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에 해당되는 글 5건

  1. 2011/10/18 가시성의 역설 (2)
  2. 2010/08/16 찌질이들의 흉내
  3. 2009/06/12 공포의 축제 (2)
  4. 2007/05/13 기업주와 기자 (3)
  5. 2006/08/11 권력 혹은 기다림의 정의 (6)

자기 자신을 타인 앞에 또는 밝은 곳에 드러내거나 과시하는 것은 자신의 위상을 제한(혹은 부정)하는 역설적 상황을 초래할 수가 있다. 드러내 보임으로써 그 자신이 자아낼 수 있을 모든 신비한 가능성의 힘들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것이 푸코(Michel Foucault)가 지적했던 권력에 있어서의 “가시성(visibilité)의 역설”이다. 앙시엥 레짐(ancient regime)의 전제권력은 보여주는 일에 열정을 쏟아 부은 권력이다. 권력자는 자신을 과시하거나 과장해서 드러내기를 좋아하고, 우쭐해 하며 의기양양한 태도로 자신을 하나의 볼거리(spectacle)로 만들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호화의복, 궁중예식, 왕의거둥, 개선행렬, 공개처형 등, 재화의 엄청난 소비와 지출로 이루어지는 이 모든 비효율적 스펙터클은 그것을 바라보는 이들로 하여금 경이로움, 존경심, 또는 공포감을 일으키는 것을 목적으로 권력을 정복자로서 가시화한다. 대로의 밝은 빛 속에서 만인의 시선을 받으며 서 있거나 걸어가는 권력자는 자신이 바로 “그곳”에 있음을 표명했던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권력자의 이러한 가시성이 증대할수록 피권력자들은 어둠 속에 숨을 수가 있었다. 오히려 드러난 권력의 실체를 볼 수가 있어, 스펙타클의 애초의 의도와는 반대로 권력자의 무한한 권능에 제한을 가하는 결과가 일어난다. 권력자 자신이 스스로 공간과 시간이라는 한정된 조건에 방치됨으로써, 혹은 그 자신의 몸뚱어리가 하나의 사물로서 현시됨으로써, 무한의 절대성을 암시해야 할 권력은 오히려 상대적이고 제한적인 힘으로 하강하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잠재적 “권능(Power, Macht)”과 현실적 “물력(force, Gewalt)”의 역학관계—카네티(Elias Canetti)가 『군중과 권력』(Masse und Macht)에서 구분했던—가 그렇듯이, 힘이 비감각적이고 비실제적이 되어갈수록 그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는 넓어지게 된다. 아니 범위가 넓은 힘일수록 비감각적이고 비실제적이다. 가까이에 있는 힘일수록 그 지속력은 짧다. 먼 곳에서 가능성을 암시하는 힘은 그 반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절대성이란 보이지 않는 비가시성 속에서 현실화된다. 뚜렷이 보이거나, 가까이에 있거나, 언제든지 감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거나, 지시 가능하거나, 표현 가능한 것은 두려움을 갖게 하지 못한다. 단지 이미 사태의 종결이나 다름 없는 주체들의 치열한 행동과 그 행동의 결과들만이 현실을 설명해줄 뿐이다. 그 형태가 어떤 것이든 눈을 감고 잠들어 있는 순간에도 희미하게 아른거리는 존재만이 만인을 지배한다. 어떤 점에서 이것은 스피노자(Baruch Spinoza)나 사드(Donatien Alphonse François, Comte de Sade)가 생각했던 “자연” 혹은 “신”의 모습을 닮아있다. 상상 속에서 언젠가는 도래할 것이라는 막연한 암시로 불안은 존재를 잠식한다. 불안 그 자체가 존재인 것이다. 푸코는 현대적 규율사회의 가시성의 역전—시선 주체의 전도 혹은 가시성의 교환—을 지적했는데, 그것은 타자의 시선을 내면화하는 가운데 발생하는 불안의 잠식에 관한 문제였다. 더 이상 만인이 권력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내면적 타자로서의 권력이 만인을 바라보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권력은 언제나 현시한다. 언제 어디서든 머릿속에 떠오르고 나타나 주시하는 절대적 존재, 바로 이 가시성의 편재는 앞이 아니라 뒤에 임하는 것, 다시 말해 실제가 아니라 효과로서의 시선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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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퍼플코메디(purple comedy)라고 부르고 싶은 <하녀>를 발표한 임상수 감독. 수 년 전 그는 블랙코미디스러운 <그때 그 사람들>을 통해 권력의 이면 아니 정면을 잘 보여주었었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어째서 임상수 감독은 작품 속의 대통령 역으로 송재호 씨를 캐스팅 했던 것일까? 독선적이지만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 이미지가 지배적으로 만들어지고 조작되었던 박정희씨를 닮은 구석이라고는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 배우를 말이다. 예상과는 달리 그 작품에서는 성대모사도 없었고 흉내도 없었던 것이 의아스러웠다.

성대모사와 흉내가 가장 빈번히 그리고 가장 격렬하게 추대되는 곳은 다름 아닌 정치판이다. 그의 흉내를 내며 그 후광에 기생하려는 현실정치인들이 간혹 있었는데, 이들은 한결같이 어떤 사진 하나를 모사하곤 했다. 그 사진은 공공건물이나 학교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동네 이발소에서조차 어릴 적부터 보아오던 것이었다. 한때 얼굴이 약간 비슷하다고 알려진 어떤 정치인은 선거 기간 내내 그 사진의 모습과 똑같은 구도로 카메라 앞에 서서 목에 부목을 한 것처럼 힘을 주고 다니곤 했다. 단정하게 빗어 4:3 비율로 가림마를 넘긴 특유의 각진 헤어스타일, 정면을 보는지 측면을 보는지 아니면 어떤 대상을 주시하고 있는지 조차 꼬집어 말할 수 없어서 뚫어지게 살펴보면 약간 사팔뜨기 끼가 있어 보이는 모호한 시선(이것이 권력이다!), 윤기가 흘러 빛을 반사하는 듯한 이마와 콧 잔등, 살짝 다문 입술과 돌출한 듯한 입, 작지만 단단해 보이는 얼굴 윤곽선, 야무지게 달려있는 귓 볼, . . . 모든 가치들이 융합되어 있는 듯 하면서도 아무 가치들도 없는 듯한 이미지.

임상수 감독이 인물 캐스팅을 그렇게 한 이유가 코메디였기 때문이었을까? 코메디였다면 더욱 더 비슷한 이미지를 도입했어야 하지 않을까? 오히려 원본보다도 더 원본 같아 원본을 능가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더라면, 그 과장과 왜곡이 풍자를 실감나게 했을 것이다. 위에서 말한 그 정치인이 이에 해당한다. 그는 원본을 능가하여 원본을 닮고자 했기 때문에, 즉 그 자신을 지우는 과정이 그를 코믹하게 한 것이었다. 닮아가고자 애를 쓸수록 처음의 의도와는 달리 원본은 희화화의 가능성이 커진다. 어쨌든 임상수의 작품이 일종의 코메디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부적절한 캐스팅의 이유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추측으로 미루어 보건대, 임상수가 의도했던 것은 권력의 '아이콘'은 아니었던 것 같다. 닮은 모습이란 본질적이기 보다는 신비화되거나 주어진 이미지일 경우가 많다. 그것은 복원이라는 목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며, 복원은 반드시 복원해야 할 이유를 가진다는 점에서 본질이나 실상과는 멀어질 수 밖에 없다. 수많은 역사드라마나 상업 주류 영화의 인물들이 중압감 있는 대사와 자세를 취하는데도 불구하고, 그 무섭게 부라리는 눈매 이면에 항상 코믹한 요소를 빠지지 않고 실어나르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이것이 기호로서의 아이콘의 운명이다. 아이콘은 닮음이 아니라 오히려 원본의 부정에 가깝다.

임상수가 원했던 것은 물론 아이콘이 아닌 '권력의 실상'이었을 것이다. 어떤 실상? 다시 말해 어떤 권력? 그가 생각한 권력은 나쁜 권력도 아니고, 포악한 권력도 아니고, 사디즘도 아니고, 잔인한 권력도, 냉담한 권력도 아니다. 비판과 비난을 받는 동안에도 어떤 위대함을 머금고 있는 그런 권력이 아니다. 그렇다고 친숙하고 자상한 권력 역시 아니다. 그런 식으로 극화된 권력이 아니라 찌질한 권력! 이것이 임상수가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즉 어떤 막연한 추상으로서의 권력이 개인을 통해 육화할 때, 아니 개인이 그 권력을 모사하고 재현하고자 할 때, 그것이 얼마나 유형적으로 물화가 되어 지질한 행태들로 변질되는지를 말이다. 그 행태를 열거하기란 얼마나 쉬운가! 건설업계 똘마니들을 법적으로 비호해주고, 그 댓가로 초중고 학부모들이 자식을 잘 봐달라며(아이러니하게도!) 담임선생들에게 주는 용돈보다는 조금 더 많은(학군에 따라 다를 수도 있지만) 금전의 비호를 받으며, 잘나가는 딴따라 여가수를 불러 앉혀 놓고 치마 속에 손을 넣어가며, 양주를 홀짝이며, 술에 취해 풀린 눈으로 징징 거리는, 소위 술집 여종업원들의 용어로 말해, "일반인 보다 더 난해하게 놀아대며," 그 댓가를 물건들로 교환해버리고 마는 찌질하기 그지 없는 권력. 임상수가 본 권력은 코웃음 밖에는 터져나올 수 없는 그런 성질의 하찮은 것이었다. 말할 수 없이 지리멸렬한 분위기의 배우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때 그 사람들>에서는 우스꽝스럽고도 찌질한 권력의 실상이었다면, <하녀>에서의 권력은 직접적으로 모방권력, 즉 흉내와 연기로 재현하는 권력을 향해 있다. 권력의 흉내는 우선 제스쳐들을 통해 육화된다. 미디어에서 그리고 그것을 따라하는 일반인 찌질이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일명 법조계의 제스쳐가 좋은 예이다. 똘마니들 앞에서 비만스러운 커다란 덩치를 이리저리 흔들어가며 걷는다든가, 윗 저고리가 반쯤은 벌어질 만큼 배와 가슴을 떡하니 내밀고 앉아 몸으로 말을 하고 싶어 한다든가,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는 부하 찌질이들을 좌우로 내려다보며 거만하게 훈시를 내리는 포즈를 취한다든가, 손가락질 하나로 사람을 부른다든가. 이러한 모든 양아치스러운 제스처와 포즈는 지배력을 '보여주기' 위해 혹은 '나타내기' 위해 저변화되어 암암리에 '학습받은' 것으로, 마치 신분을 나타내는 이름표와도 같다. 권력을 암시하는 제스쳐를 취하는 순간, 즉 이러한 이름표를 다는 순간, 익숙하게 보아온 어떤 전도가 일어난다. 역할을 부여받은, 그것도 매우 잠시동안, 폼잡고 사진 한 방 박을 새도 없이 임시로 위임된 지위가, 어느새 어떤 힘을 스스로 생산하는 것처럼 보이는 권력이 된다. 권력이란 흉내, 즉 물화된 형상을 통한 연기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소품들, 전시물들, 전리품들 같은 것이 필요해진다. 이정재 분이 홀짝이던 와인이나, 아침마다 두들겨대는 여유로운 피아노, 가정부에게조차 요구되는 하이힐과 정장, 엄격한 식사시간, 널직한 소파와 같은 것이 그것이다. 그러한 소품들은 이정재 분의 우악스러운 눈매나 인상착의, 무엇보다도 부잣집 아들이라는 선천적-사회 계급에서 흔히 느껴지는 코믹스러운 안하무인 무지막지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걸쳐져야 할 예복의 기능을 한다.

권력과 똘마니의 관계는 관력관계가 아니라 계약관계이다. 둘 모두가 계약의 주체가 되어 서로 종속되어 있는 것이다. 위험성의 정도를 따지자면, 실은 그 관계는 뒤바뀌어 있기조차 하다. 말하자면 그들의 관계는 "권력이 똘마니를 비호하는" 구도가 아니라, "물주에게 고용된 깍뚜기 혹은 기둥서방"의 구도와 같다. 스폰서라는 용어가 이를 잘 말해준다. 흔히들 공정하고 자유로운 경쟁을 부르짖으면서도 약육강식의 사회를 묵인하고 따르는 경제적 이율배반 속에서, 사업을 하려면 법의 비호를 받아야 하는데(그런 점에서 법이란 상부구조가 아니라 순수하게 하부구조적이다), 그러려면 법-물리적 수단으로 비호를 해주는 장정에게 술도 사주고 떡값도 주어야 할 것이다. 개인들이 누리는 권력의 실체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잠시 술잔을 기울여 와인을 홀짝이며, 혹은 다리를 뻗고 소파에 누워 있는 동안 두 손을 모아 와인을 따라주는 정장차림의 가정부를 바라보며, 자신이 무엇인가를 닮은 것 같은 느낌에 도취된 쾌감. 힘 혹은 역량이 특정 개인에 의해 물화(物化)될 때, 그것은 권력이라는 이름으로 이렇게 찌질하고도 코믹한 흉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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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생긴 이래 권력은 항상 공포를 이용하여 대중 다수를 통제해 왔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공포를 이용하기도 했고, 초자연적이고 주술적인 공포를 이용하기도 했고, 인간에게 보편적인 죽음의 공포를 이용하여 구원과 처벌이라는 허구로 인간을 다스리기도 했다. 어떤 점에서 인류의 역사는 공포와의 투쟁의 역사라고 할 만큼, 인간은 자신을 위협하는 그 어떤 무시무시한 것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느 정도 알게 되었듯이, 인간을 괴롭히던 그러한 공포들은 죄다 우리 자신 안에 있는 무지와 왜곡된 마음 때문이지, 실제로 자연적 공포나 초자연적 공포 혹은 사후세계가 객관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현대가 되면서, 인간은 과학적으로 자연을 보게 되었다. 즉 자연이 살아서 우리에게 벌을 주고 상을 주는 식의 인격을 갖춘 존재로 더 이상 생각하지 않게 된 것이다. 인간은 자연을 객관적이며 수학적으로 파악하였고, 무엇보다도 자연을 사물(things)의 질서로 바라보게 되었다. 그래서 자연은 계산과 예측이 가능한 그냥 사물들의 배열이고 관계일 뿐이다. 물론 자연은 아직도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떤 무시무시한 피해를 준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자연에 어떤 죄를 저질러서가 아니라, 어떤 질서의 변화를 아직 우리가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 데에 기인할 뿐이다. 자연의 공포는 우리의 죄나 부도덕이나 사악함에 대해 하늘이 내리는 벌이 아니라 단지 재해이고 재난일 뿐이다. 자연을 맹목적으로 믿지 않게 되자, 우리는 자연으로부터 공포를 물리칠 수 있게 된 것이다(이 몰-공포가 우리를 더 파멸시키는 요인이기도 하지만).

따라서 어떤 점에서 과학적 지식의 진보는 무엇보다도 인간이 공포를 이용한 정치적 탄압으로부터 해방되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자연이나 초자연적 혹은 사후세계를 운운해서는 더 이상 공포감을 줄 수 없고, 유식하고 두려움이 없는 사람들은 더 이상 시키는 대로 복종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현대는 새로운 형태의, 더 많은 종류의 공포를 탄생시켰다. 다른 인종에 대한 공포, 다른 국가에 대한 공포, 다른 계급에 대한 공포, 다른 인간에 대한 공포, . . . 이들은 모두가 적에 대한 공포이며, 이는 다름아닌 차이에 대한 공포이다. 차이에 대한 공포는 우리를 자기중심적으로 고립하게 하고, 불화를 삶의 조건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나와는 다른 존재를 불편해 하는 우리의 삶은 항상 불안하고 무섭다.

현대 산업사회는 인간이 살면서 필요한 물건만 대량 생산한 것이 아니라 아이러니 하게도 빈곤에 대한 공포 역시 대량생산 하였다. 굶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공포가 백화점 쇼윈도의 휘황찬란한 상품들의 퍼레이드 가운데 대기 전체에 퍼져 있다. 이 공포 덕분에 우리는 하루 10시간 이상을 기계처럼 일을 한다. 일이 보장해주는 먹을 것 때문에 공포가 사라진 것인지, 아니면 정신 없이 일을 하다 보니 잠시 잊어버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상하게도 고된 노동은 우리를 편안하게 해 준다. 편하게 쉬는 것이 오히려 불안하고 무섭다.

이 뿐만이 아니다. 최근 들어 인류는 핵의 공포, 범죄의 공포, 미국 발 테러의 공포(즉 테러의 테러)에 휩싸여 있다.

과학이 진보하고 현대적 생산방식이 우리를 자연으로부터 어느 정도 해방시킨 지금에도, 여전히 공포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 지금은 초자연적이고 종교적인 공포가 단지 개인적으로만 잔존하고 있지만, 여전히 사회적 정치적 공포는 대중 다수를 사로잡고 있다. 그리고 그들을 사로잡는 공포들 대부분은 여전히 어떤 보이지 않는 권력과 특정한 세력의 허구의 산물이다.

지난 주 까지만 해도 우리는 보내기 아까운 지도자를 잃어 비통해 했다. 하지만 국화꽃과 향불의 향이 아직 가시지도 않던 와중에, 다른 한 편에서는 그 애도와 슬픔에 찬물을 끼얹듯 서서히 닥쳐온 두 개의 공포가 있었다. 하나는 우리를 단결하게 하는 공포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를 흩어지게 하는 공포이다. 전자는 핵의 공포, 아니 더 정확히 말해 이데올로기 빨갱이 공포라면, 후자는 바이러스의 공포이다. 이들이 점점 강하게 다가온다.

전자는 해방 이후 남한의 태생적 빨갱이 혐오증이 만들어낸 공포이자, 그 이후 군사정권이 가장 심도 있게 창조해 왔던 공포이다. 이 공포는 법에 의해 이미 합법화된 형식의 공포이기도 하고, 심리적으로 볼 때 뿔 달린 괴물의 이미지로 수십 년 간 분위기를 조성해 온 관계로 아주 잘 먹히는 공포 중 하나이다. 이들에 관련된 색과 단어들에 대해 반응하는 몇 몇 사람들을 보면 거의 파블로프의 개 수준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로. 이 공포는 우리 자신이 아닌 적을 향해 단결하게 한다. 즉 흩어지면 죽고 뭉치면 사는 것이다.

반면에 후자는 오래 전부터 인류를 괴롭혀 온 공포이긴 하지만, 현대의 미디어와 결합이 되어 지금은 가장 막강한 신종 공포가 되었다. 이는 어쩌면 다른 모든 공포의 메타포일 수도 있는 공포이며, 그렇기 때문에 SF 영화라든가 소설의 주요 소재가 되고 있는 공포이기도 하다. 그러나 믿지 않을 수 없게도, 이것이 과학적 발견의 산물이라는 데 문제가 있다. 우리는 주술가가 말하는 귀신이나 성직자가 말하는 사후세계를 믿지 않을 수는 있지만, 바이러스를 믿지 않을 수는 없다. 과학이 종교가 된 현대에, 과학자나 의사들의 선언을 뿌리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바이러스는 다른 공포와는 달리 그 실체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아니 과학적으로 존재하는 인류의 보편적 공포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바이러스 역시 정치 권력의 손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권력이 바이러스를 만들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자연적으로 발생한 바이러스 조차 권력은 정치화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바이러스에 대한 인간의 행동을 생각해보라. 바이러스는 가장 훌륭한 통제의 수단이 된다. 바이러스는 우리를 흩어지게 한다. 즉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 바이러스는 인간들의 불신과 냉소와 경계의 천연 자연적 조건 같은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공포를 부추기는 권력은 그 자체가 하나의 공포였다. 적이 쳐들어 오면 내가 너희를 지켜 줄께! 네가 다치거나 나쁜 일이 생기면 내가 막아 줄께! 굶어 죽지 않도록 내가 보호해 줄께! 배려와 보호의 이름으로 사람을 무섭게 하면서, 배려와 보호의 필요를 역설하는 권력은 그 자체가 공포였다. 제대로 된 어느 부모도 아이에게 두려움을 심어가며 자신의 필요를 역설하지는 않는다. 한국에는 두 가지 고질적인 공포가 있었다. 경제라는 이름으로 무의식적으로 내면화한 빈곤의 공포가 하나이고, 체제 안정이라는 이름으로 심리화된 붉은 색에 대한 공포가 다른 하나이다. 전자는 줄곧 있어 오다가 최근엔 더 강화가 된 반면, 후자는 한 동안은 잠잠했던 공포이다. 그런데 최근에 우리는 신종 바이러스라고 하는 또 하나의 생물학적 공포와 아울러, 계속 있어왔던 빈곤의 공포의 강화, 그리고 잠시 사라졌었던 붉은 색의 공포의 귀환, 이 모든 유령들이 다시 떼를 지어 출몰하고 있음을 느낀다. 우리는 이제 초자연적, 종교적 공포를 지나, 과학적 공포, 사회적 공포, 이데올로기 공포, 경제적 공포의 블랙홀로 빨려 들어간다.

비통함이 분노로 치닫기도 전에, 어쩌면 가장 견고하게 뭉쳐야 할 이 때, 한 편에서는 분노의 대상을 엉뚱한 곳으로 돌리고 있는 공포가 북쪽에서 불어오고 있고, 다른 한 편에서는 광장 공포증에 버금가는 위력으로 우리 모두를 각자만의 방안으로 흩어지게 하는 공포가 서쪽에서 불어오고 있으며, 우리 내면에서는 굶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빈곤에 대한 공포가 우리를 다른 생각 하지 말고 작업장으로 가도록 채근한다. 모일 수도 없고 흩어질 수도 없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이 삼중구속 하에서 공포에 질려 새파란 입술로 얼어붙을 판이다. 이 세 가지의 다중적 공포가 재료가 되어 앞으로 어떤 작품들이 만들어질지 주목해보자.

Posted by huun

대단히 엉뚱하게도, . . . 대기업 회장이 자신의 아들과 함께 망나니 같은 폭력을 휘둘렀다고, 기자들 및 언론은 의기양양하게, 할 일을 했다는 듯!, 협잡의 화신인 경찰까지 조심스럽게 질책해 가면서, 목청을 높인다.(곧 있으면 잊혀지겠지만)

상당히 못마땅하고, 걱정스러운 것은, . . . 물론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저렇게 비본질적인 주제에 대해 호들갑을 떪으로써, 공사(公私) 구분 못하는 한 망나니 업주의 사건을 마치 한국 사회의 기업인과 기업 그리고 그 권력의 문제를 폭로하고 고발하고 있는 것 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보라! 이제 기업 권력도 잘못하면 단죄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업주의 특정 일탈 행위에 찍은 방점에 머물러 버림으로써, 오히려 한국 사회 내에서의 기업적 권력의 구조와 본질이, 조폭과 무고한 소시민이라는 신파적 상상의 권력관계로 또 다시 슈거코팅(Sugar Coating) 되어 버리는 것 같아 못마땅하다. 항상 느끼는 바이지만, 기자들과 언론의 사색 능력으로는 결코 과학적 본질을 지각할 수 없는것 같다. 과학은 엄청나게 좋아하면서 말이다. 바로 그 권력의 이데올로기에 젖어 교육을 받고, 그 권력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선발되어 취업을 하고, 그 권력의 이데올로기로부터 월급을 받아, 그 품에서 행복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인지. . . . 문제는 특정 기업인에 대해 가끔씩 터트리는 일탈(편법 자금, 불법 증여, 탈세, 자질구레한 폭력들. . )이 아니다. 그러한 것들은 지저분한 결과들일 뿐이며,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본질을 제대로 볼 수 없게 하는 연막이 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기업과 기업주들에게 느끼는 반감이나 적대감은 막연한 형태의 느낌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 실체가 막연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 느낌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가늠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사람들은 욕을 하고 손가락질을 하면서도, 술자리에서 일어나 무기력의 우울감을 짊어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막연한 감정과 분노로는 해결가능성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참담한 심정으로 아침에 일어나 신문을 주어들고는 가시적이고 분명하게 보이는 스캔들 속에서 그 원인을 찾고 싶어한다. 가령, 어떤 기업인이 무고한 시민에게 권력을 이용하여 폭력을 썼다든지, 법적 절차를 무시하고 불법적으로 재산을 증여했다든지, 회계 장부를 이중으로 기록했다든지 하는 식 말이다. 하지만 그러한 방식의 관점에 고착되어 있으면, 기업 권력의 문제는 해결될 수 없고, 반감은 더욱 모호한 감정으로 발전하게 될 소지가 크다. 우리는 사회의 안녕을 위해 일탈과 범죄를 근절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을 가만히 따지고 보면, 일탈과 범죄는 근절되어야 할 것이기 보다는, 사회의 특정 권력이 유지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유산균 혹은 가끔씩 재접종이 필요한 불주사(BCG) 같은 것이다. 범죄가 저질러지고, 그것을 법의 이름으로 처벌할 수 있는 힘이 대중들에게 있다는 확신을 갖게 해주는 것만큼 사회 권력을 공고히 하는 좋은 방법은 찾기 어렵다. TV나 신문에 소개되는 다큐멘터리 같은 화질의 범죄현장과 고개숙인 범인들을 눈쌀을 찌푸리며 바라보면서, 묘하게도 우리가 취하는 태도는 건전한 사회와 건전한 인간의 존재를 확신한다는 사실이다. 맨눈으로는 볼 수 없는 저 외계의 끔찍한(그래서 항상 모자이크 처리되는) 어떤 것 때문에, 오히려 그것을 바라보고 비난하고 단죄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현재의 우리 자신, 그리고 저들 부정적인 인생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은 현재의 우리 자신에 안도감을 갖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기업주가 권력을 이용해서 아들을 위해 폭력을 사용한 사건이 저렇게 들뜬 어조로 보도가 되는 가운데, 우리의 귓가에는 아주 조용히 다정하게 속삭이고 있는 은밀한 목소리가 들린다. 그것은 바로 "존경받는 기업주", "자본의 선용", "덕망있는 권력"과 같은 신화가 혹시나 실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라고 하는 환상이다. 기업주 자체, 자본 자체, 권력 자체를 결코 바라볼 수 없게 하고, 문제삼을 수 없게 하는 언론의 저 달콤한 부정은, 우리의 뇌리에 꾸욱 자국을 남기고는, 나약해진 우리의 육체와 정신에 가끔씩 출몰하는 상상적이고 허왕된 어떤 바램들이 실현되기라도 할 것처럼 우리를 기만한다.

지식인들이 해야할 역할은 사람들의 막연한 반감을 보다 과학적이고 첨예한 본질적 문제들 쪽으로 제시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대중들의 모호한 느낌이 예리해지고, 그 날카로운 정신을 문제 해결의 수단으로 발전시킬 수가 있다. 그랬을 때 비로소 우리는 무기력과 절망을 넘어선다. 그런데 기자들이나 언론 전체가 바라보고 있는 관점과 문제의식은 언제나 문제를 더욱 더 모호하고, 감정적이고, 신파적인 대립구조 또는 일탈적 범죄들로 몰고 간다. 문제를 사정없이 망치고 있는 것이다. 기자들과 언론은 여러가지 방법으로 어김없이 우리를 실망시킨다. 그 단순한 시각이 너무 시시해서 실망하고, 이해의 깊이가 너무나 떨어져서 실망하고, 때로는 경찰이나 업주들처럼 협잡꾼의 미소를 보는 것 같아 실망하고, 간혹 오버해서 짜증이 나고, 이런 저런 이유들로 우리의 양 미간은 여지없이 구겨진다. 물론, 저 사건은 근본적인 권력의 한 결과이므로, 당연히 처벌해야 하고, 만인에게 그 사실이 폭로 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언론은 언제나 그 수준에 머물러 있다. 그렇기 때문에 몇 주가 지나면, 아무도 그 사건을 기억하지 않고, 또 시간이 지나면 동일한 사건들이 생겨난다. 기업과 업주의 근본적인 문제는 특정인의 일탈과 편법과 부패가 아니다. 문제를 그런 식으로 개인화하고 삼류 영화 구도로 만들어 버리면, 본질을 드러내는 것은 고사하고, 실상을 왜곡만 할 뿐이다. 속빈 냄비처럼 호들갑을 떨어 실상을 스캔들로 만들어 버리는 철딱서니 없는 보도가 아니라, 냉철하고 진지하고 진정성이 있는 보도를 하길 바란다. 기업주의 악덕이 아니라, 기업주 일반의 본질을 드러내는데에 까지 나아가야 한다. 다시 말해, 기업주는 정당한 존재인가? 기업주가 이 사회에 필요한가? 한 개인의 저러한 엄청난 사회적 부(富)를 인정해야 하는가? 한 개인이 저와 같은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은 어떤 것인가? 해결 가능성이 있는가? . . . . 와 같은 방식의 질문과, 그 질문의 해답을 찾는 기사를 쓰는 것이 보다 본질에 근접한 접근법이 될 것이다. 물론 선결조건으로, 자신이 그러한 질문으로부터 자유로워야겠지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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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과 얘기를 해 보면 그 자신도 모르게 내뱉는 어색한 단어나 말버릇 등을 발견하게 된다. 한 때, 정신 분석가들은 이러한 단어나 버릇을 가지고 그 사람의 무의식을 아우르려고 했다. 그들은 이를 징후(symptom)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런데 이 방법은 꽤 설득력이 있었다. 말을 실수한다든가 아니면 그 자신(의식)도 모르게 비집고 솟아오르는 이미지들의 표현을 가만히 살펴보면, 그가 의식적으로 만들어내는 언어의 표면 아래에서 실제로 그를 지배하고 있는 어떤 욕구 혹은 억압을 포착할 수가 있다. 이 욕구나 억압을 잘 숨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서투른 사람도 있다. 또 우리는 서투르긴 하지만 저와 같은 방식에 따라 경험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읽기도 한다. 그 징후라는 것은 바로 그 사람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혹은 무엇을 싫어하고 있는지, 혹은 무엇에 두려워하고 있는지, 혹은 무엇이 그를 저렇게 만드는지 엿볼 수 있도록 해주는 일종의 틈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권력을 하나의 실체로 엿볼 수 있게 해주는 징후 즉 틈새가 있다. 바로 몸과 그 포즈이다. 진정한 권력이란 의식을 사로잡기 이전에 몸을 지배하는 과정으로부터 나온다. 그래서 우리는 언어나 의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우선적으로 몸이 반응함으로써 권력에 화답한다. 권력을 이렇게 정의해보자: 두 손을 모으게 하거나, 머리를 숙이게 하거나, 들어가기에는 너무나 비좁은 곳으로 내 몸을 몰아세우는 힘. 반복하고 싶지 않은 경험을 가능케하는 힘. 내 몸을 무(無)의 상태 쪽으로 몰아가는 힘. 나아가 나의 존재를 스스로 객관화하여 반성하게 하는, 즉 정신을 불러들이는 몸의 상태 혹은 그 자세. 이쯤되면 헤겔이나 사르트르나 푸코 등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너무 복잡하게는 생각하지 말자. 정신이나 시선(視線)과 관계하는 권력에 대하여 그들의 말을 간단히 요약한다면, 권력이란 "나의 존재를 나 자신으로부터 발견할 수 없게 하는 힘" 혹은 "나의 고유한 본성이 나 자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른 어떤 것에 의해 정의되게끔 하는 힘", 좀 지나치게 단순히 말해 "나를 종속시켜 노예로 만드는 힘"이다. 어쨌든 우리의 몸은 의식이 눈치채지 못하는 경우에도 더 빠르고 섬세하게 그 무지무지한 힘에 반응한다. 한 예로, 찰리 채플린은『위대한 독재자』라는 영화에서 몸과 권력의 관계를 의자의 높이로 표현한 적이 있었다: 히틀러는 자신을 방문한 무솔리니의 의자를 자신의 것보다 낮게 함으로써 위계에 관한 암묵적인 동의를 강요한다. 물론 무솔리니가 뚱뚱한 몸에도 불구하고 이를 잘 간파하였으므로, 히틀러의 교활한 술수는 실패하고 만다. 누구든지 자신보다 사회적으로(외면적으로) 더 큰 힘을 가진 사람과의 대화를 상기해 보자. 내 몸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 어떤 포즈로 있는지를 떠올려 보자. 그러면 이 말뜻을 잘 알게 될 것이다.


권력을 환기하는 몸의 포즈들 중 일상 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예가 바로 기다림이다. 기다리는 사람은 언제나 머리를 숙이고 있다. 절망으로 무너진 사람, 궁금해서 두리번 거리는 사람, 화가 나서 눈을 부라리는 사람, . . . 이들은 모두가 고개를 숙이고 기다리는 자신과 기다림의 대상 사이에서 서성이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는 자신으로 되돌아갈 수도 없으며, 기다리게 하는 그것에 치달을 수도 없다. 기다림이란 자신으로부터 빠져나가 버린 영혼이 어디로든 갈 수 없는 상태, 말하자면 연옥의 기로에서 배회하는 부랑아의 포즈라고 말할 수 있다. 이미 기다림이 시작되면 더 이상 선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기다릴 것인가 기다리지 않을 것인가의 문제는 나의 몫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기다리게 하는 그의 특권이다. 묘하게도 기다림의 주체는 기다리는 자가 아니라 바로 그 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기다림이란 언제든지 하나의 권력과 같은 형태로 경험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홍상수의 영화를 보면 인물들이 언제든지 무엇인가를 혹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전화를 기다리거나, 학과장이나 교수가 전화를 끊기를 기다리거나, 약속시간을 기다리거나, 아직 나오지 않은 사람을 기다리거나, 동사무소에서 공무원의 대답이나 결정을 기다리거나, . . . 한이 없다. 우리는 모두가 기다리는 자이거나 기다리게 하는 자이다. 그러다가 화가나면 강원도로 춘천으로 부산으로 경주로 여행을 하거나, 다른 누군가에게 가학적이 되거나, 배회하거나 배신을 한다. 홍상수의 영화에는 대략 네 사람이 등장하는데, 여행하는 사람, 배회하는 사람, 가학적인 사람, 그리고 배신하는 사람이다. 기다리게 하는 사람은 무엇인가를 쥔 사람이며, 기다리는 나는 그것을 욕망 하는 사람이다. 그 출처가 더 이상 나에게 속하지 않은 저당잡힌 욕망! 이것이 기다림의 정의이다. 우리가 기다리면서 화가 나는 이유는 그 시간이 지루하거나 아깝기 때문이 아니다. 복종해야만 한다는 사실! 이미 복종이 시작되었다는 사실! 기다림 속에서 이미 하나의 위계적 질서를 수긍하도록 하는 힘이, 마치 닿고 싶지 않은 어떤 몸뚱아리가 슬며시 내 몸으로 다가오듯, 나를 누르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 불쾌함이 견딜 수 없는 것이다.

<문예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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