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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5/13 기업주와 기자 (3)

대단히 엉뚱하게도, . . . 대기업 회장이 자신의 아들과 함께 망나니 같은 폭력을 휘둘렀다고, 기자들 및 언론은 의기양양하게, 할 일을 했다는 듯!, 협잡의 화신인 경찰까지 조심스럽게 질책해 가면서, 목청을 높인다.(곧 있으면 잊혀지겠지만)

상당히 못마땅하고, 걱정스러운 것은, . . . 물론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저렇게 비본질적인 주제에 대해 호들갑을 떪으로써, 공사(公私) 구분 못하는 한 망나니 업주의 사건을 마치 한국 사회의 기업인과 기업 그리고 그 권력의 문제를 폭로하고 고발하고 있는 것 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보라! 이제 기업 권력도 잘못하면 단죄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업주의 특정 일탈 행위에 찍은 방점에 머물러 버림으로써, 오히려 한국 사회 내에서의 기업적 권력의 구조와 본질이, 조폭과 무고한 소시민이라는 신파적 상상의 권력관계로 또 다시 슈거코팅(Sugar Coating) 되어 버리는 것 같아 못마땅하다. 항상 느끼는 바이지만, 기자들과 언론의 사색 능력으로는 결코 과학적 본질을 지각할 수 없는것 같다. 과학은 엄청나게 좋아하면서 말이다. 바로 그 권력의 이데올로기에 젖어 교육을 받고, 그 권력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선발되어 취업을 하고, 그 권력의 이데올로기로부터 월급을 받아, 그 품에서 행복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인지. . . . 문제는 특정 기업인에 대해 가끔씩 터트리는 일탈(편법 자금, 불법 증여, 탈세, 자질구레한 폭력들. . )이 아니다. 그러한 것들은 지저분한 결과들일 뿐이며,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본질을 제대로 볼 수 없게 하는 연막이 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기업과 기업주들에게 느끼는 반감이나 적대감은 막연한 형태의 느낌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 실체가 막연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 느낌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가늠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사람들은 욕을 하고 손가락질을 하면서도, 술자리에서 일어나 무기력의 우울감을 짊어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막연한 감정과 분노로는 해결가능성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참담한 심정으로 아침에 일어나 신문을 주어들고는 가시적이고 분명하게 보이는 스캔들 속에서 그 원인을 찾고 싶어한다. 가령, 어떤 기업인이 무고한 시민에게 권력을 이용하여 폭력을 썼다든지, 법적 절차를 무시하고 불법적으로 재산을 증여했다든지, 회계 장부를 이중으로 기록했다든지 하는 식 말이다. 하지만 그러한 방식의 관점에 고착되어 있으면, 기업 권력의 문제는 해결될 수 없고, 반감은 더욱 모호한 감정으로 발전하게 될 소지가 크다. 우리는 사회의 안녕을 위해 일탈과 범죄를 근절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을 가만히 따지고 보면, 일탈과 범죄는 근절되어야 할 것이기 보다는, 사회의 특정 권력이 유지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유산균 혹은 가끔씩 재접종이 필요한 불주사(BCG) 같은 것이다. 범죄가 저질러지고, 그것을 법의 이름으로 처벌할 수 있는 힘이 대중들에게 있다는 확신을 갖게 해주는 것만큼 사회 권력을 공고히 하는 좋은 방법은 찾기 어렵다. TV나 신문에 소개되는 다큐멘터리 같은 화질의 범죄현장과 고개숙인 범인들을 눈쌀을 찌푸리며 바라보면서, 묘하게도 우리가 취하는 태도는 건전한 사회와 건전한 인간의 존재를 확신한다는 사실이다. 맨눈으로는 볼 수 없는 저 외계의 끔찍한(그래서 항상 모자이크 처리되는) 어떤 것 때문에, 오히려 그것을 바라보고 비난하고 단죄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현재의 우리 자신, 그리고 저들 부정적인 인생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은 현재의 우리 자신에 안도감을 갖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기업주가 권력을 이용해서 아들을 위해 폭력을 사용한 사건이 저렇게 들뜬 어조로 보도가 되는 가운데, 우리의 귓가에는 아주 조용히 다정하게 속삭이고 있는 은밀한 목소리가 들린다. 그것은 바로 "존경받는 기업주", "자본의 선용", "덕망있는 권력"과 같은 신화가 혹시나 실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라고 하는 환상이다. 기업주 자체, 자본 자체, 권력 자체를 결코 바라볼 수 없게 하고, 문제삼을 수 없게 하는 언론의 저 달콤한 부정은, 우리의 뇌리에 꾸욱 자국을 남기고는, 나약해진 우리의 육체와 정신에 가끔씩 출몰하는 상상적이고 허왕된 어떤 바램들이 실현되기라도 할 것처럼 우리를 기만한다.

지식인들이 해야할 역할은 사람들의 막연한 반감을 보다 과학적이고 첨예한 본질적 문제들 쪽으로 제시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대중들의 모호한 느낌이 예리해지고, 그 날카로운 정신을 문제 해결의 수단으로 발전시킬 수가 있다. 그랬을 때 비로소 우리는 무기력과 절망을 넘어선다. 그런데 기자들이나 언론 전체가 바라보고 있는 관점과 문제의식은 언제나 문제를 더욱 더 모호하고, 감정적이고, 신파적인 대립구조 또는 일탈적 범죄들로 몰고 간다. 문제를 사정없이 망치고 있는 것이다. 기자들과 언론은 여러가지 방법으로 어김없이 우리를 실망시킨다. 그 단순한 시각이 너무 시시해서 실망하고, 이해의 깊이가 너무나 떨어져서 실망하고, 때로는 경찰이나 업주들처럼 협잡꾼의 미소를 보는 것 같아 실망하고, 간혹 오버해서 짜증이 나고, 이런 저런 이유들로 우리의 양 미간은 여지없이 구겨진다. 물론, 저 사건은 근본적인 권력의 한 결과이므로, 당연히 처벌해야 하고, 만인에게 그 사실이 폭로 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언론은 언제나 그 수준에 머물러 있다. 그렇기 때문에 몇 주가 지나면, 아무도 그 사건을 기억하지 않고, 또 시간이 지나면 동일한 사건들이 생겨난다. 기업과 업주의 근본적인 문제는 특정인의 일탈과 편법과 부패가 아니다. 문제를 그런 식으로 개인화하고 삼류 영화 구도로 만들어 버리면, 본질을 드러내는 것은 고사하고, 실상을 왜곡만 할 뿐이다. 속빈 냄비처럼 호들갑을 떨어 실상을 스캔들로 만들어 버리는 철딱서니 없는 보도가 아니라, 냉철하고 진지하고 진정성이 있는 보도를 하길 바란다. 기업주의 악덕이 아니라, 기업주 일반의 본질을 드러내는데에 까지 나아가야 한다. 다시 말해, 기업주는 정당한 존재인가? 기업주가 이 사회에 필요한가? 한 개인의 저러한 엄청난 사회적 부(富)를 인정해야 하는가? 한 개인이 저와 같은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은 어떤 것인가? 해결 가능성이 있는가? . . . . 와 같은 방식의 질문과, 그 질문의 해답을 찾는 기사를 쓰는 것이 보다 본질에 근접한 접근법이 될 것이다. 물론 선결조건으로, 자신이 그러한 질문으로부터 자유로워야겠지만 . . .

Posted by hu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