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벌로써 불안과 죄의식의 해소가 가능해 진다는 설명만으로는 매저키즘이 쾌감을 도출하는 조건들을 충족시키지 못한다. 처벌 속에서 경험하는 고통이 쾌감으로 연결된다는 매저키즘적 공식은 단순히 물질적 전이나 도덕적 위안이라는 미리 결정된 유추로는 해석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매저키즘적 쾌락을 처벌이 끝난 후에 얻어지는 도덕적 위안의 소극성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곤란하다. 매저키즘이 고통을 쾌감으로 이해하는 과정에는 그가 특별히 운용하는 정치학과 미학이 숨어있다. 그렇지 않고는 상반된 경험들이 부지불식간에 자리바꿈을 할 수 없을 것이며, 또한 이러한 전환의 논리는 설명되기 어려울 것이다. 마조흐의 미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계약과 법이 어떠한 관계를 가지게 되는가가 매우 중요하다. 그의 냉소와 저항에 스며든 유머러스한 웃음에는 법의 틈새를 극단적으로 벌려놓는 기술적 미학이 포함되며, 외디푸스적 관계들 속에서 구성되는 매저키즘적 특유의 환상이 포함된다. 계약과 법의 매저키즘적 이해와 운용방식을 통해 우리는 그가 어떻게 고통으로부터 쾌감을 도출할 수 있으며, 폭력과 억압에 대해 어떻게 승리를 경험하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 이것은 또한 더 나아가 매저키즘이 어떻게 새로운 형태의 인간으로 부활하는지를 이해하게 해준다.
마조흐가 박해자 여성들과 맺은 계약의 조항들은 점점 잔혹해지며 심지어는 죽음과 관련된 조항들까지도 등장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277∼279 참조>. 계약 조항들의 이와 같은 추이는 절대적인 법의 형태로 나아가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분명히 계약은 법을 도출해내는 속성이 있으며, 또한 법이 공포되고 난 후에는 역으로 계약의 효력들을 무효화하거나 정지시키는 특징이 있다. 한 사회의 기원이 계약에 준거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법이 발생하고 난 후에 무효화되었던 계약의 요소들이 상기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물론 이러한 생각은 법과 계약의 긴밀한 공모관계로부터 발생하는 새로운 효과로서 계약의 무효화 과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경우에만 가능해질 것이다.
계약에 의해 발생한 법이 오히려 계약의 조건들과 효력들을 제압하고 효력정지 시킨다는 점은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다. (1) 법은 계약 당사자들뿐 아니라 제 3자에게도 적용된다는 것. 그러므로 법은 계약의 형태로 유지되지 않는다. 법의 테두리 안에서는 어떠한 예외와 유보조항이 첨가되기 힘들다. (2) 법이 적용되는 유효기간은 미결정적이다. 따라서 계약의 당사자들은 한없는 법의 유효함을 경험하게 된다. 유효시기의 결정은 그 자체로 법적 권위를 실추시키는 유머러스한 상황을 만들어 낸다. (3) 법의 공포는 곧바로 계약의 당사자들로부터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제한하거나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원칙적으로 법적인 성역이란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어떤 식으로든 법은 노예상태를 만들어 낸다.
사드가 법을 신비화된 권력으로 이해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것은 계약이라는 이차적 존재들의 합의와 양도에 의해 발생하지만, 동시에 계약 당사자들의 권력을 제한하며 폭정을 불러들인다. 그러므로 법이 절대적 권력을 향해 치닫는 과정은 필연적으로 폭력과 억압이라는 매개를 수반한다. 법의 기원은 미숙한(양도된) 권력으로 시작되지만, 법이 보존되기 위해서는 절대적 권력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사물의 기원이 발생적 과정 속에서 보존되기 위해서는 매개들과 단계들이 필요하다. 법은 기원과 과정의 괴리를 폭력과 억압이라는 도약을 통해 메운다. 마조흐는 법의 이러한 메카니즘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의 정치적 태도에서 볼 수 있는 유머의 기술은 계약과 법의 관계 그리고 이로부터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폭력의 양상을 파악하는 통찰에 기인하는 것이다. 1848년 혁명과 범 슬라브 민족운동과 관련하여, 앞으로 도래할 무시무시한 짜르(Tsarina) 통치의 불가피함에 대해 그가 보여준 유머러스한 태도는 불가항력적인 힘으로부터 어떻게 그 방향이 전환되는지를 깨닫게 해준다. 법의 폭정은 반드시 도래할 것이며, 따라서 노예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누가 주체이며 누가 계약의 당사자인가. 계약은 맺어져야 한다. 그러나 계약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마조흐는 이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슬라브인들이 전제정치(짜르 통치)를 없애므로써 러시아를 위해 단결할 것인가? 아니면 천재적인 짜르의 통치 아래 강력한 국가를 목적으로 할 것인가? 93>
계약에서 법으로 연결되는 폭력과 도약의 과정은 남성적이고 아폴론적 문화중심의 세계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이다. 여기서 여자와 어머니는 언제나 피해자 또는 대상으로 결정된다. 교환과 계약의 대상은 언제나 여성에게 향해졌으며, 따라서 여성은 법으로부터 두 번 주변화되었다. 법의 객체로서 그리고 계약의 대상(여성)으로서. 그러나 마조흐는 계약의 당사자를 여성으로 설정함으로써, 동일한 하나의 사태에서 두 가지 역설적 사유의 효과를 보여주고 있다. (1) 매저키스트의 법에 대한 유머러스한 처리는 처벌의 주체와 대상간의 벡터를 반대로 역전시키는 효과를 갖는다. 처벌의 집행을 자발적으로 결정함으로써 권력이 작용하는 힘의 방향은 오히려 처벌의 대상으로부터 시작된다. 따라서 피해자는 처벌을 통해 쾌락을 획득하게 되며 처벌과 법적 권력은 무효화된다. 매저키즘의 예술은 힘의 관계를 무효화하면서 넌센스를 이용해 방향을 전환시킨다. 이것이 그의 설득과 계약의 넌센스가 보여주는 벡터의 전환 효과이다. 권력을 피해자가 부여하는 것만큼 유머러스한 상황이 있겠는가?: 자 이제 노예가 될 테니 내 말을 따르라구! (2) 그러나 또한 계약과 교환의 대상인 여성을 계약의 당사자로 바꾸어 버림으로써 계약의 신비화로부터 나오게 되는 피해자와 박해자의 관계가 역전된다. 마조흐의 계약의 원리는 계약상에 근거한 가부장 체제의 재현을 통해 이루어진다. 따라서 계약을 자의적으로 요구함으로써 계약의 주체는 매저키스트 자신이다. 그러나 이것이 매저키즘과 남성적 원리가 일치하고 있다는 의미로 보아서는 안 된다. 계약을 통해 마조흐는 가부장 체제의 계약의 원리가 어떻게 역설적으로 탈 신비화되는지를 한편의 드라마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계약은 남성에 의해서 시작되고, 그것은 주인과 노예의 관계를 발생시킬 것이며, 계약에서 법으로 이행되는 전체과정은 절대적 권력의 신비화를 재연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피해자는 계약의 주체이며 남성인 바로 자신이 되어 버렸다. 이것이 매저키즘에서 계약과 법이 만들어내는 신비스러운 드라마의 역설이다. 계약의 주체가 피해자라는 사실.
하나의 사물이나 상황 속에서 역설을 사유하는 것은 그것의 본성을 여러 방향으로 가르는 노력 속에서 나타난다. 역설이 드러나거나 드러냄으로써, 심층의 본질이 표면으로 떠오르면서 최소한 두 방향의 사유가 우리에게 주어진다. 역설 속에서 언제나 예상하지 못한 새로운 관점과 본성의 난입을 목격하게 되며, 따라서 사물은 의미를 잃어버린다. 피해자가 권력을 부여하고 계약의 주체가 피해자라는 역설적 관계 속에서, 계약과 법 그리고 권력과 처벌의 신비화된 역학관계가 무의미해 진다는 통찰 외에 또 어떠한 사유가 있을 수 있겠는가. 계약으로부터 법으로 이행되는 절대적 권력의 신비화는 마조흐의 넌센스와 드라마를 통해 역 방향으로 진행되면서 두 차례의 탈 신비화가 이루어진다. 마조흐가 보여주고 있는 자신의 연구는 가부장적 계약과 주인-노예관계를 고착시키는 법의 심층적 베일을 벗기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마조흐의 저항에는 감상적인 본성이 숨어있다. 이것이 또한 사드의 정치학과 구별되는 면모이다. 그렇다면 매저키즘적 유머가 감상적 본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저항의 소극적 이면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현실적 무게로 경험되고 실제적 효력으로 지각되는 이차적 자연 안에서, 그의 수사적 저항과 환상이 유효하다고 말할 수 없는가? 또한 사드의 망상과 마조흐의 환상이 그 본성에서 다른 것이라면, 이들이 경험하고 인식하는 현실이 본질적으로 다른 것은 아닌가? 이들은 현실적 경험뿐 아니라 일차적 자연으로서 망상과 환상의 내용 자체도 완전히 다르지 않은가? 자연이 각각 그 본성에서부터 다른 것으로 이해되고 경험된다면, 사드의 거친 저항과 마조흐의 감상적 저항이 서로 완전히 다른 자연 안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들은 같은 자연이 아닌 본성적으로 다른 자연 안에서 자신의 망상을 실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따라서 아이러니와 유머가 가능해지는 특수한 조건들이 이미 이들의 서로 다른 현실인식 위에 근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사드와 마조흐가 서로 다른 저항의 방식을 운용한다는 것은 그들이 지각하고 경험하는 세계가 본성적으로 다른 세계임을 말해주고 있다: (1) 사드는 아이러니의 구조를 통해 세계를 이해한다. 그가 법과 폭정에 대해 저항하는 발화방식으로서 아이러니는 아이러니컬 하게도 그의 지각구조인 셈이다. 절대적이고 순수한 그의 폭력 속에는 법의 폭정에 대한 분노가 스며들어 있다. 1789년 혁명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혁명은 법 제정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영속적인 혼란의 움직임을 제도화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이며 생산적이지 못할 것이다. 93> 아이러니적인 아이러니의 구조 아래 사드의 저항은 저항의 대상에 집착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폭정에 대한 저항은 폭정의 이데아에 의존한다. 사드가 이해하는 현실은 폭력과 강요로 이루어진 세계이다. 또한 그는 폭력이 배제된 어떠한 현실도 인정하지 않는다. 또한 법과 같은 계약과 문화의 산물이 거친 세계를 모방하는 것에 못 견뎌 한다. 사드는 소통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소통은 그에게 수치이며 소통의 일치는 바로 이차적 자연의 산물들과 그 부드러움 속으로 귀속되는 것을 의미한다.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그의 논증들은 일치된 소통을 위한 노력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이성이 폭력의 세계를 모사(模寫)하며 대변하고 있다고 항변하는 것이다. (2) 마조흐는 소통이 사라진 세계를 거부한다. 그러나 이것이 사드와 정 반대의 위치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의 거부에는 근원적인 부정이 있기 때문이다. 즉 그의 목적은 사라진 세계의 복원이나 이데아의 현실화에 있지 않다. 그는 소통의 부재에 더 이상 집착하지 않으며, 따라서 그의 망상은 곧바로 두 번째 세계로 달려간다. 마조흐는 세계를 둘로 분열된 것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망상을 현실 속에 투사하거나 실현하겠다는 의지는 처음부터 가지고 있지 않다. 매저키즘의 환상은 그 자체로 현실이다. 이것이 새디즘적 아이러니를 매저키즘적 망상 속에서는 볼 수 없는 이유이다. 사드는 분열된 자아를 통해 하나의 세계를 인식하며, 마조흐는 세계가 분열된 것으로 이해한다. 이런 이유로 마조흐에게 하나의 세계에 고착된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따라서 만일 매저키즘적 유머와 예술적 수사가 소극적이라고 생각한다면 커다란 오해이다. 마조흐는 도약과 폭력으로 지배되는 세계에서 현실적으로 가능한 부드러운 소통이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한다. 이것은 소통이 불가능한 세계에 대한 단순한 거부나 저항이 아니다. 분열된 현실 속에서 또 다른 세계를 상상하면서 그의 유머와 수사적 저항은 일종의 제스쳐의 기능을 갖는다. 예술의 감상적 본질이 결코 현실적 강요와 폭력의 무게에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을 그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승리는 그에게 무의미하다. 따라서 그의 나약한 수사적 저항의 궁극적인 목적은 소통 그 자체로 향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가 목적으로 하는 것은 정 반대이다: 그는 소통이 일치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현실에서 이러한 감상적 저항은 반드시 실패한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현실이 폭력으로 지배되고 있음을 예증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패배를 자발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이보다 더 효과적으로 폭력의 양상과 그 무의미함을 드러낼 수 있을까? 마조흐는 예증의 미학자이다. 이것은 분노와 항변의 정치가 적인 사드의 면모와 다른 점이다. 거친 강요와 우연적 도약으로 지배되는 폭력에 저항하기 위해 그가 선택한 대안은 예술과 문화의 소극적 본질이다. 따라서 그의 저항에는 저항의 실패라는 역설적 의도가 숨어있는 것이다. 저항의 실패는 곧 억압의 승리를 의미하고 있으며, 이것이 그로 하여금 또 다른 세계로 치닫게 하는 요소이다. 그는 하나의 세계에서 다른 하나의 세계로 단번에 도약하면서, 사드가 일찍이 하지 못한 가치의 전환을 최초로 실현한다.
매저키스트가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와의 계약을 통해 얻으려는 것은 새로운 세계로 가기 위한 재 탄생의 희망이다. 새로운 세계는 아버지의 법이 기능할 수 없는 어머니의 왕국이며, 오히려 가부장적 법이 어머니의 지배하에 운용되는 전혀 다른 세계이다. 그러므로 구강 어머니에게서 볼 수 있는 잔혹함과 냉정함은 더 이상 아버지의 처벌과 연결될 수 없는 것이다. 법이 가하는 위협(거세의 위협)이 누구로부터 발생하는가에 따라 그 효과는 완전히 달라진다. 아버지의 이미지로부터 발생하는 거세의 위협과 처벌의 고통을 연결 짓는다면 근친상간의 가능성은 사라진다. 여기서 매저키스트는 처벌 후의 도덕적 위안이라는 소극적인 쾌감만을 획득할 뿐이다. 그러나 처벌을 어머니와 그 이미지에 연결 짓는다면 근친상간의 가능성은 분명하게 나타난다. 아버지로부터 발생하는 근친상간에 대한 처벌과 금지로서의 거세가, 어머니로부터는 반대로 그것을 가능케 하는 조건이 된다. 이로부터 아버지의 기능이 없이도 가능해지는 재 탄생의 기회를 확보하게 되며, 이것이 매저키스트로 하여금 자웅동체적 본성을 갖게 하는 요소인 것이다. <"중단된 사랑"이 매저키즘에서 중요한데, 그 기능을 통해 매저키스트는 근친상간과 두 번째 탄생을 성적 활동과 동일시한다. 이 과정은 거세의 위협(불안)으로부터 구제할 뿐 아니라, 실제로 거세를 근친상간의 성공을 위한 상징적 조건으로 방향 전환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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