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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1/23 우리 사회의 실업(失業)과 생산체계에 관한 짧은 논평
  2. 2006/08/30 즐거운 월요일 (6)

흔히 실업(失業)의 사회적 해결가능성에 대해 말하는 이들이 종종 있지만 한번 웃어보자고 하는 소리일 것이다. 사실은 그 사람조차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를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실업이 거의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는 점은 매년 연례행사처럼 벌어지고 있는 노-자간의 협상테이블이 잘 예증해주고 있다. 그들은 그 테이블에서 상호간의 호혜 원칙을 발견하고 싶어하며, 양자간의 신뢰를 다지는 기회를 엿보고 싶어한다. 심지어는 가족주의적 단결(업주들이 가장 좋아하는 경쟁 or 전쟁모드) 아래 회사와 공장을 일종의 가계(家系)로 둔갑시킬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 테이블의 현실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근본적으로 무엇에 토대를 두고 있는가를 보다 일상적으로 환기시켜 줄뿐이다. 해소할 수 없는 모순. 어떤 식으로든 대립적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시장경제의 태생적 한계(간혹 맑스주의 입장에서, 포스트 모더니즘 또는 후기 자본주의라고 하는 색다른 시기라고 해서 근본적인 모순이 해소된 것이 아니라는 관점은 일견 설득력이 있다. 다만 어떤 모순인가를 따져봐야 할 문제이며, 특히 현실의 이해와 그에 대한 대응방식을 혼동함으로써 비롯되는 오해들이 있긴 하지만). 어떤 점에서 협상이란 우리가 아직은 가능성이 있다는 믿음, 즉 아직은 안정된 사회가 파괴되는 상황까지는 오지 않았다고 하는 믿음을 지연시키고 유보시키려는 제스쳐에 불과하다. 혼란한 사회란 협상이 불가능한 사회가 아니라, 반대로 협상을 필요로 하는 사회이다. 적절한 협상 타결에 의해 결정된 생산과 분배의 특정 시기가 의미하는 것은 사회적 안정이 아니라, 다음에 열릴 협상 테이블을 기다리는 동안 만연해 있을 긴장과 불안이 팽배한 사회가 아닐까? 또한 완벽한 체계는 그래야만 유지된다. 그래서 하나의 사회란 언제나 혼란과 동요가 있기 마련이다. 사실 불안과 동요는 업주에게 있어서는 반드시 필요한 윤활유이다.


노동자 운동이 갖는 (긍정적) 의미는 사회 전체의 부(富)가 무의식적으로 재분배되는 효과에 있을 것이다. 임금투쟁이나 노동시간 단축을 위한 파업의 성공은 곧바로 기업주가 계획했던 생산 단가의 상승을 불러온다. 그리하여 기업주에게 할당된 지분과 그가 축적할 수 있는 부의 몫이 줄어들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는 생산성뿐만 아니라 이윤의 감소를 의미한다. 이윤의 축소는 기업주로 하여금 더 많은 생산성 투자를 불가능하게 할 뿐만 아니라, 그 결과로서 노동임금과 같은 생산비용의 확대를 초래한다. 하나의 사회가 자본주의적 생산에 의존해 있는 경우, 이와 같은 사태는 결국 경제성장의 퇴행을 의미할 것이다. 우리가 언제나 귀가 닳도록 듣고 있는 부진한 경제성장의 실체는 기업의 부진한 이윤과 그에 따른 재생산 투자의 축소에 다름 아니다. 그 외에 무엇이 있을 수 있겠는가? 만일에 기업가가 아닌 일반인들이 경제침체를 체감한다면, 그것은 그들이 몸담고 있는 가계가 이미 기업과 뿌리깊은 유착관계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이미 편중된 부를 상거래나 교환행위들 속에서 실천함으로써 내면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파업이 실패하는 경우, 즉 노동자의 수입이 감소하거나 노동 시간이 증가한다는 것은 생산의 증가와 그 이윤의 특정 부분이 생산력 발전을 최대로 도모하기 위한 투자에 쓰였음을 의미한다. 자본가의 관점뿐만 아니라 현재 우리의 관점에서 사회가 안정되었다고 말할 때는 바로 이런 의미에서이다. 우리가 자본가의 시선으로 세계를 보기 시작한 것은 꽤 오래된 얘기다.


그리하여 노동과 자본의 이 해소할 수 없는 모순의 시이소 놀이는 실업의 문제와 밀접한 관계를 맺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기업주 입장에서 고용의 확대는 곧바로 생산비용의 확대를 의미한다. 경제적으로 특히 어려운 시기가 주기적으로 도래할 때마다 등장하는 고용 감축이나 권고퇴직 바람이 사회 전체를 휩쓰는 것도 다 이 때문이다. 그것은 가장 단순하고도 명료한 모순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이윤율이 증가하려면 최소의 인원이 최대의 생산성을 확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마찬가지로 성장률은 고용율에 반비례하여, 그것을 따돌리지 않으면 안 된다. 좀 극단적으로 말해, 사회적 부가 축적되려면 노동자가 사라져야만 한다. 왜냐하면 자본가에게 있어 노동자란 비용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이 자본과 노동의 모순적 관계 속에서 발견되는 역설이다. 그러니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늘어나고 있는 고용인원이 어느 한계에 치달으면 성장을 위해 도리가 있겠는가? 구조조정이란 냉철하고도 합리적인 계산하에 이루어지는 비용의 절감 외에는 어떠한 도덕도 개입되지 않는다. 마치 이 사회의 주기율표라고나 할까? 우리 사회에서 경제 성장률은 올라가고 있는데 고용은 줄어들고 있다는 이 이상한 신비는 다 이런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이 없다.


자본가들의 눈에 비친 노동자란 재화를 생각 없이 방탕하게 써버리며 저축할 줄 모르는 벌레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니 노동자들에게 너무 많은 부를 건네주었다가는 이 사회가 걷잡을 수 없는 타락의 구렁으로 곤두박질 할 것이다. 이들에게 가혹한 현실을 일깨우고, 그 현실을 잘 버티기 위해 필요한, 절약하는 삶과 가족의 신성함 등을 가르쳐야만 한다: 이들이 아침에 일어나 굶어죽지 않고 출근할 수 있는 기력이 있는 만큼만 베풀어야 한다. 상품 소비사회 혹은 후기 자본주의는 다소 달라졌을 것이다: 이들이 퇴근하여 자신이 만든 물건을 더 많이 살 수 있을 만큼은 베풀어주어야 한다. 한참 전부터 이미 우리는 소비의 미덕을 체화하여 오지 않았는가? 그런데 베풀려면 나누어 줄 여분의 몫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남아도는 부가 이 사회에 존재하는가? 바닷물에 밀가루를 빠뜨리는 한이 있어도, 그들에게 무상으로 제공해줄 여분의 빵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지금 당장에 필요한 것은 (존재하지도 않는) 나누어 줄 몫의 합리적 배분이 아니라, 성장에 필요한 이윤을 가급적이면 최대로 쌓아놓아야 한다는 것. 언제든지 협상테이블은 이를 수치상으로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설득하기 위해 항상 "아직은. . . "이라는 수사(修辭)를 동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러한 사회에 있어 만족스러운 분배란 언젠가는 도래할 하나의 신화가 되어 버린다.


완전고용이 실현된 사회를 가정해본다면 어떨까? 과연 거기서 이윤이 최대화 될 수 있을까? 과연 기업주들이 그것을 생각이나 할 수 있을까? 과연 그것이 자본주의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들 중 몇 몇은 흔히 완전고용을 꿈꾸면서도, 정작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에 대한 집착은 버리지 못한다. 이데올로기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있어 자본이나 시장은 단순히 생산과 분배의 체계가 아니라 일상적 행위를 결정하는 윤리적 토대가 되어버렸다. 교육이 이를 가능하게 했으며, 이런 저런 실천들이 이를 유지시켜왔다. 그러니 곧 죽어도 그 안에서 해결하고 싶어하며, 반드시 해답이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하지만 해답이라고 믿고 감사해하며 손에 잡은 것은 모두가 소똥(bull-shit)이 아니었던가? 전혀 반어적인 의도 없이 말해서, 십중팔구 해답은 없다. 있어서도 안 된다. 이것이 바로 좌파가 스스로 숙지하고 민중들에게 가르쳐주어야 할 사실이다. 니체가 허무주의를 비판한 이유는 해답의 불가능성 때문이 아니라, 정 반대로 그들의 의기양양한 해답의 도래신화 때문이 아니었던가?

Posted by huun

다들 아는 얘기지만 한번 더 상기하는 의미에서,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맑스(Karl Marx)가 말했던 노동 소외를 간단히 요약해보자. 그것은 노동을 하는 사람이 자신의 노동을 즐겁게 여기지 않는 상태일 것이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일하는 사람이 자신의 일을 고역으로 느낀다면, 그 일을 그만두는 것이 정답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그럴 수가 없다. 굶어죽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길, 자본주의라는 정치-경제 체제가 여차저차 하여 사람들로부터 모든 생산수단(토지, 기계, 건물, 원료 등)을 빼앗고, 오로지 노동력으로만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게끔 했기 때문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굶어죽지 않기 위해 억지로 공장에 들어가 일을 하면서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맑스주의자들의 구호들 속에 항상 등장하는 '빼앗긴 노동', '강요된 노동', '소외된 노동'은 바로 이런 의미이다.

맑스가 쓴 <자본>(Das Kapital)이라는 책에 그 좋은 예가 하나 있다. 19세기에 한 영국 자본가가 공장을 세우기 위해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 그리고 이런 저런 생산수단을 싣고 오스트레일리아의 스완강 지역으로 갔다. 그러나 공장을 세우고 나니 아무도 일하러 나오지 않았다. 당시의 그 지역은 주인 없는 땅이었기 때문에 누구든지 땅을 차지해서 자신만의 경제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공장이 생산을 하려면 즉 자본주의가 가동되려면, 저 사람들로부터 땅이나 일체의 생산수단을 빼앗아, 그들이 공장에 들어와 일하지 않으면 안 되는 환경을 만들어야만 한다. 실제로 영국에서는 중세때부터 수세기에 걸쳐 토지를 합병하고, 농지를 전환하고, 사유화하는 등의 운동이 있었는데, 이를 인클로져(Enclosure movement)라고 한다. 그 과정에서 쫓겨나 갈곳이 없었던 수많은 농민들이 대도시로 몰려들어 공장노동자를 이루게 되었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초석이 되었던 것이다. 산업 경제 개발에 박차를 가하던 6, 70년대의 한국도 이러했을 것이다. 지금의 우리가 그런 일을 직접 경험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자본의 품 안에서 살고 있으니, 자신도 모르게 이미 무엇인가를 빼앗긴 결과 속에서 살고 있는 셈인가?


강요된 일은 우리의 삶을 여러가지 면에서 비참하게 만든다. 그 모든 비참함의 목록을 전부 나열할 수는 없다. 다만, 우리가 쉽게 체감하는 비참함을 단 한가지만 말한다면, 우리는 일하지 않을때 가장 행복해진다는 점이 아닐까? 솔직히 말해 평생 일 안 하고 살았으면 좋겠다. 가장 기다려지는 토요일 오후! 지금은 좀 나아져서 금요일 오후! (엄밀히 말해 나아진 것도 아니다. 휴일을 잘 보내려면 돈이 필요하다) 점점 배가 아파오는 일요일 저녁! 월요병! 실제로 월요일만 되면 배가 아파오는 증후군이 있을 정도이다. 일 자체에서 오는 고역도 있지만, 이제는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불쾌함도 역시 우리의 배를 아파오게 하는 요인이다. 그들은 동료이기 보다는 잠재적 적(敵)이라고 해야 더 옳을 것이다. 노동과 관련하여 겪고 있는 이 모든 불쾌함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월요일만 되면 어김없이 그 현장들 속으로 뛰어든다. 그리고는 불쾌함의 원인이 적응을 못하는 자신의 성격탓이라거나, 사회화가 덜 된 탓이라거나, 등등의 이름모를 죄의식을 가지며, "인내가 부족해!"라고 자위하면서 조용히 자신의 자리에 앉는다. 흔히 인간관계가 좋다고 알려진 사람들은 잘 참는 사람들이다. 기독교에서는 노동이란 낙원에서 추방당한 벌, 즉 인간 자신의 죄값이라고 가르친다. 그래서 삶 자체는 노동의 과정이고, 노동이란 으례 고역이며, 참아야 할 어떤 것이다. 그래서 일주일 내내 힘든 고역을 참고 견뎌 내었다. 그런데 단 하루 좀 편하게 있어볼까 했더니, 별안간 '우리의 일요일'을 '주일'이라고 부르며 교회에 나가 기도를 드리란다. 인생 자체가 무슨 극기(克己) 훈련장 같다.

맑스는 인간의 본질을 노동이라고 보았다. 인간은 일하는 존재이며, 일하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의미했던 노동이란 아담 스미스(Adam Smith)와 같은 고전 경제학자들이 말했던, 또 대부분의 우리가 배워왔던 의미에서의 노동은 아니었다. 그에게 있어 노동이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생산하면서 삶의 충만을 경험하고, 일 그 자체가 주는 행복을 만끽할 수 있는 일이지, 더 많은 임금과 더 많은 댓가를 받음으로써 얻게되는 승리감 따위로 유지되는 그런 저질적 노동이 아니었다. 노동의 의미가 다른 것이다. 타인으로부터 댓가를 바라는 일! 그리하여 지겹고 힘들지만 어쩔 수 없이 하는 일! 눈치보며 하는 일! 잔머리를 굴리는 일! 그 자체 경쟁이고 싸우는 일! . . . 이것이 우리를 노예 상태로 만드는 일이고, 우리의 몸과 마음을 속박하는 쇠사슬이다. 우리가 풀어헤치고 벗어나야 할 것은 궁핍이 아니다. 바로 쇠사슬 그 자체로서의 노동이다. 그런 의미에서 임금투쟁은 근본적이지 못하다. 심지어 그것은 쇠사슬에 흉측한 흠집들만을 냄으로써, 그에 묶인 우리의 상처를 더 아프게 할 수가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보다 많은 월급이 아니라 바로 즐거운 월요일이다. 이것이 바로 맑스가 궁극적으로 원했던 것이 아닐까? 예술가들이 밥을 굶으며 궁핍에 허덕이면서도 자신의 작업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 맛을 본 것이다.


노동을 강요한 것은 삶 자체가 아니다. 여차저차 하여 우리 자신이 만들어낸 체계, 쇠사슬로 발목을 묶었던 고대나, 아버지의 이름 아래 말씀의 무게로 정신을 내리 눌렀던 중세의 서구처럼,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낸 어떤 규칙들이 거꾸로 우리의 노동을, 나아가 우리의 삶을 힘들게 한 것이다.

<문예 노트>
Posted by hu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