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매체'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6/09/05 어떤 충만한 허기에 대해 (21)
  2. 2006/08/08 말과 침묵 (2)

대중 매체는 지구 전체를 나아가 우주 전체를 하나의 촌락으로 만들어 버렸다. 신문을 읽고 텔레비전을 보면서 우리는 그 촌락의 일원임을 분명히 자각하게 된다. 헤겔이 말했듯이 현대인은 아침저녁으로 신문을 읽으면서 중세 사람들에 버금가는 기도를 올리고 있는 것이다. 중세의 교회가 서구 전체를 하나의 가족으로 끌어 들였듯이, 현대의 신문과 텔레비전은 인류 전체를 하나의 마을로 포섭한다. 대중 매체는 서로 실질적인 관계가 없는 부분이나 개인들을 하나의 전체로, 다시 말해 추상적 관계로부터 파생하는 공동체 의식을 조직한다. 일종의 전도된 공동체라고나 할까? 그리하여 대중 매체에는 묘한 역설이 있는데, 알지도 못하면서 잘 아는 세계, 체험하지도 않았음에도 익숙한 세계의 충만함이 있다는 점이다. 신의 전능한 품속에서 내가 태어났듯이, 나의 존재는 충만한 전체에 속해 있다. 그러나 내가 속한 전능하신 아버지를 한번도 보지 못했듯이, 나의 충만한 전체 역시 그 처소를 알 길이 없다. 감각의 세계로부터 추상의 세계로의 전환. 매체가 만들어 놓은 공동체는 실재하는 것이긴 하지만, 그 양태가 전혀 다른 실재이다. . . .


<문예 노트>



Posted by huun

말과 침묵

monograph_column 2006/08/08 16:49

여담 한 마디 하겠다. 나는 최근에 말수가 적어졌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꽤 오래 전부터 그렇게 된 것 같다. 특별히 누군가를 만나서 수다를 떠는 경우가 적어졌고, 혼자 살다보니 일주일에 며칠씩이나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보내는 날이 많아져, 자연스럽게 말이 없어진 것이다. 이제는 조리 있게 설명하거나 상대의 말에 재치 있게 응수하는 테크닉조차 다 사라지고 없다. 말이란 습관이 아닌가? 심지어는 사람들을 만나서 잡담을 하는 일이 점점 고역이 되어가고 있다. 물론, 내 직업상 학생들 앞에서 강의를 하지만, 그것은 말하기가 아니라 오히려 글쓰기가 아닌가 싶다. 우선 충분한 생각을 하고, 그 생각을 마음속에서나마 정리하고, 이런 저런 상상을 감미료로 채색하여 준비하는 것이다. 교재가 있으니 할말이 없으면 그것을 읽기만 하면 된다. 그러다 보니 강의 시간에는 학생들을 쳐다보지 않게 되었다. 준비된 것만 잘 기억하여 낭독하고, 마지막에 가서 그들의 수긍하는 고개 짓만 확인하면 만사형통이기 때문이다. 강의란 결코 대화일 수가 없는 것이다. 어쨌든 이런 식으로 나는 몇 년 동안을 말 한 마디 없이 수월하게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말수가 적어진 것은 내 주변의 불가피한 조건들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거기에는 다른 이유가 있다.

우리는 지하철이나 대합실과 같은 공공 장소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대면하고 부딪치지만, 결코 한번도 그들과 시선을 마주치지 않는다. 아무 곳에서나 군중들의 사진을 찍고, 그 사진 속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을 관찰해 보라. 제각각의 낯선 눈빛들에 놀랄 것이다. 자신만의 방으로 향하는 그 시선들은 마치 거리에서 혹은 다리 위를 걷고 있는 뭉크(Edvard Munch)의 초상들을 보는 듯하다. 개인들은 바로 그 낮선 시선을 통해 다가올 미래의 관계에 대한 이름 모를 불안을 표현하는 것처럼 보인다: "날 좀 내버려둬!"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현대인들의 소외는 고립이나 고독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가져올 상상된 결과에 대한 두려움에 있다. 뭉크가 고독을 절망과 관계짓는 것도 다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현대인들의 정신적 소외는 고독이 아니라 오히려 수다가 예증하고 있다. 말을 하지 않으면, 계속해서 말이 이어지지 않으면 죽음 뿐!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침묵이며, 그래서 말이 중단된다면 절대적인 무(無)의 상태에 직면할지 모른다는 막연한 공포에 사로잡힌다. 그러니 우리의 수다는 견딜 수 없는 고독에 대한 가련한 자기변론이 되거나, 나아가 더 심해진다면 환상적 도피 같은 것이 되기 십상이다. 정신적 소외란 고립이나 고독이 아니라 그에 대한 공포, 즉 자기 자신에 직면하기를 두려워하는 일종의 돌림병이다. 그래서 때로 사람들은 이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마치 수건을 돌리듯이 자신의 공포를 한없이 돌려가면서 타인에게 투사하고, 그로부터 일종의 공범의식 같은 것을 만들어낸다. 절대적 무에 직면하지 않도록, "나뿐만이 아니라 바로 당신도 노력을 해야할 것 아니오!"라고. 말이 없는 사람을 보면 왠지 모를 불쾌함이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침묵하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말을 강요하는 관계가 된다. 친구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왜 아무 말도 없어? 얘기 좀 해봐!" 만일 이 대사가 수십 년을 함께 살아온 어떤 부부의 것이었다면, 그들만큼 불행한 관계가 또 있을까? 그 대사가 암시하는 대화의 부재 때문에 불행하다는 말이 아니다. 그들의 불행은 그 대사 자체, 저 수다에 있다는 말이다. 저토록 수다스러운 배우자가 있다면, 당신은 이미 저주받은 인간이다. 사람들이 도서관만큼이나 조용한 출근 만원 지하철을 문제삼지 않는 것은, 그 질식할 것 같은 침묵 속에서나마 저러한 수다를 듣지 않아도 괜찮다는 암묵적인 사회적 합의가 있기 때문이다. 마치 하나의 제도처럼 애초부터 거세되어버린 관계를 축복처럼 묵인하고 있는 그들의 태연한 침묵을 보라. 그러나 삶의 대부분의 시간을 진공 상태의 지하철 속에서 태연한 죽음으로 보낼 수는 없다. 그래서 서로 아무 말이 없는 동안에도 우리는 자주 저와 같은 수다를 듣게된다. 침묵 속의 수다를 느끼는 관계를 우리는 불편한 사이라고 말하곤 한다. 수다쟁이들을 간혹 보게되는데, 내가 보기에 그들은 말을 못하게 하는 억압에 대한 단순한 저항이 아니라, 오히려 입을 막는 소극적 억압보다 더 억압적인 요구, 즉 말하게 하는 강요를 통해 억압을 적극적으로 실행하고 있는 기제이다. 억압적 고문은 말을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말을 강요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히스테리를 넘어 새디즘적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말을 듣기 위해 오랜 시간동안 앉아서 귀를 기울인다. 그러나 그가 하는 모든 말에 흥미를 느끼기 때문에 그러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제대로 된 흥미로운 토론이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똑같이 반복되는 이야기들,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화두들, 이것이든 저것이든 언제든지 교정이 가능한 사실들, 모종의 의도 하에 뒷 냄새를 풍기는 사족(蛇足)들, 다 알고 있어서가 아니라 궁금하지 않은 정보들. . . . 정치가들의 수다야 지적할 가치도 없고, 라디오나 텔레비전에 나오는 뉴스 기자들의 수다를 가만히 듣고만 있어도 역겨움 같은 것을 느낄 때가 있다. 심지어는 모든 방송국의 뉴스가 한결같이 내보내는 똑같은 대사와 똑같은 각도의 카메라를 보고 있으면 겁이 나기까지 한다. 저것이 어떻게 가능한 일일까? 수다가 강요인 이유는 다름 아닌 그 상투성 때문이다. 현대사회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억압은(그래서 심지어 악이 되는) 바로 그 진부하고도 상투적인 말들이 아닐까? 2차 대전 이후 지금까지 미국이라는 나라가 인류의 적(혹은 악)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가공할 만한 그들의 침략 때문이 아니라 맥빠지게 하는 그 진부함과 상투성에 있다. 그들은 예측된 감동을 제조하는 경이로운 능력이 있다. 우리는 그들의 침략전쟁에 반대 할 것이 아니라, 그 보다 더 최선을 다하여, 헐리웃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여인들의 하이힐이 걸쳐진 다리, 키스할 때면 여지없이 올라가는 그 왼쪽 종아리를 잘라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사드의 소설이 독자들에게 고문을 맛보게 해주는 요소는 다양하게 묘사된 새디스트의 외설과 고문들 때문이 아니라, 상투적이고도 진부한 논증이 끊임없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물론 그 반복이야 처절한 의도를 품고 자행되는 것이기 때문에 예술적이라고 말하는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상투성이란 물론 대중매체에 의해 실천된 것이긴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대담함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는 왜소한 부르주아의 산물이다. 자본가들은 결코 도박을 모른다. 시장판에서 살고 있는 개인들은 이를 잘 내면화한 것 같다. 그렇게 해서 사람들은 이 상투성에서 나오는 지루함을 피하기 위해 술을 마시고 수다를 떨거나, 많은 사람들이 들떠있는 장소에 나가 춤이라도 한 판 추고 싶어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것은 기름을 안고 불 속에 뛰어드는 것보다도 더 위험한 짓이다. 그것은 오히려 부르주아가 원하는 것이기도 하다.

거두절미하고, 차라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끊임없이 침묵을 메우려는 두려움에 찬 불필요한 화두들이 아니라, 정말로 값진 화두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되는 자리, 바로 침묵의 자리가 아닐까? 흥미롭고도 중요한(이 둘은 상호 보완적이다) 말이 나오지 않으면 안 되는 고독! 아무 할 말이 없어도 두렵지 않은 정다움! 말하지 않아도 전혀 심리적 처벌이 가해지지 않는 조용한 신뢰! 흥미로운 대화 뿐 아니라, 진정으로 값진 것이 창조되려면 바로 저와 같은 조건들이 마련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Posted by hu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