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증과 변증법이라는 언어의 두 메카니즘은 자연스럽게 두 작가의 묘사의 차이를 도출한다. 두 경우 모두 순수 이데아의 상태를 목적으로 하지만, 사드의 경우 외설적 묘사가 반복되는 반면에 마조흐의 경우에는 외설적 묘사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미 언급했듯이 매저키스트는 고통과 굴욕 자체에서 오는 쾌감을 경험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굴욕적인 상황으로부터 "이차적인 이익"을 이끌어 내고 있으며, 이는 바로 매저키즘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27> 매저키스트의 목적은 고통이나 굴욕에 있지 않으며, 그것과는 전혀 다른 곳에 집중하고 있는 셈이다. 흔히 고통을 넘어서는 쾌감이나 굴욕을 견뎌냄으로써 획득하게 되는 자유로움이나 해방 감이 매저키스트의 쾌락을 결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와 다르다. 그는 굴욕에 처했을 때 그것을 거부하고 부인하는 방식으로 쾌감을 경험한다. 쾌감은 플라톤적 상상력으로 도출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외설적 묘사의 반복이나 노골적인 묘사의 자극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그것을 피함으로써 초월적 묘사가 암시되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직접적인 표현이나 외설적 묘사보다는 우회적인 다른 방식의 묘사가 오히려 더욱 큰 효과를 보여준다.
사드는 부정의 메카니즘으로 말하면서 자신의 망상인 순수 이데아를 실현한다. 물론 부정은 개인적 요소와 비 개인적 요소에서 다르게 나타난다. 여기서 부정의 두 수준을 목격할 수 있다. 하나는 부분적인 과정으로서, 그리고 다른 하나는 총체적인 이데아로서. 부정의 이러한 두 수준은 사드의 세계에 나타난 두 자연의 개념과 일치한다: 이차적 자연과 일차적 자연. 이차적 자연은 경험세계의 영역으로서, 인과관계와 필연의 법칙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 프로이트가 구분한 본능의 두 차원 - 에로스/타나토스 - 에서 에로스의 영역과 일치하는 이차적 자연은 따라서 쾌락원칙의 지배를 벗어날 수 없다. 물론 여기서도 법칙의 부정과 자연으로부터의 위반이 가능하지만, 언제나 그 위반은 법칙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않는 한에서만 가능하다. 따라서 죽음의 본능(Death Instinct or Thanatos)은 아직 완전히 실현되지 않는다. 여기서의 부정과 파괴와 죽음은 쾌락원칙의 지배 안에서만 가능한 제한적 파괴인 것이다. <파괴는 단지 창조와 변화의 역일 뿐이며 무질서는 또 다른 형태의 질서이고 죽음에 의한 해체는 생명의 구성과 동일시된다. 모든 곳에 부정적인 것이 스며들어 있지만 그것이 보여주는 죽음과 파괴는 단지 부분적인 과정일 뿐이다. 27> 이러한 자연 안에서 새디스트는 자신의 망상을 실현할 수 없다. 언제나 이 자연 안에서는 경제의 원리가 지배하고 있으며, 생명의 보존과 유지를 필연적 조건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여기서 절대적 악의 실현과 제도화라는 사드의 망상은 언제나 실패하게 되어 있다. 새디스트는 <완전범죄의 불가능성>을 경험한다. 이차적 자연 안에서 순수한 이데아의 실현이 불가능함을 목격한 새디스트는 실망한다. 심지어는 타인에게 부과한 고통으로부터 이끌어지는 자신의 쾌감마저도 이차적임을 알게 된다. 이차적 자연에서는 철저히 개인화된 요소들 속에 갖혀 버림에 따라 그가 실행하는 악의 차원은 절대적 순수 이데아의 수준에는 도달하지 못하는 것이다(주1). <이러한 자연에 직면할 때 새디스트는 실망 감을 감추지 못한다. 어느 것도 그를 만족시키지 못한다. … 자아-만족 메커니즘에서 부정적인 것은 긍정의 역에 의해서만 가능해 진다는 점이다. 27> 쾌락원리는 부분적 과정으로서의 부정에 의존하는 원리이다. 부정 혹은 부정적인 것은 언제나 살아남는 한에서만 요구되는 자극인 셈이다.
그러나 또 하나의 층위가 있다. 경험적 사실 속에서는 주어지지 않는 자연으로서, 이것은 관념의 수준에서만 영위가능한 <원초적 망상>이다. 일차적 자연에서는 경제적 사유가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지배권이라는 최종적 진리를 초월한다. <일차적 자연은 … 모든 통치권과 모든 법을 초월하는 순수부정의 자연이며, 창조와 개인화 혹은 보존의 필요로부터도 자유롭다. 순수부정은 기반이 불필요하며, 모든 기반을 초월한다.… 이차적 자연만이 경험의 세계를 구성한다. 부정은 다만 부정적인 것이라는 부분적 과정으로만 주어진다. 따라서 근원적 자연은 필연적으로 순수 이데아의 대상으로만 가능하다. 또한 순수부정은 망상이다; 그러나 또한 이것은 이성 자체의 망상이기도 하다. … 그것은 오히려 그가 망상의 관념을 전개하고, 이성의 특권인 과대망상을 전개 시키는데서 오는 내적 필연성이다. 27> 우리는 이와 같은 자연을 파괴적 자연 혹은 타나토스라고 말한다. 이것은 에로스와도 구분되며 쾌락원칙 내에서의 파괴본능과도 구분되는 근본적 부정이다. 여기서 죽음본능은 대문자로 표기된다: the Death Instinct. 일차적 자연에서의 부정은 부분적 과정으로서 제한적일 수 없으며, 근원적 토대의 부정을 의미한다. 이것은 창조와 긍정의 역으로서도 아니며, 경제적 체계 내의 전략으로서 부정도 아니다. 이것은 무(nothing) 그 자체이며 경제를 초월한다. 따라서 이것은 <침묵 30>으로 유지된다. 여기에는 투쟁의 원리로서 지배권을 상정하지도 않으며, 합리주의가 들어설 자리도 없다. 여기서 개인화되는 요소들은 아무 것도 없다. 유지되고 보존되어야 할 어떠한 개인이나 요소들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모든 고통은 절대적 극한 속으로 스며들면서 고통과 쾌락의 경계가 불분명해 진다. 그러나 일차적 자연이 침묵으로 유지됨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또한 모든 사물을 결정하는 기원적 토대가 된다. <모든 것이 이 침묵에 의존한다. … 우리는 이에 대해 논증과 신화의 술어들을 통해서만 말할 수 있다. 30> 이것이 새디스트가 악의 실행들 - 사드의 경우 논증 - 속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절대적 악의 제도화인 것이다.
새디스트의 망상을 통해 구성되는 일차적 자연은 그로 하여금 이차적 자연의 부정을 반복하게 해주는 근원적 동기가 된다. 왜냐하면 폭력의 대상으로서 피해자나 폭력 그 자체 심지어는 자기 자신까지도 아직 이러한 자연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의 실망은 언제나 새로운 폭력과 가학의 메커니즘을 반복하게 해주며 강화시키는 촉매로 작용하는 것이다. 절대적 악을 구체화하고 육화하기 위해서는 이차적 자연과 심지어는 자기자신까지도 부정해야 하는 것이다. 새디스트는 이차적 자연 뿐 아니라, 그것에 갇혀있는 자아 까지도 부정하는 방식으로 묘사한다. 이것이 사드의 언어에서 보여주는 부정의 두 층위이다. 그러나 파괴적 본능이 대상에 집중하면서 부정을 강화하고 반복하는 과정은 만족스러운 것이 아니다. 순수 이데아의 부정이란 그 토대까지도 파괴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대상에 집중하는 자아가 여전히 이차적 자연의 제한적 존재라면 대상의 부정이란 의미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새디스트는 순수 이데아를 실현하고 육화하기 위해 자기자신까지도 파괴하는 완전부정을 실현하고자 한다. 보존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되돌아올 이익이란 어디에도 없는 부정, 이것이 새디스트의 근원적 망상 속에서 드러나는 논증의 제도이다. 사드에게 있어서 제도화는 과장의 아이러니를 요구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일차적 자연의 부정, 즉 총체적인 부정의 가능성은 경험세계에서는 불가능하다. 이것은 순수 이데아의 세계에서만 가능한 어떤 것이다. 지금 여기에 있지도 않으며 존재하지도 않으며, 완전히 폐기되거나 부정되는 <부재하는 대상 즉 악의 개념> 그 자체, 이것은 경험세계에서는 주어지지도 주어질 수 없기 때문에 당연히 논증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이데아를 실현하기 위해 새디스트는 논증을 필요로 한다 - 반면에 매저키스트는 이데아를 논증하지 않으며 상상한다. 외설적 묘사가 새디스트에게는 강화되는 반면, 매저키스트에게는 거의 없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새디스트에게 이러한 논증은 한 번도 그를 만족시키지 못한다. 어떤 경우든 이차적 자연의 존재임을 확인할 뿐이다. 개념적 논증의 완벽함에 대해 확고한 신념을 가지면서만 가능한 이러한 부정의 진리는 매번 그로 하여금 <악의 허위>를 보여주며, 따라서 그는 분노하고 절망하는 것이다. <그가 꿈꾸고 있는 것은 범 우주적인 것이며, 비 개인적 범죄이며 … 영속적인 유효성(perpetual effective)이다. … 새디스트의 임무는 두 요소들 사이에 다리를 놓는 것이다. 즉 실질적인 것, 경험적인 것과, 자신의 마음속에서만 가능한 것, 비 실재하는 것 간의 다리. 이것은 파생적인 것과 근원적인 것 간의 다리이며, 개인적인 것과 비 개인적인 것 간의 다리이다. 28> 이런 식으로 그는 <이성의 순수망상의 이데아>를 완벽하게 전개하려는 의도를 품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성은 경험세계와 이차적 자연 속에 나타나면서 현실화(자신의 범죄가 영속적 효과를 일으키게)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주2). 새디즘적 자아는 논증이라는 형식을 통해 바로 완전부정 혹은 죽음본능(the Death Instinct)의 실현과 제도화라는 임무를 부여 받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어떻게 이러한 도약이 가능해 지는가? <이차적 자연에서 생산된 구체적이고 특정한 고통이 어떤 조건에서 일차적 자연 속에서 스스로 반향되고 재생산되는가? … 이 질문에 대한 해결이 바로, 사드의 글쓰기에서 반복과 단조로움이 의미하는 핵심적인 열쇠가 될 것이다. 28∼29>
새디스트가 자신의 영향력을 일차적 자연에까지 도달시키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부수적이며 구체적인 이차적 자연과 연관된 실행을 통과 하면서만 가능하다. 다시말해 그는 일차적 자연을 논증을 통해서 전개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논증의 과정에서 그는 이차적 자연 속에서 <부분적 귀납과정> 외에는 자신의 총체적 논증을 설명할 수 없다. 부분적 귀납과정은 이차적 자연으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부분적인 폭력의 몸짓을 강화하거나 응축할 뿐이다. 29> 강화와 응축의 형식이 새디스트의 반복 속에서 드러나는 두 개의 커다란 극점이다. 폭력의 강화 속에서 (피해자들의)고통의 강도는 더욱 격렬해 질 것이며, 폭력의 응축은 새디스트의 <냉정함>속에서 재현된다. 가해자의 냉담성과 자기통제는 열정과는 대조적인 것이며, 새디스트는 열정을 경멸한다. 따라서 그에게 악은 기쁨이나 즐거움으로 묘사되지 않으며, 다만 냉담함으로 묘사된다. <폭력은 영감이나 충동에 따라 낭비되어서는 안되며, 폭력이 주는 쾌감에 부속되어서도 안된다. 이러한 쾌감은 난봉꾼을 여전히 이차적인 자연의 상태에 머무르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폭력은 냉정함 속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응축은 바로 이 냉정함, 즉 논증적 이성의 냉정함에 의해 비로소 가능해 진다. … 물론 이러한 냉담성은 강렬한 쾌감을 제공해 준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것은 자아가 이차적인 자연에 참여하여 얻게 되는 쾌감이 아니라 반대로 자아의 내부와 외부에서 동시에 자연을 부정하는 쾌감이며, 나아가 자아 자체마저 부정하는 쾌감이다. 즉 논증적 이성의 쾌감인 것이다. 29> 새디스트의 쾌감의 지연과 완성된 쾌감으로 가기 위한 경로는 이와같이 부정이라는 개념과 연관되면서 이루어진다. 다시말해 논증적 이성이 사용하는 기제는 부정의 거리 두기와 소외에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사드에게서 보여지는 묘사의 기능은 반복과 부정의 틀 속에서 그 효과를 발휘한다. 반복에서 묘사들은 강화되며 또한 응축된다. 묘사들이 강화됨으로써 <피해자수와 고통이 증가>할 것이며 따라서 외설적 묘사와 난삽한 표현들이 효과를 발휘한다. 그러나 이것으로 새디스트의 제도화가 실현된 것이 아니다. 망상은 충족되지 않으며, 따라서 또다른 몸짓이 요구된다. 이 묘사들은 절제되어야 한다. 일차적 자연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이차적으로 주어진 자연들을 강화하고 증가시키는 극대화를 통해서만 가능한 반면, 이러한 열정으로 이차적 자연상태에 집착하는 것은 동시에 여전히 이차적 자연에 머무른 존재성을 확인시켜 줄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이차적 자연에서 고통의 강화를 보여주는 외설적 묘사들 속에서도 냉정함을 잃지 않아야 한다. 그는 열정과 자제의 이중회기를 경험하며, 이러한 과정의 반복과 묘사가 계속해서 유지되고 있다. 반복은 폭력의 강화와 응축으로 점철되고 있다. 이차적 자연과 자신까지도 부정하는 외설적 묘사들의 이러한 반복 속에서 우리는 사드의 글이 지니는 단조로움을 발견하게 된다. <논증적 기능이 묘사적 기능을 복종시키고 절제된 방식으로 묘사적 기능을 확대 응축시킨다. … 묘사는 양적으로 질적으로 세밀해야 하며, 또한 잔인한 행위와 역겨운 행위라는 두 영역을 모두 갖추어야 한다. … 역겨움과 비 순수함, 혹은 잔인성으로부터 쾌감을 갖는다는 것. … 두 경우 모두에서 논증적인 기능이 최고의 효과를 발휘하는 것은 바로 반복이 가지는 강화와 응축의 효과와 묘사의 매개가 완전하게 이루어 질 때이다. 29∼30>
(주1) 이차적 자연과 일차적 자연의 메커니즘은 다음과 같은 술어들과 같은 맥락에서 풀이해 볼 수 있다: 제한경제/일반경제, 제한적 사유/초과적 사유, 지배권/지상권, 경제/비경제,….
(주2) 매저키스트는 그러나 비 개인적 요소를 이차적 자연으로 구체화하지 않으며 오히려 이차적 자연을 거부한다. 따라서 그는 상상 속에서 이데아를 그리면서 상승한다. 새디스트가 자신의 순수관념을 논증을 통해 구체화하면서 끌어 내리려 하는 반면에(스피노자적), 매저키스트는 이차적 자연을 거부하면서 순수관념으로 상승한다(변증법적, 플라톤적). 새디스트는 망상을 현실화하고 실재적인 것으로 육화 하고자 하는 반면에, 매저키스트는 실재적인 것 이차적인 자연을 회의하며 부인하고 감각적인 것을 단계로 초월적이고 관념적인 것으로 상향하는 메커니즘을 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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