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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10/11 스투디움(Studium) (16)

일반적 관점, 담론, 공유 가능한 양식, 위험하지 않은 사회적 관계, 문화적 감정, 중화된 욕망, 허용된 행위, 계약이나 공모로 이루어진 관계, 친숙함, 친구들, 의심스러운 믿음, 텅 빈 실체들, 제한적 기쁨 . . . 등. 이렇게 나열된 것들이 바로 스투디움의 윤리적 양태를 이룬다. 스투디움을 일종의 대리자(타자, 대리 기표)의 언어라고 정의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스투디움은 나에게 아무런 감흥이나 자극을 주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거기에는 내가 빠져있기 때문이다. 내가 부재 하는 어떠한 것에도 나는 흥미를 느낄 수가 없다. 사랑에 빠지지 않은 사람들의 언어 즉 스투디움의 말들은,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는 현실로 이해되지 않는다.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 현실이란 오로지 사랑이 주는 기쁨이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보기엔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실과 스투디움을 혼동하고 있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스투디움은 안정된 것을 보장하고 있는 것 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전혀 변하지 않는 동일한 관계가 반복될 때, 그래서 나의 생명과 생활이 미래에도 계속된다는 것을 보증 받을 때, 우리를 실재의 위험들로부터 보호해주는 것을 선택하고 나아가 이를 확신하기 위해, 우리는 스스로 선택한 이것을 현실이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 어느 정도는 나 자신을 계약관계에 종속시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 스투디움이 나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 다시 말해 우리가 흔히 말하는 현실 안에서 우리가 슬픈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1) 스투디움은 나를 배제함으로써만 생겨나므로 한없이 나에게 지루함만을 제공한다. 그런데 이 지루함 때문에 나는 반대로 더 사랑의 대상에 집착하게 된다. 실연 당한 내게 어떤 친구가 다정한 손길로 나를 위로한다. 그러나 그의 위로가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 모든 무용한 것들에 화가 난다! 그의 말들은 나를 위로하기는커녕 더욱더 나로 하여금 내가 떠나왔거나(그래서 나는 상심해 있는데), 더 이상 내가 도달할 수 없는 곳(그래서 나는 절망하고 있는데)으로 돌아가라고 강요할 뿐이다. 이 현실은 내게 상심과 절망만을 안겨주는 것이다. (2) 나를 배제하는 언어로서 스투디움은 나로 하여금 아무것도 생각하거나 행동할 수 없게 한다. 현실은 이제 내게 아무런 매개도 되지 않으며, 나의 연상(聯想)에 아무런 자극도 되지 못한다. 그러니 나는 다만 그것들을 무심하게 쳐다볼 뿐이다. 그럼에도 내가 여기에 있는 한, 나는 이 강요들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살아야하니 말이다. 이 경우, 현실은 내게 권력 체계로 경험될 것이다. 나는 이러한 것들에 연민을 느껴야하며, 사랑해야 하며, 공감해야 하며 . . . 심지어는 내가 현실에 적개심을 품을 때조차도 현실과 관계해야만 한다(알베르 까뮈가 뫼르소라는 한 괴물을 등장시켜 보여준 슬픔이 이것일까?). 내가 권력의 노예나 공범이나 증인이 아니라면, 어떻게 권력체계와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이며, 어떻게 산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노예가 아니라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둘 중 하나가 되어야 할 것이다. 나를 방해하거나 나를 배제하는 모든 현실들을 나의 의식으로부터 축출하여, 나도 알지 못하는 내 안의 깊은 다른 곳으로 밀어두고, 그것이 되돌아올 때마다 부정하고 억압하고 고문을 가하거나, 또는 새로운 다른 이미지들로 대체시켜 버리는 것이다. 재미있게도, 이렇게 해서 나는 모든 것에 열광한다. 혹은 더 나아가, 이 무용한 것들을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도록 그 효력을 정지시키고 얼어붙게 하여, 그것이 사실은 현실이 아니라고,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어 버리는 것이다.


앞으로 인류는 반드시 이렇게 질문해야 한다. 사랑이 현실인가? 아니면 스투디움이 현실인가? 이렇게 바꿔서 말해보자. 은둔자들의 삶이 현실인가? 아니면 세속인의 삶이 현실인가? 이렇게 질문을 하고 보니 두 가지 현실이 있는 셈이다. 현실이라고 불리는 현실. 그리고 현실이 아니라고 혹은 현실적이지 않다고 불리는 현실.

<문예 노트>

Posted by hu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