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되었든 살아가려면 누군가를 만나야 한다. 물론 아무도 만나지 않고 은둔 속에서 살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삶이라기 보다는 삶으로부터의 초월을 지향하는 것이다. 먹고 살려면 만나야 하고, 관계의 그물을 짜기 위해 두툼한 수첩을 준비해야 한다. 인터넷에는 살아가기 위해 부벼대는 이 관계의 몸부림이 즐비하다. 물리적 의미에서의 육체를 점점 잃어가는 이들은 또 다른 육체 속으로 기생하여 그 숙주들의 방 안에서 섹스를 하고, 울부짖으며, 사유를 한다. 공허와 무의미로 다시 추락하지 않기 위해 이들은 기기들을 부여잡고 파워-스위치를 끌 줄을 모르며, 손과 눈을 뗄 줄을 모른다. 너저분함으로부터의 초월에 실패한 나, 아주 많이 화가 나 있던 나 역시 결국은 그 빛 속으로 나와야 할 것이다. 기괴하게도, 관계로부터 고통 받지 않기 위해, 상처 받지 않기 위해, 불나방처럼 다시금 관계속으로!
논리학에서는 인과관계나 모순관계를 나타내는 접속사들―그러나, 그러므로 등―을 사용한다. 이 접속사들은 항들의 관계를 종속적인 것으로, 즉 관계의 원인을 항들 내부 속에서 찾는다. 가령, “A 그러므로 B”에서는 A가 B의 원인이 된다든지, “A 그러나 B”에서는 두 항이 투쟁하여 하나를 제거하려는 경향이 있다든지, 아니면 B가 A를 근거로 새로운 관점으로 이탈하거나 반대한다든지 하는 식이다. 어느 모로 보나 두 항의 관계의 원인은 둘 내부―두 항들 중 하나―에 있고, 힘의 관계가 권력적이거나 종속적인 구조를 갖는다. 들뢰즈(Gilles Deleuze)는 유럽식 특히 프랑스식 사유를 "하나의 점을 찍는 방식"이라고 말했다. 가령, 우리는 "비가 내린다" 혹은 "태양이 이글거린다"라고 말함으로써, 마치 "비"라든가, "태양"과 같은 하나의 점이 미리 존재하고, 그 점이 부슬부슬 내리거나 이글거리는 속성들을 소유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마치 손을 뻗으면 당장에라도 만질 수 있기라도 하듯. 선분은 점들의 집합이라고 생각하듯이 말이다. 그런 식으로 점을 찍고 나면 모든 술어적 관계들이 종속적으로 배열되어, 근원 또는 기원이 생기고, 제1원인이 탄생한다. 문장에서 주어가 술어들의 주체이고 세대주가 되듯이 말이다. 다수의 실질적 원인들을 거꾸로 뒤집어서, 그 결과를 맨 앞에 세우고는, 마치 그 결과가 원인인냥, 주인인냥, 전도된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거꾸로 내리는 비 혹은 타들어가는 태양이라도 된다는 듯이. 존재란 무엇인가? 자아인가? 감각인가? 물인가? 흙인가? 들뢰즈는 바로 이러한 종속적 사유를 관계판단의 논리로 은폐하는 영역이 바로 논리학이라고 말한다. 관계의 원인이 항들 내부에 배열되어, 하나가 다른 하나를 주관하거나, 제1의 원리가 되는 방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들뢰즈는 이러한 구조적 논리학을 넘어서 진정한 관계의 아상블라주를 위해 "등위접속사(그리고)"를 사용하라고 권한다. 등위접속사는 항들을 종속시키지 않고, 동등한 관계에서 공존하게 한다. 그것은 구조적 종속으로 관계를 판단하는 접속사가 아니라 파편들을 긍정하는 접속사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새롭게 등장하는 항들을 이전의 항에 대한(~ 에 의한, ~의) 관계로 배열하지 않기 때문이다. "A 그리고 B"에서는 관계의 원인이 항들 속에 있지 않다. 그 어느 누구도 제1원인이 되지 못하며, 다만 선후 관계 속에서 어느 것도 훼손시키지 않고, 공존 속에서 관계를 만들어낼 뿐이다. 그들의 관계는 관계하고 있는 항들 밖에 존재한다. 등위접속사 "그리고"는 미리 기획된 전체도 가지지 않고, 관계하고 있는 존재들을 종속시키지도 않고, 그들이 근접해 있거나, 그들 간에 선분이 그어짐으로써, 어떤 효과로서 전체가 발생한다. 이것이 바로 휘트먼(Walt Whiteman)의 "카탈로그"나 "행렬문장"과 같은 파편적 글쓰기가 예증해주고 있는 아상블라주(assemblage)이다. 그것은 하나이면서도 다수이고 다수이면서도 하나인, 결코 하나로 붙일 수 없는 것임에도 하나의 효과를 내고 있는 엠마(Emma)의 눈과도 같다.
그건 그렇다치고, 언젠가 내가 노트에 메모한 내용 중에, 바로 저 등위접속사를 "긍정의 접속사"라고 적으며, 그 예로 괄호 속에 이렇게 적은 것이 눈에 띄었다: "나 그리고 선인장!, 나의 선인장!" . . . 앞에 것은 이해가 되는데, "나의 선인장"은 왜 적었을까? 소유격 아닌가? 선인장은 나의 소유물이고, 나는 선인장의 주인이 아닌가? 긍정적 관계가 아니지 않은가?
지금 생각해보니, 아마도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며 저 메모를 했을 것 같다. 나는 물론 선인장을 소유하고 있다. 내가(더 정확히는 친구가) 비용을 지불하고 사들였기 때문에, 저 선인장은 내 소유로 된 방에 귀속되어 있고, 우리는 법적인 질서 혹은 여타 형태의 사회적 질서 속에서 소유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선인장의 존재의 원인은 아니지 않은가? 물이 컵에 담겨 있다고 해서, 컵이 물의 존재의 원인이 아니듯, 관계의 위계를 표상(representation)하는 종속이나 소유 형식이 관계 자체의 본질은 아니지 않은가? 오히려 자연 안의 모든 관계는 본질적으로 이미 긍정의 접속사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스피노자의 능산적 자연처럼, 자연은 다수의 종속적 관계 속에서도 여전히 하나의 공존의 관계가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나의 선인장"은 "나 그리고 선인장"이라는 긍정의 관계 위에서만 성립가능한 표상적 관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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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 '기생하는' 정신들? ^^ 아주 재밌고 그럴 듯한 표현입니다.
살짝'' 뜨끔하게 만드는 말. 근데.. '관계'라는 말이 굉장히 광범위 하잖아요.
인간 관계는 소통이다라는 전제 하에 독백도 소통의 방식이라고 한다면,
모노드라마에 도취되어 있는 현재의 내 모습도 관계의 그물 안에 있는 거 맞네요.
옛날(?)엔 온라인에서 Tit for Tat reciprocity에 의미를 둔 적 있지만서두..
지금의 제 경우는, '오프'에서 의미있는(의미를 두는) 관계만 '온'에서도 의미가 있고, '온'에서 시작하고 '온'으로 끝나는 관계는..내 '관계'의 범주에 넣고 싶지 않은데요. 온이나 오프나, 저의 personal space 밖에 있는 사람들은
저에겐 '관계'라기 보다는 '풍경'입니다. 마치 끊임없이 상영 중인 영화와 같은 풍경. 때때로 그 영화에 감정이입을 할 수도 있지만, 그걸 단숨에 끊어버릴 수도 있죠.
하지만, 위에 말했 듯이 불특정 관중을 향한 독백도 소통이라면 저도 분명히
인터넷 관계의 그물에서 자유롭지 못 해요,, 그렇다해도 무의미한 사람들의 피드백엔 무관심한 편.(많이 컷죠?) 외려 귀찮다고 해야 하나.
그러니까 관계로부터 '상처 받지 않기 위해서' 인터넷의 무작위한 관계망으로 빠져들 일은 없다(고 보죠).
.
관계라기보다는 '풍경'이다. . . 좋은 말이네요 . . .
다만 나 역시 그 풍경 속의 한 풍경으로 있는 그런 풍경이겠죠...
또 인터넷이 가상적이기 때문에 관계라고 말할 수 없다거나, 관계가 덜 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가상과 현실이 어떻게 다른지는 잘 모르겠고), 어쨌든 최소한 관계의 가능성은 우리가 알고 있고 기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관계를 비교적 쉽게 끊어버릴수 있겠죠. 영화관을 끊듯이 말이죠^^ 그런데 그건 현실에서도 마찬가지 같아요. 어쩔 수 없이 보고 살아야 하는 경우나 끊기가 쉽지 않을 뿐이지. 그리고 인터넷이 관계를 쉽게 끊어버릴 수 있다는 말은, 다르게 말하면 다시 쉽게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말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데. . .
"인터넷의 무작위한 관계망으로 빠져든다"는 말은 무슨 뜻인지 이해가 안 되네요? 보충설명 부탁 ~
무슨 질문일지 긴장하고 기다렸는데 연락 안주시네요 ^^
질문의 의지가 소멸된 것이거나 아님 말하기 귀찮아지셨거나 뭐 그런 걸로 생각되는데...맞나요?
그나저나 훈님은 무슨 일이 있으신가봐요.
관계망 속에서의 피로감과 시니컬함과 그것으로부터의 극복?^^ 같은 것들이 '나'라고 하는 지칭과 함께 토로되는 것이요.
저같이 극히 단순생계형^^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으로서는 사람 관계망에서는 초월할 것도 집중된 의지를 발휘할 것도 그다지 없어서인지 그 장소가 온이건 오프건 별반 다를 것도 없곤 한데... 다만 늘 약간 심심하다는 거만 빼면...바쁠 때도 마찬가지로 약간씩은 늘 심심하죠. 그래서 수다를 좀 떨긴 하지만 이 심심한 상태가 그다지 싫지도 않고....단 내 그 심심해하는 수다가 사람들에게 민폐가 되진 않길 바라기는 하지요.(특히 여기서요.딴데선 이런 신세진 듯한 느낌 갖는 곳이 없거든요. ^^여기 저기서 벌리느니 기왕 신세진 곳에서 신세지자는 게 제 식이라서요.ㅎ )
기운 좀 확내셨으면 좋겠어요.햇볓도 많이 좀 쪼이시구요 ^^
'다시 관계 속으로'는 매우 중요한 말로 들려요. 어떤 아이러니가 얽혀있다해도요...말씀대로 사람은 혼자 못사는 탓일테죠...
일산 호수공원을 잠시 갔다왔는데 사람들이 만원이더군요. 꽃잔치 중이라 만발한 튤립 꽃들이 열을 지어 만개중인데 높은 철망 펜스를 해놓아서 마치 대문간에서 가꿔놓은 남의 정원 들여다보듯하고 왔네요. ^^호수는 좋더군요.
숨겨뒀다가 조금씩 야금야금 꺼내썼으면 좋을 것 같은 날씨좋은 오월의 일요일도 저물어가네요.^^
그럼.
관계라는게 사람을 구질구질하게 하는 구석이 있다는 얘기 정도로 이해부탁 . . .넘겨짚지는 마시구요. .^^
제가 항상 말하는 것으로, 글 속의 '나'를 정말 '나'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제서야 말씀이지만, 글 쓸 때는 정신분열합니다. 그러니 글은 그냥 글로 이해해주십사^^
연락 안 드린 건, . .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겠다 싶었습니다. 직접 알아봐야 하는걸 엉뚱한데 대고 묻는 것도 좀 그렇겠다 싶더라구요. . . . 제가 궁금한건, 거기서 직접 사시거나 작업실을 가지고 있으신분과 얘기를 좀 하고 싶은데, 혹시 가능할지, . . . 그냥 일반 집 구하듯이 부동산에 알아봐야하는건지, 아니면 다른 효율적인 루트가 있는건지, . . 뭐 그런 궁금증이었습니다. 부담은 가지지 마시구요. . .
인터넷이 오로지 가상적이다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보이지 않고 닿지 않는 곳에 있지만, 그들도 나처럼 엄연히 존재하는 생명들이니까요. 하지만 나와 연관지어 생각할 땐 그 생명체들은 내게 '거의'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 않죠.
그러니까 백프로'가상'도 아니지만, <나의 현실>이라고 말 하긴 어렵다는 겁니다. 이를테면..
창 밖의 풍경이, 비록 나와 끊을 수 없는 생태계의 고리로 나와 연결되어 있지만
집 안에서 바라보면 그저 단순한 풍경일 뿐인 것처럼, 인터넷에 존재하는 사람들도 그런 의미로 풍경이구요.
쉽게 맺는 '인터넷-관계', 지금은 맺지 않죠 당연히.
쉽게 끊어질 것을 알면서 맺거나, 아니면 그걸 몰라서 맺거나.. 그런 행위는
'인터넷-유아기 단계(급조한 용어임)'에 하거나(했고), 아니면 상업적
목적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거나.
'인터넷의 무작위한 관계罔으로 빠져든다'란 말은, 개인 블로그나 홈페이지,
친목 카페등에서 랜덤으로 마주치는 타인들, 사적으로 거의 알지 못 하는 온라인 위의 사람들. 그들이 내게 일정 기간 주는 가벼운 관심이나 호감에 혹해서, 서서히 상상을 부풀려 가다가 종내는 어떤 기대를 하게 된다거나,필요 이상의 감정을 흘리는 일을 뜻해요. 설명이 충분한가 모르겠네요.
네. . 그래요 . .
가만히 생각해보면 인터넷이나 오프라인이나 큰 차이가 없어보입니다. 말씀 잘 하셨듯이, 풍경으로 치자면 오프라인도 마찬가집니다. 저 앞에 보이는 저 광장의 사람들 역시 온라인이 아님에도 제게는 그냥 풍경일 뿐이죠.
관계를 맺을 가능성은 오프라인보다는 온라인이 더 효과적이죠. 오프라인에서는 보던 사람들만 보게 되지만, 온라인에서는 아주 쉽게 누구와도 접속이 가능하죠. 아무도 안 만나는 것 보다는 더 나을 듯 한데.
사람들은 외로워 합니다. 공허하고 무료한 삶을 어떻게 보내야할지, 직장에서 돌아와서 뭘 해야할지, 소원해진 가족을 어떻게 회복할지, 아무리 무언가를 해도 채울 수 없는 허기 같은게 일상을 사로잡고 있죠. 이제는 가족이라는 개념도 거의 해체되고 있는 것 같아요. 삶을 의미있게 보내는 방법도 잘 모르고, 딱히 적절한 수단이나 권력도 가지고 있지 못하니까,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트위터나 페이스북이나 링킨 같은 미디어에 들어갑니다.
이전에는 블로그가 있었지만, 블로그는 글을 쓰고, 표현능력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재능이 있는 사람들의 전유물이었어요. 하지만 트위터나 페이스북은 그런 재능이 없어도 쉽게 사람들과 접속이 가능하고, 그걸 또 회사가 알아서 연결시켜 주더군요(소름이 끼칠정도로). 스토커처럼 개인의 접속정보를 뒤져가며 졸졸 따라다니는 페이스북을 저도 혐오하긴 하지만, 따지고 보면 사람들은 그래주길 원하고 있는 것 같아요.
어쨌든 오프라인이든 온라인이든, 관계에 대한 열망이 계속되는 한 공허한 일상의 공포 역시 계속되겠죠. 버려진 개인들의 멜랑꼴리라고나 할까. . .
하지만 거기서 뭔가 의미있는 걸 찾는다면 권장해야겠죠. 미디어 자체의 성격이 문제가 아니라 그걸 운영하는 자기 자신들이 문제가 아닌가 싶은데. . . .
털 가진 짐승은 모두 외롭습니다. 본디 외로움이 인간만의 숙명이 아니고, 게다가 이 땅의 사람 중 유독 나만 외로운 게 아니다..자각하면 외로움 받아들이기가 그나마 수월하더라구요. 감히, 외로움을 적극적으로
즐기고 있다 말 못 하지만서두, 소극적으로 수용할 순 있거든요.
외로움이든 뭐든, 자백하고 또 인정하면 맘은 한결 편하니까. 외로움을 부정하느라 쓸데없는 노력, 감정의 에너지를 쓸 일 없구 말이죠.
온라인에서 관계를 맺는 게 오프보다 효과적이다 하신 말씀엔 동의해요. 노력 대비, 상대적으로 효과적이죠. 하지만 오프의 관계는 지속성의 가능이 온라인보다 훨씬 높다고 봐야겠죠. 심지어 원치 않는 관계일지라도.
한 예로,불확정성이 내재된 온라인의 애인보다는, 물리적 거리가 가까운 오프의 끈질긴 혹은 무모한 도전자들에게 어드밴티지가 주어지니까요.
결과적으로, 온라인에서 효과적으로 쉽게 얻는 관계들은 오프에서 '근거리'을 수단 삼아 맺어지는 피동적/억지춘향 관계에 비교한다 해도, 온라인 관계가 '더 효율적'이라 단언하기 어렵습니다.
윗글에 언급하신 앙가주망의 환각. 트위터를 보니 정말 그러네요. 유명 작가나 배우들과 팔로잉/팔로우 관계를 맺은 후 마치 자신이 그들의 가까운 인맥에 포함된 듯 뿌듯한 환상을 갖는 심리나, 아리송한 이유로 자신의 팔로우 숫자가 속속 늘어는 걸 목격하며 자신에게 모종의 세력, 권력이 발생하고 있다 착각하는 심리가 엿보입니다.
페이스북은 주로 친구와 그 친구의 친구, 가족의 친구
이런 식이 주요 패턴인데 비해, 트위터는 완벽한 타인들끼리 서로 방어벽을 적당히 쳐 둔 채로, 허무하고 또 맹랑한 인맥, 일종의 심리적 권력을 찾아 헤매는 모습이 보여요..
'미디어 자체의 성격이 문제가 아니'라 하셨지만, 제 생각엔 그런 류의 미디어를 구상하고 프로그래밍 한 건 사람이니까, 그런 미디어 자체의 문제와 (운영하는) 사람의 문제를 별개로 구분하기가 좀 애매하다고 봅니다.
스토커같은 페이스북을 혐오하실 필요는 없을 텐데요.
페이스북은 원치 않는 타인을 '사전에' 봉쇄할 권리를 주거든요.
'버려진 개인들의 멜랑꼴리'라.......
하야간에, 가끔씩 기똥차게 멋진 비유를 하십니다.^^
페이스북이 혐오스럽다는 말은 단순히 개인적인 입장에서 한 말은 아닙니다. 회사가 사람들의 관계를 중재하는 방식과 그걸 실현하기 위한 발상이 그렇다는 겁니다. 물론 개인이 설정을 해서 블로킹 하면 되죠. 그러나 그 문제가 아닌겁니다.
다른 포털업체들도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제가 얼핏 생각하기에 페이스북은 일종의 방위산업체가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무기 생산이 아니라 정보생산 방위산업체 쯤 되려나? 더군다나 미국을 본부로 둔. 개인들의 정보를 어떤 방식으로 수집하고 기록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합법적인지는 정확히 따져봐야겠지만, 얼핏 보기에 그 회사가 하고 있는 짓은, 오래전에 푸코가 분석했던 바로 그 18세기적 테크놀로지를 현대적으로 완성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개인들을 분류하고, 사찰하고, 기록하고, 객체화하는것이 국가정보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기업이 하고 있는 겁니다. 최근에 불법사찰 얘기는 또 쑥 들어갔던데, . . .하기야 그게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있죠. . . 테크놀로지가 민간으로 확산되면서 테크놀로지의 민주화가 달성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시와 사찰의 주체가 기업화되어, 더 경제적이 되고 더 미시적이 된 거죠.
최근에 몇 몇 유명 엔터테이너들(개중엔 교수도 있고 작가도 있던데, 상관없이 모두 포함해서)이 해대고 있는, 정치도 아니고 연예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슨 인문학도 아닌, 코믹하기 짝이없는 쇼들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들은 그냥 순진한 좀비들일 뿐이죠. 그 몇 몇 좀비들 주변에서 성운을 이루고 있는 무수한 외로운 좀비들. . . 음. .
온라인에서 사람을 만나서 연애를 하든, 오프라인에서 추근덕거리든, 그거야 뭐 개인들이 알아서들 할 일이구요 . . . 온라인이 좋은 점도 있고, 단점도 있죠 물론, . . .예를 들면, 온라인은 효율적으로 관계를 맺을 수 있지만 감각이 제한적인 반면(주로 시청각과 상상), 오프라인은 만나기가 힘들지만(무엇보다도 걷거나 차타고 다녀야 하니까) 감각적으로 보다 다양하고 깊고 지속적이다 . . 등의 차이가 있겠죠. . .그렇다고 해서 온라인이 오프라인보다 덜 하다고 말할 수도 없겠죠. . . 제 말씀은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원하는 걸 취할 수 있고, 거기서 어떤 의미가 만들어진다면 뭐든 좋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나저나 관계 . . 뭐 이런 단어가 나오니까 눈이 반짝 뜨이시나보죠? 한동안 뜸 하시더니 . . .^^
'관계'.. 눈이 반짝 뜨인다니.. 살짝 놀리시는 뉘앙스.
살아있는 동안 관계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어디 있나요. 원하는 걸 취하고 어떤 (원하는)의미가 만들어진다면 온/오프 뭐든 좋다. 공감합니다.
온/오프 어디건 포만감은 없겠지만..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그리고 넓게는 살아있다고 느끼는 데에 꼭 필요한 것들..
온에선 지적욕구 충족이 쉽지만 접촉의 욕구는 채울 수 없고, 오프에선 그 반대로 지적욕구의 충족이 쉽지 않네요. 제 경우일 뿐이지만.
그러셨군요 ^^
원하신다면 오래 살면서 작업하시는 분 소개시켜드릴 수 있을 듯 싶은데.
작업실과 미술관을 거기서 하고 계신 분인데 전시 중이니 미술관 찾아가 연락하면 되거든요.
강화도에요.하지만 훈님께서 먼저 강화도가 맘에 있으셔야겠죠 ^^
전 뭐 개인적으로 (민통선 근처이긴해요)그곳이 좋던데 사람마다 취향은 다 다르니까요. 게다가 일반적으로 탈서울이 마냥 쉽진 않는 것 같기도 하구요.
그럼. ^^
제가 어째 미술쪽 분들과 인연이 있는것 같아요. . 예전에도 조각하시는 분과 친분이 있었는데, . . .
친구소개는 좋은겁니다.^^ . .
한번 자리를 마련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 미술관 구경도 좋구요.
아참, 그리고 제가 연락을 못드린건, 결정적으로 수강생명단을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