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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10/08 옥희의 영화 (10)

문학이나 영화 등 예술작품은 두 번 이상 보아야 한다고 흔히들 말한다. 우리의 물리적 생리적 윤리적 한계 때문에, 첫 눈에는 놓치는 것이 너무 많아 전체를 다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번 세 번 이상을 보아야 보다 많은 이미지를 읽을 수가 있고, 또 그러면서 우리는 그 작품들의 새로운 의미들에 눈을 뜨게 된다. 실제로 두 번 이상 보면 그 작품이 새로워진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홍상수의 작품들은 두 번 세 번 네 번 이상을 보아도 새로움이 일어나는 것 같지가 않다. 처음 보았을 때와 두 번 이상을 보았을 때 의미에서나 심경에서나 큰 변화가 없는 것이다. 특별한 의미가 새롭게 태어나는 것도 아니고, 작가의 의도가 다시 보이는 것도 아니고, 놓쳤던 장면조차 다시 보이는 경우가 흔하지 않다. 그의 작품이 어려워서? 즉 감추어진 것이 많아 아직 뭔가가 나오지 않은 것일까? 아니면 반대로, 너무나 쉽고 뻔해서 첫 눈에 이미 다 드러난 것일까? 전자일 수도 있고, 후자일 수도 있다. 둘 모두일지도 모른다.

그의 작품이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단조로운 사건들로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작품 안에 두고 두고 읽어야 할 어떤 의미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가 제시하는 남녀들의 무의식적 의식적 욕망과 충동들이 동일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 형태도 다르고 질도 전혀 다르다. 가령, <강원도의 힘>에서 상권이 여행중에 보여주었던 충동들은 <생활의 발견>에서의 영수의 그것과는 본성적으로 다르다. 또 여인들의 사랑과 분노 그리고 배신 역시 각각의 인물들이 모두 본성적으로 다르다. 그러나 그러한 차이들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들 안에는 자연적 질서의 반복이라는 거대한 자연주의적 주제가 암암리에 내포되어 있기 때문에(가령, 셰익스피어의 소란을 닮은 <해변의 여인>에서의 한 밤의 소란이 해변 밖으로 한꺼번에 쓸려나가 고요해진 아침에 고현정 분이 난간 계단에 앉아 사색에 잠겼다가, 다시 서울로 돌아가기 위해 차에 오르는 놀라운 장면, 또 대부분의 작품에서 인물들이 되돌아가는 장면 등), 그 차이들은 어느새 거대한 파도 속에서 중화되고 단일화 된다. 격동의 시간들은 인간이 아무리 의미의 겹을 쌓으려 해도 결국은 단조롭고 진부한 행동의 아상블라주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아무리 제 각각 날고 기어봐야 멀리서 보면 모두가 언덕을 구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선(禪)의 요소가 지배적이고 또 선을 추구했던 오즈 야스지로(Ozu Yasujiro)의 세계처럼, 홍상수의 화면에는 주름이 없다. 심지어는 주름과 의미를 만들지 않고 지우는 것이 그의 목적이 아닐까 싶을 정도이다. 여러 번을 보아도 새로운 의미가 나올 것 같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오히려 주름이 너무나 거대해서, 마치 지구의 자전 소음을 우리가 들을 수 없듯이 혹은 태산의 느리지만 강렬한 변화를 우리가 알아차릴 수 없듯이, 주름을 식역 저편에서만 어렴풋이 경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산자락에 끼어 있는 화가가 어떻게 산의 거대한 피마준(披麻皴)을 구사하겠는가?

그런데 최근에 홍상수는 자신의 영화에 영화 감독을 직업으로 삼은 인물을 등장시켜, 자유간접화법 형식으로, 마치 자신의 예술관을 변명하고 옹호하는 듯한 제스쳐를 취한다. 일부 비평가들을 의식해서인지, 자신의 자발적 불만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는 자신의 세계에 스스로 회의감을 품었거나, 아니면 회의적 비전을 의식했거나, 최소한 그것을 사색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의 작품들 속에 등장하는 많은 감독(김상경, 김승우, 이선균 등이 맡았던)들이 영화의 의미(목적, 기능 등)에 대해 말했던 내용이 어떤 일관성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그리고 이 일관성은 최근에 개봉한 <옥희의 영화>의 이선균 분이 시사회에서 술김에 잠깐 진담으로 내뱉은, 아주 모호하고도 혼란스러운 그 "깔때기 이론"에서 다소 분명해지고 있는 것 같다. 그 논조는 물론 예술적 편협, 왜곡, 기만 등에 관한 비판을 담고 있다. 그가 일관되게 구사하는 특유한 화면의 질이나 편집의 양태 또한 이러한 논조를 정당화 한다. 그러나 점점 그의 작품들이 전개되어가는 가운데, 한 가지 의아스러운 것은, 위에서 말한 홍상수의 두 세계(개인적 욕망과 충동의 세계와 반복의 세계)의 역학과는 판이하게도, 이 감독들(홍상수 자신일 수도 있는)은 모든 예술적 시도와 창조조차 편협이나 왜곡으로 혼동하거나 그 둘을 동일시하여, 결국은 아이러니하게도 편협과 왜곡을 피하려는 자신들의 노력이 자기도 모르게 영화를 지리멸렬한 몸짓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하고", "만들어 놓는" 것은 아닌가 싶은 것이다. 투명해지고 단순해지려는 시도가 어쩐지 무의미와 공허를 창조하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한편 반대의 측면에서 생각해 보면, 이들의 생각은 영화를 세계와 혹은 사물 자체와 혼동하는 것은 아닌지, 심지어는 영화를 진리나 실체와 혼동하는 것은 아닌지, 결국 영화에 대한 무의식적 과대평가로 인해, 영화와 현실의 혼동에 이르게 되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영화가 현실과 동일한 그 무엇, 혹은 동일한 밀도의 그 무엇이어야 한다면, 무엇 때문에 그 비좁은 프레임과 필름 공간 속에 현실을 담아야 할까?

자신도 모르게 어떤 세계가 우연적으로 그려진 것이 아니라, 그 세계를 의식하고, 일관되게 체계적으로 그 세계를 창조하는 사람을 우리는 거장이라고 부른다. 아직은, 아니 아직도 어렴풋이 보이는 그의 거대한 세계가 자신도 모르게 해댄 어떤 우연한 몸짓이 아니라 의식적 고뇌에서 나오는 것이기를 기대해본다.

Posted by hu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