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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삼 년 전쯤, 친구는 내게 식물 하나를 선물하였다. 꽃무늬로 사방에 돋을 새긴 작은 화분에, 네 가닥의 잎이 단도처럼 쭉 뻗어 오른 것이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산세베리아(Sansevieria, Bowstring Hemp), 혹은 천년란(千年蘭)이라고 부르고, 꽃말은 관용이라고, . . . 전자파를 차단해주는 식물이라며 어디서 정보를 듣고는, 컴퓨터 앞에 많은 시간 동안 앉아있는 나를 배려해서 사 온 것이다. 난 동물들뿐 아니라 식물을 기른다는 것에 대해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아니 주제넘은 짓이라고 생각을 했다. 간혹 길을 가다 보면 멋진 옷으로 잘 차려 입고, 쇠사슬 목걸이를 채워 강아지들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면상들을 보게 되는데, 그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침을 뱉어주고 싶은 생각이 들곤 했었다. 식물이라고 다를까? 차라리 요긴하게 쓸만한 물건을 선물하지, . . . 살아있는 식물은 별로 달갑지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내 건강을 걱정해준 마음도 있고, 또 하도 성화를 부리기에, 어쩔 수 없이 눈에 띄지 않게 책상 한 구석에 밀어 놓았다. 전자파를 차단하려면 가급적 스크린과 내 눈 사이에 있어야 할 텐데, 저만치 구석에 숨어 있으니, 선물의 용도는 이미 무의미해진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녀가 가끔씩 집에 와서 물을 주거나 먼지를 닦아 내어 돌보았던 것 같은데, 나는 저 식물이 정말로 저기에 있는지 조차 의식하지 못했다. 어쩌다가 스크린이 너무 눈이 부셔, 녹색을 보면 괜찮아진다는 말을 떠올리고는, 잠깐씩 응시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렇게 쳐다보는 동안에도 나는 저것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알게 되었다. 저것이 내 책상 한 구석을 점유한지 이 삼 년이 훨씬 넘었는데, 또 나는 물도 한 번 제대로 뿌려본 적도 없는데, 어느새 이파리가 세 가닥이나 자라나 있는 것이다. 하나는 가장 높이 솟아 올라 있었고, 나머지 둘은 서로를 정답게 감싸 안으며, 체조를 하듯이, 아니 탱고를 추듯이 비틀어져가며 자라나고 있었다. 처음엔 이파리가 네 가닥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식물인줄 알았는데, 지금 자세히 보니 두 뿌리를 가진 두 개의 식물, 즉 한 쌍의 식물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한 쌍 중 한 뿌리에서는 뾰족이 높게 치솟아 투사의 모습을 한 이파리가 생겨나고 있고, 다른 뿌리에서는 두 가닥이 무용수들처럼 나선형을 이루며 꼬여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뿌리의 저 아래쪽을 돋보기로 자세히 보니, 이미 또 다른 두 가닥의 이파리가 조금씩 조금씩 돋아나고 있었다. 정말이지 놀라운 일이었다. 처음에도 그랬지만, 난 아직도 저 식물의 본래 모습이 무엇인지, 앞으로 어떤 모습일지 전혀 예측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원래 한 뿌리가 두 뿌리로 변한 것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두 뿌리였는지, 아니면 세 뿌리가 될지, 아니면 그 이상이 될지, 아니면, 결국에 가서는 하나의 거대한 뿌리에 매달려 공존하고 있는 잔가지들인지, . . .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들 자신도 모를 것이다. 이제는 화분이 아주 작게 느껴졌다. 저것들이 자라나 언젠가는 저 단단한 화분도 깨트리게 되겠지. 화분이 너무 단단해 깨트릴 수 없다면, 그냥 죽어버리던가.


저렇게 무럭무럭 커 가고 있는 걸 보며, 저 식물이 나를 거부한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하니, 조금은 위안이 되었다. 환경이 맞지 않아 죽어가는 식물을 보고 있으면, 마치 누군가로부터 거절을 당한 듯한 불쾌함이 느껴진다. 난 처음에 저것이 내 방에 들어온 순간, 얼마 되지 않아 죽어버릴 것이라고 단정했었다. 내 몸에서 풍기는 냄새라든가, 호흡이라든가, 정신과 영혼이 오염시킨, 이 음산하고도 폐쇄적인 방안의 공기에, 저것이 질식해 버릴 것이라고,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나 조차 숨이 막혀 버릴 것이라고, . . . 정말로 나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저 미물에게 어리석은 희망을 품지 않고, 오히려 귀찮아 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죽어가거나 시들어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 일은 너무도 괴로운 일이다. 그래서인지 난 살아있는 것이 곁에 있다는 사실이 유쾌하지 않았다. 특히 식물의 죽음에는 동물과는 전혀 다른 서글픔이 있다. 살아있는 존재에 대한 나의 거부는, 말하자면 나 자신의 절망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바래가고 있는 녹색의 식물들을 방 안에 들여놓으며, 또 하나의 절망과 죽음을 하루 하루 바라보게 될 줄 알았다. 그런데 나를 비웃듯, 저것이 저렇게 버젓이 고개를 쳐들고 살아있는 것이다.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내가 잠에 들어 있거나, 나 자신의 의식에 빠져 몽롱한 상태에 있거나, 어떤 일에 열중해 있는 동안에도, 저 식물은 내 옆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 방에는 스스로 달라져가는 것이 나 말고도 또 있었던 것이다. 살아있는 존재는 의식을 넘어서 있다. 그것은 우리가, 즉 의식적 존재가 의식을 하든, 하지 않든, 싫든, 좋든, 필요하든, 필요하지 않든, 우리와는 무관하게, 우리를 외면하며, 자신 안에서 스스로 살아간다. 어느 날 내 의식에 주의력이 생겨나서 바라보고 이해한 것은 그 결과일 뿐이다. 식물은 그 자체가 시간-존재이다. 지각할 수 없는 흐름 속에서, 동물의 자연에의 투쟁이나 공간적 운동보다도 더 급진적이고 강렬한 삶이 거기에는 있다. 그래서 식물은 경이로운 존재이다. 그것은 살아있는 동물이 움직이거나 자라난 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차라리 붙박여 있는 책상이나, 콘크리트 건물이나, 조각난 쇳덩어리가 꿈틀거리며 커가고 있는 것을 보는 것 만큼이나 놀라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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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에 관한 실천적 혼동으로부터 발생하는 본질적으로 다른 두 가지의 관점이 있다. 1) 삶 속에서 맺는 다양한 관계의 양태들을 필연적 법칙으로 이해하는 방향.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현실을 피할 수 없는 당위로 간주하면서, 모든 현실적 실천의 문제를 우리가 파악하는 법칙에 귀속시키며, 우리의 행위능력을 준법의 한계 위에 위치시키는 것으로 만족한다. 이와 같은 윤리는, 우리로 하여금 현실을 인식과 사유의 대상으로 파악하게 하기보다는, 우리의 의식이 포착한 현상을 그 자체 원인으로서 혹은 그 원인에 고유한 결과로서 파악하게 함으로써, 절대적인 명령과 복종의 관계를 상정한다. 자연 안의 다양한 양태들과 이들을 무리 짓는 이러저러한 법칙들을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면, 이 법칙들은 우리에게 부여된 도덕적 명령들로 돌변한다. 자연의 법칙과 질서들이 도덕적 강령들로 변할 때, 우리의 인식과 사유의 능력들은 영원한 진리에 의존하게 되고, 초월적 신의 이미지를 자신 안에 강렬하게 각인시키면서, 우리가 따를 수 있는 한 모든 능력들에 우선하는 하나의 모델을 세우게 된다. 우리는 특정한 하나의 사태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능력들을 제한하고 포기함으로써, 그 사태들과 조건들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암묵적인 복종의 강령들과 타협하면서, 현실을 직시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이 때에 우리는 현실에 대해 아무 것도 알고 있는 것이 없다고, 그리고 우리의 신체가 할 수 있는 능력을 의식이 제한하고 있다고 말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때에 우리는 인식과 사유의 질서가 아닌, 무지한 의식의 법칙에 따라 생각하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최소한 신학은 성서에서 주어진 것들이 인식의 기초라고 생각한다. 비록 그 인식이 합리적인 방식으로 전개되어야 하고, 심지어는 이성에 의해 옮겨지고 번역되어야 한다고 해도 말이다. 여기에서 도덕적이고 창조적이며 초월적인 신이라는 가정이 나온다. . . . 여기에는 존재론 전체를 혼란에 빠뜨리는 혼동이 숨어있다. 이해해야 할 것을 명령과 혼동하고 인식을 복종과 혼동하며 존재(l'Etre)를 당위(Fiat)와 혼동하는 오랜 오류의 역사가 있다. 법칙은 언제나 선악이라는 가치의 대립을 결정하는 초월적 심급이지만, 인식은 언제나 좋음-나쁨이라는 존재 양태들의 질적 차이를 결정하는 내재적 능력이다"(들뢰즈 41-42). 따라서 다음과 같은 또 하나의 방향을 생각해 볼 수 있다. 2) 현실적 관계들을 우리의 신체가 할 수 있는 능력들에 따라 조직하고 구성하는 방향. 스피노자가 『윤리학』을 통해 말하는 신체의 능력이란, 우리가 아는 한에서, 촉발(변용)능력을 말한다. 따라서 자연 안의 모든 개체들은 새롭게 분류되어야 한다. 그에 따르면, 동물들, 식물들, . . . 이러 저러한 다양한 사물들은 형태론적이고 기능적인 기관과 외양들에 따라 군집을 이루지 않는다. 무수히 많은 이 존재들이 서로를 결합하고 자신들의 군집을 형성하는 유일한 방식은 "유(類)나 종(種)과 같은 추상적 개념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촉발 능력에 의해서, 즉 그것들이 <할 수 있는> 촉발들에 의해서, 그것들이 자신들의 능력의 한계 내에서 반응하게 되는 자극들에 의해서"이다(들뢰즈 45). 신체의 능력을 표현하고 그것을 가능케 하기는 하지만, 그 보다는 그 능력들을 제한하고 능력에 앞서 우연적으로 결정된 신체의 기관과 기능에 의해 존재가 분류되지 않는다. 이들은 자신들 안에 본성적으로 가지고 있는 반응 능력, 동일한 기관과 기능 속에서도 무수히 많은 다양한 능력, 현실화된 것으로서 기관과 이 기관에 상응하는 특정한 기능보다도 어쩌면 더 심오한 심급에서 발생했던, 기관이 미 결정된 신체에서조차 잠재하는 능력, 바로 공명하는 능력에 따라 서로를 결합하며 집단을 형성한다. 촉발과 변용은 공명능력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이를 역능(puissance)이라 부른다. 스피노자의 촉발이론 전체는 바로 우리가 어떻게 이 역능을 최대화하고, 어떻게 이 역능을 현실화할 수 있는 관념을 생산하고, 어떻게 이 역능 안에서 자신과 신 그리고 자연의 모든 사물들과 필연적 관계를 맺을 것인가에 관한 실천적 문제들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촉발이론에서 능동 촉발과 수동 촉발, 그리고 수동 촉발에서 기쁜 수동 촉발과 슬픈 수동 촉발, 그리고 기쁜 능동 촉발에 관한 복잡한 문제들을 이해하기 위해 『윤리학』3부(Of the Origin and Nature of the Affects)를 읽어보자!). 확실히 이 이론은 존재의 내재적 양태에 관한 위상학이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법칙들에 조응하는 우리 자신들의 덕목을 말하지도 않으며, 우리 자신의 덕목과 행위 능력들을 법칙들에 따라 설명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 이론 안에서 법칙들은 오로지 우리 자신 안에 본성적인 능력들과 이 능력들간의 관계, 그리고 다른 신체의 능력들과의 관계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윤리학』의 모든 길은 내재성(immanence) 속에서 만들어진다. 그런데 내재성은 무의식 그 자체이며, 무의식의 정복이다. 윤리학적 기쁨은 사변적 긍정(affirmation)의 상응 개념이다"(들뢰즈 47).

인용문헌
들뢰즈, 질. 『스피노자의 철학』. 박기순 옮김. 민음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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