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실업(失業)의 사회적 해결가능성에 대해 말하는 이들이 종종 있지만 한번 웃어보자고 하는 소리일 것이다. 사실은 그 사람조차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를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실업이 거의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는 점은 매년 연례행사처럼 벌어지고 있는 노-자간의 협상테이블이 잘 예증해주고 있다. 그들은 그 테이블에서 상호간의 호혜 원칙을 발견하고 싶어하며, 양자간의 신뢰를 다지는 기회를 엿보고 싶어한다. 심지어는 가족주의적 단결(업주들이 가장 좋아하는 경쟁 or 전쟁모드) 아래 회사와 공장을 일종의 가계(家系)로 둔갑시킬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 테이블의 현실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근본적으로 무엇에 토대를 두고 있는가를 보다 일상적으로 환기시켜 줄뿐이다. 해소할 수 없는 모순. 어떤 식으로든 대립적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시장경제의 태생적 한계(간혹 맑스주의 입장에서, 포스트 모더니즘 또는 후기 자본주의라고 하는 색다른 시기라고 해서 근본적인 모순이 해소된 것이 아니라는 관점은 일견 설득력이 있다. 다만 어떤 모순인가를 따져봐야 할 문제이며, 특히 현실의 이해와 그에 대한 대응방식을 혼동함으로써 비롯되는 오해들이 있긴 하지만). 어떤 점에서 협상이란 우리가 아직은 가능성이 있다는 믿음, 즉 아직은 안정된 사회가 파괴되는 상황까지는 오지 않았다고 하는 믿음을 지연시키고 유보시키려는 제스쳐에 불과하다. 혼란한 사회란 협상이 불가능한 사회가 아니라, 반대로 협상을 필요로 하는 사회이다. 적절한 협상 타결에 의해 결정된 생산과 분배의 특정 시기가 의미하는 것은 사회적 안정이 아니라, 다음에 열릴 협상 테이블을 기다리는 동안 만연해 있을 긴장과 불안이 팽배한 사회가 아닐까? 또한 완벽한 체계는 그래야만 유지된다. 그래서 하나의 사회란 언제나 혼란과 동요가 있기 마련이다. 사실 불안과 동요는 업주에게 있어서는 반드시 필요한 윤활유이다.
노동자 운동이 갖는 (긍정적) 의미는 사회 전체의 부(富)가 무의식적으로 재분배되는 효과에 있을 것이다. 임금투쟁이나 노동시간 단축을 위한 파업의 성공은 곧바로 기업주가 계획했던 생산 단가의 상승을 불러온다. 그리하여 기업주에게 할당된 지분과 그가 축적할 수 있는 부의 몫이 줄어들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는 생산성뿐만 아니라 이윤의 감소를 의미한다. 이윤의 축소는 기업주로 하여금 더 많은 생산성 투자를 불가능하게 할 뿐만 아니라, 그 결과로서 노동임금과 같은 생산비용의 확대를 초래한다. 하나의 사회가 자본주의적 생산에 의존해 있는 경우, 이와 같은 사태는 결국 경제성장의 퇴행을 의미할 것이다. 우리가 언제나 귀가 닳도록 듣고 있는 부진한 경제성장의 실체는 기업의 부진한 이윤과 그에 따른 재생산 투자의 축소에 다름 아니다. 그 외에 무엇이 있을 수 있겠는가? 만일에 기업가가 아닌 일반인들이 경제침체를 체감한다면, 그것은 그들이 몸담고 있는 가계가 이미 기업과 뿌리깊은 유착관계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이미 편중된 부를 상거래나 교환행위들 속에서 실천함으로써 내면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파업이 실패하는 경우, 즉 노동자의 수입이 감소하거나 노동 시간이 증가한다는 것은 생산의 증가와 그 이윤의 특정 부분이 생산력 발전을 최대로 도모하기 위한 투자에 쓰였음을 의미한다. 자본가의 관점뿐만 아니라 현재 우리의 관점에서 사회가 안정되었다고 말할 때는 바로 이런 의미에서이다. 우리가 자본가의 시선으로 세계를 보기 시작한 것은 꽤 오래된 얘기다.
그리하여 노동과 자본의 이 해소할 수 없는 모순의 시이소 놀이는 실업의 문제와 밀접한 관계를 맺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기업주 입장에서 고용의 확대는 곧바로 생산비용의 확대를 의미한다. 경제적으로 특히 어려운 시기가 주기적으로 도래할 때마다 등장하는 고용 감축이나 권고퇴직 바람이 사회 전체를 휩쓰는 것도 다 이 때문이다. 그것은 가장 단순하고도 명료한 모순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이윤율이 증가하려면 최소의 인원이 최대의 생산성을 확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마찬가지로 성장률은 고용율에 반비례하여, 그것을 따돌리지 않으면 안 된다. 좀 극단적으로 말해, 사회적 부가 축적되려면 노동자가 사라져야만 한다. 왜냐하면 자본가에게 있어 노동자란 비용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이 자본과 노동의 모순적 관계 속에서 발견되는 역설이다. 그러니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늘어나고 있는 고용인원이 어느 한계에 치달으면 성장을 위해 도리가 있겠는가? 구조조정이란 냉철하고도 합리적인 계산하에 이루어지는 비용의 절감 외에는 어떠한 도덕도 개입되지 않는다. 마치 이 사회의 주기율표라고나 할까? 우리 사회에서 경제 성장률은 올라가고 있는데 고용은 줄어들고 있다는 이 이상한 신비는 다 이런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이 없다.
자본가들의 눈에 비친 노동자란 재화를 생각 없이 방탕하게 써버리며 저축할 줄 모르는 벌레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니 노동자들에게 너무 많은 부를 건네주었다가는 이 사회가 걷잡을 수 없는 타락의 구렁으로 곤두박질 할 것이다. 이들에게 가혹한 현실을 일깨우고, 그 현실을 잘 버티기 위해 필요한, 절약하는 삶과 가족의 신성함 등을 가르쳐야만 한다: 이들이 아침에 일어나 굶어죽지 않고 출근할 수 있는 기력이 있는 만큼만 베풀어야 한다. 상품 소비사회 혹은 후기 자본주의는 다소 달라졌을 것이다: 이들이 퇴근하여 자신이 만든 물건을 더 많이 살 수 있을 만큼은 베풀어주어야 한다. 한참 전부터 이미 우리는 소비의 미덕을 체화하여 오지 않았는가? 그런데 베풀려면 나누어 줄 여분의 몫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남아도는 부가 이 사회에 존재하는가? 바닷물에 밀가루를 빠뜨리는 한이 있어도, 그들에게 무상으로 제공해줄 여분의 빵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지금 당장에 필요한 것은 (존재하지도 않는) 나누어 줄 몫의 합리적 배분이 아니라, 성장에 필요한 이윤을 가급적이면 최대로 쌓아놓아야 한다는 것. 언제든지 협상테이블은 이를 수치상으로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설득하기 위해 항상 "아직은. . . "이라는 수사(修辭)를 동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러한 사회에 있어 만족스러운 분배란 언젠가는 도래할 하나의 신화가 되어 버린다.
완전고용이 실현된 사회를 가정해본다면 어떨까? 과연 거기서 이윤이 최대화 될 수 있을까? 과연 기업주들이 그것을 생각이나 할 수 있을까? 과연 그것이 자본주의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들 중 몇 몇은 흔히 완전고용을 꿈꾸면서도, 정작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에 대한 집착은 버리지 못한다. 이데올로기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있어 자본이나 시장은 단순히 생산과 분배의 체계가 아니라 일상적 행위를 결정하는 윤리적 토대가 되어버렸다. 교육이 이를 가능하게 했으며, 이런 저런 실천들이 이를 유지시켜왔다. 그러니 곧 죽어도 그 안에서 해결하고 싶어하며, 반드시 해답이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하지만 해답이라고 믿고 감사해하며 손에 잡은 것은 모두가 소똥(bull-shit)이 아니었던가? 전혀 반어적인 의도 없이 말해서, 십중팔구 해답은 없다. 있어서도 안 된다. 이것이 바로 좌파가 스스로 숙지하고 민중들에게 가르쳐주어야 할 사실이다. 니체가 허무주의를 비판한 이유는 해답의 불가능성 때문이 아니라, 정 반대로 그들의 의기양양한 해답의 도래신화 때문이 아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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