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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07/14 사랑의 윤리학 (4)

상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횡설수설하는 말을 믿지 않을 것이다. 시를 운동경기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면, 모든 글의 제목들을 주름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단어가 변태적이라고, 혹은 문장들이 미쳤다고 말할 수가 있을까? 이러한 말들을 믿지 않는다면, 도대체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말 그 자체일까? 문법일까? 약속? 규칙? 그렇다면 단어들의 호응하는 관계가 일탈적이고 일그러진 모든 말들은 믿겨지기 위해 우리의 경험 내부로, 마무리가 잘 된 연결 관계들로 되돌아와야 할 것이다. 이때에 우리는 삶을 이해하는 두 가지 기로에서 방황한다. 우리의 삶에서 추방되어야 할 언어가 돌연히 난입하고, 우리 자신이 이미 이 언어에 매우 깊숙이 연루되어 있다는 생각에 다다르면, 우리는 미치기 시작한다. 그것은 추방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미 나는 여기에 너무나 깊이 빠져있다! 내가 미치기 시작하면 사물들은 이리저리 갈라지고 흩어지고 조각나기 시작한다. 이렇게 해서 아포리즘이 써진다.


니체(F. Nietzsche)의 어수선한 아포리즘을 읽다보면, 사물과 현상들이 무수하게 갈라지는 것을 보게 된다. 은유적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다. 그는 대상의 갈라지는 선과 에피파니의 빛을 따라 이리저리 자리를 옮기면서, 어떠한 흠집도 내지 않기 위해, 그것의 결을 따라 매우 조심스럽게 표면을 벗겨내고 있는 것 같다. 핵심을 발견하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다시 증축하기 위해서인가? 근대 수학은 아무런 흠집을 내지 않고도 존재를 고스란히 가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방법은 너무나도 거칠다. 라이프니츠나 뉴턴보다도 더 섬세한 미분이 필요하지 않을까? 니체가 시도한 작업들은 수학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너무도 생소할지도 모른다. 그의 미분은 우선적으로 표면의 결을 발견하면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저마다 자신의 표면에 포함하고 있는 시간의 결 혹은 주름들. 그래서 잘려져 나간 것들에 익숙하지 않고, 마침표가 찍히지 않은 불완전한 것들에 생경한 우리에게, 사물은 한없이 갈라지고 부서지고 파편들이 된다는 것을 가르치면서도, 자신이 다루는 어떠한 것도 손상시키지 않는다. 쌓아놓은 모래성이 한꺼번에 무너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모래알을 하나 씩 하나 씩 떼어내듯, 갈라지는 선과 빛을 따라 사물의 표면들을 벗겨낸다. 시간의 무게에 짓눌려 잘려나간 고대 화석 앞에 선 한 고고학자의 흥분과 섬세함의 십분의 일이라도 가질 수만 있다면! 그러면 더 이상 존재는 잘리기 위해 이리저리 놓이고 거칠게 다루어질 수가 없을 것이다. 움직여야 할 것은 대상이 아니라 바로 나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베르테르가 사랑한 로테는 움직이지 않는다. 움직이는 것은 베르테르이다. 로테는 말해지지 않은, 아직 드러나지 않은 진리와도 같다.


나는 우선 내 앞에 마주한 대상이 포함하고 있는 무수하고도 무한한 속성들을 발견함으로써 사랑에 빠진다. 존재에의 긍정이란 한마디로 말해 무한한 속성의 발견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속성의 무한함은 연인에게 속한 무수한 속성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그 보다는 우선 나의 속성을 촉발케 하는 연인의 속성을 다른 어떤 것으로도 교환하거나 치환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심지어 그(녀)에게만 속하는 그 단성성(singularity)은 어떠한 단어로도 바꿀 수가 없다. 존재에 깃든 단성성이란 원자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것을 넘어서 있거나 언제나 일탈한다. 에피쿠로스는 이를 증명하기 위해 클리나멘(clinamen)이라는 존재를 고안해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오로지 일반적인 의미에 불과한 하나의 단어에, 그(녀)의 충성스러운 대변인이 되어 서명이라도 하듯, 소유를 암시하는 수식어를 하나 첨가할 수 있을 뿐이다: “그(녀)의 미소! 그(녀)의 향기! 그(녀)의 순진함! . . . ”. 좀더 나아가 나의 격앙된 감정이 들킬 만큼 나의 어법이 서툴러지거나 유치해지면, 내 언어는 더 상투적이고 진부해져서 이렇게 말하기 시작한다. “그(녀)의 따뜻한 미소! 그(녀)의 따뜻하고도 감미로운 향기! 그(녀)의 따뜻하고도 감미롭고 사랑스러운 순진함! . . .”. 일이 이 지경이 되고 나면 나는 나 자신도 알 수 없는 이러 저러한 감각 이미지들을 아무 곳에나 제 멋대로 결합시키기까지 한다. 그러나 어떠한 짓도 실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를 파고드는(그래서 내가 굴복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 이미지는 치환이나 재현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녀)를 긍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결국 나는 이렇게 벌려놓은 모든 것들을 한꺼번에 표현함으로써 끝마무리를 지을 수 있다고 스스로 위로하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이라는 모호한 후렴구를 내뱉으며 잠이 들기 시작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긍정의 과정은 사랑 받는 연인의 본질의 발견 뿐 아니라 나 자신의 본질의 발견에서 비롯된다. 속성은 사랑의 대상에 속한 것임에도, 언제나 사랑하는 주체의 영역에서 발생한다. 이런 의미에서 사랑은 반드시 능동을 포함하고 있다. 긍정은 능동을 지시하고, 능동은 긍정을 생산한다. 이것이 바로 사랑으로부터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유일한 윤리학이다. 베르테르가 로테에게 그랬듯이,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연인을 함부로 다루지 않기 위해 스스로 움직여야만 한다. 그 자신이 다가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이는 사랑에 빠진 사람이 피할 수 없는 사랑의 명제이다. (무한한 공간에서 움직이고 있는 두 사람이 있다. 이 두 사람의 수동과 능동에 의해 주파수가 맞았다. 사랑이 기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말이다). 내 안에서 발산하는 능동은 스스로 형상이 되거나 스스로를 재현한다. 때로는 대상의 가치에 대해 채울 수 없는 의혹을 한껏 품다가 가냘픈 충동을 느껴 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혹은 사라진느(Sarrasine)처럼 사랑하는 여인을 상상하며 수도승의 엄격함으로 조각을 하기 시작한다. 처음부터 베르테르는 자신의 편지를 로테에게 보낼 의도가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은 이런 식으로 거울단계에 머무르고 싶어 하거나 우상숭배자가 되기도 하며(사랑이 좌절되었을 때, 사라진느는 조각상을 깨는 것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가장 소극적인 나르시시즘에 빠지거나, 간혹 물신주의자가 된다.


어쨌든 이들은 모두가 하나의 무늬를 짜 놓고 싶어 하며, 이것이 바로 사랑에 빠진 연인으로 하여금 언제나 글을 쓰도록 하는 동인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말하자면 글을 쓰는 사람이다. 마찬가지로 사랑에 빠지면 시를 쓰기 시작한다. 이들은 모두가 문형 제작자이다. 또한 긍정과 능동을 운용하여 문형을 제작하는 이들은 모두가 윤리학자이다.

<문예노트>
Posted by hu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