한 곳으로 돌리고 있는 공포가 북쪽에서 불어오고 있고, 다른 한 편에서는 광장 공포증에 버금가는 위력으로 우리 모두를 각자만의 방안으로 흩어지게 하는 공포가 서쪽에서 불어오고 있으며, 우리 내면에서는 굶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빈곤에 대한 공포가 우리를 다른 생각 하지 말고 작업장으로 가도록 채근한다. 모일 수도 없고 흩어질 수도 없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이 삼중구속 하에서 공포에 질려 새파란 입술로 얼어붙을 판이다. 이 세 가지의 다중적 공포가 재료가 되어 앞으로 어떤 작품들이 만들어질지 주목해보자.

Posted by huun

내가 쓴 글을 칭찬해주시고 직접 추천까지 해주신 선생님이 계셨다. 내겐 아주 영광스러운 일이었고, 당시로서는 학업을 지속하는데 많은 동기를 주신 분이다. 지금은 은퇴를 하시어, 모 신문에서 종종 칼럼을 통해서만 뵐 수가 있을 뿐, 직접적으로 뵙기는 쉽지 않은 분이다. 대내외적 지명도뿐 아니라 한국에서는 쉽게 접하기 힘든 지성의 폭과 깊이, 그리고 흐트러짐 없어 보이는 인격 때문에, 그의 한 마디 한 마디는 학생들의 노트에 그대로 옮겨졌다. 그가 개설한 수업은 말할 것도 없고, 개중에는 작은 식사 모임에까지 가고 싶어하는 이도 있었다. 그의 견해는 우리의 부산스러운 판단력에 일종의 좌표 같은 것이었다.

그분에 대한 나의 존경심이 어떤 종류의 것이었는지 분명히 알게 된 일화가 있다. 우리는 가끔씩 현실정치에 대한 관심으로 특정 정치가들에 대한 그분의 의견을 듣고 싶어하곤 했다. 그럴 때 마다 그 분은 정치의 의미에 대해, 삶과 정치에 대해, 현역 정치가들에 대해, 혹은 옛 세대의 정치가들에 대해 가끔씩 논평을 하곤 했다. 우리는 노무현이라는 정치가가 궁금했다. 당시로서는 예상치도 못하게 대통령이 되어 있던 터였고, 지금 기억으로, 검찰과의 불화 때문에 검사들과의 토론이다 뭐다 해가며 미디어가 시끄럽던 때였다. 그 분은 물론 권위주의나 파쇼정치를 반대했지만, 흔히 중도라는 이름으로 자신도 (알게)모르게 보수주의적 성향이 있었기 때문에(중도란 속물의 혹은 미안한 마음의 말장난일 뿐이다), 노무현을 썩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것이라고 짐작은 했었다. 그러나 그의 반응은 생각보다 훨씬 강도가 쎘다. 단어선택이나 어조는 점잖았지만, 가만히 들어보면 그가 얼마나 낯설어하는지, 얼마나 신뢰하지 않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이유는 많았다. 그는 대체로 노무현이 상징적으로 정치를 한다고 생각했다. 민주, 자유, 특권 없는 평등, 권력타도, 불의에의 비타협, . . . 이러한 구호들이 노무현의 발언에 자주 남발이 되었고, 그는 이를 구체적이지 않은 상징들의 결합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깊은 얘기를 오랫동안 한 것은 아니었지만, 몇 마디의 내용으로 미루어보아, 그의 눈에는 노무현의 정치적 발언, 행보, 판단, 타협하는 방식, 열정, . . . 그 모든 것이 일종의 정치적 쇼맨십과 크게 다르지 않은 종류의 것이었다. 노인인 그가 볼 때(그는 정말로 노인이었다!), 노무현은 치기 어린 아마추어일 뿐이었다. 너무나 뚜렷이 드러나고 드러내는 그 가시적인 열정이 그로서는 지속력도 없고 의미가 덜한 외침일 뿐이라고 말이다. 길지 않은 대답이었지만, 그 견해는 그 동안 내가 그 분께 존경심을 가지면서도 왠지 모르게 한편에서는 동의하기 어려웠던 뭔가를 폭로해 주는 것처럼 보였다.  

돌이켜보건대, 그 깊고도 탁월한 지성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항상 한 가지 빠진 것이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는 믿음이 없었다. 아니 믿음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알듯 모를 듯 믿음을 감추고 싶어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혹은 현실을 전혀 모르고 있거나. 아니 현실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내부에 깊이 들어 앉아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거나. 그는 믿음조차 심미적 형식을 갖춘 하나의 윤리이기를 바랬던 것 같은 의구심이 든다. 젊은 청년의 열정을 무모함에 기반한 서툰 낭만주의로 보고 싶어 했거나, 아니 그 열정이 사악한 제스처일 수도 있다고 의심한 것은 아닌지. 불의의 위험에 몸을 내던지는 행위를 믿지 않거나, 아니 그 전에 우선 팔짱을 끼고는 불의가 무엇인지, 열정이 무엇인지, 믿음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따져봐야 한다고 믿는 아름다운 선비이자 우아한 햄릿처럼. 그는 구체적인 인식과 판단을 주장했지만, 한편으로는 구체적인 것이 어디선가 주어지는 것으로 본 것은 아니었는지. 그래서 그것이 명확한 경험적 형식의 사물로 출현하기를 기다리기만 했던 것은 아닌지. 그와의 대화는 당시에는 의식하지 못했던 어떤 질문을 나로 하여금 항상 품게 했다: "춤을 추시겠다는 겁니까? 말겠다는 겁니까?" 아름다움에 대한 일본인들의 놀라운 열광과 탁월한 심미안을 접할 때, 감탄의 배후에서 간혹 느껴지는 허기가 혹시 이런 종류의 것은 아니었는지. 믿음이라고 불러야 할지 열정이라고 불러야 할지 욕망이라고 불러야 할지 아니면 다른 그 무엇인지는 따져봐야겠지만, 무엇보다도 불신에 사로잡혀 근간을 잃은 냉소적 지성이 도대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 그러한 지성이 할 수 있는 일이 결국은 이미 만들어진 질서 위에서 근엄하면서도 소심한 권위를 치열하게 지키는 것 외에 그 무슨 새로운 것이 만들어질 수 있을지 궁금했다. 내가 우러러보았던 것은 다름아닌 깔끔하게 살균되어 완벽하게 정리된, 냉랭한 몇 권의 책 뿐이었다.

르네상스 플랑드르 화가인 브뤼겔(Pieter Brughel the Elder)의 대단히 흥미로운 그림이 있다. 제목은 <The Procession to Calvary>(1564)이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그림은 십자가 처형을 위해 예수가 언덕으로 십자가를 지고 오르는 모습을 담고 있다. 골고다 언덕 중턱에서 일련의 군대가 그의 고난의 길에 채근질을 하며 동행하고 있고, 저 위쪽으로는 시커먼 까마귀와 검은 먹구름이 자욱한 처형지가 모여든 인파로 인해 둥근 원 모양으로 처형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니까 인류에게 있어 가장 비극적이고 슬픈 사건으로 알려진 기원적 순간의 현장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바램이나 예상과는 다르게, 그 슬픔의 현장 주변에는 시장판 혹은 난장판과도 같은 광경이 펼쳐진다. 슬픔과 탄식에 빠진 마리아와 몇 몇 신자들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무슨 시비가 붙었는지 서로 싸우고 있는 패거리들, 모처럼 생긴 구경거리에 흥분하여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철모르는 아이들과 강아지들, 언덕 여기저기에서는 말 타기 시합, 남의 보따리를 훔쳐 달아나는 도둑, 공놀이, 왁자지껄한 구경꾼들, 풀 죽어 있는 광대, 무엇에도 관심을 두지 않고 땅을 바라보는 노인, . . . 이 광경에서는 도무지 비극적 슬픔이라고는 찾아보기가 어렵다. 무지막지하게 모든 것을 휩쓸어가며 이행해가고 있는 시간 속에서, 단지 한 조그만 동네에서 벌어졌던 스캔들 혹은 구경거리 정도에 불과해 보인다. 희생과 인류의 구원이라고 하는 기독교적 열정에 도리어 찬물을 끼얹어 조롱하듯, 십자가 희생이라는 거대비극은 중심 테마가 되지 못하고 주변부의 일개 소요에 지나지 않게 된 것이다.

브뤼겔의 이 그림에는 한 열정이 현실의 삶에서 어떠한 위상을 갖는지가 잘 나타나 있다. 인류를 구원하겠다, 인간의 죄를 희생으로 상쇄하겠다고 하는 이 종교적 열정. 그러나 무지막지한 현실의 "다양성"은 이 위대한 열정이 실은 세상 모든 것을 대변해 줄 수 없다고 찬물을 끼얹는다. 언덕 끝까지 한 발 한 발 걸어가며 느껴지는 땅의 굴곡처럼, 세상은 너무나 무겁고 두터운 중층 지대로 축적되어 있다, 여전히 아무것도 모른 채 철없이 인생을 허비하는 사람이 너무 많고, 이상한 취향, 별난 성격, 전혀 다른 본성의 소유자들이 너무 많다, 따라서 한 두 마디의 혈서와 다짐 혹은 목청으로는 정리가 되지 않을 뿐더러, 저 산만한 세상을 단숨에 집합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이다. 어떤 점에서 그 야심과 기획은 망상이고 오만일 수 있으며, 한 마디로 말해, "너나 잘하세요!"라고 말이다. 혹은 그 반대일지도 모른다. 당신들의 죄를 갚기 위해 저렇게 피를 흘리며 십자가를 지고 가지 않는가? 지쳐 쓰러진 저 열정에 물 한잔 아니 고개를 좀 돌려 관심을 줄 수는 없는가? 완전히 혼자가 된 인간을 생각해 보았는가? 어떻게 당신들은 그리도 철이 없는가? 그가 죽고 나서야 후회하며 우상을 섬기는 당신들은 얼마나 어리석은 당나귀들인가? 라고 말이다.

브뤼겔이 이 그림에서 무엇을 의도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구원에의 열정을 알아보지 못하는 철없는 세상을 조롱하려고 했는지, 아니면 죄 많은 세상을 구하겠다는 자기확신에 사로잡힌 열정에 찬물을 끼얹으려 했는지는 꼬집어내기 어렵다. 둘 다일 수도 있고, 둘 모두 아닐 수도 있다. 물론 세상은 하나의 목소리로 대변될 수 없으며, 브뤼겔의 그림에는 단숨에 대답할 수 없는 현실의 다중성이 있다. 거기서 한 두 명의 가멸찬 열정이 해답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은 젊지만 얼마나 아마추어적이고, 뜨겁지만 얼마나 무모한가? 어떤 점에서 그 위대한 정신과는 반대편에 서서 세상을 삼켜버리려는 정치적 음모와 파시즘이 그러한 열정의 또 다른 모습은 아니었는가? 하늘을 보라! 당신의 바램과는 달리 임박한 처형 위에는 두렵고 슬픈 먹구름만이 드리워져 있지는 않다. 그 뒤에는 따사로운 햇살의 푸른 하늘이 있고, 또 그 옆에는 짙게 드리운 뭉게구름이 시야를 가리고, 하늘 지평선 저 끝으로 펼쳐진 광활한 대지와 집들과 초목이 현기증 나지 않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열정과 계시가 우리를 대변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사실, 이것이 우리가 처한 불행이다. 우리는 이미 미디어의 의식으로 세상을 볼 수 밖에 없고, 누군가의 눈이 되어 우리의 창을 열 수 밖에 없다.

나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참여정부 내내, 그리고 그가 자살한 오늘까지, 그를 생각하면 항상 브뤼겔의 그림이 떠올랐다. 그가 십자가를 졌다는 말이 아니라(비슷한 용어를 써서 동일한 열광으로 오해 하지는 말자), 한 열정이 세상과 맺고 있는 관계에는 저 그림에서처럼 쉽게 설명하기 어려운 안타까움이 배어있다는 말이다. 열정이 그의 생각처럼 그렇게 잘 통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자신의 뜨거운 견해가 수많은 소요의 일부에 지나지 않을 수 있음을,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그토록 원했던 민주주의란 바로 그 자신의 열정이 단숨에 쉽게 먹히는 것을 방해하는 두터운 다중성에 있음을, 아마도 이것이 정권 말엽에 그가 깨달은 현실일지도 모른다.

그는 물론 인류를 구하겠다는 망상은 없었다. 그의 열정은 순수하게 개인적인 차원의 것이었고, 현실적인 것이었다. 그의 열정이 좌파의 특정 이론이나 당정 차원의 노선, 혹은 집단적 형태의 정치체로 현실화된 것은 아니었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그것이 정치적이고 과학적으로 조직화되지는 못했던 것이다. 이를 과소평가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그의 의지와 열정을 훼손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좌파의 과학적이고 정교한 이론을 잘 알았는지는 따져봐야할 것이다. 그러나 81년 부림사건 이후 노동운동, 6월 항쟁 등 좌파적 경향이 본격화 되어갔다. 그럼에도 좌파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것은 대단히 의아스러운 일이며, 어쩌면 이것이 한국 좌파가 실패할 수 밖에 없는 근본적인 이유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그의 열정이란 조직적인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순수한 것, 비유컨대 때묻지 않은 한 시골청년이 우연히 보게 된 세상의 부당함에 대한 자발적 분노와 패기 같은 것이었다(그렇기에 그 지속력이 경이롭다). 그에게서 풍기는 아마추어적인 분위기는 이러한 청년의 열정에 기인하는 것이지, 흔히 말하듯이 전적으로 능력의 완성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보통은 나이가 들면서 혹은 사회물을 먹으면서 사그러들기 쉬운 그 분노와 패기는, 다행히도 그가 법조계에 그리고 이어 정계에 진출함으로써 어느 정도는 정치적으로 현실화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고 마음을 움직였다.

그는 정치가 야합이나 협잡 음모 혹은 비굴한 타협이 아님을 증명하고 싶어했다. 그는 품위와 위엄을 포기한 그러한 악착스러움이 없이도 성공적인 정치와 삶이 가능함을 보여주려고 했다. 아니 진정한 정치와 삶 그 자체가 바로 그러한 것들을 배제하는 과정임을 말하고자 했다. 그에게 있어 정치는 의로움(義)을 통해서만 완성될 수 있는 것이었다. 도덕성이란 그 결과 혹은 일부일 뿐이다. 우리가 그의 죽음에 가슴이 아프고 눈물이 나는 이유는, 반드시 한번은 청년이었을 우리 모두가 가졌던 그 무엇, 그러나 뒤틀린 삶의 강요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타협하고 굴복하고 비굴해질 수 밖에 없어서 이미 너무 멀리 떠나와 버린 그 무엇, 그러나 여전히 마음 한 구석에 남아 부당함에 직면할 때 강렬히 떠올리지만 아쉽게도 침묵하고 있었던 뜨거운 그 무엇을, 이제는 그 마저도 완전히 송두리째 잃어버린 것 같은 안타까움 때문이다. 청년이었던 우리 모두는 그래서 말할 수 없이 비통하다.

참여정부는 기업이나 언론을 막론하고 특권을 가진 소수와의 싸움, 즉 그들의 부당한 힘과 이익을 약화시키려는 노력으로 점철된 시기였다(성패여부를 떠나서). 따라서 어떤 점에서, 노무현은 상징적 정치를 한 것이 아니라 상징과 투쟁을 한 것이었다. 왜냐면 상징을 만들고, 상징을 유포하고, 상징을 은폐하는 쪽은 항상 그 특권소수였기 때문이다. 특권소수는 자신들의 이익이 커지지 않도록 훼방을 놓는 그를 무척이나 싫어했다. 모르긴 몰라도 노무현 정권이 계속되었다면 밥그릇에 재를 뿌려대는 그를 능히 암살까지 음모했을 만큼 그들의 증오심은 컸다. 이 기간 동안 특권층은 자신의 이익에 닥칠지 모를 심각한 손해가 생존에의 위협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이들의 싸움은 일종의 생존투쟁 같은 성격을 취했고, 그 만큼 대립은 악랄한 형태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일환으로, 그들은 그의 품위를 훼손시키고 싶어했다. 말투라든가 출신이라든가 심지어는 두 부부의 학력까지 운운하며, 오히려 자신들의 천한 근성을 드러내곤 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부도덕과 탐욕에 대한 그의 혐오에 찬 비난에 자존심이 몹시 상했고, 똑같은 방식으로 그에게 되돌려주고 싶어 했다. 그래서 제 아무리 잘난척하는 노무현도 결국은 자신들과 다르지 않은 일개 탐욕의 모리배일 뿐임을 증명하기 위해, 자기들끼리 천박한 루머를 퍼뜨려가며 악인의 소설을 쓰고 증거를 찾아 나섰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정치라는 것이 원래가 의롭지 않은 것, 탐욕에 기반한 것, 다들 그렇게 하는 부당함의 질서 자체라고 만인에게 설파하고 싶어했다. 결국 우리는 정치가들을 믿지 않게 되었고, 그 만큼 우리가 보고 싶은 지도자의 이미지를 노무현에게서 찾고 싶어 했다. 자신들이 만든 루머를 스스로 믿고 있었던 특권층은 노무현에 대한 사람들의 열광을 믿지 않았으며 의아해했다(탄핵이 좋은 예이다). 그건 그의 권모술수와 쇼맨십이 먹힌 결과라고 생각했다. 어떤 측면에서 그들은 도덕적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었는지도 모른다. 거리낌없이 내뱉는 그의 당당함(그들은 오만이라고 불렀던)에 질투심도 느꼈을 것이다. 그들은 유럽의 정치가들처럼 마치 스포츠 게임의 한 역할로서 다시 언제든지 화해가 가능한 공(公)적인 상대로 그를 수용했던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죽일지 모를 적으로, 증오를 품은 사적인 원수로 간주했다. 정치가 당사자들의 이익관계를 대변해주는 활동이 될 때, 다시 말해 정치가가 이익관계의 당사자가 될 때, 정치는 사정없이 악랄해진다는 점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정치가 아닌 생존 전쟁을 벌였던 특권소수는 결국 그 악착같음으로 인해, 그리고 칼을 쥔 몇 몇 심복들의 무의미한 오바로 인해, 그의 죽음을 이루어냈고 일견 승리한 것처럼 보인다.

특권소수의 승리는 그들 자체의 힘보다는 많은 조력자들의 힘이 컸다. 그들은 수적으로는 소수였지만, 그 힘은 다수였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이미 그들의 조력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헤게모니를 장악했던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경제모델도, 잘사는 나라의 뚜렷한 모델도 없이, 그 특권층을 선망하고, 그들이 선호하는 것을 선호하고, 그들이 싫어하는 것을 싫어하고, 그들처럼 부자가 되고 싶어하고, 강남에 살고 싶어했다. 개미든 벌레든 아니면 단순 은행고객이든, 우리는 주주가 되어 그들처럼 대박의 신화를 믿었고, 치고 빠질 기회 즉 스캔들을 기다렸다. 그렇게 우리 모두는 그들을 위해 만들어진 양복을 어색하게 걸친 채 흉내 내며 뻐기고 싶어했다. 이를 부추긴 또 다른 조력자(아니 그 주체)는 바로 언론 미디어였다. 그들 역시 경제를 제1가치로 내걸고(경제가 뭔지도 잘 모르면서), 전국민적 캠페인까지 기획하여, 모든 이의 뇌리 속에 경제, 돈, 부자, . . 이러한 특권층의 강박을 공유하게 했다. 마치 그들의 강박이 아니면 경제는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가 굶어 죽기라도 할 것처럼! 그들의 말과, 인생관, 생활습관은 책, 잡지, 미디어에 출판 방송되어 귀감처럼 다루어졌다. 그들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모든 이의 행동모델이 되어 하나의 거대한 콤플렉스를 형성하면서 우리를 설득했다. 현재의 정치 경제 권력은 이 콤플렉스를 극대화하고자 한다. 미디어의 주체가 이미 그들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의 눈을 통해서만 세상을 바라보고, 창을 열었던 것이다. 이 창을 통해 본 우리의 세상은 가난한 사람들조차 실패한 부자였고, 집값의 하락을 사형선고로 받아들인 집 없는 집주인들, 즉 잠재적 강남인이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노무현에 대한 증오까지 흉내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노무현이 특권소수와의 전쟁에서 실패한 원인은, 그가 특권소수를 일부 계층이나 일부 지역으로 혼동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상대는 국민 전체였는데도 말이다.

결국 특권소수와 최근의 검찰이 창조한 것은 무엇일까? 반추동물의 되새김질처럼 반복적으로 파고든 집요한 조사로 결국 그들이 창조한 것, 그것은 다름 아닌 절망과 허무와 무기력이다. 젊음의 살해! 그것 외에 무엇이 있겠는가? 그들은 우리가 정치가들로부터 보고 싶어했던 어떤 것이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으며, 있다 해도 반드시 실패하고 말 것이라고 믿는 냉소적 현실주의를 행동으로 증명했다. 아마추어리즘이든 무모함이든 서툰 낭만주의이든, 청년기에나 어렴풋이 품고 있다가 상실해버리고 마는 것으로 간주했던 그것이, 그래도 혹시나 현실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지속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기 나름이 아닐까? 라고 망설이고 있는데, "그딴 것은 존재하지 않아!"라고 쏘아붙이며, 경험은 많지만 한 없이 미루고만 있는 쇠잔해진 한 인정머리 없는 노인의 일축처럼. 그들은 한국인에게 가장 소중한 그 무엇을 완전히 망가뜨리고 망쳐놓았다. 정권을 창출한 것도 아니었고, 정치인의 부패를 막은 것도 아니었고, 정의를 수호하거나 도덕성을 지키거나 부도덕을 고발한 것도 아니었다. 위협을 느낀 생존을 위한 투쟁도 아니었다. 손에 든 칼이 진짜로 잘 드는지 확인하기 위해? 아니면 뭔가를 해낼 수 있음을 과시하기 위해? 충성을 증명하기 위해? 법 절차의 문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법 이전의 의지를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장하게도 또 한번 불신과 냉소를 창조하고 말았다. 그래서 우리는 힘이 빠지고, 아무것도 하기가 싫어지고, 정말이지 지겨워진다.

누군가가 죽자마자 모든 대결과 명분들은 철회된다. 마치 한쪽의 죽음이 대결의 고지였다는 듯이, 명분이 마치 살아있는 동안에만 유효한 생물체인 것처럼, 도덕성이나 정의가 마치 싸움의 무기였던 것처럼, 그가 죽고 싸움이 끝나자 심장의 멈춤과 함께 명분도 매장되어 버린다. 머리를 숙이고, 애도를 표하고, 증오의 감정을 풀고, 모든 악착스러움을 접은 평화로운 상태이다. 그러나 죽음 즉 침묵 앞에서는 근본적인 무언가가 드러난다. 그의 죽음 앞에서, 우리는 그 동안 고귀하다고 쥐고 있던 가치들을 떨구고, 잠시겠지만 모든 합리주의적 믿음을 철회하며, 잠시 서서 하늘을 보는 순간 잊고 있던 무언가를 깨닫는다. 우리는 젊음을 잃었다! 배불리 먹여주겠다는 정치? 약자를 위하겠다는 정치? 정규직 노동자를 만들겠다는 정치? 우주를 구원할 이론으로 중무장한 정치? 정치는 약속이 아니다. 장황한 약속으로 실마리를 풀어가며 냉랭하고도 까칠한 능력을 앞세우는 정치와는 본성이 다른, 마음을 움직이는, 감동을 주는, 정치 이전의 정치를 우리는 잃어버린 것이다.

그는 해방 이후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정치가에게서 보고 싶어하는 것을 육화한 유일한 사람이었다(김구 운운하며 오버하지 말자!). 새로움을 탄생시키는 것은 지성이 아니다. 게으르고 늙어빠진 소심한 지성은 항상 처져있지 않은가? 돈 버는 수완도 역시 될 수 없다. 돈은 우리가 버는 것이지 대통령이 버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들은 우리를 절망하게 하고, 힘을 쫙 빠지게 하고, 무엇보다도 지겹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러야 젊음을 육화한 정치가를 만날 수 있을까?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야 우리조차 덩달아 젊어져 그의 무모함마저 믿고 밖으로 나가게 될까? 아니 그러한 것이 있기는 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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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파이어는 항상 몰락을 하는 것일까? 해피엔딩을 일종의 문화적 제도로 삼은 헐리우드에서조차 뱀파이어의 끝은 몰락이다. 그들에겐 삶이 아예 없거나 삶을 지속할 만한 존재론적 근거가 없는 것일까? 흡혈귀가 바이러스 감염과 같은 질병이기 때문인가? 왕성한 식욕과 건장함, 그리고 나약한 인간은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공간을 초월하는 힘과 탄력을 가진 불멸의 존재 같은데도, 그늘진 창백함과 충혈된 동공은 항상 죽음을 연상케 하는 불쾌한 비정상의 비쥬얼을 환기한다.


대부분의 작가나 영화감독은 자신의 종교적 입장과는 무관하게 무턱대고 흡혈귀를 질병으로 규정한다. 그러나 어떤 질병? 인간의 의학이 규범화한 특정 징후를 보이는 그러한 질병? 그러나 딱히 의학적 소견으로 진단을 내릴 만한 징후도 없지 않은가? 다만 혈액을 섭취하지 않으면 기침과 고열과 백화현상 비스무리한 신체적 변화들이 있기는 하다. 결국 그들의 몰락은 피의 문제란 말인가? 마늘에 대한 특이한 혐오를 포함해서, 피를 먹는다든가 하는 식품에 대한 이상취미 때문에? 그러나 자연적으로 그가 갈구하는 음식이 그의 신체를 해체시키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에게는 피가 독이 아니라 생명이 아니던가? 그의 문제는 피의 섭취가 아니라 오히려 섭취를 방해하는 다른 것에 있어 보인다. 허기로 인한 인간의 죽음을 질병으로 보지 않듯이, 허기를 채우기 위한 인간의 무자비한 음식 섭취를 질병으로 보지 않듯이, 많은 흡혈 동물들이 그렇듯이, 흡혈성 역시 질병이라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의학적 생물학적 소견 외의 다른 원인, 가령 피에 대한 금지된 욕구 때문에 어쩔 없이 생명을 죽여야 한다는 생득적 때문에? 종교적 질병으로 인해 그는 항상 십자가를 피해 다니는 것으로 설정된다. 그러나 최근의 영화에서는 십자가가 다지 힘을 발휘하지 못하거나 아예 등장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종교적 질병으로부터 치유된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자연 안의 모든 존재는 아이러니하게도 생명을 파괴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가 없다. 뱀파이어뿐만 아니라 인간과 자연 전체가 원죄의 스캔들이라고 하는 종교적 질병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것이다. 생명이란 죽음으로의 길이고, 창조란 해체이며, 영양이란 분해와 소화이며, 대낮은 밤에서 밤으로의 이행이다.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선천적 죄를 부과해서 존재를 부정하는 방식 자체가 가지는 졸렬함도 있다. 그것은 구차하고도 궁색한 성직자들의 해묵은 변명에 불과할 뿐이다. 뱀파이어 역시 교설의 공포가 기만적임을 이제는 깨달은 같다. 뱀파이어의 종교적 몰락의 시대는 구식이 된지 오래다.


궁금한 것은, 어째서 뱀파이어가 갈구하는 것이 동물의 피가 아니라 반드시 인간의 피인가? 염소의 피라든가 돼지나 닭이나 소의 피로 인간처럼 그럭저럭 살아갈 있다면, 뱀파이어 자신도 몰락하지 않을 있지 않을까? 나아가 동물들을 사육하고 재배를 하여 농사를 지어 살아가는 방식도 생각해 있지 않을까? 고기는 내다 팔아 부수입을 올리고. 밤과 낮을 바꾸어 살아가야 하는 불가피한 조건이 있긴 하지만, 그것이 그의 재배나 목축활동에 치명적인 한계가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과학만능주의 시대에 피의 생화학적 인공생산 역시 생각해 수도 있지 않을까? 결국 그의 몰락은 사려(prudence) 필요로 하는 노동의 부재, 말하자면 창세기적 상상계에서 아직 깨어나지 못한 현실 인식의 부재 혹은 철없던 시절에 길들여졌던 편식습관에의 고착 때문이라고 말해야 할까? 아니면 식품가공을 혐오하는 결벽스러운 자연주의 때문이라고 말해야 할까? 하지만 널린 것이 인간의 피가 아닌가? 노동이나 과학은 필요치 않다. 인간은 많이 있다. 심지어는 너무 많이. 그다지 피를 아끼는 종족도 아니며 오히려 남발하지 않는가? 인간이 많은 세상은 뱀파이어에겐 아직도 하나의 낙원이다. 오히려 동료 흡혈귀가 너무 많아져 피의 수요가 공급을 앞지르지 않도록 동료 흡혈귀와의 야만적 경쟁이 필요할 뿐이다.


피에 대한 욕구가 불가피하게 인간과의 전쟁을 초래하기 때문일까? 뱀파이어의 피에 대한 욕구 만큼이나 인간의 생존 욕구도 있으니까. 그래서 뱀파이어는 항상 인간과 불화하고 그와 욕구의 전쟁을 치른다. 결국 뱀파이어가 몰락한다면, 주로 미국식 뱀프 영화들이 그렇듯이, 인간과의 전쟁에서 패했기 때문인가? 힘이 딸려 도저히 되겠으면 예외 없이 아버지를 호출하여 (이미 치유가 것도 모르고) 십자가를 내밀거나 성수를 뿌려대는 나약한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힘과 탄력으로 공중을 날아다니는 그가? 아무리 칼로 찌르고 총으로 쏘아대도 해체되지 않고 원래의 상태로 회복되는 단단한 육체와 끈적이는 피를 소유한 불사신이? 말도 된다. 인간과 전쟁을 치르고 대립적일 밖에 없기 때문에 몰락해야 한다면, 그것은 뱀파이어를 우리 인간의(특히 미국식 영웅으로서의 인간) 관점에서 결과일 뿐이다. 뱀파이어는 자신의 역사가 없단 말인가? 대낮의 노동과 빛의 역사 만큼이나 잠과 달과 어둠의 역사가 있다.


어느 모로 보나 뱀파이어의 몰락은 필연적 근거가 없어 보인다. 그는 의학적으로도 종교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몰락할 이유가 전혀 없다. 그는 심지어 우월하기까지 하다.


물론 가지 . 어쩌면 가장 많이 야기되는 근거라고도 있는 , 바로 윤리적 질병 때문이라는 이론이다. 말하자면 인간과의 전쟁이 아니라 근본적인 전쟁, 자연과의 전쟁 때문이라고 할까? 쉽게 말해 자연의 자정능력이 감당할 없는 과도한 갈증과 식욕으로 인한 자멸이다. 그래서인지 대부분의 영화감독이나 작가들은 항상 흡혈귀의 '' 방탕함을 연상시키는 관례 같은 것이 있는 같다. 다른 남자의 여자를 유혹하여 그녀들의 뽀얀 목에 깊고 진한 정욕의 붉은 징표를 꽂아대고, 식욕을 채워줄 인간을 찾아 날카로운 송곳니로 무자비하게 천공을 낸다. 끊임없는 쾌락에 대한 갈증. 결과 모든 자원의 고갈 아니면 자신의 고갈. 이것이 뱀파이어라고 하는 윤리적 질병의 몰락의 절차이다. 그러나 욕구가 자연을 초월하고 이탈하고 자정능력을 능가하는 것이라면, 흡혈귀는 자연의 질서 안에 있는 자연적 존재가 아니란 말인가? 그렇다고 초자연적 존재도 아니지 않은가? 그는 대낮의 빛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물론 기독교에서 빛과 십자가의 본질은 물리적 성질이 아니라 초자연성이지만, 어떤 뱀파이어는 선글라스에 선탠 크림을 칠하고 대낮에 출몰한다). 어쨌든 그는 먹어야만 하고 수면이 필요하며, 다른 어떤 존재보다도 자신의 육체로 파고든다. 그는 자연을 초월한 존재이기는커녕 오히려 자연 안에 갇혀 있는 것이다. 사실 그의 과잉 욕구의 진정한 의미가 이것이다. 욕구의 초과는 실상 결핍에 근거하고 있다. 결국 윤리적 질병에 의한 몰락이라는 이론에 따르면, 뱀파이어는 건강하지도, 식욕이 왕성하지도, 자신의 육체와 영혼을 지속시킬 만큼 충분한 참을성이 있지도 않다. 지속 가능한 건강이란 새로운 변화를 수용하는 폭과 깊이의 반영이기 때문이다. 그는 대식가이지만 실은 편식가일 뿐이며, 초월한 보이지만 실은 신경증 환자이며, 당찬 활보의 소유자이지만 실은 어둠 속에 얼어붙은 내성적 히키코모리일 뿐이라는 것이다. 자연적이지도 그렇다고 초자연적이지도 않은 그의 아노미가 이미 그를 창백하게 죽은 존재로 규정한 것일 있다.


그런데 우리는 뱀파이어의 아주 기이한 몰락을 목격하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박찬욱의 <박쥐(Thirst)>에서는 특이하고도 어이없게도 뱀파이어가 자살을 선택한다. 법적이라고 해야 할지 종교적이라 해야 할지 윤리적이라 해야 할지 아니면 바이러스 증상으로 인한 신체적 고통이라 해야 할지 판단하기 어려운 종류의 '죄의식' 혹은 '양심' 휩싸여 있는 흡혈귀를 보게 것이다. 바이러스 때문이든, 사로잡힌 욕망이 금지되었기 때문이든, 아니면 살인을 했기 때문이든, 죄의식의 내용은 자신의 존재가 자연으로부터 이탈하여 자연과 인간에 민폐를 끼치고 있다는 강박이다. 그는 갈증과 욕망을 숨기고 싶어하고 부끄러워하고 저주한다. 그로 인해 양심적인 괴물이 되어 가지 인도주의적 노력으로 양심을 상쇄하고자 한다. 죽어가는 사람(남에게 무엇이든 주길 좋아했던)에게서 약간의 혈액을 나누어 섭취한다든가, 기증된 혈액만을 받는다든가, 살인이 아니라 자살을 도와준다든가 등등. 나아가 성실한 괴물은 피의 농업이나 목축이라도 기꺼이 태세다.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양심도 없으며 식욕과 갈증이 대단히 왕성한 여인-뱀파이어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어쨌든 여기서도 뱀파이어는 전쟁을 치르다가 몰락한다. 하지만 무엇과 전쟁을 치른 것일까? 흡혈귀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전혀 다른 종이 되었을지도 모를 그를 자살로 이끈 것은 깊고도 질긴 어떤 관념이다. 인간이라고 하는, 나아가 정상적이고 윤리적인 인간이라고 하는 관념! 자신이 새로운 종이 모든 가능성을 부정하게 하는 만성적 질병, Human! 질병은 뱀파이어가 아니라 바로 인간성이다. 대낮이 주는 기쁨도 밤이 주는 기쁨도 그렇다고 다른 인간이 주는 기쁨도 없이, 단지 주기적으로 모여 마작으로 시간을 때우거나 성령을 기다리며 기적을 바라는 병든 반복의 소유자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정상인임을 의심 없이 자부하며 다른 모든 존재를 비자연적 괴물로 여기는 고착병. 그는 뱀파이어 자신의 윤리가 아니라 인간의 윤리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여인-뱀파이어는 소심한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아직도 인간인줄 알아?" 뱀파이어는 미결정된 존재이다. 그는 부유한다. 그러나 땅에 발을 내딛고자 , 어딘가에 자신의 힘겨운 육신을 정착시키려 , 주로 인간이라고 하는 만성적 질병에 안착하고자 , 그는 몰락한다.


뱀파이어는 종류의 전쟁을 치르는데, 하나는 갈증과의 전쟁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성과의 전쟁이다. 모두를 포기할 없을 , 그는 스스로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고통스러운 반복을 종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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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홍상수 영상의 중요한 요소인 과잉실재는, 세계를 요약하여 그 힘을 최대화하는 표현(주의)적 경제성과 대립하고 있다. 그 형식적인 예는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예를 들어, 클로즈업의 사용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든지, 혹은 그 고유한 의미에서의 몽따쥬의 사용도 보이지 않는다든지, 혹은 카메라가 특정 인물이나 상황을 전경화하기 위해 그들을 따라다니는 일이 두드러지지 않는다든지(카메라가 인물들을 따라다니는 경우가 있지만, 인물들은 프레임의 다른 모든 요소들 속에 묻혀있을 뿐이다), 혹은 빛과 색채를 회화적으로 사용하여 그들의 과도한 대립이나 강조를 뚜렷이 하는 일이 없다든지, 그리고 화면 구성에 있어서도 역시 의식적 배치가 두드러지지 않는다든지 혹은 숨긴다든지 하는 점이 그것이다. 또한 문학적 주제를 다루는 방식에 있어서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물론 사랑하는 연인들과 이들의 관계 그리고 욕망이나 배신 혹은 권력과 같은 소재들이 있다. 그러나 그의 영화 전체를 자세히 훑어보면, 그러한 소재들이 담론으로 다루어지거나, 서사적 의미작용을 일으키는 메커니즘은 발견되지 않는다. 단지 그 소재들을 둘러싸고 있는 정당화할 수 없는 동작들만 있을 뿐이다. 한마디로 말해 근원적 기원이나 최종적 결론이 없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동작들과 언어는 중심을 가지지 않으며, 따라서 요약되지도 않으며, 그 힘을 최대화할 수도 없다. 홍상수 영화에 있어 유일하게 스며있는 문학적 요소―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는 산만한 실재 그 자체에 대한 이름 모를 의식 외에는 아무것도 없어 보인다. 그래서 모든 문제들은 이야기가 아니라 행동주의적 사실들로부터 파생된다. 또한 이것이 바로 제임스(William James)를 위시하여 몇 몇 화용론자(pragmatists)들이 생각했던 실재이다. 이들이 생각했던 실재란 바로 의미가 결정되지 않은 세계, 미리 결정된 중심을 가지지 않는 세계, 인간적 지각 이전에 존재하는 (지각이)소거된 상태의 세계이다. 그것은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상태들 간의 이행, 나아가 지각의 이행 그 자체가 아닐까? 이를 명시적으로 예증할 수 있는 좋은 이미지가 하나 있다.

홍상수의 두 번째 영화인 <오! 수정>은 개인적으로나 사무적으로나 서로 관계를 맺고 있는 세 사람―영화 감독인 영수, 작가인 수정, 그리고 영수의 돈 많은 후배 재훈―의 사랑 이야기를 몇 편의 에피소드로 꾸며놓았다. 그런데 각각의 에피소드는 동일한 사실에 대해 세 사람 각자의 관점과 기억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니까 하나의 사건이 각 에피소드에 따라 두 번 혹은 세 번 이상 반복되어 제시되지만, 카메라의 위치나 사건의 내용은 매번 약간씩 다르게 편집되어 있는 것이다. 물론 이 작품의 화법은 개인들의 서로 다른 기억과 그 재구성에 의존하고 있지만, 전체 내용을 이루고 있는 형식은 개인들간의 상호 주관적 관계로부터 비롯된다. 이 작품에는 매우 독특한 장면 하나가 있다.

영수는 운전기사와 전화통화 중에 기사에게 모욕적인 발언을 한다. 화가 난 기사는 지금 당장 사무실에 갈 테니 그 자리에 있으라고 경고한 뒤에 전화를 끊는다. 그리고 나서 운전기사와 영수가 사무실에서 맞대면하는 장면이 두 번 등장한다. 이 두 장면은 하나의 사건(두 사람의 대면)을 두 개의 관점에서 바라본 것이다. 첫 번째로 제시된 장면은 영수의 점잖은 사과로 별일 없이 화해하는 것으로 끝난다. 우리는 이 장면이 영수의 기억으로 재구성된 것인지 아니면 객관적 사실로 제시된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그 장면에서 제시된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러나 나중에 다시 등장하는 두 번째 장면은 첫 번째와는 전혀 다른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영수는 운전기사의 폭언과 폭력에 의해 따귀까지 맞으며 모욕을 당한다. 이 장면은 첫 번째 제시되었던 사실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다. 객관성이란 상대적인 한에서만 가능한 것이므로, 어떤 쇼트가 객관적 관점의 위상을 가지려면, 그것이 다른 장면을 교정하거나 대체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두 번째 장면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처음의 점잖은 사과와 화해가 영수의 주관적이고도 자의적인 기억이었다고 확신하게 된다. 이 두 번째 쇼트는 최초의 화해 사실을 교정하면서, 그 쇼트를 (영수의) 주관적 관점으로 변형시키고, 그 자신이 스스로 객관적 관점의 위상을 취한다. 그런데 이 두 번째 장면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장면이 잠시 지속되다가 카메라는 서서히 왼쪽으로 패닝하여 그 수치스러운 장면을 숨어서 바라보는 수정을 담는다. 따라서 첫 번째 제시된 장면을 교정하여 객관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던 이 두 번째 장면은, 사실은 수정의 주관성에 의해 교정된 또 하나의 주관적 이미지였음이 드러난다. 이 두 번째 쇼트에는 아주 복잡한 문제가 있다.

우리는 흔히 영화적 지각의 두 형태(주관적 지각과 객관적 지각)를 말한다. 주관적 지각은 하나의 장면 안에서 부분을 이루고 있는 인물이나 사물에 의해 포착된 지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들뢰즈(G. Deleuze)는 이를 대체로 세 가지로 분류했는데, 우선 눈이 부상당한 사람이 자신의 파이프를 보고 있는 경우에, 이를 흐린 초점으로 처리하는 경우가 있다. 이를 감각적 주관성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카메라의 지각은 부상당한 그 사람의 주관적 감각과 동일한 것이 되어 있다. 다음으로는 춤이나 축제의 풍경이 그 안에 참석하고 있는 어떤 인물에 의해 보여지는 경우이다. 이를 행동적 주관성이라고 부른다. 움직이고 있는 인물이 어떤 대상을 볼 때에는, 그 자신의 움직이는 방식에 따라 풍경이 보이므로(흔들거리거나 빙빙 돌거나), 행동 중에 있는 경우라도 주관적 형식을 띠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감정적 주관성이라고 불리는 것이 있다. 예로, 어떤 여자가 칭찬하고 있는 주인공의 모습이 마치 거대한 나무 위에 군림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이다. 사실은 땅 위에서 단지 시이소 놀이를 하고 있을 뿐이었지만, 카메라는 그 여자의 감정이 투사된 주관성으로 그 주인공을 바라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