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그송은 생명의 미시적 운동이 전체 진화과정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 결정일 수 있는가를 한 가지 예를 통해 이론적으로 논증하였다. 물론 그는 실제의 운동이 양적으로 추상화됨으로써 어떻게 왜곡되는가를 설명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 논의에는 그 이상의 것이 있다.
아킬레스는 실제로 어떻게 거북이를 추월할 수가 있는가? 사물의 운동을 공간화해서 이해하는 수학적 방식은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운동을 직선 위의 무수한 점들의 통과와 이행으로 이해한다면(우리는 실제로 이렇게 이해하고 있다), 운동하는 사물은 직선 위의 무한수의 점들에 직면하게 되고, 따라서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의 실제적인 이동은 성립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쏜 화살은 과녁에 도달 할 수 없으며, 아킬레스는 거북을 추월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은 이와는 반대가 아닌가? 우리는 실제로 과녁에 도달하는 화살을 본 바가 있으며,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의 완전한 이행 또한 경험한 바가 있으며, 거북을 추월하는 아킬레스를 보지 않는가? 이론과 경험 사이의 이러한 간극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이것이 바로 베르그송이 『창조적 진화』에서 고대철학과 근대철학을 그리고 나아가 사유의 양(量)적인 메커니즘을 비판하기 위해 제기했던 질문이다. 실제의 경험에 대해 이론적 한계에 직면할 때, 필요해지는 것은 그 경험을 설명해줄 하나의 연역이다. 이 부분에서 베르그송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했던 내용은 존재의 생성(진화)과 지속의 관계에 대한 것이었는데, 그 골자는 다음과 같다: 운동에는 구별되어야 할 두 수준이 내재되어 있다. 한편에는 양적으로 분할 할 수 없는 운동 그 자체(운동성)가 있으며, 다른 한편에는 운동하고 있는 물체가 지나간 공간이 있다. 운동성이란 순수한 질 혹은 강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데, 그럼에도 우리는 이를 측정할 수 있다고 믿으면서, 운동하고 있는 물체가 지나간 공간(궤적)을 운동 그 자체와 혼동한다. 여기에 바로 엘레아 학파의 오류가 있다. 그들은 운동하는 아킬레스로부터 질적 운동성을 제거하고 아킬레스와 거북이 지나간 궤적을 운동 자체와 혼동함으로써, 아킬레스와 거북의 서로 다른 질적 운동을 동질적인 공간에서의 동질적 운동으로 이해한 것이다. 운동 중에 있는 물체를 상상적으로 정지(imaginary stop)시켜놓고 보면, 그 물체가 지나간 공간(거리)를 운동과 동일한 외연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아킬레스의 운동은 동질적인 공간 속에서 앞서가고 있는 거북의 운동과 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따라서 한 점과 다른 점의 거리를 균등 분할하여 측정할 수 있듯이, 운동 역시 그것이 지나간 좌표의 점들의 이행으로 환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은[엘레아 학파] 아킬레스 전체의 운동을 아킬레스의 운동이 아니라 거북의 운동으로 재구성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거북을 쫓고 있는 아킬레스가 아니라, 동일한 종류의 발걸음으로 동시적으로 행위하고 있는 두 마리의 거북을 설정하였기 때문에 이 둘은 절대로 만날 수가 없다."(Henri Bergson. Time and Free Will. Eng trans by F. L. Pogson. New York, 1921. p. 113)
실제의 운동은 좌표 위에 결정되어 있는 수학적 의미의 점과는 다르다. 하나의 순간으로 즉 움직이지 않는 점으로 파악되는 운동은 우리의 지성이 재구성한 결과이지, 단숨에 일어나는 실제의 운동은 아니다. 아킬레스를 추상적 존재로 파악할 때, 즉 부동하는 점들을 소극적으로 통과하고 있는 수학적 존재로 이해할 때, 우리는 아킬레스를 거북과 동일한 방식의 걸음을 반복적으로 내딛고 있는 존재로 이해한 것이다. 두 마리의 거북이란 그런 의미이다. 존재들의 운동이 동질적인 것으로 간주됨으로써, 아킬레스와 거북은 정도상의 차이만을 갖는 동일한 본질이 된다. 그러나 실질적 존재로서의 아킬레스는 거북을 추월하기 위해 매번 새로운 방식의 적극적인 노력, 직선 위의 점들을 통과하는 것과는 본성적으로 다른 노력을 취하지 않겠는가? 이 노력이란 거북과는 질적으로 다른 아킬레스 자신만의 독자적인 발걸음으로 구성되지 않겠는가? 그러니 그들은 동일한 공간에서가 아니라 서로 다른 수준의 공간(과 시간)에서 서로 다른 운동을 취하지 않겠는가? 따라서 아킬레스와 거북의 한 발 한 발은 동일한 공간 안에서의 점들간의 이동을 의미하지 않는다. 운동이 공간의 이동으로 환원되고 나면, 실제적인 운동은 일어나지 않는다. 보다 더 근본적인 의미에서, 실제의 운동이란 매순간 이루어지고 있는 끊임없는 이행과 생성일 것이다. 그것은 운동체만의 이행과 생성일 뿐만 아니라, 운동체를 포함하고 있는 공간 전체의 이행과 생성이다. 그래서 그 한 발은 아킬레스와 거북 사이에 놓인 장(field), 즉 공간 뿐 아니라 시간을 포함하는 그들간의 관계 전체의 변화를 의미한다. 물론 그 변화란 그들의 의식을 넘어서 있다. 나아가 이것은 이들을 포함하고 있는 우주 전체의 변화를 야기하지 않겠는가? 이는 공간적 운동에만 관련되지 않는다. 유년기에서 청년기 혹은 성년기로의 성장과 같은 존재의 질적 변화에도 동일한 공식을 쉽게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베르그송의 말을 들어보자: "하나의 운동에는 운동하는 사물이 연속하여 지나온 각각의 위치 이상의 것이 있으며, 하나의 생성에는 순간 순간 통과하였던 (정태적인)형상보다 더 한 이상의 것이 있으며, 형태의 진화 또한 하나의 형태에서 다른 하나의 형태로 잇따르는 것 이상의 것이 있다."(Henri, Bergson. Creative Evolution. Eng trans by Arthur Mitchell (New York: Random House, 1944). p. 343.)
위의 논거를 약간 변형시켜 보면, 우리는 베르그송과 맑스의 놀라운 유사성을 발견하게 된다: 추상은 우리의 무능력을 예증한다. 추상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무엇을 볼 수 있는지, 심지어는 우리 앞에 놓인 대상이 무엇인지 조차 알지 못한다. 우선 추상은 존재를 정지된 것으로 이해하고 이를 고립시켜 놓으면서 출발하기 때문이며, 따라서 정지된 존재의 실제적인 이행과 성장을 설명하기 위해, 그 존재 외부의 원인으로서의 초월적 실체를 가정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존재를 부정(negativity)으로 결정하는 추상은 바로 노예상태를 전제로 한다(맑스는 이를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의 두 원자론의 차이로 설명한 바가 있다. 참고로, 칸트나 버크(Edmund Burke) 그리고 료따르나 들뢰즈가 논의했던 숭고미와 추상충동에 대한 문제는 좀 다른 관점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구체적이고도 실질적인 존재란 바로 (실제로 운동하는 아킬레스처럼) 그 자신 안에서 그 자신에 의해 그 자신의 고유한 역사를 쓰는 존재이다. 인간의 노예성으로부터의 해방을 실현하기 위해, 이미 맑스가 역사적 수준에서 정식화했던 이 내재성의 문제를, 베르그송은 더 근본적인 수준 즉 생명의 진화의 문제로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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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킬레스와 거북의 이야기는 집합론(경문사 수학정석 1장????)에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는 데 어떠한 집합이 무한이 될 때에는 그 부분집합과 그 부분집합을 포함하는 집합이 대등(1대1 대응이 가능)할 수 있다는 거죠. 대표적인 예로 자연수나 정수의 집합이 분명히 유리수의 부분집합이지만 서로가 대등할 수 있다는 게 지금의 집합론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데, 아킬레스와 거북의 이야기도 유사한 맥락을 가지고 있는 것 같군요. 2005/12/04 12:51
베르그송의 추상은 어떠한 불완전한 추상을 의미하는 것 같군요.
플라톤에게서 추상적인 것 어떤 진리에 대한 이미지(이데아)는 영원히 불변하는 완전한 것이었는데, 베르그송에게 있어서 추상은 제도난 관습에 의해 오도되고 또 그래서 일상적으로 정형화 되어있는 추상을 이야기해서 발생하는 차이 같군요. 2005/12/04 13:00
칸토르의 집합이론을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요, . . 제가 한때는 수학이론을 공부한적은 있는데, . . 지금은 거의 잊어버려서, 기억나는 것이 별로 없군요. 다만, 칸토르가 시도했던 무한집합들간의 크기의 비교에서, 말씀하신 자연수와 정수의 무한집합의 일대일 대응은 가산 무한집합에 속하는 것이구요, 이러한 가산무한집합에 일대일 대응이 안 되는, 즉 그것보다 더 큰 무한집합이 있음을 증명한 것이 칸토르의 연속체 이론이라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연속체란 셀수 있는 집합을 넘어서 있다는 말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실수 연속체, 즉 불가산 무한집합을 표현할 때 농도로 말하더군요. 농동가 짙은 무한이 있고, 농도가 얕은 무한이 있고, . . 집합을 이렇게 농도로 말하는 것을 보면, 이미 수(number)의 문제는 넘어선 것이겠죠 . . . 정확히 맞는 말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사실, 아킬레스의 문제에 대해 베르그송이 말하고자 한 것은, 운동이나 실재를 수학적 점들의 집합으로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추상적인 것인지, 그리고 그 추상적인 분석이 존재들의 실질적 운동의 본성적인 차이들을 일반화하고 동일화한다는 것을 비판하고 싶어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아킬레스의 운동과 거북의 운동은 본성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그 자체 각각의 운동성을 각자에게 되돌려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운동을 수(number)로 이해하는 고대철학을 비판하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가령, 하나의 사회에서, 각 구성원들이 단일한 하나의 구호라든가, 정치적 방향으로 이끌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각각의 본성적 존재를 회복시켜, 사슬이 완전히 풀어진 상태 즉 해방된 상태를 추구하려는 이론적 시도라고 저는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베르그송의 운동 이론은 맑스의 이론과 관계하는 것이구요. 네. . .
제가 언젠가 기회가 되면, 시간을 내서 에세이로 쓸 예정에 있습니다만, . . . 제가 생각하고 있는 가장 아름다운 사회, 가장 멋진 공간이란, 바로 저와 같이, 모든 사슬이 풀어헤쳐진 곳입니다. 어떠한 단일한 구호도 존재하지 않는, 심리적이든 실제적이든 행동을 강요하지 않는, 제 각각의 본성에 따라 각자가 해방된 상태, 그래서 아킬레스와 거북이 서로 완전히 무관한, 또 그것을 긍정하는 세계 말입니다. 투쟁해야 한다면, 바로 저 공간을 위해서여야 할 것입니다. 2005/12/04 23:05
베르그손철학의 반철학적 입장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군요.
철학의 본분인 보편성의 추구와 공통적 이데아의 발견에 있다면,
베르그손은 그런 것을 아예 오류로 규정하고 있으니 말이죠.
어쩌면 그러한 것이 원하거나 지향하는 바가 , 다시말해서 보편성의 추구나 공통적 진리에 있든 지 아니면 사슬을 풀어서 본성적 존재를 회복하는 데 있든지 다 같이 본래적이고 근본적인 데 그 목표를 두고 있다고 하는 같은 데 있을 지도 모르지만 세월의 탓인지 두 가지의 상이한 견해가 보이는 차를 인지할 수도 있을 것 같군요.
물론 이건 제 생각이지만 , 전 그러한 베르그손의 이해가 그가 이야기하는 추상이라든지 하는 것을 너무 구체적 사건이나 사상에 집착해서 전개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집합론 점수가 좋았던 것은 아닌 것 같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 가산 집합과 불가산 집합을 이야기할 때 밀도란 말이 너무 안 맞단 생각을 한 것 같군요.
보통 밀도하면 유리수처럼 딱 정해서 이야기 하는 데, 칸토르의 밀도는 밑도 끝도 없는 무한과 무한의 비율로서 밀도를 이야기 했으니 말이죠. 물론 칸토르의 이야기를 수긍할 수 있는 면도 있지만, 무한과 무한을 이야기하면서 필연적으로 유한과 유한의 비율일 수 밖에 없는 밀도를 이야기한 칸토르의 기발함이라고나 할까 하는 걸 생각했었죠.전 이걸 담당하신 교수님보단 해석학을 가르치시는 교수님이 이야기할 때 생각을 했는데, 아마 이것도 칸토르의 엉뚱함과 유사할 지도 모르겠네요. 2005/12/05 09: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