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만들어지는 미국 영화들 중에는, 과학에 대한 미국인들의 맹목적인 신뢰가 드러나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 같다. 특히, 거기에는 아인쉬타인의 상대성이론도 포함되고 있다. 물론 상대성 이론의 실상에 대한 이해의 부족 탓이기도 하지만, 그러한 무지와 편견의 배후에는 다소 복잡한 정치 사회적 문제도 들어가 있다. 서둘러 결론부터 말하자면, 미국식 과학-기술주의 이데올로기가 문화 전반에 퍼져 있어, 과학에 대한 무지와 편견 뿐만 아니라, 그것이 악용되고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19세기 이후의 미국문학을 접해본 사람들은 잘 알겠지만, 그 얼마나 많은 작가들이 자신들의 낭만주의적 확신을 과학 기술에 의존했던가! 그 문제는 나중에 시간이 있으면 자세히 얘기하기로 하고, 그 보다 사실 그것은 미국인들 뿐만 아니라 과학-기술주의 일반이 안고 있는 근본적인 결함이기도 하다.
우리는 아인쉬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시간의 과학으로 알고 있다. 타임머신에 대한 많은 과학적 우화들 속에 항상 상대성 이론의 단편적 지식들이 많든 적든 활용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상대성 이론에서 논의하고 있는 시간이란 "어떤" 시간인가? 다들 잘 알고 있을 테니 간단히 결론만 말해, 일반적 사차원의 독립된 좌표를 갖는 시간이든(즉, (ds)2 = (dx)2 + (dy)2 + (dz)2 + (dt)2), 상대적 사차원 시-공간이든(즉, (ds)2 = (dx)2 + (dy)2 + (dz)2 - c2(dt)2), 상대성 이론에서의 "시간"이란 다름 아닌 "공간"이다(물론, 후자의 경우에서 지시된 시공간 항은 단순한 공간은 아니지만). 다시 말해, 운동이라든가 실제적인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 과학이 가진 도구 즉 수학을 이용하여, 그 운동과 변화의 특정 위치와 궤도 등의 좌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양적으로 공간화한 번역물! 이것이 바로 상대성 이론에서의 시간이다. 하나의 중심 혹은 기준으로 작용하는 특권적인 체계의 소멸, 운동에 따른 공간의 수축과 시간의 지연, 동시적 시간의 파괴, 서로 다른 체계들의 상대적 관계, . . . 상대성 이론에서의 이러한 일련의 시나리오는 시간을 공간으로 바꾸어, 가령 시계의 눈금으로 환원한 생각의 결과이다. 그 시간이란 공간을 최대로 밀고 나가, 공간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 과학의 시간, 더 정확히 말해 과학자의 시간을 의미한다.
이것은 물론 상대성 이론을 폄하하려는 의도에서 하는 말이 아니다. 우리가 삶에서 체험하는 실재의 시간과 과학의 시간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만일에 이와 같은 상징과 실재를 혼동하게 되면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우리가 흔히 겪을 수 있는 극단적인 경험의 예로, 사진과 실물을 혼동 한다든지, 사이버상의 존재와 실제의 존재를 혼동한다든지, 영화와 인생을 혼동한다든지, 현재와 과거를 혼동한다든지, . . . 하는 일들이 벌어질 것이다.
그러한 혼동은 시간(타임머신, 시간여행, 기억 등)을 다루는 미국영화에서는 어김없이 등장하는 현상이다(최근에 개봉된 <데자뷰>는 그 현상의 극단이 아닐까 싶다). 이들은 제각각 소재는 조금씩 다르지만, 구조적으로 동일한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타임머신이라든가 아니면 다른 여러 매체라든가, 그도 아니면 어떤 우연적이고 신비한 사건으로 인해, 과거로 되돌아가거나 다른 "시대"로 "이동"하여, 잘못된 현재를 바로잡는다는 구조로 되어있다. 위에서 언급한 <데자뷰>의 경우엔 아주 특이한 경우이다. 우주가 마치 두루마리처럼 펼쳐져 있어서, 어떤 우주적 에너지를 그 두루마리에 가하면, 저 편으로 가고 있는 두루마리 한 쪽 끝이 이쪽으로 접힌다는 것이다. 두루마리를 접으면 접점이 생길 것이고, 그것은 바로 공간의 결합지점이 될 것이고, 공간의 결합은 곧 시간의 결합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과거의 어떤 지점과 만나는 상태, 즉 과거로 이동이 가능해 진다. 이것은 중력장, 블랙홀 등의 현대 물리학 이론 비스무레한 것들을 뒤섞어서 만들어낸 논리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러한 논리가 가능할까? 어떻게 공간을 이동하고 접어서 과거로 갈 수가 있나? 바로 시간을 공간으로 환원해버리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미 "시대"라고 하는 시간의 용어를 "이동"이라고 하는 공간의 용어와 뒤섞어 쓰는 것에 익숙해 있다. 우리는 공간의 이동이 시간의 변화와 한 몸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한 발자국 앞으로 간 만큼, 시간도 한 발자국 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여기서 멈추지 않고, 공간의 이동은 곧 시간의 진행이라는 믿음을 도식으로 확대시켜, 뒤로 한 발자국 가면 시간도 뒤로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시간을 원래의 상태로 되돌리기 위해 과거-공간으로 간다고 하는, 헐리웃 스타일의 변형된 상대성 이론은 바로 이러한 유치한 발상에서 파생된 시나리오이다. <데자뷰>는 그런 식으로 시간과 공간을 뒤섞고 동일화해서, 시간을 공간에 완전히 종속시켜 버린다. 거대한 충격으로 두루마리-공간을 접어, 순간 이동으로 과거-공간으로 가서, 어떤 어떤 행위를 가하여 환경을 바꾸고, 그 바뀐 환경은 미래의 나 즉 현재의 나에게 영향을 미치고, 어디서 본듯하지만 도무지 알 수 없었던 현재의 이상한 일들이(데자뷰 현상) 결국은 몇 시간 전에 과거의 내가(더 정확히 말해 과거로 이동한 현재의 내가) 저질러 놓았던 일이었음을 알게 되고, 심지어는 현재의 공간에 있는 사람이 과거에 있는 사람에게 영향력(자외선, 동영상)을 미치고, . . . 나중에는 제작진 자신들 조차도 헷갈렸는지, 시간과 공간의 그 뒤섞인 관계를 풀지 못해, 방금 전에 물에 빠져 죽었던 사람이 저쪽 골목에서 살아서 되돌아오는, 기상천외한 드라마를 만들어 클라이맥스를 마무리한다. 뒤섞인 것은 시간과 공간 뿐만이 아니다. 장사를 위해 스릴도 넣어야 하고, 설득력이 있어야 하니 개연성도 필요하고, 대중의 희망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 해피엔딩도 잊지 말아야 하고, . . . 문학적 이미지, 과학적 이미지, 사회학적 이미지, 윤리적 이미지, . . . 그 모든 것들을 성의 없이 뒤섞어, 미국 사회를 말해주는 모든 환타지-오락-카탈로그가 집결되어 작성된 것이다. 아마 그들은 그 장면을 만들면서, 과학과 환타지의 경계선 위에서 나자빠지며 이렇게 외쳤을 것 같다: "아! 나도 몰라, 될 대로 되라!"
물론, 허구이기 때문에 가능한 생각이고, 재미로 웃어 넘길 수 있는 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저 헐리웃 스타일 시간 개념 시나리오는 유치한 것으로 덮어 버릴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그것은 미국 문화 속에 깃들어 있는 삶에 대한 근본적인 통찰의 일면을 보게 해주기 때문이다. 저러한 시간개념은 유치할 뿐만 아니라 병적이기까지 하다. 그것은 잘못된 현실, 슬픈 현실, 지옥 같은 현실(사랑하는 사람의 죽음과 같이 개인적인)을 견딜 수가 없어, 우리가 잠시 넋을 놓고 있을 때에나 미친 척 하고 잠깐 빠져드는 바램을, 과학적 기술로 현실화시키려는 망상으로 자라나기 때문이다. 그러한 과학-기술주의는 대단히 퇴행적이고 병적이다. 그것은 그 자체 슬프고 애처로운 망상이 아닐 수 없다. 마치 떠나버린 사람의 슬픔을 달래기 위해 앨범을 뒤척이다가, 실사출력 기술을 떠올리며 그 사람을 되살릴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망상에 빠져, 사진 속의 그 사람과 떠나버린 실제의 그 사람을 혼동하는 것처럼. 이미지와 실체를 혼동하여 과거로 퇴행하고자 하는 물신주의적-기술-맹신-광란은, 한편으로는 과학에 대한 무지와 오만의 결과이고, 또 한편으로는 시간과 삶에 대한 슬픈 생각, 가령 후회의 가정법(". . . 했어야 했어(should have . . .)")으로 현실을 이해한 결과이다. 되돌릴 수 있다는 회고적 망상은 과학기술의 능력이 아니라, 현실적 삶의 실패이다. 그것은 과학적이기는커녕, 과학의 남용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종교적이다.
과학은 모든 것을 공간화 한다. 모든 사물에 좌표를 부여하고, 운동의 변화를 양으로 환산하고, 존재성을 기능으로 치환한다. 감정이라든가 회상이라든가 음미와 같은 주관성의 영역이 과학에서 논의되기 어려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지만 그것은 과학이 악당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바로 과학이 세계를 이해하는 특정한 방식이기 때문에, 언어이기 때문에, 번역의 도구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것은 과학의 장점이자 동시에 단점이다. 예를 들어, 과학은 날아가는 새를 잡기 위해, 날고 있는 경로에 임의로 몇 개의 점을 찍어 궤도를 설정하고, 이동의 간격을 계산하여, 과녁을 만들어 새를 맞추는 식으로 시간을 계산한다 . 이것은 새를 맞출 수는 있지만, 새 자체가 아니며, 새의 실재적 궤적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것은 일종의 도표, 다이어그램이다. 과학자들은 점을 하나 찍고는, "이게 너라면. . ."하고 가정하면서 자신의 작업을 시작한다. 그것은 새의 육체와 임의로 설정된 새의 상징적 위치를 동일시 하는 방법이다. 그래야 계산이 명료해지고, 논리가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상환경 속에서는 모든 것들이 가능해 보인다. 공간의 이동 뿐만 아니라, 시간의 공간화, 육체의 소멸과 순간 이동, . . . 육체가 없어도 존재가 가능한 것이 바로 가상공간인데, 안 되는게 어디에 있겠나?
그렇지만 순진하게 가상공간을 실재의 공간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수학자들이 찍어 놓은 그 점과 궤적은, 저렇게 날아가며, 숨을 쉬고, 소화를 하고, 땀을 흘리며, 허기가 져서 헐떡거리는, 두려움을 느끼는, 매 순간 변화와 우연성의 산물인 바로 저 뱁새가 아니다. 그들이 찍어놓은 그 점들을 아무리 무한대로 적분을 한다 해도, 참새의 존재, 독수리의 비상, 따오기의 질적 변화와 운동을 재구성 할 수는 없다. 점들이 적어서가 아니다. 그것과 그것은 많고 적고의 문제가 아니라, 본성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과학-기술주의가 안고 있는 문제가 바로 이것이다. 이 과기주의는 모든 존재를 양적으로, 공간으로 재현할 수 있다고 망상한다. 매 순간 날라가는 새를 잡을 수 있다는 신념이, 살아있는 황새를 만들 수 있다는 신념으로 둔갑하는 것이다. 일하는 사람들에게 번호라든가, 자리배정이라든가, 기능들을 할당해 주지 않고서는 효율적인 생산이 불가능하듯이, 과학기술주의는 삶을 효율성이나 목표중심으로 설정하여(사이버네틱스? 목표진입 메커니즘?), 인간을 하나의 점으로, 함수(function)관계의 좌표로 용해해 버리고는, 이번엔 그 반대로 여러 점들과 좌표들의 집적으로 삶을 되살릴 수 있다고 믿는다(로봇공학?). 나아가 점들로 상징화된 그 모든 육체들을 대신하는 거대한 상징의 점 하나를 형성하며. . . .
하지만 그 상징들은 일을 하는 동안에만, 수학문제를 푸는 동안에만, 사냥을 하는 경우에만 해당되는 규약이다. 그것을 가정에까지 가져와 자신의 모든 삶을 그러한 규약으로 육화하면 어떻게 될까? 바로 육체(더 정확히는 주관성)를 잃어버린 삶이 될 것이다. 생산성을 최대로 하기 위해 기업들은 노동자들을 일터에서 뿐만 아니라, 모든 삶 속에서 상징과 규약을 내면화시키고자 한다. 업주들은 수억의 돈을 투자하여 그러한 현장(인프라)을 구축해 놓았고, 학교와 같은 여타 기관들, 그리고 그 이데올로기적 동맹자들은 반복적인 학습을 통해 내면화된 신체를 만들어 내었다. 노동을 위한 규칙들은 퇴근 후에도 지켜져야 하고, 생산성을 위해 건전한 삶을 유지해야 하며, 생산관계의 질서를 위해 순응적인 인간성을 연마해야 하고, 매출증대를 위한 건전한 소비와 약간의 방탕한 기질 정도는 발휘할 줄 알아야 한다. 뿐만이 아니다. 효율성을 위해서는 실제적인 육체를 가정해서는 안 된다. <모던 타임즈>의 떠돌이 챨리처럼 콘베이어 벨트 앞에서 가려움증이 생긴다든가, 배가 고프다든가, 웃는다든가, 한참 동안 먼 곳을 주시한다든가 해서는 안 된다. 이탈해서도 안되고, 실제적이어서도 안 된다. 육체는 오로지 가상적이어야만 하고, 따라서 언제든지 제거될 수 있어야 하고, 배치되고, 동원되고, 설명 가능한 것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생산 과정은 온 삶을 지배하게 되어, 삶 자체가 하나의 가상적 공간, 매트릭스 공간이 되어버린다. 그것은 시간 조차도 공간으로 얼어붙게 하여, 몇 가지 기술적 장치들 만으로도 얼마든지 시간의 이동이 가능하다는 망상을 키웠다. 날아가는 새를 잡아 작은 우리 안에 새를 기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리 뚜껑을 열어봐도, 새는 없고, 새를 지시하는 기표들과 좌표들과, 기능들만이 손을 벌리고 넘쳐흐른다. 미국식 과학 기술주의는 존재로부터 육체를 박탈해 버렸다. 미국인들은(우리 역시) 육체를 잃어버린 존재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살아가면서 삶의 느낌이 없는 것이다. 그 육체를 되살리기 위해, 수많은 병적이고 퇴행적인 과학기술들을 동원해봐야, 나오는 것은 한없는 허기뿐이다. 이것이 미래가 아닌 과거로 되돌아가는 미국식 과학의 병적인 실상이 아닐까?(매체 메커니즘을 가지고는 결코 과거를 재구성할 수 없다고 지적했던 영화는 Christopher Nolan의 <메멘토(Memento)> 뿐이었다.)
과학에 대한 맹목적인 신뢰는 상당히 자본주의적이고 파쇼적이다. 또한 과학-기술에 대한 맹신은 초상화를 그린 화가에게 왜 그림과 모델이 똑같지 않은가라고 질문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실사 화가에게 죽은 사람을 살려내라고 요구하는 것 만큼이나 어리석고 서글프다. 낮은 코를 실리콘으로 높이세우고, 작은 가슴에 이물질을 삽입해 성욕을 보장해 줄 수 있다고 믿으며, 사진에 찍힌 내 모습을 디지털로 수정하면 삶의 실재가 아름다워지고 행복해 질 수 있다고 망상 하는 것 만큼이나 애처롭고 바보 같다. 굉장한 단어들로 장식을 한다고 해서 곧 문학이 될 수는 없듯이, 사진을 아무리 수정해 봐야 변하는 것은 사진뿐이다. 그것으로 가면을 만들어, 끝나고 나면 공허한 파티나 기껏해야 한 두번 즐길까? 그러한 망상이 실제로 개인의 현실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다면, 그것은 망상을 필요로하고, 망상을 획책하는 이상한 관계가 우리의 현실 속에 끼어들어, 우리를 혼란하게 하기 때문이다. 발자국이 아니라 제 아무리 많은 발자국을 뒤로 이동을 해봐야 시간은 뒤로 가지 않는다. 시간은 원래부터가 그렇게 이동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현대의 많은 영화들이 그토록 시간과 공간을 탈구시키고자 했던 것도 이 때문이 아닐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괴로운 현실을 되돌리기 위해 과거로, 원래의 그것으로, 가능했었을 수도 있었을 그 어떤 시-공간으로 되돌아가는 기계가 아니라, 미래로 나아가는 수단,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실상이 무엇인지, 어떤 미래로 갈지에 대한 판단과 통찰력이다. 과학과 기술은 그 목적에 쓰여야 한다. 미래의 돈벌이 말고. . .
영화 <데자뷰>에서 우리가 목격하는 미국식 과학-기술주의는, 시간을 공간으로 뒤섞어, 모든 것을 잴수 있다고 망상하는 기계론을 닮았다. 그리하여 또한 모든 것이 어떤 초월적 지성의 기획에 의해 이미 마련되어 있다고 망상하는 목적론을 따른다. 이들은 모두가 같은 정서 속에서 뒤섞인 결과인데, 그것은 바로 시간이 자유의 소산이 아니라 절망의 소산이라고 생각하는데 있다. 그것은 대단히 종교적이다. 미국식 과학-기술주의는 삶의 절망과 그 슬픔에서 비롯된, 종교적 망상의 과학적 번역물이다. 그것은 과학에 있어 하나의 불행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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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01/28 과학기술주의와 시간: 영화 <데자뷰>를 보고 난 후에 든 생각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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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그송은 상대성 이론이 시간과 공간을 혼동 했다고 비판하면서, 다른 측면에서는 상징과 실재를 혼동했다고 비판한다. 왜 그러한 혼동이 일어나는가,. . . 과학은 대상에 대한 경험적 주체 혹은 의식적 주체 혹은 살아가는 실재적 존재를 빼고, 대상의 순수한 추상적 존재성 혹은 상징성만을 취급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순수 상징성 속에서는, 가령 A가 B보다 클 수도 있고 작을 수도 있고, 더 빠를 수도 있고 느릴 수도 있다. 우주선의 폴과 지구의 삐에르가 가지는 쌍방향적 상대성처럼, 그것은 마음대로 삭제될 수도 있고, 변환이 가능하며, 배치될 수 있고, 기능화될 수가 있다. . . .이것은 존재가 부피라든가 두께가 없이, 공간적 점의 상태 혹은 시간적 순간의 상태로 이루어져 있다고 가정함으로써 출발하는 이성 . . . 어느누구에 의해서도 체험되지 않은 시간 . . . (또한 이것은 자본이 인간을 기능화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베르그송의 비판은 냉소주의적 이성에 대한 비판으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냉소주의는 존재로부터 모든 두께와 부피를 제거하고, 그것을 점이나 선으로 대체한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 . 그렇기 때문에 아인쉬타인이 동시성의 파괴를 통해 주장하고자 했던 시간의 다양성 이론이 아이러니하게도 오히려 시간의 단일성을 주장하고 있었다는 베르그송의 비판은, "시간의 상대적 다양성을 말하고 있는 당신은 어디에서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가?"라고 질문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물리학자의 시간이 있고, 물리학의 시간이 있다. 실제로 살아가고 있으며, 시간의 두께와 부피를 체험하고 있는, 물리학자의 경험과 직관이 아니라면, 어떻게 시간의 상대적 다양성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만일에 피에르나 폴의 관점에서 시간을 바라본다면, 상대적 차이는 사라져 버릴 것이다. 차이를 보는 것은 대상으로부터 초월하여 하나의 단일한 시간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 . .그러나 아인쉬타인이 들어간 그 단일한 시간은 바로 피에르에 의해서도, 폴에 의해서도 체험되지 않은 순수상징의 시간 . . .
냉소주의는 과학에 대한 지나친 신뢰로부터 태어난다. 그러나 또한 냉소주의적 이성의 차가움의 본질은 과학의 차가움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냉소주의에는 무기력의 정서가 있는 것 같다. 과학의 차가운 온도를 절망과 무기력의 감정과 뒤섞어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