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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07/14 문형(文形, Figure)에 관하여 (18)


― 글, 시, 비유, . . . 이들을 사랑에 빠진 자의 언어가 짜놓은 무늬라고 정의해보자. 그리고 그들을 통틀어서 문형(文形, figure)이라고 불러보자.


― 사랑에 빠진 사람의 언어에는 언제나 “나”가 등장한다. "나", "내가" 화자가 됨으로써, 형태상 전면에 부각된 나! 그러나 사실상 나는 가장 깊숙이 그러나 가장 가까이 숨어버린다. 어째서 '내'가 화자가 되어야 하는가? 사랑의 이야기 속에는 왜 내가 복귀되어야 할까? 가장 구체적인 존재로서 나 만큼 사랑을 말할 수 있는 주체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사랑에 빠진 모든 언어의 근본적 시점은 일인칭 화자이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 사랑에 빠진 나는 내 앞의 모든 것들을 극화(劇化, dramatization)하기 시작한다. 또 그래야만 가장 잘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주인공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혹은 그녀와 관계하는 다른 많은 인물들,
이들(간)의 감정들, 몸짓들, . . . 아주 복잡한 실재가 가지런히 정돈되기 시작한다. 이야기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 모든 감정과 인상과 몸짓들을 표현할 수 있을까? 주인공이 없이 어떻게 이 모든 이야기들을 이끌어 나갈까? 이 지루한 시간을 구원해주는 것은 오로지 이야기 뿐. 또 이야기는 이 지루한 시간 자체를 고스란히 느끼게 해줄 것이다. 나는 맨 앞에서 말하는 화자이며 동시에 어디에서든 현존하는 주인공이다. 그런데 극화하는 화자로서, 그리고 극화된 주인공으로서 나는, 오히려 그것 때문에 가장 깊숙이 숨지 않을 수 없다. 모든 것들이 살아 있으니, 나 역시 움직이지 않을 수 없지 않은가! 도대체 내가 있는 곳은 정확히 어디인가? 사랑에 빠진 사람! 글을 쓰는 사람! 이들은 모두가 길을 잃은 자들이다.


― 사랑에 빠진 사람은 감동하거나 좌절할 때 언어를 찾는다. 갑자기 그의 연상에 떠올려진 연인의 미소 때문에, 아니면 더 이상 몸속에서 팽창하고 있는 기운을 가눌 수가 없어서, 그래서 또한 이리저리 이 방 저 방을 배회하다가, . . . 로테를 사랑한 베르테르를 보라! 갑작스런 언어의 분출은 그를 수다쟁이로 만든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언어로의 분출이라고 말해야 할까? 무엇인가 밖으로 빠져나가거나, 아니면 무엇인가 갑자기 혹은 우연히 안으로 난입해버린 것이다. 베르테르의 수많은 편지들! 문형에 관한 모든 문제들은 여기서 시작된다.


― 문형은 산채로 포착된, 생포된 말들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으며, 그 무엇으로 귀속되지도 않는다. 다만 살짝 숨어서 단 한번만 엿 볼 수 있을 뿐. 문형을 한 폭의 이미지로 말해야 한다면? 부서진 몸짓들! 숨어 엿보기 때문에, 그리고 아주 가까이서 보기 때문에, 모든 것은 부서진 채로만 보인다. 가령, 누군가 숨어서 베르테르의 좁다란 방을 엿본다고 해보자. 이리저리 방황하는 몸짓을. 혹은 그의 편지를 훔쳐본다고 해보자. 그 횡설수설하는 말들을. 꿈틀거리는 존재는 한꺼번에 너무나 많은 것이 이리저리 너저분하게 어질러져 있다. 그래서인가? 생명 앞에 선 지성은 한 없이 부분에만 고착한다. 그렇기 때문에, 지성을 소유한 존재는, 사랑에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를 엿보는 자 역시, 밀도가 낮은 그물망처럼 아주 많은 것들을 놓쳐 버린다. 그는 오로지 몇 안 되는 잔상들만을 소유한 채, 그들 사이에 가능한 빈약한 조합에 모든 것을 맡겨 버린다. 그런데도 즐거워하고 있다. 어쨌든 꿈틀거리고 있으니 말이다.


― 문형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혹은 문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랑의 감정이 있어야 한다. 문형은 누구나 소유하거나 공유하는 담론이 아니라, 오로지 사랑에 빠진 사람에 의해 만들어지고 이해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그 목적은 소통이 아니다. 도대체 누구와 소통을 한단 말인가? 특별한 섬광을 발견하거나 경험한다면, 그는 곧 바로 이 무형의 섬광에 특정한 모양새를 갖춘 육체를 부여한다. 기쁨의 강도에 따라, 그 부름에 따라 반복하고 싶기 때문이다. 문형은 반복의 언어이지, 소통의 언어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을 혐오하기까지 한다.


― 세련된 문화의 주체, 즉 일반인들의 관점에서 볼 때, 문형은 반복적 패턴과 지루한 코드들로 이루어진 것처럼 보인다. 중세 기사 로맨스나 궁정 연애담 혹은 여인의 이야기들의 일정한 패턴이 그 좋은 예일 것이다. 이는 용질(溶質)이 형태를 갖추기 위해 단단해지는 주조 과정에서는 불가피한 일일 것이다. 과잉된 촉발로부터 비롯된 감정이 형체를 갖고 단단해지기 위해서는 언어의 허용된 경계를 넘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문형은 언제나 낡은 코드의 끝자락에서 서성이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다. 이 끄트머리에서 그는 더 이상 나아갈 수가 없다. 이리저리 구석들을 탐색하지만 곧 좌절하면서, 끊임없이 입에서 맴도는 같은 말들의 참담한 반복만이 있을 뿐이다. 유치하기 짝이 없는 연속되는 감탄사들! 그 반복되는 역겨운 말들! 그 낭만주의! 오! 사랑! 이걸 어쩌지! 말할 수 없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일반인들이 보기에 그것은 마치 말더듬이의 웅웅거리는 소리와 흡사하다. 마치 잠자(Gregor Samsa)나 화부의 울부짖음이나, 이름 모를 동물소리. 반복. 과잉. 말더듬. . . . 이들은 모두 문화가 우리에게 금지하거나, 우리로 하여금 지양하도록 권고하는 있는 변태성이다. 걷잡을 수 없는 이 변태성의 분출을 막기 위해 개인과 사회는 대단히 중화된 여러 가지 형태들을 고안해 낸다. 허가받은 변태성! 결혼! 잘 다듬어진 욕망! 이 변태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모르긴 몰라도 동일한 위험의 강도(强度)에 자신을 내맡기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래서 사랑의 감정이 없는 존재는 문형을 이해할 수가 없다. 문형이란 문화적 제한구역의 경계 주위에서 배회하는 연인이 남겨놓은 자취들이다. 연인은 그 제한구역을 넘어서지 못한 채 그 너머를 바라보고 갈망한다. 그러나 한편, 이 제한된 구역의 경계 근처에 가보지 못한다면,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도 없거니와, 알고 싶어 하지도 않을 것이다. 다만 그것이 신비체험을 경험한 이방인의 헛소리일 뿐이라고 단정해 버리고,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방으로 되돌아가 버리기 십상이다.

<문예 노트>

Posted by hu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