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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09/21 이모와 찍은 한 장의 사진을 보며 (3) (5)
  2. 2006/09/19 이모와 찍은 한 장의 사진을 보며 (2) (11)

나는 혼자 여행을 하게 되는일이 가끔 있다. 낯선 곳에 도착해 버스에서 내리고나면, 밀려오는 막연함에 가슴이 두근거리고는 한다. 갈 곳이 없는 저녁이라면 고독감은 더해진다. 그것을 견딜 수 없다면 다방에서 차 한잔 마시고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면 끝이다. 그러나 만일 거기서 살아야 한다면, 다시 되돌아갈 곳이 없다면 어떨까? 키리코(Giorgio de Chirico)의 텅빈 거리 그림을 본 적이 있는가?(그림보기) 육체를 잃어버린 소수자(minority)가 느끼는 낯설고도 막연한 감정이 우리의 가슴을 후벼판다. 그녀도 그랬을 것이다. 손이 홀가분한 여행자가 아니었으니. 잔뜩 손에 쥔 보따리를 질질 끌며, 자신의 영혼을 담아줄 무엇인가를 혹은 누군가를 찾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도회지의 생활은 자유로움 그 자체였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사지가 매여있던 시골로부터 벗어나 작은 환락을 만끽할 수가 있었을 테니. 그곳에는 그녀를 아는 사람들이 없었고, 그들의 질긴 시선도 없었다. 어느 누구도 그녀를 개의치 않았을 것이다. 그녀에게 주어진 일만 열심히 한다면, 꿈꾸던 우아함을 적당히 포기할 용의가 있다면, 목숨이 유지되는 것은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지내다 보면 더러는 살맛도 나고 행운도 오기 마련이다.

그러나 도시가 그녀에게 안겨준 자유란 그녀를 속이는 것이기도 했다. 그것은 궁핍이라고 하는 법이 허용하는 한에서만 가질 수 있는, 말하자면 정글보다도 더 무시무시한 자유였다. 그녀는 삶이 가해오는 생애 최초의 그 공포에 맞딱드리지 않기 위해 정말이지 열심히 일해야 했을 것이다. 이루고 싶던 꿈도 어느새 바뀌지 않았을까? 도회지의 삶은 더 이상 권태가 아니라 무서움 그 자체였을 것이다.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다가올 것에 대비하고 준비하는 그 삶은 현재의 모든 것을 미래의 불안으로 흡수해 버린다. 그것은 너무나도 끔찍한 것이었기에 떠올릴 수조차 없었으며, 그것이 오히려 자유를 느끼게 해주었을지도 모른다. 불안과 공포란 임박한 죽음 속에서가 아니라 무한한 자유 속에서 최대화되는 법이다. 자신을 죄이고 있던 사슬이 풀어지면, 우리의 몸을 지탱해주는 것은 불안과 공포 뿐이다. 언제부터인지 우리들은 자유의 댓가로 영혼을 빼앗기기 시작했다.

공포란 도시 환경 자체가 개인에게 주는 정서이기도 하다. 어디를 가도 다를 것 없는 불특정한 구역들. 가려진 태양. 기하학적으로 구획된 거리들. 또 그 길을 따라 오고가는 이들의 뻣뻣해진 육체. 조각난 노동과 그 현장. 사방에서 밀려오는 소음과 악취. 뿌리칠수도 응할 수도 없는 유혹들. 번쩍거리는 불야성. 그 속에서 무엇인가에 굶주린 잠재적 하이에나들. 그러면서도 아이스크림과 초콜렛의 천국. 쇼우 윈도우. 백화점. 저절로 움직이는 에스컬레이터. 지하철. . . .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어떠한 짓을 해도, 꿈쩍도 하지 않는 이 거대한 기계 덩어리. 한도 끝도 없어 보이는  이 기만적인 자유. 또 거기서 겪게되는 배회와 방황. 시-공간적 좌표가 소실되어버린("여기가 어디지?") 이 회색 도회지에서 그녀는 완전히 버림받은 것이다.

이제 그녀는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아무도 감시하지 않는 감옥에서 하루 하루를 재빠른 걸음으로 살아가야 한다. 배운 기술도, 아는 정보도, 아는 사람도 없었으므로, 그다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기껏해야 식당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거나, 테이블을 치워가며 낯선자들에게 불려다니거나, 여인숙같은 곳에서 남녀들이 밤새 뱉어놓은 찌꺼기들을 치우며 한낮을 보내거나, 콘베이어벨트나 선반 앞에 꼿꼿이 앉아 기계의 시다 노릇을 하거나, 좀 나은 것이라면, 사무실에서 문서 심부름이나 커피를 타주는 일 정도 였을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70년대 한국의 도회지에서 중졸의 그녀가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욕지거리를 듣는 일은 흔했을 것이다. 못볼 일도 많이 겪었을 것이고, 심지어는 추행을 당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도회지의 세월은 그녀 안에서 만발했을 설레임과 호기심들을 하루에 하나씩 떨구어 나가는 세월이었을 것이다. 그 삶은 깔깔거리며 발랄한 미소를 지었던 그녀가 꿈꾸어온 것이 결코 아니었다. 그녀가 세상을 실망시킨 것이 아니다. 할아버지, 시골, 서울, . . . 그녀는 그 어느 누구도 실망시키지 않았다. 반대로 그녀가 그 모든 것들에 실망하고 있었다. 논리적으로도 그렇지 않은가? 젊은이들의 앳되고도 순진한 미소를 망쳐놓는 것이 삶 자체는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그녀가 지녔던 것 중에서 가장 돋보였던 그 미소는 점점 짜증과 냉소의 주름들로 구겨져가고 있었다.

아마도 그 실망과 더불어 그녀의 삶은 달라졌을 것이다. 그녀에게 무례했던 시골과 서울로부터 그녀는 더 이상 아무런 동경도 품지 않았다. 식물을 길러본 사람들은 이를 잘 안다. 식물은 환경이 맞지 않으면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환경과 자신을 절연한다. 식물의 투쟁방식은 다름 아닌 실망이다. 무엇인가에 실망한다는 것. 그것만큼 우리를 서글프게 하는것도 없다. 말 없이 떠나가는 사람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사람들은 절망하지 않는다. 실망할 뿐이다. 그녀의 영혼이 그녀 자신으로부터 빠져나가 버렸다. 그리고는 그녀는 결혼을 하였다. 그녀가 처녀를 잃은 것은 그 때부터일 것이다. 자신을 거칠게 대하는 삶으로부터 그녀가 바랬던 것은 약간의 다정함 뿐이었다. 그녀 자신의 환상이든 아니든, 어쨌든 그녀는 그 다정함을 주는 어떤 사람에게 자신의 몸과 마음을 송두리채 맡겼다. 몇 년후, 식당 주방장과 결혼하겠다고 한 남자를 집에 데려왔을 때, 할아버지를 비롯해서 사람들의 눈총과 동정어린 비난을 기억한다: "저럴 걸 왜 정신 못차리고 이혼을 . . .!"

다행스럽게도 그녀의 남편은 성실했고, 그녀를 꽤 사랑해 준다고 들었다. 아이도 둘이나 낳았다. 오래 전에 들은 기억으로, 지방의 작은 도시에서 손바닥 만한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할머니가 다 되었을 것이다. 그녀는 가슴 속에 품은 것들을 추스르지 못해 공부를 잘 하지 못했으며 외모가 잘나지도 못했다. 그러다보니 욕망을 실현시킬 사회적으로 긍정적인 수단을 쥐지 못했다. 욕망이 움츠려있기에는 너무나 피로해서, 그 피로에 더 이상 견디지 못해, 그녀는 타협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육체를 잃은 영혼처럼 서 있지도 앉아 있지도 못해 엉거주춤 했던 세월이 너무 많아서였는지, 지금은 무릎 관절이 심하게 아파 시름하고 있다고 들었다. 그녀도 언젠가는 죽게 될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삶을 후회했을지도 모른다. 또 사회에 불필요한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결국 그녀는 불행한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불행은 그녀 자신이 만드는 것으로 충분하다. 자신이 아닌 누군가의 결정으로 불행이 계속되어서는 안 된다. 불행이 사라진 낙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있을 수도 없고, 있다해도 별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낙원이 아니다. 다만 불행조차도 우리 스스로가 선택한 결과이길 바랄뿐이다. 그랬을 때에만 비로소 우리는 삶을 불행으로 여기지 않는다. 나는 그녀가 다른 조명에 의해서가 아니라 바로 자신만의 빛으로 살아가길 바란다. 오래 전에 이 사진 속에 자국을 남겼던 그 소란한 빛처럼. 할아버지 뿐 아니라 사회가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 빛이 그녀 자신으로부터 나올 수 있도록 그녀에게 되돌려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아버지의 보호에 의해서도 아니고, 남편의 사랑에 의해서도 아니다. 도회지가 그랬듯이 내버려두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기다려 주는 것. 결실이 보이지 않는다 해도, 오로지 기다려 주는 것. 그리하여 그녀의 본질이 스스로 드러나도록 한 없이 기다려 주는 것이다. 감광판을 태우기 위해 조리개를 활짝 열고, 하염없이 빛을 기다리는 카메라, 그 초연한 카메라처럼. . .




<문예노트>
Posted by huun

지금 생각해보면 내 마음 속에 남아있는 이모의 화사함은, 내가 서울로 이사오기 전까지만 남아있었던 것 같다. 이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볼 때 아주 틀린 말이 아니다.

우선, 나는 국민학교 2학년 2학기에 서울로 전학을 왔다. 서울 생활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사투리를 심하게 쓴다는 이유로 반 아이들은 나를 놀리고는 했으며, 나 역시 녀석들의 억센 텃새에 눌려 주눅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쉬는 시간이 겁이 날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성적도 좋을 리가 없었다. 시험만 끝나면 어머니가 불려오기 일쑤였다. 이모가 그렇게 칭찬했던 서울 생활은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헛된 상상을 불러 일으킨 장본인이라고 생각했던 탓인지, 한편으로는 밉기도 했던 이모의 모습은 그렇게 점점 잊혀지고 있었다.

그녀의 화사함이 더 이상 지속되지 않은 더 큰 이유가 있다. 내 마음 속에 그녀를 나타나게 했던 것은 이제 더 이상 그녀의 향긋한 냄새가 아니었다. 분홍빛 뺨의 부드러운 촉감은 더더욱 아니었다. 또 그녀의 깔깔거리는 장난이 나를 당혹스럽게 해서도 아니었다. 그녀의 이미지는 이제 그녀 자신에게서가 아니라 식구들의 입담에 의해서만 내게 전달될 뿐이었다. 시골에서 할머니나 할아버지 혹은 삼촌이 올라왔을 때라든가, 엄마 아버지의 대화 속에서만 이모가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나와 함께 있거나 마주보는 인칭이 아니라, 내가 빠진 인칭, 나 와는 관계가 없는 "그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모습은 식구들이 저만치에서 거리를 두고 요모조모 살피는 시선 속에만 있었고, 그것은 내가 예전에 보았던 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었다.

그녀는 농사 일을 돕지 않았다. 그렇다고 시집을 갈 생각도 없었다. 학벌이 없어 취직은 더 어려웠다. 집안 일을 부지런히 배우고 도울만큼 참한 처녀도 아니었다. 그녀가 가족을 위해 또는 사회를 위해 하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식구들 마음에 새겨진 이모의 빛은 더 이상 생기에 차 있지 않았다. 산 너머를 주시하는 포부를 가진 처녀도 아니었다. 다만 한 명의 시골 여자일 뿐이었으며, 자신이 해야할 의무나 할 일을 미룬 채, 소녀적 감성에 고착되어 비현실적인 동경만을 품은 철부지에 불과했다. 그러니 바람이 한껏 들어간 이 시골 여자를 근엄한 촌구석 가부장 기계가 곱게 보았을 리가 없다. 밭을 일구는 것이 무엇인지, 밥물은 얼마나 채워야 하는지, 김치에 젓갈은 어떤 것을 넣어야 하는지, 결혼 생활이 어떤 것인지, 아버지와 남편이 무엇인지, 또 아내가, 여자가 무엇인지, . . . 이러한 질문들은 그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녀의 가슴엔 막연한 약속만이 채워져 있었고, 그녀를 둘러싼 시골의 토담 한 가운데에서 한없는 갈증만을 느끼고 있었던, 말하자면 그녀는 소멸이 예고된 초라한 빛이었다.

이제야 고백하지만, 나의 이모는 두 번이나 결혼에 실패했다. 첫 번째 결혼식 날은 비가 많이 왔었다. 결혼식 날 비가 오면 불행하다는 어른들의 걱정 소리가 들렸지만, 정작 결혼할 남자가 대머리라고 수군거리며 비아냥대던 이들은 바로 그들이었다. 나 시집간다!고 들뜬 목소리로 이모가 내게 왔을 때, 그녀의 진한 화장 때문에 알아보지 못했었다. 나는 결혼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지만, 그 진한 화장을 보고 왠지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알게 된 사실인데, 이모는 1주일이 채 못되어 시집에서 도망쳐 나왔다. 그녀로부터 직접 듣지 못했으므로 정확한 이유야 알 길이 없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말에 의하면 남자의 대머리가 생각보다 심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 후로 이모에 관한 어른들의 얘기는 반은 걱정이었고 반은 비웃음이 되어갔다. 그녀에 대한 화제는 결국 웃음으로 이어지고, 가족이나 친척들끼리 모여 서먹서먹함을 중화해야할 필요가 느껴지면, 여지없이 화제는 그녀에게 가 있었다. 몇 년이 지난 후에 두 번째 결혼이 조용히 치러졌다. 창피하다는 이유로 아무도 부르지 않았던 것이다. 상대는 무슨 군수(郡守)의 아들이라고 들떠있었지만, 귓속말로는 재처(再妻) 자리라고 쑥덕거리고들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채 1달이 못되어 이모는 다시 시집에서 도망쳐 나왔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두 번이나 결혼을 하고도 그녀는 완전한 처녀였다고 했다. 그 후로 이모는 웃음거리에서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이미 그들의 눈과 귀를 통해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던 나 역시 그랬다. 심지어는 막내 여동생의 제멋대로인 행동을 비난 할 때면, 너 이모하고 똑같다!라고 말하곤 했다. 그리고 여동생에게 그 비난은 일종의 수치였다.

그러나 지금은 이모가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는지, 왜 본의 아니게 쓸모 없는 사람이 되었을지,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사람 구실 못한다고 하루에도 몇 차례씩 들었을 할아버지의 싫은 소리. 고집스런 시골 사람들의 질긴 시선. 서울 가서 공부 잘하는 막내 동생(삼촌)과의 비교. 또 누나를 창피해하는 그가 집으로 내려올 때마다 겪게 되는 사소한 언쟁들. 그리고 싸움. 모욕. 비웃음. . . . 실제로 나는 할아버지의 웬수인 이모와 그의 우상인 삼촌의 큰 싸움을 몇 차례 목격한 일이 있다. 두 번째 결혼이 실패한 후 3개월이 채 못되어, 결국 그녀는 쫓겨나다시피 집을 나가게 되었다.

그 절망적인 가출은 한편으로는 해방이었고, 어쩌면 희망이었을지도 모른다. 남들의 눈을 피해서 동네를 나와야 했으므로, 새벽에 일찍 혹은 밤 늦게 대문을 나섰을 것이다. 아니, 밤이 늦으면 갈 곳이 없으니, 새벽 일찍 나가야 한다. 계획된 가출이 아니었기 때문에, 짐을 싸들고 나오며 어디를 갈까 망설였을 것이다. 우선 잘 곳을 알아봐야겠지? 친구에게 연락을 해볼까? 그러나 그 시절에는 친구를 받아들일 만큼 여유있게 독립한 여자들이 흔치 않았다. 또 그녀는 중학교를 겨우 나온 학벌이었기 때문에, 사회에 나가 어깨를 피고 살고 있을 친구란 찾아볼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들 역시 남편이나 아버지 혹은 다른 어떤 조명 아래 살고 있었을 것이다. 집을 나서자 마자 실감을 했을 것이다. 어른들이 왜 자꾸만 자신을 시집 보내려 했는지, 동년배 친구들이 왜 자유로워지기 위해 결혼들을 해대는지, 또 배우지 못해 독립이 힘든 여자에게 결혼이, 그리고 현재 자신의  일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또 이 고독과 두려움이 무엇인지, . . . 나이 어린 처녀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찬, 뭐 이런 복잡한 사안들이 머릿속을 맴돌았을 것이다. 대문을 나선 것이 후회스러웠을 것이다. 처음으로 맡아보는 차가운 새벽공기가 가로막고 있음을 느끼며, 자신 안에 있는 생기를 원망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쨌든 살기 위해서는 취직을 해야했고, 그러려면 틀림없이 도회지 쪽으로 가게 되었을 것이다. 아마 서울이었을지도. . . . <계속>



Posted by hu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