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의 실체는 무엇일까? 작가의 의도 혹은 계획 아니면 비젼? 흔히들 글을 쓰는 일이 견딜 수 없다고 말한다. 때로는 자연과의 투쟁에서 오는 농부의 고달픔에 비유하기도 하고, 겁없는 프로메테우스의 고통에 견주기도 하면서 말이다. 그러면서도 쓴다고, 그래서 위대한 것이라고 말이다. 하기야 고통스럽지 않은 노동이 어디 있겠는가? 어쨌든, 컵을 잃어버린 액체의 긴장처럼, 불안한 상태를 지속시키고 있어야 할테니 말이다. 하지만 사람들 대부분이 글쓰기를 고통스러운 행위라고 보는 이유는 글이 저자의 계획의 산물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신처럼 세계를 만들어야 한다고, 그래서 갖추어야 할 흐름이 있다든가, 지켜야할 규칙이 있다든가, 견뎌내어야 할 의무가 있다든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내 생각에 글의 본질은 그 보다는 조각난 생각들에 있지 않나 싶다. 머릿 속에서 언뜻 언뜻 들었던 통찰, 몽상적인 상태 속에서 떠올랐던 어떤 의미, 예기치도 않았는데 갑자기 우뚝솟아 오르는 본질적인 이미지, . . . 체계나 구조 없이 불쑥 불쑥 고개를 내미는 부스러기 섬광들! 누구에게나 있는!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이든, 받은 사람이든, 인간을 사랑하는 사람이든, 증오하는 사람이든. 진정으로 살다보면 누구에게나 끊임없이 생겨나는 것들, 우리의 작은 관계와 행위들에 특별한 의미를 가지게 해주고, 그렇게 나타났다가 사라져버리고 마는 마음 속의 아포리즘들, 가령, "그에게 그런 면이 있었네?!"하는 식의 질문이나 통찰 말이다. 작가들은 이러한 섬광들을 기록해둔다. 단어 하나, 점 하나, 숨소리까지도. 노트 말이다 노트! 삶을 향유하지 않고 그러한 노트가 가능할까? 위대한 작가들의 작품은 바로 이 섬광들로 채워져 있다. 섬광의 대가인 니체의 죽음은 질병이나 육체의 노쇠함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 섬광으로 벅차오르는 가슴을 가눌 수 없었기 때문이다(혹은, 부지런한 노트가 펜을 쥔 손에 안겨준 심한 경련이 그 벅찬 가슴과 서로 장단이 안 맞았는지도). 작가들은 긴밀한 구성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신처럼 완벽한 어떤 구조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아니다. 본래적으로 타고난 체계화 능력이 있는 사람들도 아니다. 그들은 다만 그 자그마한 섬광들에 민감하고, 그 작은 아포리즘을 잠깐 동안 앉아 노트할 정도의 근면이 있는 사람들일 뿐이다. 그는 나중에가서 그 조각들을 그럭저럭 짜맞추어가며, 그들 사이 사이에 아교와도 같은 통로들을 만들어서 책을 낸다. 그 노동은 의외로 쉽다. 섬광들만 제대로 기록되어 있다면 말이다. 그런 식으로 하나의 세계와 국가가 만들어지는 것 아니겠는가? 글쓰기의 고통은 게으름을 한꺼번에 보상받으려는 헛된 욕심에 대한 자연의 처벌 같은 것이다. 그러한 조각들도 마련하지 않고, 삶 속에서 아무런 섬광도 느끼지 못한 채, 혹은 나타났던 섬광들을 강렬하게 만들지도 못하고, 지리멸렬한 하찮은 점들로 소멸시켜버리는, 그렇게 성의없는 사람들에게나 글쓰기의 고통이 견딜 수 없는 것이다. 당장에 백지를 올려놓고 펜을 들어보라. 흰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먹물이라는 사실 밖에는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글은 하나의 결과일 뿐이다. 처음부터 국가를 만들 수 없고, 처음부터 우주를 만들 수 없듯이. 만일에 신이 하루 아침에 세계를 창조 하였다면, 그의 필력은 정말이지 끔찍하지 않았을까? 글쓰기의 고통이란, 삶을 향유하지 않고, 예를 들면, 원고료와 생활고에 떠밀려, 혹은 시험을 보기 위해(논술이라고?), 삶을 빼앗긴채, 섬광도 없이, 그 작은 빛들이 자발적으로 만들어낸 어떤 질서와 국가와 체계도 없이, 갑자기 하나의 왕국을 만들어 보겠다는 망상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향유를 배우라! 글쓰기는 재주가 아니라 태도이다. (베르칸트가 말했듯이, 아무리 책을 많이 읽고 노력을 해도, 속물들 속에서는 결코 진정한 글이 써질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글쓰기'에 해당되는 글 4건
- 2007/07/31 힘들이지 않고, 심지어 즐겁게 글을 쓰는 방법
- 2007/03/30 글을 잘 쓰는 첫 번째 방법
- 2006/08/22 테드 휴즈(Ted Hughes): 글을 쓰면 구원 받을 수 있을까? (5)
- 2006/07/14 망상과 환상 (2)
유명한 소설가로부터 전해들은 비법 한 가지 소개하겠다. 아는 사람들은 잘 알 테지만, 그래도 실천하기는 쉽지 않은 비법이다. 우리가 너무나 오만하고, 무성의하고, 넘겨 짚는 습관이 너무 오래 되었기 때문에.
그 비법은 다음과 같다. 좋아하는 작가나, 마음에 드는 책을 몇 권 선택해서, 하루에 일정 량을 정해 놓고 그 책을 베낀다. 타자기로 치지 말고, 직접 손으로 정성스럽게 한 글자 한 글자를 옮겨 적는 것이다. 그렇게 베끼다 보면 무슨 일이 생기는가 하면, 작가의 글과 생각과 느낌 등을 자신도 모르게 곱씹게 되고, 그 곱씹는 행위는 바로 작가가 글을 쓰면서 찾아 헤매었던 험한 길을 함께 동행하고 있는 것과 비견할 만한 여행을 하고 있는 셈이 된다. 그러다 보면, 흉내도 내보고, 말도 걸어보고, 간혹 그를 제치고 앞서가기도 한다.
작가들은 전에 경험했던 일이나, 읽었던 글이나, 만났던 사람들을 계속해서 다시 되돌아가 곱씹는 사람들이다. 나쁜 마음을 가지고, 그들에게 해를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유로워지기 위해 그것들을 곱씹는다. 수학문제 풀듯이, 했던 것을 또 풀고 또 풀고 또 풀고, . . . 하다 보면, 어느새 자신이 그 문제로부터 자유로워지듯이, 작가들은 경험을 되풀이하고, 다시 돌아가 음미해 봄으로써, 처음이라서 당혹스러워 어쩔 줄 몰라 했던 그 경험을 여유로운 마음으로 다시 자신의 것으로 되새긴다. 그렇게 힘들게 얻은 노하우는, 바람직한 관계와 보다 쉬운 길을 찾을 수 있도록, 우리에게 삶의 지도 같은 것을 제시해주는 자료가 된다.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다. 해야 할 일들이 아주 많고, 그래서 귀찮은 일이기도 하고, 번거롭기도 하고,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것은 마치 깊고 깊은 산 중에서 길을 찾는 것과도 같다. 깊은 골짜기, 비좁은 샛길, 울창한 나무들, 빼곡한 바위들, 듬성 듬성 파헤쳐진 구덩이들, . . . 앞에 놓인 모든 것들은 쉽게 길을 찾는 것을 방해하고, 더 이상 앞으로 가지 못하도록 좌절하게 한다. 작가는 길을 찾아 그 복잡한 방해물들을 하나씩 하나씩 제쳐가며, 풀어가며,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딛는다. 지도를 찾기 위해, 더 넓은 광장에서 쉬기 위해.
독서라는 것은 바로 그와의 동행이다. 동행이 쉬운 작가도 있고, 동행이 까다로운 작가도 있다. 또 친절하게 배려를 해주는 작가도 있고, 따라 오든 말든 앞으로 자신의 갈 길만 가는 작가도 있다. 그가 험하고 깊은 굴곡의 길을 가면 갈 수록 우리는 따라가지 못해 중간에 포기하고 나와, 그를 불평하거나 비난하거나, 아니면 자신의 무능력과 무기력을 한탄하기도 한다. 그러나, 험한 길일 수록, 돌파하기가 쉽지 않은 길일 수록, 더 깊고 더 깊은 길을 따라 갈 수록, 광장은 넓어지고, 휴식은 영원해지고, 자유는 더 커지고, 기쁨은 배가 된다. 복잡한 길이 힘들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산 머리에, 혹은 산 중턱에 주저 앉아 쉬고 싶어 하지만, 실은 비좁은 샛길에서 빽빽한 돌멩이들을 피해, 다리를 오므리고, 몸을 움츠리고 앉아, 불편하게 견디고 있는 것일 뿐이다. 그러면서 자신의 인생을 후회하고, 한탄하고, 원한을 갖는다.
그러지 않으려면 독서를 해야 한다. 책이 아니어도, 글자가 아니어도, 독서를 해야 한다. 그리고 그 작가를 따라 베껴야 한다. 빠르고 날렵하게 달리고 있는 그를 따라, 그의 지팡이를 잡고, 그가 가는 발길을 한 발자국씩 따라가 봄으로써, 그와 비슷한 정도의 깊이와 폭의 여행을 해보는 것이다. 그렇게 몇 차례 동행을 하고 나면, 자신이 어떤 길을 가야 할지, 이 길이 적당한 길인지, 그렇지 않은지, 너무 얕은 길은 아닌지, 너무 엉성해서 혹시 빠질 수도 있는 함정은 아닌지, 가지 말아야 할 길은 아닌지, . . . 판단하기 어려운 사안들에 대한 식견과 통찰, 즉 노하우가 자신도 모르게 생기게 된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전쟁이나 종교적 갈등보다도 더 심각한 현대사회의 비극은 아마도 냉소나 권태에 있을 것이다. 대중 매체가 알려주고 있는 그 어수선한 세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우리 개인들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고 있지 않다는 것. 그 창백한 악몽 때문인지 저 밖의 소란함이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실제로 살고 있다는 안도감을 갖게 할 정도이다. 아직은 무엇인가가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절대적인 침묵의 상태가 오지는 않았다는 사실이 말이다. 과연 내가 살아있는 것일까? 소음과 공포와 분노는 사라져야할 비극이 아니라, 소극적이나마 이 끔찍한 악몽을 부정할 수 있게 하는 유일한 구실과도 같은 것이 아닐까? 아직은 시간이 남았다고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라크인들이나 탈북자들과 같이 죽음의 표지에 서있는 자들에 대해 애도를 취할 수가 있다. 애도가 그다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정작 죽음의 표지에 우뚝서 있는 자들은 바로 우리, 모든 감각과 지각이 마비되어, 가르쳐주는 것만을 배우고, 배운 것만을 되뇌이고, 알고 있는 것만을 느끼는, 바로 우리 자신이다. 왜 이렇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것인지. 왜 더 이상 나아갈 수가 없는 것인지. 나는 정말이지 화가나서 미칠지경이다.
영국 작가 테드 휴즈(Ted Hughes)는 글을 쓰라고 한다. 특히 이야기를. 그래서 작년 크리스마스에 무엇을 했는지, 옆으로 누가 지나갔는지, 그의 모습이 어땠는지, 손짓을 어떻게 했는지, 무슨 말을 했는지, 왜 말을 했는지, 어떤 표정으로, 어떤 눈짓으로, 무엇을 가리키며 내게 말했는지를 떠올리라고. 우선 삶에 흥미가 생긴다고.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 글을 쓸때에 우리는 스스로 깨닫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우리가 사물들을 그 자체로 온당하게 이해하고 느낄만큼 자세히 보고 있지 않으며, 깊숙히 이해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한 단어 한 단어를 쓰려면 그 모든 것들을 자세히 기억해야 하는데, 우리 모두는 한 사건에 대한 모호한 인상들만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쓰는 일이 고역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율동을 하기에는 너무나 뻣뻣해진 지각! 내가 겪은 저들을 완전하게 이루고 있는 나머지는 다 빼고, 나에게 직접 감화를 주었던, 혹은 내가 필요하다고 간주했던, 한 두가지 디테일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같은 것을 겪고도 서로들 완전히 다른 기억들로 살아가고 있으며, 우리 모두는 각자만의 방 속에 들어앉아 저 편의 타자들을 바라보고만 있다. 그래서 천적이 많은 설치류의 청각처럼, 거리를 필요로하는 감각기능이 발달한 나머지, 타인들뿐 아니라 사물들의 내부로 파고들어 지각하는 법을 잃어만 간다. 테드 휴즈의 말을 들어보자.
". . . 우리 모두가 사건의 다른 측면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우리 나름대로는 옳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우리가 거의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이며, 한 두 가지만 보고 사실들의 모든 것을 판단한다는 것이다. 만일에 배심원들이 평결을 검토하기 위해 방으로 들어가서, 지난주에 당신이 받은 수업을 당신이 기억하는 식으로, 당신의 사건을 기억한다면, 그들의 평결을 납득할 수 있겠는가?
이 소음많고, 분주하고, 편리한 현대 생활 속에서, 우리는 매일 매일 별로 중요하지 않은 광경들과 소리들로 폭격을 받는다. . . . 그것들은 말 그대로 의미가 없는 것들이다. 교통 소음처럼, 혹은 텔레비젼 소음처럼 그냥 우리의 흥을 돋굴뿐이다. 그렇게 우리는 실제로 듣지 않고 실제로 보지 않고, 다만 모든 것들을 우리 주변으로 미끄러지게 내버려두는 지루한 습관을 발전시킨다. [무감각해지는 법을 배워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우리가 보거나 듣는 모든 것들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며, . . . 우리는 상처도 안 받고, 거기에 열광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인생을 부유하면서 아무것에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마치 수족관의 뚱뚱한 돌고래처럼. 거기에는 상어도 없고 범고래도 없다. 사육사가 가져다주는 음식만 있으면 된다. 거기서 사람들은 창 저편에 서 있지만, 그들은 그냥 다른 세계의 피조물일 뿐이다. 그러니 아무 문제가 없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며, 오로지 우리를 괴롭히는 것이라고는 지루함 뿐이다.
나는 최근에 한 실험을 적어놓은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잠수함이 물 속으로 항해하는 영화인데, 이 영화를 미국인들과 아프리카 부족 원주민 관객들을 섞어 놓고 보여주었다. . . . 그 영화가 끝이 나고, 그들에게 무엇을 보았는지를 적으라고 했다.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내가 말했듯이, 미국인들은 우리 만큼 살고 있고, 우리 만큼 사물을 본다. 그들의 보고를 보면, 그들이 거의 아무것도 보지 않았다고 생각할 것이다. . . . 그들은 물론 잠수함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어떤 움직임이었는지 거의 대부분 확신할 수가 없었다. 어떤 종류의 잠수함이었는지, 그것이 심지어는 물 속에서 움직였는지 조차 추측하지 못했다. 아프리카인들의 보고는 전혀 달랐다. 아프리카인들은 거의 대부분이 기억하고 있었다. 잠수함의 모양, 시각적인 외모들; 그들은 그 움직임까지도 정확하게 묘사했다; 그들은 물의 외양까지도 자세하게 묘사했고, 잠수함이 지나간 바닷길까지도 자세히 알고 있었다. . . . 당신은 어떨 것 같은가?
이제 당신이 쓰려는 이 소설에서 다음과 같은 것들을 연습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그냥 쓰기, 혹은 당신의 상상에 맡기기 그리고 펜으로 그것을 따라 최대로 빠르게 쓰기. 그것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자연스러워질때 까지 계속하기. 두 번째로 당신의 관찰을 연습하기. 물론 당신이 특별한 사물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고, 그것들을 소설로 끌어들이고 있음을 알게 되면, 전에 당신이 했던 것보다 더 세밀해져야 한다. 만일에 어떤 사물이나 장소가 글 속에서 실제적이지 않으면, 그것 혹은 그 혹은 그녀는 거기에 없는 것이다. 사물, 사람, 장소들에 대하여 글을 쓸 때의 요점은, 그들이 스스로 드러나서 실제로 거기에 있듯이 써야한다. . . . 그러면 당신의 소설의 매 페이지 마다 새로운 관찰의 연습장이 될 것이다. 곧, 무엇인가가 사진적인 관찰처럼 당신에게 생생하게 다가올 것이다."
(Ted Hughes. "Writing a Novel: Beginning" 중에서. [ ]표시는 편집자)
글쓰기의 두 가지 동인을 생각해보자. 1) 실재하는 것의 완전한 소유를 위해 글이 짜여진다. 재현과 모사의 행위는 내가 손을 뻗쳐 닿을 수 있도록 대상을 실제로 여기에 다시 위치시키려는 의도에서 출발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기쁨의 대상이므로 반복하고 재생산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파시즘의 전(前) 단계를 취한다. 이때에 소유의 과정으로서 글쓰기는 동일한 구절들과 표현들로 반복되고 과장되어야 한다. 이렇게 강박 신경증에 사로잡힌 나는 표현의 수사적인 면모를 거부하고, 심지어는 수사 자체를 혐오한다. 문학적 사실주의는 사유의 유물론적 확장의 결과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연인을 실재로 만들어내고자 한다. 그러나 묘하게도 이때에 사랑 받는 연인은 하나의 조형적 형상을 띠며 정지해 있다. 베르테르의 문형에 의해 재현된 로테는 일종의 조형미를 갖춘 조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라진느가 재현한 잠비넬라(Zambinella)의 조각처럼, 로테는 베르테르의 반복적 문형 속에서 핏기 없는 조각이 되어 버린다(문형의 첫 번째 아이러니). 2) 문형의 첫 번째 아이러니의 결과로서, 이제는 소유의 좌절과 그 보상을 위해 새로운 형태의 글이 짜인다. 글쓰기는 이제 더 이상 소유의 망상으로 추동된 우상숭배가 아니라 기억의 판타지로 채색된 물신주의의 성향을 띤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모든 관능적 욕망에 제동을 걸고, 신체적 절제를 통해 심미적 취향에 빠져 버린다. 나는 이때에 모든 대상을 살아있는 것으로 복원시키기 위해 특수한 이미지를 찾아내서 거기에 색을 입히기 시작한다. 조각난 것들이 유기적 전체로 보이기 위해서는, 마치 부패된 시신에 대한 혐오감을 피하기 위해 마련된 화장처럼, 과도한 허구의 질서로 공백들을 채우는 것이다(문형의 두 번째 아이러니). 베르테르가 그랬듯이, 손수건에 관한 수많은 요설(饒舌)들을 보면, 손수건 문학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고려해봐야 할 판이다.
<문예 노트>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