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시, 비유, . . . 이들을 사랑에 빠진 자의 언어가 짜놓은 무늬라고 정의해보자. 그리고 그들을 통틀어서 문형(文形, figure)이라고 불러보자.
― 사랑에 빠진 사람의 언어에는 언제나 “나”가 등장한다. "나", "내가" 화자가 됨으로써, 형태상 전면에 부각된 나! 그러나 사실상 나는 가장 깊숙이 그러나 가장 가까이 숨어버린다. 어째서 '내'가 화자가 되어야 하는가? 사랑의 이야기 속에는 왜 내가 복귀되어야 할까? 가장 구체적인 존재로서 나 만큼 사랑을 말할 수 있는 주체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사랑에 빠진 모든 언어의 근본적 시점은 일인칭 화자이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 사랑에 빠진 나는 내 앞의 모든 것들을 극화(劇化, dramatization)하기 시작한다. 또 그래야만 가장 잘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주인공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혹은 그녀와 관계하는 다른 많은 인물들, 이들(간)의 감정들, 몸짓들, . . . 아주 복잡한 실재가 가지런히 정돈되기 시작한다. 이야기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 모든 감정과 인상과 몸짓들을 표현할 수 있을까? 주인공이 없이 어떻게 이 모든 이야기들을 이끌어 나갈까? 이 지루한 시간을 구원해주는 것은 오로지 이야기 뿐. 또 이야기는 이 지루한 시간 자체를 고스란히 느끼게 해줄 것이다. 나는 맨 앞에서 말하는 화자이며 동시에 어디에서든 현존하는 주인공이다. 그런데 극화하는 화자로서, 그리고 극화된 주인공으로서 나는, 오히려 그것 때문에 가장 깊숙이 숨지 않을 수 없다. 모든 것들이 살아 있으니, 나 역시 움직이지 않을 수 없지 않은가! 도대체 내가 있는 곳은 정확히 어디인가? 사랑에 빠진 사람! 글을 쓰는 사람! 이들은 모두가 길을 잃은 자들이다.
― 사랑에 빠진 사람은 감동하거나 좌절할 때 언어를 찾는다. 갑자기 그의 연상에 떠올려진 연인의 미소 때문에, 아니면 더 이상 몸속에서 팽창하고 있는 기운을 가눌 수가 없어서, 그래서 또한 이리저리 이 방 저 방을 배회하다가, . . . 로테를 사랑한 베르테르를 보라! 갑작스런 언어의 분출은 그를 수다쟁이로 만든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언어로의 분출이라고 말해야 할까? 무엇인가 밖으로 빠져나가거나, 아니면 무엇인가 갑자기 혹은 우연히 안으로 난입해버린 것이다. 베르테르의 수많은 편지들! 문형에 관한 모든 문제들은 여기서 시작된다.
― 문형은 산채로 포착된, 생포된 말들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으며, 그 무엇으로 귀속되지도 않는다. 다만 살짝 숨어서 단 한번만 엿 볼 수 있을 뿐. 문형을 한 폭의 이미지로 말해야 한다면? 부서진 몸짓들! 숨어 엿보기 때문에, 그리고 아주 가까이서 보기 때문에, 모든 것은 부서진 채로만 보인다. 가령, 누군가 숨어서 베르테르의 좁다란 방을 엿본다고 해보자. 이리저리 방황하는 몸짓을. 혹은 그의 편지를 훔쳐본다고 해보자. 그 횡설수설하는 말들을. 꿈틀거리는 존재는 한꺼번에 너무나 많은 것이 이리저리 너저분하게 어질러져 있다. 그래서인가? 생명 앞에 선 지성은 한 없이 부분에만 고착한다. 그렇기 때문에, 지성을 소유한 존재는, 사랑에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를 엿보는 자 역시, 밀도가 낮은 그물망처럼 아주 많은 것들을 놓쳐 버린다. 그는 오로지 몇 안 되는 잔상들만을 소유한 채, 그들 사이에 가능한 빈약한 조합에 모든 것을 맡겨 버린다. 그런데도 즐거워하고 있다. 어쨌든 꿈틀거리고 있으니 말이다.
― 문형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혹은 문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랑의 감정이 있어야 한다. 문형은 누구나 소유하거나 공유하는 담론이 아니라, 오로지 사랑에 빠진 사람에 의해 만들어지고 이해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그 목적은 소통이 아니다. 도대체 누구와 소통을 한단 말인가? 특별한 섬광을 발견하거나 경험한다면, 그는 곧 바로 이 무형의 섬광에 특정한 모양새를 갖춘 육체를 부여한다. 기쁨의 강도에 따라, 그 부름에 따라 반복하고 싶기 때문이다. 문형은 반복의 언어이지, 소통의 언어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을 혐오하기까지 한다.
― 세련된 문화의 주체, 즉 일반인들의 관점에서 볼 때, 문형은 반복적 패턴과 지루한 코드들로 이루어진 것처럼 보인다. 중세 기사 로맨스나 궁정 연애담 혹은 여인의 이야기들의 일정한 패턴이 그 좋은 예일 것이다. 이는 용질(溶質)이 형태를 갖추기 위해 단단해지는 주조 과정에서는 불가피한 일일 것이다. 과잉된 촉발로부터 비롯된 감정이 형체를 갖고 단단해지기 위해서는 언어의 허용된 경계를 넘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문형은 언제나 낡은 코드의 끝자락에서 서성이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다. 이 끄트머리에서 그는 더 이상 나아갈 수가 없다. 이리저리 구석들을 탐색하지만 곧 좌절하면서, 끊임없이 입에서 맴도는 같은 말들의 참담한 반복만이 있을 뿐이다. 유치하기 짝이 없는 연속되는 감탄사들! 그 반복되는 역겨운 말들! 그 낭만주의! 오! 사랑! 이걸 어쩌지! 말할 수 없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일반인들이 보기에 그것은 마치 말더듬이의 웅웅거리는 소리와 흡사하다. 마치 잠자(Gregor Samsa)나 화부의 울부짖음이나, 이름 모를 동물소리. 반복. 과잉. 말더듬. . . . 이들은 모두 문화가 우리에게 금지하거나, 우리로 하여금 지양하도록 권고하는 있는 변태성이다. 걷잡을 수 없는 이 변태성의 분출을 막기 위해 개인과 사회는 대단히 중화된 여러 가지 형태들을 고안해 낸다. 허가받은 변태성! 결혼! 잘 다듬어진 욕망! 이 변태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모르긴 몰라도 동일한 위험의 강도(强度)에 자신을 내맡기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래서 사랑의 감정이 없는 존재는 문형을 이해할 수가 없다. 문형이란 문화적 제한구역의 경계 주위에서 배회하는 연인이 남겨놓은 자취들이다. 연인은 그 제한구역을 넘어서지 못한 채 그 너머를 바라보고 갈망한다. 그러나 한편, 이 제한된 구역의 경계 근처에 가보지 못한다면,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도 없거니와, 알고 싶어 하지도 않을 것이다. 다만 그것이 신비체험을 경험한 이방인의 헛소리일 뿐이라고 단정해 버리고,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방으로 되돌아가 버리기 십상이다.
<문예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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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과 사물을 직접 접촉하고 만난다는 것은 곧 관찰함이요, 관찰함은 곧 접촉이며 만남이다. 그 뒤에 자신의 기억의 그물을 거쳐서 나오는 표현의 문양(이미지)은 얼마나 생명과 사물의 열감이 식어서 김빠진 모양인가. 그렇습니다. 문형은 반복의 언어이지 소통의 언어가 아니라고 하신 말씀, 오랜 만에 신선한 지적을 만나게 되어 감사합니다. 정말로 지루하고도 불편하기 짝이 없는 반복의 코드입니다. 언어의 불편함을 느끼면 느낄수록 더욱 더 문형의 그물을 넘어서 소통의 세계로 나아가는가 봅니다. 2006/03/14 15:57
네. . . 언어가 직관적인 접촉에 다소 거추장스러운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의 불가피한 조건을 이루고 있는 것 역시 사실 아닐까요? 그래서 언어 일반이 문제이기 보다는, 어떤 언어인가가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글쎄요. . . 주관성으로 파고드는 언어로서의 문형을 말하고자 했던 것인데, . 의도가 잘 전달이 된건지 모르겠네요^^ 2006/03/15 04:44
화자(필자)의 주관이 완전히 배제된 백퍼센트 객관적 글이 있는지는 약간 고개가 갸우뚱해 집니다... 그 예를 생각해보려고 노력했는데,, 잘 떠오르질 않아서요..
(서양의) 철학자들만 해도 자기가 인식한 세계를 논리적으로 정형화하는 작업을 하잖아요? 음,, 문법을 기술한 저서는 주관이 전혀 없는 서술이겠지만,,문예노트님이 그런 걸 염두에 두시고 이 글을 쓰신 것 같진 않고,,
아뭏든,, 좀 헷갈려요 2006/03/15 08:57
주관이 완전히 배제된 백퍼센트 객관적 글? . . 그게 뭔지는 저도 모르겠군요. 과학이나 수학의 언어야 그렇다치고,..아니죠..그것들 조차도 주관적 질서에 따라 선택된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죠..
우리가 객관성을 다소 신비화해서 마치 진리처럼 보는 경향이 있는데요..
엄밀히 말한다면, 반복가능한 것, 외면적인 것 즉 외적으로 규정가능한 것, 사회적인 것, 등등을 객관성이라고 말할 수 있겠죠? . . .
그리고 이 글은 백퍼센트 객관적인 글과는 관계가 없는 것 같은데요..어떤 구절을 보시고..그런 생각이 드신건지... 2006/03/15 22:05
사랑에 빠진 자의 (주관적)말들(문예님의 표현:문형)에 대해 비판적이고 부정적인 시각으로 이 글을 쓰셨다고, (처음 읽었을 때) 그리 느꼈습니다. 그래서,, 사랑에 빠진 자의 언어 뿐 아니라, (예의 문법책류를 빼곤) 인간의 언어(인식)에 주관이 완전히 배제된 글이 어디에 있겠냐고 반문을 드린 것이고요..
다시 읽어보니,, 글을 읽으면서 저의 주관적 해석을 넣었나 봅니다
주관과 객관이 글의 주요 포인트가 아닌 듯 하군요,,
짧은 머리로 이해를 하려다보니 그렇습니다 ㅎ~ 2006/03/15 22:32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사랑하는 대상이 다른 사람과 함께 있으면 불편한 감정을 나타낸다면, 사랑한다고 말하는 당신의 언어는 사랑이라는 실재가아니라 문양(그림자, 주관의 그물로 각인된 편견과 감정)이다. 우리들 자신의 모든 경험과 감정이 개입되어 굴절된 언어는 사실과는 먼 거리에 있다. 그래서 우리들 모든 인식의 한계가 어디서 연유하는지를 통찰할 때, 비로소 나는 세상을 바르게 볼 수 있을 것이다. 2006/03/16 14:39
네..지두선님...께서는 완전한 사랑을 말씀하시고 싶으신것 같은데요..전 완전한 사랑에 대해 감히 뭐라고 말씀드리기는 ..좀 그렇네요(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 정말로 그렇습니다)..그리고, 언어가 실재의 굴절인 것은 사실이지만, 어떤 점에서는 실재의 한 면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말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 말을 하고 들으면서 행동도 하지 않습니까? 거기서 삶이 만들어지니까요..실재에 관하여 형이상학적 관점으로 접근하는 것은 좀 다른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어쨌든, 어떤 식으로든 언어는 실재와 관계하고 있는 것이죠..만일에, 언어가 그것조차 아니라면, 도대체 왜 우리가 말을 하고, 누군가에게 지시를 하고, 또 지시를 따르고, 글을 쓰고 하겠습니까?
언어의 굴절이 실재를 잘못 이해하게 하고, 편협하게 사물을 바라보게 한다는 점은 맞는 말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문제를 언어 일반으로 확대 해석해서 보는 것은, 문제를 오히려 모호하게 만들거나, 아니면, 제자리로 돌아가는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언어는 사유이고, 사유의 표현이고, . . .따라서 언어를 비판할 수 있는 것도 언어이고, 언어를 극복할 수단도 언어일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실재에 대한 직관적 통찰 역시 언어를 배제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어떤 언어, 어떤 굴절을 말해야 하는가이지, 언어 자체의 굴절에 대해 말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 아닐까 싶네요..^^
복잡한 것은 언어가 아니라, 우리들 자신의 인식입니다. 간단합니다. 언어는 사물과 경험을 찍는 단순한 사진기이며, 또한 오직 기계적으로 표현되는 컴퓨터와 같은 것입니다. 이런 언어는 물리적 기술을 의미하는 언어입니다. 여이런 언어는 아무런 왜곡이 없는 언어입니다. 이것과 다른 언어의 기능이 있다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사물이나 세계의 접촉에서 자신의 주관이 개입되어 심리적으로 굴절과 반사를 거친 언어가 있지요. 우리는 이것을 망각하고 모든 실재를 언어로 표현할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억에 의한 감정과 과거의 이미지 때문에 사실과 실재를 담아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언어와 사고와 인식을 통하여 우리들 자신의 의지가 되고 의식의 내용물이 되지요,
여기서 우리는 세상과 삶의 한 단면를 보면서, 인식은 한계를 가지며, 심리적인 분열을 갖게 되지요. 심리적 언어는 허상입니다. .. 2006/03/17 17:17
네^^..지두선님...실재를 고스란히 재현한다는 것은 망상이라고 전제하고, 간단히 말씀드리면...언어는 실재를 담아내지 못하는 허상이 아니라, 실재의 어떤 한 측면을 지시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기계적인 언어이든, 주관적 언어이든 모두가 실재를 완전히 지시할 수는 없죠..다만, 실재의 물리적이고 기하학적 측면을 지시하는 언어가 있고, 실재의 주관적 측면을(주관적 실재도 엄연히 실재이고, 또 어떤 식으로든 객관적 대상들과 관계하고 있습니다) 지시하는 언어가 있다고 봅니다. 전자의 경우엔 과학의 언어가 될 것이고, 후자의 경우엔, 문학이나 형이상학의 언어가 될 수 있겠죠..어쨌든 그 둘 모두 실재의 특정한 측면과 관계가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언어의 굴절과 허상만을 지적하는 것은 한계가 있는 것이구요, 좀 극단적으로 말해 심지어는 넌센스일 것 같은데요^^. 2006/03/18 01:32
산술적(기술적, 물리적, 개관적)으로 지시하는 언어는 말할 필요가 본시 없으니, 그것은 그대로 내버려 두고 이야기를 합니다. / 그런 언어를 심리적 언어라고 합시다. 이 때, 심리적이라는 말은 무엇을 규정한 개념인가요? 먼저 이것에 대한 개념을 우리가 동의하고 대화를 진행하면 다른 의견이 있을 수가 없이 간단히 문제는 풀립니다. 심리적으로 표현되는 언어(사고, 개념, 경험, 시간, 기억)는 사물의 실재를 해석할 수가 없고, 사물의 본질이 아닌 어는 한 쪽 면(현상, 특성)만을 규정짓는 의미가되고 해석이 되지요. 예를 들면 저 사람은 나와 사귀는 애인이다라고 단순히 지시하는 언어는 문제가 없지만, 애인이 곧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은 애인을 동일시한 심리적 언어로 사랑 그 자체를 담는다고 할 수는 없지요.애인에 대한 감정과 기억에 의해 축적되고 주관적으로 해석된 것은 그 사람에 대하여 내가 갖는 경험과 기억이라는 이미지죠. 비실재임. 2006/03/18 11:04
그래서 '문형의 언어는 반복의 언어이지, 소통의 언어가 아니다'라고 하지요. 즉 심리적으로 동일시된 언어는 두뇌의 신피질에서 입력(축적, 기억)되어 하나의 경험된 언어는 개념적으로 틀이 형성되어 조건반사적으로 반응하지요. 그러니 사물의 실재와 관계 속의 소통에 방해가 되지요.
언어는 언어일 뿐입니다. 간단하지요. 그런데 언어의 굴절과 허상이라는 말은 또 무언가요? 언어는 굴절도 없고 허상도 없습니다. 오직 냉정하고 편리한 기호입니다. 언어가 굴절이거나 허상이 아니라, 그것을 빌어다 쓸 줄 모르는 우리들 자신의 인식이 한계와 제한된 마음의 심리적 오류를 통찰하지 못한 실수가 만들어낸 것이 굴절이고 허상이라고 말해야 정확하지요. 그런가요? 2006/03/18 11:18
지두선님, <언어의 굴절과 허상>이란 표현 대신에, 언어란 매개체로 형상화된 한 개인의 사고/심리/기억의 조합이 '듣는 이'로 하여금 자기만의 사고/심리/기억의 조합으로 (마치 프리즘처럼) (내게 던져진)언어를 <굴절>해서 받아들인다고 말하는 게 맞다. 이 말씀이신가요?
제가 지두선님의 말씀을 정확히 <굴절없이> 이해했나,, 확인하는 겁니다 ^^ 2006/03/18 13:12
처음부터 다시 읽어보니, 지두선님의 논지가 좀 왔다갔다 하긴 했지만, 지두선님의 생각은 이번에 쓰신 다음의 구절로 요약이 되는 것 같습니다: "심리적으로 표현되는 언어(사고, 개념, 경험, 시간, 기억)는 사물의 실재를 해석할 수가 없고, 사물의 본질이 아닌 어느 한 쪽 면(현상, 특성)만을 규정짓는 의미가 되고 해석된다." => 이 말씀은 논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표현이므로, 지두선님께서 뜻하신 바를 감안해서 제가 고쳐 쓰겠습니다. 즉, "심리 상태를 표현한 언어는 사물의 실재를 그대로 보지 못하고, 사물을 자신의 주관적 상태에 따라 일면만을 규정하고, 자의적으로 해석한다. 그래서 사물의 객관적 상태를 왜곡시킨다. 그래서 심리적 언어는 허상이다." 어떤 점에서는 이 말씀이 맞지만, 어떤 점에서는 대단히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쭉 읽어보니, 지두선님께서 말씀하시는 "실재"라는 것이, 단순히 사물의 객관적 상태, 사실적 사건, 현실..등을 지칭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관적 상태, 잠재적 힘이나 특질 같은 것들은 허상이라고 믿고 계신것 처럼 보이는 것이었구요.
지두선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심리적 언어"가 무엇인지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정의를 내리신 후에 말씀을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님의 말씀은 마치 감정이나 기억이나 주관적 경험들이 모두 허상이라고 주장하는 것 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일전에 말씀드렸듯이, 어떤 언어가 그러한 것인지를 명확히 해야합니다. 그냥 심리적 언어..이렇게 해버리면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가령, "시"는 순전히 감정과 기억과 주관적 경험으로만 채워진 언어 아닙니까? 설마 시와 그 은유를 허상이라고 말씀하시려는 건 아니시겠죠? 사물은 객관적 질서가 있고, 주관적 질서가 있습니다. 둘 모두 동등한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동등한 실재성이 있습니다. 객관적 질서만 진리이고, 주관적 상태는 허상이다..이런 식의 논리는 사물을 제대로 이해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말씀드렸듯이 넌센스입니다. 잘 한번 생각해 보세요..
제 생각엔 아마도, 지두선님께서 말씀하시려는 그 "심리적 언어"라는 것이, "추상적 관념"을 말씀하시려는 것이 아닌가 싶은데요...만일 그렇다면, 그건 심리적인 문제와는 대단히 다른 문제라고 봅니다. 그 문제까지 논증하는 것은 하지않겠습니다.
2006/03/19 13:21
사과꽃이 핀들님의 이해와 말씀 맞습니다. 그리고 훈님께서 거론한 실재라는 어떠한 방식의 개념이나 정의로 규정을 내리든 그것은 언어화하는 순간 이미 실재가아니지요. 그리고 실재란 객관적 실재, 주관적 실재로 분리되는 것이 아닌 것이라야 샐재의 본질입니다. 그러나 언어와 사고를 통한 자신의 주관이 개입되면 그것은 이미 심리적으로 굴절되고 마는 인식의 한계(즉 실재의 그림자)에 봉착하고 말지요. 그런 말슴입니다. 그리고 시나 예술이라고 해서 그 표현된 언어는 실재가 될 수가 없지요. 따라서 우리는 언어와 사고, 주관적 인식의 한계를 직시하고 자신의 심리적 그림자(허상)를 통찰하느냐 않느냐의 문제만 남게되지요. 안그런가요? 어떻습니까?
실재의 본질은 어떻게 포착될 수 있는지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즉 자신이 어떻게 하면 실재와 하나가 됩니까? 만약에 실재와 내가 둘이 아닌 하나일 때, 그 곳에 어떤 언어로 사고로 실재를 담아내거나 표현할 수가 있나요? 듣고 싶습니다. 실재와 내가 분리되는 상태야말로 언어(사고, 심리적 기억)에 의해 주관과 객관이라는 실체가 없는 허상에 봉착하지 않나요. 2006/03/20 11:40
음...지두선님!!..급기야는 제가 우려했던 요청을 하시는군요...제가 요즘 매우매우 바쁜 관계로 가급적이면 호흡이 있는 글을 쓰기가 힘든데...그래서 뭔가 한참을 설명해야 하는 글은 미루고 있는데...그러나, 물론 저는 지두선님의 요청에 응하겠습니다. 어떻게 실재의 본질을 포착하는지, 제가 생각하고 있는 실재가 무엇인지, 언어가 과연 실재에 접근할 수 있는지,..등에 대해 쓰겠습니다. 당장은 말구요...조만간^^...좀 전에 단숨에 메모를 끝냈습니다. 이제 그것을 잘 다듬어서 짜임새 있게 모양만 만들면 됩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제가 하던일 마저 하고...시간을 좀 내서 쓴 후에 올리겠습니다.^^ 2006/03/21 00:14
언어와 시간은 연속성을 통하여, 우리는 즉각적으로 삶을 보려하지 않아도 되는 장치를 가집니다. 여기에 불행이 있지요. 모든 사실을 있는 그대로 관찰함은 곧 행함이요, 거긴 어떤 언어도 해석도 당이성도 합리화도 불필요 합니다. 사실을 그대로 봄은 두뇌의 고요함을 통하여 생각과 느낌 사이를 관통하지요.
사실을 봄은 시간과 언어가 개입될 여지가 없는 것이지요
'이해하는 건 끝이 있지만, 정복하는 건 끝이 없다'라고 했던가. 인간의 인식은 이름과 형상이라는 먼지 묻은 거울을 제 스스로 창조하고는, 그 거울 속에 갇힌 자신이 언제나 그 거울을 개트릴 수 없는가. 이해는 어떤 언어도 사고도 필요 없건만,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언제나 정복하려 한다. 그러나 정복은 끝이 없는 또 다른 정복을 향하여 나아갈 뿐, 아무것도 변한 것은 없이 그 자리 그대로 있다. 2006/03/21 15:30
지두선님의 말씀은, 마치 크레타인의 역설을 생각나게 하네요. . 말하자면,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은 거짓말이다" . . 라고 전제를 깔고 말을 시작하는 방식 같습니다. . 언어나 기억이나 이미지로 글을 쓰고 계신분이, 언어나 기억이나 이미지는 허상이고, 잘못된 것이다. . 라고 말씀을 하시니. . . 난감합니다^^. . 그런 넌센스를 . .
누누히 말씀드리지만, 지두선님 말씀대로, 물론, 언어나 이미지는 실재 전체(혹은 자체)와 동일하지 않습니다. 실재 자체가 뭔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플라톤이 생각했듯이, 실재가 저 너머에 초월적인 곳에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직접적으로 그 실재 안에 들어와 있기 때문에, 우리가 경험적으로 실재의 현존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다 말하기에는 너무 많고, 또 너무나 다양하고, 한없이 흐르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실재가 우리의 밖에 있다면 오히려 실재를 총체화하기가 쉽겠죠. 적덩한 거리를 두고 그림으로 그리면 될 테니까요. 이데아나 천국처럼 말이죠. 하지만, 실재를 재현하는 것이 불가능한 이유는 바로 우리 자신이 이미 실재 안에 직접 투신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또한 실재 전체를 재현하는 일은 별 의미도 없습니다. 이미 들어와 있으니까 말이죠. 또 우리의 삶이라는게 따지고 보면 실제 전체를 필요로하지도 않구요(형이상학적 의미에서 요청될 수는 있겠지만).
이미지나 언어는 물론 실재의 한 측면입니다. 또 우리의 직접적(직관적) 경험의 변형이기도 하구요. 또 때에 따라서는 우리의 경험의 왜곡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미지와 언어가 실재가 아니라고 부정하는 것은 아주 단순하고도 교조적인, 좀 심하게 말하면 유아적이고 종교적인 판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실재 아닌 것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다 실재이고, 우리가 이미 직접적으로 들어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실재에 대한 경험의 방식들이 다른 것이죠. 가령, 직관은 좀 더 흐름에 가깝게 실재를 경험하는 방식입니다(이것이 아마 지두선님이나 크리스나무르티가 말하고자 하는 방식일 겁니다). 과학은 실재를 객관화시키는 방식이구요. 수학은 실재를 추상화합니다. 수학적 실재들이 있잖아요. 원이라든가 원뿔이라든가 하는. . .문학적 실재가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감정적 실재가 있고, 지각적 실재가 있고, 기억의 실재가 있습니다. 그 모든 실재들을 우리는 바로 실재(The real)라고 부르는 거지요. 크리스나무르티가 비판하는 것은, 이미지와 언어의 잘못된 사용의 문제이지, 이미지와 언어 자체의 부정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렇게 교조적으로 왜곡하지 마세요. 단순하게 그 말을 그대로 믿어버리면 독사(doxa)가 되고 종교가 됩니다. 이런게 바로 우리의 실재를 비실재로 만드는 치명적인 악이랍니다. 잘못된 관념이란 말이죠. 생각해 보세요. "나는 기억을 가진적이 없다" . . 이게 말이 된다고 봅니까? 그 말 자체가 이미 기억인데 . . . "언어는 허상일 뿐이다" . . 이게 말이 됩니까? 이미 그 자체가 언어인데. . . "내 말은 거짓말이다" . . "모든 크레타인의 말은 거짓말이다" . . . 자꾸만 실재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면서, 자신의 언어나 이미지를 실재가 아니라고 부정해버리면, 실재는 도데체 뭐란 말입니까? 우리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건가요?
다양성을 부정하기 때문에 항상 잘못된 관념이 나옵니다. "언어"라고 하면 하나의 언어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지"라고 하면 하나의 이미지만 있는 것이 아니구요. "언어"라는 단어를 쓰면서도 우리는 전혀 다른 의미로 그 말을 쓰기도 하고, "이미지"라는 말을 쓸 때에도 전혀 다른 의미로 그 단어를 씁니다. 실재를 보는 능력이라고 한다면, 바로 그 다양성을 보는 능력, 즉 맥락으로 사물과 인간을 보는 능력이겠죠. 하나의 일반화된 "언어"만 바라보고, 하나의 일반화된 "이미지"만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실재가 아니라고 부정하게 되는 겁니다. 자신이 직접 사용하고 있으면서 말이죠.
자꾸만 언어와 이미지의 허상성에 대해 말씀을 하시지만 . . 실제로 우리한테 필요한 것은, 그렇게 무의미한 비판이 아니라, 어떤 언어, 어떤 이미지가 왜곡되었는가 하는 문제일 것입니다. 가령, 광고이미지는 어떤 권력이라든가 이윤이라는 목적으로 실상을 왜곡시킵니다. 아름다움을 잘못된 방식으로 표현하고, 우리의 삶을 상투적인 행복으로 바꿔버리는 것이죠. 팔기 위해서요. 이건 이미지의 권력이고, 잘못된 사용입니다. 이것만 가지고 이미지를 일반화해서, 이미지 자체가 허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한마디로 단순하기 짝이없는 분석이라는 말입니다. 누누히 말씀드리지만, "이미지", "실재", "언어"와 같은 단순한 용어에 고착되어서 판단하지 마시고, 어떤 이미지, 어떤 언어가 문제인가를 생각하셨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