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을 좋음과 나쁨으로 구별한다는 것은 가치들을 순수 형식적 관계로 표면화한다는 것을 뜻한다. 예를 들어, 스피노자에게 악이란 사물의 본성을 이루고 있는 부분들의 관계를 해체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그에게 더 궁극적인 것으로서 악의 의미는 새로운 관계로의 이행을 의미한다. 신의 관점에서 관계들의 해체(악)는 다른 결합을 가능케 하는 새로운 관계들로의 이행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절대적 가치로서 선과 악의 심급은 좋음과 나쁨의 심급으로 치환되면서, 가치들의 상대적 관계가 형성된다. 가치들의 상대적 관계는 동등한(동일하지 않은) 능력을 가진 신체들간의 만남을 긍정하게 된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은 존재한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이것은 상대적 가치인 한에서 그렇다. 우리는 우리자신에 대해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선과 악으로 혼동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좋은 것과 선, 혹은 나쁜 것과 악은 서로 구별되어야 한다. 가치들을 순수 형식적 관계로 표면화한다는 것은 이 둘을 구분하고, 모든 선과 악이라는 종교적 배후를 관계들로부터 걷어내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가치들의 표면화는 모든 신체들간의 이러저러한 관계들의 우연적 만남을 긍정한다. 표면 위에서 이들간의 만남은 우연적이며 상대적이다. 만남의 우연적 본성이 긍정되기 시작하면, 다음에는 새로운 형태의 관계들이 출현한다. 1) 그것은 우선 죄의식을 없앤다. 슬픈 정념의 도덕적 원인으로서 죄의식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고 느낄 때 발생한다. 수동성이 죄의식과 그와 관련된 모든 슬픈 정념을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슬픈 정념은 또한 수동성을 불러들인다. 이들 양자는 모든 원인을 자기 자신이 아닌 외부에서 찾는다는 점에서 서로 뗄래야 뗄 수가 없다. 이와 같은 이차적 존재에게 다른 모든 존재들은 원인 그 자체가 되거나 혹은 원인과 관계하는 계시가 될 것이다. 이차적 존재는 자기 자신을 하나의 결과로 혹은 목적으로 이해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 앞에 주어진 모든 현실적 관계들은 하나의 명령이 되거나 복종해야 할 법칙이 된다. 그는 삶을 필연적 운명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우리의 의지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긍정은 이와는 반대의 결과를 끌어낸다. 우연의 긍정은 묘하게도 우리를 구속하는 모든 우연적인 것들로부터 자유롭다. 왜냐하면 이 때의 우연성이란 능동적인 것들간의 만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 안에 존재의 원인을 내포하고 있는 존재들간의 관계. 이러한 관계들의 양태를 결정하는 윤리학적 토대는 이제 더 이상 선과 악이라는 "심판의 체계"가 아니라, 좋음과 나쁨이라는 질적 차이가 될 것이다. 절대적 가치가 상대적인 것으로 전환되기 시작하면서, 존재의 문제는 관계들의 양태의 문제로 귀결된다. 2) 능동적인 존재들간의 관계가 존재론적 윤리학의 테마라면, 이제 윤리학은 신체들이 좋은 관계를 맺는가 혹은 나쁜 관계를 맺는가에 따라 그들을 분류하게 된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좋은 관계는 신체들이 서로간에 관계들을 형성하면서 각각 자신 안에 깃든 본성적인 것을 완성하거나, 자신의 능력들을 보다 완전한 것으로 증식시킬 때이다(음식물의 경우). 반대로 나쁜 관계는, 자기 자신의 신체를 구성하는 고유한 관계가 다른 신체와의 관계를 통해 해체될 때이다(혈액을 해체하는 독의 경우). 좋은 관계는 신체의 능력이 보다 완전한 것으로 이행하는 한에서 기쁨을 생산하고, 나쁜 관계는 신체의 능력이 보다 적은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한에서 슬픔을 유발한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신체는 지속과 연장(extension)의 속성 안에 존재한다. 따라서 신체는 자신의 고유한 능력을 유지하고 나아가 보다 완전한 것으로 자기 자신을 확장하려는 노력 속에서 전개된다. 그런 이유에서 좋은 관계는 신체들 각각이 적합한 관계들을 통해 자신들의 능력을 완성시키는 과정이며, 나아가 이 관계는 신체들을 기쁨의 과정으로 유도한다. 이와 같이 능동적인 것들 간의 이러저러한 관계들 속에서 우리는 만남의 새로운 의미를 알게 된다: 능동적인 존재의 양태적 관계. 능동적인 존재는 만남들 속에서 자신에게 적합한 속성을 표현하는 다른 신체들을 선택한다. 자신에게 적합한가 혹은 그렇지 않은가를 구별하는 능력을 통해 신체들은, 자기 자신의 고유한 본성을 표현하고, 자신의 능력과 조응하는 한에서 기쁜 만남을 조직하고, 다른 신체의 능력들을 자신의 고유함 속에서 발견하고, 이들과 결합하고 통일을 이루면서, 자신의 능력을 보다 큰 완전성으로 이끈다. 따라서 모든 결합하는 관계들은 명령이나 법칙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이고 친화적인 양태적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왜냐하면 모든 만남은 그 자신으로부터 조직된 것이기 때문이며, 어떠한 만남도, 필연적으로 결정된 관계(선/악의 경우), 죄의식과 슬픈 정념을 유발하는 관계를 통해서는 나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슬픈 관계, 즉 신체를 결합하는 고유한 관계가 해체되는 관계의 경우, 신체는 더 이상 지속과 연장이라는 고유한 본성을 유지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슬픈 관계 속에서 신체는 수동적이다. 신체가 수동적 본성을 갖추게 되면, 더 이상 자신의 고유한 본성을 표현할 수 없으며, 자신의 능력과 조응하는 다른 신체를 선택할 수도 없으며, 따라서 보다 큰 완전성으로 자기 자신을 이끌 수가 없다. "우연한 만남에 따라 살아가고, 그 결과들을 수동적으로 겪지만, 정작 자신이 겪는 그 결과가 자신에게 불리하게 나타나고 자신의 무능력을 드러낼 때마다 한탄하고 비난하는 사람은 열등하다고, 혹은 예속적이라고, 혹은 약하다고, 혹은 미련하다고 말해질 것이다"(들뢰즈 39). 이들은 모두가 서로를 알 수 없는 무지한 관계들로 삶을 이루며, 따라서 삶을 폭력이나 기만으로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소극적 관계를 통해] . . . 어떻게 좋은 만남보다는 나쁜 만남을 만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죄의식으로 인하여 어떻게 자기 자신을 파괴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원한 때문에 어떻게 타인들을 파괴하지 않을 수 있고, 그리하여 자신의 고유한 무능력, 자신의 고유한 예속성, 자신의 고유한 질병, 자신의 고유한 소화불량, 독약 그리고 독물을 어떻게 도처에 퍼뜨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들뢰즈 40) 윤리학이 선과 악을 좋음과 나쁨(기쁨과 슬픔)으로 치환한다는 것은, 존재들이 맺는 관계가 절대적 법칙에 의해 설명되거나 환원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기 때문에 존재는 다른 존재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능력을 초월적인 법칙에 맡길 수가 없다. 자신의 능력과 본성에 적합한 것(좋은 것, 기쁨을 유발하는 것)과 결합하고, 적합하지 않은 것(나쁜 것, 슬픔을 유발하는 것)을 거부하는 과정은 우선적으로 자신에게 속한 본성과 능력이 어떠한 양태들로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아는 과정이며, 따라서 다른 것들과의 결합과 해체의 과정에서 자신에게 속한 본성과 능력에 적합한 것이 무엇인가를 발견하는 과정이다. 그런 이유에서 상대적 가치들과 우연적 만남들을 단순히 가치들에 대한 순간주의나 관계들에 관한 수동성을 의미한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가치의 내재적 판(The plane of immanence) 위에서 신체들간의 우연적인 만남은 각자의 능동성이 전제되는 한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며, 이러한 능동적인 만남들이 조직되기 위해 필요한 가치들의 상대성은 각자들간에 내재하는 공통성이 전제되는 한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인용문헌
들뢰즈, 질. 『스피노자의 철학』. 박기순 옮김. 민음사. 2001.

댓글을 달아 주세요
이 글 읽기 전에 아랫글 읽고 답글 달았는데, 이 글을 먼저 읽었다해도 같은 답글을 달았을겁니다 ㅎㅎ
((아랫답글 먼저 보세요^^))
여기선 도덕경 7장 중 다음 구절이 어울릴 듯 합니다.
天地所以能長且久者, 以其不自生, 故能長生. 하략
하늘과 땅이 오래갈 수 있음은, 자기의 삶을 조작치 않기 때문이다.
<도덕경: 김용옥 번역 p.25>
여기서 '삶을 조작치 않기'에 소위 관습도덕, 종교가 권하는 수동적 죄의식에서
자유로워지는 일도 포함이 되겠지요?...
"우연의 긍정은 묘하게도 우리를 구속하는 모든 우연적인 것들로부터 자유롭다"
이 말이 저의 속에서 울리는 공명이 큽니다.. 꽤 오래 전부터 이러한 느낌을
갖게 되었는데 그런 막연했던 느낌을 이 말로 딱 집어내어 내게 보여주었다
할까..
"신체가 수동적 본성을 갖추게 되면, 더 이상 자신의 고유한 본성을 표현할
수 없으며.."
이건,,,,제가 지난 십여년 간 몸으로 힘들게 체험하면서 깨달은 사실이네요..
즐거운 깨달음!
ㅎㅎㅎ
스피노자의 윤리학을 좀 공부하려 했더니 . . 노자를 몰고 오더니 . . 난데 없이 자서전을 쓰고 계시네 . . 일절을 풀어보시죠 . . 그 화려했던 인생살이를 . .ㅎㅎ
Are you laughing at me?? 우쒸~
길어서 못쓴다고 했죠!! 대필해서 소설을 쓰시던지,,누가 알아요 돈 될지 ㅎㅎ
거시기,,노자 도덕경 풀이를 곁들인 소설 ㅍㅍㅍㅍ ^^
초안잡아! 초안! "비운의 사과향 " 제목 어때요? ㅎㅎ
지금 제가 . . "톰소여의 모험" 아시죠? . . 어떻게 어떻게 해서 그걸 지금 번역을 하고 있는데 . . . 톰이 학교를 땡땡이를 치고 . .숲속에서 혼자 놀고 있는 부분을 읽고 있어요 . . .근데. . .우리가 알고 있는 것(아이들의 명랑, 쾌활, 유머) 하고는 많이 다르게 . . 너무 슬퍼요. . 혼자 놀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 .. .
마크 트웨인(Mark Twain) . . 이 사람 정말.. 인간에 대해 무한한 연민의 눈을 가지고 있네요 . . 말년에 비관적이고 우울증에 걸려 고생했다고 예전에 읽은 것 같은데 . . 그때는 왜 그랬는지 몰랐는데. .. 지금보니까 이해가 되네요 . .
겉으로는 아이의 유머러스하고 장난스러운 말썽이 있는데 . . 그 아래에는 인생에 대한 아주 깊은 실망감과 낙담, 절망 같은게 있더라구요. . 아이가 생각하는 인생이 . . 대단히 철학적인 절망이 들어가 있어요 . . 그래서 죽는게 얼마나 평화로울까?를 혼자서 놀다가 문득 곰곰히 떠올려요 . . 그리고는 죽을 수 없으니까 . .다시 잊고, 장난질에 빠지고, . .생각해보니까 저도 그랫고, . .아마도 다른 많은 사람들도 어릴적에 그 비슷한 느낌들을 . . 철학적 성찰들을 많이 가지고 있었을 것 같아요. . 잊어버리고 있었지만 . . .
어디서 들은얘긴데 . . 왜 아이가 아침에 깨어나서 울잖아요?! . . 그게 왜 그러냐 하면 . . 깨어나서 하루를 보낼 생각이 . .갑자기 무의식적으로 떠오르면서, 자기도 모르게 깊은 절망에 빠져서 그렇다고 그러더라구요 . .깨어난 것이 너무 절망스러워서 . . 놀랍지 않아요? 전 그 얘기 듣고 깜짝놀랐어요 . . 그런데. . 그런 아이들은 주로 가정불화가 많아서라고 하던데 . .
근데 왜 갑자기 이 얘기를 했지? ^^
안휘,,,,,,,,,그 좋은 머리에서 나오는 제목이 고작,,, 무슨 무협지 소설같아 ㅋㅋㅋ
초안도 길어서 잡기 어려우니,,,,우리 걍 녹음해서 합시다 ^^;
제목은...<노자를 짝사랑한 여자> 푸하하하하하
마트 트웨인 저도 좋아해요,,그의 소설들
아참, 제가 어릴 적엔 빨강머리 앤의 팬이었네요. 내가 그녀가 되는 상상 (지금도 가끔 좀^^)
소설 얘기 하시니 찰스 디킨스도 생각나네요. 그의 <Great Expectation>을 수면제 대용으로
읽었었는데 참 재미있더라구요. 한국어로 이미 번역은 되었겠지만(제목을 뭐라 번역했지요 한국선?)
마트 트웨인하곤 다른 분위기이지만 그도 역시 인간에 대한 연민의 눈이 깊었던거 같아요
훈님, 정말로 소설을 쓰시지 그러세요? 아니 소설같은(보다 더 한) 나의 자전 ㅎㅎㅎ
후하게 드릴께 90프로 ^^
그 비운이 그 비운이 아니라 飛雲 혹은 泌雲이라면 좀 무협지 안 같을려나 . . ㅎㅎ
노자 분위기도 좀 나고 . . 노골적으로 <노자> 이렇게 쓰니까 . . 꼭 <놀자> 같잖아요 . .
디킨스 . . <위대한 유산>으로 번역되었죠 . .
디킨스와 트웨인은 아주 많이 다르죠 . . 비교할만한 짝은 아니지만 . .
그리고, 소설은 아무나 쓰나요? . . . 전 그런 소리 들으면 정말로 순진하게 믿어요 . . 그래서 쓰다가 후회하지 . .^^
90프로라 . . 구미가 당기긴 하네 . .
날으는 구름?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더 무협지 같아 뭐,,
손오공 생각나요~~~~~~~ ㅠ.ㅠ
순진하게 믿고 쓰신다면,,역시나 저도 미안해 죽겠지요(정말로 사망 ㅎㅎ)
그치만,, 소설도 역시나 멋지게 잘 쓰실 것 같은 느낌은 솔직한 맘이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