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나 영화 등 예술작품은 두 번 이상 보아야 한다고 흔히들 말한다. 우리의 물리적 생리적 윤리적 한계 때문에, 첫 눈에는 놓치는 것이 너무 많아 전체를 다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번 세 번 이상을 보아야 보다 많은 이미지를 읽을 수가 있고, 또 그러면서 우리는 그 작품들의 새로운 의미들에 눈을 뜨게 된다. 실제로 두 번 이상 보면 그 작품이 새로워진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홍상수의 작품들은 두 번 세 번 네 번 이상을 보아도 새로움이 일어나는 것 같지가 않다. 처음 보았을 때와 두 번 이상을 보았을 때 의미에서나 심경에서나 큰 변화가 없는 것이다. 특별한 의미가 새롭게 태어나는 것도 아니고, 작가의 의도가 다시 보이는 것도 아니고, 놓쳤던 장면조차 다시 보이는 경우가 흔하지 않다. 그의 작품이 어려워서? 즉 감추어진 것이 많아 아직 뭔가가 나오지 않은 것일까? 아니면 반대로, 너무나 쉽고 뻔해서 첫 눈에 이미 다 드러난 것일까? 전자일 수도 있고, 후자일 수도 있다. 둘 모두일지도 모른다.
그의 작품이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단조로운 사건들로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작품 안에 두고 두고 읽어야 할 어떤 의미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가 제시하는 남녀들의 무의식적 의식적 욕망과 충동들이 동일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 형태도 다르고 질도 전혀 다르다. 가령, <강원도의 힘>에서 상권이 여행중에 보여주었던 충동들은 <생활의 발견>에서의 영수의 그것과는 본성적으로 다르다. 또 여인들의 사랑과 분노 그리고 배신 역시 각각의 인물들이 모두 본성적으로 다르다. 그러나 그러한 차이들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들 안에는 자연적 질서의 반복이라는 거대한 자연주의적 주제가 암암리에 내포되어 있기 때문에(가령, 셰익스피어의 소란을 닮은 <해변의 여인>에서의 한 밤의 소란이 해변 밖으로 한꺼번에 쓸려나가 고요해진 아침에 고현정 분이 난간 계단에 앉아 사색에 잠겼다가, 다시 서울로 돌아가기 위해 차에 오르는 놀라운 장면, 또 대부분의 작품에서 인물들이 되돌아가는 장면 등), 그 차이들은 어느새 거대한 파도 속에서 중화되고 단일화 된다. 격동의 시간들은 인간이 아무리 의미의 겹을 쌓으려 해도 결국은 단조롭고 진부한 행동의 아상블라주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아무리 제 각각 날고 기어봐야 멀리서 보면 모두가 언덕을 구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선(禪)의 요소가 지배적이고 또 선을 추구했던 오즈 야스지로(Ozu Yasujiro)의 세계처럼, 홍상수의 화면에는 주름이 없다. 심지어는 주름과 의미를 만들지 않고 지우는 것이 그의 목적이 아닐까 싶을 정도이다. 여러 번을 보아도 새로운 의미가 나올 것 같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오히려 주름이 너무나 거대해서, 마치 지구의 자전 소음을 우리가 들을 수 없듯이 혹은 태산의 느리지만 강렬한 변화를 우리가 알아차릴 수 없듯이, 주름을 식역 저편에서만 어렴풋이 경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산자락에 끼어 있는 화가가 어떻게 산의 거대한 피마준(披麻皴)을 구사하겠는가?
그런데 최근에 홍상수는 자신의 영화에 영화 감독을 직업으로 삼은 인물을 등장시켜, 자유간접화법 형식으로, 마치 자신의 예술관을 변명하고 옹호하는 듯한 제스쳐를 취한다. 일부 비평가들을 의식해서인지, 자신의 자발적 불만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는 자신의 세계에 스스로 회의감을 품었거나, 아니면 회의적 비전을 의식했거나, 최소한 그것을 사색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의 작품들 속에 등장하는 많은 감독(김상경, 김승우, 이선균 등이 맡았던)들이 영화의 의미(목적, 기능 등)에 대해 말했던 내용이 어떤 일관성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그리고 이 일관성은 최근에 개봉한 <옥희의 영화>의 이선균 분이 시사회에서 술김에 잠깐 진담으로 내뱉은, 아주 모호하고도 혼란스러운 그 "깔때기 이론"에서 다소 분명해지고 있는 것 같다. 그 논조는 물론 예술적 편협, 왜곡, 기만 등에 관한 비판을 담고 있다. 그가 일관되게 구사하는 특유한 화면의 질이나 편집의 양태 또한 이러한 논조를 정당화 한다. 그러나 점점 그의 작품들이 전개되어가는 가운데, 한 가지 의아스러운 것은, 위에서 말한 홍상수의 두 세계(개인적 욕망과 충동의 세계와 반복의 세계)의 역학과는 판이하게도, 이 감독들(홍상수 자신일 수도 있는)은 모든 예술적 시도와 창조조차 편협이나 왜곡으로 혼동하거나 그 둘을 동일시하여, 결국은 아이러니하게도 편협과 왜곡을 피하려는 자신들의 노력이 자기도 모르게 영화를 지리멸렬한 몸짓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하고", "만들어 놓는" 것은 아닌가 싶은 것이다. 투명해지고 단순해지려는 시도가 어쩐지 무의미와 공허를 창조하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한편 반대의 측면에서 생각해 보면, 이들의 생각은 영화를 세계와 혹은 사물 자체와 혼동하는 것은 아닌지, 심지어는 영화를 진리나 실체와 혼동하는 것은 아닌지, 결국 영화에 대한 무의식적 과대평가로 인해, 영화와 현실의 혼동에 이르게 되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영화가 현실과 동일한 그 무엇, 혹은 동일한 밀도의 그 무엇이어야 한다면, 무엇 때문에 그 비좁은 프레임과 필름 공간 속에 현실을 담아야 할까?
자신도 모르게 어떤 세계가 우연적으로 그려진 것이 아니라, 그 세계를 의식하고, 일관되게 체계적으로 그 세계를 창조하는 사람을 우리는 거장이라고 부른다. 아직은, 아니 아직도 어렴풋이 보이는 그의 거대한 세계가 자신도 모르게 해댄 어떤 우연한 몸짓이 아니라 의식적 고뇌에서 나오는 것이기를 기대해본다.

댓글을 달아 주세요
잘 읽었습니다.마지막 두 단락이 좋아요.^^
이 글을 읽으니 홍상수 영화가 진짜 지리멸렬에 빠지기 전에 국자로 국솥을 한번 휘이 저어보는 듯한 생각이 오네요. 홍상수의 영화에 건데기가 어디 따로 가라앉아 있는 건지, 아니면 그게 늘 멀겋게 시레기 몇 개 뜨는대로 그냥 퍼담아주는 그의 영화가 그대로 전부인지...
홍상수 ...,뭔갈 지각,사색할 줄 아는 능력이란 것도 늘 같은 타령이라면 이번엔 관객들이 그 능력에 대해 지리멸렬한 감정에 휩싸이고 말테죠.그의 영화가 아무 터치없이 민자로된 그림의 밋밋한 화면을 만지고 있는 느낌을 훈님께 주었다는 생각이 드는데 (맞나요?^^)
윗글을 통해서 엉뚱하게도 현대미술의 심오한 제살깍기 과정을 떠올렸어요. 문학성에서 도피하고 자본에 부역드는 것으로부터 도피하려다보니 깍아내다 깍아내다 결국 투명하게 극한의 관념(문학성을 넘어선 철학의, 즉 극한의 문자놀이)속으로 사라져버리고만 근현대미술의 운명... 뭔가에서 어떤 비약된 연상을 떠올리곤 하는 것이 제 병 가운데 하나입니다만.
예술에서 비젼이 없으면 공허하고 지리멸렬해 지겠죠. 예술이 아무리 현실을 충실히 기록하고 담아낸다고 해도, 예술이 현실을 닮아가면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죠. 예를들어, 그 사람 영화에는 학삘이들이 자주 나오는데. 교수라든가 강사라든가..하나같이 찌질하고 한심해 보입니다..아마도 학교에 있으면서 본 풍경일 겁니다. 어쩌면 그것이 학삘이들의 현실적이고 감각적인 풍경일 겁니다. 그런데 감독이 그 풍경에만 고착되어, 그 학삘이들의 비젼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가 만든 영화는 두 번 이상 볼 필요가 없겠죠. 순수한 사건의 기록이 아니라 거기서 뜻깊은 시간을 품어낼 수 있어야 하지 않나 싶은데,...결국 예술이 자신의 위상을 찾아야 할 곳은 현실에서가 아니라 비현실 속에서가 아닐까 싶은데,...앞으로 어떻게 달라질지는 두고 봐야겠죠. 또 최근에 홍상수 영화가 너무 말이 많아져서 그것도 좀 위험해보이네요...
학삘이가 된 것이 무슨 죄는 아니겠지요.
하나같이 다 찌질한 것도 아닐테고, 좀 떫은 학삘이들을 위한 변명 같지만 우리 사회에서의 그들의 위치가 그렇게 역량있는 위치에 처해 있는지 그들 지식인들이 과연 지성인으로 길러진 것인지 구조적인 측면도 한번쯤은 뒤돌아보아야할 거 같고, 그들이 제대로 가야함은 지당하고 지당한 소리지만 지식인에게 지성을 요구하기는 쉽지만 지성이 대접받는 사회라고 믿기는 좀 어렵지 않은가란 생각도 듭니다...
저는 훈님이 '풍경'이란 용어를 쓰신 것에 주목하게 되네요. 그 풍경이란 용어가 가진 함의 때문인데 풍경이란 말은 그대로 풍경을 의미하지 풍경의 내부나 바깥까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보면...
그것은 그것대로 의미를 가지지만 똑같은 거 자꾸 보게 되면,흔히 하는 말로 '그런데. 그래서 뭐 어쩌라고?!'하는 소리 사람들 입에서 나오게 되죠. ^^
. . . 학삘이가 뭐 어쨌다는 말이 아니라,
홍상수가 현상을 다루는 방식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풍경은 풍경을 의미하지 풍경의 내부나 바깥까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음..무슨 말씀이신지는 모르겠지만, 뭐 어쨌든 그렇습니다...^^
ㅋ, ^^제가 대화방식에 균형을 잘 못 맞춰요.원래 그랬던 건 아닌데 요즘 좀... 뭐 연상돼 오는 데로 주저리 주저리~. ^^
가을 모기가 어찌나 극성인지 아주 귀챦아요. 여름에도 이랬던 거 같진 않은데... 여기만 이런 건지 어쩐지 모르겠네요...
좋은 주말 보내세요~.
홍상수의 작품들은 두 번 세 번 네 번 이상을 보아도 새로움이 일어나는 것 같지가 않다.--> 이건 님의 눈이 너무 밝아서 그렇지 않나 싶네요. 저같은 멍한 눈으로는 도저히 한방에... (글 잘 읽고 갑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많이 부탁드려요)
그의 작품들을 여러번 보아도 새로움이 없어보인다는 말의 뜻은, 제 개인적인 경험을 말했다기 보다는, 그의 작품의 경향성에 관한 분석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눈이 밝아서가 아니라, 작품 자체가 이미 그렇게 만들어진 것일 수 있다 . . . 뭐 그런 거죠. 여러번 보지 않았더라면, 이러한 진술도 못했겠지만 말이죠^^
좋은 코멘트 감사합니다.
물론, 새로운 것들이 보일때도 있습니다. 가령, 얼마전에 인터넷에서 <강원도의 힘>을 돈을 지불하고 다운 받아 보았는데, 무슨 판본이었는지 모르겠는데, 아니면 원래 그런 것인데 제가 보지 못했던 것인지, 아주 이상한 장면이 있더군요. 여러차례 화면 가장자리에서 마이크가 왔다갔다 하는 겁니다. 왜 자동차 먼지털이개처럼 생긴 마이크 있죠? 참으로 기괴한 장면이었습니다.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영화의 큰 줄기 안에서
투명해지고 단순해지려는 시도가 감독의 분명한 의도였다면
그부분에 관객이 인지할수 있는 어떤 섬세한 기법이나 장치가 더해져
무의미와 공허를 창조하는 것처럼 보여지기도 하는 혼란을 일으키진 않았을것..
영화관과 영화 감독의 인생을 소재로 한 사랑이야기 '시네마천국'이
홍상수의 스크린 변증법보다 백배는 세련됨..
홍상수의 스크린 변증법?
멋있어 보이는 말 같은데요. . .?!
뜻이 궁금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