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08/09/18 독서와 테크놀로지
  2. 2007/03/30 글을 잘 쓰는 첫 번째 방법
  3. 2006/12/06 책읽기와 브리꼴라쥬

최근에 학부생들에게 벤야민(Walter Benjamin)의 잘 알려진 논문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The work of art in the age of mechanical reproduction)을 읽히고 있다. 이 텍스트 말고도 학부생이 읽기에는 다소 버겁다 싶은 텍스트를 여러 개 선별해 놓은 상태이다. 어떤 점에서 이 시도는 모험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발표자를 비롯해서 여러 학생들이 읽는 가운데 어려움을 호소한다. 글의 이해를 위해 마르크스(Karl Marx)나 미학 전반에 관한 배경지식을 필요로 하는 그 내용은 고사하고, 영문 해석조차 버거워 하는 것 같다.


수년 전부터 느끼고 있는 징후가 하나 있는데, 학생들의 독서 능력이 가파르게 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지식의 문제이기도 하고, 또 언어(모국어, 외국어)를 처리하는 기술적 수준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텍스트를 대하는 그들의 태도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 내 생각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벤야민이 자신의 글에서 그렇게 썼듯이, 현대의 기술매체가 젊은 학생들의 지각패턴을 급속도로 바꾸어 놓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의 대상이나 이미지에 오랫동안 머물지 못하는 이 신 인류학적 지각 패턴의 문제는 점차 독서가 불가능해지고 있는 상황으로 치닫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벤야민은 기술복제라고 하는 사회 역사적 환경이 "현대적 위기"를 반영하고 있는 동시에, 그와는 반대로 낡은 이데올로기들 즉 마르크스식으로 말해 신비적 외피를 "청산"해 줄지도 모를 것이라고 아주 "모호하게" 믿고 있었다. 물론 정치적인 입장에서 보면 있을 수 있는 믿음이다. 확실히 테크놀로지는 새로운 지각을 탄생시켰고, 그 지각은 낡은 가치들을 낯설게--너무나 낯설어서 비판적이 되기 보다는 오히려 혐오의 감정이 들게 하는--바라보기 시작했고, 그럼으로써 신비적 외피에 감싸여 몽롱한 미학적 분위기에 취해 있었던 서구인이 그리고 최근엔 동양인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한편, 벤야민 자신이 지적했던 그 위기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도 알고 있던 바, 존재와 사물로부터 "실질적 지속"(substantive duration)이 제거되는 문제, 다시 말해 어떤 실제적 존재가 태어나서 그 자신의 고유한 시간(역사성) 속에서 살아가는 동안 서서히 축적되어 그의 실질적 존재성을 증언해 줄 수 있는 "증언적 가치"(testimonial value)가 그 존재로부터 제거 되는 문제는 어떻게 된다는 말인가? 존재를 증언해주고, 그것의 긍정성을 확보해주고, 궁극적으로 존재의 본질을 보존하는 것은 다름 아닌 그 실질적 지속이다. 그리고 윤리적 관점에서 볼 때, 그 실질적 지속이 윤리적 판단의 근거로서 유효할 수 있도록, 그것을 현시하는 능력이 바로 독서(reading)가 아닌가? 벤야민이 이 사실을 감안하여 말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현대적 테크놀로지가 사람들의 지각에 끼친 영향은 낡아빠진 상부구조를 청산할 수 있는 정치적 가능성 보다는, 오히려 독서능력의 박탈이 더 크지 않을까 싶다. 새로운 형태의 독서 테크놀로지가 있다는 말일까? 아니면 독서를 하지 않아도 되는 새로운 삶의 방식이 있다는 말일까?


그 어느 때 보다도 독서가 필요한 시대이다. 냉소적이 되어가는 정서를 바로잡기 위해. 그리고 더 본질적으로는 빼앗긴 시간을 되찾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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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소설가로부터 전해들은 비법 가지 소개하겠다. 아는 사람들은 테지만, 그래도 실천하기는 쉽지 않은 비법이다. 우리가 너무나 오만하고, 무성의하고, 넘겨 짚는 습관이 너무 오래 되었기 때문에.

비법은 다음과 같다. 좋아하는 작가나, 마음에 드는 책을 선택해서, 하루에 일정 량을 정해 놓고 책을 베낀다. 타자기로 치지 말고, 직접 손으로 정성스럽게 글자 글자를 옮겨 적는 것이다. 그렇게 베끼다 보면 무슨 일이 생기는가 하면, 작가의 글과 생각과 느낌 등을 자신도 모르게 곱씹게 되고, 곱씹는 행위는 바로 작가가 글을 쓰면서 찾아 헤매었던 험한 길을 함께 동행하고 있는 것과 비견할 만한 여행을 하고 있는 셈이 된다. 그러다 보면, 흉내도 내보고, 말도 걸어보고, 간혹 그를 제치고 앞서가기도 한다.

작가들은 전에 경험했던 일이나, 읽었던 글이나, 만났던 사람들을 계속해서 다시 되돌아가 곱씹는 사람들이다. 나쁜 마음을 가지고, 그들에게 해를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유로워지기 위해 그것들을 곱씹는다. 수학문제 풀듯이, 했던 것을 풀고 풀고 풀고, . . . 하다 보면, 어느새 자신이 문제로부터 자유로워지듯이, 작가들은 경험을 되풀이하고, 다시 돌아가 음미해 봄으로써, 처음이라서 당혹스러워 어쩔 몰라 했던 경험을 여유로운 마음으로 다시 자신의 것으로 되새긴다. 그렇게 힘들게 얻은 노하우는, 바람직한 관계와 보다 쉬운 길을 찾을 있도록, 우리에게 삶의 지도 같은 것을 제시해주는 자료가 된다.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다. 해야 일들이 아주 많고, 그래서 귀찮은 일이기도 하고, 번거롭기도 하고,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것은 마치 깊고 깊은 중에서 길을 찾는 것과도 같다. 깊은 골짜기, 비좁은 샛길, 울창한 나무들, 빼곡한 바위들, 듬성 듬성 파헤쳐진 구덩이들, . . . 앞에 놓인 모든 것들은 쉽게 길을 찾는 것을 방해하고, 이상 앞으로 가지 못하도록 좌절하게 한다. 작가는 길을 찾아 복잡한 방해물들을 하나씩 하나씩 제쳐가며, 풀어가며, 발자국, 발자국 앞으로 내딛는다. 지도를 찾기 위해, 넓은 광장에서 쉬기 위해.

독서라는 것은 바로 그와의 동행이다. 동행이 쉬운 작가도 있고, 동행이 까다로운 작가도 있다. 친절하게 배려를 해주는 작가도 있고, 따라 오든 말든 앞으로 자신의 길만 가는 작가도 있다. 그가 험하고 깊은 굴곡의 길을 가면 수록 우리는 따라가지 못해 중간에 포기하고 나와, 그를 불평하거나 비난하거나, 아니면 자신의 무능력과 무기력을 한탄하기도 한다. 그러나,  험한 길일 수록, 돌파하기가 쉽지 않은 길일 수록, 깊고 깊은 길을 따라 수록, 광장은 넓어지고, 휴식은 영원해지고, 자유는 커지고, 기쁨은 배가 된다. 복잡한 길이 힘들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머리에, 혹은 중턱에 주저 앉아 쉬고 싶어 하지만, 실은 비좁은 샛길에서 빽빽한 돌멩이들을 피해, 다리를 오므리고, 몸을 움츠리고 앉아, 불편하게 견디고 있는 것일 뿐이다. 그러면서 자신의 인생을 후회하고, 한탄하고, 원한을 갖는다.

그러지 않으려면 독서를 해야 한다. 책이 아니어도, 글자가 아니어도, 독서를 해야  한다. 그리고 작가를 따라 베껴야 한다. 빠르고 날렵하게 달리고 있는 그를 따라, 그의 지팡이를 잡고, 그가 가는 발길을 발자국씩 따라가 봄으로써, 그와 비슷한 정도의 깊이와 폭의 여행을 해보는 것이다. 그렇게 차례 동행을 하고 나면, 자신이 어떤 길을 가야 할지, 길이 적당한 길인지, 그렇지 않은지, 너무 얕은 길은 아닌지, 너무 엉성해서 혹시 빠질 수도 있는 함정은 아닌지, 가지 말아야 길은 아닌지, . . . 판단하기 어려운 사안들에 대한 식견과 통찰, 노하우가 자신도 모르게 생기게 된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Posted by huun
책 읽기를 힘들어 하거나, 책을 과도하게 동경한 나머지 책과 가장 멀리에 있거나, 책을 너무 오랫동안 집어들고 읽는 사람들의 의식을 가만히 살펴보면, 그가 그 책과 전쟁을 벌이고 있음을 알게 된다. 책에 맞서서 자신 앞에 세워진 책 만큼이나 높은 벽을 쌓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책에 대해 좌절하는 가장 큰 이유들 중 하나는 완전한 이해에 대한 강박, 그리고 지식을 소유물 대하듯 추구하는 속물근성 때문이다. 속물근성은 책과 독서의 적이다. 속물끼가 조금이라도 있어 보이는 작자와는 책에 대해 절대로 대화하지 말라! 그와 잡담이나 하면서 헛배만 채우는 세계 속에 안주하여 아까운 인생을 허비하지 말고, 당장 일어서 다른 재미를 찾아야 한다. 그럼에도 저 진부한 속물조차 그럭저럭 독서를 하고 글을 써가지고는 우리 앞에 나타난다는 사실이 우리를 신경질나게 만든다.

모름지기 고귀한 영혼의 독서는 브리꼴라주(bricolage)이다. 필연적인 의무들로 이루어진 유기적 왕국이 아니라, 우연적인 섬광들을 그럭저럭 적합하게 쌓아올린 돌담처럼, 어느것을 취해도 좋을 만큼 자유롭게, 여기 저기에 입구와 개구멍을 만들어 파고드는 독서. 즐거운 독서란 구멍이 많은 책으로부터 나온다.

Posted by hu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