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담 한 마디 하겠다. 나는 최근에 말수가 적어졌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꽤 오래 전부터 그렇게 된 것 같다. 특별히 누군가를 만나서 수다를 떠는 경우가 적어졌고, 혼자 살다보니 일주일에 며칠씩이나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보내는 날이 많아져, 자연스럽게 말이 없어진 것이다. 이제는 조리 있게 설명하거나 상대의 말에 재치 있게 응수하는 테크닉조차 다 사라지고 없다. 말이란 습관이 아닌가? 심지어는 사람들을 만나서 잡담을 하는 일이 점점 고역이 되어가고 있다. 물론, 내 직업상 학생들 앞에서 강의를 하지만, 그것은 말하기가 아니라 오히려 글쓰기가 아닌가 싶다. 우선 충분한 생각을 하고, 그 생각을 마음속에서나마 정리하고, 이런 저런 상상을 감미료로 채색하여 준비하는 것이다. 교재가 있으니 할말이 없으면 그것을 읽기만 하면 된다. 그러다 보니 강의 시간에는 학생들을 쳐다보지 않게 되었다. 준비된 것만 잘 기억하여 낭독하고, 마지막에 가서 그들의 수긍하는 고개 짓만 확인하면 만사형통이기 때문이다. 강의란 결코 대화일 수가 없는 것이다. 어쨌든 이런 식으로 나는 몇 년 동안을 말 한 마디 없이 수월하게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말수가 적어진 것은 내 주변의 불가피한 조건들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거기에는 다른 이유가 있다.
우리는 지하철이나 대합실과 같은 공공 장소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대면하고 부딪치지만, 결코 한번도 그들과 시선을 마주치지 않는다. 아무 곳에서나 군중들의 사진을 찍고, 그 사진 속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을 관찰해 보라. 제각각의 낯선 눈빛들에 놀랄 것이다. 자신만의 방으로 향하는 그 시선들은 마치 거리에서 혹은 다리 위를 걷고 있는 뭉크(Edvard Munch)의 초상들을 보는 듯하다. 개인들은 바로 그 낮선 시선을 통해 다가올 미래의 관계에 대한 이름 모를 불안을 표현하는 것처럼 보인다: "날 좀 내버려둬!"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현대인들의 소외는 고립이나 고독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가져올 상상된 결과에 대한 두려움에 있다. 뭉크가 고독을 절망과 관계짓는 것도 다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현대인들의 정신적 소외는 고독이 아니라 오히려 수다가 예증하고 있다. 말을 하지 않으면, 계속해서 말이 이어지지 않으면 죽음 뿐!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침묵이며, 그래서 말이 중단된다면 절대적인 무(無)의 상태에 직면할지 모른다는 막연한 공포에 사로잡힌다. 그러니 우리의 수다는 견딜 수 없는 고독에 대한 가련한 자기변론이 되거나, 나아가 더 심해진다면 환상적 도피 같은 것이 되기 십상이다. 정신적 소외란 고립이나 고독이 아니라 그에 대한 공포, 즉 자기 자신에 직면하기를 두려워하는 일종의 돌림병이다. 그래서 때로 사람들은 이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마치 수건을 돌리듯이 자신의 공포를 한없이 돌려가면서 타인에게 투사하고, 그로부터 일종의 공범의식 같은 것을 만들어낸다. 절대적 무에 직면하지 않도록, "나뿐만이 아니라 바로 당신도 노력을 해야할 것 아니오!"라고. 말이 없는 사람을 보면 왠지 모를 불쾌함이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침묵하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말을 강요하는 관계가 된다. 친구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왜 아무 말도 없어? 얘기 좀 해봐!" 만일 이 대사가 수십 년을 함께 살아온 어떤 부부의 것이었다면, 그들만큼 불행한 관계가 또 있을까? 그 대사가 암시하는 대화의 부재 때문에 불행하다는 말이 아니다. 그들의 불행은 그 대사 자체, 저 수다에 있다는 말이다. 저토록 수다스러운 배우자가 있다면, 당신은 이미 저주받은 인간이다. 사람들이 도서관만큼이나 조용한 출근 만원 지하철을 문제삼지 않는 것은, 그 질식할 것 같은 침묵 속에서나마 저러한 수다를 듣지 않아도 괜찮다는 암묵적인 사회적 합의가 있기 때문이다. 마치 하나의 제도처럼 애초부터 거세되어버린 관계를 축복처럼 묵인하고 있는 그들의 태연한 침묵을 보라. 그러나 삶의 대부분의 시간을 진공 상태의 지하철 속에서 태연한 죽음으로 보낼 수는 없다. 그래서 서로 아무 말이 없는 동안에도 우리는 자주 저와 같은 수다를 듣게된다. 침묵 속의 수다를 느끼는 관계를 우리는 불편한 사이라고 말하곤 한다. 수다쟁이들을 간혹 보게되는데, 내가 보기에 그들은 말을 못하게 하는 억압에 대한 단순한 저항이 아니라, 오히려 입을 막는 소극적 억압보다 더 억압적인 요구, 즉 말하게 하는 강요를 통해 억압을 적극적으로 실행하고 있는 기제이다. 억압적 고문은 말을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말을 강요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히스테리를 넘어 새디즘적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말을 듣기 위해 오랜 시간동안 앉아서 귀를 기울인다. 그러나 그가 하는 모든 말에 흥미를 느끼기 때문에 그러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제대로 된 흥미로운 토론이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똑같이 반복되는 이야기들,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화두들, 이것이든 저것이든 언제든지 교정이 가능한 사실들, 모종의 의도 하에 뒷 냄새를 풍기는 사족(蛇足)들, 다 알고 있어서가 아니라 궁금하지 않은 정보들. . . . 정치가들의 수다야 지적할 가치도 없고, 라디오나 텔레비전에 나오는 뉴스 기자들의 수다를 가만히 듣고만 있어도 역겨움 같은 것을 느낄 때가 있다. 심지어는 모든 방송국의 뉴스가 한결같이 내보내는 똑같은 대사와 똑같은 각도의 카메라를 보고 있으면 겁이 나기까지 한다. 저것이 어떻게 가능한 일일까? 수다가 강요인 이유는 다름 아닌 그 상투성 때문이다. 현대사회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억압은(그래서 심지어 악이 되는) 바로 그 진부하고도 상투적인 말들이 아닐까? 2차 대전 이후 지금까지 미국이라는 나라가 인류의 적(혹은 악)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가공할 만한 그들의 침략 때문이 아니라 맥빠지게 하는 그 진부함과 상투성에 있다. 그들은 예측된 감동을 제조하는 경이로운 능력이 있다. 우리는 그들의 침략전쟁에 반대 할 것이 아니라, 그 보다 더 최선을 다하여, 헐리웃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여인들의 하이힐이 걸쳐진 다리, 키스할 때면 여지없이 올라가는 그 왼쪽 종아리를 잘라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사드의 소설이 독자들에게 고문을 맛보게 해주는 요소는 다양하게 묘사된 새디스트의 외설과 고문들 때문이 아니라, 상투적이고도 진부한 논증이 끊임없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물론 그 반복이야 처절한 의도를 품고 자행되는 것이기 때문에 예술적이라고 말하는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상투성이란 물론 대중매체에 의해 실천된 것이긴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대담함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는 왜소한 부르주아의 산물이다. 자본가들은 결코 도박을 모른다. 시장판에서 살고 있는 개인들은 이를 잘 내면화한 것 같다. 그렇게 해서 사람들은 이 상투성에서 나오는 지루함을 피하기 위해 술을 마시고 수다를 떨거나, 많은 사람들이 들떠있는 장소에 나가 춤이라도 한 판 추고 싶어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것은 기름을 안고 불 속에 뛰어드는 것보다도 더 위험한 짓이다. 그것은 오히려 부르주아가 원하는 것이기도 하다.
거두절미하고, 차라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끊임없이 침묵을 메우려는 두려움에 찬 불필요한 화두들이 아니라, 정말로 값진 화두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되는 자리, 바로 침묵의 자리가 아닐까? 흥미롭고도 중요한(이 둘은 상호 보완적이다) 말이 나오지 않으면 안 되는 고독! 아무 할 말이 없어도 두렵지 않은 정다움! 말하지 않아도 전혀 심리적 처벌이 가해지지 않는 조용한 신뢰! 흥미로운 대화 뿐 아니라, 진정으로 값진 것이 창조되려면 바로 저와 같은 조건들이 마련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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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과의 대면에서 승리 하는 수도 있는가요? 음...중독과 즐김의 경계는 무엇일까 생각해 보러 갑니다...=3=3 2005/12/23 00:34
공동체의 경험이란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하거나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다. 그것 외에 무엇이 있겠는가?-->동감입니다. 그이상 거창하면 저도 많이 헷갈리거든요. 하지만 신문이나 소설같은 매체가 없었더라면 사람들은 단순하게 헷갈렸을 것이고 거대매체가 있기에 종합적으로 다양하게 헷갈리는 것 같습니다. 섬세한 표현에 늘 감탄을 합니다. 이런 표현 미안하지만 여하간 칭찬입니다. 여인이 아름다우면 나머지는 다 용서해 주는 남성의 심경을 체험합니다.^^생각을 많이 하고 쓰신 글이라 같은 글 두 번 잘 안읽는데 읽을 때마다 다른 뜻이 보이네요. 나중에 읽을 기회가 있으면 또 코멘트 하겠습니다. 2005/12/23 02:00
인류공동체나 대중매체공동체만을 이야기할 때엔 존재의 체험이 '말'에 의해
규정된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혈연/지역공동체에서는 단순히 던져진 말 뿐
아니라 공유한 언어 속에 퇴적된 공통의 역사와 공통의 몸의 체험들이 포함
되므로 인류/대중매체공동체와 구별되야 하지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야기를 하고 들어주는,'간접체험'이 그 전부는 아닐거라는 거죠.
한 민족이 함께 겪은 역사의 한 사건은, 제 삼자(매체)를 통해서 듣는 단순한 '이야기'의 체험에만 가둘 수 없는 역동적인 에너지가 있을 듯 합니다.
역시 엉뚱한가요? ^^;; 2005/12/23 08:51
아는것은 별로 없지만, 종합적으로 몇 마디 드리겠습니다.
2005/12/24 05:20
물론, 중독은 즐거움이 아니라 즐거움의 맹목적인 추구일 텐데요 . . 가령, 즐겁지 않아도 반복적으로 원한다든가 하는, . . 그래서 중독은 과도해질수록 즐거움으로부터 멀어지는 상태를 의미하겠죠. 특히 중독은 어떤 대상에 집착하면서, 그 대상에 쾌락을 고착시키는 속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술이나 담배나 육체와 같은 대상 자체가 쾌락으로 오인된다든지, 심지어는 어떤 상징이 쾌락과 동일시되는 경우도 그 비슷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물신숭배처럼요, . . . 특정 대상에 집착하다보니 쾌락의 조건이 우연적으로만 주어지기 때문에, 중독은 슬픔을 만들어내는 행위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술, 담배, 육체, 상징 등이 사라진다면 곧 바로 슬픔에 빠지는 것이 그런 경우겠죠. 그래서 중독은 욕구를 결코 현실화시킬 수가 없습니다. 욕구의 향기만을 잠깐 맛보게 해준다면 맞을까요? 중독이란 우연적이고 임의적인 쾌락인 것 같습니다. 2005/12/24 05:20
기쁠 수는 있지만, 그것은 너무나 수동적이기 때문에 슬픈 기쁨이라고나 할까요? 그래서 중독에 의한 쾌락이란 오히려 어설프고 서투른 쾌락이 아닐까 싶습니다. 맨정신에서도 쾌락이 느껴져야 할텐데, . . 맨정신에서는 슬프거든요. 오직 술먹는 날, 바로 토요일과 일요일에만 신나는 우리들 처럼요. 2005/12/24 05:21
이런 것들을 좀 종합해서 도식화해보면, 제 생각엔, 중독은 수동성에서 발생하고, 또 수동적 정서와 수동적 행위를 유발시키는 것 같습니다(좀 상투적인 도식이네요^^). . . . 관계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능동적 관계가 있고 수동적 관계가 있는 것이죠 . . 따라서 관계들의 총체라고 말할수 있는 공동체 역시 능동적 공동체와 수동적 공동체가 있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 . 수동적 공동체가 바로 중독적 관계를 이루고 있을 텐데요, . . 가령, 우상이나 상징으로 결집된 집단과 같은 것이 그 예라고 할 수 있겠죠. . .좀 단순화시켜서 쉽게 예를든다면, 포탈사이트 회원들과 동호회 회원들, 학교의 학생들과 동아리 멤버들, 동료집단과 친구(또래)집단, . . . 등, .. 부여된 자격으로 결합된 관계와 자발적 친화력으로 결합된 관계의 차이라면 예가 될지 모르겠습니다. 2005/12/24 05:22
중독적이라는 말은 바로 수동적 상태, 의존상태, 주어진 관계, 즉 주체가 가만히 있어도 자신의 역할이나 할일이 결정되는 공동체를 지칭하기 위해 쓴 말이었구요. . 그런데 대중매체는 대부분(전부는 아닐지라도) 상징적이고 추상화된 관계를 만들어낸다는 것입니다. . 국가라든가, 민족이라든가(이 말은 원래 정치체로서의 국가와 그리 멀지 않은 개념입니다), 인류라든가, 지구촌이라든가, . . . 중독적 현실들이죠 . . 교육에 의해 알려진 공동체, 심하게 말하면 강요된 공동체이고, . . 좀 덜 심하게 말하면 어떤 목적에 써보겠다고 발생한 공동체이고, . . 가령, 지구촌이라는 말은 원래 지구인들이 스스로 자발적으로 만들어낸 말이 아니라, 우주개척을 위해 그 중심지 혹은 발상지로서의 개념으로 출발했다고 하더군요, . . 그리고 지금은 지구촌이라는 말이 세계시장을 꿈꾸는 세계화 담론의 주역들의 입에서 주로 거론되고 있구요, . . 2005/12/24 05:23
민족-국가(Nation-State)라는 개념도 따지고 보면, 근대에 와서야 생긴 개념이잖습니까? 근대가 어떤 시대입니까? 자본, 식민지, 전쟁, . . . 그 이전에는 공동체의 개념이 완전히 달랐겠지요. . .베네딕트 앤더슨 말인데요,. . 민족이나 국가라는 상징(어떤 사람들은 '알레고리'라고도 합디다)이 우리의 뇌리에 박힐 수 있었던 것은 신문과 소설이 주역이라고, . . . 에구. . .더 이상 나아가면, 논문이 되겠네요 . .
다음엔 이야기의 문제인데요, . . 그건 좀 쉬었다가 하겠습니다. . . 다만, 이야기는 단순히 말을 통해 경험을 간접적으로 전달하는 문제라기 보다는, 시간성의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만 말씀드리겠습니다.
2005/12/24 05:27
文才님^^의 중독과 즐김에 관한 멋진 풀이, 재밌게 읽었습니다.
'즐김'은 huun님 말씀마따나 능동적인 '행위'이고,
'중독'은 능동성을 잃어버리고 즐김의 대상이었던 것과 '주종 관계'가 성립
되어 수동적으로 주체가 휘둘리는 '상태'인가 합니다. 담배를 스스로 즐긴다 생각하고 피우기 시작했다가, 어느새 담배가 없으면 불안하고 허전/초조해지는
몸의 상태가(뉴로트랜스미터의 부족감) 정신적인 공황까지도 몰고오는 경우가 허다하니까요. 이건 마치 봉건영주에게 해마다 빚을 얻어 원금은 커녕 이자도 갚기 어려운 소작농 같군요 ㅎㅎ 2005/12/24 06:40
-_-a;; 님들 글 읽다가, 정신적인 공황에 다다랐습니다. ㅠ.ㅠ
담배라도 피우러 갔다와야겠습니다... 2005/12/24 13:24
흑...내가 이럴 줄 알았어...ㅠ.ㅠ 중독이란 과연...=3=3 2005/12/24 18:57
사과꽃님의 소작농 비유는 아주 멋집니다. . . 문재는 따로 있었네요 . . . 그리고, deca님 . . 저 위에서 했던 중독에 관한 말들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뭔지 아세요? . . . 담배 끊으세요!! . . 입니다. ^^ . . . 땡글땡글님 . . 한가지 궁금한게 있는데요, . . 모든 꼬리말 끝에 적은 표시 "=3=3"가 뭔지 몰랐는데. . . 혹시 달음질 치는 모습인가요? 만약 그렇다면, 방향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 . 그쪽으로 가면 글자들이 길을 막고 있어서, . ^^. 2005/12/25 23:28
병문안 왔어요^^ 아무때나 도망가는 것은 아니고 민망했을 때만 달아나는 것입니다. 전 글자들이 허들인줄 알고..그짝으로다가...^^
뭐 암튼 중독과 즐김의 경계를 생각해보려면 우선 즐거움의 주 객체를 논하기 전에 중독의 네거티브한 면이 강조되어서는 중독에게 살짝 불리한것 같아서 잠시 생각 좀 해보려고 했습니다. 잘 정리가 되면 트랙백으로다 모십지요...
일단 제일 큰 의문은 중독 이후 금단 증상의 두려움인데 쉽게 우리가 극복하지 못할꺼라는 전제에 합의한것은 아닐까 입니다. 물론 아는것, 좋아하는 것이 즐기는것만 못하다고는 하지만 이는 신선의 경지에서나 득도한 자만이 가능한것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해봤구요. 2005/12/26 00:50
그래서 중독이 주는 즐거움 혹은 쾌락의 정도를 시간의 축으로 수치적으로 나타내 본다면 시작하는 단계나 혹은 금단의 고통이 찾아오기 전까지의 중독이 주는 쾌감은 가히 기하급수적 증가 곡선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즐김이 시간을 두고 조금씩 골고루 쾌락을 나누어 준다면 중독은 금단의 위험 대신 강력한 거부 못 할 에너지를 내뿜으니까요.
"나는 그의 목소리와 그의 눈빛을 하루라도 못 보면 미칠것 같아...난 아마 그이를 즐기나봐..."이러면 이상하잖아아?
더우기 금단 현상의 한계를 극복 하고 났을 때의 짜릿한 쾌감도 있구요..그래서 전 중독의 에너지 응집 상태(?)를 즐긴답니다.
그리고 궁금한 것이 있는데...쾌차 하시면 여쭈어 볼께요...^^ 2005/12/26 00:54
허들?! . . 그걸 생각못했군요 . . 그렇군요 . .
. . 중독이라는 용어 자체가 이미 부정적인 측면을 나타내기 위해 만들어진 개념일테니 . . 그렇게 얘기를 해야겠죠 . . 그렇지 않다면 중독/즐김 이라고 분할해서 비교할 이유가 없겠죠. . 혹여 중독의 의미를 다시 정의내리고 싶으신 건가요? ^^ . . . 그런 문제라면 제 생각엔 중독/즐김의 일반적 개념을 문제삼기 보다는. . 특정 형태의 중독을 가지고 말해야 하지 않나 싶네요. . 가령, 알콜중독이 중독인가? 즐김인가? 커피중독이 중독인가? 즐김인가? . . .와 같이요. . . 정신의학에서는 중독을 정의할 때에, 주로 "기능장애"를 언급하더군요. 어떤 물질이 신체의 기능장애를 일으킨다든지 하는 경우요 . . . 금단증상의 경우엔 물질에 대한 신체적 내성의 발현이구요, . . 어떤 경우든지, 중독이라고 할 때에는 신체가 지속될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만일에, 중독의 윤리적 측면 혹은 심리적 측면에 대해 말해야 한다면, 위에서 언급했던 능동과 수동의 문제로 말할수 있을 것 같구요, . . 무엇보다도 쾌감을 지속시킬 수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중독은 쾌감을 어떤 대상에 의존함으로써 . . 쾌감의 지속을 우연적이고 외적으로만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구요, . . . 뭐, . . 더 생각을 해봐야겠지만 말이죠. . .
다시 공동체 얘기로 돌아와서 . . 이야기의 문제를 한번 생각해볼까 합니다. 다시 이어서 말씀드리면, . . 사실, 공동체의 한계를 정하는 것은 기준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언어공동체, 민족공동체, 혈연공동체, 가족공동체, 유, 종, . . . 어떤 식으로든 공동체는 형성되겠죠. . .하지만 위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 .능동적 공동체가 문제인데요, . . 그것이 지속력을 갖추어서 완성되려면 시간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 관계라는 것은 시간 속에서만 완성되는 것이고 . . 그 형태는 주로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 . 이야기는 말로 소통한다는 뜻도 되겠지만 . . 보다 근본적으로는 시간의 경험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 . 시간이란 기다림이고, 망설임이고, 지루함이고, 고민이기도 하고, 고독이기도 하고, . . 그 시간 속에서 사람들은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이야기를 듣고 . . 하는 것 같습니다.
친구나 애인과 함께 오랫동안 앉아있거나 지내다보면, 한 마디도 하지 않아도 서로 이야기를 하고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 서사를 만들어 내는 것 뿐만 아니라, 이야기란 그 에게서 혹은 그와 나 사이에 놓여있을 시간 속에서 무엇인가가 느껴지고, 그것이 표현되는 것 자체가 이야기가 아니겠느냐 하는 것이죠. 가령, 그림은 눈으로 보는 것이지만, "그림을 읽는다"고도 합니다. 읽는다는 표현을 씀으로써, 그 그림으로부터 느껴지는 어떤 것을 이야기로 풀어낸다는 말을 하는 것이죠. . 그림 속 인물들을 둘러싼 사연들을 풀어내고, 정황설명이나, 배경, 인물들간의 관계 등등 . . 그림속에 재현된 모든 것들을 정지되어 있거나 죽어있는 하나의 대상이 아니라, 각각이 자기 자신의 사연을 가지고, 자신의 시간을 갖는 존재들, . . 즉 살아있는 존재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죠. .
. . 아마도 이야기가 아니라면 우리는 절대로 다른 존재들을 살아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 . 그림을 읽음으로써, 그것을 시각이나 촉각과 같이 무시간적인 감각을 통해서가 아니라, 시간성 속에서 경험함으로써, 우리는 관계들을 살아있는 것으로 . . 가령, 책은 절대로 직접적인 감각으로는 읽을 수가 없잖아요. 오랫동안 기다리고 망설이고 지루하게 감내하면서, 즉 오로지 시간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듯이 말이죠. 그래서 능동적 공동체라는 것은 시간속에서 형성되는 것이고, 그 시간 속에서 무엇인가가 느껴져야 하는 것이고, 개인들로 하여금 느낌을 표현하고 실천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어 있는 "장"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중매체가 만들어 놓는 공동체라는 것은 느껴지는 공동체이기 보다는 주로 (지식으로) 알려진 공동체, 강요된 공동체, 교육된 공동체 . . . 인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대중매체는 사람이나 사물들간의 관계를 시간 속에서가 아니라, 편집 속에서 받아들이게 한다는 것입니다. 가령, A라는 사람이 집에서 나와서 차를 타고 학교에 가는 과정을 보면, 그 A는 한 발 한 발 걸어서 1초. . 1초를 보내면서, 매우 지루한 시간을 지나가지 않으면 안 되잖아요 . . 그런데 편집된 현실은 A가 집에서 나오는 장면 한 컷, 차 타는 장면 한 컷, 학교에 도착하는 장면 한 컷 . . 이런 식으로 시간성을 배제하는 경향이 있어요. . . 무수한 시간들 속에서 특정한 정점의 시간만을 포착하여, 그것들을 추상적으로 종합하는 것이죠 . . . 예전에, 트뤼포 라는 영화감독이 만든 <400번의 구타>라는 영화에서, 아이들이 방과후에 집으로 가는 장면들이 나오는데, 그 영화에 출현했던 아이들이 개봉된 영화를 보고나서, 감독에게 엄청나게 비난을 퍼부엇다고 하더군요. .
왜냐면, 학교에서 집으로 가는 과정을 너무 짧고 성의 없이 만들었다는 거예요 . . 자기네들이 학교에서 집에까지 얼마나 고생하면서 가는데 . . 그렇게 짧게 만들수가 있냐구요 . . 그 영화를 보면 학교와 집 거리가 별로 멀지 않아 보였다구요 . . . 매체가 만들어 놓는 경험은 항상 시간성을 배제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 . 그래서 매체의 공동체란 언제든지 충만해 보이지만. . 동시에 허기지게 하는 . . 무엇인가가 부족한 . . .마치 한국사람이 세끼 식단을 버터를 먹은 것 처럼 ^^ . . . 뭐 그렇다는 얘기 . . 2005/12/26 02:01
담배는 마음의 일요일이라고 누가 그러더군요^^
아직은 흡연이라기보단 애연이(라고 주장하는 거지만)어서 금연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저 사는 동네에선 담배타박이 심해서요... 좀 불편하긴 합니다^^ 2005/12/26 02:03
'이야기'에 시간의 역사가 들어있다고 말씀하시니 한결 이해하기가 편합니다^^
그러고보니 그림을 해석하는 사람이나 소위 시를 '비평'한다는 사람들도 자신의
주관적 경험과 통시/공시적 세계의 경험을 바탕으로 시나 그림을 '재해석'하는
것, 그러니까 결국은 자신의 총체적 이해를 '이야기/언어'의 매체를 빌어 타인에게 이해를 시키려는 작업이 되는군요. 또한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도 자신만의 '의미의 체계'로 또 다시 재해석하여 이해를 할테니, 결과적으론 끊임없는 '재해석'의 연속이라해도 과언이 아니겠습니다 ㅎㅎㅎ 2005/12/26 09:51
'대중매체'에 공동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다고 해도,이는 혈연/가족공동체와
다르게 내가 그 것과의 관계를 일방적으로 끊고자 마음 먹으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이 혈연공동체와 크게 다른 점 인 듯 합니다. 이렇게 보면 오히려 공동체를 '능동'과 '수동'으로 분류할 때, 소위 대중매체공동체는 '능동적'인 성격이 더 큰 것 같습니다. 게다가 언어(이야기)에 못지않게 중요한 인간 '소통'의 수단인 '육체적인 텃치'가 빠져있으니 역시나 '대중매체공동체'는 여타의 다른 공동체와는 구분이 되야할 것 같아요.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윗글에서 "이러한 것들이 바로 대중매체를 통해 개인들이 망상하는 내 가족 내 민족 내 인류라는 공동체 의식이다"라고 쓰신 부분에서 드는 의문때문입니다.
대중매체를 통해 조작되어지는 모래성같은 공동체의식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설명을 해나가시다가 갑자기 내 가족 내 민족을 (내 인류는 빼겠습니다^^) 2005/12/26 09:54
언급하셨기에 제가 헷갈렸거든요^^
암튼, 그 부분만 빼고는 '충만한 듯 보여도 허기지게 하는 대중매체 공동체'에
대하여 크게 공감을 하며 읽었습니다. 언제나 제가 미처 생각지 못하는 것들을
불러 일으켜주는 글에 탄복을 하면서... ^----^* 2005/12/26 09:54
네. . . 다른 얘기들은 넘어가기로 하구요, . . 한가지만 더 말씀드리면, . . "내 가족 . . ." 이라고 한 이유는, 현대사회에서의 가족이라는 것이 의미가 완전히 달라졌다고 봅니다. . 사실, 가족을 깊이있게 연구해보지는 않았지만요, . . 일단,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가족이 가부장적이라는 것이고, 따라서 가부장 시스템이 점점 무너져가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가족의 개념 역시 매우 추상적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가족의 개념과 현실에서의 가족의 괴리가 생각보다 매우 큽니다. 그런데, 대중매체가 만들어 놓는 가족의 이미지는 상당히 비현실적이에요. 사라져가고 있는 것에 대한 마지막 가련한 믿음처럼 . . "그래도 그것은 지켜져야만 한다!!" 라든가, "아직도 남아있는 것이 있어야 한다!!" 라든가, 심지어는 가족주의적인 믿음을 이용해서 스캔들을 즐기고 있기 까지 합니다. . 2005/12/26 17:52
가족이 자본주의를 강하게 유지시키는 가장 훌륭한 메커니즘이라는 것은 잘 아실테구요, . .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미국사회에서 개인들을 폐쇄적으로 만드는 것중 가장 강력한 기제가 바로 가족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구요 . .전 가족들이 모여있는 공원이나 유원지 같은 곳을 가 보면, 그들의 그 폐쇄적인 도취를 아주 많이 발견하게 됩니다. 또, 제가 아는 사람들 몇 명만 꼽아서 보아도, . 그 가족의 형태를 명확하게 구분짓기가 힘듭니다 . . 우리가 알고 있는, 양부모와 아이들 . . 이 개념이 아주 복잡해요 . . 또 사회생활들 속에서 그 관계들이 매우 뒤틀려있고, 비정상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 그런데 가족의 정형화된 이미지를 대중매체는 강요하고 있죠. .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면 비정상적인 가정이고 잘못된 삶인 것 처럼요, . . .어쨌든 그러한 환상들을 만들어내면서, 우리로 하여금 가족에 대한 제대로된 고민을 못하게 하죠, . . 2005/12/26 18:13
이것 뿐만이 아니라, 사실 부지기수로 많습니다. . 어쨌든 . . 우리가 너무 맹목적으로 믿고 있는 가족도 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 그것도 역시 하나의 공동체라고 본다면, . . 좀 다른 형태의 공동체를 생각할수도 있을 것이구요, .. 2005/12/26 18:13
민족-국가란 개념이 따지고 보면 고조선 시대이야기 인데 요사인 포퍼가 이야기하는 민족은 허구다란 명제를 보고 많이 이야기하는 거겠죠?원래 나라란 게 혈연적인 관계를 피할 수 없는 거였는데, 국가가 거대화되고 다원화 되면서 허구가 된 것이죠.... 2005/12/26 18:50
huun님, 친절하신 설명 감사드립니다 ^^ 꼬리글로 님의 글에 대한 이해를 높였으니 저로선 성과가 크네요. 골치 아프게 해드려서 죄송하구요 ㅎㅎ 2005/12/26 19:16
지적과 관심. . 진정 감사합니다. 총명한 사과꽃님 . . 덕분에 페이지가 춥지 않습니다. . . 저 역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구요. . 질문에 답하면서, 내심 깊은 한계를 느낍니다.^^ . .
song님 오랜만입니다. . 포퍼가 그런 말도 다 했나요? . . 그랬군요 . . 니체는 그러더군요 . . 국가는 . . .? . . . "금발의 야수"다!! ^^ . . 니체 답죠? 2005/12/26 23:45
음...이 방에만 오면 연필이랑 공책을 쳉겨와야 할것 같은...참 그리고 돋보기도...deca님 따라 넘던 허들이나 마저 넘을까부다...=3=3 2005/12/27 01:10
참 . . 늦은 감이 있지만 ,. . . 위에 deca님의 말씀에 답하면요, . . 전 약 1년 반 전에 담배를 끊었습니다 . . 거의 20년 가까이 피워오던 담배를요 . . 한 동안 꿈 속에서 담배피우고 죄의식에 빠지는 장면들이 주기적으로 나오곤 했어요 . . 담배 피우는 장소도 꼭 지하실 어두 컴컴한 암실 같은 곳에서 천장에 조그마하게 달린 환풍기에 연기품어가며 피우는 장면들이 대부분이었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