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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1/15 권력의지 (4)
  2. 2009/10/21 과거와 우리: 니체의 경우 (11)
  3. 2008/12/12 니체(Friedrich Nietszche)의 수염 (6)
  4. 2008/10/16 니체와 아포리즘 (2)
  5. 2007/05/14 지배권(支配圈)의 향략 (2)
  6. 2007/01/30 소모와 내적 경험
  7. 2006/09/20 니체의 짜라투스트라
노예들이 생각할 때, 주인은 노예로부터 자신이 주인임을 인정받기를 원한다. 즉 주인은 지배자로 인정받기 위해 지배를 욕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니체에 의하면 이것은 노예가 생각하는 지배욕구이다. 권력(능력)을 갖지 못하고 비굴한 자만이 지배와 권력을 욕구한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능력과 분리되어 비굴함에 머물러 있는 노예만이 지배하고 싶어하며 타인들로부터 인정받기를 원한다. 그렇기 때문에 권력을 쟁취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고 그것을 탐을 내고 아쉬워하는 자는 주인이 아니라 다름 아닌 노예이다. 권력의 공허한 메아리를 자신에게 투사한 이미지 속에서 발견하는 권력의지는 가장 낮은 정도의 저열한 권력의지일 뿐이다. 가장 고귀한 정도에 이른 권력의지는 탐을 내는 것이 아니며 가지거나 취할 수 없는 것이다. 노예와는 반대로 주인은 이미 지배자이다. 주인은 노예를 지배할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을 지배한다. 주인은 자신의 능력과 분리되어 있지 않고, 행동과 판단과 사유에 대하여 바로 자기 자신이 원인이고 지배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권력을 욕구하지 않는다. 이들은 권력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실현하고 살아갈 뿐이다. 주인에게 있어 권력은 관심의 대상도, 욕구의 대상도 아니다. 권력은 대상조차 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권력은 다름 아닌 바로 그에게 속한다. 니체의 위대한 아포리즘: "약자들을 지키듯이 우리는 언제나 그렇게 강자들을 지켜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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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바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성장하는 것? 아니면 과거와 전통과 관습을 보존하는 것? 그래서 한편으로는 풍요와 부의 시대를, 다른 한편으로는 안정과 질서의 시대를 만드는 것? 어떤 점에서 우리 시대에 성장과 보존은 모순처럼 보이면서도 서로 상호보완적으로 엮여있다. 특히 그것이 어떤 소수의 견해를 대변하는 경우라면 더욱 더.  니체(Friedrich Nietzsche)는 『때아닌 명상』(Unzeitgemässe Betrachtungen, Untimely Meditations, 1873-1876)에서, 삶에 도움을 주는 역사의 서술방법을 세 가지로 나눈 바 있다. 역사가 본질적으로 순수한 지식일 수는 없으므로, 역사 그 자체의 세 가지 방법을 언급함으로써, 그는 자연스럽게 현재적 삶의 세 가지 양태를 지적한 셈이다. 그의 말을 따라가보자.

세 가지 관점에서, 역사는 인간의 삶 속에 속해 있다.
(1) 능동적이고 투쟁적인 강자의 역사
(2) 보존하고 경배하고 찬양하는 인간의 역사
(3) 고통 받으며 해방이 필요한 인간의 역사

이렇게 세 가지 관점은 니체가 언급한 세 가지 역사(혹은 연구방법)와 일치한다.
(1) 기념비적 역사
(2) 골동품 애호가의 역사
(3) 비판적 역사(들뢰즈는 미국영화를 설명하기 위해 이를 변형시켜, '윤리적 역사'라고 불렀다)

기념비의 역사는 능동적이고 힘있는 인간의 관점에서 본 역사이며, 그러한 인간을 정당화하는 역사이다. 대단한 전투를 치른 인간, 모범이 되는 인간, 만인에게 교훈을 주고 위안을 주는 인간, 평범하지 않은 인간의 역사, 즉 "쉴러(Schiller)의 역사"이다. 기념비의 역사는 과거와 현재 모든 시간을 정점(culminating point)으로 환원하고, 가장 높은 것의 위대함으로 세상의 구석구석을 설명하려는 야심이다. 따라서 그 정점에 세워진 기념비의 힘과 가시적인 업적의 크기가 과거의 느낌의 정도를 좌우한다.

이러한 역사에서는 사소한 것에 대한 관심이나 꼬치꼬치 캐묻는 습관을 싫어한다. 심호흡을 크게 하고 세상을 보다 통 큰 진보로 고취하는 일에 열중하여, 괜히 어슬렁거리거나 맴도는 게으름뱅이를 싫어하며, 예술의 다성(多聲)과 산만(散漫)에서 쾌락을 얻는 영혼을 경멸한다. 목표도 동기도 양태도 분명치 않은 모호한 행동들이나 사소한 몸짓들, 그래서 열등해 보이는 것들은 보이지도 않고 저 뒤에서 세상 구석구석을 채우고 있기 때문에, 마치 브뤼겔의 그림에 펼쳐진 중층지대처럼, 산 꼭대기의 위대한 기념비 주변에서 구름처럼 육중한 대기를 형성하며, 이 위대함이 불멸로 나아가는 길을 방해하고, 기만하고, 축축하게 하고, 질식할 만큼 가로막고 있다. 따라서 이들을 모조리 거두어야만 한다.

과거가 기념비로 세워진 찬란한 산맥들 즉 위대함의 연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산맥의 정점들이 수 천 년에 걸쳐 서로 유사하고 무엇인가 상통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서로 조우한다고 생각한다. 현대인은 그들을 닮아야 하며, 그들을 모델로 삼아야 한다. 그래서 과거의 위대한 시간이 다시금 태어나 되살아나게 해야 한다. 그러나 니체에 따르면 이 높은 곳에 위치한 "기념비들은 영원해야 한다는" 불멸에의 요구 때문에, 그 산맥 아래에는 높이 오르지 못한 사소한 존재들의 크고 작은 고함과 울부짖음이 있다. 기념비적 역사는 정점에 올라 가장 높이 빛나는 것만이 존재한다고 억지를 부리는 가운데, 그 반대자들이 "그렇지 않아!" 라든가 "기념비는 만들어지지 말아야 한다!"고 목청껏 소리를 지르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의 대단한 업적, 건물, 탑, 깃발들을 우러러 보고 닮아가느라고, 이들은 현재적 삶의 초라함에 대한 비난의 눈총으로 질식할 것만 같아 숨이 차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기념비란 잉여의 울부짖음이다.

이러한 과거인식, 즉 이전 시대의 정전(canon)과 고귀한 것에 열광하는 정신상태가 필요한 이유는, 니체에 따르면, 그로부터 다음과 같은 유추가 정당화되기 때문이다: "위대함이 이전에 존재했다면 현재의 모든 사건 속에서도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유추는 "현재 자신이 어쩌면 불가능한 것을 바라고 있지는 않을까라고 하는 회의감을 불식"시킬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과거는 마치 현재의 마취제 혹은 신경 안정제처럼 작용한다.

여기에 기념비적 역사의 근본적인 모순이 있다. 마취제로서의 과거는 기념비(혹은 그 가치)를 부정한다. 거추장스러운 실재를 경멸하는 위대한 정신만이 살아남아 그들만이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혹은 기념비를 창조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듣지 않을 수 없는 잉여의 울부짖음이 현재적 과거 속에서 제외되어야 한다면, 기념비의 역사적 조건으로서의 고난과 시련과 차이를 동반한(그래서 기념비가 더 값지고 귀한) 진정한 경주, 진정한 전쟁이 어떻게 가능해질까? 이것이 니체의 탄식이다: 똑같은 샘플과 모델로부터 배운 지식이란 얼마나 덧없고 나약한가! 그 유비는 또한 얼마나 부정확할까! 그 비교의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차이가 간과될까! 과거의 특이성이 현재의 일반성으로, 혹은 그 반대로 현재의 특이성이 과거의 일반성으로 얼마나 무지막지하게 억지로 끼어 맞추어질까! 그리하여 그 모든 날카로운 구석구석과 모서리들이 동일한 반복으로 일치되기 위해 얼마나 부서져야 할까!

똑같은 동기와 똑같은 구원자와 똑같은 파국과 똑같이 결정된 간극으로 역사가 되돌아오는 것이라면, 진리는 차이가 중화된 그러나(아니 그래서 더 쉽게) 모방할 가치가 있다고 칭송되는 도상적(iconic) 범례에 불과하다는 것이 니체의 생각이다. 그것은 일반의 박수와 갈채로 승인된 기념비적 '결과'이다. 그럼에도 이 모범은, 그것의 진정한 원인인 잠재적 잉여들의 희생아래, 그들의 울부짖음을 동력으로 하여 산출된 결과이다. 기념비의 역사가 그 근본적 원인과 점점 멀어지기 때문에, 니체는 이를 "결과들의 컬렉션"이라고 불렀다. 민속축제, 종교적 행사, 군사적 기념일, 문화재, 건출물, . . . 이러한 모든 기념비들에 대한 찬사는 결과 그 자체에 대한 맹목적 열광이며, 진취성이라는 이름을 가슴에 떡 하니 붙인 부적이라는 것이다.

눈에 잘 띄는 곳에 우뚝 솟아 올라 모방하고 따를 가치가 있는 것만이 역사책에 쓰여지는 한, 역사는 결코 새로운 것으로 변하지 않으며, 더 아름다운 것으로 재해석 될 수도 없다. 따라서 "신화적 허구"와 구별이 어려워질 것이다. 세상의 자질구레한 모든 것들이 하나의 빛으로부터 파생하고, 그 빛을 닮아야 하기 때문에, 그 빛을 머금은 과거는 우리의 시야를 멀게 하는 해악이 된다. 닮아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거나 닮아야 하는 것만큼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도 없다. 시대정신을 표상하는 상징(인간이든 사물이든)들이 산맥처럼 봉우리를 형성하여 서로 서로 닮은 꼴로 수 천년 동안 이어져 내려왔다는 것을 철석같이 믿는 순간, 현재의 위대한 활동과 포부와 욕망은 기념비라고 하는 과거의 가면과 무대의상에 의해 탄압을 당한다. 니체에 따르면 기념비적 역사란 당대의 힘과 위대함을 혐오하는 열등한 영혼이 그 추한 안색을 들키지 않기 위해 호들갑을 떨며 연막을 뿌리는 과거에 대한 과도한 찬사이다. 이 찬사로부터 역사의 의미가 뒤집힌다: "죽은 자가 산 자를 묻게 하라!"

한편 두 번째의 역사가 있다. 이것은 기념비가 아닌 과거 그 자체를 신봉하는 보수적인 인간을 위한 역사이다. 그는 과거의 경배를 통해 현재의 삶에 감사한다. 향수도 아닌 이 특이한 과거에의 집착은 수 천년 전부터 지금까지 살아남은 증거들을 보존하는 것으로 실천할 뿐만 아니라 후세대에 남겨줄 조건들을 재생산 하는 것을 삶의 과업으로 여긴다. 삶이란 과거에 바쳐진 헌정사 혹은 봉헌물 외에 그 무엇도 아닌 것이다.

관습적이고 전통적인 가치를 옹호하고 강조하려는 이 영혼은 결국 골동품에 대한 사랑의 역사를 배양하기에 이른다. 그에게는 증거가 필요하고, 증거란 직접 잡을 수 있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조상이 쓰던 가구나 조그마한 기구들을 소유하는 것이 그에게는 과거의 영혼과의 교접이며 배움의 의미 그 자체이다. 물건에 사로잡힌 그의 물신주의적 영혼은 과거에 쌓아 올린 벽, 성문, 속기록, 일기, 유물, 풍물, 행위의 수단들, 친숙한 관습들, 태피스트리, 의상, 보석, 개인물건들로 환원된 과거의 시간을 바라보며 잃어버린 흔적의 향기를 느낀다. 뿐만 아니라 그로부터 자신의 힘, 목적, 열정, 어리석음, 나쁜 버릇을 재발견한다. 가령, 니체에 따르면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정신이 이러한 취향과 매력을 대표한다.

이 골동품 애호가의 경배 정신의 가치는 기념비적 역사의식과는 반대로 그 겸손에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튀지 않은 조건들 심지어는 무미건조한 환경들로부터 기쁨과 만족을 느낄 줄 아는 개인이나 집단의 소박한 정서에 대한 이해와 긍정이 이 역사의식의 정수이다. 역사가 대우를 덜 받았던 인종이나 소박한 사람들에게 그들이 살았던 거주지역과 물건들 그리고 삶의 직접적 편린들을 되돌려주고, 그들 자신의 전통을 연결해주고, 그들을 바로 거기에 살게 해주며, 그들을 안주 없는 유랑과 방랑으로부터 막아주는 것만큼 삶에 봉사하는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물론 개인을 집단과 환경에 고정시키거나, 자질구레하고 고단한 일상의 결과들로 환원하여, 그를 어딘가에 뿌리박게 하는 것은 심각한 곡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나름대로 건강하고, 또 어떤 점에서 공동체에 유익한 것이기도 하다. 유목민들이 그렇듯이 방랑과 모험의 결과들을 경험했던 사람들, 조상과 선배에 대한 신뢰를 포기하고 끊임없이 고결한 것만을 쫓아 다니는 경계 없는 코스모폴리탄은 이 사실을 잘 안다. "뿌리에 매달린 나무열매의 느낌, 성장이 제멋대로나 우연이 아님을 아는 행복감"이 무엇인지를.

그러나 골동품 애호가의 역사는 항상 그 비전의 폭이 좁다. 이것이 니체의 생각이었다. 과거 삶의 복원에 대한 물신주의적 열망은 자신이 알고 있는 몇 가지 지식을 너무 가깝게 들여다보고, 그것의 전체적 맥락으로부터 떼어내어 고립시킨다. 이러한 편협하고도 소심한 시야는 서술하고 있는 대상이 가지는 가치의 경중을 시간 전체의 견지에서 판단할 수 없게 한다. 그의 취향에는 모든 것이 귀중하고 똑같이 중요하게 취급된다. 사물이든 사람이든 과거든 각각 공정하고 따로따로 다르게 구별해야 하는데도, 그 가치와 비례에 있어 아무런 차이를 두지 않았기 때문에, 이 또한 기념비적 역사와 마찬가지로 현재의 과거화 혹은 과거의 현재화라는 위험에 노출되어있는 것이다. 그렇게 골동품에 사로잡혀 차이의 힘을 간과하는 개인은 전적으로 자신의 취향의 비례에 의거하여 과거를 들여다본다. 

특이한 비전의 수준에 속하는 것을 무차별적으로 경배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것 뿐만 아니라, 과거의 것에 고착되어 새로이 다가올 것을 거부하고 적대시하는 습관이 감각적으로 굳어지면, 마치 순수지식의 영역에 오래 전부터 안착해 있는 안주인이라도 된 것처럼, 역사는 더 이상 삶에 봉사하기를 멈추고 존경이라는 명목으로 과거를 다루듯 현재와 미래의 더 위대한 삶 조차 박제해버린다. 골동품 애호가의 역사가 더 이상 현재의 생생한 삶에 열정을 불어넣지 못하게 되는 순간 그 자체 스스로 퇴행적이 된다. 그러면 그 경배심 또한 시들어 버릴 것이다. 순수지식의 허황된 그리고 공허한 영역에 안주한 학자들이 존경심이나 경배도 없이 습관적으로 과거의 궤도를 어슬렁거리며 이기적이고 자기만족적인 배회에 인생을 낭비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맹목적인 수집광과 독서광의 불쌍한 드라마, 남이 말했거나 존재했던 모든 것을 모아대는 반추동물의 드라마를 보게 된다. 이러한 영혼은 어딜 가나 곰팡이 냄새를 풍기게 되어있다. 자신의 귀한 재능과 고결한 욕구를 그야말로 낡은 것에 대한 욕망으로 변질시키고, 때로는 너무 깊이 들어가 단지 전기(傳記)의 증거에 지나지 않는 물건더미가 쌓여가는 것에 쾌감을 느끼는 것으로 만족하기 때문이다.

결국 기념비의 역사와 성격이 전혀 다름에도 불구하고, 골동품 애호가의 역사의 심층에는 그와 마찬가지로 삶의 창조적 가능성의 배제가 있다. 골동품 중독 역사관은 "삶을 보존하는 법만 알지, 창조하는 법은 모른다." 그것은 언제나 새롭게 다가오는 것을 평가절하하고, 경배를 미루어두거나 불경스럽게도 거부하기조차 하는 능동적 인간을 불구로 만든다. 심지어는 기념비 역사의 모토인 위대함과 성장조차에도 관심이 없다. 오래된 무엇인가는 항상 불멸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선조들의 관습과 종교적 믿음 그리고 전해 내려온 정치적 권위의 오랜 시간 겪어온 무게와 깊이 그리고 그 동안 받아온 찬탄과 경이의 양이 얼마인지를 상상해 본다면, 그 귀한 것을 새롭고 낯선 것으로 대체하거나 현존하는 단순한 사실처럼 보이는 것으로 환원하려는 시도가 대단히 건방지고 뻔뻔스러워 보이기 때문이다.

니체는 삶에 봉사하는 역사의 세 번째 방식을 '비판적 역사'라고 불렀다. 이러한 글쓰기는 더 이상 과거에의 종속도 고착도 아닌 해방을 욕망한다. 현재의 부당함과 폭력과 오류를 비판하기 위해, 비판적 역사가는 현재를 낳은 과거로 돌아가 그 원인이 되는 싹을 잘라버릴 것을 독려한다. 독자의 전달이 아니라 장본인의 말을 직접 들어보는 것이 생생하리라.

"과거를 깨부수는 힘을 가져야 한다. 살아가려면 과거를 전유하고 분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는 과거를 심판대로 끌고 와서 가차없이 질문하고 비난을 퍼붓는다. [. . .] 과거는 비난 받아 마땅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인간의 과거이기 때문이다. 인간적인 것 안에서 힘과 나약은 언제나 필멸의 운명에 처한 인간사이다. 인간은 언제나 위대한 힘과 인간적 약점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심판이 의미하는 것은 정의가 아니며, 그 판결을 선언하는 자비도 아니다. 그것은 삶 그 자체, 그 희미하고도, 모호하고도, 끊임없는 자기 욕망의 힘, 바로 삶 그 자체 때문이다. [. . .] 그 판결은 언제나 무자비하고 불공정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순수한 지식의 발로에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 . .] 생겨난 모든 것은 파괴되어 마땅하다. 따라서 아무것도 생겨나지 않는 것이 더 좋았을 수도 있다. 살아가려면 상당한 힘이 있어야 한다. 인생이 얼마나 부당한지를 잊으려면 또한 상당한 힘이 필요하다. 루터 자신은 세상이 단지 신의 망각으로 존재했을 뿐이라는 견해를 피력했다. 만일에 신이 "포병부대"를 떠올렸더라면, 결코 세상은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이 같은 삶은 망각을 이용하여 이 망각의 일시적 파괴를 요구한다. [. . .] 과거가 비판적으로 분석될 때, 그 뿌리를 잘라낼 수가 있으며, 모든 경건함을 넘어 나아갈 수가 있다. 그 과정은 항상 위험하다. 심지어 죽을 때까지. 그래서 이런 식으로 과거를 심판하고 전멸시킴으로써 삶에 봉사하는 사람들 혹은 그 시대는 언제나 그 자신이 위험에 처해있고 다른 이들을 위험에 처하게 한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이미 이전 세대의 산물이며, 또한 그들의 오류와 열정과 범죄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 사슬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비록 그 오류들을 비난하고, 우리 자신이 그들로부터 탈피했다고 생각할지라도, 우리가 그들로부터 태어났다는 사실을 빠져나갈 수는 없는 것이다."

기념비적 역사는 과거를 이용하여 정복의 위대함을 설득하고 정당화하는 과거의 현재화이다. 반면에 골동품 애호가의 역사는 과거에 안주하고 과거를 보존하여 현재를 과거의 현재로 만든다. 비판적 역사는 현재의 부당함으로부터 받는 고통을 제거하기 위해 과거를 심판함으로써 과거를 미래의 현재로 남김없이 바꾼다.

우리에겐 업적과 기념비에 대한 두서 없는 열광이 한 쪽을 사로잡고 있고, 개인의 소박한 그러나 맹목적인 순응주의가 우리의 또 다른 한 쪽을 사로잡고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복의 힘도 아니고, 그렇다고 냉소적이고도 비굴한 평화도 아니다. 평화라는 이름조차도 이제는 어떤 구실이 되어버렸고, 기만과 착취의 한 전략이 되어버렸다. 과거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 그것은 다름 아닌 비판이 아닐까? 또한 비판받아 마땅한 그 과거의 수혜자들의 정당성의 단죄와 그에 대한 거부가 아닐까? 수혜자들이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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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생전 모습이라고 한다. 신이 죽어버린, 아니 새로운 신이 탄생한 현대의 악취가 견딜 수 없어 무덤 속에서 출몰한 유령이 찍힌 듯 하다
가만히 보면 아우라(aura)가 느껴지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벤야민은 기술복제로 인해 아우라가 사라졌다고 말했지만, 반대로 기술복제는 아우라를 생산하기도 하니까 말이다. 이 의심은 어쩌면 놀라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믿어지지 않는다" 혹은 "믿을 수가 없다"는 말만큼 믿음에의 열망을 극단적으로 표현해주는 말은 없을 것이다. 정말로 그 니체일까? 그 아름답기 그지없는 아포리즘의 대가인 백년도 넘은 바로 그 니체일까? 이제 그 의구심을 확인하기 위해, 아니 오히려 의구심을 일소하고 싶어 근거없는 기억들이 마구마구 솟아나기 시작한다.

"예전에 어디서 얼핏 듣기로, 니체는 생전에 한번도 저렇게 긴 비스마르크 콧수염을 기르지 않았다고 하던데. 그도 그럴 것이 제2제국을 독일의 재앙이라고 생각했던 니체가 아닌가? 사진에서 우리가 흔히 보던 콧수염은 새벽녘을 바라보는 듯한 총명한 시선의 옆모습과 함께 그의 아우라를 창출하기 위해 덧칠한 픽토그래프(pictograph)였다고 하던데.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건가? 잘못된 기억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상은 나의 기억착오 혹은 소문착오를 오히려 증명하듯, 상상 속의 그 니체, 꼬장꼬장하게, 근엄하게 기른 콧수염의 니체를 우리 앞에 제시한다. 어쨌든 내 기억이 잘못된 것이어서 영상 속의 니체가 진짜(?)였으면 좋겠다. 그 마저도 아니라면 삶이 얼마나 지리멸렬해질까? 그의 모습이 진짜이든 가짜이든, 니체의 영상을 바라 보며 내가 마치 그림의 진본성(authenticity)을 의심하는 것 같은 태도를 취하는 이유는, 사상(思想)의 아우라가 테크놀로지를 압도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저 영상이 우리 앞에 드러난 이상, 그 촉각적 실체가 확인된 이상, 이제 그의 육체는 현재적인 것이 되었다. 그가 출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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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만큼 자신을 위해 글을 쓴 사람이 있을까? 자신이 느끼기에 이토록 쉽게, 즐겁게, 통쾌하게 책을 쓴 사람이 또 있을까? 그는 섬광의 대가이며, 섬광의 어버이이며, 섬광의 벌레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은 그에 관한 아포리즘으로 성을 쌓고 싶어 한다. 정념을 냉각시키지 않고도 가장 고상하게 토로할 수 있는 형식은 아포리즘이 제격이다. 아포리즘은 논증이 아니므로 구차한 논리적 이성에 호소하지 않고, 우리 모두가 제청하고 박수치고 손사래를 칠 수 있는 의지와 직관의 육중한 무게를 배가한다. 아포리즘은 논증처럼 감산(減算)이 아니라, 더하기, 모임, 회합, 동호회, 말하자면 호손(Nathaniel Hawthorne)의 젊은 굿맨 브라운(Young Goodman Brown)이 한 밤중에 "숲"에서 목격했던 바로 그 무시무시한 악마적 집회와도 같은 것이다. 아포리즘은 촉각적이다. 피부를 파고드는 금속의 탄두처럼, 우리는 읽는다기 보다는 폭격을 당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아주 오래 전부터 우리 자신 안에 아포리즘이 이미 있었음을 깨닫는다. 아포리즘은 공통하는 육체, 관념, 실재의 합창이며 코러스이다. 그래서 아포리즘은 출발이 아니며 과정도 아니다. 말하자면 갈무리이다. 혹은 다음을 기약하며 우렁차게 외치는 끝 인사라고나 할까! 읽히는 글, 읽기 좋은 글, 읽기에 쾌적한 글, 우리를 편안하게 해주는 친절하고 이기적인 글, 그래서 우리를 머무르지 못하게 하는 글이 있다. 그러나 다른 집회도 있는데, 거기에는 쓰게 하는 글, 쓰고 싶어지게 하는 글, 오만하고 불친절한 글이 있다. 똑같이 오만하고 불친절한 대응을 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우리의 오기를 자극하는. 니체의 섬광들은 우리의 근성을 두드린다.

Posted by huun

자본이나 노동 혹은 재산의 소유와 같이 지배관계를 규정하는 정치경제학적 요소들을 파악하기 전에 짚고 넘어 가야할 주제: 이 사회는 묘하게도 지배자보다 피지배자들이 더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급 관계가 초래하는 부도덕과 비효율을 세 살 먹은 애들조차도 분명히 의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때는 계급성에 관한 분명한 의식을 취하는 것이 관건이었던 적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허구한날 서로들 앉기만 하면 불만에 차 내뱉는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실상 우리가 흔히 말하는 지배자들은 소수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수적으로나 질적으로 얼마나 왜소하고 보잘 것 없는 존재인지는 한 사회나 특정 집단이 뜨거운 소용돌이에 휘말렸을 때를 떠올려 보면 명백히 알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좀 서둘러서 고백하자면 그들은 아무것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 . . 어째서 인류는 여전히 지배관계를 존속시키고 있으며 오히려 더 강화하고 있는 것일까? 더 구체적으로 말해 지배자의 위상에 도달하기 위해 항상 조심스럽게 긴장하면서 투쟁하는 역사로서의 지배권(支配圈) 전체가 유지되는 근본적인 심리학은 무엇일까?

심리학의 대가 니체(F. Nietzsche)의 대답을 들어보면, 그것은 지배자의 강압적 힘이나 피지배자라고 간주되는 이들의 무지 때문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도덕과 처벌로 이루어진 잔인한 문화 내에서의 인간 관계를 통해 개인이 겪는 쾌감과 고통의 함수 때문이다. 니체의 말을 길게 요약해보면 이렇다: 도덕의 목표는 도덕적인 인간을 만드는 것이다. 도덕적인 인간이란 자신의 말과 행동에 책임을 지는 인간이며,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에게 자기의 의지 즉 미래를 약속할 줄 아는 인간이며, 심지어는 도덕이 요구하는 행위양식(관습)을 자율로서 이해하고 실천하는 인간이다. 책임과 의무를 자신의 존재양태로 스스로 인식하는 인간! 자신의 의지와 힘과 자유의 의지를 굽히지 않는 그 자신 스스로 주권자인 인간! 도덕이 양성하고자 하는 완성된 인간이란 바로 주권적 개체(sovereign individual)를 말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몇 가지 조건이 따른다. 책임 있는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본능적으로 양심을 갖는 인간이 되어야 하며, 미래를 약속하는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타인에 의해서든 자신에 의해서든 예측가능한 인간이 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도덕을 하나의 자율로서 이해하고 실천하기 위해서는 기억력이 좋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것이 주권적 개체의 양성을 목표로 하는 도덕의 3부 모델이다. 한편에는 왠지 미안한 마음(양심이나 죄의식이나 유죄임의 자백)이 있어야 하며, 다른 한편에는 행위의 규약(약속이나 다짐이나 지속적인 의지)을 잘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억을 잘해야 한다는 것은 저 두 모델의 조건이면서 동시에 종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 둔하고 경박하고 찰나적인 인간이, 스스로 미안한 마음이 들어 미래의 행위를 다짐하고, 그것을 죽을 때까지 잊지 않도록 할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하면 그의 자백과 다짐의 자국을 그의 마음 깊숙이 새겨 넣을 수가 있을까? 어떤 것이 기억에 남으려면 고통이 있어야 한다. 뜨겁고 따갑고 쓰라린 것이 가장 오랫동안 남아 있다. 바로 이 고통과 기억이라는 심리학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로부터 형벌이 태어난다. 우리의 마음이 엄숙하고 무거워질 때면 과거의 고통스러운 기억들이 어김없이 등장한다. 예를 들면 종교적 희생이나 제의라든지, 사법적 고문과 형벌, 금욕주의, . . . 등, 이 모든 절차들은 고통의 재생을 위해 기억이 필요한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잔인한 고통이 필요하다. 준엄한 형법은 인간의 건망증을 치료하기 위해, 그리고 순간적인 감정과 욕망에 사로잡힌 노예의 뇌리에서 사회적 공동생활에 필요한 몇 가지 규정들을 사라지지 않게 하기 위해, 인간의 야만적인 본능과 추한 언행을 통제하기 위해, 고통을 사용하여 마음속에다가 몇 가지 기억의 이미지를 아로새겨 온 것이다. 신체의 일부를 돌로 치는 형벌, 사지를 찢어 죽이는 형벌, 삶아 버리는 형벌, 불로 지지는 형벌, 어떤 단단한 이(異)물질을 그의 몸 속으로 쏘아서 죽이는 형벌, 밧줄에 목을 매다는 형벌, 태생적 죄인을 의미하는 붉은 색 십자가 낙인을 모든 이들의 마음속에 깊숙이 새겨 넣는 창세기적 형벌, 선량함과 겸손과 예절이라는 이름으로 이리저리 따돌려가며 개인을 밑도 끝도 없이 주눅들게 하는 형벌, . . . 이 모든 것들이 바로 '왜 당신은 미안해하지 않는가?'라고 따져 묻는 문화, 도덕과 처벌이 서로 얽히고 설키며 자아낸 잔인한 문화가 아니겠는가? 이러한 문화는 관객을 필요로 한다. 그 처벌의 광경이 발산하는 뜨거운 빛을 내면(內面) 깊숙이 하나의 인상으로 새겨 넣을 관객을. 형벌에는 연극과 축제의 요소가 참으로 많이 들어 있다고 니체가 말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잔인한 문화에는 희생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잔인한 종류의 인간 역시 존재한다. 마찬가지로 도덕적 인간이 되기 위해 고통을 각인하는 자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고통을 주는 자, 고통을 즐기는 자가 있는 법이다. 채찍에는 고통뿐만 아니라 쾌락이 있다. 채찍과 그 형태는 다르지만 본질에 있어 동종의 계보를 갖는 연민이나 동정과 같은 매저키즘적 정서에도 역시 쾌락이 있다. 프로이트가 고통과 쾌락의 연결 즉 고통이 쾌락이 되고 쾌락이 고통이 되는 그 알 수 없는 신비에 대해 언급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흔히들 말하는 '사랑의 매'라고 해서 다를까? 우리는 선생님이나 부모 혹은 그럴만한 자격이 있다고 믿는 자들이 행하는 처벌을 저 용어로 정당화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간혹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을 추상화해서 그의 모든 표현이나 행위를 그 추상적 사랑과 혼동한다. 아주 위험한 경우이다. 선의의 매라는 것에도 역시 다소간의 쾌감이 있는 법이다. 그러나 어떤 쾌감이 있다는 말인가? 누군가에게 고통을 줌으로써 얻을 수 있는 쾌감이란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역사적으로 볼 때 처벌은 오로지 악행을 범한 자의 양심이나 책임 때문에 가해지지는 않는다. 유죄인 사람만이 형벌을 받아야 한다는 전제 아래 처벌이 행해진 것도 아니다. 근본적으로 처벌이란 자신이 피해자라고 스스로 간주하는 자가 가해자라고 판단된 자에게 가하는 일종의 분노이다. 피해자의 의식은 재산상의 손해나 신체의 상해와 같이 구체적인 물적 변동에 의해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예를 들어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아랫사람의 거만한 태도에서 느끼는 불쾌함이나, 백인이 흑인의 피부색을 보고 느끼는 불결함이나, 그 외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발생하는 언짢음을 포함하여 모든 감정상의 동요로부터도 야기된다. 이와 동일한 의미에서 사회적 분노의 표현이 바로 형법의 기원이 아니겠는가?


이와 같이 도덕과 법(즉 제도와 계약)의 형식으로 분노와 고통을 해소하는 예를 니체는 채권자와 채무자의 배상형식을 통해 설명하였다. 누군가에게 손해를 입힌 자(채무자)는 피해를 입은 자(채권자)의 고통을 보상하고 그 부채를 상환하기 위해, 혹은 부채 상환 약속의 신용을 얻기 위해, 혹은 그 약속의 진지함과 신성함을 보증하기 위해, 그리고 그 책임과 의무를 자신의 양심에 새겨두기 위해, 예를 들면 자신의 재산이나 신체의 일부 혹은 처(妻)나 가족 심지어는 목숨을 저당 잡힐 것을 맹세한다. 이 저당물은 그에게 보다 소중한 것일수록 적합할 것이다. 반면에 채권자는 자신이 입은 손해의 고통을 상쇄해 줄 보상을 어떤 식으로든 받을 수 있는 권리를 보증 받는다. 보상은 주로 손해에 상당하는 것으로 판단되는 금전이나 토지 혹은 그 외의 소유물이 될 수도 있으며, 심한 경우에는 직접적인 손해나 피해를 고의로 입힐 수도 있다. 예를 들면, 고문을 가하거나 모욕을 준다든가 혹은 샤일록(Shylock)이 안토니오(Antonio)에게 그랬던 것처럼 육체의 일부를 베어내는 일 등이 가능했던 것이다. 만일 누군가가 (고의든 아니든) 내 발을 밟아 나를 아프게 했다면, 나 역시 그의 발을 밟아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최소한 나와 동일한 고통을 그에게 줄 수가 있는 것이다. 배상이란 한마디로 물적 혹은 심리적 복수의 권리를 말한다.


따라서 채권자가 자신의 손해에 대해 받을 수 있는 보상의 본질은 누군가에게 고통을 줄 수 있는 자격에 있으며, 그 자격으로부터 발생하는 쾌감을 즐길 권리를 말한다. 타인에게 고통을 줄 수 있는 형벌권 혹은 타인의 고통을 볼 수 있는 관람권은 하나의 자격이고 권리일 뿐만 아니라 그로부터 무르익는 무한한 쾌락이다. 무력한 자에게 마음껏 휘두를 수 있는 권력의 쾌감! 악을 저지를 수 있는 자격을 갖춤으로써 생기는 탐욕스러운 쾌감! 타인의 불행을 보며 은근히 자신의 우월감을 확인하는 음흉한 쾌감! 나아가 동정과 연민으로 더 우울하게 만드는 그리스도적 쾌감! 이 모든 폭행의 향락은 사회적 지위가 낮고 천한 사람일수록 더 커지는 법이다. 드높은 지위를 미리 맛보는 경험은 그 낙차가 크면 클수록 달콤하다. 채무자에게 형벌을 가함으로써 채권자는 자신도 모르게 지배권(支配圈)에 참여하는 것이다. 따라서 마침내는 그 역시 다른 사람을 아랫사람으로 경멸하고 학대하고 야유할 수 있다는 우월감을, 아니면 자신의 권력에 따라 채무자를 처분할 수 있는 집행권이 관료에게 넘어갔다 해도, 최소한 그 사람이 경멸 당하고 야유거리가 되는 불행을 안전한 발코니에 멀찌감치 앉아 목격할 수 있다는 우월감과 그 권리의 현실적 가능성을 경험하는 것이다. 지배권의 역사란 바로 저 자격과 권리에 도달하여 지상에서 가장 달콤한 고통의 쾌락을 맛보는 과정이 아니겠는가? 작든 크든 다들 그러고 있지 않은가? 내 주변에서도 하루에 몇 번씩 저 지독한 냄새를 맡는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맨 위에서 했던 질문, 즉 우리는 더 많은 피지배자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 의식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지배권이 여전히 존속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강화되고 있는지를 설명해 줄 심리적 근거가 아니겠는가? 한마디로 말해 즐거운 것이다.


그러니 누가 그 쾌락을 맛보는가? 라고 질문하지 말자. 국왕도 아니며, 귀족도 아니며, 자본가도, 남성도, 영국, 미국, 유럽, 아버지, 관료, . . . 에이! 모두가 아니다. 이 모든 도식화된 지배주체를 통해 지배권을 설명하는 것은 너무도 성급하고 추상적일 뿐만 아니라 서툴기 짝이 없는 대답이 될 것이다. 이미 위에서 지적했듯이 이 모든 결과들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더 근본적인 것을 고민하자. 예를 들면 지금까지 설명한 이런 것 말이다: 사람들의 모든 행동거지와 미세한 숨소리까지, 행위의 양태 전반을 하나의 지배권의 구도로 견인하는, 그리하여 우리 스스로가 지배의 무의식을 실천하고, 또 모든 이들이 추구하고 있는 생활의 경향, 이데올로기보다도 훨씬 더 깊숙이 윤리적 에피스테메를 이루고 있는 모종의 쾌감들 말이다.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지배권에의 참여를 독려하고, 그 권역에 대한 사회적 합의와 정당화를 가능케 한다. 헤게모니? 아비투스? 그 보다 더 적절한 말은 없을까? 지배권의 쾌락이란 지배자의 쾌락이 아니다. 취향에 따라 혹은 주어진 몫에 따라 혹은 능력에 따라, 우리 모두는 많든 적든 자신이 취할 수 있는 이런 저런 고통의 쾌감들을 통해 살맛을 느낀다. 서로들 마주 앉으면 불평의 원인이고, 돌아서면 불만의 씨앗이며, 자리에 누으면 불면(不眠)의 테마임에도 불구하고, 지배권이 끊임없이 유지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Posted by huun

소모와 내적 경험

2007/01/30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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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edrich Nietzsche의 Thus Spake zarathustra(in engl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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