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 관점, 담론, 공유 가능한 양식, 위험하지 않은 사회적 관계, 문화적 감정, 중화된 욕망, 허용된 행위, 계약이나 공모로 이루어진 관계, 친숙함, 친구들, 의심스러운 믿음, 텅 빈 실체들, 제한적 기쁨 . . . 등. 이렇게 나열된 것들이 바로 스투디움의 윤리적 양태를 이룬다. 스투디움을 일종의 대리자(타자, 대리 기표)의 언어라고 정의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스투디움은 나에게 아무런 감흥이나 자극을 주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거기에는 내가 빠져있기 때문이다. 내가 부재 하는 어떠한 것에도 나는 흥미를 느낄 수가 없다. 사랑에 빠지지 않은 사람들의 언어 즉 스투디움의 말들은,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는 현실로 이해되지 않는다.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 현실이란 오로지 사랑이 주는 기쁨이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보기엔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실과 스투디움을 혼동하고 있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스투디움은 안정된 것을 보장하고 있는 것 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전혀 변하지 않는 동일한 관계가 반복될 때, 그래서 나의 생명과 생활이 미래에도 계속된다는 것을 보증 받을 때, 우리를 실재의 위험들로부터 보호해주는 것을 선택하고 나아가 이를 확신하기 위해, 우리는 스스로 선택한 이것을 현실이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 어느 정도는 나 자신을 계약관계에 종속시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 스투디움이 나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 다시 말해 우리가 흔히 말하는 현실 안에서 우리가 슬픈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1) 스투디움은 나를 배제함으로써만 생겨나므로 한없이 나에게 지루함만을 제공한다. 그런데 이 지루함 때문에 나는 반대로 더 사랑의 대상에 집착하게 된다. 실연 당한 내게 어떤 친구가 다정한 손길로 나를 위로한다. 그러나 그의 위로가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 모든 무용한 것들에 화가 난다! 그의 말들은 나를 위로하기는커녕 더욱더 나로 하여금 내가 떠나왔거나(그래서 나는 상심해 있는데), 더 이상 내가 도달할 수 없는 곳(그래서 나는 절망하고 있는데)으로 돌아가라고 강요할 뿐이다. 이 현실은 내게 상심과 절망만을 안겨주는 것이다. (2) 나를 배제하는 언어로서 스투디움은 나로 하여금 아무것도 생각하거나 행동할 수 없게 한다. 현실은 이제 내게 아무런 매개도 되지 않으며, 나의 연상(聯想)에 아무런 자극도 되지 못한다. 그러니 나는 다만 그것들을 무심하게 쳐다볼 뿐이다. 그럼에도 내가 여기에 있는 한, 나는 이 강요들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살아야하니 말이다. 이 경우, 현실은 내게 권력 체계로 경험될 것이다. 나는 이러한 것들에 연민을 느껴야하며, 사랑해야 하며, 공감해야 하며 . . . 심지어는 내가 현실에 적개심을 품을 때조차도 현실과 관계해야만 한다(알베르 까뮈가 뫼르소라는 한 괴물을 등장시켜 보여준 슬픔이 이것일까?). 내가 권력의 노예나 공범이나 증인이 아니라면, 어떻게 권력체계와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이며, 어떻게 산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노예가 아니라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둘 중 하나가 되어야 할 것이다. 나를 방해하거나 나를 배제하는 모든 현실들을 나의 의식으로부터 축출하여, 나도 알지 못하는 내 안의 깊은 다른 곳으로 밀어두고, 그것이 되돌아올 때마다 부정하고 억압하고 고문을 가하거나, 또는 새로운 다른 이미지들로 대체시켜 버리는 것이다. 재미있게도, 이렇게 해서 나는 모든 것에 열광한다. 혹은 더 나아가, 이 무용한 것들을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도록 그 효력을 정지시키고 얼어붙게 하여, 그것이 사실은 현실이 아니라고,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어 버리는 것이다.
앞으로 인류는 반드시 이렇게 질문해야 한다. 사랑이 현실인가? 아니면 스투디움이 현실인가? 이렇게 바꿔서 말해보자. 은둔자들의 삶이 현실인가? 아니면 세속인의 삶이 현실인가? 이렇게 질문을 하고 보니 두 가지 현실이 있는 셈이다. 현실이라고 불리는 현실. 그리고 현실이 아니라고 혹은 현실적이지 않다고 불리는 현실.
<문예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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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유교의 가장 큰 특질을 교육입국적 이념이라고 그러더군요.
배움을 비로서 인간존재의 근거로 삼았던 공자이기에 위편삼절의 찬탄을 수천년이 지난 지금에도 남기고 있는 것을 보면,우리는 비록 서양의 스투디움의 의미가 다를지언정 신경증적인 것으로 치부하기엔 그 의미를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도 드는군요. 우리에게 나타난 현실이 그냥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스투디움이 있기에 있을 수 잇는 것이 아닐까요? 만약 우리에게 스투디움이란 것이 없었다면 그것은 현실이라기 보단 어떤 이해되어질 수 없는 상황에 불과할 것이니까요... 2006/03/15 15:25
네. 위편삼절이란 글읽기 글쓰기와 관계가 있는 말일텐데요..교육의 문제와는 약간 다른 문제가 아닐까 싶네요. 교육은 사실 윤리학이나 정치철학의 실천적 근간이므로, 반드시 유교에만 해당되는 말은 아닐 것입니다. 어쨌든 그런데 위편삼절이 스트디움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네요...사회의 외면적인 관계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뭐 유교적 윤리학과 견주어서 말해볼 수는 있겠지만,.. 그것도 또한 시원스레 맞아 떨어지는 쌍은 아닐 것 같구요.. 어쨌든 서로 다른 개념들을 엇 비슷한 관계들로 짝 짓는 것은 매우 조심스러워야 할 것 같습니다... 일반화로 흘러서, 이말이나 저말이나 별 차이가 없게될 위험이 있으니까요 2006/03/15 20:42
제가 이해한다고 말한 부분은 사실, 이 글에 담겨있는 문예님의 emotion입니다.
정확히 안다곤 할 수 없지만, 저 역시 저의 emotion으로 느껴진만큼 이해했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그 것이 이해가 아니라 <오해>일 가능성도 있지요.
그리고,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 역시 있습니다. 부러 말은 안했지만^^
문예님이 쓰신 <스투디움>이 문학이나 철학에서 어떤 정의를 갖는 지 저는 모릅니다. 다만, 라틴어로서의 간단한 정의만을 알 뿐이지요. 그래서,,문예님의 글에 대한 제 느낌이 틀렸는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으나,, 제가 얇팍하게 이해하는 <스투디움>에는 <추구>와 <열정/passion>이 필연적으로 들어있고,(추구의 대상이 학문이든 이상이든 무엇의 원인이든 간에) 그래서 '나'가 포함이 된다고 생각하거든요..왜냐면, 추구나 열정은 그 것의 주체인 <사람/나>가 당연히 있다고 생각되서요,, 문예님이 말씀하시는 <스투디움>의 정확한 정의는?
<스투이움>이 추구하는 것, 찾는 것은 생명이 없는 것들만 입니까? 잘 모르겠어요 그걸,, 그 것이 설사, 막연한 유토피아라 할지라도,,그건 인간들이 이루는 세상에서 유기적인 관계와 완벽하게 떨어져 존재할 수는 없지 않은가요? 이 것도 역시 잘 모르겠습니다... 제 질문에는 한 치의 비난이나 비아냥이 없습니다. 질문하는 학생의 마음 뿐,, 2006/03/15 22:17
네..스투디움의 개념은 제 말은 아니기 때문에...사실, 푼크툼이라는 용어와 반대편 짝을 이루는 용어거든요..라틴어로서의 스투디움은 물론 사과꽃님 말씀대로 무엇인가를 추구하고, 집중하고, 열정(compassion)을 가지고...등의 뜻인데요,..그것이 극단적 상태에 이른 것이기 보다는, 사회적이고, 일반적이고, 문화적인 수준에서의 감정상태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종교적 열정같은 것이기 보다는, 사회적 열정, 취미, 문화, 호감, 찬탄, 우정, 호의... 같은 것이죠. 길들여진 감정? 교육으로 만들어진 감정, 전수받은 열정 같은 것이죠. 위에서 song님이 유교 교육 말씀을 하신 것도 사실 그 맥락에서 였을 겁니다. 일리가 있는 말씀인거죠...물론, 스트디움에도 "나"가 있긴 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의 나 이기 보다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나를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2006/03/17 02:01
물론, 사회적 존재를 부정할 수는 없겠죠. 다른 존재와의 상대적인 관계 속에서 규정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니까요..사회 안에서 살고 있는 한에서는 말이죠. 그런데, 그렇게 상대적인 관계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절대의 수준이 있다고 봅니다. 색을 예를 들어 본다면 쉽게 이해가 갈까요? 물론, 색에도 보색이 있고, 상대적 명암이 있습니다. 하지만, 색 자체의 절대가 있는 것이죠. 노란색이나 푸른색과의 상대적 보색관계로는 결코 설명할 수 없는 붉은색 그 자체의 절대가 있다는 것이죠. 음악도 마찬가지로, 절대적인 것이 있습니다. 인간 역시 사회적이고 상대적 관계로는 설명할 수 없는 특유한 인간 그 자체의 절대가 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나 자신이 어떻게 고유의 존재를 지속할 수 있겠습니까? 스투디움에는 그 절대적인 것이 빠져있다는 것이 바로 저 글의 골자입니다. 2006/03/17 02:12
스투디움의 감정 만으로는 포섭할 수 없는, 그 이상의 존재가 우리에게는 있다는 것입니다. 그건 유토피아의 문제이기 보다는, 존재와 실존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매우 중요한 것이기도 합니다. 나중에 시간이 되면, 그 절대적 차원의 존재가 어떻게 드러나는가, 어떤 방식으로 그 절대를 표현하는가의 문제를, 영화의 클로즈업과 관련지어 쓸 계획이 있습니다. 그때 더 많은 이야기를 해 보도록 하죠... 2006/03/17 02:16
^^ 이리 설명을 해 주시니 안개가 걷히듯 글의 의미가 뚜렷히 보입니다. 귀찮아하지 않으시고 설명해 주셔서 고마워요. 그러니까 사회적 관계의 맥락에서의 <나>를 주체로 하는 조율된 (포괄적인)감정이로군요.. 이렇게 이해할 때, 아래의 문예님의 말, "스투디움은 나를 배제함으로써만 생겨나므로 한없이 나에게 지루함만을 제공한다"이 일견 수긍이 됩니다. 원치않아도 거기에 존재하는 <관계들> 속의 <나>는 무의미하다고 전제한다면 말이죠..
그런데,, <스투디움>의 원뜻에 <추구/열정>이 있다면,,<푼크툼>과의 대비나,사회적 관계를 상정한 존재로서의 뜻 말고도, 관계상정 이전에 존재하는 <나/本我>도 <스투디움>의 주체가 될 수는 없는 건가요?
<본연의 나>를 찾겠다고 면벽/좌선하는 스님의 그 <추구/열정>은 스투디움이라 불리우지 않는가 보네요. <스투디움>에 관계외적/피안적/자기만족적 추구의미가 없거나 퇴색되어 있는진 몰랐습니다.. 2006/03/17 06:52
존재와 절대성과는 상당한 관련이 있지만, 영화처럼 자체가 대상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경우에는 절대성이란 말에 어느 정도 한계가 있을 듯 하군요. 물론 플라톤적 이데아와 관련이 있는 존재와 유교적 지행합일적 학의 개념이 어떻게 유비될 지는 몰라도 그러한 스투디움과 존재의 이원성은 다소 서양의 편중된 사고에서 나온 결과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스투디움과 동양의 학의 개념에 정합적 대응관계가 가능할 지는 몰라도 자기자신의 앎이나 삶을 영원한 이데아에 합치하려하였던 철학이나 예술의 근본정신을 생각한다면,더더구나 그러한 이원적 사과의 맹점은 문제를 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2006/03/17 16:40
사회적 관계 속에서의 "나"는 무의미하기보다는 오히려 의미가 너무 많을 것 같은데요?!!..사실 "나"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상대적인 관계들 속에서나 가능한 개념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나"를 가능케하는 것이 바로 "타자"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 즉 "주체"가 누구인가?를 규정하는 것 역시 쉬운일이 아닌데요.. "나"라고 했을때, 어떤 "나"를 말하는 것인가? 대부분은, 의식적 주체로서의 "나"이겠죠..이건 법(철학)에서도 매우 중요한 문제인데요,...서구의 주체철학이 바로 의식의 철학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현대에 이르러 의식적 주체를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는 있지만 말이죠..좀 단순화하는 위험이 있긴 하지만..프로이트나 니체 같은 사람들이 현대 이론에서 중요하게 언급되는 이유도 바로, 그들이 의식으로부터 벗어난 무의식적 존재를 주장했던 사람들이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2006/03/18 03:51
여담은 그렇고, 우리의 얘기로 돌아와서..스투디움의 주체란 바로 의식의 주체, 즉 자기 자신을 의식하는 주체,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을 스스로 사회적 관계들 속에 위치시켜 놓는 주체, 타자의 시선으로 자신을 보는 주체,..일종의 코지토(cogito)..즉 신경증적 주체인 겁니다..만일에, 스투디움에서 벗어난 "나"가 가능하다면, 무의식적 존재라고 해야 더 맞겠네요..그런데 "관계 이전에 존재하는 본연의 나(이를 "나"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와 사회적 존재로서의 나"를 근본주의적으로 동일화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비유를 써도 될지 모르겠지만, 얼음이 물로 이루어졌다고 해서 얼음을 마실수는 없다고나 할까요? 존재양태가 엄연히 다른 겁니다. 단일한 근원적 존재성을 공유하고 있다고해서, 곧바로 동일화하는 것은 위험하지 않나 싶네요.. 2006/03/18 04:01
그러고보니 그 불가에서 말하는 본연의 나라는 것이 어떻게 보면 푼크툼을 통해 드러난 모습 아닐까요? 제가 본 그 식당 지배인의 앳된 모습처럼요..친구의 눈속에 깃든 오래된 다른 친구의 어린시절의 모습처럼요..스님들을 보고 있으면 그런 모습이 느껴진다면서요..?(본적은 없지만..) 2006/03/18 04:02
그리고 스트디움에서 의미하는 추구, 열정, 학문 . . 같은 의미를 불가에서 말하는 추구 혹은 열공 같은것과 동일한 것으로 말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군요.. 원래 서구인들에게 있어 학문은 본연의 나를 찾기 위해서이기 보다는, 공통적 사회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나누기 위해서 있는 것이었잖아요...그래서 그들은 방법론으로 대화를 사용했고..또 그 대화가 발전해서 변증법이 된 것이잖아요..그래서 때로는 철학을 우정과 연계지어 말하지 않습니까?.. 그들에게 철학은 사회적이지, 개인의 내공을 추구하는 그런 영역이 아니었습니다...추구하는 바가 다른 것이지요..비교해볼 수는 있겠지만..동일한 것으로 보면 안 될 것 같네요..."추구"라고 같은 용어를 써도, 그 의미가 전혀 다를 수 있으니까요. 여기서도 역시 용어에 현혹되어서는 안 될 것 같네요.^^ 2006/03/18 04:05
네 훈님^^ <스투디움>이 라틴어이니까 거기에서 동양적 '나 찾기'를 발견
하고자 하는 건 애초에 좀 무리겠네요.
말씀하신 대로 현실 속의 <나>는 열반하지 않은 이상은 절대적 孤我가 아니네요. plato류의 '하늘/이데아에 있는 본질(numena가 맞나요?)로 부터 분수(分受)받은 현상으로서의 나'가 아니라 <소우주>로서의 나도 결국은 다른 소우주들과의 횡적<관계>'에 있고, 스님들이 열반을 오매불망 하며 버리고자 하는 욕망(소유,집착,분노,쾌락등)도 모두 <관계>에서 파생하는 것들이니까요..
모든 관계를 떠나서도 존재하는 나 즉, 배고픔을 느끼고 잠을 자야하는
나까지도 극복하는 本我는(현상 이전의 존재, 문예님이 말씀하신 '특유한
인간 그 자체의 절대'가 이겁니까?) 해탈이나 해야 찾아지겠지요.
이건 좀,,제가 불가에 의해 세뇌된 생각인지도 몰라요^^ 2006/03/18 12:59
훈님의 표현,<의식의 주체로서의 나>가 제 머릿속에선 역시나
두 가지로 나눠지네요. 관계들 속에서의 상대성을 띤 의식주체, 관계이전의
존재(동양적 본아)로서 '타자의 시선'과 무관한 절대성을 띤 의식주체.
결국 훈님의 말씀하신 것과 같은 말인가요?
네, 그리고 저는 이 둘을 동일화하지 않습니다.
다만, "스투디움에서 벗어난 "나""는, 무의식적 존재라기 보단 <의식의
가장 깊고 무겁고 세밀한 그리고 다듬어지지 않은 일부>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사회적 관계 속에서의 나'를 저는 거칠게 두 가지로 보았어요.
원치 않아도 맺어야 하는 <수동적 관계>, 예:직장,사업,군대등
적극적으로 맺는 <능동적 관계>, 예:연인,친구
위의 두 경우 모두 나름의 의미를 찾을 수야 있겠지만, 강요된 관계에서
찾는 의미는 부정적인 감정이 우위를 차지할 가능이 크죠,, 2006/03/18 13:01
어째,, 제가 훈님의 문하생 노릇을 할 만한 이해력을 가졌습니까??
전 원래,, 생각을 두루뭉실하게 하는 버릇이 있는데(태생적인가 봅니다)
훈님 덕분에 생각을 세세히 쪼개어 보는 계기가 되었네요.
그리고,,푼크툼이란 말이 아주!! 좋아졌어요.
이쁜 옥가락지를 찾아 손에 낀 느낌,, ㅎㅎㅎ
반지 고마워요 2006/03/18 13:03
음..절대성을 띤 의식 주체라 . . .뭐, 부르기 나름이겠지만,..의식이나 주체를 지칭할 때는, 흔히 타자와의 관계를 말합니다. 그것과 무관한 의식주체라..글쎄요..좀 더 생각을 해 봐야겠네요^^
그리고, 사회적 관계를 둘로 나누셨는데요,..후자의 경우, 즉 능동적 관계 혹은 친화적 관계가 가능하기 위한 조건이 바로 푼크툼 같은 것이겠죠? . . "옷 깃에 살짝 드러난 속살"이라고 표현한 이유도 바로 그것이구요..
예전에 써놓은 글 중에 푼크툼에 관한 글이 또 한편 있는데, 이번에 그걸 한번 올려봐야 겠네요..지난번 보다 푼크툼을 보다 분석적으로 쓴 것이거든요..
그리고, 원래, 가락지나 반지는 구속의 물신 아닌가요? 푼크툼은 윤리적 해방의 통로인데..그걸 또 반지처럼 소유하시겠다구요?^^ 2006/03/20 0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