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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imnews.imbc.com/weeklyfull/weekly04/2989993_6416.html
국내든 해외든 집단이 한 개인을 따돌리거나, 강자가 약자를 괴롭힌다고 하는 또 다른 진부한 형태의 뉴스이다. 폭행이란 강자에게는 행사되지 않는다. 폭행은 전적으로 약자에게, 즉 무기를 접고 이미 백기를 들고 있는 자(이것이 약자의 정의이다)에게 안도감 속에서 행사되는 '상대적 강자'의 사후 선언이다. 강자에게는 행사 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 역시 또 다른 약자이다(이것이 또한 강자의 정의가 아닌가?). 이런 점에서 보면 폭행은 비굴이나 비겁의 범주에 속한다.
저 젊은이들은 노숙자나 부랑자가 거기에 존재하고 있다는 이유로, 그가 저기서 그냥 걸어가거나 앉아 있다는 사실 때문에 화가 난 것이다. 그의 행색이 역겹고, 그의 냄새가 싫고, 그냥 밉고, 옆에 있다는 것이 견딜 수가 없고, 쉬워 보이고, 몇 대 갈겨준다 해도 별 해가 없을 것 같다. 저들의 폭행은 대응이 아니라(정당하든 정당하지 않든) 존재를 규정하는 방식이다. 주변에 보이는 존재를 규정하는 방식을 젊은 애들 스스로 만들어낸 것일까? 노숙자를 왜 싫어하게 된 것일까? 그를 때려도 괜찮다는 생각은 어떻게 가지게 된 것일까?
아이들은 자신의 행위를 동영상을 찍어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자랑하듯이 보여주었다. 이것이 문화이다: 저러한 뉴스에서 어김없이 등장하는 가장 진부한 시츄에이션은 폭행을 당한 노숙자에 대한 사람들의 동정과 구호품 공세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등장하는 크리스마스 트리, 그 옆에 앉아 선물 꾸러미를 안고 울고 있는 부랑자, . . . 폭력은 직접적인 폭행을 통해 행사되기도 하지만, 동정이나 연민과 같은 잠재적 폭력으로도 행사된다. 인터넷과 미디어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노숙자 데이빗씨에게 선물을 보내고 동정어린 손길을 보냈다. SNS 미디어를 통해 그를 돕자는 카페가 만들어진다. 그는 얼굴을 가리고 눈물을 흘린다. 기자들이 편집을 했기 때문에, 봉변을 당한 것이 억울해서 흘리는 눈물인지, 동정에 대한 고마움에 배인 감동의 눈물인지, 아니면 이 모든 상황이 어처구니 없어 나오는 하품의 국물인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마지막에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일자리도 구하고 술도 끊어야죠."
경우에 따라서는 고귀하다 할 분노는 말할 것도 없고 차라리 불만이나 불평보다도 저열한 윤리적 감정으로서의 동정과 연민이 뉴스언론과 기자들의 도덕 원리의 근간이 되는 한, 텔레비전이나 신문을 무심코 바라보고 있는 우리들은 그냥 방에 가만히 앉아 있는 동안에도 이미 누군가에게 테러와 폭행을 가할 수 있다. 연민과 동정에 있어 가장 치열한 종교집단이나 국가가 다른 한편 가장 급진적이고 잔혹한 폭행과 전쟁을 일삼는 경우를 항상 보는것도 이와 무관치는 않을 것이다. 선과 악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자기 자신을 타인 앞에 또는 밝은 곳에 드러내거나 과시하는 것은 자신의 위상을 제한(혹은 부정)하는 역설적 상황을 초래할 수가 있다. 드러내 보임으로써 그 자신이 자아낼 수 있을 모든 신비한 가능성의 힘들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것이 푸코(Michel Foucault)가 지적했던 권력에 있어서의 “가시성(visibilité)의 역설”이다. 앙시엥 레짐(ancient regime)의 전제권력은 보여주는 일에 열정을 쏟아 부은 권력이다. 권력자는 자신을 과시하거나 과장해서 드러내기를 좋아하고, 우쭐해 하며 의기양양한 태도로 자신을 하나의 볼거리(spectacle)로 만들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호화의복, 궁중예식, 왕의거둥, 개선행렬, 공개처형 등, 재화의 엄청난 소비와 지출로 이루어지는 이 모든 비효율적 스펙터클은 그것을 바라보는 이들로 하여금 경이로움, 존경심, 또는 공포감을 일으키는 것을 목적으로 권력을 정복자로서 가시화한다. 대로의 밝은 빛 속에서 만인의 시선을 받으며 서 있거나 걸어가는 권력자는 자신이 바로 “그곳”에 있음을 표명했던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권력자의 이러한 가시성이 증대할수록 피권력자들은 어둠 속에 숨을 수가 있었다. 오히려 드러난 권력의 실체를 볼 수가 있어, 스펙타클의 애초의 의도와는 반대로 권력자의 무한한 권능에 제한을 가하는 결과가 일어난다. 권력자 자신이 스스로 공간과 시간이라는 한정된 조건에 방치됨으로써, 혹은 그 자신의 몸뚱어리가 하나의 사물로서 현시됨으로써, 무한의 절대성을 암시해야 할 권력은 오히려 상대적이고 제한적인 힘으로 하강하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잠재적 “권능(Power, Macht)”과 현실적 “물력(force, Gewalt)”의 역학관계—카네티(Elias Canetti)가 『군중과 권력』(Masse und Macht)에서 구분했던—가 그렇듯이, 힘이 비감각적이고 비실제적이 되어갈수록 그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는 넓어지게 된다. 아니 범위가 넓은 힘일수록 비감각적이고 비실제적이다. 가까이에 있는 힘일수록 그 지속력은 짧다. 먼 곳에서 가능성을 암시하는 힘은 그 반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절대성이란 보이지 않는 비가시성 속에서 현실화된다. 뚜렷이 보이거나, 가까이에 있거나, 언제든지 감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거나, 지시 가능하거나, 표현 가능한 것은 두려움을 갖게 하지 못한다. 단지 이미 사태의 종결이나 다름 없는 주체들의 치열한 행동과 그 행동의 결과들만이 현실을 설명해줄 뿐이다. 그 형태가 어떤 것이든 눈을 감고 잠들어 있는 순간에도 희미하게 아른거리는 존재만이 만인을 지배한다. 어떤 점에서 이것은 스피노자(Baruch Spinoza)나 사드(Donatien Alphonse François, Comte de Sade)가 생각했던 “자연” 혹은 “신”의 모습을 닮아있다. 상상 속에서 언젠가는 도래할 것이라는 막연한 암시로 불안은 존재를 잠식한다. 불안 그 자체가 존재인 것이다. 푸코는 현대적 규율사회의 가시성의 역전—시선 주체의 전도 혹은 가시성의 교환—을 지적했는데, 그것은 타자의 시선을 내면화하는 가운데 발생하는 불안의 잠식에 관한 문제였다. 더 이상 만인이 권력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내면적 타자로서의 권력이 만인을 바라보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권력은 언제나 현시한다. 언제 어디서든 머릿속에 떠오르고 나타나 주시하는 절대적 존재, 바로 이 가시성의 편재는 앞이 아니라 뒤에 임하는 것, 다시 말해 실제가 아니라 효과로서의 시선이기 때문이다.
서구의 사유에는 기원에 도달하는 두 계열이 존재한다. 하나는 빼기이고, 다른 하나는 더하기이다. 빼기는 순수성을 지향하며, 경험 가능한 모든 요소들을 사유 가능한 단일성으로 환원한다. 반면 더하기는 순수성을 전혀 다른 관점에서, 다시 말해 사유 가능한 모든 단일성을 경험 불가능한 다양성의 지대로 펼침으로써 모든 환원적 요소들을 해체한다. 가령, 순수 시각에 대한 두 계열의 관점의 차이를 생각해 보면, 전자의 경우는 모든 감각작용들, 즉 협동일관적이고, 복합적이고, 융합적인 감각작용들을 지우고 공허에 가까운 순수시각을 보려고 하는 반면, 후자에게 순수시각이란 시각의 협동일관적, 융합적, 복합적, 잠재적, 가상적 감각작용의 결합으로 정의될 것이다. 순수성이란 '무'라든가 '극'과 같은 어떤 상태가 아니라 출발 혹은 기원이다. 단순성에서의 출발인지 아니면 복잡성에서의 출발인지는 서로 분리될 수 없는 두 계열의 각각의 위치에 의해 결정되는데, 하나는 복잡성의 피로감으로부터 벗어나 어디론가 귀환하고 싶어하는 열망으로, 다른 하나는 단순성의 단조로움으로부터 벗어나 어디론가 떠나려는 열망으로 구별된다. 이로써 두 계열의 뜻밖의 아이러니가 나오는데, 전자는 삶을 지움으로써 그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반면, 후자는 삶을 더함으로써 그것을 넘어서고자 한다.
"철학을 거의 전투적으로 반대하는 몇 몇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과학자들이 공포소설의 주인공이라면, 그들이 하는 일은 그들의 도망이 멈출 때 시작할 것이다. 겁에 질린 주인공이 뒤를 돌아볼 수있을 만큼 멀리 앞으로 돌진해서 자신이 보았던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질 때, 과학은 시작된다. 외계인일까? 돌연변이일까? 아니면 철학자일까? 식별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 안도감을 느낀다. 계획을 세우자. 이것 저것 꾸며보자. 그래야 그것을 식별할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쫓고, 미끼를 놓고, 결국 함정에 빠뜨린다. 그러고나서 그것을 꼭 잡고, 캐내고, 결국 절단한다. 공을 들여, 조각 조각, 그것의 정체를 꿰어 맞춘다. 그러면 괴물 하나가 목격되고, 나는 새로 발견한 확신을 가지고 그것을 향해 달려간다. 이제 알 것만 같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볼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다음에 나올 것은 지난 번에 나온 것과 다르지 않다고. 내가 만들어 낸 이 동일성을, 일치하든 일치하지 않든 내 인지 능력 테스트에 적용한다. 내가 관찰한 것들을 다른 사람들과 열심히 공유한다. 같은 방법론을 고수하는 다른 사람들도 내 발견을 인정한다. 그 탐구 결과는 재생산되고 입증된다. 이제 낯선 것의 침략으로부터 행성을 구하기 위해 예방책들이 취해질 수 있게 되었다." (Brian Massumi, Parables for the virtual: Movement, Affect, Sensation, Durham & London: Duke University Press, 2002. pp. 232-233)
제이미슨(Fredric Jameson)은 필리핀 영화감독 키드랏 타히믹(Kidlat Tahimik)의 영화, 『향기로운 악몽』(The Perfumed Nightmare)을 언급하면서, 그의 영화가 well-made(예술적 태도로서)가 아닌 점을 칭찬한다. 프루스트(Marcel Proust)의 생각처럼 물론 예술가의 스타일은 그의 세계관 혹은 통찰의 관점 전체를 반영하지만, '태도'에 대한 언급은 예술의 윤리적 지침을 제시하는 것과는 일견 다른, 새로운 형식적 아니 비형식적 전략 같은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다. 타히믹의 작품에서 은은하게 스며들어 있거나 발산하고 있는 '솔직 담백함'이 좋은 예가 된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아마도 그것은 버나드 쇼(Bernard Shaw)가 입센(Henrik Ibsen)의 토론극에 찬사를 보내며 마음 속으로 생각했고, 결국 그 자신도 적극적으로 도입했던, 입센의 극 속에서 함축하고 있는 어떤 태도와 관련이 있는 맥락이 아닐까 하는 점이다. 가정적인 여성으로서의 Nora가 죽 그래왔듯이, 예술은 더 이상 화장을 해서도, 그러니까 결코 그 자신 안에 상관적 타자(결국 고객이나 소비자가 될 수 밖에 없을)를 꿈꾸어서도, 또 유럽 모더니즘의 가식적인 포커페이스가 한 때 그랬듯이, 더 이상 자신이 뭔가를 알고 있는 것처럼 위장을 해서도, 그러니까 자신 안의 메타주체 아니면 더 나아가 대타자를 움켜쥐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왜곡이 문제가 아니라 허기와 공허가 문제이다. 우리는 너무 지겨워졌고 너무 지쳐있고, 그래서 언제나 그래왔듯이 이제는 진정한 뭔가가 필요하다.
쇼는 틀림없이 입센 극의 위대함을 마지막 부분의 "토론"에서 찾았을 것이다. 문제는 토론이라는 형식의 민주적 성격에 있는 것이 아니라(토론은 본질적으로 힘의 연장 혹은 지연으로 결코 민주적이지 않다), 테이블에 앉기까지의 어떤 근본적인 변화 혹은 토론의 주관적 조건으로서의 주체의 정신상태 즉 태도이다. Nora가 남편과 토론을 벌인 것은, 그로부터 해답을 얻기 위해서도, 자신의 문제를 남편과 상의하기 위해서도, 남편의 배려를 요구하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거기서 토론은 선언 같은 것, 더 정확히 말해 비로소 그녀를 안전한 가정으로부터 구해내는 단절과 거부의 형식이었다. 모든 냉소로부터의 단절(왜냐하면 냉소는 남편의 월급봉투를 고대하는 주부 인생의 전-의식적 자기혐오이므로), 모든 불성실과 태만으로부터의 단절(왜냐하면 태만과 불성실은 방관하고 있는 인형들의 존재방식이므로), 모든 소유관념 즉 사물성으로부터의 단절(왜냐하면 사물성은 인생을 허기지고 공허하게 하는 모든 말장난의 근원이므로), 그렇게 모든 노예근성으로부터 단절하여 자기자신을 새로운 유형의 인간으로 점차 개조하는 이정표! 이것이 니체를 닮은 활력 만땅의 쇼가 입센의 예술의 현대성으로부터 발견한 (진지한)토론의 의미이다. 타히믹이 유럽과 미국 나아가 본질적으로 자본에 대해 "조용히 거부하면서" 보여주었던, 비판을 넘어서는 소박파(Art Naïf) 특유의 솔직 담백한 도큐멘타리스러운 영상이, 모든 예술의 상품 타자성으로부터 박차고 나와, 거리에서 구걸을 할지언정 결코 되돌아가지 않는 새로운 유형의 예술과 그 제작 형식을 제시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거칠고 어설픈 브리꼴라쥬 형식의 낯설음은 모든 '진지한' 단절과 비판의 불가피한 아니 의기양양한 선택이다. (2009. 8. 5)
가령, 고독의 역설을 생각해보자. 고립이 깊어져 혼자가 되어갈수록 주변과의 일체감 혹은 공감의 가능성은 커진다. 어떤 점에서 고독은 일체감 혹은 소통이라고 해도 좋을, 즉 고립으로부터의 급진적이고도 본원적인 해방의 인간적 조건이다. 물리적 상황이나 육체가 주변으로부터 단절하고, 그 외연적인 관계가 끊어지면, 비로소 외연 너머의 감각적 지대와 내면이 고개를 든다. 소리, 냄새, 촉감, 표현내용으로서의 정동, . . . 완결된 형태를 뚜렷이 그릴 수 없는 부분적 충동들의 세계, 즉 그 모든 감각적 추상이 구체적이고도 현실적인 행동성을 대체한다. 이것은 퇴행이나 장애가 아니라 새로운 능력의 열림이다. 이 능력의 열림을 경험적으로 목격할 수 있는 사례를 들어야 한다면, "장애인"이라고 빈약한 근거로 거칠게 잘못 불리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우리는 망설임 없이 단언할 수 있다. 가령, 시력을 잃은 맹인은 발소리를 통해 사람을 식별한다. 혹은 얇은 지팡이 하나로 자신이 딛고 서 있는 지면의 총체적 촉지면을 느낌으로써, 시력을 가진 사람들은 상상하기 어려운 촉각의 세계에 이른다. 망막이나 안구와 같은 육체적 처리기관의 단계에서 빛-물질을 포기하고 나면, 이제 물질의 소리의 측면 혹은 질의 측면이 새로운 가능성으로 육체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모든 존재에 내재하고 있는 힘은 장애물을 넘기 위해, 자신에게 주어진 물질-장애를 처리하기 위해, 도구로서의 새로운 능력(faculties)을 열어젖힌다. 그렇다면 "장애인"이라는 용어는 무엇을 지칭하는 것일까? 무엇에 대한 장애라는 것일까?
지금까지 편협하게 우격다짐 식으로 편성된 세계구도는 우리가 가진 모든 능력에 적합한 형식으로 새롭게 다시 짜야 한다.
아래의 구절은 한국의 영문학과에서 나온 한 학위논문의 구절이다. 우연히 접하게 된 구절이었기 때문에, 특별한 목적이나 이유 없이 아무데서나 발췌한 구절이다. 그러니 발췌된 내용을 꼼꼼히 읽어볼 필요는 없다. 논문들을 찾아서 읽어본 사람은 잘 알겠지만, 이러한 식의 논문은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이 구절을 보고 있노라면, 한국의 정치적 현실인지, 역사적 현실인지, 문화적 현실인지, . . . 같은 것들이 뒤죽박죽 머리 속을 채운다. 속물의 욕망을 포부로 들이마시는 한국인들은 그 무엇도 스스로 할 수 없는, 그저 남들이 만들어 놓은 질서에 잘 적응하는 것을 최고의 명예로 삼으며 노예처럼 살아가는 것이 고작으로 보인다. 예나 지금이나 한국인들은 바다 건너로 나가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들은 언제나 되돌아오기 위해 그러한 포부를 꿈꾼다. 위에 보이는 언어 속물이 그 예이다. 이러한 가운데 한민족의 문화사 아니 한반도의 역사 전체는 어떤 역설을 형성한다. 주로 지식인들에 의해 주도된 그것은 바로 언어에 있어 "단절의 연속"이라는 역설이 아닐까 싶다. 그 역설 속에서 한국인들은 지식과 사유와 감성과 기억 자체의 파편화된 분열을 경험한다. 이 분열을 역동이라고 불러야 할까?
수 주? 아니 수 개월 전 어느 날, 마치 헤롤드 핀터(Harold Pinter)의 난입극을 보는 것처럼, 개도 아니고 돼지도 아닌 기묘하게 생긴 두 명의 짐승들이 난입해와 꽥꽥 거리며 울부짖는 통에 잠을 설쳤다. 그 울부짖음은 고통스러워 보였고, 쌓여있던 무엇인가를 내 뱉는 성토 같아 보였고, 어떤 점에서는 애처로워 보였지만, 울부짖음의 덩어리가 가지런히 분절되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말해 말이 아니었기 때문에, 도무지 무엇을 고통스러워하는지, 무엇을 내뱉는 것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카프카의 동물들처럼, 그 소리는 그냥 거기에 "어떠한 고통의 울부짖음이 존재한다"고 하는 사실만을 드러낼 뿐이었다. 분절되는 소리를 낼 수 없는 동물들은 또한 분절되는 소리를 들을 수 없으므로, 나 역시 그 울부짖는 소리에 아무런 응답을 할 수가 없었다. 시도를 해볼까 했지만, 그들은 들을 수 없을 것이고, 오히려 내 소리에 자극을 받아 더 꽥꽥 거릴 것 같았다. 단지 그 소리가 잦아들어 평정을 되찾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울부짖음의 본질은 그 동물 자신이 왜 울부짖고 있는지 스스로 알지 못한다는 점에 있다. 울부짖음의 코믹함이란 바로 울부짖음 자체가 울부짖게 한다는 사실이다. 그 울부짖는 이유를 스스로 알게 될 때, 울부짖음은 멈춘다. 그것을 알게 될 때까지 울부짖음은 계속되거나, 아니면 몽둥이나 어떤 두려움 때문에, 혹은 대부분은 스스로 열기가 빠져 사그러들 뿐이다. 사그러들고 나면, 마치 발광을 하다가 꽁무니를 빼는 똥개나 이유도 없이 갑자기 울음을 뚝 그쳐버린 어린아이처럼, 머쓱한 표정으로 갈길을 가는 것이다. 울부짖음을 들으며 내가 혼란스러워지거나 정념에 사로잡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설사 그것이 나를 향한 것이라 할지라도, 울부짖음에 화가 나지는 않는다. 단지 성가시거나 당혹스러울 뿐이다. 고통이 있다면 어떤 크고 작은 상실감 이랄까? 그러니까 마치 길을 가다가 우연히 사고를 당해서 내 물리적 몸의 한 부분을 잃었다든가, 물건을 잃어버렸다든가, 하던 일을 방해를 받았다든가 하여, 돌이킬 수도 후회할 수도 없이 벌어진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아무 소용이 없는 종류의 상실감. 혹은 본의 아니게 어떤 고약한 소동에 휩쓸리고 난 후의 당혹감.
울부짖음을 듣고 있자니 잠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나가다가 난데없이, 혹은 내가 어쩌다가 본의 아니게 개를 자극하게 되어, 개가 달려들어 나를 물었다고 가정해보자. 충동을 누를 수 있는 이성의 힘이 우세한 사람이라면 말을 하거나 달랠 수 있겠지만, 개에게 그런 것을 기대할 수는 없다. 개의 충동은 오로지 몽둥이 외에는 막을 도리가 없다. 하지만 몽둥이가 주변에 없다면, 혹은 몽둥이를 집어들 겨를도 없이, 막무가내로 달려든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살기 위해 나 역시 개가 되어 악착같이 물어뜯고 싸워야 할까? 아니면, 힘이 닿는 한에서 적당히 피하고, 적당히 물리치고, 적당히 대응하면서 최대한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지켜야 할까? 아니면 개의 충동이 누그러질 때까지 이를 악물고 참아내야 할까?
분절 없는 정념에 사로잡힌 울부짖음은 어떤 덩어리처럼 나오기는 하지만, 항상 비틀려 있고, 가운데가 뚝뚝 잘려져 나가 있으며, 파편들이 나뒹굴고, 하나의 울부짖음이 다른 울부짖음으로 파고들어, 분절의 모든 가능성들을 차단해버리고, 중간과 중간을 뚝 잘라 부스러기들로 만들어 버린다. 정념과 충동은 모든 자연을 부스러기와 파편들로 향하게 하고, 또 모든 자연을 조각 내고, 그렇게 잘려져 나간 부분대상들에 모든 총력을 기울여 그 대상을 숭배한다. 그래서 분노는 맥주병이 되고, 원한은 칼날이 되고, 슬픔과 억울은 고층빌딩의 난간이 된다. 이것이 바로 충동이 이들을 소통하지 못하게 하는, 단지 직접적 가해, 공격, 상처들만 나뒹굴게 하는 이유이다.
생명에 위협이 느껴진다면 아마도 나 역시 본능적으로 악착같이 물어뜯게 될 것이다. 이 위협과 공포에 대한 본능적 반응 때문에, 화와 충동에는 항상 약자의 가련함이 있다. 저 동물들의 울부짖음 역시 어떤 공포와 고통의 산물이 아니겠는가?(그러나 궁금한 것은 도대체 무엇이 그렇게 공포스럽고 고통스러웠던 것일까? 모든 자연적 공포가 말살된 이 대도시에서!) 결국 생명에 위협이 되지 않을 때, 정념에 사로잡힌 혼란에 뒤섞이지 않으려면 숨을 죽이고 가만히 있는 수 밖에 없다. 소란은 반드시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릴 것이다. 정념의 혼란은 지속적이지도,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도, 무게도 없다. 그것은 한 순간의 끓어오르는 수증기의 부글거림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결국 남는 것은 속을 비우고 난 공허감, 과거 오래 동안 삭힌 냄새를 풍기며 몸 밖으로 빠져나와 버린 질척한 국물, 충동의 소란이 휘젓고 간 후 잘려져 나간 부스러기와 파편들 뿐이다. 그래서 그들의 소리가 아무리 애처로워 보이고, 당장에 임박한 문제가 그들의 고통을 누그러트리는 문제라고 해도, 결코 그들과는 뒤섞일 수도, 뒤섞여서도 안 되는 것이다. 서둘러 도망을 가야 한다.
대중 미디어는 거의 매일 소셜네트워크니 사이버스페이스니 해가며 인터넷을 통한 사람들의 접속관계에 대한 보도로 울부짖는다. 미국에서 온 트위터, 페이스북, . . .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그 양상, 파급력, 기능, 효율을 과장해가며 소셜미디어 네트워크의 열광을 창조해낸다. 이 과장으로 공허한 미래-현대인이 창조된다. 소셜네트워크라고 하는 열광적 공허의 접속양태가 창출하게 될 많은 것들 중에, 그 중엔 물론 긍정적인 것도 있을 것이고 부정적인 것도 있겠지만, 최후의 승자는 무엇일까? 바로 접속단말기(또는 그 생산자)가 아닐까? 그리고 그에 부수적으로 기생하는 자질구레한 업자들. 화려하게 치장한 무대위의 모든 무희들이 최종적으로 지시하는, 이 과장의 한 가운데에서, 울부짖는 보도들의 스크립트와 동영상 속에서 어떤 식으로든 (우연을 각색하면서까지) 빠지지 않고 항상 등장하는 매체. 스마트폰 혹은 무슨 무슨 "탭", 무슨 무슨 "패드"로 불리는 미학적 기기들. 일찌기 산업을 토대로 성장했던 영화 제도와 마찬가지로(위대한 고다르가 <경멸Le Mepris>에서 그 역학을 잘 보여주었듯이), 앞으로 언론사의 기사와 보도에는 반드시 글을 쓴 해당 기자의 이름 뿐만 아니라 보도의 후원자(스폰서)--연예인을 뒤에서 놀아가며 보호해주는 사람도 스폰서라고 부른다--가 누구인지도 기록해야 한다는 조항을 입법화 했으면 좋겠다. 보도의 주체를 그 막연한 객관주의적 얼버무림으로부터 떼어내기 위해서.
스폰서: 화대를 대주는 쪽.
스폰시: 화대를 받으며, 스폰서에게 다른 가치를 주는 쪽. 쾌락을 주거나 선전을 해주는 쪽.
영화 <아이들>은 "팩트(fact)는 환상일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을 밑바닥에 품고 있다. 왜냐하면 팩트의 본질은 모호성에 있기 때문이다. 가령, 시체 옆에 칼을 든 남자가 서 있다. 그는 죽이기 위해 칼을 찌른 후인가? 아니면 살리기 위해 찔려 있는 칼을 뺀 것인가? 이렇게 해서, 팩트는 기억이라느니, 필요라느니, 아니면 "욕망을 반영한다"는 식의 인식론적 존재론의 오래된 화두들이 등장한다. "이것이 사실이다!"는 진술은 보고나 기술이 아니라 표현이라는 것이다. 내 경험에도, 사람들은 보고싶은 것만 보고, 말하고 싶은 것만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보는 방식, 말하는 방식은 바로 그 사람이 사물에 더 가까운 사람인지, 신에 더 가까운 사람인지를 말해주는 것이다.
모든 팩트의 실상에 도달하기 위해, 혹은 쉽게 말해 칼을 든 저 남자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다름 아닌 "시간"이다. 이것이 바로 전후 유럽의 네오리얼리즘과 누벨바그 등의 현대적 영화감독들이 그토록 고민했던 "베리떼(verite)"의 최종 종착지가 시간인 이유이다. 따라서 시간을 제거할수록 베리떼는 물건너 간다. 그리고 그 균열 사이에서 폭력이라고 하는 듣기도 싫은 단어가 탄생한다.
영화 <아이들>에서는 살인보다도 더 끔찍하고 소름끼치는 폭력이 등장한다: 속단!
여기서는 속단의 두 가지 형태 혹은 동기가 제시되고 있다. 하나는 믿음에서 비롯되는 끼워맞추기식 속단이 그것이고(교수가 대변하는). 다른 하나는 필요(욕망)에서 비롯되는 선택식 속단(PD가 대변하는)이 그것이다. 믿음이든 필요이든, 아니면 그 어떤 다른 정념이든, 이들은 실상을 보려는 욕망이 아니라, 보고싶고, 봐야만 하는 것을 욕망한다. 모호성의 근원적 환경인 리얼리티의 다양성은 "상식"이라는 무시무시한 무지 아래, "확신"이라는 저열한 의기양양 아래 무식하기 그지없이 왜곡된다. 영화의 나중에 가서(실상은 항상 나중에 나온다) 밝혀지게 되는 그 전화통화, 즉 아들로 추정되는 목소리와 어머니의 전화통화에서 보듯이, 실상은 항상 비상식적인데도 말이다.
어쩌면 지식인에게 필요한 것은 용기나 정의감이 아니라, 유보시키는 힘, 햄릿과도 같은 우유부단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햄릿의 고뇌를 흔히 우주론적이라고 말하지만, 내가 보기엔 가장 현실적인 것으로 보인다. 살인이나 학살과 같은 명시적 폭력보다도, 우리는 실제로 비명시적 폭력을 일삼는 괴물들에 더 자주 더 깊숙히 더 지속적으로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스캇 펙(M. Scott Peck) 이라는 미국의 정신과 의사이면서 기독교 관련 작가가 있다. 비록 기독교적 관점에서 영성(spirituality)과 믿음에 관한 글을 쓰고는 있지만, 비교적 포용력을 발휘하고자 노력은 하는 것 같다. 그는 과학과 종교의 내밀한 관계성을 언급하는 칼 융(Carl Jung)이나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의 현대적 반복이라고 스스로를 정의하기도 한다. 또 기독교 뿐만 아니라 불교(특히 선불교)와 다른 여타 종교들에 관해서도 비교적 열려고 노력은 한다. 뉴에이지(New Age) 경향도 있다. 그래서인지 미국에서는 상당한 독자가 있고, 당연히 한국에서도 꽤 많은 독자가 생긴 것으로 알고 있다. 최근에 의뢰를 받아 그의 책 한 권에 관하여 번역 감수를 하고 있는데, 여기 저기를 읽다가 흥미로운 대목이 있어 소개하려고 한다. 지옥에 관한 그의 얘기이다. 이 구절에서 스캇 펙은 판타지 소설가 루이스(C. S. Lewis)의 소설인 <천국과 지옥의 이혼>(The Great Divorce)이라는 작품을 소개하면서 지옥에 관해서 언급한다. 소설 속의 인물들은 어찌어찌 하여 천국에 갔는데 천국을 체험하고 나서 거의 모두가 자기들이 살던 곳(지옥으로 묘사된)으로 다시 되돌아 가기로 결정한다. 천국에 갔던 사람들이 어째서 다시 지옥으로 되돌아가려고 마음먹은 것일까?
[. . .] 그의 소설 《천국과 지옥의 이혼 The Great Divorce》은 지옥(루이스는 지옥을 비참하고 우울한 영국의 중부 도시로 묘사하고 있다)에 있던 사람들이 가까스로 천국행 버스를 타게 된 과정을 다룬 이야기다. 천국은 아주 밝고 유쾌하고 즐거운 곳이다. 이 사람들은 친구들과 친지들로부터 엄청난 환대와 온정을 받는다. 그러던 마지막 날, 이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을 제외하고 다시 버스에 올라탄다. 그 한 사람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하지가 않다. 이 한 사람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다시 지옥으로 가기로 결정한다!
이유가 뭘까? 루이스는 여러 예를 들었다. 무례를 무릅쓰고 과감하게 사례들을 요약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겪은 전형적인 사건을 인용해 보겠다.
버스에 있던 사람들 가운데 조카에게 환대를 받았던 한 사람을 예로 들어보자. 이 남자는 천국에서 조카를 만나게 되어 깜짝 놀란다. 왜냐하면 이 젊은이는 도무지 천국에 있기에 가당치도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조카는 아주 반기는 모습이었고 천국은 밝고 유쾌한 곳이다. 그 남자는 이렇게 말한다. “여긴 아주 훌륭한 것 같고 나는 여기 머물고 싶구나. 너도 알다시피 난 콜럼비아 대학 역사학 교수였잖니. 여기도 대학이 있니?”
조카는 대답한다. “그럼요, 삼촌.”
“그럼 난 종신 재직권을 얻을 수 있겠구나.”
“당연히 그러실 거예요. 천국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종신 재직권을 가지거든요.”
삼촌은 깜짝 놀란다. “아니, 어떻게 모든 사람들이 종신 재직권을 얻을 수 있단 말이냐? 적임자와 비적임자를 구분해야 되지 않겠니?”
조카는 이렇게 말한다. “여기선 모든 사람들이 적임자랍니다. 삼촌.”
삼촌은 더 이상 함께 앉아있기도 싫었지만, 계속해서 조카에게 질문을 한다. “너도 알겠지만, 나는 학장이었다. 여기서도 학장이 될 수 있겠지.”
“유감스럽지만, 여기엔 학장이란 건 없어요. 그런 식으로 일을 처리하지 않아요.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 책임이 있고 그래서 의견을 모아 일을 하기 때문에 학장이란 직책은 필요하지 않아요.”
그때 바로 삼촌이 침을 튀겨가며 툴툴거린다. “적임자와 쓰레기를 구분하지도 않는 이런 설익은 조직에 내가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야.” 그러고는 이 남자는 버스에 올라타 지옥으로 돌아가 버린다.
지옥에 대한 나의 견해는 확실히 루이스와 같다. 지옥문은 넓게 열려 있다. 사람들은 지옥에서 곧바로 걸어나올 수 있다. 이들이 지옥에 있는 이유는 나오지 않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 . .] 희망도 갖지 못하도록 사람들을 벌주고 부활의 기회도 없이 영혼을 파괴하는 곳이 지옥이라는 견해를 나는 받아들일 수 없다. 끓는 기름에 사람들을 튀겨버릴 심사였다면 신은 일부러 그토록 복잡하게 영혼을 창조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Morgan Scott Peck, Further Along the Road Less Traveled, New York, 1998. pp. 170-171.)
속물의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면, 그것은 부지런하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속물은 일찍 일어나고, 일찍자고, 맡은바를 게을리하지 않으며, 뚜렷한 목표의식으로 일상을 채운다. 속물의 행동강령은 부지런이다. 방탕하거나, 게으르거나, 자신의 의무에 의구심이 강한 사람은 속물이 되기 어렵다. 한 사회에서 좋은 직업군이나 상위계층에 속하는 사람들의 거의 대부분이 속물로 채워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들의 행동강령 속에 녹아들어 있는 뚜렷한 목표가 바로 그들이 현재 처해있는 사회적 위상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속물의 가장 최악의 덕목 또한 이 부지런에 있다. 속물은 마주보고 서있는 앞사람 그리고 함께 앉아있는 옆사람에게 자신과 마찬가지의 목표의식과 부지런을 강요한다. 자신만이 힘들게 사는 것 같아 억울해서인지, 아니면 그러고 사는 것이 너무도 좋아 전도를 하고 싶어서인지, 아니면 열등한 영혼을 공유해서 분산시키고 싶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사실은 배가하지만), 어쨌든 부지런한 그들은 부지런을 강요한다. 헉슬리(Aldous Leonard Huxley)가 말했듯이, 속물근성은 "행동을 자극해서 바쁘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래서 속물근성으로 가득찬 사회는 "마치 벼룩이 잔뜩 묻은 개처럼" XX 발광을 한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인류 역사상 모든 진정한 예술가들(헉슬리에 따르면, 예술속물 혹은 문화속물도 있으므로)의 개인사는 속물과의 투쟁사, 아니 희생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William Thackeray가 편집했던 잡지 <펀치>(Punch)의 1892년 어느 날 삽화에는 뿌리깊은 '상처'를 안고 '열등감'으로 살 수밖에 없는 속물의 내적본질을 잘 담은 한 대화가 수록되어 있다. 삽화에서 한 신흥부르주아 여인은 딸에게 이렇게 가르친다. "우리와 사귀고 싶어 환장한 사람들은 우리가 사귈만한 사람들이 아니란다. 우리가 사귀어야 할 사람들은 오로지 우리와 사귀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 뿐이란다!"
질투의 경우 보다 실질적인 횡단(transgression)이 일어난다. 질투란 연인으로부터 발견한 많은 영혼과 풍경에서 나의 부재를 각성하거나 망상하면서 생기는 감정이다. 그것은 사랑하는 애인에 의해 발산된 징후에 의해 펼쳐지는 세계가 나와는 전혀 무관한 어떤 실재임에 대한 통찰이다. 내 눈에 보이는 애인의 모든 말과 몸짓은 매순간이 배신이며 거짓이며 이별의 선언이다. 그러나 나를 배신하는 그 풍경들로 인해 나는 더욱 더 애인에 대한 열망과 사랑에 이끌린다. 질투에 빠진 나는 애인이 생각하고 느끼고 바라보고 경험하는 모든 있을 법한 행위와 상황들을 밝히기 위해 고통스런 해석을 쉼 없이 감행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랑이 언제나 좌절로 귀결되는 것은 필연적인 과정이다. 해석 행위가 깊어질수록 나는 애인의 세계로부터 배제되고,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 중 하나의 대상에 불과한 존재가 될 뿐이다. 질투하는 여성이나 남성은 연인의 조각난 영혼들과 부스러기의 세계 속으로 끊임없이 파고들어야 할 운명에 처한다. 그 세계는 내가 결코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이며, 거짓말과 배신으로 베일이 가려져 애인의 표정이나 말의 진실을 감추고 있는 암흑의 세계이다. 바로 이 세계와의 대면 속에서 횡단이 일어난다. 애인이 내뱉는 단어 한마디는 그녀의 동성애 상대와의 대화를 암시하기도 하고, 슬쩍 엿본 그녀의 곁눈질 속에는 다른 남성에 대한 타오르는 욕망이 있으며, 내게 보내는 미소와 호의조차도 하나의 거짓된 음모로 꾸며지며, 감추고 있는 표정들 하나하나가 천근만근의 비수가 되어 가슴에 꽂힌다. 그것은 “연적戀敵을 발견하는 것보다도 더 잔인한 부분 대상들”을 발견하면서 겪어야할 절망적인 전투이다.(Deleuze, Proust and Signs, 139~141)
<들뢰즈의 잠재론: 소멸과 창조의 형이상학>중에서 pp. 372-373에서 발췌
이창동의 정동(affects)에 관한 영화 <시>(Poetry)에서는 실제로 한 시인이 등장하여 시를 배우기 위해 찾아온 수강생들에게 "시가 무엇인지", 그리고 "시를 잘 쓰는 법"에 관하여 여러 차례에 걸쳐 강의를 한다. 그는 시를 잘 쓰려면 "잘 보아야 한다"고 충고하면서, 사과 하나를 집어 들고는 거의 스토아철학(Stoicism)을 방불케하는(심지어 "순수가능성"이라는 용어까지 사용하여) 아름다운 시론(詩論)을 강의한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우리는 사물을 잘 보지 않는다. 필요할 때만 관심을 두고, 용도에 따라서만, 미리 정해진 어떤 역할과 기능에 따라서만 사물을 취급한다. 사과는 항상 우리의 눈 앞에 있지만, 우리는 사과를 먹을 뿐 보지는 않는다. 사과는 존재한다기 보다는 단지 우리에게 주어진, 우리를 위한, 우리에 대한, 하나의 음식일 뿐이다. 사과가 우리에게 이러한 존재일 뿐이라면, 사과의 시상(詩想)은 우리를 찾아오지 않으며, 시를 쓰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가 말하는 시상이란 사과가 우리의 필요와는 무관하게 그 자신 안에 존재하는 것임을 우리가 아는 순간이다. 말하자면 우리가 관심을 두기 이전부터 있어왔던 사과 자신의 역사가 우리 앞에서 펼쳐질 때, 비로소 사과의 시상이 떠오르는 것이다. 따라서 시가 우리를 찾아오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찾아 떠나야 한다고 시인은 충고한다. 그 가르침에 따르면, 시는 우리 자신의 안이 아니라 밖에 있는 무언가이다. 여기에 시의 어려움이 있으며, 이에 할머니-소녀는 시를 찾아 '생전처음' 밖으로 외출을 한다. 그러나 이것이 또한 시의 역설이다. 시를 찾아 밖으로의 외출은 가장 깊숙한 내부로 들어가기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녀는 자신의 주변에서 살아가는 어느 누구보다도 멀리 나가서 가장 깊숙한 어떤 곳으로 들어간다. 자신으로부터 빠져나가 다른 존재의 내부로 들어가기. 혹은 내 안에서가 아니라 그가 있는 바로 거기에서 그의 역사 전체를 바라보기. 이렇게 해서 시를 쓴다는 것은 하나가 되기이다(마지막에 할머니-소녀가 남긴 시는 그녀 자신의 시인지 아니면 죽은 소녀의 시인지 알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러나 하나가 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이창동 감독이 제시하는 길은 아주 단순한 것이다. 기억이 지워져도 남아있는 것, 아니 오히려 자신의 기억과 역사가 지워짐으로써만 더 잘 드러나는 그 무엇. 볼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고, 가질 수도 없고, 말해질 수도 없고, 단지 느끼는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는. 즉 느껴지는 존재로서의 온전한 한 사과의 현존을 가능케하는, 들뢰즈(Gilles Deleuze)가 어디선가 "선분"이라고 불렀던 것과 다르지 않은 의미에서의 "순수한 비젼"에 도달하기. 이것이 그가 말하는 시이다.
나아가 시는 실천적 비전에까지 이른다. 왜냐하면 이렇게 본다면 시는 가장 구체적이고 가장 내밀하며 가장 친밀한 관계를 가능케하기 때문이다. 시는 살인범을 잡아 처벌 할수는 없지만 살인범의 탄생을 막을 수는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시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본질적이다. 영화든 문학이든, 모든 예술의 토대는 정동이다. 정동을 향해있고, 정동을 드러내고, 정동에 사로잡힌 이미지만이 미적인 비전과 실천적 비전의 아상블라주를 드러낸다. 역사적으로 볼 때 정동은 주로 얼굴과 관계가 있었다. 정동을 추출하는 영화들은 아주 많다. 어떤 감독은 얼굴을 통해 정동을 추출하기도 하고, 어떤 감독은 얼굴을 지움으로써 정동을 추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창동은 정동의 추출에 머물지 않고 그것을 논의한다. 그의 작품 <시>는 정동에 관한 영화, 즉 메타-정동 영화이다. 놀라운 것은 이를 리얼리즘 분위기의 이미지로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졸라(Emile Zola)의 자연주의적 혹은 근원적 세계의 시간과는 달리, 위대한 고다르(Jean Luc Godard)는 Vivre Sa Vie (1962)에서 사회적 시간을 묘사한다. 나나는 자신 안에 내재한 곰팡이의 배아와도 같은 기질로 인해 주변을 썩어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녀 자신이 사회적 곰팡이로 인해 감염되어 썩어간다. Vivre Sa Vie에서의 시간이란 다름 아닌 그러한 감염의 흔적들이 점점 깊어지고 돌이킬 수 없게 되어 결국 파국으로 치닫는 과정의 목도이다. 나나는 매춘부가 되어 포주 라울에게 매춘부 교육을 받는다. 매춘 사회학과도 같은 대화 내레이션이 계속되면서, 나나의 조직적이고도 기업적인 영업활동이 짧은 장면들로 스쳐 지나간다. 이어지는 장면들을 바라보며 우리는 아주 엄격한 통제하에 매춘부의 관리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목격하게 된다. 그녀는 타락을 한 것이 아니라 취직을 한 것이고, 직업인으로서 합당하고도 효율적인 규율 하에서 노동을 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이 매춘은 비윤리적이고 더러운 것이 아니며, 공장의 제품 생산 공정이나 기업의 마케팅 과정처럼 대단히 일상화되고 체계적으로 잘 관리되는 직업으로 묘사된다. 방세조차 지불할 수 없어 좀도둑질을 하던 레코드 점원 시절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물적 풍요를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결국은 무엇이 진짜 사회 악인지 구분할 수 없게 된 이 마당에, 단지 그것이 개인적인 것과 조직적인 것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그 방식과 강도가 조금 다를 뿐 그녀가 노동과 규율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한때는 '대중문화의 퍼스트레이디'로 잘 알려졌던 뉴요커(New Yorker) 수잔 손택(Susan Sontag). 예술에 대한 사랑과 강박의 소유자. 그럼에도 그녀는 자기 스스로 "강박적 모럴리스트"라고 부르길 꺼리지 않았다. 아름다움과 도덕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던 것 같다.
그녀는 예술에 대한 사랑을 분석가나 연구자로서가 아니라, 한 명의 감상자 혹은 숭배자로서 감추지 않는다. 예술작품을 분석의 대상이 아니라 마치 애인에 대한 욕망과 관능으로 이해하겠다는 태도이다. 그녀는 이를 예술의 "성애학"(erotics)이라고 부르고 싶어했다. 프랑스인 글쟁이 바르뜨(Roland Barthes)의 예술론의 한 측면인 감각주의와 뉴욕 예술계 특유의 냉소적 분위기가 뒤섞여 (적잖이 속물스러운) 변용을 일으키는 것 같기도 하지만, 어쨌든 예술작품뿐만 아니라 경험에 있어서의 관능성의 회복, 이것이 그녀의 주장이다. 어떤 점에서 볼 때, 그녀가 주장했던 전체 논지는 현대의 복제 산업이 만들어 놓은 불감증에서 느껴지는 불쾌감의 표현에 다름 아니다(그럼에도 그녀는 현대성이 여성을 해방시킨 유일한 시대라고 옹호하기도 하지만).
그녀는 1966년에 이 불쾌감의 한 몸짓으로, 어쩌면 불쾌감의 근원이라고 판단했던 누군가에게 항변하는 대응시선으로, 맹랑한 제목의 글을 발표했다. 그녀를 일약 스타의 반열에 오르게 해준 에세이 <해석에의 반대>(Against Interpretation)가 그것이다. 여기서 그녀는 해석행위를 불감증을 일으키는 근원으로 규정한다. 그녀의 항변에는 일부분 일리가 없지 않다. 그녀의 말을 들어보자:
" 예술 쪽으로 눈을 돌려보면, 해석이란 작품 전체로부터 몇 가지 요소들(요소 X, 요소 Y, 요소 Z, 등)을 뽑아내는 것을 의미한다. 해석의 임무는 사실상 번역의 임무와 같다. 해석자는 말한다. 보세요! 저 요소 X가 정말로 A인 것이 안 보이세요? 저 Y가 정말로 B가 아닌가요? 저 Z가 정말로 C가 아닌가요? [. . .] 해석은 맨 처음 후기 고대 문화에 나타나는데, 이 때는 과학적 계몽주의를 통해 소개된 '사실주의적' 세계관에 의해 신화의 힘과 신뢰성이 깨졌던 때이다. 신화로부터 벗어나려는 의식을 지배하고 있었던 의심—종교적 상징의 '그럴듯함'에 대한 의심—이 생기자, 고대의 텍스트는 더 이상 그 원시적 형태로 수용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고대의 텍스트와 '현대적' 요구를 화해시키기 위해 해석이 필요해지게 되었다. 그래서 스토아학파는 신들이 도덕적이어야 한다는 자신들의 견해와 일치시키기 위해, 호머의 서사시에 나오는 제우스와 그 떠들썩한 일족의 무례한 행태를 알레고리로 만들어 버렸다. 그들의 설명에 따르면, 제우스와 레토의 부정을 통해 호머가 진정으로 말하고자 했던 것은 권력과 지혜의 연합이었다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알렉산드리아의 필로(Philo)는 구약의 역사적 이야기를 영혼의 패러다임으로 해석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40년 동안 사막에서 방랑을 하다가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출애굽기가 실은 개인 영혼의 해방, 시련, 최후의 구원에 대한 알레고리라는 것이다. 해석은 이렇게 텍스트의 분명한 의미와 (현대)독자의 요구 사이에 불일치를 전제한다. 해석은 그 불일치를 해소하려는 것이다. 여러 가지 이유로 텍스트를 받아들일 수 없게 된 상황이지만, 폐기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해석은 옛날 텍스트, 즉 너무나 소중해서 개작하거나 거부할 수 없는 텍스트를 보존하려는 급진적인 전략이다. 해석자는 그 텍스트를 실제로 지우거나 다시 쓰지 않고도 그것을 바꾸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그 텍스트의 진정한 의미를 드러내어 단지 텍스트를 이해 가능한 것으로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해석자가 텍스트를 아무리 많이 바꾸어도(또 다른 유명한 예로는, 틀림없이 관능적이기 그지없는 아가서(the Song of Songs)를 '영적으로' 해석한 유대교와 기독교가 있다), 이미 거기에 존재하고 있는 어떤 의미를 읽어낸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 . .] 이해한다는 것은 해석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해석한다는 것은 현상을 바꾸어놓는 것, 그것에 대한 등가물을 찾는 것이다. [. . .] 해석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정하듯이) 절대적인 가치, 시간을 초월한 능력의 왕국에 자리잡은 어떤 정신의 몸짓이 아니다. 인간의 의식이 역사적 산물이라는 견지에서, 해석은 그 자체로 평가 받아야 한다. 어떤 문화적 문맥에서 보면, 해석은 해방적 행위이다. 그것은 죽은 과거를 개정하고 재평가하고 탈출하는 수단이다. 다른 문화적 맥락에서 보면, 그것은 반동적이고, 무례하고, 비겁하고, 답답하다." (Susan Sontag, "Against Interpretation", A Susan Sontag Reader, New York, Random House, 1982, pp. 97-98.)
손택의 말을 넓게 생각해보면, 해석은 적든 많은 왜곡이고 기만이다. 해석은 텍스트의 다양성으로부터 해석자 자신이 보고 싶어하는 요소만을 잡아내어 자신 쪽으로 끌어 당기는 행위이다. 그래서 해석은 과거의 현재화이고, 차이의 동질화이다. 가령, 카프카의 텍스트를 '현대 사회의 소외'라든가 '개인의 고독'이라고 하는 한 두 가지의 규정된 관점으로 읽는다든가, 현재의 필요에 따라 역사적 사실이나 영토의 소유관계를 (재평가가 아닌) 현재적으로 규정하고 싶다든가, 그 묘사가 너무나 다양해서 하나의 의미로는 말할 수 없는 브뤼겔(Pieter Breughel)의 작품 <Procession to Calvary> 안에서 '십자가 처형'이라는 부분적인 주제에 적합한 몇 개의 장면만을 시퀀스로 떼어내어 그 작품 전체를 성화로 간주한다든가, 연예인이나 스포츠스타 혹은 정치가의 특정 모습만을 담은 스틸컷을 스캔들 기사와 나란히 병치한다든가, . . . 이 같은 모든 정당화 행위들, 즉 현재의 욕망을 투사해서 과거를 왜곡하기,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개인의 주장과 의지로 환원하기, 전체를 보지 않고 부분만 떼어내어 편집하기, 미리 알려진 교리와 믿음에 기대어 새로운 상황을 규정하기, . . . 를 손택이 우려했던 것은 지식의 정치적 사용에 의한 훼손이다. 이로 인해 예술작품이든 삶이든 그 고유한 관능성과 투명성을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물론 해석하지 않고 살 수는 없다. 아니 해석이 아닌 삶이 존재할까? 손택도 밝혔던 바, "니체가 말하는 해석의 의미", 즉 삶에는 진리가 아니라 해석만이 있다고 니체(Friedrich Nietzsche)가 말했을 때의 그 해석의 의미를 부정할 수는 없다. 원리상 현재란 새로운 경험들을 맨몸으로 직접적으로 대면해야 하는 상태이고, 이를 해석하지 않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예컨대 현대성의 한 진기한 현상으로 볼 수 있는 연쇄살인의 명확한 의미를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 안에 미리 결정되어 있는 해답이 있는지조차 알 수 없다. 우리가 가진 지식과 기억을 통해 해석할 도리 밖에.
결국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고, 자신의 필요에 따라 주변을 해석하고, 과장하고, 비유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손택이 하고 싶었던 말은 우리의 전반적인 경향성, 더 정확히 말해 우리의 해석 행위조차 하나의 반성적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해석행위 자체는 시간을 초월한 관점을 소유한 신의 활동이 아니라 역사적 산물이기 때문이다. 즉 해석이란 필요에 의해 자행된, 사실에 가해지는 폭력이다. 역설적이게도 우리의 해석이 역사의 산물임을 받아들일 때, 해석의 굴레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해석을 반대하는 가운데 그녀는 자신의 '성애학'을 특징짓는 술어로 관능성을 말했을 뿐만 아니라, 경험의 "직접성"(immediacy) 혹은 "투명성"(transparency)을 강조하고 있다. 같은 맥락에서, 삶에는 해석만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니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삶의 능동적 창조에 관한 것이었지, 삶 자체를 어떤 혼탁한 의견에 의한 왜곡과 기만이라고 정의한 것은 아니었다.
동물원이란 속물근성적인 문명의 허영과 오만에 찬 향수이다. 고향 사진을 한 장 찍어 사진첩 혹은 벽걸이에 꽂아두는 것과는 비교할 수가 없는 것이다. 동물원에서 일어나는 일은 자연사적 사건이 아니라 문명의 한 스캔들이다. 그것이 식물이나 동물들로부터 일어난 것일지라도. 아래의 흥미로운 기사를 보라.
http://nownews.seoul.co.kr/news/newsView.php?id=20090618601007
이 에피소드에는 자연을 바라보는 문명의 공포가 뚜렷이 드러나 있다. 어른이 순진무구한 아이의 행동을 바라보며 불안해하고 걱정하고 놀라며 공포에 떠는 그러한 모습과는 전혀 다른. 칼을 쥔 당사자로서는 칼의 용도조차 알지 못했을 것이다. 칼은 물론 자르거나 찌르거나 파고들어 사물을 해체한다. 그러나 칼에는 수많은 윤리적 가치가 내재한다. 물건을 자르고, 찌르고, 줄을 끊고, 사람의 육신을 해체하고, 피를 내고. 그 중에 어떤 기능을 선택할지는 순전히 칼을 쥔 자의 생각에 달려 있다. 요리사의 칼, 어머니의 칼, 범죄자의 칼, 어린 아이의 칼. 문명의 반대편에 서 있는 고릴라로서는 칼이 음식을 자르는 도구라는 생각조차 했을 리 만무하다. 아니 쥐는 부분이 칼 자루일 것이라는 생각조차. 그냥 우연히 날카로운 곳을 피해 잡다 보니 칼자루였을 것이고, 그냥 우연히 장난을 치다 보니 칼을 휘두르는 꼴이 된 것이다. 자연은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우연이니까. 하물며 칼이 생명을 해치고 살생을 하는 범죄 행위의 도구라는 생각은, 범죄의 개념조차 없는 그에게 있을 수도 없지 않은가? 그는 그냥 인간이 떨어 뜨려 놓은 칼을 호루라기를 주어 불어보듯이 이리저리 휘둘러 보았다. 그러나 칼을 들고 장난을 치는 고릴라를 바라보며, 소스라치게 놀란 표정과 신음을 냈던 관람객들이 상상했던 것은 무엇일까? 휘둘려지는 허연 칼과 그것을 쥔 고릴라의 특유한 외모를 결합했던 것일까? 그래서 그 동안 자신이 문명인으로서 마음 속 깊이 새겨둔 어떤 이미지가 환기되었던 것일까? 검은 색의 털이 온 몸에 무성하게 나 있어 무지막지하고 무섭게 생긴 동물이 금속성의 강한 해체 도구를 들고 뛰어 다닐 때, 문명이 쉽게 머리 속에서 떠올릴 수 있는 그러한 이미지를. 예를 들면, 기자가 찍었을 수많은 사진들 중에서 하나를 뽑아 저기에 게시된 저 이미지와 같은, 정확히 인간의 모습을 닮아 더 끔찍해 보이는 그러한 이미지를. 어떤 점에서 문명이란 만물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싶어 안달이 난 강박 아니면 부정적 나르시즘일 것이다.
칼의 존재는 칼을 쥔 자 뿐만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자의 상상 속에도 있다. 칼을 보며 우리가 상상하는 것! 자연에 대하여 혹은 순진무구에 대하여 문명이 상상하는 것! 그것이 바로 칼의 존재이며, 칼을 쥔 우리의 상황을 표상한다.
2차 대전을 전후하여 활약했던 일본의 유명한 영화감독 오즈 야스지로(Ozu Yasujiro)는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특유의 카메라 시선을 창조했다. 흔히 "다다미 쇼트"라고 불리는 것으로, 피사체를 낮은 자세에서 잡은 장면을 말한다(특히, 인간의 시야와 친숙한 이미지를 만들어내기 위해, 그는 깊이감을 주는 망원렌즈나 넓은 시야를 보여주는 광각렌즈보다는 표준렌즈를 사용했다).

이 장면은 그의 작품 <부초>(floating weeds)의 한 장면을 자른 사진인데, 이를 보면 카메라가 거의 지면에 붙어서 포착한 장면처럼 보인다. 낮은 자세에서 사물을 바라볼 때, 저러한 독특한 이미지가 나온다.
다다미쇼트는 주로 집안이나 방안의 정경을 보여주는데 사용된다.

위의 사진 역시 <부초>의 한 장면인데, 먼 곳으로 유랑하던 남편이 몇 년 만에 돌아와 저쪽 방 안에서 약간 처량하게 담배를 태우고 있는 동안, 아들과 살며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는 그를 위해 술을 데우고 있다. 부엌의 마루 아래쪽에서 그녀를 올려다 보며, 카메라는 마치 그녀의 고독과 원망을 슬쩍 훔쳐보고 있는 듯 하다.

유랑극단의 단원들이 빗소리를 들어가며 처량하게 창 밖을 바라보고 있다. 멋지게 공연하려던 계획은 관객의 냉담으로 수포로 돌아가고, 갑자기 내리는 비는 갈 곳 없는 이들의 절망을 배가한다. 낮은 구도로 그들의 굽은 등 뒤를 포착하여, 마치 옆에서 함께하는 누군가의 공감 어린 시선이 느껴지는 듯 하다.

이 장면은 수 년간 유랑생활을 하던 아버지가 아들과 오랜만에 재회하는 모습이다. 아버지는 자신의 비천한 계급 때문에 아들이 사회적으로 부당한 대접을 받을까 두려워, 아내와 함께 작정을 하여 자신이 삼촌이라고 속인다. 오랜만에 집에 돌아와 힘차게 쭉 뻗어 자란(서로를 꽉 물고 있는 저 단단한 엉덩이를 보라!) 아들을 바라보며, 한편에는 뿌듯함과 대견함이, 다른 한편에는 아버지임을 말할 수 없는 안타까움이 교차한다. 카메라는 마루 아래 쪽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모습 전체를 올려다보며, 아들의 성장이 얼마나 힘찬지, 그리고 아버지의 쇠잔함과 왜소함이 얼마나 초라해 보이는지를 대조하고 있다.
다다미쇼트는 다다미에서 앉은뱅이처럼 좌식 생활을 하는 일본가정 환경에서 일본인들이 사람과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을 반영한다. 또한 마치 가부키나 가면극의 무대 아래에서 무대 위를 관람하고 있는 것 같은 시선을 갖추고, 뒷마당으로 활짝 난 창 밖이 마치 무대의 배경처럼 설정되어, 일종의 액자형(proscenium frontage)의 구도를 드러낸다. 카메라는 가만히 정지한 채로 무대 위를 바라보고 있고, 이 액자 같은 무대 위에서 인물들이 들어오거나(frame in) 밖으로 나감으로써(frame out), 카메라를 움직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장면들을 전환하고 있는 것이다.
다다미 시선의 구도는 서구인이 사물을 바라보는 환경과는 전혀 다르다. 서구인들은 주로 의자에 앉아 있거나 서 있거나 혹은 침대에 누워 있다. 이들은 방바닥에 앉아서 사물을 바라보는 경우가 흔하지 않아, 대부분 선 자세에서 허리 위, 혹은 어깨 정도의 높이에서 사물을 바라보는 구도가 지배한다. 그들의 시선은 행동을 준비하거나, 행동과 관련되어 있는 시선이다. 그러니까 사람이나 사물을 바라보는 자는 그들과 물리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가능성이 큰 것이다.

그러나 다다미 시선은 바닥에 앉아 있거나 누운 자세에서 사람의 무릎 정도의 높이에서 사물을 바라본다. 이는 행동적 시선이 아니라 관조적 시선에 가깝다. 우리는 바닥에 앉거나 누워 뭔가를 생각하고, 사색하고, 관찰하는 시선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다다미 시선은 사물을 바라보는 구도의 독특함을 반영하지만, 무엇보다도 이는 사물에 대한 관찰자의 독특한 태도, 그리고 특유의 정서와 분위기를 반영한다. 서구의 역동적 시선과는 다르게, 관조적 시선에 의해 우리는 사물과 인물들을 가만히 바라보며 연민의 감정을 느낀다. 또한 카메라가 인물들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앉은 자세나 누운 자세로 올려다 봄으로써, 그들이 크고 거대해 보인다. 인물들 곁으로 깊숙이 들어와 앉아 있는 제3의 시선이 그들과 함께하며 감정을 공유하는 것이다. 서구인들은 오즈의 영화를 보고 그 낯섦에 대단히 놀랐다고 한다. 아마도 그들에게 세계가 전혀 다르게 보였고, 전혀 다른 무언가를 촉발했던 것이다.
사진은 인간의 시각이 기계적인 메커니즘으로 사물에 접근하게 한 최초의 매체이다. 인간의 지각은 시시각각 변덕스럽고, 쉽게 나타났다가 사라져버리며, 개인 안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믿을만한 객관성을 보증하지 못한다. 개인이 목격한 어떤 사건은 법정에서 증언적인 가치로서 참고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명백한 의미에서의 증거가 되지는 못한다. 객관성을 입증하려면 목격자 자체의 신뢰성을 증명해야 하고, 그의 증언에 뭔가 추가로 비인간적인 절차가 필요하다(법은 근본적으로 인간을 불신한다). 예컨대 과학적 증명과 같은 신의 지각에 의존하든가, 아니면 사진이나 동영상과 같은 기계의 지각이 첨부되어야 하는 것이다(디지털 시대엔 또 다른 문제가 있지만).
무엇보다도 카메라는 그 기계의 본성상 객관성의 도구이다. 애초에 사진이 등장한 이후, 그 객관적 성질 때문에 인간은 세계를(인간 자신조차도) 차갑고 비정한 그 무엇으로 경험하기 시작한다.
사진의 객관성은 눈에 보이는 사물에만 관계한 것은 아니었다. 사진은 인간이 지각할 수 없는 무의식적 영역 조차도 객관적인 그 무엇으로 만들었다. 가령 우리는 물건을 쥐거나 길을 걸을 때 손동작이나 걸음걸이를 막연히 추측만 할 뿐이지 손놀림과 발 동작의 세세한 부분까지 포착하고 기억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카메라는 고속촬영이나 렌즈와 같은 보조장치를 이용해서 이들을 잡아내고 보존한다. 벤야민(Walter Benjamin)이 말했듯이, 정신분석이 인간의 충동적 무의식을 밝히는 분야라면, 카메라 기술은 사물의 "시각적 무의식"(the optical unconsciousness)을 밝힌다.
인간이 시각적 무의식을 인식하자마자, 마치 정신분석에 의해 꿈의 세계가 열린 것처럼, 현실은 인간이 바라보고 생각했던 것 이상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현실은 기괴하고 부조리해 보였으며, 더 이상 인간이 상상했던 균형과 비례를 갖춘 정상적인 모습이 아니었다. 카메라 같은 기계가 펼쳐놓은 현실은 기계가 주는 정밀한 대칭의 이미지와는 반대로 뒤틀리고 일그러져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카메라 기계가 보여준 시각적 무의식이 불균형적이고 뒤틀린 현실을 제공하긴 했지만, 오히려 다른 한편 인간이 대상에 깊숙이 파고들어 경험할 수 있는 가능성도 열어주었다. 특히 인물사진에서 그러한 경향은 두드러진다. 사진을 찍는 예술가나 사진에 찍히는 모델의 의식을 넘어서는 시각적 무의식은, 그 인물 자신조차 알지 못했던 어떤 본성을 몸 밖으로 빠져 나오게 한다. 사진에 찍힌 인물은 그 만이 가질 수 있는 어떤 독특함을 외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자기 자신의 무의식적 본성 즉 물리적(육체적) 외양을 넘어선 그의 역사 전체에 비견될만한 특유의 시간을 무심코 드러낸다.
다음 사진을 보자.

이 작품은 케르테츠(André Kertész)가 1926년에 찍은 화가 몬드리안(Piet Mondrian)의 초상사진이다. 케르테츠는 이 외에도 몬드리안에 관한 여러 점의 사진작품을 남겼는데, 이 작품은 몬드리안 개인의 온전한 표정과 포즈를 담고 있다. 케르테츠 자신의 예술적 비전이나, 심지어 모델이 된 화가의 예술 세계와는 무관하게, 여기에는 한 인간이 취하고 있는 순수하게 개인적인 포즈와, 그로부터 피어 오르는 그의 인격 전체의 분위기가 감돈다. 그의 사유(예술)와 전혀 호응하지 않는 비뚤어진 코와 약간 왼쪽으로 일그러진 얼굴 균형,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는 듯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히스테리컬한 손가락, 순수해 보이면서도 어쩐지 (아니 그래서 더) 고집스러운 지성을 품은 시선, 사회적 계급과 소박한 성품이 공존하는 듯한 옷차림, 단정하면서도 비뚤어진 넥타이, 넥타이를 꽉 조여 매어 주름진 와이셔츠, 그리고 낡아 보이는 외투, 날렵하면서도 안정되어 있지 않은 자세, 그리고 약간 경직된 자세 때문인지 움츠러든 목, . . . 이러한 시각적 요소들은 한 개인이 예술이라는 제도 속으로 흡수되기를 거부하고, 온전한 자신을 주장하고 있는 완고하기 그지없는 존재론적 무의식을 표출하고 있다.
사진은 사물의 거죽 즉 외양을 포획하는 일에 만족하는 매체라는 생각은 구시대적이다. 사진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보다 더 많은 것을 우리 앞에 제시한다. 수잔 손탁(Susan Sontag)의 말에 따르면, 사진에는 "우리가 놓쳐버린 10%"가 있다. 만약에 진실이라는 것이 우리의 상상 안에 있지 않다면, 틀림없이 우리를 빠져나간 그 10%에 있을 것이다.
푸코(Michel Foucault)는 자신의 저서인 『비정상인들』(Les Anormaux)에서, 한 사회가 "정상"과 "비정상"을 어떻게 구분하고 규격화하는지를 분석한다. 사회가 비정상이라고 규정한 대상은 크게는 괴물이라고 불리는 기형인이나 범죄자를 비롯하여 작게는 예의 없음, 좋지 못한 버릇, 자위행위, . . . 등이 있다. 이 책에서 그는 중요한 두 가지의 앎의 형태를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17세기 유럽에서 범죄자를 다루는 사법체계와 권력이 범죄자에 대한 앎을 어떤 식으로 형성하는지에 대해 간단하지만 강렬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짧은 구절을 발췌하여 한번 읽어보자.
"[…] 권력의 메커니즘은 너무나 강하고, 그 과잉은 너무나 의식적으로 계산되어 있어서 죄의 처벌은, 죄가 아무리 크다고 할지라도 그것의 성질을 규정할 필요가 없었다. 권력의 메커니즘은 군주의 의식 안에 거대한 범죄를 흡수하고, 그 안에서 그것을 과시하며, 마침내 그것을 말살 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하다. 이런 점에서 극단적으로 말하면 거대한 범죄의 성질 같은 것은 있을 필요도 없고, 있을 가능성도 없다. 거대한 범죄의 성질은 없다. 범죄와 그 주변 사이의 투쟁, 격분, 악착스러움만이 있을 뿐이다. 17세기말까지 사람들이 한번도 범죄자의 성질에 대해 질문하지 않은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권력의 체계가 이러했기 때문에 이런 질문은 제기될 필요가 없었거나, 혹은 그것을 아주 주변적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몇몇 텍스트에서, 특히 브뤼노가 1715년에 쓴 에서 여러분들은 다음과 같은 것을 읽을 수 있다. 판사는 피고인을 연구해야 한다. 그의 정신과 습관, 활기와 육체적 상태, 나이, 그리고 성별을 검토해야 한다. 가능하다면 그의 영혼으로 침투해 들어가기 위해 범죄자의 '내면'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와 같은 텍스트는 내가 방금 이야기한 모든 것을 다소 거칠게 전면적으로 부인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텍스트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판사에게 범죄자에 대한 앎을 요구하는 것이 범죄를 이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만 범죄가 저질러졌는지를 알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판사는 제대로 죄인을 심문할 수 있기 위해, 즉 심문의 엉큼한 계약을 그의 주변에 잘 엮어 놓아 그로부터 진실을 짜내기 위해 죄수의 영혼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죄수가 판사의 앎의 대상이 되는 것은 진실을 간직한 주체로서이다. 그것은 결코 죄를 저지른 범죄자로서가 아니다. 왜냐하면 일단 자백을 하고 나면, 바로 이 순간부터 이 모든 앎은 처벌의 결정과 아무런 상관이 없기 대문이다."(『비정상인들』(Les Anormaux), 박정자 역, 동문선, 2001, pp. 107-108).
푸코의 글을 통해 이렇게 유추해볼 수 있을 것 같다. 무엇인가 다른 목적에 이용하기 위한 앎이 있고, 그 자체로 목적인 앎이 있다. 말하자면, "정보"로서의 앎이 있고, "이해"로서의 앎이 있는 것이다. 푸코에 따르면, 판사들이 범죄자를 연구하는 이유는, 범죄자 그 자체가 궁금해서도, 범죄의 본질이 궁금해서도 아니다. 다만 규정된 법 체계 안에서 그의 행위가 범죄인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그가 범죄자로서 적합한지 아닌지를 판별하기 위해, 처벌의 기준을 확정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이러한 앎의 방식은 범죄의 본질을 아는 것이 아니라, 범죄행위의 확인과 인지(認知)이다. 이렇게 사법체계의 앎의 사후형식 때문에 법은 절대로 범죄를 사라지게 하거나 교정할 수가 없고, 오로지 처벌만을 가할 수 있을 뿐이다(애초부터 반항이나 반란의 가능성이 있는 범죄에 본때를 보여주기 위해, 애초의 범죄보다도 더 가혹하고 잔인한 처벌을 통해).
혹시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뭔가를 알고 싶어하거나, 알고 있다고 확신할 때, 이해로서의 앎이 아니라 정보로서의 앎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그것 혹은 그 사람 자체가 궁금한 것인가? 아니면 나의 악착스러운 필요 때문인가? 앎의 두 형식 중에서 후자가 지배하는 사회, 즉 정보만을 필요로 하고, 악착스러운 필요에 사로잡힌 앎 만을 추구하는 사회는 냉소주의가 만연된 사회일 것이다. 아는 것이 없고, 느껴지는 것도 없고, 아무래도 상관없기 때문에.
얼마 전부터 사진으로 찍어 두고 싶은 광경이 하나 있었다. 내가 가끔 산책을 하며 걷던 곳인데, 거기에는 오래 전부터 건설 중에 있는 아파트 단지가 횡 하니 솟아 있다. 단지 주변에는 마치 SF 전쟁물의 로봇처럼 거대한 기중기가 듬성듬성 버티고 서 있다. 그리고 건설현장 앞쪽으로는 여기 저기에 낙서가 지저분한 시멘트 벽이 만리장성처럼 가로놓여 있었는데, 그 시멘트 벽은 건설현장과 앞쪽의 개천을 둘로 가르는 경계가 되었다. 사진을 찍는다면 시멘트 벽이 수평선처럼 프레임의 좌에서 우로 반을 쭉 가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벽 위쪽으로는 기하학적으로 힘차게 솟아오른 아파트 단지가 보이고, 아파트 단지 뒤쪽으로는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푸른 산과 하늘이 있다. 다음으로 벽 아래쪽엔 흉하게 여기저기에 나 있는 잡초와 낮은 등성이 있고, 더 아래쪽은 얕은 개천 물이 돌덩이들에 부딪혀가며 지저분하게 흐르고 있다. 잡초가 나 있는 둔덕 여기 저기엔 중년 혹은 노인 남자들이 더운 날씨에도 땀 복을 입고 앉아 그 지저분한 개천 물에서 물고기를 잡고 있었다.
이 극적인 광경은 동영상 보다는 사진이 더 적절할 것 같았다. 바람이나 물의 흐름 혹은 날아가는 새 외에는 움직임이 거의 없었고(낚시꾼들 조차 미동이 없어 보였다), 그 광경이 자아내는 어떤 첨예함을 순간적으로 담기에는 지속적인 붓질이나 글의 묘사 보다는 대기를 단번에 갈라내는 칼끝과도 같은 민첩함이 필요했던 것이다. 나는 그곳을 찍고 싶다고 생각한 후로 1년도 더 지나 카메라를 들고 그곳을 찾았다. 여러 장을 찍었지만 아무래도 카메라를 잘 다룰 줄 모르는 탓이었는지, 내가 느꼈던 광경의 첨예함이 좀처럼 사진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물체를 가르는 칼이 그렇듯이, 셔터의 순간을 포착하는 심리적 속도와 무게와 균형 같은 것이 필요한 것은 아닌지 싶다.
카메라가 생산하는 이미지는 펜촉이 생산하는 이미지보다도 그 물리적 속성에 있어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날카롭다. 종교적인 의례와도 무관하지 않은 예술이 그렇듯이 분위기를 잡고 포석을 깔고 절차를 밟으면서 서서히 우리를 압도하는 대신에,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순간 혹은 사진을 보는 순간 실제적 균열 같은 것이 파고든다. 물론 그러한 민첩함이 없이도 첨예함을 드러내는데 탁월한 예술가도 있다. 지아 장커(賈樟柯)가 바로 그 이다. 안토니오니(Michellangelo Antonioni)나 데시카(Vittorio De Sica)와 같은 네오리얼리즘이 부활한 듯한 느낌을 자아내는 그의 작품들은, 사회적 변화를 개인의 존재론적 몰락이라는 형태로 가시화된 심리적 저항과 병치시켜 놓으면서, 재빠르게 무언가를 포착하지 않고도 오히려 서서히 진행되는 걸음걸이와 오랫동안 주시하는 시선을 전광석처럼 날카롭게 한다. 변화를 그 자체로 목격하는 것 만큼 찌르는 고통을 맛보는 경험은 없다. 그의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마천루 지각"의 장면들을 보며 가슴이 아픈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변화의 광경에 익숙해진 우리들로서는 고통스럽지도 그렇다고 무감각하기만 한 것도 아니지만 말이다.
지아 장커의 작품에는 항상 두 가지의 세계가 평행한다. 2006년작『東』이나 2007년작 『無用』과 같이 예술과 현실의 관계에 관한 다큐멘터리에서 볼 수 있듯이, 그리고 마치 아우구스트 잔더(August Sander)나 다이안 아버스(Diane Arbus)—이 두 작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경향이지만—의 사진집을 보는 듯한 느낌을 주는 『24city』, 그리고 특히 2004년 작품인 『世界』에서 다소 노골적이고 이례적으로 드러내고 있듯이, 급격한 변화 아래 그 존엄성을 상실한 육체들의 찰과상이 널려있는 세계가 한 편에 있고, 누군가에 의해(혹은 어떤 외계인들에 의해) 그 세계가 은폐되거나, 또 누군가에 의해 그 세계가 거부되어, 예술의 형태로 혹은 판타지의 형태로 고착된 매끈하고도 영원할 것 같은 그림의 세계가 다른 편에 있는 것이다. 무자비한 세계와 병적인 세계의 두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가 안타까운 것은, 언제나 후자의 세계는 전자의 세계로 되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이다. 가령 『24city』에서의 그 놀라운 장면이 그것이다. 화려하게 분장을 하고 신화적인 의상을 입은 배우들이 어느 허름한 건물에 들어가 주민들에게 여흥을 주기 위해 그들 앞에서 노래와 춤을 공연한다. 다음 장면에서는 공연이 끝나고 배우 한 명이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건물 밖으로 걸어 나온다. 계단을 하나씩 내려와 돌아 나오는 순간 그녀가 걸어가야 할 골목길이 갑자기 그녀의 뒷모습과 함께 화면 전체에 펼쳐진다. 외계식물들처럼 전선줄이 건물들을 휘감고, 빨래나 쓰레기 혹은 시멘트 벽에 낀 검은 자국 같은 삶과 시간의 부산물로 더럽혀진 그 골목길은 다름 아닌 판타지가 서식하는 토대이다. 영화 전체를 통해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이 토대 어디에선가 잠을 자고 꿈을 꾼 사람들이 날이 밝자 밖으로 걸어 나온다는 것이다. 처음엔 노동자가, 다음엔 빈민들이, 다음엔 배우가, 다음엔 명품으로 치장한 보따리 상인이, . . . 인물들이 대체되는 양상은 마치 토대의 이행—가령, 중국사회의 공장자본주의에서 소비자본주의로의—을 보는 듯 하다. 이와 유사한 장면은 이미 『東』에서도 제시된 적이 있다. 거기서는 어느 여성 모델이 낙원 분위기의 수채화를 위해 포즈를 취하는 작업이 끝나고 나서 옷을 갈아입고 소음과 매연에 질식할 것 같은 도심지의 귀가길을 나선다. 이것이 바로 서서히 움직이며 한참 동안 주시하는 지아 장커 영화 전체에 잠재되어 있는 첨예함이다. 끝나지 않은 모순을 가리키며.(여기엔 또한 현실과 관계하는 예술의 달라진 위상에 대한 지아 장커식의 날카로운 비평이 있다)
아마추어인 내가 찍은 그 광경 사진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사진을 보자마자, 아니 지아 장커의 작품들을 보자마자, 그 사진의 제목을 망설임 없이 떠올려 내었다: 지아 장커!
그는 대화를 즐겼다. 대화는 언제나 그의 높이를 확인시켜주곤 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얼마나 되는지, 쌓아놓은 것이 얼마나 많은지, 대화는 그러한 재산목록을 확인하고 세어보는 만국 박람회와도 같았다. 모두들 관객처럼 그의 앞에 모여 그가 자랑하는 전리품들을 구경했고, 그러한 것들을 소유하지 못했거나 소유하길 염원하는 그들은 찬사를 보냈다. 그는 흡족해했다. 그는 책을 꽤 읽는 편이었지만, 대부분은 그 박람회를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진열된 목록, 이국적인 이름, 새로운 명칭들이 그의 입에서 쉼없이 암송되었고, 옆자리의 관객들은 그것에 의아해 했지만, 그의 취향으로볼때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는 언제나 대상을 소유하고, 윤곽선을 분명하게 해 놓아야만 만족스러움을 느꼈다. 아무도 부른적이 없거나 이름이 없는 것은 그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결혼을 해야만이 사랑을 얻을 수 있다고 보았던 알베르트처럼, 그는 모든 것과 결혼하고 싶어했다. 심지어 그는 음악조차도 다른 장식물들처럼 선반 위에 놓아두길 원했다. 그래서 그는 큰 소리로 터져나오는 음악은 견디질 못했다. 누군가가 그에게 그 점을 지적하자, 그는 마치 자랑처럼 이렇게 말했다: "그래서 난 항상 음악한테 미안해!" 그는 언젠가는 그 소유물들이 자신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음을 느낄 것이다. 늙어가고 있는 그는, 아니 이미 많이 훌쩍 늙어버린 그는 그것을 조금씩 알기 시작했다. 점점 허기가 지고, 뺨이 야위고, 추해진 몰골에 허리가 휘어, 더 이상 대상 조차 바라볼 수 없게 될 날이 머지 않았음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그는 요즘 말이 많아졌다. 내뱉은 그 모든 단어들이 마치 자신의 소유물인냥, 식사나 술자리에 앉으면 숨쉬기가 버거울 정도로 말이 많았다. 이상한 것은, 그 많은 소유물을 확인하는 절차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 많아질수록 허기는 더 깊어진다는 사실이었다. 우리 모두는 그가 늙어가고 있는 증거라고 생각했다. 그와의 식사는 언제나 빨리 끝났다. 대화를 위해서가 아니라, 고깃국물 속의 고기가 쉽게 동이나 버렸기 때문이었다. 고기에서 국물이 흘러나올때까지 기다릴 만큼 그와 우리는 느긋하지 못했으며, 다른 사람과 함께 국물을 떠 먹는다는 사실을 유쾌하게 여기지 않았다. 윤곽선도 분명치 않고, 그 출처조차 분간할 수 없어 보이는, 모호하기 짝이 없는 그 국물을 너무나도 싫어했던 사람이 바로 그 였으며, 그에게 찬사를 보내던 우리들 역시 감염이 되어, 어느새 그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액체 자체가 그에겐 일종의 파괴였으며 침략이었다. 그냥 두었더라면 국물이 되었을 고깃덩이를 얌체들처럼 빼가는 바람에, 더 이상 국그릇엔 육수가 없었다. 조미료 향내만 진동하는 김빠진 맹물만이 고여있을 뿐이었다.
구름 속에서 어떤 형상을 떠올리는 것은 문화적 행위일까 아니면 자연적 행위일까? 무질서한 상태 속에서 질서와 균형감을 갖춘 형상을 떠올리므로 그것은 문화적 행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생명체는 삶을 유지하기 위해 자연을 보다 습관화된 패턴으로 도식화하는 경향이 있고, 이러한 도식화는 꿀벌이나 개미의 사회적 경향처럼 일종의 본능일 수도 있으므로 그것은 자연적 행위가 될 것이다. 데리다(Jacques Derrida)가 구조주의 인류학자들의 이분법(자연/문화)을 해체시키면서 말하고자 했던 것은, 그들의 새하얗고 의기양양한 구분이 실상은 그렇게 분명한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아래의 그림은 미국 이민자들의 역사를 알레고리화한 <헤롤드와 쿠마>(Harold & Kumar Go To White Castle, 2004)라는 영화의 맨 끝에 나온 장면의 하나이다. 미국에서 살고 있는 한국청년 헤롤드와 인도청년 쿠마가 저녁시간에 배가고파 "White Castle"이라는 햄버거 가게를 찾아 가면서 좌충우돌한다는 이야기이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이런 저런 사고를 치고 나서 범죄자가 되어 경찰서에 구류되었다가, 기지를 발휘하여 그곳을 빠져나간다. 이 그림은 도망 가버리고 없는 두 오리엔탈(Oriental)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면서 백인 경찰관들이 그린 몽타주이다. 백인들의 이 스키마(schema) 혹은 게스탈트(Gestalt)는 문화적인 것일까? 아니면 본능적인 것일까?

들뢰즈는 베르그송이 지속에 부여한 분할과 연속의 힘보다, 더 심오하고 더 훌륭한 힘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포함하는 힘(the power to encompass itself)"이다.
. . . 물의 흐름, 새의 비상, 내 삶의 속삭임은 세 가지 흐름을 형성한다; 그러나 그것은 오로지 나의 지속이 그 흐름들 중 하나에 속하기 때문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른 나머지 두 흐름들을 포함하고 있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왜 두 흐름은 안 되는가? 가령, 나의 지속과 새의 비상은 왜 안 되는가? 왜냐하면 두 흐름은 세 번째의 다른 흐름 안에 포함되지 않으면 공존한다거나 동시적이라고 말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새의 비상과 나의 지속이 동시적이 되려면, 나의 지속이 둘로 나뉘어져야 한다. 그래서 나뉘어진 또 다른 지속이, 새의 비상을 포함하고, 동시에 나의 원래 지속도 포함함으로써, 나뉘어진 지속 안에서 원래의 지속이 반영되어야만 한다: 따라서 흐름들의 근본적인 삼중성이 있다.(Bergsonism, 80)
지속 안에서의 포함을 설명해주는 한 가지 예가 있다. 영화학자 Bela Balazs는 이 포함관계를 이렇게 말한다.
[ ... ] 하나의 멜로디는 시간의 차원을 가지지 않는다. 왜냐면 첫 음이 그 멜로디의 한 요소가 되려면, 오로지 그 첫음이 다음에 나올 음을 지시해야만 하고, 분명히 그 첫음이 계속 이어지는 다른 음들과 관련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지막 음은 아직 얼마간은 연주되지 않겠지만, 그래도 이미 첫 번째 음 속에 멜로디를 자아내는 요소로서 현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음이 나와 그 멜로디가 완성되려면, 우리가 그 멜로디를 따라 들으면서 그 첫 번째 음을 기억하고 있어야만 한다. 그 음들은 시간의 연속 속에서 다른 것이 나오면 그에 잇따라서 소리가 난다. 따라서 그 음들은 하나의 실제적인 지속이 있다. 그러나 멜로디의 일관된 선율은 시간의 차원이 아니다; 그 음들의 서로간의 관계는 시간 속에서 연속으로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다. 그 멜로디는 점진적으로 시간의 경과에 따라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첫 음이 연주 되자마자 이미 하나의 완전한 실체로서 존재성을 갖는다.(Bela Balazs, Theory Of The Film, 1952, "Melody and Physiognomy" 중에서)
하나가 다른 하나와 함께 무엇인가를 이루려면, 그 안에 바로 그 다른 하나를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 하나의 멜로디가 가능하려면, 그 멜로디를 이루고 있는 각각의 음들이 다른 음을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 지속이란 잇따르는 것들의 집합이 아니라 포함 관계로 정의할 수 있다. 실질적 지속이란 거짓된 연속이 아니라, 즉 따로 떨어진 것이 연속의 효과만 내는(만화, 몽따쥬처럼) 것이 아니라, 물의 흐름처럼 실제의 연속이다. 이 포함관계를 윤리적으로 정의내릴 수 있다. 어떤 대상에 대해 뭔가를 느낀다면, 그 대상속에 있는 그 무엇인가를 내 안에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사물에서 신을 보고, 신에게서 인간을 보는 것은, 우리 안에 신이 있거나, 사물 안에 신이 있기 때문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무엇인가를 느끼는 활동은 대상을 내 안아서 발견하는 것이다. '하나가 된다'는 말의 윤리적 정의가 이것이다. 느낀다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의 시간 속에서의 공존을 의미한다.
니체만큼 자신을 위해 글을 쓴 사람이 있을까? 자신이 느끼기에 이토록 쉽게, 즐겁게, 통쾌하게 책을 쓴 사람이 또 있을까? 그는 섬광의 대가이며, 섬광의 어버이이며, 섬광의 벌레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은 그에 관한 아포리즘으로 성을 쌓고 싶어 한다. 정념을 냉각시키지 않고도 가장 고상하게 토로할 수 있는 형식은 아포리즘이 제격이다. 아포리즘은 논증이 아니므로 구차한 논리적 이성에 호소하지 않고, 우리 모두가 제청하고 박수치고 손사래를 칠 수 있는 의지와 직관의 육중한 무게를 배가한다. 아포리즘은 논증처럼 감산(減算)이 아니라, 더하기, 모임, 회합, 동호회, 말하자면 호손(Nathaniel Hawthorne)의 젊은 굿맨 브라운(Young Goodman Brown)이 한 밤중에 "숲"에서 목격했던 바로 그 무시무시한 악마적 집회와도 같은 것이다. 아포리즘은 촉각적이다. 피부를 파고드는 금속의 탄두처럼, 우리는 읽는다기 보다는 폭격을 당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아주 오래 전부터 우리 자신 안에 아포리즘이 이미 있었음을 깨닫는다. 아포리즘은 공통하는 육체, 관념, 실재의 합창이며 코러스이다. 그래서 아포리즘은 출발이 아니며 과정도 아니다. 말하자면 갈무리이다. 혹은 다음을 기약하며 우렁차게 외치는 끝 인사라고나 할까! 읽히는 글, 읽기 좋은 글, 읽기에 쾌적한 글, 우리를 편안하게 해주는 친절하고 이기적인 글, 그래서 우리를 머무르지 못하게 하는 글이 있다. 그러나 다른 집회도 있는데, 거기에는 쓰게 하는 글, 쓰고 싶어지게 하는 글, 오만하고 불친절한 글이 있다. 똑같이 오만하고 불친절한 대응을 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우리의 오기를 자극하는. 니체의 섬광들은 우리의 근성을 두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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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 동안 좋은 글 많이 읽고 많이 배웠습니다.
수다도 농담도 많이 했습니다만.^^
좋은 설 보내세요.
^^ 미루님. 감사합니다.
미루님도 복된 한 해 되시길 바랍니다.
날씨 많이 추운데, 건강도 조심하시구요.
우연히 찾아온곳에서 니체를 만나 반갑습니다 앞으로 많은 깨우침에 미리 감사드립니다^^
반갑습니다.^^ 멀더님 . . .
즐겁게 읽어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