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다르'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0/05/05 만사형통 (9)
  2. 2010/05/04 비브르 사 비 (3)
  3. 2009/11/07 낯설게하기와 폭로 (3)
막강한 물리적 정신적 힘으로 무장한 다수가 시위와 파업으로 몰아붙이고 있는데, 어째서 그들은 그렇게 힘겹게 싸우고 있는 것일까? 왕성한 식욕으로 인한 복부비만과 대머리 그리고 그 어떤 기질적 분위기를 자아내는 빤들거리는 윤기의 붉은 입술을 하고 있는 업주를 감금하고, 요새와도 같은 철통 보안의 건물을 장악하고, 임금 뿐만 아니라 인사의 모든 결정권을 쥔 경영진과 언쟁을 벌이며 신나게 몰아붙이는데도, 수적으로나 힘 적으로 얼마 되지도 않는 그들에 맞서서 그 다수는 어째서 그렇게 맥을 못추는 것일까? 고다르의 Tout Va Bien(1972)을 보면, 그들의 싸움이 결코 경영진이나 소유주를 상대로 한 것이 아님을 보게 된다. 다름 아닌 법과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들의 사회적 목소리를 내기 위한 기본적인 조건이라고 할 수 있는 법적 평등이라는 이름으로, 더 정확히 말해 개인이 아닌 법인으로서 말이다. 심지어는 법적 부당함에 대하여 항의를 할 때 조차, 그들은 법인으로서 법의 언어로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문제는 법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인데, 이 아이러니가 그들이 처한 어려운 문제이다. 예술가? 물론 그들은 명목상으로는 법 이전의 존재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브 몽땅의 넋두리처럼 그들은 이제 업주의 마케팅 담당 직원이 되어, 급료계좌를 개설함과 동시에 자동으로 법인이 되었다. 언론과 기자? 인물 중 누군가가 말했듯이, "감상적이고 울부짖긴 하지. 하지만 투쟁과 변화의 과정을 보여주진 못해요!" 더군다나 이들은 이미 업주의 빳빳한 현금에 매수되어 진부하고 지루한 묘사들과 더불어 왜곡과 날조까지 서슴지 않는다. 결국, 그 다수는 법의 이름으로 군대와 대면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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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라(Emile Zola)의 자연주의적 혹은 근원적 세계의 시간과는 달리, 위대한 고다르(Jean Luc Godard)는 Vivre Sa Vie (1962)에서 사회적 시간을 묘사한다. 나나는 자신 안에 내재한 곰팡이의 배아와도 같은 기질로 인해 주변을 썩어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녀 자신이 사회적 곰팡이로 인해 감염되어 썩어간다. Vivre Sa Vie에서의 시간이란 다름 아닌 그러한 감염의 흔적들이 점점 깊어지고 돌이킬 수 없게 되어 결국 파국으로 치닫는 과정의 목도이다. 나나는 매춘부가 되어 포주 라울에게 매춘부 교육을 받는다. 매춘 사회학과도 같은 대화 내레이션이 계속되면서, 나나의 조직적이고도 기업적인 영업활동이 짧은 장면들로 스쳐 지나간다. 이어지는 장면들을 바라보며 우리는 아주 엄격한 통제하에 매춘부의 관리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목격하게 된다. 그녀는 타락을 한 것이 아니라 취직을 한 것이고, 직업인으로서 합당하고도 효율적인 규율 하에서 노동을 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이 매춘은 비윤리적이고 더러운 것이 아니며, 공장의 제품 생산 공정이나 기업의 마케팅 과정처럼 대단히 일상화되고 체계적으로 잘 관리되는 직업으로 묘사된다. 방세조차 지불할 수 없어 좀도둑질을 하던 레코드 점원 시절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물적 풍요를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결국은 무엇이 진짜 사회 악인지 구분할 수 없게 된 이 마당에, 단지 그것이 개인적인 것과 조직적인 것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그 방식과 강도가 조금 다를 뿐 그녀가 노동과 규율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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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브레히트(Bertold Brecht)식 낯설게 하기의 가장 좋은 소재는 상품이 아닐까? 상품은 너무나 친숙해졌고, 아름다워졌고, 편안해졌고, 신비스러워졌다. 포스트모던 브레히트는 상품의 이 허울을 벗겨내기 위해, 이들의 구성요소들, 부속들, 쓰레기로 만들어지는 실체들, 그 조잡하고 무의미한 성분들과 관계들에 대한 가차없는 폭로가 필요해 보인다. 예술가들은 상품을 해부하고(비유적으로가 아니라 물리적으로), 날 재료들을 가리거나 그들을 봉합하는 거친 재봉선을 들추어내고, 속을 보여주고, 창자들을 빼내어, 그 날 재료들을 드러내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보이지 않는 옷처럼 걸치고 있는 이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물건들의 실체가 무엇인지, 자신들의 등판과 어깨에 무엇을 걸치고 있는지, 기업이 들추어내기를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물건들에 대한 관심과 취향과 흥미를 떨어뜨리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일이 필요한 것이다(작은 예로, 얼마 전에 일부 영리한 젊은 층이 문화-경제적으로 시도했던 특정 기업 상품불매 광고 운동에 대한 기업과 사법부의 흥분된 반응을 보라. 우리는 치명적인 약점 하나를 발견한 셈이다). 고다르(Jean Luc Godard)가 영화를 감동적이지 않은, 재미없고 시시하고 엉성하고 부산하고 산만하고 지루한 것으로 만들었던 것처럼 예술 자신을 재미없게 할 것이 아니라, 상품과 그 이미지를 시시하게 만드는 일, 이것이 예술가들이 (무엇보다도 그 자신들을 위해) 해야 할 현대적 과업이 아닐까? 감동적이고, 아름답고, 뭉클하게 만드는 예술가들은 가짜이며, 점점 더 마취되기를 원하는 관객들과 아울러 함께 놀아나고 있는 공범자이다. 앤디워홀(Andy Warhol)? 물론 그는 상품을 신비화한 장본인이다. 그는 한 꺼풀만 벗겨내면 쓰레기가 되었을 그 무엇들에 대해 아무도 그 한 커플을 벗겨내지 못할 것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그 얇은 가리개를 이용하여 아우라를 재구축했던 것이다. 그는 결국 영리한 사기꾼이었지만, 현대의 예술가가 필요한 능력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와 같은 사기꾼 근성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상품의 아우라는 파괴되어야 하지 않는가? 브레히트나 고다르의 방식이 옳지 않았을 수도 있다. 예술은 자기자신을 망가뜨리고, 스스로를 드러내고, 자기를 지시하고, 자기를 반영함으로써, 오히려 스스로를 아무도 신뢰하지도 흥미로워하지도 않고 관심을 두지 않는 괴물로 만들었던 것은 아닐까? 교화는 행동과 결단을 촉구하지 못한다. 그것은 윤리적으로도 조차 지속되기가 어렵다. 인간이 돼지가 되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돼지가 인간이 될 수는 없지 않은가? 인간이 돼지라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그 지성이란 것이 생각처럼 그렇게 쉽게 결단하고 행동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브레히트는 이성을 일깨워 행동을 촉구했지만, 실은 이성은 행동을 방해한다. 서사극보다는 오히려 그람시(Antonio Gramsci)의 지적처럼 멜로드라마가 더 효과적이었을지도 모른다. 대중을 교육시키려는 생각보다는, 그들에게 네가 본 것을 폭로하라! 도덕과 집단적 정의에 호소했던 미국의 전 근대적 저널리즘식 폭로(muckrakers)가 아니라, 개인의 이익과 취향과 쾌락에 호소하는, 폭로의 예술, 폭로의 기교가 필요한 것이다. 낯설게 하기가 예술의 형식으로서 아직도 유효하다면, 교화가 아닌 폭로를 위한 것이 되도록 할 것.
Posted by hu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