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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6/12 공포의 축제 (2)
  2. 2008/01/08 부연: 믿음과 공포
  3. 2006/09/21 이모와 찍은 한 장의 사진을 보며 (3) (5)

인류가 생긴 이래 권력은 항상 공포를 이용하여 대중 다수를 통제해 왔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공포를 이용하기도 했고, 초자연적이고 주술적인 공포를 이용하기도 했고, 인간에게 보편적인 죽음의 공포를 이용하여 구원과 처벌이라는 허구로 인간을 다스리기도 했다. 어떤 점에서 인류의 역사는 공포와의 투쟁의 역사라고 할 만큼, 인간은 자신을 위협하는 그 어떤 무시무시한 것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느 정도 알게 되었듯이, 인간을 괴롭히던 그러한 공포들은 죄다 우리 자신 안에 있는 무지와 왜곡된 마음 때문이지, 실제로 자연적 공포나 초자연적 공포 혹은 사후세계가 객관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현대가 되면서, 인간은 과학적으로 자연을 보게 되었다. 즉 자연이 살아서 우리에게 벌을 주고 상을 주는 식의 인격을 갖춘 존재로 더 이상 생각하지 않게 된 것이다. 인간은 자연을 객관적이며 수학적으로 파악하였고, 무엇보다도 자연을 사물(things)의 질서로 바라보게 되었다. 그래서 자연은 계산과 예측이 가능한 그냥 사물들의 배열이고 관계일 뿐이다. 물론 자연은 아직도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떤 무시무시한 피해를 준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자연에 어떤 죄를 저질러서가 아니라, 어떤 질서의 변화를 아직 우리가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 데에 기인할 뿐이다. 자연의 공포는 우리의 죄나 부도덕이나 사악함에 대해 하늘이 내리는 벌이 아니라 단지 재해이고 재난일 뿐이다. 자연을 맹목적으로 믿지 않게 되자, 우리는 자연으로부터 공포를 물리칠 수 있게 된 것이다(이 몰-공포가 우리를 더 파멸시키는 요인이기도 하지만).

따라서 어떤 점에서 과학적 지식의 진보는 무엇보다도 인간이 공포를 이용한 정치적 탄압으로부터 해방되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자연이나 초자연적 혹은 사후세계를 운운해서는 더 이상 공포감을 줄 수 없고, 유식하고 두려움이 없는 사람들은 더 이상 시키는 대로 복종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현대는 새로운 형태의, 더 많은 종류의 공포를 탄생시켰다. 다른 인종에 대한 공포, 다른 국가에 대한 공포, 다른 계급에 대한 공포, 다른 인간에 대한 공포, . . . 이들은 모두가 적에 대한 공포이며, 이는 다름아닌 차이에 대한 공포이다. 차이에 대한 공포는 우리를 자기중심적으로 고립하게 하고, 불화를 삶의 조건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나와는 다른 존재를 불편해 하는 우리의 삶은 항상 불안하고 무섭다.

현대 산업사회는 인간이 살면서 필요한 물건만 대량 생산한 것이 아니라 아이러니 하게도 빈곤에 대한 공포 역시 대량생산 하였다. 굶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공포가 백화점 쇼윈도의 휘황찬란한 상품들의 퍼레이드 가운데 대기 전체에 퍼져 있다. 이 공포 덕분에 우리는 하루 10시간 이상을 기계처럼 일을 한다. 일이 보장해주는 먹을 것 때문에 공포가 사라진 것인지, 아니면 정신 없이 일을 하다 보니 잠시 잊어버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상하게도 고된 노동은 우리를 편안하게 해 준다. 편하게 쉬는 것이 오히려 불안하고 무섭다.

이 뿐만이 아니다. 최근 들어 인류는 핵의 공포, 범죄의 공포, 미국 발 테러의 공포(즉 테러의 테러)에 휩싸여 있다.

과학이 진보하고 현대적 생산방식이 우리를 자연으로부터 어느 정도 해방시킨 지금에도, 여전히 공포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 지금은 초자연적이고 종교적인 공포가 단지 개인적으로만 잔존하고 있지만, 여전히 사회적 정치적 공포는 대중 다수를 사로잡고 있다. 그리고 그들을 사로잡는 공포들 대부분은 여전히 어떤 보이지 않는 권력과 특정한 세력의 허구의 산물이다.

지난 주 까지만 해도 우리는 보내기 아까운 지도자를 잃어 비통해 했다. 하지만 국화꽃과 향불의 향이 아직 가시지도 않던 와중에, 다른 한 편에서는 그 애도와 슬픔에 찬물을 끼얹듯 서서히 닥쳐온 두 개의 공포가 있었다. 하나는 우리를 단결하게 하는 공포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를 흩어지게 하는 공포이다. 전자는 핵의 공포, 아니 더 정확히 말해 이데올로기 빨갱이 공포라면, 후자는 바이러스의 공포이다. 이들이 점점 강하게 다가온다.

전자는 해방 이후 남한의 태생적 빨갱이 혐오증이 만들어낸 공포이자, 그 이후 군사정권이 가장 심도 있게 창조해 왔던 공포이다. 이 공포는 법에 의해 이미 합법화된 형식의 공포이기도 하고, 심리적으로 볼 때 뿔 달린 괴물의 이미지로 수십 년 간 분위기를 조성해 온 관계로 아주 잘 먹히는 공포 중 하나이다. 이들에 관련된 색과 단어들에 대해 반응하는 몇 몇 사람들을 보면 거의 파블로프의 개 수준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로. 이 공포는 우리 자신이 아닌 적을 향해 단결하게 한다. 즉 흩어지면 죽고 뭉치면 사는 것이다.

반면에 후자는 오래 전부터 인류를 괴롭혀 온 공포이긴 하지만, 현대의 미디어와 결합이 되어 지금은 가장 막강한 신종 공포가 되었다. 이는 어쩌면 다른 모든 공포의 메타포일 수도 있는 공포이며, 그렇기 때문에 SF 영화라든가 소설의 주요 소재가 되고 있는 공포이기도 하다. 그러나 믿지 않을 수 없게도, 이것이 과학적 발견의 산물이라는 데 문제가 있다. 우리는 주술가가 말하는 귀신이나 성직자가 말하는 사후세계를 믿지 않을 수는 있지만, 바이러스를 믿지 않을 수는 없다. 과학이 종교가 된 현대에, 과학자나 의사들의 선언을 뿌리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바이러스는 다른 공포와는 달리 그 실체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아니 과학적으로 존재하는 인류의 보편적 공포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바이러스 역시 정치 권력의 손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권력이 바이러스를 만들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자연적으로 발생한 바이러스 조차 권력은 정치화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바이러스에 대한 인간의 행동을 생각해보라. 바이러스는 가장 훌륭한 통제의 수단이 된다. 바이러스는 우리를 흩어지게 한다. 즉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 바이러스는 인간들의 불신과 냉소와 경계의 천연 자연적 조건 같은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공포를 부추기는 권력은 그 자체가 하나의 공포였다. 적이 쳐들어 오면 내가 너희를 지켜 줄께! 네가 다치거나 나쁜 일이 생기면 내가 막아 줄께! 굶어 죽지 않도록 내가 보호해 줄께! 배려와 보호의 이름으로 사람을 무섭게 하면서, 배려와 보호의 필요를 역설하는 권력은 그 자체가 공포였다. 제대로 된 어느 부모도 아이에게 두려움을 심어가며 자신의 필요를 역설하지는 않는다. 한국에는 두 가지 고질적인 공포가 있었다. 경제라는 이름으로 무의식적으로 내면화한 빈곤의 공포가 하나이고, 체제 안정이라는 이름으로 심리화된 붉은 색에 대한 공포가 다른 하나이다. 전자는 줄곧 있어 오다가 최근엔 더 강화가 된 반면, 후자는 한 동안은 잠잠했던 공포이다. 그런데 최근에 우리는 신종 바이러스라고 하는 또 하나의 생물학적 공포와 아울러, 계속 있어왔던 빈곤의 공포의 강화, 그리고 잠시 사라졌었던 붉은 색의 공포의 귀환, 이 모든 유령들이 다시 떼를 지어 출몰하고 있음을 느낀다. 우리는 이제 초자연적, 종교적 공포를 지나, 과학적 공포, 사회적 공포, 이데올로기 공포, 경제적 공포의 블랙홀로 빨려 들어간다.

비통함이 분노로 치닫기도 전에, 어쩌면 가장 견고하게 뭉쳐야 할 이 때, 한 편에서는 분노의 대상을 엉뚱한 곳으로 돌리고 있는 공포가 북쪽에서 불어오고 있고, 다른 한 편에서는 광장 공포증에 버금가는 위력으로 우리 모두를 각자만의 방안으로 흩어지게 하는 공포가 서쪽에서 불어오고 있으며, 우리 내면에서는 굶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빈곤에 대한 공포가 우리를 다른 생각 하지 말고 작업장으로 가도록 채근한다. 모일 수도 없고 흩어질 수도 없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이 삼중구속 하에서 공포에 질려 새파란 입술로 얼어붙을 판이다. 이 세 가지의 다중적 공포가 재료가 되어 앞으로 어떤 작품들이 만들어질지 주목해보자.

Posted by huun

무력해진 믿음이라는 공포영화의 주제는 초자연적 존재를 등장시키는 영화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귀신과 대면하고 그를 쫓아내고자 하는 과학적 믿음과는 다른 형태의 믿음도 있다. 그것은 현실적 질서 안에서의 다른 세계와 대면하는 믿음인데, 바로 인간의 현실을 미신의 세계가 아닌 범죄의 세계로부터, 더 정확히는 부당함의 세계로부터 지켜야 한다는 법적 믿음(혹은 소유의 믿음)이다. 미국 헐리웃 영화들의 지배적인 테마인 이 믿음은, 이제는 범죄자에 의해 반격을 받아 죽어 가는 경찰관들을 설정함으로써, 그 믿음의 무력함이 점점 극단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것은 과학적 믿음의 무력함에서 나오는 공포와는 또 다른 형태의 공포일 것이다.


간단한 예를 들어, 로버트 드니로(Robert De Niro)가 나오는 『15 minutes』에서의 충격이란, 대중매체를 통해 시민의 우상이 되었던 경찰관이 바로 시민들이 바라보는 텔레비전 속에서 범죄자에 의해 굴욕적인 죽음을 당하는 장면일 것이다. 또 게리 올드만(Gary Oldman)이 출연하는 『Romeo is Bleeding』에서 가장 불쾌하면서도 기괴했던 장면은, 범죄 집단의 하수인으로 전락한 한 경찰관이, 몇 가지 실수로 인해 오히려 그들에 의해 처벌을 받으면서, 애원과 함께 발가락이 잘리는 장면이었다(이것은 아마도 게리 올드만 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이 아닐까 싶다. 그의 연기에는 인간의 타락에 대해 우리가 느끼는 근원적인 공포를 역겨움으로 전환시키는 면모가 있다). 이 외에도 더 많은 목록을 작성할 수 있을 것이다.


5년 전만 해도 스릴러 영화에서 문제 해결을 위해 경찰관이 등장하면 다소 마음이 편해지는 경향이 있었지만, 최근에는 문제 해결에 있어 오히려 방해가 되거나, 심지어는 위협적인 존재가 되어, 더 불안해지기만 한다. 법적인 믿음의 무력함과 불신만을 확인하기 때문일 것이다. 경찰이나 변호사와 같은 법적 존재는 이제 공포영화에서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헐리웃 영화 제작자들이 직면한 문제가 바로 이점일 것이다. 어떤 공포를 만들어내어야 할까? 이 질문은 우리가 가장 믿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것과 관계가 깊다. 우리는 무엇을 믿고 있는가? 혹은 더 나아가 우리에게 믿음이 존재하는가?


아마도 공포의 본질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종교적 믿음의 시련이 될 것이다. 특히 십자가에 매달려 처벌을 받는 신의 아들, 신의 말씀을 실천하는 성직자의 시련과 같은 주제가 그 경우에 해당된다. 그러나 종교적 믿음에 있어 현대적 공포란 그 보다 더 근본적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간단히 말해 그것은 시련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 자체의 문제, 즉 현대인들이 서서히 신의 죽음을 자각하게 되면서 느꼈을 법한 무한한 공포 혹은 불안과 관계가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멜 깁슨(Mel Gibson)의 『예수의 수난(The Passion of the Christ)』(2004)은, 믿음을 불가능하게 하는 외부의 적이나 시련에 맞서는 투쟁과 그 의미를 문제 삼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믿음의 사라짐 혹은 믿음의 존재 자체에 대한 공포, 즉 믿음 내부의 투쟁으로부터 출발한 영화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영화에는 예수가 어떻게 시련을 극복 하는가 혹은 수난이 의미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혹은 왜 그는 수난을 받아야 하는가와 같은 신학적 질문이 불필요해 보인다. 오로지 수난 그 자체, 시련의 강도, 나아가 수난의 형상화가 문제인 것이다. 그것은 믿음이 사라져버릴 것에 대한 공포, 믿음 자체의 회의감에서 오는 공포를 전제로 한다. 마치 사라져버릴 꽃의 아름다움을 보존하기 위해 붓을 들어 난잡에 가까울 정도로 색채를 추구 하듯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불안에서 비롯된 그 믿음은 이미 종교적 의미를 상실한 것이다. 그래서 그 영화는 더 이상 고유한 의미에서의 종교영화라고 보기 어렵지 않나 싶다. 순수한 공포영화라면 맞을까.

Posted by huun

나는 혼자 여행을 하게 되는일이 가끔 있다. 낯선 곳에 도착해 버스에서 내리고나면, 밀려오는 막연함에 가슴이 두근거리고는 한다. 갈 곳이 없는 저녁이라면 고독감은 더해진다. 그것을 견딜 수 없다면 다방에서 차 한잔 마시고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면 끝이다. 그러나 만일 거기서 살아야 한다면, 다시 되돌아갈 곳이 없다면 어떨까? 키리코(Giorgio de Chirico)의 텅빈 거리 그림을 본 적이 있는가?(그림보기) 육체를 잃어버린 소수자(minority)가 느끼는 낯설고도 막연한 감정이 우리의 가슴을 후벼판다. 그녀도 그랬을 것이다. 손이 홀가분한 여행자가 아니었으니. 잔뜩 손에 쥔 보따리를 질질 끌며, 자신의 영혼을 담아줄 무엇인가를 혹은 누군가를 찾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도회지의 생활은 자유로움 그 자체였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사지가 매여있던 시골로부터 벗어나 작은 환락을 만끽할 수가 있었을 테니. 그곳에는 그녀를 아는 사람들이 없었고, 그들의 질긴 시선도 없었다. 어느 누구도 그녀를 개의치 않았을 것이다. 그녀에게 주어진 일만 열심히 한다면, 꿈꾸던 우아함을 적당히 포기할 용의가 있다면, 목숨이 유지되는 것은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지내다 보면 더러는 살맛도 나고 행운도 오기 마련이다.

그러나 도시가 그녀에게 안겨준 자유란 그녀를 속이는 것이기도 했다. 그것은 궁핍이라고 하는 법이 허용하는 한에서만 가질 수 있는, 말하자면 정글보다도 더 무시무시한 자유였다. 그녀는 삶이 가해오는 생애 최초의 그 공포에 맞딱드리지 않기 위해 정말이지 열심히 일해야 했을 것이다. 이루고 싶던 꿈도 어느새 바뀌지 않았을까? 도회지의 삶은 더 이상 권태가 아니라 무서움 그 자체였을 것이다.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다가올 것에 대비하고 준비하는 그 삶은 현재의 모든 것을 미래의 불안으로 흡수해 버린다. 그것은 너무나도 끔찍한 것이었기에 떠올릴 수조차 없었으며, 그것이 오히려 자유를 느끼게 해주었을지도 모른다. 불안과 공포란 임박한 죽음 속에서가 아니라 무한한 자유 속에서 최대화되는 법이다. 자신을 죄이고 있던 사슬이 풀어지면, 우리의 몸을 지탱해주는 것은 불안과 공포 뿐이다. 언제부터인지 우리들은 자유의 댓가로 영혼을 빼앗기기 시작했다.

공포란 도시 환경 자체가 개인에게 주는 정서이기도 하다. 어디를 가도 다를 것 없는 불특정한 구역들. 가려진 태양. 기하학적으로 구획된 거리들. 또 그 길을 따라 오고가는 이들의 뻣뻣해진 육체. 조각난 노동과 그 현장. 사방에서 밀려오는 소음과 악취. 뿌리칠수도 응할 수도 없는 유혹들. 번쩍거리는 불야성. 그 속에서 무엇인가에 굶주린 잠재적 하이에나들. 그러면서도 아이스크림과 초콜렛의 천국. 쇼우 윈도우. 백화점. 저절로 움직이는 에스컬레이터. 지하철. . . .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어떠한 짓을 해도, 꿈쩍도 하지 않는 이 거대한 기계 덩어리. 한도 끝도 없어 보이는  이 기만적인 자유. 또 거기서 겪게되는 배회와 방황. 시-공간적 좌표가 소실되어버린("여기가 어디지?") 이 회색 도회지에서 그녀는 완전히 버림받은 것이다.

이제 그녀는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아무도 감시하지 않는 감옥에서 하루 하루를 재빠른 걸음으로 살아가야 한다. 배운 기술도, 아는 정보도, 아는 사람도 없었으므로, 그다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기껏해야 식당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거나, 테이블을 치워가며 낯선자들에게 불려다니거나, 여인숙같은 곳에서 남녀들이 밤새 뱉어놓은 찌꺼기들을 치우며 한낮을 보내거나, 콘베이어벨트나 선반 앞에 꼿꼿이 앉아 기계의 시다 노릇을 하거나, 좀 나은 것이라면, 사무실에서 문서 심부름이나 커피를 타주는 일 정도 였을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70년대 한국의 도회지에서 중졸의 그녀가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욕지거리를 듣는 일은 흔했을 것이다. 못볼 일도 많이 겪었을 것이고, 심지어는 추행을 당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도회지의 세월은 그녀 안에서 만발했을 설레임과 호기심들을 하루에 하나씩 떨구어 나가는 세월이었을 것이다. 그 삶은 깔깔거리며 발랄한 미소를 지었던 그녀가 꿈꾸어온 것이 결코 아니었다. 그녀가 세상을 실망시킨 것이 아니다. 할아버지, 시골, 서울, . . . 그녀는 그 어느 누구도 실망시키지 않았다. 반대로 그녀가 그 모든 것들에 실망하고 있었다. 논리적으로도 그렇지 않은가? 젊은이들의 앳되고도 순진한 미소를 망쳐놓는 것이 삶 자체는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그녀가 지녔던 것 중에서 가장 돋보였던 그 미소는 점점 짜증과 냉소의 주름들로 구겨져가고 있었다.

아마도 그 실망과 더불어 그녀의 삶은 달라졌을 것이다. 그녀에게 무례했던 시골과 서울로부터 그녀는 더 이상 아무런 동경도 품지 않았다. 식물을 길러본 사람들은 이를 잘 안다. 식물은 환경이 맞지 않으면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환경과 자신을 절연한다. 식물의 투쟁방식은 다름 아닌 실망이다. 무엇인가에 실망한다는 것. 그것만큼 우리를 서글프게 하는것도 없다. 말 없이 떠나가는 사람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사람들은 절망하지 않는다. 실망할 뿐이다. 그녀의 영혼이 그녀 자신으로부터 빠져나가 버렸다. 그리고는 그녀는 결혼을 하였다. 그녀가 처녀를 잃은 것은 그 때부터일 것이다. 자신을 거칠게 대하는 삶으로부터 그녀가 바랬던 것은 약간의 다정함 뿐이었다. 그녀 자신의 환상이든 아니든, 어쨌든 그녀는 그 다정함을 주는 어떤 사람에게 자신의 몸과 마음을 송두리채 맡겼다. 몇 년후, 식당 주방장과 결혼하겠다고 한 남자를 집에 데려왔을 때, 할아버지를 비롯해서 사람들의 눈총과 동정어린 비난을 기억한다: "저럴 걸 왜 정신 못차리고 이혼을 . . .!"

다행스럽게도 그녀의 남편은 성실했고, 그녀를 꽤 사랑해 준다고 들었다. 아이도 둘이나 낳았다. 오래 전에 들은 기억으로, 지방의 작은 도시에서 손바닥 만한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할머니가 다 되었을 것이다. 그녀는 가슴 속에 품은 것들을 추스르지 못해 공부를 잘 하지 못했으며 외모가 잘나지도 못했다. 그러다보니 욕망을 실현시킬 사회적으로 긍정적인 수단을 쥐지 못했다. 욕망이 움츠려있기에는 너무나 피로해서, 그 피로에 더 이상 견디지 못해, 그녀는 타협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육체를 잃은 영혼처럼 서 있지도 앉아 있지도 못해 엉거주춤 했던 세월이 너무 많아서였는지, 지금은 무릎 관절이 심하게 아파 시름하고 있다고 들었다. 그녀도 언젠가는 죽게 될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삶을 후회했을지도 모른다. 또 사회에 불필요한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결국 그녀는 불행한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불행은 그녀 자신이 만드는 것으로 충분하다. 자신이 아닌 누군가의 결정으로 불행이 계속되어서는 안 된다. 불행이 사라진 낙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있을 수도 없고, 있다해도 별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낙원이 아니다. 다만 불행조차도 우리 스스로가 선택한 결과이길 바랄뿐이다. 그랬을 때에만 비로소 우리는 삶을 불행으로 여기지 않는다. 나는 그녀가 다른 조명에 의해서가 아니라 바로 자신만의 빛으로 살아가길 바란다. 오래 전에 이 사진 속에 자국을 남겼던 그 소란한 빛처럼. 할아버지 뿐 아니라 사회가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 빛이 그녀 자신으로부터 나올 수 있도록 그녀에게 되돌려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아버지의 보호에 의해서도 아니고, 남편의 사랑에 의해서도 아니다. 도회지가 그랬듯이 내버려두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기다려 주는 것. 결실이 보이지 않는다 해도, 오로지 기다려 주는 것. 그리하여 그녀의 본질이 스스로 드러나도록 한 없이 기다려 주는 것이다. 감광판을 태우기 위해 조리개를 활짝 열고, 하염없이 빛을 기다리는 카메라, 그 초연한 카메라처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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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hu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