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브레히트(Bertold Brecht)식 낯설게 하기의 가장 좋은 소재는 상품이 아닐까? 상품은 너무나 친숙해졌고, 아름다워졌고, 편안해졌고, 신비스러워졌다. 포스트모던 브레히트는 상품의 이 허울을 벗겨내기 위해, 이들의 구성요소들, 부속들, 쓰레기로 만들어지는 실체들, 그 조잡하고 무의미한 성분들과 관계들에 대한 가차없는 폭로가 필요해 보인다. 예술가들은 상품을 해부하고(비유적으로가 아니라 물리적으로), 날 재료들을 가리거나 그들을 봉합하는 거친 재봉선을 들추어내고, 속을 보여주고, 창자들을 빼내어, 그 날 재료들을 드러내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보이지 않는 옷처럼 걸치고 있는 이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물건들의 실체가 무엇인지, 자신들의 등판과 어깨에 무엇을 걸치고 있는지, 기업이 들추어내기를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물건들에 대한 관심과 취향과 흥미를 떨어뜨리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일이 필요한 것이다(작은 예로, 얼마 전에 일부 영리한 젊은 층이 문화-경제적으로 시도했던 특정 기업 상품불매 광고 운동에 대한 기업과 사법부의 흥분된 반응을 보라. 우리는 치명적인 약점 하나를 발견한 셈이다). 고다르(Jean Luc Godard)가 영화를 감동적이지 않은, 재미없고 시시하고 엉성하고 부산하고 산만하고 지루한 것으로 만들었던 것처럼 예술 자신을 재미없게 할 것이 아니라, 상품과 그 이미지를 시시하게 만드는 일, 이것이 예술가들이 (무엇보다도 그 자신들을 위해) 해야 할 현대적 과업이 아닐까? 감동적이고, 아름답고, 뭉클하게 만드는 예술가들은 가짜이며, 점점 더 마취되기를 원하는 관객들과 아울러 함께 놀아나고 있는 공범자이다. 앤디워홀(Andy Warhol)? 물론 그는 상품을 신비화한 장본인이다. 그는 한 꺼풀만 벗겨내면 쓰레기가 되었을 그 무엇들에 대해 아무도 그 한 커플을 벗겨내지 못할 것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그 얇은 가리개를 이용하여 아우라를 재구축했던 것이다. 그는 결국 영리한 사기꾼이었지만, 현대의 예술가가 필요한 능력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와 같은 사기꾼 근성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상품의 아우라는 파괴되어야 하지 않는가? 브레히트나 고다르의 방식이 옳지 않았을 수도 있다. 예술은 자기자신을 망가뜨리고, 스스로를 드러내고, 자기를 지시하고, 자기를 반영함으로써, 오히려 스스로를 아무도 신뢰하지도 흥미로워하지도 않고 관심을 두지 않는 괴물로 만들었던 것은 아닐까? 교화는 행동과 결단을 촉구하지 못한다. 그것은 윤리적으로도 조차 지속되기가 어렵다. 인간이 돼지가 되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돼지가 인간이 될 수는 없지 않은가? 인간이 돼지라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그 지성이란 것이 생각처럼 그렇게 쉽게 결단하고 행동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브레히트는 이성을 일깨워 행동을 촉구했지만, 실은 이성은 행동을 방해한다. 서사극보다는 오히려 그람시(Antonio Gramsci)의 지적처럼 멜로드라마가 더 효과적이었을지도 모른다. 대중을 교육시키려는 생각보다는, 그들에게 네가 본 것을 폭로하라! 도덕과 집단적 정의에 호소했던 미국의 전 근대적 저널리즘식 폭로(muckrakers)가 아니라, 개인의 이익과 취향과 쾌락에 호소하는, 폭로의 예술, 폭로의 기교가 필요한 것이다. 낯설게 하기가 예술의 형식으로서 아직도 유효하다면, 교화가 아닌 폭로를 위한 것이 되도록 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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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는 '대중문화의 퍼스트레이디'로 잘 알려졌던 뉴요커(New Yorker) 수잔 손택(Susan Sontag). 예술에 대한 사랑과 강박의 소유자. 그럼에도 그녀는 자기 스스로 "강박적 모럴리스트"라고 부르길 꺼리지 않았다. 아름다움과 도덕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던 것 같다.

그녀는 예술에 대한 사랑을 분석가나 연구자로서가 아니라, 한 명의 감상자 혹은 숭배자로서 감추지 않는다. 예술작품을 분석의 대상이 아니라 마치 애인에 대한 욕망과 관능으로 이해하겠다는 태도이다. 그녀는 이를 예술의 "성애학"(erotics)이라고 부르고 싶어했다. 프랑스인 글쟁이 바르뜨(Roland Barthes)의 예술론의 한 측면인 감각주의와 뉴욕 예술계 특유의 냉소적 분위기가 뒤섞여 (적잖이 속물스러운) 변용을 일으키는 것 같기도 하지만, 어쨌든 예술작품뿐만 아니라 경험에 있어서의 관능성의 회복, 이것이 그녀의 주장이다. 어떤 점에서 볼 때, 그녀가 주장했던 전체 논지는 현대의 복제 산업이 만들어 놓은 불감증에서 느껴지는 불쾌감의 표현에 다름 아니다(그럼에도 그녀는 현대성이 여성을 해방시킨 유일한 시대라고 옹호하기도 하지만).

그녀는 1966년에 이 불쾌감의 한 몸짓으로, 어쩌면 불쾌감의 근원이라고 판단했던 누군가에게 항변하는 대응시선으로, 맹랑한 제목의 글을 발표했다. 그녀를 일약 스타의 반열에 오르게 해준 에세이 <해석에의 반대>(Against Interpretation)가 그것이다. 여기서 그녀는 해석행위를 불감증을 일으키는 근원으로 규정한다. 그녀의 항변에는 일부분 일리가 없지 않다. 그녀의 말을 들어보자:

    " 예술 쪽으로 눈을 돌려보면, 해석이란 작품 전체로부터 몇 가지 요소들(요소 X, 요소 Y, 요소 Z, 등)을 뽑아내는 것을 의미한다. 해석의 임무는 사실상 번역의 임무와 같다. 해석자는 말한다. 보세요! 저 요소 X가 정말로 A인 것이 안 보이세요? 저 Y가 정말로 B가 아닌가요? 저 Z가 정말로 C가 아닌가요? [. . .] 해석은 맨 처음 후기 고대 문화에 나타나는데, 이 때는 과학적 계몽주의를 통해 소개된 '사실주의적' 세계관에 의해 신화의 힘과 신뢰성이 깨졌던 때이다. 신화로부터 벗어나려는 의식을 지배하고 있었던 의심—종교적 상징의 '그럴듯함'에 대한 의심—이 생기자, 고대의 텍스트는 더 이상 그 원시적 형태로 수용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고대의 텍스트와 '현대적' 요구를 화해시키기 위해 해석이 필요해지게 되었다. 그래서 스토아학파는 신들이 도덕적이어야 한다는 자신들의 견해와 일치시키기 위해, 호머의 서사시에 나오는 제우스와 그 떠들썩한 일족의 무례한 행태를 알레고리로 만들어 버렸다. 그들의 설명에 따르면, 제우스와 레토의 부정을 통해 호머가 진정으로 말하고자 했던 것은 권력과 지혜의 연합이었다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알렉산드리아의 필로(Philo)는 구약의 역사적 이야기를 영혼의 패러다임으로 해석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40년 동안 사막에서 방랑을 하다가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출애굽기가 실은 개인 영혼의 해방, 시련, 최후의 구원에 대한 알레고리라는 것이다. 해석은 이렇게 텍스트의 분명한 의미와 (현대)독자의 요구 사이에 불일치를 전제한다. 해석은 그 불일치를 해소하려는 것이다. 여러 가지 이유로 텍스트를 받아들일 수 없게 된 상황이지만, 폐기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해석은 옛날 텍스트, 즉 너무나 소중해서 개작하거나 거부할 수 없는 텍스트를 보존하려는 급진적인 전략이다. 해석자는 그 텍스트를 실제로 지우거나 다시 쓰지 않고도 그것을 바꾸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그 텍스트의 진정한 의미를 드러내어 단지 텍스트를 이해 가능한 것으로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해석자가 텍스트를 아무리 많이 바꾸어도(또 다른 유명한 예로는, 틀림없이 관능적이기 그지없는 아가서(the Song of Songs)를 '영적으로' 해석한 유대교와 기독교가 있다), 이미 거기에 존재하고 있는 어떤 의미를 읽어낸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 . .] 이해한다는 것은 해석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해석한다는 것은 현상을 바꾸어놓는 것, 그것에 대한 등가물을 찾는 것이다. [. . .] 해석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정하듯이) 절대적인 가치, 시간을 초월한 능력의 왕국에 자리잡은 어떤 정신의 몸짓이 아니다. 인간의 의식이 역사적 산물이라는 견지에서, 해석은 그 자체로 평가 받아야 한다. 어떤 문화적 문맥에서 보면, 해석은 해방적 행위이다. 그것은 죽은 과거를 개정하고 재평가하고 탈출하는 수단이다. 다른 문화적 맥락에서 보면, 그것은 반동적이고, 무례하고, 비겁하고, 답답하다." (Susan Sontag, "Against Interpretation", A Susan Sontag Reader, New York, Random House, 1982, pp. 97-98.)

손택의 말을 넓게 생각해보면, 해석은 적든 많은 왜곡이고 기만이다. 해석은 텍스트의 다양성으로부터 해석자 자신이 보고 싶어하는 요소만을 잡아내어 자신 쪽으로 끌어 당기는 행위이다. 그래서 해석은 과거의 현재화이고, 차이의 동질화이다. 가령, 카프카의 텍스트를 '현대 사회의 소외'라든가 '개인의 고독'이라고 하는 한 두 가지의 규정된 관점으로 읽는다든가, 현재의 필요에 따라 역사적 사실이나 영토의 소유관계를 (재평가가 아닌) 현재적으로 규정하고 싶다든가, 그 묘사가 너무나 다양해서 하나의 의미로는 말할 수 없는 브뤼겔(Pieter Breughel)의 작품 <Procession to Calvary> 안에서 '십자가 처형'이라는 부분적인 주제에 적합한 몇 개의 장면만을 시퀀스로 떼어내어 그 작품 전체를 성화로 간주한다든가, 연예인이나 스포츠스타 혹은 정치가의 특정 모습만을 담은 스틸컷을 스캔들 기사와 나란히 병치한다든가, . . . 이 같은 모든 정당화 행위들, 즉 현재의 욕망을 투사해서 과거를 왜곡하기,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개인의 주장과 의지로 환원하기, 전체를 보지 않고 부분만 떼어내어 편집하기, 미리 알려진 교리와 믿음에 기대어 새로운 상황을 규정하기, . . . 를 손택이 우려했던 것은 지식의 정치적 사용에 의한 훼손이다. 이로 인해 예술작품이든 삶이든 그 고유한 관능성과 투명성을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물론 해석하지 않고 살 수는 없다. 아니 해석이 아닌 삶이 존재할까? 손택도 밝혔던 바, "니체가 말하는 해석의 의미", 즉 삶에는 진리가 아니라 해석만이 있다고 니체(Friedrich Nietzsche)가 말했을 때의 그 해석의 의미를 부정할 수는 없다. 원리상 현재란 새로운 경험들을 맨몸으로 직접적으로 대면해야 하는 상태이고, 이를 해석하지 않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예컨대 현대성의 한 진기한 현상으로 볼 수 있는 연쇄살인의 명확한 의미를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 안에 미리 결정되어 있는 해답이 있는지조차 알 수 없다. 우리가 가진 지식과 기억을 통해 해석할 도리 밖에.

결국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고, 자신의 필요에 따라 주변을 해석하고, 과장하고, 비유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손택이 하고 싶었던 말은 우리의 전반적인 경향성, 더 정확히 말해 우리의 해석 행위조차 하나의 반성적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해석행위 자체는 시간을 초월한 관점을 소유한 신의 활동이 아니라 역사적 산물이기 때문이다. 즉 해석이란 필요에 의해 자행된, 사실에 가해지는 폭력이다. 역설적이게도 우리의 해석이 역사의 산물임을 받아들일 때, 해석의 굴레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해석을 반대하는 가운데 그녀는 자신의 '성애학'을 특징짓는 술어로 관능성을 말했을 뿐만 아니라, 경험의 "직접성"(immediacy) 혹은 "투명성"(transparency)을 강조하고 있다. 같은 맥락에서, 삶에는 해석만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니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삶의 능동적 창조에 관한 것이었지, 삶 자체를 어떤 혼탁한 의견에 의한 왜곡과 기만이라고 정의한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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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원이란 속물근성적인 문명의 허영과 오만에 찬 향수이다. 고향 사진을 한 장 찍어 사진첩 혹은 벽걸이에 꽂아두는 것과는 비교할 수가 없는 것이다. 동물원에서 일어나는 일은 자연사적 사건이 아니라 문명의 한 스캔들이다. 그것이 식물이나 동물들로부터 일어난 것일지라도. 아래의 흥미로운 기사를 보라.

http://nownews.seoul.co.kr/news/newsView.php?id=20090618601007

이 에피소드에는 자연을 바라보는 문명의 공포가 뚜렷이 드러나 있다. 어른이 순진무구한 아이의 행동을 바라보며 불안해하고 걱정하고 놀라며 공포에 떠는 그러한 모습과는 전혀 다른. 칼을 쥔 당사자로서는 칼의 용도조차 알지 못했을 것이다. 칼은 물론 자르거나 찌르거나 파고들어 사물을 해체한다. 그러나 칼에는 수많은 윤리적 가치가 내재한다. 물건을 자르고, 찌르고, 줄을 끊고, 사람의 육신을 해체하고, 피를 내고. 그 중에 어떤 기능을 선택할지는 순전히 칼을 쥔 자의 생각에 달려 있다. 요리사의 칼, 어머니의 칼, 범죄자의 칼, 어린 아이의 칼. 문명의 반대편에 서 있는 고릴라로서는 칼이 음식을 자르는 도구라는 생각조차 했을 리 만무하다. 아니 쥐는 부분이 칼 자루일 것이라는 생각조차. 그냥 우연히 날카로운 곳을 피해 잡다 보니 칼자루였을 것이고, 그냥 우연히 장난을 치다 보니 칼을 휘두르는 꼴이 된 것이다. 자연은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우연이니까. 하물며 칼이 생명을 해치고 살생을 하는 범죄 행위의 도구라는 생각은, 범죄의 개념조차 없는 그에게 있을 수도 없지 않은가? 그는 그냥 인간이 떨어 뜨려 놓은 칼을 호루라기를 주어 불어보듯이 이리저리 휘둘러 보았다. 그러나 칼을 들고 장난을 치는 고릴라를 바라보며, 소스라치게 놀란 표정과 신음을 냈던 관람객들이 상상했던 것은 무엇일까? 휘둘려지는 허연 칼과 그것을 쥔 고릴라의 특유한 외모를 결합했던 것일까? 그래서 그 동안 자신이 문명인으로서 마음 속 깊이 새겨둔 어떤 이미지가 환기되었던 것일까? 검은 색의 털이 온 몸에 무성하게 나 있어 무지막지하고 무섭게 생긴 동물이 금속성의 강한 해체 도구를 들고 뛰어 다닐 때, 문명이 쉽게 머리 속에서 떠올릴 수 있는 그러한 이미지를. 예를 들면, 기자가 찍었을 수많은 사진들 중에서 하나를 뽑아 저기에 게시된 저 이미지와 같은, 정확히 인간의 모습을 닮아 더 끔찍해 보이는 그러한 이미지를. 어떤 점에서 문명이란 만물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싶어 안달이 난 강박 아니면 부정적 나르시즘일 것이다.

칼의 존재는 칼을 쥔 자 뿐만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자의 상상 속에도 있다. 칼을 보며 우리가 상상하는 것! 자연에 대하여 혹은 순진무구에 대하여 문명이 상상하는 것! 그것이 바로 칼의 존재이며, 칼을 쥔 우리의 상황을 표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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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대전을 전후하여 활약했던 일본의 유명한 영화감독 오즈 야스지로(Ozu Yasujiro)는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특유의 카메라 시선을 창조했다. 흔히 "다다미 쇼트"라고 불리는 것으로, 피사체를 낮은 자세에서 잡은 장면을 말한다(특히, 인간의 시야와 친숙한 이미지를 만들어내기 위해, 그는 깊이감을 주는 망원렌즈나 넓은 시야를 보여주는 광각렌즈보다는 표준렌즈를 사용했다).

이 장면은 그의 작품 <부초>(floating weeds)의 한 장면을 자른 사진인데, 이를 보면 카메라가 거의 지면에 붙어서 포착한 장면처럼 보인다. 낮은 자세에서 사물을 바라볼 때, 저러한 독특한 이미지가 나온다.

다다미쇼트는 주로 집안이나 방안의 정경을 보여주는데 사용된다.

위의 사진 역시 <부초>의 한 장면인데, 먼 곳으로 유랑하던 남편이 몇 년 만에 돌아와 저쪽 방 안에서 약간 처량하게 담배를 태우고 있는 동안, 아들과 살며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는 그를 위해 술을 데우고 있다. 부엌의 마루 아래쪽에서 그녀를 올려다 보며, 카메라는 마치 그녀의 고독과 원망을 슬쩍 훔쳐보고 있는 듯 하다.

유랑극단의 단원들이 빗소리를 들어가며 처량하게 창 밖을 바라보고 있다. 멋지게 공연하려던 계획은 관객의 냉담으로 수포로 돌아가고, 갑자기 내리는 비는 갈 곳 없는 이들의 절망을 배가한다. 낮은 구도로 그들의 굽은 등 뒤를 포착하여, 마치 옆에서 함께하는 누군가의 공감 어린 시선이 느껴지는 듯 하다.

이 장면은 수 년간 유랑생활을 하던 아버지가 아들과 오랜만에 재회하는 모습이다. 아버지는 자신의 비천한 계급 때문에 아들이 사회적으로 부당한 대접을 받을까 두려워, 아내와 함께 작정을 하여 자신이 삼촌이라고 속인다. 오랜만에 집에 돌아와 힘차게 쭉 뻗어 자란(서로를 꽉 물고 있는 저 단단한 엉덩이를 보라!) 아들을 바라보며, 한편에는 뿌듯함과 대견함이, 다른 한편에는 아버지임을 말할 수 없는 안타까움이 교차한다. 카메라는 마루 아래 쪽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모습 전체를 올려다보며, 아들의 성장이 얼마나 힘찬지, 그리고 아버지의 쇠잔함과 왜소함이 얼마나 초라해 보이는지를 대조하고 있다.

다다미쇼트는 다다미에서 앉은뱅이처럼 좌식 생활을 하는 일본가정 환경에서 일본인들이 사람과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을 반영한다. 또한 마치 가부키나 가면극의 무대 아래에서 무대 위를 관람하고 있는 것 같은 시선을 갖추고, 뒷마당으로 활짝 난 창 밖이 마치 무대의 배경처럼 설정되어, 일종의 액자형(proscenium frontage)의 구도를 드러낸다. 카메라는 가만히 정지한 채로 무대 위를 바라보고 있고, 이 액자 같은 무대 위에서 인물들이 들어오거나(frame in) 밖으로 나감으로써(frame out), 카메라를 움직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장면들을 전환하고 있는 것이다.

다다미 시선의 구도는 서구인이 사물을 바라보는 환경과는 전혀 다르다. 서구인들은 주로 의자에 앉아 있거나 서 있거나 혹은 침대에 누워 있다. 이들은 방바닥에 앉아서 사물을 바라보는 경우가 흔하지 않아, 대부분 선 자세에서 허리 위, 혹은 어깨 정도의 높이에서 사물을 바라보는 구도가 지배한다. 그들의 시선은 행동을 준비하거나, 행동과 관련되어 있는 시선이다. 그러니까 사람이나 사물을 바라보는 자는 그들과 물리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가능성이 큰 것이다.

그러나 다다미 시선은 바닥에 앉아 있거나 누운 자세에서 사람의 무릎 정도의 높이에서 사물을 바라본다. 이는 행동적 시선이 아니라 관조적 시선에 가깝다. 우리는 바닥에 앉거나 누워 뭔가를 생각하고, 사색하고, 관찰하는 시선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다다미 시선은 사물을 바라보는 구도의 독특함을 반영하지만, 무엇보다도 이는 사물에 대한 관찰자의 독특한 태도, 그리고 특유의 정서와 분위기를 반영한다. 서구의 역동적 시선과는 다르게, 관조적 시선에 의해 우리는 사물과 인물들을 가만히 바라보며 연민의 감정을 느낀다. 또한 카메라가 인물들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앉은 자세나 누운 자세로 올려다 봄으로써, 그들이 크고 거대해 보인다. 인물들 곁으로 깊숙이 들어와 앉아 있는 제3의 시선이 그들과 함께하며 감정을 공유하는 것이다. 서구인들은 오즈의 영화를 보고 그 낯섦에 대단히 놀랐다고 한다. 아마도 그들에게 세계가 전혀 다르게 보였고, 전혀 다른 무언가를 촉발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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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인간의 시각이 기계적인 메커니즘으로 사물에 접근하게 한 최초의 매체이다. 인간의 지각은 시시각각 변덕스럽고, 쉽게 나타났다가 사라져버리며, 개인 안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믿을만한 객관성을 보증하지 못한다. 개인이 목격한 어떤 사건은 법정에서 증언적인 가치로서 참고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명백한 의미에서의 증거가 되지는 못한다. 객관성을 입증하려면 목격자 자체의 신뢰성을 증명해야 하고, 그의 증언에 뭔가 추가로 비인간적인 절차가 필요하다(법은 근본적으로 인간을 불신한다). 예컨대 과학적 증명과 같은 신의 지각에 의존하든가, 아니면 사진이나 동영상과 같은 기계의 지각이 첨부되어야 하는 것이다(디지털 시대엔 또 다른 문제가 있지만).

무엇보다도 카메라는 그 기계의 본성상 객관성의 도구이다. 애초에 사진이 등장한 이후, 그 객관적 성질 때문에 인간은 세계를(인간 자신조차도) 차갑고 비정한 그 무엇으로 경험하기 시작한다.

사진의 객관성은 눈에 보이는 사물에만 관계한 것은 아니었다. 사진은 인간이 지각할 수 없는 무의식적 영역 조차도 객관적인 그 무엇으로 만들었다. 가령 우리는 물건을 쥐거나 길을 걸을 때 손동작이나 걸음걸이를 막연히 추측만 할 뿐이지 손놀림과 발 동작의 세세한 부분까지 포착하고 기억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카메라는 고속촬영이나 렌즈와 같은 보조장치를 이용해서 이들을 잡아내고 보존한다. 벤야민(Walter Benjamin)이 말했듯이, 정신분석이 인간의 충동적 무의식을 밝히는 분야라면, 카메라 기술은 사물의 "시각적 무의식"(the optical unconsciousness)을 밝힌다.

인간이 시각적 무의식을 인식하자마자, 마치 정신분석에 의해 꿈의 세계가 열린 것처럼, 현실은 인간이 바라보고 생각했던 것 이상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현실은 기괴하고 부조리해 보였으며, 더 이상 인간이 상상했던 균형과 비례를 갖춘 정상적인 모습이 아니었다. 카메라 같은 기계가 펼쳐놓은 현실은 기계가 주는 정밀한 대칭의 이미지와는 반대로 뒤틀리고 일그러져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카메라 기계가 보여준 시각적 무의식이 불균형적이고 뒤틀린 현실을 제공하긴 했지만, 오히려 다른 한편 인간이 대상에 깊숙이 파고들어 경험할 수 있는 가능성도 열어주었다. 특히 인물사진에서 그러한 경향은 두드러진다. 사진을 찍는 예술가나 사진에 찍히는 모델의 의식을 넘어서는 시각적 무의식은, 그 인물 자신조차 알지 못했던 어떤 본성을 몸 밖으로 빠져 나오게 한다. 사진에 찍힌 인물은 그 만이 가질 수 있는 어떤 독특함을 외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자기 자신의 무의식적 본성 즉 물리적(육체적) 외양을 넘어선 그의 역사 전체에 비견될만한 특유의 시간을 무심코 드러낸다.

다음 사진을 보자.

이 작품은 케르테츠(André Kertész)가 1926년에 찍은 화가 몬드리안(Piet Mondrian)의 초상사진이다. 케르테츠는 이 외에도 몬드리안에 관한 여러 점의 사진작품을 남겼는데, 이 작품은 몬드리안 개인의 온전한 표정과 포즈를 담고 있다. 케르테츠 자신의 예술적 비전이나, 심지어 모델이 된 화가의 예술 세계와는 무관하게, 여기에는 한 인간이 취하고 있는 순수하게 개인적인 포즈와, 그로부터 피어 오르는 그의 인격 전체의 분위기가 감돈다. 그의 사유(예술)와 전혀 호응하지 않는 비뚤어진 코와 약간 왼쪽으로 일그러진 얼굴 균형,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는 듯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히스테리컬한 손가락, 순수해 보이면서도 어쩐지 (아니 그래서 더) 고집스러운 지성을 품은 시선, 사회적 계급과 소박한 성품이 공존하는 듯한 옷차림, 단정하면서도 비뚤어진 넥타이, 넥타이를 꽉 조여 매어 주름진 와이셔츠, 그리고 낡아 보이는 외투, 날렵하면서도 안정되어 있지 않은 자세, 그리고 약간 경직된 자세 때문인지 움츠러든 목, . . . 이러한 시각적 요소들은 한 개인이 예술이라는 제도 속으로 흡수되기를 거부하고, 온전한 자신을 주장하고 있는 완고하기 그지없는 존재론적 무의식을 표출하고 있다.

사진은 사물의 거죽 즉 외양을 포획하는 일에 만족하는 매체라는 생각은 구시대적이다. 사진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보다 더 많은 것을 우리 앞에 제시한다. 수잔 손탁(Susan Sontag)의 말에 따르면, 사진에는 "우리가 놓쳐버린 10%"가 있다. 만약에 진실이라는 것이 우리의 상상 안에 있지 않다면, 틀림없이 우리를 빠져나간 그 10%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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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혹은 앎이란 무엇일까? "지식이 있다" 혹은 "알고 있다"라고 말할 때는 한 가지 조심스럽게 구분해야 한다. 예컨대, "나는 이것에 대해 지식이 있다", 혹은 "나는 그에 대해 알고 있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무엇을 알고 있다는 것인지, 어떻게 알고 있다는 것인지를 분명하게 밝히거나, 최소한 자신에게 확신을 주어야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앎이란 최소한 두 가지 이상의 형식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푸코(Michel Foucault)는 자신의 저서인 『비정상인들』(Les Anormaux)에서, 한 사회가 "정상"과 "비정상"을 어떻게 구분하고 규격화하는지를 분석한다. 사회가 비정상이라고 규정한 대상은 크게는 괴물이라고 불리는 기형인이나 범죄자를 비롯하여 작게는 예의 없음, 좋지 못한 버릇, 자위행위, . . . 등이 있다. 이 책에서 그는 중요한 두 가지의 앎의 형태를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17세기 유럽에서 범죄자를 다루는 사법체계와 권력이 범죄자에 대한 앎을 어떤 식으로 형성하는지에 대해 간단하지만 강렬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짧은 구절을 발췌하여 한번 읽어보자.


"[…] 권력의 메커니즘은 너무나 강하고, 그 과잉은 너무나 의식적으로 계산되어 있어서 죄의 처벌은, 죄가 아무리 크다고 할지라도 그것의 성질을 규정할 필요가 없었다. 권력의 메커니즘은 군주의 의식 안에 거대한 범죄를 흡수하고, 그 안에서 그것을 과시하며, 마침내 그것을 말살 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하다. 이런 점에서 극단적으로 말하면 거대한 범죄의 성질 같은 것은 있을 필요도 없고, 있을 가능성도 없다. 거대한 범죄의 성질은 없다. 범죄와 그 주변 사이의 투쟁, 격분, 악착스러움만이 있을 뿐이다. 17세기말까지 사람들이 한번도 범죄자의 성질에 대해 질문하지 않은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권력의 체계가 이러했기 때문에 이런 질문은 제기될 필요가 없었거나, 혹은 그것을 아주 주변적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몇몇 텍스트에서, 특히 브뤼노가 1715년에 쓴 에서 여러분들은 다음과 같은 것을 읽을 수 있다. 판사는 피고인을 연구해야 한다. 그의 정신과 습관, 활기와 육체적 상태, 나이, 그리고 성별을 검토해야 한다. 가능하다면 그의 영혼으로 침투해 들어가기 위해 범죄자의 '내면'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와 같은 텍스트는 내가 방금 이야기한 모든 것을 다소 거칠게 전면적으로 부인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텍스트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판사에게 범죄자에 대한 앎을 요구하는 것이 범죄를 이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만 범죄가 저질러졌는지를 알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판사는 제대로 죄인을 심문할 수 있기 위해, 즉 심문의 엉큼한 계약을 그의 주변에 잘 엮어 놓아 그로부터 진실을 짜내기 위해 죄수의 영혼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죄수가 판사의 앎의 대상이 되는 것은 진실을 간직한 주체로서이다. 그것은 결코 죄를 저지른 범죄자로서가 아니다. 왜냐하면 일단 자백을 하고 나면, 바로 이 순간부터 이 모든 앎은 처벌의 결정과 아무런 상관이 없기 대문이다."(『비정상인들』(Les Anormaux), 박정자 역, 동문선, 2001, pp. 107-108).


푸코의 글을 통해 이렇게 유추해볼 수 있을 것 같다. 무엇인가 다른 목적에 이용하기 위한 앎이 있고, 그 자체로 목적인 앎이 있다. 말하자면, "정보"로서의 앎이 있고, "이해"로서의 앎이 있는 것이다. 푸코에 따르면, 판사들이 범죄자를 연구하는 이유는, 범죄자 그 자체가 궁금해서도, 범죄의 본질이 궁금해서도 아니다. 다만 규정된 법 체계 안에서 그의 행위가 범죄인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그가 범죄자로서 적합한지 아닌지를 판별하기 위해, 처벌의 기준을 확정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이러한 앎의 방식은 범죄의 본질을 아는 것이 아니라, 범죄행위의 확인과 인지(認知)이다. 이렇게 사법체계의 앎의 사후형식 때문에 법은 절대로 범죄를 사라지게 하거나 교정할 수가 없고, 오로지 처벌만을 가할 수 있을 뿐이다(애초부터 반항이나 반란의 가능성이 있는 범죄에 본때를 보여주기 위해, 애초의 범죄보다도 더 가혹하고 잔인한 처벌을 통해).


혹시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뭔가를 알고 싶어하거나, 알고 있다고 확신할 때, 이해로서의 앎이 아니라 정보로서의 앎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그것 혹은 그 사람 자체가 궁금한 것인가? 아니면 나의 악착스러운 필요 때문인가? 앎의 두 형식 중에서 후자가 지배하는 사회, 즉 정보만을 필요로 하고, 악착스러운 필요에 사로잡힌 앎 만을 추구하는 사회는 냉소주의가 만연된 사회일 것이다. 아는 것이 없고, 느껴지는 것도 없고, 아무래도 상관없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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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부터 사진으로 찍어 두고 싶은 광경이 하나 있었다. 내가 가끔 산책을 하며 걷던 곳인데, 거기에는 오래 전부터 건설 중에 있는 아파트 단지가 횡 하니 솟아 있다. 단지 주변에는 마치 SF 전쟁물의 로봇처럼 거대한 기중기가 듬성듬성 버티고 서 있다. 그리고 건설현장 앞쪽으로는 여기 저기에 낙서가 지저분한 시멘트 벽이 만리장성처럼 가로놓여 있었는데, 그 시멘트 벽은 건설현장과 앞쪽의 개천을 둘로 가르는 경계가 되었다. 사진을 찍는다면 시멘트 벽이 수평선처럼 프레임의 좌에서 우로 반을 쭉 가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벽 위쪽으로는 기하학적으로 힘차게 솟아오른 아파트 단지가 보이고, 아파트 단지 뒤쪽으로는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푸른 산과 하늘이 있다. 다음으로 벽 아래쪽엔 흉하게 여기저기에 나 있는 잡초와 낮은 등성이 있고, 더 아래쪽은 얕은 개천 물이 돌덩이들에 부딪혀가며 지저분하게 흐르고 있다. 잡초가 나 있는 둔덕 여기 저기엔 중년 혹은 노인 남자들이 더운 날씨에도 땀 복을 입고 앉아 그 지저분한 개천 물에서 물고기를 잡고 있었다.  

이 극적인 광경은 동영상 보다는 사진이 더 적절할 것 같았다. 바람이나 물의 흐름 혹은 날아가는 새 외에는 움직임이 거의 없었고(낚시꾼들 조차 미동이 없어 보였다), 그 광경이 자아내는 어떤 첨예함을 순간적으로 담기에는 지속적인 붓질이나 글의 묘사 보다는 대기를 단번에 갈라내는 칼끝과도 같은 민첩함이 필요했던 것이다. 나는 그곳을 찍고 싶다고 생각한 후로 1년도 더 지나 카메라를 들고 그곳을 찾았다. 여러 장을 찍었지만 아무래도 카메라를 잘 다룰 줄 모르는 탓이었는지, 내가 느꼈던 광경의 첨예함이 좀처럼 사진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물체를 가르는 칼이 그렇듯이, 셔터의 순간을 포착하는 심리적 속도와 무게와 균형 같은 것이 필요한 것은 아닌지 싶다.

카메라가 생산하는 이미지는 펜촉이 생산하는 이미지보다도 그 물리적 속성에 있어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날카롭다. 종교적인 의례와도 무관하지 않은 예술이 그렇듯이 분위기를 잡고 포석을 깔고 절차를 밟으면서 서서히 우리를 압도하는 대신에,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순간 혹은 사진을 보는 순간 실제적 균열 같은 것이 파고든다. 물론 그러한 민첩함이 없이도 첨예함을 드러내는데 탁월한 예술가도 있다. 지아 장커(賈樟柯)가 바로 그 이다. 안토니오니(Michellangelo Antonioni)나 데시카(Vittorio De Sica)와 같은 네오리얼리즘이 부활한 듯한 느낌을 자아내는 그의 작품들은, 사회적 변화를 개인의 존재론적 몰락이라는 형태로 가시화된 심리적 저항과 병치시켜 놓으면서, 재빠르게 무언가를 포착하지 않고도 오히려 서서히 진행되는 걸음걸이와 오랫동안 주시하는 시선을 전광석처럼 날카롭게 한다. 변화를 그 자체로 목격하는 것 만큼 찌르는 고통을 맛보는 경험은 없다. 그의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마천루 지각"의 장면들을 보며 가슴이 아픈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변화의 광경에 익숙해진 우리들로서는 고통스럽지도 그렇다고 무감각하기만 한 것도 아니지만 말이다.

지아 장커의 작품에는 항상 두 가지의 세계가 평행한다. 2006년작『東』이나 2007년작 『無用』과 같이 예술과 현실의 관계에 관한 다큐멘터리에서 볼 수 있듯이, 그리고 마치 아우구스트 잔더(August Sander)나 다이안 아버스(Diane Arbus)—이 두 작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경향이지만—의 사진집을 보는 듯한 느낌을 주는 『24city』, 그리고 특히 2004년 작품인 『世界』에서 다소 노골적이고 이례적으로 드러내고 있듯이, 급격한 변화 아래 그 존엄성을 상실한 육체들의 찰과상이 널려있는 세계가 한 편에 있고, 누군가에 의해(혹은 어떤 외계인들에 의해) 그 세계가 은폐되거나, 또 누군가에 의해 그 세계가 거부되어, 예술의 형태로 혹은 판타지의 형태로 고착된 매끈하고도 영원할 것 같은 그림의 세계가 다른 편에 있는 것이다. 무자비한 세계와 병적인 세계의 두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가 안타까운 것은, 언제나 후자의 세계는 전자의 세계로 되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이다. 가령 『24city』에서의 그 놀라운 장면이 그것이다. 화려하게 분장을 하고 신화적인 의상을 입은 배우들이 어느 허름한 건물에 들어가 주민들에게 여흥을 주기 위해 그들 앞에서 노래와 춤을 공연한다. 다음 장면에서는 공연이 끝나고 배우 한 명이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건물 밖으로 걸어 나온다. 계단을 하나씩 내려와 돌아 나오는 순간 그녀가 걸어가야 할 골목길이 갑자기 그녀의 뒷모습과 함께 화면 전체에 펼쳐진다. 외계식물들처럼 전선줄이 건물들을 휘감고, 빨래나 쓰레기 혹은 시멘트 벽에 낀 검은 자국 같은 삶과 시간의 부산물로 더럽혀진 그 골목길은 다름 아닌 판타지가 서식하는 토대이다. 영화 전체를 통해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이 토대 어디에선가 잠을 자고 꿈을 꾼 사람들이 날이 밝자 밖으로 걸어 나온다는 것이다. 처음엔 노동자가, 다음엔 빈민들이, 다음엔 배우가, 다음엔 명품으로 치장한 보따리 상인이, . . . 인물들이 대체되는 양상은 마치 토대의 이행—가령, 중국사회의 공장자본주의에서 소비자본주의로의—을 보는 듯 하다. 이와 유사한 장면은 이미 『東』에서도 제시된 적이 있다. 거기서는 어느 여성 모델이 낙원 분위기의 수채화를 위해 포즈를 취하는 작업이 끝나고 나서 옷을 갈아입고 소음과 매연에 질식할 것 같은 도심지의 귀가길을 나선다. 이것이 바로 서서히 움직이며 한참 동안 주시하는 지아 장커 영화 전체에 잠재되어 있는 첨예함이다. 끝나지 않은 모순을 가리키며.

아마추어인 내가 찍은 그 광경 사진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사진을 보자마자, 아니 지아 장커의 작품들을 보자마자, 그 사진의 제목을 망설임 없이 떠올려 내었다: 지아 장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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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대화를 즐겼다. 대화는 언제나 그의 높이를 확인시켜주곤 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얼마나 되는지, 쌓아놓은 것이 얼마나 많은지, 대화는 그러한 재산목록을 확인하고 세어보는 만국 박람회와도 같았다. 모두들 관객처럼 그의 앞에 모여 그가 자랑하는 전리품들을 구경했고, 그러한 것들을 소유하지 못했거나 소유하길 염원하는 그들은 찬사를 보냈다. 그는 흡족해했다. 그는 책을 꽤 읽는 편이었지만, 대부분은 그 박람회를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진열된 목록, 이국적인 이름, 새로운 명칭들이 그의 입에서 쉼없이 암송되었고, 옆자리의 관객들은 그것에 의아해 했지만, 그의 취향으로볼때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는 언제나 대상을 소유하고, 윤곽선을 분명하게 해 놓아야만 만족스러움을 느꼈다. 아무도 부른적이 없거나 이름이 없는 것은 그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결혼을 해야만이 사랑을 얻을 수 있다고 보았던 알베르트처럼, 그는 모든 것과 결혼하고 싶어했다. 심지어 그는 음악조차도 다른 장식물들처럼 선반 위에 놓아두길 원했다. 그래서 그는 큰 소리로 터져나오는 음악은 견디질 못했다. 누군가가 그에게 그 점을 지적하자, 그는 마치 자랑처럼 이렇게 말했다: "그래서 난 항상 음악한테 미안해!" 그는 언젠가는 그 소유물들이 자신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음을 느낄 것이다. 늙어가고 있는 그는, 아니 이미 많이 훌쩍 늙어버린 그는 그것을 조금씩 알기 시작했다. 점점 허기가 지고, 뺨이 야위고, 추해진 몰골에 허리가 휘어, 더 이상 대상 조차 바라볼 수 없게 될 날이 머지 않았음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그는 요즘 말이 많아졌다. 내뱉은 그 모든 단어들이 마치 자신의 소유물인냥, 식사나 술자리에 앉으면 숨쉬기가 버거울 정도로 말이 많았다. 이상한 것은, 그 많은 소유물을 확인하는 절차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 많아질수록 허기는 더 깊어진다는 사실이었다. 우리 모두는 그가 늙어가고 있는 증거라고 생각했다. 그와의 식사는 언제나 빨리 끝났다. 대화를 위해서가 아니라, 고깃국물 속의 고기가 쉽게 동이나 버렸기 때문이었다. 고기에서 국물이 흘러나올때까지 기다릴 만큼 그와 우리는 느긋하지 못했으며, 다른 사람과 함께 국물을 떠 먹는다는 사실을 유쾌하게 여기지 않았다. 윤곽선도 분명치 않고, 그 출처조차 분간할 수 없어 보이는, 모호하기 짝이 없는 그 국물을 너무나도 싫어했던 사람이 바로 그 였으며, 그에게 찬사를 보내던 우리들 역시 감염이 되어, 어느새 그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액체 자체가 그에겐 일종의 파괴였으며 침략이었다. 그냥 두었더라면 국물이 되었을 고깃덩이를 얌체들처럼 빼가는 바람에, 더 이상 국그릇엔 육수가 없었다. 조미료 향내만 진동하는 김빠진 맹물만이 고여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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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속에서 어떤 형상을 떠올리는 것은 문화적 행위일까 아니면 자연적 행위일까? 무질서한 상태 속에서 질서와 균형감을 갖춘 형상을 떠올리므로 그것은 문화적 행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생명체는 삶을 유지하기 위해 자연을 보다 습관화된 패턴으로 도식화하는 경향이 있고, 이러한 도식화는 꿀벌이나 개미의 사회적 경향처럼 일종의 본능일 수도 있으므로 그것은 자연적 행위가 될 것이다. 데리다(Jacques Derrida)가 구조주의 인류학자들의 이분법(자연/문화)을 해체시키면서 말하고자 했던 것은, 그들의 새하얗고 의기양양한 구분이 실상은 그렇게 분명한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아래의 그림은 미국 이민자들의 역사를 알레고리화한 <헤롤드와 쿠마>(Harold & Kumar Go To White Castle, 2004)라는 영화의 맨 끝에 나온 장면의 하나이다. 미국에서 살고 있는 한국청년 헤롤드와 인도청년 쿠마가 저녁시간에 배가고파 "White Castle"이라는 햄버거 가게를 찾아 가면서 좌충우돌한다는 이야기이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이런 저런 사고를 치고 나서 범죄자가 되어 경찰서에 구류되었다가, 기지를 발휘하여 그곳을 빠져나간다. 이 그림은 도망 가버리고 없는 두 오리엔탈(Oriental)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면서 백인 경찰관들이 그린 몽타주이다. 백인들의 이 스키마(schema) 혹은 게스탈트(Gestalt)는 문화적인 것일까? 아니면 본능적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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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는 베르그송이 지속에 부여한 분할과 연속의 힘보다, 더 심오하고 더 훌륭한 힘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포함하는 힘(the power to encompass itself)"이다.

. . . 물의 흐름, 새의 비상, 내 삶의 속삭임은 세 가지 흐름을 형성한다; 그러나 그것은 오로지 나의 지속이 그 흐름들 중 하나에 속하기 때문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른 나머지 두 흐름들을 포함하고 있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왜 두 흐름은 안 되는가? 가령, 나의 지속과 새의 비상은 왜 안 되는가? 왜냐하면 두 흐름은 세 번째의 다른 흐름 안에 포함되지 않으면 공존한다거나 동시적이라고 말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새의 비상과 나의 지속이 동시적이 되려면, 나의 지속이 둘로 나뉘어져야 한다. 그래서 나뉘어진 또 다른 지속이, 새의 비상을 포함하고, 동시에 나의 원래 지속도 포함함으로써, 나뉘어진 지속 안에서 원래의 지속이 반영되어야만 한다: 따라서 흐름들의 근본적인 삼중성이 있다.(Bergsonism, 80)

지속 안에서의 포함을 설명해주는 한 가지 예가 있다. 영화학자 Bela Balazs는 이 포함관계를 이렇게 말한다.

[ ... ] 하나의 멜로디는 시간의 차원을 가지지 않는다. 왜냐면 첫 음이 그 멜로디의 한 요소가 되려면, 오로지 그 첫음이 다음에 나올 음을 지시해야만 하고, 분명히 그 첫음이 계속 이어지는 다른 음들과 관련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지막 음은 아직 얼마간은 연주되지 않겠지만, 그래도 이미 첫 번째 음 속에 멜로디를 자아내는 요소로서 현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음이 나와 그 멜로디가 완성되려면, 우리가 그 멜로디를 따라 들으면서 그 첫 번째 음을 기억하고 있어야만 한다. 그 음들은 시간의 연속 속에서 다른 것이 나오면 그에 잇따라서 소리가 난다. 따라서 그 음들은 하나의 실제적인 지속이 있다. 그러나 멜로디의 일관된 선율은 시간의 차원이 아니다; 그 음들의 서로간의 관계는 시간 속에서 연속으로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다. 그 멜로디는 점진적으로 시간의 경과에 따라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첫 음이 연주 되자마자 이미 하나의 완전한 실체로서 존재성을 갖는다.(Bela Balazs, Theory Of The Film, 1952, "Melody and Physiognomy" 중에서)

하나가 다른 하나와 함께 무엇인가를 이루려면, 그 안에 바로 그 다른 하나를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 하나의 멜로디가 가능하려면, 그 멜로디를 이루고 있는 각각의 음들이 다른 음을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 지속이란 잇따르는 것들의 집합이 아니라 포함 관계로 정의할 수 있다. 실질적 지속이란 거짓된 연속이 아니라, 즉 따로 떨어진 것이 연속의 효과만 내는(만화, 몽따쥬처럼) 것이 아니라, 물의 흐름처럼 실제의 연속이다. 이 포함관계를 윤리적으로 정의내릴 수 있다. 어떤 대상에 대해 뭔가를 느낀다면, 그 대상속에 있는 그 무엇인가를 내 안에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사물에서 신을 보고, 신에게서 인간을 보는 것은, 우리 안에 신이 있거나, 사물 안에 신이 있기 때문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무엇인가를 느끼는 활동은 대상을 내 안아서 발견하는 것이다. '하나가 된다'는 말의 윤리적 정의가 이것이다. 느낀다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의 시간 속에서의 공존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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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만큼 자신을 위해 글을 쓴 사람이 있을까? 자신이 느끼기에 이토록 쉽게, 즐겁게, 통쾌하게 책을 쓴 사람이 또 있을까? 그는 섬광의 대가이며, 섬광의 어버이이며, 섬광의 벌레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은 그에 관한 아포리즘으로 성을 쌓고 싶어 한다. 정념을 냉각시키지 않고도 가장 고상하게 토로할 수 있는 형식은 아포리즘이 제격이다. 아포리즘은 논증이 아니므로 구차한 논리적 이성에 호소하지 않고, 우리 모두가 제청하고 박수치고 손사래를 칠 수 있는 의지와 직관의 육중한 무게를 배가한다. 아포리즘은 논증처럼 감산(減算)이 아니라, 더하기, 모임, 회합, 동호회, 말하자면 호손(Nathaniel Hawthorne)의 젊은 굿맨 브라운(Young Goodman Brown)이 한 밤중에 "숲"에서 목격했던 바로 그 무시무시한 악마적 집회와도 같은 것이다. 아포리즘은 촉각적이다. 피부를 파고드는 금속의 탄두처럼, 우리는 읽는다기 보다는 폭격을 당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아주 오래 전부터 우리 자신 안에 아포리즘이 이미 있었음을 깨닫는다. 아포리즘은 공통하는 육체, 관념, 실재의 합창이며 코러스이다. 그래서 아포리즘은 출발이 아니며 과정도 아니다. 말하자면 갈무리이다. 혹은 다음을 기약하며 우렁차게 외치는 끝 인사라고나 할까! 읽히는 글, 읽기 좋은 글, 읽기에 쾌적한 글, 우리를 편안하게 해주는 친절하고 이기적인 글, 그래서 우리를 머무르지 못하게 하는 글이 있다. 그러나 다른 집회도 있는데, 거기에는 쓰게 하는 글, 쓰고 싶어지게 하는 글, 오만하고 불친절한 글이 있다. 똑같이 오만하고 불친절한 대응을 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우리의 오기를 자극하는. 니체의 섬광들은 우리의 근성을 두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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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따주의 대가 에이젠슈타인(Sergei Eisenstein)은 영화 예술이 해야 할 일은 현실의 재현이 아니라 새로운 현실의 구성(창조)에 있다고 생각했다. 몽따주는 그 자체가 이미 변증법적 창조이고, 재료로서의 현실적 파편들의 파지(Aufhebung)이다. 각각의 조각들은 서로 충돌하기도 하고, 유인(attraction)하기도 하며, 대립, 모순, 보충, . . . 그러한 범 우주적 파동 속에서 폐지되었다가 새로운 현실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반복한다. 새로운 현실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인간을 그러한 파동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필요한데, 영화 예술이 바로 그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가령, 마르크스 식으로 말해 "비판의 본질적 파토스로서의 분노!"를 창출하는 것이다.
반면에 네오-리얼리즘을 옹호했던 바쟁(Andre Bazin)은 몽따주가 자연에 뭔가를 억지로 덧붙이는 행위라고 못 마땅해 했다. 그에 따르면 현실은 살아있는 것이고, 스스로 지속하는 것이다. 따라서 영화 예술은 그 살아있는 지속에 관념을 덧붙여 왜곡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스스로 말을 할 때까지 기다리며 주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에게 있어 영화란 무엇보다도 기다림으로부터 출발한다. 영화가 문학이나 회화와 본성적으로 다른 그 고유의 미학이 있다면, 다름 아닌 이 다큐멘터리즘이라는 것이다.
 

그들 말 대로 정말로 그런 것인지, 전제정권에 의한 민중의 학살이라는 유사한 테마를 다루는 서로 다른 두 가지 영상을 통해 이 대조를 확인해보자. 첫 번째 영상은 에이젠슈타인이 직접 구성한 몽따주 아니 새로이 창조된 현실의 이미지이다. 두 번째 영상은 안토니오니(Michelangelo Antonioni)가 참을성 있게 기다리며 포착한 살아있는 현실(약 2분간)의 이미지이다.  장면보기(용량이 커서 조금 기다려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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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벅스(Starbucks) 커피숍. 다방도 아니고, 카페도 아니고, 레스토랑도 아닌 곳. 90년대 혹은 200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서구 특히 미국 소비문화의 전형. 외국인들이 부쩍 많아지고 있는 대학가 주변, 셀프서비스, 아무렇게나(casual) 놓여져 산만하고 비좁은 의자와 테이블 혹은 미국식 자유, 어딘가 도시적인 취향의 인테리어, 오렌지색 실내등, 난삽해 보이면서도 뭔가 일관된 깔끔함, 냉소, 등등.


그러나 정작 영화나 TV에 나오는 미국인들을 간혹 보면 스타벅스 커피는 그러한 자유나 낭만과는 무관해 보인다. 아침 출근시간에 커다란 스타벅스 종이컵을 양떼들처럼 들고 다니는 걸 보면 말이다. 스티븐 소더버그(Steven Soderberg)의 영화 <버블>(Bubble)에서 아직은 기름 때가 덜 타 학생처럼 뽀얗게 생긴 풋나기 공장 노동자들이 점심 시간에 간이 테이블에 앉아 양손에 쥐고 먹는 햄버거와 콜라(우리도 그들과 똑같은 자세로 햄버거 한 입과 콜라 한 모금을 빨대로 빨지만, 식사라기 보다는 주로 별미 혹은 흥겨운 간식으로 먹는)처럼 말이다. 미국식 자유는 오히려 한국의 대학가 스타벅스나 맥도널드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 아닐까 싶다. 주목할 것은 사람들이 그곳에 들어와 앉아 공부를 한다. 단순히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숙제를 하고, 작업을 하고, 필기를 한다. 책을 읽을 때, 도서관이나 공부방 보다는 지하철이 더 편할 때가 있듯이, 스타벅스에는 현대인의 임기응변과 냉소가 짙게 배어있다. 젊은이들은 거기에 익숙해 있다.


외대(한국외국어대학) 앞 스타벅스 2층. 계단을 올라가자마자 왼쪽 옆으로 돌아 열 발자국 정도를 걸어간다. 화장실에 가기 위해, 그 사이에 놓여진 테이블 두 서너 개를 지나간다. 한 백인 청년과 한국인 중년 여성이 앉아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 중이다. 청년은 붉은 혈색이 도는 피부에 갈색 구렛나루를 하고 있었고, 여자는 두꺼운 안경을 쓰고 있다. 그녀는 화장실이 마주 보이는 방향으로 앉아 있고, 백인 청년은 계단 쪽 방향으로 앉아 있다. 화장실에 가는 동안 그 백인이 정면으로 보인다. 여자는 느린 속도의 영어로 더듬거리며 무슨 말을 하고 있었고, 남자는 무릎 위에 공책을 올려놓고 고개를 숙여 붉은 펜으로 무엇인가를 적고 있었다. 토론? 설교? 꾸지람? 부탁? 구걸? 아니면 이것저것.


화장실에서 나와 청년의 뒤쪽으로 걸을 때 그의 노트가 보였다. 그는 여전히 같은 자세로 뭔가를 적고 있었지만, 여자는 말이 없이 그를 바라보다가 눈을 돌려 멋쩍은 듯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걸음을 늦추어 그의 노트를 잠깐 본다. 노트에는 그녀의 말을 옮겨 적은 흔적도, 정리를 한 것도, 그렇다고 간단한 메모를 한 것 같지도 않았다. 사실 거기에 적힌 것들은 필기라고도 할 수가 없는 그런 것이었다. 그는 노트 여기저기에 강박적으로 붉은색을 칠해가며 낙서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림도 그렸다가, 글씨도 썼다가, 그런 것들을 남김없이 지워버린 파선들이 신경질적으로 삐죽삐죽 거렸다. 그녀는 다시 말을 하려는 듯, "Frankly speaking, yesterday, I go to . .  ." 하며 우물쭈물 거리지만, 그는 여전히 그러고 있다. 문법 탓이었는지, 따분해서인지, 아니면 그녀의 무례함에 불쾌해서였는지, 그는 계속해서 그 요란한 붉은 펜으로 침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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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 시절에 처음으로 동물원에 가서 놀랐던 것은 아마도 잠재적인 것(the virtual)이 지각과 의식으로 난입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림 책을 보거나 우화집을 읽을 때 조차, 나는 동물이나 사물, 그 밖에 세상 모든 것들을 마치 눈을 감고 걸어가는 몽유병자처럼 지각했다. 부피도 없고 잔주름도 없이 깔끔하고도 살균된 이미지들을 2차원의 형태로 상상했던 것이다. 그러나 동물원에서는 그 환영지대(phantom zone)의 이미지들이 창문을 부수고 나와 실제로 육체라고 하는,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잠재적 지속(virtual duration)이라고 하는 엄청난 것을 내 앞에서 드러내고 있는 것이었다. 백 년도 훨씬 넘은 거북의 뱃살에 새겨진 정신착란적 찰과상들,  슬로우 모션 영화를 보는 것같이 우아하기 그지없는 기린의 몸동작, 막대한 체적으로 시야를 압도하는 코끼리의 뒷다리, 송곳니를 드러내며 나를 노려보는 늑대와 사자들의 야수성, . . . 그들은 정말로 동물들이었고, 내게는 일종의 괴물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한결같이 내가 가져왔던 지각의 패턴을 흩트려 놓았다. 어린 시절 동물원으로의 외출은 그야말로 지각의 외출이었다. 어쩌면 실재에 대한 불안 의식이 싹트기 시작했던 것도 그 때이며, 한편으로는 내 일상적 지각이나 믿음에 대한 어렴풋한 권태가 밀려온 것도 그 때였던 것 같다. 그 후로 나는 아주 오랫동안 동물원에 가보지 못했다. 그러자 점차 그 권태와 불안은 잊혀져 갔다.

다 커서 동물원에 갔을 때, 이제는 지각의 흐트러짐 조차 또 하나의 지각이 되어가고 있음을 실감했다. 늙어가는 동물들을 바라보며, 어쩐지 저것들이 자신들을 바라보는 존재를 닮아가는 것 같았고, 한참이나 바라보던 나 또한 그 사실이 그다지 놀랍지가 않았던 것이다. 레드 피터(Red Peter)처럼, 살아나기 위해, 본인은 "잠시 동안만!" 이라고 매 순간 다짐하면서 실은 평생동안 흉내를 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지. 그렇게 그들은 더 이상 창살 쪽으로 가까이 와서 식식대며 좌-우로 배회하는 일이 없다. 간혹 아프리카 초원이나 남미 정글에서 새로 구입되어 막 갇힌 동물들만이 새 우리에 익숙해지기 위해 창살 쪽에서 이리저리 배회하면서 방문객들의 시선을 잠깐 끌고 있을 뿐이다. 다른 동물들처럼 그들도 곧 창살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눈에 띄지 않는 그늘이나 어두운 동굴에 엎드려 잠이 들어 있거나, 관리인이 던져놓아 한참 동안 바닥에 나뒹굴던 김빠진 먹이를 뜯게 될 것이다. 그들은 먹이로부터 초연하기까지 하다. 급기야 구경거리를 기대하던 방문객들이 동요를 일으키기 위해 이리저리 소리를 질러가며 약을 올리지만, 동물들은 오히려 더욱 더 인간다운 모습으로 하품을 해댄다. 누구의 창살이고 누구의 구경거리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누구의 것이든, 거기서는 그 무엇도 흥미를 끌지 못했고, 모든 것이 아무래도 상관없는 관심밖의 일인 것처럼 보였다. 사람들이 동물원에 가는 것은 바로 그러한 상태를 기대하고 예상하고 확인하고 싶어서인지도 모른다. 그곳은 낙원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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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서야 수 년 동안 계획하고 써 왔던 논문을 끝냈다. 350여쪽 분량의 두터운 책이 쓰여진 것이다. 시간이 급해 마지막 마무리가 좀 성에 안 차지만, 단행본으로 나올 때 보완 할 것을 감안한 것이니 문제될 것이 없다. 지겹고, 힘겹고, 두렵고, . . . 뭐 그런 막대한 경험들을 맛 본 시간이었다. 들뢰즈(Gilles Deleuze)의 이론과 예술론을 결합하여 구성한 연구서 혹은 주석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중간에 프레드릭 제이미슨(Fredric Jameson)을 번역 하느라고 거의 1년여간을 중단했었다. 완전히 중단한 것은 아니었고 잠재적 휴지상태 정도였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게 실수였던 것 같다(좋은 점도 있었지만). 중단했던 프로젝트를 다시 재개하는 것은 엎질러진 물을 다시 담는 일 만큼이나 힘든 일이었다.

수 개월 동안 <문예노트>를 돌보지 못해 거미줄이 끼어 있는 것 같았다. 가뜩이나 이전의 호스팅 회사가 불성실하고 문제가 많아, 다른 회사로 옮기려고 마음먹고 있던 터라, 손도 대고 싶지 않았다. 계약 만료가 원래는 8월중이어서 남은 기간이 한 달이나 남았음에도, 논문을 끝내고 바로 옮겨 버렸다. 서버 시스템상의 불일치 문제로 중간에 약간의 문제가 있었지만, 이제는 바로잡았다. 그럭저럭 잘 돌아가는 것 같다. 홀가분하다.

그동안 이론을 너무 강박적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자유로와지기 위해 시작했는데, 오히려 또 다른 차원에 구속되었던 것이다. 강박적 영혼에는 많든 적든 위선 같은 것이 있는 것 같다. 자유로워진다는 것, 자기 자신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바로 그것으로부터 결별하는 일일 것이다. 그러려면 아마도 더욱 더 나 자신을 위해 글을 써야겠지.

개인적으로 조동진의 노래를 아주 좋아한다. 흔히 잘 알려진 곡들만 듣기 때문에, 그의 노래의 깊이가 많이 알려진 것은 아니지만, 앨범들 전체를 들어보면 훌륭한 가수라고 생각한다. 음악 자체뿐만 아니라, 음악 활동에 있어서도 그는 많은 것을 시사해주는 가수이다. 대중가요는 그 대중적 태생과 성격으로 인해 불가피하게 상업 시스템이나 어떤 경우에는 이데올로기 선전 수단에 종속되기 일쑤이다. 그래서 천박함이나 정치적 진부함을 피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조동진의 차분하고도 요란하지 않은 음악과 음악 활동은, 저러한 시류들로부터 어떻게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는지, 또 대단한 예술적 경지까지는 아니더라도, 대중 가수가 어떻게 자신의 고유한 존재를 가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한 동안 음악을 듣지 못했는데, 비교적 여유로와진 이 마당에, 조동진의 깔끔한 한 곡을 들어본다.

(노래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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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는 베르그송의 '지속(dureé)' 개념을 설명하는 가운데, 정신과 물질의 "이원론적 일원론"에 관한 아름다운 구절들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정신과 물질은 전혀 다른 두 세계 같지만, 실은 하나의 세계가 수축하거나 이완되어 여럿으로 다양하게 공존하는 결과이다. 가령, 정신의 무한한 이완 상태는 회상과 꿈(무의식)이 될 것이고, 그것이 점점 수축되어 지각(perception)이 되다가, 곧 수축된 지각은 점차 물질이 되었다가, 또 더 나아가면 연기라든가 공허와 같은 물질적 이완상태가 무한하게 연장되어 점차 우주론적으로 팽창하게 된다는 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신 속에는 물질의 표상이, 물질 안에는 정신의 형식이, 또 수축 속에는 이완이, 이완 속에는 수축이 내재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현실이란 꿈의 수축상태이고, 꿈이란 현실의 이완상태인 셈이다. 이것이 베르그송주의의 심오한 "이원론적 일원론"이며, 그 안에서 모든 존재는 수축과 이완의 정도들의 공존이라는 것이다.


웃을지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생활의 측면에서 볼 때, 거지라든가 예술가들은 현실적 필요 즉 수축상태를 상실하고 무한한 이완상태의 현실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고, 생활의 필요에 종속되어 부지런한 노동 속에서 긴장된 삶을 사는 사람들은 수축상태의 현실을 사는 사람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공부를 잘하고 출세를 하려면 수축해야 하고, 넓은 시야를 가지려면 이완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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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력해진 믿음이라는 공포영화의 주제는 초자연적 존재를 등장시키는 영화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귀신과 대면하고 그를 쫓아내고자 하는 과학적 믿음과는 다른 형태의 믿음도 있다. 그것은 현실적 질서 안에서의 다른 세계와 대면하는 믿음인데, 바로 인간의 현실을 미신의 세계가 아닌 범죄의 세계로부터, 더 정확히는 부당함의 세계로부터 지켜야 한다는 법적 믿음(혹은 소유의 믿음)이다. 미국 헐리웃 영화들의 지배적인 테마인 이 믿음은, 이제는 범죄자에 의해 반격을 받아 죽어 가는 경찰관들을 설정함으로써, 그 믿음의 무력함이 점점 극단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것은 과학적 믿음의 무력함에서 나오는 공포와는 또 다른 형태의 공포일 것이다.


간단한 예를 들어, 로버트 드니로(Robert De Niro)가 나오는 『15 minutes』에서의 충격이란, 대중매체를 통해 시민의 우상이 되었던 경찰관이 바로 시민들이 바라보는 텔레비전 속에서 범죄자에 의해 굴욕적인 죽음을 당하는 장면일 것이다. 또 게리 올드만(Gary Oldman)이 출연하는 『Romeo is Bleeding』에서 가장 불쾌하면서도 기괴했던 장면은, 범죄 집단의 하수인으로 전락한 한 경찰관이, 몇 가지 실수로 인해 오히려 그들에 의해 처벌을 받으면서, 애원과 함께 발가락이 잘리는 장면이었다(이것은 아마도 게리 올드만 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이 아닐까 싶다. 그의 연기에는 인간의 타락에 대해 우리가 느끼는 근원적인 공포를 역겨움으로 전환시키는 면모가 있다). 이 외에도 더 많은 목록을 작성할 수 있을 것이다.


5년 전만 해도 스릴러 영화에서 문제 해결을 위해 경찰관이 등장하면 다소 마음이 편해지는 경향이 있었지만, 최근에는 문제 해결에 있어 오히려 방해가 되거나, 심지어는 위협적인 존재가 되어, 더 불안해지기만 한다. 법적인 믿음의 무력함과 불신만을 확인하기 때문일 것이다. 경찰이나 변호사와 같은 법적 존재는 이제 공포영화에서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헐리웃 영화 제작자들이 직면한 문제가 바로 이점일 것이다. 어떤 공포를 만들어내어야 할까? 이 질문은 우리가 가장 믿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것과 관계가 깊다. 우리는 무엇을 믿고 있는가? 혹은 더 나아가 우리에게 믿음이 존재하는가?


아마도 공포의 본질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종교적 믿음의 시련이 될 것이다. 특히 십자가에 매달려 처벌을 받는 신의 아들, 신의 말씀을 실천하는 성직자의 시련과 같은 주제가 그 경우에 해당된다. 그러나 종교적 믿음에 있어 현대적 공포란 그 보다 더 근본적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간단히 말해 그것은 시련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 자체의 문제, 즉 현대인들이 서서히 신의 죽음을 자각하게 되면서 느꼈을 법한 무한한 공포 혹은 불안과 관계가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멜 깁슨(Mel Gibson)의 『예수의 수난(The Passion of the Christ)』(2004)은, 믿음을 불가능하게 하는 외부의 적이나 시련에 맞서는 투쟁과 그 의미를 문제 삼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믿음의 사라짐 혹은 믿음의 존재 자체에 대한 공포, 즉 믿음 내부의 투쟁으로부터 출발한 영화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영화에는 예수가 어떻게 시련을 극복 하는가 혹은 수난이 의미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혹은 왜 그는 수난을 받아야 하는가와 같은 신학적 질문이 불필요해 보인다. 오로지 수난 그 자체, 시련의 강도, 나아가 수난의 형상화가 문제인 것이다. 그것은 믿음이 사라져버릴 것에 대한 공포, 믿음 자체의 회의감에서 오는 공포를 전제로 한다. 마치 사라져버릴 꽃의 아름다움을 보존하기 위해 붓을 들어 난잡에 가까울 정도로 색채를 추구 하듯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불안에서 비롯된 그 믿음은 이미 종교적 의미를 상실한 것이다. 그래서 그 영화는 더 이상 고유한 의미에서의 종교영화라고 보기 어렵지 않나 싶다. 순수한 공포영화라면 맞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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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 브레송(Robert Bresson)의 영화 『어느 시골 사제의 일기(Journal D'un Cure de Compagne)』(1951) 는 신과 신앙에 대한 냉소적인 태도가 강렬하게 표현되어 있다. 작품의 형식은 제목 그대로 간략한 형태의 일기들로 꾸며져 있다. 한 젊은 신부가 시골 교구로 부임을 한 후에 거기서 위암으로 죽을 때까지 얼마간의 삶이 그 일기에 적혀있는데, 내용은 주로 자신의 신앙심에 대한 반성, 아니면 신에 대한 단편적인 생각, 그리고 무엇보다도 교구 사람들과 지낸 짧은 에피소드들이다.

 

그는 마을 사람들과 원만한 관계를 가지지 못했다. 다소 경직되어 보이는 그의 경건한 태도 때문인지, 아니면 사람들의 부족한 신앙심 때문인지, 사람들은 여러 차례에 걸쳐 진흙 속으로 그를 끌어들여 함께 뒹굴며 그를 망가뜨리고 싶어 했다. 그는 자신의 의무를 져버리지 않기 위해 사람들의 갈등과 고통을 함께 고민하고 기도했다. 고통 그 자체인 삶 속에서 신의 은총을 설교하고, 젊음을 잃어가며 그것의 존재함을 증명하고자 애썼다. 때로는 그것이 그들에게는 지나친 간섭처럼 보였고, 때로는 교회가 그렇듯이 신의 이름으로 그들의 사적인 삶을 제한하려는 의도처럼 보였다. 오해와 불신의 화신처럼 보이는 이 죄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는 오로지 침묵하는 것만이 평온해지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불신과 오해는 더 커져갔다. 오해는 주로 사람들 자신의 상상 속에서, 자신들이 꿈꾸고 욕망해왔던 것과 똑같은 그림들을 그에게 되비추면서 생겨났다. 그가 술을 마신다든지, 자살을 부추겼다든지, 남의 비밀을 엿본다든지 하는 식으로. 그는 더욱 더 침묵했고, 자신에 대한 판단을 그들에게 완전히 내던져버리고 말았다. 또 그것 외에는 길이 없었다. 외딴 방에서 혼자 지내는 밤의 공포는 점점 심해졌고, 잠에 빠지는 것은 대낮의 모든 고통을 한꺼번에 끌어안은 채 자신의 베개 밑으로 침수하는 것 같았다. 신에 대한 그의 신앙심은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결핵인줄 알았던 병세가 위암으로 판정되고, 그는 침묵조차도 견딜 수 없을 만큼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오래 전 신부 수업을 함께 받던 친구가 신의 의무를 저버린 자신의 과오를 고백하자, 그는 숨을 거두며, 어쩌면 신께로 돌아가며, 마지막 말을 남겼다: "무슨 상관인가? 모든 것이 은총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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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것 만큼 사악하고, 나약하고, 위선적이고, 속물스러운 것도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여행이란 근본적으로 속물적인데가 있다. 간혹 마음이 변해 되돌아오지 않는 이도 있긴 하지만. 되돌아오는 사람, . . . 고향에 다시 얼굴을 들이미는 사람, . . 그들을 조심하라!

로렌스(D.H. Lawrence)의 작품 <채털리 부인의 연인(Lady Chatterly's Lover)>에서 코니를 단순한 불륜이나 부도덕으로 치부할 수 없는 이유는, 여성성의 회복이나 남성에 대한 주체성의 확립과 같이 여성독자들의 파격적인 박수 때문이 아니다. 근원적인 육체성의 긍정 때문도 아니다. 그 보다는 그녀가 완전히 떠날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녀는 배신자가 되어 다른 남자의 애를 밴 채 남편과 마주섰다. 그녀의 진지함에 놀라울 따름이다. 이기적이고 무능해서 기껏해야 여행에 만족하고 마는 겁쟁이 남자들과는 다르게, 되돌아온 그 순간에도 그녀의 삶과 확신은 저편에 있었던 것이고, 앞으로도 결코 되돌아가지 않을 만큼 확고한 것이었다. 그녀는 진심이었던 것이다! 마치 "삶의 부활"이 가능해지는 유일한 길인것 처럼.

같은 맥락에서 간혹 작가들의 자살이란 위대한 불륜과도 같다. 울프(Virginia Woolf)가 좋은 예이다. 아마도 진심으로, 진정으로 살다보니 자연스럽게 생긴 용기일 것이다. 진심으로 살면 두려움이 없어진다. 자신의 욕망을 믿었던 코니처럼 정치적인 사람이되어 머리도 좋아지고 총명해질 뿐만아니라.

이 만큼 인생에서 역설적인 일도 없을 것이다.

진심으로 사는 이들은 시인들이 광기에차서 내뱉은 횡설수설들, 가령 "세상이 바로 내집이다"라든가, "죽음은 기쁨이다"하는 식의, 우리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그들만의 몽상과도 같은 진실을 점차 깨달은 사람들이다. 코니가 그랬듯이, 집 밖의 삶이 더 아름답다고 믿게 되었거나, 방안의 물건들이 없어져도 삶은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거나, 윤회를 믿게 되었다거나, 바람 속에 우리의 영혼이 있음을 점차 깨닫게 된 것이다. 그리고는 한꺼번에 태워버리듯, 아낌없이 그 흐름 속에 자신의 육신을 내던진다. 울프가 물속으로, 흐름속으로, 바람속으로 들어간 것은 정확히 이런 식이었다. 코니의 불륜처럼, 피츠제럴드의 방탕처럼, . . . 모두가 물속으로, 대기속으로 흩어져 버리는 것이다.

이들이 진정한 글쓰기를 했다면, 그것은 바로 결코 되돌아오지 않는 바람이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언제나 최후로, 아무도 가보지 않은 곳에 갈 요량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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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아침. 팔등에 소름이 돗아 간지러울 만큼 싸늘했다. 그와 그녀는 벤취에 앉아 빵과 차를 마시고 있다. 그들은 서로 각자의 생각에 빠져 있었지만, 함께하고 있다고 느꼈다. 기름진 빵과 향기롭고 따뜻한 차. 서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이 얼마나 행복한 시간인가! 따가운 햇살에 머리를 반쯤 묻고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던 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좀 역설적인 일인데, 피츠제럴드(Scott Fitzgerald)는 새 삶을 찾기 위해, 자신이 간신히 빠져나왔던 술독의 소굴로 잠깐 되돌아간적이 있었어. 파리 몽마르뜨의 유흥가. 블랑슈의 거리들. . . 시간과 돈을 뿌려대며 방탕했던 지난 세월을 떠올리면서 이곳 저곳을 걸어다니다가, 그는 문득 '방탕'에 대해 이렇게 말했어. '방탕이란 엷은 공기 속으로 흩어져 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유에서 무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 . . 내 생각인데, 아마도 저러한 생각 덕분에 자신이 버렸던 그 세월을 후회하지 않고 기꺼이 받아들일 수가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아니 그랬기 때문에 진정한 소설을 쓸 수 있었던 것이겠지. 무절제하게 다 써서 잃어버리는 와중에도 무엇인가가 만들어지고 창조되고 있었다는 것. 무엇인가를 잃어버리지 않고는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고 했던 푸르스트(Marcel Proust)의 말처럼, 잃어버리는 것 그 자체가 하나의 소득이 되는거야. 예술적 비젼 속에서는 저렇게 괴상망측한 형태의 경제가 실현되고 있지. 예술은 그를 모든 것으로부터 초연할 수 있게 했고, 그로써 자신과 삶의 악덕 조차도 끌어안을 수가 있었던 거라고 할까? 확신하건대, 예술의 궁극적인 주제 아니 목적은 '바람이 되어 흩어지는 문제'임에 틀림없어. 홀가분해지기 위해서든,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든 말야. 하지만 피츠제럴드처럼 술독에 빠지지 않고도 그럴 수 있으려면, 마약이나 알콜중독보다도 더 급진적으로 '그 무엇도 아닌 것'이 만들어지려면, 뭔가 굉장한 고통이 있어야 할거야. 술에서 깬 후의 허탈이나 금단의 환각으로는 비교도 되지 않는 고통말야. 그 고통 역시 잃어버려야 할 하나의 댓가겠지만, 또 그것이 두려워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개를 숙이고 되돌아가지만 말이지. . ."

그러자 그녀는 옆에 앉아 차를 한 두 모금 마신 후에, 태양을 한꺼번에 마셔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가슴 속 깊이 햇살을 들이마시고는 이렇게 말했다.

"가을은 있잖아, 모든 것이 영원할까? 하고 질문하게 만드는 계절인것 같아."

그는 궁금해진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흥미롭게 보았다. 방금 전에 자신이 했던 예술과 고통에 관한 요설들을 까맣게 잊어버린채, 그날 아침 그가 몸으로 느꼈던, 그래서 그를 저러한 사변적인 생각으로 이끌었던 삶의 분위기를, 어쩌면 그녀가 가을의 주제로 더욱 더 적절하게 표현해 줄 것만 같았다. 그녀가 말을 계속 했다.

"그러니까, 내 생각이 갑자기 나를 떠나버리는거야. 영혼이라고 불러도 상관은 없어. 어쨌든 내가 나를 떠나 저 먼 곳으로, 아니면 저 먼 미래로 가고 있어. 내가 여기에 있는 한, 나도 이 계절도 모두가 사라져버릴테니까. 이 짧은 계절을 갑자기 멈추기라도 하듯, 날아가버린다고 하는 것이 더 맞을거야. 그리고는 이 빵과 녹차의 맛. 저 햇살. 내 옆에서 조근조근 들려오는, 강렬하지만 조용한 당신의 그 얘기들. 심지어는 그 예술과 고통까지, . . . 이 모든 것들이 영원할 수 있을까? 하고 말야. 사람들이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는 행위들은 이런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어. 아쉬워 하면서, 죽기전에 사진을 찍어놓듯이, 무언가를 남기기 위해 먼 곳으로 날아가보는 거지."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그녀의 말을 거들어 한 마디 덧붙였다.

"말하자면 떠나기 직전의 계절이로군. 다시는 영원히 오지않을 계절처럼, 어쩌면 바람이 되어 흩어지는 것이 두려워 견딜 수 없는 계절처럼말야."

다시 그녀가 말을 이었다.

"응, 그래서 모든 것이 예사롭지가 않아. 나와 당신의 숨소리까지, 모든 것이 뜻깊게 느껴지고, 매 순간의 경험이 진하게 느껴지는 것 같아. 만약에 내 말이 맞다면, 예술은 바람이 되어 흩어지는 것이기 보다는 오히려 남기는 것이 아닐까? 죽음을 의식하는 자만이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쓸 수 있는 것 같아. 죽음을 극복하는, 소극적이지만 유일한 길이지. 이런 아침이 또 올까? 하고 계절이 사라지길 아쉬워하면서, 조용하고도 자그마한 아침 만찬을 만끽하는 우리처럼. . . ."

그렇게 한참 동안 그녀의 말을 들으며 그는 또 사변적인 생각에 빠져들었다. 전혀 엉뚱한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그녀의 말을 다른 관점에서 해석한, 가령, 성실한 삶 만이 뜻 깊다고,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믿는 삶은 얼마나 초라한가! 이렇게 생각하며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도서관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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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학에서는 인과관계나 모순관계를 나타내는 접속사들―그러나, 그러므로 등―을 사용한다. 이 접속사들은 항들의 관계를 종속적인 것으로, 즉 관계의 원인을 항들 내부 속에서 찾는다. 가령, “A 그러므로 B”에서는 A가 B의 원인이 된다든지, “A 그러나 B”에서는 두 항이 투쟁하여 하나를 제거하려는 경향이 있다든지, 아니면 B가 A를 근거로 새로운 관점으로 이탈하거나 반대한다든지 하는 식이다. 어느 모로 보나 두 항의 관계의 원인은 둘 내부―두 항들 중 하나―에 있고, 힘의 관계가 권력적이거나 종속적인 구조를 갖는다. 들뢰즈(Gilles Deleuze)는 유럽식 특히 프랑스식 사유를 "하나의 점을 찍는 방식"이라고 말했다. 가령, 우리는 "비가 내린다" 혹은 "태양이 이글거린다"라고 말함으로써, 마치 "비"라든가, "태양"과 같은 하나의 점이 미리 존재하고, 그 점이 부슬부슬 내리거나 이글거리는 속성들을 소유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마치 손을 뻗으면 당장에라도 만질 수 있기라도 하듯. 선분은 점들의 집합이라고 생각하듯이 말이다. 그런 식으로 점을 찍고 나면 모든 술어적 관계들이 종속적으로 배열되어, 근원 또는 기원이 생기고, 제1원인이 탄생한다. 문장에서 주어가 술어들의 주체이고 세대주가 되듯이 말이다. 다수의 실질적 원인들을 거꾸로 뒤집어서, 그 결과를 맨 앞에 세우고는, 마치 그 결과가 원인인냥, 주인인냥, 전도된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거꾸로 내리는 비 혹은 타들어가는 태양이라도 된다는 듯이. 존재란 무엇인가? 자아인가? 감각인가? 물인가? 흙인가? 들뢰즈는 바로 이러한 종속적 사유를 관계판단의 논리로 은폐하는 영역이 바로 논리학이라고 말한다. 관계의 원인이 항들 내부에 배열되어, 하나가 다른 하나를 주관하거나, 제1의 원리가 되는 방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들뢰즈는 이러한 구조적 논리학을 넘어서 진정한 관계의 아상블라주를 위해 "등위접속사(그리고)"를 사용하라고 권한다. 등위접속사는 항들을 종속시키지 않고, 동등한 관계에서 공존하게 한다. 그것은 구조적 종속으로 관계를 판단하는 접속사가 아니라 파편들을 긍정하는 접속사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새롭게 등장하는 항들을 이전의 항에 대한(~ 에 의한, ~의) 관계로 배열하지 않기 때문이다. "A 그리고 B"에서는 관계의 원인이 항들 속에 있지 않다. 그 어느 누구도 제1원인이 되지 못하며, 다만 선후 관계 속에서 어느 것도 훼손시키지 않고, 공존 속에서 관계를 만들어낼 뿐이다. 그들의 관계는 관계하고 있는 항들 밖에 존재한다. 등위접속사 "그리고"는 미리 기획된 전체도 가지지 않고, 관계하고 있는 존재들을 종속시키지도 않고, 그들이 근접해 있거나, 그들 간에 선분이 그어짐으로써, 어떤 효과로서 전체가 발생한다. 이것이 바로 휘트먼(Walt Whiteman)의 "카탈로그"나 "행렬문장"과 같은 파편적 글쓰기가 예증해주고 있는 아상블라주(assemblage)이다. 그것은 하나이면서도 다수이고 다수이면서도 하나인, 결코 하나로 붙일 수 없는 것임에도 하나의 효과를 내고 있는 엠마(Emma)의 눈과도 같다.

그건 그렇다치고, 언젠가 내가 노트에 메모한 내용 중에, 바로 저 등위접속사를 "긍정의 접속사"라고 적으며, 그 예로 괄호 속에 이렇게 적은 것이 눈에 띄었다: "나 그리고 선인장!, 나의 선인장!" . . . 앞에 것은 이해가 되는데, "나의 선인장"은 왜 적었을까? 소유격 아닌가? 선인장은 나의 소유물이고, 나는 선인장의 주인이 아닌가? 긍정적 관계가 아니지 않은가?

지금 생각해보니, 아마도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며 저 메모를 했을 것 같다. 나는 물론 선인장을 소유하고 있다. 내가(더 정확히는 친구가) 비용을 지불하고 사들였기 때문에, 저 선인장은 내 소유로 된 방에 귀속되어 있고, 우리는 법적인 질서 혹은 여타 형태의 사회적 질서 속에서 소유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선인장의 존재의 원인은 아니지 않은가? 물이 컵에 담겨 있다고 해서, 컵이 물의 존재의 원인이 아니듯, 관계의 위계를 표상(representation)하는 종속이나 소유 형식이 관계 자체의 본질은 아니지 않은가? 오히려 자연 안의 모든 관계는 본질적으로 이미 긍정의 접속사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스피노자의 능산적 자연처럼, 자연은 다수의 종속적 관계 속에서도 여전히 하나의 공존의 관계가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나의 선인장"은 "나 그리고 선인장"이라는 긍정의 관계 위에서만 성립가능한 표상적 관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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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을 갈아입는 바람에 신분증을 놓고 왔다. 지하철을 타기 직전에 알고 있었지만, 다른 선생이 열람실 안에 있겠거니 생각을 하고 그냥 지하철을 타 버렸다. 그러나 평소 같았으면 항상 자리에 있던 선생이 오늘은 나오지 않았다. 불도 꺼져있었고, 문도 잠겨 있었다. 보안설정이 되어 있음을 알리는 파란불 두 개도 문 고리 옆에서 번쩍이고 있었다.

잠시 망설이고 있는데, 복도 저편에서 청소하는 아주머니가 보였다. 무슨 대청소를 하는 날이었는지, 교실에 있던 모든 의자와 책상들이 복도로 나와 있었고, 아주머니 몇 명은 이 교실 저 교실에서 덜그럭거리며 소리를 내고 있었다. 내 눈에 띈 그 아주머니는 잠시 나와서 쉬고 있는 듯 했다. 그녀는 양말을 벗은채 앞에 놓인 의자 위에 다리를 올려놓았다. 내가 다가가자, 무슨 일인지 궁금하다는 듯이,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저, . . . 401호 연구실이 문이 잠겨 있는데, . . ."
내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그녀는 바로 대답을 했다.
"저희는 몰라요. 들어갈 수가 없어요."
"아, . . 열 수 없으신가보죠?"
"네 . . ."
아침에 와 보면 항상 휴지통이 비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마도 착각을 한 것 같았다. 나는 더 할말이 없어, 보안요원을 떠올리며 돌아섰다. 걸어가고 있자니, 다소 멀어진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1층 관리실에 가보세요. 아마 거기서 열어줄 거예요."
나는 대꾸하지 않은 채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갔다.

1층 로비에는 흔히 보안요원이나 관리 아저씨가 앉아 있었지만, 지금은 한가한 방학중이어서인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뒤편으로 돌아가 관리실도 가 보았지만, 문이 잠긴채 아무도 없었다. 약간 난감했다. 기다려야 하나? 어딜 간 것일까? 곧 오긴 오는건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로비 저 쪽에서 낮익은 얼굴이 보였다. K교수였다. 나는 잠깐 머뭇거리며, 그녀에게 가서 인사를 해야할지 말아야 할지를 고민했다. 그녀는 학생처럼 캐쥬얼한 옷차림에 여행가방 같은 보따리를 들고는 문 밖으로 나가려는 듯 했다. 걸어가며 내 쪽을 쳐다본 것 같은데, 나를 알아보지는 못했다. 혹은 다들 그렇듯이, 보았지만 그냥 지나치고 싶었는지도.

수년 전에 잠깐 동안 함께 일을 하게되어 알게 된, 말하자면 선배였다. 일을 하는 동안은 편하게 지냈지만, 그녀가 교수가 된 이후로는 그렇지 못했다. 학교에서 우연히 마주친 적이 여러 번 있었는데, 만나면 서로 오랫 동안 머물러 있지는 않았다. 처음엔 4-5분 정도 서로의 근황을 물어보았고, 두 번째는 한 번 놀러오라는 인사만 하고는 바쁘게 지나가 버렸다. 세 번째는 눈 인사만 하고 지나쳤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하지만 왠지 이상하고도 불합리한 일들 중의 하나라는 생각이 그녀를 마주칠때면 들곤 했었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나는 천천히 그녀 쪽으로 다가갔고, 그녀 역시 천천히 문 밖 쪽으로 걸어갔다. 처음엔 그녀가 문 밖으로 나가면, 나도 그냥 돌아서려고 작정했다. 하지만 내 걸음이 좀 더 빨라서인지, 그녀의 걸음이 느려서인지, 이제는 작은 목소리로 부를 수 있을 만큼 가까이에 있었다. 나는 뒤에서 부르듯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그녀는 뒤를 돌아 나를 보았다. 의외라는 듯 미소를 지으며 나를 알아보았다.
"아,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어요?"
"저야 뭐, 그냥 그렇죠."
대답을 하는 동안 그녀의 목덜미와 어깨가 보였다. 목이 둥글게 라운드처리가 된 티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왼쪽 목 부분에는 악세서리처럼 작은 꼬리표 같은 것이 달려 있었다. 상표 이름이 영어로 씌여 있었지만, 너무 작아 읽을 수는 없었다. 그 꼬리표는 특별한 이유 없이 달려있는 헝겊 조각이었는데도, 자그마하게 박음질된 영어 문자들과 그 색깔 덕분에, 평범한 티셔츠에 불과한 그녀의 옷을 세련된 그 무엇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것을 잠시 바라보고 있는데, 그녀가 말했다.
"어제 잠을 잘 못 주무셨나봐요? 안색이 . . . "
간 밤에 잠이 오질 않아 아침까지 뒤척였고, 겨우 점심 때 즈음에 일어나 부랴부랴 나오는 터였다.
"아, 네, 좀 . . . 티가 많이 나나요?"
"얼굴에 씌여 있네요. . . . 그래, 요즘엔 어떻게 지내세요?"
언제나 그랬듯이 상냥한 목소리로 그녀가 물었다.
"그냥, 뭐, 이것저것 쓰고 있죠."
"뭘 쓰시고 계세요? 이론에 관한?"
"네, 그냥, 예술에 관한 논문을 쓰고 있어요. . . 선생님은 요즘에 어떻게 지내세요?"
나는 말을 돌려 그녀에게 물었다.
"저도 그냥 뭐 . . . "
"방학인데, 어디 안 가세요?"
"글쎄요, . . 어딜 갈 수가 없어요. 애가 이제 중3이 되어서, . . ."
"아, 네, . . "
"애들 대학 보내기가 너무 힘든가봐요?! 지금 중3인데도, 뒷바라지 할 것이 얼마나 많던지 . . . 도통 다른 일에 신경을 못쓰겠어요."
그녀는 이제 부조리한 교육의 가장 직접적인 당사자가 된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뭔가 힘을 줄 수 있는 말을 해주어야 겠다고 느꼈다. 그래서였는지 하마터면 대학과 교육제도에 관하여 험담까지 할 뻔 했다. 하지만 흔히 하는 따분한 멘트 말고, 우리 사이에 할 수 있는 말은 별로 없었다.
"그럼요, 말로 다 못하죠. 요즘엔 정말로 애들 대학 보내는 부모는 대단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이렇게 말하자, 처음엔 호기심을 가지며 듣는 듯 하더니, 금새 그녀의 안색이 약간 바뀌는 것 같았다. 내 말에 동의를 한 것인지, 아니면 너무나 진부한 대답이어서인지, 아니면 다른 어떤 생각이 들어서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그다지 흥미로운 대답을 듣지 못했기 때문이었을지도.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도 가지지 않은 내가, 그녀의 귀를 솔깃하게 해줄만한 코멘트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잠시라도 더 머물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떠나려는 듯 문 밖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대학을 보내는 거야 뭐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닌데, 좋은 대학 보내기가 . . ."
그리고는 가방을 어깨에 저며 메고는 문 고리를 잡고 서서히 밀기 시작했다. 어쨌든 만나서 반가웠다고, 또 나중에 보자고, 바빠서 이만, 그럼 잘 지내라는 등등의 메세지를 한꺼번에 담은 눈인사를 하며 그녀는 밖으로 나갔고, 나 역시 약간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다시 로비로 돌아와 관리실을 살폈다. 여전히 사람이 없었다. 살펴보니 로비 데스크 구석에 관리자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곧바로 나는 휴대폰을 들어 전화를 했다. 음악소리가 몇 초간 들리더니 그가 전화를 받았다. 그는 잠에서 깨어난 듯한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누구십니까?"
"네, 저, 401호 문이 잠겨서요."
"보안카드 없어요?"
"네, 오늘 안 가져왔거든요 . . ."
그는 잠시 생각을 하는 듯 하더니, 뭐라고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전화를 끊었다. 오겠다는 것인지, 전화가 그냥 끊어진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잠시 후 관리실 쪽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관리실 안 쪽에 또 하나의 방이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낮잠을 자고 있었던 듯 싶다. 가끔 로비에서 보았던 관리 아저씨였다. 그는 불만에 싸인 얼굴로 고개를 숙이며 내 쪽으로 걸어 나왔다.
"카드 가지고 다니세요."
그는 나즈막히, 그러나 짜증이 섞인 투로 말했다.
"네, 죄송합니다."
나는 짧게 대답을 하며 그를 따랐다. 어깨를 앞으로 많이 굽힌 50대 중년이었다. 아직도 잠에서 덜 깨어서인지, 오른쪽 손으로 히스테리컬하게 귀를 긁어가며 앞서가고 있었다. 나는 뒤를 따르며 붉게 물든 그의 목덜미와 주름을 보았다. 엘리베이터 앞에 섰을 때, 그는 잠에서 깨어나 정신이 맑아진 것 같았다. 무엇때문인지 방금 전과는 기분이 달라보였다. 심지어 그는 작게 휘파람까지 불며, 이쪽으로 탈까? 저쪽으로 탈까? 하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잠시 동안의 침묵이 흘렀다. 엘리베이터 문이 거울처럼 반사가 되어, 우리 두 사람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왔다. 각자 벽을 바라보며 눈을 부딛치지 않으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4층까지는 꽤 긴 시간이었다.

방으로 들어와 자리에 앉자마자 다시 일어섰다. 캐비넷에 있는 컴퓨터를 가져오기 위해서였다. 방을 나와 의자들이 널부러져 있는 복도를 걸어갔다. 캐비넷은 복도 끝에 있었고, 거기까지 가는 동안 교실에서 바쁘게 손 발을 놀리며 청소하는 아주머니들이 보였다. 내가 캐비넷을 열자마자 한 아주머니가 복도에 나와 나를 쳐다 보았다. 그녀는 개의치 않고 다시 가던 길을 가기 시작했다. 나는 컴퓨터를 빼 내어 손에 들고, 그녀가 가는 길을 따라 뒤에서 걷고 있었다. 곧 다른 아주머니가 교실에서 나와 내 뒤를 따르고 있었다. 복도에 있는 의자들 때문에 우리는 한 줄로 나란히 걸어야 했다. 그녀는 걸어가며 내 앞에 있는 아주머니에게 말을 걸었다.
"그 불 언니 혼자 달수 있겠어? 언니?"
그녀의 말은 누구나 사용하는 평범한 단어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앞에 가는 언니를 배려해주는 따뜻한 말이었지만, 크게 떠벌리는 듯한 목소리의 톤과, 째지는 듯한 말씨와 어조는 이상하게도 천박함이 배어있었다. 그녀는 "언니"라는 단어를 유난히 반복해서 발음함으로써, 그 언니에게 무엇인가를 전달하고 싶어 하는 듯 했다. 그러자 이에 화답하듯, 내 앞의 아주머니가 말했다.
"응, 괜찮아, 내가 충분히 달 수 있어."
언니의 대답 역시 아우의 걱정에 고마워하듯 따뜻한 말투를 자아내려는 듯 했다. 동료간의 우애를 보여주는, 그러나 약간은 과장된 그들의 그 짧은 대화는, 그들이 사력을 다해 힘겹게 끌고 가고 있는 수레처럼 느껴졌다. 한 번도 타 보지 못해 어색한, 아니 올라타기 위해 또 하나의 일을 해야하는 수레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들은 그 이상의 다른 것을 바라고 있지는 않아 보였다. 뒤에서 오던 아주머니가 물었다.
"그럼, 고기는 내가 가져갈까?"
"응, 그려, 고기하고, 술 두병하고 가져가."
"비닐에 싸야지?"
"아니, 싸지 말고 그냥 가져가도 돼."
"그래, 알았어, 빨리와."
그들은 일을 빨리 끝내고 파티라도 할 참인듯 했다. 아마도 언니는 마무리 일을 하러 가는 중이었고, 아우는 파티 준비를 위해 어딘가로 삼겹살 몇 점과 소주를 나를 것이다. 조용 하면서도 날렵한 걸음걸이로 각자가 할 일을 절도있게 분담하고 있는 모습이 대단히 진지해보였다. 큰 소리로 나눈 대화였지만, 마치 귀속말을 주고받으며, 아무도 모르게 군침도는 세기의 밀회라도 즐길 분위기였다. 나는 자리로 돌아와 컴퓨터를 연결하고 잠시 생각에 빠졌다. 알 수 없는 전율이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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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의 실체는 무엇일까? 작가의 의도 혹은 계획 아니면 비젼? 흔히들 글을 쓰는 일이 견딜 수 없다고 말한다. 때로는 자연과의 투쟁에서 오는 농부의 고달픔에 비유하기도 하고, 겁없는 프로메테우스의 고통에 견주기도 하면서 말이다. 그러면서도 쓴다고, 그래서 위대한 것이라고 말이다. 하기야 고통스럽지 않은 노동이 어디 있겠는가? 어쨌든, 컵을 잃어버린 액체의 긴장처럼, 불안한 상태를 지속시키고 있어야 할테니 말이다. 하지만 사람들 대부분이 글쓰기를 고통스러운 행위라고 보는 이유는 글이 저자의 계획의 산물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신처럼 세계를 만들어야 한다고, 그래서 갖추어야 할 흐름이 있다든가, 지켜야할 규칙이 있다든가, 견뎌내어야 할 의무가 있다든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내 생각에 글의 본질은 그 보다는 조각난 생각들에 있지 않나 싶다. 머릿 속에서 언뜻 언뜻 들었던 통찰, 몽상적인 상태 속에서 떠올랐던 어떤 의미, 예기치도 않았는데 갑자기 우뚝솟아 오르는 본질적인 이미지, . . . 체계나 구조 없이 불쑥 불쑥 고개를 내미는 부스러기 섬광들! 누구에게나 있는!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이든, 받은 사람이든, 인간을 사랑하는 사람이든, 증오하는 사람이든. 진정으로 살다보면 누구에게나 끊임없이 생겨나는 것들, 우리의 작은 관계와 행위들에 특별한 의미를 가지게 해주고, 그렇게 나타났다가 사라져버리고 마는 마음 속의 아포리즘들, 가령, "그에게 그런 면이 있었네?!"하는 식의 질문이나 통찰 말이다. 작가들은 이러한 섬광들을 기록해둔다. 단어 하나, 점 하나, 숨소리까지도. 노트 말이다 노트! 삶을 향유하지 않고 그러한 노트가 가능할까? 위대한 작가들의 작품은 바로 이 섬광들로 채워져 있다. 섬광의 대가인 니체의 죽음은 질병이나 육체의 노쇠함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 섬광으로 벅차오르는 가슴을 가눌 수 없었기 때문이다(혹은, 부지런한 노트가 펜을 쥔 손에 안겨준 심한 경련이 그 벅찬 가슴과 서로 장단이 안 맞았는지도). 작가들은 긴밀한 구성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신처럼 완벽한 어떤 구조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아니다. 본래적으로 타고난 체계화 능력이 있는 사람들도 아니다. 그들은 다만 그 자그마한 섬광들에 민감하고, 그 작은 아포리즘을 잠깐 동안 앉아 노트할 정도의 근면이 있는 사람들일 뿐이다. 그는 나중에가서 그 조각들을 그럭저럭 짜맞추어가며, 그들 사이 사이에 아교와도 같은 통로들을 만들어서 책을 낸다. 그 노동은 의외로 쉽다. 섬광들만 제대로 기록되어 있다면 말이다. 그런 식으로 하나의 세계와 국가가 만들어지는 것 아니겠는가? 글쓰기의 고통은 게으름을 한꺼번에 보상받으려는 헛된 욕심에 대한 자연의 처벌 같은 것이다. 그러한 조각들도 마련하지 않고, 삶 속에서 아무런 섬광도 느끼지 못한 채, 혹은 나타났던 섬광들을 강렬하게 만들지도 못하고, 지리멸렬한 하찮은 점들로 소멸시켜버리는, 그렇게 성의없는 사람들에게나 글쓰기의 고통이 견딜 수 없는 것이다. 당장에 백지를 올려놓고 펜을 들어보라. 흰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먹물이라는 사실 밖에는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글은 하나의 결과일 뿐이다. 처음부터 국가를 만들 수 없고, 처음부터 우주를 만들 수 없듯이. 만일에 신이 하루 아침에 세계를 창조 하였다면, 그의 필력은 정말이지 끔찍하지 않았을까? 글쓰기의 고통이란, 삶을 향유하지 않고, 예를 들면, 원고료와 생활고에 떠밀려, 혹은 시험을 보기 위해(논술이라고?), 삶을 빼앗긴채, 섬광도 없이, 그 작은 빛들이 자발적으로 만들어낸 어떤 질서와 국가와 체계도 없이, 갑자기 하나의 왕국을 만들어 보겠다는 망상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향유를 배우라! 글쓰기는 재주가 아니라 태도이다. (베르칸트가 말했듯이, 아무리 책을 많이 읽고 노력을 해도, 속물들 속에서는 결코 진정한 글이 써질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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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아 장커(賈樟柯)의 영화 "Still Life (三峽好人)"(2006)에 펼쳐진 광경들은 마치 외계인이 하늘에서 내려다보듯, 낯선 나그네가 아직 도착하지 않은 마을을 산마루에서 관망하듯, 마천루-쇼트라고 이름 붙일만한 전체성이 깊숙히 배어 있다. 사실주의적 관점에서 볼때, 막노동꾼인 한샨밍이 높은 곳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장면은 놀랍기 그지 없다. 마치 역사적 운명을 떠맡은 한 전사의 고뇌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역사적 존재의 역설이란 바로 그가 민중들 속에 있으면서도 동시에 그들로부터 우뚝 솟아 마천루의 지각을 소유해야 한다는 점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에는 이상망측한 장면이 두 개가 나온다. 처음엔 야릇한 빛을 내면서 하늘로 날아다니는 괴물체가 등장한다. 이 괴물체는 샨밍의 에피소드에서 센홍의 에피소드로 첫 번째 전환되는 순간에 나온다. 그것이 날아다니면서 서로 무관한 두 주인공이 마치 같은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임을 말해주는 것처럼 말이다. 하늘 높이 치솟은 십자가라든가, 허공에서 펄럭이는 국기를 바라보며 하나의 시간과 하나의 공간을 상상하듯, 관객은 그 괴물체를 통해 서로 떨어진 인물들이 함께 살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무관하게 살아간다. 두번째는 센홍의 에피소드에서 나온다. 센홍이 남편을 찾아와 잠시 동안 그의 친구집에 머무는데, 근처의 산 위에 우뚝 서 있었던 특이하게 생긴 철탑이 갑자기 불을 내뿜으며 하늘로 날아가는 장면이다.

원래 지아장커의 이 작품은 도큐멘타리 요소가 아주 짙은 사실주의적 분위기의 작품이다(이미 싼샤(三峽)의 댐건설과 중국 노동자들에관한 도큐멘타리 "동(東)"이 만들어졌는데, 이 작품과 연관이 깊다). 자연을 파괴하며 개발 이데올로기에 흠뻑 패인 중국의 자본주의, 그리고 그 체제의 음영 아래 벌레들처럼 이리저리 이사를 다니며, 헤어진 가족과 그리운 짝을 찾아 헤메는 군상들, 남편을 찾는 일에 피로해 끊임없이 물을 먹어대는 센홍, 아내와 딸 생각에 혹은 아슬아슬한 광경들에 말문이 막힌 샨밍, 혼자 남아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는 군상들, . . . 어느모로 보나 사회 비판적 요소가 짙은, 혹은 개인의 삶에 관한 사실주의 작품이다. 실제로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이 사회적 관계를 다룬다(<소무>에서의 소매치기, <플랫폼>에서의 가무단, <임소요>에서의 실업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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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두 괴물체(아마도 UFO)가 등장하면서, 관객의 그러한 믿음은 불안해진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이 영화를 SF 전쟁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감독은 무협물을 의도했다고 한다). 산업사회 이전의 산과 자연 속에 난데 없이 떨어져버린 첨단 기계문명(컴퓨터, 핸드폰, 기중기 . . .), 더 이상 인간의 주거공간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다른 무엇인가를 위해 세워지는 듯한 거대한 건설물들, 시야를 압도하는 기계 덩어리들, 알 수 없는 존재의 어떤 엄청난 음모가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생기를 잃은 노예나 벌레처럼 맴도는 슬픈 얼굴의 인간들, 유난히 땀을 흘려 구릿빛 피부를 하고 먼 곳을 주시하는 멍한 눈빛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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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외계의 어떤 존재가 만들어 놓은 낯선 건축물들 위에서, 아래에서, 또 그 안에서, 그것들이 한꺼번에 무너지거나 세워지는 것을 무심히 바라보며 서있다. 샨밍과 센홍의 멍해진 동공처럼, UFO를 보고도 놀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지아장커는 어느 인터뷰에서, 난데 없이 등장하는 초현실적 UFO를 통해 인물들의 고독한 감정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지만(아마도 Michelangelo Antonioni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특히 그의 영화 L'eclisse에서의 그 텅빈 아파트단지 장면들이 그렇다), 그건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고다르(Jean Luc Godard)의 "Alphaville"과 마찬가지로, SF라고 불러왔던 환타지 계열은 실은 사실주의의 한 갈래였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전사의 탄생이 아닐까? 현재의 중국이 아니라, 미래 사회의 태동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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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누군가의 글에 매료 되었을때, 글을 쓴 사람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 작품 만큼이나 그의 삶도 아름다울 것이라고 말이다. 당연한 일처럼 보이지만, 실은 아주 우스꽝스러운 넌센스 중의 하나이다. 이러한 넌센스는 예술을 대하는 우리의 전반적인 태도(주로 속물적인) 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나아가 이는 예술과 예술가 그리고 예술작품을 마음대로 뒤섞어서, 그들을 한꺼번에 폄하하거나 망치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 예술가나 작가 개인의 전기적 사실들에 대한 관심, 가령, 그의 출신은 어디인지, 학력은 어떤지, 유년시절이나 가족관계는 어땠는지, 연애를 얼마나 했는지, 버릇이나 취향이 무엇인지, 동성애자는 아닌지, 결혼은 했는지, 주변의 누구와 친분이 있었는지, 도덕심이 어땠는지, 성격은 어떤지, 앉은 자리가 얼마나 높았는지 하는 식으로, 한 개인과 작품에 접근함으로써, 우리는 예술가의 본질로부터 멀어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심지어는 예술가 개인에 대한 실망감을 그의 작품에 대한 비난으로 대신하는 어처구니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든 예술과 개인, 예술과 삶을 묶어서 예술이 삶으로부터 따돌림 당하는 일을 막아보려 한다. 그래도 예술은 삶에 꼭 필요하다든지, 살아가는데 도움이 된다는 식으로 말이다. 미안한 얘기지만, 그들은 예술의 적이다. 인맥과 겸손으로 작업을 하는 협잡꾼들은 주로 그런 인간들 속에서 나온다.

한 번만 숨을 죽이고 생각을 해보자. 만일에 하나의 작품이, 그 예술가나 작가의 전기적인 사실들과 동류의 문제이고, 그 예술가 개인의 삶과 구분되지 않는 것이라면, 그래서 그의 전기적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작품이 평가될 수 있는 것이라면, 도대체 예술 작품이란 무슨 쓸모가 있단 말인가? 가령, 프루스트(Marcel Proust)의 작품이 그의 소소한 과거사에 관한 이야기이고, 그의 개인적 시간 경험의 기록이며, 그가 관계한 많은 사교계와 사랑에 관한 보고서이며, 그 주변 인물들에 대한 소묘이며, 작가 개인의 정신적 성장의 과정에 불과한 것이라면, 그래서 마르셀(작가의 이름이며 주인공의 이름이기도 한) 개인에 대한 이해가 작품의 이해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은 것이라면, 그의 소설이 벽장 속의 사진첩과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예술작품이나 이론은 작가나 예술가 개인의 사회적 삶과는 본질적으로 아무 관련이 없다. 가령, 방금 전 불륜의 밤을 보낸 후에 쓴 한 예술가의 연애시는 얼마든지 위대하다. 왜냐하면 그의 작품과 이론은, 육체와 대상에 필연적으로 묶여있는 그의 지리멸렬한 삶보다 더욱 심오한 어떤 통찰 속에서, 그의 내적인 영혼에 관계하고 있기 때문이다.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일은 단순히 한 개인의 경험의 기록이나 감정 표현이 아니다. 그런 이유였다면, 당장에 손에든 책과 그림을 던져버리고, 차라리 당신 자신의 일기를 써라! 작품은 그 개인의 삶을 뛰어넘는 것이다. 그래서 작품은 현실세계에서 살아가고, 생각하고, 사회적 관계를 맺는 바로 그 개인이 아닌, 전혀 다른 존재(심지어는 인간 조차도 아닌), 전혀 다른 관점과 세계와 가능성의 펼침이다. 우리가 그림 앞에서 모자를 벗고, 소설 속에서 전 우주의 떨림을 체험하고, 그 예술가에게 위대함의 찬사를 보내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그렇치 않다면 예술작품은 화장실의 신문지보다도 가치가 없다. 예술가는 사실들을 가지고 자질구레하게 신변의 넋두리를 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현실적 존재를 넘어서기 위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붉게 충혈된 동공으로 새벽의 작업실을 빠져나온다. 우리가 그 작품에 빨려들어 매료되는 것은, 그의 덕망도, 인품도, 겸손도 아닌, 그가 펼쳐 놓은 어떤 풍경, 우리와는 전혀 다른 세계 때문이다. 삶이 없어도 예술은 존재한다거나, 예술이 삶을 대신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그것과 그것은 근본적으로 다른 문제라는 말이다. 신변잡기의 얘기를 썼다 해도, 그의 작품은 그 자신과 무관하다. 신적인 광채를 지닌 작품을 쓴 작가를 실제로 만나보면, 초라하기 그지없는 모습의 한 주정뱅이 노인을 발견하고는(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의아해 하며 그의 작품을 다시 보는 경우가 있는데, 바로 예술과 삶을 혼동한 우리의 편견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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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이나 사물에는 변하지 않는 하나의 모습이 있다고들 한다. 영원히 같은 모습의 정체성 혹은 본질이 있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조금만 더 냉정하게 세계를 바라본다면 삽시간에 허공으로 꺼져버릴 만큼 근거가 빈약한 믿음이다. 사물을 바라보고 대하는 우리의 변덕스러운 모습만 보더라도 이 말을 쉽게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친한 사람, 사랑하는 사람, 애뜻한 사람, 미운 사람, 혐오스러운 사람, . . . 그들의 정체성 때문에 그러한 관계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정체성에 대한 우리의 믿음 때문에, 우리는 아주 많은 가능성들을 스스로 포기한다. 그들로부터 우리는 풍경들을 바라보고, 그들 중 어느 하나의 풍경이 우리를 만나게 한다. 풍경이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만일에 우리가 사랑하게 된다면, 그것은 단지 하나의 행운일 것이다.

나의 변덕은 내 앞에 펼쳐진 모든 것들의 변화와 다양성을 말해준다. 가령, 하늘을 보라. 그리고 하늘이 무엇인가? 혹은 하늘은 무슨 색인가? 라고 질문을 해보라. 우리는 쉽게 대답할 수가 없다. 우리가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 대답할 수 없음 자체가 하늘이기 때문이다. 바다는 또 무엇인가? 바다는 무슨 색인가? 이 또한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그 대답없음 자체가 바로 바다이기 때문이다. 그들에 대해 대답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을 때, 우리는 그들을 제대로 본 것이다. 하늘, 바다, 노을, 뿐만 아니라 내 작은 방 창틈으로 새어들어오는 자그마한 빛, . . . 그들은 본성이 없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것들을 '하늘', '바다', '노을', '빛' 이라고 부르고, 그들을 식별해 내는 것은, 단지 우리의 어림짐작으로, 우리의 무딘 지각이 뭉뚱그려 놓은 통계 때문이다. 현실이란 잡히지 않는 기체-연기가 무리를 이루며 모인, 혹은 우리가 뭉뚱그려 놓은 여럿의 덩어리-몸둥이들의 집합이다. 현실은 한 두가지의 통계일 뿐이다. 사랑은 또 어떤가? 우리는 사랑이 하나의 감정 상태인 것처럼 믿고 열광한다. 하지만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랑의 대상들, 애인들의 수 만큼이나 많은 사랑이 있으며, 뿐만 아니라 한명의 애인에게 조차 매순간의 서로 다른 사랑과 질투와 고통이 있다. 그 감정들은 서로 뒤섞이지 않으며, 각각의 세계와 각각의 풍경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한 사랑을 다른 한 사랑과 혼동하지 않고, 그 사랑을 다른 사랑과 대체하거나 교환하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의 태만과 무성의는, 바꿀 수 없고 대체할 수 없는 그 각각의 사랑을 마치 하나의 감정이라도 되듯 뭉뚱그려 뒤섞는다.

현실을 이루고 있는 것이 그 덩어리-몸둥이라고 해서, 하나의 현실, 하나의 본질이 있다고 믿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 몸둥이에는 아주 많은 주름들이 나 있고, 그 몸둥이의 실상은 바로 그 주름의 변화이기 때문이다. 예이츠(William Butler Yeats)가 평생을 찾아 헤매던 풍경: "어머니가 아들에게서 보는 것, 예술가가 장미에게서 보는 것, 수녀가 마리아 상에서 보는 것!" 주름이 만들어 놓은 각각의 풍경들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그 각각의 풍경에 맞는 전혀 다른 광학 도구들을 필요로 한다. 사랑의 주름을 생각해보라.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뒤척일 때마다, 웃을 때마다, 담요에서 먼지가 일어나듯, 그녀의 주름들 속에 숨어있던 어떤 미지의 영혼들이 작은 몸짓과 뒤척임 속에서 퍼져나와, 방금전에 내가 보았던 그녀의 풍경을 지워버리고, 전혀 다른 풍경을 펼쳐놓는 바람에, 나는 새로운 돋보기로 그것을 관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들여다보다가 내 스스로 웃기도 하고 찌푸리기도 하며 진풍경을 자아낸다. 그 하나의 풍경은 내가 바라보는 하나의 관점이고, 다른 여인과 구별되는 바로 그녀(전체)는 그 관점들의 통계이다. 그녀가 퍼뜨리는 풍경과 관점들이 요술을 부려, 내가 믿었던 그녀가 아님을 보게 되었을 때, 알 수 없고 소유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 풍경 속에 내가 없을 때, 그 저주같은 풍경들이 점점 내 눈에서 증식하여, 그녀를 사랑하는 내게 되려 적이되어 몰려올 때, 나는 배신감과 질투의 포로가 될 것이다. 그 관점과 풍경들은 마치 기차여행에서 보게되는 창문의 풍경처럼, 이리로 갔다가 저리로 갔다가 종잡을 수 없는 부스러기와 조각들로 펼쳐져, 내가 믿고 있었던 그녀의 본질을 해체한다. 나는 더 이상 어제의 그녀를 찾을 수 없으며, 내일의 그녀를 예측할 수가 없다.

하늘을 바라보며 발견하게 되는 그 무수한 관점들의 수 만큼이나 많은 우리의 자아가 있다. 창틈으로 새어 나오는 빛과 세상의 모든 빛의 수 만큼이나 많은 우리의 영혼이 있다. 사랑하는 애인의 그 복잡한 모습 만큼이나 많은 자아와 관점이 우리를 사로 잡고 있다. 푸르스트(Marcel Proust)는 이렇게 말한다. 애인이 떠났을 때, 그녀를 상대했던 내 안의 수많은 자아들 모두에게, 그녀가 떠났음을 각각 알려주어야 한다고.

우리는 사랑하며 잠에 빠진다. 잠 속에서 보게 되는 그 많은 풍경의 방들을 돌아다니듯, 각각 밀폐된 방안으로 연기처럼 스며들듯, 사랑은 우리를 이방 저방을 옮겨다니게 하고, 애인이 내뿜는 풍경에 길을 잃고 방황하게 한다. 잠과 마찬가지로, 사랑에서 깨어난다는 것은, 그 많은 풍경들로부터, 그 풍경의 방들 속에서 펼쳐지는 것들로부터, 내가 지금 앉아있거나 서 있는 이 현실의 방으로 자리를 옮기는 것이다. 혹은 그 많은 풍경들에 빠지기 전의 자아, 단 하나의 풍경에 고착된 허전한 자아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결국, 잠과 마찬가지로, 사랑에서 깨어난다는 것은 그 아름다운 풍경들을 져버리고, 잠에서 깨어나 내가 누군지 여기가 어딘지를 정신없이 서둘러 선택하듯이, 불안 때문에 아니면 두려움 때문에, 단단하게 마련된 사슬들을 몸에감고, 덩어리-몸둥이가 되어 스스로 한 곳에 묶여 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찬란한 순간들을 포기한 채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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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cis Bacon, Study for a Portrait of Van Gogh IV  1957

말이 없는 곳에 있다보면, 눈에 보이는 모습이 우리를 필요 이상으로 압도할 때가 있다. 특히 도서관에 앉아 있는 뒷 모습이 그렇다. 그는 항상 내가 앉은 자리에서 한 칸 앞 쪽에 앉아있다. 나와 마주보는 사람이 없을 때에는, 어김없이 그의 뒷모습을 보게 된다. 구석자리에 조용히 앉아 무엇인가를 들여다보고 있는. 깔끔하게 올려친 뒷통수. 한 번도 벗어 본 적이 없을 것 같은 그 고동색 얇은 반코트. 자리에 앉아 책을 읽거나, 노트를 정리하거나, 잠시 책상에 엎드려 잠을 잘 때에도, 그는 언제나 그 코트를 입고 있다. 언제 드나드는지 알아챌 수 없을 만큼 조용한 걸음걸이. 가지런히 놓인 왼편의 책과 오른편의 노트, 그리고 노트 위에 검은색과 붉은색 두 개의 펜. 나는 한 번도 그와 마주친 적이 없다. 그래서인지 그의 앞 모습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언제인가 3층 창밖으로 머리를 내밀어 바깥을 바라보고 있는데, 저 쪽 아래 잔디밭 옆으로 그가 지나가고 있었다. 여전히 뒷 모습이었다. 연두색 잔디와 고동색 코트가 어울리지 않아서였는지, 그를 보며 잠깐 생각에 빠져 버리고 말았다. 멀리에서 보니, 꾸부정한 어깨임을 처음으로 알았다. 검은색 가방을 들고, 긴 우산을 지팡이처럼 짚어가며, 고개를 숙인채, 여전히 조용한 발걸음으로, 모퉁이를 돌아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다. 하늘엔 세상의 모든 구름들이 끝없이 엉켜있어, 그 회색빛을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멀미가 날 것 같았다. 비가 올 것 같았지만, 정오가 훨씬 넘었는데도 비는 오지 않았다. 대신에 부드러운 바람만 불고 있었다. 그의 먼 뒷모습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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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음

note_fragmentary_aporism 2007/05/31 14:43

도서관과 같이 조용하고, 정숙한 곳에는 소음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실상과 아주 다르다. 도서관에는 약간의, 아니 절대적으로 소음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소음 때문에 엄청난 고통에 시달리는 것은, 이상하게도 소음들 속에서가 아니라, 정숙과 고요와 침묵 속에서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옆 사람의 책넘기는 소리나, 뒤척이는 소리, 또는 숨소리가 아니다. 침묵 소리! 아마도 우리 자신으로부터 새어나오는, . . . 시간을 견디며 끙끙 거리는 고요한 소리! 이를 들키지 않으려면, 다른 소음이 필요한 것이다.

창밖에서 들려오는 먼 잡음들 때문에 아까부터 신경이 쓰였는지, 옆 자리에 앉아있던 한 여선생이 급기야는 벌떡 일어나 창문가로 간다. 그리고는 견고하게 설치된 방음 창문을 신경질적으로 닫아버렸다. 뭘 모르는 선생 같으니라구! 이제 그녀의 고통은 보다 구체적이고, 더욱 견딜 수 없는 것이 될 것이다. 이 침묵 속에서, 숨이라도 제대로 쉴 수 있을까? 당신의 그 침묵 소리에 고막이 터지지 않고도 앉아 있을 수 있을까? 집중은 커녕, 뇌리 속에 산만하게 펼쳐질 그녀의 시간은, 오분도 견디지 못하고 그녀를 일어서게 만들 것이다. 옆에 있는 나를 잊고, 당신의 소리를 감추고, 이 고요를 외면하려면, 그 창문은 그냥 내버려 두었어야 했어! 피할 수 없는 우리 자신의 침묵의 소리가 지옥이 되지 않기 위해, 우리의 책임을 타인에게 떠넘기지 않기 위해, 마치 주술적으로 쓰이는 주물(呪物)이나 희생양처럼, 아니면 향수처럼, 우리가 내뿜는 지독한 냄새와 소리들을 중화시켜줄, 외부의 소음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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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은 눈을 감아주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서로의 결점과 오류들을 이해해 준다. 친구는 내가 보고 싶지 않고 듣고 싶지 않은 나 자신의 실상을 들추어내거나 따져 묻지 않는 자이다. 그는 나를 덮어주고, 망을 보아주고, 곁에서 시름과 고통의 위안이 되어주며, 나를 편안하게 해주는 고마운 사람이다. 우정은 사랑처럼 나를 특별한 존재로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아니 오히려 특별한 존재가 되는 것을 싫어하지만, 사랑의 고통을 견딜 수 없을 때, 위안을 받기 위해 찾아가는 환상의 귀의처이다. 그리하여 우정은 우리를 고립되지 않은 존재, 고독감을 떨쳐버리게 해줄 존재, 대면하고 싶지 않은 나 자신의 가장 무시무시한 상태와 맞닥뜨리지 않아도 세상 사는데 별 문제가 없음을 일깨워주는 존재, 우리를 사회적 존재이게끔 해준다. 그리하여 사회 속에서, 사회인으로서, 섬이 되지 않고, 잘 어울릴 수 있도록 도와준다. 우정은 우리의 고립과 외로움을 편안한 관용으로 덮어준다. 그러나 이렇게 형성된 진실이란 무슨 쓸모가 있단 말인가? 우리의 사이좋은 우정과 조화로운 통일로 만들어진 진실이 도대체 무슨 효력이 있단 말인가? 나의 무능력을 치유하고 위로해줄 친구의 그 칭찬 한마디는 나를 더욱더 화나게 할 뿐이다. 그의 위로가 실연의 고통을 잊게 해주지는 못한다. 그렇게 마련된 진실이라면 너무나 초라하고도 왜소하지 않은가? 들뢰즈에 따르면 우정의 철학이란 바로 협잡과 합의의 철학이다. 그것은 진실을 제대로 보지 않고, 애써서 그것을 외면하는 길임을 뜻한다. 진실은 가혹하지만 엄밀한 어떤 것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우리는 그 무엇도 걸치지 않고, 맨몸으로 나가야할 시간을 피할 수 없다. 이것이 베르그송이 직관의 비판능력이라고 말했던, 소크라테스의 신 다이몬이 귓가에 속삭이며, 우리를 아포리아(aporia)의 상태 속으로 밀어 넣는 무시무시한 시간이다. 실재는 난입하는 그 무엇이다. 그것은 우리의 지성을 강요하고, 지성의 잘못을 질책함으로써, 지성의 굳은 몸체들을 대기 속으로 흩뿌리는 그 무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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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을 찾아 나서는 자는 철학자보다는 오히려 "애인의 거짓말 때문에 고통 받는 질투에 빠진 남자", "찾기를 강요하고 우리에게서 평화를 빼앗아가는 어떤 징후의 폭력"에 맞닥뜨린 사람이라고 Deleuze(혹은 Proust)는 말했다. 지적이고 분별이 있는 사람은 언제나 명확하고 객관적인 의미를 제시한다. 또한 자연으로부터 윤곽선이 뚜렷한 형태들을 자신의 지식으로 취한다. 그들은 쓰여진 책을 통해 진실을 찾아나서길 좋아하는 모범생이다. 하지만 지식이 만들어지는 것은 그러한 길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와 같은 지성이 만들어 낸 진리 말고도, 우리는 다른 풍요로운 방식으로, 즉 사물의 징후로부터 출발하여 진실에 도달할 수 있다. 지적이거나 위대한 사람보다는, 평범하거나 결점이 있는 사람들이 더 많은 징후를 가지고 있고, 그것이 그의 존재를 더욱 풍요롭게 해준다. 그것은 예술가들을 풍족하게 해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성의 노동과 임무를 가지고 세계에 뛰어들어 노력하는 학자들보다는,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며 인생을 보내는 사람들, 직업도 없이, 그렇다고 예술을 할 만큼 능력도 없는 실망스러운 인간”들이 더욱 더 징후에 있어 풍요로운 진실에 도달할 수가 있다. 가령,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이란 바로 허송세월을 보낸 시간을 의미한다. 그러나 쓸모없이 보내버린 시간, 즉 훌륭한 사람을 만나 진지한 대화를 하거나 지적인 모임에 나가 무엇인가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사교계에 드나들며 사람들과 노닥거리고, 여인들과 사랑에 빠지고, 감각적 경험에 사로잡혀 봄으로써, 오히려 우리는 사람들과 풍경과 이 세계에 대한 진실을 배울 수가 있다. 우리는 완전한 이상적 대상에서 보다는, 불완전한 인간들과 비틀린 물질적 감각에 쉽게 매료된다. 또 결함 없는 위대한 한 인물 보다는 평범한 여인을 통해 인간과 세계의 근원적 진실에 도달할 수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 사유의 지적인 활동이 강렬하게 활동하여, 대상들로부터 본질을 발견하고, 세계의 진실에 도달하게끔 하는 것은, 그 비틀린 경험과 비균형적 경험 속에서 규정하기 어려운 징후들의 난입을 직면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실재와 그 징후가 우리에게 직접 던져주는 것으로, 우리가 직접 풀어내고 해석하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이다. 그것은 친구들이 모여 합의한 해답과는 판이하게 다른 해답을 도출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어떤 여인과 사랑에 빠지고, 그 여인에게서 어떤 진실을 발견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녀와 매끈한 소통을 하거나, 합의된 대화에 이르렀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 의미가 무엇인지, 그 진실이 어디에 감추어져 있는지 알지 못한 채, 그녀가 발산하는 낯선 징후들을 해석하기 위해, 우리 자신을 잃어가며, 시간을 낭비해가며 알몸으로 달려드는 직관능력 덕분일 것이다. 선생님이 제시한 문제들 속에서는 그 무엇도 배울 수가 없다. 그렇게 의무와 노동에 사로잡힌 배움을 통해 얻은 진실은 “필연성이 결여”되어 있다. 억압적이고 부정적인 반성적 노동이 만들어낸 진실은 추상적이고 인위적일 뿐이다. 그 진실은 그것을 배우는 나 자신과는 무관한 진실이며, 따라서 이렇게 말해도 저렇게 말해도 되었을 법한 임의적 진실에 불과하다.

진실이란 정다운 대화 속에서가 아니라 참을 수 없는 폭력 속에서 피어난다. 우리는 고통을 겪음으로써만, 통증이나 갈증이나 제지된 욕구를 통해서만, 그 추동적 힘에 직면해서만 비로소 의미와 진실을 찾으려 한다. 진리를 사랑한답시고 고통도 없이 달려드는 얼뜨기 속물 학자로부터는 그 무엇도 배울 것이 없다. 그 보다는 오히려 애인의 얼굴에서 거짓말의 징후를 간파하고 질투에 빠진 남자가 참된 것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그 속물 학자로서는 결코 자신에게 가해오는 인상들에 아프지도 않고, 그것을 해석해야할 어떠한 필연적 운명적 책임도 느끼지 못하는 반면, 질투에 빠진 남자는 인상과 징후들의 폭력에 맞서 그 누구보다도 민감해지기 때문이다. 질투의 고통만이 애인의 거짓말과 사랑의 진실을 찾는다. 진실이란 사회 속에서가 아니라 근원적인 것에 대한 질문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 사회의 지배계급은 그 사회의 진실에 접근할 수가 없는 것이다. 어떤 놀라운 경험 때문에 우리의 기억이 작동하듯이, 고통은 지성으로 하여금 진리와 의미를 찾도록 강요한다. 필연적 진실이 태어나려면, 우선 실재가 뿜어내는 징후의 폭력에 직면해야만 한다. 지성은 실재의 징후들로부터 어떤 강요를 받아야만 하고, 이것인가 저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빼앗긴 채, 모든 도구와 무기와 갑옷을 벗은 맨 몸으로 실재를 대면해야만 한다.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지성은 등장하게 될 것이다.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느낌으로써만, 그 징후들의 의미와 본질을 찾아내고 진실의 근처로 다가갈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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