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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1/08 선과 악 (2)
  2. 2006/10/26 Spinoza를 이해하기 위한 몇 가지 개념 정리: 윤리학과 도덕의 차이 (3)
미국에서 젊은이들이 노숙자들을 재미로 폭행한다는 뉴스를 보자.
http://imnews.imbc.com/weeklyfull/weekly04/2989993_6416.html

국내든 해외든 집단이 한 개인을 따돌리거나, 강자가 약자를 괴롭힌다고 하는 또 다른 진부한 형태의 뉴스이다. 폭행이란 강자에게는 행사되지 않는다. 폭행은 전적으로 약자에게, 즉 무기를 접고 이미 백기를 들고 있는 자(이것이 약자의 정의이다)에게 안도감 속에서 행사되는 '상대적 강자'의 사후 선언이다. 강자에게는 행사 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 역시 또 다른 약자이다(이것이 또한 강자의 정의가 아닌가?). 이런 점에서 보면 폭행은 비굴이나 비겁의 범주에 속한다.

저 젊은이들은 노숙자나 부랑자가 거기에 존재하고 있다는 이유로, 그가 저기서 그냥 걸어가거나 앉아 있다는 사실 때문에 화가 난 것이다. 그의 행색이 역겹고, 그의 냄새가 싫고, 그냥 밉고, 옆에 있다는 것이 견딜 수가 없고, 쉬워 보이고, 몇 대 갈겨준다 해도 별 해가 없을 것 같다. 저들의 폭행은 대응이 아니라(정당하든 정당하지 않든) 존재를 규정하는 방식이다. 주변에 보이는 존재를 규정하는 방식을 젊은 애들 스스로 만들어낸 것일까? 노숙자를 왜 싫어하게 된 것일까? 그를 때려도 괜찮다는 생각은 어떻게 가지게 된 것일까?

아이들은 자신의 행위를 동영상을 찍어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자랑하듯이 보여주었다. 이것이 문화이다: 저러한 뉴스에서 어김없이 등장하는 가장 진부한 시츄에이션은 폭행을 당한 노숙자에 대한 사람들의 동정과 구호품 공세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등장하는 크리스마스 트리, 그 옆에 앉아 선물 꾸러미를 안고 울고 있는 부랑자, . . . 폭력은 직접적인 폭행을 통해 행사되기도 하지만, 동정이나 연민과 같은 잠재적 폭력으로도 행사된다. 인터넷과 미디어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노숙자 데이빗씨에게 선물을 보내고 동정어린 손길을 보냈다. SNS 미디어를 통해 그를 돕자는 카페가 만들어진다. 그는 얼굴을 가리고 눈물을 흘린다. 기자들이 편집을 했기 때문에, 봉변을 당한 것이 억울해서 흘리는 눈물인지, 동정에 대한 고마움에 배인 감동의 눈물인지, 아니면 이 모든 상황이 어처구니 없어 나오는 하품의 국물인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마지막에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일자리도 구하고 술도 끊어야죠."

경우에 따라서는 고귀하다 할 분노는 말할 것도 없고 차라리 불만이나 불평보다도 저열한 윤리적 감정으로서의 동정과 연민이 뉴스언론과 기자들의 도덕 원리의 근간이 되는 한, 텔레비전이나 신문을 무심코 바라보고 있는 우리들은 그냥 방에 가만히 앉아 있는 동안에도 이미 누군가에게 테러와 폭행을 가할 수 있다. 연민과 동정에 있어 가장 치열한 종교집단이나 국가가 다른 한편 가장 급진적이고 잔혹한 폭행과 전쟁을 일삼는 경우를 항상 보는것도 이와 무관치는 않을 것이다. 선과 악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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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은 결과를 의식하고 그 결과를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것으로 만족한다. 따라서 도덕적 계율들의 토대와 근거 자체에 대한 질문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당위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행위하도록 강요된 초월적인 법칙이다. 그것은 주어진 법칙을 내면화하고 학습하여 우리의 신체를 어떻게 그 내용에 부합시킬 것인가에 집중한다. 그래서 우리는 도덕에서, 그 발생적 과정을 알지는 못한 채, 우리 앞에 미리 던져진 계율들과 덕목들을 발견하게 된다. 도덕은 한편에서는 의식과 나란히 발생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의식으로부터 구성되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의식을 구성한다. 또한 그것은 의식과 결과들의 법칙이기 때문에, 선과 악이라는 초월적 강령들에 의해서만 작동한다. 그러나 스피노자에 따르면, 윤리학은 선과 악이라는 초월적 법칙이 부여한 양적 차이에 의해서가 아니라 좋음과 나쁨이라는 질적 차이의 체계를 통해 구성된다. 이런 이유에서 윤리학은 발생적인데, 우선 그것은 강요되지 않은 질서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강요로 이루어진 제도적 규칙들과는 대비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윤리학적 질서 안에서 관계들의 원인과 결과(인과관계)는 관계 내재적 양상을 띤다. 내재적 관계는 자연 안의 어떠한 신체도 다른 신체에 대해 절대적 원인이 되지 못하며, 신체를 구성하는 어떠한 제1원인도 없음을 의미한다. 윤리학은 "내재적 존재 양태들의 위상학"이다(들뢰즈 40). 우리는 때때로 초월적 법칙이나 계율이 사라질 때 출현하게 될 혼란과 파괴적 상황에 대해 두려움을 갖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 두려움은 법칙을 당위적인 것으로 의식하고 수용하는 태도에서 비롯된 수동적 존재들의 두려움이다. 그것은 우리 스스로가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별하지 못하고 인식(사유)하지 못한다고 가정할 때에 발생한다. 윤리학은 우리가 법칙을 설명할 수 있고, 의식의 수준에서 당위로 부여된 진리들이 어째서 그런지를 인식할 줄 알 때에 비로소 우리 자신의 것이 될 것이다. 존재가 끊임없이 자신의 신체를 통해 가해진 명령과 복종의 법칙을 확인하고 이를 인과적 질서로 내면화하려는 노력이 도덕이라면, 윤리학은 쉼 없는 질문들과 결정(선택)을 창조하고 재창조하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과정은 피부와 근육을 통해 신체 전체에 퍼져있으며, 나아가 우리의 사유의 종합으로 귀결된다. 윤리학의 내재적 본성은 육체와 정신의 순환작용에서 확인될 수 있을 것이다. 육체와 정신은 서로 대립적이지 않으며 서로를 부정하지도 않는다. 이들은 다만 바톤을 이어가면서 증식될 뿐이다. 윤리학의 유일한 토대는 법칙을 이해하는 정신에 있지 않고 좋고 나쁨을 구별할 줄 아는 우리의 연약한 신체에 있다. 그러나 이것이 윤리학의 본질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윤리학의 본질은 적극성에 있는데, 이 적극성이란 연약한 신체로부터 출발하긴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이를 강하게 다져줄 인식(사유)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인용문헌
들뢰즈, 질. 『스피노자의 철학』. 박기순 옮김. 민음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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