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프랑스 파리에서는 도시 현대화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오스망프로젝트'(Haussmannization)가 그것이다. 비좁고 불결한 거리, 낡아빠진 건물, 일관되지 않은 도로망, 비위생적인 상하수도, 빈민가와 같은 전근대적 풍경을 현대식 깔끔함으로 재편하려는 시도였다. 이 살균 프로젝트가 겨냥하고 있었던 것은 물론 파리의 도시화, 효율화, 상업화, 합리화였다. 이로부터 파리는 급속도로 기하학적인 풍경을 갖추어가기 시작했고, 이는 곧 '대로'(Grands Boulevards) 주변의 생활 전반에 속도감을 부여해주었다.

(Gustave Caillebotte, Sur Les Champs Elysees, Boulevard Haussmann, 1880)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효율적 속도화 기획과는 다르게 새로운 형태의 시민집단이 생겨났다.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를 위시하여, 훗날 벤야민(Walter Benjamin), 하비(David Harvey),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 케루악(Jack Kerouac), 그리고 짐멜(Georg Simmel) 등에 의해 이론화되어 잘 알려져 있는 현상으로, 다름 아닌 '산보객'(Flâneur)이다.

이 말은 원래 프랑스어 동사 Flâner의 남성명사 Flâneur에서 유래하여, 산보를 하거나 어슬렁거리거나 배회하는 사람을 지칭한다. 보들레르는 이를 도시경험과 연관하여 사용했다. 간단히 산보객이란 '도시를 배회하고 걸어 다니며 도시 생활을 경험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산보객은 도시의 문화적 현상과 현대성(modernity)을 예시하는 눈금자가 된다.

현대성의 지표가 되는 핵심은 물론 사회 안에서의 개인의 위상의 변화일 것이다. 오스망프로젝트가 예시했듯이, 사회규율이 합리적이고 체계적이 되면서 개인의 사적인 삶과 그 자율성은 사회적 힘에 의해 압도된다. 특히 대도시는 익명의 군중 공동체를 만들어 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군중이란 전통적인 지역 공동체로부터 박탈된 개인에 다름 아니었다. 이들은 결속된 근거도 없이 다만 산업사회의 테크놀러지에 의해 불특정 공간에 배치된 원자였다. 전통을 넘어선 현대적 자유가 한편에 있었지만, 한편에는 불안, 박탈감, 고독, 공허와 같이 삶의 추상적 형식이 가하는 정서들이 이들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Gustave Caillebotte, Un Balcon, 1880)

짐멜이 자신의 에세이 "메트로폴리스와 정신적 삶"(The Metropolis and Mental Life)에서 지적했듯이, 현대성은 새로운 사회적 유대 그리고 타자에 대한 새로운 태도를 창출했다. 개인은 시간과 공간을 이전과는 전혀 다르게 수용하여, 그 기하학적 광경이 말해주듯이, 세상에 대해 '무감동한 태도'를 가지게 되었다. 또한 18세기 이전의 정치적 종교적 경제적 사상적 굴레로부터 벗어난 현대인은, 그 자유를 예증해줄 효율적 생산력을 최대로 하기 위해 19세기가 되면서 노동의 분업과 기능적 전문화를 요구 받는다. 이 전문화는 개인이 완전한 하나의 총체로서 다른 개인에 대하여 절대적 존재성을 가질 수 없게 했다. 현대적 의미에서의 전문성이란 말하자면 불완전한 완전성이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개인들은 서로를 배타적(경쟁)으로 수용하면서, 또 한편 서로에게 긴요한 존재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은 서로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되는 보충적 존재였고, 실상은 고립적이면서도 무리로부터 5피트 이상 멀어지면 불안을 느낄 만큼 고립을 가장 두려워하는 독신자였던 것이다.

익명성으로 보장을 받은 자유의 다른 편에 고독과 우울의 정서가 자욱했던 부르주아 개인들은 자신의 자유를 확인하기 위해 혹은 자신의 우울을 치유 혹은 즐기기 위해 거리로 나와 배회와 산보를 한다. 보들레르를 대표로 하는 이들의 우울은 도시를 단지 생활공간이 아니라 하나의 심미적 대상으로 둔갑시키면서, 메트로폴리스 한복판에 침잠하여 거리를 탐색하고 모던을 관찰한다. 보들레르의 말에 따르면 '보도의 식물학자'가 된 것이었다.

(Gustave Caillebotte, Sur Le Pont de l'Europe, 1877)

그러나 이들은 도시에 감동을 느낀 것이 아니라 무감동하고 냉소적인 관찰자였다. 이들은 산업화가 추구했던 도시의 획일화, 속도, 기계화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견지했다. 19세기 영국의 댄디즘(Dandyism)이 보여주었던 퇴폐 그리고 부에 대한 혐오가 그랬듯이, 이들은 도시적 삶의 일부였고 부르주아의 도시적 우수의 탐닉자였지만, 동시에 그로부터 떨어져서 그것을 바라보고 살피고 탐색함으로써, 그 존재 자체가 하나의 제동(制動)이 되었다. 도시 한복판에서 어슬렁거리는 이들은 그 자체가 하나의 망설임이었던 것이다. 이 망설임 속에는 근본적 동기가 있었는데, 바로 사회 기술 메커니즘이 설정해 놓은 초개인적 균등화로 인한 개인의 존재론적 비하에 대한 암묵적 저항이 그것이다. 벤야민 자신이 이미 한 명의 예증적 산보객이었는데, 그것이 한편으로는 하나의 라이프스타일이었지만, 다른 한편에는 사회에 직접 참여하지 않으면서도 높은 통찰력을 갖춘 부르주아지 딜레탕트를 예시한다고 썼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비록 미완성에 그치고 말았지만 파리의 쇼핑 거리에 대한 식물학자와도 같은 관찰을 감행했던 그의 <아케이드 프로젝트>가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느린 산보와 사색은 순수하게 개인적인 행위지만 초개인적 거리 두기의 효과적 기제이다. 그것들은 대단히 비효율적인 가치들을 생산하면서 소리 없이 효율을 잠식한다. 자본의 붕괴는 공장이나 시장 혹은 현장이 아니라, 공원과 산책로에서 시작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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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미루 2009/07/26 23: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느린 산보와 사색은 순수하게 개인적인 행위지만 초개인적 거리두기의 효과적 기제이다. 그것들은 대단히 비효율적인 가치들을 생산하면서 소리없이 효율을 잠식한다.자본의 붕괴는 공장이나 시장 혹은 현장이 아니라 , 공원과 산책로에서 시작될지도 모른다.

    한 번 따라 써봤습니다.장난은 아니고...^^
    과연 그럴까 싶기도 하지만 어떻든,비효율적 가치들로 효율을 잠식한다는 말이 매력적으로 들리는 걸 보면 저도 평생 철들기는 어렵겠다는 생각이 스칩니다.

    그렇다면 그 산보객들, 그 진상(^^)들을 국가에선 어떻게 처리(?)할까요? 아니면 어떻게 처리하고 있을까요?

  2. huun 2009/07/27 00: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 . .
    물론 짭짤한 손가락이나 빠는 신세로 전락하는거죠 . .
    뭐 그런걸 문의하십니까?. . 뻔한것을 . .
    혼자서 뭘 할 수는 없는 노릇이죠,
    최소한 어떤 정서적 공감은 가질지 모르지만. . .
    산보나 사색만으로는 실제적 변화를 끌어낼 수는 없겠죠.

  3. 미루 2009/07/27 10: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죄송합니다.^^
    바보같은 질문을 했군요.
    물론 손가락을 빠는 두통거리로 전락을 하겠지요만...

    그런데, 아주 불가능한 이야기도 아니라고 생각되네요.
    아주 조그만 틈이 벌어지면서 둑이 무너지는 걸 생각하면.
    산보객과 같은 존재들이 그 틈을 만들 수 있는게 아닐까 가정해 볼수도요.
    꼭 둑을 무너지게 하는 역할이 아니라도 말씀대로 소리없이 효율을 잠식하면서 숨쉴 틈을 조금씩 벌려놓고 벌려가는.아니면 최소한 효율성과 합리성의 오만에 대한 아주 작은 경고, 혹은 방부제 역할이라도.

  4. huun 2009/07/28 06: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 글쎄요. . 그 아주 작은 경고와 숨쉴 틈 때문에 또 그럭저럭 현재가 살만해지기도 하죠 . . .^^
    온전한 의미에서 산보가 가능한 환경에서 살고 있는 것인지 우선 의구심이 듭니다. 현대인들에게 산보란 따지고 보면 작업 후 5분간 휴식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은데, . . .

    그런 점에서 보면, 전 오히려 그들이 효율성과 합리성을 더 강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도 듭니다.
    보이지 않는 산업예비군처럼 도시 곳곳에 포진을 하고는, 사회편제에 등록된 사람들에게 어떤 심리적 위협이 되면서 말이죠. 마치 비정규직이 산업의 훌륭한 무기가 되듯이 말이죠. 언론은 비정규직이 사회문제라고 호들갑을 떨면서, 비정규직이 사라지기를 기대하는 것처럼 제츠쳐를 취하지만, 실은 자본가들과 함께 비정규직을 즐기고 있습니다. 비정규직이 없으면 이 사회가 돌아갈 수가 없을 정도죠. 거대 메카니즘의 훌륭한 한 요소이기 때문에, 대학이든, 공장이든, 어디든, 비정규직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오히려 그들이 해체하고 싶어하는 건 비정규직이 아니라 정규직이죠. 그러나 해체할 수는 없으니 위협이나 담보 같은 것을 보여줘야 하는데, 그 역할을 비정규직이 아주 잘 하고 있는 겁니다. 비정규직은 이중적인 의미에서, 즉 경제적, 심리적, 모두 반드시 필요한 존재입니다. 제 소견입니다만, 한국의 진보-분위기 언론이나 정치권이 자꾸만 비정규직을 걸고 넘어지는데, 그들이 정말로 어떤 본질적인 인식을 하고 있는 것인지 의구심이 들 때가 많습니다. 산보객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습니다. 편제된 노동자들은 산보가 불가능할테니, 결국 산보객들은 자본의 눈에는 실업자들일 뿐이겠죠^^ . . . 옛날과는 많이 다르겠지만, 지금 실업자란 직업이 있는 사람들에겐 공포 그 자체가 아닙니까?, . . 더 열심히 일하고, 그들처럼 되지 않기 위해 말도 잘 듣고, . . 언론이나 교육기관에서는 이 산보객들을 일종의 부도덕, 사회 악으로 규정해서, 청량제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 . 실업자든 산보객이든 어차피 굶어죽을 수는 없을테니까, 그들도 결국은 비정규직 아니겠습니까?

    옛날에 유럽에서 산보객들은 예술가나 지식인처럼, 자기표현이 가능한 집단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산보객은 산업과 도시로부터 거리를 두고 그것들을 비판하거나 냉소를 보내는 역량이 있었을 수도 있겠죠. 지금도 역시 비슷한 상황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인터넷 매체가 생기면서, 많은 사람들이 표현하고, 소통하고, . . . 확실히 한국의 경우도 인터넷이 나오기 전인 90년대 초반이나 그 이전과는 개인들의 성향이나 표현방식이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느낍니다. 오히려 19세기보다도 더 역동적이고 강렬한 역량의 가능성이 높아진 것처럼 보일 정도죠.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가 더 만연해지는 것 같습니다. 한번 보세요. 모조리 블로그를 만들어서 기업의 자발적 비정규직 마케터가 되고 있잖습니까? 예전에는 기업이 비용을 들여서 사람들을 고용해서 자사의 마케터로 채용했지만, 이제는 "자유로운 글쓰기", "글쓰기의 낭만" 어쩌고 하면서 쓰레기 같은 로망과 환상을 부추겨서, 사람들이 아무 댓가도 없이 스스로 블로그나 웹사이트를 만들어 광고를 하고, 심지어는 기업과 비정규직 계약을 맺고 그들의 물건들을 암암리에 선전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자유로운 직업을 원한다며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기도 하더군요. 출퇴근 시간을 면제받는 대신 더 가혹하고 악랄한 불길로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말이죠. . . 저는 이들이 포스트모던 신자본주의의 선봉이 되고 있다고 봅니다. 아주 교묘하게 이용당하고 있는 거죠. 어쩌면 가장 무서운 집단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죠. 한국에서도 이제 기업과 정치가 미디어의 중요성을 깨달으면서, 점차 미디어 정치가 더 정교해질 겁니다. 그러면 결국 노동자라든가, 비정규직이라든가, 무슨 무슨 집단이라든가 하는 식의 "집단적 개인"이 아니라, TV를 보거나 신문을 읽고 인터넷을 서핑하고 있는 "개인적 집단"이 자기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설득을 당하게 되겠죠.

    물론, 더 따져봐야 겠지만, 그리고 제가 사정을 잘 모르고 하는 소리일 수도 있지만, . . . 이 사회에 진정한 의미에서 산보객이 존재 하는건지 의구심이 듭니다.

    미루님은 산책 많이 하십니까? ^^

  5. 미루 2009/07/28 15: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훈님의 판단이 정확하다고 생각합니다.

    저 자신도 진정한 의미의 산보객이 있는 지 자신을 할 수는 없습니다.간혹 비슷하다고 판단되는 경우를 보긴 하는데 본래 실업자와 다름없는 직업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몇몇 예술가들의 경우입니다.저는 이들 예술가들을 염두에 두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저들도 말씀대로 비정규직이라 할 수 있습니다.그들도 먹고는 살아야 되니까.

    산책 많이 하지는 않습니다.동네 산책 정도는 많이 하는 편인데,장거리는 잘 가질 않습니다.

    그리고 산책 유무와 관계없이 저 또한 진정한 산보객이라곤 할 수가 없습니다.우선 저의 현재를 보면 겉으론 유유한데 속으론 일자릴 찾아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일을 아주 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너무 불충분하기 때문에 초연할 도리가 없습니다.바로 비정규직이죠.
    생각을 접었다 폈다 합니다.손가락을 빠는 것 따위는 그다지 겁이 나진 않습니다만 그 또한 지겹고 그보단 주변의 옥죄는 의무감에 떠밀립니다.그게 또 외면하기가 쉽지가 않습니다.무엇보다 지겨운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그것이 제일 문제입니다.-그건 손가락에 슈가 코팅을(^^) 해봐도 별 도움이 되질 않습니다.- 처음부터 혈안이 되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만만디 였던 것 같습니다.뭘하면 못버티냐 식의 생각으로.

    자발적인 산보객이란 지속하려면 엄청난 내공(^^)을 필요로 합니다. 그건 어찌어찌 하다보니 그렇게 된 경우에도 많이 다르진 않을 것입니다.그래서 저는 그런 지구력이 있는 예술가들을 존경합니다. 비록 그들이 실업자 군상으로 보일지라도.물론 그들의 경우 작업에 반영이 되는 일이니 순수하게 산책만으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만-직업의 일환이라고 할 수도 있죠-그런 결과물들이 산보객들의 산물로서 유효한 것 같습니다.그들을 산보객이라 부를 수 있을지요?비록 말씀과 같은 문제들을 안고 있을지라도.

  6. 미루 2009/07/28 19: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훈님의 윗글(본문 말고 댓글요)은 제가 스크랩을 좀 하겠습니다.허락하신다면.
    아주 서늘한 글입니다.

  7. 미루 2009/07/28 20: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목대로 원점 재검토 인지는 모르겠지만...뉴스하나 퍼왔습니다.

    뉴스 > 정치

    비정규직법 새 국면…한 "유예안 원점 검토"

    2009년 07월 28일 16:40






    【 앵커멘트 】
    지난 6월 임시국회에서 처리되지 못한 비정규직법 개정안이 새로운 국면을 맞았습니다.
    한나라당이 비정규직법 유예안을 원점에서 재검토할 수도 있다는 뜻을 밝혔기 때문입니다.
    보도에 김명준 기자입니다.


    【 기자 】
    비정규직법 시행 유예를 고집하던 한나라당이 한발 물러섰습니다.

    한나라당 안상수 원내대표는 이제는 유예안에 집착하지 않고 태스크포스를 만들어 근본적인 문제 해결에 나서겠다고 밝혔습니다.

    ▶ 인터뷰 : 안상수 / 한나라당 원내대표
    - "우리의 당론인 1년6개월의 유예안은 그대로 유지한 채, 그러나 이게 협상이 잘 안되니까 태스크포스팀을 만들어서 근본적인 문제도 함께 해결해 나가겠다. 이런 뜻이지…."

    이에 따라 한나라당은 신상진 제5정조위원장을 단장으로 하는 노동법 태스크포스를 가동할 예정입니다.

    특히 비정규직법 시행에 따른 계약직 근로자에 대한 지원책뿐 아니라 법 개정안 마련에도 나설 방침입니다.

    또 오는 목요일 당정회의를 열고 비정규직법과 관련한 대책을 논의하기로 했습니다.

    법 시행 유예 자체에 반대하고 있는 민주당은 환영의 뜻을 밝혔습니다.

    ▶ 인터뷰 : 정세균 / 민주당 대표
    - "(정부·여당이) 그냥 기간 연장을 하거나 유예하는 식의 편향된, 한쪽에 치우진 주장을 쭉 해오다가 이제야 노동부가 제정신이 든 것 같습니다."

    계약직 근로자의 기간 규정을 고수하지 않을 경우 제기되는 대안은 비정규직 사용 사유 제한과 정규직 전환 의무비율 도입, 처우 개선과 계약기간 완전 철폐 등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와 함께 당정은 계약직 근로자를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기업에 대해 사회보험료와 법인세 감면 등의 지원책 마련도 병행할 방침입니다.

    MBN뉴스 김명준입니다

  8. 비브르사비 2009/07/29 20: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미디어법을 달래서 은근슬쩍 넘어가려는 꼼수를 민주당이나 시민들이 알까요?
    일단 분위기 가라앉으면 상황종료라는 판단이겠죠. 지금까지 항상 해왔듯이요; 잘먹히기도 했고요.
    그렇게 또 보궐선거까지 질질 끌려다니다가 닭쫓던개 지붕만 쳐다보겠죠. 민주당의 인자들이 한나라당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 아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